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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1:16:07

조제프 드 메스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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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조제프 드 메스트르
Joseph de Maistre
본명 조제프마리 드메스트르[1]
Joseph-Marie de Maistre
출생 1753년 4월 1일
사르데냐 왕국 샹베리
사망 1821년 2월 26일 (향년 67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토리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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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철학자, 작가, 법률가, 외교관
사상 고전적 보수주의, 군주주의
계몽주의, 반자유주의
교권주의, 기독교 인본주의

1. 개요2. 생애3. 사상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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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프랑스계 철학자, 작가, 법률가, 그리고 외교관이었다.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Toute nation a le gouvernement qu'elle mérite)라는 명언으로 유명하다.

2. 생애

프랑스계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나 예수회 교육을 받았다. 1787년부터 1792년까지 사보이아의 상원 의원이었다. 1803년부터 1817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대사였다. 1817년부터 1821년까지 토리노 법원의 장관이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공화정이 설립된 것을 보고 군주정을 옹호했으며, 반계몽주의(Counter-Enlightenment)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군주정이 신성한 제도이자 유일하게 안정된 정부 형태라고 보았기 때문에 부르봉 왕조프랑스 왕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교황이 궁극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스트르는 기독교에 대한 합리주의적인 거부가 프랑스 혁명에 이어진 무질서와 유혈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3. 사상

프랑스에 대한 성찰(1797년 작)에서 메스트르는 이렇게 주장했다. 프랑스는 지상에서 선과 악의 궁극적 도구로서 신성한 사명이 있으나 이를 저버렸다. 프랑스의 군주정, 귀족정, 그리고 앙시앵 레짐은, 프랑스 문명의 영향을 인류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대신에, 18세기 철학자들의 무신론적 사상들을 키워주었다.1789년 혁명은 그 결과이며, 섭리에 의한 사건이다.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의 범죄는 계몽주의 사상의 논리적 귀결이자 계몽주의 사상에 신이 내린 형벌이다.

정치 체제와 다른 인간의 제도들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에 대한 에세이(1809년작)에서 그는 정치체제란 인간의 이성의 산물이 아니며, 신으로부터 비롯하고, 신이 제도들을 천천히 성숙시킨다고 주장했다.

1816년 '죄인의 처벌에 있어서의 신적 정의의 지연에 대하여'라는 플루타르코스의 수고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1819년에는 '교황에 대하여'를 출판했다. 이 책은 정치에 대한 그의 권위주의적인 개념을 가장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메스트르에 따르면, 정부를 이성적 근거로 정당화하려는 어떤 시도도 존재하는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종결되지 않는 논증으로 이어질 뿐이며, 결국에는 폭력과 카오스로 귀결될 뿐이다. 정부의 정당성은 매력적이지만 비이성적인 근거에 기초해야 하고, 신민들의 질문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정치적 권위는 종교에서 비롯해야 하며, 유럽에서 이러한 종교적 권위는 궁극적으로 교황에게 있어야 한다.

메스트르의 글에서 군주제와 종교적 권위에 대한 열정적인 옹호는 새로운 점이 아니다. 결정하는 행위를 하는 개인에게 궁극적인 권위가 실제적으로 필요하다는 논변과 권위의 정당성의 사회적 기초에 대한 분석이 새로운 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왕당파가 되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이전에는 본능이었으나, 오늘날에는 과학이다. 질서를 사랑한다면 군주를 사랑해야 하며, 지성의 모든 힘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권위와 그 정당성의 문제에 대한 메스트르의 분석은 오귀스트 콩트나 앙리 드생시몽과 같은 초기 사회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전통 가톨릭적 반계몽주의 사상은 전통 가톨릭 내 강경파에 의해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4. 평가

자유주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메스트르의 사상을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큰 도전으로 평가한다. 한편 역사철학 에세이인 여우와 고슴도치에서는 메스트르의 사상이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정치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반동의 수사학이라는 책에서 메스트르를 개혁의 제1물결에 맞선 반동의 제1물결의 대표적 사상가로 평가하며, 그의 반자유주의적 수사의 핵심은 '반작용' 레토릭에 있다고 평가했다. 모든 개혁은 그 개혁이 의도하지 않은, 의도한 바와 정반대의 반작용을 낳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앨버트 허시먼은 이에 대해 물론 어떤 개혁은 의도하지 않은 반작용을 낳을 수도 있지만 모든 개혁이 그런 것은 아니며 순기능을 낳는 개혁도 있다는 상식에 근거하여 비판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