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2:25:15

요한의 묵시록

요한 묵시록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계시록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의 웹툰에 대한 내용은 계시록(웹툰)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bible-1297745_960_720.png 성경의 구성
{{{#!wiki style="margin:0 -10px -5px; word-break:keep-all"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구약성경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구약성경
오경 (모세오경) 창세기 · 출애굽기 (탈출기) ·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
역사서 여호수아 · 판관기 (사사기) · · 사무엘 (상 + 하) · 열왕기 (상 + 하) · 역대기 (상 + 하) · 에즈라 (에스라) · 느헤미야 · 에스델 (에스더/에스테르)
시가서 · 시편 · 잠언 · 전도서 (코헬렛) · 아가


(선지서)
대​예언서 (대선지서) 이사야 · 예레미야 · 애가 (에레미야애가) · 에제키엘 (에스겔) · 다니엘
소​예언서 (소선지서/열두 예언서) 호세아 · 요엘 · 아모스 · 오바디야 (오바댜/오바드야) · 요나 · 미가 (미카) · 나훔 · 하바꾹 (하바쿡/하박국) · 스바니야 (스바냐) · 하깨 (하까이/학개) · 즈가리야 (스가랴/즈카르야) · 말라기 (말라키)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구약의 제2경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7f7f7f><colcolor=#fff> 제2경전
가톨릭 · 정교회 토비트 (토빗) · 유딧 · 마카베오기 (상 + 하) · 지혜서 · 집회서 · 바룩 · 다니엘 일부 · 에스델 (에스더/에스테르) 일부
정교회 에스드라스 1서 · 송시 · 마카베오기 3서 · 므나쎄의 기도 · 시편 151편
테와히도 에녹 1서 · 희년서 · 메카비안 1서·2서·3서 · 바룩의 나머지 말 · 요시폰
그 외 에스드라스 2서(Ge)(aM)(SY)(eT) · 마카베오기 4서(조지아) · 바룩의 편지(시리아)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신약성경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신약성경
복음서 마태오 (마태) · 마르코 (마가) · 루가 (누가/루카) · 요한
역사서 사도행전
바울로 서간 (바울서신) 로마 · 고린토 첫째 (고린도전/코린토 첫째) · 고린토 둘째 (고린도후/코린토 둘째) · 갈라디아 (갈라티아) · 에페소 (에베소) · 필립비 (빌립보/필리피) · 골로사이 (골로새/콜로새) · 데살로니카 첫째 (데살로니가전/테살로니카 첫째) · 데살로니카 둘째 (데살로니가후/테살로니카 둘째) · 디모테오 첫째 (디모데전/티모테오 첫째) · 디모테오 둘째 (디모데후/티모테오 둘째) · 디도 (티토) · 필레몬 (빌레몬) · 히브리
보편서간 (공동서신) 야고보 · 베드로 첫째 (베드로전) · 베드로 둘째 (베드로후) · 요한 서간 (요한1·2·3) · 유다
예언서 묵시록 (계시록)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테와히도 정교회의 확장된 정경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7f7f7f><colcolor=#fff>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Sinodos (Sirate Tsion · Tizaz · Gitsew · Abtilis) · I Dominos · II Dominos · Clement · Didesqelya }}}}}}}}}
}}}}}}}}}}}} ||
성경의 목차 | 위경 및 제안된 문서
<rowcolor=#ffffff> ◀ 이전 요한의 묵시록
묵시
/
유다의 편지
파일:요한계시록.jpg
언어별 명칭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그리스어 Αποκάλυψη του Ιωάννη
라틴어 Apocalypsis Ioannis
Revelatio Ioannis
영어 Book of Revelation
Apocalypse of John
Revelation to John
한국어 가톨릭: 요한 묵시록(默示錄)
성공회, 정교회: 요한의 묵시록(默示錄)
개신교: 요한계시록(啓示錄)
중국어 간체자: 若望默示录
정체자: 若望默示錄
일본어 ヨハネの[ruby(黙示録,ruby=もくしろく)]
기본 정보
저자 사도 요한[1][2]
연대 AD 90–130년대
분량 22장

1. 개요2. 설명3. 명칭4. 해석론5. 내용
5.1. 배경5.2. 1~3장5.3. 4~7장5.4. 8~13장5.5. 14~19장5.6. 20~22장5.7. 재요약
6. 등장 개념 및 해석
6.1. 가톨릭의 해석6.2. 개신교의 해석6.3. 이상주의적 해석6.4. 6666.5. 144,000명6.6. 7년 대환난6.7. 두 증인6.8. 황충6.9. 곡과 마곡의 전쟁6.10. 천년왕국
7. 논란8. 대중매체9. 기타

[clearfix]

1. 개요

ἐγὼ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ὦ, ὁ πρῶτος καὶ ὁ ἔσχατος, ἡ ἀρχὴ καὶ τὸ τέλος.[3]
[egō to alpha kai to ō ho prōtos kai ho eschatos hē archē kai to telos]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prōtos과 마지막eschatos이며 시작archē과 끝telos이다. (공동번역성서)
요한의 묵시록 22장 13절[4]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요한의 묵시록 22장 20~21절 (공동번역 성서)[5]

성경의 마지막 권으로 73번째/66번째 권이며 신약성경의 유일한 예언서다.

2. 설명

요한 묵시록은 결코 '비밀스러운' 책이 아니다. 당시 독자들은 이 책의 묵시 문학적 상징 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요한 묵시록이 그들에게서 거둘 수 있었던 성과는, 그 교회들의 시대·상황(狀況)·문학적 환경 등을 알아야만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슈테판 슈라이버Stefan Schreiber(1967~)[6]/마르틴 에브너Martin Ebner(1945 ~)[7] 등 공저, 《신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3), 874쪽

상술했듯 요한 묵시록은 결코 비밀스러운 책이 아니지만, 관련 배경 및 성경 전체(구약-신약 모두)는 물론이고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제2성전기 유대교 묵시 문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유대의 묵시 문학의 정수로,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 등 예언서와 더불어 풀이와 해설에 이론이 많은 책이다. 단일한 해석을 고수하는 것이 우려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문에 과거부터 자기 임의대로 해석하여 그릇된 종말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나왔고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다. 예를 들자면, 조만간 종말이 닥치니 전 재산을 다 교주에게 갖다 바치라거나, 아래처럼 예수의 재림을 얘기하는가 싶다가 뜬금없이 "내가 그 예수다" 하는 등이다. 건물 현수막이나 길가의 종교 서적 비치대 같은 데에 "요한계시록 강해(해설)"라고 써 있는 경우나, 묵시록 내용을 독자 해석하여 자기가 재림 예수이니 하느님이니 자칭하는 등의 사이비 종교들이 대표적. 안식교에서는 묵시록 12장 17절의 '남은 자손'이 자신들이라고 주장하는 고로 묵시록 강해에 상당히 힘을 많이 쏟는다. 학교법인 삼육학원 소속 초-중-고등학교, 특히 초등학교 레벨에서 아주 상세하게, 그것도 정규 수업으로 개신교 기준 성경 66권 전체 강해를 하면서 묵시록을 상세하게 가르친다.

해당 교파의 해석은 상당히 세대주의적인데, 묵시록 6장 12절의 지진을 리스본 대지진으로 해석할 정도. 재밌는 점은, 자의적인 해석을 내건 사람치고 묵시록 후반부의 이 예언의 말씀을 가감[8]하지 말라는 구절을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묵시 22:18-19).[9] 이는 역으로 그동안 요한 묵시록 강해에 한국 개신교계가 소홀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현재 목사들의 설교들을 보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이 등장하는 4장 이후로는 거의 인용조차 잘 되지 않는 현실이다. 거의 없는 내용으로 치부하는 수준이라 강단에서의 강해 설교나 신학과에서의 전공 수업이 아니라면 일반 평신도가 요한 묵시록에 대한 전문적인 해설을 들을 길이 없으니, 무지의 영역을 이단이 파고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개신교 종파뿐만이 아니라 가톨릭에서도 역시 매한가지로, 여기는 밑에 서술된 '과거주의적 해석'[10]으로 묵시록을 보기에 이에 대해 중요히 여기지도 않는 상황이다.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강림(초림)을 약속한 책이라면,[11] 신약, 그중에서도 특히 요한묵시록은 세상 마지막 때에 있을 예수의 재림을 약속한 책이다. 묵시록 22장 전장의 내용은 이 예수가 언제, 어떻게, 어떤 일 이후에, 어디에 임하여 어떤 일을 하는가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의 골자는, 세계 말일에 사탄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부패한 세계를 심판하여 끝나고, 그리스도가 세상의 주권자로 통치하는 새로운 천년왕국 시대를 열게 되며, 그리고 천년왕국 시대 이후, 최후의 심판인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이 있게 되고, 그 이후 오게 될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내용이다. 창세기 1장이 천지 창조라면 요한의 묵시록 22장은 새 하늘 새 땅의 지상 임재로 장엄하게 마무리되는데, 성경의 완결을 알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성경의 완전히 끝을 맺는 문장으로는 예수가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라며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최종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거기에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라는 요한의 마지막 말과 세계에 퍼진 기독교도들에게 남기는 축복의 말까지 성경을 마무리 짓기에 손색없는 문장들이다.

또한, 상당히 많은 작가들의 영감의 중심이 된 글이기도 하다.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도 또한 예수의 재림과 그 징조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재림'이란 단어 덕분에 세상에는 수많은 자칭 재림 예수가 등장한다.

내용이 굉장히 센세이셔널하기 때문에 이를 모티브로 해서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오멘, 세븐사인, 리핑 등. 기독교인들에게 먹히기 좋은 소재가 많다. 소설 소재로 두고두고 써먹히는 죽음을 의미하는 푸른 말, 묵시록의 붉은 용, 666, 짐승, 묵시록의 4기사, 아마게돈 등이 여기서 나왔다.

3. 명칭

일반적으로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요한 묵시록'으로, 일부 교파[12]를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요한계시록'으로 부르고 표기한다. 묵시(默示)란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고 은연중에 뜻을 나타내 보임'이라는 의미이므로, 묵시록이란 '묵시한 내용을 적은 글'인 셈이다.

원어인 코이네 그리스어 '아포칼륍시스(ἀποκάλυψις)'는 '드러냄, 계시, 벗김.'의 뜻을 가진 명사로, '드러내다, 나타내다, 폭로하다.'라는 뜻인 동사 '아포칼륍토(ἀποκαλύπτω)'에서 유래했다. 이의 번역인 '묵시(계시)'는 '예언'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말이다. 성경의 맥락에서 '예언'은 원칙적으로 '신탁'이라는 뜻이며, 미래 예지라는 좁은 뜻이 아니다. 반면 '묵시(계시)'는 환시적 성격이 강하며, 이는 역사의 신비를 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묵시'와 '계시'라는 번역어를 비교하자면, '묵시'는 '신탁(예언)'과의 혼동을 방지하는 대신 조금 더 어려운 말이고, '계시'는 쉽지만 '신탁(예언)'과 혼동하기가 쉽다.

4. 해석론

요한 묵시록에서는, 성경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는 것을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지식이 없다면 묵시록, 나아가서는 성경의 전체 내용을 하나하나 보고 자신의 생각을 더하거나 몇몇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빼서 단정해 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이며 하느님이 아니면 확실한 해석은 없다고 본다.

앨런 F. 존슨이 편집한 묵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본다. 해설자들의 성경 주석에 의하면 크게 4가지 해석 방법이 있는데, 사도 요한을 기점으로 하여 미래주의적 해석, 과거주의적 해석, 역사주의적 해석, 상징주의적 해석이다. 상징주의 → 역사주의 → 미래주의, 과거주의로 해석 방법이 바뀌어 왔기 때문에 주석도 많고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이 외에도 온갖 소수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그 예로 라그나로크 같은 다른 신화의 몰락과 비교하여, 난세의 재래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다룬다는 해석도 있고,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언젠가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 역사를 뭉뚱그려 썼다는 해석도 있다. 또한 각 해석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이 부분은 특히 미래주의적 해석에서 부각되는 편이다. 묵시록이 쓰일 당시에는 핵무기 같은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어찌 됐든 요한 묵시록을 읽을 때에는 누가 화자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화자가 갑자기 바뀌어 있는 경우도 허다하고, 집중해서 제대로 읽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게 될 수도 있다. 심지어는 누가 말하는 건지를 찾다가 숫자에 집착하는 등의 오류를 범하고 정말로 중요한 맥락을 누락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해석의 오류가 요한 묵시록에 대한 수많은 오해를 낳고 이런 오해를 곧대로 믿는 사이비를 양산하는 중대한 원인이기도 하니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이 주장한 요한 묵시록의 해석을 참고할 때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관련 분야의 전공자이거나 연구실적이 있는 인물인지, 어떠한 근거와 맥락을 바탕으로 이렇게 추론하고 해석을 했는지 각주까지 꼼꼼하게 챙겨서 읽어야 한다. 아무 근거 없이 그럴듯하게 꿰어맞춘 카더라에 몰입하는 것은 주화입마에 빠지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5. 내용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개신교 용어로 적힌 요약에 대한 내용은 성경/신약성경/요약 문서
번 문단을
요한계시록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요한의 묵시록 전문

5.1. 배경

파일:external/media1.shmoop.com/john-vision-heaven.jpg

전승에 따르면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이 요한이 실제 '사도 요한'이라고 명시된 내용은 없으나 전승들과 묵시록의 내용들로 미루어 저자가 사도 요한일 것이라고 여긴다. 전승에 따르면 이 책은 사도 요한이 서기 90년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문에 파트모스(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가 미래, 즉 예수 재림 때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이상과 환상(비전)으로 본 것을 기록한 예언서라고 한다.

사도 요한이 현재의 그리스의 파트모스 섬(Πάτμος)에 유배 생활을 했다고 알려졌고, 본 책에서도 저자 스스로가 파트모스에 있다고 썼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요한묵시록 본서에 '유배'라는 표현이 있다고 알지만 사실 본문에서 '유배'되었다는 표현은 없다. 그저 '하느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파트모스에 왔다고 썼을 뿐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저 구절을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유배 왔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계시를 받을 줄 알고 일부러 한적한 곳을 찾아 파트모스 섬에 짱박혔다는 의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설대로라면, '하느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라는 말은 요한 묵시록 그 자체를 가리킨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전승에 의하면 요한이 서기 96년(도미티아누스가 죽고 네르바가 황제가 된 해)에 파트모스에서 풀려나 이후 에페수스로 가서 요한 서신(요한1~3서)을 쓰고 트라야누스 황제 제위 초에 사망했다고 한다.

다만 예언서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들만을 다루었다고 멋대로 단정해 버린다거나, '당시의 예언서니까 초대 교회의 일(로마 시대의 기독교 박해)만 다루었겠지'라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부 신학자들은 요한 묵시록이 그냥 로마 제국 시대에 일어난 일을 묘사한 것일 뿐이며 미래에 대한 것은 그저 상징이라는 견해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 책이 말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은 '저자'의 입장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이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와 심판'을 다루었다고 해석하는 쪽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톨릭에서도 이렇게 가르친다.[14] 하지만 이러한 로마 제국의 박해와 연관 지어 해석하려는 쪽에서는, 요한 사후~테오도시우스 시대때의 국교화 이전 사이의 시기가 아니라 주로 1세기 시기의 박해로만 한정해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크다. '학술적-사료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하려는 쪽에서 이러한 식의 해석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신학적에서 성서비평학을 수용하면서 성서로서 다루는 경우에도 현재적인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도 이 책을 '로마의 신자 박해'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아직도 성취되지 못한 예언[15]도 있고, 이미 성취된 것으로 해석되는 일부 예언마저도 "특정 시대를 초월하여 일어날 일을 지나치게 과거의 벌어진 일로 제한시킨다"라는 수많은 신학자들의 반박[16], 갑론을박과 해석이 존재한다. 저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박해는 과거에도 당시에도 일어나던 일이었으며 또한 미래에도 일어날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묵시록의 내용을 과거의 일만으로 볼 것인가, 미래에 대한 메시지로 볼 것인가 하는 두 관점에서 어느 것에 무게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게 갈린다. 특히 개신교만 해도 이 예언이 온전히 앞으로 실현될 것으로 보는 교파도 매우 많다.[17]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런 식의 해석 논쟁들이 비단 묵시록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묵시록이 성경 목록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마술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요한 묵시록과 다른 요한 문서들의 문체나 종말론에 대한 입장 등이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저자 역시 사도 요한이 아니라 후대의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으며, 성서비평학에서는 이쪽이 다수설이다. 이는 고대에도 알려져 있었던 쟁점으로 초기 교회의 교부들 중 상당수가 사도 요한이 저자라는 데 부정적이었을 정도이며, 요한묵시록이 정경에 포함되는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던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학술적으로는 묵시록의 저자 요한을 '파트모스의 요한'으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5.2. 1~3장

이 책을 순서대로 읽어보면 1장에는 요한이 이 묵시록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고, 2~3장에 걸쳐서는 (소)아시아[18]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실려 있다. 이 교회들의 위치의 공통점은 로마 황제의 직속령에 속한 교통의 중심지이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들이고 각각의 거리가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일관적으로 7번에 걸쳐 '대상이 되는 교회 - 예수를 나타내는 수식어 - 예수가 교회의 상황에 대해 잘 안다는 선언 - 칭찬 혹은 질책 - 주로 회개를 촉구하는 지시 - 지시를 지켰을 경우 하느님 나라에서 내릴 언약 -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강조' 순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칭찬만 받는 교회는 스미르나와 필라델피아, 칭찬과 질책을 같이 받는 교회는 에페소·페르가몬·티아티라, 질책만 받는 교회는 사르디스와 라오디게아이다. 각 도시의 특성에 따른 비유법이 볼거리. 하느님의 천사에 의하여 전해지는 메시지를 통틀어 가장 경계하고 있는 것은 당 로마 제국에 타협하는 니콜라오파와 거짓 예언자, 영지주의 즉 이단 교리다.

특이하게도 이 모든 교회들은 미덕과 악덕이 공존한다.

묵시록은 에페소 교회는 믿음에 대한 열정을, 스미르나 교회는 인정받지 못하고 비난을 받음에도 올곧은 믿음을 버리지 않은 의지, 페르가몬 교회는 악의 중심지에 놓여 있음에도 굽히지 않는 의연함을, 티아티라 교회는 신앙을 왜곡하지 않는 순수한 태도[27]를, 사르디스 교회는 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속에서도 올바른 신앙을 지켜낸 자들이 있음을, 필라델피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올바른 신앙을 지켰음을, 즉 잘 모르고 연약하나 치우치지 않고 올곧게 있음을 칭찬한다. 심지어 라오디케이아 교회 또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으나 들을 귀가 있다[28]는 것으로 칭찬하고 있다.

한편, 미덕과 별개로 묵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모두가 문제(악덕)를 가지고 있는데,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대놓고 꾸짖는 내용만 나오듯 완전히 그릇된 길로 가고 있으며, 사르디스 교회는 교회의 무리가 악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티아티라 교회는 거짓 예언자 이제벨에게 속아 넘어가있으며, 페르가몬 교회는 무리 안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와 "니콜라스 당"의 자가 있음을[29], 에베소 교회는 니콜라스 당을 지지하는 자들이 있으며 첫 사랑을 버렸음을, 스미르나 교회는 눈앞에 놓은 고난을 두려워함을 지적받으며, 심지어 필라델피아 교회도 "미약한 상태"에 있음을 지적받는다.

5.3. 4~7장

4장부터 이 세상의 마지막 날과 최후의 심판, 새 땅, 새 하늘을 묘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어느 때인가 세상에는 예정된 심판의 날이 올 것이고, 그때 메시아재림하여 합당(合當)한 자와 합당치 않은 자를 가려 천국으로 올려보낸다고 한다.

5장에서 6장까지, 어린 양은 어좌의 앉은 이에게서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아 그 일곱 봉인을 차례로 뜯고, 묵시록의 4기사를 시작으로 7번의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일곱째 봉인을 뜯기 전, 천사들이 '하느님의 종'들에게 인장을 찍어준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한 지파당 12,000명씩 144,000명이 나와 인장을 받고, 그 다음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족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하느님을 찬미한 뒤 어린 양의 피로 옷을 빨고 하느님의 어좌 앞에 앉는다.

5.4. 8~13장

7장에서 선택된 이들 모두가 세이프 존에 안착하자, 8장에서는 어린양이 마지막 일곱째 봉인을 뗀다. 반 시간의 침묵 뒤, 나팔을 들고 나온 일곱 천사가 향으로 의식을 치른 뒤 차례로 나팔을 분다. 그러자 또다시 7번의 재앙과 기적이 일어난다.
나팔이 모두 불어진 뒤 여인과 용이라는 2가지 표징이 나타난다. 하늘에서 발 밑에 달을 두고 "12개 별로 된 관을 머리에 쓴 여인"과[44][45] 머리 7개와 뿔 10개의 붉은 용[46]이 나타났는데, 악마 혹은 사탄이라고도 불리는 용(드래곤)은 하늘의 별 3분의 1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고,[47] 여인이 아이를 낳자마자 삼키려고 대기한다. 여인은 아들을 낳고, 아들은 곧 하느님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여인은 광야로 달아나 1,260일(3년 반) 동안 하느님이 마련한 은신처에 몸을 숨겼고, 용은 미카엘과 천사들에 의해 처단되어 땅으로 떨어졌지만 여인을 끝까지 쫓아간다. 그러나 여인은 독수리 날개를 달고 날아가 광야에 있는 은신처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3년 반) 동안 부양을 받는다.[48] 용이 물을 뿜어 여인을 공격했지만 땅이 그 물을 모두 먹어버려 화가 나 타깃을 변경한다. 용 '사탄'은 여인의 남아있는 자손들과 싸우기 위해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두 짐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5.5. 14~19장

14장에는 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동안 시온 산 위에 어린 양과 144,000명의 선택된 선량한 사람들이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채 서서 새로 배운 노래를 부른다. 또 세 천사가 차례로 나와 하느님을 찬미하고 바빌론의 몰락을 알리며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다. 요한은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라고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렇게 환시는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7개의 재앙이 아직 더 남았다. 천사의 경고는 곧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인 것이다.

요한은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금관을 머리에 쓰고 손에 낫을 든 채 흰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걸 본다. 천사가 그에게 수확할 때가 됐다고 알리자 그는 땅에 낫을 휘둘러 곡식을 거둔다. 불에 대한 권한이 있는 또 다른 천사가 날카로운 낫을 들고 나와 포도송이를 수확해 도성 바깥에 있는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 넣었고, 그것을 밟았더니 피가 뿜어져 나왔다.

요한은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불 섞인 유리 바다 위에 용 '사탄'의 무리와 싸워 이긴 사람들이 서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었다. 일곱 천사는 '하느님의 분노가 담긴 금 대접'을 받고 나와 차례로 쏟는데, 이것이 요한묵시록 16절의 내용이다.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에게 물 위에 앉아 있는 한 탕녀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갖가지 보석과 금으로 치장했으며, 손에는 더러운 것들이 가득 담긴 금 잔을 들고 있다. 또한 그 여자의 이마에는 '땅의 탕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큰 바빌론'이라고 적혀 있고, 이 여자는 순교자의 피에 취한 채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짐승을 타고 있었는데, 요한이 이것을 보고 놀랍게 여기자 천사는 요한에게 요한이 본 것들이 상징하는 바를 알려준다.
-일곱 머리: 이미 망한 다섯 왕, 지금 있는 한 왕,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를 한 왕까지 총 7명의 왕을 상징한다.
-짐승: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장차 무저갱에서 올라와서 결국은 멸망할 것인데,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들은 이 짐승을 보고 놀랄 것이다. 그리고 이 짐승은 여덟번째 왕이면서 일곱 왕 중에 속해 있다.
-열 뿔: 장차 짐승과 함께 한동안 왕권을 차지하며, 장차 짐승과 함께 어린 양에게 싸움을 걸 열 왕을 상징한다.
-탕녀: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을 상징하고, 장차 열 뿔과 짐승에게 망할 것이다.[54]

대탕녀 바빌론이 죽으면, 천사들이 나타나 바빌론이 무너졌음을 선포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긴 노래를 부른다.

19장에서는 큰 무리들이 바빌론이 무너진 것을 기뻐하며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고, '성실하고 참되신 분'이라고 불리고 '하느님의 말씀'[55]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가 흰 말을 타고 온다. 피에 젖은 옷을 입고, 작은 왕관을 머리에 많이 쓰고 있고, 몸에 본인만 아는 이름이 적혀 있으며, 입에서 날카로운 칼이 나오는 모습인데, 희고 깨끗한 옷을 입은 하늘의 군대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짐승과 땅의 왕들이 흰 말을 타신 분과 군대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지만, 결국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유황불에 던져져 영벌을 받게 되고, 천사가 새를 모아, 말 탄 자의 입에서 나오는 검에 죽은 나머지 적들의 살을 파먹게 한다.[56]

5.6. 20~22장

20장부터 21장까지는 2번의 부활을 통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묘사한다.

마지막 22장에는 천사가 요한에게 '그때'가 다가왔으니 예언을 봉하지 말고 있을 것을 지시한다. 또한 요한 자신이 본 모든 환시를 보태거나 빼지 말 것을 경고하면서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61]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62]이라는 말로 성경 전체를 끝맺는다.

이러한 전반적 내용이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는 자유주의 신학 쪽에서는, 요한 혹은 정체불명의 요한계 교회 인사가 박해로 약해진 신자들 마음을 북돋고자 썼다고 보기도 한다. 신자가 아닌 사람이 보기엔 그냥 세계멸망일지언정, 신자들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는 박카스 같은 내용이라는 주장. 애초에 위 구절에서도 보이듯 망하는 건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악인들일 뿐,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은총이 내리기를 빌고 있다.

5.7. 재요약


(요한묵시록의 주요 내용들을 요약한 영상. 출처는 성서 영화 <요한묵시록>(원제 Apocalypse. 2000년작)

, 짐승, 등을 중심으로, 큼지막한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 등장 개념 및 해석

6.1. 가톨릭의 해석

요한묵시록을 보면 보통 ‘무섭다’, ‘두렵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신 계시’(묵시 1,1)가 요한묵시록인데, 그 계시의 내용이 마치 재앙과 환난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묵시록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하늘에서 봉인을 일곱 차례 뜯는 장면이 나오는 6장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살해하고 평화가 사라지며(6, 4), 흉년과 굶주림과 흑사병 등이 일어난다(6, 6-8). 또 일곱 번의 나팔을 부는 8장에서는 우박과 불이 땅에 떨어지고(6, 7),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며, 강들에 독성이 퍼져 그것을 마시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 등이 벌어진다(6, 8-11). 12장에서는 사탄이라고도 불리는 용이 나타나서 영인을 괴롭히는 내용이, 13장에서는 두 짐승이 나타나서 신앙인들을 박해한다. 16장에서는 하늘에서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데, 이때에도 우주적인 재앙이 벌어진다.

이와 같이 무서운 심판과도 같은 일들을 묘사하고 있고, 또 그 이들이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니 두려운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요한묵시록 전체에서 ‘행복합니다(makarios, 그리스어 μᾰκάριος)’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오는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함을 상징한다. 그러니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이 책이 ‘재앙의 책’이 아니라 축복으로 가득한 ‘행복의 책’임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묵시록의 내용 자체가 전반적으로 재앙을 묘사하고 있는지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어둠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박쥐에게 있어서는 빛이 재앙이 된다. 그러나 햇빛을 따라 살아가는 해바라기에게 있어 그 빛은 축복이 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요한묵시록과 같다고 본다.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축복이 되지만, 하느님과 맞서 대적하려는 이들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심판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었던 아담의 반응과도 같은 이치이다. 그는 죄를 지은 이후에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였다(창세 3,8).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 소리는 그에게 반가운 소리였을 것이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따르려는 ‘마음’만 있다면 요한묵시록을 두고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6.2. 개신교의 해석

워낙 교파가 많아 아래 영상이 개신교의 해석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국신약학회CBS가 주관하는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 강의에서 요한계시록(개신교 교회의 명칭)을 다룬 바 있다. 통념과는 다르게 그리 지루하지 않으니 관심 있는 독자는 들어 보자. 요한계시록 1~7강 재생 목록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문자적인 천년왕국이 있다는 전천년설을 믿는 교회들이 적지 않은데,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마지막 때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각종 재앙들이 일어나는 7년간의 대환난이 있고, 그 후에 재림이 일어나서 의인들만 부활하고 천년왕국이 열리며, 천년왕국의 끝에 있는 곡과 마곡의 전쟁까지 일어나야 비로소 악인들까지 부활한 다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고 한다.

개신교에서는 사람마다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려는 경향성이 강하다보니, 요한계시록에 대한 개신교의 통일된 해석은 없고, 신천지 급의 이단적 해석만 아니라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6.3. 이상주의적 해석

현대인들에게는 요한묵시록의 상징어들이 난해해 보이지만, 1차적 수신자들의 특성과 시대 상황을 고려했을 때, 당시 요한묵시록의 수신자들에게 요한묵시록은 거의 문자적으로 읽히는 예언서였다. 당시의 수신자들은 요한묵시록의 예언을 대략 다음과 같이 해석했을 것이다.
머지않아 로마 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지금보다 거세질 것이고, 세상에는 갖가지 재앙들이 닥칠 것인데, 다음 로마 황제 시대에 10명의 이방 왕들이 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것이고, 로마 제국이나 10명의 이방 왕들의 나라나 영적인 배후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 이방 왕들은 기독교를 대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그들도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열리며 믿음을 지키다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고, 천년왕국의 끝에 성도들을 대적하는 세력이 일어날 것이지만, 그들 역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 사이에 천년왕국이라는 중간기가 있다는 것은 다른 신약성경에 나오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첫 재림 때에 곧바로 온 세상이 불에 녹아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진다고 말하는 베드로후서 3장과 모순된다. 위와 같은 문자적 예언과 현실의 괴리는 구약성경의 예언서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인데,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영적인 해석으로 풀어내 전형적인 기독교의 교리로 승화시킨다. 예를 들어 남유다 왕국아시리아와 대치하고 있던 시절에 쓰여진 미가는, 5장에서 아시리아를 무찌를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지도자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데, 이 예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된 바가 없다. 미가가 쓰여지고 한참 뒤에 생겨난 기독교는 이 예언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이 예언이 마귀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런 식의 예언은 당대의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빠른 시일 내에 세상에 구원이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품게 하여, 세상의 근심거리에 매여있기 보다는 신앙에 열중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요한의 묵시록 역시 로마제국 치하에서 핍박받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빠른 시일 내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망을 품게 하여 그 사람들의 신앙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적인 분위기는 요한의 묵시록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카전서, 히브리서 등의 다른 신약성경에서도 드러난다.

요한묵시록이 로마 제국 치하에서 기독교가 핍박 받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쓰여진 책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에서 미가 등의 예언서를 해석하는 것 같이 요한의 묵시록에 한층 더 깊은 영적인 해석을 더한다면, 요한의 묵시록은 핍박당하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쓰여진 책이 된다. 베드로후서 3장이 말하는 것처럼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 사이에 천년왕국이라는 중간기는 없고, 이것은 단순히 핍박이 끝난 이후의 기독교 부흥기를 상징한다고 가정했을 때,[66] 요한의 묵시록을 한층 더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요한의 묵시록이 말하는 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앞으로 세상에는 온갖 환난들이 닥칠 것이고, 점점 믿음 지키기가 어려운 상황이 올 것이지만, 성도들을 핍박하는 악한 세력은 머지않아 다른 악한 세력들에 의해 멸망할 것인데, 기존의 악한 세력이 멸망하더라도 영적 배후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핍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악한 세력들은 머지않아 심판을 받을 것이고, 믿음을 지키다 죽은 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에 가게 되며, 기독교 부흥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말세에 성도들을 대적하는 세력이 일어날 것이지만, 그들 역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그 이후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진다.

이와 같은 해석은 요한의 묵시록을 읽는 독자들의 여러 상황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고, 예언을 현실에 억지로 끼워 맞추다가 해석이 산으로 갈 일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6.4. 666

짐승의 수를 가리키는 666이 무엇인지는 요한묵시록이 정경으로 확정된 이래 오래된 떡밥. 집필자 요한은, 지혜 혹은 통찰력이 있다면 이것의 뜻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 등 많은 사람들은 이것의 뜻을 전혀 알지 못했고, 이후에도 정확한 뜻이 밝혀지기는커녕 추측만 난무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요한묵시록의 판본에 따라 616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666이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는 학설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이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수비학, 즉 게마트리아에 근거한 것으로 '네로 황제'를 히브리어로 옮기고 n=50, r=200 등으로 숫자를 바꾸면 666 또는 616이 된다. 요한묵시록을 1세기 로마 제국 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의 산물이라고(혹은 산물일 뿐이라고) 여기는 쪽에서 주로 주장하는 내용이다. 요한묵시록에는 일곱 왕에 대해 나오는데,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지금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있는 왕을 네로 황제(5대 황제)라고 하면, 망한 다섯 왕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사실상 0대 황제와 1~4대 황제)를 의미하고, 아직 이르지 않았으나 잠시 머무를 다음 왕은 A.D. 68년에서 A.D. 69년까지 로마 황제였던 갈바(6대 황제)를 의미하고, 일곱 왕에 대한 요한묵시록의 묘사가 로마의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666이 네로를 가리킨다고 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예언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성경에서 다른 예를 들자면 임마누엘이 있는데, 이는 본디 이사야 당대의 유다 왕국에서는 다윗 왕가에 태어날 새 아기를 의미했으나 훗날 예수 탄생 예언으로 재해석되었다. 당시 로마 제국 동부에는 죽은 네로가 귀환해서 로마 제국을 치리라는 “네로의 귀환” 전설이 퍼져 있었는데, 이 전설에 익숙할 기독교인들에게는 666을 귀환할 네로의 이미지에 기대어서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67]

구약의 맥락을 짚어보면, 솔로몬 왕 대의 전성기 시절에 세입으로 거두어들인 금의 양이 666달란트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68] 이는 야훼신명기에서 왕에게 명령한 항목 중 하나인 재산 축적 금지 항목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다.[69][70] 이와 같은 맥락에 따라 당대 로마 사회의 분위기에 적용한다면 로마 황제의 불신앙적인 행위, 과도한 조세 징수, 약자에 대한 폭압적 권력 행사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완전수인 7에 1 부족한 6을 불완전한 수로 여겨 불완전한 수 6을 3번 붙였다는 설도 있다.

종교개혁 시기에는 개신교에서는 교황을 666, 가톨릭에선 마르틴 루터를 666으로, 서로 적그리스도라고 비방했다.

음모론으로 바코드가 666을 가리키며 이것을 사람들 몸에 심을 거라는 설이 제기된 바 있으며,[71][72] 휴거론자(혹은 세대주의자)들은 이 표가 베리칩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정맥 인증이 666을 가리킨다고 주장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음모론으로 전 세계적으로 원전 666기 건설에 도달하면, 향후 100년 내에 잦은 고장과 전쟁, 알 수 없는 기상 이변으로 통제 불능이 되어 전 지구적 핵겨울이 된다는 설이다. 그리고, 기존 원전, 현재 건설 중 원자력 발전소의 합은 507기다(현재는 조금 줄어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짐승의 표 666을 받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세상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을 말하며, 백신 같은 특정 물질을 몸에 투입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다소 빈약하다.[73]

6.5. 144,000명

666과 더불어 12×12×1,000=144,000(명)도 유명하다. 지상의 사람들 중에 딱 잘라 요만큼만 하늘로 올려보낸다고 하는 커트라인이라는 설이 있지만, 사실 그것은 성경 등 히브리 문학에 의외로 자주 쓰이는 숫자다. 히브리 문학은 수신학(Theomatics)이라고 하는 숫자와 연관된 어구들을 연구하는 학문이 존재하는데,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완전수[74]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1,000을 곱하는 이유 또한 1,000이라는 숫자가 '많음'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144,000은 실제 수라기보다는 '완전하다' 또는 '매우 많다'를 뜻하는 표현이다.[75]

문맥적으로 따져 봐도 커트라인 운운은 상징주의를 비롯한 신약 성경의 주된 메시지를 깡그리 무시하는 의견이라고 많은 신학자들한테 까인다. 요한묵시록 7장을 보면 단 지파를 빼고 레위 지파를 넣은 12지파에서 12,000명씩이라고 했기에 12×12,000=144,000이 맞다.

게다가 144,000명이 등장하는 바로 그 구절(요한묵시록 7장 4~8절) 뒤에 "그 뒤에 나는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후략)"라는 구절이 있는데(요한묵시록 7장 9~17절), 즉 문자적으로 봐도 144,000명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거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어떤 식으로든 구원받는 자들의 총 수는 144000+@. 전 세계 통틀어서 144,000명만이 구원받고 나머지는 다 멸망한다는 말은 신빙성이 제로인 것. 12지파 144,000명은 구원받는 유대인들을 상징하고,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군중은 구원받는 이방인들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많은 조건부 종말론 종교에서 이 144,000명 떡밥을 애용하기도 한다. 기존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여러 번 거짓된 종말론으로 혹세무민해 오다가 92년 휴거 사태(다미선교회)를 마지막으로 날짜로 사기 치는 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신천지 등이 이쪽으로 갈아타면서 지금은 사이비 교주들이 주장하는 종말론의 대세가 된 상태. 결국 명심할 것은 요한묵시록은 겁을 주려고 쓴 글이 아니라 희망을 주려고 쓴 글이라는 것.

그리스도교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영혼 불멸 교리와 일반적 천국 교리를 부정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에는 하르마게돈 전쟁에서 생존한 수많은 참그리스도인 신자들은 태초 에덴 동산의 아담이 그러했듯이, 회복된 지상 낙원에서 살 것이고 인침을 받고 선택된 144,000명은 '적은 무리'로서 하늘로 올라가 예수와 함께 왕노릇하며 낙원이 된 지상을 다스린다고 본다.


6.6. 7년 대환난

요한의 묵시록에는 7년(3년 반+이전보다 강한 핍박의 3년 반) 간의 환난이 2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12장에서 여인이 겪는 7년 간의 환난(전반기: 12장 6절, 후반기: 12장 14절)이고, 두 번째는 19장까지 요한의 묵시록 전반에서 등장하는 7년간의 환난(전반기: 11장 2-3절, 후반기: 13장 5절)이다. 이러한 7년이라는 숫자는 다니엘을 인용하면서 가져온 것인데, 다니엘에는 안티오코스 4세가 이스라엘을 7년동안 핍박할 것에 대한 예언이 있으며, 이 기간 역시 상대적으로 핍박이 덜한 전반기 3년 반과 핍박이 강해진 후반기 3년 반으로 나뉜다.

역사적으로 안티오코스 4세는 이스라엘의 레위 지파 대제사장을 해임하고 베냐민 지파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세웠으며, 그로부터 3년 반 후에 성소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번제단을 허물어버리고, 그곳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놓고 매달 25일이 되면 돼지와 돼지피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반 후에 마카베오 전쟁 및 안티오코스 4세의 사망으로 이러한 핍박은 끝나게 된다. 요한의 묵시록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이러한 핍박의 과정을 인용하여, 용이 여인을 해치려다가 실패한 것과, 짐승으로 표현되는 기독교 핍박 세력의 영적 배후가 끝내 심판받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데살로니카후서 2장 4-8절[76]에서도 다니엘 11장 36-37절[77]에서 말하는 안티오코스 4세의 모습을 인용하면서 말세의 적그리스도에 해당하는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요한의 묵시록에서 7년 간의 환난 끝에 최종적으로 심판 받는 대상이 짐승이라는 영적 배후이고, 그 때에 같이 심판 받는 가장 높은 세상의 왕들이 여럿이라는 점에서, 요한의 묵시록과 차이가 있다.

어찌되었든 요한의 묵시록은 이러한 7년간의 핍박 과정을 인용하여 '핍박→더욱 거세지는 핍박→핍박 세력의 멸망'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다니엘에도 나오는 7년이라는 환난 기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말세에 7년 간의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7년이라는 기간은 단순히 상징적 숫자일 뿐이고 성경은 이러한 과정들이 말세까지 역사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것을 예언했을 뿐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6.7. 두 증인

요한의 묵시록에서는 7년 간의 환난의 전반기 동안 권능을 행하면서 예언을 하다가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사흘 반 뒤에 부활하여 승천하는 두 증인이 나온다. 두 증인은 두 촛대로 표현되는데, 요한의 묵시록 1장에서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는 단어로 쓰였다.

이 두 증인에 대해서는 엘리야 · 모세, 즈룹빠벨 · 여호수아, 베드로 · 바울로, 보편 교회 · 지역 교회, 유대인 교회 · 이방인 교회 등 여러 해석이 난무한데, 두 증인이 영적으로는 신약 시대의 교회를 예언하고 있는 즈가리야 4장에서 나온 표현이고, 요한의 묵시록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단어인 촛대로 표현된데다가, 요한의 묵시록이 구원받는 자들을 유대인 144,000명과 나머지 흰 옷 입은 무리들로 구분하고 있으며, 즈가리야서도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두 증인은 유대인 교회 · 이방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또한 두 증인이 죽었다가 사흘 반 만에 다시 부활한 것은, 3.5라는 숫자 자체가 요한의 묵시록에서 핍박의 기간을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잡힌 이후부터 실제로 순교하여 천국에 들어가기까지의 기간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개신교의 신사도 운동에서는 두 증인을 말세에 나타날 영웅적인 선지자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특정 인물을 두 증인이라고 주장하는 단체는 사이비 종교 단체일 확률이 매우 높다.

6.8. 황충

요한의 묵시록 9장에는 5달 동안 사람들을 전갈에 쏘인 것 같이 괴롭게 하면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는 황충이 나온다. 이 황충이 전염병을 가리킨다는 의견이 있으나, 요한의 묵시록이 쓰여졌을 당시에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고 요한의 묵시록이 당대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쓰여진 글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황충은 , 벼룩 같은 곤충들을 가리킨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한편, 요한묵시록이 근미래의 제3차 세계대전을 예언한다고 주장하는 유사종교학적 해석의 경우 보통 황충을 MBT에 대한 은유라고 해석하는 케이스도 있다. 1997년경 출판된 <한반도 UFO 프로젝트>라는 외계문명기원설을 주장하는 괴서적에서 이러한 해석을 주장한다. 여기서는 천사의 환시를 '외계인'(천사)이 요한을 UFO로 불러다 초과학 스크린을 통해서 재래식 전쟁에서 핵전쟁으로 발전하는 듯한 전쟁 영상을 보여주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천사의 두루마리는 외계인이 스크린을 조작하는 리모컨에 대한 은유고, '대접을 쏟았다'는 신의 지팡이류 위성 무기에서 빔이 발사되는 장면에 대한 은유, 쓴 흰쑥은 핵 낙진 내지는 방사능이라는 식. 참고로 해당 서적은 구약-타나크-유대교 야훼 신앙에 대해서는 상당히 반유대주의스러운 서술로 쓰여 있다. 거기에 환뽕은 덤. 논란을 회피하기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예수는 인정한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논란 문서로. 실제로는 천부교 내지 증산교 계열의 서적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6.9. 곡과 마곡의 전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곡과 마곡의 전쟁 문서
4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10. 천년왕국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천년왕국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논란

이 책은 요한 자신이 겪은 모든 환상을 남김없이 드러내려고 썼으며, 그야말로 완전히 '환상'을 묘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책의 가치와는 별도로 오독될 우려가 매우 높은 위험한 책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이미 4세기 기독교 교부들에 의해 신약 정경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이 요한묵시록이 과연 정경에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전통적인 성경 아람어역본 페시타의 목록에는 요한묵시록이 빠져 있으며 4세기 초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및 몇몇 주교들이 요한묵시록의 난해함과 그에 따른 잘못된 해석의 위험성을 근거로 들어 요한묵시록을 정경에서 제외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도 요한묵시록은 예언서도 사도의 책도 아니라며 요한묵시록의 진위 여부를 회의적으로 보았다.

이 기독교 교부들의 우려가 결코 과언이 아닌 것이 당시 4세기도 이 묵시론에 근거한 종말론의 해악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이미 바울로 시절의 초대 기독교 교회 시기부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종말론적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 1990년대 소위 세기말에 휴거를 비롯한 종말론이 득세하고 이와 관련된 서적과 영화 등이 크게 유행했듯이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많은 묵시록 형태의 문학 장르가 유행했다.[78] 당연히 종말론에 기반한 엉터리 요설과 사이비 종교도 난무했으며 그 피해의 정도도 지금 못지않게 심각했다.

때문에 4세기 교부들 상당수가 정경에서 묵시록을 모두 배제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 중에서 요한의 묵시록만은 그 위험성을 충분히 뛰어넘는 가치와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간신히 정경에 포함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교부들의 우려는 정확하게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는데 정경이 확립된 이후의 기독교 역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들의 우려는 심지어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인 상황.[79]

신약 성서 27권이 정경으로 확립된 후 정경에 포함되지 못한 기독교 문서들은 위험하고 이단적인 주장으로 취급돼서 대부분 소각되거나 폐기 처분됐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영지주의 관련 문서와 묵시록 관련 문서들이 집중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현재 사람들은 영지주의나 묵시론에 대해 매우 단편적인 사항밖에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요한묵시록을 비기독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요한묵시록이 그저 당대에 존재했던 여러 묵시록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묵시록들의 목적은 물론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666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센세이셔널한 내용으로 정신적 고양과 종교적 각성을 위한 책으로 본다. 따라서 종교적으로는 상당한 가치가 있는 문서이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전달해주는 사료의 의미 이상을 가진 책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워낙 떡밥이 많은 책이다 보니 해석하는 방법이 실로 무궁무진하며, 실제로 통일교 신천지 등 이단 종파들이 성경 중에 가장 많이 인용하는 책이 바로 요한묵시록이다. 일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의 이단 종교의 계보를 보면 거의 모두 요한묵시록에 기반한 종말론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종파의 중요 특징은 높은 확률로 요한묵시록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전체 구-신약 성경 내의 다른 구절과 서로 통하는 내용인지 연관 지어서 봐야 함에도 성경의 전체 66책 중 묵시록을 제외한 다른 책은 대체로 등한시하며 설령 인용을 하더라도 묵시론의 내용에 맞춰서 해석하는 것이 특징. 정통을 자처하는 일반적 교회들(특히 개신교)조차 목회자 혹은 교파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이며 이따금 자기 멋대로 풀이하는 설교자들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다만 가톨릭 교회나 정교회처럼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진 기독교 교파에서는 학문적인 논쟁은 활발할지언정 교리적인 해석은 통일되어 있다.

앞에서도 나왔지만 "이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라는 말만이라도 기억해 두자. 이단적인 내용의 주석을 붙여 잘못된 교리를 합리화하거나 성경 외의 다른 경전을 묵시록이나 성경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말라는 뜻과 더불어 요한 묵시록에 적힌 예언을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나 헛소리처럼 취급하지 말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다. 한편으로는 여기도 두 가지의 해석이 있는데, "이 말씀"이 요한 묵시록만을 의미한다는 해석과 신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8. 대중매체

9. 기타



[1] 전통적 견해[2] 그러나 성서비평학계에서는 요한 복음서의 문체와 요한 묵시록의 문체가 다르다는 것을 근거로 동명이인 또는 요한을 가명으로 한 사람이 썼다고 본다.[3] Nestle-Aland 28판[4] 여담으로 원문에선 '오메가'라 하지 않고 그냥 장음으로 '오'라 말하는데, 이는 알파벳 이름이 시대에 따라 변했기 때문이다.[5] 성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 일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가톨릭 성경)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개역개정판)[6] 독일신학자[7] 독일의 가톨릭 사제이자 신학자[8] 加減, 더하거나 또는 빼는 것.[9] 베드로후서 1:20~21: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예언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 다만 흠정역에서는 이와는 달리 20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10] 기독교 신학에서 정경, 외경 등에서 예언된 종말적인 사건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은유적으로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말한다.[11] 그럼에도 구약 성경에서 세상 종말 때를 묘사한 예언이 없는 게 아니다. 구약의 다니엘서 후반부, 즈가리야서, 요엘서, 이사야서 등에서는 신약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동일한 종말론적인 예언들이 매우 많이 나온다. 묵시록적 관점은 신약 교회 사람들에 의해 갑툭튀한 게 아니라, 유대 민족의 역사로부터 이어진 전통이었다.[12] 공동번역 성서를 사용하는 성공회와 일부 기타 개신교 교단[13] 666네로 황제를 나타내는 글자를 숫자로 변환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데, 요한 묵시록이 저술된 시점(1세기 후반~2세기)에 네로 황제(생몰 서기 37~68)는 이미 죽은 과거의 인물이다. 단, 당시 로마 제국 동방에는 '되살아난 네로(Nero Redivivus)' 전설이 광범위하게 돌고 있었다.[14] 이를 따르면 로마 제국은 종국에는 이교도를 버리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으니 (서기 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의 일. 요한 묵시록의 내용 일부는 실현된 예언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15] 예수 재림이나 하르마게돈, 새 예루살렘 등.[16] 예를 들어 묵시록 중반에 묘사되는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다루는 구절에서, 적그리스도를 로마 제국이라고만 해석하면 당시 상황과는 맞을지 몰라도 교리적으로 보면 과거형 서술밖에 안 되는 문제가 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적그리스도는 시대를 초월하여 성경 복음과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세력의 총칭이다.[17] 이 두 관점의 양립이 성립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분명 묵시록은 2천 년 전 로마의 박해를 격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작성되었지만,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보내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근거가 흔히 말하는 '성령의 감도'.[18] 터키 서부 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로마의 행정구역.[19] 당시 페르가몬엔 로마 황제 신전,로마 여신의 신전은 물론이고 제우스,아테네,디오니소스,아스클레피오스 신전까지 자리 잡았었다. 이러한 다신교의 본고장 안에서 믿음을 지키는 교회 공동체를 칭찬한 것. #[20] 페르가몬과 사르디스 중간지점에 있고, 현재 이름은 아크히사르이다.[21] 그리스어로 칼콜리바논(χαλκολίβανον), 즉 칼코스+리바노스. 구리의 합금(칼코스, 즉 청동이나 황동)이라는 단어와 유향(리바노스, 아기 예수의 탄생선물 셋 중 하나이기도 하다)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있다.[22] 사실 이사야 14장의 헬렐=에오스포로스=루치페르, 즉 "샛별"을 사탄에 비유해 해석하는 것은 후대 교부들의 해석이다. 샛별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사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23] 미국의 필라델피아가 여기서 따온이름이다.[24] 파묵칼레 온천 근처에 있다.[25] 라오디케이아는 파묵칼레 온천이 근처에 있는 온천도시였는데, 도시가 쓰는 물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산에서 내려오는 찬물이었다. 그런데 이 찬물과 온천수가 섞인 미지근한 물은 식수로 사용할 수 없었다. 이걸 이용한 비판.[26] 지역 특성을 이용한 드립인데, 라오디케이아는 질 좋은 안약의 생산지로 유명했다고.[27] 그래서 잘 몰라서 이제벨에 속아 놀아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벨 쪽에 남아 있으면 엄벌에 처할 것이나, 그를 내치고 벗어난 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명시하고 있다.[28] 예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할 준비가 된 사람들. 그래서 예수가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문을 열어달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29] 발람의 교훈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나귀의 입이 열려 억울함을 토로했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발람이 일으켰다는 점이며, 니콜라스 당은 당대에 영지주의파로서 성도를 이단으로 끌어넣은 이들로서, "백성의 승리자"라는 이름대로 하느님께서 보호하시는 백성들을 상대로 싸워 이긴 자들로 하느님의 구원의 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역자들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자유하되 오로지 구원의 법에 의한 자유함"을 강조한 성 사도 바오로의 말을 왜곡하여 육체의 일을 금하지 않아도 된다고 속이고 다닌 자들이다.[30] 1 데나리온은 당시 기준으로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또한 이 구절에서 '되'로 번역된 단위 χοῖνιξ(Choinix, 코이닉스)는 1쿼트, 대략 1리터 내외의 양으로 당시 한 사람의 하루 필요 식량을 이 정도로 가늠했다. 즉 한 데나리온에 밀 1되, 보리 3되라는 표현은 하루를 벌어서 간신히 하루 입에 풀칠할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물가가 올랐다는 소리다.[31] 개신교 개역성경에서는 '청황색 말'이라고 나온다. 일반 매체에서는 흔히 '창백한 말'이라고 번역되며,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제목이나 웹툰 제목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푸르스름(청황색)하다는 것은 부패가 시작되는 시체의 색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중론.[32] 여섯 봉인에 대한 예언은 당시에 각종 자연재해, 전쟁, 기근, 전염병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로마 제국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모 교파는 이것을 리스본 대지진으로 해석하여 교육한다.[33] '체르노빌'의 지명이 '쑥' 또는 '검은 풀'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 구설 해석에 자주 대입된다.[34] 이것이 대천사 중 가장 먼저 타락했다는 루시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물론 루시퍼란 이름 자체가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것이므로 결국 믿거나 말거나 주장인 셈.[35] 판본에 따라 황충.[36] 판본에 따라 이만 만의 기병대[37] 이는 예언의 권한과 순종의 고통을 상징한다.[38] 요한의 묵시록 1장에서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는 단어이다.[39] 이 두 증인에 대해서는 엘리야 · 모세, 즈룹빠벨 · 여호수아, 베드로 · 바울로, 보편 교회 · 지역 교회, 유대인 교회 · 이방인 교회 등 여러 해석이 난무한데, 두 증인이 영적으로는 신약 시대의 교회를 예언하고 있는 즈가리야 4장에서 나온 표현이고, 요한의 묵시록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단어인 촛대로 표현된데다가, 요한의 묵시록이 구원받는 자들을 유대인 144,000명과 나머지 흰 옷 입은 무리들로 구분하고 있으며, 즈가리야서도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두 증인은 유대인 교회 · 이방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또한 3년 반이라는 기간은 다니엘서를 인용하며 가져온 상징적 숫자이고, 교회가 본격적 핍박이 오기 전까지 핍박받는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문맥 상 이 3년 반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안티오코스 4세 치하에서 유대인들이 성소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기 전까지 핍박받았던 기간을 인용한 것이다.[40] 앞에서 말한 42달과 동일한 기간을 말한다.[41] 3.5라는 숫자 자체가 요한의 묵시록에서 핍박의 기간을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에, 사흘 반은 교인들이 잡힌 이후부터 실제로 순교하여 천국에 들어가기까지의 기간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존재한다.[42] 이 부분을 근거로 환난 가운데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는 소수의 의견이 있으나, 재림 직후 세상이 완전히 멸망해버린다는 베드로후서 3장의 메시지를 볼 때 이 부분은 단순히 순교자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43] 전염병, 전쟁, 일조량 감소, 환경 파괴 등 나팔 심판에서 나오는 각종 재앙들은 모두 실제로 과거 로마 제국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44]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 가톨릭은 성모 마리아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동시에 교회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여인이 쓴 12개 별로 된 관은 성경 속의 12지파, 예수의 12사도 등으로 해석된다. 본래 예수의 12사도는 구약의 12지파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45] 묵시록의 여인이 쓴 12개 별로 된 관은 마치 예수를 묘사할 때 나오는 가시 면류관처럼,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를 묘사하는 그림이나 조각상에 자주 애용되고 있다. 유럽 연합 깃발의 12개 별로도 등장할 정도다.(공식적인 해석은 1992년의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서명한 유럽 연합 창설국의 숫자를 뜻한다.)[46] 요한묵시록은 7개의 뿔을 일곱 왕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지금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있는 왕을 네로 황제(5대 황제)라고 하면, 망한 다섯 왕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사실상 0대 황제와 1~4대 황제)를 의미하고, 아직 이르지 않았으나 잠시 머무를 다음 왕은 68에서 69년까지 로마 황제였던 갈바(6대 황제)를 의미하고, 일곱 왕에 대한 요한묵시록의 묘사가 로마의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요한묵시록은 열 뿔이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음녀 바벨론을 망하게 할 열 왕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서로마 제국이 망하고 롬바르드족(Lombards), 부르군트족(Burgundian), 동고트족(Ostrogoths), 서고트족(Visigoths), 프랑크족(Franks), 반달족(Vandals), 수에비족(Suevi), 알레만니족(Alamanni), 앵글로색슨족(Anglo-Saxons), 헤룰리족(Heruli)의 열 나라로 분열될 것을 예언한 것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47] 요한의 묵시록에서 종종 별은 천사를 나타내는데, 이 장면은 사탄이 천사 3분의 1을 타락 시킨 것을 의미한다.[48] 요한의 묵시록은 다니엘서를 인용하여 '3년 반+3년 반'이라는 기간 자체를 기독교 핍박의 기간을 상징하는데에 쓰고 있다.[49] 두 증인이 죽은 후부터 아마겟돈 전쟁까지의 기간을 말하며, 문맥 상 다니엘서에 나오는 안티오코스 4세가 성소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할 때부터 축복의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의 기간인 3년 반을 인용한 것이다.[50] 이 짐승은 대체로 로마 제국 및 그 군사력을 상징한다고 한다.[51] 리용의 성 이레네우스는 이 짐승을 '첫 번째 짐승의 시종'이라 일컬었다.[52] 그 유명한 아마게돈 전쟁으로, 기독교와 기독교 핍박 세력 사이의 영적인 전쟁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53] 대접 심판들 역시 실제 과거 로마 제국에서 만연했던 자연재해, 환경 파괴, 전염병 등의 사회상에 대한 예언이라는 주장이 있다.[54] 탕녀를 로마 제국으로, 짐승의 일곱 머리들을 로마의 일곱 황제(0~6대 황제)로, 짐승을 사탄으로, 열 뿔을 서로마가 분열되어 생길 열 나라로 해석하는 쪽의 주장에 따르면, 서로마 제국이 사탄의 의도대로 열 나라로 분열되어 멸망함을 뜻한다고 한다.[55] 개역개정판에선 로고스라고 한다.[56]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상황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많지만, 재림 이후에 있을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을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이것은 단순히 적그리스도 세력에 대한 심판의 상황이고 그 이후에 부흥이 이어질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57] 이 '천 년'의 의미에 대해서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많은 학설이 있었다. 천년왕국 문서로.[58] 무천년설에 따르면 곡과 마곡 전쟁이 재림 직전에 있을 전 세계적 미혹과 환난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59] 불 속에 던져져서 영벌을 받게 되는 것을 두 번째 죽음이라고 한다.[60] 파일:bbs_9129423945.jpg[61] 묵시 22:20[62] 묵시 22:21[63] 이들을 두 촛대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촛대는 요한묵시록 1장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64] 요한묵시록 화자의 시점에서 그 짐승이 예전에는 땅 위에 있었으나 현재는 무저갱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65] 또는 하르마게돈[66]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는 첫째 부활이 일어나야 하고 사탄도 무저갱에 갇혀있어 세상에 죄가 없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비판을 받기도 하나, 성경의 내용 상으로 천년왕국 기간동안 모든 마귀들이 무저갱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우두머리 마귀만 무저갱에 갇힌다고 나와있고, 천년왕국 기간은 말세의 전세계적 핍박이 시작되기 전까지 각 지역에서 반복적으로 있어왔던 기독교 핍박기 이후의 기독교 부흥기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단일화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은 단순히 재림 전에 죽어서 천국에 간 사람들이라고 해석해버리면 이러한 비판을 피해갈 수 있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흥기에 대응되는 핍박기의 기간도 1,000년으로 잡으면, 공교롭게도 마지막 환난 전까지 있을 핍박기와 부흥기의 기간이 도합 2,000년이 된다.[67] 리처드 보컴, 《요한계시록 신학 : 예언의 절정》 (강대훈 역), 부흥과개혁사, 2021[68] 열왕기상 10:14, 역대하 9:13[69] 신명기 17: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70] 이외에도 솔로몬신명기에서 야훼가 규정한 왕의 금기 항목들인 이집트와의 교역, 과도한 병력 축적, 축첩 등의 항목들을 모두 어겼다.[71] 오른손 혹은 이마에 심는다는 구절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자주 설명된다. 666을 바코드나 베리칩 등으로 해석하는 측에서는 왼손은 사람들 중에서 혈관 구조가 비슷한 경우가 있으므로 사람마다 혈관 구조가 모두 다른 오른손 혹은 이마에 666을 삽입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또한 정맥 인증과도 연결된다.[72] 왜 이런 설이 나왔는가 하면 실제로 바코드에서 기준으로 삼는 가드 바, 즉 3개의 이중 선이 숫자 6을 나타내는 코드와 같다. 즉, 모든 바코드에 666이 숨어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가드 바는 바코드에서 실제로 숫자로 읽히지는 않는 부분이기는 하나, 그 모양이 눈으로 보기에 마치 6처럼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엄밀히 따지면 바코드에서 선 2개가 6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눈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니 음모론이 나올 수밖에.[73]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9)[74] 3은 하늘의 숫자, 4는 땅의 숫자를 상징한다. 이 둘을 더한 7이나 곱한 숫자 12는 완전수를 상징한다. 수학적 완전수와는 관련이 없다.[75] 전 세계 문화권에 많은 수라는 은유가 담긴 숫자는 여러 가지 있다. 일본야오요로즈(8,000,000)라거나, 한국, 중국(100,000,000)이나 인도무량대수(1068)나 전부 그런 의미.[76]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이런 일을 여러분에게 거듭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자가 지금은 억제를 당하고 있지만, 그의 때가 오면 나타날 것입니다.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불법자가 나타날 터인데, 주 예수께서 그 입김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고, 그 오시는 광경의 광채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77] 북쪽 왕은 자기 좋을대로 하며, 스스로를 높이고, 모든 신보다 자기를 크다고 하며, 괴상한 말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끝날 때까지는, 그가 형통할 것이다. 하나님은 정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조상이 섬기던 신들이나, 여자들이 사모하는 신들을 섬기지 않으며, 그 밖에 어느 신도 섬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그 모든 것보다 더 높이기 때문이다.[78] 요한 묵시록 외에도 당시 유행했던 묵시문학의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이들은 모두 외경이나 위경으로 분류되어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79] 신천지JMS같이 기독교에서 파생된 한국의 사이비종교들도 대부분 이 요한묵시록을 임의대로 해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성경 중에서도 요한묵시록만을 특별하게 취급하며 구약이나 4복음서와 바울서신 등의 다른 책들은 참고 수준으로만 인용한다.[80] 더빙판에서는 여의도.[81] 매튜·리키 형제의 아버지.[82] 말은 홍차라고 하는데 마시면 환각 증세가 보이는 걸 보면 정상적인 홍차는 아닌 듯하다. 일단 구매자인 야고보의 말로는 매장에서 3000엔에 살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83] 동 시기에 제작된 성경 영상화물 시리즈의 마지막편이다. 기독교 계통 케이블 채널에서 '더 바이블'(이후 2010년대에 나온 동명의 10부작과는 다름) 시리즈란 제목으로 방영하기도 했다.[84] 어디까지나 농담이며, 죽을 때 자신의 재산에 미련을 갖는 믿음으로는 천국에 절대 못 들어간다. 괜히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구절이 있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