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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왕국 제7대 국왕 아달리야 עֲתַלְיָה | Athaliah | |||
<colbgcolor=#0038B8,#467EFF><colcolor=#fff> 출생 | 기원전 898년경 | ||
사마리아 | |||
사망 | 기원전 835년경 | ||
예루살렘 | |||
재위 기간 | 제7대 남유다 왕국 국왕 | ||
기원전 841년 ~ 기원전 835년 (약 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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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아하시야 | ||
후임자 | 요아스 | ||
부모 | 아버지 아합 | ||
자녀 | 아하시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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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유다 왕국의 제7대 국왕이자 유일한 여왕. 성경 번역본에 따라서 한글 표기가 다른데, 개역개정판은 '아달랴', 공동번역성서는 '아달리야', 천주교 성경은 '아탈야'로 표기한다.북이스라엘 오므리 왕가의 아합 왕의 딸로,[1] 남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이자 남유다 왕 아하시야의 어머니이다.
흥미롭게도 페니키아계 도시의 시돈의 공주인 이제벨의 딸로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혼혈아 출신이지만 아합의 딸이자 여호람의 아내, 아하시야의 어머니, 요아스의 할머니로서 전근대로서는 흔치 않게도 스스로 여왕에까지 즉위했다.[2]
2. 생애
남유다 왕국으로 시집와서 여호람의 왕비, 아하시야의 왕대비로 살다가, 기원전 841년경에 어머니 이세벨과 아들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예후에게 시해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본인이 직접 왕위에 오르겠다 선포하고는, 유다 왕국 내의 다윗 왕가의 씨를 말려버리겠다 선언하고 자신의 모든 손자를 죽이는 전대미문의 대학살을 저질렀다.[3] 이로 인해 유다 왕국에서 다윗 왕가는 멸족될 위기를 맞았으나, 이 상황을 알게 된 아하시야 왕의 누이인 왕녀 여호세바가 어머니의 이 포악한 대학살에 다급히 아기였던 조카인 어린 왕자 요아스를 빼내 유모와 함께 대피시켜 남편이자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에게 위탁하는데 성공했다.아달리야가 나라를 다스리는 육 년 동안 요아스는 고모와 함께 야훼의 전에 숨어 살았다.
열왕기하 11:3 (공동번역성서)
열왕기하 11:3 (공동번역성서)
이후 성경에서는 열왕기하나 역대하나 요아스가 숨어있는 동안 아달리야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냥 집 나간 왕자가 돌아와 왕좌를 되찾는 이야기의 보스로서만 그려진다. 다윗 왕조 혈통이 아니고 야훼 신앙과 철저히 거리를 둔 오므리 왕조의 혈통이라서 기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요아스는 성전에 숨어 제사장인 고모부 여호야다와 고모 여호세바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고 여호야다와 여호세바는 어린 조카의 보호자로서 장모이자 어머니인 아달리야의 서슬 퍼런 집착으로부터 조카를 보호하였다. 이렇게 아달리야의 폭정이 시작된지 6년 후인 아달리야 재위 7년차에 여호야다가 크레타와 필리스티아 용병들로 구성된 외국인 부대들[4]과 함께 언약을 맺고 그들 앞에 다윗 왕가의 마지막 생존자인 요아스를 데리고 오며 "유다의 왕위는 야훼의 말씀대로 마땅히 다윗 왕가의 것이다."라고 선포하며 쿠데타를 실행했다.
그때 백성들의 환호소리를 들은 아달리야가 무슨 일인가 하여 나와봤더니 여왕인 자신을 두고 대관식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에 아달리야는 "반역이다!"라며 절규했다. 여호야다는 백부장을 불러 그녀의 체포를 명령했고, 결국 아달리야는 그 자리에서 백부장들에게 붙들려 성문 끝까지 끌려나가 거기서 처형되고 요아스가 즉위한다.
3. 여담
- 남유다 왕국에서 유일하게 다윗과 솔로몬의 후손이 아닌 왕이었다.
- 아달리야가 탄압한 다윗의 자손들의 범위가 어느정도인지 신학적으로도 의견이 갈린다. 어떤 부류는 솔로몬 외 다윗의 아들들의 자손들까지 탄압했다는 견해도 있고, 그냥 아하시야의 아들들만 탄압했다는 의견도 있다. 어찌 되었던 아달리야가 다윗의 가문을 멸절시키려 한 것은 분명하다. 또한 여호람 시절의 형제들의 숙청 사건의 배후를 아달리야가 조장했다는 의견들도 많다.
- 여호세바와 아달리야의 관계 역시 많은 의문점이 있다. 이 둘이 모녀 관계인지 아닌지 등의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과거 역사에서 형제나 가족간의 권력 전쟁은 얼마든지 있어 왔으므로 설령 여호세바가 아달리야의 친딸이 맞다고 해도 아달리야의 악행에 반기를 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5][6]
- 일부 평가에서는 자신의 자식들도 숙청하고 왕이 된 점에선 측천무후와 비슷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자식들을 탄압한 것은 사실이나 모두 죽이지도 않았고, 내치에서의 능력은 아달리야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유능한 군주였다. 결국 다윗 자손들에 대한 탄압으로 위태로운 위치였던 아달리야는 내치 등에 실패하였고 결국 여호야다가 일으킨 거사로 제거되었지만 측천무후는 내치에서의 실책보다 외치에서의 실책으로 몰락한 것이라 권좌에서 내려온 뒤 자연사했다는 점에선 차이가 있다.
[1] 즉, 북이스라엘의 왕들인 아하시야, 여호람과 남매 사이인 셈이다.[2] 아달리야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의 여성 군주로 살로메 알렉산드라, 살로메 1세 등이 등장하며, 여성 지도자까지 포함하면 20세기 중반에 골다 메이어라는 이스라엘 공화국의 여성 총리가 나오기도 한다. 판관기의 내용에 따르면 아달리야보다 과거인 판관기 시절에 여성 판관 드보라가 나온적이 있다.[3] 남편 여호람이 다윗 왕가의 일원이므로 여호람도 아하시야도 모두 피살당한 시점에서 아하시야의 아들들, 즉 손자들만 없애면 왕위가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즉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자신의 친손자들을 살해하는 극악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4] 역대하에서는 백부장 아사랴, 이스마엘, 아사랴(동명이인), 마아세이아, 엘리사밧 등 레위인 위주로 병력을 꾸렸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열왕기 쪽의 기술이 좀 더 사실에 가깝다. 다만 다른 견해로는 역대하에 기록된 저 인물들이 여호야다와 함께한 핵심 인물들이고 이들이 크레타와 필리스티아 용병들을 지휘했단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5] 당장 아합의 교훈을 따른 아하스의 아들이 히즈키야이다. 요시야의 아버지인 아몬도 우상숭배자였으나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가는 선례는 성경에도 제법 나와있다.[6] 여호세바가 아달리야의 친딸이 아니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당장 아달리야는 이세벨이 여호와를 믿었던 사람들을 탄압한 것을 보고 배웠기에 이세벨이 했던 행동을 본인도 한 것이다. 게다가 여호세바의 남편은 제사장이 여호야다이기 때문에 이세벨의 친딸이 맞다면 순순히 허락했을 가능성이 없을거라는 견해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