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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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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부산광역시 휘장.svg 부산광역시행정구역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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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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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역 확장의 역사[1]
부산광역시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크게 보아 고대 도시국가로부터 이어진 동래의 역사, 근세 항구로서의 부산포의 역사 둘로 나누어볼 수 있다. 현대에 두 지역이 하나로 통합하고 도시화로 완전히 연담화하면서 두 정체성은 하나로 녹아들었다.

2. 상고~남북국시대

영도구 동삼동 조개무덤 유적 등을 통해 신석기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좌동, 청사포 등에서 1990년대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서 구석기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지만, 구석기시대 자체가 정착생활이 아닌 수렵 및 채취로 먹고 살던 시기다. 때문에 신석기와 다르게 정주한 것이 아니라, 나그네처럼 잠시 거쳐간 것으로 여긴다. 여기서 현미경으로 발견한 기장는 기원전 5,000년 것으로 보여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곡물 자료 중 하나다.

원삼국시대 때 지금의 부산광역시 땅에는 삼한변한진한의 여러 소국이 있었는데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보면 지금의 부산 북부에 장산국 혹은 내산국/거칠산국[2]이 있었다. 이외에 후한서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와 접경한 국가로 독로국이 등장하는데, 거제도설과 부산설이 있다. 부산설의 경우, 독로국이 동래(東萊)의 어원이 되었다고 주장하나 현재 학계에서는 거제 설이 다수다.

대체로 거칠산국은 고고학적으로 지금의 동래구 수안동, 낙민동, 명륜동, 복천동[3], 칠산동[4]에 있었다고 보며, 초기에는 넓은 의미의 가야 권역으로 낙동강 건너편의 구야국(금관가야)과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본다. 현재와는 반대로 대체로 김해의 금관가야 쪽이 주도권을 쥐고 부산 지역이 그 영향을 받는 편이었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신라가 전성기를 맞기 전까지는 김해와 양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거칠산국탈해 이사금신라의 장군 거도의 활약으로 우시산국[5]과 함께 신라에 복속당했다고 하나 이 연대는 학계에서 대개 신뢰하지 않는다. 고고학적으로는 대개 4세기 이후 부산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향력이 뚜렷해진 것으로 보여 그 때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산 지역에서 경쟁하던 금관국이 한동안은 대등하게 맞선 것으로 보이나, 4세기 후반에는 점차 쇠퇴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신라가 진출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복천동 고분군은 고대 부산지역에 있던 소왕국 지배계층의 대표적인 유적인데 신라의 수도 경주를 제외하면 남부지방 최대급의 고분군 중 하나고 보물급 유물이 많이 출토됐다. 복천동은 1969년 주택공사 중 고분 일부가 파괴되어 우연히 드러나서 긴급조사한 뒤 2008년까지 8차례 조사했다. 여기에 복천박물관이 있다. 한편 연제구 연산동에도 상당한 규모의 연산동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그러다 불교국가였던 신라의 영향을 받아 불교식 화장 문화가 번성해 대형 무덤은 사라졌고 범어사, 장안사 같은 사찰이 창건돼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옛 장산국과 내산국은 신라에 합병된 이후 거칠산군(居柒山郡)이 되었다. 거칠산군은 2개의 영현을 거느렸는데 대증현(大甑縣, 부산진구)과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 기장군)이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경덕왕 때인 757년에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지명으로 바꾸는데 거칠산군은 동래군, 갑화양곡현은 기장현, 대증현은 동평현으로 이름을 바꿨다. 동평은 지금은 공식 행정구역 이름은 아니고 주민들 사이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지명이다. 동평(지명) 문서 참조. 기장현은 뒤에 양주로 이속되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와 가까웠기에 그런지 태종대, 해운대 등 신라시대에서 유래한 지명이 꽤 남아있다.

3. 고려 시대

후삼국시대~고려 초기에는 수도가 더 먼 곳으로 가버려 지리적 정치적으로 변방이 되었다. 고려는 지방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동래군이었던 부산지역의 격을 낮춰 속현으로 만들었다. 동래현은 울주군에, 동평현과 기장현은 양주군(양산)에 포함시켰다. 동래현은 지금의 동래구, 금정구, 해운대구, 수영구, 남구, 연제구 지역이고 동평현은 부산진구, 영도구, 사상구, 사하구, 북구, 동구, 중구, 서구이며 기장현은 기장군이다. 동평현은 나중에 조선 초기에 동래현과 합병된다.[6]

동래 정씨가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다. 대표적인 고려시대 유적인 동래 고읍성지와 온천동 차밭골 유적에서 나온 기와에서 정씨 호족 세력의 존재가 재확인되었다. 수영구에는 고려가요 정과정의 무대가 있다.

4. 조선 시대

조선시대 동래현은 동래도호부, 동래군, 동래부라는 여러 명칭으로 계속 바뀌었지만 부산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일본과의 교역과 외교 관문으로 지정되어 격이 높아졌다. 조선 측의 사절단인 조선 통신사는 일본의 중심지 에도까지 갔지만, 일본 측의 사절단은 주로 부산까지만 왔다.

태종세종대왕 때에 왜구에 대한 교린책으로 문호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지만, 1443년 계해약조를 맺으면서 이곳이 염포(울산), 제포/내이포(진해)와 함께 일본 상인들에게 개항되는 3포로 확정되었다. 조선 전기에 대일외교의 관문으로서 부산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경상 관찰사의 통제를 받던 부산 지역(지금의 동래)은 군사 거점인 부산진이 설치되자 행정적인 위치뿐 아니라 군사적인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15세기 말 즈음에 ''이라는 지금까지 쓰이는 표기가 처음 등장하는데, 음이 같은 부산인 ''도야마 등의 표기가 혼재되어 있기도 했다. "釜山은 동평현[7]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釜山浦)이다."라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증산[8][9]', '가모령' 등 인근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볼 때 '가마솥 모양의 산'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후 16세기 잦은 왜구들의 침략, 특히 삼포왜란으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더욱 커져 동래현은 동래도호부로 승격이 되었고 지금의 울산에 있었던 경상좌수영도 부산 수영구로 옮겼다.[10][11] 16세기 전국시대의 혼란으로 왜구가 늘면서 삼포는 열리고 닫히고를 계속하다가 임진왜란 때는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부산포 해전, 다대포 전투의 전장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기유약조를 맺으면서 부산포 한 곳만을 개방하고 사신왜관에 머물러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다.[12] 이로 인해 부산 지역은 무역항으로 성장하였으며, 통신사가 출항하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단순히 조선통신사가 배를 타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통신사를 위한 특산물을 동래부에 모아 보급했고 15~50일 정도 부산에서 체류하며 부산의 명소를 돌거나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의 주요 기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일본 대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빈관 격인 '연향대청(宴享大廳)'도 설치되었다.

부산에서는 특히 조선에서 산출량이 적었던 (화약의 재료), (청나라와 연결되는 화폐 단위), (상평통보의 재료) 등이 많이 수입되었다.

조선시대 초기 동래현의 인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1400명, '경상도지리지'에 2,416명으로 나오지만 보정을 해 7,000명 정도 인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는 기록상 1740년 기근이 끝날때 약 1만 9천명, 1832년 3만 2,158명으로 적혀있지만 보정을 해 약 2만 7,284~5만 3,597명 사이 인구가 추정된다.#

5. 개화기

1871년 서계 문제로 일본은 왜관에서 깽판을 벌였고, 결국 1876년 강화도 조약 직후 개방[13]되어 일본전관거류지가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에게 수탈에 가까운 수준의 무역에 많이 시달렸고 두모진 해관에서 시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만 들어온 것은 아니고 청나라 조계지가 지금의 부산역 앞 지역[14]에 설치되는 등 국제적 항구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파일:attachment/부산광역시/역사/busan1896.jpg

구한말 동래부 및 주변 지역의 행정구역 상황. 양산군 영역이었던 구포(좌이면)는 1906년 동래부로, 대저(대상면, 대하면)는 김해군으로 편입되었다.

6. 일제강점기

파일:attachment/부산광역시/역사/busan1914.jpg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한 부산부동래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0년 10월 1일, 경술국치 직후에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칭되고, 1914년 3월에 부산부의 개항장 이외 지역(현재의 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를 제외한 나머지 전역)을 동래군으로 분리하여 본격적으로 '부산'이란 이름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렇게 1910년 10월 1일, 동래부가 부산부[15]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에 부산부 개항장 지역(현재의 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 부산진구 범천동)만을 부산부로 남기고, 나머지 면 지역을 동래군으로 분리시켰다. 이 때 동래와는 별개의 행정구역이었던 기장군도 동래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를 거치면서 동래군의 읍면 지역들이 다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 기간 부산의 행정구역 변천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 치하 부산은 거주민 복리에 관계없이 단지 일본에서의 인구와 물자이동의 편리성에만 중점을 두고 도시계획을 추진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도시계획이나 조선인에 대한 복지 계획이 미비했고, 기존 조선인의 중심권인 동래 일대에도 일본인들이 상권을 잠식해나갔다.[16] 부산의 도시화는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불러왔고, 도시는 부를 찾아 들어온 일본인이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선인, 일본으로 도항하려는 한인 등으로 가득 차게되었다. 식민도시로서의 특징인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거주 구역 또한 나뉘어져 일본인 거주지는 지금의 중구 부평동 일대에, 조선인 거주지 지금의 범일동 일대에 위치하게 되었고 대개 빈자들의 거주지는 고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부산은 일본 자본의 침투와 근대 시설의 건립 등이 빠르게 이루어졌는데[17]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이니만큼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부산의 중요도를 가리키는 일례로 당시의 경부선 철도는 부산 방향이 상행, 서울 방향이 하행이었는데 이는 부산잔교역부관연락선을 통해 일본 본토의 도쿄역까지 이어진다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일제의 식민지였으니 경성(서울)이 아닌 도쿄가 모든 철도의 기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간선철도'와 '지선철도'라는 용어가 확정, 확산되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현재 도시철도의 전신인 부산전차도 이 때 개통되었는데, 한반도에서 노면전차가 달렸던 도시는 경성부, 평양부, 부산부 3개 도시 뿐이었으니 당시 부산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경상도 내의 평범한 고을이였던 부산은 개항을 기점으로 구한말까지 크게 성장했다. 경상도 전통의 대도시였던 경주시, 상주시[18]를 넘었고, 1900년대에 이미 평양과 비슷한 규모의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도시 개발을 거쳐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광복할 때까지 인구 규모로는 계속 평양과 엎치락 뒤치락하며 한반도 제 2의 도시가 된다.[19]

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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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발족 ·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 여천석유화학단지 준공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 제9대 대통령 선거 · 8.8 조치 시행 · 백곰 미사일 발사 성공 · 자연보호헌장 선포 ·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9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착공 · 정부 제2청사 착공 · 보문관광단지 개장 · 고리 원자력 발전소 3, 4호기 착공 · 2차 오일 쇼크 · YH 사건 · 성수대교 개통 ·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 김형욱 실종 사건 · 부마항쟁 · 삽교천방조제 준공 · 10.26 사건 ·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 서울의 봄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12.12 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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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는 1945년 8.15 광복 당시 부산부와 동래군의 행정구역 상황

1947년 10월 1일에 일본식 동명을 청산했다.#
동의명칭변경에관한규정
개편 전 개편 후 현재 법정구역
경상남도 부산부
부산부 서정(西町)1~4정목, 부평정1~4정목, 변천정(弁天町)1~3정목, 행정(幸町)1~3정목, 본정(本町)1~5정목, 대청정1~4정목, 영정(榮町)1~3정목, 대창정(大倉町)1~4정목,대교통(大橋通)1~3정목, 남빈정(南濱町)1~3정목, 보수정1~3정목, 복전정(福田町)
신창동1~4가, 부평동1~4가, 광복동1~3가, 창선동1~3가, 동광동1~5가, 대청동1~4가, 대창동1~3가,
중앙동1~4가, 대교동1~3가
, 남포동1~3가, 보수동1~3가, 복병동(伏兵洞)


부산부 소화정(昭和町)1~5정목, 녹정(綠町)1~2정목, 초장정1~5정목, 토성정1~5정목, 곡정(谷町)1~2정목, 중도정(中島町)1~3정목, 동대신정1~3정목, 서대신정1~3정목,토성정1~3정목, 부민정1~3정목, 남부민정(南富民町), 암남정
충무동1~5가, 완월동1~2가, 초장동1~5가, 토성동1~5가, 아미동1~2가, 부용동1~3가, 동대신동1~3가, 서대신동1~3가, 토성동1~3가, 부민동1~3가, 남부민동, 암남동


부산부 어영정(御影町)1~4정목, 산수정(山手町)1~3정목, 항정(港町)1~5정목, 대교통4~5정목, 갑정1~2정목, 석견정1~3정목, 청산정, 동산정
영선동1~4가, 신선동1~3가, 봉래동1~5가, 대교동4~5가, 대평동1~2가, 남항동1~3가, 청학동, 동삼동

경상남도 부산부 복정(福町) 경상남도 부산부 복천동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경상남도 부산부 학견정(鶴見町) 경상남도 부산부 칠산동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경상남도 부산부 수정(壽町)) 경상남도 부산부 수안동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경상남도 부산부 유락정(有樂町) 경상남도 부산부 낙민동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
경상남도 부산부 사정(社町) 경상남도 부산부 사직동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
경상남도 부산부 욱정(旭町) 경상남도 부산부 거제동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경상남도 부산부 남수정(南壽町) 경상남도 부산부 수영동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경상남도 부산부 좌동정(左洞町) / 좌리정(左里町) 경상남도 부산부 좌동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
경상남도 부산부 중동정(中洞町) / 중리정(中里町) 경상남도 부산부 중동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경상남도 부산부 우동정(右洞町) / 우리정(右里町) 경상남도 부산부 우동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이외: 정(町) → 동(洞)

1949년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고[20],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임시수도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이때 전국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높은 인구밀집도를 자랑하게 되고, 마침내 지금의 난개발적인 모습의 부산이 완성된다. 참고로 이때 당시의 유적들이 부산에 잘 남아있어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1963년에는 경상남도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됨과 동시에[21] 동래군 구포읍(대부분이 현 북구), 사상면(현 사상구), 북면(현 금정구 북부), 기장면 송정리(현 해운대구 송정동)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었다. 이로서 옛 동래부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들이 모두 부산직할시에 편입되면서, 동래군의 영역은 현 기장군 영역과 일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군 명칭을 기장군으로 개칭하지 않고 계속 동래군으로 유지해 오다가[22], 결국 10년 후인 1973년 동래군을 완전히 폐지하고 양산군에 병합하였다.[23] 이렇게 병합된 동래군 최후의 영역(즉 현재의 기장군)은 훗날 1995년 양산군에서 부산광역시로 편입됨으로써 다시 부산(동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광복 이후 현재까지의 부산광역시의 행정구역 변천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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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직할시 승격 당시 행정구역 상황. 동래군에서 구포읍, 사상면, 북면, 기장면 송정리를 편입해 온 부산진구와 동래구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이로써 옛 동래도호부의 영역을 모두 회복했다. 또한, 1957년부터 1973년까지 같은 이름의 군(동래군)과 구(동래구)가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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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직할시 시절 휘장과 상징 설명[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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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김해군 일부(대저 일대)를 편입하고 북구를 설치할 당시 부산직할시의 행정구역 상황. 대저 일대를 편입한 북구의 면적이 어마어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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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김해군 일부 및 의창군 천가면(가덕도)을 편입하고 강서구를 설치할 당시 부산직할시의 행정구역 상황. 이 상태로 1995년 광역시 출범 전까지 이어졌다.

광복 후 한국사에서 부산을 빼놓을 수 없는데, 광복 직후에는 9월 총파업으로 사회주의 운동 및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도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30] 6.25 전쟁 초반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린 1950년 8월 18일 부로 임시수도로 지정되어[31] 대통령 관저(임시수도기념관), 정부청사(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부산극장과 문화극장), 대한민국 국방부(토성초등학교),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 등 주요 시설들이 부산으로 옮기고 무수한 사람들의 피란 행렬이 이어졌다.[32]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유엔군이 북한 지역으로 북상한 10월 28일 정부는 서울로 환도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이 재점령당하자 다시 임시수도로 지정되어 휴전협정 체결 후인 1953년 8월 14일까지 임시수도로 기능하였다. 한편에서는 가장 흑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했는데, 한국전쟁 시기 양민학살(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 피해가 가장 심각한 곳이기도 했다.[33]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단 한 번도 점령해보지 못한 땅이라는 점에서 대한민국 국군UN군이 단 한 번도 점령해보지 못한 땅인 강계군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정부는 서울로 귀환하였으나 부산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인구수가 커졌다. 반면 인구가 비등하였던 평양은 북한 정권에 따르면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어도 '평양속도'로 완벽한 복구를 했다고 주장하나, 북한 정권이 평양으로의 이촌향도를 규제하는 바람[34]에 부산이 평양을 확실하게 제치게 되었고, 부산은 확고한 한반도 제2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기부터 한국 경인공업지역과 함께 남동임해공업지역으로 국내공업을 이끄는 양대 축으로 성장하였으며, 공업화와 산업화를 최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한국의 최대 수출항 역할도 떠맡게 되었다. 하지만 중앙정부 주도의 산업화는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성장을 이끌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지역민의 불만과 바람은 충분히 수용하지 못해 주택문제나 환경문제 등의 기본적인 문제는 미해결된 상태였다. 한편으로 마산과 함께 부마민주항쟁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부산대학교에는 부산·마산 민주 항쟁이 일어난 날을 기념하는 10. 16 기념관과 기념비가 있다.

성장일로를 달리던 부산은 전두환 집권 이후 지역 기반 대기업인 국제그룹, 동명목재 두 곳이 상납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날아가고, 성장관리도시로 지정되어 공장 이전이 사실상 막히는 규제를 당하여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부산지역의 공장수는 전두환 집권전인 1979년까지 매년 증가하다가 잠시 감소 후 1982년부터 다시 증가하여 1985년에야 겨우 1979년의 수준을 유지했고, 수출업체수는 1980년까지 증가하다가 1986년에야 겨우 1980년의 542개 업체를 겨우 뛰어넘었을 정도.

1995년 양산군 장안읍, 기장읍, 정관면, 일광면, 철마면을 관할로 하는 기장군이 설치되었고(즉, 1914년 동래군에 병합되기 이전의 기장군이 다시 부활한 것이며, 또한 1973년 동래군의 폐지 직전의 영역이 다시 부활한 셈이다.), 진해시 가주동과 용원동[35]의 일부[36]를 병합하여 부산광역시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내무부 관련 문서에 따르면, 양산군 웅상읍(현 양산시 웅상출장소)과 김해군(현 김해시) 대동면, 진해시(현 창원시 진해구) 웅천2동 전역의 부산 편입 또한 고려되기도 했으나 이들 지역의 부산 편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 1995년 부산 시역 확장은 추후 양산군 웅상읍, 김해군 대동면, 진해시 웅동2동 나머지 지역의 부산 추가 편입을 전제로 부산시청이 동의한 사항이기도 하다(내무부 문서에 나오는 내용임).

인구는 1995년에 정점을 찍어 390만 명까지 성장하였으나 현재는 부울경 권역 밖으로는 수도권, 부울경 권역 내에서는 양산시, 김해시, 창원시 등으로 인구가 30여년간 꾸준히 빠져나가 2022년 기준으로 벌써 인구가 330만명대까지 감소했다.

부산의 위성도시인 김해시와 양산시의 인구가 1995년부터 2020년까지 47만명이 늘어나[37] 같은 시기 부산의 인구 감소와 맞물렸으므로 2010년대 중후반기까지만 해도 이런 현상을 도시의 쇠퇴보단 부산을 중심으로 한 부울경권의 광역화[38]로 보는 시각도 있었으나, 2020년대 들어 양산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주변도시의 인구마저도 조금씩 감소세로 접어들면서 위기감이 가속화되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는 끝내 320만명대로 내려앉으며 2022년으로부터 불과 1년도 안되어 1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현재진행형으로 급하락한 모습을 보였다.

인구 감소의 주요 원인으로는 과거 부산의 전통 강호 산업이었던 경공업이 쇠퇴한 점이 있다.[39] 그 외에도 넥센타이어 등 각종 기업이 양산 같은 위성도시나 아예 부산권 바깥으로 거의 다 빠져나간데다, 부산 안에서도 사실상 교외 지역인 강서구, 기장군으로 인구가 빠져나가 부산 도심부 인구의 노화 또한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서 고령 사회 국가에서 일어나는 대도시의 주택값 하락[40] 등이 가장 먼저 일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24년 3월 기준 6대 광역시 중 최초로 소멸위험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부산의 인구는 329만명으로, 65세 이상 인구가 23.0%인데 비해 20~39세 여성인구는 11.3%에 그쳐 소멸위험지수 값이 0.490을 기록했다. #

부산 영도구는 소멸위험지수값이 0.256으로 광역시 구 중 가장 낮았다. 이는 소멸위험이 가장 높다는 것. 그동안 광역시 소멸위험 지역들은 재개발이 지연된 원도심(부산 영도구·동구, 대구 서구, 대전 중구 등)과 노후산업지역(부산 사상구·사하구, 대구 서구 등)이 주를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부산 해운대구와 같은 신도심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1] 현재의 법정 경계를 기준으로 제작된 관계로, 동-리 단위 이하의 자잘한 경계변화는 생략되었다.[2] 기록마다 이름이 다른데, '장(萇)'과 '내(萊)'가 거친 땅에서 자라는 풀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보고 '거칠산'과 '장산', '내산'이 의미상 통한다고 보는 추측도 있다.[3] 복천동 고분군이 있는 곳이다.[4] 거칠산국에서 유래된 지명이다.[5] 신라 바로 옆에 있었다는 기록 때문에 울산으로 추정된다.[6] 세종실록 지리지 기준으로 동평현은 동래현의 속현으로 언급되고 있다.[7] 지금의 부산진구 당감동 지역이 중심지[8] 甑山 : 시루 모양의 산; 동구 좌천4동 소재[9] 동평현의 옛 지명인 대증현은 '큰 시루'라는 뜻으로 증산과 의미가 비슷하다.[10] 초기에는 부산 부산포에 있었는데 일본으로 비밀이 유출될 수 있다면서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 울산에는 이미 경상좌병영이 있어서 약 60년 만에 도로 부산으로 왔지만.[11] 수영구, 수영강이라는 명칭이 경상좌수영에서 유래되었다.[12] 두모포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초량으로 옮겨졌으며, 초량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할 수 있으나 동구 초량동 일대가 아니라 중구 남포동, 광복동,동광동 일대에 있었다. 초량동 일대에 남아 있는 고관이라는 지명은 두모포 왜관에서 유래된 것이다.[13] 같이 약조한 원산은 1881년, 인천은 1883년에 개항되었다.[14] 화교 밀집지역을 거쳐 지금의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졌다.[15] 일본 한자음으로는 후잔후로 불린다. Fuzan.[16] 동래에서 개발된 동래온천의 경우, 한인과 일본인이 합동경영하면서 규제를 피하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17] 과거에 용두산과 대칭되는 용미산이라는 산이 있었는데 부산부청을 짓기 위해 용미산을 깎아버려 산 자체가 아예 사라졌다고 한다.[18] 이 두 도시는 일제강점기 초중기 동안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19] 외국인 거주인구까지 포함한 인구는 대략 구한말부터 1920년대까지는 부산이 더 많았고 1930년대부터는 평양이 더 많다. 내국인 인구는 평양이 부산을 항상 앞섰다. 광복 직전인 1944년 인구 조사에서는 내외국민 다 합쳐도 평양이 부산보다 큰 도시였다.[20] 같은 날 마산부와 진주부도 각각 마산시, 진주시로 개칭되었다.[21] 단 당시의 승격시의 명칭은 부산직할시가 아닌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정부(내무부)직할의 그냥 부산시로 독립이 되었다. 시장도 부산직할시장이 아닌 그냥 부산시장이었다.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명칭이 변경된건 1981년 경상북도 대구시경기도 인천시가 각각 대구직할시와 인천직할시로 승격되기 3개월 전이었다. 단, 비공식적으로는 '부산직할시' 명칭도 함께 쓰였다. 직할시 승격식(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참석했다.)에서도 '부산직할시'로 쓰였고 지역 언론에서도 '부산직할시'를 썼으며 부산교통공사의 전신인 부산직할시지하철건설본부는 1981년 1월 1일에 설치되었으나 실제 부산직할시 개칭은 동년 4월 4일에 이루어졌다. 즉 (정부 직할) 부산시 시절에도 부산직할시 명칭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문에 현 부산광역시에서는 부산직할시 명칭을 1963년부터로 소급하고 있다.[22] 심지어 동래군청도 기장으로 이전하지 않고 부산 시내(동래구)의 원래 위치를 그대로 유지했다! 수안동에 있는 동래부동헌이 1973년까지 동래군청으로 쓰였다. 조선시대 건축물이 현대에까지 현역 관공서 건물로 쓰인 특이한 케이스. 심지어 1973년 이후에도 동래부동헌 건물은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쓰였다고 한다.[23] 오히려 부산 시내(동래구)에 있던 기존 동래군청(동래부동헌)보다 새로운 주인(?)이 된 양산군청이 기장 지역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덩달아 기존 양산군과 기장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산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양산군에서 1986년 기장 지역을 관할하는 동부출장소를 설치하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불편을 느낀 기장 주민들은 동래군 부활(사실상 옛 기장군 부활)을 주장해 왔다.[24] 1962년 5월 31일 ~ 1995년 3월 27일까지 사용되었고 이후 변경된 휘장은 1995년 3월 28일부터 2023년 5월 16일까지 사용되었다.[25] 경상남도에서 분리되어 서울특별시, 도와 동등하게 내무부의 직할을 받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부산직할시의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라서 법령상 명칭은 그냥 '부산시'였다.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명칭이 변경된 건 1981년 7월 1일에 경상북도 대구시경기도 인천시가 각각 대구직할시와 인천직할시로 승격되기 3개월 전인 4월 4일이었다. 물론 법령상의 이야기고, 실제로는 1963년부터 1981년까지 계속 부산직할시라는 명칭이 통용되어 왔다. 그래서 소급 적용해도 틀리지는 않다. 현 부산광역시에서도 부산직할시 명칭을 1963년부터로 소급하고 있다.[26] 이때 편입한 지역은 여러 개의 를 묶어서 행정동마냥 하나의 법정동으로 편성했다는 특징이 있다.[27] 그러나 실제로는 이전부터 부산직할시 명칭이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28] 또한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대구광역시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주택가가 형성된 일부 지역에는 부산직할시 북구 대저동과 같이 표기된 패찰이 붙어 있는 곳도 있다. 그 패찰들은 모두 80년대부터 붙여진 아주 오랜 유물로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에서 1978년에 제정되어 1988년까지 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우편번호(OOO-OO형식의 5자리) 표기 없이 주소만 표기되었으나 1983년부터는 우편번호도 같이 표기하였다.[29] 같은 날 거제군 장승포읍, 밀양군 밀양읍도 각각 장승포시, 밀양시로 승격되었다.[30] 이는 당시 경상도 지역이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강세였던 것도 있었지만, 광복 직후 당시 미군정의 쌀배급 정책 실패, 구(舊) 친일파 출신 경찰들의 쌀 강제공출, 경상도 전역에서 퍼져나간 전염병(이때, 군정청에서는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경상도 전역을 봉쇄해버렸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결과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등으로 인해 민심이 매우 흉흉했던데 배경이 있었다.[31] 이 때문에 부산 지역의 일부 학생들은 6.25 전쟁 때 부산 빼고는 죄다 북한 점령하에 들어가고 부산 근처에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된 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는 대구를 비롯한 경북 지역 및 마산과 대구 일대를 잇는 경남 중서부 지역이 최후 결전이 벌어진 격전지였다. 하필이면 그 동네에 왜관이 있어서 더 헷갈린다.[32] 이 때 부산으로 피란 가던 피란민들이 만날 곳은 정해야겠는데 부산 지리는 알 턱이 없으니 대부분은 그나마 유명했던 영도다리(다리가 들어올려지는 도개교라 유명) 밑에 모이기로 했다고 한다. 그 결과 피란민의 한의 장소로 꼽히게 되었다.[33] 보도연맹 사건의 피해가 전국구로 심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지역이 경상도 지역으로 특히 경남, 부산 지역이 가장 심각했었다. 지금도 부산지역에는 보도연맹 희생자 유가족들이 적지않게 존재하는데, 이 분들 말씀 들어보면 오랜 기간 동안 연좌제에 묶여 한(恨)이 많이 쌓였다고...[34] 북한에서는 평양은 시민증을 발급하며 중국 후커우 제도 이상으로 엄격하게 인구 유입을 통제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에는 심지어 정치적으로 불량한 사람을 추방했다고도 한다.[35] 행정동상으로는 웅동2동.[36] 이쪽은 산업단지 일대의 행정구역 조정을 한 것이다.[37] 김해시는 263,577명 → 542,338명, 양산시는 161,241명 → 352,229명[38] 한국의 수도권으로 치면 서울자체의 인구는 2000년대 중후반기에 들어서 천만명이 깨지고 서서히 900만명 중후반대로 좀 내려앉았지만 대신 서울의 광역권인 인천경기도의 인구가 꽤 크게 증가하는 형세였고 현재까지도 서울+인천+경기도를 합친 범 수도권의 광역 인구는 서울만의 인구 추이와는 별개로 계속 커지고 있다. 위성도시 또는 광역권으로의 인구 유출이 지속됐음에도 서울 자체가 900만명 중후반대선을 거의 15년 넘게 유지하는 중인 것만 봐도 쉬이 알 수 있다. 다만 부산을 비롯한 부울경권은 부산의 인구 감소가 단순하게 주변 위성도시로 빠져나가고 광역화가 되는 중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그걸 감안해도 부산이란 도시의 본래 체급 대비해서도 감소 속도가 너무 가파르고(연간 5~10만명 단위로 주는 중) 몇몇 위성도시가 그덕에 약간 커졌다지만 정작 부울경 전반적인 인구도 통째로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서울을 중심으로한 수도권의 사례와 스케일만 다를뿐, 비슷한 사례라고 보는 시선은 2010년대 말~코로나 시국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사라졌다.[39] 부산광역시에서 특히 유명한 경공업이 신발 공업이다. 현존하는 기업 중에서 프로스펙스부산광역시를 기반으로 하였고, 현재 부산 권역(양산시)에 남아있는 신발 제조 기업 중 유명한 업체로는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임팀 화승 오즈의 후원사로 유명했던 화승이 있다.[40] 부부 + 자식의 4~5인 정도가 거주하던 집에서 노인 인구만 수용하면 되는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가구가 늘어난다. 따라서 큰 집의 집값은 떨어지고 작은 집의 수요는 늘어나지만 노인 인구의 수는 비교적 많지 않으므로 전반적인 집값은 하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