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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1:06:26

중세/정치사/중기/발칸 반도와 에게해 일대

1. 개요2. 그리스 및 현 이스탄불 일대
2.1. 동로마 제국
2.1.1. 마케도니아 왕조2.1.2. 25년의 혼란기2.1.3. 콤니노스 왕조2.1.4. 혼돈의 시기2.1.5. 앙겔로스 왕조
2.2. 십자군 국가
2.2.1. 라틴 제국2.2.2. 아카이아 공국2.2.3. 아테네 공국
2.3. 동로마 부흥 세력
2.3.1. 이피로스 전제군주국2.3.2. 니케아 제국
2.4. 동로마 제국의 부활과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성립
3. 발칸 서부4. 발칸 동부(불가리아)
4.1. 제1 제국의 몰락과 멸망4.2. 동로마 제국의 통치기4.3. 제2제국의 건국4.4. 불가리아 제2제국의 전성기4.5. 몽골의 침략과 쇠퇴기4.6. 내전과 혼란기
5. 에게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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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그리스 및 현 이스탄불 일대

2.1. 동로마 제국

11세기 초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원정을 통해 1차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킨 동로마 제국은 그나만 숨통이 트였다고 생각하나 중앙아시아에서 와 이슬람으로 개종한 튀르크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튀르크인들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조금씩 잠식하다가 마침내 1037년 셀주크 제국을 건국했고, 1071년 만지케르트에서 동로마를 패배시켜 아나톨리아에 대부분 지역을 획득했다.

1081년 새로게 동로마 황제로 즉위한 알렉시오스 1세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정예 기사 300명을 파병해줄 것을 요청하나 이 요청이 제국의 명줄을 크게 끊을 악수가 될 십자군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2.1.1. 마케도니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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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년, 바실리오스 2세 황제의 지휘하에 클리돈 통행로에서 불가리아인을 포획한 로마군.
불가리아 제1제국의 말기인 이 시절쯤 되면 불가리아에서 슬라브적 색채가 튀르크적 색채보다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1] 머리채가 잡힌 불가리아인의 복식이 유럽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방적(유목민적, 몽골 / 튀르크적) 색채가 강한 것이 주목된다.

아나톨리아 지방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통제한 바실리오스 2세는 제국 내부가 안정된 후,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999년 불가리아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1000년경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제1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아드리아 해에 면한 제국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와 협의한 끝에 그를 달마치야 대공에 임명하여 달마치야 해안 지대 전체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로써 해안의 그리스어권 도시들의 안전을 확보한 뒤, 황제는 불가리아를 확실히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1001년 여름, 그는 베로이아 요새를 공략했고, 테살리아에서 불가리아 수비대를 격파했다. 또한 니키포로스 시피아스 휘하의 군대를 발칸 산맥의 북쪽으로 파견하여 프레슬라프와 플리스카를 탈환했다. 이로써 불가리아 북동부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 들어갔다. 사무일은 적의 수가 워낙 많아서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매복이나 기습 공격으로 일관했지만,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의 전훈을 뼈저리게 익힌 바실리오스 2세가 워낙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

이후 15년간 이어진 전쟁 초중반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만 않았지만 1014년 7월 29일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 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는 이 포로들에게 끔찍한 형벌을 내리고 돌려보냈다. 15,000명의 포로들을 100명씩으로 나누어 1명은 애꾸, 나머지는 전부 눈을 뽑고, 애꾸가 나머지 99명을 인솔해 불가리아로 되돌아가게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불가록토노스(Βουλγαροκτόνος), 즉 불가르인의 학살자라 불리게 되었다.[2] 이전투 이후 사무일이 급사하고 아들인 가브릴 라도미르가 즉위했다.

사무일의 사망 소식을 접한 바실리오스 2세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군의 방향을 돌려 마케도니아로 진격해 크르나 계곡을 거쳐 가브릴이 있는 비톨라로 향했다. 비록 비톨라 요새를 공략하진 못했지만, 차르의 궁전을 불태우고 철수했다. 1015년 초, 가브릴은 바실리오스 2세에게 앞으로 황제에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이를 의심하여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와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장군을 모글레나로 파견해 적군을 섬멸하고 모시노폴리스에서 트리아디차로 진군하여 그 일대를 평정하고 보아나 요새를 점거하도록 하였다.

동로마군이 뒤이어 모글레나 요새를 포위하자, 가브릴은 구원군을 이끌고 요새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포위망이 워낙 견고하여 구원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가 압박을 가함으로써 적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지만, 동로마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수일 간 테오도시오스 성벽 주위를 맴돌다가 별 수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모글레나 요새는 함락되었고, 가브릴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워졌다.

그 사이 바실리오스 2세는 가브릴의 사촌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차르가 되는 데 도움을 주고 앞으로 호의를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넘어간 블라디슬라프는 1015년 8월 페트리스크 마을 근처의 숲에서 사냥하던 가브릴을 습격해 살해하였다. 그는 가브릴의 가족과 지지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차르가 되었다.

이반은 차르에 오른 뒤 바실리오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평화 협약을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그를 믿지 않고 암살자를 보냈으며, 암살이 실패하자 1015년 말 군대를 이끌고 오스토보와 소스크로 진격해, 펠라고니아 평원을 황폐화하고 수많은 불가리아인을 포로로 잡았다. 블라디슬라프는 오흐리드를 버리고 프레스파 요새에서 버텼다. 바실리오스 2세는 오흐리드를 점거한 뒤 좀더 공세를 이어가려 했지만, 불가리아군이 배후를 습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모시노폴리스로 귀환하였다.

블라디슬라프는 비톨라를 새 수도로 선택하고 요새화한 뒤, 1016년 비톨라로 쳐들어온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페르니크를 88일간 포위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1017년 바실리오스 2세의 요청을 받아들인 키예프 루스군이 불가리아 북동부를 침공하여 프레슬라프를 점령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 사이에 남쪽으로 진군하여 카스토리아를 포위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사절을 파견하여 루스군을 아군으로 끌여들이려고 애쓰는 한편, 페체네그와 연합하여 테살로니키를 공략하려 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페체네그가 다뉴브 강을 건너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카스토리아 포위를 풀고 오스트로보 호수 근처로 이동하여 페체네그와 대치했다. 페체네그는 곧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바실리오스 2세는 남쪽으로 돌아가서 사무일의 궁전이 있던 세티나를 점령하고 그곳에 보관된 식량을 다수 확보하였다. 그해 가을,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의 별동대를 기습 공격했지만, 바실리오스 2세가 친히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1018년 2월 디라키움 요새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이던 중 전사했다. 장남 프레시안 2세가 뒤를 이어 차르가 되었지만, 불가리아 귀족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제국에 대거 귀순했다. 프레시안 2세는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어머니 마리아 황후 마저 귀순하자 그해 8월 바실리오스 2세에게 항복하였고, 불가리아 제1제국은 멸망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구 불가리아 제국 지배층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 이들에게 손대지 않고 오히려 매우 우대했다. 죽은 차르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황후 마리아를 로마 제국에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인 조스테 파트리키아에 봉하고, 그녀의 아들들은 주요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했다. 그리고 불가리아 각계각층의 귀족들의 아들들은 동로마 여인들과 결혼하게 주선하고, 딸들은 동로마 남편감을 찾아주어 제국 귀족층에 편입시켰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가리아 속주 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세금을 인하하고 곡물로 현물 납부할 수 있도록 해서 민심을 잡았으며,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대주교를 황제가 서임하게 된 것 외에는 건드리지 않아서 독립성을 유지시켰다.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병합한 이후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하였는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 1020년경에 황제는 넘치는 에너지로 제국의 동쪽 끝자락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021년 그에게 병약한 동생 외에 조카딸 둘만 있어 사실상 후계자가 없었기에 불가리아 원정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던 수석호위관인 니키포로스 시피아스바르다스 포카스의 아들 니키포로스 포카스 바리트라첼로스(Nikephoros Phokas Barytrachelos)와 함께 반란을 꾀했다. 그들은 황제가 조지아 왕국과의 전쟁에 착수하여 수도가 비어있는 틈을 타 추종자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조지아 왕국과도 내통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원정을 지속하는 한편 두 반란 지도자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 양자가 서로를 불신하도록 조장했다. 이 작전은 보기좋게 들어맞았다. 1022년 8월 15일, 시피아스는 그를 암살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파견된 토벌대가 접근해오자, 그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조지아 원정을 마치고 귀환한 바실리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온 시피아스를 삭발시키고 안티고네 섬으로 추방했다. 또한 공모자 대부분을 투옥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모반에 가담하여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가 발각된 2명의 왕실 인사 역시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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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스 2세 치하 최대 강역.

이후 남이탈리아에서도 동로마인들은 992년에 공표된 금인칙서에 따라 베네치아의 해상 원조를 받으면서 노르만인들을 격퇴했다. 그는 시칠리아를 1027년에 원정할 계획을 세웠으나, 1025년 12월 15일에 사망하였고, 공동 황제였던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8세는 방탕하면서도 무능한 인물이었다. 전임 황제인 형 바실리오스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후계를 제대로 정하지 못했으며 1021년 ~ 1022년을 풍미했던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의 난 등을 겪으며 말년에까지 군대 통솔을 포기할 수 없었느데 문제는 바실리오스 생존 때까지 콘스탄티노스는 공식 석상에 나온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바실리오스가 죽기 전까지 니케아의 별장에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근위대같은 경우는 콘스탄티노스의 승계 결정이 알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제국의 동단 바스푸라칸(Vaspurakan) 테마의 절도사를 맡고 있던 니키포로스 콤니노스가 1026년에서 1027년 사이에 조지아 왕국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한다는 첩보가 입수되기도 했다.

니키포로스는 즉각 체포되어 1년간 조사에 들어갔고 결국 조사 결과에 따라 콘스탄티노스는 그를 실명의 형벌로 처벌하였다. 또한 1025년 부켈라리오스 테마의 총독을 지내고 있던 전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였던 프레시안이 부켈라리오스 테마의 총독을 지내는 중 바실리오스 스클리로스와 말다툼을 벌이다 결투까지 벌였다. 콘스탄티노스 8세는 두 사람을 프린스 제도로 유배냈다.

그 밖에의 내치로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아리스타키스와 야햐는 콘스탄티노스 8세의 시대에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오랜 전쟁 동안 강제되었던 알렐렝군이라는 세금 제도가 폐지되었다. 알렐렝군이란 주변의 세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의 미납금을 주변의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내도록 하는 제도였다. 로마노스 3세에 의해 직접적으로 폐지되었다는 소리도 있으나, 대체로 콘스탄티노스 8세는 형의 치세 동안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해 갇혀있던 사람들을 석방하고 신규 건축 중이던 감옥을 허물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3]

다만 나브팍토스(Naupaktos)에서 행정 장관에 대하여 일어난 반란에 대해서는 다소간 엄격하게 대하여 주교가 실명 형벌을 받고 주민들 상당수도 처벌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Anthony Kaldellis는 비록 콘스탄티노스를 폭압적 통치자로 보지는 않으나 이를 체제의 불안성을 보여주는 초조함의 한 징후로 해석한다.

외치의 경우 전대의 기조를 따라 파티마 왕조와의 교린이 이어졌다. 물론 국경이 조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1026년에는 전방 사령관 니키포로스가 조지아와 반란을 책동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에게 해로 상당한 규모의 사라센 함대가 출몰하여 제국 해군이 격퇴한 소식 역시 보고된다. 1027년에는 국경을 맞대고 있던 페체네그 유목민 군대가 이스트로스 강을 건너와 마케도니아까지 이르렀다. 이에 시르미온 방면을 담당하던 사령관인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Konstantinos Diogenes, ? ~ 1032년)가 불가리아 방면 최고 사령관으로서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국경은 다시 안정되었다.

국방상 가장 중요한 동부 지역의 총 지휘관인 동방군 총사령관(Megas Domestikos)에는 환관 니콜라오스가 임명되었다. 그는 비교적 임무 수행에 성공적이었다. 바실리오스 치세 말엽인 1021년의 조지아 원정이 히피아스의 반란으로 조기 종결되었다가 1027년, 조지아 측의 반격으로 요새 몇 곳이 함락된 것을 이유로 원정이 재개된 것이다. 비잔티움군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1028년, 니콜라오스는 제2차 원정에 올라 조지아와의 영토 분쟁 지역인 상 타오(Upper Tao)를 확실하게 장악하여 쐐기를 박고자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가 곧 숨을 거둘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에 곧 귀환하였다.

1028년 11월이 되자 콘스탄티노스의 건강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제국에서는 바실리오스 2세 시절부터 문제였던 후계자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실리오스 2세가 자식이 없어서 그 동생이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그 황제에게도 아들이 없었다. 황제에게는 알리피오스의 딸 엘레니 알리피아와의 사이에서 딸이 3명 있었는데, 맏이인 에브도키아는 천연두에 걸리다가 겨우 살아남았으나 곰보가 되었기에 평생 수도원에서 살아야 했으며, 둘째 딸 조이는 26년전에 이탈리아로 결혼하러 갔다가 약혼자가 열병으로 죽어버린 덕분에 황궁의 규방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여동생 테오도라와 함께 살고 있었다.

서방과는 다르게 여성도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동로마 제국의 특성상 조이를 통해서 남편이 제위를 물려받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누가 될 건지에 대해서는 다 죽어가는 황제의 침대 맡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으며 콘스탄티노스는 결국 황실에 충성도 깊고 능력과 시민들의 지지가 상당한 콘스탄티노스 달라시노스(Konstantinos Dalassenos)를 둘째 딸 조이와의 공동 후계자로 낙점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1024년 이래로 안티오키아 도독(Doux of Antiocheia)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위가 비어 있는 위험한 시기에 계승하기에는 조건이 좋지 않았다.

결국 새로이 결정된 후보는 로마노스 아르이로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으로 기혼자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즉각 로마노스를 병석으로 불러들여 강제로 아내와 이혼시킨 후 딸 조이와 결혼시키게 했다. 11월 10일에 조이와 결혼한 로마노스는 그 다음날에 자신의 장인인 콘스탄티노스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15일에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로마노스 3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롤모델로 여기고 그처럼 '철학자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당대의 역사가이며 로마노스와 대면한 적이 있었던 미하일 프셀로스는 로마노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그리스 문학에 익숙했고 이탈리아인들의 문학 작품에도 소양이 있었다.그의 말쏨씨에는 기품과 더불이 위엄이 흘러넘쳤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황제로서 당당한 위풍을 지닌 사람이었다. 자신의 폭넓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크게 과장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과거의 위대한 안토니누스[4]를 본받아 (중략) 학문의 연구와 전쟁 기술의 두 가지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전쟁 기술에 관해 그는 완전히 무지했고, 학문에 관해서도 깊은 지식을 지니지 못했다.

로마노스는 건축 사업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고 교회와 수도원에도 거액의 자금을 기부했다. 소피아 대성당에 지급하는 연간 정부 보조금을 금 80파운드만큼 증액했고, 지역 공동체가 납부하는 세금에서 적자가 발생할 경우 수도원과 대지주가 메우도록 한 '알렐렝욘(allelengyon)'을 폐지했다. 또한 시민들에게 보너스를 지불했고 정부 채무자들을 대거 사면해 수백 명을 감옥에서 풀어주는 등 여러모로 민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아나톨리아 귀족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려 했던 이전 황제들의 정책을 포기하고 귀족들이 자영농을 착취하는 걸 허용했다. 심지어 그는 악명 높은 징수 도급제까지 부활시켰다. 이것은 투기꾼이 일정한 금액을 주고 정부로부터 세금 징수를 대신할 권리를 사들인 다음 납세자들에게서 두 배 또는 세 배의 세금을 마음대로 징수하는 제도였다. 자영농들은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고 그 결과 제국군의 전통적인 기반인 자영농이 몰락했고 세금 기반도 허약해져 제국을 약화시켰다.

로마노스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처럼 역사에 오래 남을 건물을 짓고 싶었다. 그는 마르마라 연안으로 이어지는 일곱 번째 언덕 위에 페리블렙토스(Peribleptos), 즉 "만물을 굽어보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거대한 성당을 건립했으며 부속 수도원을 추가로 건설하게 했는데, 이 수도원은 성당보다 규모가 커서 그 안을 채울 수도자의 수도 모자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이를 정도로 분노했다. 이에 프셀로스는 이 건물이 로마노스의 명성에 보탬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다고 기술했다.
그 행위는 신앙심에서 비롯되었으나 실은 수많은 악과 부정의 원인이 되었다. 성당에 들어가는 비용은 나날이 늘어갔다. 황제는 매일 공사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기부금을 징수했고 건축을 제한하려는 사람에게는 화를 냈다. 그 반면에 새로운 장식이나 양식적 변화를 생각해내는 사람은 대번에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중략) 이 성당에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써야 했다. 그리하여 황실의 금은보화를 모조리 그 성당에 쏟아부었다. 기금이 고갈된 뒤에도 건축은 완성되지 않았다. 일부분을 부수고 일부분을 위에 덧쌓는 짓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외치 또한 재앙 수준이었다.1030년, 로마노스는 알레포의 아미르를 공격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가 안티오크에 도착했을 때, 아미르가 대사를 보내 기존의 평화 조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피해가 있다면 배상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미 개선식에 사용할 제관을 주문해 놓은 로마노스는 그 제의를 거부하고 알레포로 진군했다. 군대가 시리아에 이르러 좁은 고개로 막 들어서려 할 때 사라센군의 함성이 들리더니 갑자기 아미르의 병사들이 언덕의 양쪽 사면으로 내려왔다. 로마노스는 부관 한 명이 말을 오르게 해주고 자신을 경호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프셀로스에 따르면, 아미르의 군대는 적이 제대로 대항하지도 않고 도망치는 걸 오히려 깜짝 놀라 지켜봤다고 하다. 이리하여 바실리오스 2세 시기 최강의 군대로 손꼽히던 제국군은 불과 5년 만에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며칠 후, 사라센 기병대 800명은 제국군에게서 노획한 전리품을 가득 실은 채 텔루크로 다가왔다. 그들은 황제가 전사했고 제국군 전체가 괴멸되었다는 과장된 소식을 전하면서 텔루크 군사 총독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에게 이튿날 아침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보복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마니아케스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사라센 진영에 많은 음식과 술을 보내주고 자신과 병사들은 동이 트자마자 항복하고 시가 소유한 금과 보물을 내놓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사라센군은 크게 기뻐하며 술을 마음껏 마셨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마니아케스는 이튿날 새벽 기습을 가해 곯아 떨어진 사라센 기병 800명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모든 시신에서 코와 귀를 잘라냈다. 이후 그는 패주한 로마노스 황제를 카파도키아에서 만나 800개의 코와 1600개의 귀를 내놓았다. 그러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마니아케스를 하(下) 메디아의 군사 총독으로 임명해 유프라테스 상류 유역의 모든 도시들을 다스리게 했다. 이후 마니아케스는 사라센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고 1032년엔 에데사를 공략했다.

그와중에 동로마 궁정 내부는 혼란기에 진입한 상태였다.1029년, 조이 황후의 여동생 테오도라는 불가리아의 프레시안과 결혼하여 황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프레시안은 실명형을 받은 뒤 수도자가 되었지만, 테오도라는 처벌받지 않았다. 하지만 1031년에 그녀는 또 다른 음모에 연루되었고, 이번에는 음모의 주동자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와 함께 페트리온의 수도원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이렇듯 외부에서 그를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로마노스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아내를 홀대하고 정부를 들인 것이다.

조이는 로마노스가 황제로 집권할 수 있게 해준 기반이었다. 로마노스도 처음에는 조이에게서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 최음제를 복용하고 특별한 비법을 행하고 부적을 지니고 주문을 외우는 등 온갖 애를 썼다. 하지만 당시 로마노스는 60세가 넘었고 조이도 50대였기 때문에 끝내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자 로마노스는 아내를 무척 싫어해 한 방에 있는 것 조차 꺼렸고 정부를 뒀다. 또한 그는 아내가 국고에 접근하는 것도 금지했고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한도가 정해져 있는 보잘 것 없는 연금을 내줬다.

남편의 홀대를 받던 조이 황후는 1033년 어느 날 환관 요한네스 오르파노트르푸스의 남동생 미하일을 만났다. 조이는 잘생긴 미하일에게 한 눈에 반했다. 이후 그녀는 미하일을 자주 자신의 침소로 부르다가 환관 요한네스에 따라 남편을 제껴놓고 미하일을 황제로 세울 음모에 가담했다. 한편 로마노스는 미하일을 의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개인 시종으로 삼아 자주 불러 다리와 발을 주무르게 했다.

그러나 그의 누이 풀케리아가 황제에게 세간의 소문을 전하고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경고를 전했다. 이에 황제는 미하일을 불러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뜬소문이라는 걸 성스러운 유물에 서약하라고 명령했다. 미하일이 선뜻 그렇게 하자 황제는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그러던 1034년 성금요일 전날의 목요일, 로마노스는 목욕탕에서 갑자기 죽었고, 이후 조이는 자신의 정부 미하일을 황제 미하일 4세로 옹립했고 자신이 미하일의 황후라고 선포했다. 이에 프셀로스는 로마노스 황제가 사망한 정황에 대한 세간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역사서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황제는 이튿날에 치러질 공공 행사를 몸소 준비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 그는 침소 근처에 있는 아름답게 장식된 대형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시중을 드는 사람은 없었지만 당시에는 분명 죽음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중략) 그는 머리와 몸을 씻은 다음 숨을 크게 쉬면서 수영을 할 수 있는 중간 깊이의 목욕탕으로 갔다. 그는처음에 헤엄을 치고 즐겁게 놀면서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 그의 명령을 받고 종자들 몇이 와서 황제를 쉬게 하고 옷을 입혀 주었다. 이들이 황제를 죽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하는 모든 사람들은 황제가 평소의 습관대로 물에 뛰어들었을 때 종자들이 물 밑에서 오랫동안 그의 머리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를 목졸라 죽이려 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런 뒤에 그들은 갔다.
나중에 그 불행한 황제는 물 위에 둥둥 떠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그는 아직 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고 도와 달라는 듯한 몸짓으로 팔을 뻗은 자세였다. 누군가가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팔을 잡고 목욕탕에서 꺼내 소파에 뉘었다. 그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황후는 시중도 받지 않고 달려와서 짐짓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한동안 남편을 바라보다가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만족하고는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로마노스는 신음하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그는 말을 할 수 없어 표정과 몸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호흡은 점점 빨라졌다. 갑자기 그의 입이 열리더니 검은 색의 걸쭉한 물질이 흘러나왔다. 그는 두세 차례 숨을 헐떡이고는 숨을 거두었다.

또다른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치스는 로마노스가 황궁의 목욕탕에서 미하일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교살되었다고 기술했고 에데사의 마테오는 그가 황후에게 독살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당시 로마노스가 쇠약해졌기 때문에 목욕하던 도중 심장마비 또는 발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프셀로스가 나중에 황제의 시신을 직접 보고 기록한 내용을 보면 로마노스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인의 얼굴은 야위지 않고 기묘하게 부풀어 올랐고 아무런 색깔이 없어 독살당한 자와 똑같았으며 머리털과 수염이 드문드문 난 모습은 마치 수확이 끝난 뒤의 빈 들판 같았다."

어째든 미하일은 즉위 초기에는 조이와 함께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그는 조이가 로마노스 3세를 배신한 것처럼 자신 역시 배신할 것을 걱정했고 그의 형이자 환관인 요안니스 오르파노르포스 역시 조이가 권력을 잡게 된다면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결국 미하일은 조이를 규방에 가두고 엄중하게 감시하게 했고, 그녀에게 로마노스 때보다 훨씬 적은 연금을 줬다. 그녀의 친구들은 허가 없이는 그녀를 만나러 오지 못했다. 이후 미하일은 형 요안니스에게 많은 권력을 양도하면서도 제국을 위한 개혁을 실시했다.

미하일은 형에게 재정과 세금의 문제를 맡기고 나머지 모든 일은 자신이 직접 도맡아 처리했다. 그는 지방 행정과 대외 관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고 로마노스 3세의 실정으로 사기가 떨어졌던 군대를 어느 정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비록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배우는 속도가 빨라서 여러 뛰어난 학자들의 가르침을 모조리 깨우쳤다. 그는 간질 환자였으나 정서적으로 매우 건전해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고 침착하면서도 빠르게 말했으며 타고난 재치와 표현력을 자주 선보이곤 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비천한 가문 출신에 간질 환자라는 핸디캡을 안고서도 이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제국을 잘 이끌어가는 것에 탄복했다.

하지만 그가 이렇듯 성실하게 제국을 다스리는 동안 그의 형 요안니스 오르파노르포스는 과도한 세금을 매겨 백성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그는 세금을 회피하기 일쑤였던 아나톨리아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확실하게 뜯어냈다. 이에 반발한 귀족들은 종종 봉기를 일으켰고 1034년엔 콘스탄티노스 8세로부터 황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콘스탄티노스 달라세노스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요안니스는 바실리오스 2세 이래 현물로 세금을 납부해오던 불가리아 주민들에게 현금 납부를 강요해 그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 결과, 불가리아 주민들은 제국을 상대로 봉기한다.

1038년, 미하일은 요안니스의 추천을 따라 매제인 스테파노스를 수송 함대 사령관,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를 육군 사령관으로 삼고 시칠리아 원정을 단행했다. 시칠리아 원정은 본래 바실리오스 2세가 1026년에 단행하려 했으나 그 전해에 죽는 바람에 지연된 것이었고, 현재 시칠리아에 근거지를 둔 사라센인들이 남부 이탈리아의 동로마 영토를 침략하고 지중해에서 해적질을 했기 때문에 미하일로서는 반드시 정벌해야 했다. 게다가 마침 시칠리아에서 내분이 일어나면서 성공 확률이 더 높아졌다. 급기야 팔레르모의 지배자 알 아칼은 반란군에게 시달리다가 1035년 동로마 제국에게 구원을 호소해 가뜩이나 시칠리아를 정벌하려 했던 제국군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비록 알 아칼은 곧 암살되었지만 동로마 제국은 어차피 명분은 제공되었으니 그대로 원정을 단행했다.

1038년 초여름, 시칠리아 원정군이 출격했다. 늦여름에 시칠리아에 상륙한 원정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나갔다. 사라센군은 분열된 상태에서도 용감히 싸웠으나 제국군의 기세를 전혀 막지 못했다. 제국군은 순식간에 메시나를 손에 넣었고 팔레르모로 가는 북부 해안 도로와 메시나를 잇는 고개를 통제하는 중요한 요새인 로메타[5]도 격전 끝에 함락시켰다. 1040년에 시라쿠사를 함락시켰던 등 시칠리아의 동해안 전체를 장악했었다고 한다.[6]

그러나 시라쿠사를 공략한 후 원정군은 문제에 직면했다.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와 스테파노스가 서로 갈등을 빚었던 것이다. 'History Times'이라는 유튜버의 영상 'Normans in Italy // Wars of the Lombards & Byzantines (1008-1053)'의 21분 35~50초 즈음에 따르면, 여러 해안가의 도시들을 봉쇄 후 함락해나가는 과정에서 스테파노스가 마니아케스만큼 철저하지 못해 전멸시키지 못하고 일부 이슬람군이 도시를 탈출해 배로 도망가는 것을 허용하게 되자 마니아케스는 스테파노스를 모욕을 담아 질책하였으며, 나아가 무능하다면서 공개적으로 채찍질을(publicly whipping) 했다고 한다. 스테파노스가 과연 남자인지 의심스럽다면서 황제에게 즐거움이나 주는 자(즉 남색 상대라는 의미)일 뿐이라고 조롱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스테파노스는 황제의 인척인데 이는 정치적으로 큰 실책이었다. 이에 스테파노스는 복수를 결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긴급 사자를 보내 마니아케스를 반역자라고 몰아붙였다. 그러자 마니아케스는 소환되어 변명할 기회도 빼앗긴 채 투옥되었다.

한편 남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계 3대 공국 중 하나인 살레르노 공국이 보내준 파견부대 대장인 아르두인이[7] 이슬람측으로부터 생포한 말을 바치라고 요구받았는데 아르두인이 거절하자, 마니아케스는 아르두인을 벗기고서는 두들겨 팼다고도[8] 한다.[9] 즉 마니아케스는 그 시대 최고의 장군이었지만 국내정치에서든, 외국(혹은 포이데라티)와의 관계에서든 인화력이 부족했던 것이다.[10] 이렇게 랑고바르드계 공국들이 빈정이 상해서 이탈하게 되자 이탈리아에서의 정세가 불리해졌고, 시칠리아 전선에서는 스테파노스가 총사령관을 맡았으나 얼마 안 가 병사했고, 환관 바실리오스가 그 뒤를 이었지만 변변치 못해 원정군의 사기가 뚝 떨어지는 걸 막지 못했다. 결국 원정군은 힘을 잃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042년에는 마지막 전초기지인 메시나를 다시 뺏겨 시칠리아 재정복이 무산되었음은 물론, 이 때가 동로마의 마지막 시칠리아 영유였다. 즉 이 이후에는 손도 못 댔다.[11] 위의 각주에서 이 1042년이 아닌 902년이나 965년을 동로마의 마지막 시칠리아 영유로 간주하는 것은 이 때에는 오래 안정적으로 영유했던 것이 아니라 전쟁 중의 일시적인 손바뀜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038년 아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일부 지휘관들이 살해되었고 1040년에는 동로마의 군사 총독이 살해되었으며 현지 민병대가 해안 지대에서 연이어 폭동을 일으켰다. 특히 노르만 용병대는 베네벤토 공자 아테눌프를 지도자로 선출하고 이탈리아 속주 총독 엑사고스토스를 생포하기까지 했다. 이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시칠리아 원정군 일부가 긴급히 파견되었고 몇 개월 뒤에는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이 도로 사라센의 수중에 들어갔다.

1040년, 불가리아인들은 제국의 수탈에 맞서 페터르 데얀(Peter Delyan)의 지도 아래 폭동을 일으켰다. 몇 주뒤 페테르의 사촌인 알루시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해 반란 세력에 합류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불가리아 서부에서 비잔티움 세력을 몰아낸 다음 북부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해 말, 그들은 다라키온을 손에 넣고 아드리아 해로 나가는 길을 확보한 후 곧이어 남쪽의 레판토 만까지 진출한 후 동쪽의 테베를 공략하려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미하일은 친정을 선포했다. 당시 그는 괴저병으로 두 다리가 끔찍하게 부어올라 거의 마비 상태였고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심했다. 형제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 치세에 제국의 영토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면서 적어도 줄어들게 놔두지는 않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미하일 프셀로스는 황제가 세심하게 원정 계획을 수립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정한 뒤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섰을 때, 지휘관들이 진지에 남아있으라고 권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말에 올라타더니 안정된 자세로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고 기술했다.

황제가 전선에 막 이를 때 페테르과 알루시안이 서로 내분을 벌였다가 알루시안이 페테르의 눈과 코를 잘라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뒤 봉기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황제에게 항복할 테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달라고 제안했다. 이리하여 미하일은 1041년 초에 눈과 코를 잃은 페테르을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거느리고 수도에 개선했다.

하지만 미하일의 뇌전증과 수종병은 결국 치료되지 않았으며, 미하일 4세는 이것을 로마노스 3세를 암살하고 제위를 찬탈한 데 대한 천벌이라 여겨 짧은 재위 기간 내내 참회 기도를 드리고 기부와 자선을 하며 종교에 집착하였다. 하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였고 불가리아 반란을 제압한 직후인 1041년 12월 10일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조카인 미하일 5세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집권을 시작한 미하일 5세는 곧 큰 삼촌 요안니스와 충돌에 들어갔다. 결국 미하일 5세는 요안니스를 변경의 수도원으로 유배를 보낸 뒤, 삼촌이 추방했던 관료들을 복귀시켰다. 그 중에는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되는 미하일 케룰라리오스(Michael Keroulrarios)나 요르요스 마니아키스(Georgios Maniakes)와 같은 유망한 지휘관들이 있었다. 특히 마니아키스는 곧장 지휘권을 받아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용병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수도를 떠났다.

미하일 5세는 삼촌인 4세와 마찬가지로 원로원을 보호하는 입장이었으며 아울러 출신 성분 뿐만 아니라 주요 정치 구성원으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 대중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원로원 - 시민을 중심으로 한 정치 구도를 안정 궤도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실제로 1042년에 들어와 치렀던 대규모 공공 행진에서 미하일 5세는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확인했고 마침내 모종의 결심을 내리게 된다.

4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 미하일 5세는 양어머니이며 정치적으로 무거운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 조이를 제거하고자 했다. 직전에 있었던 행진에서 시민들의 분명한 지지를 확인한 그는 거침없이 밤중에 조이가 미하일 5세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그녀를 남자 성직자처럼 대머리 일부가 보이게끔 삭발시키고[2], 마침내 수도에서 머지 않은 프린키포(Prinkipo) 섬의 수녀원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4월 19일 아침, 콘스탄티노스 광장에서 조이의 폐위를 통보하는 선언서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을 통해 대독하게 했다.

시민들의 반응은 미하일 5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폭발적이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 왕조를 폐할 생각은 염두에 없었던 것이다. 프셀로스는 '조용하던 여성들이 제일 먼저 들고 일어나 모든 것을 때려부쉈다'고 평하였다. 실제로 19일날 일어난 봉기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궁궐과 그 외부로 분단되었다. 시민들은 유배되었던 조이와 노년을 쓸쓸히 보내던 테오도라를 성 소피아 교회로 데려와 공동 여황제로 선포했다. 조이는 테오도라를 싫어했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했지만 시민들은 기어코 테오도라도 황제로 삼았다.

이후 바로 시민군이 조직된 뒤에 3갈래로 나뉘어 궁궐을 공격했다. 예상치 못한 봉기에 당황한 미하일 5세는 도주하려 하였으나 또 다른 삼촌인 콘스탄티노스(Konstantinos)가 물러서지 말고 맞설 것을 강청하자 이에 호응하여 병력을 무장시켰다.

4월 19일부터 20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궁궐을 두고 정부군과 시민군이 크게 충돌했다. 이 사건으로 총 3천 명의 시민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결국 시민군은 정부군을 압도하였으며 버티지 못한 미하일 5세와 삼촌 콘스탄티노스는 황급히 황제의 기함을 타고 근교의 스투디온 수도원으로 물러나 재빨리 수도자가 되었지만 조이와 테오도라는 시민군들이 스투디온 수도원에 있던 미하일 5세와 콘스탄티노스를 끌어내 실명형과 거세를 하도록 놔뒀다.

그러나 원체 사이가 좋지 않던 자매들인 만큼 즉위 2개월만에 조이는 콘스탄티노스 모노마호스라는 인물과 재혼해 테오도라와 나란히 퇴위한다.동로마 황제가 된 콘스탄티노스 9세는 그동안 혼란스럽던 동로마 제국을 안정화시키기 시작했다. 내치로는 우선 제국의 국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여론 정치를 쉽게 수행하게 했다. 명목상 정실부인이자 계승권자이며 포르피로게(예)니타인 조이를 멀리하고 젊은 애인인 마리아 스클레리나(Maria Sklrarina)를 가까이하다가 1044년 축일 행진 중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는 문제가 있었지만 스클레리나건 외에는 흠집이 될 만한 일은 잘 만들지 않았다.

원로원 정치의 대표자였던 콘스탄티노스는 원로원과 시민대중을 함께 연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대중의 지지를 확고히 얻어야만 정권에 도전할 수도 있는 파플라고니아카파도키아 출신 군부 인사들에게 명분을 제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결과 1047년, 레온 토르니키오스가 수도권에 가까운 마케도니아의 병력을 독점하여 군사 정변을 시도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고 변변한 병력 없이 정권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정치가 가능하게 한 것은 학제 개편과 함께 원로원을 개방했기 때문으로 원로원과 대중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화합시키기 위하여 콘스탄티노스는 두 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공교육 제도를 개선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법학 대학과 철학 대학을 수립했다. 이 교육 과정 개정은 교육비 부담을 없앴으며 변호사 자격 시험을 통한 변호사 자격증 제도의 병행으로 공식적인 관료 진출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로서 기존 대가문 출신이 아닌 일반 평민이나 지방 출신 시민권자도 법관과 같은 전문직이나 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스는 원로원의 자격 제한을 크게 개방하여 기존 대가문에 고정되어 있던 숫자를 증가시켰다. 일반 상인노동자 역시 충분한 품직(品職)을 가질 수 있다면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미하일 4세(1034년 - 1041년) 때 고아원장 요안니스의 품직 개편이 일어난 뒤에는 품직이 단순한 명예 칭호 뿐 아니라 자금을 보유한 사람의 투자 도구 겸 국가의 재원 창출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대상인들까지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다만 기존 원로원의 제한된 정원이라는 혜택을 누리며 국가 정책을 논해왔던 대가문이나 기존 정치인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동시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미하일 프셀로스도 이러한 조치가 국가 질서에 혼란을 초래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중 여론은 반감을 느끼게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생전에는 이러한 갈등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의 사후에는 양자를 중재할 만한 인물이 사라지게 되었고 결국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군사 정변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경제적으로는 콘스탄티노스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특히 과거에는 페리블렙토스(Peribleptos) 수도원 단지 건설 등의 사례를 들어 그의 낭비벽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사례는 방대한 국가 예산 전반에 비하면 사소한 건에 불과하였다. 경제적으로 당시 동로마 제국이 처해 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방에서 계속되는 전쟁이었다. 대체적으로 동서와 북쪽의 삼면에서 전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며 군대의 유지, 주둔, 이동, 작전 및 축성에 막대한 경비가 소모되었다. 또한 외부적인 전쟁과 더불어 국내, 교역 경제에서 교역이 팽창함에 따라 금화 수요도 늘어났고 이로 인하여 추가적인 금화 수요가 발생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1040년대까지는 90% 혹은 80% 후반대를 유지하던 금화의 순도는 1050년대에 들어 급격히 하강하여 70%대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 때 비축된 국고 적립금도 이 시기에 들어 사실상 거의 바닥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제는 계속 이어지다가 이사키오스 1세콘스탄티노스 10세에 이르러서는 재정 수지 회복이 중요 현안으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결말은 매우 좋지 않았다. 무려 만지케르트 전투.

결과적으로는 콘스탄티노스 9세가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으며 그의 재임시에는 국고를 어느 정도 희생하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무엇보다도 그 재정 위기의 뒷마무리를 하기에는 콘스탄티노스가 주요 전쟁들이 일단락되자마자 사망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또한 군부 또한 제어했는데 카파도키아와 파플라고니아계 군부 인사들은 이 시기에도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군 장성들은 전쟁이 잦았던 이 시기에 대중의 주목도 받고 군사적인 실력과 세력을 확고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었다. 니키포로스 2세 이래로 오랜만에 전장에서 직접 병력을 지휘하는 유형이 아니라 중앙에서 만사를 관장하는 유형의 군주 이미지를 창출한 콘스탄티노스 9세는 직접적으로 드러내놓고 견제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자신의 친위 세력에 가까운 환관들이나 행정 장관 등을 총사령관으로 지목했다. 이는 정권을 노릴 수도 있는 장성들에게 군대 장악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조치로 보인다. 그도 아닌 경우에는 비교적 중앙 정부의 통제에 충실한 마케도니아군과 같은 서부 지역 출신의 군대를 주요한 작전 단위로 삼았다.

외치 또한 전쟁과 외교 둘로 나눠졌는데, 전쟁의 경우 10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상당히 이름난 키예프 상인이 주민과 말다툼 끝에 격투를 벌여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키예프 루스는 이 사건을 절호의 기회로 보고 바로 전쟁을 시작했다. 요안니스 스킬리치스는 자신의 책 『개요』를 통해 당시 대공 야로슬라프 1세가 북방의 해양에 거주하는 동맹에게서까지 지원군을 받으며 10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043년 실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출현한 바이킹 함대가 약 400척 - 500척 수준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4만이나 5만으로 잡아도 충분히 많은 병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국을 떠난 키예프 군대는 중간에 위치한 바르나(Varna)에 이르러 잠깐 정박하려 했다. 약탈 보급 실시 혹은 전초 기지 마련을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바르나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장군은 카타칼론 케카브메노스(Katakalon Kekaumenos). 당시 동로마 제국의 최고참 장성 중 한 사람이자 노련한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카타칼론은 손쉽게 키예프 군대를 격파했다. 항구에서도 쫓겨난 키예프 함대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위치한 보스포루스 해협에 키예프 함대가 들어올 무렵 콘스탄티노스는 키예프 측이 원하는 대로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며 화의를 제안했다. 이에 대하여 키예프 측은 사실상 거부를 표명했다. 곧이어 벌어진 전투를 파로스 전투라 한다. 1자 대열로 진영을 구축한 양군은 팽팽하게 대치했다. 일요일 해질녘, 바실리오스 테오도라카노스 장군이 지휘하는 세 척의 전함이 루스의 함대에 돌격, 10여척을 침몰시키거나 빼앗아버리면서 균형은 무너졌다. 키예프 함대는 후퇴했고 그 뒤에는 크림반도에서의 반격 이상의 공격은 불가능했다.

10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상당히 이름난 키예프 상인이 주민과 말다툼 끝에 격투를 벌여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키예프 루스는 이 사건을 절호의 기회로 보고 바로 전쟁을 시작했다. 요안니스 스킬리치스는 자신의 책 『개요』를 통해 당시 대공 야로슬라프 1세가 북방의 해양에 거주하는 동맹에게서까지 지원군을 받으며 10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043년 실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출현한 바이킹 함대가 약 400척 - 500척 수준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4만이나 5만으로 잡아도 충분히 많은 병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국을 떠난 키예프 군대는 중간에 위치한 바르나(Varna)에 이르러 잠깐 정박하려 했다. 약탈 보급 실시 혹은 전초 기지 마련을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바르나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장군은 카타칼론 케카브메노스(Katakalon Kekaumenos). 당시 동로마 제국의 최고참 장성 중 한 사람이자 노련한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카타칼론은 손쉽게 키예프 군대를 격파했다. 항구에서도 쫓겨난 키예프 함대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위치한 보스포루스 해협에 키예프 함대가 들어올 무렵 콘스탄티노스는 키예프 측이 원하는 대로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며 화의를 제안했다. 이에 대하여 키예프 측은 사실상 거부를 표명했다. 곧이어 벌어진 전투를 파로스 전투라 한다. 1자 대열로 진영을 구축한 양군은 팽팽하게 대치했다. 일요일 해질녘, 바실리오스 테오도라카노스 장군이 지휘하는 세 척의 전함이 루스의 함대에 돌격, 10여척을 침몰시키거나 빼앗아버리면서 균형은 무너졌다. 키예프 함대는 후퇴했고 그 뒤에는 크림반도에서의 반격 이상의 공격은 불가능했다.

1044년 키예프가 크림 반도의 거점인 케르손(Kherson)을 점령한 뒤에도 양국의 대치는 이어졌다. 1046년, 마침내 콘스탄티노스는 전쟁을 끝내기로 키예프 루스와 합의했다. 이때까지 구금되었던 키예프 국적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또한 야로슬라프 대공의 아들인 흐셰볼로드 1세를 콘스탄티노스의 딸인 아나스타시아(Anastasia) 공주와 결혼시켰다. 그 아들인 볼로디미르 모노마크는 볼로디미르 2세로서 키예프 대공이 되었다.[12]

이후 콘스탄티노스는 동방 지역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이슬람 세력과도 동맹을 맺었는데 완전히 다른 종교권인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정책이 필요했다. 일단 콘스탄티노스의 등장 시기까지 동로마 제국이 접하고 있던 이슬람 세계는 명목상 파티마 왕조아바스 왕조라는 시아파, 수니파 각각의 대표자가 있었다. 그러나 아바스 제국은 이 시기에는 시아파인 부와이 왕조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실제 동로마 제국은 아바스 제국을 상대로 한 외교 활동을 중단한 지 오래였다. 또한 부와이 왕조 역시 부차적인 외교 대상에 불과했고 어디까지나 당시 동방 외교의 주안점은 남쪽에 위치한 파티마 제국이었다.

파티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11세기 들어와 시리아 일대의 영역과 알레포 토후국의 종주권을 두고 몇 차례 격돌한 바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양국은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먼저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청 앞에 위치한 유서 깊은 무하마드 모스크의 관리권을 파티마 제국에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 파티마 제국은 예루살렘에 위치하였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때 설치된 이래 역시 유서 깊은 성묘교회의 관리권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에 양도할 수 있었다. 파티마 제국은 외국의 대표적인 상징성을 가진 콘스탄티노폴리스 모스크의 보호자를 자처함으로서 이슬람 세계에 위엄을 과시하고 지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예루살렘 성묘 교회의 관리권과 시리아 - 팔레스타인 - 이집트 대주교들에 대한 권한을 인정받음으로서 해외의 정교도 세력을 관리하고 보호할 수 있다는 반대 급부가 있었다.

이러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콘스탄티노스는 동맹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1046년, 동로마 정부는 많은 선물을 제공하고 파티마 제국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동로마의 동방 전선은 무난하게 안정되는가 싶었지만 바실리오스 2세 이후 불가리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다뉴브 저지대까지 뻗어 있는 여러 유목민들과 직접적인 접촉하면서 쿠만페체네그와도 잦은 접촉을 해야 했고, 대개 이들의 약탈이 주를 이루었다.

1047년, 콘스탄티노스는 페체네그족 내부의 내분으로 2개 부족이 이탈하자 이들을 국경 수비대로 기용하기 위해 받아들였다. 바실리오스 2세 이래로 제국 정부는 발칸 산맥 남쪽과 달리 북쪽 모이시아 지방을 자연적인 청야 지대로 편성, 주요 요새지가 아닌 이상 황무지로 방치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곳을 제국의 동맹군으로 들어온 유목민들에게 내주어 정착 및 방위를 담당하게 했다.

페체네그족은 공식적으로 이탈 부족들의 반환을 요구했으며 제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1047년 12월, 페체네그를 포함한 대규모 유목 민족 집단이 강을 건너옴에 따라 제1차 페체네그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페체네그 족이 항복하고 시민권을 받아 발칸 산맥 일원에 정착하면서 상황은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48년, 동부 변경으로 파견된 페체네그 군대가 이탈하면서 페체네그 등 유목 민족 집단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양 세력은 1049년 디아키니 전투와 1050년 바실리키-리바스 전투 등 격전을 벌였다. 결국 소모전이 이어지다가 1053년, 페체네그 측의 제안으로 30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데 합의하였다.

튀르크계 유목민에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정주국가화 된 셀주크 투르크가 이라크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 당시 동로마 제국은 셀주크가 강적이 될 것으로는 보지 않았으며 이란, 이라크 지역에 대해서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양측의 외교적 접촉은 10여년이 경과한 뒤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1047년경 셀주크 군대의 일부가 동로마 제국의 동부 변방인 바스푸라칸 지방을 통과하다가 동로마군과 충돌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후 1048년에는 두 차례의 침공이 일어났다. 첫 번째 맹인 하산이 지휘한 2만의 병력은 전방 병력이 쉽게 진압하였으나 두 번째 이브라힘 이날이 지휘하는 10여만의 병력은 바스푸라칸 일대와 아르메니아 변경을 크게 휩쓸었다. 압도적인 병력에 부담을 느낀 동로마군은 방어 자세를 유지하다가 조지아군과 연합, 5만의 병력을 구축하여 맞섰다. 1048년 9월 18일 일어난 카페트론 전투에서 양군은 크게 충돌했다. 전황은 동로마군에 우세하게 끝났으나 총사령관인 조지아의 장군이 포로가 되어 흐지부지한 싸움으로 끝났다.

이후 양자는 1050년경에 평화 조약에 이르렀지만 1054년, 셀주크 군대는 다시 투으룰 베이의 친정을 단행했다. 이때 벌어진 전투가 제1차 만지케르트 전투. 동로마군의 선전으로 셀주크 본군은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진군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때 이들이 동반하였던 튀르크 유목민들은 이곳에 장기적으로 주둔하면서 계속해서 동로마 동부 변경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이들이 상당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동부 지역을 위협한 끝에 1060년대 동로마 정계는 발칵 뒤집히게 되었고 만지케르트 전투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카페트론 전투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셀주크 제국이 만만하지 않은 상대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동로마의 외교 부처에서는 전투 직후 포로 송환 문제를 겸하여 평화 조약을 두고 바그다드 아바스 정권과의 옛 외교 채널을 가동시키는 등 상황 변화에 대한 적응이 시작되었다. 아바스 칼리프와 셀주크의 토그릴 베그는 양자간에 진행되는 평화 조약에서 파티마 제국이 보유하고 있는 무하마드 모스크의 관리권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제한된 시리아 전선을 맞댄 파티마 제국보다는 셀주크 제국이 더 위협적이고 외교적으로 그만큼 중요한 대상임을 인식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무하마드 모스크의 관리권은 아바스 칼리프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파티마 제국의 위기는 당분간 이어졌다. 1050년대 들어와 나일 강 하류의 범람이 불규칙해져 기근이 이어졌으며 1052년에는 북아프리카의 지리드 왕조가 파티마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아바스 조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바스 왕조와 셀주크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지리드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이 경우 콘스탄티노스는 1046년에 체결된 동맹 조약을 언급하면서 그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또한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파티마 대사단을 영접하며 위로하는 방식으로 상호 우호를 변함없이 유지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파티마 제국의 기근을 해소해주기 위하여 총 2만 8천톤, 400만 모디오스에 달하는 곡물을, '파티마 시민들의 복리를 위하여' 제공하기로 약조했다.

그런 한편으로 동쪽의 셀주크를 대상으로 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1054년 제1차 만지케르트 전투가 끝난 직후 콘스탄티노스는 마침 발칸에서 제1차 페체네그 전쟁이 끝난 기회를 이용하여 마케도니아의 정예 병력을 차출, 동방 전선에 배치시켜 튀르크 유목민들을 제압할 계획까지 세웠다.

한편 콘스탄티노스는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선은 다른 곳보다 다루기가 더 어려웠다. 수도에서 병력을 증파하려면 필연적으로 함대의 대규모 운용이 필요하고 보급도 어려워 많은 경비가 소모되었다. 반면 이 지역의 용병으로 유입되어 정착한 노르만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유지하기가 쉬웠다. 여기에 노르만족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요르고스 마니아키스 장군은 국내 정치에 휘말려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이런 막간을 이용하여 노르만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의 동로마 영토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불려나갔다.

1053년부터 이탈리아의 총독(Katepan)으로 부임한 이탈리아 출신 장군 아르이로스(Argyros)는 교황령 및 이탈리아 여러 세력들과 공동으로 제휴하여 노르만 군대를 상대할 계획을 세워나갔다. 하지만 그의 동서 교회 화합 정책에 대하여 콘스탄티노스 9세가 전폭적으로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1세(1043년 - 1058년)가 이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연합 전선 구축은 어려워져갔다. 1058년, 동로마 국내가 혼란한 가운데 아르이로스 장군이 절도사에서 물러난 공백이 발생하자 로베르 기스카르의 우수한 지휘하에 이탈리아 남부 대부분이 노르만족의 지배에 들게 되었다.

더욱이 그의 치세 막바지에 정통 기독교가 동서로 갈라졌다.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과 남부 이탈리아 등의 관할권 그리고 동로마 제국 소재 로마 교회에 대한 통제 등을 두고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급기야 1054년, 교황청 대사 일행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하고 케룰라리오스도 교황청 대사를 맞파문하면서 동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분열되었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당시 이미 지병인 관절염 등의 악화로 병석에 있던 상황이었지만 교황청 대사단을 불러들여 적절하게 대우하고 총대주교와 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다르다는 점을 거듭 확인시켜주었다. 이런 정책하에서는 동서 대분열이 장기화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는 곧 사망해버렸다.

조이는 황후는 이미 1050년에 죽은데다가 후계 조차 없었기에 환관 관료들은 모이시아의 절도사를 지낸 프로테본(Proteuon)을 옹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황을 전해들은 테오도라의 지지자들은 곧바로 유폐되어 있던 수녀원에서 그녀를 궁궐로 귀환시키고 제위에 앉혔다. 프로테본 지지자들은 처벌받고 프로테본 자신은 트라키시온 지방으로 쫓겨나 수도자로 은둔하였다.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노스 9세의 내각을 교체하여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8세나 옛 형부인 미하일 4세를 보좌하였던 관료와 환관들을 고위직으로 기용했다. 통치 초기에 그녀는 열성적으로 국무를 처리하려 했다. 그러나 벌써 70대 후반이 되어가는 건강 문제 등으로 치세 후반 정부의 주도권은 총리 장관인 레온 파라스폰딜리스(Leon Paraspondyles)가 쥐게 되었다. 더욱이 콘스탄티노스 9세가 동서 대분열을 해결을 하기도 전에 죽었기에 혼란에 휩싸인 동로마 제국은 교회 분열 문제를 후순위로 미루어두었다. 이 분열은 자연스럽게 장기화되어 서유럽권과 동로마 제국의 항시적인 논쟁거리가 되었다.

테오도라의 치세는 콘스탄티노스 9세의 기조를 그대로 따랐다. 파티마 왕조와의 우호 관계를 지속시키고자 노력했으며 동방 변경을 위협하는 튀르크 유목민을 진압하기 위해 서부의 마케도니아 금군을 동부 국경으로 전진 배치한 조치를 그대로 유지했다. 쿠데타를 시도하는 장군들을 거침없이 제압하거나 여러 사령관들을 질책하는 인사 조치도 흔들림 없이 집행하였다

1056년 8월 말이 되자 테오도라는 복통을 호소하며 생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레온 파라스폰딜리스 등은 논의 끝에 역시 관료로서 콘스탄티노스 9세 시대의 정부 내각에서 군사국 국장을 지내왔던 미하일 브링가스를 황제 후보로 추천하였다. 테오도라는 이를 좇아 미하일에게 제위를 전달하면서 마케도니아 왕조는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2.1.2. 25년의 혼란기
즉위한 미하일 6세는 기본적인 정책을 이전 황제들이었던 콘스탄티노스 9세테오도라 시절의 것을 그대로 유지했다. 대외적으로는 파티마 왕조셀주크 제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파티마 제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스 9세 시절 처음 제안이 나왔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지연되어 있던 2만 8천톤의 식량 지원을 재차 천명했다. 파티마 정부 역시 일찍이 미하일 6세의 방문을 기억하며 그의 즉위를 우호적으로 간주했다. 다만 테오도라 시절에 있었던 양국의 갈등이 여전히 시리아에서의 전쟁을 초래, 시리아에 상당한 피해를 강요했다. 특히 제국 최고참 사령관인 카타칼론 케카브메노스는 자신의 임지였던 안티오히아 관구에서 적절하게 대응하는데 실패하여 라오디키아를 상실할 뻔 했고 중앙 정부에서 급파한 전함 80척과 상당수 육군으로 위기를 진화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1054년 제1차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셀주크 군대와 달리 계속 현지에 남아 약탈을 벌이는 튀르크 유목민들에 대한 대응 태도에서도 미하일 6세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동부군 총사령관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는 특별히 대응에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테오도라 시절이던 1056년에 이미 아르메니아 변경의 여러 지역이 유목민들의 공격으로 약탈당하고 주민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터였다.

1056년 8월에 정권이 바뀌자 동부군의 주요 지휘관인 이사키오스와 카타칼론 등은 새로운 황제가 관료들과 시민들에게 작위 승진이나 선물 등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혜택을 받기를 바랐다. 이들은 황제를 직접 면담하여 이사키오스와 카타칼론에게 '의장' 품계를 내려줄 것 등을 요구했다. 이 '의장'(Proedros)는 곧 원로원 의장을 뜻하는 직급으로서 963년에 창설되었으며 11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여전히 왕실의 인척이나 정부의 가장 명성 높은 관료 혹은 학자들에게 주어지는 자리였다.

하지만 미하일 6세는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는데 미하일 자신이 오랫동안 제국 전군의 재정 사무를 관할하며 군부에 대하여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그가 유독 군 장성에 대하여 보인 냉정한 태도로 보아 그가 군부에 대하여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카타칼론과 이사키오스는 자신들이 대동한 군 지휘관들과 함께 1056년 8월 바로 그 무렵에 몰래 성 소피아 교회에서 회합을 열었다. 역시나 유력한 군 지휘관 출신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및 그의 친척이자 총대주교인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 역시 여기에 참석하거나 이를 최소한 방조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쿠데타 모의는 1056년 말 혹은 1057년 연초에 모의에 가담하고 있었던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갑작스런 반란으로 그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시작점은 1056년 - 1057년 전환기 쯤에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요안니스 옵사라스라는 재무관을 니키포로스가 체포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옵사라스는 제국 재무부 군사국에서 파견되어 카파도키아의 군사들에게 나누어줄 봉급을 소지하고 있었다. 브리엔니오스는 그를 체포하고 돈을 빼앗아 반란 자금으로 충당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곧 아나톨리코스 군단 소속의 리칸티스 장군이 이를 눈치채고 재빨리 브리엔니오스를 쳐 진압함으로서 사태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제 브리엔니오스의 체포 및 송환으로 말미암아 이사키오스 쿠데타 모의자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게 되었다. 브리엔니오스가 언제든 자신들의 계획을 고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들은 1057년 3월, 예정보다 계획을 앞당겨 반란을 일으켰다. 제국 동부 전선의 핵심을 이루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수비대까지 차출한 대규모 병력으로서, 이들은 일전을 각오하였다. 그러나 서쪽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군단들은 상당수가 이사키오스의 반란에 거부감을 느꼈다. 이들은 오히려 반대로 치달아 정부군의 주를 이루고 있는 서부군에 가담해버렸다. 이사키오스의 쿠데타는 이렇듯 그 동력원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정부군은 미하일 6세의 조서에 따라 니코미디아에 방어선을 준비했다. 그러나 곧 반란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니케아에 다시 주둔할 것을 명령하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들은 니케아로 이동하다가 이미 그곳을 장악하고 역시 자신들을 향해 나아오고 있던 반군과 맞닥뜨렸다. 이들은 상가리오스 강을 가로지르는 석조 대교 인근에서 싸우게 되었다. 페트로에 전투 혹은 하디스 - 폴리몬 전투에서 반군은 밀고 밀리는 공방전 끝에 정부군을 격파하였으며 퇴각하는 이들을 확실히 제압하려다가 엄청난 인명 피해를 일으켰다. 당시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연대기에서 이사키오스를 논할 때마다 언급이 되었고 이사키오스 쿠데타와 이후 수립된 정부에도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역할했다.

페트로에 전투의 결과가 전해지자 미하일 6세는 추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원로원 의장 미하일 프셀로스 등 저명한 인사들을 모아 협상단으로서 반란군 진영에 파견했다. 이들은 이사키오스에게 부황제의 자리를 주고 차기 후계자를 약속한다는 미하일 6세의 제의를 건넸으며 심각한 유혈 사태와 여전히 남아있는 정부군의 세력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이사키오스는 이를 환영했다. 하지만 곧 수도에서 큰 격변이 일어난다.

수도에 있던 일부 관료들과 미하일 케룰라리오스는 페트로에 전투의 유혈에 경악하면서 미하일 6세 정권을 무너뜨리더라도 시민들과 원로원을 설득하여 이사키오스를 수용하도록 설득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하여 두카스는 쿠데타에 가담한 관료들과 함께 성 소피아 교회를 방문, 미하일 6세가 공무원들에 충성을 요구해놓고서는 반란군들과 타협한다며 고발하였다. 케룰라리오스는 고심하는 연출을 한 끝에 미하일 6세에게 퇴위를 권고했다. 한 논문집 서적에서는 아예 케룰라이오스가 미하일 6세를 퇴위시켰음은 물론 뒤이은 이사키오스 1세도 거의(nearly) 퇴위시켰다고 적혀 있다.[13]

여전히 미하일 6세와 함께 있던 많은 공무원들과 수비군 그리고 시민들은 황제를 격려하면서 함대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요새를 이용한다면 충분히 반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이들의 제안을 물리쳤다.
고작 나 자신을 위해서 이 위대한 도시를 살인자와 다른 학살당한 사람들의 피로 더럽히는 것은 이기적일 뿐 아니라 비인간적인 일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자홍빛 신발을 내려다 보며 결정한 듯이 말했다.
이런 것을 위해서 나의 종교(신념)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를 깎고 수도자로서 서원을 마쳤다. 이후 그는 총대주교가 마련해준 지방 소재의 국립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1057년 8월 마지막 주간에 입성한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는 9월 1일, 정식으로 대관식과 인준 의례를 치르고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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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미상이나 이사키오스가 즉위하면서 최초로 쌍두독수리를 동로마 황제의 문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출신지를 고려해봤을 때 히타이트 유적에 그려진 문양을 본뜬 것이라는 이 일반적이다. 이사키오스 1세가 자기 가문의 출신지인 파플라고니아 지역의 히타이트 쌍두독수리 문양을 따와 도입한 이래 콤니노스 황제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14]

이사키오스의 쿠데타는 동로마에 여러가지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콘스탄티노스 9세 이래로 유지해왔던 안정적인 정치 구도가 붕괴되었다. 콘스탄티노스 9세가 원로원 개방 정책 등으로 시민 대중과 원로원의 공존을 통한 안정적 정치를 꾀했으나 그의 사후에는 양자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점점 원로원 및 이에 기반한 관료 집단과 황제들의 정통성도 약화되어 갔다. 반면 이사키오스로 대변되는 파플라고니아계 지휘관들과 카타칼론 등의 카파도키아계 지휘관들은 쿠데타 모의에서 협조하며 동맹 전선을 임시로 구축했다. 이사키오스의 쿠데타는 이런 변화된 정치 구도의 결과였다.

문제는 이 쿠데타로 동부 전선의 방위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었다는 것이었다. 유프라테스 상류의 방어선은 멜리티니를 중심으로 하여 오랫동안 강력한 방어 능력을 갖추어왔다. 하지만 이 시기 이후에는 점차 단순히 강둑을 따라 지키는 것조차도 버거워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파티마 제국이 시리아를 상대로 원정할 때에도 수비에 급급한 상황에 처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 직후에는 파티마 제국이 부와이 왕조와의 공조 노선을 통해 잠시나마 이라크에까지 영향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런 점 때문에 국제 외교에서도 동로마는 취약한 상태에 처했다. 심지어 파티마 제국의 요구에 따라 이전 시기에 비해 불리한 외교적 관계를 강제당할뻔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방면에서도 후폭풍이 몰아쳤다. 콘스탄티노스 9세 시절부터 이탈리아의 절도사였던 아르이로스가 1058년에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절도사 자리가 공백이 되었으나 후임 인사가 배치되지 못했고 이 틈을 탄 로베르 기스카르의 강력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에 있었던 동로마 영토의 대다수가 노르만의 영토로 전락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즉위한 이사키오스는 첫날부터 바로 궁정에 들어가 집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곧장 미하일 6세 시기에 주요 관료와 원로원 의원을 지냈던 많은 인물들을 추방하거나 관직 및 품계를 삭탈하는 조처를 취하고, 그자리에 자신의 측근들로 채웠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재정 개혁을 실시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강경 노선이었다.이전 정부까지 여러 이유로 부과되었던 세제 혜택을 대량으로 철폐하고 정부에서 민간이나 교회, 수도원에 양도되었던 모든 토지들을 강압적으로 회수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옛 황제들이 증명서로서 나누어주었던 금인칙서까지 취소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강경한 수단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평가가 좋지 않았다. 비록 재정 회복이 시급한 문제긴 하였지만 죄인에게서 재산을 박탈하는 듯한 태도는 결코 호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특히 수도원 재산에 함부로 개입한 문제는 점점 세력을 강화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청과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이사키오스는 대외적으로도 군인 출신다운 강직한 모습을 연출했다. 그의 태도를 보고 헝가리, 셀주크 제국파티마 칼리파국동로마 제국이 기존의 노선을 버리고 나오는 것으로 간주,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특히 헝가리는 1053년 이후 발칸 반도 북부에 정착하고 있는 페체네그와 연계하여 제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1059년, 이사키오스는 동쪽 끝 이베리아 지역의 원정을 다녀온 후 곧바로 페체네그에 대한 공략을 준비했다. 대군을 동원한 동로마 군대가 이스트로스 강까지 진출하자 헝가리가 먼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이탈했다. 곧이어 페체네그의 다른 부족들도 황급히 화친을 맺었다. 셀티(Selte)가 거느린 부족만은 제국군에 저항하였으나 수적 차이가 압도적이었기에 비밀리에 발칸을 탈출했다. 9월 말에 이사키오스는 귀환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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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개혁을 도모한답시고 강압적으로 시민의 혜택을 빼앗아 간 처사부터 시작하여 이사키오스의 정치적 능력은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설사 대지주의 토지를 빼앗는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불리한 입장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 이사키오스였으므로 항변의 여지가 없는 셈이었다. 여기에 점차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하게 된 그는 예전과 달리 동생 요안니스에게 형제의 예보다는 군신의 예를 갖추도록 강제하기에 이르렀다. 요안니스는 조용히 이에 따랐지만 주변의 측근들과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서도 의문을 가졌다.

여기에 1058년부터 수도원 재산 압류 문제 등으로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와 갈등이 불거진 것도 큰 문제를 일으켰다. 대주교는 점차 이사키오스에게 '폐위'를 암시하는 강한 정치적 압박을 넣기에 이르렀다. 이사키오스는 그가 자신의 친척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다는 추측에 설득되었다. 하지만 케룰라리오스는 당시 강직한 성직자로서 시민의 지지를 널리 받던 인물이었기에 수도에서는 손을 대기 어려웠다. 이에 1058년 11월, 케룰라리오스가 잠시 수도를 떠나 근교 수도원을 방문하는 시점을 노렸다. 총대주교는 황제가 보낸 병사들에게 갑자기 붙들려 굴욕적으로 끌려나왔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 해안가에서 즉흥적으로 유배에 처한다는 칙서를 전해들었다.

이사키오스는 케룰라리오스를 부정한 혐의로 기소하여 공식적으로 주교좌를 박탈하기를 원했다. 몇 명의 관료와 성직자들이 그의 의견을 따라 대주교에게 먼저 명예롭게 자진 사퇴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완고한 대주교는 자신을 찾아온 주교들을 거침없이 비판하여 용서를 빌게 만들었다.
우리가 패했습니다, 황제시여. 우리는 패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위협을 초월하고 모든 논변과 설득 시도보다도 강력합니다. 심지어 그는 당신께서 그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노력한 모든 것을 간단하게 반박할 것입니다. 곧 만약 당신께서 이 이용할 수 없고 적수가 없는 사람에 맞서기를 바라신다면 당신께서 감내하실 패배와 그로 인한 후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사키오스는 끝내 자신이 총애하는 미하일 프셀로스를 통해 케룰라리오스의 반역 음모와 이단 혐의를 준비하여 소송을 진행할 준비에 들어갔다. 1059년 1월에 케룰라리오스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는 점점 더 확대되었을지도 모른다. 후임 대주교로 역시 학식이 깊으며 프셀로스의 지인인 콘스탄티노스 리쿠디스(1059년 - 1063년)가 지명되면서 갈등은 일단 봉합되었다. 이 문제가 마무리되자마자 곧바로 북벌을 떠난 것을 보면 이사키오스가 이후로 정치에 대한 염증에 빠진 것은 아닌가 싶다.

1059년 9월 원정에서 돌아온 뒤 이사키오스는 2개월 동안 사냥에 몰두했다. 그런데 돌연히 11월 중순에 갑자기 벼락을 맞고 쓰러졌다. 프셀로스와 어의가 모두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이 3일 뒤부터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곧 그는 블라헤르네 궁으로 돌아왔다. 11월 24일이 되자 더 이상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콤니노스 일가가 침전으로 들어와 울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에 이사키오스는 교회에서 '참회'를 하고 싶다며 굳이 몸을 일으켜 말을 타고 성 소피아 교회로 향했다. 어떤 성격의 참회인지는 알 수 없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언제나 그의 부담이었던 페트로에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이 떠올랐던 것인가? 대주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데서 비롯된 것인가? 어찌되었든 아내가 남편의 죄를 대신 지겠다며 만류했지만 이사키오스는 궁에서 교회까지 이동하였다. 교회에 도착할 무렵에 그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다. 성 소피아 교회로 들어가 참회를 마친 뒤 그는 후계자를 결정했다. 케룰라리오스의 친척이자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의 성공을 도와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차기 황제가 될 것이었다.

정권이 받던 무언의 압력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이사키오스는 퇴진을 선택한 것이다. 11월 25일에 모이시아 절도사로 근무하던 콘스탄티노스가 궁전에 도착하여 이사키오스를 알현했고 여기서 정권을 인계받았다. 이사키오스는 가족과 후계를 부탁한 뒤 머리를 깎고 스투디온 수도원으로 은거했다.

1059년 11월 24일 혹은 25일, 제위에 오른 콘스탄티노스 10세는 기존 원로원과 여론 그리고 군부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갈등 구도를 진정시키고 국가를 정상화해야 했으며 이사키오스의 압제적인 태도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여 있었으므로 이를 진정시켜야 했다.

정권을 인수하자마자 콘스탄티노스는 원로원을 소집하여 이들을 달래는 연설을 했다. 그 내용은 사회적 정의를 충실하게 구현하고 온화한 정치를 펼치겠으며 잘못된 점은 시정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나는 현전하는 가장 위대한 명예를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천상의 임금으로부터 지상의 일을 맡도록 지명 받았습니다. 그분과의 계약을 실패하지 않고 자연의 섭리와 본을 따라 친절하고 열정으로 임함으로써 젊은이들에겐 아버지와 같이, 동년배에게는 형제와 같이, 노인에게는 지팡이와 자식과 같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치세 동안 번영을 누릴 것이며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됨을 목격할 것입니다. 이는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슬픔과 비탄, 불리한 박탈로 인하여 고통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행 조치로서 콘스탄티노스는 미하일 6세 때 주요 고위 관직이나 원로원 의원을 지내다가 이사키오스 1세에 의하여 해임, 추방된 사람들을 다시 초빙하여 원래의 직위와 직급을 돌려주었다. 팽배한 불만은 잠시 가라앉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여전히 불만을 품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파플라고니아 군벌의 재집권을 반대한 원로원인지 아니면 정권에서 밀려나는 군부였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콘스탄티노스가 집권한지 불과 5개월만에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는 점이다.

원로원 측이 일을 벌인 것이라면 이는 콘스탄티노스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을 설득하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군부의 행동이라면 마땅히 콘스탄티노스의 군부 견제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이후 콘스탄티노스 10세로서는 정권의 유지를 위하여 원로원에 더 유화책을 펼치고 군부 쪽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1060년 4월 23일은 성 요르요스축일이었다. 콘스탄티노스 9세가 규정한 이래로 이 축일에는 황제가 반드시 참석하여 망가나 수도원에 있는 요르요스의 예배당까지 도보 행진을 한 뒤 하루종일 이어지는 축제를 참관해야 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축일로서의 기능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청원할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회견의 기회를 제공하며 황제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점검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그 날, 시내는 혼잡하고 황제도 정부를 떠나있는 그 시점이 쿠데타에도 최적의 시점이었다는 점이다. 모반을 꾀하는 인사들 다수는 제국 해군까지 포섭하면서 대대적인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군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무작정 밀어넣을 수는 없었다. 예상치 않은 희생이 발생하게 되면 쿠데타는 바로 끝장이었다. 이들은 먼저 도시 내에 미리 심어둔 자신들의 세력으로 시내 각지에서 가짜 시위를 벌여 축제 참여 시민들을 대거 시위로 끌어들인다. 정부와 공권력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게 혼란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심지어 경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 역시 쿠데타군 측에 가담해 있었다. 그러면 망가나 수도원 단지에 있는 황제는 위기감을 느껴 바로 옆에 위치한 바닷가의 배를 집어타고 황궁의 항구로 도망가려 할 것이었다. 그 때 해군 함정이 황제에게 접근하여 구출하는 척 올라타게 하고는 바다로 바로 나아가 물에 빠트려 죽인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4월 23일 당일 시내 수십, 수백여 장소에서 일시에 시위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황제와 정부 각료들은 크게 당황했다. 실제 진상은 꾸며진 시위였기 때문에 정확한 소식은 전해지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위는 더 이상 확대되지는 못했다. 축제 때문에 시내를 돌아다니던 시민들은 처음에는 시위대를 보고 왜 시위를 하고 있는지 지켜보다가 곧 관심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거나 그 자리에서 시위를 구경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때문에 시내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여전히 축제 분위기에 들뜬 주민들 그리고 시위대가 마구 뒤섞여 누구도 진상을 알 수 없는 개판 혼란이 일어났다.

쿠데타군의 예측대로 콘스탄티노스는 가족들을 대동한 채 해안가로 향했다. 그런데 마침 해안가에는 황제가 잘 알고 있는 행정관이 소유한 배가 한 척 있었다. 당연히 이에 올라탄 황제는 최대한 빨리 바닷길로 황궁으로 향했다. 뒤늦게 해안에 접근한 해군 함정들은 황제가 탄 함선에 정지 명령을 내리며 추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끝내 황제를 체포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궁정으로 급히 소집된 내각은, 그러나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불안감에 젖어 있었다. 시위 진압을 책임져야 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은 자기 집에서 조용히 상황만 살피고 있었다. 외부에서 군대라도 들어오지 않는 한은 정리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동생인 부제 요안니스는 시내의 소란을 전해 듣고는 재빨리 소규모 경호대를 대동한 채 중앙대로로 들어왔다. 한창 시내에서 북적이던 시민들은 요안니스와 군대가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들어오자 길 양쪽으로 비켜주고는 이들에게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가짜 시위대들은 곧 상황이 나가리된 것을 파악하고선 집으로 도망가 숨거나 교회당으로 도망쳐 보호를 요청했다.

상황이 서서히 쿠데타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낌새가 보이자 저택에서 정세를 관망하던 시장은 이 무렵에 급히 집을 나와 가짜 시위대들을 진압했다. 그리고는 궁으로 들어가 자신의 활동을 보고했다. 하지만 곧이어 내각에서 시장이 하루종일 무엇을 했는지 질문하기 시작하자 말문이 막힌 그는 곧 공개적으로 고발되었으며 나중에는 유배되었다.

정변이 진압되고나서 후폭풍은 거셌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법정에 올랐으며 이들에 대한 심문만으로 오랜 시일이 걸렸다. 다수의 죄인들은 사법 거래를 통해 더 많은 연루자들을 증언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 기소되어 일부는 감옥에 투옥되었고 다른 이들은 재산 몰수형이나 유배형, 연금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의 형량은 부과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가 유혈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지 시민권 박탈만으로 충분한 형벌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명예나 돈을 박탈하기보다는 이들을 자유인이 아닌 노예로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유를 빼앗은 것은 내가 아니다. 법률이 이들의 조국으로부터 추방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쿠데타로 인해 동로마의 방위력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실리오스 2세 이후 연이은 전쟁으로 국고가 피폐하고 이사키오스 1세의 재정 개혁은 큰 반발에 부딪혀 무산된 상태로 국고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은 상태였다. 더욱이 동부 소아시아의 방어선이 이중적인 문제에 부딪혔다는 것이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는 연이은 전쟁으로 국고가 피폐하고 이사키오스 1세의 재정 개혁은 큰 반발에 부딪혀 무산된 상태의 국가를 이어받았다. 그로서는 추가적인 세원 확보가 불가능하였으므로 이제는 불가피하게 세금을 좀 더 엄격하게 걷고 조금 더 올려받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문제는 동부 소아시아의 방어선이 이중적인 문제에 부딪혔다는 것이었다. 1057년 쿠데타로 상당수 인력을 상실한 동부의 군부대는 오랫동안 회복이 느리게 진전되었다. 거기에 1060년 2차 쿠데타 시도까지 일어났으니 정부로서는 불완전하나마 군대에게 임금 지불과 보급을 원활하게 공급할 계제가 되지 못했다.

1062년 / 1063년에는 여기에 조금 변화가 오는 듯 했다. 1054년 이래로 거의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 등 여러 지역을 노략하며 파괴를 일삼던 사무크(Samouch) 등이 지휘하는 유목민 부대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방어군과 크게 충돌한 끝에 궤멸당한 것이다. 동부 지역에 긴장감을 초래하였던 무리였으므로 이들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은 콘스탄티노스로 하여금 동부 변경의 방어 능력이 현 상태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바로 비슷한 시점에 중앙 정부의 부족한 지원을 보충하면서 자발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아르메니아 일대의 방어 기능을 재편하고자 했다.

아르메니아 토착민 출신인 판그라티오스라는 사람은 그 때 정부에 접촉하여 이베리아(Iberia) 관구의 수도인 아니(Ani)의 절도사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자급자족하도록 방어군을 재편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 콘스탄티노스는 아르메니아 전방의 방어 기능을 이런 방식으로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판그라티오스는 약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러 시행 착오에 부딪히며 성내의 곡물 비축도 제대로 완료하지 못했다. 외려 국경을 통과해 지나가던 셀주크 군대를 공격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물론 국경을 멋대로 넘었다는 점은 셀주크 제국측 잘못이긴 했지만 셀주크 군대가 그렇다고 어떠한 적대적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곧바로 공격한 것은, 아직 부족한 이베리아 지역의 군사적 능력을 고려하건대 무리한 조치이긴 했다.

이 무렵 셀주크 제국은 1050년대 말에 벌어졌던 부와이 왕조의 반격을 물리치고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 위치를 굳혀놓은 상태였다. 1062년부터 새로운 술탄이 된 알프 아르슬란은 1064년, 대대적으로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여러모로 재편 과정에서 대비가 되어있지 않던 아니는 지휘관들은 지휘권 분쟁 끝에 도망쳐버리고 8월 16일에 함락되어 폐허로 전락했다. 셀주크 군대는 곧 돌아갔지만 이들을 따라왔던 또다른 대규모 튀르크 유목민 부족들이 무너진 아르메니아 국경을 따라 수시로 진입하여 노략과 파괴를 일삼았다. 전방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동로마는 이들이 알프 아르슬란 술탄의 셀주크 정규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동로마 제국과 셀주크 제국 사이의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셀주크 제국은 중간지대에서 제멋대로 활동하는 문제거리 유목민들의 통제를 위해서 동로마와 가능한 원만한 관계를 추구하려 했고, 그러한 사정을 셀주크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니 더욱 상황을 알 수 없이 그저 튀르크 유목민들의 공격을 당할 뿐인 동로마는 셀주크 제국이 계속 동부 지역에 침공을 가하며 위기를 조성한다고 간주했다. 이런 양자간 의사 소통 부재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로 이어지는 직접적 도화선이 된다.

1059년에 이사키오스 1세의 원정으로 발칸 북쪽에 자리잡았던 페체네그유목민들은 이스트로스 강을 건너 도주했다. 그러나 1065년이 되자 이들은 재차 오우즈족의 이름을 걸고 대규모 민족을 이루어 남하했다. 불가리아와 모이시아의 향군(鄕軍 : Themata)들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쉽게 격파당하고 말았다. 오우즈족 이하 유목민들이 북쪽에서부터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각지로 흩어져 약탈을 일삼자 위기가 고조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대군을 소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가뜩이나 군부와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군을 소집해도 지출할 막대할 경비는 물론 이들을 통제할 자신도 없어했다. 그리하여 일단 시간을 번다는 명목 아래 외교 사절단을 오우즈족에게 파견하여 선물 공세로 침략을 늦추고자 했다. 그러나 민심은 재차 악화되어 어서 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동방에서 군대가 수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15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미리 출발했다. (통상 지역의 병력을 소집하고 수도에서 출발하는 황제는 150명의 병력을 데리고 출발하며 이후 각 지역에 설정된 집결 지점에서 각 군세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집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우즈족은 바로 그 직후 불가리아 지역 향군과 제국에 충성하는 토착 유목민 부대의 반격으로 붕괴되었으며 나머지 세력들도 풍토병으로 고생하다 끝내 다시 강을 건너 도주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에 만족하며 포로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지도자들에게는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주어 사회 내부로 받아들였다.

1066년에는 페체네그족이 다시 침입을 위해 남하하였으나 모이시아 절도사인 로마노스 디오예니스에 의하여 완전한 패배를 당하고는 북쪽으로 물러났다. 페체네그족이 다시 공격을 시도하게 되는 것은 8년 뒤 네스토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었다.

북방에 있어서 콘스탄티노스는 바실리오스 2세 이래의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였다. 발칸 산맥 이북은 적의 거점으로 활용되지 않도록 일부러 저발전 지역으로 남겨두고 주요 거점만 유지했으며 유목민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이 지역의 방어를 확립했다. 천연의 청야 작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는 공간을 두어 완충지로 삼는 이 정책은 상당히 유효하여 콤니노스 왕조 시대에도 이어졌다.

1058년 이탈리아 도독직이 공석이 된 이래 로베르 기스카르는 재빠르게 기회를 이용, 남이탈리아에서 동로마의 영토를 대부분 빼앗았다. 1060년, 이에 대한 대응으로 마침내 콘스탄티노스 10세는 미리아르흐(Miriarch)를 새로 도독으로 기용하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미리아르흐는 1060년에서 61년 사이 기스카르가 시칠리아 원정을 떠난 것을 기회로 삼아 반격을 펼쳤으며 바리(Bari), 타란토(Taranto) 등을 탈환했다. 이후 기스카르는 원정에서 복귀하여 재차 반격을 꾀하여 여러 지역을 재점령한다. 그 뒤에도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양측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전 도독이었던 아르이로스(Argyros)는 물론 새 도독으로 부임한 아불하레(Abulhare)도 서로 협력하며 반격을 이어나갔다. 1067년과 1068년에는 브린디시(Brindisi)와 타란토(Taranto)를 재차 탈환하며 동로마군의 반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1067년 5월에 콘스탄티노스가 사망하고 그해 말부터는 동쪽 변경이 완전히 붕괴되어 이탈리아 전장은 상대적으로 방치되었다. 1068년 아불하레와 아르이로스 둘다 사망하자 기스카르는 거침없이 남이탈리아를 휩쓸었으며 1071년 4월 15일에 마지막으로 남은 거점인 바리를 점령했다.

콘스탄티노스는 다시금 원로원의 문을 열고 원로원 집단과 시민 대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 중에서 새로 편입된 오우즈족 시민권자에게까지 원로원 의원직이 나누어졌다. 또한 점점 사회가 발전하고 복잡해지는데 비하여 여전히 콘스탄티노스 9세 시절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법학을 완전히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여 심지어 병사들조차도 무기를 내려놓고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려는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냈다. 다만 국방 정책의 실패로 인해 재차 여론의 지지를 잃게 되었으며 결국 카파도키아 군부의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재정은 콘스탄티노스 10세 정권의 갖은 노력 끝에 상당히 회복되었다. 재정 수지도 양호한 상태가 되었고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비축금 역시 예전 시대의 절반 정도까지 수복되었다고 언급된다. 다만 재정이 소진되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군부에 대한 경계 태도가 적정한 군비 지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1063년 9월 23일 새벽에는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 많은 도시와 건축물이 파괴되고 인명 손실이 잇따랐다. 이후 2년 동안 여진이 계속 이어지더니 1065년, 니케아 지역에서 재차 큰 지진이 일어나 많은 지역이 파괴되었다. 1066년 5월에는 큰 꼬리를 가진 밝은 별이 홀연히 출현하여 동과 서를 가로질렀다. 동시기 잉글랜드에서도 큰 소동을 일으켰던 이 별은 바로 핼리 혜성이었다. 여러가지 일이 겹치면서 사람들은 자연 현상임은 알고 있으면서도 불안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1065년, 59세의 나이에도 직접 원정을 나갈 정도로 건강이 괜찮은 편이었던 콘스탄티노스는 그해 10월이 되자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병석에 누웠다. 무려 1년 7개월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있던 그는 1067년 5월에 이르러 숨을 거두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는 이제 이제 겨우 성년이 되는 아들 미하일 7세와 아내 에브도키아가 제위를 지키기 어려울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군부가 나서지 못하도록 한 가지 계책을 짰다. 그리하여 에브도키아는 남편의 요구에 따라 앞으로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 이후 5월 22일, 콘스탄티노스는 사망했다.

하지만 1067년 후반부터 시작되는 대규모 유목민 침공에 유프라테스 강 방어선도 뚫리고 말았다. 중심 기지인 멜리티니는 고립되었고 현지 병력들은 궤멸되었다. 수효가 많은 향군들은 기동성이 높은 유목민들을 상대로 방어와 농성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뚫린 곳으로 침투한 유목민들은 카파도키아의 세바스티아(Sebasteia), 케사리아로 이어지는 협로를 따라 노략과 파괴를 계속하였고 이코니온 평원 일대를 분탕질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시민들은 마침 그 때 반란 기도로 사형 언도까지 받은 로마노스 디오예니스에 대하여 급격하게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기 시작했다. 입지가 위태로워진 에브도키아 역시 디오예니스에 대한 고민에 들어갔다. 그 뒤에 그는 형집행이 정지되었을 뿐 아니라 원로원에 의해 사면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저택도 받게 되었다. 에브도키아는 이때 디오예니스를 접견하였는데 이 때 아마 대강의 사정을 언질하였을 것이다.

결국 1067년 12월, 에브도키아는 상원[15]의 표결을 통해 로마노스 디오예니스를 황제로 선임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와의 협의 끝에 재혼 상대를 찾지 않겠다는 전 남편과의 맹세로부터 자유로워졌음도 인정받았다. 원로원 의장인 프셀로스조차 이 사실을 12월 31일 저녁에 통보받았을 정도로 이 일은 조심스럽게 진행되었고, 미하일 7세는 그 뒤에 이 사실을 알았다.

1068년 1월 1일, 로마노스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그의 치세는 사실상 세 차례의 동방 원정이 전부라고 할 수 있었고, 내정은 미하일 7세와 에브도키아가 전담했다. 첫 원정은 1068년에 실시되었다. 알레포의 마흐무드가 셀주크 유목민들을 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그 본거지를 제공하다시피 한 상황이 되었는데 이 유목민들은 동로마령 시리아를 집요하게 약탈하고 공략했다. 이 때문에 안티오히아 도독부는 가뜩이나 부족한 군사력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방어에도 급급하고 있었고, 로마노스는 병력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또 다른 유목민 세력이 북방의 방어선을 뚫고 폰토스를 공략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로마노스는 병력 중 기병대 일부를 차출하여 후퇴하는 유목민들을 추격했다. 산악을 집요하게 타넘은 끝에 로마노스의 군대는 국경인 유프라테스와 가까운 테프리키(Tephrike)에서 유목민을 공격할 수 있었다. 적군 다수는 살아남았지만 포로와 재물 상당수는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로마노스는 타우로스 산맥의 위험한 협곡을 건너 시리아로 향했던 본대와 합류했다. 이 군대는 알레포 토후국을 압박하였으며 마침내 이에라폴리(Hierapolis. 현대 시리아 Manbij)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아지즈(Aziz)나 알레포를 향한 공격은 만족스럽지 않아서 지지부진한 소모전이 이어졌다.[16] 결국 로마노스는 수도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귀환에 올랐다. 도중에 대규모 유목민의 또 다른 부대가 다시 유프라테스를 넘어왔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접했을 때는 이미 유목민 부대가 이코니온에 이르는 깊숙한 지역까지 약탈한 뒤 한참 후퇴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로마노스는 병력을 해산하고 수도로 귀환했다.

2차 원정은 1069년에 있었는데 출발부터 여러가지 사건이 얽히면서 실패로 귀결되기 시작했다. 최전방 지역 중 하나인 에데사에 배치되었던 금군 중 용병대가 봉급 미지불 문제 때문에 폭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의 폭주로 아르메니아코스 지역 일대가 피해를 입었다. 가까스로 이 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선수를 친 유목민들이 다시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와 카파도키아와 케사리아 인근을 공격했다. 로마노스는 가까스로 이들을 격퇴하는데는 성공하였고 원 계획대로 유프라테스 방어선을 강화하기 위해 출진했다.

강변에 이르러서 전략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대다수의 군인들과 관료들은 강을 넘어 폐허가 된 옛 영토를 수복, 강화할 것을 지지했다. 오직 미하일 아탈리아티스만이 이미 전략적 가치를 상실한 지역을 포기하고 유프라테스 강의 방비를 굳힐 것을 주장했다. 로마노스는 여기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 아탈리아티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결정을 번복하고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야 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강을 건너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러면서 정작 전투는 가급적 피하려고 하는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어쨌든 이런 방식으로 동로마군은 로마누폴리(Romanoupolis)를 거쳐 반 호수 근교까지 진출했다.

문제는 바로 그 때 일어났다. 동로마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유목민들은 동로마군 본대를 외면하고 유프라테스 강으로 달려온 것이다. 당시 이곳은 황제가 방어를 위임한 필라레토스 브라카미오스 사령관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가 지휘하는 병력[17]은 제대로 적을 저지하지 못한 채 붕괴되어 타우로스 산기슭으로 도주해버렸다. 텅 비어버린 카파도키아로 유목민들이 다시 쏟아져 들어왔고, 이번에도 재차 이코니온 평원이 쑥대밭이 되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중앙 아나톨리아의 중심지인 이코니온 자체도 함락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서둘러 회군한 로마노스는 유목민들이 본대를 피하여 킬리키아를 통해 알레포로 퇴각하리라고 예측하여 안티오히아 도독에게 길목을 틀어막고 적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과연 유목민들은 황제의 예측대로 기동했다. 안티오히아 도독은 이를 영격하였는데 역시 기동력을 앞세운 유목민들은 노획물들을 포기한 채 빠르게 알레포 방면으로 도주해버렸다. 갈구하던 대승전의 기회를 놓친 로마노스는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1069년, 원정을 끝내고 귀환한 로마노스는 이후 1071년 초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국내의 일들을 처리했다. 물론 군사적인 업무는 여전했다. 우선 서쪽에서는 1068년에 현지 동로마군을 지휘하던 아르이로스(Argyros)와 절도사 아불하레(Abulhare)[18]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탈리아 통제영(Katepan of Italy)이 급속도로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최근에 탈환했던 타란토(Taranto), 브린디시(Brindisi) 등이 다시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제는 통제영 본부가 위치한 바리(Bari)까지 포위되었다. 바리 시민들은 급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연락을 취해 구원을 요청했다.[19] 이에 로마노스와 에브도키아는 디라히온 절도사에게 병력과 함대를 주어 구원하도록 지시했다.

구원 함대는 급히 바다를 건너 진군하였는데 바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모노폴리(Monopoli)에서 노르만 군대의 공격을 받아 수송선 7척을 격침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어쨌든 바리로 입성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1070년에 있었던 야전에서 동로마군은 노르만군에게 완전히 패배하였고 바리 역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071년 4월 15일, 기스카르의 군대는 바리로 입성하였으며 동로마령 이탈리아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1070년에는 동쪽의 문제도 여전했다. 또 한 무리의 대규모 유목민들이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온 것. 황제는 내년에 있을 대규모 원정 준비에 바빴으므로 다른 지휘관을 선임하기로 하였다. 당시 25세였던 마누일 콤니노스[20]가 그 대상이었다. 마누일의 병력은 조심스럽게 케사리아까지 진군한다. 그러나 이 곳에서 호루즈(Khourdj)라는 셀주크 지휘관의 대군과 맞닥뜨렸고 압도적인 병력 앞에 그대로 패배했으며 마누일 자신도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셀주크의 술탄인 알프 아르슬란과 대립하면서 국외를 돌아다니고 있던 호루즈는 이를 기회로 동로마 제국과 결탁을 결심했다. 이에 로마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호루즈와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이로써 현재도 셀주크 국내의 정치적 위협거리인 반란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권을 강화하고 통제권을 어떻게든 확보하려는 아르슬란으로서는 대단히 위협적인 것이기도 했다. 코카서스에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북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그의 의도 역시 알레포를 중심으로 삼국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동로마 제국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아르슬란은 1070년에 알레포 토후국의 종속국 요청을 받아들인 뒤 아르메니아로 진군, 만지케르트와 아르체스(Arches) 등 반 호수 인근의 영지들을 점령하였으며 거기서 남하하여 유프라테스 강 중상류의 에데사 근교를 집요하게 약탈하였다. 이곳의 방위는 에데사 도독인 바실리오스 알루시아노스가 맡고 있었다. 다행히 에데사는 포위를 버텨냈으나 더 이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21]

중동 3대 강대국 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파티마 왕조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시리아가 무너지게 되면 수니파를 수호하는 셀주크가 곧 이집트로 밀고 들어오리라는 공포도 존재했다. 당시 파티마 왕조는 연이은 기근과 정치 혼란, 베르베르 출신과 튀르크 출신의 유목민 군대가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어 이 직면한 위기를 당해낼 힘이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파티마는 동로마와 누차에 걸쳐서 외교를 진행하였고, 이러한 행동이 동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시리아의 후방인 아르메니아에서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그런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에 대한 작전이 불가피한 상태였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내정에서도 불안한 조짐은 계속해서 축적되었다. 로마노스가 전쟁 일변도로 모든 국력을 쏟아붓다보니 관료들의 임금이 대거 삭감된 것은 물론이고 전 지역의 시민들에 대한 세금도 가혹하게 부과되었다. 거기에 보통의 황제들이 시민들의 지지를 구하고 의견을 청하는 소통로인 각종 행진,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대경기장에서 열곤 하는 전차 경주와 같은 유흥거리도 시행되지 않았다. 궁정에서는 앞서 언급한 임금 삭감은 물론, 독선적으로 자신의 권력 강화와 행사에만 신경쓰는 그의 행동에 관료들과 강한 지지대가 되어줄 수 있는 두카스 왕실까지 적으로 돌려세우고 말았다. 군대 역시 병력은 계속 모여들었고 조련도 진행되었으나 로마노스 자신은 군대와 점점 심리적으로 격리되었을 뿐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판단으로 인해 사기 저하에 일조하기까지 했다.

1071년 1월 19일부터 3월 말까지 아르슬란의 군대는 유프라테스 유역을 마구잡이로 약탈하며 많은 재화를 노략했다. 한동안 동로마군의 반격이 없으리라고 판단한 셀주크 군대는 용병들의 임금 체불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불과 반년 전에 충성을 자처했던 알레포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알레포의 군주인 마흐무드는 결국 버틸 수 없게 되자 배상금을 지불하고 다시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차원에서까지 복종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가 문제가 되어 재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5월 4일에야 힘에 부친 마흐무드가 다시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아르슬란의 반년에 걸친 긴 원정은 마무리되었다.

셀주크 군대가 아직 알레포에서 전쟁 중에 있던 3월 13일. 로마노스는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건너왔다. 그의 목표는 단언컨대 아르메니아, 특히 반 호수의 방위 요새들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 이르면 셀주크 제국이 동로마 제국의 외방 번국의 역할을 해왔던 마르완 토후국과 알레포 토후국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어안음으로써 콘스탄티노스 9세가 완성하고 콘스탄티노스 10세에 이르기까지 유지해왔던 외부 방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는 만지케르트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동로마 제국이 입었던 큰 타격이었다. 유프라테스의 방어선 역시 이 무렵에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서 1070년 셀주크 제국군의 별동대가 침투했을 때 별 피해도 없이 소아시아 깊숙이 진출하여 노략질을 하고서는 자유로이 후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안티오히아로부터 에데사,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위협을 저지하고 무너지고 있는 힘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서는 원정이 불가피해 보였다.

로마노스는 최대한의 병력을 통솔한 채 세바스티아까지 진군한다. 하지만 로마노스는 술탄의 군대가 오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지만 아르슬란은 동로마의 후방 공격을 항상 경계하였기에 해당 소식을 빠르게 파악한 뒤 서둘러 만지케르트를 향해 진군했다. 이하의 진행에 대해서는 만지케르트 전투 항목을 참고할 것.
파일:만지케르트.png
파일:The Battle of Manzikert 1071 Seljuk Dominance.jpg

아르슬란은 8월 23일, 교전에 앞서 흰옷을 입고 나와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선두에 서겠다며 연설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로마노스의 본대는 분리된 타르카네이오테스를 잃었다는 걸 모른 채로 만치케르트를 향해 진격해 갔다.

만치케르트는 남쪽에 호수가 있는 평야지대로 기병의 운용에 적합했다. 셀주크 군은 동로마 군의 군량 조달 부대를 포착해 이를 격파하면서 개가를 올렸다.

8월 25일, 로마노스는 셀주크 측에게서 평화협상을 제안받았으나 소아시아 전체를 가로질러 오는 동안 소모된 전비나 피해를 봤을 때 여기서는 군사행동 외에 해결책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결의한다.

파일:터키 만지케르트 전투.jpg
전투 진행도

8월 26일, 로마노스는 포진을 완료하고 셀주크 군을 향해 전진했다. 좌익을 테마병이 맡고 우익을 아르메니아 기병, 테마병 혼성 군이 맡았으며 중앙에는 로마노스의 본진과 근위병, 중앙 테마병이 배치되었고 후방의 예비병은 두카스가 지휘하는 노르만과 게르만 병이 맡았다. 그런데 두카스가 로마노스 황제의 정적이라 그에게 중요한 병력을 맡겨도 될지가 의문이었는데 이게 적중해 버렸다.

동로마 군은 셀주크 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으나 셀주크 군은 전통적인 스웜 전술로 제국군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중앙은 그러면서 서서히 후진하는데 양익은 전진해서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동로마 중앙군은 스웜 전술의 피해를 버티며 전진해 비어있는 아르슬란 본진까지 진출했지만 양익은 셀주크 궁기병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거의 궤주하고 있었다.

일몰이 다가오자 로마노스는 후퇴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황제를 보호해야 할 후방의 두카스 군이 그냥 후퇴해 버리면서 중앙군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셀주크는 지금껏 아껴온 중기병을 집중 투입해 동로마군을 유린했다.

동로마군은 '아르메니아의 배신으로 황제가 죽었다'는 함성에 넘어가 우익이 궤멸되었고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좌익도 무너졌다. 로마노스 황제의 친위대는 셀주크 군에게 포위되어 결국 황제가 포로가 되었다.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는 아르슬란에게 포로로 끌려갔는데 아르슬란은 처음에는 그 너덜너덜한 먼지투성이 남자가 황제인지를 믿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명한 대화가 오고간다.
알프 아르슬란: 그대가 나를 포로로 잡았다면 어떻게 하겠소?
로마노스: 아마 그대를 죽이거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했겠지.
알프 아르슬란: 나는 그보다 더 심한 짓을 할 생각이오. 그대를 풀어주지.

아르슬란은 그를 1주일간 억류해두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제시했으며 몸값으로 금화 1천만을 요구했지만 아무튼 로마노스를 풀어주었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자세한 정황은 확인하기 어렵다. 누가 배신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훈련이 부족한 향군들이 갑작스런 후퇴 신호에 스스로 무너졌던 것인지도 분별하기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동로마 제국군이 패했고, 황제 로마노스 4세가 포로로 잡혔으며, 1주일 간 억류되었다. 또한 패전 당시 군대가 너무 와해된 나머지 후방의 진영에 있던 원로원 고위급 의원들이나 군인들 몇이 병력을 규합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고위급 정치가들마저 이 와중에 셀주크 군대의 추격에 휘말려 사망하기까지 했다. 황제도, 병력도 없게 된 원로원 의원들 일행은 결국 바다를 통해 수도로 귀환한다.

회전의 대패를 보고받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발칵 뒤집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황제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급한대로 의장인 프셀로스는 원로원 회의를 즉각 소집한다.[22] 그간 로마노스에 대한 반감도 축적되어 있던 원로원은 표결을 통해, '도시와 시민의 이름으로' 로마노스를 폐위하고 미하일 7세를 선임 황제로 다시 선포했다. 로마노스가 뒤늦게 살아있음이 알려지자 잠시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공황이 일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혼란을 진정시킨 뒤 미하일 7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로마노스에게 사절을 보내어 제위를 포기하고 지휘관으로 봉직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로마노스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양 세력은 아르메니아코스에 위치한 도키아(Dokeia)에서 격돌한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지휘하는 관군은 로마노스의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 때 정부는 안티오키아의 도독인 카타투리오스(Chatatourios)에게 명령을 내려 진압군에 참여하게 했다. 그러나 카타투리오스는 로마노스에 의해 임명되었던 만큼 그에게 충성을 다짐했고 결국 로마노스가 패배로 몰리게 되자 용병대장인 프랑크인 크리스핀(Crispin)의 기사대와 함께 그를 데리고 자신의 관할지인 킬리키아로 후퇴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좋지 않은 것이었다. 킬리키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멀어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동시에 빠르게 수도를 점령해야 할 반란군으로서는 시간을 잃는 선택이기도 했다. 결국 정부는 빠르게 군세를 재정비한 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지휘에 힘입어 기습적으로 타우로스 산맥을 통과했다. 카타투리오스와 크리스핀은 뒤늦게 출격했으나 관군 소속의 기사대가 연이어 펼친 파상적인 돌격으로 궤멸하고 말았다. 방치되어버린 타르소스는 곧장 관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안드로니코스는 로마노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고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호송하게 했다.
황제로서, 나는 당신에게 150만의 몸값을 약속했었소. 폐위되었고, 곧 남들에게 좌지우지될 상황에서 나는 감사의 뜻으로 당신에게 내가 소유한 모든걸 보냅니다

항복하기 전 로마노스가 수중에 모을 수 있는 돈을 끌어모아 술탄 아르슬란에게 보내며 첨부한 편지

황제 미하일 7세는 이 시점에서도 로마노스를 완전히 제거할 마음은 없었고 그를 실각시키는 정도의 조치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노스의 실각에 앞장섰던 원로원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결국 원로원의 결의로 황제의 조치도 거부한 채 로마노스에게 실명의 형벌을 내리도록 결정했다. 황제의 강력한 안전 보장을 믿고 코티에온(Kotyaion)까지 북상하여 관청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로마노스는 원로원의 명령이 떨어진 뒤 실명 형벌에 곧바로 처해졌다. (1072년 6월 29일) [23] 이는 신체적 안전을 보장했던 두카스의 약속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 직후에 자신이 건축을 후원했던 프로티 섬의 수도원으로 하야했다. 아주 짧은 수도사 생활을 거친 뒤, 로마노스는 실명형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 (8월 4일) 그의 장례는 전 아내인 에브도키아의 후원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제 단독 황제가 된 미하일 7세는 내분을 수습해야 했다. 미하일 7세 정권은 1072년, 동부 방어선의 구멍이 되어버린 소아시아케사리아(Kaisareia) 인근 통행로가 튀르크 유목민들의 무리를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고 있음을 고려하여 최대 정예병인 타그마를 동원하여 이곳을 차단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남아있는 동부 금군 대부분이 모였다. 칼델리스(Kaldellis)는 그 수를 약 4천 명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이들은 도중에 대규모 튀르크군을 만나 수적 열세에 밀려 격파당했다. 1074년에는 다시 한 번 이를 시도하였다. 이번에는 수가 훨씬 줄어서 약 2천 명으로 추정되며 노르만 용병대가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노르만 용병대가 부대를 이탈하면서 군대는 흔들렸고 결국 상가리오스 강을 건너는 좀포스(Zompos) 다리에서 벌어진 노르만 군대와의 전투로 붕괴되었다. 이후로 동로마의 동부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원정군을 꾸려 작전할 수 있는 금군 부대는 완전히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이탈한 노르만 용병대는 프랑스 바이욀(Bailleul) 출신의 루셀 드 바이욀이라는 지휘관의 영도 아래 있었다. 루셀은 동족인 노르만족들이 남이탈리아에서 자립한 것을 기억하며 소아시아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좀포스 전투에서 동부 타그마를 와해시킨 루셀은 동로마에 고용되어 있던 프랑크 용병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총 3천에 달하는 기사대가 모두 모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다 건너편에서 무력 시위를 하자 무력한 미하일 7세는 깊은 굴욕감을 느끼고서는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루셀을 파멸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몰락을 본격적으로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1072년 이후 셀주크 튀르크 제국 본토와 외교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고 또한 소아시아 각지의 튀르크 유목민 일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동로마 정부는 아예 루셀이 영토를 강탈해간 아르메니아콘(Armeniakon)에 튀르크 유목민들을 유입시켜 루셀을 견제하려고까지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루셀을 사로잡기 위해 2년 전 총사령관에 취임시킨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변변한 병력도 없이 투입하기까지 했다. 갖은 고통 끝에 알렉시오스는 루셀을 체포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뒤에 남겨진 아르메니아콘 지방은 사실상 튀르크 유목민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물론 1079년 ~ 1080년 초까지도 동로마 정부는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까지 행정관을 지명하며 여전한 통치력을 행사하기는 했다. 유튜브 지도 동영상류에 나오는, 동로마의 영토에서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패배 이후 아나톨리아의 서부[24]와 북부[25] 해안만 남고 나머지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은 편의상 그렇게 그렸을 뿐 실상과는 다소 다르다.)

한편 치세 초기 미하일 7세 정권을 지휘한 것은 시디(Side)의 주교였던 요안니스였다. 하지만 당시 제국이 필요로 했던 것은 인품과 덕망보다는 현실 감각이었다.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엘라도스(Hellados, 오늘날의 그리스 지역) 행정 장관을 지내던 니키포로스(Nikephoros)가 서서히 실권을 잠식하며 요안니스 주교를 몰아냈으며 부황제 요안니스 역시 정계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후 그는 강경한 정책을 밀어붙이며 재건을 시도했다. 전반적인 물자 부족으로 화폐 경제가 악화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인상하였고 새롭게 불사 부대(Athanatoi)를 재건했다. 불과 18세였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서부군 총사령관에 봉한 것도 그의 안목이었다.[26]

하지만 혹독한 세금 정책은 반발에 부딪혔다. 1074년, 이스트로스 강 연안에서 유목민들과 섞여 살며 상당 부분 세제 혜택을 보고 있던 저지대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부는 네스토르(Nestor)를 지휘관으로 진압군을 파견했으나 오히려 네스토르까지 반란군에 결탁하며 한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미하일 7세를 압박하여 니키포로스를 실각시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군대를 물려 북방으로 후퇴했다. 비록 직접적인 타격은 거의 없었던 사건이었으나 이 반란으로 북방의 유목민 방어선은 다시 무너졌다. 1076년부터는 재차 남하한 페체네그와 여러 유목민들이 트라키아마케도니아 등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서부 타그마 중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부대가 아드리아노폴리스에 있었지만 최후의 정예 부대라는 점 때문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1076년이 되자 유통 경제가 전란으로 마비되면서 곡물 공급에 많은 애로사항이 닥쳐왔고, 니키포로스는 식량 공급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점점 위축되는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또다른 세원을 궁리했다. 1077년에 그 결과로 공영 식량 창고(Phoundax)라는 시설이 도입되었다. 모든 식량 판매자들은 이 국영 시장에 식량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지불했으며, 구입자들은 시장에서 수수료가 포함된 값으로 식량을 구입해야 했다. 여기에 대상인들이 끼어들어 가격 장난질을 시작하자 1077년도의 공식 식량 가격이 1075년~ 1076년 대비 거의 50배 수준으로 폭등했다.

1077년에는 소아시아 아나톨리콘 관구의 절도사인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3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고 동시에 디라히온의 절도사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어찌어찌 중앙 정부는 수도와 그 인근을 건사하였으며 육군과 해군 병력도 있었으나 동서 양쪽의 반란으로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황에 처했다. 이제 수도의 시민 대중도 더 이상 묵과하지 않을 태세였다.

1078년 1월 6일. 성 소피아 성당의 성탄절 행사 도중 사제단이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를 황제로 선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정부는 즉각 이를 진압하여 사제단을 체포하여 세계 총대주교 코스마스 1세(1075년 ~ 1082년)와의 깊은 갈등의 골까지 생겨났다. 3월 1일에 이르러 보타니아티스가 수도 건너편 해안가에 도착하여 봉화로 도착을 알리자 수도 시내는 흥분에 휩싸였다. 결국 3월 24일, 시민군이 조직되어 황궁을 점령하였으며 치안을 유지함은 물론 함대까지 접수한 뒤 보타니아티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수도를 정돈했다. 시민군에 체포되어 성 소피아 성당에 연금된 미하일 7세는 결국 스스로 정권을 포기하고 수도자가 되어 정치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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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포로스 3세와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

1078년 3월 24일, 막 제위에 오른 보타니아티스는 관대한 정책을 시행했다. 두카스 가문의 요인들은 큰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 수많은 관직과 품계들이 말 그대로 뿌려졌고, 많은 명사들의 부채도 탕감되었다. 이 시기 킬리키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튀르크인의 공격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장군 필라레토스 브라카미오스(Philaretos Brachamios, 아르메니아어 이름은 바흐람 바라즈누니)도 사면되고 안티오히아의 둑스로 임명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일부 잔존 동부 타그마군과 테마군을 흡수하고 자치적으로 지역을 통치하던 브라하미오스의 세력은 십자군 전쟁 시기를 거쳐 소아르메니아 왕국으로 발전한다.

또한 미하일 7세의 황후인 알라니아의 마리아(Maria of Alania, 1050년 ~ 1103년)[27]와 결혼하였다. 이는 마리아가 아직 젊어 로마노스 4세의 미망인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등 다른 결혼 후보자들에 비해 외모적으로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구 두카스 정권 구성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타니아티스는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두카스 왕조 지지자들의 불만을 가라 앉힐 수 있었고, 본인에게 다소 부족한 정통성도 제고할 수 있었다. 다만 에브도키아는 오히려 아들 미하일 7세 재위기에 비해 처우가 큰 수준으로 개선되었으며,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등 미하일 7세의 형제 자매들의 처우도 이전보다 개선되었다.[28]

하지만 보타니아티스는 마리아 황후와 두카스 가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하일 7세와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인 포르피로예니토스 콘스탄티노스를 황궁에는 놔둘지언정 후계자로 삼지는 않았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던 보타니아티스는 콘스탄티노스가 아닌 다른 후계자를 찾기 시작했다. 보타니아티스는 마리아와의 결혼까지 총 3번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었으므로 조카인 니키포로스 시나디노스(Nikephoros Synadenos)를 후계자로 삼고 보타니아티스 혈통에 기반한 왕조를 세우려는 계획을 갖는다. 이는 후에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가 아들 콘스탄티노스의 계승권을 보장받기 위해 콤니노스 가문 및 두카스 가문의 쿠데타 모의에 동참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결혼하고 두카스 가문과의 불안한 공생 관계와 함께 시작된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의 치세는 전반적으로 두카스 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미하일 7세 정권이 중용한 많은 인사들이 니키포로스 3세 정권에서 다시 중용되었다. 특히 미하일 7세 정권에서 동부군 총사령관(Stratoperdakhes)을 지낸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보타니아티스 정권 아래에서 서부군 총사령관(Domestic of the Schools of West)를 지내며 두 차례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했다. 두카스 정권의 재정 정책과 품계를 돈을 받고 팔아 재정을 확충하는 정책 또한 유지되어 제국 기축금화 노미스마의 금 함량은 지속적으로 감소되었다. 미하일 7세 정권의 수상 노릇을 했던 환관 니키포리치스의 자리는 보타니아티스 가문의 슬라브인 노예인 보릴라스(Borilas)와 예르마노스(Germanos)가 대체하였으며, 니키포리치스의 대두 이전까지 두카스 정권을 운영했던 시디(Side,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의 도시) 주교 요안니스도 다시 입각해 민간 행정을 이끌었다. 마케도니아 왕조 말기부터 두카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줄곧 제국 정부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원로원도 그 힘을 유지하였다. 원로원은 이미 미하일 7세 정권을 붕괴시키고 보타니아티스가 제위를 차지하는 데 크게 일조한 세력이었다. 보타니아티스는 원로원에 막대한 보상을 내리고 원로원, 나아가 도시 시민 계층을 지지층으로 흡수하였다.

여러 차례의 반란을 겪으면서도 제국의 내우외환을 수습하려 애썼다. 군 부대가 여러 번 동원되어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군 작전을 수행하였고, 페체네그족에 대한 제국의 종주권을 확인하였다.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명예 작위를 판매하는 정책은 더욱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키포로스 3세의 치세가 끝난 1081년에 이르면 제국 정부는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였으며, 페체네그의 분탕질도 점점 담대해졌다. 노미스마 금화의 금 함유량은 33% 수준까지 감소하였고, 영토 상실과 지방 통제력 약화로 인한 세수의 감소와 기근, 방대한 전비 부담은 재정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있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에게 해의 도서에는 소아시아에서 몰려든 피난민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니키포로스 3세의 정권은 결국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쿠데타로 붕괴하였다.

1077년 10월, 미하일 7세가 선임한 디라히온 둑스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군을 경시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를 비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브리엔니오스는 아무런 군대도 대동하지 않고 디라히온을 출발했다. 대신 브리엔니오스는 테살로니키에서 니키포로스 바실라키스를 포섭하고, 동생 요안니스의 도움을 얻어 운용 가능한 최후의 제국 서부 타그마군을 접수함으로써 순식간에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다.

디라히온에서 시작된 반란의 불길은 테살로니키를 거쳐 마케도니아와 스라키로 번져나갔다. 1077년 11월 브리엔니오스는 마케도니아 해안가에 위치한 트랴아누폴리(Traianoupoli)에서 서부 타그마군, 프랑크인, 페체네그인, 바랑인 용병들로 구성된 동생 요안니스의 군대를 접수하고 황위를 참칭하였다. 이후 고향인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개선식을 연 브리엔니오스는 동생 요안니스에게 군대를 맡겨 수도로 진군시켰다. 수도를 포위하고 시민들을 설득하려던 요안니스의 군대는 도시 교외를 방화하면서 민심을 잃었다. 겨울을 나기 위해 브리엔니오스의 군대가 포위를 거두고 아드리아누폴리로 퇴각했을 무렵,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제위에 올랐다.

보타니아티스는 브리엔니오스에게 부제(Kaisar) 품계를 내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대신 반란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브리엔니오스는 이를 거절하고 다시 수도로 진군하였다. 이에 보타니아티스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서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브리엔니오스를 진압할 것을 명했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미하일 7세 정권에서 육성된 '불사조(Immortals)' 부대의 편린들과 소아시아 서부의 요새인 호마(Choma)에서 전출된 제국군 부대, 프랑크인 용병 부대를 당장 동원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보타니아티스와 동맹 관계에 있는 소아시아의 튀르크인 토후 쉴레이만 쿠탈미쉬오울루와 그의 형제 만수르가 2,000명의 병력 파견을 약속한 상태였다. 하지만 브리엔니오스의 군대가 빠른 속도로 기동하였기 때문에 알렉시오스는 튀르크 동맹군을 기다릴 여지가 없었다. 알렉시오스는 튀르크 동맹군을 제외한 부대를 이끌고 스라키의 알미로스(Halmyros) 강 유역으로 진군해 브리엔니오스의 군대와 대치하였다.

기록에 따르면[29] 브리엔니오스의 군대는 알렉시오스의 군대보다 만 명 이상이 많았다. 병사 개개인의 질도 브리엔니오스의 군대가 앞섰고, 장교진의 경험도 마찬가지였다. 전면전으로는 반군에 맞설 수 없다고 여긴 알렉시오스는 반군을 인근의 계곡으로 유인하여 매복하여 반군을 기습하였다. 기습에도 불구하고 반군은 다시 규율을 되찾고 정부군을 압박하였고, 이에 정부군이 붕괴하려던 참에 알렉시오스는 개인의 기지와 막 도착한 쉴레이만의 튀르크 병력의 도움으로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사로 잡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자세한 것은 칼라비레 전투 참조.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실명 당하고 반란에 실패하였지만 니키포로스 3세에게 사면받았다. 그러나 그의 서부 반란 세력은 니키포로스 바실라키스가 접수하여 또 다른 반란을 낳았다.

니키포로스 바실라키스는 테오도시우폴리(Theodosioupoli) 둑스로서 만지케르트 전투에도 종군한 경험이 있는, 아르메니아 혈통의 장군이었다. 만지케르트 이후에는 파플라고니아의 군관구장을 지냈고, 브리엔니오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미하일 7세에 의해 디라히온 둑스로 임명되었다. 바실라키스는 새로운 임지인 디라히온으로 이동 중에 테살로니키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브리엔니오스의 반란에 합류하였다.

브리엔니오스의 몰락 이후 바실라키스는 서부 군인들의 지지를 받고 브리엔니오스의 잔존 반란 세력을 흡수하고 마케도니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바실라키스는 테살로니키를 근거지로 하고 약 1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니키포로스 3세는 막 브리엔니오스의 반란을 제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복귀한 알렉시오스 1세를 다시 반란 진압에 파견하였다. 바실라키스의 군대와 정부군은 테살로니키 인근의 바르다리오스 강(Bardarios)에서 대치하였다.

바실라키스의 군대는 콤니노스의 정부군에 비해 숫적으로 우세에 있었지만 알렉시오스의 기민한 전술로 인해 이어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바실라키스는 겨우 몸만 빼내어 테살로니키로 피신하였지만 테살로니키 시민들은 도주해 온 바실라키스를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에게 인계하였다. 1080년 바실라키스는 이후 니키포로스 3세의 신하들에 의해 실명하였다. 이로써 제국 서부의 반란은 일단락이 되었다.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는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당대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아나톨리아 군인 가문인 멜리시노스의 일원이었다[30]. 멜리시노스는 마이기스트로스의 품계를 가지고 있었고, 트레디차(Traiditza, 현재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둑스를 지냈었다. 멜리시노스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누이 에브도키아와 결혼했기 때문에 콤니노스 가문과 혈연 관계에 있기도 했다. 멜리시노스는 처남인 마누일 콤니노스(알렉시오스 1세의 큰 형)과 동서인 미하일 타로니티스(알렉시오스의 누이인 마리아의 남편)과 아나톨리아에서 대 튀르크 원정에 종군하기도 했었다. 멜리시노스는 다른 아나톨리아 지역 유지들과 달리 1078년 니키포로스 3세가 두카스 정권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킬 때도 반란에 참여하길 거부하였고, 이에 따른 미하일 7세의 보상으로 아나톨리콘의 둑스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멜리시노스는 보타니아티스가 즉위하자 아나톨리아 연안의 코스(Kos) 섬에 그의 가족들과 함께 유배되었는데, 이는 상기했듯 반란을 거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080년 가을 코스 섬을 탈출해 아나톨리아로 건너간 멜리시노스는 쉴레이만 쿠탈미쉬오울루의 세력 등 튀르크 세력을 포섭하고 서부 아나톨리아를 장악하였다. 지역 주민들의 환영 속에 멜리시노스는 서부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을 무혈 통과하면서 튀르크인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이윽고 멜리시노스는 동년 니케아를 점령하였다. 보타니아티스는 환관인 황실 의상 실장(Protovestiaros) 요안니스에게 군대를 맡겨 니케아를 탈환하고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하였다. 요안니스는 도시를 포위하였으나 튀르크 대군이 멜리시노스를 지원하기 위해 니케아로 접근하자 퇴각하였다.

멜리시노스의 반란은 결국 니키포로스 3세 정권 아래에서는 종결되지 못했다. 반란은 다음 해인 1081년 4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보타니아티스 정권을 뒤엎고 알렉시오스 1세로서 즉위한 이후에야 협상을 통해 종결되었다.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의 반란이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멜리시노스가 튀르크 수비대를 배치한 서부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은 모두 튀르크인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 시기 니케아는 결국 쉴레이만 쿠탈미쉬오울루가 장악하였고, 이내 룸 술탄국의 수도가 되었다.

더구나 시칠리아 방면에서도 동로만 제국과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1078년 미하일 7세가 니키포로스 3세에게 폐위되었고 헬레네는 수도원에 유폐된 소식이 시칠리아 백국에까지 전해지면서 격노한 로베르는 우선 남이탈리아의 반란을 제압하는 데 2년을 소비한 후 1080년 여름에 비잔티움 침공 준비에 착수하고 있었다. 전쟁 준비가 한창일 무렵, 한 정교회 수도자가 살레르노에 와서 자신이 바로 미하일 7세이며 수도원에서 간신히 탈출해 이곳으로 도망쳤으니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로베르는 침략 명분을 제공해준 그를 융숭하게 대접해줬다.

한편 1073년, 시칠리아 일대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노르만계 아풀리아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미하일 7세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군사 동맹을 체결하는 대가로 포르피로예니토스인 황제의 동생과 로베르의 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을 결혼시키자는 것이었다. 로베르토가 여기에 답신을 하지 않자, 미하일 7세는 또 다른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자신의 갓난 아들 콘스탄티노스를 장래의 신랑감으로 정하는 한편, 로베르에게는 비잔티움의 훈장을 44개나 주어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눠줄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매년 금 200파운드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로베르는 황제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킴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의 제위 계승에 끼여들 여지가 생기는 것에 혹해 제안을 받아들이고 딸 헬레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그런데 1078년 미하일 7세가 니키포로스 3세에게 폐위되었고 헬레네는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이에 격노한 로베르는 남이탈리아의 반란을 제압하는 데 2년을 소비한 후 1080년 여름에 비잔티움 침공 준비에 착수했다. 전쟁 준비가 한창일 무렵, 한 정교회 수도자가 살레르노에 와서 자신이 바로 미하일 7세이며 수도원에서 간신히 탈출해 이곳으로 도망쳤으니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로베르는 침략 명분을 제공해준 그를 융숭하게 대접해줬다.

1080년 12월, 로베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퐁투아즈의 백작 라뒬프를 대사로 파견했다. 라뒬프는 니키포로스 3세에게 헬레네를 만족스럽게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당시 제국의 수도에 고용되어 있는 상당수 노르만인들의 세력을 결집하고 당시 서부군 총사령관인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다. 라뒬프는 알렉시오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인물됨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귀환 길에 알렉시오스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브린디시에 있던 주군 로베르를 찾아가 원정을 완전히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새 황제는 노르만인들과 친해지고자 하니 침공할 이유가 없으며, 자신이 자기 눈으로 수도원에서 편안히 지내는 미하일 7세를 목격했으니 지금 로베르가 받들고 있는 '미하일 7세'는 완벽한 가짜라고 주장했다. 또한 라뒬프는 헬레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잘 대접받고 있다는 시실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로베르는 무시무시한 분노를 터트리며 라뒬프를 내쫓았다. 그는 애당초 헬레네를 구하려고 원정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딸은 여섯이나 더 있을 뿐더러 헬레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편이 제위를 노리는 데 적합했다. 그래서 그는 1081년 5월 말에 함대를 출격시켜 비잔티움 제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했다.

니키포로스의 정권은 원로원과 도시 시민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부의 상황은 전혀 녹록치 않았다. 1080년 튀르크 유목민들은 프로폰티스 해에 면한, 제국 해군의 요충지인 키지코스(Kyzikos)를 점령하였다. 당시 제국군은 소아시아에서 군사 활동을 재개하고 있었고, 키지코스는 반드시 수복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1081년 초 황제는 서부군 총사령관인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와 그의 형인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 군대를 이끌고 키지코스를 탈환하라 명했다. 콤니노스 형제는 명령을 수행하기로 하였으나, 이내 형제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보릴라스와 예르마노스에게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형제는 두카스 가문과 협력하여 키지코스를 탈환하기 위해 모인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성벽 수비대가 매수당함으로써[31] 성문을 반란군에 열었고, 도시에선 보타니아티스를 지지하는 시민군과 반란군의 잔혹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시민군의 일방적인 학살과 더불어 도시의 약탈이었다.

잔혹한 시가전과 나름대로 세워놓은 반란 대책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충격을 받았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위를 포기하였다. 제위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에게로 돌아갔고, 스스로는 페리블렙토스(Peribleptos) 성당 부속 수도원에 은거하여 1081년 말 병사하였다. 향년 80세의 일이었다.
2.1.3. 콤니노스 왕조
파일:알렉시오스 1세 -3.jpg

결국 위기의식을 느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무능한 니키포로스 3세보다는 여러 전공을 세우면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알렉시오스와 그의 형 이사키오스를 더 신임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황제를 배출하고 있던 두카스 가문도 일족의 제위를 보장해 줄[32] 사위인 알렉시오스[33]가 더 낫다고 판단하고 있던 차에, 콤니노스 형제의 쿠데타로 결국 니키포로스 3세는 제위를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추방당했고, 콤니노스 형제들 중 동생 알렉시오스가 황제에 올랐다.(그 사정은 아래 두카스 가문에 대한 각주를 참조)

하지만 형 이사키오스도 그에 못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알렉시오스는 형 이사키오스를 위해 부제(Καισαρας, Caesar)보다도 더 높은 '세바스토크라토라스'(σεβαστοκράτορας, Sebastokrator)라는 작위[34]를 신설하여 항상 가까이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081년 4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코스마스가 집전하는 대관식에서 황제의 관을 썼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약간의 분란이 있었는데, 황후로 즉위해야 할 알렉시오스의 부인 이리니 두케나가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것이다.[35]

이는 미하일 7세의 황후이자 니키포로스 3세의 황후였던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알렉시오스의 염문설로 인하여 더욱 불거졌고- 알렉시오스가 부인을 버리고 황후와 결혼해 황제가 되려 한다!-, 이리니 두케나의 가문이자 콤니노스 형제의 반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두카스 가문의 격렬한 분노를 샀는데, 이는 알렉시오스의 모후 안나가 두카스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벌인 술수라는 설이 있다.[36]

하지만 워낙 두카스 가문이 드셌고 또 세계 총대주교 코스마스도 퇴진 압력을 받으면서까지도 이리니의 대관식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이는 성사되었다. 시작부터 황제 가문과 황후 가문의 갈등으로 얼룩지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알렉시오스는 동로마의 선임 공동 황제로서 지급한 위기에 당면한 동로마 제국의 옥좌에 앉게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는 마리아와의 약속대로 공동 황제로 봉해졌다. 1083년 알렉시오스 1세의 장녀인 안나 콤니니가 태어나자 곧장 약혼을 시켰는데, 1087년 아들 요안니스가 태어나자 제위에서 밀려나 곧 죽었다. 아마 알렉시오스 즉위 이후 수녀원으로 들어가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한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를 배제하려는 의도와, 아들 요안니스가 태어나자[37] 콤니노스 왕조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알렉시오스 1세의 고의로도 해석될 수 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외적의 침입에 맞서야만 했다. 우선 즉위한 해 이탈리아 남부에서 활동하던 노르만 족이 이피로스(에페이로스) 지역을 침공하였다.(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당시 바실리오스 2세가 죽고 난 뒤부터 동로마령 남 이탈리아가 점차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데다가 1071년 마지막 동로마의 이탈리아 거점인 바리가 노르만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함락당하여 완전히 세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디라히온에서 로베르와 접전을 벌였으나 패배했고, 동로마 제국군은 간신히 남아있던 중앙 야전군 궤멸과 디라히온, 테살리아 전역, 마케도니아 일부와 카스토리아 일대 상실했다. 이후에도 수 차례 패배를 당하며 제국의 서부 영토를 전부 상실할 위기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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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히온 전투에서 패전해 도망치는 알렉시오스 1세 황제

당시 제국의 자체적인 능력으로 이들을 맞서는 것이 어려웠기에 알렉시오스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각종 무역 특권을 떡밥으로 제공하여 해군을 지원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보내는 사절에게 막대한 뇌물을 들려주어 이탈리아 지역의 노르만 본진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게다가 1085년 노르만 진영에 역병이 돌아 로베르 기스카르가 죽자 그를 따르던 귀족들은 상당수 남이탈리아로 돌아가 장남 보에몽이 물려받은 제국의 영토는 이제 기량면에서나 군사력 면에서나 우위를 점한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급속히 탈환되었다. 그 덕분에 첫 번째 침입은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1087년부터 1091년까지는 페체네그족이 대대적으로 발칸 반도를 침공하였다. 페체네그 족은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면서 룸 술탄국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알렉시오스 1세는 페체네그 족에 적대적인 쿠만 족과 동맹을 맺고 레부니온 전투에서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로써 페체네그 족의 위협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키프로스 섬과 크레타 섬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비티니아에선 튀르크인 토후들이 제국령을 침범하고 스미르니의 튀르크인 토후인 차카가 전쟁을 선포했다. 키프로스(랍소마티스)와 크레타(카리키스)의 반란자와 비티니아의 튀르크 세력은 손 쉽게 진압할 수 있었으나 차카와의 전쟁에는 꽤 큰 노력을 들여야 했다. 아나톨리아의 주요 항구 도시인 스미르니와 에페소스를 장악한 차카는 두 도시를 정복한 이후부터 대함대를 건설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차카는 제국에 선전포고한 뒤 에게 해의 제국령 섬들을 침탈하고 페체네그 족과 연합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며 무역을 방해하는 등 큰 피해를 끼쳤으나 재건된 제국 해군의 반격과 제국의 사주를 받아 차카가 암살당해 이 전쟁도 일단은 제국의 승리로 종결될 수 있었다.

대내적으로 알렉시오스는 미하일 7세가 벌여놓고 니키포로스 3세가 악화시켜 놓은 모든 것을 쇄신해야만 했다. 우선 미하일 7세가 떨어뜨려놓은 화폐 가치를 회복해야 하였으나, 이는 이미 제국의 국고가 바닥난 상황에서 불가능하였으므로 오히려 더 질이 낮은 금화를 마구 찍어내서 유통하고는 금 함량이 높은 화폐를 세금으로 거둬들였다.[38]

그렇게 하여 충당된 돈은 모조리 군비로 쏟아부어지기는 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일단 막장에 이르른 군대는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또 10년 간 4번에 걸친 제위 찬탈로 인하여 급격히 불안해진 제국의 중앙 정부를 수습하기 위해 모후 안나 달라시니와 형 이사키오스를 비롯한 일가붙이는 물론 처가인 두카스[39] 가문을 비롯한 여러 친인척들을 중앙에 배치하여 안정적인 황제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후 어느 정도 혼란이 수습되자, 알렉시오스는 저질 금화의 주조를 금지하고 기존 노미스마의 금 함량의 7/8을 함유한 금화, 히피르피론(ὑπέρπυρον)을 주조하여 다시금 제국의 경제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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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외적의 침입은 1090년에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페체네그 족의 침입으로 제국과 동맹을 맺었던 쿠만 족이 스스로를 로마노스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앞세워 트라키아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셀주크 투르크도 계속 동로마 제국을 계속 공격하였는데, 황제는 신임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قِلِج اَرسلان)과 스미르나 지역의 토후인 차카의 반목을 유도해 클르츠 아르슬란과의 협정을 통해 외교적으로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과 이슬람계 군주들과 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을 피하려 하였다. 하지만 즉위 초기 서방에서 벌어진 군사 활동들로 인하여 동방의 영토는 점차적으로 제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무정부 사태에 이르거나 튀르크 침략자들에게 점령당하였다. 1096년 경 동방에 남아 제국의 행정권이 미치는 영토는 시노피부터 트라페준타에 이르는 폰토스 지방과 이라클리아 폰티키, 다말리스, 니코메디아, 아비도스를 잇는 마르마라 해안가의 비티니아와 미시아 지방 뿐이었다.[40]

알렉시오스 1세는 동방으로 눈을 돌려 아나톨리아 해안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튀르크의 침공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동로마의 힘만으로는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알렉시오스 1세는 서유럽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과거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알렉시오스 1세에게 파문을 선고하면서[41]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로마 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으나, 이즈음 새로이 교황으로 등극한 우르바노 2세가 알렉시오스 1세의 파문을 취소하는 등 동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고, 이에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하면서 교황의 초청을 받아 1095년 3월 피아젠차 공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제국의 어려움과 성지 회복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워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투르크 인들에게 대적하기 위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42]

우르바노 2세 역시 전임자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권의 신장을 꾀하면서 이를 공고히 할 필요성이 생겨나고,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4세와 노르만의 로베르 기스카르 사이에서 교황 자체의 무력적인 기반이 약화되자 동로마 제국과의 화합을 꾀하는 동시에 무력 원조를 통한 입지 강화 및 동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의도하였기 때문에, 이는 쉽게 수락되었고 나아가 알렉시오스 1세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프랑스 남부 클레르몽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면서 제1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당초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통해 적당한 규모의 지원 병력[43]을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교황의 호소에 따라 조직된 제1차 십자군은 서유럽 국가들의 영주, 기사들이 대거 참여한 대규모 병력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성지 탈환이라는 목표가 제시되면서 너도나도 십자군에 참여하여 병력의 규모는 지나친 수준을 초월한 규모로 커져버렸으며, 특히 민중 십자군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행패만 부렸기에 오히려 골칫거리가 되어버렸다.

결국 이들이 와서 싸지른 것들을 뒷처리한다고 상당히 골머리를 썩었지만, 1095년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이라는 예방 주사(...)를 맞은 알렉시오스 1세는 식량을 비축하고 십자군에게 호송대를 붙이는 등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보급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큰 마찰없이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는 프랑크인들을 신뢰하지 않았으므로[44] 십자군 군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고 앞으로 점령할 영토의 종주권을 동로마 황제, 즉 자신에게 넘길 것을 맹세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군주들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으나[45], 선물과 회유를 비롯한 여러가지 방법으로 알렉시오스는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하였다. 다만 저지 로렌(Niederlothringen)의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문제였는데, 백작 가문의 둘째 아들로[46] 노퓨처 인생을 살다가 신성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여 공작 작위까지 받은 그로서는 신성 로마 황제 이외의 군주에게 충성 서약을 할 수 없노라고 강변하였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가 식량 공급을 차단하자, 분노한 고드프루아는 보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의 촌락을 약탈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지휘하는 수비대와, 성벽에 배치된 제국군 궁병대의 반격으로 물러났다가 황제가 정규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제압할 생각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충성 서약을 하였다.[47] 노르만 침략 때 주요한 역할을 했던 보에몽도 있었는데, 그는 동생 루지에로에게 모든 유산을 빼앗기고[48] 허송세월을 보내다 십자군 모집 공고를 보고 아녀자들까지 급하게 끌어모은 군대를 가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한 것이었다. 보에몽은 모범적으로 서유럽 군주들 사이에서 앞장 서 알렉시오스에게 충성 서약을 하였으나[49], 뒤에서 은밀하게 황제에게 동방의 제국군 총사령관 직위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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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1세는 이제 슬슬 중견에 접어든 황제 경력으로 말미암아 적당한 때가 되면 반드시 신중하게 고려해보겠다는 외교적인 답변을 해주고는 스리슬쩍 넘어갔다. 툴루즈 백작 레몽은 곧 죽어도 충성을 안 하겠다고 버텼는데, 고드프루아처럼 성급히 군사적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완고하게 버텼으므로 알렉시오스 1세도 GG치고 황제의 명예와 안전을 최대한 존중하고 보호하겠다는 약속만 받기로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시오스 1세와 맺은 서약을 레몽은 가장 충실히 지켰고, 보에몽은 가장 빨리 어겼다.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여차저차 1차 십자군은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로 진군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는 유능한 장군인 타티키오스에게 2000 병력을 딸려주고 처남 요안니스 두카스 대공에게 대규모 함대를 맡겨 십자군을 지원했다. 최우선 탈환 대상은 셀주크 투르크의 소아시아 분점인 룸 술탄국이 수도로 쓰고 있던 니케아였다. 당시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이전의 민중 십자군이 니케아를 공격할 때 계략을 써서 제리고르돈 요새에서 완전히 파괴한 뒤로는 십자군을 과소 평가하여 아예 원정을 떠나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니케아를 전투민족 프랑크인들과 현지에 밝고 기술력이 뛰어난 동로마 군대가 두들겨대니 쉽게 함락...하였는데, 니케아같은 유서깊은 대도시가 프랑크인들에게 점령당하면 관례에 따라 사흘 동안 벌어질 약탈이 엄청날 것임을 우려한 알렉시오스 1세는 도시가 점령당하기 전날 밤 밀사를 파견하여 항복하면 약탈은 면하게 해주겠노라고 제안한다. 니케아 측에서는 구원을 위해 달려온 술탄의 군대가 격퇴되는 것을 목도한 상황이었고, '알아서 생존을 도모해라'라는 사실상 항복을 허가하는 전언이 있었기에 거리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총공격을 준비하던 프랑크인들의 눈에는 니케아 성에 펄럭이는 황제의 군기가 보였다. 이미 마누일 부투미티스가 니케아의 공작(Doux)으로 임명되어 상황을 정리해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황제는 클르츠 아르슬란의 아내와 자식들을 정중하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모셔갔고, 이후 그녀의 친정인 스미르니를 통해 술탄에게 반환하였다. 이는 십자군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것이 동로마와 프랑크인들의 이해 관계가 상충하여 벌어진 첫 번째 사고였고, 동로마 제국에 대한 서방 십자군의 불신의 시발점이 되었다.

게다가 동로마는 자신의 땅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었고, 십자군은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고 부를 원했으므로 이해 관계의 상충은 불가피한 일이었다.[50] 이후 십자군을 격퇴하기 위해 클르츠 아르슬란이 군사를 이끌고 도릴레온 협곡에서 십자군을 요격하지만, 처참하게 발리고 퇴각한다.

룸 술탄국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잃은 소아시아 인근의 고만고만한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난하게 탈환될 수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팔레스타인까지의 진격이 성공하여 예루살렘까지 탈환하였으며, 예루살렘 왕국이 건국되었다.

그렇게 십자군들이 라틴 계열 공국들을 세우는 동안 알렉시오스 황제도 자신의 숙원이었던 아나톨리아의 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처남 요안니스 두카스의 대군은 수륙 병용으로 이오니아와 리디아의 튀르크 토호들을 축출했으며, 스미르니, 에페소스, 호마, 트랄리스 등의 대도시와 요충지들이 다시 제국의 지배와 통제 하로 들어왔다.

하지만 십자군의 영주와 기사들은 이러저러한 불미스러운 갈등들로 인하여 사이가 틀어진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 충성할 생각이 없었으며,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작국과 같은 국가들이 난립하였다. 결국 알렉시오스 1세가 힘으로 찍어눌러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였고, 소아시아의 곡창 지대와 시리아 지역 일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십자군 국가에 대한 확고한 통제권은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해 십자군 국가와 대립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원래 동로마 제국과 사이가 안 좋던 노르만족, 즉 보에몽이 세운 안티오키아 공국은 그리스 지역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보에몽은 충성 서약을 하였지만 안티오히아를 함락하자마자 안티오키아 공국을 자신의 영지로 선포하고 이에 항의하는 레몽을 까버렸으며(롱기누스의 창 항목 참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묘의 수호자(사실상 국왕)로 등극하자 교황청 특사 다임베르트 주교와 야합하여 예루살렘의 왕위를 얻어내려고 하였는데, 그의 동생인 에데사 백작 보두앵의 발빠른 대처로 이가 무산되자 별 수 없이 주변 무슬림 촌락을 약탈하기만 하였다.

십자군 내부 뿐만 아니라 서쪽에서 다가오는 위협도 보에몽을 걱정스럽게 했다. 기량을 되찾은 동로마군이 대병력을 끌고 아다나,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인 토호들을 복속시키고 안티오히아의 접경까지 다다른 것이다. 황제가 겨우 14년 전까지만 해도 동로마의 땅이었던 안티오히아의 주권을 요구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다가 다니슈멘드 왕조[51]의 한 아미르에게 생포되어, 그 이름도 높은 보에몽 경매를 하게 되었다. 주요 입찰자는 총 세명. 즉위하자마자 그에게 털리고 충성 서약에 대해 배반까지 당했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니케아를 눈뜨고 빼앗기고 도릴레온에서 보에몽의 침착한 지휘에 대패하고 물러났던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그리고 사로잡힌 보에몽 본인(...)이었다. 각 군주들의 입찰가는 다음과 같다.
알렉시오스 1세 : 현찰 박치기로 26만 디나르(황제답게 돈이 많았다.)
킬리지 아르슬란 : 13만 디나르와 휴전 협약(보에몽을 다른 사람에게 팔면 자신이 공격하겠다고 했다. 협박에 가깝다(...))
보에몽 : 13만 디나르와 군사적 협력(돈에 더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가장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룸 술탄국과는 휴전이고 뭐고 틈만나면 싸워댔으므로.)

다니슈멘드 술탄은 보에몽의 제안을 채택하였고, 보에몽은 석방되자마자 즉시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자신이 없는 사이 안티오키아의 공작 노릇을 하며 자신의 석방을 방해하던 조카 탕크레드를 축출하고 10만 디나르를 신민들에게 짜내어 납부하여 다시 레반트의 주요 영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력 판도가 잡힌 레반트에서 더이상 자신이 얻을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는 아버지의 숙원이자 자신의 유산인 동로마 제국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의 공주와 결혼하고는 딸려온 재물과 자신의 명성으로 소집한 병력을 바탕으로 아버지 기스카르 로베르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1108년 28년 만에 남이탈리아에서 출병하여 디라히온을 공격한다.

하지만 30년 만에 제국은 이미 유럽 최강대국의 타이틀을 수복한 후였다. 보에몽은 아버지같은 기량도 갖추지 못했을 뿐더러 원숙했던 알렉시오스의 상대가 더 이상 되지 못하였다. 보에몽은 디라히온을 공격하지만 재건된 제국군에 의해 대패하고, 포위당한 상황에서 전염병까지 창궐하자 안티오키아가 제국의 봉신임을 맹세하는 등의 굴욕적인 조항이 담긴 항복조약인 데볼 조약(1108년)을 체결하고는 실의에 빠져 남이탈리아에서 죽었다.

제국의 동서방이 모두 안정되고, 히피르피온 경제정책이 성공을 거두며 알렉시오스 황제 말년에는 제국이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제국을 안정기로 만든 것과는 별개로 강경한 과세정책과 족벌주의는 시민들과 귀족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다. 제위 초중반부에 긴급자금을 수혈하기 위해 시도한 교회 재산의 징발 또한 교회의 눈총을 사기 딱 좋은 정책이었다. 알렉시오스는 교회, 구빈원, 병원을 건설하고 빈자들을 구휼하는 한편, 불가리아에서 성행하던 보고밀파 이단을 정리하며 지지를 얻어보고자 했으나 민심은 싸늘한 상황이었다.

황궁 내에서도 문제는 산적해있었다. 알렉시오스의 장녀이자 포르피로옌니타안나 콤니니는 공공연하게 둘째아들인 요안니스 왕자를 모함하고 있었고, 후계갈등에 알렉시오스의 아내인 이리니 두케나까지 안나를 지지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황제의 통풍은 심각한 수준까지 악화되고 있었고, 노쇠한 황제는 딸을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했다.

1111년, 룸 술탄국의 술탄 말리크 샤가 다시금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이들은 수군까지 보유하여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넘었고, 제국 서부인 트라키아까지 약탈을 감행했다가 격퇴되었다. 2년 뒤인 1113년, 이들은 또다시 침공을 감행해 수만 병력으로 니케아를 공성하고, 수복한지 30년도 채 되지 않은 서부 아나톨리아의 제국영토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투르코만 유목민들은 니케아의 두터운 성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주변 영토를 초토화시켰다. 다행이도 알렉시오스는 아틸레이아부터 아드라미티온까지의 서부 아나톨리아의 대도시와 주요거점을 요새화시켜놓았기 때문에, 룸 술탄이 영토를 빼앗는 일은 없었지만, 계속 도시근교를 약탈당한다면 수복지를 강탈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115년부터 황제는 병력을 준비했지만 친정은 힘들었다. 통풍과 노환이 심해진 데다가, 아내 이리니와 딸 안나의 세력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북부 지역에서 쿠만족까지 침공해온다.

1117년, 쿠만족의 공격은 격퇴되었고, 황제의 병세도 나아졌다. 그는 룸 술탄국에 대한 대규모 응징원정을 통해 주요 로마인, 기독교인 인구를 룸 술탄국 영토에서 구출해내고, 약탈을 멈추기 위해 필로밀리온으로 진격했다. 여기에 본인 부재 시에 있을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아내 이리니까지 전장에 함께 데려갔다.

필로밀리온 전투에서 알렉시오스의 로마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황제의 마지막 치적이었다. 그는 전투 후 다시 앓아누웠다. 1118년이 되자 그는 목이 부어 물조차 삼키기 힘들고, 앉은 자세가 아니면 숨쉬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아내 이레네는 그를 헌신적으로 간호했지만, 이는 그의 사후 안나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의도였다.

1118년 8월 15일, 죽음을 직감한 황제는 아내와 딸 몰래 황제의 증표를 아들 요안니스 2세에게 보냈다. 그리곤 거친 수도복으로 갈아입고 병상에서 고백성사를 받은 후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는 죽기전 제위를 후계자가 아닌 다른이에게 주려는 이레네에게 웃으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아무리 내가 적법하지 않은 찬탈로,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제위에 올랐다고 해도 어찌 내 아들이 아닌 이방인에게 제위를 물려주겠소?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요안니스 콤니노스' 1장, 알렉시오스의 유언)

하지만 안나는 낙담하지 않고 차근차근 다음 음모를 준비해나갔다. 요안니스가 제위에 오른 몇달 뒤, 그녀는 남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함께 군대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요안니스가 금문 바깥에 위치한 별궁 필로파티온에 기거하는 동안, 니키포로스가 그를 따르는 귀족들의 사병들과 함께 별궁을 포위해 황제를 끌어내리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에 필로파티온 앞으로 나타난 다른 귀족들과 안나의 사병들과는 달리, 니키포로스가 이끄는 병사는 별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처남에게 달려가 이 음모의 진상을 밝히고 이를 주도한 자신의 아내 안나를 선처해 줄 것을 빌었다. 요안니스는 귀족들과 안나를 잡아들였지만, 관례대로 눈과 코를 상하게 하는 대신 재산만을 몰수하는 관대한 행보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요안니스 악수흐에게 안나의 재산을 양도했지만, 이마저도 이후 반환되었다. 쿠데타에 실패한 안나는 결국 체념하고 테오도코스 케카리토메네 수녀원에서 35년간 칩거하며 역사서를 집필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요안니스 2세의 재위 초반 제국의 안보는 나름대로 안정적이었다. 주변의 국가들은 서로 싸우고 있거나,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황제는 바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룸 술탄국을 몰아내고 아나톨리아 서남부를 수복하려 했다. 당시 룸 술탄국은 다니슈멘드의 압박으로 약해져 있었다. 다니슈멘드의 아미르 가지 2세가 할리스 강 유역에서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며 룸 술탄을 위협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아나톨리아 내의 튀르크족들의 정세도 급박해졌다. 이들은 룸 술탄국과 다니슈멘드 영토 사이를 오가며 양자에게 군사력을 제공했다. 이들은 프리기아(Phrygia)와 피시디아(Pisidia) 사이의 넓은 지대를 유린하며 자신들의 소유로 삼고 있었는데, 이곳은 그들이 발흥한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이나 이미 정착해있던 아나톨리아 중부의 고원지대와 다르게 목초지가 넓고 기후가 온화했다. 이들은 여름과 가을엔 이곳에 사는 로마인들에게 소작을 놓고, 겨울에는 뗄나무와 목초를 베게 하는 착취를 계속하고 있었다. 튀르크인들은 선황의 치세동안 제국령을 침탈하면서 그 도상에 있는 라오디키아(Laodikea)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아나톨리아 서남부의 동로마 항구들과 도시들이 고립되어 육로로 통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가장 큰 위기에 처한 곳은 항구 아탈레이아였다.

아탈레이아와 니케아를 잇는 육로 통행을 복구하기 위해 황제는 출병을 감행했다. 먼저 그는 요안니스 악수흐에게 병력을 떼어 주어 리쿠스(Lycus)와 라오디키아로 급속 행군하게 하였다. 이 소규모 병력은 로마의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공성 병기를 준비해 놓음으로써 적이 방어할 시간을 빼앗았다. 튀르크멘 지도자 아부 샤라는 아나톨리아 중부로 도망쳤고, 첫 공격에 라오디키아는 바로 함락되었다. 황제는 그곳에 주둔군을 배치하고 요새를 건설하는 작업을 시작해, 아나톨리아 중남부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황제는 이 시기에 중앙군을 악수흐에게 맡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52] 악수흐는 중앙군을 이끌고 늦가을까지 소조폴리(Sozopolis)와 메안데르 강 중부를 재탈환했다. 또한 이 지역에 도로와 요새를 수리하여 안정화시키는 작업도 빼놓지 않았다. 이렇게 거의 50km에 이르는 지역이 요새화되거나 도로로 연결되었다.

1120년, 악수흐는 다시 아나톨리아 서남부로 향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그들의 아나톨리아 재수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 찾아왔다. 레부니온 전투로 약화되었던 페체네그족이 다시 세력을 키워 30여년 만에 제국의 국경선을 넘은 것이다. 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트라키아를 향했고, 불가리아 테마의 많은 마을들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아직 악수흐가 이끄는 주력군이 마르마라 해를 건너지 못한 상황에서 황제는 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해 사회 혼란을 조성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수백명의 바랑인 친위대가 포함된 80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거의 네배에 달하는 페체네그 군을 향해 진군했다. 그들은 트라키아의 베로이아 지역에서 대치했다. 황제는 현명하게도 페체네그의 족장들에게 저자세로 나가면서 막대한 선물과 도나우강 이남의 통행권을 제공하고 강화 조약을 체결할 것처럼 행동했다. 페체네그의 족장들이 황제의 제안에 대해서 논의하는 동안, 때맞춰 도착한 악수흐의 주력군이 그들을 덮쳤다. 서로 비슷한 두 군세는 베로이아의 벌판에서 혈전을 벌였다.

요안니스는 전투에 돌입하기 전 재물로 페체네그족을 분열시켰고, 이후 전투가 벌어진 후 중반에 페체네그족의 후방을 공격한 후 그들의 군량을 차지하면서 승기를 다지는데 성공했지만 페체네그족의 저항을 완고했다. 전투의 마지막은 치열했다. 총사령관인 악수흐까지 부상당할 지경이였다. 하지만 화살과 보급품을 실은 짐마차를 잃어버리고서는 장기인 스웜 전술이 봉쇄된 페체네그 경기병이 제국의 중장보병과 중장기병을 상대로 돌격해서 이길 확률은 적었다. 바랑인 친위대는 트레이드 마크인 양손 도끼로 적들을 격멸하고 수천명의 페체네그족을 포로로 잡았다. 페체네그군 1만명 이상이 전사했고, 페체네그의 대족장과 11명의 족장들이 사로잡혔다. 그들이 황제에게 받았던 모든 재화는 물론, 지금까지 페체네그 군대가 수집한 수많은 전리품이 황제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황제가 가지게 된 전리품 중 가장 값진 것은 역시 페체네그족 그 자체였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계속해서 야전군을 불리려던 콤니노스 왕조에게 수천명의 포로는 좋은 병력 공급원이었다. 포로들은 좋은 대접을 받으며 대부분 바르다리오타이에 편입되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재건 중인 소아시아 정착 사업을 위해 이주되었다.

황제는 휘하 장병들의 승리를 치하했고, 베로이아에는 거대한 승전 기념비와 기념문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개선식에 수십만명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환호했다.

그에 비해, 900년대부터 200여년간 우크라이나 지방의 스텝 지역을 주름잡던 페체네그족은 이 전투를 끝으로 거의 멸망하고 말았다. 그들은 전쟁이나 원정에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다니는 습성이 있었고, 패배는 곧 부족 전체의 멸망과 같았다. 물론 수십만명 이상의 페체네그족이 이미 동로마 제국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고, 복속되지 않은 소수의 잔당들도 헝가리, 동로마 제국, 키예프 대공국의 국경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전자는 훗날 완전히 로마화되었으며 남은 이들은 역사에 남을 정도로 큰 족적을 남기기에는 이제 역량이 부족해져 있었던 상태가 되었다.

한편 황금뿔 만에 있는 베네치아의 무역 조계는 선황 때의 조약으로 거의 무관세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는 제국의 시전 상인들과 그 조합들은 원로원을 통해 베네치아인들의 특권을 취하해달라는 청원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마침 노르만인의 위협이 주춤해진 상황이었기에, 막 제위에 오른 요안니스는 도박을 감행해보기로 하였다. 1118년, 그는 베네치아의 원수 도미니코 미카엘에게 더이상 옛 통상 특권은 유지되지 않는다고 딱 잘라 거절하고 보호 무역을 시작했다. 이에 분노한 베네치아는 수년간 기회를 노리다 70여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드리아 해를 가로질러 제국의 서부로 향하면서 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은 6개월간 제국 서부 해안의 주요 요새 코르푸를 공성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예루살렘 왕국보두앵 2세가 무슬림들에게 사로잡혀 베네치아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기에 공성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베네치아는 코르푸를 얻지 못하고 우르트메르로 향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혼란이 정리된 1125년, 마침 동로마 제국이 전선을 확장시켜 해로 방어에 틈이 생기자 에게 해에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주요한 조선소가 있던 레스보스(Lesbos), 히오스(Chios), 로도스(Rhodos), 사모스(Samos), 안드로스(Andros) 등이 점령당하거나 타격을 입었다. 제국은 이에 대응하여 북 에게 해에 있는 림노스(Lemnos)에 함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1126년 봄, 북진하는 베네치아 함대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로마 해군 간의 해전이 일어났다.[53] 이 전투 이후 베네치아 측에서는 통상 특권을 재승인 받는 대신, 점령지를 반환하고 로마 해군을 지원하는 내용의 평화 조약을 제안했다. 피해도 컸지만 다른 영토 수복이 급했던 제국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알렉시오스 1세가 지휘 체계를 개편한 이후, 해군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던 요안니스는 이 전쟁을 계기로 해군 개혁을 단행했다. 기존의 지방 함대 사령관인 드룬가리오스(Droungarios)들 위주로 움직이던 해군은 더욱더 해군 총사령관인 메가스 둑스(Megas Doux)에게로 집중되었다. 해군 관할지도 기존의 에게 해의 섬에서 더욱 확장되었고, 개편된 해군의 운용과 유지에 걸맞게 세제도 바뀌었다. 덕분에 1120년대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에 휘둘리던 로마 해군은 마누일 1세의 치세 초에만 수백여척의 원정 함대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위세가 절정에 이른 마누일 치세 후반에는 베네치아를 포함한 주변 국가 모두를 압도하는 동지중해 최강의 해군으로 성장하게 된다.

1095년부터 헝가리는 콜로만, 알무스 형제의 불화로 왕위 계승전 상태에 있었다. 알무스와 그의 아들 벨라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쳐 친척 피로스카 태자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알렉시오스와 요안니스 부자는 그들에게 마케도니아의 영지를 내 주었고, 이곳은 반 콜로만 헝가리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콜로만은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케도니아의 헝가리 반군을 용인했지만, 그의 형제이자 두 번째 헝가리 왕인 스테판 2세는 알무스를 추방할 것을 요구하며 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1128년, 헝가리군은 베오그라드니소스, 소피아 그리고 필리푸폴리를 공격하고 북방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즉시 반격에 나섰다. 도나우 강의 함대와 이스쿠르 계곡의 가도를 따라 행군한 두 개의 제국 중앙군은 도나우강 북방으로 도하하는 헝가리군을 추격했다. 스테판은 풍토병에 걸린 상태에도 일사불란하게 군대를 지휘해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하람의 요새에 진을 쳤다. 이에 황제는 도나우 강과 네라 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함대를 이용해 몰래 도하하여 공격을 시작고, 스테판의 헝가리군은 불시의 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이후 스테판과 헝가리군을 지원하려 봉기한 세르비아인들은 라스키아(Rascia)의 족장 볼칸의 지도 아래 로마인들을 공격했지만, 그들의 반격은 제국에게 있어 산발적인 반란에 불과했다. 1130년경이 되면 세르비아 반군은 대부분 포로로 잡히고, 아나톨리아의 새로 건설된 도시에 농경지를 받고 정착하게 된다.

서방이 다시 안정되자 황제는 다시 동방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는 룸 술탄국이 몰락하고 다니슈멘드 왕조가 강성해지고 있었는데, 아미르 가지는 멜리테네, 앙키라, 카스타모뉘(Kastamonu), 강그라(Gangra) 등을 점령했으며, 1130년에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제압하고 안티오키아의 공작인 보에몽 2세[54]의 목을 은상자에 담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보낼 정도가 되었다. 1130년,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요안니스는 전면전을 개시했다. 그는 원정을 통해 파플라고니아, 강그라 등의 아나톨리아 중부를 수복하였고 카스타모뉘를 공성전하여 점령하였다. 황제는 다니슈멘드에게 핍박받던 로마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구출하여 아나톨리아 서부에 재정착시켰으며, 심지어 튀르크 아미르들까지 황제에게 자발적으로 항복하게 만들어 다니슈멘드에게 칼을 돌리게 했다. 이들은 대부분 투르코폴레스라고 불리는 모태 정교회 신앙의 투르크족들이거나, 로마인의 황제보다 다니슈멘드를 더 혐오한 투항한 룸 술탄국 귀족들이었다. 그 동안 황제의 동생 이사키오스는 그가 원정을 떠난 틈을 타서 제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미기 위해 제국의 적들을 연대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떠나고 말았다. 수년간 이어진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특히 1133년에는 황제가 직접 참가하는 개선식을 수도에서 열 정도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문부터 성 소피아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광장에 비단이 수놓였고, 수십만에 이르는 인파가 황제의 개선을 보러 쏟아져나왔다. 바랑인 친위대와 제국의 중앙군은 반짝이는 금박, 청동 미늘 갑옷을 입고 행진했으나, 황제 자신은 검소한 치장의 개선 마차에 성모상을 실은 채로 걸어서 개선에 참가했다. 요안니스 1세의 치세 이후로 이런 거대한 개선 행진은 처음이었다. 시민들은 화려한 개선식과 황제가 가져온 승리에 열광했다.

1134년, 그는 다시 중앙군을 아나톨리아 깊숙히 진군시켰다. 함께 종군하던 황후가 풍토병으로 죽었지만, 행군은 짧은 장례식 이후 멈추지 않았다. 더군다나 1134년 다니슈멘드에서는 수장인 가지 아미르가 죽게 되어 혼란이 일어났고 강그라와 주변 지역이 쉽게 정복되었다. 요안니스는 새로운 정복지에 2000여명의 주둔군을 배치하고 돌아갔다. 대부분이 정교회 신자이던 지역 사람들이 다시 점령지로 모여들었고, 여기에 제국의 사민 정책이 이어지면서 아나톨리아 서부는 융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로마 제국과 다니슈멘드와의 전면전은 1130년부터 1135년까지 거의 매년 이루어진 원정이 대체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1136년, 제국의 위협이 되는 시칠리아를 견제하기 위한 모략이 성공하면서 서방이 안정되자, 황제는 염원하던 안티오키아를 회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1137년). 안티오키아 공국보에몽 1세의 데볼 조약 이래로 명목상 로마 제국의 신하였지만, 바로 다음 공작인 탕크레드부터 이를 부정하며 제국과 적대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안티오키아 공작과 황제는 서방과 십자군의 우르트메르를 이어주는 유일한 육로인 킬리키아에서 계속해서 대립했다. 이곳은 본래 로마 제국에 속한 아르메니아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로마인들이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 아르메니아를 평화적으로 합방하고 주민들을 정착시킨 영토였다. 아르메니아의 척박한 산악지대보다 킬리키아가 마음에 들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이곳으로 대거 이주해왔고, 제국이 만지케르트 전투로 인해 소아시아의 패권을 놓치는 1070년대에 들어서는 그 이주가 절정에 달했다. 혼란에 빠졌던 제국이 겨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1100년대에 들어서 이곳은 각각의 독립 아르메니아인 토후들이 로마, 안티오키아, 그리고 아르메니아 공국의 편을 들며 난타전을 벌이고 있었다. 1137년 당시 이곳의 패권을 쥔 국가는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공국이었다. 군주 레오 1세의 통치 아래 이들은 타르소스, 아다나, 시스(Sis), 모프수에스티아(Mopsuestia) 등의 주요 로마 거점을 빼앗고는 공작을 칭하기 시작했다. 이 거점들은 그 해 제국의 손에 다시 돌아오지만, 이번에는 레오 1세와 동맹을 맺은 안티오키아의 공작 레몽이 모프수에스티아를 제외한 세 도시를 도로 빼앗고 로마인들의 촌락 수십 곳을 약탈했다.

다니슈멘드의 준동을 어느 정도 억제한 요안니스는 4만 5천의 대군을 몰아 동방 원정을 감행한다. 레오 1세는 황제의 대군에 대항하지 못하여 산악 지대로 숨어 들어갔고,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도 꼬리를 뺄 수밖에 없었다. 1138년 초, 바랑인 친위대와 페체네그족 부대를 중심으로 한 황제의 대군의 안티오키아의 성벽을 두들겼다. 중앙군이 성을 공성하는 동안 로마인들의 용병들은 황제의 명령 하에 레몽이 한 방식과 똑같이 안티오키아 공국의 촌락들을 약탈하여 응징했다. 더 우려스러운 사실은 그들의 동쪽 측면에서 장기 왕조의 군대가 북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서로 적을 두게 된 안티오키아 공작은 결국 황제에게 항복했다. 황제는 제국이 무슬림의 영토를 정복하여 그의 새 영지로 줄 것을 약속하는 대신, 안티오키아를 다시 제국령으로 다시 가져왔다.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주교에는 라틴 총대주교 대신 쫒겨난 정교회 총대주교를 다시 불러들일 것을 명했다. 이 때가 바야흐로 요안니스의 짧은 전성기였다.

레몽을 위해 정복할 지역은 모술과 알레포 주변의 샤이자르라는 지역이었다. 튼튼한 성채로 둘러싸인 이곳은 시리아의 주요 요충지였다. 1138년, 동로마군을 중심으로 한 4만 8천의 군대와 성전 기사단까지 동원한 연합군은 샤이자르를 공격했지만, 외성을 파괴하는 것 외에는 성과가 더뎠다. 레몽이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와 짜고 동로마군이 공성할 동안 태업을 하기로하고, 이를 통해 황제에게 안티오키아를 가질 명분을 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황제가 공성에 회의감을 느끼는 동안 조슬랭과 레몽을 비롯한 라틴 기사들은 주사위 놀이나 하며 시간을 때웠다.

외벽이 날아간 사이자르 수비군으로서도 더 이상 버티기엔 어려웠다. 결국 사이자르 영주는 기독교도인과 성 십자가의 조각을 넘기고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성을 온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이자르를 레몽에게 할양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 속에서, 라틴 귀족들은 황제가 조약을 위반하였다고 안티오키아의 주민들을 선동하였다. 결국 황제가 안티오키아 성내에서 소규모 주둔군과 함께 휴식하는 동안, 조슬랭 2세와 레몽의 주도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게다가 제국의 대장군이자 황제의 자형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시리아의 풍토병으로 생사가 위중한 상황이기까지했다. 황제는 라틴 귀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교묘한 태업과 선동을 통하여 레몽은 사실상 독립 세력으로서의 명맥을 지켜낼 수 있었다.

요안니스는 다시 동방 원정을 바랐으나 주변 상황은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다니슈멘드의 에미르 가지의 후계자인 말리크 모하메드 가지(Melik Mehmed Gazi)가 새로이 부상하여 트라페준타의 둑스가 일으킨 반란과 연대를 꾀했기 때문이었다. 반란을 진압한 황제는 원정을 준비했다. 그 동안 안티오키아 공국의 패악질은 멈추지 않았다. 황제가 귀환한지 4년도 채 되지 않은 1142년, 이제는 안정적으로 제국령에 편입한 아다나와 모프수에스티아 사이의 아르메니아 공국 영토를 계속해서 약탈한데다, 제국령인 키프로스 섬 주변에서 해적질을 자행한다는 보고까지 입수한 상황이었다. 황제는 친서를 보내 약탈을 중지할 것을 명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리스 황제를 운운하는 모욕적인 괴서들 뿐이었다. 결국 황제는 다시 우르트메르를 향해 진격했다. 이번 원정에는 그의 세 아들인 황태자 알렉시오스, 둘째 황자 안드로니코스, 넷째 황자 마누일까지 대동한 5만의 대군이 참가했다. 이번에는 공국 신민들의 민심마저 제국 쪽에 가 있었다. 기독교 신민들은 원래 정교회 신자들이었던데다, 레몽의 지속된 실정으로 라틴 귀족들에게서 마저 황제의 친정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었다. 레몽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저번 원정 때처럼 반 제국 폭동을 일으킬 만한 여론 자체가 조성될 수 없는 상태였다.[55]

그러나 이번에는 신이 레몽의 편이었다. 진격 중인 제국군의 군영에서 장남이자 공동 황제 알렉시오스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고, 그를 운구하기 위해 배편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던 차남 안드로니코스마저 시체에서 감염되었는지 같은 병으로 사망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레몽은 그 참사로 황제가 병력을 돌리길 간절히 바랐지만, 황제는 아랑곳 않고 킬리키아를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황제는 까마귀의 둥지로 불리는 두 봉우리의 산에서 이어지는 광활한 계곡에 주둔지를 세우고 사냥에 나섰다. 홀로 떨어진 멧돼지와 마주친 황제는 투창의 날을 짐승의 가슴팍에 찔렀다. 멧돼지가 앞으로 뛰쳐나오자, 창은 짐승의 배를 관통했으나 창을 쥐고 있던 황제의 손은 이에 감각을 잃고 튕겨나갔다. 그 손은 황제가 어깨에 매고 있던 독화살이 담긴 전통(箭筒)에 부딫혔다. 전통이 엎어지면서 쏟아진 화살 중 하나가 황제의 새끼손가락과 약지사이의 피부를 찔렀다. 맹독이 몸에 퍼져나갔고, 급소를 덮쳐 황제의 몸을 차갑게 마비시켰다. 이후 황제는 사냥을 중지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역사' -
황제는 사냥에 나서서 거대한 멧돼지와 조우했다. 킬리키아와 타우로스 산맥 주변은 멧돼지가 넘쳤다. 어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창을 세워쥔 채로 멧돼지가 뛰쳐나오던 중에 조우했다고 했다. 창날이 멧돼지의 가슴팍에 파고들자, 성난 멧돼지는 더 앞으로 달려들었다. 이로써 황제의 팔은 멧돼지의 난폭한 저항에 옆으로 밀렸으며, 그가 매고 있던 화살이 든 전통을 이상한 방향으로 밀어버렸다. 그의 팔에 화살촉이 긁히자 바로 상처가 났다. -요안니스 킨나모스, '요안니스와 마누일 콤니노스의 업적'-

킬리키아에 주둔하는 동안 황제는 사냥에 나섰다가 독이 발라진 화살촉에 손을 찔려버렸고, 상처에서 생긴 패혈증으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직접 키워온 충성스러운 군대는 사흘을 넘게 철야 기도를 올리며 그의 쾌유를 빌었지만, 이미 기력을 잃은 그는 충성스럽던 병사들을 하나 하나 호명한 후, 막내 아들 마누일을 후계로 지목하고 죽고 말았다. 성지 안티오키아를 수복하겠다는 그의 염원은 그의 막내아들에게 넘어갔고, 그는 진중에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56]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마누일은 즉시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그의 계승이 확실히 인정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장례식을 살펴야 했으며, 제위 계승권이 있는 셋째 형 이사키오스와 삼촌 이사키오스 등의 다른 친족들을 견제해야했다. 마누일은 제국군 총사령관 요안니스 악수흐를 부고가 전해지기 전에 수도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레몽은 그 명줄이 연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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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흐는 선황의 부고가 전해지기 전에 수도에 도착했다. 그는 신속하게 다른 제위 계승권자들의 신병을 확보했으며, 마누일의 지지자들을 포섭해놓았다. 덕분에 1143년 8월 마누일이 수도에 귀환했을 때, 그는 무난히 새로운 총대주교에게 제관을 받아 쓸 수 있었다. 그 후 자신의 제위가 확고해지자 다른 계승권자들을 석방했으며, 200파운드의 금을 교회에 보냈다.[57]

마누일이 요안니스 2세에게 물려받은 제국은 1세기 전에 중흥기를 누린 뒤로 많이 변해 있었다. 노르만족은 남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지우고 있었으며, 룸 술탄국은 여전히 소아시아 중부를 잠식하고 있었다. 발칸에서는 헝가리 왕국아드리아 해세르비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레반트에서는 십자군 국가들이 제국에 도전하고 있었다. 황제의 과업은 실로 벅찼다.

마누일 1세의 치세에서 첫 번째 시험은 1144년에 찾아왔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주 레몽이 킬리키아의 이양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 말, 이웃의 에데사 백국은 이마드 앗딘 장기 1세 아래 다시 일어난 지하드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안티오키아의 동쪽 역시 이 새로운 위협에 위험하게 노출되어 있었고, 레몽은 머나먼 서방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선택지가 없던 레몽은 자존심을 굽히고 동로마 제국에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여정을 떠났다. 황제에게 굴복한 레몽의 충성심은 보장되었으며, 그가 요청하면 지원을 해 줄 것을 약속받았다.

한편 룸 술탄국의 튀르크인들은 서부 아나톨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제국의 국경을 계속해서 침탈하고 있었다. 특히, 아나톨리아 서부 지방인 리디아(Lydia)와 프리기아(Phrygia)에 자리잡은 유목민들이 서진하여 제국의 주요한 요지인 트라키시온 테마까지 진출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황제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에 1146년, 마누일은 룸 술탄국을 향해 친정했다. 야전에서 세번에 걸쳐 룸군을 격파한 동로마군은 기세좋게 이코니온에 이르렀다. 아버지 요안니스 2세가 가꿔놓은 중앙군의 공성 능력은 지중해 세계 최고를 자랑했으나, 외벽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음에도 도시를 최종적으로 점령할 수는 없었다. 이 원정을 시작하기 위한 마누일의 동기 중에는 십자군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서방에 보여주기 위한 소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킨나모스는 이것을 마누일이 새 신부에게 전쟁 기량을 과시하기 위한 욕구로 보았다. 포위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마누일은 프랑스 왕국루이 7세에게 서신을 받았다. 루이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십자군 국가의 구제를 위한 군대를 주도하겠다는 의도를 알리는 것이었다.

반백년 전 제1차 십자군 원정을 겪은 제국은 십자군의 동기가 어떻든 간에 대규모의 십자군이 얼마나 제국에 위협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유럽이 기독교 일파였다지만 가톨릭, 정교회 등 여러 분파가 있듯이 엄연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동방으로 교파가 나뉘어 반목하는 일이 잦았으며, 기독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완충 지대 및 수문장 역할을 하던 것이 당대 로마 제국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만 봐도 중국과 일본이라는 양대산맥 사이에 끼인 위치로 인해 대통령의 성향에 따라 국민들에게서 친중 정권이니 친일 정권이니 하는 비판이 쏟아져 나오듯이, 당시에도 특히 서방 세계에서는 제국의 태도에 따라 협력하거나 반목하는 것이 갈렸다. 이때 십자군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력으로, 로마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들에게 잘 보여야 했다. 이뿐 아니라 상당수 십자군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않고 쌈박질만 할 줄 아는 양아치들이었다.

민중 십자군과 1차 십자군을 거치며 이 양아치로 가득한 깡패 십자군이 지나다니는 곳마다 자신들의 소속을 방패로 멋대로 약탈과 반달리즘을 일삼았으니 십자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로마 제국 입장으로서는 웬 홍위병 떼거지가 찬란한 자기네 국토를 지나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나며 로마 제국은 십자군이라면 이골이 나게 된다.][58] 더 이상 원정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마누일은 술탄과 평화 조약에 이르렀고, 십자군에 대비하기 위해 서둘러 수도로 복귀했다.

이때의 [제2차 십자군 원정]]은 1차때와 달리 루이 7세콘라트 3세와 같은 서방의 왕들도 친정한데다가 무엇보다 오랜 숙적이나 다름없게 된 시칠리아 왕국의 루지에로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도 점령할 겸 프랑스 십자군들을 팔레스타인까지 수송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더욱이 당시 서유럽에선 동로마 제국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소문이 돌고 있었고 동로마의 황제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서유럽인들은 동로마 황제에 대한 온갖 음해를 쏟아냈다. 프랑스 궁정은 반 동로마 세력이 강했고 루이 7세에게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지만, 루이 7세는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걸었던 육로를 선호했고 루지에로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누일 1세는 2차 십자군의 결성이 룸 술탄국과 겨우 맺은 평화 관계를 깨뜨리고 신성 로마 제국 - 교황 - 베네치아를 잇는 대 노르만 동맹을 해칠 것이라 믿어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그리고 십자군이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지 않을 것은 전례를 보아 자명했다. 따라서 마누엘 1세는 투르크족과 정전 협정을 맺어 투르크 쪽 국경을 안정시켰는데 이 때문에 서유럽은 그리스도의 적과 동로마가 거래를 했다고 매우 분노했다.

결국 콘라트 3세의 독일군이 1147년 9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해 이근에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 제국은 독일군의 약탈에 못마땅해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망칠 생각은 없어 접촉을 시도했지만 콘라트 3세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교외를 계속 약탈했다. 견디다 못한 마누엘 1세는 이들을 소아시아로 보내줬다. 콘라트 3세는 프랑스 십자군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러지 않고 1차 십자군의 이동 경로를 따라 안티오키아로 이동했다.[59]

루이 7세의 프랑스 군대는 1147년 10월 4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시칠리아의 루지에로의 제안을 이제라도 받아들여 동로마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지만 루이 7세는 기독교 제국을 공격하는 일을 거부했다. 마누엘 1세는 루이 7세와 그의 왕비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했다. 왕과 왕비 모두 동방 제국의 호화로움에 감탄했지만, 그 호화로움을 오래 누릴 틈도 없이 소아시아로 이동했다.

한편 마누일 1세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이 십자군에 신경을 쓴 사이에 시칠리아 왕국의 루지에로 2세는 코르푸 섬을 점령하고 테베]와 [[코린토스를 약탈했다. 1148년에도 십자군은 물론 제국 북변을 침탈하는 유목민 등 여러 문제 때문에 황제는 섣불리 군사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1148년 후반에 이르러서야 마누일 1세는 콘라트 3세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고, 제국의 동맹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1149년에 코르푸 섬을 탈환할 수 있었다.

십자군 문제가 대강 정리되자 황제의 관심은 서쪽으로 향했다. 남이탈리아는 제국의 고토이자 서유럽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창구였으며, 동시에 제국의 적들에게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제국 서부를 공격하기 좋은 교두보였다. 당장 마누일의 조부인 알렉시오스 1세는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과 여러차례의 전면전을 벌인 바 있었고, 그들의 후손은 이제 왕국을 세워 서유럽의 국가들에게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자며 제국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을 하고 있었다.
마침 1154년 2월에 루지에로 2세가 죽자, 원정전의 대대적인 '밑작업'이 시작되었다. 먼저 서방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삼촌 콘라트 3세와 맺었던 동맹을 상기시켰다.

동시에 외교관과 요원들이 파견되어 현지의 귀족 및 도시와 접촉하여 엄청난 금을 뿌렸고, 충성을 맹세받음은 물론 미래의 협조까지 약속받는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는 교황청에도 접근했다. 갈수록 통제하기 어려운 '야만적인' 시칠리아 왕국과, 막강한 권위를 갖추고 오랜 친교를 맺고 있었던 '문명화된' 제국을 대조시키며 교황과 그 신하들을 구워삶았다. 착수금으로 많은 금이 건네졌으며, 성공했을 때의 더 많은 금 역시 약속되었다.

1155년, 마침내 동로마군의 본격적인 원정이 개시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지원이 뒤를 따랐고, 노르만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제국을 그리워하던 토착 귀족들은 이에 호응했다. 오트빌 왕실을 싫어했던 노르만계 귀족들도 제국의 자금에 흔들려 협조적인 자세였다. 1만 ~ 2만으로 추산되는 동로마군은 옛 남이탈리아 총독부가 있던 바리(Bari)에 상륙했고, 미리 해놓은 밑작업 덕분에 손쉽게 동부 해안 일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155년 말에 이르면 시칠리아 섬을 제외한 남이탈리아 대부분이 동로마 제국 밑으로 들어왔고, 원정은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반격은 이듬해 봄부터 시작됐다. 시칠리아의 1만 2천 보병과 5천의 기사대는 두 배가 넘는 수의 아풀리아의 동로마계 반란군들에 맞서 연승을 거둬 전황을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원정군 지휘부도 내분으로 갈팡질팡하며 실책을 연발했고, 거듭된 실패로 현지 세력도 점차 비협조적으로 변해갔다. 마침내 브린디시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자 동로마군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로 퇴각했고, 루지에로는 반란의 씨앗을 자르기 위해 옛 동로마계 반란군 잔당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동로마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지워졌고,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의 협조적인 움직임도 없었다. 기록된 것만 216만 전의 금화를 소모한 이탈리아 원정은 이렇게 1년 만에 엉망진창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더욱이 동로마의 원정이 실패로 끝난 것을 지켜본 프리드리히 1세는 삼촌과 달리 이탈리아로 세력을 확장할 의향을 갖고 있을 정도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기에 이탈리아의 남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156년 르노 드 샤티용은 날치기 결혼을 통한 자신의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위 획득을 명목상의 상위 군주인 황제가 용인해 주는 대가로 제국령 킬리키아에 있는 도로스 2세의 아르메니아계 반란군을 응징하고 자금을 지원받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막장 공작은 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에게서 뜯은 돈을 군자금 삼아 돌연 동로마 제국이 약속한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쟁을 선언하였으며, 그 명목으로 키프로스를 공격하여 약탈하는 사건을 터뜨렸다.

이에 격분한 마누일은 1158년 가을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레반트로 친정했다. 4만 ~ 5만에 달하는 동로마군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손쉽게 쳐부수고 차례차례 킬리키아의 모든 도시를 다시 제국의 수중으로 가져왔다. 황제는 응징의 의미로 일부러 병사들을 통제하지 않고 풀어놓았으며, 동로마군의 약탈에 의해 안티오키아 주변은 초토화 되었다. 막강한 동로마 해군도 바다를 휩쓸고 안티오키아로 향하는 항로를 모두 차단했다. 궁지에 몰린 르노는 신민들과 다른 십자군 국가들에게 함께 저항하자고 설득했으나, 주민들은 '원주인이 돌아오나보다' 정도의 반응을 보였고 다른 십자군 국가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키프로스 공격도 내부 반대를 억눌러가며 저지른 패악질의 연속이었고,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는 황제의 질녀 테오도라 콤니니와 결혼하는 등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추구하고 있었다. 결국 르노는 저항을 포기하고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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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에서 개선하는 마누일 1세와 황제의 말구종 노릇을 하는 르노 공작

한편 프리드리히 1세가 남하하여 이탈리아의 반항적인 도시들을 공격하자 동방 원정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마누일은 돈을 뿌려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지원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는 북이탈리아의 도시 연합과 이를 후원하는 동로마 제국, 교황청, 시칠리아 왕국에 의해 저지되었다.

1159년 4월, 마누일은 성대하게 안티오키아에 입성했다. 안티오키아는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으며, 교회 역시 정교회 산하로 편입되었다. 또한 황제는 인척이 된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3세와 함께 마상 시합을 여는 등 우호 관계를 다졌으며 십자군 국가들의 종주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두앵 3세로서는 주변의 위협인 장기 왕조를 동맹인 제국의 힘을 빌어 공격하고 싶어했으나, 누르 앗 딘은 재빠르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안했다. 마누일은 이를 수용했고, 보두앵 3세와 예루살렘의 십자군 군주들은 불만스러워했으나 제국이 안전을 보장했으므로 결국 납득했다. 황제는 원정 결과에 만족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1160년 르노가 무슬림들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그 지위가 위태로워진 콩스탕스는 후원자가 필요해졌다. 1년 전 황후 슐츠바흐의 베르타가 죽어 홀아비가 된 마누일은 십자군 지역에 영향력을 더 굳히기 위해 십자군 국가 사이에서 새 신붓감을 물색했는데, 예루살렘 왕국 측에서는 트리폴리 백국의 백작 레몽 3세의 누이이자 보두앵 3세의 사촌인 멜리장드를 밀어주었다. 동로마 황실과 예루살렘 왕실을 더욱 가깝게 엮는 한편, 안티오키아 공국과 동로마 제국이 지나치게 가까워 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측에서는 마리아의 계부인 르노를 도의적으로 도우기 위해서나 콩스탕스의 지위를 위해서나 황제의 후원이 절실했으므로 더 적극적이었고, 이에 황제는 마리아를 황후로 택했다. 그녀가 알렉시오스 2세의 모후가 되는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이다. 이렇게 1150년대 후반 동로마 제국의 동방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나 레반트 지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은 확고해졌다.

이후 마누일 1세의 다음 목표는 헝가리로 돌렸다. 헝가리는 제국의 동방정책에 있어서 걸림돌이었고, 1155년에 황제가 이탈리아에 친정하려 할 때도 방해를 했고, 이후 세르비아인들에 의한 후방 교란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헝가리와의 1155년 평화 조약 이후 십자군 국가들과 룸 술탄국 등의 동방 문제에 집중하던 와중에도 여전히 헝가리가 차지하고 있는 상업이 발달한 달마티아 해안과 비옥한 도나우 분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로 인해 동쪽의 전선이 크게 후퇴하고 그 종심을 차지하고 있는 룸 술탄국과의 전쟁이 1161년 튀르크 측의 굴복으로 끝남에 따라, 제국의 유럽 영토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헝가리 왕국 또한 동로마 제국을 위협적인 상대로 보았다. 서로는 신성 로마 제국을, 동으로는 동로마 제국을 접하던 헝가리는 신성 로마 제국 측과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으나 가톨릭계가 아닌 데다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발칸 서북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던 동로마 제국과는 갈등의 여지가 많았다. 때문에 자연히 신성 로마 제국과 연대하여 견제중인 상태였다.

그러던 1162년, 20여 년을 통치하던 게저 2세가 죽자 마누일은 헝가리의 왕위 계승에 개입했다. 당시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로 게자 2세의 아들인 이슈트반 3세벨러 3세, 그리고 게저 2세의 형제인 라슬로 2세이슈트반 4세가 있었는데 게자 2세의 동생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누일 황제의 모후 이리니는 게자 2세의 증조부인 게자 1세의 동생 라즐로 1세의 딸이었다. 즉, 마누일 1세에게는 아르파드 왕조의 친척이자 왕위 계승권자들의 보호자로서 나름대로 개입 명분이 있었다.

일단 헝가리인들은 동로마 제국에 이권을 주고 조카인 이슈트반 3세의 대립 왕이 된 라슬로 2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채 1년을 못 가서 죽자, 마누일의 질녀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한 이슈트반 4세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거부감을 보였다. 결국 왕위를 유지하지 못한 이슈트반 4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이슈트반 3세에게 1163년에 쫓겨나자 마누일은 대신 이슈트반 3세의 동생 벨러 3세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달마티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이 있던 그에게 황제는 헝가리 왕국을 압박하여 맺은 조약으로 시르미움 지역을 얹어 주었으며 수도로 데려와 교육시켰고, 자신의 맏딸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시켜 데스포티스 칭호까지 부여했다. 아직 마누일의 적장자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의 후계자가 된 셈이었다.

이를 지켜본 헝가리인들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렇잖아도 사이가 안 좋던 나라의, 이미 왕위 계승에 개입했었으며 망명한 이슈트반 4세를 보호하고 있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황제가 1순위 왕위 계승권자를 사위이자 제위 계승권자로 삼고는 그의 영지에 보호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결국 전쟁을 위한 조건들이 하나하나 쌓인 끝에 이슈트반 3세는 벨러 3세의 영지인 달마티아와 이슈트반 4세가 머무르던 시르미움을 향해 헝가리의 바치의 이슈판이었던 데네시를 지휘관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후 헝가리군이 사르미움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은 마누일 또한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를 지휘관으로 하는 비슷한 규모의 제국군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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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7년 7월 8일 사르미움에 마주한 양국의 군대는 헝가리 군대의 선제 공격에서 부터 전투를 시작했다. 초반의 헝가리군은 기병부대를 앞세워 우위를 점했지만 예비대로 바랑기안 가드들이 투입되면서 백병전에서 난전으로 전환됨에 따라 12시간에 달하는 전투 끝에 - 병장기들이 못 쓰게 되어 부무장인 메이스(mace) 따위의 둔기를 꺼낼 지경이었다. - 헝가리군은 붕괴되었고 수천여가 죽거나 다쳤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도나우 강 방면으로 도망치던 헝가리군은 이미 강을 거슬러와있던 동로마 해군에게 공격당해 800여명의 포로와 5명의 지휘관을 생포당했다. 당일 전장에서 한번, 다음날 텅 빈 헝가리군의 진영을 두번째로 약탈한 제국군은 수도로 승첩 장계를 올렸고 얼마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문(Golden Gate)으로 개선하였다.

칸 서북부에 대한 영유권 다툼은 더 이상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다. 본래 영유권을 주장하던 달마티아와 시르미움이 할양되었음은 물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지역까지 여기에 더해졌다. 이슈트반 3세는 크게 입지가 약해졌고 그를 배후에서 지원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헝가리는 동로마에 종속되었고 마누일 1세는 헝가리의 왕위 계승과 대주교좌도 통제하에 두었다. 1169년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나 장녀 마리아와 벨러 3세의 결혼이 취소되었음에도 새로이 획득한 영토는 여전히 동로마의 것이었으며 1172년 이슈트반 3세가 죽자 벨러 3세는 자연스럽게 헝가리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헝가리는 공물을 바치고 황제의 원정에 군대를 보내는 등 종속국 노릇을 하다 마누일이 죽는 1180년 이후에야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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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일 대제 치하 동로마 강역 • 영향권.

한편 동로마 제국의 경제 상황이 점점 좋아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지중해 내에서의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제적 영향력 또한 커져가는 상황이 되자 마누일 1세 또한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베네치아의 특혜를 박탈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1170년 8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베네치아인들이 제노바 조계를 공격해 불태우고 화물을 노략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흥정 싸움으로 시작되었던 실랑이가 황도에 패악을 끼치자 마누엘은 베네치아에게 제노바인들에게 사죄하고 자비로 조계를 수리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은 선제가 자신들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잊였냐는 폐드립식 답변을 하자 마누일은 격분하여 더이상 오만방자한 베네치아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1170년 말에 섬세하게 작전을 준비한 마누엘은 1171년 3월 제국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모든 베네치아 국적의 사람들을 체포하고 배를 나포하면서 회심의 복수를 가한다.

이때 베네치아측이 이 사실을 모르게 하기 위해 모두를 감옥에 집어넣느라 제국 주요 도시의 감방이 1만명이 넘는 베네치아 상인들로 폭발 직전이었다. 그러다가 감방이 넘쳐 채 체포되지 않은 상인들이 몰래 빠져나와 베네치아행 배에 올라 귀국 후 이사실을 알렸고, 이사실을 알게 된 베네치아의 여론은 반동로마 정서가 확산되어 수만의 군중들이 도제에게 복수할 것을 촉구했고, 1171년 9월, 응징 원정을 위한 100척의 군선과 20척의 갤리선이 준비되었다.

베네치아 도제였던 비탈레 미카엘은 120척의 배를 이끌고 로마령 에브리포스 해협을 기습하여 반격했지만 에브리포스를 위시한 주요 항구들이 이미 철저하게 보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구에 대한 공성은 피해만 늘어날 뿐이었다. 도제는 협상을 위해 병력을 다른 제국령 섬인 히오스로 물리고 대사들을 보냈지만, 이미 베네치아를 굴복시키겠다고 단단히 벼른 황제는 바랑기안 친위대장을 보내 이미 로마 함대는 다르다넬스와 디라히온에서 출발해서 남북으로 너넬 포위할거니 알아서 하세요식으로 답했다.

히오스를 공격하던 베네치아군은 히오스 수비대의 맹렬한 반격과 마침 돌기 시작한 전염병으로 또 피해를 입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압박하기 위해 다르다넬스로 향하던 함대는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이끄는 150척의 로마 함대에게 격파당했고 비탈레 도제의 함대는 남쪽을 향해 패주했다. 제국 군선은 패주하는 베네치아 함대를 300km 넘게 추격했다. 그러나 그 퇴각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아드리아해에서 출발해 퇴로를 차단하려했던 디라히온의 제국함대를 베네치아군이 추월해버리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할 지경이었다. 제국군은 펠로폰네소스의 말레아 해협까지 베네치아 함대를 추격하다가 복귀했다. 하지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폭풍까지 불어 베네치아의 석호로 돌아간 배는 몇 척 되지않았다.

베네치아 인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격분했다. 패장으로 돌아온 원수를 때려죽임은 물론이요, 동로마 제국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적대 행위를 지속했다. 동로마 제국은 위신도 세우고 나쁜 선례를 막는 등 성과를 내었으나, 아드리아 해에서 에게 해에 이르는 해역이 1년 넘게 전장이 되어 나름의 피해를 입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를 저지하는 대전략에 금이 가고, 베네치아라는 중요한 교역 상대이자 강력한 해군 동맹이 성가신 적으로 돌변하는 등 씁쓸한 결과를 맛봤다.

또한 동방 정책에서도 패착이 보이기 시작했다.1152년 콘라트 3세가 죽었을 때, 유럽의 정세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2차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 친분을 쌓은 콘라트 3세와 마누일 1세의 협력 관계가 종식되자, 야심 많은 프리드리히 1세가 즉위하여 두 제국 간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1155년 ~ 1156년간 동로마의 이탈리아 원정을 지켜본 프리드리히는 곧 남하할 의향을 드러내었고, 이를 감지한 마누일은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을 멈췄다. 1158년 프리드리히가 남하하여 이탈리아의 반항적인 도시들을 공격하자 동방 원정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마누일은 돈을 뿌려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지원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는 북이탈리아의 도시 연합과 이를 후원하는 동로마 제국, 교황청, 시칠리아 왕국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1160년대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는 동로마 제국이 예루살렘 왕국을 끌어들이고 마지막으로 1167년 헝가리 왕국시르미움 전투를 통해 복속하자 좌절되는 듯 했다.

그러나 1169년 예루살렘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연합한 다미에타 원정이 실패하고 1171년 동로마 - 베네치아 전쟁이 발발하자 서서히 남하할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동로마를 공통의 적으로 두는 나라들 -베네치아, 장기 왕조 등- 과 연대를 꾀한 프리드리히는 1173년 동로마에 충성을 맹세한 안코나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공격하였고 동년 장기 왕조와 협조하여 당시 동로마의 통제를 벗어나는 중이던 룸 술탄국을 장기 왕조와 연대시켜주려 하였다. 비록 두 시도 모두 동로마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1174년 아모리 1세가 사망하고 어린 보두앵 4세가 즉위하여 섭정단이 통치하기 시작한 예루살렘 왕국이 동로마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한편 몬페라토 후작인 굴리엘모 5세를 통해 신성 로마와 비교적 가까워지자 프리드리히 1세는 성지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 남하한다는 명분을 쥐게 되었다.

이를 지켜본 마누일은 불안했다. 재위 초반 2차 십자군을 겪은 그는 제국령을 대규모의 십자군이 지나가는 것은 물론 신성 로마 제국 측이 남하할 명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싫었고 이를 위한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했다. 마침 1161년 제국에 복속 되었던 룸 술탄국이 1170년대 들어 다니슈멘드를 공격하며 세를 불리고 제국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이를 징벌한다는 외교적 이유가 생겼으며, 제국의 고토를 수복한다는 역사적 이유와 아나톨리아 반도라는 긴 종심을 확보하는 군사적 이유 및 기독교 국가의 황제로서 이슬람 국가를 공격한다는 종교적 이유까지 확보한다는 계산까지 생기게 되었다. 애초에 도중에 중지했던 1146년의 이코니온 공성도 군사적인 목적 이외에도 서방에 대한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이 있지 않았던가?

프리드리히가 남하할 조짐을 보이던 1175년, 마누일은 '성전'을 선포하였고 원정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룸 술탄국령인 니오 케사리아(Neo Kaisareia)와 아마시아(Amasya)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 성전을 선포했으니 이에 걸맞게 '성지'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하기 위한 해군도 소집했다. 그리고 황제 본인은 룸 술탄국을 공격하기 위해 중앙군은 물론 봉신국, 동맹국 등의 주변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모조리 소집하기 시작했다. 이 연합 원정군의 목표는 룸 술탄국의 수도 이코니온이었다.

1176년 9월 17일 현 튀르키예 콘야 도 베이셰히르(Beyşehir) 호수와 콘야시 사이의 도로에 있던 미리오케팔론에서 동로마 제국군과 그 밑의 헝가리 왕국군, 안티오키아 공국군, 세르비아 대공국 연합군은 집결지인 미시아의 로파디온(Lopadion)[60] 에서 목적지인 이코니온으로 향하다가 매복 중이었던 롬술탄국의 군대에 의해 패전하고 만다.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롬 술탄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자 지중해 세계는 크게 흔들렸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는 동년 저지되었지만, 교황령은 동로마 측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의 평가도 떨어지게 되었다. 교황령이 그렇게 신성 로마 제국 측에 조금 더 기울자 1177년 프리드리히 1세는 재차 남하해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최후의 교두보인 안코나를 점령해버렸다. 룸 술탄국은 통제를 벗어나 응징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제는 언제 서쪽으로부터 새로운 십자군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서서히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 황제는 여전히 분주해야만 했다.

먼저 룸 술탄국과의 전쟁이 이어졌다. 미리오케팔론 전투 직후 원정군이 회군할 당시, 룸군 일부는 평화 조약에도 불구하고 회군하는 동로마군의 일부를 공격했다. 군을 물리는 것이 더 중요했으므로 황제는 적극적인 반격을 지시하지 않았으나, 대신 조약에 파괴하기로 명시한 도릴레온(Dorylaion)과 수블레온(Sublaion)의 두 전진 요새 중 중요한 도릴레온은 남겨두고 수블레온만을 파괴했다. 술탄은 마침 응징 원정의 구실이 필요했으므로 이를 꼬투리잡아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개시했다.

1177년, 작년엔 1만의 병사조차 모으지 못했던 술탄은 2만 4천의 병력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결과를 보고 술탄에게 달려온 병력이 늘어난 것인지, 정규군을 제외한 약탈을 위한 유목민들까지 포함한 수치인지는 모른다[61]. 어쨌든 룸군은 메안데르강을 따라 서진하여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짓밟았다. 마누일은 섣불리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규모 원정 직후 다시 대군을 일으키기 곤란한 상황이었고, 십자군 혹은 서방의 추가적인 움직임을 주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비교적 소규모의 정예 병력만을 편성한 황제는 이를 요안니스 콤니노스 바타치스에게 붙여 급파했다. 에게 해까지 이른 룸군은 왔던 길을 따라 회군하고 있었는데, 동로마군은 이를 노려 매복으로 급습하여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대승을 거둔다.

이 전투 이후 룸 술탄국의 공세는 현저히 약해졌다. 1178년 파나시온(Panasion)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179년에는 클라우디오폴리(Claudiopolis)를 포위했으나 황제가 소규모의 기병만을 이끌고 친정하자 퇴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년간 공방이 이어졌지만 국력차는 확연했다. 1177년부터 응징을 위해 전쟁을 지속했던 룸 술탄국은 수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하고 거꾸로 압박당하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1179년 겨울, 술탄은 평화 조약에 동의했다. 미리오케팔론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이 없는 여전히 불리한 조약이었다.

한편, '성전'에 맞춰서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하기 위해 아크레로 집결했던 동로마 해군의 150여척의 대함대는 1177년에 소득없이 귀환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연합 원정에 회의적이었다고 전해지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와 인연을 맺는데 성공한 제국은 그를 이용해 프랑스 왕국루이 7세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루이는 2차 십자군 때의 일로 마누일에게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황제가 보낸 외교단을 대동한 플랑드르백의 중매 끝에 9살난 공주 아녜스를 10살난 동로마 제국의 황자 알렉시오스 2세에게 시집 보내는데 동의했다. 27살임에도 아직 미혼이던[62] 장녀 마리아 콤니니를 이용한 외교도 이어졌다.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몬페라토 후작의 5남인 17살난 레니에르와 혼인시킨 것이다. 그의 죽은 큰형과 시빌라 사이의 아이가 예루살렘의 왕이 될 것이고, 후작위를 이을 둘째 형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주요한 인사가 되며, 이후 셋째 형이 몬페라토 후작위를 이어 받을 것을 생각해보자면 황가와 후작가의 격이 맞지 않는 결합이었음에도 매우 의미 있는 혼인이었다.

나이차 많은 이복 남매의 혼례를 치르던 1180년 3월, 미리오케팔론의 실패로 혼돈에 빠져드는 듯 했던 지중해는 다시 안정되었다. 각각 전쟁으로 굴복시킨 헝가리 왕국룸 술탄국은 제국에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교황령과의 관계를 1179년 ~ 1180년간 다시 개선하면서 프랑스 왕국, 몬페라토 후국 등 과의 혼인 동맹이 이어지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탈로 막을 수 없어 보였던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는 재차 좌절되었다. 킬리키아에서는 동로마군이 아르메니아인들을 격파하고 있었으며, 안티오키아 공국은 차기 황제의 외가로서 존재할 터였다. 영향권을 벗어나는 듯 했던 예루살렘 왕국도 안티오키아와 몬페라토와의 동맹이 굳건히 유지된다면 살라딘의 위협 때문에 마누일이 구축한 혼인 관계를 통해 동로마 제국의 대전략 속으로 복귀할 것이었다.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60에 가까운 나이에 지나치게 기력을 소모한 탓일까? 1180년 9월이 되자 황제는 더 이상 제위에서 버틸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1살의 어린 아들 알렉시오스 2세를 남기고 수도원으로 퇴위했다. 한달도 못 지나 황제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2.1.4. 혼돈의 시기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마누일은 어린 아들을 위해 온갖 안전 장치를 마련하기 시작했었다. 밖으로는 그의 장기인 외교술을 발휘하여 주변의 정세를 안정시켰고, 아들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막내 공주프랑스의 아녜스약혼시키는 등 결혼 동맹을 맺었으며, 1177년 룸 술탄국이 침공하자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에서 이를 대파하고 1179년까지 노구를 이끌로 친정을 불사하는 등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여 거꾸로 제국이 압박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안으로는 황후와 대제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대군주(1135?~1182, 요안니스 2세의 차남 안드로니코스의 아들)를 필두로 한 섭정단을 꾸렸으며, 죽어가는 와중에도 힘세고 강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고명 대신으로 붙여주었다.

그러나 섭정들을 세운 것만으로 상황은 충분치 않았다. 비록 마누일에 의해 가려졌지만, 여러 차례 황위를 찬달하려는 안드로니코스 또한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배우처럼 연기와 언변에 능숙했으며, 여러 여성을 유혹할 만큼 매력적이었고, 군대를 비롯한 여러 공직을 지낸 경력과 오랜 기간 쌓은 명성(?) 또한 있었다. 1180년 마누일 사후 제국은 어린 알렉시오스 2세를 내세운 황태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필두로 한 섭정단(알렉시오스 대군주(1135?~1182)[63])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일어난 혼란은 늙은 야심가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

당시 제국에는 마누일의 친서방 정책으로 인해 많은 서방인들이 존재했다. 상인은 물론이요 관료 집단에도 침투해 있어서 마찬가지로 서방인인 황후와 알렉시오스 대군주의 섭정단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여러모로 이질감을 느꼈던 제국민들은 자신들이 '야만인'으로 보던 서방인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상당히 만연해있던 부정부패는 이를 부채질하여 아직 젊은 미망인인 황태후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소문 따위를 낳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누일의 장녀인 마리아 콤니니가 섭정단이 동생 알렉시오스 2세의 제위를 찬탈할 것으로 의심[64]하여 남편 몬페라토의 레니에르와 함께 수도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쿠데타는 '여론을 등에 업었으나 정당성과 실력이 부족한' 황녀파의 숨통을 '정당성과 실력은 갖췄으나 여론의 지지가 부족한' 섭정단이 끊지 못하면서 어중간하게 멈춘 상황이었다. 황녀파는 황족의 명사(?)인 안드로니코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는 '황가에 충성한다'라는 맹세를 한 안드로니코스가 이를 지킬 뿐이라는 명분을 준 셈이 되었다. 요양지를 출발한 안드로니코스는 수도로 향하면서 앞을 막는 사람들과 진압군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며 수도에 입성하였고 이에 맞춰 일어난 폭동은 성내에 거주 중이던 몇 만명 규모의 서방인 대학살로 이어진다.[65] 이러한 살육을 방관한 - 혹은 부추겨놓고 모른 체 한 - 안드로니코스는 황녀파를 손쉽게 제압하였다. 이와 함께 1182년 그의 또 다른 당질인 알렉시오스 대군주를 실명시킨 뒤 숙청하고, 그토록 염원했던 것을 차지한 실권자가 된다.

황태후와 인척이었던 헝가리 왕 벨러 3세가 침공하자 이미 여론의 지지를 잃은 황태후마저 살해해 버린 안드로니코스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알렉시오스 2세를 지키기 위함이라며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얼마 안가 어린 황제를 살해하고 마르마라 해에 시신을 던져버렸다. 평생 꿈꾸던 황제의 자리는 그만의 것이었다(1183년).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유럽 지역은 물론 마누일의 가계(家系)[66]에 충성하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도 정통한 황제를 죽이고 자리에 오른 찬탈자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안드로니코스는 아직 충성하던 군대를 소집하여 진압에 나선다. 로파디온 - 니케아 - 프루사 등 비티니아 지역에 대한 진압은 잔혹한 대학살로 본보기를 보이며 끝을 맺었고 드러난 반대파는 소멸해버렸다. 찬탈자라지만 명색이 황제라는 자가, 끌어안아야 할 자신의 신민을 향해 칼을 휘두른 정신나간 사건이었다.

진압을 마친 안드로니코스는 이번엔 수도로 돌아와 피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아직 남아있던 반대파를 갈아버리던 피바람은 곧 명사(名士)들에게도 들이닥쳤고 황족들도 덮쳤으며 과거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까지 예외는 아니었다. 긍정적이게도(?) 마누일 말기의 부정부패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조금의 혐의나 고발이 있으면 죄다 죽여서 부패의 주역이던 서방인, 황족, 관료들이 처형시켜 온 것이었다.

찬탈과 폭정으로 안밖을 가리지않고 적을 만들어낸 제국이 외침을 받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미 헝가리의 침공이 있었으며 혼란을 틈타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67]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계 세력이 떨어져나갔고 룸 술탄국의 압박 또한 이어졌다. 숙청을 피해 달아난 황족들이 주변 국가로 망명하면서 서방인 학살에 대한 보복과 함께 좋은 명분을 제공해 주었으며 이는 곧 시칠리아 왕국의 침공으로 현실화 되었다.(1185년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침공) 시칠리아군은 상륙 즉시 디라히온을 함락시키고 수비군과 요격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동진하였고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까지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정권에 충성하지 않는 군대와 시민들은 저항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안드로니코스의 실책으로 요격군이 족족 격파당하자 테살로니키가 위치한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부터 수도에 이르는 트라키아 지방까지의 방위 체계는 모조리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안드로니코스는 신나는(...) 학살을 수도에서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안드로니코스의 총신이자 간신이었던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68]의 악의에 의해 살생부에 오른 이사키오스 앙겔로스가 자신을 잡으러온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우발적으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겁에 질린 이사키오스는 성당으로 도주하였고 이를 알게 된 수도 시민들은 그동안 쌓인 불만을 한꺼번에 터트리는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당황한 안드로니코스는 폭동을 진압하고 이사키오스를 잡아들이려 했으나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기아 소피아에 도망가있던 용감한(?) 이사키오스는 즉흥적으로 황제로 추대되어 이사키오스 2세가 되었고 대세를 읽은 군과 근위대는 안드로니코스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결국 시내로 끌려나간 폭군은 오른손이 잘리고 머리카락과 이와 오른쪽 눈이 뽑히게 되었으며 얼굴에 끓는 물이 부어지는 등 온갖 고문과 모욕을 당하다 죽었다.[69]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eath_of_andronic_I.png
2.1.5.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는 봉기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추대로 일단 황제가 되기는 하였으나 수도권인 트라키아 앞까지 시칠리아군이 도달해있었다. 이사키오스 스스로가 군사(軍事)와는 무관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아예 제국군 총사령관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에게 권한 일체를 넘겨버렸고 남은 병력을 지원군으로 편성하여 보내며 요격군을 격려했다. 이 간단한 행동은 무서울 정도의 효과를 발휘하여 전열을 정비한 제국군은 손쉬운 승리에 취해있던 시칠리아군을 트라키아에서 마케도니아로 밀어내버렸다. 당황한 시칠리아군은 강화를 제의했는데, 제국군 측은 오히려 강화 제의를 시칠리아군이 약화된 것으로 보고 총공격을 가했다. 이는 정확히 들어맞아 시칠리아군의 전열이 무너져 궤주하였고 다수가 스트리몬 강에 빠져 죽었으며 소수가 간신히 산맥을 넘어 이피로스 지역으로 도망쳤다. 시칠리아 왕국의 절멸적인 패배였다.

이후 이사키오스는 헝가리벨러 3세의 딸을 자신의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이고 여동생을 몬페라토 공국에 시집보내는 등 안드로니코스 1세가 파괴한 마누일 1세 시절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많은 제국인들은 라틴 섭정단과 안드로니코스 1세시절의 정치에 염증을 내고 있었기에 신황제의 '선정'을 보고 기대에 부풀기 시작했다.

시칠리아군을 격파하고 주변 국가들과 원만한 외교관계를 수립해 입지가 안정적으로 다져지자 마음을 푹 놓았던 것일까? 재물욕이 대단했던 그는 향락을 누리기 위해 매관매직을 무분별하게 시행했다. 어찌나 관직을 팔아댔는지 당대의 기록에는 "관직을 마치 시장채소처럼" 팔아먹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안정을 되찾는 듯했던 제국은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얻어낸 관료들이 본전을 뽑으려고 민중을 수탈하면서 날로 약화되었고 자연히 민심은 점차 황실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한 이사키오스 2세는 서방인들을 총애해 그들에게 갖가지 이권을 부여했고 서방인들은 이러한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동로마인들을 괄시했다. 결국 제국 내에서 동로마인과 서방인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한편, 이사키오스 2세는 1180년 시칠리아 왕국과 전투를 벌이면서 이를 충당하기 위한 비용 마련을 위해 불가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장정들을 징집했으며, 심지어 새로 황후를 맞아들인 뒤 결혼 축의금을 마련하라는 명분으로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에 1185년 불가리아의 귀족 토도르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이사키오스 2세에게 세금 경감과 자치권, 그리고 세금을 내는 데 필요한 수도원 수입을 받기 위해 하이모스 산 근교의 토지를 하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아센 형제는 반란을 꾀했지만 동료들은 쉽사리 그들을 따라 제국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살로니카의 성 디미터르의 이콘이 터르노보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아센 형제는 성 디미터르가 불가리아를 돕기 위해 살로니카를 포기했다고 선언했다.
"신은 불가리아인왈라키아인을 해방하기로 결정하셨고 그들이 오랫동안 지고 있던 멍에를 벗겨내셨다."

그들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아센과 페터르의 난) 이에 가뜩이나 제국의 무거운 세금으로 신음하던 불가리아인들이 대거 가담했고 1186년 봄 무렵엔 불가리아 북부 전역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페터르는 스스로를 불가리아의 차르 페터르 4세라고 자칭했고, 동생 아센 역시 이반 아센 1세라고 자칭했다. 이에 이사키오스 2세는 1186년 여름 친히 대군을 일으켜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초반에는 성공적이었다. 1186년 4월 21일의 일식 동안 동로마군은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공격하였고, 대부분의 반란군은 도나우 강 이북으로 도망쳤다. 또한 이사키오스 2세는 성 디미터르의 이콘을 페터르의 집에서 획득해 반란의 명분 마저 박탈했다.

아직 잔당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정도면 다 이겼다고 여긴 이사키오스 2세는 승리를 자축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도나우 강 이북으로 도망한 아센 형제는 그곳에 살고 있던 쿠만족과 군사 동맹을 맺고, 도나우강을 건너 이전의 영토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모이시아 전역까지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황제는 반란 진압을 군사에 밝은 삼촌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맡겼다. 과연 요안니스는 반란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전을 거두어 황제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는 요안니스 두카스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의심해 경질하고 처남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지휘관에 선임했다. 칸타쿠지노스는 불가리아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으나 매복에 걸려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이사키오스 2세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하고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를 선임했다. 그런데 이 인간마저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 황제의 또다른 처남 콘라드 1세가 브라나스를 격파해 반란을 막아낼 수는 있었지만, 그 사이에 불가리아 반란군은 입지를 확고히 다져놓았다. 이후 제국은 반란군과 맞붙어 몇차례의 작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험한 산지와 쿠만족의 도움을 받은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1187년에 평화협정을 체결해 불가리아 제2제국을 사실상 인정했다.

불가리아 제2제국의 성립으로 제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축소되는 상황에서 또다른 악재가 닥쳤다. 1187년 10월, 살라흐 앗 딘기독교성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에 제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고 1189년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나야 했고 이사키오스 2세에게 협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는 이 붉은 수염의 황제가 나중에 마음을 바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비협조적인 자세로 대했고 급기야 살라흐 앗 딘과 극비리에 군사 협정을 체결하기까지 했다. 이 정보가 새면서 프리드리히 1세의 귀에 들어가자 양측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그래도 예루살렘으로 얼른 갈 생각만 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1세는 이사키오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제국에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 아군이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사키오스는 대체 뭔 생각인지 사절을 인질로 삼아버렸다! 이에 격노한 프리드리히 1세는 즉시 디디모티코를 점령하는 한편 대규모 함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강경한 반응에 겁이 나 당장 인질로 삼았던 사절을 돌려보내고 용서를 구하는 한편, 보스포러스 해협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좀더 떨어진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병력을 이동시킨다면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는 이를 수락하고 1189년 겨울을 동로마 제국 내에서 월동한 뒤 1190년 5월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프리드리히 1세의 10만 대군을 보내 한시름을 던 이사키오스 2세는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1190년, 이사키오스 2세는 불가리아의 요새 터르노보를 포위했다. 그러나 수개월에 걸친 공격에도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쿠만족 지원군이 근접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이에 이사키오스 2세는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페터르 4세의 아우 아센이 트랴브나에 매복해 있다가 이사키오스 2세의 동로마군을 습격했고, 황제는 군대와 자금, 황제관과 황복을 죄다 내팽개치고 홀로 도주했다. 역사 유튜브 'Kings and Generals'의 Rise of Bulgaria - Events leading to the Sack of Constantinople에 이 일련의 과정이 나와 있다. 여하튼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페터르, 아센 형제는 쿠만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잇달아 공격하여 바르나와 포모리를 약탈하고 트리아디사를 파괴했으며, 불가리아의 성인인 이반 릴스키의 유물을 확보했다. 1192년, 이사키오스 2세는 사촌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두카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에서 불가리아 약탈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진압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형제는 1192년 통치하에 있던 영토를 분할하기로 했다. 페터르는 북동부 지역을 받고 프리슬라프에 수도를 세웠고, 아센은 나머지 지역을 관할하여 터르노보에 정부를 꾸렸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페터르를 동생에게 끌려다니는 자로 묘사하고, 아센을 무모하고 완고한 반란자로 지칭했다. 이로 볼 때 페터르는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려 했지만 아센이 전쟁을 지속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193년, 아센은 형 페터르와 함께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기도스와 바실리오스 바티치스를 파견했지만, 형제는 이들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섬멸하고 폴로브디프를 포함한 트라키아의 일부 지역을 공략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트라키아를 되찾기 위해 킵셀라에서 군대를 모집했으나...

이 무렵 이사키오스 2세의 상황은 심각했다. 연이은 전쟁과 지방의 반란에 부딪혀 정권은 실각 직전이었고, 영토 자체도 황폐해지고 있었다. 바로 이전 해였던 1194년에는 트라키아의 수도인 아르카디우폴리스(Arcadioupolis)[70]에서 제국군의 양대 축인 서부군, 동부군 총사령관이 연합한 병력이 불가리아-쿠만 연합군에게 박살나기까지 해 국고는 물론 군사력이 더욱 피폐해졌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는 여론에 밀려 기어코 일전을 하기 위하여 모든 국력을 쥐어짰다. 정부와 국내에 회의적인 의견들이 팽배했으며 그의 형인 알렉시오스는 이때문에 찬탈을 결정하게 되었다. 1195년 4월 8일 아침, 원로원과 지휘관들의 지지를 얻으며 알렉시오스는 이사키오스 2세가 산책을 떠난 사이에 황제를 자칭했다.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 소리를 들은 이사키오스 2세는 수십 킬로미터를 도주하였다가 마크리(Makre)에서 붙잡혀 두 눈을 잃고 수감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며칠 뒤에 찬탈의 소식이 전해졌는데 사람들은 이사키오스 2세에 대하여 혐오를 느끼고 있어 알렉시오스 3세의 등극을 환영하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길 기원했다. 수도의 치안과 정권 장악을 위하여 알렉시오스 3세의 부인인 에우프로시나 두케나 카마테리나가 궁정으로 건너가 알렉시오스를 지지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부 기능을 접수했다. 뒤이어 총대주교와 시민 대표단이 궁정을 방문하여 미래의 새 통치에 대한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에우프로시나는 훌륭하게 이에 대응하면서 시민들을 설득했다. 만족한 시민들은 이후 원로원과 협력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거리를 단장하고 알렉시오스 3세의 입성을 축하하였다. 이로서 정권의 인수인계가 완료되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연대기의 언급에서는 알렉시오스 3세의 등장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그가 전선에서 화려한 활약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1192~3년경, 알렉시오스 3세는 소아시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가짜 알렉시오스 2세의 반란으로 지방군과 지역민들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던 상황에 군단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민심과 병력의 사기를 진정시켰으며, 붕괴상태에 놓여있던 전황을 대치국면으로 전환시키는 데까지 성공했다. 또한 그가 군의 통솔과 작전 능력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가 있어 불가리아 제국 역시 그의 황제 즉위에 긴장감을 가졌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3세는 당시 제국에 임박한 위기가 단순히 전술적 역량으로 헤쳐나갈 대상은 아니라고 보았던 듯하다. 전장의 장수로서 있을 때에는 용장으로서 이름났던 그였지만, 정치가가 된 이후에는 극적으로 노회하고 신중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우선 1195년의 시점에서 급한 것은 민심의 수습과 변경 방어의 유지였다. 동생 이사키오스 2세가 지방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한 까닭에 그리스와 소아시아는 물론 사방에서 유력자들이 민회의 여론을 장악, 지방군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정부의 장악 능력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사서에서는 가장 큰 문제가 된 4, 5개의 세력을 언급하고 있지만, 아드라미티온을 비롯하여 1198년경, 에게 해 연안 각지의 도시들도 공공연히 반란 혹은 이탈을 일삼고 있었다.

1195년에는 두 번째 가짜 알렉시오스 2세가 등장하여 비티니아 일대를 크게 흔들었다. 이번엔 룸 셀주크 술탄국까지 개입하여 전방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비티니아 방어의 요충지인 말라기나(Malagina)의 주민들까지 반란에 가담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직접 비티니아 각지를 순회하며 여론 진작에 나섰으며 말라기나에서는 주민들을 친히 설득하는 작업에도 들어갔다. 1199년에 재차 니케아 등지에도 방문하여 수비대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민심을 달랬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룸 술탄국의 정권 교체로 술탄위에 쫓겨난 케이휘스레브 1세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게 된다.
주민: 당신께서도 그를 본다면 기뻐하실 겁니다, 저의 군주이신 황제 폐하. 그의 길고 노란 빛을 띤 붉은 머리칼은 금가루와도 같이 빛이 납니다. 그 사람은 키가 훤칠하며 안장에 단단히 고정된 것마냥 흔들림 없이 말을 잘 타는 기수였습니다.

알렉시오스: 마누일 대제의 아들인 알렉시오스는 이미 오래 전 안드로니코스의 명령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그렇기에 이제 출현한 저 자는 콤니노스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 설사 그가 살아있다고 해도 이제 와서는 짐이야말로 이의의 여지가 없는 권리를 가진 황제가 아니겠느냐?

주민: 말씀이야 그렇습니다만 폐하, 폐하께서는 그 소년의 정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시고 그 소년의 죽음에 대해서도 확신을 내리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제국을 3세대 동안 상실했고 제위와 국가로부터 불의한 방식으로 격리되었던 소년을 긍휼히 여기는 저희에게 청컨대 노여워 하지 마십시오.

이후에도 계속하여 지방을 순회하며 반역 동조자들을 설득한 끝에 알렉시오스 3세는 가까스로 가짜 알렉시오스 2세의 동조 세력이 불어나는 것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1197년 가짜 알렉시오스 2세가 자객에 의하여 살해된다.

1200년과 1201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비만자 요안니스 콤니노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부패한 관리들로 인한 봉기도 발생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3세는 암군 이사키오스 2세나 폭군 안드로니코스 1세처럼 퇴위되거나 찬탈당하지 않았다. 정치적 능력이 더 좋았던 까닭일수도 있겠지만, 그의 통치 양식이 미친 긍정적인 영향이 더 클 것이다. 그는 이전 두 군주와 달리 무고에 의하여 누군가를 처형하거나 실명시키지 않았다.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는 항의성 질문을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주저한 끝에 다가갔지만, 알렉시오스 3세에게는 누구나 대놓고 큰 소리로 항의를 해도 안전에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상기에서 언급된 호니아티스의 평가는 바로 이러한 점을 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점점 알렉시오스 3세의 입지는 강화되어갔고, 이러한 지지 기반은 4차 십자군으로 수도가 함락된 이후에도 알렉시오스 3세가 각지에서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저항을 이어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다만 이시기의 동로마 제국의 재정 위기는 지방 이탈이 가속화된 시점에서는 이미 필연적인 결과였다. 징세관이 파견되어도 수도 밖으로 나가면 살해되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징세관들은 파견 근무를 질색했다. 육군도 유지하기 버거웠을 것이며, 관료들 봉급조차도 지불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청사 감옥 관리인 같은 경우에는 부하 관리들 몫의 경비를 챙겨주기 위해서 죄수들을 풀어주는 일을 공공연히 했을 정도였으며, 정부에서 공개적으로 관직을 매매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당시 불가리아-쿠만 연합과의 전쟁은 더욱 극성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유목민 군대는 수시로 남하하여 마케도니아트라키아 각지를 약탈하고 살육했다. 1180년대와 1190년대 초에는 동로마군이 무장과 훈련도에서 앞서 있었기에 전면전에서 유리했지만, 점차 이들이 동로마군의 무기고를 약탈하고 무장함에 따라 전황도 불리해졌다. 1194년에 벌어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는 동로마군의 최고위 장성 2명과 주력 군대가 궤멸당하는 대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뒤인 1195년에 더욱 대규모로 자금을 동원하며 대규모 전쟁을 준비했다. 결국 이것이 이사키오스 2세의 몰락을 불러온 요인도 되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후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면 군사 활동을 극도로 자제했다. 해군은 사실상 존폐의 위기에까지 몰렸는데, 이는 주로 에게 해의 관구에서 세금을 중앙으로 끌어와 운영하는 해군 특성상 필연적인 위기였다.[71] 반면 육군은 최소한의 힘을 보존한 끝에, 여러 모로 상황이 개선된 1201~2년경 가장 위험한 반란군 세 집단을 한 번에 궤멸시켜버리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다만 재정적인 궁핍함 자체는 알렉시오스 3세 통치기에는 해결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방을 진압하는 작전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마침 그 시점에 닥쳐온 것이 4차 십자군이었으니...

재정 부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알렉시오스 3세 재위 전반기에는 군사적인 활동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최대한 수세적인 정도로 한정되었다. 그 결과는 소아시아 여러 부분에서의 후퇴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닥쳐온 위기의 강도와 달리 그의 시대에 상실된 영토는 대체로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변경에 국한되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외교적인 방법을 집중 동원하여 우선 닥쳐온 위기를 피하는데 주력하였으며, 군사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입장이 개선되자 비로소 군사활동을 재개하였다.

또한 그는 금군(禁軍)의 역량이 약화되었으며 지방 토호들의 지지가 매우 미약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에 비하여 유래없을 정도로 원로원을 개방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즉 원래는 주로 황족들에게나 분봉되었던 명예작위인 '세바스토스'(Sebastos) 등이 실제 가치에 비해서도 훨씬 저렴하게 여러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이는 대제 마누일 1세 시대 이후 사라졌던 중앙-지방의 조화를 재차 시도한 행동이었다. 지방의 유력자들은 지방군과도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기에 이들을 포섭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불가리아의 숱한 남침에도 불구하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는 사실상 전혀 영토상실이 일어나지 않았다.

1201년, 알렉시오스 3세는 3로로 대군을 일으켰다. 맏사위 등이 지휘관으로 참전한 이 작전에서 1202년까지 동로마군은 마누일 카미치스, 요안니스 스피리도나키스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했다. 특히 이 반란들은 불가리아 제국과의 암묵적인 연계가 염려될 정도로 국경에 인접한 요충지에서 발생한 것들이라 그 진압이 갖는 의의는 결코 작지 않았고, 불가리아 제국이 17년에 이르는 전쟁을 끝내도록 마음을 굳히는 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1201년에는 중부 그리스에서 군사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레온 스구로스를 진압하기 위해 해군 총사령관을 파견했다. 실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미 보이오티아의 티베를 함락한 상태였던 스구로스의 군대는 십자군이 침입하여 금군이 개입할 우려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추가적인 활동을 멈추었다. 이들은 1204년 초에 아티카 지방의 수도 아티나를 공격하게 되지만,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형이자 아티나의 총대주교인 미하일 호니아티스를 중심으로 결집한 민병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기본적으로 대제 마누일 1세의 시기의 기조로 돌아가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가 파괴해버린 국제 공조 체제는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하여 살라흐 앗 딘이나 남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왕국 등 주요 강국과의 공개적 동맹을 통한 안전보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는 한창 패권국으로 떠오르던 신성 로마 제국을 자극하는 조치였고, 다른 잠재적 동맹자를 제외해버렸으며, 살라흐 앗 딘과의 동맹은 서유럽 가톨릭으로부터 적개감을 사는 악수가 되었다. 1195년에 시칠리아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무너지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상속받게 되자, 이것이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반도 침입의 계기가 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1185년에 시칠리아의 대군이 동로마군의 반격에 무너졌던 사례를 생각하여 먼저 외교적으로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다. 그 사절단은 정권이 교체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런 정도의 부담을 쉽게 지나쳐버릴 수 없었다. 결국 협의 끝에 1196년, 막대한 공물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패권을 인정하는데 합의하였다. 그나마 하인리히 6세가 1197년 사망하면서 저 공물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게 동로마에겐 천만다행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후 다방면의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통상 마찰이 계속 있어왔던 베네치아와는 1198년에 통상 겸 동맹 조약을 체결하였고, 베네치아를 다시 견제하기 위하여 피사, 제노바 등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198년에는 역시 교황청과도 교회일치 문제나 십자군 문제를 두고 외교를 재개해 언제든 부활할 여지가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맞선 잠재적 동맹자로까지 지위를 강화했다.

이외에도 룸 술탄국 왕조에서 벌어진 내분으로 망명한 술탄 케이휘스레브 1세를 잘 대접하여 추후 술탄이 정계로 복귀한 이후에는 유력한 동맹자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이어졌던 룸 술탄국과의 전선도 안정 국면에 접어들고, 더 이상의 영토 상실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1200년 여름에 수도를 방문한 키예프 공국의 사절단도 융숭히 대접하는 가운데,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군주 로만 므스티슬라비치와도 관계를 수립했다. 이후 로만은 1200~1년에 걸쳐 쿠만족의 본거지를 대대적으로 공략했다. 불가리아 제2제국의 주 병력원이었던 쿠만이 전쟁에서 사실상 이탈하자 한결 마음 놓은 제국 정부는 1201년에 바로 군대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반란을 진압한다. 이런 정세 변화를 맞닥뜨린 불가리아는 결국 1202년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의 상황이 안정되었음을 인식하고 결국 오랫동안 거부해왔던 평화 조약을 먼저 제의하여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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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3세 시기 동로마 제국의 강역.

한편 1202년 본래 아이유브 왕조의 이집트를 원정지로 하려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은 대규모 함대에 의한 해로로 이동하려 했지만 정작 약속한 날짜인 1202년 6월이 되어도 집결한 병력이 부족하자 문제가 되었다. 원정군 전체의 규모가 줄어든 것은 물론, 수송비를 십자군 영주들 각각이 내는 돈으로 충당할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10월이 되기까지 십자군 지휘부는 집결을 기다렸는데, 그럼에도 당초 예정의 절반에 못 미치는 1만 2천여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협상 당시 허세를 부려서인지 실제로 영주들의 사정이 악화 되었던지 간에 전체적으로 비협조적인 분위기로 인해 병력이 모자라게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 운송사업에 거의 국운을 걸다시피 준비를 했다. 1201년 4월에 십자군과 채결한 협정에 의하면 베네치아가 준비해야 하는 선단은 화물 수송선(군마 4,500필, 종자 9천명) 및 범선(기사 4,500명 및 보병 2만명) 외에 추가로 베네치아 정부의 비용으로 운영하는 5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되었다. 선단의 구체적인 규모는 정확한 사료가 없어 조금씩 추산이 달라지나 최소 200척에서 480척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냐면 이후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추진한 7, 8차 십자군 당시 준비된 수송선단이 각각 36척, 39척 정도이다.

베네치아가 준비한 선단에는 선원 1만 4천 명이 필요한데 이 수치는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성인 남성의 반에 해당되었다. 선단을 꾸리는 작업은 베네치아의 재정 및 상업 활동 전체를 1년 이상 동결시켜야 하는 엄청난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공화국의 지도자인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선박의 상업활동을 18개월 간 중단시키는 한편 해외에 나가있는 선박을 귀환시켰다.[72] 여기에 십자군과 선원을 먹여살릴 식량 조달 등 부수적인 간접 비용까지 고려했을 때 사업이 나가리 된다면 베네치아의 국운이 휘청거릴 판이었다. 하지만 십자군 병력 집결이 당초 계획보다 저조하면서 출항이 기약도 없이 지지부진해지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손해는 눈덩이 마냥 불어났고 지도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가장 초창기 프랑크군이 운송비 대금으로 요구받은 금액은 84000 쾰른 마르크였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실 수입의 2배에 해당되는[73] 엄청난 액수였다. 하지만 병력 집결이 지지부진하여 십자군은 자산을 파는 등 돈을 쥐어짰으나 5만 1천여 마르크밖에 모으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십자군 측은 예루살렘은커녕 출항 한번 해보기도 전에 파산으로 해산될 위기에 처했다.

베네치아와 십자군 둘 다 궁지에 몰린 이런 기막힌 상황 속에서 베네치아 측은 8월경 십자군에 타개책을 제안하게 된다.
바로 다른 기독교 국가들을 약탈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당시 헝가리 보호령이자 달마티아 해안의 항구도시 자라[74]를 공격하여 부족한 돈을 충당하고, 또 부족한 돈을 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십자군 측은 놀고 있는 대병력을 이용하여 돈을 벌 수 있었으며 베네치아 측은 헝가리 왕의 보호를 받는 데다가 지상 전력이 부족하여 공략하기 곤란한, 요충지의 경쟁 도시를 이참에 제거해서 좋았다.

물론 '십자군'이라는 공개적인 간판을 내세운 주제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같은 기독교계 도시를 약탈한다는 것이 상식을 벗어난 개막장 행위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이 떠나기도 하였으나 결국 9월이 되어 베네치아 측의 제안을 받아들인 십자군은 집결을 기다린 끝에 10월 8일 출발하여 11월 10일, 자라를 포위해 13일만에 함락시켰다.

문제는 이것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분노를 사게 된 결과로 이어져 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파문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십자군은 해체되지 않았다. 교황의 서신은 십자군 지도부에 의해 은폐되었고 대신 십자군에 참전한 일선 성직자들이 사면령을 내렸다. 이는 명백한 월권 행위였지만 이미 십자군 지도부는 돈의 맛을 본 상황이었다. 이제부터는 교황의 통제력이 전혀 듣질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때 자라에서 월동 중인 십자군 지휘부와 동로마 제국의 폐위 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이자 현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황자가 접선했다. 당시 로마 왕 -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 이던 슈바벤의 필립[75]의 협조 속에 십자군 인사들과 만난 알렉시오스는 아버지와 자신의 제위를 되찾아 달라고 요청했으며 대가로 엄청난 조건을 내걸었다. 바로...
1. 십자군이 지고 있던 빚 탕감과 이집트 원정을 위한 비용으로 20만 마르크를 지불한다.
2. 이후 성지 수호를 위해 병사 1만과 기사 500여 명을 파견한다.
3. 교황수위권을 인정하고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의 산하로 통합시킨다.

제위를 되찾아 달라는 요청은 곧 중세 유럽 최대의 도시이자 난공불락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이라는 엄청난 요구였지만 대가 역시 엄청났다. 당시 동로마 제국과 공조하던 교황 측은 이미 이 황당한 제안[76]을 거부한 상황이었으나, 물자도 부족했고 병력 부족으로 이집트 원정을 고민하고 있던 십자군 측은 사령관 몬페라토 변경백의 개인적인 사정[77][78]까지 더해져 승낙하고 만다.

베네치아 측 역시 이를 환영했다. 일단 성공하면 손해를 더 보지 않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간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동로마 제국이 허약해진[79] 틈에 친 베네치아적인 인물을 제위에 올리고 특혜를 얻어 경쟁자들과의 차이를 벌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해 관계가 얽힌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연합군은 1203년 4월 자라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황자는 디라히온코르푸에서 지지자들과 연합군의 도움으로 알렉시오스 4세로 추대되었다.

이때 4차 십자군이 닥쳐온 당시에 동로마군의 대응이 미흡하거나 부족하였다고 논해지지만, 알렉시오스 3세가 망명을 떠나기 이전 시점과 이후는 구분해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1202년 11월 26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알렉시오스 4세를 지원하는 군대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1203년 5월에 디라히온에서 십자군이 알렉시오스 4세를 노출시킨 다음에야 관련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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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출정일이었던 1202년 6월 24일 로부터 정확히 1년이 지난 1203년 6월 24일, 십자군 - 베네치아 연합군의 대함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앞 마르마라 해에 도달했다. 규모도 규모거니와 그 목적 역시 저지되어야 할 것이었지만, 이미 해군이 붕괴해서 베네치아의 해군력을 지원받던 동로마 측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 측의 입장에서는 금인칙서를 통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십자군의 방아쇠를 당긴 교황청 측에서 알렉시오스 황자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 언질을 해주었기에 십자군의 침공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웠다. 한달 전 즈음인 1203년 5월에서야 알렉시오스 4세라며 디라히온에서 떠들어 댔는데, 디라히온에서 수도까지는 직선으로도 800km 가까이 거리가 있었다. 당시의 통신 기술을 생각해보면 동로마 정부 입장에서는 날벼락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이지만 디라히온에서 알렉시오스 4세가 모습을 들어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까지 알렉시오스 3세의 정부는 일단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로 혼란에 빠지지 않고 군대를 수습하는데 노력했다.

처음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반대편에 있는 칼케돈에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방비가 갖춰져 있어서 결국 교두보 확보에 실패했고, 소규모지만 요격군이 나타나 배후를 위협하자 이를 격퇴시킨 연합군은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일면을 차지하는 금각만 너머의 갈라타를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갈라타 공략을 위해서는 금각만을 막고 있는 쇠사슬을 끊는 것이 우선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쇠사슬을 지키기 위해 이를 관리하는 망루를 수비했는데 결국 전투 끝에 물러났고, 갈라타 지구가 점령되면서 금각만과 도시 북쪽 6km에 달하는 지역이 위험에 노출되어버렸다. 그리고 금각만 방향에서 연합군 육해군이 공격하는 공성전이 개시 되었다.

7월 11일에 1차 공격이 있었으나 격퇴되었고 7월 17일 2차로 총공격이 감행되었다. 연합군은 두 갈래로 갈라져, 십자군은 육로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로 했고 베네치아군은 금각만 방면에서 해로로 성벽을 개시하였다. 엔리코 단돌로의 격려로 베네치아군은 25개의 망루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고, 이에 알렉시오스 3세는 바랑인 친위대를 투입시켜 이를 격퇴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베네치아군은 불을 질렀고, 이로 인해 2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황제는 '도시들의 여왕'의 참담한 불운을 목도하고 인민의 근심을 지각하게 되어서야 무기를 들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적군의 기세가 더욱 등등하며 더럽혀진 도시를 위한 어떤 도움도 오지 않는다는 데 대해 분노하고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이제 군대의 심약함과 용기 및 과단의 결핍이 도시를 뒤덮어버림으로서 이 도시는 운명의 폭력 가운데에서 안쓰러운 시신이 되었다. -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초기 연대기 판본

황제 자신은 마침내 17개 사단을 이끌고 육로에서 십자군을 치러 갔고, 십자군 역시 소식을 전해듣고 동로마군과 대치하였다. 빌라르두앵도 증언하듯이 동로마의 대군이 훨씬 대군이었기에 이대로 가면 십자군이 격멸당할 수도 있었고, 이에 따라 베네치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내에서 빠져나와 육로로 십자군에 합류한다. 알렉시오스 3세는 금세 십자군이 불어나는 것을 보고 후퇴를 명했고, 이번에도 이렇다 할 육상 전투 없이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황제가 더 많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이 때 결판을 짓지 않은 것은 미스테리한데, 서방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경계해서였는지, 추후에 있을 외교적 파장을 막기 위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피곤하고 지쳤기 때문에 갑옷을 벗었다. 식량마저 부족했기에 먹고 마시는 것도 조금밖에 할 수 없었다. -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

보급도 떨어져가는 십자군의 실정을 생각해본다면, 알렉시오스 3세 입장에서는 굳이 십자군과 결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그냥 굳히기만 들어가도 십자군은 알아서 퇴각할 공산이 더 높았다. 그러나 성 안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가 갈라타를 넘겨줄 때부터 지리멸렬한 싸움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한 끝에 베네치아군이 처음으로 성내에 진입하는 참사까지 벌어졌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성 안의 화재로 엄청난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것에서 황제는 이미 결정적으로 지지를 잃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대군을 이끌고 출격했는데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알렉시오스 3세는 쿠데타의 기운을 감지하였다. 알렉시오스 4세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코웃음을 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었지만, 이제 불필요한 공방전으로 도시가 더 피해를 입느니 십자군의 요구사항대로 알렉시오스 4세가 '정당한 황제'로서 다시 등극하는 편이 더 나은 것으로 여겨졌다. 주위에 불안한 시선들이 오가고 있었고, 미하일 5세안드로니코스 1세의 전철을 밟을 것에 대해 공포에 빠진 알렉시오스 3세는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바로 그 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알렉시오스 황제는 수송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재물을 취하고 자신의 사람들 중 갈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람들을 추려내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주함으로서 도시를 버렸다. -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들어가 알렉시오스를 찾았지만 (십자군은) 그를 찾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5,000명의 사람과 함께 왈라키아의 왕인 이반에게로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제국 초대 황제 보두앵 1세(1204~1205)
알렉시오스 황제는 이러한 협상 및 시내의 신민들이 절망으로 인해 혼란으로 기울어지고 반란의 기운으로 전염이 되는 것으로 인해 위축되었다. 그를 목도한 사람에 의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윗의 구원은 도주에 있었다." 그리고는 국고로부터 상당 액수의 재화를 취하고 아내를 데리고 도망했다. - 요르요스 아크로폴리티스

1203년 7월 18일 오전 2시에 알렉시오스 3세는 수도를 빠져나왔다. 10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과 그외 챙길만한 보석들, 그리고 장녀 이리니 앙겔리나를 대동한 채 말이다.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탈출에 환관 콘스탄티노스 필록시니티스를 위시한 궁내 사람들조차 황제가 사라진 것을 몰랐으며, 처음엔 에우프로시나 황후가 음모를 꾸몄다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이내 상황 파악이 완료되자, 그들은 감옥에 있는 이사키오스 2세를 복위시키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알렉시오스 3세가 수도에 내버려둔 황후는 그대로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해 포로가 되었고, 이윽고 십자군이 알렉시오스 4세와 함께 의기양양하게 수도로 입성했다.

이렇게 하여 과거 황제였던 이사키오스 2세와 연합군이 내세운 알렉시오스 4세 부자가 공동 황제로 추대되었다. 어차피 부자가 공동으로 황제에 오르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어서 표면적으로는 이상할 게 없었고, 동로마 측은 일단 공격받을 여지가 없어서 좋았으며, 연합군 측은 맹인이 된 이사키오스 2세와는 달리 자신들이 추대한 알렉시오스 4세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었으므로 좋았다.[80] 그렇게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아들덕에 제위를 되찾은 이사키오스 2세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멍청한 아들이 다른 사람 손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감당치 못할 빚을 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십자군 - 베네치아 연합군이 아들의 요구를 들어 자신을 복위시켰으니 대가를 치러야 했는데, 어느 것 하나 들어주기 어려웠다. 아무리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십자군이 옹립한 황제와 그 정부는 고작 수도와 인근 지역만을 장악하고 있는 괴뢰 정부에 불과했으며 적법한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가 수도 밖에서 반격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군사력 파견은 불가능했고 교회 통합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해 보였고 연합군 측도 가장 원했던 조건인 은 20만 마르크[81]를 지불하려고 창고를 열어 재정 상태를 확인해 보니 아뿔싸, 제위를 찬탈했던 형 알렉시오스 3세가 이미 국고 안에 있는 돈을 들고 튄 이후였다.

동지중해를 호령했던 마누일 1세 시절 같았으면 무제한으로 비유될 자금력과 마르지 않는 재정이 실재했겠으나, 이사키오스 스스로가 말아먹고 형이 비축금을 가지고 떠난 뒤였다. 자신도 빚쟁이였던 연합군 측은 체납에 짜증나서 닥달하였고, 이에 못 이긴 황제는 결국 세금을 추가로 물리고 황실의 보물과 성물을 팔고 교회의 재산을 징발하여 돈을 마련하려 하였다. 돈을 긁어모으자 당연히 시민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교회는 재산이 침해되는 와중에 교회 통합에 대한 밀약까지 듣게 되어 분개했다. 게다가 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 의해서 황제가 된 만큼 십자군이 물러나면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십자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그들에게 돈을 추가로 약속하며 자신의 호위까지 맡겼고, 그를 통해 베네치아인이 정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니 귀족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였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했다. 박박 긁어모았음에도 절반인 10만 마르크 정도밖에 못 마련한 것이다. 황제 부자는 일단 모은 10만 마르크를 라틴인들에게 지불하고, 알렉시오스 4세는 상당한 자금과 병력을 가지고 수도 밖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알렉시오스 3세를 잡기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동안 폭동이 터져서 수도에 거주하던 라틴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연합군 측은 보복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무슬림 지구를 목표로 공격했지만, 그 과정에서 도시에 거주하던 수많은 무슬림뿐만 아니라 정교회인들까지 연합군에게 학살되거나 약탈당했다. 결국 분노한 시민들이 종교를 가리지 않고 연합하여 민병대로 반격에 나서자 열세에 몰린 연합군은 도망치기 위해 불을 질렀고, 이것이 대화재로 번져 수일간 도시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했고, 시민과 연합군 측의 갈등은 극심해져갔다.

알렉시오스 4세가 겨울에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도시는 대화재와 폭동, 연합군의 약탈로 황폐해져 있었고 황제에 대한 불만은 살의에 이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던 알렉시오스 4세는 사태를 해결도 못 하고 공포에 질려 십자군의 호위하에 황궁에만 틀어박혀 그들에게 줄 돈만 모으는 지경이 되었고, 그런 황제 부자에게 크게 실망한 귀족과 시민들은 대립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열어버렸다.

그 와중에 프로토스파타리오스(Protospatarios)인 황제 신변 책임자 알렉시오스 두카스[82]가 시민들과 십자군, 황제 사이를 중계하다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부자를 구금하는 일이 일어났다. 쿠데타 와중 이사키오스 2세가 미심쩍은 죽음을 맞았고(1204년 1월 27일 ~ 28일), 대립 황제도 곧 제거되었다.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2월 초에 스스로를 알렉시오스 5세로 선포하였다.

자신들이 옹립한 황제 부자를 실각시켰기 때문에 연합군(십자군)과 신황제(알렉시오스 5세)의 사이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알렉시오스 5세는 곧 군대를 모집하고 성벽을 수리하는 등 전투 준비를 서둘렀고, 이렇게 모은 군대로 연합군을 공격했다. 사태의 급진전에 연합군은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대응하여 동로마 군을 역관광시켜 버린다. 알렉시오스 5세는 1204년 2월 8일, 엔리코 단돌로 원수를 만나 협상하였으나 곧 결렬되었고,[83] 같은 날 알렉시오스 4세는 교살되었다. 이에 분기탱천한 연합군 측은 재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짧은 휴식은 그렇게 끝났다.
이븐 알 아시르(Ibn al Athir)가 쓴다. 로마(Rum)의 왕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고, 프랑크인(Franj)들은 그들의 젊은 후보자를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이름 뿐인 권력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결정은 프랑크인들이 내렸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무거운 공물을 부과하였으며 그 지불의 불가능함이 드러나자 모든 금과 보석들, 심지어 십자가와 메시아상의 일부를 이루던 것까지 약탈해 갔다.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러자 들고 일어난 로마인들은 젊은 군주를 죽이고 프랑크인들을 도시에서 내쫓았으며 성문에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아민 말루프(Amin Maalouf), 존 로스차일드(Jon Rothschild)(역), 『The Crusades Through Arab Eyes』, (New York, Schocken Books, 1984년),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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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겨울을 세는 와중에도 회의감를 느끼고 탈주자가 이어졌던 십자군 측이었으나,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자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측의 대표인 엔리코 단돌로가 연합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전리품 분배와 사후 계획 따위를 논하게 되었다. 십자군 측은 돈도 못 받고 성지 구경도 못하게 된 판이었으나, 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전리품을 얻고 빚도 갚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다.

베네치아 측의 생각도 이때 굳어지게 되었다. 당초에는 계산 착오로 인한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탈선을 저질렀지만, 폭주하는 군사력을 주도하게 된 상황에서 본래 동로마에 대한 고민이 결합되자 이후의 계획을 생각하게 되었다. 주요한 도시와 섬, 항구 등을 가지게 되면 각종 상품을 독점적으로 취급할 수 있었고, 항로도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장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면, 경쟁 상대를 동로마에서 쫓아내고 흑해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4월 8일, 9일의 이틀동안 서전을 벌인 연합군은 생각보다 도시의 방어 태세가 단단한 것을 보고 당황했다. 연합측은 10일, 11일간 갈라타로 물러나 다시 본격적인 공성을 준비했다. 그 즈음 교황이 보낸 특사가 도착하여 기독교인의 도시를 공격하지 말라고, 자라 공격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연합 측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반로마 감정과 전투에 흥분해있던 연합 측은 전부 계약 불이행으로 동로마 측이 초래한 것이라며 특사를 쫓아버리고 최후의 공세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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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직접 지휘하고, 시민들도 같이 저항하고 다시 바랑인 친위대가 투입되는 등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으나, 한번 함락된 성벽은 1차 공격 때 만큼의 역할을 못 했다. 4월 12일이 되자 연합군은 성벽을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고, 알렉시오스 5세는 저항 의지를 상실하여 다른 인사들과 함께 황도를 빠져나갔다. 그 와중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가 황제로 선포되었으나 바랑인 친위대를 설득하는데 실패하였고, 곧 연합군을 피해 탈출하였다. 그렇게 9백년 가량 이어져 오던 동로마의 찬란한 유산을 담은 성지이자 제 2의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사상 최초로 기독교인의 손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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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창조된 이래, 그 어떤 도시에서도 이렇게나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Geoffroi de Villehardouin),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De la Conquête de Constantinople) 中

운명의 4월 13일, 성내를 살펴본 연합군은 방어군의 저항 의지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동로마 측에서는 십자군 영주를 새 황제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연합군에는 약탈에 굶주리고 악에 받힌, 동로마인들을 증오하는 2만여의 군대가 관례대로 3일간의 약탈을 바라고 있었다. 지휘부 역시 22년 전 제위 찬탈 과정에서 무관한 서유럽인 수만 명을 학살한 동로마인들에 대한 보복심에다, 자신들을 엿먹인 동로마를 증오하며 약탈을 강하게 욕망하고 있었으므로 약탈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그야말로 대약탈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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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고 손에 닿는 모든 것들에 대해 파괴, 약탈, 방화가 벌어졌다. 조금이라도 값나가 보이는 물건은 약탈되었고 교황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소 역시 오물이 갈겨지고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녀노소, 귀족, 성직자들을 가리지 않고 폭행, 살해, 강간, 납치 등이 가해졌다. 소녀, 처녀, 유부녀는 물론 고귀한 귀족 여성들에 심지어 수녀들까지 끌려나와 능욕당하였다. 고대 로마 때부터 전해 내려온 예술품, 유물, 성물도 마찬가지였으며 황제들의 무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판토크라토 수도원의 묘역에 있는 황제의 관들이 끄집어 내져 부장품들이 약탈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골조차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햅도몬 궁전에 안장되어 있던 바실리오스 2세의 묘역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길거리에 질질 끌려다녀지다가 내버려졌다.[84] 천여 년을 이어 오던 성당의 많은 성화들도 이교도가 그렸다고 하여 파괴되고 긁혀져 손상됐다. 그리고 새롭게 가톨릭 화가가 그린 성화로 채워졌다가 나중에서야 탈환한 동로마인들이 이를 다시 지우고 그려야 했다.
모술의 역사가가 쓴다. 모든 로마인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약탈당했으며, 프랑크인들에게 쫓긴 몇몇 유지들은 그들이 '소피아'라고 부르는 큰 교회로 가서 피난처를 찾으러 시도했다. 십자가성경을 품고 나간 사제수도자들은 공격자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프랑크인들은 이러한 간청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프랑크인들은 그들 모두를 죽였고 교회를 약탈했다.
아민 말루프(Amin Maalouf), 존 로스차일드(Jon Rothschild)(역), 『The Crusades Through Arab Eyes』, (New York, Schocken Books, 1984년), p.221-222.)

3일간의 지옥이 구현된 끝에, 연합군은 은 90만 마르크[85]에 달하는 전리품을 약탈해 본전을 넘어선 큰 수익을 벌었다. 남은 것은 수십 만의 시신과 난민, 폐허만 남은 도시였다. 가장 부유하고 유서 깊은 황제의 도시는 그렇게 몰락했다.

한편 이때 십자군 기사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거리에서 글쓰는 흉내를 내면서 동로마인들을 조롱했는데, 동로마인들이 글쓰는 데에만 골몰하여 나약하다고 비웃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왜냐하면 당시 서유럽에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성직자 같은 극히 소수의 지식인 계층들 뿐이었고, 그 외 나머지 대부분은 글을 쓰거나 읽을 줄을 몰랐다. 당대의 기사들은 문맹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며 '글 쓰고 읽는 것은 나약한 이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86]

한편 처자식과 5천의 정예병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도주한 알렉시오스 3세는 갖고온 막대한 자금력과 함께 불가리아, 그리고 갈리치아 공국 등에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직접 방문하는 등 이러한 외교적 결실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거한 4차 십자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8월 이후 십자군이 알렉시오스 4세와 함께 북진하자 조금 맞서던 그는 불가리아와 갈리치아로 원병을 청하기 위하여 잠시 전장을 벗어났다. 불가리아에서는 특히 서부 지역의 통제권을 넘겨주는 대신 원병을 요청하는 협상도 진행되었다. 하지만 불가리아가 미온적인 가운데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의 사악한 음모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1204년 4월) 그는 다시 트라키아로 남하하였다. 이때 그는 불가리아에 엘리트 계층들을 상당수 남겨두었는데, 이들은 차후 불가리아-십자군 전쟁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된다.

모시노폴리스에서 알렉시오스 5세를 만난 알렉시오스 3세는 치세 동안 한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실명의 형벌을 그에게 내렸다. 알렉시오스 5세는 알렉시오스 3세 시절에 이미 공주에게 작업을 건다거나 찬탈 음모로 수감되기도 했던 문제적 인물로서 알렉시오스 4세를 부추겨 십자군과의 관계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파국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알렉시오스 3세가 비록 십자군에 대해 강경파긴 했지만, 최소한 협상을 통해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알렉시오스 3세도 알렉시오스 5세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십자군의 추격을 피하며 테살로니키, 테살리아와 테르모필레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코린토스까지 이동하면서 최대한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반란자인 레온 스구로스를 회유하여 십자군에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8월에 이르러 코린토스를 탈출하다가 체포됨으로서 그의 저항은 끝이 났다.

2.2. 십자군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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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년의 강역[87]
2.2.1. 라틴 제국
동로마 제국을 무너트리고 성립된 라틴 제국은 차지한 영토의 규모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일대를 비롯해 현재 그리스의 대부분과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북부 일부만을 통제했다. 더구나 라틴 제국이 들어선 동로마 제국의 내부는 테마 제도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로 운영되었지만 초대 황제인 보두앵 1세를 비롯한 라틴인들로 구성된 십자군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정복지에 봉건제를 강요했다. 비록 동로마의 관료제를 일부 수용하기는 했으나 그 본질은 봉건제임은 부정할 수 없었으며, 중앙집권적 관료제 하에서 운영되던 경제마저 파산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현지 실정에 그나마 상대적으로 밝았던 동로마 제국의 귀족 계층을 외면하고 정교회의 성직자들에게는 가톨릭 전례를 강제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의 불만은 높아져 갔다.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의 황족들이 각지에 세운 망명 정권에 참여하거나 제2차 불가리아 제국과 협력하는 등 라틴 제국에 저항하고 성직자들은 협력을 거부했다.

제국의 영토는 십자군 기사들에게 봉토로 분할되었기 때문에 존립 기반이 약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관심도 에게해의 군도와 항구의 유지와 제해권만으로 제국의 내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라틴 제국은 2차 불가리아 제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불가리아의 차르 칼로얀은 트라키아의 옛 동로마 영토를 공략했다. 그는 동로마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 라틴인들에 대한 폭동을 일으키도록 설득했다. 1205년 초 아드리아노폴리스와 인근 마을의 그리스인들이 라틴인에 맞서 봉기했다. 그는 곧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보두앵 1세는 한발 앞서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칼로얀은 14,000명 이상의 병력을 소집하여 즉시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격하였고, 1205년 3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군을 섬멸하고 보두앵 1세를 생포했고, 기록이 저마다 다르긴 했지만 보두앵 1세는 구금된 상태에서 죽었다.

라틴 제국은 1년도 채 안 돼서 멸망의 위기에 임박했으나 불가리아의 약탈이 너무 심하여 동로마인들은 라틴 제국에 의지하게 되었고, 불가리아의 동맹인 쿠만족의 이탈과 차르 칼로얀의 의문사로 라틴 제국은 간신히 한숨 돌리게 되었다. 보두앵이 죽고 라틴 제국의 제위는 그의 동생인 앙리가 계승하게 되었다.

앙리는 현명한 군주여서 그의 치세에 강력한 라이벌인 불가리아의 차르 칼로얀과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1세와의 세력균형을 교묘히 이용했고, 비교적 성공적으로 라틴 제국을 방어했다. 1207년, 보니파시오 델 몬페라토의 딸이자 아내인 아그네스가 자식 없이 죽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앙리를 불가리아의 칼로얀의 딸 마리아와 강제로 결혼시켰다.

1209년, 앙리는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쿠스로와 동맹을 맺고 칼로얀의 딸을 후처로 받아들이는 등 외교적으로 니케아 제국을 압박했고, 1211년 10월에 소아시아의 린다쿠스 강변에서 테오도로스 1세의 니케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 때 불가리아 차르국의 압박으로 더 이상 진격하진 못했다. 1214년, 테오도로스와의 조약을 통해 라틴 제국은 소아시아 북서 해안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후 앙리는 그리스에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고, 테살로니카 왕국을 수립한 보니파시오 델 몬페라토를 복속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1216년 6월에 41살의 나이로 테살로니키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그는 두 번의 결혼에서 모두 후사가 없었으므로, 라틴 제국의 귀족들은 앙리의 누나인 욜랑드 드 에노의 남편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의 손자인 피에르 드 쿠르트네를 황제로 선출했다.

이때 피에르는 프랑스에 머물며 사촌인 필리프 2세와 함께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다가 같이 프랑스로 귀국한 후에도 알비 십자군에 참여하고 있던 상태였다. 1217년 그리스로 떠났는데, 로마 성벽 바깥에서 교황 호노리오 3세의 대관식을 받았다. 교황은 피에르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러주긴 했으나 그가 서방 황제의 지위도 요구할 것을 염려했다.

피에르는 1217년 베네치아 공화국으부터 배를 빌려 베네치아 함대와 5500명의 병력과 함께 알바니아의 두라초를 점령하기 위해 출발했으나, 두라초 정복에 실패하고 육로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는 알바니아 산맥에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에게 사로잡혔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 채 감옥에 사망했다.

그나마 황후인 욜랑드는 해로로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고, 라틴 제국의 섭정이 되었다. 그녀는 니케아 제국에 맞서 제2차 불가리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나중에는 니케아 제국과도 협정을 맺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 마리 드 쿠르트네를 니케아의 황제 테오도로스 1세에게 시집보냈다. 그녀는 그해 44살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피에르가 죽은 후 장남 필리프, 피에르의 차남 로베르 중 둘 중 한 사람이 가 황제가 되어야 했다. 이때 장남 필리프는 한사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서 황제가 되길 거부하면서 그 덕에 로베르는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라틴제국은 강력한 국가들의 사이에서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때 강력한 라이벌인 니케아 제국은 1222년 요안니스 3세가 황제로 등장하였는데 반발한 전임 황제의 두 동생 알렉시오스 라스카리스이사키오스 라스카리스가 라틴 제국의 로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로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니케아로 진격했으나, 포이마네논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불과 몇달 뒤에는 테살로니키가 점령당했는데 로베르는 쾌락만을 쫓았고 여자를 농락하고 수도원과 성당의 보물을 탐하였다.

참다 못한 귀족들이 반발하자 그는 로마로 도망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교황도 그를 무시할 정도였다. 로베르는 결국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는 길에 1228년 모레아에서 죽었다. 후사가 없어 동생 보두앵 2세가 즉위했으나, 아직 어려서 예루살렘 왕국 국왕이었지만 사위인 신성 로마 황제이자 시칠리아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가 왕위를 찬탈하여 교황에게 위탁 중인 브리엔의 장이 섭정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어린 딸 마리와 라틴 제국의 어린 황제 보두앵 2세를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기로 했다. 1231년 이미 80에 가까운 나이로 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서 공동 황제 겸 섭정이 되었다. 그는 왕성한 원기를 과시하며 노구를 이끌고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2세와 니케아 제국군을 상대로 싸워 1235년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1237년 3월 장은 죽었고 사위인 보두앵 2세가 단독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라틴 제국은 그 태생적 한계가 끝에 도달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권인 니케아 제국 및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침공을 받아 쇠퇴 중인 상태였고, 브리엔의 장이 섭정겸 공동 황제로 있는 동안에는 겨우 연명할 뿐이었지만 이제 장마저 죽으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보두앵 2세는 제국을 살리기 위해 서유럽의 여러 나라에 원조를 요구하였다.유물을 팔거나 돈을 빌리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끝에 자금과 병력을 마련했으나, 1242년 쿠만족 유민을 받아줬다는 이유로 몽골 제국의 분노를 사게 되어 카단 오구르가 이끄는 몽골군이 불가리아를 초토화시킨 후 트라키아 일대를 침공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밖으로 나와 한차례 싸워 이겼으나 이어지는 싸움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혔는데 한 동안 그가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후 몽골과의 협상을 통해 복귀하고, 카라코룸에 사절을 보내 몽골 제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지만 이 사건으로 몽골의 조공국이 된것은 물론 보두앵 2세가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한 돈과 병력을 모두 잃어 결국 니케아 제국에 대항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1261년 라틴 제국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운 사이에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의 공격을 받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때, 밤을 틈타 항구를 통해 도주했고 보두앵 2세는 이탈리아로 망명하면서 라틴 제국은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반 세기만에 붕괴되었다.
2.2.2. 아카이아 공국
1204년 5월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을 일시적으로 멸망시킨 뒤, 플랑드르의 백작 보두앵 1세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의 옛 잔재들은 십자군에 참가한 세력들에 분할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피로스 일대와 두라초, 코르푸 등 에게 해의 여러 섬 지역을 가졌고, 라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의 트라키아,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을 가졌고, 몬페라토의 보니파시오 1세는 테살로니카와 마케도니아를 아우르는 테살로니카 왕국을 세웠다. 아테네 일대는 부르고뉴 기사단장 오토 드 라 로슈의 수중에 들어갔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빌라루두앵의 조프루아 1세에게 할당되었다.

조프루아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여 메세니아 지역 코로니의 통치자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협조를 받아 아카이아와 엘라스를 정복하고 안드라비다와 파트라스 요새를 공략한 뒤 겨울을 보냈다. 그러나 1205년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사망한 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라틴인들을 몰아내고자 펠레폰네소스에 개입했다.

이에 조프루아는 테살로니카 왕국에 찾아가서 보니파시오 1세에게 그의 신하인 기욤 드 생리트를 보내달라면서 테살로니카 왕국의 속국을 자처하겠다고 맹세했다. 보니파시오는 즉시 수락하였고, 수백 명의 기사와 보병들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돌아간 두 사람은 코운투라스의 올리브 과수원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미하일의 이피로스군을 격파하고 모레아를 공략했다.

먼저 스코르타에서 농성하던 독사파트리스가 1207년에 사망했고, 아크로코린토스 요새에서 항전하던 레온 스구로스마저 1208년 경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아크로코린토스는 이후 테오도로스 주교의 지휘하에 항전했지만, 결국 1210년 함락당했다.

이리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을 차지하게 된 아카이아 공국의 첫번째 공작은 기욤 1세 드 생리트였다. 하지만 1209년 조국인 프랑스로 돌아가던 중 사망했다. 기욤을 대신하여 공국을 다스리던 조프루아는 기욤의 사촌인 로베르가 새 공작이 되기 위해 프랑스에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공국을 독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이보다 앞서, 기욤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이 사망할 경우 1년 1일 이내에 합법적인 상속인이 공작이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영지가 몰수될 것이라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조프루아는 이걸 이용하기로 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에 뇌물을 찔러서 베네치아에서 배를 타고 가려던 로베르를 2달간 붙들게 했다. 가까스로 출항한 로베르는 이후에도 온갖 훼방을 받았고, 결국 1년 1일이 지나자 조프루아가 공작에 올랐다. 뒤늦게 도착한 로베르는 강력히 항의했지만 대세를 뒤집지 못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마저 그를 인정하자 로베르는 어쩔 수 없이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공국을 포기했다.

이렇듯 교묘한 계략으로 공국을 손아귀에 넣은 조프루아는 공국을 잘 다스렸고, 요안니스 3세가 이끄는 니케아 제국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을 때 6명의 봉신과 100명의 기사, 800명의 궁수와 함께 라틴 제국에 합류하여 방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뒤이어 공작이 된 아들 조프루아 2세는 유럽에서 가장 공정한 통치를 하는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수도 안드라바다에 조폐국을 설치하여 경제 부흥 정책을 실시했으며, 라틴 문학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꽃피웠다. 이 시기에 제4차 십자군에 대한 귀중한 문헌 기록인 모레아 연대기가 출간했다. 이후 3대 공작으로 취임한 기욤 2세는 1249년 수도를 안드라바다에서 미스트라스로 이전했고, 1255년 에우보이아 섬을 놓고 베네치아와 전쟁을 벌였다.

1259년 니케아 제국미하일 8세에 대항하여 아케네 공국, 테살리아, 세르비아, 시칠리아 왕국, 그리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연합했으나, 그해 9월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참패했다. 기욤 2세는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니케아 제국의 포로가 되었고, 126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킨 미하일 8세에게 미스트라를 비롯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대부분을 헌납하고 모레아의 데스포티스로서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서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자 했다. 미하일 8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이복 동생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에게 군대를 맡겨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파견했지만, 1263년 프리니츠 전투에서 패배했다. 아카이아 공국은 여세를 몰아 1264년 마크리플라기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다시 한번 격파했다. 그 후 1267년 교황청의 중재로 시칠리아 왕국의 제후국이 되었다.

1278년 기욤 2세가 사망한 후, 라틴 제국의 최후의 황제 보두앵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도움을 기대해 시칠리아 국왕 앙주의 샤를 1세가 아카이아 공국을 직할령으로 삼는 걸 인정했다. 그러나 앙주의 샤를 1세와 아들 샤를 2세는 주변에 적이 너무 많아서 아카이아에 큰 관심을 보이지 못하고 단지 돈과 일부 병력만 보냈고, 빌하르두앵의 이사벨라가 1289년부터 남편 에노의 플로렌스와 함께 공국을 다스렸다. 1297년 플로렌스가 사망하자, 이사벨라는 3년 간 재혼 상대를 물색해야 했다.
2.2.3. 아테네 공국
1204년 5월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을 일시적으로 멸망시킨 뒤, 플랑드르의 백작 보두앵 1세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의 옛 잔재들은 십자군에 참가한 세력들에 분할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피로스 일대와 두라초, 코르푸 등 에게 해의 여러 섬 지역을 가졌고, 라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의 트라키아,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을 가졌고, 몬페라토의 보니파시오 1세는 테살로니카와 마케도니아를 아우르는 테살로니카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빌라루두앵의 조프루아 1세에게 할당되어 아카이아 공국이 세워졌다. 또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아티카와 테베를 중심으로 하는 보이오티아 일대는 부르고뉴 기사단장 오토 드 라 로슈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분할은 어디까지나 서류상에서나 이뤄진 것이었고, 당시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만 함락되었다. 따라서 각 지도자들은 무너진 제국의 잔재를 스스로의 힘으로 정복해야 했다. 아티카와 보이오티아를 할당받은 오토 드 라 로슈는 그 지역의 로마인 지배자 레온 스구로스를 물리쳐야 했다. 그는 테살로니카 왕 보니파시오 1세에게 복종하는 대가로 군대를 지원받았고, 실정을 거듭하면서 민심을 잃어버린 레온을 가볍게 물리치고 테베를 비롯한 보이오티아 일대를 공략했다. 그 후 친정에 나선 보니파시오 1세와 함께 아티카로 진격하여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온 스구로스를 격파하였고, 아테네 시 주교이자 레온의 폭정에 맞서 싸웠던 미하일 호니아티스[88]가 귀순한 덕분에 아테네에 무혈 입성했다.

오토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요새화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테베, 아르고스와 나우플리아, 다말라 시를 확보했다. 그는 자신을 아티카와 보이오티아의 데스포티스라 칭하며 테살로니카 왕국과 라틴 제국 양자에 충성하였고, 봉건제도를 시행했으며, 프랑스어를 행정 언어로 사용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정교회를 신봉하는 그리스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강요했고, 이로 인해 그의 통치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1224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테살로니키를 정복하면서 테살로니카 왕국이 멸망하자 아카이아 공국의 봉신이 되었으며, 1225년경 불분명한 이유로 아들들과 함께 부르고뉴로 돌아갔고, 아들[89] 기 1세 드 라 로슈가 새 공작으로 취임했다.

아테네 공국은 기 1세의 통치 동안 번영을 구가했다. 해상 해적은 아테네 공국의 부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에비아 섬에 최소 100척의 해적선이 매년 출항하여 에게 해의 여러 해안 지대를 약탈했다. 1255년 에우보에아 섬을 두고 아카이아 공국베네치아 공화국이 전쟁을 벌였을 때, 기 1세는 베네치아를 지지했다. 아카이아 공작 기욤 2세는 이를 보복하고자 아테네 공국을 침공하였고, 테베에서 포위된 기 1세는 기욤 2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 후 기는 프랑스로 가서 빌럼이 자신의 군주인 걸 취소하고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봉신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루이 9세는 그때까지 공국 대접을 못 받던 아테네 공국을 정식으로 공국으로 인정하였다.

기가 프랑스에 가 있던 1259년, 아카이아 공국 - 시칠리아 왕국 - 테살리아 - 세르비아 - 이피로스 전제군주국니케아 제국미하일 8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해 9월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연합군이 참패하였고, 아카이아 공작 기욤 2세는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니케아 제국의 포로가 되어 3년간 억류되었다. 기는 그리스로 돌아온 뒤 기욤 2세를 대신하여 아카이아 공국을 다스렸다. 1263년 기 1세가 사망하고 아들 장 1세 드 라 로슈가 집권했다. 그는 북쪽의 그리스계 국가 테살리아와 가까워졌고, 동로마 제국에 대항해 테살리아인들을 돕고자 군대를 2번 파견하였다. 1275년 장 1세는 테살리아의 구원 요청을 받고 300명의 기사와 함께 출진해 테살리아를 포위한 동로마군을 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276년에도 재차 테살리아를 포위한 동로마군을 요격하였고, 테살리아 데스포티스의 딸을 자신의 아들 기욤 1세 드 라 로슈와 결혼시켰으며, 지참금으로 테살리아의 여러 도시를 받아냈다.

그러나 1278년 에우보이아 귀족들이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에 개입했다가 바론다 전투에서 패했고, 그는 화살을 맞고 낙마하여 포로로 붙잡혔다. 미하일 8세는 3만 두카트의 몸값과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풀어줬고, 장 1세는 아테네로 귀환한 뒤 2년만에 사망했다. 뒤이어 공작에 취임한 기욤 1세 드 라 로슈는 유명무실해진 라틴 제국의 후손들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시칠리아 왕국의 카롤로 1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1287년 집권한 기 2세 드 라 로슈는 어린 나이에 통치자가 된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2세 두카스의 보호자가 되어 아테네 공국의 영향력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랐다.

2.3. 동로마 부흥 세력

파일:1204년의 강역.png
1204년의 강역[90]
2.3.1.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동로마 제국이 십자군에 붕괴되고, 이후 데살로니카에서 십자군 지도자들 중 한명인 몬페라토 후작인 보니파초 1세가 왕국을 건국한다. 그는 동로마 황실과 혈통 관계였던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를 이피로스 지역으로 파견했다.그러나 이피로스에 도착한 그는 곧 라틴 제국에 대항하는 그리스인들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아르타를 거점으로 삼아 영토를 빠르게 확장하여 북쪽으로 디라히온, 남쪽으로 나우팍토스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다. 동쪽 경계는 보니파시오의 테살로니카 왕국과 맞닿았고, 서쪽 경계에는 불가리아 제2제국, 북쪽 경계에는 세르비아가 있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몰려든 피난민들을 사비를 들여 구휼했으며, 국경 주변에 여러 요새를 세웠다. 유민들은 그를 제국을 부활시킬 유일한 인물로 여겼고, 데스포티스라는 칭호로 불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빠져나온 사람의 절반 이상이 이피로스로 달아났다고 한다.

사실 이피로스 일대는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할당되어 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해양을 중시해서 두라초와 코르푸 등 여러 군도를 점령했을 뿐, 이피로스 본토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하일은 이 점을 잘 활용해 이피로스 본토의 패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정교회와 가톨릭의 결합 가능성을 암시하며 십자군을 더 이상 보내지 말 것을 은연중에 내비쳤다.

교황은 1209년 8월 17일 답신을 보냈는데, 그를 "로마인들의 미하일 콤니노스"라고 지칭했다. 교황은 이 서신에서 그가 진정으로 교황의 하인이라면, 베네치아가 디라히온에 세워놓은 가톨릭 대교구에 이피로스를 종속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는 아직 세력이 미진하다고 여겨서 요구에 따르는 '척'했다.

1209년 여름, 라틴 제국 황제 [[앙리(라틴 제국|앙리)가 테살로니카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테살로니카 왕국을 실질적인 지배하에 둔 후, 미하일은 앙리에게 동맹을 제안하고자 사절을 보냈다. 앙리는 그의 진의를 의심했고,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미하일은 앙리의 동생 유스터스와 맏딸을 결혼시키고, 영지의 3분의 1을 지참금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앙리가 동의하면서 1210년 6월 20일, 미하일의 사절인 테오도로스 주교와 베네치아 공작 마리노 발라레소의 중재하에 양측 지도자가 선서하면서 평화 협약이 확정되었다. 미하일은 이 평화 협약에서 베네치아 영지에 자신의 땅을 보유하는 대신 베네치아의 신하가 되기로 했다. 또한 베네치아에게 광범위한 무역 특권과 세금 면제 특권을 주겠으며, 베네치아 선박이 난파하면 즉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은밀히 라틴 제국과 맞서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1209년 몬페라토에 수감되어 있던 알렉시오스 3세에우프로시나 두케나 카마테리나 부부의 몸값 협상을 타결하여 아르타의 살라고라 항구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아내 에우프로시나를 이피로스에 남긴 뒤 니케아 제국으로 떠났다.

1210년 가을, 앙리 황제가 니케아로 원정을 떠나자 미하일은 라틴 제국과 맺었던 평화 협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테살로니카 왕국으로 쳐들어가 라틴 귀족들과 용병들로 구성된 적군을 격파했다(도모코스 전투). 이때 사로잡은 포로 중 최고위 귀족 3명을 십자가형에 처했고, 나머지 포로를 죽이거나 채찍형에 처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 소식에 격노해 파문을 내렸지만 미하일은 개의치 않고 이후에도 테살로니키의 여러 요새를 점령하고 성직자를 포함한 라틴 수비대를 섬멸했다.

앙리 황제는 이 소식을 접하자 격노하여 니케아 제국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불과 12일 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테살로니카로 달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미하일은 불가리아 제2제국과 동맹을 맺고 앙리에 대항했으나 패배했다. 하지만 불가리아가 트라키아를 계속 압박하는 데다 니케아 제국도 공세를 가하고 있었기에, 앙리는 미하일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앙리가 떠난 뒤 미하일은 테살로니카를 놓고 불가리아와 대립했다. 이피로스 단독으로는 불가리아와 대적할 수 없었기에, 앙리의 동생 유스터스와 연합하여 1211년 펠라고니아에서 불가리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양측은 곧 분열되었다. 갈락시디 연대기에 따르면, 1210년에서 1214년 사이 그와 살로나의 라틴 영주인 토마스 1세가 갈등을 빛었다. 토마스 1세가 갈락시디 앞바다의 코린토스 만에 있는 몇 개의 섬을 점령하자, 섬 주민들은 미하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미하일은 공격을 개시해 토마스를 죽이고 살로니아를 공략했다. 그러나 토마스 2세가 곧 프랑크 지원군을 이끌고 부친의 영주권을 되찾으면서 이피로스의 살로니아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1212년, 미하일은 테살로니카를 또다시 침공하여 라리사를 함락시키고 라틴 대주교를 폐위시킨 뒤 정교회 지역 교구를 복원했다. 이렇게 새롭게 확보한 영역은 그의 사위 콘스탄티노스 멜리시노스의 영지가 되었다. 1213년 베네치아로부터 디라히온을 탈취했으며, 1214년에는 코르푸 섬을 탈환했다. 이후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로 북상하여 크루여를 공략하고 아르바논 공국을 종속시켰지만, 제타 공략 시도는 세르비아에 의해 저지되었다.

1214년 후반 또는 1215년, 벨라그라다에서 로마이노스라는 하인에게 암살당했다. 암살 배후가 누구인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어린 아들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 대신 이복형제이자 니케아 제국에서 관직을 역임하고 있던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이피로스를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이피로스의 통치가 되었다는 것을 듣게 된 테오도로스는 자신의 황제인 테오도로스 1세가 자신과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를 하게 해 이피로스로 떠나는 것을 허락했지만 이피로스에 도착한 그는 자기가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테오도로스는 먼저 세르비아의 제타를 공략하려던 선임 군주 미하일 1세의 계획을 취소하고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어 북쪽 경계의 안전을 확보하기로 했다. 동생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가 1216년에 스테판 네마니치의 자매 중 한 명과 결혼했고, 1219년에서 1220년 겨울 그의 맏딸 안나가 세르비아 왕자 스테판 라도슬라프와 결혼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매우 가까워졌다.

이리하여 북쪽 국경 지대가 안전해지자, 그는 본격적으로 영역 확장을 개시했다. 1217년까지 오흐리드, 프릴레프, 그리고 스트리몬 강 연안의 펠라고니아 평원 대부분을 장악했다. 또한 디미트리오스 코마티아노스를 오흐리드 대주교로 선출했다. 코마티아노스는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니케아 제국이 아닌 이피로스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다만 세르비아 군주 스테판 2세가 오흐리드 대주교가 전통적으로 관할하던 세르비아 교회를 독립시키는 걸 허용해서 그와 대주교간의 마찰이 빛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여 마케도니아 북부까지 이르자, 멜니크의 통치자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자기까지 공격받을 것을 염려하여 그의 아내의 조카와 결혼하기로 했다.

1217년 초, 라틴 제국의 새 황제로 선출된 피에르)가 프랑스에서 기사 160명과 기병 5500명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출발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도착한 뒤 베네치아가 미하일 1세에게 빼았겼던 디라히온을 탈환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

4월, 브린디시에서 출항한 피에르는 디라히온에 상륙하여 공성전을 벌였다. 그는 디라히온을 함락한 뒤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테살로니키로 진격하여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를 탈취하려는 계획이었으나, 디라히온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고 사상자가 늘어나자 포위망을 풀고 테살로니키로 진군했다. 그러나 지형이 무척 험난하고 지역 주민들이 적대해서 피에의 군대는 갈수록 약화되었다.

테오도로스는 피에르와 맞서기 전, 교황 특사인 조반니 콜론나와 협의해 가톨릭 교회의 우월성과 라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제5차 십자군 원정에 피에르가 참여하는 걸 돕는 대가로 지지를 약속받았다. 그는 이 사실을 피에르에게 알리며 음식을 제공하고 안내인을 보내주었다. 피에르는 이 뜻밖의 도움에 크게 기뻐했고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라틴군이 경계를 풀고 있던 날 밤, 그는 피에르의 진영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피에르, 특사 조반니 콜론나를 비롯한 수많은 라틴 귀족이 포로로 잡혔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이 소식에 격분하여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테오도로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으며, 그에게 별도로 서신을 보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217년 말 십자군 원정을 위한 선발대가 안코나에 집결했고, 베네치아 역시 이에 가담할 기미를 보였다. 이에 그는 1218년 3월 교황에게 사과하고 콜론나를 석방했다. 그러나 피에르와 여러 귀족은 감옥에 계속 갇혀 있다가 옥사했다.

그 후 테오도로스는 동생 콘스탄티노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아이톨리아와 아카르나니아의 총독으로 임명해 남쪽 국경지대를 지키게 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아테네 공국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네오파트라스와 라미아를 탈환했다. 이리하여 안전을 완전히 확보한 뒤, 그는 본격적으로 테살로니키를 향한 공세를 개시해, 1218년에 플라타몬 요새를 공략하여 해상 보급을 차단한 것을 시작으로 테살로니키 주변의 요새를 하나씩 공략했다.

1221년 말, 세레스를 공략한 테오도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 사이의 보급로를 끊었다.

테살로니키 함락이 임박하자, 교황 호노리오 3세는 그를 파문하여 아드리아 해 항구에서 말, 군대, 물자에 대한 금수조치를 명했으며, 십자군을 조직하여 이피로스 원정을 단행하려 했다. 비안드라테의 오베르토 2세가 이끄는 십자군 첫 번째 부대는 1222년 여름 테살로니키에 도착했다. 이에 그는 서두르기로 마음먹고, 1223년 초에 테살로니키를 포위했다. 교황은 베네치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독촉하여 테살로니키에 대한 원조를 약속받았다.

호노리오 3세는 그리스 남부 지역의 라틴 영주들에게도 이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고, 라틴 제국의 황제 로베르의 협조를 약조받았다. 1224년 3월, 브린디시를 출발한 십자군은 그해 4월 세레스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라틴 제국의 황제 로베르가 2년 전 요안니스 3세와 포이마네논에서 맞붙었으나 참패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듣자, 포위망을 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물러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로스가 이끄는 이피로스군에게 급습당해 대부분의 병사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게다가 십자군의 잠재적 지도자인 몬페라토의 굴리에모 6세가 병에 걸리자 교황은 십자군의 정식 출정을 내년 봄으로 미뤄야 했다.

십자군이 좀처럼 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테살로니키 수비대는 1224년 12월, 테오도로스에게 항복했다. 뒤늦게 1225년 3월 출발한 십자군이 테살리아의 할미로스에 상륙했지만, 이질이 돌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었다. 굴리에모 6세 역시 이질로 사망했고, 나머지는 이탈리아로 철수했다. 이로서 동로마 제국의 제2의 도시로 손꼽히는 테살로니키를 탈환한 그는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를 칭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완전히 부활시키겠다는 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동로마 제국의 관습에서 황제의 대관식은 오로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만 행해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주관해야 했지만, 라틴 제국이 그 도시를 지배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1208년 이래 니케아 제국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테살로니키 수도원장 콘스탄티노스 메소포타미티스에게 테살로니키에서 대관식을 주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티스는 니케아에 있는 총대주교만이 그럴 수 있다면서, 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관식 수행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에 그는 1225년 3월 아르타에서 주교 회의를 소집한 뒤, 자신의 업적을 낱낱이 밝히면서 제국의 부활, 가톨릭 사제 추방과 정교회 주교 복직 등을 약속했다. 주교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고, 그는 오흐리드의 충실한 대주교인 데메트리오스 코마티아노스로 하여금 대관식을 주관하게 하였다.

테오도로스는 아르타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하고 형제 마누일과 콘스탄티노스를 데스포티스로 선임했다. 또한 이피로스로 피난한 옛 동로마 귀족 가문 후손들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니케아 제국의 요안니스 3세는 그를 이피로스와 테살로니키의 통치자로 인정해줄 테니 황제 즉위를 취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황제를 칭했다. 이후 양자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니케아의 총대주교 예르마노스 2세는 오흐리드 대주교가 제멋대로 대관식을 주관했다고 비난했지만, 오흐리드 대주교 코마티아노스는 자신은 그렇게 할 권한이 있다고 맞받아쳤다. 1227년 아르타에서 열린 공의회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니케아 총대주교의 전반적인 권위를 인정하지만, 그가 그의 영역에 주교들을 임명할 권리를 요구했다. 만약 게르마노스 2세가 3개월 안에 회답을 주지 않는다면, 교황의 우월성을 인정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게르마노스 2세는 테오도로스의 황제 즉위를 참칭으로 규탄함으로써 대응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주교를 디라히온의 주교로 임명하려 했으나, 즉각 그 주교를 추방한 테오도로스는 코마티아노스의 친구인 콘스탄티노스 카바실라스를 디라히온 주교로 선출했다. 결국 니케아와 이피로스는 종교적으로도 완전히 분열되었다.

1225년 봄, 그는 크리스토폴리스, 크산티, 그라티아노폴리스, 모시노폴리스, 그리고 디디모티콘 등을 공략하면서 마케도니아 동부와 트라키아 서부 일대를 확보했다. 니케아 제국은 이에 맞서 아드리아노폴리스 주민들의 구원 요청에 응해 군대를 파견하여 라틴 제국군을 축출하고 도시를 공략했다. 그러나 테오도로스가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고 주민들은 결국 테살로니키 제국에게 투항했다. 니케아군은 그가 제공한 배를 타고 소아시아로 철수할 수 있었다.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손아귀에 넣으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할 수 있게 된 테오도로스는 북쪽의 불가리아 제2제국과 타협하기로 하고, 차르 이반 아센 2세의 딸 마리아와 자신의 동생 마누일을 결혼시켰다.

1225년 여름, 그는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로 진군하여 라틴 제국군의 역습을 물리쳤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몬페라토의 굴리에모가 테살리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으로 철수했다.

1228년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고자 코르푸 섬에 머무를 때, 그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힘을 썼다. 심지어 1229년에 병력 일부를 십자군에 가담시키기도 했다. 반면 1228년 8월 19일 베네치아 상인들이 그의 제국에서 무역 활동을 하는 걸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고, 코르푸의 총독에게 난파된 베네치아 배의 화물을 몰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아센 2세가 라틴 제국에게 동맹을 제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불가리아를 의심했다. 비록 라틴 제국은 불가리아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차지하려는 야욕을 품었다고 의심하여 동맹 제의를 거부했지만, 테오도로스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릴 때 불가리아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1228년 9월, 그는 라틴 제국과 1년간의 휴전을 합의하고 불가리아를 먼저 손봐주기로 했다. 1229년 말, 그는 테살로니키에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한 뒤 1230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는 척하다가, 갑작스럽게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에브로스 계곡을 따라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승리를 확신한 테오도로스는 처자식까지 거느리고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천천히 전진했다. 그러나 이반 아센 2세는 2만의 병력을 이끌고 반격을 개시했다.1230년 4월, 이반 아센 2세는 클로코트니차 마을에 주둔하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을 급습했다.

기습을 예상치 못했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테오도로스는 포로로 붙잡혔다. 동생 마누일만이 소규모 호위군을 이끌고 간신히 탈출했다. 그 후 마누일은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를 칭했지만, 그의 영역은 테살로니키 주변으로 축소되었다. 디라히온과 코르푸, 이피로스와 테살리아 등지는 콘스탄티노스가 옹립한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서자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넘어갔다. 이리하여 허수아비 신세가 된 테살로니키 제국은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종속되었다.

이피로스의 통치자가 된 미하일 2세는 6년 간의 와신상담 끝에 1236년 코르푸를 점령하였고, 1238년 니케아 총대주교 게르마노스 2세의 방문을 시작으로 니케아 제국과 긴밀하게 교류하였으며, 1249년 요안니스 3세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데스포티스 작위를 인정받았다. 한편 불가리아의 포로 신세가 되었던 테오도로스는 1237년 자기 딸 이리니를 이반 아센 2세의 황후로 삼게 하는 대가로 풀려난 뒤 테살로니키로 돌아와서 마누일을 축출하고 아들 요안니스를 테살로니키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자 마누일이 1239년 병력을 이끌고 테살로니키를 탈환하려 했다. 테오도로스와 마누일은 곧 합의하여 요안니스가 테살로니키를 지배하고, 마누일은 테살리아를 다스리기로 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테살리아를 확보하기 위해 기회를 엿봤다. 1241년 마누일이 죽자, 그는 테살리아를 곧바로 공략했다. 테오도로스는 니케아 제국에 구원을 청했지만, 요안니스 3세는 테오도로스를 니케아에 억류한 뒤 테살로니키에 입성하고 테살로니키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니케아 제국의 신하가 되게 하였다. 1246년 가을, 요안니스 3세는 불가리아가 어린 군주 미하일 2세 아센의 즉위로 어수선한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해 트라키아 대부분과 마케도니아 동부와 북부를 공략했다. 이피로스의 미하일 역시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 북서부로 영역을 확장했다. 하지만 요안니스 3세가 내부의 호응에 힘입어 테살로니키를 완전히 공략하면서, 정세는 니케아 제국 쪽으로 흘러갔다.

요안니스 3세는 미하일의 장남 니키포로스와 자신의 손녀 마리아의 결혼을 제안했다. 부인 테오도라 페르랄리파나는 적극적으로 호응했지만, 미하일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중 보데나에 은거 중이던 테오도로스가 니케아 제국에 맞설 것을 권하자, 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1251년 봄 요안니스 3세가 소아시아 원정을 떠난 틈을 타 테살로니키를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테살로니키 시민들이 끝까지 저항해 함락이 어렵자, 북쪽으로 이동하여 프릴레프와 베렐스를 공략했다. 얼마 후 요안니스 3세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피로스로 철수했다. 요안니스 3세는 보데나를 공략한 뒤 1252년-1253년 겨울에 카스토리아와 디볼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카스토리아 지역에서 이피로스군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피로스군의 요안니스 글라바스와 테오도로스 페트랄리파스 장군이 니케아 제국에 귀순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졌고, 미하일 2세는 요안니스 3세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피로스군이 장악한 요새와 마케도니아의 나머지 영토를 양도하였고, 미하일 2세의 장남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3세의 손녀 마리아의 결혼이 이뤄졌다. 요안니스 3세는 미하일 2세에게 테오도로스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미하일 2세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곧 압력에 굴복하여 테오도로스를 넘겨줬다. 그는 소아시아로 끌려갔고, 1253년경 그곳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1256년, 미하일은 니케아 제국과의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재차 테살로니키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시칠리아 왕국의 만프레디 왕이 디리키움과 그 주변 지역을 점령했다. 미하일은 만프레디와 합의하여 자신의 딸 엘레니 앙겔리나 두케나를 만프레디의 아내로 삼게 하고, 디라키움 일대와 코르푸 섬을 지참금으로 줬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에 아케아 공국의 굴리에모 2세를 끌여들어 마케도니아의 니케아 제국 영토를 공략했고, 1259년 펠라고니아 평원에서 미하일 8세의 형제인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니케아 제국군과 교전했다.(펠라고니아 전투) 그러나 연합군 끼리 상호 의심으로 인해 전세는 불리해졌고, 급기야 굴리에모 2세가 니케아군에게 붙잡혔다. 결국 니케아 제국은 이피로스를 공략했고, 미하일은 이오니아 제도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피로스 주민들의 저항이 심해서 오래 지배할 수 없었던 니케아 제국군은 철수하였고, 미하일은 만프레디 왕의 도움으로 영토를 되찾았다. 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한 미하일 8세와 계속 전쟁을 벌였으나, 1264년 패배를 면치 못하고 미하일 8세의 명목상 종주권을 인정했다. 1266년 또는 1268년에 사망하였고, 큰아들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차남 요안니스 1세 두카스가 테살리아를 분봉받았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의 군주이자 이피로스의 우군이었던 만프레디가 전사하고 앙주의 샤를이 카를루 1세로서 왕위에 오르자, 그는 이에 맞섰지만 1272년 디라키움을 잃었다. 1274년부터 미하일 8세가 시칠리아 왕국를 상대로 공세를 가하자, 카를루 1세는 이피로스와 손잡기로 했다. 그는 이에 동의하여 1276년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두카스, 시칠리아 왕국과 함께 동맹을 맺었다.

1278년 3국 동맹군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부트린트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1279년 카를루 1세의 봉신으로 들어가고 부트린트를 시칠리아 왕국에 내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칠리아군이 동로마군에게 패배했고, 알바니아에 있던 이피로스의 영토가 동로마 제국에게 잠식되었다. 1282년 시칠리아 민중이 봉기하여 카를루 1세의 프랑스군이 학살당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발발하면서, 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를 잃어버렸다. 후원자가 힘을 잃자, 그는 동로마 제국에게 접근하였고, 아내 안나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서 협상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이피로스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었고, 그는 그 대가로 이피로스에서 무제한적인 통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1284년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두카스의 아들인 미하일을 이피로스로 유인하여 체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이에 분노한 요안니스는 1285년 군대를 일으켜 아르타 주변 지역을 유린했다. 한편 딸 타마르를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와 결혼시켜서 이피로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가를 통합하려 했지만, 미하일 9세가 아르메니아의 마리아를 택하면서 실패했다. 이피로스 내 반 동로마 성향의 귀족들은 그에게 나폴리 왕국의 카를루 2세와 협상하라고 설득했고, 그는 이에 설득되어 1291년 나폴리 왕국에 동맹을 제의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이 소식을 접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피로스에 군대를 보내 응징하려 했지만, 카를루 2세의 봉신인 케팔로니아의 리카르도 오르시니와 아케아의 플로렌스 대공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피로스는 이제 나폴리 왕국과 손을 잡았고, 그는 딸 마리아를 리카르도 오르시니의 후계자와 결혼시켰으며, 다른 딸 타마르를 카를루 2세의 아들인 타란토의 필리포 1세와 결혼시켰다. 타마르와 필리포 1세의 결혼식은 1294년에 열렸고, 타마르의 지참금으로 해안 아드리아 해의 해안 요새를 양도했다. 그러나 아드리해 해 연안의 그리스 주민들은 필리포 1세의 지배를 받기 싫어했고, 테살리아의 두카스 가문은 이를 틈타 필리포에게 넘어갔던 요새 대부분을 점거했다. 하지만 곧 나폴리 왕국이 개입해 요새를 되찾았고, 1296년 나폴리와 테살리아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니키포로스는 1297년경 사망했고, 아들 토마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그 뒤를 이어 이피로스의 군주가 되었다.하지만 토마스 1세는 어렸기에 어머니 안나가 섭정을 맡았다.

카를루 2세가 약속대로 아들에게 이피로스를 넘기라고 요구하자, 안나는 타마르가 정교회를 계속 믿게 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막상 시집온 그녀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느냐며, 그때 합의가 깨졌으니 이피로스를 넘겨줄 수 없다고 답했다. 이리하여 나폴리 왕국과의 갈등이 깊어지자, 안나는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아들을 미하일 9세의 딸 안나 팔레올로기나와 결혼시켰다. 카를루 2세는 군대를 보내 이피로스를 점거하게 했지만,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은 이피로스군에게 격퇴되었다.
2.3.2. 니케아 제국
한편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부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세력은 소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던 니케아를 중심으로 하는 니케아 제국이었다. 니케아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령된 후 도망친 앙겔로스 왕조의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였던 테오도로스 1세였다. 테오도로스 1세는 니케아에 자리를 잡자마자 비시니아와 미시아 일대를 정리하고 아나톨리아 서부일대로 나아갔다. 같은 해에 알렉시오스 1세가 건국한 뒤 흑해안을 따라 비티니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트라페준타 제국을 저지하였으나, 그해 말 라틴 제국보두앵 1세와 포이마네논에서 격돌하여 대패했다. 행정 체제도 군대도 돈도 없는 껍데기 상태에서 급조한 군대만으로는 당연한 결과였고, 라틴 제국의 군대가 마르마라 해안가를 전부 장악하고 수도 니케아 근방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대위기였다.

구원은 뜻 밖의 방향에서 나타났다.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이 라틴 제국을 침공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의 주력을 격파하고 황제 보두앵 1세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적의 예봉이 꺾여 시간을 벌게 된 테오도로스 1세는 서둘러 국가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소아시아 서부의 이오니아 지역을 통합했으며, 붕괴한 행정제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웠고, 정치와 조세의 모든 제도를 짧은 시간 내에 재건하였다. 이전 동로마 시절의 관직이 전면 복구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테오도로스의 기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205년에는 다시 라틴 제국의 위협이 닥쳤다. 2대 황제인 앙리가 아드라미티온을 점령, 다시 공세를 걸어온 것이었다. 아드라미티온 근교에서 양측은 맞붙었으나 또 패배한 니케아 측은 불가리아와 연합, 공동의 적인 라틴 제국을 견제하고자 하였고 그 해 4월 불가리아가 후방을 침공하자 라틴 제국은 물러나게 되었다.

120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요안니스 10세가 안식한 뒤 니케아에 총대주교좌를 이전하고, 프리지아 지역을 통합하였다. 이 무렵 룸 술탄국은 또 다시 니케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으며, 테오도로스는 라오디키아, 아탈리아 등이 룸 술탄국 측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208년, 요안니스 10세가 안식한 뒤 1년 넘게 공백이던 총대주교좌에 새 총대주교로 미하일 4세를 선출하고[91] 새 총대주교의 주관으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1211년 전 황제이자 테오도로스 1세의 장인인 알렉시오스 3세가 니케아에 왔다. 알렉시오스 3세는 니케아 궁정에 선임황제로써 자신의 입지를 요구했는데 거부당하자 룸 술탄국으로 도주, 니케아를 칠 것을 주문했다.[92] 룸 술탄국의 공격 소식을 접수한 테오도로스 1세는 1200명의 그리스인 병사와 800명의 라틴인 기사대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93]에서 룸 술탄국의 군대를 만난 니케아군은 고군분투 속에 적군을 격파했다. 테오도로스 1세 본인도 전장 한복판에서 분전했다. 이 때 테오도로스 1세가 룸 셀주크 술탄 카이쿠스로 1세와 직접 칼싸움을 벌여 술탄을 전사시켰다고 한다.[94]

1211년 말 안티오키아 전투로 약화된 니케아를 노리고 라틴 제국이 공격했다. 트라페준타 제국, 룸 술탄국과 협정을 맺어 니케아 제국을 고립시킨 후의 공격이었다. 린다코스 전투에서 니케아군은 라틴 군대에게 패배하였고 결국 협상의 결과로 미시아가 통째로 넘어갔으며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일부가 넘어갔다.

1212년 라틴 제국과 룸 술탄국 전선이 안정되자 테오도로스는 트라페준타 제국을 공격했다. 시노피 이서의 영토가 수복되었으며 트라페준타 측은 약체화되었다. 이후의 평화를 기회로 테오도로스는 군사력을 재건하였고, 라틴 제국과는 결혼을 빌미로 관심을 계속 돌려두다가 1220년에 라틴 제국을 향해 공세를 취했다.

1221년에는 후계자로 사위 요안니스 3세를 택했다. 지지를 확보하고 형제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유력자들을 소집하여 투표과정을 거쳤고, 이를 통과한 요안니스는 충분한 정통성과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요안니스 역시 테오도로스의 기대에 걸맞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면서 이는 테오도로스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선택이 되었다.

요안니스 3세에게 제위를 물려줄 당시 니케아 제국은 인구 300만 명의 지역강국이 되어 있었고 그가 증원한 8천 명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의 기틀이 되었다. 제위에 오른 요안니스 3세는 우선 선대 때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자신의 처숙부들인 알렉시오스 라스카리스, 이사키오스 라스카리스를 정리해야 했다.

이들은 요안니스 3세가 제위에 오르자 라틴 제국으로 망명해 당시 라틴 제국의 황제인 로베르 1세에게 요안니스 3세를 몰아내줄 것을 요청했다. 로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니케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1224년 포이마네논 전투에서 요안니스 3세가 이끄는 니케아 제국군에게 참패당했다. 이때 로베르와 함께 간 두 형제는 포로로 잡혔고, 소아시아 북서부에 있던 라틴 제국의 요새 대부분이 니케아 제국으로 넘어갔다. 그 후 두 형제는 실명형에 처해졌다.

포이마네논의 승리에 고무된 요안니스 3세는 그 기세를 몰아 단숨에 소아시아 영토까지 회복한 후 마르마라 해를 건너 유럽 영토 일부까지 수복했으나, 곧 이피로스의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아드리아노폴리스를 빼앗기게 되었다. 1225년 안드로니코스 네스톤고스이사키오스 네스톤고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요안니스는 동방으로 눈을 돌렸다.

요안니스는 동방으로 눈을 돌린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수도를 니케아에서 니케아 황제의 겨울 별궁이 있던 님페온으로 옮겨버린다.[95] 소아시아의 경제적 중심지인 이오니아에 위치한 도시이자, 대 튀르크족 방어를 위한 중요한 거점이며, 동시에 황가인 바타치스 가문의 영지이기도 한 님페온으로의 천도는 니케아의 경제적 중심인 메안드로스, 에르모스, 카이스트로스의 3강(江) 유역을 중요시하며 황제의 권위를 확고히 함에 더해 튀르크족에게 더 이상의 서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황제 본인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1226~7년 곧바로 룸 술탄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해 트라키시온에서 카이쿠바드 1세룸 술탄국 군대를 격파하여 그들을 메안드로스 계곡 상류로 쫓아내 트리폴리스를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거기에 아나톨리아의 올림포스 산에 정착한 우즈 튀르크멘족 또한 니케아-룸 술탄국 사이의 무인 지역으로 쫓아내버리는 성과를 낸다. 이후 1229년까지 카이쿠바드 1세와 요안니스 3세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다 몽골에 밀린 호라즘 왕조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아나톨리아를 침범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룸 술탄국은 아이유브 왕조동맹을 맺고 호라즘 군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여파로 몽골군의 진격이 가속화되면서 이를 막아야되는 상황에 놓이자 니케아 제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하고 마침 이피로스 전제군주국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불가리아에게 패해 몰락하면서 유럽 쪽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겠다 판단한 요안니스가 받아들이면서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1241년이 되면서 요안니스는 곧바로 경쟁자중 하나였던 이피로스데스포티스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니케아로 초청했다. 물론 이는 그를 포로로 잡아두기 위한 계략이었고 그는 이듬해 여름에야 니케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동안 또 하나의 빅 찬스가 있었으니 바로 몽골소아시아 침공이었다. 이 원정으로 말미암아 쾨세다 전투에서 룸 술탄국이 패배해 완전히 몰락하고 트라페준타 제국도 몽골에게 갈려나가면서 아나톨리아의 경쟁자가 둘이나 사라지게 된 것이다. 처음에 요안니스는 몽골을 경계하면서 룸 술탄국에 소수의 지원병력을 보내기도 했으나 기적같이 몽골은 룸 술탄국과 트라페준타 제국만 갈아버린채 그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니케아 제국은 몽골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요안니스는 불가리아로 관심을 돌렸고 역시나 몽골에게 짓밟힌데다 차르 칼로얀이 죽고난 후 혼란을 겪고 있던 불가리아도 그에게 무릎을 꿇게 되어 요안니스는 마케도니아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거기에 테살로니키 제국이 항복하면서 남은건 이피로스 뿐이었는데, 이피로스의 지역 특성상 장기전이 될 것을 우려해 우호조약을 체결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테오도로스가 충동질을 일으켜 우호조약이 박살나 버렸고 이에 단단히 화가 난 요안니스가 1253년에 이들을 격파하고 이피로스가 불가리아에게서 뺏은 영토를 다시 가져간다. 테오도로스는 감옥에 갇힌 채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고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아들과 요안니스의 손녀딸이 결혼하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된다.[96]

이기간 동안 니케아 제국의 경제 또한 성장한 상태였다. 이는 요안니스 본인이 검소했기에 가능했다. 우선 그는 황실 직속 토지 외에는 일절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97]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에 이런 정책이 자칫 군대를 약화시킬 수 있지 않느냐고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시민의 부유함이 궁극적인 국가 방위의 근본임을 알았기에 세금을 걷지 않는 대신 자신부터 검소한 생활을 하여 모범을 보였다. 단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위해서는 서로 희생하는 게 있어야 한다면서 외국에서의 사치품 수입은 일절 금지했고 자급자족 생활을 권장했으며, 요안니스 본인이 직접 농장을 운영하여 살림에 보태 썼다. 농장에서 나온 달걀을 팔아 그 돈으로 보석을 사서 작은 왕관을 만들어 공식 석상에서 아내 이레네에게 선물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황제의 검소함은 제국의 경제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몽골의 침략으로 대부분의 경쟁자들이 힘을 잃게 되고 이피로스도 고개를 숙이면서 이제 요안니스에게 남은 것은 도시, 즉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뿐이었다. 라틴 제국은 포이마네논 전투에서 박살난 것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기에 더욱 적기였다. 실제로 1235~6년 당시 한 번 공격을 시도했다가 장 드 브리엔의 악전고투와 라틴 제국의 자리에 적성국이 생기는 것을 우려한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실패했던 적이 있었기에 더욱 절박했다. 열정적으로 원정을 준비했던 그였지만 고질적인 간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그는 간질로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62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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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3세가 죽은 직후의 니케아 제국, 사실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하면 4차 십자군 직전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요안니스 3세 이후 니케아 제국은 다음 황제인 테오도로스 2세는 당대 최고의 학자인 니키포로스 블렘미데스에게서 교육을 받아 문학, 신학, 과학에 관해 방대한 문헌을 집대성할 만큼 지적인 인물이었으나 아버지 요안니스 3세에게 물려받은 간질 증세로 인해 황제로서의 권력을 크게 행사하지 못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남은 라틴 제국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대신 내치에 주력해야 했지만 간질로 인해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최대한 강력하고 무자비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본능적으로 귀족들을 불신했던 그는 그들을 최대한 무시하고 그 대신 평범한 가문 출신의 소규모 관료 집단에 의지했다. 특히 요르요스 무잘론과 그의 두 동생인 테오도로스와 아드로니코스는 테오도로스 황제에게 큰 힘이 되어줬다. 그러나 테오도로스가 세계총대주교로 엄격한 금욕주의자인 아르세니오스를 임명한 것은 교회의 큰 반발을 샀을뿐더러 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꾀하던 아버지의 정책을 허물어버리는 결과를 야기했다.

외치 역시 이슬람 세력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니케아 제국을 위협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테오도로스는 이슬람 세력을 걱정할 필요 없이 불가리아 제국과 라틴 제국 전선에 집중했다. 먼저 불가리아 제국의 경우, 그는 1255년부터 1256년까지의 원정을 개시해 강화 조약을 유도했다. 1256년 불가리아 제국 차르 미하일 아센 1세가 살해되고 이듬해에 콘스탄틴 티흐라는 귀족이 차르 자리를 계승한 뒤 테오도로스의 딸 이리니와 결혼하자,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개선되었다. 또한 요안니스 바타체스의 딸 마리아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군주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아들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와의 결혼을 성사시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의 대립을 회피하고자 했다.

그런데 테오도로스는 이피로스와의 결혼 협상 도중 막바지에 결혼 조건으로 두라초와 세르비아를 요구했다. 이에 미하일 2세는 격분하여 테살로니카 공격을 준비했고 그의 선동으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도 그를 지지하고 나섰으며 마케도니아도 며칠 뒤에 가담했다. 신하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테오도로스는 그를 싫어했고 이미 1256년 초에 그에게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도 했다. 이때문에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룸 술탄국 측으로 피신해서 술탄의 기독교 용병들을 지휘하여 몽골군과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테오도로스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받고 소수 병력을 맡겼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소규모의 병력으로도 용감히 싸워 두라초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피로스의 공세를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하일은 이피로스군이 테살로니카의 성문에 이르는 걸 허용했다는 이유로 니케아에 소환되어 파문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

1258년. 테오도로스는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간질로 인한 병사로 여겨지지만, 독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맏아들 요안니스 4세는 아직 어린아이였으므로, 테오도로스는 요르요스 무잘론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테오도로스가 죽은 지 불과 아흐레 뒤에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열린 황제 추도식 때 귀족들은 무잘론과 그의 형제 한 명을 제단에서 살해하고 그들의 몸을 난도질해버렸다. 곧이어 궁정 혁명이 일어났고, 귀족들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감옥에서 석방시켜 요르요스가 맡으려 했던 섭정을 대신 맡게 했다.

테오도로스 2세 치세 때 황제의 미움을 받아 견제를 받고 있었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섭정으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미하일은 요안니스 4세의 섭정단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한다. 또한 선황제에게 부당하게 의심받았다는 여론과 마그니시아의 재무성에 있던 자금을 뿌리고 국유지를 하사하는 등 미친듯이 뇌물을 뿌린 덕분에 하일은 사회 각층의 지지를 받았다. 귀족층은 물론이고 윤리적으로 까다로운 교회, 일반 신민, 심지어 요안니스 4세에게도 말이다.

이후 대관식도 못 치렀던 요안니스 4세는 같은 해 12월, 미하일과 공동황제로 대관식을 치렀다. 당연히 실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궁정의 어느 누구도 공공연하게 알고 있었다 미하일 8세로 즉위를 한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1259년 주변 국가들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미하일 2세와 시칠리아 왕국 그리고 아케아-아시나 공국, 테살리아의 연합군대를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니케아의 공동황제인 미하일 8세가 대승을 거두고 만다. 그 뒤 1261년 8월 15일에 미하일 8세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라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로마 제국을 부활시킨다.

2.4. 동로마 제국의 부활과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성립

1261년 8월 15일 미하일 8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의 환도식을 거행하면서 동로마 제국을 다시 부활시켰고,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와 함께 수복된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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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8세의 정식 대관식(1261년 수복 직후 대관식
출처: ΑΠΑΝΤΑ ΟΡΘΟΔΟΞΙΑΣ, Τρίτη, 15 Αυγούστου 2017, Coronation of Michael VIII Palaiologos in Hagia Sophia - 1261)

그리고 여기까지가 미하일 8세의 전성기였다. 그 이후 미하일 8세는 자기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전선을 여러 개로 만들고 만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미하일은 1204년 이전으로 제국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수도의 성벽을 수리하고, 교회와 병원을 정화하고, 다시 유럽령 영토가 제국의 중심부가 될 수 있도록 복구 및 정복사업을 펼치는 등 대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것이 당연지사. 기존의 중심지였던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지역으로부터 인력과 자원이 유럽으로 빠져나가자 소아시아의 주민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구 제국령 수복을 위한 군비확장 때문에 중과세가 이어지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라스카리스 황실에 대한 처우도 불만을 키웠다. 11살의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는 눈이 뽑혀 폐위당했고,[98] 니케아 제국은 지방정권[99]으로 격하되었다. 섭정 명의로 황제가 된 자가 정통 황제를 하극상했음은 물론, 영웅 테오도로스 1세와 명군 요안니스 3세, 그리고 그들의 후손 테오도로스 2세요안니스 4세의 가계가 부정당한 것이다.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은 시점에서 라스카리스의 정통성을 잃었고, 어차피 욕 먹을 동네의 자원을 쪽쪽 빨아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쏟아부우며 마지막 지지까지 상실했다.

결국 다양한 요소가 결합한 끝에, 이러한 불만은 요안니스 4세의 후견인이었던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 세계 총대주교의 황제 파문으로 폭발했다. 명목상으론 요안니스 4세를 실명시키고 폐위시킨 것이 이유였으나, 소아시아의 주민들은 니케아 제국에 대한 향수와 현정부에 대한 실망을 가진 차에 중과세까지 이어지자 아르세니오스 세계 총대주교에게 공감하기 시작했다.

파문당한 황제는 세계 총대주교에게 '양해'를 구하고, 파문을 거두어 달라 청했다. 이에 꼬장꼬장하고 금욕적인 세계 총대주교는 황제가 굽히고 참회할 것을 - 마찬가지로 쿠데타로 제위를 차지했던 알렉시오스 1세가 거친 옷을 입고 맨바닥에서 자며 40일 동안 사죄했던 것처럼 - 요구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세계 총대주교가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자들과 결탁한 것이라 의심해 버렸고, 4년간이나 대립각을 세웠다. 1265년에서야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회의(Synod)를 열어 아르세니오스를 면직시켰으나 후임 세계 총대주교도 황제와 대립하여 파문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1267년 새로이 세계 총대주교가 된 요시포스가 파문을 거둠으로서 공식적인 갈등은 해소되었으나 여론은 악화 될대로 악화되어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이유가 근간에 깔린 종교계의 아르세니오스 분열(Arsenite Schism, Arsenian schism)은 50여년 간이나 이어져 극심한 사회적 분열을 초래했으며, 말기 제국사에 큰 그림자를 남기게 된다.

'집토끼'인 소아시아령이 극심한 여론 악화와 사기저하로 흔들리는 와중, 동쪽으로부터 튀르크의 침식이 시작되었다. 미하일 자신이 1261년에 수복한, 요안니스 3세 시절 부터 시작한 마지막 동방 수복의 마무리가 된 라오디키아(Laodikeia) 지역이 튀르크 부족들에 의해 넘어간 것이다. 라오디키아 자체는 경제적으로 중요하지도 않았고 동부 최전방에 불과 하였으므로 제국 측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중요한 것은 유럽의 전선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베네치아 공화국이 후원하는 라틴 제국을 무너트렸으므로 제노바 공화국과 연합하여 해전이 주가 되는 전선이 형성되었다. 에게해의 섬과 베네치아 조계지를 수복하기 위한 이 전선은 엄청난 예산을 잡아먹으며 일진일퇴의 공방으로 1277년까지 이어졌고, 평화조약 이후에도 베네치아가 적대적으로 돌아서는 등 제국의 골치거리가 된다.

남은 망명정권인 이피로스 군주국과의 전쟁은 유럽에서 주 전선이 되었다. 제국군 총사령관이 패하자 동생 요안니스가 대타로 나갔고 미하일 본인도 친정하는 등 관심을 아끼지 않았고, 결국 이피로스는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거기에 남부 그리스에 대한 원정도 이어졌다.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포로가 된 기욤 공작을 교황의 중재로 풀어주기로 하고 영토 할양을 약속받았으나, 이단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교황의 허가를 받은(...)약 주고 병 주고 기욤 공작이 영토 할양을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피로스 전선이 비교적 쉽게 풀려 사실상의 주 전선이 된 남부 그리스 전선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1264년이 되자 당분간의 진격은 정지되었다.

전선 자체는 3중(...) 전선이었으나, 외교적 적대 관계는 불가리아의 북, 룸 술탄국과 튀르크계 공국 및 부족의 동, 베네치아의 남, 이피로스와 주변의 테살리아, 아케아-아시나, 세르비아, 그리고 바다 너머 시칠리아가 개입한 서부까지... 동서남북뭐이미친으로 고립된 희대의 다중 전선이었다. 물론 동로마는 그 경제력 탓에 사방에서 약탈자들이 몰려오는 게 일상이었고, 4면전선은 전통이었다. 그러나 사방의 적을 거꾸러트리며 패권을 외치던 1025년, 1180년의 제국과 막 지역 강국을 벗어난 1261년의 제국은 달랐다. 그러나 미하일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 벅찼음에도 전선은 유지되었고 최대한 국력을 기울여 전선 그 자체를 없애는 정책 자체도 타당해 보였으며 기반인 소아시아가 유지되었기에 아직까지는 할 만 했다. 그러나 한계가 오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260년대의 제국은 베네치아와 겨루는 해군을 운용하면서 지역 수비를 담당하는 지방수비군을 두었고, 전선에 나갈 야전군을 따로 운용하면서 1만 미만 수천 단위로 3개의 전선에 동시에 파견했다. 거기다 펠라고니아 전투나 남부 그리스 원정에서 보듯, 제국이 작정하고 원정군을 조직하면 1만 수천을 넘겼다. 정예함이 예전만은 못했고 쉬이 집중하기 힘든 여건이었으나 어쨌든 군사력은 여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한계가 왔다. 소아시아의 사기가 떨어지고 제국 정부의 관심이 유럽으로 쏠린 사이 튀르크 공국과 부족들이 1261년의 라오디키아 함몰을 시작으로 동부 국경을 본격적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의 영토가 아직 복구 중이었고 심지어 전장이 되기도 하여 사실상의 인적·물적 기반은 소아시아 지역이었기에 이는 중대한 사태였고, 미하일은 소아시아로 군을 보내 방어선을 정비하고 튀르크족을 몰아내면서 국경너머로 응징원정을 가했다. 그러나 이들을 통제할 룸 술탄국은 통제력을 상실한채 분해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고 일 칸국의 위협에 튀르크인들은 비교적 만만한 서쪽으로 재차 넘어왔다. 유럽의 전선을 유지한 채로 소아시아에 투입할 여력은 없었고 사실상 제국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미하일은 외교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일단 1265년부터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동년 룸 술탄국의 상위 군주인 일 칸국의 칸에게 미하일의 딸을 시집 보냈고 1266년에는 불가리아의 상위 군주인 킵차크 칸국의 칸에게 다른 딸을 시집 보냈다.[100] 튀르크족을 억제하기 위한 이러한 일련의 외교는 이후 불가리아의 북방 전선을 안정시켰고 칸국들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내는 등의 결실을 보았으나 당장 급한 동부 국경의 위기를 진압하는데는 별 효과가 없었다.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도 진행되었다. 이단으로 규정되어 서유럽과 단절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회 일치라는 카드를 꺼내들었으나, 시칠리아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비테르보 조약(1267년)이 체결되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기존의 적인 시칠리아,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외에도 세르비아 제국, 헝가리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이 참여하였고 '이단 황제를 내쫓고 정통한 라틴 제국의 황제를 복귀시키기 위한 십자군 원정'이 계획되었다. 에게해에서는 베네치아와, 남부 그리스에서는 아카이아 공국과의 소모전이 다시 일어났다.

더 이상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던 미하일은 유럽의 전선을 안정화 시키고 동부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교황청에 굽히는 자세를 취했다.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의 원정이 태풍으로 좌절되고 신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올라 교회 일치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자 미하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협상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거룩한 로마 교회는 전체 가톨릭교회 위에 최고의 충만한 수위권과 우선권을 가졌다. 로마 교회는 이러한 권한을 사도들의 으뜸이요 대표인 복된 베드로의 존재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진정으로, 그리고 겸손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로마 교회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진리를 수호할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앙에 관해서 야기되는 논쟁들은 로마 교회의 결정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


-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읽혀진 미하일 8세 팔레올로스의 신앙 선서

그렇게 1274년에 겉으로나마 교회 일치가 달성되어 외교적인 지위가 격상되었다. 덕분에 여력이 생기자 다시 알바니아의 시칠리아 세력을 밀어 붙였고 남부 그리스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이 실시되었다. 지상전의 경우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와 외교적으로 굴복시키는 정도로 그쳤으나 해전이 대체로 승리로 끝나서 1277년에는 베네치아와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먼저 외교적인 이익을 위해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 해치운 교회 일치였기에 1274년의 통합 당시부터 국내의 반발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하일의 파문을 거두었던 요시포스 총대주교를 필두로 교회 일치 반대파가 생겨났으며 황제에게 적대적이던 아르세니오스파 역시 교회 일치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내부의 분열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동쪽에서는 다시 튀르크의 침입이 이어졌다. 1260년대 중반 잠시 잠잠했던 동부국경은 1270년을 전후하여 파플라고니아, 카리아, 도리아 지역의 붕괴로 재앙의 막이 올랐으며 제국 정부 측은 일단 중요도가 높은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지역이나마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팽창 된 군비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었고 지방 수비군이 와해 되었으며 튀르크를 쫓아낼 전투력과 기동력을 갖춘 야전군은 유럽에 묶여 움직이지를 못했다.

국외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그레고리오 10세가 1276년에 죽자 후임 교황들은 동로마 종교계의 분열된 여론을 인식하고는 겉으로만 일치됐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미하일 8세가 외교적인 이득을 위해 자신들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결국 교회 일치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으며 알바니아 지역에서는 다시 카를루 1세의 시칠리아군이 침략해왔다. 1280년 여름부터 시작된 베라트 공방전이 1년의 지루한 공성전 끝에 지쳐 나가떨어진 시칠리아군을 제국군이 추격하면서 승리로 막을 내렸으나, 이미 제국 내부의 분열은 극심했고 제국의 대외관계는 카를루 1세의 앙주 가문 편을 드는 신임 교황 마르티노 4세의 파문으로 다시 고립 상태가 되었다. 이미 1279년 교황청-시칠리아 왕국-베네치아 공화국[101]이 합의한 오르비에토 조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한 해로 원정 계획으로 발전해 있었고, 카를루 1세는 아카이아 공국을 합병하여 원정로를 확보하고 라틴 제국의 명목상 황제를 사위로 들여 명분까지 확보했다. 동서남북으로 고립된 악몽의 재래였다.

1282년의 제국은 더 이상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재정의 근간인 소아시아가 튀르크의 침입으로 붕괴되는 와중 유럽의 전선은 한계까지 확장되어 야전군이 묶인 상태였고, 베네치아와의 전쟁상태가 다시 시작되어 해군도 줄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종교계의 분열로 내부의 혼란이 계속되었고 재정은 이미 파산직전인데다 외교적으로는 다시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시칠리아 왕국카를루 1세였다. 서쪽의 위협을 제거해야 동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미하일은 대규모 군사원정을 반복하는 시칠리아 왕국도 국력의 소모가 심할 것이라 보았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명분을 가진 아라곤 왕국페드로 3세[102] 를 충동질했다. 전쟁을 위해 반복 된 물적·인적 수탈로 불만이 쌓여있던 시칠리아 인들은 동로마 요원의 공작으로 더욱 불만을 키워갔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동로마의 자금을 밑천삼아 함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대망의 1282년 3월 30일, 팔레르모에서 축제를 즐기던 시칠리아 인들에게 마침 파견되어 있던 프랑스 군인이 다툼을 벌이다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팔레르모 전역에 저녁기도를 위한 종이 울렸다. 만종 소리를 시작으로 시칠리아 섬 전역에 동시다발적인 반란이 일어나 프랑스인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살해당했고 4월 28일에는 마지막으로 버티던 메시나까지 점거당해 원정을 위해 주둔 중 이던 함대까지 불타버렸다.

주민들은 자신들을 교황에게만 충성하는 자유민으로 선언하였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카를루 1세가 군대를 보내자 '마침' 가까운 튀니지에 주둔하면서 '해적을 소탕하려 한다'며 교황의 추궁을 회피하던 페드로 3세의 함대를 받아들였다. 결국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페트루 1세' 타이틀을 추가하는데 성공했고 나폴리로 도망친 카를루 1세는 이후 잃어버린 시칠리아를 되찾는데 주력하면서 미하일의 의도대로 카를루의 동방원정은 일단락되었다.[103]

서쪽의 복잡한 외교관계가 그럭저럭 단순해지고 위협도 사라지자 미하일의 관심은 동쪽으로 향했다. 야전군과 지휘관이 부족하여 실시하지 못했던 방위선 점검과 응징원정을 행하며 소아시아의 상황을 살폈고 유이민들을 불러모았으며 더 나아가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프리기아 지역에 대한 원정도 계획했다.

그러나 58세의 황제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 했다. 군을 이끌던 미하일은 쓰러져 1282년 트라키아의 파코미오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지를 못했고, 동서남북의 적과 23년간 쉴새없이 싸웠던 황제는 그렇게 죽었고, 공동황제였던 아들 안드로니코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단독 황제가 된 후 안드로니코스는 부친이 저지른 실책을 수습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282년 12월 25일 교회 일치 정책을 지지했던 총대주교 요안니스 11세를 해임하고, 1285년 블라허나이 공의회를 개최하여 서방 교회의 필리오케 교리를 부정하는 내용의 신조를 발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르세니오스 분열을 종식하려 했지만, 갈등의 골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총대주교들이 주교들의 대립을 수습하지 못하고 잇따라 사임하는 결과만 야기했다.

한편, 서방 전선은 세르비아의 맹공으로 위태로워졌다. 1283년,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스테판 드라구틴 형제는 흐리스토폴레 인근의 스트루마 일대의 세르지 일대를 관통하여 에게 해 연안으로 진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요새에 틀어박혔고, 그들은 포로와 재물을 실컷 받아낸 뒤 마케도니아 중부로 후퇴하여 겨울을 보냈다. 그 후 드라구틴은 영지로 돌아갔고, 밀루틴은 1284년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는 데바로, 키체포, 포레시를 점령하여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북부를 공략하였으며, 뒤이어 동로마 제국의 요충지인 스트루미카, 프릴레프, 오흐리드, 크로야를 공략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에 별 대항도 못하다가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협약을 맺고 딸 시모나다를 밀루틴의 왕비로 들이게 하고 나서야 겨우 공세를 멈추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호 인해 재정 위기와 화폐 가치 하락이 되자 1285년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증세와 함대 축소를 결의하였다. 그의 치세동안 히페르피론의 가치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는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세금을 올리고 면세자들의 수를 줄이며 약 80척을 보유하던 해군을 해체한다. 따라서 이후 동로마 제국은 제노바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에 의존하게 되었다. 더욱이 때 해체된 해군 전력이 나중에 오스만 해군으로 편입되거나 해적이 되어 제국에게 향한 칼날이 되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소아시아를 사실상 방치했던 부친과는 달리 튀르크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우선 궁정을 소아시아로 옮기고 장병들을 격려했으며, 명장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를 기용해 투르크군을 무찌르게 했다. 필란트로피노스는 메안드로스 강 계곡에서 투르크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으며, 멘테세 토후국으로 진격하여 멜라노디온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1295년 가을, 안드로니코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붙들려 한쪽 눈이 뽑히고 유폐되었다. 그가 사라지자, 소아시아의 동로마군은 지리멸렬해졌다. 그와중에 오스만이라고 하는 한 튀르크 부족장이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의 쇠위트에 오스만 베이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뒤 제국령 비티니아를 향해 공세를 가했고 이들의 공세에 의해 급기야 소아시아의 대도시인 니코메디아까지 포위되자, 큰아들이자 공동 황제 미하일 9세가 이끄는 동로마 군을 투입했으나 바페오스 전투에서 제국군에 고용된 알란 용병대와 민병대가 서로 호흡이 맞지 않는 바람에 패배했다.

1296년 제노바인들이 황제의 묵인 하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갈라타 지구의 베네치아 상인들을 학살하자, 1296 ~ 1302년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동로마 - 제노바 측이 패하여 산토리니 섬 등이 베네치아 령이 되었다.

3. 발칸 서부

4. 발칸 동부(불가리아)

4.1. 제1 제국의 몰락과 멸망

1000년경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제1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아드리아 해에 면한 제국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와 협의한 끝에 그를 달마치야 대공에 임명하여 달마치야 해안 지대 전체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로써 해안의 그리스어권 도시들의 안전을 확보한 뒤, 황제는 불가리아를 확실히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1001년 여름, 그는 베로이아 요새를 공략했고, 테살리아에서 불가리아 수비대를 격파했다. 또한 니키포로스 시피아스 휘하의 군대를 발칸 산맥의 북쪽으로 파견하여 프레슬라프와 플리스카를 탈환했다. 이로써 불가리아 북동부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 들어갔다. 사무일은 적의 수가 워낙 많아서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매복이나 기습 공격으로 일관했지만,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의 전훈을 뼈저리게 익힌 바실리오스 2세가 워낙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003년 불가리아와 헝가리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당시 헝가리 대공 게저가 사망하자, 사무일은 게저의 아들 이슈트반 1세 대신 줄러와 코파니를 헝가리 왕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1세가 내전에서 승리했고, 자신의 정적들을 도운 것에 보복하고자 불가리아 제국의 북쪽 영역인 다뉴브 강 북서쪽을 침략했다. 이로 인해 불가리아는 헝가리와 동로마 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고, 전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 때를 틈타 불가리아 북서부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비딘을 포위 공격해 8개월만에 함락시켰다. 사무일은 보복으로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공격해 그 일대를 약탈했다. 1004년, 바실리오스 2세는 스코페로 이동한 뒤 바르다르 강 반대편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적을 야습해 큰 타격을 입혔다. 그 후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페르니크 요새를 포위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트라키아로 철수했다. 사무일은 보복 차원에서 테살로니키를 공격하여 테살로니키 총독 요안니스 샬두스를 생포했다.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불가리아는 내분을 겪기 시작했다. 디라키움 총독 아쇼트는 사무일의 장인인 요안니스 크리셀리오스, 아내이자 사무일의 딸 미로슬라바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아쇼트와 미로슬라바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였고, 크리셀리오스는 동로마 제국 사령관 유스타시오스 다프노멜리스에게 디라키움을 내주었다. 1006~1007년,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영역 깊숙히 침투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1009년 테살로니카 근방의 크레타에서 사무일의 군대를 괴멸시켰다. 황제는 이후에도 불가리아의 영토에 매년 침공하여 진군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사무일은 이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소모전을 지속한다면, 동로마 제국에 비해 국력이 현저히 약한 불가리아는 패망하고 말 것이었다. 매복 공격으로는 아무런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바실리오스 2세가 영토를 침략하기 전에 길목을 차단하기로 했다. 1014년, 그는 클레이디온 협곡을 점거하여 두꺼운 나무 벽을 세우고, 적이 길고 위험한 우회로로 가도록 유도했다. 그해 여름 클레이디온 협곡에 도착한 황제는 나무벽을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자만 기록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사무일은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네스토리차 장군에게 테살로니키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차 장군은 클류치 인근에서 동로마군에게 패배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나무벽을 어떻게 뚫을 지를 놓고 고심했다. 이때 니키포로스 시피아스가 일부 병력을 몰래 숲이 우거진 언덕 사면으로 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능선을 따라 불가리아군의 뒤까지 가서 협곡으로 내려간 다음 후방을 기습하자는 것이었다. 황제가 승낙하자, 시피아스는 엄선된 병사들을 이끌고 몰래 본진을 빠져나간 뒤 숲을 가로질러 가다가 협곡의 반대편 끝, 즉 불가리아군의 후위까지 간 뒤 숲에서 나왔다. 7월 29일, 그는 공격을 개시했고 황제도 동시에 나무벽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불가리아군은 협공을 견디지 못하고 패주했다. 이때 사로잡힌 병사는 14,000~15,000명에 달했다. 사무일 역시 잠시 포로로 잡혔다가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의 활약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바실리오스 2세는 바르다르 계곡을 완전히 점령하려면 스트루미차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에게 스트루미차 주변의 요새와 성곽들을 정리하도록 했다. 자신은 직접 스트루미차를 공격하기로 했다. 테오필락토스는 요새들을 손에 넣었지만 곧이어 가브릴 라도미르의 복병을 만나 대패하고, 테오필락토스 본인도 전사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가브릴 라도미르가 직접 창으로 테오필락토스를 찔러 살해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적지 않았는지 바실리오스 2세도 스트루미차의 포위를 풀고 철군했다.

에드워드 기번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바실리오스 2세는 1만 5천 명의 포로를 100명씩 150개조로 나눠서 99명은 두 눈을 모두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나머지 1명은 한 눈만 뽑은 뒤 애꾸 한 명이 나머지 99명을 인솔해서 돌아가게 했다고 한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이것은 과장되어 전해진 이야기로 간주하지만, 불가리아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건 사실이다. 사무일은 전투 직후 쇠약해졌고, 1014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가브릴 라도미르가 차르가 되어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10월 24일 사무일의 사망 소식을 접한 바실리오스 2세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군의 방향을 돌려 마케도니아로 진격해 크르나 계곡을 거쳐 가브릴이 있는 비톨라로 향했다. 비록 비톨라 요새를 공략하진 못했지만, 차르의 궁전을 불태우고 철수했다. 1015년 초, 가브릴은 바실리오스 2세에게 앞으로 황제에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이를 의심하여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장군을 모글레나로 파견해 적군을 섬멸하고 모시노폴리스에서 트리아디차로 진군하여 그 일대를 평정하고 보아나 요새를 점거하도록 하였다.

동로마군이 뒤이어 모글레나 요새를 포위하자, 가브릴은 구원군을 이끌고 요새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포위망이 워낙 견고하여 구원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가 압박을 가함으로써 적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지만, 동로마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수일 간 테오도시오스 성벽 주위를 맴돌다가 별 수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모글레나 요새는 함락되었고, 가브릴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워졌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차르가 되는 데 도움을 주고 앞으로 호의를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넘어간 블라디슬라프는 1015년 8월 페트리스크 마을 근처의 숲에서 사냥하던 가브릴을 습격해 살해하였다. 그는 가브릴의 가족과 지지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차르가 되었다. 이후 1016년에는 차르 사무일의 가신이자 사위였던 두클랴 대공 요반 블라디미르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그는 차르에 오른 뒤 바실리오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평화 협약을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그를 믿지 않고 암살자를 보냈으며, 암살이 실패하자 1015년 말 군대를 이끌고 오스토보와 소스크로 진격해, 펠라고니아 평원을 황폐화하고 수많은 불가리아인을 포로로 잡았다. 블라디슬라프는 오흐리드를 버리고 프레스파 요새에서 버텼다. 바실리오스 2세는 오흐리드를 점거한 뒤 좀더 공세를 이어가려 했지만, 불가리아군이 배후를 습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모시노폴리스로 귀환하였다.

블라디슬라프는 비톨라를 새 수도로 선택하고 요새화한 뒤, 1016년 비톨라로 쳐들어온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페르니크를 88일간 포위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1017년 바실리오스 2세의 요청을 받아들인 키예프 루스군이 불가리아 북동부를 침공하여 프레슬라프를 점령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 사이에 남쪽으로 진군하여 카스토리아를 포위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사절을 파견하여 루스군을 아군으로 끌여들이려고 애쓰는 한편, 페체네그와 연합하여 테살로니키를 공략하려 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페체네그가 다뉴브 강을 건너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카스토리아 포위를 풀고 오스트로보 호수 근처로 이동하여 페체네그와 대치했다. 페체네그는 곧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바실리오스 2세는 남쪽으로 돌아가서 사무일의 궁전이 있던 세티나를 점령하고 그곳에 보관된 식량을 다수 확보하였다. 그해 가을,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의 별동대를 기습 공격했지만, 바실리오스 2세가 친히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1018년 2월 디라키움 요새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이던 중 전사했다. 장남 프레시안 2세가 뒤를 이어 차르가 되었지만, 대다수 귀족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귀순했다. 프레시안은 두 남동생인 알루시안과 아론과 함께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토모르 요새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어머니 마리아 황후 마저 불가리아 총대주교 다비트 등과 함께 바실리오스 2세에게 귀순하면서, 그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바실리오스 2세의 동로마군은 토모르 요새를 4개월간 포위하였고, 결국 프레시안은 1018년 8월 형제들과 함께 항복했다. 그렇게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로마 제국에 의해 병합되었다.

4.2. 동로마 제국의 통치기

바실리오스는 마리아 황후와 프레시안, 알루시안, 아론 등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간 뒤 상당히 우대했다. 마리아 황후는 제국에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인 조스테 파트리키아에 봉해졌고, 프레시안 등 아들들은 주요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또한 불가리아 귀족들의 자제들은 동로마 여인들과 결혼하였고, 딸들은 동로마 남편감을 찾아주어 제국 귀족층에 편입시켰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가리아 속주 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세금을 인하하고 곡물로 현물 납부할 수 있도록 하였고,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대주교를 황제가 서임하게 된 것 외에는 건드리지 않아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하였는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

1025년 콘스탄티노스 8세가 즉위한 뒤, 프레시안은 부켈라리오스 테마의 총독을 지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실리오스 스클리로스와 말다툼을 벌이다 결투까지 벌였다. 콘스탄티노스 8세는 두 사람을 프린스 제도로 유배했는데, 스클리로스는 도중에 도망치려 했다가 체포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몇년 후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1029년 테오도라와 결혼하여 로마노스 3세를 축출하고 황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었고, 마누일 수도원으로 끌려간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스테 파트리키아로서 귀한 대우를 받던 어머니 마리아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수도원에서 조용히 지내다 1061년경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한 동안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 대해 별다른 저항이 없다가 미하일 4세가 즉위한 이후 빈번한 전쟁으로 인한 지출을 땜질하기 위해 제국 전역에 과세를 실시했는데 이는 불가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형이자 환관인 요안니스 오르파노르포스는 과도한 세금을 매긴 데서 그치지 않고 바실리오스 2세 이래 현물로 세금을 납부해오던 그들에게 현금 납부를 강요했다. 이로 인해 세금을 마련하기 곤란해진 불가리아인들은 제국의 통치에 반감을 품었다. 결국 1040년 페터르 데얀이란 인물이 이러한 민심을 읽고는 현재의 베오그라드에서 불가리아의 부활을 선포하고 자신을 차르 페터르 2세로 칭하면서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페터르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불가리아 차르 가브릴 라도미르의 아들이자 바실리오스 2세를 상대로 혈전을 벌였던 사무일의 손자라고 한다. 또한 어머니는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1세의 여동생 마르가리타라고 한다. 1015년 부친이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살해당하고 차르 자리를 찬탈당한 뒤 유폐 생활을 하다가 1018년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당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 어느 동로마 귀족하인이 되었고, 기회를 틈타 탈출하여 어머니의 나라 헝가리로 돌아간 뒤 다시 불가리아로 잠입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의 주장의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본다. 이반 블라디슬라프가 사촌 라도미르를 시해하고 차르 직위를 찬탈한 뒤, 라도미르의 자식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블라디슬라프는 세르비아계 두클랴 대공 요반 블라디미르 역시 라도미르의 사위라는 이유로 죽여버렸다. 학자들은 페터르의 정체는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한 뒤 불가리아에서 조용히 지내던 농민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다만 어째든 봉기를 일으킨 페테르와 불가리아인들은 니시스코페를 공략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억류되어 있던 그의 사촌 알루시안이 탈출한 뒤 반란군에 합류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불가리아 서부에서 비잔티움 세력을 몰아낸 다음 북부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해 말, 그들은 다라키온을 손에 넣고 아드리아 해로 나가는 길을 확보한 후 곧이어 남쪽의 레판토 만까지 진출한 후 동쪽의 테베를 공략하려 했다.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미하일 4세는 친정을 선포했다. 당시 그는 괴저병으로 두 다리가 끔찍하게 부어올라 거의 마비 상태였고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심했다. 형제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 치세에 제국의 영토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면서 적어도 줄어들게 놔두지는 않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반면 페터르와 알루시안은 서로 분열했다. 페터르는 알루시안에게 테살로니키를 공격할 군대를 주었지만, 알루시안은 동로마군의 반격으로 참패하고 오스트로보로 돌아왔다. 페터르는 크게 실망하여 알루시안을 질책했다. 그러자 알루시안은 페터르가 자신을 숙청할 것을 우려하여 1041년 어느 날 밤 저녁 식사 중 페터르가 술에 취한 틈을 타 부엌칼로 그의 눈을 찌르고 코를 잘랐다.

그 후 알루시안은 봉기가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황제에게 항복할 테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달라고 제안했다. 이리하여 미하일은 1041년 초에 눈과 코를 잃은 페터르를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거느리고 수도에 개선했다. 그는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의 수괴로서 처형되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1072년 불가리아 총독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의 심한 수탈을 견디다 못하자 불가리아인들은 다시 포모라블제와 포바르다르제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디오클레아(달마티아) 대공이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수석호위관의 직책을 부여받은 미하일로 1세의 아들인 콘스탄틴 보딘을 자신들의 차르로 추대했고, 콘스탄틴은 자신을 페테르 3세로 자칭했다.

불가리아의 두번째 반란은 두 갈레로 나눠졌다. 한 부대는 페터르 3세 보딘이 직접 통솔하여 니시로 진격했고, 두 번째 부대는 보이보다 페트릴로의 지휘하에 오흐리드를 거쳐 카스토리아로 진격했다. 페트릴로는 오흐리드와 데볼을 전투 없이 점령했지만, 카스토리아에서 슬라브 출신의 동로마 장군 보리스 다비트에게 패퇴했다. 한편 페터르 3세 보딘은 니시로 진군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했고, 니시에 도착하자마자 복종하지 않은 자들을 죽이거나 고문했다. 또한 로마에 사절을 보내 정교회가 아닌 가톨릭을 따르겠다고 선언하여 교황의 지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미하일 사란테스 휘하의 동로마군이 스코페를 포위했고, 보이테흐는 항전을 포기하고 도시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페터르 3세 보딘에게 속히 스코페로 와달라고 청했다. 보딘은 곧장 그곳에 가다가 타오니오스에서 동로마군의 기습으로 붙잡혔다. 그 후 페터르 3세 보딘은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고, 성 세르지오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안티오키아로 추방되었다. 보이테흐 역시 모든 게 발각되면서 체포 후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아버지 미하일로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동로마 장군이며 자신의 딸과 결혼한 랑고바르도풀로스에게 사람을 보내 아들을 중도에서 납치하여 자신에게 데려와달라고 요청했다. 랑고바르도풀로스는 그 요청에 따랐지만, 동로마군에게 패퇴했다.

1078년, 베네치아 선원들이 페터르3세 보딘을 구출한 뒤 미하일로에게 보냈다. 당시 두클랴의 왕이었던 미하일로는 1081년 사망했고, 그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페터르 3세 보딘은 미하일로의 동생 라도슬라프의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을 모조리 진압하고, 위협적이라고 판단되는 친척들을 대거 숙청했다. 안나 콤니니는 그를 "달마티아군주"라고 칭하면서, 알렉시오스 1세와 동맹을 맺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군을 저지했지만 이후 노르만인들이 동로마 영토 깊숙이 진군하는 걸 방치하는 등 불안정한 동맹자였다고 서술했다. 실제로 디라키움 공방전 때 동로마 제국 측에 섰지만 그저 전투를 관망하기만 하다가 동로마군이 패배하자 즉시 자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바리 출신의 친 노르만 귀족의 딸 자크빈타와 결혼했고,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영역을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1085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사망하면서 전쟁이 종결된 후, 동로마 제국은 두클랴를 응징할 태세를 갖췄다. 그들은 1089년에서 1091년 사이에 원정을 감행해 두클랴 왕국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보스나, 라슈카 등을 포함한 영역을 내주고 다시는 제국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맺어야 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콘스탄틴은 불가리아 차르직을 포기하면서 반란 또한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이후 불가리아는 마누일 1세 때까지는 제국에 복종해야 했다. 그러다가 1180년 마누일이 어린 아들인 알렉시오스 2세를 남기고 죽으면서 동로마 궁정은 누가 실세가 되는지를 두고 각기 권력 쟁탈전에 돌입하다가 마누일 1세 생전 그의 자리를 여러번 찬탈하려고 여러번 발악한 안드로니코스 1세가 동로마 제국의 실권을 차지하다가 1183년 9월 마침내 알렉시오스 2세를 축출하고 동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4.3. 제2제국의 건국

하지만 안드로니코스의 치세는 폭정 그자체였고, 자신의 반대 세력이라면 누군든지 가리지 않고 처형을 일삼기 시작했고, 동로마 제국의 내부 정세가 혼란해진 것을 틈타 시칠리아 왕국굴리에모 2세가 발칸 반도를 침공했다. 결국 안드로니코스 2세는 봉기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에 의해 붙잡혀 처형되었고, 새로룬 황제로 이사키오스 2세가 즉위한 후 발칸 전역에 전쟁세를 부과하면서 또한 새로 황후를 맞아들인 뒤 결혼 축의금을 마련하라는 명분으로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때 불가리아인 출신이자 터르노보 인근에 사유지를 경영하면서 동로마 제국 황실의 농장을 운영했을 것이라는 추측되는 토도르와 그의 동생인 아센은 1185년 킵셀라에 있던 이사키오스 2세 황제에게 세금 경감과 자치권, 그리고 세금을 내는 데 필요한 수도원 수입을 받기 위해 하이모스 산 근교의 토지를 하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요청은 거부당했고, 황제의 삼촌인 요안니스 두카스는 아센의 얼굴을 때리며 요구가 너무 무례하다고 꾸짖었다.

형제는 메시아로 돌아간 뒤 반란을 꾀했지만, 동료들은 쉽사리 그들을 따라 제국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살로니카의 성 디미터르의 이콘이 터르노보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성 디미터르가 불가리아를 돕기 위해 살로니카를 포기했다고 선언했다.
"하느님은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을 해방하기로 결정하셨고 그들이 오랫동안 지고 있던 멍에를 벗겨내셨다."

그들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제국에 반기를 들었고,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던 민중이 대거 호응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수도였던 프리슬라프에는 상당 규모의 제국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즉시 점령할 수 없었기에, 반군은 타르노보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토도르는 차르만이 사용하던 휘장을 채택하고 자신을 페터르 4세로 자칭했고, 아센 역시 이반 아센 1세로 칭했다. 그 후 각지를 빠르게 공략해 1186년 봄 무렵에 불가리아 북부 전역을 석권했으며 트라키아 일대를 약탈했다. 또한 프리슬라프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1186년 여름 친히 대군을 일으켜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형제는 산악 지형에 의지하여 동로마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1186년 4월 21일 일식이 찾아와서 어둠이 완전히 깔린 틈을 타, 동로마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 반란군을 격파했다. 형제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도나우 강 이북으로 도망쳤고, 이사키오스 2세는 성 디미터르의 이콘을 페터르의 집에서 획득해 반란의 명분마저 박탈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아직 잔당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정도면 다 이겼다고 여기고 승리를 자축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형제는 쿠만족의 원조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뒤 1186년 가을 도나우 강을 건너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던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이전의 영토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모이시아 전역까지 장악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진압을 명했고, 요안니스는 반란군을 상대로 벌인 몇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지휘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칸타쿠지노스는 어느 산채를 포위했다가 반군의 급습을 받아 참패당했고, 페터르와 아센은 그의 예복을 노획한 뒤 대중에 전시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칸타쿠지노스를 경질한 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로부터 황제로 추대받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다. 황제의 2번째 처남인 콘라드 1세가 브라나스를 전사시키면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그 사이에 입지를 확고히 다져놨다. 그 후 양측은 몇 차례 접전을 치렀지만 전황에 큰 영향은 없었다. 결국 이사키오스 2세는 1187년 페터르와 평화 협정을 체결해 불가리아 제국을 사실상 인정했다.

1187년 10월, 살라흐 앗 딘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에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추진되었고, 1189년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가 비협조로 나오면서, 양자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동로마 제국을 협공하자고 제의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를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하러 가는데 동로마 제국과 쓸데없이 싸울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고 거절했다.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가 아나톨리아로 건너간 뒤, 이사키오스 2세는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1190년 7월, 황제는 함대를 도나우 강 하류에 파견하여 쿠만족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한 뒤 타르노보를 포위했다. 그러나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적이 올 것을 예상하고 요새 수비를 강화해뒀다. 황제는 요새 공략을 좀처럼 달성하지 못하다가 9월에 쿠만족이 도나우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로 귀환하기로 했다. 페터르 4세의 아우 아센은 트랴브나 협곡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그는 적 선봉대가 협곡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둔 뒤, 본대가 협곡에 완전히 들어섰을 때 급습했다. 동로마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 보고 괴멸되었고, 이사키오스 2세는 군대와 자금, 황제관과 황복을 죄다 내팽개치고 몇몇 측근만 대동한 채 도주했다. 페터르와 아센은 이사키오스 2세의 왕관과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유물을 포함한 '황제 휘장'을 대중에 전시했다.

그 후 형제는 쿠만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잇달아 공격하여 바르나와 포모리를 약탈하고 트리아디사를 파괴했으며, 불가리아의 성인인 이반 릴스키의 유물을 확보했다. 1192년, 이사키오스 2세는 사촌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두카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에서 불가리아 약탈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진압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형제는 1192년 통치하에 있던 영토를 분할하기로 했다. 페터르는 북동부 지역을 받고 프리슬라프에 수도를 세웠고, 아센은 나머지 지역을 관할하여 타르노보에 정부를 꾸렸다. 그들은 1193년 공동으로 트라키아를 습격하는 등 긴밀하게 협력했다.

1196년 가을, 아센이 터르노보에서 보야르 이반코에게 살해당했다. 이반코는 동로마 제국의 새 황제 알렉시오스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황제는 마누일 카미치스를 파견했다. 그러나 군중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를 수습하느라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고, 페터르는 그 사이에 타르노보로 쳐들어갔다. 이반코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고, 페터르는 터르노보에 입성하여 반란 주동자들을 숙청한 뒤 동생 칼로얀을 새 지배자로 세운 후 프리슬라프로 돌아갔다.

1197년, 페터르는 동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그는 귀족 한 명의 칼에 찔러 죽었다고 한다. 반면 이스트반 바사리는 페터르가 폭동을 진압하던 중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 어쨌든 페테르의 사망 후 터르노보를 통치하고 있던 칼로얀이 불가리아의 새로운 차르로 즉위하게 되었다.

4.4. 불가리아 제2제국의 전성기

그는 불가리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뒤 두 형의 잇따른 죽음으로 혼란해진 정국을 재빨리 수습했다. 그 후 트라키아를 연이어 습격하여 동로마 제국에 타격을 입혔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협상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알렉시오스 3세는 그런 그를 견제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에 망명한 이반코를 필리포폴리스의 사령관으로 삼았다. 이반코는 로도피 산맥의 두 요새를 점령했지만, 1198년 칼로얀의 회유를 받아들여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동로마 제국이 이반코의 반란으로 정신없는 사이, 그는 쿠만족과 연합하여 1199년 봄과 가을에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브라니체보, 벨버즈드, 스코페, 프리즈렌 등을 공략했다. 1199년 12월 말 인노첸시오 3세의 사절이 불가리아에 도착하여 칼로얀의 조상이 "로마의 도시"에서 왔다는 걸 알았다며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자, 칼로얀은 자신을 불가리아인의 황제라고 칭하며,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불가리아 정교회를 교황의 관할로 하는 대가로 자신을 불가리아 차르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1201년 3월, 그는 쿠만족과 함께 콘스탄티아를 파괴하고 바르나를 함락시켰다. 또한 도브로미르 크리소스(Dobromir Chrysos)와 마누일 카미치스(Manuel Kamytzes)의 반란을 지원했지만, 둘 모두 알렉시오스 3세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쿠만족이 철수하자, 그는 알렉시오스 3세와 평화협정을 맺고 그해 말 트라키아에서 철수했다. 1202년 세르비아에서 쿠데타가 벌어져 스테판 네마니치가 추방되자, 그는 네마니치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뒤 쿠만족이 불가리아를 가로질러 세르비아를 침략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세르비아가 혼란에 휩싸이자, 1203년 여름 세르비아를 침공해 니시를 점령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새 세르비아 국왕 부칸 2세 네마니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칼로얀에게 화해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다시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차르로 추대할 수 있는 추기경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헝가리가 불가리아의 주교국 5곳을 점거했다며, 분쟁을 중재해주고 양국의 경계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204년 초, 교황은 레오 브란칼로니 추기경을 불가리아로 파견해 칼로얀을 불가리아 왕으로 추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브란칼로니는 헝가리-불가리아 국경의 케베에서 헝가리군에게 붙들렸다. 헝가리 왕 임레는 칼로얀을 헝가리로 소환하여 분쟁을 중재할 것을 촉구했지만, 교황이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자 9월 말이나 10월 초에 풀어줬다. 11월 초 불가리아에 도착한 브란칼로니는 바실리오스를 불가리아 대주교로 선임했고, 다음날 칼로얀을 불가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이무렵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하자, 그는 트라키아의 옛 동로마 영토를 공략했다. 그는 동로마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 라틴인들에 대한 폭동을 일으키도록 설득했다. 1205년 초 아드리아노폴리스와 인근 마을의 그리스인들이 라틴인에 맞서 봉기했다. 그는 곧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1세가 한발 앞서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칼로얀은 14,000명 이상의 병력을 소집하여 즉시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격하였고, 1205년 3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군을 섬멸하고 보두앵 1세를 생포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는 그가 보두앵을 고문하고 살해했다고 기술했고,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필리티스는 보두앵의 두개골이 칼로얀의 술잔으로 사용되었다고 기록했다. 반면 보두앵 1세의 동생이자 후임 황제인 앙리는 칼로얀이 생포된 십자군을 정중하게 대우했다는 내용의 서신을 교황에게 보냈다.

그는 라틴 제국의 영역으로 쳐들어가서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했다. 1205년 5월 하순 세레스를 포위하여 신변 보장을 약속해 항복을 받아냈지만, 약속을 어기고 포로로 잡았다. 이후 베리아의 주민 대부분을 학살했으며, 모글레나에서도 심각한 약탈을 벌였다. 이렇듯 약탈을 심하게 저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그에게 반감을 품은 필리포폴리스 시민들은 불가리아에 반기를 들기로 결의하고, 알렉시오스 아스피에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칼로얀은 필리포폴리스를 에워쌌고 6월에 주민들의 신원을 보장하겠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를 비롯한 도시 지도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알렉시오스는 수 시간 동안 거꾸로 매달려있다가 토막난 뒤 협곡에 던져져서 독수리에게 먹혔다고 한다.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필리티스에 따르면, 그는 바실리오스 2세불가리아 제1제국을 멸망시킨 후 불가록토노스(Boulgaroktonos, 불가르인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것을 기억하고, 자신을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로마인 학살자)라고 자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들은 그의 만행에 격분하여 라틴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앙리 황제는 테오도로스 브라나스를 파견해 아드리아노폴리스와 디디모티콘을 지키도록 하였다. 1205년 6월 불가리아군이 디디모티콘을 공격했지만 십자군의 역공으로 패배했다. 8월 20일 킬리안이 직접 디디모티콘을 함락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 후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앙리 황제의 역공으로 큰 피해를 입고 트라키아에서 철수했다. 그 후 앙리 황제가 10월에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2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라틴 제국을 굴복시키려면 동맹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와 손을 잡았다. 앙리 황제가 소아시아로 건너가 아드라미티온 근교에서 니케아 제국군을 격파하자, 테오도로스 1세는 불가리아에게 구원을 청했다. 칼로얀은 트라키아를 공격했고, 앙리는 소아시아에서 철수했다. 1207년 4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재차 포위했지만, 수비대의 저항으로 좀처럼 함락되지 않다가 함께 싸우던 쿠만족이 초원으로 돌아가자 어쩔 수없이 포위를 풀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에게 라틴 제국과 화해하라고 촉구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1207년 7월 테오도로스 1세와 휴전 협약을 맺은 앙리는 테살로니카 왕국의 보니파시오와도 협의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는 테살로니카로 돌아가던 중 모시노폴리스에서 불가리아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고, 그의 머리는 칼로얀에게 전달되었다. 칼로얀은 즉시 테살로니카를 포위공격했지만, 수비대의 저항으로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1207년 10월, 그는 돌연 사망했다.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필리티스는 그가 늑막염으로 죽었다고 기술했지만, 옆구리에 창으로 때린 듯한 흔적이 있어서 신의 분노로 인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밝혔다. 불가리아군은 곧 철수하였고, 칼로얀의 여동생의 아들 보릴이 새 차르가 되었다.

킬로얀의 죽음으로 불가리아군은 테살로니키 공성전을 포기하고 귀환한 뒤, 그는 칼로얀의 미망인 데시슬라바와 결혼하여 차르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으며, 특히 이반 아센 1세의 작은 아들인 이반 아센 2세를 차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었다. 이에 보릴은 이반 아센 2세를 죽이려 했고, 이반 아센 2세는 쿠만족의 땅으로 도망쳤다가 나중에 키에프나 할리치로 도피했다. 보릴의 친동생 스테즈는 세르비아로 망명했다. 보릴은 헝가리 왕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스테즈를 넘겨달라고 요구했지만, 스테판은 거부하고 스테즈에게 프로세크 요새 수비를 맡겼다. 여기에 보릴의 또다른 친척인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로도프 산맥의 체피나 성에서 독립했다.

1208년 5월, 그는 위신을 끌어올리기 위해 트라키아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자 라틴 제국 황제 앙리가 요격에 나섰고, 그해 7월 8일 플로브디프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을 격파했다. 보릴은 타르노보로 철군했고,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앙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사이, 세르비아 왕 스테판 네마니치가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서 스트루마와 바르다르 강 사이의 땅을 점령했다. 스테판은 스테즈에게 점령지를 다스릴 권한을 넘겨주면서도, 세르비아군은 그곳에 남겨뒀다.

1209년 초, 테살로니키 왕국의 지배를 받던 세레스의 그리스 시민들은 멜니크의 보릴 휘하 사령관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앙리 황제가 먼저 움직여서 추종자를 그곳의 통치자로 삼았다. 보릴은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동맹을 맺어서 라틴 제국에 대항했으며,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등을 돌린 스테츠와도 화해했다. 1211년 초 타르노보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력에 따라 부활절 날짜를 정하고 보고밀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기로 하고, 불가리아어로 공의회의 결의를 공표하게 하였다.

1211년 4월 테살로니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던 앙리 황제를 잡기 위해 산악로에 병력을 매복시켰지만, 앙리가 이를 간파하고 인근 라틴 요새에서 군대를 모아 역습을 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스테즈가 테살로니키 왕국을 침략했다가 이피로스가 라틴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그의 영지에 쳐들어오는 바람에 위기에 처하자, 그는 동생을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1211년 초여름, 보릴과 스테즈 형제는 비톨라 근처에서 테살로니키-이피로스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그해 10월 테살로니키를 포위공격했으나, 알렉시오스 슬라브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철수했다.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불가리아군을 추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뒤이어 멜니크를 공략했다.

거듭된 패전으로 그의 위신은 추락하였고, 보야르들은 1211년과 1214년 사이에 비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외부의 도움 없이는 진압할 수 없다고 보고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언드라시 2세는 페체네그로 구성된 부대를 앞세워 구원군을 파견해 비딘을 공략하고 그에게 넘겼다. 이렇듯 내우외환이 심해지자, 그는 라틴 제국과 화해하기로 했다. 마침 앙리 황제도 불가리아와 평화를 맺고 니케아 제국과 전쟁을 재개하고 싶었던 터라 협상이 진행되었고 앙리는 칼라얀의 딸 마리아를 후처로 들이는 조건으로 종전을 하는데 합의를 봤다. 이로서 불가리아와 라틴 제국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1214년 초 자신의 딸을 헝가리 황태자 벨라와 약혼시켰고, 헝가리와 라틴 제국의 지원에 힘입어 세르비아를 공격해 니시를 포위했다. 여기에 스테즈도 남부에서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스테즈는 원정 도중 암살당했고, 불가리아군과 라틴 제국군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니시를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다 1216년 앙리가 사망하자 라틴 제국군은 철수하였고, 1217년 언드라시 2세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헝가리를 떠나면서, 그는 더 이상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반 아센 2세는 이 틈을 타 1218년 불가리아로 돌아가서 반란을 일으켰다. 보릴은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참패를 면치 못하고 타르노보로 도주했다. 그는 몇달간 항전했지만 끝내 붙잡혀 실명형에 처해졌다.보야르들의 추대로 새 차르에 즉위한 그는 우선 적을 줄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1218년 말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가 제5차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귀환길에 올랐다. 언드라시 2세는 보릴을 후원했기 때문에, 보릴을 축출한 그와 갈등을 빛을 소지가 있었다. 그는 우선 군대를 이끌고 언드라시 2세의 앞을 가로막고, 그의 딸 마리아를 자신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헝가리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언드라시 2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1221년 헝가리가 점령하고 있던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불가리아에게 돌려줬다.

1221년 새로 선출된 라틴 제국 황제 로베르가 프랑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자, 그는 불가리아 영토를 지나가게 해줬고, 극진한 대우를 해줬다. 그 덕분에 불가리아와 라틴 제국의 관계는 로베르의 통치 기간 동안 화목했다. 이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고,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의 동생 마누일 두카스와 자신의 딸 마리아를 결혼시켰다. 1228년 로베르가 죽고 11살 된 동생 보두앵 2세가 즉위했다. 그는 라틴 제국의 섭정이 되고 싶었기에 딸 엘레나를 보두앵 2세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으며, 이피로스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라틴 제국의 귀족들은 그를 경계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피로스의 군주이자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두카스 콤니노스는 이 소식을 듣고 불가리아를 경계했다. 그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릴 때 불가리아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1228년 9월, 그는 라틴 제국과 1년간의 휴전을 합의하고 불가리아를 먼저 손봐주기로 했다. 1229년 말, 그는 테살로니키에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한 뒤 1230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는 척 했다가, 갑작스럽게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에브로스 계곡을 따라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테오도로스는 승리를 확신하여 처자식까지 거느리고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천천히 진군했다. 그러나 이반은 당황하지 않고 수천 명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반격에 착수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반 아센 2세는 창끝에 테오도로스의 배신으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상호방위조약서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

1230년 4월, 이반은 클로코트니차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을 급습했다.(클로코트니차 전투) 기습을 예상치 못했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테오도로스는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평화 협약을 어기고 침략한 죄를 물어 테오도로스를 실명시키고 타르노보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그의 군대는 이피로스로 쳐들어갔다.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프릴리프, 세레스, 아드리아노폴리스, 데모티카, 플로브디프 등지가 불가리아에 넘어갔고, 테살리아의 대 블라키아도 함락했으며, 과거 보릴에게 반기를 든 뒤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알렉시오스 슬라브의 체피나 성도 공략했다. 테오도로스의 뒤를 이어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가 된 마누일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불가리아의 봉신이 되었다.

아센은 정복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수비대를 중요한 요새에 배치하고 부하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하지만 과거 칼로얀이 정복지 주민들을 학살하다가 그리스인들의 분노를 샀던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방 관료들이 계속 지위를 유지하도록 했고 백성들을 가급적 해치지 않았다. 그는 타르노보로 귀환한 뒤 승리를 기념하는 금화를 주조하였고, 성 순교자 성당을 세우고 성당의 기둥 중 하나에 자신을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및 다른 종족의 차르"라고 알리는 글귀를 새기게 하였다. 또한 동로마 황제를 모방하여 황제의 휘장을 갖추는 등 장차 발칸 반도 전역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1231년 라틴 제국의 귀족들이 예루살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을 보두앵 2세의 섭정으로 선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반은 니케아 제국과 손을 잡아 라틴 제국을 압박하기로 하고, 세계총대주교 게르마노스 2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한편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31년 5월 9일 헝가리아의 언드라시 2세에게 라틴 제국의 적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라고 촉구했다. 안 그래도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넘겨준 것에 불만이 가득했던 언드라시 2세는 이를 명분삼아 불가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황태자 벨러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1231년 말 또는 1232년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탈환했다. 뒤이어 스레데츠를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벨러는 1233년 왈라키아 서부 지역을 장악하고 불가리아의 반격을 저지하고자 여러 요새를 세웠다.

1233년, 세르비아 귀족들이 불가리아의 지원에 힘입어 스테판 라도슬라프를 축출했다. 뒤이어 세르비아 왕위에 오른 스테판 블라디슬라프는 아센의 딸 벨로슬라바와 결혼했다. 그 후 아센은 불가리아 교회를 정교회에 복귀시키기 위한 협상을 지속했고, 1235년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의 후계자 테오도로스 2세와 자신의 딸 엘레나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엘레나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고 요안니스 4세, 이리니 라스카리나, 마리아 라스카리나, 테오도라 라스카리나,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를 낳았다. 그 후 니케아 총대주교 게르마노스 2세가 불가리아 총대주교구를 부활시키기로 하면서, 불가리아 교회는 정교회에 복귀했다.

그렇게 니케아 제국과 손을 잡은 뒤, 아센은 라틴 제국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마리차 강 서쪽 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니케아 제국군과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1235년 말 베네치아 함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면서 포위망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초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지만 공략하지 못했다. 1237년 라틴 제국의 섭정을 맡던 장 드 브리엔이 죽자, 그는 난공불락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계속 공격하기보다는 라틴 제국과 손을 잡기로 마음 먹고, 니케아 제국과 동맹을 파기하고 엘레나를 불가리아로 데려와서 보두앵 2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1237년 여름 라틴군과 연합하여 니케아 제국에 속한 카에노프루리온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타르노보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아내 안나 마리아와 아들 한 명,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이를 신의 징벌로 생각해 철수하였고, 딸 엘레나도 니케아로 돌려보냈다.

1237년, 이반은 7년간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테오도로스의 딸 이리니와 재혼하였고,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테오도로스를 석방했다. 테오도로스는 테살로니키로 돌아간 뒤 쿠데타를 일으켜 동생 마누일을 몰아내고 테살로니키를 장악했다. 하지만 실명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들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신임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후견인을 맡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반이 이단자들을 보호한다고 비난하고 1238년 초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에게 불가리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라고 촉구했다. 벨러 4세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지만, 내심 강성한 불가리아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읽은 이반은 1239년 시몽 드 몽포르 등 귀족 십자군이 불가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행진하는 걸 허용했고, 1240년 5월 헝가리에 사절을 보내 키예프를 공략하고 쿠만족을 축출한 몽골의 예상되는 침략에 맞서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파일:이반 아센 2세 시기 불가리아 제국 영역.png

이반은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을 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불가리아 차르로서는 최초로 동로마 제국의 것을 모방하지 않은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였으며, 무역과 조세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립, 집행했다. 또한 각지에서 독자적인 통치를 하던 보야르들을 복종시켜서 왕권을 강화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안니스 아크로폴리티스는 그를 "야만인들 사이에서 자기 민족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한 자"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1241년 5월 또는 6월에 사망했을 때, 후계자는 7살 밖에 안된 칼리만 아센 1세 뿐이었다.

4.5. 몽골의 침략과 쇠퇴기

1241년 5월 또는 6월 부친이 사망한 뒤 7살의 나이로 차르에 올랐다.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1237년 이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국가 중대사를 대신 맡았다. 그러나 1242년 바투 칸의 몽골군 별동대가 불가리아 북부 일대를 유린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타르노보, 프레슬라프, 이사체아 등 적어도 12개의 불가리아 요새가 파괴되었다. 이후 불가리아는 킵차크 칸국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리옹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몽골의 침략에 대항한 십자군 창설을 촉구했다. 교황은 칼리만에서 서신을 보내 불가리아 정교회를 교황청에 합류시키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불가리아측은 이에 대해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았고, 십자군 창설 역시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서 없었던 일이 되었다. 바투 칸과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원정군은 불가리아에 이어 폴란드, 헝가리를 파괴하고 독일로 진격했으나,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몽골로 귀환했다.

1246년 8월 또는 9월, 12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동로마 제국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티스에 따르면, 그의 사망에 대해 질병으로 죽었다는 소문과 신하들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동시에 나돌았다고 한다. 사후 이복동생인 미하일 아센 1세가 8살의 나이로 차르가 되었다. 어머니 이리니와 불가리아 총대주교 페터르가 그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지만, 나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는 이때를 틈타 불가리아를 전격 침공하여 벨버즈드, 멜니크, 스코페, 세레스, 필리레프, 테살피나 등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여기에 헝가리도 베오그라드 등 여러 지역을 공략하였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데스포티스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도 마케도니아 서부를 공략했다. 결국 불가리아는 1247년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을 상대할 때 군사 지원을 해줘야 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

1254년 11월 3일 요안니스 3세가 사망하자, 불가리아는 협약을 파기하고 공세를 개시해 스타니마카, 페루시티사, 크리힘, 체피나 페르페레크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새 황제 테오도로스 2세가 주력군을 소아시아에서 발칸 반도로 파견하여 불가리아군을 물리치고 로도프 산맥의 요새 대부분을 탈환했다. 미하일 아센 1세는 1255년 말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손녀 안나 아르파드와 헝가리의 봉신인 로슽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딸인 안나 로스티슬라브나와 결혼하였고, 이를 토대로 헝가리의 군사 지원을 받아냈다. 1256년 봄 헝가리와 연합하여 니케아 제국을 공격해 트라키아를 약탈했으나, 곧 테오도로스에게 격파되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불가리아는 1256년 6월 차르의 장인인 로스티슬라프를 니케아로 파견해 평화 협약을 논의했다. 테오도로스 2세는 미하일이 불가리아가 일전에 잃었던 영토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때에야 평화 협약에 서명하겠다고 하였다. 로스티슬라프는 이에 동의하였고, 양국은 마리차 강의 상류를 국경으로 정했다. 귀족들은 이 결정에 격노하였고, 칼리만 아센 2세는 터르노보 근교에서 사냥하던 미하일 아센 1세를 습격해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미초 아센콘스탄틴 아센 1세가 이에 불복하여 각자의 지배지에서 차르를 칭하면서, 불가리아는 세 차르간의 내전 시대를 맞이한다.

4.6. 내전과 혼란기

칼리만 아센 2세미하일 아센 1세를 살해한 뒤 미하일의 미망인인 안나 로스티슬라브나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안나 로스티슬라브나의 장인이자 헝가리의 봉신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는 딸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불가리아의 수도 타르노보로 쳐들어갔다. 칼리만은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한 달만에 축출되었고, 로스티슬라프는 타르노보를 점거한 뒤 딸을 데리고 헝가리로 돌아간 후 "불가리아의 왕"을 자칭했다. 그 후 차기 차르를 놓고 여러 후보가 경합했는데, 이반 아센 2세의 사위인 점을 내세운 미초 아센이 새 차르로 추대되었다. 칼리만 아센 2세는 자기 영지에서 한동안 대항했지만 1256년 또는 1257년 살해당했다.

그러나 미초 아센은 니케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백성의 신망을 잃었고, 스코페의 명문 귀족이었던 콘스탄틴 아센 1세가 이 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켜 수도 타르노보를 공략했다. 그는 본래 이름이던 티흐(Tih)를 아센(Asen)으로 개명하여 이반 아센 2세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선언하였고, 1258년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테오도로스 2세 황제와 불가리아의 엘레나 아세니나의 딸인 이리니 두케나 라스카리나와 결혼하면서 니케아 제국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미초 아센은 프레슬라프와 메셈브리아 일대에서 할거하며 차르를 계속 칭했고, 이로 인해 불가리아는 콘스탄틴 아센 1세를 지지하는 서부와 미초 아센을 지지하는 동부로 분열되었다. 여기에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는 헝가리를 등에 업고 불가리아를 계속 공격했다.

설상가상으로,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한 미하일 8세가 라스카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요안니스 4세를 실명시키고 불가리아와의 결혼동맹을 끊어버렸다. 1263년 콘스탄틴 아센 1세의 거듭된 공세를 버티지 못한 미초 아센이 메셈브리아 일대를 동로마 제국에 넘기며 망명하자, 미하일 8세는 이 기회를 틈타 트라키아를 전격 침공해 타니마카와 필리포폴리스를 공략하였으며, 해군을 파견해 비치나를 비롯한 도나우 강 하류의 삼각주를 점령하였다. 한편 또다른 부대는 흑해 주변의 아가트호폴리스, 소조폴리스, 안키알루스를 공략했다. 헝가리와 동로마 제국의 협공으로 곤경에 처하자, 콘스탄틴 아센 1세는 상국으로 모시던 킵차크 칸국에 도움을 청했고, 노가이 칸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와주면서 남은 영토라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1264년 헝가리 내부에서 벨러 4세와 이슈트반 5세 부자가 내전을 벌이자, 콘스탄틴 아센 1세는 1265년 비딘의 통치자 야코프 스베토슬라프와 손을 잡고 다뉴브 강을 건너 헝가리를 침공해 트란실바니아를 약탈했다. 그러나 내전이 종식된 뒤 트란실바니아의 주인이 된 이슈트반 5세가 역공에 나섰고, 1266년 6월 비딘이 함락되었고 뒤이어 불가리아 수도 타르노보까지 헝가리군이 진격해 주변 일대를 파괴하고 플레벤을 함락했다. 이에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버리고 헝가리의 봉신이 되었다.

1268년 아내 이리니 두케나 라스카리나가 사망하자, 콘스탄틴 아센 1세는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고자 미하일 8세의 조카인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니와 결혼했다. 미하일 8세는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면 메셈브리아와 안키알루스를 지참금으로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아들 미하일 아센 2세가 태어났는데도 미하일 8세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콘스탄틴은 분노하여 1271년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칠리아 왕국의 카롤로 1세와 동맹을 맺고 트라키아로 침공했다. 하지만 미하일 8세가 자신의 사생아인 에우프로시나 팔레올로기나를 킵차크 칸국 서부 일대의 지배자 노가이 칸에게 넘기고 불가리아를 침공하게 했기 때문에, 콘스탄틴은 곧 돌아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272년 콘스탄틴이 낙마 사고를 당한 뒤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이에 아들인 미하일 아센 2세가 공동 차르로 즉위하였고, 아내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니가 국정을 장악했다. 마리아는 이슈트반 5세 사망 후 다시 불가리아에 귀순한 야코프 스베토슬라프가 자기 부인이 이반 아센 2세의 손녀임을 내세워 차르가 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1276년 독살하고 스베토슬라프의 지지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렇듯 국정 혼란이 갈수록 가중되고 민중의 삶이 비참해지자, 1277년 농민 출신의 이바일로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1277년 갈수록 심화되는 정국 불안정과 킵차크 칸국에 바쳐야 하는 막대한 공물을 마련하기 위한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던 민중은 도브루자 농민 출신의 이바일로를 지도자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먼저 북동부 불가리아를 약탈하던 몽골군을 모조리 축출하였고, 자신을 진압하려는 콘스탄틴 아센 1세를 죽이고 토벌군을 자신의 휘하에 편입했다. 이후 타르노보를 제외한 불가리아 전역을 삽시간에 공략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는 이바일로가 지나치게 강성해지자 동로마 제국에도 큰 위협이 될 거라 판단하고, 지난날 동로마 제국에 망명했던 미초 아센의 아들 이반 아센 3세를 자기 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시킨 뒤 새 차르로 옹립 후 트라키아 대부분을 공략했다. 이리하여 이바일로의 반란군과 이반 아센 3세의 동로마군에게 동시에 압박받게 되자, 교회 통합 정책을 추진한 것에 반감이 있던 데다 도와주진 못할 망정 새 차르를 세운 삼촌에게 분노한 마리아 황후는 자기 남편을 죽인 이바일로와 연합하는 길을 택하고, 협상 끝에 그와 결혼하되 자신의 아들인 미하일 아센 2세를 공동 차르로 삼게 하였다.

미하일 8세는 미하일 글라바스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타르노보를 공략하게 했지만, 이바일로는 모조리 격파했다. 이에 킵차크 칸국에 도움을 청했지만, 이바일로는 칸국의 군대까지 다뉴브 강 이북으로 축출했다. 그 사이에 동로마군이 시프카 가도와 흑해 반도에서 불가리아를 협공했지만 격파당했다. 하지만 킵차크 칸국의 주력 부대가 재차 침입하자, 이바일로는 이번엔 쉽게 막아내지 못하고 드러스터르 요새에서 3개월간 포위되었다.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타르노보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리아 황후와 미하일 아센 2세를 폐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하고, 미하일 아센 3세를 새 차르로 옹립했다.

하지만 이바일로는 포위망을 돌파하고 킵차크 칸국 군대를 본국으로 돌아가게 한 뒤, 타르노보를 포위했다. 1279년 미하일 8세가 급파한 동로마군 10,000명이 타르노보로 접근했지만, 이바일로는 데비나에서 이들을 괴멸시켰다. 다시 5,000명의 동로마군이 추가로 파견되었지만, 발칸 산맥을 지나가던 중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이반 아센 3세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고 판단하고, 타르노보에서 도망치면서 왕실의 보물을 모조리 가지고 갔다. 그는 메셈브리아로 간 뒤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를 새 차르로 추대하고 이바일로에 계속 맞섰고, 거듭된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지지 세력이 등을 돌리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된 이바일로는 1280년 킵차크 칸국으로 망명하였다. 얼마 후, 이반 아센 3세는 미하일 8세의 지시에 따라 킵차크 칸국으로 갔고, 이바일로가 거기에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도움을 요청했다.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은 두 차르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미하일 8세에게서 막대한 뇌물을 건네받고 이바일로를 처형했다.

이바일로의 몰락으로 불가리아의 단독 차르가 되었지만,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오랜 세월 지속된 내전으로 국력은 쇠진해졌고, 많은 보야르들이 중앙 정부에서 이탈했다. 그중 비딘의 데스포티스 시슈만 1세, 스밀레츠, 라도슬라프, 보이실 등이 각 영지에서 자기 영지에서 군림하며 중앙의 명령을 잘 듣지 않았다. 타르노보의 차르는 불가리아의 유일한 통치자에서 '동등한 보야르 중 첫번째'로 변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국의 군주 카롤로 1세의 반 동로마 연합에 참여하여 장차 동로마 제국을 정벌하여 위신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가 사생아인 에우프로시나를 킵차크 칸국 노가이 칸의 후처로 보내 원군을 호소했고, 노가이 칸은 1282년 4만에 달하는 기병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설상가상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카롤로 1세가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인해 시칠리아 섬을 아라곤 왕국에게 빼앗기면서 불가리아를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게오르기는 반 동로마 정책을 중단하고, 아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를 인질로 보냈다. 그는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1284년 자신의 딸인 안나를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슈 2세 밀루틴과 결혼시켰다. 1284년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와 협상하여 키라 마리아를 동로마 제국으로 돌려보내는 대신에 아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와 첫번째 아내 마리아를 돌려받았다. 1285년 킵차크 칸국이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하자, 게오르기는 노가이 칸의 봉신을 자처하고 토도르를 다시 킵차크 칸국의 인질로 보내야 했다. 또한 딸 엘레나를 노가이 칸의 아들인 차카와 결혼시켰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세르비아, 킵차크 칸국에게 잇따라 머리를 숙여가며 어떻게든 입지를 다지고자 노력했고, 그 덕분에 12년간 옥좌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1292년 노가이 칸이 돌연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게오르기를 퇴위시키고 스밀레츠를 새 차르로 세웠다. 게오르기는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하였지만, 노가이 칸이 두려운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박대당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 주변에서 죽은듯이 숨어지내야 했다.

스밀레츠는 1296년 딸 테오도라를 세르비아의 왕위 계승권자인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와 결혼시켜 입지를 다지고자 했지만, 제위를 오래 누리지 못하고 1298년 사망했다. 뒤이어 아들 이반 2세가 차르로 즉위했지만,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스밀체나(Smiltsena)가 섭정을 맡았다.[104] 그녀는 전 차르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형제인 알다미르를 크란의 데스포티스로 세우고, 그의 협력을 받아 황권을 다지려 했으며,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슈 2세 밀루틴에게 자신과 결혼하여 세르비아-불가리아 연맹체를 결성하고, 아들을 공동 차르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왕은 장래에 불가리아의 손에 세르비아를 맡기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1299년 노가이 칸이 토크타 칸과의 전쟁 도중 전사했다. 이후 노가이 칸의 아들인 차카가 부친의 잔존 세력을 이끌고 킵차크 칸국에 볼모로 와 있던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와 함께 불가리아로 향했다.

5. 에게해 일대



[1] 불가리아는 튀르크 + 슬라브의 일종의 연립 정권으로 출발했고, 나라 이름부터가 튀르크족의 일파인 '불가르'족에서 따 온 만큼 튀르크 쪽이 상위 파트너였다. 하지만 불가리아 및 그 주변 발칸 반도 북부 ~ 동유럽권에서는 슬라브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점차 슬라브화되었다. 단적인 예로 군주의 칭호가 불가리아 초창기에는 이었는데, 913년 동로마에 대한 승전 이후 로마와 맞먹는다는 자부심을 담아서 '카이사르'의 슬라브식 음차인 차르로 바뀌었고, 군주의 이름들도 초대 군주 아스파루흐부터 시작해서 코르미소쉬, 비네흐, 텔레츠, 우모르, 오무르타그 등 튀르크-몽골적 느낌이 강한 이름이 많다가, 9C 중반 보리스 1세를 시작으로 블라디미르, 시메온 대제, 사무일, 로만 등 기독교-슬라브적 느낌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만은 Roman, 즉 자신들의 최대의 적인 '로마인'이 맞다.[2] 이 불가리아 포로 학살을 야사로 여기는 견해가 있으나, 이 기록 자체는 (관찬 사서에 가까운)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의 약사 등이 출처이다. 실제로 클레이디온 전투와 바로 그 전에 대규모 야전이 있었고, 편집증적일 정도로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바실리오스 2세가 그 이후로 수도로 돌아가 공세의 고삐를 늦추고 소모전으로 일관해서 불가리아를 고사시켜 버리는 전법을 보인 여유를 봤을 때, 불가리아가 그때의 패배에서 절멸에 가까운 손실을 겪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특히 저 15,000명의 병력은 불가리아 추정 총 병력 35,000명의 40퍼센트를 넘어가는 엄청난 수치로, 저 정도의 병력을 그렇게 짧은 시기 안에 다 잃었으면 사실상 그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한다.무엇보다 바실리오스는 불가리아 정복 이전에 시리아 원정 당시 포로로 잡은 베두인 병사들의 오른팔을 잘라버리고 조지아 원정에서는 압하스인 포로들의 두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든 전적이 있다.[3] 그러나 알렐렝기욘은 가난한 백성들이 내지 못한 세금을 부유한 지주층에게 전가하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제도라 과연 개선인지 개악인지 불분명하다. 결국 교회의 반발로 로마노스 3세 때에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한다.[4]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5] Rometta. 이 시칠리아 원정 이전에는 이 로메타가 동로마 입장에서 진짜로 마지막 거점이었고, 965년에 함락되었었다. 으레 902년에 함락된 타오르미나(Taormina)가 동로마 측의 시칠리아 내 마지막 거점으로 알려져 있으나, 진짜 마지막은 로메타였다. 영어 위키백과 Muslim conquest of Sicily 중 'The Muslim conquest of Sicily began in June 827 and lasted until 902, when the last major Byzantine stronghold on the island, Taormina, fell. Isolated fortresses remained in Byzantine hands until 965, but the island was henceforth under Muslim rule until conquered in turn by the Normans in the 11th century.' 및 'Although few strongholds in the northeast remained unconquered and in Christian hands, the fall of Taormina marked the effective end of Byzantine Sicily, and the consolidation of Muslim control over the island.' 등의 대목이 있다.[6] 영어 위키백과 Muslim conquest of Sicily 중, 'Maniakes quickly recaptured the entire eastern coast' [7] 동로마-롬바르드는 남이탈리아에서 6세기 말 이래로 전통적인 숙적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땅에서 어울려 산 지 수백년 되어 서로 섞였을 뿐더러, 이슬람 상대로는 교파, 국적, 종족 등의 차이를 덮고서 동맹해서 싸운 일도 더러 있었고 이 케이스도 그 중 하나이다.[8] 마찬가지로 윗 각주 영상 22분 20~30초 즈음에 'when Ardoin refused to surrender a captured horse to the Byzantine general, Maniakes had him stripped and beaten'이라고 나온다.[9] George Maniakes 중 'However, he soon ostracised his admiral, Stephen, whose wife was the sister of John the Eunuch, the highest ranking man at court, and, by publicly humiliating the leader of the Lombard contingent, Arduin, he caused them to desert him, with the Normans and Norsemen.'[10] 이래서인지 몰라도 후대 콘스탄티노스 9세 때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군의 최전선에서 같이 싸우다 죽었다.[11] 영어 위키백과 Muslim conquest of Sicily 중, 'The Kalbids soon recovered their losses, and Messina, the last Byzantine outpost, fell in 1042.' [12] 이후 블라디미르 모노마크의 후손들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을 거쳐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으로 이어졌다.[13]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15p, 원문 'He (the patriarch Michael Keroularios) removed one of the ruling emperors (Michael VI) from the Roman axis, and nearly so another one (Isaac I Comnenus).' 여기서 axis(축)는 당연히 제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동로마 당시의 미하일 프셀로스가 실제로 썼던 표현이다. 원어는 그리스어의 로마자 버전으로 axon.[14] Ν. Ζαφειρίου, «Η ελληνική σημαία από την αρχαιότητα ως σήμερα», Αθήνα, 1947, pp. 21-22, "Ο φωτισμένος αυτός Αυτοκράτορας καταγόταν από Οίκο της Παφλαγονίας, όπου στην πόλη Γάγγρα υπήρχε ο θρύλος της ύπαρξης φτερωτού αετόμορφου και δικέφαλου θηρίου (γνωστού ως Χάγκα), το οποίο και κοσμούσε το θυρεό του κτήματος της οικογένειάς του στην Καστάμονη."[15] 상원-high senate에 대해서는 원로원 항목을 참조할 것[16] 한 기록으로는 어떤 전투에서 동로마군이 3천명씩이나 전사하기도 했다[17] 아마 향군이었을 것이다[18] 아라비아계 출신으로서 추정되는 원음은 아폴라파르 정도로 보인다[19] 당시 이탈리아 통제사(Katepano)는 공석이었고 바다 건너 디라히온 절도사가 겸직하여 대행하고 있었다.[20] 이사키오스 1세의 동생인 요안니스 콤니노스의 첫째 아들. 알렉시오스 1세의 맏형이다.[21] 당시 셀주크 제국은 용병들의 임금 체불 문제가 심각하여 이미 재정 위기 직전에 놓여 있었고 이 때문에라도 번번이 주변 지역을 약탈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때 에데사와 근교 하란 일대를 약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셀주크 군대는 다시 임금 체불로 인해 반란 직전까지 치달았다. 아르슬란은 결국 이를 충당하기 위해 자신에게 종속해온 알레포 토후를 공격하게 된다. 그 와중에 발생한 것이 2차 만지케르트 전투.[22] 원로원은 황제 유고시에 임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23] '숙련되지 않은 유대인'이 형을 맡아 3번의 시도 끝에야 형이 집행될 수 있었다고 ..[24] 에게 해 연안[25] 흑해 연안[26] 물론 이는 파플라고니아 군부와의 연계를 꾀하여 위협적인 카파도키아 군부를 견제하고자 했던 목적이 더 크긴 하다.[27] 조지아 왕국의 왕 바그라트 4세의 딸이다. 1056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학을 가서 테오도라 여제에게 후원을 받으면서 교육을 받았다. 유학 뒤 일시적으로 고국인 조지아로 돌아갔다가 1065년 미하일 7세와 결혼을 하였다.[28] 그러나 콘스탄티오스는 1079년 흐리소폴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고 섬으로 추방된다.[29]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기록[30] 단 아버지가 부르치스(Bourtzes) 가문의 일원이었고, 어머니가 멜리시노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당시에는 멜리시노스 가문의 위세가 부르치스 가문보다 더욱 강력했으므로 모계 성씨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알렉시오스 1세의 모후인 안나 달라시니도 같은 이유로 부계 성이 아닌 모계 성을 따른 바 있다.[31] 당시 기록에 바랑인 친위대를 회유하는 건 불가능 하니 바로 옆 성벽의 독일 용병을 매수해서 열었다고 한다[32] 니키포로스 3세는 미하일 7세를 몰아내고 제위를 차지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하일 7세의 황후인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미하일 7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이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라는 아들을 낳은 상황이었지만, 니키포로스 3세는 황후를 존중하던 동로마의 관습과는 달리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제위 후보에서 제외했고, 때문에 황후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부계 친척인 두카스 가문은 분노하였다. 그래서 황후인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콤니노스 형제를 돕는 대가로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공동 황제에 앉히기로 합의하였다.[33] 사실 알렉시오스는 원래 아나톨리아의 유서 깊은 명문 군벌인 아르이로스 가문의 딸과 약혼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아르이로스의 여식이 요절하면서 이리니 두케나와 약혼하게 됐고 이것이 제위 찬탈에 큰 도움이 되었다.[34] 황제의 칭호이던 Sebastos와 Autokrator을 합쳐 만든 작위로, 사실상의 2인자 자리였다.[35] 동로마의 황후는 서유럽의 왕비들과는 궤가 다른 독자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황후도 황제와 마찬가지로 대관식을 치렀으며 독자적인 세금 징수권과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졌다. 심지어는 황제가 죽거나 폐위당하면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황후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 남편을 황제로 올릴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황제인 아들과 대립할 때면 아들을 몰아내고 여제(女帝)로서 단독 재위하기도 하였다. 동로마의 경우 서유럽보다 여성 군주가 많았으며 재위기간도 비교적 길었다.[36] 안나 달라시니는 콤니노스 가문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육성된 카파도키아 군벌인 달라시노스 가문 출신으로, 딸 테오도라를 두카스 가문에 의해 폐위당한 로마노스 4세의 아들과 결혼시키고 두카스 가문과 잦은 반목을 겪었던 인물이었다.[37] 그 전까지는 장녀 안나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약혼시켜 놓아 안정적인 제위를 확보하려 하였다.[38] 조선 말기 흥선 대원군 시절 지방관들이 상평통보로 세금을 걷고 당백전으로 돈을 풀었던 것과 비슷하다.[39] 당시 이사키오스가 안티오히아의 공작으로(7세기 후반 무함마드에게 빼앗긴 예루살렘과는 달리 안티오키아는 지속적으로 제국이 재점령하였고, 십자군 전쟁 전 마지막으로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긴 것은 1084년의 일이다.) 재임하며 큰 명성을 쌓았지만, 당시 알렉시오스의 부인인 이리니 두케나가 두카스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알렉시오스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이리니 두케나의 조부 요안니스 두카스 부제는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동생이자 미하일 7세의 숙부로서 막강한 권력과 높은 지위를 향유하고 있던 차에 콤니노스 형제의 반란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따라서 알렉시오스와 이사키오스 중 누구를 황제에 올려야 할 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자 요안니스 부제가 나서서 두카스 가문과 더 가까운 사위 알렉시오스가 황제가 되었다.[40] 이 외에도 아나톨리아 내륙 곳곳에 여전히 제국의 기치를 휘날리고 있는 곳들이 있었으나 제국 중앙 정부의 통치를 받고 있지는 않았다. 당장 룸 술탄국의 차기 수도인 이코니온만 해도 1085년 경에 함락되었고 피시디아의 호마는 아예 튀르크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을 정도.[41] 1078년 전 황제 니키포로스 3세가 미하일 7세를 폐위하고 제위를 찬탈했을 때에도 교황은 니키포로스 3세를 파문한 바 있었다. 한편으로는 제국을 침략할 구실을 만들고자 했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협력한 것이기도 하다.[42] 기존에 친교를 튼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닌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한 까닭으로 교황이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 좋은 대상이었으며, 교황의 무력 기반이자 제국의 적인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의 힘을 소모시키기 위해서라는 추측이 있다.[43] 당시 동로마에서 보기에는 서유럽의 프랑크족들은 야만적이고 무례하지만 전투민족으로서의 기량만은 출중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생각대로 서유럽 측의 군대는 이슬람과의 전쟁 때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44] 그도 그럴 것이, 주로 용병으로 동로마에 흘러들어온 프랑크인들은 신의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알렉시오스 1세도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의 전투에서 프랑크 인들이 배반하자 튀르크인 용병대가 지원군으로 도착할 때까지 고전하였다.[45] 당연한 게 십자군 군주들은 외국인인데다 제각기 신성 로마 황제와 프랑스 국왕 등의 봉신이었기에 동로마의 신하가 아니라서 충성 서약을 할 의무가 없다.[46] 11세기 후반부터 봉건 제도가 확립되자 장자가 거의 모든 상속권을 독점하게 되었다.[47] 일설에 의하면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이때 알렉시오스 1세의 양아들이 되었다고 전해진다.[48] 당시 새로 점령한 제국 서부가 그의 유산으로 할당되어 있었으나, 전술했다시피 순식간에 털리고 남 이탈리아로 쫓겨나 남 이탈리아를 물려받은 이복 동생 루지에로에게 공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핏줄은 못속였는지 숙부와 연합하여 동생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명목상의 공작 작위만 유지한 채 근근히 살아갔다.[49] 또한 보에몽은 알렉시오스 1세를 비롯한 동로마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데리온 병사들한테 동로마 백성들을 해치거나 약탈하면 즉시 사형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 식으로 군사들의 군기를 엄격하게 유지했다.[50] 이는 후술하게도 십자군 또한 알렉시오스 황제와 약조한 내용 중 점령지를 동로마의 것으로 하지 않게 된 결과가 되었다.[51] 룸 술탄국과는 형제지간이지만, 원수보다 더욱 격렬하게 싸워대었다. 모든 자식에게 땅을 배분하였던 튀르크 족의 특성상 빈번한 일이었다.[52] 이는 안나 공주의 새로운 쿠데타 음모를 감지했다는 설, 수도의 치안이 불안정했다는 설 등이 있다.[53] 전투의 결과에 대해 베네치아 측 사서에서는 승리라고 주장하고, 로마 측에서는 저지했다라고 주장한다. 제국 측 기록 대로 저지했다고 치더라도, 패배했거나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54] 타란토의 보에몽으로도 불리는 보에몽 1세의 아들이다.[55] 출처 : 비잔티움 연대기 3권 -쇠퇴와 멸망- (존 줄리어스 노리치 저)[56] 수도에 있던 삼남 이사키오스 대신 막내 마누일이 계승자로 선택된 이유로는 성정이 사나운 이사키오스보다는 마누일이 인격적으로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주력군의 회군을 안정적으로 이끌 제위 계승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설이있다.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음모론이 자주 제기된다.[57] 제위 계승의 정황을 보고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즉, 제위 계승권이 뒤쳐지던 다른 황자가 2년여 동안 장자 알렉시오스와 차남 안드로니코스를 죽도록 하고, 모종의 방법으로 황제를 죽인 다음, 진중에서 유력 인사를 포섭해 군대에 의해 황제가 된 것이라는 것. 후보는 요안니스 2세의 삼남 이사키오스와 사남 마누일 그리고 요안니스 2세의 동생 이사키오스(마누일의 사촌인 안드로니코스 1세의 아버지)이다.[58] 이뿐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함께 전쟁에 참여해 군사 활동을 하는 관계가 아닌 이상에야 제아무리 동맹이나 중립 관계라고 해도 남의 나라 군대가 자기 땅을 대놓고 지나가는 것은 매우 예민한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땅을 내어 준 그 제3국 입장에서는 이후에 공격을 받은 나라에서 이 나라에 대고 왜 자기네 적군들에게 길을 빌려줬냐며, 이는 사실상 그들과 협력한 것이니 그쪽도 적국이라고 나올 수 있는 심각한 외교 문제의 빌미를 떠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길 좀 빌려달랬다고 정말로 빌려줬으니 길을 빌린 나라 입장에서도 그 제3국을 쉽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덤이다. 다른 예로 임진왜란 때 일본이 명나라를 친다는 구실로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 했을 때 조선 측에서 정말로 길을 빌려줬다면 이후 조선과 주변국의 관계가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 보자.[59] 이후 독일군은 도릴라리움에서 투르크 군대에 패해 니케아로 후퇴해 프랑스군이 합류하기까지 기다렸다.[60] 현 튀르키예 부르사 도 Uluabat[61] 다만, 수세에 몰린 상황보다 공세-우세 상황에서 병력 동원력이 높아지는 것은 유목민의 중요한 군사적 특징 중 하나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는 군사활동(약탈) 자체가 중요한 산업 중 하나이기에 약탈 성공 가능성이 높은 우세-공세 상황에서는 군사활동에 참여하려는 동력이 높아지지만 반대로 약탈을 기대할 수 없는 방어전, 특히 상대가 우세할 경우라면 반대로 참여 동력이 크게 약화되어 동원력이 격감하는 것. 이 때문에 수 많은 유목제국들이 전성기에는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정주제국을 말 그대로 밟아버리지만, 반대로 정주제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역습해 올 경우에는 그 잠재적 동원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털려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점에서는 사실 <술탄에게 달려온 병력이 늘어난 것인지, 정규군을 제외한 약탈을 위한 유목민까지 포함한 수치인지> 굳이 구별할 필요 자체가 없다. 원래 그게 잘 구별이 안 되는 게 유목민이고, 이걸 굳이 구별하지 않고 성인 남성의 다수가 상시적으로 병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 유목민이 가진 폭발적인 군사적 위력의 핵심요소이기 때문. 결국 요약하자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강대국이 25000~40000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오는 상황에서는 "맞서 싸우러 나가봤자 이득볼것도 없는데 뭐하러 나감?" 하던 유목민 전사들이 비잔티움의 공세가 실패하고 룸 술탄국이 역습하는 상황이 되자 "비잔티움령을 털면 많이 벌 수 있겠네!" 하고 모여든 것이다. 이는 결국 유목민 사회가 가지는 특징으로부터 기인한 현상이다.[62] 마리아는 헝가리의 왕이 되는 벨러 3세와 결혼하여 공동으로 제위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나면서 없던 일이 되었고, 이후 시칠리아 왕국의 굴리엘모 2세와 결혼이 논의 되었으나 마누일의 반대로 역시 결혼하지 않았다.[63] 요안니스 2세의 차남인 안드로니코스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는 또 다른 당질[64] 알렉시오스 대군주가 알렉시오스 2세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즉위하려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알렉시오스는 알렉시오스 2세 못지 않게 안드로니코스 1세보다 정통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마누일 1세가 요안니스 2세의 4남이고, 이 알렉시오스 대군주의 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는 요안니스 2세의 차남으로서 요안니스 2세 계열의 집안에서는 오히려 선제 마누일보다 형으로서 큰집이기 때문이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요안니스 2세의 자손도 아닌 그 형제의 집안이라서 방계 황족이다. 즉 알렉시오스 2세에게는 할아버지 요안니스 2세의 후손도 아닌 안드로니코스 1세보다도, 같은 할아버지 요안니스 2세를 둔 사촌형 알렉시오스 대군주가 더욱 가깝다. 그만큼 더 위협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65] 이 사건이 22년 후 4차 십자군이 탈선한 명분 중 하나가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제위 계승 전쟁 중 일이 꼬여서 대금을 못 받았다고 해도, 채권이나 저당을 잡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를 아예 때려부숴서 강제로 상환받자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66] 당연히 정통성은 알렉시오스 2세의 가계가 안드로니코스 1세에 비하면 넘사벽이다. 알렉시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의 적손인 반면 안드로니코스 1세는 알렉시오스 1세의 직계이지만 요안니스 2세의 조카이므로 방계에 불과하다. 고로 적통 황손과 방계황족(조선시대에 비유하면 왕세자 > 군)의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67] 요안니스 2세 황제의 아들의 딸의 아들. 즉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는 6촌 조카손자(재종손) 되겠다.[68] Στέφανος ἁγιοχριστοφορίτης, 안드로니코스 1세 시기의 공문서국 국장(Logothetes tou dromou)이자 알렉시오스 2세를 죽인 실행범으로, 포악한 성격으로 인해 시민들로부터 증오를 받았다.[69] 동로마의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히포드롬의 두 기둥에 발로 매달린 안드로니코스 1세를 누가 더 깊이 찌를 것인지를 놓고 제국의 라틴인 병사 두 명이 겨루기까지 했다고 한다. 3년 전의 대학살에 대한 서방인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일화.[70] 지도를 찾아봐도 아르카디우폴리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겨우 100여 km 정도 떨어진 데 불과한 중심지였으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71]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100여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베네치아 해군을 격파했던 걸 생각하면, 폭군 안드로니코스 1세와 암군 이사키오스 2세의 실정으로 인한 재정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72] 실제로 1204년에서 1205년까지 베네치아의 해외 상업 활동에 관한 사료는 유달리 거의 남아있지 않다.[73] D.E.Queller & T.F.Madden, The Fourth Cursade, pp.222[74] Zadar(zara): 현재 크로아티아령 자다르. 본래 달마티아 지방은 명목상의 군주인 동로마 측이 내린 작위 덕에 베네치아령이었고, 자라는 베네치아 측의 식민 도시였으나 독립하여 헝가리 왕에게 충성했다.[75] 알렉시오스 황자의 누이 이리니의 남편으로 자형이 된다.[76] 혈통에 의한 작위의 계승권을 강조하던 서유럽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 때부터의 전통에 따라 시민들의 지지만 있으면 제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서유럽의 영주들이라면 몰라도, 동로마 제국과 교류가 잦던 교황청은 알렉시오스 황자가 사실 정통성이랄 게 딱히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교류가 잦고 문화적으로도 가까웠던 베네치아 역시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원수인 엔리코 단돌로가 모를리가 없었으니 사실상 여기서부터 베네치아의 뒷계산이 시작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77] 십자군에 참가한 영주들은 재산과 영토를 저당잡혀 있었고 베네치아에 빚까지 지고 있어서 자금이 절실했다. 더군다나 병력이 부족한 차에 이를 지원해주고, 교회 통합으로 대의적인 면에서도 부족한 명분을 취할 수 있는 제안이었으니 매력적이었을 것이다.[78]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시오의 아버지 굴리엘모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보니파시오는 3남이었다. 그중 5남 레니에는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 마누일 1세의 장녀 마리아와 결혼했었으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했다. 때문에 동로마 제국에 원한을 가지거나 다른 몫을 요구하기 좋은 입장이었다.[79] 당시 제국은 반란과 대 불가리아 전쟁, 세수 감소 등으로 국방력이 망가져 있었고, 해군력의 경우 아드리아해 연안의 방위를 베네치아 측이 대신 제공할 정도였다.[80] 동로마에서는 황제가 후계자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고 주로 형제나 자식 혹은 황제와 가까운 관계의 유능한 인물이 그 대상이 되었다. 물론 실권은 지명자가 선임 황제로서 쥐었고 피지명자는 후계자로서 대우받았다. 때때로 시민들의 동의나 다른 독특한 조건들이 요구 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은 고대 로마로부터의 전통이었다.[81] 당시 제국 최고액화 히피르피론(Hyperpyron) 200만 닢에 육박하는 거액이었다.[82] 알렉시오스 3세의 딸인 에브도키아의 연인이었다.[83] 연합군 측에서 내건 협상 조건이 알렉시오스 4세의 복위와 남은 계약금 절반에 대한 지급이었는데, 알렉시오스 5세는 이를 지킬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잘 될 리가 없었다.[84] 바실리오스 2세의 시신은 나중에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발견하여 수습했다.[85] 히피르피론 800만 닢에 육박했다.[86] 심지어 이 4차 십자군 원정으로부터 300년이 지난 16세기에도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 같은 스페인 정복자들 대부분도 글을 쓸 줄 몰라서 자기 이름을 미리 새겨놓은 금속판을 대고 문서에 서명을 했을 정도였다.[87] EPIRUS: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보라색 계열: _라틴 제국_, NICAEA: 니케아 제국, TREBIZOND: 트라페준타 제국[88] 역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형이다.[89] 조카로 알려졌지만, 1973년에 발견된 1251년 헌장에서 오토의 아들이라고 명시되었음이 확인되었다.[90] EPIRUS: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보라색 계열: _라틴 제국_, NICAEA: 니케아 제국, TREBIZOND: 트라페준타 제국[91] 테오도로스와 정교회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정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총대주교를 선출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교황을 이를 무시하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 총대주교좌를 설치했다. 결국 테오도로스와 정교회는 가톨릭과의 타협 없이 자체적으로 총대주교를 선출한다.[92] 테오도로스 1세 입장에서 본다면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알렉시오스 3세는 이미 다른 사위였던 알렉시오스 5세의 뒷통수를 쳤던 경력이 있었고(물론 알렉시오스 5세가 이전부터 보인 행보에 대한 자업자득이긴 했다.) 알렉시오스 3세가 살아있을 때 황제를 자칭했기에 제위를 내놓아도 목숨이 보장되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93] Ἀντιόχεια τοῦ Μαιάνδρου. 현 터키 아이든 주 쿠유자크(Kuyucak).[94] 황제와 술탄의 칼싸움은 당대 역사가인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의 역사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95] 사실 니케아가 라틴 제국과 지척이라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전부터 님페온에서 주로 머물고 있었는데 이걸 정식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여름철에는 근처의 스미르니마그니시아에서 머물기도 했다.[96] 출처:네이버 블로그 아마추어의 장(물의 백작 블로그)[97] 걷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아 환급해 주었다.[98] 이 사건으로 요안니스 4세의 누나인 불가리아의 황후 이레네와 불가리아의 차르 콘스탄틴 아센 1세가 분노해 불가리아 제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99] Despotate. 군주국, 전제군주국, 친왕부 등으로 번역된다.[100] 다만 2명 모두 양녀 혹은 사생아였다고 한다.[101] 1277년에 평화조약을 맺었으나 통상조건에 불만족하여 파기해버렸다.[10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사생아로서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을 놓고 카를루 1세와 겨뤄 패배한 만프레디의 사위이다.[103] 한편 나폴리로 도망친 카를루 1세의 '시칠리아 왕국'은 편의상 나폴리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공식적인 이름은 여전히 '시칠리아 왕국'이었고 따라서 2개의 '시칠리아 왕국'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 상황은 나중에 아라곤 왕국이 나폴리까지 차지하여 두 '시칠리아 왕국'이 같은 군주를 섬기게 되었음에도 변하지 않았는데 빈 회의 이후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4세에 의해 다시 정식으로 합쳐져 양시칠리아 왕국이 되었다.[104] '스밀레츠의 부인'이란 뜻이다.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