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다윗 왕조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르호보암 | 아비얌 | 아사 | 여호사밧 | 여호람 | |
다윗 왕조 | 오므리 왕조 | 다윗 왕조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아하시야 | 아달리야 | 요아스 | 아마지야 | 우찌야 | |
다윗 왕조 |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요담 | 아하스 | 히즈키야 | 므나쎄 | 아몬 | |
다윗 왕조 | |||||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요시야 | 여호아하즈 | 여호야킴 | 여호야긴 | 치드키야 | |
이스라엘 판관 · 통일 이스라엘 · 북이스라엘 바빌론 예후드 · 예후드 메디나타 하스몬 왕조 · 헤로데 왕조 · 유다이아 | }}}}}}}}} |
남유다 왕국 제14대 국왕 므나쎄 מְנַשֶּׁה | Manasseh | |||
<colbgcolor=#0038B8,#467EFF><colcolor=#fff> 출생 | 기원전 709년경 | ||
예루살렘 | |||
사망 | 기원전 643년경 | ||
예루살렘 | |||
재위 기간 | 제14대 남유다 왕국 국왕 | ||
기원전 698년 ~ 기원전 643년 (약 55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8B8,#467EFF><colcolor=#fff> 지파 | 유다 지파 | |
전임자 | 히즈키야 | ||
후임자 | 아몬 | ||
부모 | 아버지 히즈키야 | ||
자녀 | 아몬 | }}}}}}}}} |
[clearfix]
1. 개요
재위 기원전 687~642. 성경의 등장인물로 남유다의 14대 왕.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모든 왕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44년)였다. 성경에서는 므나쎄의 죄 때문에 야훼가 유다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하면서 평생까임권에 당첨된 왕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시대의 흐름과 냉혹한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순응하여 피폐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운 중흥군주로 평가받는다. 애초에 성경의 역사관(신명기적 사관)은 세속적으로 어떤 업적이나 치적을 남겼느냐보다, 얼마나 야훼를 충실히 섬겼느냐를 기준으로 삼아 그 왕의 치세를 평가한다. 따라서 실제로는 훌륭한 통치를 했던 왕이라 해도 야훼에게 순종하지 않았다면 악한 왕으로 낙인을 찍어 치적을 잘 묘사하지 않는다.[1] 어찌보면 야훼에게 순종했으나 암군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던 아버지 히즈키야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2. 즉위 이전
아버지는 히즈키야였으며 할아버지는 아하스였다. 아하스 시절에 유다 왕국은 북이스라엘과 아람-다마스쿠스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당시 중동의 패권국이었던 신아시리아 제국에게 신종하여 속국이 되었다. 그 대가로 주권은 제한되었지만 유다는 아시리아 제국에 편입되어 안전과 무역 확대와 같은 번영을 누렸다.아버지 히즈키야의 재위 시절에는 형제 국가였던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완전히 멸망했고, 그 유민들이 유다로 대거 이주하면서 왕국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경제적 번영은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나라가 부강해지고 북이스라엘의 유민들이 몰려오면서, 당시 유다 전역에 만연해 있던 혼교주의[2]를 대신하여 야훼만을 섬겨야 한다는 일신주의와, 북이스라엘의 고토를 회복해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을 재현해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격렬하게 타올랐다.
므나쎄의 아버지 히즈키야는 이러한 민족주의, 일신주의적 열망에 심취해 있었거나, 최소한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산당[3]에서의 제사를 금지시키고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종교적인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가 소아시아 전역에서 전사하고 그 직후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반란에 휘말리자, 이에 편승하여 아시리아의 종주권을 거부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큰 실수였는데 당시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의 왕에 오른 센나케리브[4]가 아시리아를 중흥시킨 명군이었기 때문. 센나케리브는 바빌로니아를 평정한 뒤 곧바로 중동으로 진군, 다른 반란세력들을 모두 때려잡고 유다 역시 다시 굴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의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 아래 놓여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5] 결국 아시리아에게 개긴다는 히즈키야의 패기는 만용으로 드러났다. 왕국은 간신히 멸망을 면했지만, 왕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하는 무거운 짐이 남았다.
3. 즉위와 치적
히즈키야는 기원전 68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폐허가 된 왕국을 재건할 막중한 임무는 므나쎄에게 지워졌다. 즉위 후 므나쎄가 실시한 정책은 북왕국 고토를 되찾고 독립을 꿈꾸던 아버지의 정책과 180도 달랐다. 즉 아시리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제국에 철저히 순종, 협력하여 떡고물을 얻어먹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당시 아시리아는 센나케리브-에짤하돈-아슈르바니팔로 이어지는 명군 라인이 이룩한 최후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실제로 출토된 아시리아의 기록에 므낫세는 아시리아의 왕을 도와 제국의 수도 니네베의 토목공사에 필요한 건축 자재들을 공급했던 속국 군주들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충실히 공물을 바치고, 아시리아의 이집트 정벌에도 종군하는 등 철저한 친 아시리아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충성에 대해 아시리아 역시 확실히 보답했다. 아시리아는 유다가 바치는 공물의 양을 경감해 주었고, 이전과 같이 유다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바쳐야 하는 공물의 양이 줄고 평화가 찾아오자 국가 재건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파괴된 촌락과 도시들이 복구되는 한편 황무지 역시 개간되어 점차 경제는 회복되었다.
무엇보다도 므낫세의 친 아시리아 정책이 가져온 성과는 무역의 확대였다. 유다는 동지중해 페니키아 지역과 아라비아를 잇는 아시리아 제국 내의 무역로에서 중개지 역할을 도맡으며 번성하였다. 특히나 이 무역로의 가장 핵심적인 상품인 올리브유의 생산과 거래에서 유다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다. 올리브유의 주요 생산지였던 필리스틴(블레셋)의 도시 에크론에서는 유대인들의 제단이 발굴되었고, 예루살렘에서는 아랍 무역상들이 방문했음을 입증하는 고대 아랍어가 적힌 토기가 발굴되는 등,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 유다가 지중해-아라비아로 이어지는 올리브유 교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음을 증명하는 유물들이 많다.[6] 또 운 좋게도 므나쎄의 치세는 아시리아 명군 라인이 건재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44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아시리아 제국의 비호 아래에서 전란 걱정할 이유 없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경제 회복과 항구적인 평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그러나 철저한 친 아시리아 정책은 일신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의 엄청난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열왕기하에는 므나쎄가 성전에서 가나안의 토착신들 뿐 아니라 아시리아의 신앙인 일월성신(해와 달과 별들)을 섬겼다고 하는데, 이는 아시리아를 받들면서 그들이 섬기는 신들 역시 받들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속국의 왕이 대국의 신앙을 따르며 비위를 맞추는 건 고대에 흔히 있는 일이기는 했으나 야훼만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신주의자들에게 이러한 므나쎄의 정책은 종교적인 타락에 불과하였다. 또한 잃어버린 고토와 동족들을 회복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철천지 원수 아시리아를 주인으로 떠받드는 므나쎄는 그야말로 매국노요 적국의 앞잡이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므나쎄를 위대한 아버지의 길에서 벗어난 배신자로 규정했다. 열왕기하 중 므나쎄 파트에서 므나쎄의 치세에 유혈이 낭자했다고 표현하는 것은[7] 이러한 일신주의, 민족주의자들이 므나쎄에 대항하여 싸운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히즈키야의 반 아시리아, 일신주의 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했던 유명한 예언자 이사야 역시 전승에 따르면 므나쎄 시대에 처형당했다고 열왕기하 21:16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므나쎄는 나의 눈에 거슬리는 그 못할 짓을 하도록 이끌어 유다 백성을 죄에 빠뜨린데다가 무죄한 사람의 피마저 흘려 온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다.(열왕기하 21:16, 공동번역개정판)
므나쎄는 기원전 643년에 죽고, 왕위는 아들 아몬이 계승했다.
4. 평가
2므나쎄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그릇된 정치를 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사람 면전에서 쫓아낸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따라 3부왕 히즈키야가 허물어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웠고 이스라엘 왕 아합을 본받아 바알 제단을 쌓았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고 하늘의 별들을 절하여 섬겼다. ... 6그리고 왕자들을 불에 살라 바칠 뿐 아니라 점쟁이와 술객을 두었고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과 박수를 두었다. 이렇게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많이 하여 야훼의 속을 썩여드렸다. ... 17 므나쎄의 나머지 사적과 행적 그리고 그가 저지른 죄는 유다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8므나쎄가 그 선조들과 같이 잠들자 우짜 정원이라고도 하는 왕실 정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 아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2열왕 21,2-18 (공동번역성서)
2열왕 21,2-18 (공동번역성서)
10야훼께서는 므나쎄와 그의 백성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므나쎄와 그의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자, 11야훼께서는 아시리아 왕의 군대를 끌어들이셨다. 아시리아 군 장교들은 므나쎄를 갈고리로 끌어내어 놋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데리고 갔다. 12이렇게 곤경에 빠지자 므나쎄는 자기의 하느님 야훼께 빌었다. 선조들의 하느님 앞에 굴복하고 13빌었다. 그러자 야훼께서는 마음이 움직이시어 그의 애원을 들어주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왕위에 앉게 해주셨다. 므나쎄는 그제야 야훼야말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14이런 일이 있은 뒤에 그는 기혼 서쪽 골짜기에다가, 다윗 성 물고기문에 이르기까지 외곽성을 쌓아올렸다. 오벨 밖으로 돌아가며 성을 아주 높이 쌓아올렸고 유다의 요새화된 성마다 군대와 장군을 배치하였다. 15그리고 외국의 신상들을 치워 없애버렸다. 야훼의 성전에 있던 우상을 떼어내고 야훼의 성전 언덕과 그 밖에 예루살렘에 세웠던 제단들을 허물어 성 밖에 내다 버렸으며 16야훼의 제단을 세운 다음 그 위에다 친교제물과 감사제물을 바치고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를 예배하라고 유다인들에게 일렀다. 17그러나 백성은 저희 하느님 야훼께 바친다고 하면서도 계속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다. 18므나쎄의 나머지 역사와 그의 하느님 야훼께 드린 기도와 선견자들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으로 말한 내용은 이스라엘 왕조실록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19또 그가 기도를 올려 하느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던 일, 하느님께 굴복하기 전에 하느님께 반역하며 어떤 못할 짓을 하였는지, 어디에 산당들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 등 우상들을 세웠는지, 그 모든 일이 선견자들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2역대 33,10-19 (공동번역성서)
2역대 33,10-19 (공동번역성서)
정치적인 식견과 치적만을 따지자면 충분히 명군으로 꼽힐 수 있는 왕이었다. 잘못된 외교적 상황 판단으로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비판이 가능한 아버지 히즈키야와는 달리, 므나쎄는 철저히 현실적인 인물이었으며 아시리아의 흥성이 지속될 것임을 꿰뚫어보았다. 이러한 현실 감각에 기반한 외교적 판단을 바탕으로 므나쎄는 약소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강대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그 아래에서 실익을 챙기는 것)을 했고, 히즈키야 시대의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구하며, 오랜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신학자 에른스트 크나우프(Ernst Knauf)는 아예 대놓고 "좋은 왕이 그의 시대에 백성들에게 평화의 안전, 번영을 가져오는 왕이라면, 므나쎄는 유다의 가장 훌륭한 왕 두 사람 중 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8]
후대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이후 아시리아가 빠르게 쇠퇴하면서 므나쎄의 손자 요시야[9] 치하의 남유다가 독립을 달성하고 지역 패권국 노릇을 해보려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므나쎄가 재건해준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가장 선한 왕 중 하나로 띄워주는 요시야가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므나쎄였던 셈.
성경에서는 크게 두 가지 계열의 평가가 전해진다. DtrG(Deuteronomistisches Geschichtswerk, 신명기계 역사서)[10]에 속하는 열왕기에서는 그야말로 악랄한 왕으로 등장한다. 우선 므나쎄의 친 아시리아 정책으로 우상 숭배가 만연하여 야훼 일신주의가 흔들렸고, 민족의 고토를 회복하는 일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비슷한 이유로 북왕국의 왕들도 비판 받기는 하지만, 대체로 북왕국보다는 괜찮게 묘사되는 남왕국 왕실에서 므나쎄의 행적은 굉장히 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DtrG 관점에서 남왕국 몰락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왕은 므나쎄이다.[11]
반면 ChrG(Chronistisches Geschichtswerk, 역대기계 역사서)[12]에 속하는 역대기에서는 말년에 자신의 행적을 후회한 입체적인 왕으로 등장한다. 비록 평가의 초점은 열왕기와 다르기는 하지만, 이는 열왕기와 모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 책이 각각 어느 전승에 주목하고 발췌했냐의 차이이다. DtrG는 반(反) 왕정적인 이데올로기에 바탕해서 편집된 역사서들로, "어째서 왕국이 멸망했나"라는 질문에 응답하고자 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왕들은 토라에 충실하지 못하여 천벌을 부른 지도자로 묘사되고, 예외적인 일부 왕들마저도[13] 고대의 전형적인 고결한 영웅상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신명기계 역사서의 유배 시기 최종 편저자들은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생성·존재·멸망했던 시간을 오로지 기만당한 자들의 분노 안에서만 회고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국가에 대한 분노의 회고'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결코 인간의 분노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속에 떨어진 하느님의 분노였다. 이 '분노'는 이미 이스라엘 이전 이집트에서 매우 현실적으로 채택되었던 정치신학의 한 개념이었다: 주권자의 분노는 억압받는 이들의 권리 관철과 구원을 위한 정치적 열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dtr 역사가들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이 하느님 분노의 비밀을 캐보려 노력한다.
그들의 결정적 물음은 이것이다: "왜 야훼께서 이 땅에 이렇게 하셨는가? 타오르는 이 큰 분노는 어찌 된 것인가?"(신명 29,23). 답은 다른 신들에게로 이스라엘의 이탈과, 이스라엘을 이방 제의들로 미혹한 임근들의 죄에 있다. 이 노선이 이 책군群의 편집을 관통한다. 이것은 DtrG가 하느님의 분노에 관해 말하는 두 가지 표현 틀에서 아주 명확히 드러난다: '분노 정식'('야훼의 분노가 ~를 거슬러 타오른다', 또는 '야훼께서 분노에 빠지신다')과 '상심 정식'(어떤 인간 또는 이스라엘이 '야훼를 상심시켰다'). 야훼의 분노에 관한 말은 이 역사서의 모든 책에 나오지만, 신명기와 열왕기에 무더기로 나타난다. 분노 정식은 이스라엘의 야훼 이반離反에 관한 정형화된 묘사들의 정점에 으레 등장한다(예: 판관 10,6-7). 이 정식은 사실상 계약이 깨어졌음을 나타내며(예: 신명 29,22-27; 여호 23,16; 판관 2,20; 2열왕 17,15-18), 또한 하느님께서 심판·징벌하시리라는 언급과 언제나 결부되어 있다. 상심 정식은 하느님의 징벌과 반드시 결부되어 있지는 않다. 이 정식의 전형적 맥락은 임금에 대한 판결이다(예: 1열왕 16,26;22,53-54; 2열왕 21,6).
......사무엘은 국가 창설을 (이스라엘이 토라를 준수했다면, 이 사회형태도 이스라엘에게 가능했을 터이지만) 처음부터 재앙으로의 길로 판단했다(1사무 8장과 12장; 신명 17-14-20의 임금의 지켜야 할 규정도 참조). 그래서 두 임금이 지나선 실현되지 못한 미래 언명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인즉, 이 작품의 시작인 신명기 4장과 30장에 나오는 모세의 역사 해석이다. 이 본문들은 가장 후대의 편집들에서 유래하는데,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미래를 펼쳐 보이는 말을 그대로 옮긴다. 그런 까닭에 이 본문들은 높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 이 본문들의 관점은 하느님 이반과 유배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개(신명 4,23-31)와 하느님에 의한 귀향과 마음의 할례[이로 말미암아 이제 이스라엘은 사랑의 계명과 신명기의 모든 사회적 규범을 지킬 수 있다(신명 30,1-10)]를 포괄한다. 비할 바 없이 슬기롭고 의로운 이 (dtr) 토라를 통해 이스라엘은, 임금과 국가 없이도, 하느님의 사회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더이상 성전이 필요하지 않으니, 이스라엘이 언제 어디서든 야훼를 부르면 그분은 토라를 통해 도와주시고 가까이 계셔 주시기 때문이다(신명 4,6-8). 바야흐로 이 본문들의 관점에서 전체 DtrG와 그 분노의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게오르크 브라울리크Georg Braulik OSB, 〈신명기계 역사서(DtrG)에 관한 이론 변천사〉Theorien über das Deuteronomistische Geschichtswerk (DtrG) im Wandel der Forschung, 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2, pp.346-349
반면 ChrG는 과거의 현실을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고자 하며, 그렇기에 DtrG처럼 "므나쎄가 이러이러했으니 나라가 망했다"라고 제시하기보다는 "그 므나쎄마저도 이러이러하게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고 제시하는 게 훨씬 주제에 부합했다. 그리고 이는 DtrG와 ChrG 중 하나가 이야기를 날조한 것이 아니라, 책의 주제에 맞는 자료를 취사선택했기 때문이다. 역대기 저자가 출처 사료를 밝히고 있는데로(2역대 33,18-19) 므나쎄의 악행과 통회는 '이스라엘 왕조실록'과 '선견자들의 역사서'에 나와있는 내용이었고, 역대기 저자의 시대에는 이 사료들이 남아있었다.그들의 결정적 물음은 이것이다: "왜 야훼께서 이 땅에 이렇게 하셨는가? 타오르는 이 큰 분노는 어찌 된 것인가?"(신명 29,23). 답은 다른 신들에게로 이스라엘의 이탈과, 이스라엘을 이방 제의들로 미혹한 임근들의 죄에 있다. 이 노선이 이 책군群의 편집을 관통한다. 이것은 DtrG가 하느님의 분노에 관해 말하는 두 가지 표현 틀에서 아주 명확히 드러난다: '분노 정식'('야훼의 분노가 ~를 거슬러 타오른다', 또는 '야훼께서 분노에 빠지신다')과 '상심 정식'(어떤 인간 또는 이스라엘이 '야훼를 상심시켰다'). 야훼의 분노에 관한 말은 이 역사서의 모든 책에 나오지만, 신명기와 열왕기에 무더기로 나타난다. 분노 정식은 이스라엘의 야훼 이반離反에 관한 정형화된 묘사들의 정점에 으레 등장한다(예: 판관 10,6-7). 이 정식은 사실상 계약이 깨어졌음을 나타내며(예: 신명 29,22-27; 여호 23,16; 판관 2,20; 2열왕 17,15-18), 또한 하느님께서 심판·징벌하시리라는 언급과 언제나 결부되어 있다. 상심 정식은 하느님의 징벌과 반드시 결부되어 있지는 않다. 이 정식의 전형적 맥락은 임금에 대한 판결이다(예: 1열왕 16,26;22,53-54; 2열왕 21,6).
......사무엘은 국가 창설을 (이스라엘이 토라를 준수했다면, 이 사회형태도 이스라엘에게 가능했을 터이지만) 처음부터 재앙으로의 길로 판단했다(1사무 8장과 12장; 신명 17-14-20의 임금의 지켜야 할 규정도 참조). 그래서 두 임금이 지나선 실현되지 못한 미래 언명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인즉, 이 작품의 시작인 신명기 4장과 30장에 나오는 모세의 역사 해석이다. 이 본문들은 가장 후대의 편집들에서 유래하는데,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미래를 펼쳐 보이는 말을 그대로 옮긴다. 그런 까닭에 이 본문들은 높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 이 본문들의 관점은 하느님 이반과 유배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개(신명 4,23-31)와 하느님에 의한 귀향과 마음의 할례[이로 말미암아 이제 이스라엘은 사랑의 계명과 신명기의 모든 사회적 규범을 지킬 수 있다(신명 30,1-10)]를 포괄한다. 비할 바 없이 슬기롭고 의로운 이 (dtr) 토라를 통해 이스라엘은, 임금과 국가 없이도, 하느님의 사회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더이상 성전이 필요하지 않으니, 이스라엘이 언제 어디서든 야훼를 부르면 그분은 토라를 통해 도와주시고 가까이 계셔 주시기 때문이다(신명 4,6-8). 바야흐로 이 본문들의 관점에서 전체 DtrG와 그 분노의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게오르크 브라울리크Georg Braulik OSB, 〈신명기계 역사서(DtrG)에 관한 이론 변천사〉Theorien über das Deuteronomistische Geschichtswerk (DtrG) im Wandel der Forschung, 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2, pp.346-349
결론적으로 말해서 열왕기와 역대기의 다소 상반된 므나쎄 묘사 차이는 국가 멸망이라는 천벌을 설명하고자 한 DtrG의 입장과 어떻게 살아야할지의 그림을 제시하고 싶어한 ChrG의 입장에서 각자 주제에 맞는 자료를 알맞게 선별한 결과이다.
5. 여담
열왕기하의 기록에 따르면 자식을 몰렉에게 인신공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부친 히즈키야와는 나이차가 49년 정도나 나지만 의외로 정작 조부 아하스와는 60년 정도로 정상적인 정도이다. 이유는 아하스가 히즈키야를 너무나도 빨리 만 11살에 낳은 반면, 히즈키야는 아들을 가지려고 노력했으나 잘 되지 않다가 뒤늦게야 얻은 게 만 49세 정도였던 게 이유였다.
6. 참고 문헌
Finkelstein, Israel and Silberman, Neil A. The Bible Unearthed: Archaeology’s New Vis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Origin of Its Sacred Texts. New York: Free Press, 2001. p243-250Gallagher, William R. Sennacherib’s Campaign to Judah: New Studies. Leiden, Bostom: 1999.
Grabbe, Lester. “The Kingdom of Judah from Sennacherib’s Invasion to the Fall of Jerusalem.” Good Kings and Bad Kings. Kings and Bad Kings. Edited by Lester Grabbe, 2005.
Knauf, Ernst A. “The Glorious Days of Manasseh.” Good Kings and Bad Kings. Edited by Lester Grabbe, 2005
van Keulen, P. S. F. Manasseh through the eyes of the Deuteronomists : the Manasseh account (2 Kings 21:1-18) and the final chapters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Leiden ; New York: E.J. Brill, 1996.
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2
[1] 북이스라엘 왕국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오므리와 아합, 그리고 최후의 중흥군주인 여로보암 2세를 야훼를 잘 섬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악한 왕으로 까는 것이 좋은 예다.[2] 가나안의 토착신과 야훼를 함께 섬기는 행위를 이야기한다. 최근의 연구를 보면 아예 초기 유대교는 야훼를 주신으로 섬기는 다신교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대놓고 야훼의 아내 아세라(본래는 엘의 아내)라는 글귀가 적힌 유물이 발굴되기도 하고.[3] 지방에서 각기 지방신을 섬기는 사당.[4] 성경 한국어 번역판으론 산헤립[5] 성경에서는 열왕기하나 역대기하 모두 아시리아의 18만 대군이 야훼가 보낸 천사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몰살당하고 히즈키야가 승리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역사적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엄청난 공물과 영토를 할양하고 전 국토가 약탈과 살육으로 쑥대밭이 난 뒤에야 겨우 멸망을 면했다고 한다. 사실 멸망을 면한 것만 해도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인데, 아시리아는 반란을 일으키는 속국에게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북이스라엘도 히즈키야와 정확히 같은 테크를 타서 멸망했다. 이러한 주장에 일부에서 반론을 제기하기는 하지만, 히즈키야가 항복을 했냐 안했냐의 문제일 뿐 학계의 정설은 예루살렘을 제외한 나머지 유다 전역은 아시리아의 약탈과 살육으로 폐허가 되었다는 것이다.[6] 심지어 일부 학자들은 므나쎄의 왕비가 아랍인이었을 것이라는 가설도 제기한다.[7] 므나쎄는 나의 눈에 거슬리는 그 못할 짓을 하도록 이끌어 유다 백성을 죄에 빠뜨린데다가, 무죄한 사람의 피마저 흘려 온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열왕기하 21장 16절, 공동번역성서)[8] 다른 한 명은 헤로데 대왕이다![9] 처음부터 악을 행하다가 나중에 하나님께 회개하고 개심한 할아버지와는 정반대로 이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와 더불어 성경에서 남유다 최후의 선한 왕으로, 야훼를 매우 신실하게 섬기던 왕으로 평가된다. 성전에서 율법서(신명기의 원형으로 추정된다)를 찾아내(실제로는 이 시기에 편찬한 후 모세가 쓴 책을 이제야 찾아냈다는 명분으로 공표했을 것으로 본다) 종교 개혁을 이끌었고, 아시리아가 빠르게 국가 멸망 테크에 접어들면서 독립도 이루고 영토도 확장해보고 하다가, 아시리아를 대신해 중동 패권국으로 떠오르던 이집트에게 관광당하고 어이없이 사망하는, 증조부 히즈키야와 거의 비슷한 테크를 타고 유다 멸망의 단초를 열었다. 다만 이집트보다는 신바빌로니아에 붙는 게 국가 보존에 더 좋을 것이다라는 외교적 판단으로 행한 행동이며 결과론적으로 친 이집트 왕이 즉위해서 멸망한 유다의 역사를 보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집트를 막을 대책에 대하여 전무했다는 점은 있다. 아무튼 핑켈슈타인 같은 학자들은 아예 요시야 시대가 현재 유대교의 기틀이 잡히는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10] 신명기,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11] 전체적으로 성경에서 악하다고 평가받는 왕들(오므리 왕가, 므나쎄)의 가장 큰 공통점은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 말한 솔로몬식 정치 체계인 1) 풍요경제, 2) 억압정치, 3) 내재종교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중앙집권형 발전은 필연적으로 수용주의를 동반하는데, 이스라엘의 나할라 토지법(레위기 25:23)은 당대 이스라엘 왕국에 관료로 많이 뽑혔던 페니키아, 가나안인들의 토지관과 엄청난 차이가 있고(땅의 주권이 누구에게 속하는가?) 그로 인한 사회 부패와 계층 격차 심화를 동반했다. 므나쎄를 비롯한 악한 왕들에 대한 비판은 출애굽 전승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이해에서 출발했으며, 예언자들은 아모스가 그러했듯 선택받았다고 말한 이스라엘이 제일 먼저 심판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BC 9-7c에 걸쳐 수도 없이 진행했다. 정치적 요소만 놓고 본다면 단순히 므나쎄까(...)들로 정리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의 예언자 사상이 여기에 들어간다면 므나쎄를 비롯한 성경의 악한 왕 비판을 단순히 '정치적 반대파'로 규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당장 아모스 5장(북 왕국에 대한 사회-종교비판)과 이사야 1장(남유다 예루살렘 성전의 과잉적 제의 비판)이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12] 역대기, 에즈라기, 느헤미야기[13] 다윗, 요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