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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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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히브리어 ספר ישעיה (sefer yesha'yáhu)
그리스어 Ἠσαΐας (Ēsaḯas, 고대)·Ησαΐας (Isaḯas, 현대)
라틴어 Liber Isaiae[1]
영어 Book of Isaiah
한자(한국어) 이사야書
중국어 依撒意亞
일본어 イザヤ書 (イザヤしょ)
기본 정보
저자 이사야
기록 연대 B.C. 8세기(전통적 견해, 제1이사야)
B.C. 6세기(제2이사야)
B.C. 5세기(제3이사야)
분량 66장
주요 인물 이사야
이사야서
제1이사야 1–39
제2이사야 40–55
제3이사야 56–66


1. 개요2. 특징3. 구분4. 이스라엘의 회복5. 신약과의 연관성
5.1. 내용 요약 및 기독교적 해석5.2.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6. 여담7. 이 이름을 가진 인물

[clearfix]

1. 개요

성경의 29번째/23번째 권, 혹은 유다 왕국의 유명한 선지자.

기원전 8세기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 이사야가 저술했다. 이름의 의미는 '야훼는 구원이시다'로,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와 유래가 같다. 히브리어 표기는 '예샤야후(יְשַׁעְיָהוּ‎ / yesha'yáhu)'에 가깝고 이 인물이 당대에 실제로 불렸던 호칭은 '여사야후'지만, 70인역 성경에서 그리스어 '에사이아스(Ἠσαΐας / Ēsaïās)'로 음역하고 라틴어로 다시 '에사야스(Esaias)'와 '이사야스(Isaias)'로 다시 옮기면서 '이사야'라는 표기로 전래되었다.

2. 특징

이사야 선지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유다 임금 요아스의 손자이자 아모쓰(אָמוֹץ)[2]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남유다 왕족이며 요담 임금에겐 당숙, 아하즈에겐 종조부가 된다.[3] 그는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북이스라엘 왕국이 망해가고, 남유다 왕국 내에서는 종교적 관용주의가 팽배하면서 흉흉해진 시기를 살았다. 이 당시 종교적 관용주의가 왜 흉흉한 거냐면, 유대 민족이 위기에 빠지면서 야훼 근본주의가 강해지고, 다른 신을 인정하는 것은 외세에 굴복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메시지는 암울하고 절망적이며, 정의와 평화가 사멸해 가는 상황을 바라보며 강력하게 규탄하고 심판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열리게 될 새로운 세상, 곧 '공평과 정의의 기초 위에 세워진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말하고 있다.

작성자로 알려진 예언자 이사야는 히즈키야의 뒤를 이은 므나쎄왕이 친아시리아 정책과 이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펴자 여기에 대항하다가 톱으로 허리를 잘려 죽는 처형을 당했다고 탈무드 전승 등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사야가 무턱대고 반아시리아 민족주의 극우냐면 그건 애매한 게 임마누엘 예언에서는 반아시리아 정책을 편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과 그를 두려워하는 아하스 왕, 둘 다에게 경고하면서 아시리아의 힘 앞에 둘 다 멸망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 이 예언은 히스기야 왕의 대 아시리아 반란을 막기 위해 히스기야 시절 적힌 것으로 보인다.

비록 1차적으로는 이사야서의 수신자가 유대인이고, 당시 남북 왕국 및 유배자들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깔고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이를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전반부에서 사회적, 경제적 정의가 무너진 현실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것은 어떤 사회에서든 그대로 적용되며, 전반부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등장하는, 미래에 열리게 될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비전도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것이라고 기독교에서는 해석한다.

결과적으로 이사야서 전체의 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암울하고 불의한 현실에 대한 고발과 규탄 및 심판에 대한 경고.
2. 꿈이고 희망이고 없는 암울한 상황 속에 나타날 메시아에 대한 예언.
3. 메시아에 의해 구현될 새로운 세상, 즉 천국에 대한 비전.

3. 구분


39장까지의 내용과 40장 이후의 내용이 확연하게 갈린다. 39장까지는 이스라엘에 닥칠 위험에 대해 엄숙히 경고하는 내용인데 비해, 40장부터는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과 위로를 말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39장까지의 내용과 40장 이후의 내용은 200년의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신학계에서는 1~39장을 제1이사야로 보고, 40~55장과 56~66장은 후세인이 이사야의 이름을 빌려 쓴 제2이사야, 제3이사야로 구분한다.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는 각각 바빌론 치하의 포로 시대(6세기 초)와 페르시아 키루스왕 치하(6세기 말)를 다루고 있다. 한국 가톨릭에서 쓰는 성경에서는 이 시각을 따라서 아예 1~3부로 구분을 해놓았다.

일부 근본주의 개신교 목사, 신학자들은 이사야서 구분을 '가톨릭 이단'의 물이 들은 것이라고 완강히 비난하면서 40장부터 문체와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개신교 성서가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나눠지는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가톨릭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다수 개신교 신학자들 역시 이사야를 1~39장, 40~55장, 56~66장의 3부분으로 구분한다. 최초로 이사야서를 이런 방식으로 구분한 사람이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이었다. 이사야를 이사야 혼자서 다 썼는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단일 저작권 견해와 다중 저작권 견해 사이에 논란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이사야는 서로 다른 세 역사적, 신학적 정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6]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이는 이사야는 크게 1~39장과 40~66장, 혹은 1~39장/40~55장/56~66장의 2파트 혹은 3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각 파트는 서로 다른 배경을 깔고 집필이 되었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의 단일 주제 때문에 한 권으로 묶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목회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필시 이사야는 각각 다른 때에 설교한 예언들을 모아 놓은 것이지만 하나의 완전한 책이 되었습니다.[7]

다만 이 세 파트를 이사야 혼자서 썼는지, 아니면 2명 또는 3명이 나눠서 썼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사야를 몇 명이서 쓴 것이든 최소한 이사야는 서로 완전히 다른 책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주제와 표현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 둘 또는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근거는 많다.

우선 제1이사야는 아시리아를 언급하는데, 제2와 제3에서는 아시리아가 전혀 등장 안 한다. 그리고 제2와 제3에만 구속자(Redeemer)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제1은 산문체로 장엄한 심판을 말하지만, 제2와 제3은 운문체로 위로와 희망을 주로 말한다.
역사적인 근거에서 이 책이 제시하려는 논리를 간파하려는 시도를 통해 한 권의 이사야서는 독립된 별도의 세 권의 책으로 분리되었으며(1~39장, 40~55장, 56~66장), 이 책들은 그 이상의 시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바로 기독교 시대까지 수백 년을 거쳐오는 동안에 각각 별도로 영감을 받은 3명의 개인들이나 세 학파들에 의해 공적으로 선포된 말씀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현재 해석가들은 우리가 1~39장 안에서 제2이사야에 있는 내용과 예루살렘 멸망 및 포로 생활을 폭 넓게 경험한 데서 영향을 받은 편집자들에 의해서 문학적인 첨가-때로는 산발적이며 또 다른 경우에는 더 포괄적인-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중략) 제 1이사야의 해석과 제2이사야의 해석을 선명하게 구별되게 한 것은 본문 40~55장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나타났고, 따라서 그 명백한 지리적, 사회적, 양식 비평적(form-critical)인 정체성(identity)은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이사야의 예언으로부터 대략 150년 정도 떨어져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퍼 사이쯔, 한미 공동 주석편집, 현대성서주석-이사야 1~39,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pp. 31-35
이 책은 이사야가 살았던 수십 년으로 시작하여, 약 3세기에 걸친 야훼의 계획 그리고 그의 백성과 대화를 증거한다. (중략) 이사야의 이상의 의도는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즉, 이사야의 이상은 주전 8세기와 6세기의 문제들을 정의하고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사야의 이상은 주전 8세기, 6세기 그리고 5세기의 정황으로부터 자료들을 제출함으로써 주전 5세기의 문제들을 정의하고 제시한다. (중략) 이사야의 이상은 약 두 시대-전시대와 후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책이다. 이 점에서 제1이사야와 제2이사야의 구분은 적절하다. 그러나 이 구분이 두 가지의 다른 작품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제2이사야는 제1이사야를 전제하고, 제1이사야는 제2이사야를 예상한다. 문학적 형태와 구조는 한 작품이다.
-존 와츠, 강철성 옮김, World Bible Commentary-이사야 (상), 도서출판 솔로몬, 2006, pp.35-57
이사야의 저자가 한 사람인지 혹은 두 사람, 세 사람인지는 19세기 말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 이래로 학자들의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1~39장은 대체로 아시리아 제국의 위세를 경험하던 청중에게 선포된 예언들이고, 40~66장은 바빌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위세를 경험하던 청중에게 선포된 예언처럼 읽힌다. 과연 주전 8세기 예언자가 당대의 회중에게 약 200년 뒤의 일에 관하여 예언했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에 역사비평적인 학자들은 40~66장을 제2이사야(40~55장)와 제3이사야(56~66장)로 구분한다.
그들은 이사야 40~66장은 포로기가 끝날 무렵에 자신을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의 신학적 후예라고 자처하는 한두 예언자(집단)에 의하여 선포되었거나 저작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경우 40~66장에 기록된 예언적 설교의 청중은 바빌론으로 끌려간 바벨론 포로들이거나 그들의 후예였다(에제키엘 37장 11절). 이런 역사적 정황상의 차이(바빌론 포로 전 상황과 바빌론 포로 후 상황) 외에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이 1~39장과 40~66장(40~55/56~66장)을 구분하는 것을 지지한다.
첫째, 언어적 어휘상의 차이로서 40~66장에는 '아시리아'라는 단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사야'라는 단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차이로서 1~39장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40~6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구속자'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 셋째, 문체상의 차이로서 1~39장에는 부분적인 전기적 이야기체 문체와 장엄한 심판 문체가 주로 사용되고, 40~66장은 대부분이 운문체 예언이며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는 시문들이 주를 이룬다. 후자는 예언 선포의 역사적 맥락이 거의 누락되어 있는 반면에, 전자에서는 상당 부분에서 명시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1~66장을 하나의 이사야로 묶은 것은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연속성이다. 시온에 대한 야훼 주님의 계약적 투신과 사랑(hesed=covenantal devotion), 즉 '시온을 향한 여호와의 계획'이 이사야를 응집시킨다. 이 큰 공통점 외에도 크고 작은 신학적 연속성이 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공평과 정의의 문제). (중략) 얼마나 많은 저자가 현재 이사야의 마지막 저작 과정에 참여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현재의 이사야는 서로 다른 세 역사적, 신학적 정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1~66장의 저자가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현재 이사야가 가지고 있는 심오하고 광대한 신학적 가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중략)
베른하르트 둠 이래 계속된 자료 비평적, 양식 비평적 그리고 편집사적 연구들이 이사야 1~66장을 1~39장, 40~55장, 56~66장으로 나누어 읽음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도저히 포착할 수 없었을 신학적 자산을 발굴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고 본다. 1~39장이 주전 8세기 역사적, 신학적 맥락과 조응하고, 40~55장이 고레스 칙령 전후 시기의 포로살이 공동체의 역사적, 신학적 맥락과 조응하고, 56~66장은 포로귀환 공동체의 시온 재건을 위한 분투와 좌절을 그리고 있다고 본 역사적, 비평적 읽기는 특히 이사야 40~66장의 메시지를 거의 원음(原音)으로 재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만일 40~66장이 주전 6~5세기의 예언자가 선포한 동시대적 메시지가 아니라, 주전 8세기 이사야의 미래예언(fore-telling/혹은 fortune-telling)이라면, 40~66장의 원음 메시지를 생생하게 복구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제 2, 3 이사야가 있었느니 혹은 40~55장, 56~66장이 한때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는지의 여부를 완전히 논증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40~55장, 56~66장이 각각 주전 6세기, 5세기를 반영하거나 전망한다고 읽을 때에, 주전 8세기 예언자가 200~300년 전에 주전 6~5세기 상황에 대해 미리 예언하였다고 믿고 읽을 때보다, 역사 창조와 주님의 말씀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훨씬 더 강력하게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만일 40~66장도 주전 8세기 이사야가 직접 발설한 예언들이라고 믿으면, (중략) 말씀과 당대 역사 사이에 작용하는 역동적인 조응 관계를 파악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바빌론 포로살이도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바빌론 포로살이가 끝났으니까 위로를 받으라'고 외치는 이사야 40장이 어떤 역동적인 반향사역(反響事役)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도대체 주전 8세기에 그 위로의 말씀들과 고레스 출현의 세계사적인 의의를 설명하는 역사 신학적 강화(講話)들이 무슨 목회적, 신학적 동력을 낼 수 있었을까? 이사야 40장 이하도 주전 8세기 이사야의 진정성 있는 예언이라고 주장한다면, 40~66장은 거의 200~300년 후에 올 청중, 즉 이사야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유령 같은 청중에게 외친 비의(秘義)에 가득 찬 미래 예견으로 평가절하될 것이다.[8]
반면에 이사야 40~66장이 주전 8세기 예언자의 예언을 자신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었던 주전 6~5세기의 예언자적 인물 혹은 신앙공동체의 파생적 예언이라고 본다고 해서, 이사야 40~66장의 권위가 추락하는가? 오히려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시대를 넘어 역사를 해석하고 창조하는 권능을 발휘하는 과정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 이사야의 원메시지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40~66장이 형성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27장들의 신언성(神言性)과 계시성이 약화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김회권, op. cit. pp. 37-39; 81-82[9]

4.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 문서 참조.

5. 신약과의 연관성

나중에 신약이 이사야 7장 14절의 "젊은 여인(혹은 처녀)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라는 예언 등 이사야서의 예언들을[10] 예수에게 적용시켰기에 신약과의 연관성에서 특히 관심을 많이 받는 예언서이다. 예수 또한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언하기 위해 이사야 61장 1~2절을 낭독했다. 성서주석학의 훈련을 받지 않은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신약을 주의 깊게 읽었다면 거의 누구나 이사야서가 '뭔가 중요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사야서가, 더 나아가 구약 성경이 1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다는데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져있다. 가령 이사야 7장 14절 번역을 보자.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단어인 '알마'는 그 자체로만 보자면 '젊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비록 많은 경우 이 단어가 '처녀'의 의미로 쓰이지만, 또한 칠십인역에서 '파르테노스(처녀)'로 번역했기에 처녀라는 번역의 설득력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더군다나 신약에서 '파르테노스'라는 번역을 인용하기에 그 번역의 설득력을 더욱 높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이사야서를 번역할 때 '젊은 여인'이라는 번역을 드물지 않게 취한다.[11] 다만 애초에 처녀라는 단어도 젊은 여인이라는 뜻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근래 들어서는 처녀가 숫처녀라는 의미로만 사용되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교황청 성서위원회(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12]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이사야서를 비롯한 구약의 수신자를 1차적으로 유대인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의 틀에서 생각하더라도 1차적 수신자를 유대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신앙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며, 이사야서의 예언을 예수에 적용하는 것을 막지도 않는다. 이는 일부 극단적인 소수 신학자들의 일탈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성서학의 폭넓은 합의이다.
따라서 이사 7,10-17의 단락에서도 일차적으로는 아하즈 시대를 배경으로 이 말씀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그다음에 비로소 마태오 복음서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피해야 할 가장 큰 오류는, 이 예언을 아하즈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같은 본문을 예수님께는 적용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잘못된 이해다. 구약의 예언서들에서도 어떤 시대의 예언이 다른 시대에 새롭게 해석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살아있는 말씀인 성경의 본문은 어느 한 시대에 매이지 않고 계속적인 재해석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 지녔던 의미를 보존하면서도 그와 다른 의미를 더 지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소근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바오로딸, 2016, 137쪽

5.1. 내용 요약 및 기독교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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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이사야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구약의 예언서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을 적절히 혼합하여 해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5.2.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9. 주께서 이르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
10.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11. 나는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주께서 대답하셨다. "도시들은 헐려 주민이 없고 집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농토는 짓밟혀 황무지가 될 때까지다.
12. 야훼께서 사람을 멀리 쫓아내시고 나면 이 곳엔 버려진 땅이 많으리라.
이사야 6:9-12 (공동번역성서)

이사야에는 하느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일부러 그 사람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특이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 대목은 신약성경에서도 여러번 인용되며 하느님이 일부러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것에 기한이 있고 하느님이 나중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 것을 볼 때,[17] 이 말은 지금 어설프게 회개해서 곧바로 다시 죄 가운데로 빠지는 것보다 나중에 회개하기에 더욱 적절한 환경에서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 나온 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6. 여담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장 3절
* 지구 구형론을 언급할 때 꼭 나오는 성경이다.
세찬 발길로 너를 공처럼 넓은 땅으로 걷어차 버리리라. 너는 거기에서 죽고 네 영광의 마차들도 거기에 버려지리라, 네 상전 집안에 치욕인 자야!
이사야서 22장 18절
הַיֹּשֵׁב֙ עַל־ח֣וּג הָאָ֔רֶץ וְיֹשְׁבֶ֖יהָ כַּחֲגָבִ֑ים הַנֹּוטֶ֤ה כַדֹּק֙ שָׁמַ֔יִם וַיִּמְתָּחֵ֥ם כָּאֹ֖הֶל לָשָֽׁבֶת׃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It is he that sitteth upon the circle of the earth, and the inhabitants thereof are as grasshoppers; that stretcheth out the heavens as a curtain, and spreadeth them out as a tent to dwell in:
이사야서 40장 22절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58:6-7)

7. 이 이름을 가진 인물



[1] 약칭은 이사야스(Isaias).[2] 아모스(עָמוֹס)와는 다른 인물이다.[3] 고로 아이러니하게도 이사야는 다름아닌 그 오므리, 아합, 이세벨, 아달리야의 후손이기도 하다. 아달리야가 요아스의 친할머니기 때문[4] 제1이사야 중에서 이사야의 대묵시록이라고 불리는 24~27장, 이사야의 소묵시록이라고 불리는 34~35장 등은 유배 이후에 집필되었다.[5] 36~39장은 열왕기하의 히즈키야왕 부분(열왕기하 18~20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6] 김회권, 성서주석-이사야 I, 대한기독교서회, 2006, p. 38[7] 마틴 로이드 존스, 이운연 옮김, 이사야 1장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p.9[8] 물론 성경의 다른 여타 묵시록처럼 이사야가 심판과 회복의 메세지를 동시에 전했다는 견해도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당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9] 즉, 이사야를 추종하는 학파 내지 집단 내에서 기록되지 않은 예언자가 시대를 거쳐 지속적으로 나와서 이사야서를 완성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10] 다른 예로는 제2이사야서에 나타나는 주님의 종 예언[11] 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ew American Bible Revised Edition[12] 다음 링크에서 각 언어 번역을 볼 수 있다: # 원문은 프랑스어이다.[13]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14] 개신교 성경 기준[15] 개신교 성경 기준[16] 로마서 11장 26절은 이런 의미로 해석했다.[17] 내가 잠깐 너를 내버려두었었지만, 큰 자비를 기울여 너를 다시 거두어들이리라. (이사야 54:7)[18] 개역개정식 표현으론 '구스'로 칭해진다.[19] 남유다 왕국이 망한 건 이사야가 죽고 난 뒤 수십년 뒤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이후 왕국 말기에 한번 부흥을 이끌었던 군주가 있었으나 이 왕을 죽이고 한번 나라를 헤집었던 게 하필 그 이집트였고 얼마 안 가 신 바빌로니아에게 남유다 왕국은 개털리고 이집트가 이걸 방관하면서 멸망하게 된 것. 이집트를 믿어선 안 된다는 말 자체는 틀린게 없던 셈. 사실 저 때 다시 뭉친다 해도 국력 차이가 이미 어마무시하게 벌려졌기 때문에 그 당시 남유다 왕국이 커 봤자 얼마나 컸겠냐만은...[20] 다만 나와있지는 않지만 동물들은 그 어떠한 심판없이 곧바로 천국에 간다는 묘사가 적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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