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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02 19:08:00

마누일 카미치스

이름 마누일 카미치스 콤니노스 두카스 앙겔로스
(영어: Manuel Kamytzes Komnenos Doukas Angelos
그리스어: Μανουήλ Καμύτζης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Ἄγγελος)
출생 1150년
사망 미상
직위 프로토스테라토르
반란 대상 알렉시오스 3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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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앙겔로스 왕조의 반란자. 이사키오스 2세 대부터 여러 전장에 참가했으나, 알렉시오스 3세가 불가리아로 잡혀간 자신을 구해주려 하지 않자 칼로얀의 지원을 토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했다.

2. 생애

1150년경 콘스탄티노스 카미치스와 마리아 앙겔리나 콤니니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궁정 시인 테오도로스 프로드로모스의 장례 송가에서만 알려졌고, 어머니는 앙겔로스 가문의 시조인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와 알렉시오스 1세의 딸 테오도라 콤니니의 맏딸이다. 1185년 사촌 이사키오스 2세가 황제가 된 뒤, 프로토스테라토르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1187년 몬페라토의 콘라드가 이끄는 제국군의 좌익부대를 맡아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의 반란군 진압에 기여했다. 이후 그해 9월 이사키오스 2세 황제를 모시고 라르에다스에서 쿠만족 6천 명을 격파했다.

1189년 프리드리히 1세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지나갈 때, 이사키오스 2세는 그와 알렉시오스 기도스에게 그들을 감시하고 식량 공출을 방해하라고 명령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필리포폴리스를 점거한 뒤 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가는 것 뿐이지 동로마 제국을 적대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지만, 황제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걸 질책하며 신성 로마 제국군과 싸우라고 명령했다.

결국 그는 1189년 11월 22일 필리포폴리스 인근에 2,000명의 기병을 매복시켜 신성 로마 제국군의 보급부대를 급습하려 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그가 본진을 설치한 프루세노스 요새의 아르메니아인 주민들로부터 이 사실을 전달받고,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매복한 동로마군을 급습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동로마군은 오흐리드까지 도망쳤으며, 그는 부하들을 버리고 3일이 지나도록 합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프리드리히 1세가 소아시아로 건너간 후인 1190년, 그는 이사키오스 2세가 불가리아 반란군을 토벌하는 원정에 참여했다. 원정군은 타르노보 요새를 포위 공격했으나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쿠만족 지원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철수하기로 했다. 트라브냐 계곡에 이르렀을 때, 그는 선봉대를 이끌고 계곡을 지나갔다. 그러나 사전에 매복해 있던 이반 아센 1세의 불가리아군은 동로마군 본대가 계곡에 완전히 들어섰을 때 들이쳤다. 그는 본대가 궤멸되는 걸 보고 공포에 질러 달아났다.

1195년 알렉시오스 3세가 이사키오스 2세를 몰아내고 대관식을 거행할 때 참여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그는 새 황제의 말의 고삐를 잡았다고 한다. 1196년 이반코가 타르노보에서 이반 아센 1세를 암살하고 제국에 구원을 청하자, 알렉시오스 3세는 그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는 필리포폴리스에서 출발했지만 모이시아에서 불가리아군과 싸우는 걸 꺼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페터르 4세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이 타르노보로 쳐들어갔고, 이반코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다.

1197년 봄, 알렉시오스 3세는 스트루미카와 프로세크 인근에서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의 조카인 도브로미르 크리소스에 대항하는 원정을 벌였다. 하지만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자, 황제는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카미치스의 딸을 크리소스와 결혼시키게 했다. 당시 카미치스의 딸은 유부녀였지만, 이혼을 강요당하고 크리스소와 억지로 재결합했다고 한다. 1198년 필리포폴리스를 지키던 이반코가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의 회유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키자, 알렉시오스 3세는 그에게 진압 임무를 맡겼다. 그는 처음엔 필리포폴리스 요새를 여러 개 공략했지만, 이반코가 일부러 흩어놓은 가축을 약탈하느라 정신없다가 이반코의 급습으로 포로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반코는 카미치스를 타르노보로 보내버렸고, 칼로얀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몸값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 역시 황제에게 몸값을 달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거부당했다. 그렇게 약 1년간 포로 생활을 보낸 끝에, 사위 도브로미르 크리소스에 의지하여 몸값을 마련해 겨우 풀려났다. 그는 다시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크리소스가 지불한 몸값을 대신 갚아달라고 청했지만, 황제는 역시 거절했다. 이에 격노한 그는 칼로얀의 지원하에 사위 크리소스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쳐들어가서 펠라고니아와 프릴레프를 점령했다. 이후 크리소스는 프릴레프에 남았고, 카미치스는 테살리아로 진격했다. 이로 인해 제국이 혼란에 빠진 사이, 레온 스구로스가 펠로폰네소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마케도니아 동부의 스몰레나 테마 총독이었던 요안니스 스피리도나키스도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시오스 3세는 우선 스피리도나키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1201년 가을 카미치스의 난을 진압하러 출진했다. 그는 크리소스와 접촉해 손녀 테오도라를 아내로 삼게 해주겠다고 제의했고, 크리소스는 곧 이에 동의하여 카미치스와 관계를 끊고 펠라고니아와 프릴레프를 넘겨줬다. 이에 동시에 환관인 요안니스 오이노폴리티스는 테살리아로 가서 카미치스에게 신분을 원상 회복하게 해줄 테니 귀순하라고 제안했다. 카미치스가 거절하자, 알렉시오스 3세는 친히 테살리아를 침공했다. 카미치스는 이에 맞섰으나 패배했고, 스타노스 요새로 피신했지만 곧 함락당하자 불가리아로 도망쳤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