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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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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FFF00> 카를 슈미트
Carl Schmitt
파일:카를 슈미트.png
출생 1888년 7월 11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스트팔렌 플레텐베르크
사망 1985년 4월 7일 (향년 96세)
독일연방공화국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플레텐베르크
국적 독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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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베를린 대학교 (법학)
뮌헨 대학교 (법학)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법학 / 박사)
경력 그라이프스발트(1921), 본(독일)(1922), 베를린 상과대학(1928), 쾰른(1933), 베를린(1933~1945) 대학 교수 역임.
종교 가톨릭
소속
주요개념 예외상태, 오적구별(吾敵區別), 주권자, 결단주의, 정치신학

1. 개요2. 생애3. 상세4. 배경5. 내용
5.1. 독재론5.2. 가톨리시즘
5.2.1. 가톨릭 대 유대교
5.3. 정치신학
5.3.1. 예외상태5.3.2. 결단주의
5.4. 정치적인 것의 개념
5.4.1.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해
5.5. 헌법이론
5.5.1. 정체성 정치와 공동체이론(동일성 민주주의)
5.6. 헌법의 수호자5.7. 합법성과 정당성5.8. 참고: 중기사상5.9. 대지의 노모스
5.9.1. 경계선사고
5.10. 정치신학II
6. 저서7.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카를 슈미트는 독일의 변호사였으며 정치철학자로서 20세기 독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헌법 및 국제법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슈미트는 정치적 권력의 효과적 행사에 관한 광범위한 글을 작성했다. 그의 연구의 범위는 정치, 종교, 법, 역사,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

슈미트의 영향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초기 독일연방공화국의 헌법과 법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의 사상이 국제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정치 사상의 고전으로 불린다. 슈미트는 아리스토텔레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빌프레도 파레토와 같은 정치 사상가로부터 자신의 사고에 대한 형성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영향은 이탈리아 출신의 조르조 아감벤, 안토니오 네그리, 프랑스 출신의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줄리앙 프룬드, 스페인 출신의 마누엘 가르시아-펠라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야콥 타우베스, 벨기에 출신의 샹탈 무페, 독일 출신의 발터 벤야민, 위르겐 하버마스, 한나 아렌트,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푀르데 등 상당한 인물들에게 미쳤다.

2. 생애

카를 슈미트는 1888년 7월 11일 플레텐베르크에서 가톨릭을 믿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7년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하여, 191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1915년 바이에른 보병연대에 자원입대를 하게 된다. 같은 해 파울라 도로티츠와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되지만, 1924년 세속법원에 의하여 결혼에 대한 무효화 판결을 받게 되었다. 교회법에 의한 혼인 무효는 아니었으므로, 1926년 두스카 토도로비츠와의 두 번째 결혼과 함께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 1950년 두 번째 부인의 사망과 함께 파문이 해제되고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초기 저작들은 문학적 시도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독일의 표현주의 시인이자 예술 평론가인 테오도르 도이블러의 작품 『북극광』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었다. 그 외에도 『거울』, 『부리분켄』, 『실루엣』 등의 다양한 문학 작품들을 저술하였으며, 이는 향후 그의 문학적 재능과 법학이 결합하여 결실을 맺은 다양한 창조적 작품들의 표현력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1914년 국가에 대한 연구 논문과 함께 교수자격을 취득한 그가 처음으로 출판한 저서는 1919년의 『정치적 낭만주의』였다. 이것은 고전주의에 대항하는 낭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그의 태도를 감지할 수 있는 저서이며, 이는 아마도 독일의 유명 작가인 괴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추정된다. 한편 낭만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자신에 대한 내부적 성찰이기도 하였다. 이 괴리감은 그의 저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계속되어지는데, 그 긴장 관계야말로 그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정확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기에 신중한 접근과 해석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1920년에서 1933년까지는 여러 대학 교수직을 역임하며[1] 다양한 저서들을 출판하는데, 이 시기가 아마도 종교-정치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와 그의 기본적 성향의 토대를 두텁게 마련하기 위한 중대한 작업의 시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앞서서 그의 생애기간 중에 만난 두개의 세계대전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된 저서들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어느 한쪽의 편의만을 위해서 제공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입장을 견지하며 하나로써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점이 그가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지만, 이는 한편 위기상황 속에서 형성된 고유한 인간의 방어기작과도 연관되는 듯하며, 이를 슈미트가 정의하기를 매너리즘(Manierismo)이라고 표현한다. 매너리즘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위치하며, 일종의 “예외상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개념 규정은 모두 그 이전의 역사적 사건들을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의 핵심적 이념의 발전이 개신교의 세력이 강하던 독일 내에서 가톨릭을 옹호하기 위한 일종의 정당원인의 시도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 노력이 가시화되어 직접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1921년의 『독재론』이었다. 그 저서는 다양한 세속권력에 관하여 다루고 있으며, 드물게도 교황이 세속권력을 장악했던 12 ~ 13세기의 기록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가지는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고 보겠다. 곧바로 1922년에 출판된 『정치신학』과 1923년에 출판된 『로마 가톨릭주의와 정치형태』는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나온 『독재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여지며, 이것이 향후 나치당에게 법적인 빌미를 제공한 시대적 아이러니의 한 예시로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1924년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을 출판하며, 결단에 대한 이론의 강조와 함께 종교적 이원주의에 대한 비판과 일신론의 강력한 촉구를 요구하였다. 이는 아마도 당대의 가톨릭 활동 또는 교계 제도에 평신도들의 참여를 강조하는 가톨릭 신앙의 윤리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듯 싶다. 다만, 1927년에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출판하고 나서 이후 전개되는 흐름 속에서 그의 방향성에 대한 의심을 촉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시점이 아마도 당시 그의 종교-정치 이념의 혼란의 정점이었을 것이며, 향후 정치에 과도한 개입이 초래한 비극과 연관되어 있는 과도기적인 시행착오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중요한 핵심적이고 논란적인 사상이 나온게 된다:

"정치적 개념은 국가를 앞선다"

이 표현은 상당한 문제거리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예컨대, 이는 세속국가에 대한 비판의식이었으며, 이것이 의회주의에 대한 비판,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세계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언뜻보기에는 이는 중세기의 황제정을 시사하는 듯 보이며, 아마도 여기서의 황제정이란 신성로마제국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는 향후 출판된 『대지의 노모스』에서의 카테콘 개념[2]으로 이어지며, 세속국가, 즉 나폴레옹의 카이사르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의 재고였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1928년에 출판된 『헌법이론』은 그의 가장 중요한 학술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서는 헌법제정권력과 다양한 헌법적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음을 시사하는데, 시작이 그러하듯, 절대적 헌법개념에서 상대적 헌법개념으로의 해체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개념에서 부터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인용하여 헌법개념에 역사적이고 사상사적인 발전의 흐름을 일관되게 보이고 있다. 이어서 1931년 『헌법의 수호자』를 발표, 헌법의 수호자가 대통령인지, 의회인지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전개된다. 1932년 『합법성과 정당성』을 출판, 파펜 정부를 대리하여 프로이센 쿠데타 재판에서 변호를 하게 된다. 이는 앞서 이어지는 헌법의 수호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의 연속이었다.

3. 상세

사람들이 현대 의회주의라고 부르는 것 없이도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있고 민주주의 없이도 의회주의는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독재의 결정적인 대립물이 아닌 것처럼 독재는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대립물이 아니다.[3]
-칼 슈미트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1장 67쪽-[4]
카를 슈미트는 나치의 법학자로 사상적 측면에서 전체주의자이며, 행위가 아닌 사상 때문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단죄 당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하이데거와 함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선 것은 맞지만, 하이데거와 달리 슈미트는 '혐의 없음'판결을 받았다. 법적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아 사면되었다. 그의 사상은 언뜻 보기에 무시 무시하지만 모두가 헛점을 찔렸다고 생각할 만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학에서는 주로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의 양면성을 지닌다는 것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학자이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와의 관계를 탐구한 것으로 유명하며, 민주주의가 스스로 독재를 선택하는 경우에 대해 언급할 때, 슈미트의 이론은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슈미트가 좌파 사상가들에게 거론되는 것을 유독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그는 좌익이 아니며, 극우라 칭하는데 이는 "극우"라는 단어 자체를 잘못 쓰는 것에 가깝다. 그는 헤겔 우파적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이므로 독일적 환경에서 우파라고 불릴수 있을지언정 명예혁명이후 자유권을 확장시켜온 영미권적 사조에서는 극우는 커녕 우파의 흔적조차도 없다. 그리고 알다시피 헤겔 우파는 2차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단죄되어 사라졌다. 그래서 네오나치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극우라고 칭하는 것인데, 이사람의 경우 정치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할 이유가 있다. 그 극우의 정체는 민족 사회주의이며 이들과 철학적으로 극단에 서 있는 것이 영미권의 지유주의다. 반면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좌익들은 독일적 전통을 물려받은 사회주의자이자 헤겔의 후예로서 많은 부분을 공유하며 철학적 스펙트럼상 바로 옆집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칼 슈미트를 극우로 몰면서 자신들과 철학적으로 멀리 있는 사람인 척 하는 것은 악의섞인 왜곡에 가깝다.

어떤이는 슈미트의 해석을 가지고 미국이 형성되어있는건 사실이라고 믿기도 하나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달리 어느날 외국인이 투입한 체제가 아니다. 존 로크이후 수백년간 수많은 영미권 철학자와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체제라 그 미국의 기초를 20세기까지 살았고 그 논의 자체를 인정할 생각이 없는 대륙철학자인 카를 슈미트가 만들었다는건 넌센스에 가까운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실상 그의 미국 체제분석의 가치는 헤겔 우파인 "독일인"의 입장에서 "영국과 미국"의 사상과 정치체제를 "독일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해석하고 대부분 "비난"하는데 쓰이고 있다. 당연히 헤겔주의를 수용하는 헤겔좌파의 후예, 즉 "사회주의자"들의 인정과 이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헤겔 우파는 나치와 더불어 단죄되었으니 사실상 카를 슈미트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좌파"들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영미권 지식인들은 대개 철저히 부인하지만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미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카를 슈미트의 해석(헤겔 우파적 해석)을 수용하려든다. 다만 그가 나치였기 때문에 그 개인을 존경하지는 못할 뿐이다.

실제로 슈미트를 높게평가하는 사람중에 영미권의 우파적 지식인은 "아예 없다." 영미권의 철학전통과 그 정치체제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옹호한다면 이미 그는 우파가 아니다. 그를 좋아하고 원용하는 사람들이 국가 사회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아나키스트건 칼 슈미트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그의 반자유주의적인 정치사상과 영미권에 대한 혐오와 폄하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의 정치체제를 싫어하는 사상가들에게는 높게 평가받지만 그 자유주의적인 정치체제를 가진 미국과 영국에서의 평가는 대개 어처구니 없는 말을 그럴듯하게 내뱉는 "악의 화신" 그 자체다. 그 자신이 미국과 영국을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꾸준히 영미권의 보수적 지식인들에게는 악당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좌익들이 칼 슈미트를 좋아하건 혹은 싫어하면서 이용하건, 미국을 비난하는데 원용하며 떠들어대는 재료일 뿐이라고 인식했다. 이같은 태도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2024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J. D. 밴스는 이런 경향을 콕 찝어 미국을 비난하는 좌파 지식인들이야 말로 분명히 칼 슈미트를 읽고 따르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에겐 법도 정의도 [5] 권력만 쫒아다니는 동물들[6]이라고 강도높게 비난할 정도다. # 물론 밴스의 말이 옳든 그르든 이렇게라도 끊임없이 거론된다는거 자체가 칼 슈미트가 걸물은 걸물이라는 이야기기도 하다.

영미권의 반응은 둘째치고 어차피 독일인의 입장에서 "영미권을 씹는데" 사용되는 철학자니, 지금부터는 전체주의, 좋게말하면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대륙철학적 입장에서 서술해보자. 말꼬기 좋아하고 고루한 단어와 자의적인 창조적 단어재정의를 남발하는 대륙철학답게 사용되는 단어와 문체부터가 지금부터는 확 달라지는게 느껴질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민족국가의 동질성을 파괴하려는 세력에 대하여 자신의 고유한 존재의 권리를 주장할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의 정치적 능력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카를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제법적 질서는,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것의 다수의 개별성에 있어 다소간 우연적인, 특정의 역사적 시점에 있어서의 그때마다 영토적 현상을 수호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초가 되는 노모스, 그것의 공간구조, 질서와 장소확정의 통일성을 수호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미트가 좌익 세력에게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7] 왜냐하면 슈미트 스스로가 자신의 정치신학이 그들에게 이용되는 것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표현을 하자면, 예컨대 슈미트의 적과 동지는 헤겔변증법을 문제시하고 헤겔과 함께 마르크스까지 자신 속에 포함시킨 일종의 상급의 이론 구성이라고 하겠다.[8] 물론 이와 관련하여 좌익 쪽에서는 죽어도 인정하기 싫겠지만, 이것도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J. H. 맥코르믹(McCormick)은 슈미트를 현대의 미국의 다양한 보수주의의 흐름의 “대부”(godfather)로 규정한다.[9] R. 메링(Mehring)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보수주의를 주도했던 인물들 중에서 슈미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10]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를 좌파, 심지어는 극좌로 규정하고 싶어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매우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반공주의자이며, 경우에 따라서는―공산주의자들에게 인용되기는 하지만―나치에 가담한 파시즘적인 성향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으로 현대의 "자유민주주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적 예외와 민주주의적 예외가 부각되며, 이와 같은 <예외상태>에 관한 학문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다시 연구되어, 재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감벤의 『예외상태』라는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슈미트는 수권법을 통하여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를 구성한다. 여기서 슈미트가 어떤 식으로 역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어내려가며, 독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이 부분은 부연설명은 하진 않겠지만 『독재론』을 참고하는 것을 추천한다. 「프랑스 혁명기 동안의 인민위원의 실제」라는 챕터는 과연 타당하며, 타당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다.

베르나르 페이(Bernard Faÿ)는 문명이라는 단어가 19세기 초에 나온 것이며, 오로지 고대 유럽을 프랑스와 미국과 결합시키고 있는 계속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증하였다.[11] 1796년의 워싱턴 대통령의 고별 교서도, 1923년의 먼로 교서도, 유럽 외부적인 국제법의 기초를 세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미국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유럽 문명과 유럽 국제법의 담지자로 느끼고 있었다.[12] 당시 수립되고 있었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역시 스스로를 자명하게 <유럽 국가군>과 그들의 국제법공동체에 속하는 것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19세기에 나온 아메리카 국제법의 모든 교과서들은, 유럽 국제법 옆에 나란히 놓이는 특별한 아메리카 국제법에 대하여 말하는 경우에도, 더욱 더 자명하게 그러한 주장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13] 따라서 서반구와 더불어 주어진 전세계적 경계선은 비록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구(舊)유럽을 염두에 둔 것이며, 유럽을 배제시킨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특정 의미에서만 반(反)유럽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즉 이러한 점에 한정해서만 오늘날 "좌익들의 칼슈미트 이용"이 이루어진다고 하겠다.다른 의미에서 아메리카의 서반구 경계선은 반대로 자유롭고 진정하며 고유한 유럽이고자 하는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요구를 포함하고 있다.

영미권을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은 카를 슈미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사상적 배경 자체가 완전히 이질적이라서, "근대의 이원주의적인 사고 방식"[14]을 보지하는 특정 인물들에게 있어서는 슈미트가 구유럽과 현대의 '극우파' 자유주의자들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 근대의 이원주의에 기반한 정치체제와 이론을 몸으로 체험하며 살고 있는 "좌익"들은 독일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 사람의 문헌을 읽으면 단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가톨릭적인 기초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 즉 이러한 근대의 이원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슈미트가 어떤식으로 구유럽과 영미권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의 보수주의자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지를 확실하게 인지시켜줄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풍부한 설명은 최재훈이 번역한 『대지의 노모스』에서 그 효과를 확실히 발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이른바 제퍼슨 라인으로 표현되어 있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명확하고 일관된 공식화에 의지해 논의를 풀어가 보자.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5]은 1812년 초에 <영국의 운명은 거의 결정되어 있으며 현재의 영국의 존재 형태는 몰락으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들이 지닌 강력함으로 인해 우리들은 반구(半球)에 대하여 법률을 부과하는 것이 우리에게 허용된다면, 그러한 법률은, 대서양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경선(經線)이 전쟁과 평화의 분리선을 이루고, 그러한 분리선 이 편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행해지지 않으며 사자와 양이 평화 속에서 나란히 쉴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823년 12월 2일의 제임스 먼로(James Monroe)[16] 대통령의 교서는 반구(半球)라는 말을 완전히 의식적으로 그리고 특별히 강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교서는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아메리카로, 그리고 또한 이 대륙이나 이 반구(this hemisphere)로 부르고 있다. 먼로주의와 서반구는 둘이 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 둘은 미국의 특별이익의 영역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국가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간, 즉 광역(廣域, Groβraum)[17]이라는 말이 지닌 국제법적 의미에서의 광역을 나타내고 있다. 전통적인 미국의 국제법이론은 그것을 법적으로 자위지역으로 이론구성을 하고 있었다. 1939년 10월 3일의 파나마 선언에서 우선 서반구라는 표현이 정착된 것으로 보였다. 이 선언에 의해 확정된 아메리카 국가들의 중립성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보장지대(安全保障地帶)의 내부에서는 전쟁 수행 당사국은 어떠한 적대행위도 취해서는 안 된다. 중립적인 안전보장지대의 경계선은 아메리카대륙의 양쪽 해안선에서 대서양 쪽으로도 태평양 쪽으로도 300해리에 이르고 있다. 그 경계선은 브라질 해안에서는 그리니치 자오선(子午線)의 서경(西經) 24도에 도달하고 있으며, 따라서 통상적으로 지도제작법상(地圖製作法上)의 동방과 서방의 분할선을 나타내고 있는 서경 20도에 접근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슈미트가 "전세계적인 경계선사고(Globales Liniendenken)"라고 부르고 있는 "전세계적(global)"이라는 말은 이러한 사고방식의 평면적이며 표면적인 성격과 더불어 대지포괄적-혹성적인(erdumfassend-planertarisch) 성격을 나타낸다.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세계적 경계선사상은 고유의 발전과정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사상은 1492년의 아메리카 발견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아메리카의 선언에 이르기까지의 서로 관련되고 통일적인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초의" "전세계적인" 경계선은 처음에는 아메리카 발견 수개월 후인 1494년 5월 4일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Ⅵ)의 교서,『Inter Caetera』속에서 등장한다.

그러한 종류의 것인 미국의 고립선은, 즉 그러한 선민의식은 정신사적으로는 칼뱅주의적이며 청교도적인 태도로부터 유래한다. 그러한 의식은 이성론적이고 세속화된 형태로 계속되며, 또한 흔히 그러한 형태에로 고양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오로지 신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감정이 함께 세속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즉 1775년의 독립선언 이래 미국적인 선민의식은 프랑스로부터 순수하게 세속적·현세적 성질을 지닌 새로운 도덕적 힘을 공급받는다. 계몽주의 철학자들, 그 중에서도 레이날(Raynal)과 콩도르세(Condorcet)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은 인류 역사의 새로운 상(象)을 창조한다. 이제까지는 가톨릭의 정복자들과 프로테스탄트의 정복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앙의 선교로서 정당화되어 있었던 16세기의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의 정복, 아메리카 토지에 대한 대규모적인 육지취득은 이제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비인간적인 잔혹행위로 나타난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18]에게서 이러한 견해에 대한 자료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에 반해 미국의 인권선언은 일종의 인간성의 부활로 이해된다. 17세기 철학자인 토머스 홉스에 있어 아메리카는 이기적인 충동과 이익을 위한 국가 이전의 자유로운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자연상태의 영역이었다. 존 로크에 있어서는 아메리카는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출발의 상태에 있었고 자연상태에 있었다. 18세기 말경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북아메리카를 재차 또 다른 종류의 자연상태의 영역, 즉 루소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자연상태, 다시 말해 지나치게 문명화된 유럽의 타락에 물들지 않은 자연상태로 간주하는 것에로 옮아갔다. 이를 위해서는, 프랑스가 미국과 체결한 동맹(1778년) 때문에,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신적 우의(友誼) 때문에도, 벤저민 프랭클린[19]의 프랑스 체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아메리카는 유럽의 의식에 있어 두 번째로 자유와 자연성의 공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전세계적인 투쟁선이라는 옛날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고 고립에 적극적인 내용을 부여하는 하나의 긍정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한 기본적인 고립은 그것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에 따라 대지의 새로운 하나의 공간질서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한 고립은 보장된 평화와 보장된 자유의 영역을 전체주의와 타락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식에 의해 새로운 공간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을 완성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아메리카적인 고립의 사고는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헤겔은 이러한 신세계의 구조에 관하여 백 년이 넘는 시간 전에, 1848년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강의의 서문에서 주목할 만한 진단을 제시하였다. 최초의 먼로주의의 시대인 당시, 그는 순진함과 박식함을 천재적으로 혼합시켜, 미국이 아직 결코 국가(Staat)가 아니라는 사실, 미국이 아직도 시민사회의 단계에 있다는 사실, 즉 개인주의적 자유에 대한 변증법적 극복이라고 하는 국가적 상태에 선행하는 이해관계의 자유라고 하는 국가 이전적 상태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였다.

카를 슈미트의 이런 묘한 스탠스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이식된 체제가 독일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준다. 사회민주당, 가톨릭 중앙당, 민주당이라는 세개의 독일 정당들이 많은 학자들에게 헌법 초안을 의뢰해 만들어낸 결과 프랑스식 대통령제, 영국의 의회제,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가 모두 들어있었다. 이를 수권법으로 무력화시킨 후 폭주한 나치당 때문에 이것을 이상적인 헌법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많으나 실상 이 법안 자체가 수권법으로의 전환을 내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점 때문에 슈미트의 이론은 독일 전통의 정치적 방법론으로 영미권의 법률 이론과 논의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다만 그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논의가 너무나도 정교했기에 정치적 의의가 있어 헌법학에 반면교사로서 그의 이름이 남게 되었다. 물론 슈미트의 저작들은 이런 것들 중에서도 상당히 고전적인 것이고 영미권의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데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에게 구미가 잘 들어맞아 대중적으로도 크게 알려진다. 그의 독특한 법학, 정치학적 사유가 나치당의 집권을 정당화하는데 기여하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나치즘에 기초해 있다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는데, 그의 이론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것의 가능성을 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슈미트에 의하여 영미식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정당화되고, 이것이 오늘날의 의회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라는 표현이 실제적이며 실존적으로 타당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슈미트가 나치의 집권 이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시절에 주장한 표현법은 상당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를 어지럽히는 독일 공산당과 나치당의 폭동을 비상대권을 이용하여 제압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슈미트는 나치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는다. <그의 국가론에 인종, 민족적 기반은 전적으로 정치적 입지를 위한 허구이며 실상은 가톨릭에 기반한 헤겔주의적 국가론이다>라고. 더불어 슈미트가 3년만에 당에서 축출었다는 점은 오늘날의 슈미트 연구를 위한 중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실제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사상적으론 나치즘의 인종주의에 빠지지 않을 만큼 명석하고, 실제로 유대인 지식인들과도 많이 교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혐오하던 바이마르 자유민주정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나치와 결탁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석에선 나치의 인종주의를 멍청하고 저급한 발상이라 비웃으면서도 나치가 가져올 반민주주의적, 반자유주의적 국가를 위해서는 동료 유대인 교수들을 강단에서 쫓아내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본인의 사상과 차이점을 이미 파악했던 나치 지도자들에겐 그냥 권력에 빌붙은 지식인으로 취급 당하고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했다. 어쨋든 반민주주의, 반자유주의적 일관성을 위해 계속 충성했고, 종전 이후엔 이게파르벤 전범기업가들을 비롯한 전범들 변호에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도 했다. 이렇게 나치즘과 사상적 독립성을 유지할 지성을 가지고도, 딱히 대접도 못받았으면서 적극 부역했다는 점에서 슈미트의 사상과 삶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선 나치보다 더 악질이라 보지만, 어쨌든 이런 특유의 카리스마를 지닌 통찰력이 전후 현대 정치학, 법학계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4. 배경

근원적으로 근세 영미권에서는, 어쩌다보니 거대 제국이 된 대영제국의 미래상을 두고 제국을 유지해서 얻는 이익 때문에 도덕적 딜레마를 등한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식민지인과 본국인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래서 근대 자유론의 거의 대부분이 영국에서 나오게 된다(존 스튜어트 밀, 존 로크, 토머스 홉스, 존 오스틴,[20] 제러미 벤담 등).

반대로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중앙정부가 사실상 명목만 남은 채로 영방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일찍이 민족국가 체제를 갖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둘러싸여 이권과 영토를 차근차근 무력하게 빼앗기고 있었다. 독일계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독일인이 단결할까, 독일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중권력을 어떻게 구현할까'에 관심이 쏠려 있었고, 근대 전체주의의 대부분이 이러한 고민들에서 나오게 된다(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틴 하이데거, 카를 마르크스 등). 이 중 법철학 부분을 담당하는 게 카를 슈미트이다.

부연하자면,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는 영미권 철학자들과 다르게 독일 철학자의 전체주의적 성향에 대해서 그 후계자와 해설자들은 매우 강경하게 부인한다. 그러나 독일철학의 옹호자들이 그들의 선학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양보한 표현으로 전체주의자들이 이들의 사상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해 동원했다라고 말한다면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 독일어권 철학에 대한 어떤 존중도 없는 까칠한 영미권 철학자들의 경우 배경 상황부터 봐도 애초에 그놈들은 그럴 목적이었고 동료, 후학, 대중의 인식도 딱 그랬으며 본인들도 그렇게 해석하던 놈들에게 교수직, 연구기금, 관료 자리를 받아먹던 놈들이라고 표현하는걸 감안하면 이들이 총체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전체주의적 성향이 있다고 해서 이들의 철학이 가치없는 것이 아니고 영미권 철학이 독일철학과 완전히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사상의 전개 결과 전체주의를 옹호나는 결론이 나온다고 해서 이들 철학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영미권 철학자 대다수도 동의한다.

정리하자면 독일과 영국의 상반된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타개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요구가 이런 상반된 전통으로 나타난 것이다.[21]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 사람의 저작을 이해하려면, 당대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공화국은 독일인들이 원해서 만든 체제가 아니다. 패전으로 강요된 체제다. 그래서 이게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독일어권 사람들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모든 국민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었고,거리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시위대들끼리 내전에 가까운 대립을 반복하고 있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걸 정리할 국가체제가 대체 작동할 생각을 하질 않는다. 법학자로서 이걸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다. 이래서 "독일어권 법 철학자"의 입장에서 강요된 "영미권의 체제"가 도무지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사회질서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냉소적인 비판을 시작하며 그 "독일"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그것은 수권법이라는 독일적 전체주의의 정치적 구현체로 표출된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는 비판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그 시도는 매우 참신한 시도다. 영국에서 진행된 논의방향과 전혀 다른 전통을 가진 대륙철학적의 방향에서 영미권의 국가체제를 해석하는 방식이라 단순한 나치선동이라 치부할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준다. 역사적으로 ‘사회권’ 개념을 처음으로 헌법에 도입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조화시키고자 한 바이마르 체제에 슈미트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음을 설파하고,이 "흉악하고 조악한 섬나라의 자유주의,개인주의라는 역겨운 질병을 위대한 독일인들의 국가주의적 열망. 민족주의사회주의와 무리하게 접목시킨 이 헌법과 체계"는 당연히 작동할 수 있을 리가 없으며, 어떤 매커니즘에 의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매우 설득력있게 주장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민족의 열망이자 시대정신인 통일 독일제국이 아니며 로마가 인증한 신의 대리인, 황제가 다스리는 신성로마제국도 아니다. 따라서 이 조악한 공화국의 의사결정구조인 의회정치란 헤겔적 의미에서 이신론적 시대정신인 민족의 총의가 아니며, 그렇다고 신성로마제국시절처럼 신의 대리인의 영도와도 다르다. 그저 영원히 대화만 하자며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부르조아들의 결단회피의 산물일 뿐이며 국가마비를 고의적으로 고안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수권법은 필연적이다. 결단을 내리는 총통이야말로 작동하지 않는 관료제적 톱니로만 가득찬 헌정체제가 의미를 가지고 가동하게하는 진정한 엔진이라는 것이다. 독일에 속해있으며 독일법의 권원이지만 동시에 독일법에 의해 구속받지않는 초인위버멘쉬(Übermensch)다. 그리고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야말로 주권이라고 주장했다. 끔찍하고 냉소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독일인들에게 있어 이게 놀랍게도 작동했다는 점이 현대의 법학자 철학자들에게도 더욱 흥미로운 주제다. 특히나 대륙법체계이면서 영미권에게 이식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더더욱 흥미로운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지도자원리에 영감을 받은 10월 유신 주체사상등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물론 당대건 지금이건 영미권 정치가, 법학자들은 이러한 논의를 매우 냉소적으로 받아들인다. [22] 하지만 위에도 말했지만 모든 전체주의와 사회주의는 대륙철학에 기초해있으니 대륙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이 사람의 말이 설득력있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나 이 사람의 비판은 영미권의 관습과 문화가 다르면서 체제가 이식된 국가 예를들어 한국의 경우에도 유효할 수 있다. 유신헌법에서 칼 슈미트의 향기를 강하게 느끼는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륙철학자들, 포스트 모던철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영미권의 체제의 모순과 조악함을 탓하지만 영미권 철학자들은 거꾸로 칼 슈미트의 저작과 논변을 통해 대륙철학 대륙법의 근본적인 결함이 드러난 것으로 받아들인다. 예를들어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연구한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이를 가리켜 나폴레옹 히틀러 레닌 스탈린 어쩌면 드골까지, 민주주의가 사산될 수 밖에 없는 프랑스 혁명의 전통 탓이라고 광범위하게 폄하한다. 따라서 카를 슈미트의 해설서 마저 저자에 따라,부르주아 과두제에서 파시즘으로 흐르거나 무정부상태가 될 영미권의 민주주의를 냉소적으로 다루느냐, 혹은 민주주의를 인민민주주의 혹은 민주집중제 혹은 수권법등으로 사산시키는 대륙의 철학과 문화를 냉소적으로 다루느냐로 정반대로 나뉘게 된다.

고대의 공화제에 바탕한 독재론, 가톨릭계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신학, 프랑스혁명 이후의 헌법제정권력론, 마르크스주의의 혁명론 등을 연구하면서 그는 ‘법제도’와 ‘정치’ 에는 ‘친구’와 ‘적’ 사이에 선을 긋고 ‘보통(nomal)상태=규범성’을 창출하는 ‘결단’이라는 행위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슈미트와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되는 혁명적 좌파들도 그의 ‘결단법론', 친구/적’이론을 깊게 탐구한다. 1990년대 부터는 데리다, 아감벤, 무페 등 포스트모던 좌파 논객들이 슈미트의 이론을 논하였다.

5. 내용

5.1. 독재론

1920년대 초 슈미트의 저술은 바이마르 법에 내재된 법적 문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법적 관점은 극도로 불안정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발전되었다. 1918년 11월 9일 필리프 하인리히 샤이데만(Philipp Heinrich Scheidemann)이 공화국을 선포하기 전부터 독일을 괴롭혔던 이러한 문제들은 1918년 베를린에서 일어난 인민해군사단(Volksmarinedivision)의 반란과 1919년 1월 11일 베를린의 포어베르츠(Vorwärts) 독일사회민주당의 잡지사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의 서막이었다. 독일 전역에서 발생한 이 사건과 이와 유사한 많은 사건들이 독일을 내전 직전까지 몰고 간 광범위한 무질서의 주요 원인이었다. 1919년 8월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도 이러한 위기 상황은 종식되지 않았다. 1920년 3월의 카프 폭동(Kapp Putsch), 튀링겐과 작센의 공산주의 봉기, 1923년 11월의 뮌헨 폭동(Beer Hall Putsch), 그리고 증가하는 실업자 수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초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독재의 본질에 대한 슈미트의 중요한 저서 『독재론 : 근대 주권사상의 기원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까지』(1921)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발표되었다. 독재를 정의할 때 슈미트의 출발점은 주권과 독재의 구분이다. 장 보댕(Jean Bodin)에 따르면 <주권이란 국가의 절대적이며 영속적인 권력이며 라틴 민족이 마에스타라고 부르는 것>이며 <인민 또는 군주에 의해서 행사된다>고 한다. 그러나 독재자는 군주가 아니며, 최고 권력을 가진 집정관(Konsul)도 아니지만, 최고 통치자에게 특정임무(전쟁 수행, 국가 개혁)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다. 독재자의 권력은 절대적이지도 영구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독재자는 폭군이 아니며, 독재는 절대적 지배의 한 형태도 아니며, 공화체제에 특유한, 자유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댕의 정의에 따르면 권한이 있는 사람이 모두 독재자일 필요는 없다. 그는 권한을 위임받는 정무관(Magistrate) 관리위원이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관리란 일반적인 직책을 짊어진 공직자이다. 위원은 특별한 직책을 가진 공직자이다. 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전자는 법률에 구속을 받는 반면, 후자는 최고 통치자로부터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특별 명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후자만이 본 연구의 목적상 주목할 만한데, 이는 보댕이 독재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바로 후자이기 때문이다. 보댕은 위원을 특정 권한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분류하지만, 이 분류가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슈미트는 독재자를 다른 유형의 위원과 구별하기 위해 보댕 체제에서의 독재자를 <행동위원>(Aktionskommissar)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보댕은 주권과 독재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유지하면서도 호민관의 항의권이 여전히 존속되었기 때문에 술라(Sulla)와 카이사르(Caesar)의 독재는 본질적으로 독립적이고 주권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민중>이 시한적 권력보유자의 의지에 의하지 않거나 또는 나아가 의지에 반하여 회합할 수 있다면, 이 권력보유자는 군주는 아니며 단지 <민중의 최고 봉사자>(primus populi minister)일 뿐이다. 보댕의 해석에 따르면 진정한 주권자는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위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슈미트는 또한 고대 공화정 초기의 독재후기의 술라와 카이사르의 독재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올바르게 지적한다. 로마 시대의 독재자는 보통 원로원의 요청에 따라 집정관이 임명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독재자의 임무에는 전쟁의 수행(군사독재)내란의 진압(치안독재)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종교상의 이유에서 제1인자에 의해서 행사될 필요가 있었던 못박음을 위한 독재, 조사의 지휘, 제일의 결정 등이 포함된다. 독재자의 임무는 그 임명이유인 위기적 상황을 제거하는 것, 즉 중단된 헌법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위기 상황을 제거하려는 즉각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대 공화국의 독재자는 6개월 동안 재임했으며, 대부분 그 임기가 만료 전에 독재를 포기했으며, 물론 <상황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술라와 카이사르의 독재는 고대 공화정의 독재 관행과는 상당히 달랐다. 술라는 무기한 독재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하고 <그라쿠스 헌법>(Gracchan constitution)을 폐지한 후 사임했다. 카이사르의 독재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4년간의 독재후에 살해되었다. 또한 월트 휘트먼 로스토(Walt Whitman Rostow)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모든 행동은 기존 헌법이 무의미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한다. 슈미트는 독재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독재와 관련된 시간적 요소와 독재가 기존 헌법 질서의 유지 또는 폐지를 목적으로 했는지 여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17세기의 30년 전쟁(Dreißigjähriger Krieg) 중 소위 독재관이라고 불렸던 발렌슈타인(Wallenstein)의 통치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이를 독재의 사례로 취급해왔다. 하지만 슈미트는 절대적인 통치처럼 보이는 것이 본질적으로 항상 독재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특히 발렌슈타인의 경우에는 1625년과 1631년에 그가 받은 두 가지 명령과 관련된 법적 의미에 주목할 만하다. 슈미트는 두 가지 위임장을 분석하고 그 어느 것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독재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슈미트에 따르면 1625년 신성 로마 제국의 왕실 군대를 지휘하도록 발렌슈타인이 처음 임명된 것은 단지 군사 위원에 불과했다. 이 임무는 전적으로 군사적 성격의 것이었기 때문에 발렌슈타인은 사회 계층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슈미트는 그가 총사령관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163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의해 해임된 발렌슈타인은 이후 1631년 복직했다. 이로써 1634년 살해당할 때까지 지속된 그의 군통수권 2기가 시작되었다. 슈미트에 따르면, 이 두 번째 명령으로 발렌슈타인은 순수 형식적인(absolutissima forma) 최고 지휘권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렌슈타인의 권력 복귀는 신성 로마 제국 왕실 군대의 총사령관 역할로 복귀한 것에 불과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독재자는 현행 법질서를 넘어서는 권한을 가져야 하므로, 발렌슈타인의 명령을 독재라고 부르는 것은 현행 법질서를 다루는 예외적인 상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결론지었다.

위임적 독재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특징으로 한다.
(1) 위임적 독재는 독재자의 임명을 승인 할만큼 상황이 충분히 위협받는 순간에 발생한다.
(2) 독재자는 최고 통치자인 법정권위(pouvoir constitué)에 의해 임명되며, 이 특정 임무가 수행되면 독재자의 임무는 끝난다.
(3) 임명된 독재자는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헌법을 정지하거나 법의 통상적인 범위를 과도하게 침해할 수는 있지만 법령집에서 기존의 법률을 폐지할 수는 없다.

슈미트에 따르면, 임명된 독재자가 헌법을 정지하는 목적은 헌법을 보호하고 위기적 상황이 끝나면 헌법을 복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재자의 임무는 위기적 상황을 제거하고 위협받는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라와 카이사르의 독재는 슈미트가 주권적 독재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새로운 요소를 구현했다. 이와같은 주권적 독재는 현행 헌법이 아니고 장래의 이상적 헌법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 실현하기로 예정한 헌법에 의거하여 행사되는 독재를 말한다. 즉 이 경우에는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의 헌법제정권력(pouvoir constituant) 또는 슈미트의 헌법제정권력(verfassunggebende Gewalt)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독재자는 헌법제정권력을 인민(혹은 국가)의 위임에 의거하여 주권적 독재권으로서 이를 행사한다. 즉 주권자인 인민의 헌법제정권력을 법적 근거로 하여 독재를 실시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의 산옥당(Montagnards) 또는 로베스피에르(Robespiére)의 독재가 이 전형이며, 러시아 혁명에 있어서의 볼셰비키 독재는 주권자인 인민, 즉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장래의 헌법(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을 실현하기 위한 독재로서 주권적 독재에 속한다. 슈미트가 보기에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의 많은 차이점은 전자는 법적 권한에 근거하여 독재자를 임명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 독재자의 임명은 인민의 제공권위(pouvoir constituant)에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헌법적 권한은 1793년부터 1795년까지의 프랑스와 1917년 이후 소련의 경우처럼 주권자인 독재자 본인에 의해서만 인정된다.

주권적 독재의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은 지속될 수 있는 기간현행 헌법 질서와 장래의 이상적 헌법 질서 간의 충돌이다. 슈미트는 정치이론의 관점에서 주권적 독재라는 개념을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특히 마블리(Gabriel Bonnot de Mably)와 시에예스의 철학에서 찾고 있다. 마블리는 1756년 초 혁명 시기에 <인민대표가 모든 국정을 관리하고 행정 권력을 자신의 손에 쥐어야 한다>는 관념을 제창했는데, 마블리 스스로는 여전히 고대 로마의 법적 의미에서의 독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슈미트에 따르면 이는 새로운 해석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독재는 법이 무너지고 부패가 만연할 때 발생한다. 슈미트는 “독재자는 개혁을 옹호하는 위원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기존 국가기관 전체에 비해 무한한 권한을 갖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슈미트가 보기에 혁명의 시기에 인민대표가 행정 권력을 인수해야한다는 마블리의 공식은 개혁 위원으로서의 독재자 개념과 비교한다면,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라는 신종 독재는 더 이상 위임적 독재(즉 위협을 받는 현행 법체계를 보호하기 위한 독재)가 아닌 혁명가의 독재라고밖에 이해될 수 없다. 이로써 보댕이 주권과 독재 사이에 설정한 대립은 해소되었고, 양자의 통일은 전체주의의 기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헌법제정권력의 원천은 제3신분에 관한 시에예스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제3신분은 국가에 속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제3신분이 아닌 사람은 국가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제3신분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부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헌법제정권력은 그가 원하는 어떤 헌법이라도 가질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의지는 모호하다. 예를 들어, 국민들은 기껏해야 그들이 헌법을 가지고 있다는 이런 염원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시에예스는 대표라는 개념을 건드린다. 조직하지 않은 국민의 대표자는 진정한 의미의 위원이며, 그의 임무는 국민의 일반적인 소망을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전혀 조직하지 않는 항상 다른 존재체이다. 그러므로 슈미트에 따르면 국민의 대표자는 위원이며, 그 권력의 근간은 조직되지 않은 인민(제권위)이며, 그들은 끊임없이 국민에게 호소해야 국민이 행동할 수 있다고 한다.

국민공회는 활동에 따르면 주권적 독재의 사례였다. 1792년 9월 20일에 개최된 국민공회는 권위를 확립한 특별한 기관이었다. 이 기관은 헌법 제정에 관한 일을 맡게 되었고, 완성된 초안은 국민에게 제출되었고 국민은 최종적으로 1793년에 이를 승인했다. 헌법이 채택된 후, 국민공회의 임무는 완료되었다. 국민공회의 임무가 완수된 이후에는 더 이상 권한을 행사하는 특별한 기관이 아니게 되었다. 통과에 실패하여 그 임무는 완수되었으나 1793년 10월 10일 국민공회는 전쟁의 위협과 국내 반혁명 활동이 제거될 때까지 해산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당시 헌법은 정지됐지만 폐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헌법은 결코 복원되지 않았다. 핵심 쟁점은 협약이 헌법을 정지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내부 및 외부 위협에 대응하여 국민공회는 1793년 4월 5일에 공안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를 설립하여 이러한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 위원회의 권한은 국민공회에서 파생되었는데, 슈미트에 따르면 국민공회는 1793년 10월 10일 이후 자칭 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권위는 국민공회만이 인정하는 제도적 권위로부터 파생되었다.

20세기 주권적 독재의 예는 레닌, 트로츠키, 라데크가 해석한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의 목표는 경제적 계급이 없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슈미트의 견해에 따르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를 역사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은 계급이라고 믿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적 과정에서 신흥 계급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역사적 과정에서 신흥계급과 쇠퇴계급의 관계에서 전자가 후자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역사적 발전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 이런 행위는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로부터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이 노동계급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명백하다.

슈미트는 주권적 독재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제거할 수 있는 상황을 기존 질서 전체에서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 헌법은 정지는 물론 폐지도 가능하다. 주권적 독재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권적 독재자가 진정한 헌법으로 간주하는 헌법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독재 사이의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범주는 슈미트의 후기 저술 전반에 걸쳐 은밀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의 본질이 실제로 주권적 사례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한 논쟁을 유발시켰다. 주권의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성격에 대한 보댕의 정의가 받아들여진다면, 임명된 독재자는 그의 권력이 헌법상의 권위에서 나오기 때문에 확실히 최고 통치자는 아니다. 주권자는 언제든지 위임을 종료할 수 있다. 임명된 독재자가 자신의 임무 해임을 거부하면 그는 주권적 독재자가 되거나 심지어 최고 통치자가 될 수도 있다. 주권과 독재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주권, 주권적 독재, 위임적 독재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후자의 두 독재는 위임에 의존하는 반면, 주권은 특정 위임에 기초하지 않고 시간의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5.2. 가톨리시즘

어릴 적부터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슈미트는 어릴 적부터 가톨릭 철학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그의 헌법이론의 근저 속에서 가톨릭주의는 그의 철학의 근간의 많은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저서들 속에서는 다양한 신학적 정치학의 바탕이 되는 사상들이 등장하는데, 철학적 첫번째 업적이라 불리는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부터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철학의 허구성과 유악함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메스트르, 루이 보날과 같은 반동적 가톨릭 국가주의 사상[23]을 기초로 하여 교회론적 철학의 바탕으로 드러난다고 여겨진다.
보날은 자신의 기독교적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1793년의 자코뱅주의를 무신론적 철학의 발현으로 봤다. 그는 신에 관한 신학적·철학적 관념과 정치적 사회질서 사이의 유비를 해명했다. 이는 군주제적 원리가 인격신이라는 일신론적 관념에 대응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인 섭리로서의 인격적 군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군주제적-민주적 구성constitution은 초월적 신이라는 이신론적 가정에 순응해야 한다. 1791년의 헌법Constitution이 하나의 예이다. 이것에 따르면, 국가에 있어서 왕은 이신론의 신이 세계에서 그러하듯이 무기력하다. 보날에게 이것은 이신론이 비밀스런 무신론(crypto-atheism)이듯이 비밀스런 반왕실주의(cryptoantiroyalism)이다. 하지만 1793년의 ‘데마고기적 아나키’는 무신론에 열려 있었다. 즉, 신도 없고 왕도 없는 것이다
-<정치적 낭만주의> 중에서-

5.2.1. 가톨릭 대 유대교

1933년부터 1934년 사이에 카를 슈미트는 세 권의 팜플렛 『국가·운동·민족』(1933), 『제2제국의 국가구조와 붕괴』(1934), 『법학적 사고방식의 세 유형』(1934)을 출판한다. 법치 국가를 논의하기 위한 짧은 글이 1935년에 발표되었다. 1935년과 1936년 슈미트는 또 다른 짧은 글에서 유대인 문제를 건드렸다.

슈미트는 1935년 9월 뉘른베르크법(Nürnberger Gesetze)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대인은 독일 국가에 관심이 없으며, 독일인과 유대인 간의 결혼은 출신을 불문하고 이제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슈미트는 점점 더 목소리를 높였다. 법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1) 유대인의 대립성, (2) 유대인의 지적 특성과 이에 수반되는 모호한 학문적 능력, (3) 유대인의 사상과 독일 정신의 관계라는 세 가지 근거를 들어 유대인을 공격했다.

첫 번째 요점과 관련하여, 수 세기 동안 디아스포라(diaspora)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이 게토(Ghetto)에 갇혀 있었으며 낮은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누릴 수 없는 특권을 반복적으로 누렸다는 점과 19세기에 유대인들이 해방되어 대학에 입학하여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공헌을 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기가 바뀌면서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한 직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문제에 대해 슈미트는 <인종정신병학>(Rassenseelenkunde)은 유대인이 자신의 나라와 땅이라고 생각하는 경계 밖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무정부적 허무주의와 실증적 규범주의…감각론적 유물론과 가장 추상적인 도덕주의”와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슈미트가 내린 진단은 가톨릭교회의 반대물의 복합체(complexio oppositorum)와 낭만주의의 딜레마에 대한 그의 담론을 다소 연상시킨다. 분명한 것은 유대인과 가톨릭교회의 주요 차이점은 전자는 전체적으로 어떤 교리도 지지하지 않고 개인으로서만 지지한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낭만주의자나 유대인 모두 근본적인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슈미트의 유대인과 낭만파에 대한 공격을 살펴보면 이러한 공격에서 슈미트 자신의 기질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슈미트가 유대인과 낭만주의자들에게서 싫어했던 특성 중 일부는 슈미트 자신에게도 존재했다. 그는 조직화된 가톨릭교회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를 통해 스스로를 법학자라고 강조하였다. 슈미트가 법률 저술을 통해 주장한 유일한 것은 독일 다원주의의 딜레마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서 일원론적 신념이었다. 바이마르 시대의 다원주의는 자칫 내전으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원심력을 제거하여 독일의 질서와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슈미트의 추앙을 받게 될 것이다. 슈미트는 자신의 충성심을 진리의 소유자인 교회에서 권력의 소유자인 국가로 옮기면서 1914년 자신이 비난했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24]

두 번째 요점인 유대인 학문에 대한 질문에서는 더이상 유대인 저자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유대인의 글은 지능과 인종 사이의 연관성 때문에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점에 대해 슈미트는 “유대인의 지성은 너무 멍청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유대인 학자들은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고 매우 유대인 혐오적인 태도를 취한다. 슈미트는 유대인 저자에 대한 독일인의 표절 관행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여 유대인 작가들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면, 적어도 “유대인으로” 분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슈미트 자신의 새로운 태도는 그에게 높은 수준의 객관성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학문의 수준을 높이려는 그의 노력에서 모호함과 심지어 자기기만이 쉽게 감지될 수 있었다.

세 번째 요점인 유대인 사상과 독일 정신의 관계에 대해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은 우리의 지적 성취물과 기생적이고 계략적이며 상업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유대인은 평소 사물의 진실과 거짓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는데…이는 기생충이자 순수한 ​​사업가로서의 본능 때문이다. 유대인은 독일에서 돈이 어디에 있는지를 빠르게 간파한다…이 원칙을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종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인종이란 무엇인가?”

여기서도 슈미트의 반유대주의는 기독교 교리에 비추어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와 결합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그린 인상은 독일 지식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는 독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독일 내 인구수와 비례하지 않는 지적 공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주장은 명백히 반유대주의적이지만, 위에서 인용한 마지막 문장은 그가 <생물학적 요인>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반유대주의가 전혀 인종주의적 해석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신적 반유대주의>의 배경에서 볼 때, 뉘른베르크법을 준수해야한다는 슈미트의 초기 주장은 이해할 수 있다. 히틀러는 이 법이 준수되지 않으면 나치당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슈미트는 그러한 개입이 가져올 반종교적 결과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러한 개입을 피하고 싶었다.

1933년 이전의 슈미트의 글에는 반유대주의의 흔적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지만, 이 갑작스러운 반유대주의의 폭발은 새로운 모습으로 신학이 부활했음을 나타냈다. 그는 나치당을 인종주의에서 벗어나게 하고 필요한 경우 전통적인 반유대주의 노선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슈미트는 유대인 문제가 당이 아닌 국가의 권한 내에서 다루어지기를 원했다. 그의 초기 담화는 이러한 해석을 확인시켜주었지만, 이후 유대인에 대한 그의 유명한 공격은 그 이상으로 나아갔다.

프란츠 블레이(Franz Blei)와의 사적인 서신은 슈미트의 반유대주의가 본질적으로 인종 차별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블레이로부터 슈미트가 절망 속에서 영감을 얻은 원천이 프랑스의 가톨릭 소설가 레옹 블루아(Léon Bloy)의 저서와 성금요일(Good Friday) 전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블루아가 폭력적인 감정 폭발로 유대인의 사업 기술에 대한 증오를 반복해서 드러냈지만, 그에 따르면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종교적 선조이기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폭력 행위를 거부해야 마땅하다. 블루아의 단언─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온다(Salux ex Judaeis est, Le salut par les Juifs)─은 유대인의 종교적 태도에 대한 그의 가장 적절한 결론을 내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금요일 전례는 가톨릭 신자 개개인이 <배신의 유대인>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과거 기독교인들의 과격한 행동을 불러왔지만, 유대인을 육체적으로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예배의식의 의미이다.

이처럼 드문 재능을 가진 사상가 슈미트가 각계각층의 폭넓은 존경을 받으면서도 반유대주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보통의 시대였다면 그의 발언은 오토 바이닝거(Otto Weininger)[25]와 같은 개종주의자의 발언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유대인들이 처한 환경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1933년 이전의 슈미트의 글에서는 이러한 가혹하고 편협하며 잔인한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런 점에서 슈미트가 새롭게 배운 반유대주의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회주의적이다. 슈미트가 앓고 있는 기회주의는 그가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기연주의(occasionalism)라고 부르며 비난한 것이다. “기회와 우연성이 원칙이 되는 곳이라면 구속력에 대한 커다란 우위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슈미트의 폭발적인 반유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형의 반유대주의는 나치 독일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슈미트의 견해가 <생물학적 인종 해석>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이 나치 당국에 알려지고, <정치적 생물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치 친위대(SS)가 독일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면서 슈미트는 심한 질책을 받게 되었다. 슈미트는 법률연구자대회에서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친위군의 인종해석─즉 한스 프랑크(Hans Frank)의 해석─에 충실한 법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1936년 11월 대회가 끝난 후, 국가사회주의 법학연구자 협회에서의 그의 직위를 사임한다.

5.3. 정치신학

특정하게 정치적인 구분이란 정치적 행동과 동기들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친구와 적의 구분이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은 규범과 정상성을 창출하는 내부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슈미트에 의하면 이것은 국가뿐 아니라, 국가, 정당, 윤리, 종교, 예술 등을 아우르며 그속의 정치적인 것, 요소를 구별짓는 중요한 기초가 된다.[26]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본질인 "정치적인 것"들을 윤리나 경제에 종속시킨다. 개인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이론,정치이론을 만들지 못하고 오로지 개별적인 정책만을 비평할 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가톨릭계 보수주의의 무신론적 해석이다. 구체적으로 정치는 개인의 영역에서 벗어선 일종의 사회규범과 룰의 역할을 하기에 당연히 비개인적이어야하고 개인의 집단인 사회와도 동떨어져 비사회적이어야한다. 중세에는 신이 그 역할을 담당했는데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부당하게 개인의 영역에 집어넣어버렸다. 개념 정의 수준에서 정치의 기본단위는 개인이 될 수 없다.최소단위는 국가이며 이는 정치행위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 개념이어야하기 때문에 당연하다라는 뜻. 이런 관점을 가톨릭적으로 인식하면 가톨릭계 보수정당이 된다. 그리고 이 정당은 지금도 독일의 유력정당으로 남아있다.

5.3.1. 예외상태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정치신학>의 첫문장-
이는 역설을 선호하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진정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통찰은 언제나 밋밋하게 반복을 일삼는 텅 빈 일반화보다 깊은 곳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예외는 정상사태보다 흥미롭다. 정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지만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예외가 규칙을 보증할 뿐 아니라, 규칙은 애당초 예외에 의해서만 존속한다. 예외 속에서 실제 삶의 힘은 되풀이됨으로써 굳어 버린 기계장치의 껍데기를 깨부술 수 있다.
-<정치신학> 1장 중에서, 카를 슈미트-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선언하는 자이다" 로 시작되는 그의 주권론적 통찰은 아주 독특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평이한 증명이 아니라, "예외" 라는 역설을 통한 논리적인 반정립의 반정립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주장해 가기 때문이다.

법실증주의가 제시하는 법 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소멸속에서 입법자의 의무는 단지 정해진대로 법을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정해진 법규범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예외상태(비상사태)" 라면 어떨까?

슈미트에 의하면 이때야 말로 누가 진정한 주권자인지 어떻게 사회적 체계가 조직되어 있는지, 법조문의 존립이 구체적으로 무엇에 근거할 수 있는지. 이러한 "예외상태" 속에서 비로소 주권에 대한 진정한 본질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정상상태는 무엇도 증명하지 않지만 예외는 모든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대통령은 국민의 기본적인 주권을 대의하는 자이고,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그런데 국가에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국가 멸망의 위기가 도래했을 때, 대통령은 계엄이나 각종 비상사태 선포로 국민의 여론을 묵살하면서까지 자신을 뽑아준 국민의 기본권을 합법적으로 제한해버릴 수 있다. 즉 주권을 대의하는 대통령이 진짜 주권자를 제외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며, 합법적으로 법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법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면서 법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이 아닌 대통령이 진짜 주권자라고 봐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생긴다.

5.3.2. 결단주의

여기서 슈미트가 메타법률학의 차원에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이념(ideology)' 이다. 법은 이념이라는 목적을 담고서 그 자체의 '목적성' 을 띄고 있는 것이며, 무언가 다른 것을 이루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의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슈미트에게 법은 그 자체의 지고한 '목적'이지 '수단'이 될 수 없다.[27]

이러한 법 실증주의의 모순은 슈미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그들은 헌법조문을 쓰여진 활자가 튀어나와서 법을 실행한다고 가정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법조문은 사실상 정상상태의 관리의 의미밖에 없으며 그 관리조차도 법조문을 제정하는 자의 "결단"의 권위에 의존한다.

또한 현실의 상황과 법조문과는 당연한 괴리가 있으며 현실은 법전이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예외상태를 발생시킨다. 이때 이 "결단"하는 자는 정상상황을 "결단"한 만큼 "예외상황"도 "결단"할 수 있으며 이 정치행위에 헌법은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다.

이 결단하는 자는 당연히 "주권자"이다. 거꾸로 해도 똑같이 비상상태를 규정하는 자가 "주권자"이며 이는 법 실증주의와는 달리 현행 법조문과 관련하여 주권자가 취하는 행동과 개정[28] 양자 모두에 대하여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핵심이다.

거칠게 줄이자면 소위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한다는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들은 정치적 행위를 규정하지조차 못함을 헤겔인식론을 이용해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들이 정치의 개념조차 규정하지 못하니 이들은 정치의 근원적인 것을 "주관"을 떠나 "객관"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뜻이니 무능한게 아니라 불능하다는 이야기다. 이건 법 실증주의를 까는 이야기다.

영미권 개념에서의 국민주권은 "왕과 귀족은 널 언제나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안 죽이므로 너흰 복종해야 한다"라는 강압적인 권력에 반대하는 맥락으로 주장된 것으로, 권력의 근원은 국민 그 자체라는 측면에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를 슈미트식으로 뒤집어 이야기하면, '민주주의에서 법을 제정하는 국민의 단결된 힘은 법 위에 있다.'는 것이 된다.[29]

이것이 단순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째서 현대민주주의에서는 국민들의 숱한 불만과 불신들을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대의제권력분립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자인 엘리트와 민중들 사이에 거리 두려고 하면서, 반면 민중들의 직접적인 의사와 가치들이 반영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본다면...

현대의 헌법학에서 슈미트의 이런 결단주의적 법학은 켈즌(H. Kelsen)으로 대표되는 법실증주의적 헌법이론, 스멘트(R. Smend)에 의해 주창된 통합론(Integrationslehre)과 등 여러 이론과 함께 교육과정 중에 주요 헌법이론 중 하나로 다루어진다.

여기서 그럼 슈미트가 말하는 결단을 일으키는 주체가 한사람에게 만 있다는 라는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주체자는 구성원을 통합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한명의 사람일 수도, 강한 힘을 지닌 특정한 세력들일 수도, 대다수의 국민들 전체의 단결력에서 생겨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헌법적 제정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규범과 질서를 가르는 필연적인"결단"이 생겨난다는 점이다.[30]
정치이념사 정체를 통틀어 등장하는 고전적 반정립이 이 명제 안에 들어 있다. 바뵈프로부터 바쿠닌, 크로포트킨 그리고 그로스에 이르기까지의 무정부주의적 이론은 모두 하나의 격언, 즉 “인민은 옳고, 정부는 썩었다”(Le peuple est bon et le magistrat corruptible)라는 격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에 대해 드 메스트르는 정반대로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며 그 자체는 선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면 그 자체로 선하다(Tout gouvernement est bon lorsqu'il est etabli). 그 근거는 정부라는 권위의 존재 속에 하나의 결정이 있고, 매우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는 어떻게 결정되는지보다도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데에 있다.

-<정치신학>, 4장 중에서, 카를 슈미트-
그의 결단주의를 드러내는 구절이다.

이 모든 사상은 훗날 나치 독일의 수령론인 지도자 원리에 강한 영향을 준다.

5.4. 정치적인 것의 개념

5.4.1.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해

슈미트는 그의 연구의 근본적인 어려움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자유주의적 사고의 체계성이 오늘날 유럽에서는 다른 어떤 체계에 의해서도 대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옳다면, 슈미트 자신도 그의 견해를 진술함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사고의 요소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부터 슈미트의 이론구성의 잠정적인 성질이 발생하며, 그 자신이 그것을 언명하고 있다. 즉 슈미트는 광범위한 문제에 이론적으로 『틀지우는(encadrieren)』것 만을 의도하고 있으며, 그의 저작의 명제는 객관적인 토론의 출발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슈미트를 비평하려 하는 자는 어디에서 슈미트가 지배적인 자유주의적 견해에 단순히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어느 점에서 지배적인 자유주의적 견해와 구별되는가라는 것에 관해서 더욱 주의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특질>에 대한 1932년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해는 슈미트가 두 번째 판에서 수정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이후 슈미트는 스트라우스가 가 독일을 떠날 수 있도록 하는 장학금 지원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5.5. 헌법이론

5.5.1. 정체성 정치와 공동체이론(동일성 민주주의)

정치 공동체의 공동의 정체성과 차별성을 표시하는 구분이 구체적 상황에서 인민을 서로에 대하여 기꺼이 투쟁할 용의가 있는 적대적인 집단으로 분류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그러한 구분은 정치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고 슈미트는 강조한다. 그 구분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전쟁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정체성과 차이의 분류이고, 그 분류에 입각하여 인민을 적과 동지로 구분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구분으로 인해 한 공동체는 통일된 사회 단위가 되고 정치적 공동체가 된다.[31]

법과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가 창출되는 것도 바로 인민의 동질성을 정하는 이 근본적인 정치적 결정을 통해서이다. 자유주의는 이와 같은 결정을 회피하거나 영원히 미루려는 태도일 뿐이면서도 정치(적과 동지의 격렬한 대립)의 종언이라는 허구적인 기반을 두고 다원주의 국가를 수립하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체성을 둘러싼 정치적 전투에서 승리하려고 꾀하는 당파적 이념에 불과하다. 적과 동지의 구분을 포기하고 정치적인 것의 격렬한 대립을 외면함으로써 자유주의는 정치에서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 본질적 토대를 제거해버린다.

현대 정치학 용어로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ndentity)가 자유주의보다 정치적인 것의 본질에 더 적합하다.

자유주의적 법률주의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정치에서 더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듯이 짐짓 가장하지만, 이와 같은 가식적인 태도는 자기모순이라고 슈미트는 비판한다.

다원주의와 중립성을 내세워서 적과 동지의 구분을 폐기하려는 태도 자체가 이미 적과 동지의 구분을 전제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다원주의와 중립성 테제에 동의하지 않는 진영을 입헌민주주의의 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32]

슈미트에게 국가란 “정치적 통일의 상태”를 뜻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기초는 피통치자와 통치자간의 동일성을 의미한다.[33]

동일성의 원리는 현존하는 인민(Volk)이 정치적 통일체와 자기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정치적 통일체가 구성되는 원리를 말한다. 이 동일상태는 현존하는 인민이 고유한 정치적 자각과 민족적 의지에 의해 적과 동지를 스스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인민이 정치적 자각(적과 동지의 구별)에 의해 스스로를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와 동일시할 수 있는 상태에 상응하는 국가형태, 즉 동일성의 원리를 실현하는 국가가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다.[34]

슈미트에 의하면 이러한 동일성의 기초는 평등(Gleiheit)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등은 동일성을 갖춘 인민들만의 ‘실체적인 평등’을 뜻한다. 그 결과 슈미트에게 국가형태로서의 민주주의란 모든 인민의 실체적 평등,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명령자와 복종자의 동일성”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국가에서는 통치자가 인민과의 동일성 내지 동질성으로부터 빠져나와서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여서는 아니 된다. 민주국가에서 “통치자의 권력과 권위는 동일성에 의해 일반의지를 실현하는 피치자의 의지, 위임과 신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35]

그는 선거권의 확대, 선거연령의 인하, 선거주기의 단축, 의회해산과 같은 일련의 민주적 경향과 제도들 또한 이러한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실현하려는 노력의 산물로 파악한다. 민주적 과정은 다양한 세력들이 인민들간의 통일된 정체감을 만들어내어 동일성을 실현 시키려 하는 과정이다.

이와 같이 슈미트는 민주주의이념에 기초한 국가를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내지 실체적 평등에 기초한 국가형태로 보았고 자신의 이론이 인민의 자기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동질성에 기초한 정체성을 창조할 것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적 이상은 대립하는 것이다. 즉,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부정한다. 따라서 슈미트에게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고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이다[36]
슈미트와 독일 나치와의 연관성에 대한 강조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이 제공하고 있는 풍부한 통찰들을 평가 절하하는 오류를 피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슈미트의 비판과 그가 내린 이론적 결론들 및 정치적 결정들을 분리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서의 갈등과 적대적 성격에 대한 슈미트의 강조는 물론이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모순되고 화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며, 현대 대중민주주의 내지 의회민주주의는 서로 양립 불가능한 두 구성요소 사이의 긴장과 갈등으로 인해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지속 불가능한 기획이라는 슈미트의 주장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들을 보여줌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로부터 슈미트가 선택한 결정, 즉 파시즘적인 독재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결론이 합리적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슈미트의 이론의 긍정성을 변증법적인 방식으로‘지양’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의 것으로 남아 있다.
-나종석 (2009). ‘정치적인 것’의 본질과 카를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 . 헤겔연구, 25, 227- 254.-

5.6. 헌법의 수호자

5.7. 합법성과 정당성

5.8. 참고: 중기사상

참고: 법학적 사고의 세 종류

‘규범주의적 normativistisch’

‘결정주의적 dezisionistisch’

‘제도주의적 institutionalistisch’ : 역사적으로 형성된, 법을 적절하게 기능시키기 위한 ― 그 국가나 지역의 특성에 맞는 ― 제도들을 중시

↳ 중기 슈미트 사상의 개념인 ‘구체적 질서 konkrete Ordnung’
<정치신학> 제2판의 <머리말>에서 슈미트 자신은 ‘규범주의’적 사고와 ‘제도주의’적 사고도 중요하게 본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슈미트는, 서문이 무색하게 해당 저술에서 규범주의적 법적 사고, 특히 법실증주의에 반발하며 ‘결단주의’적 논증을 이어 갔다. 초기 슈미트는 법실증주의와의 대결을 자처하면서 결정주의적(결단주의적)인 관점을 취하게 되는데,

그러나 중기에 이르러 그런 슈미트에 사상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여겨진다. ‘구체적 질서konkrete Ordnung’ 개념이 생겨나면서 제도주의적 관점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 질서’란 한 공간 아래 대지에서 ‘민족’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통상적인 법체계가, 추상적으로 상정하고 있을 뿐인 관념적 철학체계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버크주의와도 비슷한 맥락을 보인다.

이런 슈미트의 '구체적 질서' 등장에 대해서 학자들은 1930년대 나치당이 독일에 집권하며 그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 나치의 민족 생활권이라는 개념과 자신의 사상을 조화시키기 위해 일루어진 것이라 평가하기도 하며 또는 슈미트는 원래 공허한 허무속의 ‘결단’에 관해 말했던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예외상태'와 ‘결단’ 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규범법학과 대비되는 "새로운 법질서를 발견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는 관점으로, 슈미트 철학은 그의 정치적 입장과 별개로 일관된 발전양상을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5.9. 대지의 노모스

5.9.1. 경계선사고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헤겔 인식론의 이해가 필요하다. 헤겔에게 있어 독단적 규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벤다이어 그램을 머리속에 떠올려보자. 예를들어 플라톤의 인식론에선 A라는 개념의 본질은 "이데아"라는 A의 중심점에서 나온다, "정의를 만들고 그 정의에 현실을 적용시켜라." 하지만 개념의 세계와 달리 질료의 세계인 현실은 완벽함이란 있을 수 없다. 현실의 세계에선 완벽한 사각형이란 있을 수 없지만[37] 어째서인지 우리는 사각형을 인식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캔버스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그 중심은 찬란하고 명료하고 그 주변부는 모호하기 이를데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완벽한 신, 그의 불안전한 모사품인 인간, 그리고 세상. 중세를 지배한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근대를 열어젖힌 헤겔에게 있어선 반대다. 그에게 있어 개념이란, 의미의 중심에선 오히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경계선이야말로 뚜렷하며 그 경계선은 커튼처럼 규정과 부정이 중첩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논리학이라 불렀던 헤겔의 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이다.[38] 소논리학이라고 부르던 서적은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서문이다.

창문이 없는 다락공간을 떠올려보자. 이 다락방은 어둡다. 바깥에 비해서 퀴퀴한 곰팡내나는 공간이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지하실에 비하면 밝은 것 아닌가? 어떠한 A라는 개념은 ~A가 아니면 정의할 수 조차 없다. 또다른 예를들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 식이라면 아버지라는 개념은 나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존재다. 이야기 끝, 하지만 헤겔은 깐죽거린다. 다정한 양아버지와 자녀관계를 떠올려보자. 아버지가 아닌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누가봐도 부자관계인데? 한편으로 씨만 뿌리고 도망가서 아들임을 부정하는 아버지를 떠올려보자. 정의에 따르면 그래도 아버지인건 맞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다른 아버지와 다른 행태를 보이는 것 만큼, 아버지가 아니다. 라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닌거 같다. 끊임없이 "예외" 즉 ~A를 찾아내며 깐죽거리고 있다.

따라서 개념은 뭘로 정의해도 예외가 생기며, 우리의 실제세상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헤겔은 또 깐죽거린다. 아버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사람이 있을때나 가능한 것이다. 플라톤이 A의 정의를 세우고나서야 ~A를 논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 헤겔은 거꾸로 A는 존재하지 않는다. ~A가 존재하기 이전에는라고 깐죽댄다. 이게 무슨 말장난이냐? 이라고 화를 내더라도 어쩔 수 없다. 실제 세상이 그러니까, 오직 1명의 성인만 있다면 아기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시점에서 아버지는 인간 성인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일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라는 단어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버버버버지라는 단어가 현재 아무 의미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할 단어일 뿐일 것이다. "아""버""지"라는 음가를 쓰는 단어가 있다한들 다시 말하지만 그 뜻은 "성인"에 지나지 않을 것인데 그러면 성인이라는 단어는 왜 존재할 것이냐? 그것은 성인이 아닌 아기인 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아닌 다른 존재, 예를들어 어머니나 아저씨가 있기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A가 존재하기에 비로소 A가 존재한다. 이것을 헤겔은 부정이 규정에 선행한다. 규정은 부정의 부정이다. "규정의 이중부정성"이라고 부른다. 헤겔 본인이 말한바에 따르면 규정(Bestimmung)은 대립(egensatz)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므로 경계선에 대한 탐구가 곧 그 개념에 대한 탐구다. A와 ~A가 부딫히는 경계선은 칸트의 그것과 달리 헤겔에게 있어서는 개념자체가 유동적이고 ~A에 의해 A는 침습을 당한다. A의 경계선은 2차원적 선이 아닌 두꺼운 커튼처럼 차곡차곡 A와 ~A가 모순되어 있지만 역동적으로 변화하며 중첩되어 있다.[39] 그것이 변증법이다. 그렇기에 A의 중심에선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예외상태가 정상상태의 모든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치신학에서 말한 유명한 인용구인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동지의 구분에서 시작한다." 라는 구문 역시 이러한 인식론을 모르면 완전히 오독하기 쉽다. 흔히 이 단어를 적을 없애고 동지만 남기자는 것이나, 아니면 영원히 갈등하자는 이야기로 잘못해석하고는 한다. 이는 독일 인식론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예를들어, 미국 민주당에서 버니 샌더스오카시오 코르테스는 동지다. 적은 낸시 펠로시조 바이든으로 대표되는 민주당내 온건파이다. 버니와 오카시오가 동지인 까닭은 낸시가 있기 때문이다. 낸시가 사라지면 오카시오와 버니도 더이상 동지가 아니다. 적이다. 둘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적은 사라질 수 없고, 적이 사라질 수 없으니 세상에 단 두명만 남지않는한 동지도 사라질 수 없다. 적을 죽이자거나 동지끼리 뭉치자거나 등등 어덯게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당대 독일의 예를 들자면 괴링힘러가 대립하는건 부정적인 것도 긍정적인 것도 아니라 그냥 당연한 것이다. 이를 해결해주는 것이 히틀러라는 존재인데 하위 지도자인 괴링은 공군과 그 산업체에 대해 히틀러와 똑같은 결단을 내려줄 하부 체계외 주권자다. 괴링은 공군에 속해있지만 동시에 공군의 어떠한 체계도 무시할 수 있다 힘러도 친위대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괴링과 힘러는 적이고 대립은 발생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필요한 것이고 히틀러는 독일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인 것이다. 이게 이상하다거나 바람직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정치라는 것 자체가 당연히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차례로 정치신학 정치적인 것의 개념 결단주의 헌법이론에서도 이러한 헤겔주의적 경계선주의를 관철하고 있다. 그러면 이걸 보다 큰 규모로 국가간의 단계의 정치, 국제법, 지정학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이게 대지의 노모스이다.

독일의 정치신학자인 슈미트는 자신의 저서 『대지의 노모스』에서 자신이 그렇게 부르고자 하는 전세계적인 경계선사고(globales Liniendenken)를 전개한다. 경계선사고란 신세계의 발견과 함께 만들어진, 구세계의 유럽 공법의 국제법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장소확정과 질서의 노모스(Nomos)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분할경계선인) 라야(Raya)와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우호선(amity line)을 통하여 전개된다.

슈미트는 이와 같은 경계선사고를 <신세계>가 발견되기 이전의 전세계적이지 못한 신화적 관념들과 구분하여서 설명한다. 즉 그는 <신세계>의 발견 이전의 국제법은 전세계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한 신화적인 표상들에 머물러 있다고 설명한다. 그가 이와같은 구분을 행하는 것은 아마도, 유럽 공법의 국제법을 여타의 국제법들과 다른 지위에 놓이게 함으로써, 유럽 중심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유지와 확대를 보급하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많은 역사가들은 기원전 14, 15세기 이래의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미탄니(Mitanni) 클라티(Klati)의 파라오와 왕들의 교섭, 동맹, 통상조약, 정략적 통혼, 문서의 교환과 기록체제 등을 국제법적 관계의 원형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 헬레니즘, 유대, 인도, 아랍, 몽고, 비잔틴 등과 그 밖의 권력구성체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 또한 흥미 있는 설명의 대상이 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든 것들은 단지 불완전하고 모호한 의미에 있어서의 국제법이었다. 당시의 모든 것, 특히 전쟁은 조직적인 면에서 볼 때, 당시의 기술적, 경제적 교통 또는 관계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대지를 포괄하지 않으며 전세계적이지 못한 공간상이라는, 아직 과학적으로 측량되지 못한 대지라는 한계와 시야 속에 머물러 있었다>라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16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공법의 국제법은 지도제작과 그리고 지구의제작과 함께 정치적인 가능성을 발견하며, 장소확정과 질서의 결합의 방식으로, 즉 공간질서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서 클링호퍼(Arthur Klinghoffer)의 저서 『지도와 권련』─왜 유럽은 지도 상단에 표시되어 있고 아프리카는 지도 하단에 표시되어 있을까?─은 정치적 관념의 교훈이 풍부한 기록이다. 아무튼,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는 것은 육지의 취득이며, 그로써 생겨나는 노모스(Nomos)이다. 물론 이와 같은 기독교적 유럽의 연장으로서의 현대 국제법은 <이중헤게모니>로서 유지되어온 교황과 황제의 중세 기독교적 공간질서의 세계적 영향력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법사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활발하게 논의되어온 지동설과 천동설, 지평설과 지구설의 내용과 관련되며, 여기서는 따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하여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길 바란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無主의 토지에 대한 발견과 선점의 가능성, 그리고 그로써 생겨난 <국가>의 가능성은 유럽의 모든 생활을 <세속화>하는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는 라야와 우호선의 구분 속에서 명확해지고, 정당화되어지고 있다. 그것은 유럽 내부의 문제점들로부터의 엄청난 면제를 의미하며, 그와 동시에 악명도 높은 <경계선의 저쪽(beyond the line)>이라는 말이 지닌 국제법적 의미이다. 슈미트는 여기에서 홉스의 국가창설에서의 자연상태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다.

추가적으로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한 내용은 아마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우호선에 대한 내용이 그 주를 이루고 있으며, 더욱 자세한 내용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분할경계선인 라야와 1493년 6월 7일의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도록 『대지의 노모스』의 비토리아에 관한 챕터와, 칸트에 관한 챕터를 참조할 것.

5.10. 정치신학II

6. 저서

7. 같이 보기


[1] 뮌헨 상과대학, 그라이프스발트, 본, 베를린 상과대학, 쾰른[2] 카테콘을 무엇으로 보는지에 대한 의견은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교회와 성령이다. 둘은 신성로마제국이다[3] 일반적인 통념과 다른 그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다.[4] 칼 슈미트,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나종석 옮김, 도서출판 길, (2012), 67쪽[5] 대륙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다보니 영미권 철학의 바탕에 서 있지 않으며 그 정치와 역사에 따른 합의와 논의구조를 일체 무시한다. 애초에 세계관과 상식이 달라서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다.[6] 미국의 민주주의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모든 제도와 도덕 윤리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니 역설적으로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권력만을 추구하며 기독교적 윤리에도 어긋나는 악당짓을 반복한다는 의미다.[7] 물론 슈미트는 좌파 가톨릭 신학자에게서 보이는 “로마 가톨리시즘과 마르크스주의적 코뮤니즘의 공존”을 결코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다.(『정전과 내전』,윤인로 역 참고.)[8] 이를 슈미트는 “세계사를 줄곧 움직이고 있는 변증법적 긴장”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헤겔처럼 최종적으로 절대지(知)로 지양되는 대립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는 1955년 12월 1일자 알렉상드르 코제브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헤겔에게 적이란 “단지 부정의 필연적인 이행단계인가, 혹은 무이며 본질을 갖지 않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표하면서, “헤겔에겐 애초에 '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코제브는 1956년 1월 4일자 편지에서 이 물음에 대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라고 답한다. 즉 “승인을 둘러싼 투쟁, 역사가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리고 그런 한에서는 그렇다고 하겠습니다”만, “역사(=승인을 둘러싼 투쟁)가 절대지에 있어 '지양'되고 있는 한에서는, 그리고 그렇게 되자마자 곧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적대는 상호 승인 속에서 지양, 즉 폐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현실에서 승인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있던 적일 따름이므로, 적대는 승인행위 속에서 보존(지양)되고 있기도 합니다. 단, 승화된(지양된) 형태에서 그런 것이지만 말입니다.”[9] (Carl Schmitt's Critique of Liberalism, Cambridge UniversityPress, 1997, 305쪽)[10] (Carl Schmitt zur Einführung, Hamburg 2000, 18쪽)[11] Bernard Faÿ, Civilisation Américaine, Paris, 1939, S. 9.[12] 그리하여 <La Jeune Engenie> 사건 (1822 ; 2 Mason 309, Fed. Cas. Nr. 1551)에서 스토리(Story) 대법관(大法官)은 모든 문명사회에 의해 또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구성하는 사회들에 원칙으로서 보편적으로 승인된 원칙들을 언급하고 있다.[13] 켄트(James Kent)는 그러한 국제법을 그의 『Commentaries on American Law』(1836)에서 다루었다. Henry Wheaton, History of the Law of Nations in Europe and America, New York 1845 참조. 칼보(Carlos Calvo)는 1868년의 그의 유명한 저서에 <Derecho Internacional teórico y práctico de Europa y América>(유럽과 아메리카의 국제법의 이론과 실제)라는 제목을 붙였다. 비안나(Sa Vianna)는 그의 저서 De la non existence d'un droit international américain, Rio de Janeiro, 1912, S. 241.에서 어떠한 아시아국제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아메리카 국제법이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4] 슈미트는 근대의 이원주의, 즉 자연과 인위의 이원주의적 분리를 비판하고, 그러한 이원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슈미트는 이러한 이원주의 속에 프로테스탄트, 프롤레타리아트, 18세기 계몽적 합리주의를 포함시킨다.[15] 미국의 3번째 대통령이자,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다.[16] 미국의 5번째 대통령이며, 먼로 독트린을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17] 슈미트의 광역이론의 핵심은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만 인식할 수 있게 된다.[18] 스페인의 가톨릭 선교사 · 도미니코회 수도자 · 멕시코의 가톨릭 주교[19]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다.[20] 벤담의 제자로 벤담의 아이디어를 제도로서 구체화한 법 실증주의로 유명하다. 본 항목의 슈미트에게 사정없이 까이지만 역설적으로 독일철학에 기초한 영미권철학자의 이단자로도 꼽힌다.[21] 범게르만주의, 대독일주의 항목 참조.[22] 영미권의 법률체계는 관습법이며 정치체제 역시 일종의 문화적 기반을 바탕으로 해야만 굴러갈 수 있다. 제도만 가져와서 독일인들에게 적용시킨 결과과 바이마르의 실패이며, 많은 나라에서 실패해왔다. 특히나 대륙법체계나 구대륙의 식민지 국가에서 이러한 현상이 매우 두드러져 현재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예를들어 아프리카의 쿠데타 벨트는 죄다 대륙법을 채택하는 전-프랑스 식민지들이다.[23] 당시 시민혁명적 가치관들에 반대하여 교황과 절대성과 신의 율법에 기초한 군주국의 지도자의 주권적 계승을 강조한 중유럽 보수주의 계통 부류의 학자들[24] 당시 그는 국가는 역사의 산물이자 시대의 희생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으며, 국가는 지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매우 강력한 교회에 맞설 수 없다는 가톨릭교회 당국의 견해를 공유했다.[25] 오토 바이닝거(Otto Weininger).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유대인 금세공사인 아버지 레오폴트 바이닝거와 유대인 출신인 어머니 아델하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유일한 대표작 『성과 성격』을 발표한 이후 23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바이닝거는 그 책에서 자신이 1902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음을 밝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최근에 한 유대인이 자살했는데, 그가 유대인들은 사람들의 타락 위에서 번영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26] 그러나 슈미트에 의하면 각 분야 별로 자율성을 지니고 있으나 언제나 결정의 최종 심급자는 '국가'에 해당한다고 보고있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 참고[27] 이것은 사실 장 보댕에서 부터 이어지는 유럽 공법학의 개념을 체계화시킨 것이기에 슈미트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28] 법 실증주의하에서도 주권자는 법률위에 존재한다. 다만 법률 역시 내부의 체계성이 존재하기에 그 체계를 개정하려면 전체를 뜯어고치던지, 들어내던지해야한다. 즉 사전/사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을 뜯어고치건 삭제하건 필요가 생기면 해야하며 이런것들을 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29] 이런 헌법제정권력에 대한 논의는 이미 18세기 프랑스 혁명기 시에예스의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전개된 바가 있다.[30] 곧, 이점이 슈미트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이라 할 수 있다.[31] 카를 슈미트, 『합법성과 정당성』, 김도균 옮김, 도서출판 길(2015), 해제 참조[32] 카를 슈미트, 『합법성과 정당성』, 김도균 옮김, 도서출판 길(2015), 해설 참조[33] 성정엽. (2019).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국가 비판. 서울법학, 27(1),[34] 성정엽. (2019).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국가 비판. 서울법학, 27(1),[35] 성정엽. (2019).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국가 비판. 서울법학, 27(1),[36] 성정엽. (2019).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국가 비판. 서울법학, 27(1),[37] 나노 현미경으로 보면 어떤 사각형 물체라도 수백억의 튀어나온 분자가 있을 것이다.[38] 헤겔은 고의로 아리스토텔레스의 Ὄργανον와 같은 이름을 붙히고 자신이 그를 덮어씌울 위대한 저서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39]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떠올를 텐데, 우연이 아니다. 양자역학의 초기논의는 독일인들의 독무대였으며 슈뢰딩거는 이걸 부정적으로 이용했지만, 다른 독일인들은 매우 익숙하고 훌륭한 비유라며 옹호했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독일인들이 아닌 과학자들은 왜 이런 알듯말듯한 비유를 쓰는지 이해를 못한다. 독일인 지식인들은 헤겔 변증법에 이미 익숙해있기 때문에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이게 좋은 비유라고 생각하지만, 영미권 지식인들의 경우 괜한 비유로 더 헷갈리게 하지말라며 일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