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카타칼론 케카브메노스 (영어: Katakalon Kekaumenos, 그리스어: Κατακαλὼν Κεκαυμένος)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동방의 스트라테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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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세기 동로마 제국의 장성.2. 행적
이름만 보면 10~12세기 동로마 제국의 유력한 군사 귀족 가문 중 하나였던 카타칼론 가문에 속하는 것 같지만,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에 따르면 아나톨리아 콜로네이아(Κολώνεια, 오늘날 튀르키예 셰빈카라히사르) 출신의 평민이었다고 한다. 스킬리치스는 카타칼론을 매우 호평했고 그가 남긴 회고록을 참고하기도 했다고 밝힌 것을 볼 때, 폄하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지어낸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병졸로 입대한 뒤 군공을 세우다가 카타칼론 가문의 눈에 들어 양자로 입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1038년 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에서 프로토스파타리우스(protospatarius) 계급을 맡아 아르메니아 테마의 분견대를 지휘했고, 1040년 아랍군의 메시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1042년 4월 미하일 5세의 지시에 따라 황제에게 반기를 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과 맞붙어 3천 명을 살해했지만 시민들이 정부군을 압도하자 대세가 기울었다고 여기고 항복했다. 그 후 새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에 의해 바르나(Varna) 수비대 지휘관으로 선임된 그는 10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가던 중 보급품을 수집하기 위해 비르나에 들리려던 키예프 루스군을 격파했다. 이후 키예프 루스군이 파로스 해전에서 참패한 뒤 해로와 육로를 따라 귀환할 때, 황제의 지시에 따라 육로로 이동하는 적군을 습격해 많은 적병을 사살하고 노브고로드 포사드니크 비샤타를 비롯한 800명의 전사를 체포해 사슬에 묶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키예프 루스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운 뒤 이베리아 테마 방면군 지휘관으로 부임했으며, 1045년 동로마군에 의해 공략된 아니의 총독을 맡았다. 얼마 후 셀주크 제국의 술탄 토그릴 1세의 조카인 하산이 지휘하는 20,000명의 투르크군이 아니로 쳐들어오자,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였던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아들인 아론과 함께 이들을 협로에서 습격해 격파했다. 토그릴 베이의 이복형제인 이브라힘이 10,000명 가량의 새로운 군대를 파견하자, 그는 이번에도 기습 공격을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아론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가 명령이 있을 때까지 방어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론의 주장에 따르기로 하고, 투르크군이 약탈을 자행하는 동안 요새에 틀어박힌 채 정부의 지침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이후 조지아의 트리알레티아 총독 리파리트 4세가 콘스탄티노스 9세의 지시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자, 그는 리파리트, 아론과 함께 튀르크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1040년대 말 동방의 스트라테고스로 승격된 그는 페체네그와의 전쟁에 참여해 니키포로스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페체네그족이 다 모이기 전에 선제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니키포로스는 "그렇게 했다간 놈들이 쥐구멍에 죄다 숨어버릴 거다"라며 거부하고 페체네그족이 다 모일때까지 기다린 뒤 일망타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뒤이은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참패했고, 카타칼론은 다른 부대가 무너지는 와중에도 우익 부대를 이끌고 끝까지 분전하다가 머리와 목에 심한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러다가 카타칼론이 다뉴브 강변의 바르나에 있을 때 친분을 맺었던 갈린(Galin)이라는 페체네그인이 그를 알아보고 천막으로 데려와서 정성껏 치료한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포로 교환을 통해 제국에 돌아온 그는 마기스테르 직책에 선임되었으며, 1055년 이전에 안티오히아 관구의 최고 사령관을 맡았다. 1055년 파티마 왕조의 시리아 침공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 라오디키아를 상실할 뻔했지만, 중앙 정부에서 급파한 전함 80척과 상당수의 육군 덕분에 라오디키아를 사수했다. 그러던 1056년 새 황제 미하일 6세가 관료들과 시민들에게 작위 승진이나 선물 등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동방군 총사령관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황제에게 프로에드로스(Proedros)[1] 칭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에 따르면, 미하일 6세는 장군들을 조심히 대하면서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반면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미하일이 장군들을 거세게 공박하고 특히 카타칼론에게는 안티오히아를 하마터면 빼앗길 뻔했다면서 격렬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사실에 근접한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황제가 군부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에 카타칼론과 이사키오스는 자신들이 대동한 군 지휘관들과 함께 1056년 8월 바로 그 무렵에 몰래 성 소피아 교회에서 회합을 열었다. 유력한 군 지휘관 출신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및 그의 친척이자 총대주교인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 역시 여기에 참석하거나 이를 최소한 방조하였다.
1057년,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카파도키아에서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수도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들어 카파도키아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지난날 테오도라 여제에 의해 추방되었을 때 빼앗긴 재산을 돌려주지 않은 미하일 6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고,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를 차기 황제로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미하일 6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사절을 보내 그에게 귀환을 명령했다. 그러자 그는 사절을 구타하고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에 장교들은 그가 곧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즉시 사절을 감옥에서 구출한 뒤 그를 체포하여 실명형에 처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이사키오스는 자신을 옹립하려 했던 니키포로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변을 서둘러 일으키기로 마음먹었고, 카타칼론은 이사키오스를 도와 정변 성공에 공헌한 뒤 이사키오스로부터 쿠로팔라테스(κουροπαλάτης: 궁전 담당관)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059년 이사키오스 1세가 퇴위한 뒤 제위에 호른 콘스탄티노스 10세에 의해 해임되었고, 이후엔 수도자가 되어 칼리니코스(Καλλίνικος)라는 수도명을 사용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요안니스 스킬리치스는 자신의 연대기 말미에 그의 회고록을 상당 부분 인용하면서, 그를 당대 최고의 장군이라고 극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