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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콘스탄틴 티흐-아센 (영어: Konstantin Tih-Asen, 불가리아어: Константѝн Тих – Асѐн) |
출생 | 미상 |
사망 | 1277년 |
직위 |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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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 10대 차르.2. 생애
스코페 가문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티호미르 아센이고, 어머니는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니치의 알려지지 않은 딸이라고 한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파키메레스는 그를 "반 세르비아인"이라고 묘사했다. 1256년 칼리만 아센 2세가 차르 미하일 아센 1세를 살해한 뒤 한 달만에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에게 축출된 뒤, 차르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였지만 위대한 차르 이반 아센 2세의 사위인 점을 내세운 미초 아센에게 패했다. 그러나 미초 아센은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2세에게 패하면서 신망을 잃었고, 콘스탄틴은 이 때를 틈타 1257년 반란을 일으켜 미초 아센을 몰아내고 수도 타르노보를 공략했다.그는 차르에 오른 뒤 본래 이름이었던 티흐(Tih)를 아센(Asen)으로 개명해, 이반 아센 2세의 유지를 잇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1258년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테오도로스 2세와 불가리아의 엘레나 아세니나의 딸인 이리니 두케나 라스카리나와 결혼하면서 니케아 제국과 결혼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축출된 차르 미초 아센이 프레슬라프와 메셈브리아 일대에서 할거하였고,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는 "불가리아의 왕"을 자칭하며 그에게 대항하였다. 1259년, 로스티슬라프는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도움을 받아 불가리아 북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1260년 로스티슬라프가 벨러 4세의 보헤미아 침공을 지원하면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콘스탄틴 아센 1세는 슬라브 출신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를 파견해 비딘을 공략하고 이어서 세베린 바나트를 점령했다. 그러나 1261년 벨러 4세가 보헤미아와 강화 조약을 체결한 뒤 아들인 이슈트반 5세를 파견해 반격을 가하면서 도나우 강 하류의 롬과 비딘을 상실했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한 미하일 8세는 라스카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요안니스 4세를 실명시켰다. 이로 인해 결혼동맹은 깨졌고, 1262년 미하일 8세가 불가리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콘스탄틴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비사 시 까지 진군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63년 봄 콘스탄틴의 거듭된 공세를 버티지 못한 미초 아센이 메셈브리아 일대를 동로마 제국에 넘기고 망명하자, 미하일 8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트라키아를 전격 침공하여 스타니마카와 필리포폴리스를 공략하였으며, 해군을 파견해 비치나를 비롯한 도나우 강 하류의 삼각주를 점령하였다. 한편 또다른 부대는 흑해 주변의 아가트호폴리스, 소조폴리스, 안키알루스를 공략했다.
헝가리와 동로마 제국의 협공으로 곤경에 처하자, 콘스탄틴은 상국으로 모시던 킵차크 칸국에 구원을 호소했다. 이때 마침 룸 술탄국의 술탄 이젯틴 케이카부스 2세도 1260년 정변으로 축출된 뒤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으나 마리차 강 어귀의 아이노스 마을에 억류되었는데, 그 역시 킵차크 칸국에 도움을 호소했다. 이에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 칸은 개입하기로 결의하고, 조카인 노가이에게 군대를 맡겼다. 노가이는 1256년 다뉴브 강을 건너 트라키아로 쳐들어갔고, 콘스탄틴도 여기에 합류했다. 킵차크-불가리아 연합군은 아이노스를 공략하고 케이카부스 2세를 석방하였다. 케이카부스 2세는 몽골족 부인과 결혼한 후 킵차크 칸국의 봉신이 되어 크림 반도에 정착했다. 하지만 막상 불가리아는 별다른 영역을 확보하지 못 했다.
이 무렵 헝가리 내부에서 벨러 4세와 이슈트반 5세 부자가 내전을 벌이자, 헝가리의 봉신이었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가 불가리아로 귀순했다. 1265년, 콘스탄틴은 스베토슬라프와 함께 다뉴브 강을 건너 헝가리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나 벨러 4세와 이슈트반 5세가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하면서 헝가리의 내전은 종식되었고, 이슈트반 5세는 자신의 영지인 트란실바니아에 피해를 입힌 불가리아에 역공을 가했다. 1266년 6월 비딘이 함락되었고, 뒤이어 불가리아 수도 타르노보까지 진격하여 그 주변을 파괴하였고, 플레벤을 함락한 뒤 돌아갔다. 이에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버리고 헝가리의 봉신이 되었다.
1268년 아내 이리니 두케나 라스카리나가 사망하자,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기 위해 1269년 미하일 8세의 조카인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니와 결혼했다. 미하일 8세는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면 메셈브리아와 안키알루스를 지참금으로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아들 미하일 아센 2세가 태어났는데도 미하일 8세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콘스탄틴은 분노하여 1271년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칠리아 왕국의 카롤로 1세와 동맹을 맺고 트라키아로 침공했다. 하지만 미하일 8세가 자신의 사생아인 에우프로시나 팔레올로기나를 킵차크 칸국 서부 일대의 지배자 노가이 칸에게 넘기고 불가리아를 침공하게 했기 때문에, 콘스탄틴은 곧 돌아가야 했다.
1272년, 콘스탄틴은 낙마 사고를 당한 뒤 하반신이 마비되고 말았다. 이에 아들인 미하일 아센 2세가 공동 차르로 즉위하였고, 아내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니가 국정을 장악하였다. 마리아는 1274년 미하일 8세가 가톨릭과 정교회의 통합을 받아들이자 극렬히 비판하였다. 한편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는 이슈트반 5세가 사망하자 불가리아로 다시 귀순하였고, 불가리아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이반 아센 2세의 손녀임을 내세워 차르가 되려는 야욕을 품었다. 마리아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1276년 스베토슬라프를 독살했다.
이렇듯 국정이 혼란스러워지고 민중의 삶이 비참해지자, 1277년 농민 출신의 이바일로가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틴은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였지만 반란을 친히 진압하기로 하고 수레를 타고 출진했지만, 이바일로에게 참패하고 도망치던 중 수레가 전복되면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