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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4:26:42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체르노빌 사고에서 넘어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attachment/radiation.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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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Авария на Чернобыльской АЭС[1]
Чорнобильська катастрофа[2]
Чарнобыльская аварыя[3]
Chernobyl disaster[4]
파일:attachment/e0072368_47996efc607a0.jpg
원자력 사고 요약도[사진설명]
<colbgcolor=#bc002d><colcolor=white> 사고 레벨 7등급 - 대형 사고[6]
사고 일자 1986년 4월 26일 01시 23분 45초(UTC+3)
참사 D[dday(1986-04-26)]일([age(1986-04-26)]년)
사고 유형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사고 지점 소련 우크라이나 SSR 키예프주 프리피야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북위 51° 23′ 23″, 동경 30° 05′ 57″)[7]
누출 방사능 5.3엑사 베크렐[8][9]
영향 프리피야트유령도시화 및 인근 공역의 황폐화
범유럽 지역의 피폭자 발생[10]
4호 원자로 봉쇄 [11]
붉은 숲 형성[12]
소련 붕괴
피폭자 약 22만 ~ 83만여 명[13]
사망자 30명[14] 또는 약 50명[15]
재산 피해 약 7천억 달러[16][17]

1. 개요2. 폭발 사고의 발생
2.1. 배경2.2. 문제점2.3. 대폭발
3. 재앙의 시작, 그리고 진화4. 대피, 그리고 작업 준비5. 체르노빌 전투(Battle of Chernobyl)
5.1. 체르노빌 다이버5.2. 바이오 로봇5.3. '코끼리 발' 문제5.4. 석관의 완성5.5. 이후
6. 책임자들의 처리7. 피해
7.1. 인명피해
7.1.1. 사망자 명단
7.2. 주변 지역의 피해7.3. 주변국의 피해7.4. 동식물들의 피해
7.4.1. 루머
7.5. 소련 붕괴에 미친 영향
8. 사고 이후
8.1. 남은 원자로들의 처분8.2. 관광8.3. 여전히 남아있는 위험8.4. 원자로 처리 방안8.5. RBMK8.6. 다시 시작된 위험8.7. 관련 소식8.8. 사고 등급8.9. 정치적 영향
9. 매체
9.1. 다큐멘터리9.2. 저서9.3. 기타
10.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1986년 4월 26일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예프주[18] 프리피야트[19]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20]에서 발생한 원자력 사고.[21]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원자력 사고[22] 이 사고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본격적으로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에 나서도록 결심한 계기였고 궁극적으로는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평가된다.

2. 폭발 사고의 발생

1986년 4월 26일 모스크바 기준 시각으로 새벽 01시 23분 45초경[23]에 일어났다.

2.1. 배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이날 체르노빌 발전소에서는 부소장 니콜라이 포민이 기획한 특별한 실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실험이 실시된 이유는 원전의 안전 장치 구조가 완비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24] 원래대로라면 설계와 시운전 당시에 완료했어야 하지만 공산권 특유의 "승리적인 조기 달성"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지시한 완공 시간에 맞추고자 이를 누락하고 이미 발전소 완공을 선언하여 관련자(아나톨리 댜틀로프 포함)들은 이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러니 관련자들은 체르노빌 발전소가 이미 상업 운전에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안전성 테스트를 서둘러 완료할 필요가 있었다.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모종의 이유로 원자로 냉각 장치의 전원 공급이 중단될 경우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돌려 냉각수를 순환시키게 된다. 그런데 대형 디젤 엔진 특성상 충분한 출력에 도달하는 데 1분이나 걸렸다. 서방 측 원전도 이런 종류의 문제가 많았다. 디젤 발전이 최고 출력까지 이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위험은 존재한다. 따라서 원자로가 정지했을 때 과연 냉각 펌프를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제때 공급할 수 있는지 불확실했고, 그것을 회전하던 터빈의 잔여 회전에서 발생하는 전기로 그 간극을 메운다는 것이다. 이른바 "런다운 유닛"이라 불리는 메커니즘으로, 4호기 원자로의 안전 계통의 핵심 요소였다. 완공에 맞추기 위해 실험을 건너뛴 이래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전부 실패하여 1986년 초에 이르러 2년이나 미뤄지게 되었고, 마침 4호기 원자로의 첫 번째 정기 유지 보수 일정이 되어 가동 정지를 한 덕분에 현실 조건에서 이 테스트를 해볼 기회가 생겨 부수석 엔지니어 아나톨리 댜틀로프에게 바통이 돌아갔다.

이 실험은 25일 낮 시간대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해 안전장치정지시키고 저출력 상태로 변경했다. 이 때 키예프의 전력 담당자가 낮 시간대 전력 공급 유지를 요구했기에 일시적으로 실험이 지연되어 26일 1시부터 14시까지로 변경되었는데, 그 때까지 계속 저출력 상태로 장시간 안전 장치가 꺼진 채 운전했다. 그리고 이것이 후술하는 원자로의 불안정에 일조하게 된다. 자정까지도 실험이 시작되지 않자 테스트 모니터링을 위해 체르노빌에 와서 대기하고 있던 도네츠크의 전기 엔지니어팀이 당장 실험을 시작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고 돌아가겠다고 압박을 가했고, 여기서 또 미뤄지면 적어도 또 1년은 기다려야 했기에 결국 실험은 강행되었다.

2.2. 문제점

이 때까지는 소련의 기밀주의 및 은폐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운영하는 RBMK 원자로는 구시대 원자력 발전 구조, 그 중에서도 특히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하는 노심의 한계로 인해 자기제어성이 낮다는 문제가 있었고, 이것이 후술하는 대폭발로 치닫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다. 보통 원자로내부출력이 높아져 고열이 발생했을 때 어느 정도 출력이 줄어들도록 고유안전성이라는 개념을 갖추고 있고, 서방에서 사용하는 비등수형 경수로에서는 이 냉각재와 감속재의 역할을 모두 하는 만큼 출력이 높아지면 물이 증기로 바뀌어 중성자와의 반응이 낮아져 자연스럽게 핵분열도 줄어드는 반면 RBMK는 물이 냉각재를 담당하고 흑연은 감속재를 담당하는 원리라 출력이 높아져 증기가 발생해도 핵분열이 계속된다는 게 문제였다. 거기다 안전장치인 AZ-5는 제어봉 끄트머리가 흑연으로 되어 있어서 이를 통해 급속 정지 시스템을 가동시키면 투입된 제어봉 끝의 흑연이 중성자를 흡수하는 물을 흐트려 처음에 반응이 더 증가해버리고 그 뒤 탄화붕소가 들어 있는 부분까지 삽입되어야만 원자로의 반응을 줄이는 효과가 나타난다. 이른바 자동차 페달이 거꾸로 연결되어 브레이크를 밟았더니 엑셀을 밟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 1983년 이그날리아 원전 등을 통해 해당 문제점이 보고되었지만 당시 소련 사회 전반에 만연한 기밀주의 탓에 현장의 기술진들에 이 문제점이 제대로 공유되지 못했고, 순차적으로 소련 전역의 원자로 시스템이 수정되는 가운데 체르노빌 원자로 1호기, 2호기, 3호기도 시스템이 변경되었지만 문제의 4호기는 완공이 너무 가까워 첫 번째 유지 보수를 위해 가동 정지를 할 시점이 될 때까지 수정이 미뤄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런 원자로 자체의 문제점 외에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건물 내구성 자체도 취약한 편이었는데, 통상의 원전과 달리 격납 건물[25]이 없다 보니 강철 상자 안에서 돌려야 할 원자로를 나무 상자에서 돌린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런 발전소가 용인된 것은 플루토늄 생산로를 변형시킨 구조라 설계가 단순했고 저농도 연료로도 고출력 효율을 낼 수 있는 데다 운전 중 연료 교환이 가능해 비교적 적은 돈으로도 많은 에너지 생산이 가능해서였다.

그렇게 된 것은 이 발전소의 소장이자 설립자인 빅토르 브류하노프(1935년 12월 1일 ~ 2021년 10월 13일)가 소련 국영 은행에서 돈을 많이 타다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긴 했는데, 문제는 자재가 부족해서 필요한 자재와 비슷한 물건으로 땜빵을 반복하고 더군다나 결정적으로 격납 건물을 돈은 많은데[26] 자재를 못 구해서 짓지 못했다. 당시 빅토르 브류하노프 발전소장은 발전소를 건설하는 김에 체르노빌프리피야트 두 도시를 같이 지었는데 이런 데다가 계속 도둑들이 들끓어 자꾸 자재를 훔쳐가서 늘상 자재 부족에 시달리는 바람에 격납 건물은 끝내 짓지 못했다.

이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자체의 문제점 외에도 실험의 운용 자체도 문제 투성이였는데, 비록 일정 요소를 제어 하에 두고 있다고는 해도 임의로 비상 사태에 준하게끔 저출력 상태를 만드는 만큼 전문가들과 원전 설계자 등의 인원들을 대동했어야 했는데 발전소장 동의한 채 정식 절차도 거치지 않고 현장의 인원들만 동원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현장의 인원들도 만전을 다한 게 아니었는데 원래는 0시/8시/16시라는 8시간 단위로 발전소를 3교대로 운영하던 새벽조/정오조/저녁조 중 가장 발전소 업무에 숙달한 정오조가 이 실험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상술한 전력 공급 유지 문제로 새벽조가 이 실험을 담당하게 되었다. 원래 새벽조는 붕괴열 관리라는 비교적 간단한 업무만 숙달하고 있었는데 어떤 연습도 없이 일을 떠맡은 격이었고, 현장에서 그나마 숙달한 인물이라 한다면 책임자인 댜틀로프와 4호기 제5 근무조 조장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정도였다. 심지어 원래 실험에서 원자로 운전원을 돕기 위해 자리에 있어야 할 발전소 내 원자력 안전부 소속 물리학자는 실험이 이미 끝났다는 보고를 받고 현장에 아예 오지도 않았고, 그래서 선임 원자로 제어 엔지니어가 된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은 레오니드 톱누토프가 가동 정지 중의 원자로를 조절하게 되었다. 이런 판에 실험을 강행하며 후술하는 각종 무리수까지 뒀다는 것이 댜틀로프가 이 실험을 얼마나 가벼이 여기고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심지어 댜틀로프 그 본인의 컨디션도 좋지 않았던 것이, 무려 이틀 밤을 철야를 하느라 지친 상태였다. 이 실험에서 여러 무리수를 두며 강압적으로 나온 것이 이런 심신 상태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애초에 이 실험 자체가 상부의 승인을 따로 받은 것이 아니었는데, 기획자인 니콜라이 포민은 앞서 3호기 원자로에 이 런다운 유닛 실험을 했을 때도 상부의 승인을 따로 받지 않고 지시해서 이번에도 그렇게 했던 것이다.[27] 그래서 원자력 안전 국가위원회, NIKIET, 쿠르차토프 연구소 중의 주요 기관 어디에도 실험 계획을 알리지 않았고 심지어 발전소장 브류하노프에게도 일정을 보고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원자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할 발전소장 브류하노프는 본래 전공이 전자공학이고 원자력에 대해 완벽한 문외한인 데다가, 체르노빌 완공 후에도 발전소와 프리피야트의 행정 및 계속되는 시설 확충과 제2의 체르노빌 원전을 건설하라는 명령까지 떠맡은 터라 사축 신세로 불철주야 행정 업무만 맡은 터라 원자로 운영 자체에는 참여할 여건도 시간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니콜라이 포민이 원자로 운영을 비롯한 발전소 운영 부분을 맡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문제는 그 포민조차 원래 원자로 부문 기술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임 후 통신 강좌로 핵물리학 지식을 쌓았다고는 하지만 댜틀로프처럼 잔뼈가 굵은 전문가의 역량을 갖추는 것은 무리였으니, 결국 발전소장이란 자는 행정 및 시설 확충에 녹아나는 판에 허술하게 지식을 쌓은 부소장이 실질적인 운영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판에 상부에도 실험 내용을 알리지 않고 실행해 버렸으니, 누구도 사전에 막을 수 없었고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후술하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 원자로의 대폭발은 당시 소련 사회 전반에 걸친 적폐들로부터 비롯된 구식 원자로 자체의 안전성 문제점에 안일한 판단이라는 인재까지 겹친 총체적 난국이 빚어낸 대참사였다.

2.3. 대폭발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가 안전 장치도 없는 구식 소련 원자력 발전소가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체르노빌 원자로에도 안전 장치인 ECCS가 장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험에 이것을 꺼 버리는 절차가 들어가 있었고, 실험을 지도하던 댜틀로프는 이 절차를 따라 ECCS를 모조리 해제하고 실험에 임했다. 사고가 발생한 후 소련 공산당 정권은 실험을 승인하고 이 절차를 용인했던 정권 당국에게서 현장으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자기들은 안전 수칙에 ECCS를 끄지 말라고 되어 있었으나 댜틀로프가 무단으로 꺼 버렸다며 국제 사기극을 벌였고, 이 내용은 1986년 IAEA 산하 기관에서 발행한 보고서(INSAG-1)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하지만 애시당초에 ECCS와 사고는 별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1992년 이 대목을 수정한 내용(INSAG-7)이 발행되었다. 어쨌든 다시 실험을 실시했을 때 안전 장치는 꺼진 상태였다.

본디 실험 조건은 3,200 MW(열 출력 기준) 출력으로 운행 중이던 원자로의 발전 출력을 22%, 700 MW(의도적 정전 사태)까지 낮추는 것이었지만 제어 관리를 맡던 레오니트 톰투노프의 조작 실수로 원자로에 제어봉이 삽입된 직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28] 700 MW로 낮추는 과정에서 출력이 30 MW까지 낮아지면서 원래 예정보다 원자로의 출력이 크게 떨어졌다.

이렇게 출력이 갑자기 떨어지자 원자로 내부의 균형이 깨지고 중성자를 흡수해 버리는 제논-135가 쌓이게 되었다. 제논-135는 원자로 운전 중 우라늄-235의 핵분열로 발생하는 아이오딘-135가 붕괴하면서 생산되는데 중성자를 흡수해서 제논-136이 되든지, 아니면 붕괴해서 세슘-135가 된다. 원자로의 출력이 올라갈수록 아이오딘도 많이 생성되며 시간이 지나면 제논으로 변해서 중성자를 흡수하지만 그만큼 핵분열, 아이오딘 붕괴, 제논 소멸의 순환 과정도 빠르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30MW까지 출력이 떨어졌더라도 아이오딘과 제논의 생산 또한 30 MW로 운전하는 만큼만 나오므로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1,600MW로 출력했을 때 발생한 아이오딘과 제논이 아직 붕괴하기도 전에 30 MW로 출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제논이 중성자를 흡수하는 속도는 30MW 출력 수준으로 느려졌으므로 축적된다.

노심 중단에 축적된 제논-135들이 중성자를 모두 먹어치우면서 핵반응을 일으킬 중성자가 모자라게 되었고, 그래서 출력도 잘 올라가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는 실험을 중지하고 원자로를 정지 시킬 것을 요청했으나 댜틀로프는 출력을 높여 실험을 속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실험자들은 제어봉을 빼내서 출력을 올리기 시작했으나 제논이 쌓인 노심 중단보다 노심 상단과 하단 쪽으로 중성자가 쏠리면서 원자로 반응 분포가 불균형해졌다. 그러나 어떻게든 실험자들은 200MW 정도까지 출력을 끌어올렸고, 이제 댜틀로프는 본디 목표였던 700MW보다는 낮은 출력이지만 200MW에서라도 안정을 시킨 후 실험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변인 통제부터 안 되고 있어 실험으로서는 글러먹었고 유효한 실험 결과로 인정될 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술한 바와 같이 오직 실험 자체를 완주한 기록을 남기는 것만이 필요했던 댜틀로프는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파일:RBMK_Reaktor_ChNPP-4-HQ.gif

1986년 4월 26일 1시 22분 30초(사고 1분 15초 전) 제어 컴퓨터인 SKALA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 반응로에서의 제어봉 위치.

숫자는 반응로 안으로 삽입된 깊이를 나타낸 것이며 cm 단위다.

이때 실험자들은 평소라면 쓰지 않을 급수 펌프까지 가동시켜 노심 압력을 올리고 수동 제어봉을 6개만 남기고 전부 뽑은 상태였다. 규정상 최소 수동 제어봉은 15개였고 15개 내지는 16개에서 RBMK 원자로를 가동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댜틀로프는 실험 매뉴얼을 따라가고 있었던 까닭에 지금 원자로가 어떤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원자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고 있었기 때문에 실험을 중단하고 원자로 강제 중지에 들어가더라도 사고를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1시 23분 04초에 터빈 가동을 멈추면서 실험이 실시되었다. 그 사이 원자로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현재까지 가설만 있을 뿐이지만 4호기의 전기 공급이 줄면서 자연스럽게 냉각 펌프에 공급되는 전기의 양도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냉각수의 유입이 감소하자 원자로 내부가 과열되고 내부 증기압은 상승하면서 RBMK의 설계 결함으로 인해 원자로의 출력이 상승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경수로식 원자로의 경우에는 물(=경수)이 감속재 역할을 한다. 그래서 물이 증발되어 줄어들면 열중성자 수가 줄어들어 자연적으로 출력이 줄어든다. 그런데 흑연을 감속재로 쓰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RBMK 원자로는 물이 냉각재이기 때문에 물이 줄어들면 반대로 출력이 증가해 버린다.[29] 과열된 원자로는 물을 마구 끓게 만들어 수증기로 만드는데, 이것은 물 분자의 밀도를 감소시킨다.[30] 핵분열 반응을 억제해야 할 물의 밀도가 낮아지니 핵분열 반응이 활성화된다. 반응이 활성화되니 온도는 더 올라가고, 온도가 올라가니 물은 더 증발하고, 반응을 더 활성화시키는 악순환에 빠져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 성질을 양의 기포계수(Positive Void Reactivity Coefficient) 혹은 기포에 의한 정반응도계수라고 한다.[31]

그러나 실험이 시작된 23분 04초부터 23분 30초까지 원자로의 출력이 계속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점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정반응도계수 상승이 원자로를 불안정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로는 꼽히고 있으나 원자로의 폭주를 직접 격발한 것은 후술하는 아키모프의 제어봉 삽입(АЗ-5 가동)으로 보인다.

23분 40초, 원전의 선임 연구원인 아키모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32] 원자로의 모든 제어봉을 삽입하여 가동을 즉각 중지시키는 АЗ-5(안전장치)를 가동시켰다. 이 제어봉은 아래쪽에 흑연 감속재가 있고 위쪽에 붕소 흡수재가 있어서 제어봉이 빠진 상태에서는 흑연 감속재가 자리를 차지하고 핵 반응을 활성화시키지만, 제어봉이 삽입되면 흑연은 아래로 밀려가고 그 자리에 붕소가 들어간다. 그런데 체르노빌 사고에서 문제가 된 것은 제어봉 막대가 갑작스레 한 번에 삽입되고 노심 중단에 삽입되어 있던 흑연이 하단으로 내려가면서 아슬아슬하게 출력을 조절하는 흡수재 역할을 하던 물을 밀어내 버렸다.

파일:FIGii-10.jpg

이미 서술했듯 당시 노심 중단의 제논 축적으로 인해 중성자 반응 분포는 물로 가득 찬 하단과 상단으로 쏠린 상태였다. 앞서서 설명했듯 RBMK에서 물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핵분열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그동안 끓어오르면서도 이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АЗ-5의 가동으로 제어봉이 내려오면서 이렇게 흡수재 역할을 하던 물이 하단에서 밀려나고 중단에 있던 감속재인 흑연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 즉 중성자 반응이 비정상적으로 쏠려 있던 노심 하단에 그나마 핵반응을 조절하던 흡수재가 밀려나고, 반대로 핵반응을 활성화시키는 감속재가 들어가자 통제 불능의 중성자 연쇄 반응이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원자로를 꺼 버려야 할 안전 장치가 일시적으로 오히려 중성자 반응을 늘리고 출력을 올려 버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RBMK는 증기 발생이 곧 핵반응으로 이어지는 양의 기포계수를 가진 원자로다. 그러나 연료온도계수 등이 이를 상쇄시키고, 또 평상시에는 제어봉을 조작하기 때문에 전체 계수는 음으로 떨어진다. 이 개념을 '출력계수'라고 한다. 따라서 안전장치의 가동에서 발생하는 일시적인 출력 상승도 마찬가지로 평상시라면 상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실험진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4호기의 정반응도계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작은 충격으로 거대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나 이를 상쇄시킬 요인은 없었고, 가뜩이나 제논 축적으로 인해 중성자 반응이 상단부와 하단부로 불균형적으로 뭉쳐있어 약간의 변화에도 민감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АЗ-5의 가동으로 발생한 찰나의 핵반응 증가는 하단부에 쌓여있던 중성자의 연쇄 반응을 폭발적으로 이끌어내면서 폭주로 이어졌다. 만약 АЗ-5가 발동하기 이전에 제어봉이 적절한 위치에 10여 개만 더 미리 들어가 있었더라면 순간적인 반응 폭주를 제어할 여력이 있었겠지만[33] 제어봉이 6개밖에 삽입되지 않은 상태였므로 억제되지 못하고 안전 장치 발동 3초만에 출력이 200MW에서 530MW로 증가해 버렸다.

그렇다면 밀려난 감속재 자리에 흡수재가 빨리 삽입되어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어야 할 텐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비등 경수로 방식인데 비등 경수로는 가압 경수로 방식에 비해서 제어봉 삽입 시간이 20초 정도로 상당히 길었다. 당시 RBMK 원자로의 최대 제어봉 삽입 속도는 초당 40cm 정도였다. 반대로 가압 경수로 방식일 경우는 2~4초 안으로 가능한데 이는 제어봉 구동 방식에 있어 줄에 매달린 제어봉을 전동식 호이스트로 구동하는 RBMK와 달리 가압 경수로는 전자석 래치로 제어봉을 붙들어 구동하는 차이 때문이다.[34] 설상가상으로 이상 출력의 영향을 받은 연료봉이 파손되기 시작하였고, 삽입되던 제어봉들이 그 파편에 걸려서 2~2.5 미터에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기타 원자로의 경우 비상시 이에 대응하는 시간은 2초 이내라고 한다. 한편 안전 장치가 발동된 후 원자로가 폭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8초 내외이며 당시 마지막으로 기록된 원자로의 출력은 정상 출력의 10배를 초과한 약 33,000MW였다.

이 제어봉의 가동으로부터 정확히 불과 5초 뒤였던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3분 45초, 폭주하는 출력을 버텨내지 못한 체르노빌 원전 4호기는 그대로 천지가 심하게 뒤흔들리는 굉음과 밝은 섬광과 함께 불꽃을 내뿜으면서 폭발하고 말았다.

폭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증기 폭발로 추정하는 것이 통설이며 또 정설이다. 내부의 열이 과도하게 상승하면서 핵연료봉이 파손되고, 달아오른 핵연료와 물이 서로 접촉하면서 한꺼번에 끓어올라 일으킨 증기압이 1차 폭발을 일으켰고, 1차 폭발로 압력용기 상단의 차폐 구조물이 파손되어 열리자 나머지 열이 수증기를 흑연과 반응시켜 수소일산화탄소로 만들어 또 한 번의 2차 대폭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기 중 동위원소 성분과 분포를 토대로 증기 폭발설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대신 핵분열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버티지 못한 연료봉이 파손되어 폭발했다는 핵폭발 모델이 제시되기도 한다.
SKALA[35]가 보내온 마지막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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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4
격리 밸브가 닫혀 있습니다

1:23:11
[AR] 오작동으로 꺼짐

1:23:23
[KND-1]에서 물 주입 압력 감소

1:23:40
[AZ-5 SUZ] EPS[36]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AR2] 측정 부분이 고장났습니다
[P2-1332] 레귤레이터[37]가 АЗ-5에서 켜졌습니다
[P1-1332] 레귤레이터가 АЗ-5에서 켜졌습니다
[AR] 오작동으로 꺼짐
АЗ-5에서 TG[38] 언로드

1:23:43
[AZSR] (기본 범위에서 주기 감소)
[AZM] (기본 범위에서 전력 초과)
2APP-1의 비상 전원 초과
2APP-2의 비상 전원 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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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PP-3의 비상 전원 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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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PP-4가 고장났습니다
1APP-3이 고장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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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APP-2가 고장났습니다
2APP-1이 고장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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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발생)

1:23:47
[AR-2]의 측정 부분이 이상합니다
[AR-1]의 측정 부분이 이상합니다
오른쪽 SD의 압력 초과
왼쪽 SD의 압력 초과
1APR-12가 고장났습니다

1:23:48
АЗ-5에서 TG 언로드
[BRUK-1] 작동

1:23:49
RS의 압력 증가
[1АР]의 실행 부분이 고장났습니다
[2АР]의 실행 부분이 고장났습니다
1[SSh]에 48V 전압이 없습니다
오른쪽 SD의 압력 초과
왼쪽 SD의 압력 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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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PP-1이 고장났습니다
1APR-12가 고장났습니다
2APP-4가 고장났습니다
2APP-3이 고장났습니다

1:24:03
(기록 정지)
볼드 처리가 된 단락은 모두 영상 속에서 경고음이 울린 부분들이다. 위에서 언급된 문제의 AZ-5 안전 장치를 발동시킨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핵심적인 설비들이 파괴되면서 순식간에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원자로의 과부하로 인해 발생한 1차 폭발은 1,000톤 무게의 반응로의 상부 생체 방호벽(Biological shield)[39]을 파괴했고, 2~3초 뒤에 발생한 2차 폭발은 4호 원자로 건물의 상단부를 붕괴시켜 건물의 잔해와 원자로 내부에 있던 흑연 감속재의 파편을 3호기와 기계동을 비롯한 발전소 여러 구획에 흩뿌렸다. 폭발로 생긴 방사성 물질로 가득한 불꽃과 불씨들이 방사선에 의해 이온화 반응을 일으키며 1km 상공까지 치솟았다. 생존한 원전 직원의 목격담에 의하면 폭발이 마치 화산 폭발과 같았으며, 폭발 직후 거대한 푸른 빛줄기가 마치 레이저처럼 하늘로 솟구쳤다고 한다. 심지어 아름다운 광경이라 이를 구경하려고 원자로 근처로 온 주민들도 있었다.[40]

이후 감속재인 흑연이 타면서 화재가 일어남과 동시에 최소 500경 베크렐, 최대 1,200경 베크렐가량의 흉악한 양의 방사능 물질이 사방으로 누출되었다. 노심용융이 일어났다고도 하지만 실제로 노심용융이 발생한 스리마일 섬 사고와 비교하면 너무나 빠른 속도로 출력이 폭주했기 때문에 노심용융보다는 폭발에 의한 영향이 더 크다. 실험 시작 시간인 1시 23분 04초에서 폭발 시간인 1시 23분 45초까지 단 41초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때 누출된 방사능 물질의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리틀 보이400배. 방사성 물질을 대량으로 생성하는 코발트 폭탄과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핵무기보다 이런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방사선은 몰라도 방사성 물질은 더 많이 뿜어낸다. 실제 핵무기가 떨어지면 처음 나오는 낙진만 물로 깨끗이 제거하면 방사능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41] 체르노빌처럼 폭발이 일어나 핵연료 자체가 불타오르면 개방된 노심이 방사성 물질을 뿜어내면서 피해가 커진다.

3. 재앙의 시작, 그리고 진화

폭발 후 최초로 사망한 발레리 호뎀추크[42]를 비롯해 사상자들이 속출하고, 전력 케이블 대다수가 날아가 시설 곳곳이 마비되는 통제 불능의 아비규환이 된 와중에도 아나톨리 댜틀로프와 선임 연구원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는 발 빠르게 대처에 나섰다. 문제는 이들이 이 폭발을 "수소 폭발로 인한 것이지 원자로 자체는 아직 멀쩡하다"고 판단하고 발전소 소장과 부소장에게도 그렇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원자로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한시바삐 화재를 진압하고 수동으로 노심에 제어봉을 삽입하고 냉각수를 공급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대처가 정해졌는데, 이미 4호 원자로 자체가 폭발해 붕괴되고 노심의 잔해가 주변을 나뒹굴어 사방으로 치명적인 방사선이 유출되고 있을 때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원자로에 대한 급수 투입을 위해 인력을 투입시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들을 죽으라고 내보내는 짓이었다.[43] 이 치명적인 오판으로 아직 멀쩡했던 직원들 다수가 당하지 않아도 됐을 피폭을 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후술하는 소방관들의 피폭도 이 오판으로 인한 결과였다. 그나마 댜틀로프가 3호기 원자로 제어실로 뛰어들어가 정지를 요청한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

이러한 지휘자들의 판단 미스를 비롯한 미흡한 초동 조치는 그 때까지 이런 재난에 대비한 메뉴얼 자체가 전무하다는 것도 크게 한 몫 했는데, 여태껏 체르노빌 원전의 운영 인력들도 RBMK가 터질 거라는 상황 자체를 전혀 상정하지 못한 채 그저 AZ-5 버튼만 누르면 비상 정지가 가능할 거란 정도의 대비밖에 없었고 원자력 사고 7레벨이라는 개념도 그 때까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폭발 직후 원전 근무자들은 자기들 직장이 스스로 터졌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하고 미국이 대뜸 선제 공격을 해왔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 때까지 알려진 원자력 사고라고 해봐야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같은 레벨 5 정도였고, 레벨 6의 키시팀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소련 특유의 기밀주의로 냉전 종식 후에야 알려졌을 정도이다. 물론 스리마일-키시팀의 두 원자력 사고는 체르노빌과 상황도 스케일도 격이 달라 알려져 봤자 딱히 참고는 안 됐겠지만. 그런 마당에 난데없이 전대미문의 레벨 7의 사고가 터져 버렸으니 상황의 인지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방사능 누출을 측정할 때 3.6 뢴트겐이 한계인 소형 계측기[44]로 측정해서 3.6 뢴트겐이 나오자 그대로 믿었다가 더 고성능의 계측기로 측정하니 수치가 15,000 뢴트겐 이상의 끔찍한 수준으로 드러나자 경악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수치냐면 발전소 측이 사태 초기에 측정하고 보고한 3.6 뢴트겐의 4,000배를 훨씬 초과하는 수치였다.
앞부분에 나오는 컴퓨터 화면은 폭발 직후 인근 소방소들과 긴급대응본부 간의 통화 기록을 한 유튜버[45]가 자작한 영상과 합성한 것이다.[46]
2019년 HBO 제작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이를 무단으로 사용했다가 뒤늦게 제작자와 합의를 보았다. 원본 링크.
신고를 받고 1차로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었고, 그 다음으로 급히 달려온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소방 소장[47]이 지휘하는 체르노빌 소방대가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전력을 다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그들은 나중에 도착한 키예프 소방여단과 교대할 때까지 방사능 방호복도 없이 사투를 펼쳐 진화 작업에 전력을 다했는데, 그 결과 오전 5시에 대부분의 화재가 진압되었다. 이들 소방관은 화재 진압 후에도 남아 현장 정리 작업까지 했으며 다수가 엄청난 방사선에 노출되어 많은 후유증을 겪었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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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HBO 제작 드라마 체르노빌의 소방관들의 화재 진압 장면. 극적 과장이 들어 있어 현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49]
텔랴트니코프의 소방대는 역부족이었으나 화재 진압과 3호기의 보호에 최선을 다했으며,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3호기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이 공적을 인정 받아 텔랴트니코프는 그의 부하인 블라디미르 프라비크, 빅토르 키베노크와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 받았다.[50]

그러나 사고 직후 방사선에 피폭됐던 직원들과 1차로 파견된 소방대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이 날 동원된 소방관 80여 명 중 50여 명이 병원에 입원하여 2주간 6명이 사망했는데, 사망자 전원이 환기용 굴뚝에 진입한 소대 소속으로 불타오르면서 공중으로 휘날아치는 방사능 물질과 흑연에 노출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회복한 생존자들도 방사능 후유증으로 고생했으며, 실험을 진행했던 새벽조 직원들도 화재가 진압됐을 무렵 제 발로 서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화재 진압에서 사용된 대량의 물이 4호기와 접촉하면서 증기로 변했는데, 이 증기가 내부 물질과 반응하여 가연성 물질을 만들어냈고 26일 21시 41분(당시의 모스크바 기준 시각, 대한민국 표준시 기준으로는 27일 새벽 2시 41분)에 다시금 대폭발을 일으켜 높이 50m의 불기둥이 치솟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의 "원자로는 아직 무사하다"는 판단을 완전히 벗어나는 사태의 심각성이 계속 드러났고, 결국 체르노빌 사태 진압의 지휘권은 우크라이나 SSR에서 소련 중앙정부로 넘어갔다.

내부에서 열을 방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불길이 아니라 분열을 계속하고 있는 핵연료라는 걸 깨달은 소련 당국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대량의 붕소, 돌로마이트, , 진흙, 모래 등을 뿌리면서 화재를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원자로 상공의 방사선이 너무 강해서 원자로 위에 헬리콥터를 멈추게 할 수 없었고, 원자로 상공을 지나가면서 흙을 뿌리도록 해야 했다. 이 와중에 Mi-8 한 기가 노심 상공으로 날아가다 엄청난 양의 방사능을 그대로 직격 당함과 동시에 크레인 케이블에 메인로터가 걸려 날개가 분리되면서 추락했으며[51] 탑승 인원이 전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사고 영상. 공교롭게도 당시 지역 방송사에서 생방송으로 취재하고 있었는데, 이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전국으로 송출되고 말았다.

이 위험천만하고 희생자들까지 나왔던 방법은 다른 추가 대안이 나오기 전인 5월 7일까지 계속되었으나, 흙이 4호기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뿌려지면서 열이 식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바람에 실패했고 헬리콥터도 추가 폭발 위험 때문에 물러나야만 했다.

그나마 4호기와 매우 가까이 붙어있던[52] 3호기의 상태가 무사하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3호기에 있던 액체 질소를 4호기에 주입하면서 최종적으로 5월 9일 원자로 화재 진압에 성공했다. 만약 3호기마저 폭발했다면 더욱 참담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사고 직후 구 소련 정부는 필사적으로 이를 숨기려고 했으나 사고로 인해 발생된 낙진이 1200km 떨어진 스웨덴까지 날아가[53] 스웨덴의 언론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소련 근방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 낙진이 감지됐다."고 밝히자 어쩔 수 없이 소련 당국은 직접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전부터 스웨덴을 비롯한 프랑스, 폴란드 등 유럽권 원자력 발전소를 샅샅이 점검했던 IAEA의 요청을 받은 미국영국군사위성을 동원해서 소련 전역의 원자력 시설을 샅샅이 촬영한 끝에 당시 체르노빌 4호기의 열점(Hot spot)을 발견하여 소련에서 사고가 일어났음을 밝혀낸 후 즉시 IAEA에 정보를 전달했다.

4. 대피, 그리고 작업 준비

당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위치한 도시인 프리피야트에는 발전소 직원과 연구원, 그들의 가족 등을 포함 5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특히 100km 내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가 있었기 때문에 사태는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에서는 사고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고, 인근 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피폭 당했다. 사고 발생 당일 그 방사성 물질이 북쪽 멀리 무려 1,200km나 떨어진 스웨덴까지 날아갔으나[54] 항의를 묵살하는 바람에 이 소문이 전 유럽에 모조리 퍼지고 나서야 소련은 사고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낙진은 전 유럽을 싸그리 다 덮었고, 편서풍을 타고 저 멀리 일본홍콩아시아에까지 낙진이 떨어졌다. 물론 일본·홍콩보다 상대적으로 소련과 가까이 있는 중국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55] 결국 북미/남미/아프리카 같은 지구 반대편이나 남반구를 빼고는 모조리 낙진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56]

사고 첫 날의 방사선 누출량은 그렇게 크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는 사고 초기에 사용된 소형 측정기의 계측값 때문이었다. 측정 가능한 최대값이 굉장히 낮았고, 현장에서 측정된 최대값(초당 1,000 마이크로뢴트겐)을 기반으로 보고되었다. 그런데 정확하게 1,000 마이크로뢴트겐이라는 것은 대단히 어색한 데다 티가 나기 때문에 시간당 3.6 뢴트겐이라는 숫자로 적당히 손질해서 전달했다. 그러나 프리피야트에 파견되어 방사선량을 측정하던 군인들의 책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상승하는 방사선량에 경악했고, 높으신 분들도 이 보고를 받고 경악했다.[57] 이후 레가소프의 지적대로 대형 측정기를 가져와 측정한 결과는 무려 약 15,000 뢴트겐.[58] 그리고 26일 밤에 원자로에서 다시금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가뜩이나 많이 누출된 상태였던 방사성 물질의 누출량이 더욱더 크게 늘었고, 이에 따라 소련 당국도 뒤늦게서야 주민들을 안전 지대로 대피시키기로 결정했다.
프리피야트 전역에 발령된 주민대피령
HBO 체르노빌에서 묘사된 피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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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 말씀 드립니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59][60]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인민 대표 협의회에서, 프리피야트 시가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해 방사선이 누출되고 있음을 알립니다!

과 소비에트 연방, 군대에서는 이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주민 여러분, 특히 어린 아이들의 완전한 안전을 위해 임시적으로 도시 거주자 여러분들을 키예프주(Kiev Oblast)로 대피시킬 예정입니다.

피난을 위해 오늘 4월 27일 오후 2시, 오후 2시에, 각 아파트로 버스가 제공될 예정입니다.

경찰(Militsiya)과 도시 집행위원회(Ispolkom) 인원들이 여러분들을 호위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은 신분증, 생필품들을 준비하시고 첫 끼 식사를 해두실 것을 권장 드립니다.

기업과 공공 기관들의 책임자들은 도시의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도심에 잔류할 핵심 인력을 지정했습니다.

대피 과정에서 모든 아파트들은 경찰에 의해 보호 받을 예정입니다.

동지 여러분! 피난을 떠나기 전에 잊지 마십시오!

집 안의 모든 창문들을 닫으시고, 전기를 차단 시키시고, 가스레인지와 수도꼭지를 꼭 잠궈주십시오.

피난을 떠날 때에는 침착함을 유지하시고, 질서정연하게 피난에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태가 워낙 심각했던 까닭에 군부대와 경찰, 소방관 등 수십 만의 인력이 인근으로 투입되어 사람들을 긴급 대피시켰다. 처음에는 프리피야트와 체르노빌, 그 인근 지역 주민들만 피난시켰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험 지역이 점차 확대되었기 때문에 4월 30일부터 추가적인 소개 작업이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발전소 주변 30km 이내의 주민 전부가 철수했으며, 방사성 물질이 대량으로 뿌려진 지역으로부터의 탈출이 종료된 것은 8월이었다.

당시 원자력 발전소의 힘으로 아주 번창하던 도시였던 프리피야트[61]는 이 사고로 인해 5만 명이나 되는 거주민들이 도시를 하루 아침에 전부 떠나야 했다. 현재 가장 유명한 유령도시로 알려져 있는 이 도시는 오랫동안 인류의 관리를 받지 않아 온갖 잡초가 도로와 건물을 타고 자라났고, 금속은 녹슬고, 콘크리트는 부식되면서 현재의 기괴하고 섬뜩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방사능에 피폭 받았던 동물들이 대를 이어 가면서 영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소련 당국은 제염 작업을 위해 전국의 방사선 방호복을 긁어모았지만, 방사선 방호복은 비싼 데다 만들기도 어려워 인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일부 복구 인력만 입을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던 소련 당국은 어쩔 수 없이 화생방 보호의나 우의에 납을 기워 만든 임시 방호복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추가로 소련 당국은 아이오딘 131[62]에 대한 방호를 위해 인부들에게 아이오딘이 첨가된 보드카를 다량 지급했다. 이러한 조치는 갑상선 부위에 아이오딘을 과포화시켜 갑상선이 방사성 아이오딘에 오염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에 분명히 효과가 있었지만, 아이오딘 외의 다른 방사성 물질은 막을 수 없었다.[63] 그리고 이 보드카를 지급했다는 소식이 소련 전역에 보도되면서 알코올이 방사능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는 소문으로 와전되었고, 방사능 피폭을 예방한답시고 술을 진탕 마시다가 방사선 중독 대신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나가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수습을 위해 골머리를 짜내다가 토의 끝에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지역은 모조리 부숴서 평평하게 한 다음 콘크리트로 2m 이상 덮어 버리고 오염된 원자로는 초대형 금속 커버를 씌워 버린 뒤10년쯤 지나면 해결 방법이 나오겠지?"였다. 즉, 지금의 기술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일단 뚜껑을 덮어서 봉인해 놓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우 5년 8개월만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다른 나라로 쪼개져 버렸고, 이 계획은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파기되었다. 뭐 그래봤자 소련이 여전히 건재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고 발생 후 [age(1986-04-2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폐연료를 처리할 기술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5. 체르노빌 전투(Battle of Chernobyl)[64]

독재 체제에서만 가능한 무제한적인 인력 동원과 조치들이 이런 비상 상황에는 효력을 발휘했다. 소련 휘하의 모든 공화국에서 인구 비례로 인원을 할당하여 소련 전체에서 총 60만 명의 인력(주로 예비군)을 징집했다. 소련 정부는 엄청난 인원을 축차투입하는 방식으로 각자의 피폭 부담을 줄여 체르노빌 노동 인력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0.5 Sv 이하의 방사선에 사람이 피폭되면 즉각적인 증상은 거의 없으면서 약간의 백혈병 위험만 생기는 정도로 약하게 피해를 입기 때문에[65] 이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체르노빌 청산 작업 전체를 연구한 전문가의 의견에 의하면 "현명한 조치였으며 약간의 백혈병 위험은 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은 수준"이라고 한다. 총 지휘는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타라카노프(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Тараканов, Nikolai Dmitrievich Tarakanov) 소장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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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체르노빌이 폭발 사고로 황폐화된 지 8일이 지난 뒤
노동자들이 핵발전소의 파괴된 원자로에서 자신들을 밖으로 실어 나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

5.1. 체르노빌 다이버

현장에 도착한 기술진이 제일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사고 첫 날 화재 진압을 위해 뿌린 물이었다. 기술진 일부에서 사고 직후 녹아내리는 노심과 방사성 물질이 원전 지하에 고인 냉각수 및 소화수와 만날 경우 수천 도의 고열의 물이 한순간에 증발하며 증기 폭발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측이 제기되었다. 이 예측이 현실화될 경우 주변 원자로 3기까지 훼손시킬 것이고, 결국 광범위한 오염이 일어나 수습이고 뭐고 없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었다.

현장을 지휘하던 쿠르차토프 연구소 부소장 발레리 레가소프는 예브게니 벨리호프[66]를 이 주장의 근원지로 지목하면서 "영화를 너무 많이 본 사람"이라고 무시했지만, 벨리호프는 국방부 등 정치적 연줄이 있는 인물로 고르바초프와 직통으로 전화로 보고할 수 있는 거물이었고 당국 입장에서도 이미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된 사태를 당장 눈 앞에 두고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둘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고 5일째 되는 날, 발레리 레가소프의 명령에 의해 펌프 기사 알렉세이 아나넨코(Олексій М. Ананенко, Alexei Ananenko, 1959년생. 당시 27세), 발레리 베스파로프(Валерій О. Беспалов, Valeri Bezpalov, 1957년생. 당시 29세), 보리스 바라노프(Борис О. Баранов, Boris Baranov, 1940년생~2005년 사망. 당시 46세)가 지하수로 흘러들어가는 방사능을 막기 위해 램프를 들고 직접 지하의 방사능에 오염된 물(냉각수) 속으로 들어가 펌프를 가동 시켜 지하수를 보호했다. 문제의 노심 바로 밑이기도 해서 얼마나 많은 방사선이 들어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오염수가 얼마나 들어찼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대단히 위험한 임무였다. 최악의 경우 희생자들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될 지도 모르는 임무였지만 세 사람은 이 일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하겠노라고 했다.[67] 이들은 후일 언론에 의해 체르노빌 다이버로 불렸다.[68]

이들이 스페츠나츠 출신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사능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니지만 3명 모두 순수한 엔지니어였으며, 가장 연장자였던 바라노프가 2005년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뿐 나머지 2명인 아나넨코, 베스파로프는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69] 체르노빌 다이버라는 별칭은 당시 동구권 언론에 의해 '지하에 가득 찬 방사능 오염수 속으로 목숨 걸고 들어갔다' 정도로만 알려지는 바람에 붙은 별명이었고, 2010년대 초반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2006년에 방영된 BBC 다큐에서 선보인 재연조차 두꺼운 잠수복을 입고 어둡고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일 정도였다. 제대로 된 이야기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2010년대 중반에 와서였다. 당사자들은 제대로 검증된 정보도 없이 이러한 별명을 퍼뜨려 그렇게 불려진 것을 탐탁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무에 참여했던 아나넨코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3명은 3m 깊이의 발전소 지하에 들어가서 4GТ21(4ГТ-21)과 4GТ22(4ГТ-22)라는 이름의 밸브 2개를 열어야 했고, 그것을 위해서 방사성 물이 들어찬 001번 복도를 지나가야 했다. 그들은 가슴과 발목 언저리에 X선 측정기를 착용하고 밸브의 핸들이 폭발로 날아갔을 것을 대비해 가스 압력식 열쇠도 준비하여[70] 지하로 내려갔다. 바닥에 깔린 큰 직경의 파이프를 따라가서 밸브를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폭발로 밸브 명판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예상했지만, 다행히 밸브에 명판이 남아 있어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고 들어갔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방사선량도 생각보다 낮았고 물도 무릎 정도까지 밖에 올라오지 않았다고 한다.[71]

물론 결과론적일 뿐이지 상황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목숨을 걸었고, 매우 위험한 일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대중적으로 연상되는 고방사선 구간이 없진 않았는데, 그 구간에 진입하던 중 앞서가던 바라노프가 전방에 들이밀던 측정기에서 범위를 넘어서는 값이 나타나자 일행 모두 그 지역을 전력질주해서 통과하였다고 한다. 도중에 호기심을 못 이기고 뒤를 돌아보니 위쪽에 있을 중앙 홀로 연결된 구멍을 통해 지하 바닥으로 흘러내린 검은색의 거대한 원뿔 형태를 이루고 있던 무언가가 보였고, 그와 동시에 당시 대량의 방사선 피폭자들이 증언하던 금속 맛이 입 안에서 느껴졌다고 했다. 이것은 후술할 코끼리이라 불리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원자로의 잔해와 콘크리트 잔해가 섞여서 마그마처럼 흘러내린 혼합물이었다.

이들 3명의 헌신적인 사고 수습 활약에 대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8년 4월 25일에 3급 용맹훈장을 수여하였다. # 이어 드라마 체르노빌을 통해 이들의 활약이 재조명되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상훈의 격을 높여 2019년 6월 27일우크라이나 영웅 칭호와 함께 우크라이나 최고의 훈장인 금성훈장을 수여하였다. #

이들 전원은 다행히 임무 수행 후에도 살아남았지만 이 외에도 수많은 소련의 군인들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몸 바쳐 체르노빌에서의 오염을 막으려다가 희생됐다. 이들은 인민을 살렸고 소련을 살렸으며 동유럽을 살렸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나라로 분리되긴 했지만 이 후폭풍이 유럽에서 지금도 심각한 문제인 걸 보면 이들은 소련뿐 아니라 가히 유럽 전역을 살린 셈이다.

5.2. 바이오 로봇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로봇이 투입되었다.
미국제 로봇은 7분 정도 작동하다가 원자로에서 방출되는 강한 방사선에 의해 회로가 타서 멈추었다.
일본제 로봇은 9분 동안 작동하다가 멈추었다.
그런데 소련제 로봇은 1시간째 작동 중이다. 사고 현장에 취재를 위해 온 기자들이 소련제 로봇의 성능에 감탄하고 있을 때, 확성기가 울려퍼졌다.
"이바노프 이병! 이제 쉬는 시간이니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오시오."
- 당시 상황을 빗댄 공산주의 유머 -
파일:attachment/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bio-robots-chernobyl-500x330.jpg

당시 체르노빌의 참상을 취재하던 사진 기자인 이고리 코스틴이 찍은 체르노빌 원전을 청소하는 '바이오 로봇'들의 사진.[72]

소련군이 폭심지 주변을 헬기로 찍은 화면에서는 아직도 방사성 물질이 고농도로 나오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대해 엔지니어들은 서로 논의하여 거대한 석관을 씌워 원자로의 지붕을 덮어버리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 작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발전소 지붕을 조금이나마 깨끗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붕은 폭발 당시 흩어져 날아가거나 쌓인 흑연 감속재 조각으로 뒤덮여 있었고, 이 흑연들은 한 조각마다 시간당 몇 시버트씩의 방사능을 내뿜고 있었다. 인간은 투입되는 즉시 즉사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무인 달 탐사 차량 루노호트를 만들었던 기술자들을 불러와 로봇을 제작해서 투입하였다. 거창한 물건은 아니고 원격 조종 불도저 같은 간단한 것으로, 조각을 지붕 아래로 밀어서 떨어뜨렸다. 은 우주 방사선이 강력하게 내리쬐는 환경이므로 달 탐사 로봇이라면 원자로의 방사능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로봇들로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된 파편들을 지붕 아래로 떨어트려 지붕의 방사능을 사람이 억지로 투입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낮출 수는 있었으나 이들은 배터리 작동 시간에 크게 문제가 있어 이들만으로 방사능에 오염된 파편들을 모두 처리할 수는 없었다. #[73]

파일:attachment/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LiqPrepR3.jpg

작업을 마냥 미룰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자원자와 발전소 인부들을 포함한 약 3,500명 정도의 인력을 투입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로봇을 대신해 폭심지에 투입된 이들은 바이오 로봇으로 불렸다. 그러나 문제는 방사선 보호의가 몇 벌 없었다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그 많은 인원에게 방사선 보호의를 전부 줄 수는 없었고 가격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즉시 우의에 납 판때기를 끼워서 만든 조잡한 화생방보호의가 만들어졌으나 이것마저도 몇 벌 없었던 까닭에 작업 인원들이 돌아가면서 입어야 했다.[74] 하지만 아무리 고성능의 방사능 보호의가 있어도 그 보호의를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일정 시간 동안 방사능에 노출되었을 때는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그런데 사태의 심각성이 너무나도 크다 보니 현실은 달랐다. 사실 3500명의 인원들에게 모두 지급할 만큼 넉넉한 수량의 방사능 보호의가 있었다고 해도 방사능 지대에 오래 노출될수록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 또한 커지다 보니 그럼에도 인원들을 그룹으로 쪼개서 교대 투입을 시켜야 했을 것이다. 즉, 단순히 방사능 보호의가 부족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근무자들을 그룹으로 나누어서 교대 투입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한 이유는 발전소 지붕의 방사선 수치가 너무 위험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시간당 최대 70 시버트로 계산했으나 오늘날에는 시간당 최대 120 시버트는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마디로 입자 단위의 무수한 총알들이 계속 발사되는 발판 위에서 작업한 것이나 다름없다. 올라가 잠깐 작업한 뒤 되돌아와 쉬어야 했는데 보통 작업 시간이 2분을 넘어가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으며, 방사선 수치가 강할 경우 작업 시간은 불과 40초로 제한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방사선에 노출된 시간은 40초보다 길었다. 작업 인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40초 내에 모든 일을 끝내고 돌아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발전소 지붕에 올라간 건 한 번이 아니니 그 피폭량은 목숨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삽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때때로 큰 흑연 덩어리는 한두 사람이 손으로 들어서 옮기기도 했는데, 시간당 15 시버트를 내뿜는 오염물을 단 한 번 그렇게 옮긴 것만으로도 복귀 후에 통증을 느끼며 한동안 주먹을 쥘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8명이 뛰어들어가 방사능에 오염된 파편을 삽으로 퍼내서 지붕 아래로 떨어뜨리는 작업을 2번 하고 다시 뛰어나와 재빨리 옷을 벗으면 그걸로 다음 조가 갈아입고 또 다시 뛰어들어가는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이 위대한 자기 희생의 모습을 찍으려고 같이 현장으로 들어간 이고리 코스틴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방사선 때문에 카메라 필름이 타 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3500명이 열흘을 밤을 새며 작업한 뒤에야 겨우 33% 정도의 방사능이 줄어들었고 석관 작업이 진행되었다. 소련 정부에 의하면 지붕 작업자들의 피폭은 수백 밀리시버트 정도로 통제되었다고는 하는데[75] 당사자들은 "그것은 축소된 수치이며, 실제로는 몇 배나 많이 피폭되었다"고 주장했다. "지붕에서 복귀한 후 코피를 쏟으면 병원으로 실려갔고, 몸을 가누지 못하면 집으로 보내졌다."는 증언 등을 볼 때 많은 이들이 급성 피폭의 증상을 보였을 정도로 전반적인 피폭량은 매우 높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40초 이내에 모든 작업을 끝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흑연 조각을 포함하여 현장의 파편 중 가장 방사성이 심각했던 약 10% 가량은 로봇들이, 나머지 90%는 이 '바이오 로봇'들이 치웠다. 이들은 평균 250 밀리시버트를 피폭 당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방사선과 싸운 대가로 증명서 하나와 100루블을 받았다. 당시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1달 봉급이 200루블 수준이었는데 목숨을 담보로 한 작업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적은 금액이었다.

이때 작업에 참여했던 인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쪽에서 일하자마자 입 안에서 시큼하고 아주 신 금속, 즉 맛이 났다"고 하는데 저때 이후 그 납 맛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것은 방사능의 맛 또는 방호복 때문이 아니라 방사능 피폭 증상 중 하나다. 방사선으로 인해 혀의 미뢰가 교란되어서 맛을 느끼는 것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폭격기 승무원들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HBO의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묘사된 바이오 로봇들의 작업 과정.[76]
근거리 실제 기록 영상
당시 지붕 상황 촬영 영상 풀버전

5.3. '코끼리 발' 문제

파일:1934_8562ae5e286544710b2e7ebe9858833b.jpg
방사성 연료가 녹아서 2m의 차폐벽을 뚫고 나와 쌓인 모습.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선을 뿜어내고 있었으며 그 모양 때문에 '코끼리'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고 10년 후인 1996년에 찍힌 사진으로, 이때는 반감기로 인해 방사선이 줄어들어 사진을 찍는 게 가능했다. 그나마도 복도 구석에 있던 거울로 반사[77]해서 사진을 찍은 것이고, 바퀴 달린 카메라는 방사선에 의해 고장 나서 찍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거울을 이용해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78]
파일:Chernobyl_Elephant's_Foot.jpg
똑같이 1996년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지하로 내려가서 찍은 사진.[79][80] 다른 사진(3번째)도 있는데 그게 그나마 잔상이 안 나왔다.
파일:chernobyl_elephant's_foot_1990.jpg
사고 발생 불과 4년 후인 1990년에 찍힌 코끼리 발의 사진. 위 두 사진에 비해서 잘 쓰이지 않는 사진이다.[81]
Слонова нога(Slonova noha)/Elephant's Foot

2001년에 실제로 내려가서 코끼리 발을 찍은 영상. 영상 내내 가이거 계수기가 계속 삐삐삐삐삐 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 15년이 지나서 사고 당시에는 시간당 약 10,000뢴트겐, 즉 93.3 Sv를 뿜어내던 코끼리 발[82]이 많이 진정돼서 시간당 800 뢴트겐으로 줄었다. 물론 800 뢴트겐도 8시버트의 매우 높은 수치다.

2011년 영상.

1986년 12월에 사고가 난 원자로에서 남동쪽으로 15m, 지상에서 6m 밑에 있는 217/2호실 복도에서 이 원자로 잔해와 콘크리트 잔해가 섞여서 마그마처럼 흘러내린 혼합물인 코륨(corium)이 발견되었다.

직경은 2m 정도이고 무게는 수 톤으로 추정된다.

한편 위쪽을 덮는 것뿐만 아니라 아래쪽을 차단하는 것도 문제였다. 용융된 핵연료 마그마들이 점점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아래쪽으로 핵연료가 누출될 경우 대수층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러면 서부 러시아의 전체 식수원인 드네프르강, 그리고 그 드네프르강과 연결된 흑해가 오염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방사선이 그나마 약한 지하 쪽으로 땅굴을 파들어간 다음 발전소 아래에 액체 질소를 사용한 냉각기를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소련 전역에서 약 400여 명의 광부들이 소집되었다.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열기 안에서 광부들은 1달 만에 작업을 완료했는데 통상의 3분의 1로 단축된 것이었다. 이 때 지반이 매우 좁고 더워서 방호복을 입을 수 없었고 토양도 방사능에 오염된 상태였기 때문에 광부들도 다량의 방사능에 피폭되었다. 이로 인해 최소 100명 이상의 광부가 40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지하는 방사선 수치가 그렇게 높지 않았지만 터널 입구가 발전소 근처에 있었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한 끝에 발전소 아래에 공간을 마련했더니 정작 냉각기 완성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겼다. 결국 액체 질소 냉각기는 무산되었고 그 자리를 콘크리트로 채웠다.

그러나 광부들의 이 작업은 결과적으로 불필요했다고 한다. 당시 지휘부는 녹아내린 노심이 땅을 뚫고 내려가 지하수까지 도달해 흑해에서 키예프까지의 모든 식수원이 오염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광부들을 동원해 그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지하의 불순물이 계속해서 노심에 섞여 핵분열을 중단시켰고 덕분에 노심이 지하수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지휘부도 최악의 결과가 일어날 확률이 약 50%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50%의 확률에만 기대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작업을 강행했다. 때문에 이를 보고 광부들의 희생을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결과론적인 해석임에도 당시에는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었다는 씁쓸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묘사된 것 처럼 광부들을 소집할 때는 당시 소련 석탄산업부 장관인 미하일 이바노비치 샤도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Щадов)가 직접 현장을 방문해서 광부들을 설득해 소집했다. 다만 드라마에선 각색된 부분이 있는데, 드라마에선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젊은 책상물림 관료처럼 나오지만, 실제 샤도프 장관은 당시 60이 다된 장년(1927년생)이었고,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현장 경험이 많은 인사였다.

조사를 위해 코끼리 발의 샘플을 채취했다. 원격 조종 트롤리에 달린 드릴로 채취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AK 소총으로 쏴버리고 탄환으로 쪼개진 파편을 채취하였다. 참 소련답다면 소련다운 방식.

조사 결과 이 노심용융물이산화 규소와 부위에 따라 0.2~18%우라늄, 티타늄, 지르코늄, 마그네슘, 흑연으로 이뤄져 있고 용해 온도는 약 1200°C[83]라는 게 밝혀졌다.

1998년 6월 외부가 먼지로 변해 점점 깨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2018년 사진에서는 코끼리 발 위에 검은색 사문석이나 유리 같은 게 많아져 있다. 2021년에는 모래와 비슷한 농도가 되었다.

절대로 검색해서는 안 될 검색어象の足(코끼리의 발)이라는 이름으로 위험도 1로 등재되었다. 위험도 1이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라는 뜻. 위험도가 1이고 사진 자체가 심각한 혐짤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무서운 짤은 아니지만 코끼리의 발 자체가 만들어진 계기가 위험하고, 선술한 아르투르 코르네예프가 있는 사진의 빛 줄기와 방사능으로 필름이 손상되어 잔상처럼 찍힌 게 사람에 따라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2022년에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에서 이것과 비슷한 게 발견되었다.

5.4. 석관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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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전을 완전히 뒤덮을 석관의 부품은 소련 각지에서 제작되어 운반되었고, 이 부품은 현장에 투입된 인원들이 조립했다. 현장에서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은 이유는 발전소 주변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었고 이런 곳에서 오래 작업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립은 1986년 10월에 완료되었으며 현장의 소련군은 방사능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

다만 이것은 단지 첫 번째 전투의 종결일 뿐이었으며, 이후에도 사후 작업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석관 위에 다시 더 큰 석관을 씌우는 프로젝트 역시 진행되고 있는데 우크라이나 단독으로는 도저히 무리라 각국의 모금을 걷어 2016년에 진행하였다.

5.5. 이후


새로운 석관이 완성된 후 핵연료를 끌어내 폐기할 때까지 위협은 계속될 것이다.

파일:attachment/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Example.jpg

위 메달(Медаль "участнику ликвидации последствий аварии на ЧАЭС")은 저 생지옥에서 목숨을 걸고 희생한 사람들에게 수여한 것이다. 메달에 새겨진 알파, 베타, 감마는 방사선의 종류인 알파선, 베타선, 감마선을 나타낸 것이다.[85]

1991년에 이 메달과 인증서를 저 생지옥에서 고생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며, 그 사람들이 받은 이 훈장을 그들의 자식들이나 홀로 살아남은 배우자들이 팔고 다녔다고 한다. 메달을 나눠주었을 때가 소련 붕괴 직전이었는데 소련 붕괴 직후 소련과 구 소련권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큰 혼란에 처했다.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빠지고 복지 혜택 같은 것도 별 볼 일 없어져 고생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안정적인 삶을 누릴 환경이 못 되었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명예로운 메달이 되어야 했을 텐데 혼란 때문에 값어치가 떨어져서 말 그대로 떨이 수준의 값어치를 지니게 되었다.

21세기에도 저 메달들을 이베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메달 단품의 가격은 약 20~30달러 정도. 싼것은 15달러선 까지도 있다. 목숨을 걸고 한 일에 비하면 기가 찰 가격이다. 사실 소련 메달들은 레플리카가 아니라 진품조차도 전승훈장 같은 귀한 훈장들을 제외하면 거의 이 수준인데, 워낙 수훈자도 많기도 하고 소련 붕괴 이후 수훈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관광객들에게 뭉텅이로 내다 팔아서 철십자 훈장 같은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헐값에 팔리곤 한다. 가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인증서가 세트로 구성된 상품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창고에 있던 미수여 메달이 경매로 올라오는 것으로 추측된다. 물량이 많은지 한국에도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이며, 당근에서 거래되기도 한다. 덕분에 훈장 수집에서 입문용으로 많이 추천된다.

6. 책임자들의 처리

문제의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사고 당일 즉사하거나 극심한 피폭으로 며칠에서 몇 주 사이에 사망했으며, 발전소 직원들 상당수도 그 뒤를 따랐다.

반면 발전소장 빅토르 브류하노프(Виктор Брюханов)와 실험책임자 아나톨리 댜틀로프(Анатолий Дятлов)는 살아났으며 소련 정부는 이 둘에게 책임을 떠넘겼는데, 중대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형사고소를 통해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현장 직원들도 도마에 올랐지만 조사 결과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것으로 밝혀졌으며, 사후에 용기 칭호가 수여된 사람도 있다. 사고는 너무 컸지만 책임자들이 의도적으로 사고를 친 것이 아니었고, 당시 소련 형법상 업무상 과실치사죄에 해당하여 최대 형량으로 판결한 것이 징역 10년이었다.

브류하노프와 댜틀로프는 모두 형기를 채우지도 않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애초에 핵심 책임자였고 직접 노심을 맞닥뜨린 건 아니지만 사고 당시 최근방에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댜틀로프도 상당한 양의 방사능에 피폭 당해 그 여파로 남은 삶을 고통 속에 살았고, 결국 사고가 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1995년에 세상을 떠남에 따라 체르노빌 사고 후유증 사망자 명단에 올랐다.

반면 브류하노프는 이후에도 멀쩡히 살아남아 2011년 4월 28일 기자와 인터뷰까지 했다. # 사고 당시 피폭량이 250rem(2.5Sv)이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 같다.[86] 브류하노프는 가석방 이후 잠시 무역 관련 일을 하다가 도로 우크라이나로 재배치 되어 80살인 2015년 12월까지 이 사고로 인한 피해 복구를 전담했으며 2021년 10월 13일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Surviving disaster - Chernobyl Nuclear disaster>에선 소련 당국의 공식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들의 '악행'을 스크린에 담았는데 "안전 장치를 끄고 실험하면 위험하다"는 기술자들의 주장을 묵살하면서 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일어났는데도 방사선 수치가 높지 않다고 상부에 허위 보고를 했다. 이때 사용된 소형 계측기의 최대값이 3.6 뢴트겐인데 레가소프의 지적 이후[87] 대형 계측 장비를 갖고 와서 측정한 결과는 15,000 뢴트겐을 초과했다.[88] 이런 엄청난 수치의 방사선이 뿜어져 나오는 곳에 사람을 데려다 두면 2~3분이면 바로 치사량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EBS에서 <대재앙 -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라는 제목으로 더빙 방영되었다. 나중에 사태가 심각해지고 발레리 레가소프의 추궁에 "난 이번 년도에 훈장을 받기로 되어 있었네... 이 사고로 인해 그걸 날려버릴까 두려웠다."고 말하면서 결국 자기 안위만 생각하다가 그나마 피해를 덜 볼 수 있게 해결할 수 있던 걸 돌이킬 수 없게 크게 키운 셈. 레가소프는 그 말을 듣고 "소장님은 용서 받을 수 없어요" 하고 치를 떤다. 실제 모습을 보면 브류하노프가 장신, 거구에 윤곽이 뚜렷한 인상이고 댜틀로프는 마른 체구에 여우상인데 다큐상의 배우는 브류하노프가 오히려 인자해 보이고 댜틀로프 역은 뚱뚱한 체구의 배우가 맡았다.

7. 피해

7.1. 인명피해

통계에 따라 집계된 인명피해의 범위가 매우 다양하다. 일단 1986년 당시 소련 정부는 공식 사망자 수를 30명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직접적인 외상이나 피폭으로 사건 후 수 주 이내에 사망한, 인과관계가 매우 명백한 사망자들에 한정한 것이다. 피폭으로 수 주 내에 사망하지는 않았으나 수 년 후에 암이나 백혈병으로 사망한 경우 등은 그 병이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한 것이 확실한지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어렵기에 집계가 어려운데, IAEA는 사망자 수를 약 4000명으로 추정했으며 그 외에도 6000명, 25000명 등 여러 주장이 있다.

인명피해가 제대로 집계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피해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애매한 저수준으로 피폭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 정부는 사고 피해 규모를 숨기기에만 급급했고, 1988년에는 아예 법적으로 방사선 피폭을 사망 원인으로 기록하는 것을 금지해버렸다.[89] 그러다보니 서구권에서는 소련에서 내주는 자료만 가지고 사고 경위나 피해를 말 그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의도적으로 축소한 자료를 다시 의도적으로 부풀려서 장님 코끼리 더듬듯 실제 피폭자를 추정하다 보니 결과물의 정확도가 엉망이 되었다.[90]

이 대형 사고로 인해 지금까지도 이 발전소 주변 지역이 몽땅 출입금지 지역[91]으로 묶여 있다. 스리마일에 이은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는 대표적인 기피 시설이 되었다.

디스커버리 다큐멘터리에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사고 당시 프리피야트는 물론 키예프도 정상치보다 수천 배는 더 높은 방사능 오염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국은 다가오던 5월 축제(5월 1일 국제노동절, 5월 9일 대조국전쟁 전승절)를 준비하기 위해 이 사실을 숨겼다.

체르노빌 사고로 현장 지휘를 맡았던 발레리 레가소프높으신 분들에 의한 강압과 정치적인 힘에 눌려 UN 사고청문회에서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소련 정부에서 날조한 거짓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후 전세계 인류와 사고로 인해 죽은 자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이때 원자력 사고 수습 과정에서 레가소프도 피폭의 영향으로 해가 갈수록 폐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고 한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상황과 과학자로서의 양심, 죄책감에 죽기 직전에 모든 걸 폭로하는 음성과 자료를 낱낱이 공개하고 바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각 단체마다 사망 입증과 집계 방식, 그리고 기준이 천차만별이라 정확한 피해 수치의 통계는 알 수 없다. 본 문서의 서술에서는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 의사회의 2011년 보고서에 따른 83만 명의 근로자를 피폭자 기준으로 한다. 83만 명이 아닌 다른 기준을 쓰기도 한다. 연간 평균적으로 130~17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계속해서 피폭되었던[92] 작업 초기인 1986년에서 1987년 사이에 누출 방지와 누출 방사능 처리 작업에 투입된 해체 작업자들 22만 6천 명을 기준으로 보기도 한다(EXPOSURES AND EFFECTS OF THE CHERNOBYL ACCIDENT, 526쪽).

그래도 추적 조사를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어서 2012년 11월 8일 미국에서 사고 현장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에 대한 추적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자세한 건 관련 소식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

이러한 조사는 2021년에도 다시 진행되었는데, 미국 국립암 연구소 예이거 박사팀은 체르노빌 사고 청소에 동원되어 방사능에 노출된 105명과 그들의 자녀 130명을 조사한 결과 본인은 물론 배우자와 자식도 방사선에 의한 유전자 변이는 확인되지 않았다(Lack of transgennerational effects of ionizing radiation exposure from the Chernobyl accident, Science 2021. 5. 14.).

다행인 건 지하 콘크리트층이 뚫리는 수준의 멜트스루는 피했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까지 갔더라면 지하수가 오염되어 희생자 수는 수십 곱절이나 늘었을 것이다.

한편 위에 언급한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바실리 이그나텐코 등 피폭 희생자들은 죽은 뒤에도 그리 편하지 못하게 되었다. 심하게 피폭된 관계로 그들의 시신 역시 심각한 수준의 '방사성 폐기물'이 되었기 때문에 으로 된 관에 안장한 뒤 용접하고 콘크리트로 구덩이를 채우는 형태로 매장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고 직후 주변으로 신속한 피난이 이뤄졌기 때문에 직접 사고 처리에 투입된 인원을 제외하면 방사능에 의한 직접적 건강 영향을 받은 주변 거주민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고 발생 20년 후 WHO의 조사에 의하면 복구 작업에 투입된 인원에서 고형암과 백혈병 발생의 상대적 증가율은 1%, 0.1% 수준이었고 30km 주변 지대 피난자들에서는 둘 다 0.1% 미만으로 거의 큰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출처.

오히려 현재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은 사고 당시 충격으로 인한 심리적인 피해와 정신적인 피해다. 하루 아침에 직장과 고향을 잃게 된 주민들의 심리적 트라우마는 이후 높은 알코올 중독, 자살률 등으로 수십 년간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특히 방사능에 대한 과도한 공포는 엉뚱한 결과로도 나타났는데, 일례로 북유럽에서는 기형아가 발생할까봐 10만 건 이상에 달하는 낙태 수술이 행해졌다.

7.1.1. 사망자 명단

아래는 소비에트 연방 정부가 1986년에 발표한, 즉 사건 수 개월 내에 사망한 30명의 사망자 명단이다. 피폭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수 년이 지나 1995년 사망한 아나톨리 댜틀로프, 2004년 사망한 소방 준장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등은 제외되어있다.

1986년 10월 2일 붕소를 투입하던 소련 공군Mi-8 헬기가 크레인에 걸려 추락해서 탑승자 4명 전원이 사망했다. 그러나 체르노빌 사고가 원인이 아니라 조종 부주의로 사망했다고 본 것인지 소련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명단에는 이 4명은 빠져있다.

7.2. 주변 지역의 피해

체르노빌과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도시가 되었으며 주변 마을들도 모조리 비워졌다. 이때 수많은 땅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는데, 향후 바람을 타고 번질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아예 트랙터를 사용하여 땅을 갈아엎고 밑에 있는 오염되지 않은 흙을 퍼올려 덮어 버렸다. 주변의 숲들도 똑같은 이유로 갈아엎으려고 했으나 시간과 인력이 너무 많이 소모된다는 이유로 그냥 출입금지 구역으로만 지정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붉은 숲이다.

원전에서 18km 떨어진 체르노빌 시는 오랫동안 유령도시가 되었다가 2003년 체르노빌 복구 및 개발 프로그램(Chernobyl Recovery and Development Programme)이 시작되면서 관련자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다. 원전과 프리피야트 관람도 여기서 출발했다. 그러나 전성기에 비하면 꽤나 적은 숫자로, 일부 건물을 제외한 도시의 거의 모든 건물이 빈 상태라서 유령도시에 가까운 상태다.

7.3. 주변국의 피해

파일:1986ChN.png

1986년 사고 당시 피해 예상 지역

파일:체르노빌 방사선 지도.svg

주변 지역들도 무지하게 피해를 봤다.

일단 벨라루스[106]에서는 소아 갑상선암 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특히 하필이면 바람이 남풍이었던 탓에[107] 벨라루스에는 이 사고의 낙진의 80% 가량이 떨어져 지금도 벨라루스 국토의 33%씩이나 되는 곳(한국의 절반이 넘는 면적)이 방사능 오염으로 인해 출입금지 구역이다.

2019년 기준으로 국토의 22%는 오염 지역으로 남아 있으며 벨라루스의 국토 개발 계획에 심각한 장애로 남아있다. 이 빈 땅을 루카셴코 정부는 낙농업 중점 지역으로 만들 계획을 추진했지만 2016년에도 이 지역에서 동위원소 스트론튬-90이 벨라루스 농업부가 정한 안전 기준치인 kg당 3.7 베크렐의 10배가 넘는 수치로 확인되었다.# 낙후된 벨라루스의 경제 사정 탓인지 관련 연구자들은 벨라루스가 국민들을 방사능 발암 물질로부터 국민들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고 성토하고 있다.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유럽의 반대쪽에서도 토양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다. 특히 영국의 일부 지역은 이때의 사고로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출입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곳도 있다.

이탈리아파스타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어 일본에서 수입이 금지 당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2006년에 이 사고의 영향으로 20~30대 중에 갑상선암 발병 비율이 높아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당신의 갑상선암은 체르노빌 탓인가>.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방사능량이 미미했으며 갑상선암의 발생율 증가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건강에 대한 관심과 검진율의 증가가 원인이라는 반론이 있다. <녹색연합 최초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 그러나 아주 영향이 없던 것은 아니었고, 당시 방사능에 대한 규제 조치가 약했기 때문에 남양유업한국야쿠르트를 비롯한 여러 식료품 회사에서 방사능 과다 검출로 폐기처분될 뻔한 유럽 여러 나라들의 폐기 농산물, 유제품을 수입해서 분유[108], 커피 프림, 라면, 사료 등으로 가공해서 팔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 문제는 1980년대 말에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우지 파동이나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처럼 공론화되지는 못하고 흐지부지 넘겼다.

이 사건 이후 유럽 여러 나라의 야생동물의 뼈와 뿔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됐다. 독일 같은 경우 방사능에 오염된 사슴이나 멧돼지를 잡을 경우 정부에서 돈을 주고 회수할 정도였는데, 특히 사슴은 한약재로 인기가 높은 녹용에 방사능이 쌓이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 특히 서유럽에서도 체르노빌 사고가 너무도 큰 피해였기 때문에 자국 내 원전 반대 여론과 집단 패닉을 우려하여 사건에 대한 진상을 감추었다. 체르노빌 사고 관련 자료는 당시 즉각적으로 발표되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혔으며, 2000년대 들어서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었다.

7.4. 동식물들의 피해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소개령이 내려질 때 시민들은 키우던 동물들을 데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두고 갔다. 이후 오염 지역을 격리하는 과정에서 구역 내에 살아 움직이는 동물들에게는 전부 살처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중에는 살처분을 피한 동물들도 있었고, 체르노빌 지역은 몇십 년간 인간의 손이 닿지 않고 보존된 덕분에 야생동물의 천국이 되었다. 방사능 물질이 어느 정도 줄어들자 몽골야생말, 비젠트, 스라소니, 불곰, 늑대, 말코손바닥사슴 등의 야생동물들이 돌아왔다.

방사선으로 인해 체르노빌 주변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에게 생긴 변화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사고 당시 방사선에 강하게 노출된 장소의 청개구리들일수록 방사선에 저항하는 멜라닌 색소를 많이 가져 짙은 색을 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7.4.1. 루머

인터넷에서 4m가 넘는 메기초거대 지렁이/ 사진이 떠돌아다니면서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방사능으로 등장한 돌연변이라는 소문이 같이 돌지만 루머에 불과하다. 4m가 넘는 메기는 유럽메기라는 종으로, 원 어종 자체가 3m는 자라며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자연 상태로 무럭무럭 자란 것에 불과하다. 낚시 다큐멘터리 River Monsters에서는 방사능으로 인해 오히려 크기가 줄었다는 기록도 있다.[109] 초거대 지렁이는 거대깁스랜드지렁이(Megascolides australis)라는 종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서식하며 원래 1m에서 최대 3m정도까지 자라는 대형종이다. 마지막으로 거대 쥐는 중국 모 대학생의 제작품이라고 한다.

체르노빌 주변에서 하나의 몸통에 머리통이 여러 개가 달린 개구리나, 중심 자체가 둘둘 말린 해바라기나, 꽃 한가운데를 뚫고 다시 올라온 꽃대와 꽃 같은 기형 생물들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방사선에 의한 동물의 돌연변이는 일부 염색체에 이상을 끼치는 정도에 그친다. 아직까지 방사능에 의한 변이 중 실루엣까지 큰 이상이 생기는 수준의 변이는 확인된 것이 없다.

7.5. 소련 붕괴에 미친 영향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내셔널 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투입된 비용이 거의 국가 예산 전체 규모에 맞먹었던 것[110]으로 구 소련의 붕괴를 불러일으킨 결정적 요인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가뜩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들인 비용에 미국과의 군비 경쟁으로 인해 소련의 재정지출이 크게 늘어났고 전전임자 유리 안드로포프의 경제 개혁은 단기 처방으로 끝난 상황이었는데, 더군다나 사우디와 영미권 업체간의 치킨 게임으로 인해 석유값이 폭락한 데다 쓰는 돈은 그대로인데 걷어들일 돈은 크게 줄어든 상태에서 체르노빌 사고가 터져 수습하는 데 드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게 된 바람에 소련 경제가 회생 불능에 빠졌다는 게 정설이다.

거기다 위에서 언급됐듯이 아직도 많은 지역이 방사능에 덮여 있고 60만 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하면서 그 인력들의 대부분과 인근 지역에 살았던 이들 대부분이 방사능에 피폭되었으므로 건강한 삶을 살았을 리는 만무하며, 정화 작업에 투입한 자원과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 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실험 책임자 한 사람의 무지함이 국가 전체에 벗기 힘든 큰 굴레를 안겨준 셈이다.

이 때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1980년대 유가 폭락, 미국SDI 계획에 따른 군비경쟁과 함께 소련 붕괴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사고 이후에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면서 정보 통제를 통제하려하고 심각성을 은폐하려하고, 사건을 축소하는데에 급급해서 대피가 늦어지는 등의 사실도 드러나면서 대중의 불신이 심화되었고 이는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도 이어졌다. 실제로 1990년 4월에는 키예프에서 체르노빌 사건 은폐•축소에 저항하는 시위 또한 일어났으며 연방 탈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8. 사고 이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환경에 미친 영향과 복구에 대한 보고서를 IAEA가 내놓았다. 다운로드는 여기에서 할 수 있다.

8.1. 남은 원자로들의 처분

아직도 발전소 잔해 안에는 사고 당시 즉사한 발전소 직원 발레리 호뎀추크(메인 순환펌프 기사)의 유해가 있다고 한다. 핵심 오염 구역인 데다 폭발로 인해 완전히 붕괴, 현재는 방사능 유출 방지를 위해 대형 돔까지 씌운 상태이기에 내부로 들어가 시신을 수습할 수 없다고 한다.[111] 또한 해당 돔은 향후 100년간 방사능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다시 말해 향후 100년간은 돔을 걷을 수 없기에 그의 시신은 아무리 못해도 향후 140년간은 수습이 불가능해진 것이다.[112]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기 부족을 이유로 폭발해 훼손되어 버린 4호기를 제외하고 남은 1·2·3호기를 계속 가동했으며, 그 옆에 5·6호기 원자로를 건설하다가 1988년 중단했다. 원전 내부를 철근과 두꺼운 콘크리트로 차폐를 시켜놓긴 했지만 그럼에도 사고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직원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결국 1991년에 2호 원자로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우크라이나 정부는 원자로 손상이 너무 심하다며 2호기를 폐쇄, 1호기와 3호기는 2호기 화재 사고 이후로도 5년여간 운영을 계속하다 '사고가 났는데도 운행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문을 닫으라는 세계 각국의 압력과 비판으로 인해 1996년 11월, 1호기가 폐쇄되었고, 2000년 11월에 3호기 또한 가동이 정지함으로써 모든 원자로가 멈추게 되었다.[113] 하지만 완전히 원자로를 끌어내 폐기하기 전까진 위험 요소가 제거된 것이 아니므로 일정 인력이 상주하며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심지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체르노빌 지역이 러시아의 점령지가 되었을 때도 근무자들은 체르노빌 원전을 떠나지 않았으며, 러시아 연방군도 이들과 일종의 적과의 동침을 하면서 매우 평화롭게 이곳을 상시 관리했다. 당연하겠지만 이곳에서 공연히 허튼짓이라도 했다가 양국의 엄청난 희생으로 간신히 잠재운 범지구적 재앙을 몰고온 괴물이 다시 깨어나기라도 하면 러시아고 우크라이나고 안 가리고 40여 년 전처럼 둘 뿐만아니라 동유럽은 싸그리 초토화되기 때문.

8.2. 관광

체르노빌은 나름대로 관광 명소의 입지를 가지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에서 허가받은 관광 업체의 관광 프로그램을 통하면 타지인, 외국인도 관광할 수 있으며 비용은 10만원 내외로 전날 신청해도 받아준다. 심사와 신원 조회를 거친다고 표면적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입구에서 여권이나 ID카드만 확인한다. 정신병력이나 범죄 전과가 있는 사람은 제한된다. 심지어 만약 이 지역의 방사선에 피폭되어 사망한다 해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각서는 종이와 경고문을 사전에 나눠주며 사인해야 출입할 수 있다.

공인된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이드가 반드시 1명은 따라다니며 다른 곳은 위험하기 때문에 지정된 곳, 즉 주로 아스팔트 도로로만 갈 수 있다 가이드가 필히 경고한다. 그러나 체르노빌 자체가 이미 풀이 자란상태라 등산과 다름없어 가이드를 따라가다보면 흙위로 걷게된다. 체르노빌에서 자라는 일부식물은 방사능이 측정돼 함부로 밟으면 안된다. 특히 버섯같은 균류는 조심하라 경고한다. 방사선 물질이 비에 의해 쉽게 쓸려나가고 도로 아래 아스팔트가 지면 아래에서 올라오는 방사선을 일부 막아주며 우크라이나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하루에 2번씩 도로에 물 청소를 진행하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도로 근처가 안전하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도로 위만 다닐 수 있다 말하나 도시의 도로전체를 점검할 수는 없는 상태라 일부코스는 흙길위다. 가이드가 방사선 탐지 장비인 가이거 계수기를 가지고 다니며 이는 관광상품으로도 비용을 받고 관광객에게도 대여하나 관광객에게 필요는 없다.

입구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정상치의 10배를 넘는 방사선이 존재한다. 만약 카운터에서 방사선의 양이 많이 검출될 경우 집으로 귀가하기 전에 여기 들어왔을 때 입었던 옷과 신발을 모두 벗어 소각해야 된다. 따라서 방문 시 여벌의 옷과 신발은 필수로 준비해야 하고, 옷과 신발도 버릴 것으로 입고 가야 하며 당연히 절대로 비싼 명품 옷을 입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귀중품을 소지하고 들어가는 것 역시 하지 말아야 한다.

2011년부터는 관광객들에게 본격적으로 개방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당시 안전한 관광 코스를 편성하고자 탐색 중이었다. #

2013~2014년 경부터는 체르노빌 관광이 매우 자유로워져서 사실상 돈만 충분한 성인이면 누구나 관광이 가능해졌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지정한 여러 여행사의 투어 프로그램에 신청할 수 있고 신상에 심각한 문제가 없는 한 출입 허가를 받을 수 있다.[114]

2016년 11월 29일에 새로운 석관인 NSC(New Safe Confinement)가 완공되어 폭발한 원자력 발전소 본 건물은 볼 수 없게 되었다. #

2019년에는 건물들이 낡아 붕괴 위험이 커져서 출입이 제한되는 구역이 늘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체르노빌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전체가 여행금지국으로 지정되어 한국인은 아예 우크라이나 관광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들어가면 여권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설령 법을 어기고 들어간다고 해도 우크라이나 정세를 감안하면 적어도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체르노빌 관광을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8.3. 여전히 남아있는 위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아직 확실하게 안전을 확보한 게 아니다. 방사능이 석관 밑에 봉인되어 있을 뿐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 당시 기술진이 목표로 한 것은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피해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당시 복구반의 노력으로 30년이란 시간을 번 것도 사실이다.

허나 벌어둔 30년의 시간도 이미 지나갔고, 체르노빌을 덮었던 석관의 수명도 슬슬 끝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당시 체르노빌 뒷수습은 일단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것이 급하므로 완전한 해결책은 나중에 나오리라 보고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식이었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고 동구권 경제가 붕괴하면서 어영부영하는 사이 내구연한이 다가왔다.

우선 우크라이나 정부는 새로운 석관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급조한 콘크리트 석관이 수명을 다했기 때문인데 새로운 석관은 자유의 여신상이 그대로 들어갈 만큼 높이가 크다. 2016년 11월 14일(현지 시간), 'New Safe Confinement'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석관이 완성되어 원자로 4호기의 봉인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영상. 새 차폐막이 원자로 건물을 밀봉한 뒤에는 내부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고 발생으로부터 [age(1986-04-2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확실한 해결 방법은 나오지 않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2022년 2월 25일 자정경 실제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 병력이 체르노빌 인근에서 격돌했음이 확인되었다. # 우크라이나 당국자는 교전에 혹여 석관이 파열될까 우려했으며 러시아가 체르노빌 인근에서 물러난 후 석관이 무사함을 확인했다.

8.4. 원자로 처리 방안

현재 기술자들이 지금도 방사선을 내뿜고 있는 원자로를 제거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기술자들끼리의 논의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아직 남아 있는 플루토늄 등의 방사능 물질들을 어디에 버리느냐"는 것이다.

저 멀리 우주에 내다 버리는 방법도 신중히 논의는 되고 있지만 말 그대로 논의만 되고 있을 뿐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고 있다. 우주에 버린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좋지만 문제는 로켓으로 쏘아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로켓이 고장나서 대기권 돌파도 하기 전에 공중 폭발이라도 한다면 타국에 극도로 치명적인 방사능 ICBM을 떨구는 꼴이 된다. 더군다나 대량 수송이 가능한 우주 발사체가 대부분 퇴역했기 때문에 소유즈 같은 걸로는 택도 없다. 더욱이 우크라이나와 가까운 곳에서 로켓을 쏠 만한 장소는 바이코누르, 플레세츠크,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인데 이곳은 입지가 카자흐스탄 영내, 북극해, 중국 국경과 시베리아 횡단철도 근처다. 즉, 이걸 쏴줄 만한 발사장도 없다. 또 로켓을 발사하는 것이기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가며 국제법상 제약도 있는 등 이렇다 할 해답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65년까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해체하고 정화 작업을 완료할 예정이다. #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바로가 우크라이나 비상사태부 장관에 따르면 (해체) 작업에는 50년이 걸린다고 하며, 비상사태부의 다른 관계자는 "핵연료 꺼내는 데 30년, 해체 작업에 60년이 더 걸린다."고 예상했다. 4호기의 핵연료 외에도 노후화된 사용후핵연료 냉각수조에 저장된 21,000개(2천 톤)의 폐연료봉도 처리해야 한다. 2015년까지 새 저장 시설이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 데다 우크라이나는 남부 크림 반도와 동부 돈바스가 러시아에 점령된지라 어떻게 될지 불투명하다.

8.5. RBMK

체르노빌 발전소의 원자로에 사용된 원자로는 RBMK(Реактор Большой Мощности Канальный, 대출력채널형원자로)였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동형 원자로에 대해 대규모 안전 보강 조치가 실시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동형 원자로 11개가 아직도 운전되고 있었지만 사고의 정치적-사회적영향에 의해 새로 짓는 것은 없으며[115], 사고 당시에 건설되던 원자로도 스몰렌스크원자력발전소 3호기 (1990년 완공 후 전력망연결) 와 이그날리아원자력발전소 2호기 (1987년 완공 후 전력망연결) 외에는 모두 건설이 중지되거나 취소되었다

현재 러시아가 새로 짓는 원자로는 VVER[116] 방식인데 이놈도 골 때리는 게 초기 모델에는 RBMK처럼 격납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딱 1군데 서방의 안전 기준을 맞추는 VVER이 있는데 바로 핀란드가 건설한 로비사 원자력 발전소. 이 원자력 발전소는 원자로만 소련제[117]였고 나머지 운용설비는 지멘스 등에서 충당했다. 지금도 이 VVER은 정상적으로 운전되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쿠르스크[118], 레닌그라드,[119] 스몰렌스크 발전소에서는 여전히 RBMK 원자로를 발전 용도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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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 차량의 차종은 MAZ/KTKZ 535.

한편 소련은 1990년대에 완성할 목적으로 원자력 발전소 차량을 구상 중이었고 개발 완료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 그러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나는 바람에 핵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동식 원자력 발전소 개발 프로젝트는 전면 백지화되었으나 러시아 시대에 와서 재개되었고 2020년 즈음부터 배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

8.6. 다시 시작된 위험

우크라이나의 원전안전문제연구소 과학자들이 "원자로 내부의 중성자 밀도 증가가 실제로 관찰되고 있다"는 발표를 했다. 실험을 통하여 과학적 가설이 입증되었다고 하며 면밀히 모니터 중이라고 덧붙였다.[120] 그러나 원전측에서는 현재 수준은 안정적이라는 반대 성명을 냈다. #

어쨌든 사고가 난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곳에 있는 방사능이란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군이 진격로 중 하나를 하필 체르노빌 방향으로 택한 탓에 발전소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전투는 금방 끝났지만 전투 종료 직후 일대의 감마선이 비정상적으로 폭증한 것이 감지되었다. 석관에는 이상이 없고 방사성 폐기물 저장소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8.7. 관련 소식

마리아 샤라포바의 가족들이 당시 샤라포바를 임신한 상태에서 체르노빌 근교에 살고 있었는데 이 사고 때문에 소치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샤라포바를 낳았다. 실제로 샤라포바의 친할머니는 이 사고로 피폭 당했다. 그래서 샤라포바는 체르노빌 피해자들을 돕는 자선 활동을 한다.

2011년 4월에 경향신문이 체르노빌 원전의 기술자 니콜라이 이사예프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때 동료들 가운데서 자신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공포의 붉은 숲피해 농민 인터뷰도 참고하면 좋다.

2011년에는 우크라이나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체르노빌 원전 사고 관련자들의 특혜와 연금 등을 줄이고 남는 돈을 빈민 구제에 사용하겠다"고 했다가 전국적인 반대 시위에 직면했다.

2011년 9월 4일에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프랑스를 통과한 방사능 구름은 건강에 아무런 영향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악성 사기죄로 기소된 보건성 방사선 방호 중앙국 국장 피에르 펠런 교수가 면소 판결을 받았다. 국민과 교수 사이에 계약 관계가 성립된 것이 아니므로 사기죄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게 이유라고 한다. 환경 운동가들과 (방사능 구름 때문에 암에 걸린) 갑상선암 환자들은 이 판결을 강하게 비난했다.

2012년 11월 8일에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습 작업에 참여한 작업원 11만 명을 20년간 추적 조사한 미국 국립암연구소와 대학 연구팀이 "저선량 피폭도 백혈병의 발병율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를 미국 학술지에 게재했다.

체르노빌 사고 이전에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이때 원자로를 가동 중지했다면 이런 대참사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2021년 이들 자손들의 유전체 시퀸싱을 돌려서 얼마나 변이되었나 보는 2가지 실험 결과가 나왔다. 한쪽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서 131I에 노출된 359명의 아이들과 81명의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의 시퀸싱을 돌렸고, 다른 한쪽은 DNMs이라는 한 세대 내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생식세포 돌연변이를 130명의 어린이(1987 ~ 2002년)와 부모 세대를 모두 시퀸싱한 결과 과도한 돌연변이가 없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기사, 기사 2, 한글.

8.8. 사고 등급

이 사고는 전 세계의 원자력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 7등급으로 분류되었다. 비교를 위해 5등급 이상의 다른 사고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8.9. 정치적 영향

미국소련 양국의 핵무기 감축 논의에 체르노빌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보다 더 넓은 지역이 더 높은 수치의 방사능 오염 지대로 변하면서 핵전쟁 이후 펼쳐질 지옥에 대해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며 핵무기 감축을 주장하는 세력이 정치계에서 큰 힘을 차지하게 되어 핵무기 감축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물론 핵무기 감축을 통한 비용 절감 등의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더불어 이 사고는 소련에 엄청난 재정 지출을 강요해 안 그래도 1980년대 초반 석유 가격 폭락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휘청거리던 소련의 경제에 치명타를 날렸고 결국 1991년 소련 붕괴로 이어졌다.

9. 매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처럼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장르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이하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직간접적으로 다루는 작품들이다.

9.1. 다큐멘터리

1. Zero Hour - Disaster At Chernobyl (2004) - Discovery


2003년 Cineflix Production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히스토리와 BBC에서 방영하였다. Discovery에서 추가로 방영을 하였다.

2. 사상 최악의 참사 (2004) -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4년 사상 최악의 참사 시즌 1의 7화로 다루어졌다. 약 1시간 분량.

3. Surviving Disaster (2006) - BBC


2006년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꽤나 자세히 사건의 경과를 설명하고 있으며, 발레리 레가소프의 시점에서 사건을 돌아본다. 해외에서는 2019년작 HBO 드라마 체르노빌과 구별하기 위하여 BBC판 체르노빌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에서는 EBS 다큐 10에서 더빙 방송하였으며 위의 영상이 당시 EBS 더빙판이다.

4. The Battle of Chernobyl (2006) - Discovery


2006년 디스커버리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로 한글 자막이 달려 있으며 총 90분 분량이다. 다른 다큐에 비해 비교적 분량이 길어 자세하게 내용이 나온다. 2016년에 디스커버리에서 비슷한 분량의 다른 다큐도 제작되었으나 그 다큐에는 자막이 없다.

5.[NHK]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7부 - 인류의 위기 (2020)
[navertv(46471103)]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7부 - 인류의 위기中
2020년 9월 19일에 방송한 다큐멘터리로 영상 매체가 태어난 이후 20세기 인류가 직면해 온 세계를 뒤흔든 전대미문의 위기를 다루면서 시간 순서상 후반부에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대해서 간략히 다루고 있다

1980년대에 우크라이나에서 자랐던 네티즌은 체르노빌 다큐멘터리를 본 후 8가지 재현 오류한 손에 꼽을 수 있다고 했다.
My mate has just seen the Chernobyl documentary. He actually grew up in Ukraine in the 1980's and was able to count at least 8 historical inaccuracies on one hand.

9.2. 저서

9.3. 기타

10. 외부 링크



[1] 러시아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2] 우크라이나어: 초르노빌 참사.[3] 벨라루스어: 차르노빌 사고.[4] 영어: 체르노빌 참사.[사진설명] 움푹 들어간 부분에 조금 보이는 원형이 폭발 직후 날아갔다가 다시 박힌 4호기 반응로의 뚜껑이다. 그리고 굴뚝 오른쪽 부분이 3호기인데 다행히 이건 폭발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남았다.[6] 과거 최악의 원자력 사고는 소련 첼랴빈스크 주에서 발생한 키시팀 사고였다.[7]우크라이나 키이우주 프리피야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8] 이 수치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서 방출된 방사능의 400배에 해당하며, 같은 7등급 원자력 사고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서 누출된 방사능의 10배이다.[9] 5.3 x 1018[10] 동독, 스칸디나비아 지역 등의 거주민에게도 암을 유발했을 가능성을 가늠하고 있다.[11] 1, 2, 3호기는 전력 부족 문제로 계속해서 가동되었고 2호기는 1991년 심한 화재가 발생하여 폐쇄되었으며, 1996년에 1호기가 폐쇄되었고 2000년에 3호기가 폐쇄되었다.[12] 붉은 숲(Рыжий лес)은 프리피야트 인근 약 10km 이내 소나무들이 방사능에 피폭되어 붉게 변색되면서 형성된 숲을 일컫는다.[13] 최솟값은 복구 작업에 투입된 130밀리시버트 정도의 저선량 피폭자 22만여 명. 최댓값은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 의사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른 소련 정부에 의해 사고 복구에 투입된 총 인원. 그러나 사고 당시 방사능이 인접국을 넘어 전 유럽에 퍼져나가 수많은 환자를 유발한 것으로 보아 피폭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을 것이라고 판단된다.[14] 소련 당국에서 발표한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들이다.[15] 체르노빌 포럼의 발표치로 포럼 구성은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국제원자력기구(IAEA), 세계보건기구(WHO), 유엔개발계획(UNDP), 식량농업기구(FAO), 유엔환경계획(UNEP), 유엔인도주의사무조정사무소(UN-OCHA), 유엔원자력위원회(UNSCEAR), 세계은행 외 8개 유엔 전문기관에서 조사한 보고서에서 발표된 단기적 시망자에 대한 수치다.[16] 출처. 2016년 기준 30년 동안의 누적 재산 피해라고 하며, 체르노빌 다음으로 재산 피해가 많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3600억 달러)의 2배에 육박한다.[17] 소련 붕괴 당시 소련이 진 외채(660억 달러)의 10배 가량이며, 1985년 소련 GDP 추정치(2조 2,000억 달러)의 약 1/3에 육박한다.[18] 여기서는 발생 시점이 소련 시절이므로 구 명칭을 사용하여 표기한다.[19] 우크라이나어 기준 現 우크라이나 키이우주 프리피야티. 당시 키이우의 공식 명칭은 러시아어인 키예프였으며, 프리피야티도 당시 공식 명칭은 러시아어인 프리피야트였다. 사실 러시아어나 우크라이나어나 둘 다 각각 프리퍄티, 프리피야티로 발음이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의 표기 방식과 프리피야트 나무위키 문서를 제외하더라도 국내에선 이미 프리피야트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나무위키 규정상 대중성을 우선하여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로 한다.[20] 現 우크라이나어 기준으로는 초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이나 당시에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로 불렸으며, 나무위키에서도 대중성을 우선하여 체르노빌로 표기한다.[21] 원자력과 관련되긴 하지만 원자 폭탄과 원리는 다르다. 위력도 비교적 약하다.[22] 2위는 2011년 3월 12일, 전 날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일어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다.[23] 대한민국 표준시 기준으로 아침 07시 23분 45초경.[24] 단순히 전력 공급이 가능한지, 어느 정도인지만을 연구할 생각이라면 당연하지만 터빈의 회전 운동이 생산하는 에너지를 수학 이론 내지는 다른 발전소의 터빈을 통한 실험으로 어느 정도 계산할 수 있다.[25] 사고 시 방사성 물질이 대기 중으로 배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건물이다.[26] 소련 정부에서 브류하노프 박사에게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라고 시키면서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다며 국영은행으로 하여금 계속 돈을 대게 해 줬으니 돈은 말 그대로 원하는 대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은 돈이고 자재는 다른 방법으로 구해와야 하는데 이게 무척 힘들었다.[27] 이 3호기의 런다운 유닛 실험도 목표로 한 간극 메우기 자체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사고없이 마무리되었다.[28] 이에 관해서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레오니트의 실수가 원인이라 볼 수도 있지만 여러 명이 지켜보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출력 조절이 조작원의 일방적인 실수로 저렇게 낮아지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아래 설명에도 있듯이 조작원의 실수로 30MW로 떨어뜨렸다고 해도 곧바로 출력을 올렸으면 되었을 일인데 출력이 낮아지기 시작하기 전부터 원자로 내부적인 문제가 있었기에 출력 조절 실패 후 출력 상승 실패가 연이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추측일 것이다.[29] 추가 설명. 전공자나 관련 지식이 있는 사람은 물이 감속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핵분열 시 나오는 중성자는 감속재에 의해 감속되어 열중성자가 되어야만 핵분열 연쇄 반응을 지속할 수 있으므로 가압, 비등을 막론하고 경수로에서는 냉각수가 줄어들면 핵분열 반응도 줄어든다. 감속재가 없어지니 핵분열을 일으키는 열중성자의 수가 줄어듦으로. 하지만 체르노빌 노심의 구조인 RBMK의 경우 물은 단순 냉각재고 감속재로써 흑연이 따로 존재한다. 즉 RBMK에서는 물은 냉각만을 위한 것이고 그 외의 용도로는 되려 방해물이다! 흑연 감속재가 있는데 물이 감속재의 역할을 하면 추가적인 감속을 일으킬 수 있고, 또 물의 일부는 중성자를 흡수하기도 한다. 따라서 RBMK에서 물은 경수로와는 다르게 핵분열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물이 줄어들었으니 어찌 보면 방해물이 없어진 셈이 되고, 흑연 감속재가 여전히 존재하므로 핵분열의 반응 밀도는 줄어들지 않거나 소폭 감소하는 수준에 그친다. 따라서 본문의 설명은 RBMK에서의 물의 주된 역할을 설명했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30] 수증기의 밀도는 1기압 시 물의 1/1600.[31] 상업용 원자로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가압경수로의 경우, 이와는 반대로 반응도 출력 계수가 음의 값을 갖는다. 원자로 출력이 올라가면 반응도가 낮아지면서 출력도 자연스럽게 낮아진다는 얘기. 이것을 '원자로의 고유 안정성'이라 한다.[32] INSAG-7 Chernobyl Accident: Updating of INSAG-1, IAEA, 1992, p.66 원자로의 치솟는 이상 출력을 확인하고 원자로를 정지시켰다는 설이 대중적으로 퍼졌고, 드라마 체르노빌에서도 해당 설을 채택하였으나 컴퓨터로 기록된 온도나 출력에는 그런 징후가 없다. 그래서 원자로 폭주 등 드라마틱한 상황이 아니라 그냥 본디 목적이었던 실험을 종료하기 위해서, 즉 그냥 일 끝났으니 퇴근하려고 원자로를 껐을 뿐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은 댜틀로프의 주장이기도 하다.[33] 이런 개념을 '반응도 여유'라고 한다.[34] 이로 인해 RBMK는 제어봉 긴급 삽입 시 인출할 때와 같은 시간이 걸리지만, 가압 경수로의 제어봉은 래치의 전원을 끊으면 제어봉이 자유 낙하하므로 짧은 시간 내에 긴급 정지가 가능하다. 일반적인 삽입과 인출 과정에서는 가압 경수로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35] RBMK 원자로 제어 시스템의 이름이다.[36] 전력계통(Electric Power System)을 의미.[37] 제어봉(control rod)을 의미.[38] 터빈 발전기(Turbine Generator)를 의미.[39] 이 구조물은 2차 폭발 당시 충격으로 튀어오르면서 4호기 원자로 건물의 상단부를 파괴했다. 이후 기울어진 채 원자로 위에 다시 떨어졌으며, 현재 '엘레나'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사진이나 모형, 투시도들을 보면 파괴된 원자로 건물 내부 원자로 위에 휘어진 막대(연료봉과 제어봉의 잔해들)들이 달려있는 둥근 원판과 같은 물건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일부가 외부에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반응로의 생체 방호벽이다. 원래라면 원자로 위에 장착되어 방사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40] 근처의 철교 위에서 보던 사람들이 방사능 후유증으로 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근거 없는 루머다. 꽤 유명한 이야기라 드라마 체르노빌에서도 다 죽은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실제로는 보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41] 핵무기가 떨어졌던 히로시마나가사키도 방사성 오염 물질이 태풍에 의해 씻겨나가면서 50년대에는 도시의 기능을 거의 다 복구했다.[42] 당시 원자로 순환 펌프 기사였던 그는 원자로의 비정상적 출력을 보고하려 자리를 뜨려는 순간 원자로 폭발과 함께 무너진 잔해에 깔려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물론 폭발 당시보다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뿐 현재에도 4호기 내부로는 진입할 수 없다 보니 그의 시신은 현재도 수습되지 못한 채 40여년 째 발전소 4호기 안에 잠들어 있다. 또한 현재는 4호기 주변으로 돔이 씌워졌는데, 해당 돔은 향후 100년간 원자로에서 나오는 방사능을 막을 용도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140여 년간 원자로 속에서 수습되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 있게 되는 것이다.[43] 아키모프는 정말로 이를 믿고 중간에 방사선 피폭 증상이 일어났음에도 응급 조치만 받고 장비를 착용하고 레오니드 톱튜노프와 함께 마지막까지 원자로 부근에 남아 급수 밸브를 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방사능에 추가적으로 피폭 당해 쓰러진 채 소방관들에게 발견되어 이송되었고 결국 병원에서 사망했다.[44] 기본적인 가이거 계수관.[45] 위의 SKALA 기록 영상을 올린 사람과 동일하다.[46] 저렇게 잡음이 심한 음성을 컴퓨터가 곧바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기록하는 것은 현재 기술력으로도 쉽지 않다. 붉은색의 DOS창 화면 효과와 마치 구형 컴퓨터에서 출력되는 듯한 연출이 당시 현장의 급박함과 공포감을 전해주는 효과가 크기에 실제 소방본부의 컴퓨터 화면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존재한다.[47] 법학 관점에서 영미권 국가가 주류인 서방은 경찰, 소방이 필요에 의해 자연발생한 조직이며 따라서 군대와는 태생 자체가 별개라고 인식하지만, 당시 공산권 국가는 경찰·소방도 군대의 역할이며 이 역할을 하는 인원도 군의 일부로 인식했다. 지금도 공산주의의 유산을 갖고 있는 국가들은 경찰과 소방이 군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중국, 베트남공안북한보위부, 러시아 국가근위대가 있다. 따라서 공산권의 정수인 당대의 소련도 군대, 경찰, 소방이 전부 통일된 군대식 계급을 사용했다. 이 준장 계급은 소방서장급. 경찰로 따지면 경무관, 소방관으로 따지면 소방준감에 해당되는 계급이다.[48] 이들이 입었던 소방복은 프리피야트의 체르노빌 병원 지하에 버려져 있는데, 사고로부터 [age(1986-04-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청난 양의 방사선이 검출될 정도다. # 측정기의 살벌한 경고음을 들어볼 수 있다. 영상에 나오는 측정량은 시간당 최대 3 밀리시버트가 넘어가는데, 이 정도의 방사능이면 한 달 정도만 주변에 두고 살아도 치사율이 3~40%에 달하는 수준이다.[49] 흑연 조각을 집어들자마자 화상을 입는 것이 대표적인 예. 실제로는 그냥 뜨겁다고 생각했다. 피폭 증상이 바로 드러나는 것도 과장되었다. 당시 회고록에 따르면 사고의 규모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의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소방관들도 있었지만, 이미 사고 현장에 온 것만으로도 원자로에 심각한 피해가 간 것을 보고 자신들이 사형 선고를 받았음을 깨달은 소방관들도 있었다. #[50] 텔랴트니코프는 53세였던 2004년에 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당시 키예프에 마련된 그의 무덤에는 그를 위한 기념비가 건립되었다.[51] 정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순수 방사능이 원인이라기 보다는 아래의 노심에 집중하다가 전방의 크레인을 못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체르노빌(2019)에서는 앞이 안 보였던 것처럼 묘사하려고 했는지 실제보다 노심의 연기가 더 과장되었고, 노심에 가까워질수록 무전이 끊기면서 벗어나라는 무전을 듣지 못한 채 회피 기동도 없이 크레인을 향해 계속 다가가는 것으로 묘사된다.[52] 건물 구조상 3호기와 4호기는 같은 건물에 대칭으로 들어가 있었다. 맨 위 사진에서 굴뚝을 기준으로 폭발한 4호기의 대칭이 되는 부분이 바로 3호기다.[53] 당시 스웨덴의 포스마크 원자력 발전소에서 직원들이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옮겨가 도착한 동에서 검사를 받자 방사능 수치 경고음이 울렸다. 발전소 내부 수치는 정상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운영 최소 인력들만 제외한 직원들이 모두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다.[54] 스웨덴은 처음에 자신들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 누출이 일어난 게 아닌가 의심했으나 분석 결과 소련으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55] 대한민국에 사고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수도권에는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면서 앞다퉈 급히 우산을 펴는 모습이 뉴스에 방영되기도 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시골 지역에는 우물을 쓰는 곳이 많았는데 체르노빌 이후 시골 우물들에 우물 뚜껑들이 많이 설치되었다.[56] 낙진 영향만 안 받았을 뿐이지 방사능 공포는 극에 달한 상황에서 사고 1년 후 브라질에서 고이아니아 방사능 유출사고가 터지자 사람들이 집단 패닉에 빠지기도 했다.[57] 이 에피소드는 HBO의 드라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시간당 3.6 뢴트겐이란 수치를 처음부터 사용했다.[58] 1 뢴트겐은 약 0.0093 시버트이므로 15,000 뢴트겐은 약 140 시버트다. 목성의 위성 이오의 표면에서 하루 노출 방사선량이 36시버트인 점을 생각해 보자! 일반인의 연간 방사선 허용량은 1 밀리시버트이며 이는 허용량의 14만 배에 달한다.[59] 러시아어로 "Внимание(브니마니예)"는 영어로 Attention, 한글로는 주의, 주목을 뜻하는 단어이다.[60] 2번씩 끊어 말했으며 현재 보존된 녹음 기록 원본에서는 마지막 한 번이 손실되었다. 방사선에 의한 무선 전파 간섭일 수도 있지만 단순 전파 장치에 종종 발생하는 전파 혼선이 원인일 수도 있다. 위키미디어에 등재된 1986년 녹음 원본.[61] Прип'ять. 러시아어로는 프리퍄티(Припять).[62] 아이오딘의 동위원소 중 하나로, 반감기가 8일인 방사성 물질이며 갑상선에 붙어서 갑상선암을 일으킨다.[63] 자세한 것은 방사선방호 약제를 참고하면 된다. 제대로 막아내려면 엄청나게 다양한 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작용도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약제들도 방사선의 급성 장애의 방호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 발암이나 수명 단축 등 만성 장애의 방호에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64] 이 사고를 다룬 디스커버리 채널의 동명의 다큐멘터리 제목이다.[65] 사실 이도 제대로 된 연구에 의함이 아니라 소수 사례를 바탕으로 한 적당한 추정이며, 수백 mSv 정도의 피폭에서의 중장기 피해에 관한 정확한 연구 결과는 없다. 사례가 많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실험해 보는 것도 문제라 연구가 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지금도 그럴 판국에 당시라면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66] 1989-92 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1992-2015 회장.[67] 이 사람들이 한 일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인디 게임이 2020년 9월 스팀에 업로드되었다. 게임 이름은 Liquidators.[68] 우크라이나에서는 'Богатирі(Bogatyri, 보가트리)', 영미권에서는 'Suicide Squad(자살특공대)'로도 불렸다. 자살에 가까울 정도로 위험한 임무에 뛰어들었다는 뜻이었지만 이는 해외 언론에 이들이 실제로 전원 사망했다는 것으로 잘못 알려지는 데 기여했다.[69] 아나넨코는 사고 이후에도 원자력 업계에서 일하면서 안전대책 강화에 힘을 쏟았다. 2001~2010년에 우크라이나 원자력 규제 위원회에서 일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다가 2018년에 완전히 은퇴했다. 베스파로프는 1992년에 아예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로 돌아와 업무를 계속했다.[70] 다행히 핸들은 무사해서 손으로 열었다고 한다.[71] 때문에 물 속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잠수 장비를 메고 사람 키 이상의 깊고 어두운 오염수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와전된 이야기다. 이들이 스페츠나츠 출신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던 이유도 와전된 이야기 속 임무는 고도로 훈련 받은 인원이 아니면 시도도 못 해볼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72] 잘 보면 사진의 밑부분에서부터 하얀 그을음이 기둥처럼 올라와 있는데, 지상에서 올라오는 강한 방사선에 필름이 망가져서 그렇다.[73] 방사능이 너무 강해 로봇들이 모두 고장 났다는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일부 고장난 로봇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끝까지 정상 작동하는 로봇도 있었으므로 이들 덕분에 방사능이 줄기는 했다.[74] 이 방사능 보호의는 거의 모든 부위를 납으로 덮었기 때문에 그 무게가 무려 30kg에 달했다. 중세의 기사들이 입었던 풀 플레이트 아머도 30kg 조금 안 되는 무게였다.[75] 겉으로만 그랬을 뿐 지붕에 위치한 흑연 조각 파편 등과 폐기물들이 전부 시간당 10~100시버트라는 무시무시한 방사선을 뿜어대고 있었다. 맨몸으로 올라갔다간 1시간도 안 돼서 사망이 확정된다.[76] 무서운 장면이 전혀 없는데도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잘 묘사하였으며, BGM은 가이거 카운터가 작동하는 소리를 묘사한 것이다. 영상의 마지막에서 한 인부가 그만 흑연에 발이 끼었고 탈출하긴 했으나 서둘러 돌아오려다가 물웅덩이에 한 번 넘어졌는데, 돌아와서 보니 앞서 있던 발이 흑연에 끼었던 사고로 인해 장화가 찢어져있었다. 즉 그 인부는 이미 방사능에 급격하게 노출되어 버렸다. 이걸 본 감독관이 내뱉은 "병사 동무, 자네 역할은 끝났네.(Comrade soldier, you're done.)"는 이제 (해야 할 일은/자네 목숨은) 끝났다중의적 표현을 사용한 명대사다.[77] 이 때문에 직접 보면 위험하다는 게 메두사 같다는 사람들의 이 있다. 사실 코륨(corium)이라는 게 이런 특성 때문에 과학자들에게 메두사라고 불리기도 한다.[78] 만약 사고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찍었으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찍었다면 아래 사진처럼 방사능이 필름을 손상시켜 사진에 흰색 배경만 나왔을 것이다.[79] 사진 속의 인물은 아르투르 코르네예프(Артур Корнеев, Artur Korneyev, 당시 46세 정도)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핵 과학자이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보수 책임자로, 2021년 기준으로는 71세로 생존해 있으나 코끼리 발을 촬영하는 등 그 근처에 수백 번은 다녀갔기 때문에 건강이 크게 나빠져서 병원 신세라고 한다.[80] 빛 줄기는 카메라 셔터 속도에 의한 것이지만 코르네예프의 잔상은 필름에 있던 아이오딘(할로겐화은)이 방사능을 흡수하면서 손상되어 생긴 것이다. 필름 카메라는 촬영 중 다른 빛이 들어가면 필름이 망가지는데, 감마선 등의 방사선은 관통력이 매우 높아 필름까지 그대로 뚫고 들어가 필름을 망가뜨린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코끼리 발이 얼마나 많은 방사선을 내뿜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디지털 카메라였으면 다가간 순간에 회로가 타버렸을 것이다.[81] 이 사진은 인부 1명이 모서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다가 뛰어가면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고 발생으로부터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필름이 심하게 손상되었고 사진 화질도 좋지 않다. 훗날 이 사진을 찍은 인부는 방사능 피폭으로 목숨을 잃었다. 체르노빌 사고 관련 자료로 잘 사용되지도 않는 사진 1장에 사람 1명의 목숨이 날아간 것이다. 사고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코끼리 발의 방사능 수치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부분.[82] 목성의 위성 이오에 가야지 36Sv의 방사선에 피폭된다. 그만큼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일 수 있다.[83] 사건 당시에는 약 2000°C였다.[84] 이 사람은 체르노빌 주변을 탐사하면서 여전히 방사능에 절어 있는 다양한 풍경과 사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같이 올라오는 유튜브 동영상을 참조.[85] 알파선은 헬륨원자핵(알파입자)이므로 양극을, 베타선은 전자이므로 음극을 띄고 주변 전자기력에 서로 반대 방향으로 끌려서 휘어진다. 감마선은 전자기파이므로 휘어지지 않는다. 헬륨 원자핵이 전자보다 쿨롱 힘이 더 크기 때문에 더 많이 휘어진다.[86] 이 정도의 피폭량으로도 인체의 혈액 구성이 달라져 백혈병이 걸릴 수도 있다. 사실 1Sv 이상의 피폭은 적은 양이 결코 아니라서 통상 이 정도 피폭된 경우 사람에 따라서 피해가 천차만별인 만큼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통계적으로 이 정도 구간까지는 생존 혹은 치료 받고 좋아진 환자도 많지만 더 높은 수Sv, 특히 10Sv 이상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대부분 사망한다.[87] 레가소프는 소형 계측기의 한계로 인해 실제 방사선량이 매우 적게 측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88]130시버트[89] 사건 수습을 진두지휘한 소련 장관회의 부의장 보리스 셰르비나의 지시였는데, 정작 셰르비나 본인도 1990년에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암으로 사망했으나 자신의 지시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체르노빌 사건의 사망자는 아니다.[90] 예를 들면 자연사한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마저 피폭으로 죽었다고 카운트한 등의 사례가 있다.[91] 이 지역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사마셜'이라고 불리는 체르노빌 출신뿐으로,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죽음을 맞고 싶어하는 노인들에 한해 살 수 있다고 한다. 식량은 내부 피폭을 막기 위해 외부에서 가져와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게 밀봉된 채로 지급된다. 전면 무료 의료 지원이 제공되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조건 건강검진을 받는다.[92]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도쿄는 연간 7밀리시버트. 원래 자연 방사선은 11~1 사이를 왔다갔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노출된 환경은 이보다 10배 강했다.[93] 원자력 발전소 직원 중 생존자인 알렉산드로 유브첸코가 인터뷰 중 "발레리 호뎀추크가 서 있었을 자리가 붕괴된 잔해들로 덮여있는 것을 보고 호뎀추크가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으며, 이때 유브첸코는 거대한 빛줄기가 파괴된 원자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봤다고 한다. "푸른 색을 띤 빛이었는데 레이저 같았으며, 매우 아름다웠다"고 언급했다.[94] 폭발로 인해 유해 자체가 흔적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석관 제작 과정에서 지지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북쪽 펌프룸에 콘크리트를 채웠기 때문에 석관을 해체하지 않는 이상 시신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95] 위에서 서술한 그 첫 번째 사망자 발레리 일리치 호뎀추크를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96] 소리가 작았기에 간호사가 귀를 가까이 대고서 들었다고 하며, 정황상 자신 근처에 있으면 당신들 역시 피폭될 것이니 접근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인다.[97] 사고 반경 10km 내에 있던 마을 중 하나이며 사고 이전에는 986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6년 5월 3일 주민 대피가 시작되었고 대피 후 모든 목조 주택들을 철거하여 매립했다고 하며, 사고 이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 마을이다.[98] 원자로의 출력 이상을 확인하고 정지를 시도했다는 설과 실험 종료 후 일상적으로 원자로를 정지하는 절차에 따라 실험이 종료되어서 원자로를 정지시키려 했다는 설이 있다. АЗ-5 작동 과정에는 아키모프와 톱투노프만이 참여했기에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후 조사위원회에서도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생존 직원의 증언에 의하면 버튼이 눌려질 때 제어실 내부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했다고 한다.[99] 2006년 BBC판 체르노빌 다큐에서 발전소 동료들이 피폭량을 뢴트겐 단위로 말할 때 "난 1500뢴트겐"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1500뢴트겐을 시버트로 환산하면 15시버트다.[100] 진입했을 때 이들이 본 것은 아래의 어둠 속에 있는 분화구 같은 원자로 잔해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란색 광선에 비쳐 보인 옆으로 쓰러진 원자로 뚜껑 엘레나와 그것에 장착되어 있던 증기관과 연료봉들의 너덜너덜해진 잔해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자신들이 폭발한 원자로의 불타오르는 분화구를 직접 내려다보았음을 깨닫고 공포에 질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애초에 제어봉은 인력으로 조작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제어봉 수동 조작을 지시한 댜틀로프도 잠시 뒤 이 점을 깨닫고 밖에 나간 이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이미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101] 당시 소련은 군대, 경찰, 소방이 같은 계급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서구권 국가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다. 경찰로 따지면 경장에 해당되며 소방관으로 따지자면 소방교에 해당된다.[102]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의하면 남편이 죽을 때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103] 이때 의사생체 원자로라고 강력히 경고했다.[104] 그러나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의사로 일했던 알라 샤피로에 의하면 피폭자와 접촉해도 피폭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바실리가 오염된 소방복을 벗고 샤워를 했기에 루드밀라가 접촉했다고 해도 위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피폭자 치료에 관여한 로버트 피터 게일도 역시 피폭자 자신에게 방사선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폭의 위험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 당시인 1986년에는 이런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105] 소방관은 상당한 신체 능력을 요구하는 직업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106] 사고 당시에는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사고가 일어났던 우크라이나와 함께 소련의 구성국이었다.[107] 만약 바람이 북풍이었다면 키이우, 하르키우 등 유수의 대도시에 낙진이 떨어졌을 테니 더 큰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체르노빌 인근 지역은 북쪽 시베리아의 찬 공기가 내려와 보통 북풍이 부는데 이 날에는 유독 남풍이 불었다.[108]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 중에 이 분유 때문에 아토피, 천식, 비염 등등 알레르기 질환자가 많다는 얘기가 있지만 당시 학계에서 별 관심이 없었는지 이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없고, 관련 기업들 대다수가 나중에 당시 방사능 기준치로는 괜찮아서 그랬다면서 형식적으로나마 사과한 데다 1990년대 후반에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파산한 기업도 많아서 이 문제로 시민들이 어떠한 배상을 받기는 어려울 듯하다. 중국의 핵실험으로 인한 황사능 유입을 알레르기 질환자 증가의 원인으로 꼽기도 하지만 이건 50년 전부터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날아오기 때문에 특정 세대만 적용시키긴 어렵다.[109] 또한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체르노빌 냉각호수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유럽메기의 공격을 당해 한 팔을 잃는 사고가 있었다는 도시전설이 소개되기도 했다.[110] 이 부분은 하나의 레토릭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당시 체르노빌 복구 비용은 3,580억 달러. 2011년의 대한민국 국가 예산을 뛰어넘긴 하지만 소련 GDP의 수~15% 규모라는 추정치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계획경제 체제인 소련 경제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겠지만 OECD 국가의 예산 규모는 그 나라 GDP 대비 20~40% 선이다. 국가가 많은 부분을 책임지는 북유럽 복지국가가 40% 이상, 복지 수준이 낮은 한국멕시코가 20%로 최저다. 평균 30% 수준이다. 그렇다면 국가 예산의 절반 정도다.[111] 현재 씌워진 대형 돔 아래에는 소련 시절 방사능 유출을 막기 위해 철근과 콘크리트로 석관을 만들어 임시적으로 봉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4호 발전소를 뒤덮은 돔과 석관은 문자 그대로 그의 무덤이 되어 버린 셈이다.[112] 다만 폭발에 휘말린 데다 40여 년이 지난 현재 그의 시신이 온전히 남아있을진 의문이며, 남아있더라도 부패하여 일부분만 남아있거나 폭발로 인해 사고 당시 아예 불타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13] 각각 1호기는 폐쇄, 2호기는 화재로 인한 손상, 3호기는 가동정지, 4호기는 폭발로 인한 훼손, 5·6호기는 건설 중단.[114] 관광 루트가 매우 다양한데, 단순 프리피야트 관광 정도인 루트부터 발전소 내부까지 들어가는(!) 루트까지(심지어 이 루트는 사고기인 4호기의 통제실까지도 방문한다. 프리피야트의 2~3배에 달하는 8~10mSv 정도다.) 매우 다양하다.[115] 이전 판에는 로형이 1950년대의 낡은 것이라 수명을 다했다는 잘못된 서술이 있으나, РБМК는 50년대의 로형이 아니라 АМ-1이나 АМБ같은 이전 세대의 채널형 원자로의 운용실적을 바탕으로 개량된 것이며, 서방의 PWR과 마찬가지로 РБМК-1000, -1500 및 РБМКП-2400 등의 개량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이 로형을 설계한 НИКИЭТ 역시 사고 후 최신 안전기준에 부합하는 РБМК의 발전형인 МКЭР을 설계하였으니, 만약 이것을 싸잡아 1950년대의 낡은 로형으로 한다면 PWR 역시 설계수명을 다한 구식 원자로에 불과하게된다.[116] Водо-водяной энергетический реактор, 물-물 에너지 반응로. 러시아식 가압경수로.[117] 사실 로비사 원자력 발전소는 다 서방제로 때울 생각이었는데, 당시 핀란드화의 영향으로 VVER을 들고 오는 대신 핀란드 원자력 위원회는 소련보고 '니들 거 사줬으니 우리가 나머진 다 한다!'는 식으로 안전 기준, 운용 설비 등을 다 가져왔다.[118] 구글 지도 위성 사진으로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데, 체르노빌 원전과 원자로 배치가 똑같다. 심지어 1, 2호기가 따로 떨어져 있고 3, 4호기가 굴뚝을 중심으로 대칭인 것까지 똑같다.[119]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구 명칭이며 레닌그라드주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력 30%를 공급한다. RBMK 대신 VVER을 짓고 있으며 로사톰은 이 VVER을 갖고 열심히 팜플렛을 만들어 팔아먹는 중이다.[120] 새롭게 씌운 석관이 빗물의 유입을 막아 원자로 내부가 건조해진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고 한다.[121] 2GB가 넘는 고용량 맵이라 만일 플레이 중에 ED_alloc: No free edicts라는 엔진 에러 문구가 뜬다면 스킨 및 애드온을 많이 구독한 문제일 가능성이 높으니 어쩔 수 없이 애드온 구독한 걸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맵 제작자는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122] 본작의 시간적 배경은 1984년이다.[123] 이 미션의 배경인 1996년 당시에는 신참 소위였다.[124] 7km/l만 넘겨도 충분히 가능하다.[125] 지그재그로 운전하다가 경찰에 걸린 후에는 가속 잠깐 하다가 브레이크 가속 잠깐 하다가 브레이크를 반복했으며, 경찰에 걸려서 정차하는 동안에도 기어를 중립에 넣고 고RPM을 유지하는 수법을 썼다.[126] 차 안에 짱돌 적재 및 트렁크 열고 달리기. 중간에는 잠깐 운전석 문도 열고 달렸다.[127] 케이블을 뽑아 ECU에서 엔진 제어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128] 에란겔은 어떠한 실험 중 사고로 모두 대피해야 해서 버려진 지역이라는데, 이 밀타 파워 지역의 폭발이 이 실험 실패를 뜻하는 듯하다. 결국 체르노빌이랑 같은 처지다.[129] 간이 차폐형 불도저 용도로 사용하였다. 실제로는 원본의 용도 그대로 4호기 원전의 벽을 포격해 부수고 액화질소 파이프를 투하하려고 했으나 너무 위험하다는 결론 때문에 이렇게 쓰인 것.[130] 프리피야트 폐차장에 이렇게 버려져 있다.[131] 나머지 하나는 하바롭스크 지방에 위치해 있다.[132] 소련은 두가 말고도 다른 종류의 미사일 감지 레이더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지만 두가는 10MW라는 어마무시한 전파 출력을 내뿜고 있어서 본래 용도인 탄도미사일 감지 외에도 부가 효과로 유럽 전역에 무선 통신 장애를 유발하는 재머 역할까지 했기 때문에 소련 당국은 의외의 용도에 감탄하여 이 물건을 애지중지해 유럽 국가들의 소통을 방해할 목적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한 순간에 가동이 중지되어 버리자 재밍도 불가능해졌고, 사고 이후 가동이 멈춰버리자 유럽 국가들도 이 물건의 위치를 유추해 버리게 되었다. 체르노빌 사고와 함께 재밍이 사라졌으니 위치도 체르노빌 근교임을 알게 되는 건 당연한 일.[133] Черный(Black)+ полынь(Mugwort)=Чернобыл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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