{{{#!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77, #000095 20%, #000095 80%, #000077);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제1-5대 | 제5대* | 제6·7대 | 제7*·8·9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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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6·7대 총통 장징궈[1] [ruby(蔣, ruby=ㄐㄧㄤˇ)][ruby(經, ruby= ㄐㄧㄥ)][ruby(國, ruby=ㄍㄨㄛˊ)](장경국)[2] | Chiang Ching-kuo | |||
<colbgcolor=#000095><colcolor=#ffffff> 출생 | 1910년 4월 27일 | ||
청 절강성 봉화현 (現 중국 저장성 닝보시) | |||
사망 | 1988년 1월 13일 (향년 77세) | ||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 |||
재임기간 | 제6대 총통 | ||
1978년 5월 20일 ~ 1984년 5월 20일 | |||
제7대 총통 | |||
1984년 5월 20일 ~ 1988년 1월 13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95><colcolor=#ffffff> 본관 | 계구 장씨 | |
부모 | 아버지 장제스 어머니 마오푸메이 | ||
형제자매 | 여동생 장젠화 이복남동생 장웨이궈 이복여동생 장야오광 | ||
자녀 | 장남 장샤오원 장녀 장샤오장 차남 장샤오옌 삼남 장샤오츠 사남 장샤오우 오남 장샤오융 | ||
학력 | 모스크바 중산 대학교[3] (철학 / 학사) 군사정보국 부설 정보학교 (졸업) 레닌그라드 톨마체프 군사정치학교 (졸업) 국방참모학교 (졸업) |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 ||
소속 정당 | |||
자 | 건풍(建豐) | ||
군사 경력 | |||
복무 | 노농적군 | ||
1929년 ~ 1937년 | |||
국민혁명군 | |||
1937년 ~ 1947년 | |||
중화민국 육군 | |||
1947년 ~ 1968년 | |||
최종 계급 | 2급상장 (중화민국 육군) | ||
참전 | 중일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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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제6-7대 총통.2. 생애
2.1. 파란만장한 출생
장제스 총통의 장남으로, 장제스의 첫 아내인 마오푸메이(毛福梅, 모복매)에게서 저장성 펑화현(奉化縣)에서 태어났다. 장제스는 14세 때 다섯 살 연상인 마오푸메이와 결혼했는데 자신이 억지로 결혼해야 한다는 사실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혼 후 두 달 정도는 부부 사이가 좋았으나 장제스의 어머니인 왕차이위(王采玉, 왕채옥)[4]가 아들에게 못된 영향을 준다고 며느리를 꾸짖었고 이후 마오푸메이는 남편과 감히 얘기조차 나누지 못했다. 결국 부부 관계는 파탄났고 장제스는 아내를 버리고 곳곳의 학당을 전전했다.이후 장제스는 일본 군사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도일했다가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돌아와선 아내를 구타하기도 했다. 장제스는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상하이시로 이동했는데 왕차이위가 마오푸메이를 데리고 아들의 뒤를 쫓아와서 점쟁이가 마오푸메이가 낳을 아들이 고관 대작에 오를 것이라는 점괘를 내렸다면서 며느리와 동침할 것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점쟁이 같은 미신을 믿냐고 비웃었지만 왕차이위가 만약 며느리와 동침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마오푸메이와 동침했는데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장징궈다.[5]
2.2. 소련 유학
장제스가 친소 성향이었을 때 아버지를 졸라서 소련에 유학간 경력이 있었다. 장제스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이자 장징궈보다 네 살 연상인 천제루(陳潔如, 진결여)가 간청하여 유학을 허락해 줬는데 거기서 장징궈는 잘 나갔고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 때 같은 중국인 유학생 한 명과 잠시 동거하기도 했는데 그 유학생이 다름아닌 군벌 펑위샹의 딸이었다. 여담으로 이 때 덩샤오핑을 만나서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덩샤오핑과 형 아우하며 지냈다고 하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계기로 소련과 관계를 끊자 장제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맹비난하기도 하면서 사실상 의절했다. 사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장제스의 성향 때문에 부자 관계가 최악이기도 했다.“어머니의 전 남편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수십만의 형제와 동포들을 도살했습니다. 중국인의 적이며 당신 아들의 적입니다. 듣자 하니 장제스는 효와 예의와 염치를 선전한다고 합니다. 항상 이런 수법으로 인민들을 속이고 우롱했습니다.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2층에서 집어 던지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할머니에게 야단맞자 버릇없이 대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저는 군벌의 아들에서 한 사람의 공산당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장제스는 다섯 차례에 걸쳐 중국의 소비에트 정권을 소멸시키려 했지만 홍군은 중국 인민의 힘을 상징합니다.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과 죄악의 근원은 장제스입니다. 저의 조국은 소련입니다. 어머니가 중국을 떠날 수만 있다면 계신 곳 어디라도 제가 달려가겠습니다.” - 프라우다[6]
“저는 군벌의 아들에서 한 사람의 공산당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장제스는 다섯 차례에 걸쳐 중국의 소비에트 정권을 소멸시키려 했지만 홍군은 중국 인민의 힘을 상징합니다.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과 죄악의 근원은 장제스입니다. 저의 조국은 소련입니다. 어머니가 중국을 떠날 수만 있다면 계신 곳 어디라도 제가 달려가겠습니다.” - 프라우다[6]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장제스는 유일한 아들에게 이러한 욕설을 듣고도 "소련 놈들이 내 아들에게 내 욕을 시키는 걸 보니 내 아들을 죽이진 않겠구나, 조상님들 뵐 면목이 생겼다."고 좋아했다는 것이다. 상하이 쿠데타를 통한 공산당 탄압은 자식이 소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중국에 해가 될 것이라며 자식을 잃을 각오로 일으킨 것이고 장제스는 고자라 더 자식을 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장징궈는 얼마 안 가서 대학에서 쫓겨나 수력발전소에서 일해야 했으며 대숙청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로 그 자리마저 잃었다. 소련은 1931년 쑹칭링을 통해 장징궈와 상하이에서 체포된 폴란드인 공산주의자 스파이를 교환하자고 제의했지만 장제스는 국가의 이익을 사사로운 정으로 망칠 수 없다고 거부했다. 1935년 동거하던 소련 여자[7]와 결혼했으며 스탈린의 강권으로 트로츠키주의를 부인하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2.3. 귀국
장징궈는 이후 용기를 가지고 중국 대사관에 접촉해서 귀국을 요청했다. 안 그래도 쑹메이링을 필두로 국민당 내부에서는 장제스의 혈육인 장징궈를 소련에서 귀국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소련은 장징궈가 소련에 없다는 뻔한 거짓말까지 하면서 동시에 장징궈의 귀국을 종용했고 장징궈는 중국 대사 장팅푸(蔣廷黻, 장정불)에게 자기는 집도 절도 없는 처지이니 귀국 비용을 대줄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에게 소련인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괜찮냐고 물었다. 장제스의 혈육을 귀국시키는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잡은 중국 대사가 장징궈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할 리가 없었고 그가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자결을 할 심정으로 일을 추진했다.하지만 1937년에 상하이를 통해 귀국한 장징궈는 들어오자마자 괜히 귀국했다고 겁을 먹었는데 소련에서 아버지를 비난한 것 때문에 장제스가 벌을 줄 것이라고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장제스는 장제스대로 12년 만에 아들이 돌아오자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12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반동 소리를 들을까봐 겁이 나서 아들을 만나지 않았다. 이것을 불안한 징조로 여긴 장징궈는 장제스의 비서 천리푸 등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천리푸는 장징궈에게 아버지에게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편지를 쓰라고 권했다.
장징궈의 편지를 받은 장제스는 천륜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국민당 원로들의 충고에 따르는 척하면서 장징궈를 만나 절을 받았고 장징궈는 쑹메이링에게도 어머니라 부르며 절을 올렸다. 장제스가 장징궈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장징궈는 농업이나 공업 중 하나를 하고 싶다고 했고 장제스는 장징궈를 자신의 고향인 시커우 마을로 내려가게 했는데 이때 쑹메이링이 금일봉을 주어 그걸로 시커우 마을에서 잔치를 베풀고 아내와 다시 중국식 결혼식을 올렸다.
장징궈는 그 곳에서 다시 중국 고전을 공부하면서 소위 붉은 물 빼는 작업에 들어갔고 장제스의 소련인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중국어 강습도 행해졌다. 얼마 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장제스에게 가장 열악한 곳에 보내 줄 것을 청했고 장제스는 아들의 청에 크게 될 놈이구나 하고 기뻐했다. 1939년 생모 마오푸메이가 일본군의 공습에 죽자 피는 피로 씻을 것이라는 비문을 세웠다.
2.4. 대만에서의 통치
1945년 8월 마오쩌둥, 장제스,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와 충칭에서 사진을 찍은 장징궈.
1948년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이 내려지자 상하이에서 부패 척결과 화폐개혁[8] 등을 통해 초인플레이션을 수습하고자 애썼지만 방법 자체가 자본가들을 일방적으로 두들겨패는 강압적인 방법이었던지라 상하이 시장 우궈전을 비롯한 자유파 인사들의 큰 반발을 샀으며 장징궈를 견제하는 CC계열이나 4대가족의 일원인 쑹메이링, 쑹쯔원, 쿵샹시와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실패했다. 그래서 1930년대까지만 해도 쑹메이링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장징궈는 이후에는 죽을 때까지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한다. 실제로 장징궈가 집권하자마자 쑹메이링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편 장제스는 믿을 것은 혈육인 장징궈밖에 없다고 여겨 장징궈를 1946년 5월 국립정치대학 교육장에 임명하는 등 중용하기 시작했다. 1949년 국부천대 후 장징궈는 정치행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공안기관을 장악하고 반정부 인사들을 숙청했으며 1950년에는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 국민당 중앙개조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54년 부총통에 출마하려던 쿵샹시를 낡은 사회의 권세 있는 집안 사람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여 정치판에서 완전히 제거했고 대만성 정부 주석이자 민주파 지도자였던 우궈전과의 대립 끝에 우궈전 사건으로 그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같은 해 국가안전회의 부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민당 독재를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집권 후의 유화적인 모습과 달리 이 당시의 장징궈는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국민당 통치에 방해되는 인물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모으는 데 귀재였다.[9]
1963년 무임소장관으로 입각했으며 1965년 1월에는 국방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3월 부총통 천청이 사망하면서 장징궈는 장제스의 후계자로 확정되었다. 1969년 행정원 부원장에 취임하였고 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1972년부터는 행정원장을 맡아 사실상 전권을 장악했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자 부총통 옌자간(嚴家淦)이 잠시 총통 자리를 대신한 후, 1978년 국민대회에서 총통으로 당선되어 1988년에 죽을 때까지 중화민국 총통으로 있었다.
행정원장 시절인 1975년. 젊었을 때의 깐죽이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중후한 인상으로 탈바꿈했다.
그가 행정원장에 오르기 직전인 1971년에는 중화민국이 UN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탈퇴하고 올림픽에서는 중화 타이베이가 되는 등 중화민국의 국제적 지위가 점점 하락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대륙 출신의 인물이었고 중화민국이 지배하는 통일 중국을 정치적 목표로 해왔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게 국부천대는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이며 실제로 국부천대 이후 중국공산당을 몰아내고 대륙을 통일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작 대만 내정은 방치하다시피 했으며 1950년대부터 이미 대만이 경제적으로 빠른 성장을 달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인프라는 일제 시대에서 발전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본성인이 탄압받고 외성인이 우대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륙 수복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된 데다 애초에 중화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지지해 줄 외성인의 머릿수는 본성인에 비해 1/6 정도로 한참 밀렸기 때문에 이대로는 중화민국이 대륙에서도, 대만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외면받아 소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화민국이 '대만 사람들(본성인)의 지지를 받는 중화민국'이 되어야 했으며 따라서 장징궈는 행정원장 취임 후 대만 내정과 본성인 차별 철폐에 전력을 다했다.
우선 1972년 행정원장이 되고 나서 국민대회와 입법원의 증액선거(추가 의석에 대한 선거)를 실시했다. 물론 기존 대륙에서 온 국민대회 및 입법원의 의원들을 교체하는 것은 아니고 야당 후보의 출마를 불허했지만 이로써 본성인들을 어느 정도 국민당 일당체제 안에 들이는 데는 성공했다. 장징궈는 여기서 더 나아가 본성인들을 국민당에 입당시키거나 당 요직에 기용하여, 셰둥민과 리덩후이가 차례로 부총통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결과 장징궈가 사망할 즈음 국민당에서는 비록 비주류일지언정 본성인들의 수가 적지 않게 되었다.
행정원장 시절 주말이 되면 지방 시찰을 자주 나갔는데 야구 모자에 점퍼만 걸쳐 입고 조선 시대의 암행어사마냥 시장, 건설 현장, 농촌 등에 가서 지역 주민들과 스스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대만 사회의 실상을 직접 익혀나갔다.[10] 더불어 장제스 시절부터 심각했던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1960 ~ 1970년대에는 '10대 건설'(十大建設)[11] 사업의 주도면밀한 진행을 통해 고속도로, 철도, 항만, 에너지 시설 등의 사회 간접 자본과 중화학 기간 산업 확충에도 박차를 가하여 대만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러한 장징궈의 대만 경제 정책은 좀 더 고도화되기는 했지만 부친 시절부터의 안정 제일주의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장징궈의 10대 건설 사업을 소재로 한 보드 게임. 표지에 당시 10대 건설 사업의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지금도 대만 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문화 정책에서도 장제스가 중화 문명을 찬양하고 중국과 다른 대만의 전통 문화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은 것과 달리 국가가 설립한 문화 시설에서 대만 전통 문화 관련 공연이 개최되는 등 대만의 독자적 문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국가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통치 방식은 총통에 취임한 이후에도 이어진다.
이를 상징하듯이 1987년에 본성인 지방 원로들을 총통부로 초청하여 가진 회담에서 그는 "제가 대만에 살게 된 지 40년이 되었으니, 저도 대만인입니다. 물론 중국인이기도 합니다."(我在台灣住了四十年,是台灣人,當然也是中國人。)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승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권력 세습을 원하지 않아서 1984년 제헌절 기념 축사에서 "내 후계자는 헌법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내 가족들 중에 어느 누구도 정권을 잡을 일은 없으며 군부 역시 마찬가지다."라는 선언을 했으며[12] 1986년 후계자설이 떠돌던 아들 장샤오우(蔣孝武)를 싱가포르 주재 무역대표부 부대표로 내보내 3대 권력세습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말년에 가서는 3당 훈정[13]의 3개 정당[14]을 제외한 새로운 정당의 창당이 오래 전부터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진보당의 창당을 사실상 묵인하였다. 중국국민당의 몇몇 강경파 인사들은 강제로 해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반발했으나 장징궈가 이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고 하며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화민국 헌법 준수', '반공 정책 지지', '대만 독립 세력과의 연합 금지'를 지키기만 한다면 다른 정당도 허용할 방침임을 밝히기도 했다.[15] 아울러 언론 자유에 대한 통제도 어느 정도 완화하고 1949년 선포된 계엄령을 38년 만인 1987년 7월 전격적으로 해제했다.
다만 장징궈 치세에도 흑역사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닌데, 1987년 3월 7일에 푸젠성 진먼현의 례위향 둥강만에서 중화민국 국군이 비무장 중국계 베트남인 보트피플[16] 최소 19명에게 총을 난사하고 부상자까지 군삽으로 구타하거나 생매장해 죽이는 례위 학살이 있었다. 대만 측의 공식적인 입장은 지금까지도 '오인사격'이지만, 중국어로 쏘지 말라고 외친 보트피플과 도망치려고 일어난 소년까지 무자비하게 총살했다는 것을 볼 때 의도적인 학살로 보인다.[17] 사건은 장징궈 본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이긴 하나, 이 사건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이 대만 계엄령 해제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당대에 국제적으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참고로 학살을 지시한 자오완푸(趙萬富, 1928~2016) 진먼 국방사령관은 1991년 중화민국군 총참모부사령관으로까지 승진했고, 이후 중화민국 총통의 전략보좌관, 중국국민당 중앙위원회 심사위원(종신직)으로 활동하였고, 88세 생일 12일 전인 2016년 2월 28일 사망한 후 '그의 덕행은 후손들이 따라야 할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는 마잉주 총통의 표창 포고문과 함께 군인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한국어 요약본
2.5. 양안관계 개선을 모색하다
1979년 중국이 신년 교서를 통해 무역, 우편, 여행 등의 3개 교류를 전면 실시하자는 이른바 '3통'(三通) 제의를 하자[18] 공식적으로는 본토의 중국 공산 정부와는 정부 차원에서의 접촉, 담판, 타협을 거부한다는 '3불'(三不) 정책으로 응답했다.[19]하지만 선친인 장제스의 무력 본토 수복 노선이 비현실적임을 반영하여 '삼민주의를 통한 중국 통일'이라는 일종의 평화적 통일 노선을 제시했다. 무력 통일 노선을 공식적으로 버리지는 않았으나 무력 통일 노선을 주장하던 왕성(王昇) 장군을 파라과이 대사로 보내는 등 무력 통일을 사실상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아울러 구 국민당 군인들이 본토의 가족, 친척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이산 가족 상봉, 즉 '탐친'(探親)을 허가했고 학문이나 예술 등 비정치 분야의 중국 인사들이 대만을 방문하는 것도 용인했다. 이 점에서 장징궈 시대는 초보적이나마 양안관계의 개선이 모색되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앞서 말했다시피 덩샤오핑과는 한 때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막역한 사이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실권을 각각 잡았을 때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를 통한 막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1979년 1월 전격적으로 양안 교류 확대를 선언하고 장징궈가 몇 년 뒤 민주진보당 창당을 사실상 묵인한 것과 계엄령을 해제하여 대만의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한 것이 서로 연관성이 있었다.[20] 장징궈는 말년에 정말로 전향적인 양안 관계 개선 정책을 펼쳤고 죽기 전에는 국민당, 공산당의 재합당과 통치 체제 통합 등이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였으며 이에 중국도 전향적으로 나와 중화민국의 UN 복귀를 찬성하기도 했지만 이 자체는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장징궈가 사망하자 이를 전해들은 덩샤오핑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장징궈가) 너무 일찍 죽었다. 계속 살아있었다면 3차 국공합작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 그의 사후 천안문 6.4 항쟁으로 인해 대만에서 중국공산당에 대한 경계가 강해져 양안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2.6. 타계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987년 10월 10일 신해혁명 기념일(통칭 쌍십절)에서의 모습. 왼쪽으로 국민당 내의 차세대 지도자 경쟁을 벌이던 롄잔, 리덩후이 등의 모습이 보인다.
6년 재선 임기를 2년 정도 남겨 둔 1988년 1월에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헌법에 따라 부총통이었던 리덩후이가 총통 대행으로서 총통직을 수행하였다.
당뇨병은 이미 총통이 되기 전에도 앓고 있었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 당뇨병으로 인해 쓰러졌다 회복되기를 반복했는데 이를 노려 국민당 강경파가 그의 의중을 무시하고 정적 등을 살해하며 그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내정하려고 하는 등 정치적으로 흉흉한 일이 잦았다고 한다.
부친인 장제스가 안치된 타오위안시 츠후(慈湖)에서 1km 정도 떨어진 다시(大溪)에 안장되었다. 장제스처럼 지하 매장이 아닌 지상 토관묘 형식으로 안치되었고 묘소 형태도 장제스의 것과 대동소이한데 이것은 장징궈가 장제스의 유지를 이어 통치했다는 것을 상징한다.[21]
2019년 들어 이 사진에 나온 장소는 장제스의 묘와 함께 일반에게 개방하지 않고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대만 독립파들 등의 테러를 우려해 이루어진 조치로인데 실제로 2018년 2월 28일에 장제스 묘가 털린 바 있다.
2022년 1월 타이베이에 그의 생전 활동, 집권기를 다른 기념관 및 도서관이 개관했다. 차이잉원 총통, 주리룬 국민당 주석, 마잉주 전 총통을 비롯한 정계 유력인사들이 개관식에 참석하였다.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의 이름으로 도서관 형식의 사료관을 운영하는 것을 채택했으며 대만에서는 장징궈가 첫 사례다. 위치는 그가 총통 재임 시절 관저로 사용했던 곳이며 대만의 국립현충원 격인 국민혁명충렬사 근처다. 여담으로 관저에는 장징궈가 한국 방문 당시 박정희로부터 선물받은 병풍이 전시되어 있다.
3. 가족관계
장징궈 총통의 가족
본처 파이나 이파티예브나 바흐레바(Фаина Ипатьевна Вахрева, Фаіна Іпацьеўна Вахрава), 일명 장팡량(蔣方良, 장방량)(1915~2004)[22]
피는 못 속이는지 아버지 못지 않게 가족 관계가 복잡하다.
본처 장팡량은 벨라루스인으로 장징궈가 소련에 머물던 시절에 만나 결혼했고 훗날 남편이 총통이 되자 영부인이 되었다. 아들 장샤오원(蔣孝文, 장효문)[23]·장샤오우(蔣孝武, 장효무)[24]·장샤오융(蔣孝勇, 장효용)[25]과 딸 장샤오장(蔣孝章, 장효장)[26] 등 3남 1녀를 낳았다. 즉 이 4자녀들은 중국인-벨라루스인 혼혈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건강이 나빠서 딸 장샤오장을 빼고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비서이자 내연녀 장야뤄(章亞若, 장아약)는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이 쌍둥이는 본처 장팡량의 반대로 아버지의 호적에 오르지 못하고 외가의 성을 따랐기 때문에 호적상으로는 외삼촌과 외숙모가 부모로 등재되어 있었다. 쌍둥이 중 동생인 장샤오츠(章孝慈, 장효자)는 1996년에 사망하여 살아 생전에 아버지의 성을 회복하지 못했고 쌍둥이 중 형인 장샤오옌(蔣孝嚴, 장효엄)은 장팡량이 사망한 후인 2005년에야 이미 죽은 동생 장샤오츠와 더불어 본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장징궈가 3대까지 세습을 하지 않고 그친 건 이런 가정 환경 탓도 있다는 말도 있다.
장징궈의 자녀 중 생존자는 딸 장샤오장과 혼외자 장샤오옌뿐이다. 장샤오옌은 행정원 부원장과 외교부 장관, 재선 입법위원(국회의원), 국민당 부총재를 지내는 등 정계에서 활동했으며 장샤오옌의 아들인 장완안(蔣萬安, 장만안)은 2016년 입법위원 선거와 2020년 입법위원 선거에서 내리 당선된 뒤 2022년 지방선거에서는 타이베이 시장에 당선되면서 미래의 총통 주자로 주목받고 있다.
오늘날 대만 정계에 진출한 장징궈의 자녀들을 보면 정실 부인 소생의 자녀들보다 혼외자들이 더 잘나가고 있다. 장징궈 생전에는 본처 소생 아들들이 우위였고 심지어 후계자 이야기도 나왔지만 정작 장징궈 본인이 거절하고 장징궈 사후 세 아들이 1989년, 1991년, 1996년에 40~50대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면서 좀 더 오래 살아남은 혼외자들이 더 잘나가게 되었다. 아무래도 혈통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의 정서상 적자녀들은 혼혈, 그것도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도 아니고 아예 벨라루스인(백인)과의 혼혈인 반면 서자녀들은 순수 중국인 혈통인 탓도 있었을 것이다.
장제스의 유일한 친자이지만 장제스의 친자가 아니라 마오푸메이가 주워온 자식이란 소문이 있는데 이는 장제스의 양자로 알려져 있던 차남 장웨이궈의 증언을 기초로 한다. 장웨이궈는 말년에 장제스가 어릴 적에 고환에 화상을 입는 소동 끝에 고자가 되었고 따라서 장징궈는 양자라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27]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 천제루의 회고록에 따르면 장제스가 성기능을 상실한 것은 서른 살이 좀 넘었던 시점이라고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성병에 걸려서 고환에 염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장웨이궈는 1975년까지는 공식적으로 장제스의 친자이며 장징궈의 이복동생으로 못박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장제스의 의형제이자 혁명 동지인 다이지타오(戴季陶, 대계도)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사실 대륙 시절부터 장웨이궈가 다이지타오의 아들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이 소문을 듣고 충격받은 장웨이궈가 다이지타오에게 사실이냐고 따지기도 했다. 이에 다이지타오가 "네가 나를 닮았느냐, 장제스를 닮았느냐?"라고 묻고 장웨이궈가 장제스를 닮았다고 대답하자 "그럼 누가 네 아비인지는 확실하지 않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장웨이궈는 공식적으로 장제스의 차남으로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출세운이 없었고[28] 장제스와 혈액형도 달랐으며 실력자인 쑹메이링과의 연줄도 의도적으로 만들지 못하게 해서 사실 장씨가 아니라 대씨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소문은 장제스 사후에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결국 장웨이궈 본인이 장위국보도란 책을 내놓아 "자신 또한 다이지타오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나 장(蔣)씨 집안의 아들이던 다이(戴)씨 집안의 아들이던 상관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공처가 다이지타오가 일본에서 바람을 피워서 애를 얻자 아내에게 맞아죽을까 봐 벌벌 떨었고 이에 장제스가 맡아주었단 건데 소문의 당사자인 장제스와 다이지타오 본인들이 워낙 강하게 부정을 한데다가 이미 사망해서 확인할 길도 없고 그 일본 여자와의 관계가 복잡해서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4. 평가
4.1. 긍정
장제스라는 철권 독재자의 아들로 태어나 정권을 세습했으나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혼란이 야기되는 급격한 체제 변화를 지양하면서도 유연한 통치로 반대파들을 억누르지 않고 자신에 대한 비판에도 관용을 베풀면서 조용히 체제의 통제를 풀어주었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은 중국국민당의 일당 독재였고 본인도 독재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처럼 폭압적으로 운용하지는 않았다. 민주진보당도 그의 통치 당시에는 불법 정당이었지만 활동을 상당히 눈감아주었다. 말년에 들어 국민당을 설득해 가면서 1987년에 40년 가까이 지속된 대만 계엄령도 해제했고 각종 법률도 서구 민주주의에 걸맞게 개혁했다. 여기에 당시에는 매우 앞선 개념이었던 경제민주화 및 복지국가의 비전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만의 빈부격차를 낮추기 위해 노력했고 매우 훌륭한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도 도입했다. 독재자임에도 국민들에게는 큰형님같은 친근한 이미지로 비쳤는데 민생 현장에 자주 얼굴을 내비쳐서 서민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고 일반 국민이 총통에게 쓴 편지에 직접 답장을 해주기도 하는 등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권위적인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서기 어려웠던 아버지와는 달리 서민적이고 소탈한 풍모가 있었다.그의 사후 대만이 그다지 큰 유혈 사태나 혼란, 갈등 없이 급격히 서방식 민주화를 이룰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이런 면이 크게 작용했다. 석유 파동을 극복해낸 뒤 대만 경제는 고성장으로 정점을 달려 1980년대 기준으로 대만의 경제력은 중국 전체 경제력의 40%에 달했으며[29] 경상수지도 매년 안정적으로 흑자를 기록하여 외환보유고는 세계 수위권에 도달하여 1980년대 후반에는 대만이 선진국으로 진입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제 상황이 대단히 좋았다.[30]
그렇기 때문에 2대 세습한 독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나름대로 존경을 받았다. 대만 독립주의자들도 독재자 장제스는 힐난한다 치더라도 계엄령을 해제한 장징궈는 욕을 덜 하는 편이다.
대만에서는 물론이고[31] 대륙, 즉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평가도 비교적 좋은 편인데 한때 친공산당 성향이 있었던 데다 이후 국공내전 등으로 공산당과 대립할 때도 아버지인 장제스처럼 강경 일변도의 성향만 가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며 집권기에 양안관계 개선에도 꽤 노력을 기울인 편이다.
4.2. 부정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재자였고 그보다 더 억압적이었다고 평가받는 장제스의 독재를 도왔다. 장제스의 독재 당시 그는 특무 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정적 탄압에 앞장섬으로써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국부천대 이후 1965년까지 대만 정부(행정원)내의 여러 지위를 겸임하면서 대만의 정보-공안 기관을 지휘했으며 이후에는 국방부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이 공안기관들은 독재정권의 비밀경찰로서 장제스 정권의 안정화를 위해 민주화운동가나 대만독립파에 대해 갖은 인권유린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그의 통치는 장제스에 비해 부드러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후계자 자리를 굳히게 된 계기는 장제스 정권에서 악역을 맡아서 온갖 악행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의 통치가 장제스에 비해 유화적이었을지언정 집권 초기에는 메이리다오 사건(1979년)과 같은 민주화 운동 진압과 더불어 천원청 살인 사건(1981년), 린이슝 일가 피살 사건(1982년), 강남사건(1984년)[32]처럼 반정부 인사를 겨냥한 것으로 의심되는 의문사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당시 사건의 피해자들은 지금도 민주진보당 등 대만의 범록연맹 진영에서 정계의 주역, 원로 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때문에 장징궈도 대만의 진보 진영의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입장이다.
아울러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결국 중국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중국국민당이 독재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그의 민주화 및 대만화 추진 역시 일정 부분의 한계를 가졌다. 메이리다오 사건이나 야당 허용의 조건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 국민 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은 1940년대에 중국 대륙에서 남녀노소 인민들의 직선제로 선출한 의원들이 종신직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민주 국가라면 당장 해산하고 재선거를 했어야 하지만 이들이 이른바 '3당 훈정'을 지탱하는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장징궈 시절에는 끝내 재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5. 기타
행정원장 시절인 1973년 장징궈의 연설. 문장 구조 자체는 표준 중국어로 말을 했지만 발음은 아버지보다도 좋지 않다. 장징궈가 저장성 출신이라 오어를 모어로 썼기 때문인데 영상을 보면 외국인이 듣기에도 표준중국어와 확실히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오어 억양이 심하게 배어 있다. 같은 저장성 출신인 아버지도 오어 억양이 많이 섞여 있던 걸로 유명한데 장징궈는 더 심했다.[33]
- [ 연설 내용 ]
- || 我們認為今天工商界的困難,政府絕對會負起責任替他們解決,但是必須要具備正當的條件。就是你借去的錢就祇能夠用到工業生產上面去,你不能夠做其他用途,所以,這地方我們拿公家的錢做人情讓少數人發財,我們不能夠做的。
昨天晚上睡覺的時候,我想起我在六歲的時候,我的祖母她給我兩個碗、兩個銅板,她說買一個銅板的醬油、買一個銅板的醋,我走到門口跌了一跤,我忘記了,到底哪個銅板買醋?哪個銅板買油?回去問祖母,她說你這個人怎麼這麼笨啊?她說一樣的嘛!但是醋就是醋,醬油就是醬油。
我們一些工商界的人,他拿買醬油的錢去了買醋,買醋的錢去買了醬油,這就不對了。所以,今天我有一句話說:發財是自由地發財,用錢是自由地用錢;但是,發財、賺錢要正當,用錢要恰當。
我認為賺錢要正當,用錢要恰當。不然的話,他虧了,國外去造了一個廠,這裡有公館、洋房,家庭有游泳池,(卻喊著)困難過年、困難過年、快救我、快救我,不救我的話,明天在報紙上說:現在我們經濟發展已經休克了。不是這麼一回事,我知道得很清楚,誰在那裏幹什麼,誰在那裏搞什麼!
有腐弊的案子,我們一定辦,扯上面的案子,我們也辦!新的案子也辦,凡是犯法的事情,我們都要辦!但是,希望工商界的人要體驗到我們國家的一個政策,我們所要顧到的是全民生活的安定、全民物價的穩定,這是我們基本的一個政策。
今年這一年農業的發展是很合於我們的理想,最難得的一點,使我們感覺到很興奮的,就是當時主張採取免息貸款給農民,就是不要利息的貸款。討論這個問題的時候很多人反對,說這個免息貸款將來收不回來,到今天事實證明,第一季的稻穀免息貸款收回來的,已經到了百分之九十七點五,農民守信用的這一種精神,實在是令人欽佩! ||오늘날 재계의 어려움은 정부가 책임지고 대신 해결해 주어야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정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바로 빌린 돈으로는 공업생산에만 써야 하고, 다른 데에는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적인 돈으로 소수의 사람들을 부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젯밤에 자고 있을 때, 저는 여섯 살 때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할머니께서 주발 두 개와 동판 두 개를 주시고는 한 곳에는 간장을, 한 곳에는 식초를 사오라고 말씀했습니다. 문 바깥으로 나가다가 넘어졌는데, 어디다 간장을 담고 어디다 식초를 담아야 할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께 다시 가서 물어보니, 그분께서는 '아이고, 사람이 왜 이렇게 둔할꼬, 어디다 담든 똑같지 않니!' 하셨습니다. 그런데, 식초는 식초고, 간장은 간장인 것입니다.
우리 몇몇 재계인들은 간장을 살 돈으로 식초를 샀고 식초를 살 돈으로 간장을 샀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했던 말입니다만, 자유롭게 돈을 벌고 자유롭게 돈을 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은 정당해야 하며, 돈을 쓰는 것은 적절해야 합니다.
저는 돈을 버는 것은 정당해야 하고, 돈을 쓰는 것은 적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외국에 가서 공장을 하나 지었는데, 이곳에는 공관이나 양옥이 있고, 집에 수영장이 있습니다. 그래놓고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올해를 못 넘기겠다! 빨리 도와달라!' 이래놓고, 또 도와주지 않으면 그 다음날 신문에 '우리 경제 발전이 쇼크 상태에 있다!' 이렇게 기사가 뜹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겁니다.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누가 제대로 하고 있고 누가 장난질을 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부패하고 폐단이 있는 건에 대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처리할 것입니다. 겉으로 나와 있는 것을 뜯어내고 (안쪽까지 다) 처리할 것입니다! 새로운 사건도 함께 처리하고, 무릇 법을 어긴 일이라면, 우리는 모두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계인들이 우리나라의 정책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국민생활의 안정, 국민물가의 안정이며, 이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정책입니다.
올 한해 우리의 농업 발전은 우리의 이상과 잘 맞아떨어져서, 가장 얻기 힘들었던 목표로 우리를 매우 흥분하게 했습니다. 그때의 주장으로 농민들에 대한 무이자 대출이 나왔는데, 말 그대로 이자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할 때, 무이자 대출은 제대로 회수되지 않을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작금의 결과가 사실을 증명하듯, 제1분기의 벼 무이자 대출의 회수 분량은 이미 97.5퍼센트에 이르렀습니다. 농민들의 굳건한 신용 정신은 정말 사람을 탄복하게 합니다!
추가적으로 이 연설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자면 산업 발전을 위해 투입한 공적 자금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써버린 당시 기업가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동영상 아래의 자막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신랄하게 비판한다... 간장을 사라고 심부름을 시켰더니 식초를 사온다는 비유로 대놓고 비꼬았다.
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8 | 제6대 총통 선거 | 중화민국 자유지구 | | 1,184 (98.34%) | 당선 | 초선 |
1984 | 제7대 총통 선거 | 1,012 (95.11%) | 당선 | 재선[34] |
7. 주요 경력
대만 역대 행정원 부원장 | |||||||
10대 | → | 11대 | → | 12대 | |||
황소곡 | → | 장징궈 (1969년 7월 1일 ~ 1972년 6월 1일) | → | 서경종 |
중화민국 역대 국방장관 | |||||||
대행 | → | 9대 | → | 10대 | |||
위훙쥔 | → | 장징궈 (1965년 1월 25일 ~ 1969년 7월 1일) | → | 황걸 |
8. 매체에서
중국의 건국 60주년 기념 영화인 《건국대업》에서는 중국의 유명한 배우인 진곤이 열연했는데 상하이로 가서 흑사회를 잡아 부패한 재정을 해결하여 막장 상황에 처한 중국국민당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지만 역사와 동일하게 현실은 시궁창. 상하이 삼합회의 보스인 두월생(杜月笙, 두웨성)에게 "저희 같은 잔챙이가 아니라 4대 가문 패거리들을 처바르는 것이 훨씬 이득일 것입니다."라고 충고를 빙자한 조롱까지 듣는다. 두월생이 단순히 암흑가의 보스라서 나타난 것은 물론 아니다. 두월생은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장제스와 적극 협력하며 상하이 지역의 경제를 장악했다. '잔챙이' 발언도 '상하이를 장악한 나도 당신네 4대 가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사태가 심각한 걸 알기는 하는가?'라는 의미에 가깝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장징궈에게 두월생조차도 아들이 체포되는 바람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천보다가 주장한 4대가족론은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도 당시 국민당 통치 정당성 흠집내기 위한 구라였다고 인정하는 판국이다.
이안의 초기작인 1994년작 음식남녀에서 총통 시절의 장징궈가 주인공 주 사부와 악수하는 사진이 있다. 주 사부의 요리사로서의 명망을 드러내는 장치.
제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한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1.5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 출시 후 중화민국 정치고문으로 추가되었다. 정치력 획득 15% 버프를 주는 '조용한 일꾼' 특성을 부여받았는데 조용한 일꾼은 어떤 국가든 항상 사용하는 고문이므로 중국 플레이시 장징궈는 무조건 채택해야 할 고문 중 하나다. 장징궈가 국립정치대학 수립 등에 참여한 것을 감안한 듯.
온라인 끝말잇기 게임 끄투에서 장으로 시작하는 공격단어로 애용된다. 보통 그 뒤는 '궈모뤄' → '뤄수이강'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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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 이름은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옐리자로프(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Елизаров)[2] 한어병음 : Jiǎng Jīngguó[3] 중국의 중산대학이나 대만의 국립중산대학과 철자가 같다.[4] 여기서 이름을 딴 차이위 훈장이 있다. 자국 또는 우방국 국가원수에게만 줄 수 있는 훈장인데 천수이볜 전 총통도 받은 적이 있다. 장제스의 어머니의 이름을 딴 훈장이지만 천수이볜도 이름을 안 바꾸고 그대로 받았다. 마잉주는 받지 않고 퇴임했으며 차이잉원은 두고 봐야 한다.[5] 아버지 버프도 있었지만 아래 서술처럼 소련 거주 시 잠시 장제스와 의절한 이력도 있는 등 집권하기 전까지 의외로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국부천대 이후에는 장웨이궈의 견제도 있었다.[6] 1955년에 장징궈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소련에 있을 때부터 소련을 신뢰하지 않았다면서 해당 내용을 부정했지만 굳이 쓸 필요가 없는 가족의 개인적인 일까지 거론한 것으로 걸로 봐서 본인의 의지로 서술한 게 맞는 것 같다.[7] 아래에서도 언급할 장팡량(蔣方良)이다.[8] 이 화폐개혁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국민당의 전비지출)을 다스리지 않은 채 단순히 화폐가치를 절상함으로써 위기를 넘기려고 했기 때문에 대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정부방침을 충실히 따라 화폐개혁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자기 재산을 신권으로 바꾼 사람들만 거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국민당 정부가 붕괴되었다고 할 만큼 국민당의 경제기반인 저장성-장쑤성-상하이의 민심이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9] 우궈전은 장징궈가 공산당을 잡겠다는 구실로 공산당의 방식을 사용한다고 비판했다.[10] 그는 이미 이 시절부터 당뇨병 증상을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싸돌아다니니 주치의가 진절머리를 냈다고 한다.[11] 구체적으로는 중산고속공로, 중정 국제 공항(현재의 타오위안 국제공항), 타이중 항, 쑤아오 항, 북회선, 서부간선 전철화, 조선(造船) 공사, 석유 공사, 제1 원자력 발전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2] 사실 장징궈는 세습을 안한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자녀가 다 혼혈 아니면 사생아라는 점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이 세습하거나 군부가 집권하게 된다면 대만에서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없고 이래서는 날로 국제적 지위가 높아져가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제쳐두고 중화민국을 지지해야 할 명분도 낮아 미국의 지지를 계속 받기 어려웠다.[13]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 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 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다.[14] 중국국민당과 중국청년당과 중국 민주사회당[15] 민진당이 대만 독립을 정면으로 내세운 것은 1991년에 대만독립강령을 채택한 후다. 이전에는 대만 독립을 정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극초기 민진당은 대만 독립 세력을 포함한 반국민당 당외 세력이 결집한 것이라 양안통일을 내세우는 비주류 계파도 있었다.[16] 이들 중에는 어린이, 노인을, 임신 7개월차 임산부, 아기도 있었다.[17] 의미심장하게도 학살 사건 핵심 증인이었던 중령과 부사관이 갑자기 실종되기도 했다. 이들의 행방은 2024년 현재에도 불명.[18] 이 제의는 29년 후 마잉주가 대만 총통으로 취임한 2008년 말에 실현되었다.[19] 당시 대만은 미국이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단교하면서 1971년 유엔에서의 축출 이후 악화일로에 있던 국제적 고립이 더욱 가중된 위기 상황이었고 장징궈를 비롯한 대만 국민당의 지도층 대다수는 여전히 국공내전 시절 공산당과의 대립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중국 공산 정권의 3통 제의는 과거 자신들이 중국 본토에서 밀려나는 단초가 되었던 제2차 국공 합작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고 이를 단순한 선의로 받아들이기 곤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20] 즉 덩샤오핑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상호간의 교류를 강조하자 장징궈도 대만의 민주화를 통해 차후 통일 문제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것이다.[21] 두 부자의 묘는 모두 '능침'(陵寢: 영어로는 영묘를 뜻하는 Mausoleum으로 번역)이라고 불린다. '릉'이 황제의 무덤에 붙는 것을 생각하면 장씨 부자 총통의 권력을 반영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22] 팡량이라는 중국식 이름은 장징궈의 생모인 마오푸메이가 지어줬다고 한다. 원래 장제스가 지어준 이름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바꿨다고 한다.[23] 1935~1989(향년 53세). 굉장한 사고뭉치였다. 사람을 죽게 한 적도 몇 번 있었으며 건강관리도 안 돼 있었는지 34살의 나이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고 뇌가 손상되어 53세로 죽을 때까지 19년 간(...)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당뇨병과 매독을 지병으로 앓고 있었는데 알코올 중독까지 있었다고 하니...(사실 10대에 당뇨가 온 사람이라고 해도 기대수명은 1형 당뇨 기준 55~60세, 2형 당뇨 기준 60~65세이며 20대에 당뇨가 온 경우는 기대수명이 7년 정도 더 길기 때문에 당뇨가 아무리 어릴 때부터 있다고 해도 30대에 죽기 직전까지 갔다는 것은 건강관리를 엄청나게 안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인후암이니 암이 없었으면 몇 년 더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죽기 1년 전에 아버지 장징궈가 죽자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충격을 많이 받고 급격하게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래놓고 삼형제 중 제일 오래 살았다(...). 슬하에는 딸 한 명이 있으나 이 딸은 영국으로 가서 유럽인과 결혼하고 아예 그 쪽에 정착했으니 대만에서 무언가를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24] 1945~1991(향년 46세). 형만큼은 아녔지만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일화가 많은 사고뭉치였다. 이 사람도 젊을 때부터 당뇨병과 고지혈증, 만성 췌장염을 지병으로 앓고 있었고 일찍 쓰러져서 자리보전을 한 형과 다르게 외교관 등을 맡으면서 계속해서 격무를 했기 때문인지 급성 심근경색이 와서 형보다도 빠른 46살에 죽었다. 슬하에는 1남 1녀가 있는데 아들의 경우 미국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역시 대만에서 무언가를 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25] 1948~1996 (향년 48세). 성격 자체는 형들과 비슷하게 오만했다고 하지만 절제할 줄 알았기 때문에 사고를 치거나 하지는 않고 성실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삼형제 중 가장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국립타이완대학을 졸업한 후 사업을 하다가 말년에는 국민당 중앙위원을 하였다. 형들처럼 당뇨병이 있었다는 말은 없었으나 40대에 식도암이 오는 바람에 큰형보다 이른 48세로 죽었다. 슬하에 3남이 있는데 셋 다 미국 쪽에서 학교를 나왔고 정치와는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 장남이 장여우보이고 막내아들은 기자에게 욕설을 하는 등 사고뭉치 기질이 조금 있는 것으로 보인다.[26] 1937~. 현재 생존해 있지만 이 사람도 미국에 정착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을 정도로 심한 지병이 있다고 한다.[27] 마오푸메이의 사진을 보면 장징궈와 무척 닮았다. 마오푸메이(1882-1939)가 장제스와 결혼한 뒤에 28살에 얻은 아들이며 장징궈가 웃을 때의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아버지 장제스의 얼굴이 나타난다.[28] 원로들이 장웨이궈를 위해 사퇴까지 하면서 자리를 마련해 줘서 겨우 승진하기도 했다.[29] 인구수를 생각하면 대만의 생활수준이 중국보다 월등히 높다는 얘기다. 물론 거꾸로 얘기하자면 그만큼 중국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까먹은 역량이 엄청났다는 것을 보여준다.[30] 실질적으로는 리덩후이 집권기인 90년대 초반에 선진국에 진입했다.[31] 역대 최고의 총통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장징궈를 꼽는 사람이 많다. 사실 실질적으로 민주화를 이룩해내고 금융위기도 돌파해낸 리덩후이도 평판이 좋을 수 있겠지만 강경한 대만 독립론자라 여러모로 호불호가 갈린다.[32] 국방부 군사정보국이 삼합회인 죽련방을 시켜 장징궈를 비판하던 재미 대만언론인인 류이량을 암살한 사건이다. 류이량의 필명이 강남이라 강남사건이라고도 불린다.[33] 장제스의 연설 영상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장징궈도 생전 영상들에 하나같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댓글이 달린다. 이 영상도 자막이 달려 있어서 그렇지 자막이 없으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그럼에도 저장성 출신 대륙 사람들은 이 연설을 자막 안 보고도 알아듣는다고 한다. 저장성, 특히 닝보 쪽 억양이 워낙 강하게 배어 있어서 댓글창에 간체자로 "닝보 출신인데 어린 시절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쓰던 말투 같다"는 댓글도 보일 지경.[34] 임기 중 사망(88.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