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즘이 아닌 맥락에서 '민족사회주의'나 '국민사회주의'\에 대한 내용은 좌익 내셔널리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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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즘은 독일에서 기원한 파시즘의 분파 이념으로, 20세기 아돌프 히틀러가 창시하였으며 그가 지도자(Führer)로서 이끌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이념이다. 따라서 종종 히틀러주의(Hitlerism)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인 명칭은 아니다.나치즘의 주요 사상가는 그레고어 슈트라서, 리하르트 발터 다레,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있다.
흔히 말하는 나치즘(Nazism, Naziism)은 National Socialism의 독일어 발음의 약칭이고 정식명칭은 아니다. National Socialism의 번역어로는 국가사회주의, 민족사회주의, 국민사회주의가 사용되며 일반적으로 국가사회주의라는 번역이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지만 이 번역은 페르디난트 라살의 State Socialism과 혼동되기에, 민족사회주의라고 불러서 구별해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2. 이념
파시즘 같은 제3의 위치에서 추구하는 국가사회주의는 코포라티즘적인 국가, 조합주의 경제체제를 선택하였다. 집단과 공동체를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적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국가가 폐지되고 모든 경제를 노동자가 쥐는 직접민주주의적, 개인주의적, 코뮌주의[1] 사회를 추구하였고,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주장한 반면에 파시즘은 노동자뿐만이 아니라 부르주아를 포함한 모든 민족 구성원이 참여하는 민족공동체를 추구하였고, 자유주의(자본주의)와 마르크스식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물론 아나키즘과 같은 사상 역시 반민족적인 외세(특히 유대인)의 사상으로 보고 반대하였다.나치독일의 포스터 : 적들의 배후에는 유대인이 있다.
우리의 적들이 꾸미는 모든 음모의 배후에 국제 유대주의가 있다는 진실을 끝까지 깨닫지 못한다면 이 전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유대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차이와 이해관계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모든 연합국들을 한데 묶어두고 있는 접착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볼셰비즘은 동일한 유대적 뿌리에서 나오며, 한 나무의 다른 두 가지처럼 결국에는 같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국제 유대주의는 많은 국가들과 민족을 압제하여 복종시키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45년 1월 21일 베를린, 주간지 'Das Reich'
말하자면, 유대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차이와 이해관계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모든 연합국들을 한데 묶어두고 있는 접착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볼셰비즘은 동일한 유대적 뿌리에서 나오며, 한 나무의 다른 두 가지처럼 결국에는 같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국제 유대주의는 많은 국가들과 민족을 압제하여 복종시키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45년 1월 21일 베를린, 주간지 'Das Reich'
간혹 나치즘의 생산수단의 적극 통제를 마르크스주의의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는 시선도 있으나, 두 개념은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본질적으로 노동자의 생산수단 통제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이 생산수단을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착취받지 않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 반면 나치즘이 추구한 것은 생산수단을 국가권력이 통제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노동자 계급의 생산수단 통제로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치즘은 국가(정확히는 민족) 그 자체를 우선시하였기에 계급투쟁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나치당은 집권하는 과정에서 자본 계급과 제휴관계를 맺어온 역사를 가졌으며 '민족'의 안녕에 반하지 않는다면 자본가 계급을 보호하는 입장에 가까웠다.[2] 나치즘을 사회주의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는 의견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을 근간으로 세워진 국가들이었던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대개 국유화로 치환하는 형태의 사회구조를 가진 것이 나치즘의 생산수단 통제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더군다나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비록 집산주의적이긴 하였으나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기본적으로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었음[3]을 생각하면 더더욱 둘은 같은 맥락이라고 보기 어렵다.
즉 파시즘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민족, 더 나아가서 고대 독일인의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비이기적이고 희생적인 민족이었다. 따라서 파시스트들은 모든 민족은 자기 민족만의 사회주의가 있다는 주장 아래 자신들의 사상을 독일 민족 특유의 민족적인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면서, 유대인이 만든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볼셰비즘(유대-볼셰비즘)이라고 불러서 구별하였다. 민족에 기반한 사회주의였기에, 민족의 순수성과 우월성을 해치는 열등한 존재들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민족복지의 차원에서 민족의 생활권인 레벤스라움을 확보할 것을 주장하는 팽창주의적 태도가 나타난다. 나치즘은 니체철학의 위버멘쉬 사상과 힘에의 의지, 고비뉴의 '인종 불평등론',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19세기의 기초', 시온 의정서, 헨리 포드의 저서 '국제 유대인' 등의 영향을 받았다.
괴벨스는 엘버펠트의 홀츠 거리에 있는 사무국에서 밤을 새우며 작업을 하여 1월 초에 초안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 초안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보다 약 2개월 전 그자 작성했던 <나치즘의 ABC>로 초안의 내용을 재구성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나치당 정책의 목표는 "독일의 민족 동지 중 억압받는 계층들"의 '자유와 빵'을 위한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한 민족이고자 한다면 그중에서 억압받는 계층에게 정치적 자립성, 자유와 재산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유재산의 재구성과 제한을 위한 농업 혁명을 요구했고, 공업 부문, 즉 '생산적 자본'에서는 주요 기업들의 '국유화'를 추구했다.
그는 '나치 독일의 자유'에서 주적은 '증권 자본주의'라고 생각했다. "증권 자본은 생산적 자본이 아니라 기생적이고 탐욕적인 자본이다. 그것은 땅을 딛고 선 것이 아니라, 고향을 잃고 국제적이 되었다. 증권 자본의 활동은 생산적이지 않으며, 단지 이윤을 끌어내려는 목적에서 생산의 통상적 과정에 개입할 뿐이다. 그 자본은 유동 가치, 즉 현금으로 존재하며, 주된 주체는 유대인 금융 자본이다. 이들은 생산하는 대중을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하고 이를 통해 노동의 이윤을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의회 민주주의 체제라는 '간판'을 내건 '증권 자본'은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과 손을 잡는데 이는 이들이 유대 인종이라는 동일한 뿌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둘이 독일의 자유를 막는 주적이다. 나치는 이들에 맞서 '백병전'을 벌이려 한다.
...
12월에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의 '예언적 전망'인 <제 3제국>을 읽기 시작한 괴벨스는 미래 나치 독일의 서방 지향을 단념했다. 그는 젊은 대학생 시절부터, 러시아 극작가들을 받아들이면서 러시아 민족의 본질이 독일과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문학에도 인간 존재를 둘러싼 근본 물음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24년 <민족의 자유> 편집인으로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민족적 정화를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썻다. 그는 러시아가 "언젠가 자신들의 최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 속에서 깨어나게 될 것"을 확신하였다. 이때 괴벨스는 "유대인의 국제주의에서 해방된" 러시아, "물질주의를 영영 거부하고" "사회주의적 민족국가"를 쟁취할 러시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서한>에서 러시아는 "서방의 악마적 유혹과 부패에 대적하는 우리의 타고난 동맹자"이기 때문에 독일과 함께 이 길을 갈 것이고 독일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152~154p
그는 '나치 독일의 자유'에서 주적은 '증권 자본주의'라고 생각했다. "증권 자본은 생산적 자본이 아니라 기생적이고 탐욕적인 자본이다. 그것은 땅을 딛고 선 것이 아니라, 고향을 잃고 국제적이 되었다. 증권 자본의 활동은 생산적이지 않으며, 단지 이윤을 끌어내려는 목적에서 생산의 통상적 과정에 개입할 뿐이다. 그 자본은 유동 가치, 즉 현금으로 존재하며, 주된 주체는 유대인 금융 자본이다. 이들은 생산하는 대중을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하고 이를 통해 노동의 이윤을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의회 민주주의 체제라는 '간판'을 내건 '증권 자본'은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과 손을 잡는데 이는 이들이 유대 인종이라는 동일한 뿌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둘이 독일의 자유를 막는 주적이다. 나치는 이들에 맞서 '백병전'을 벌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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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의 '예언적 전망'인 <제 3제국>을 읽기 시작한 괴벨스는 미래 나치 독일의 서방 지향을 단념했다. 그는 젊은 대학생 시절부터, 러시아 극작가들을 받아들이면서 러시아 민족의 본질이 독일과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문학에도 인간 존재를 둘러싼 근본 물음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24년 <민족의 자유> 편집인으로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민족적 정화를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썻다. 그는 러시아가 "언젠가 자신들의 최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 속에서 깨어나게 될 것"을 확신하였다. 이때 괴벨스는 "유대인의 국제주의에서 해방된" 러시아, "물질주의를 영영 거부하고" "사회주의적 민족국가"를 쟁취할 러시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서한>에서 러시아는 "서방의 악마적 유혹과 부패에 대적하는 우리의 타고난 동맹자"이기 때문에 독일과 함께 이 길을 갈 것이고 독일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152~154p
어떻게 이 도시, 우리가 6년 전 몇 안 되는 사람들로 시작했던 이 도시에서 진정 전 시민이 들고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저 아래에서부터 노동자, 부르주아, 농부, 학생 군인들이 행진하였는지를 보는 것은 그야말로 감동적인 일이다. 그 위대한 민족공동체에서 우리는 그가 유산계급인지 무산계급인지, 가톨릭 신자인지 개신교 신자인지 더 묻지 않는다. 우리는 오로지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당신의 나라를 신봉하는가 물을 뿐이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391p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391p
그는 "부르주아적인 점잔" 따위는 집어치워야 한다고 과도하게 목소리를 높였고, 미칠 듯한 박수 갈채가 끝나자 총력전이라는 자신의 요구 사항으로 접어들었다. 그에 따르면, 총력전은 시대의 요구였다. 괴벨스는 사회주의로부터 영감을 얻은 과거 자신의 사고방식, 그러나 결코 실현된 적 없는 '민족공동체'라는 비전을 다시 끄집어내어, 당은 신분과 직업 등을 결코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신분이 높거나 모두 같은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볼셰비즘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볼셰비즘을 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782p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782p
민족공동체 개념은 나치체제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개념이다. 나치는 민족공동체의 형성을 약속하면서 정치와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를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구축하고자 했다. 연구개념으로서의 민족공동체는 첫째, 나치에서의 변화된 정치적·사회적 권력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며, 두번째 사회적 약속을 통해 주민들을 동원하는 기제이며, 세 번째 나치체제의 통합과 배제의 특성을 지칭한다.
나치의 사회정책은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와와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나치는 계급투쟁을 극복하고 민족공동체를 수립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파트너쉽에 기초한 바이마르의 노동질서를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기업공동체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새로운 나치적 노동질서를 수립하였다. 민족공동체와 업적공동체를 수립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노동전선은 노동자들을 규율하는 동시에 체제 내로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정책적 활동을 벌였다. 노동전선의 산하조직인 기쁨을 통한 힘은 여행, 스포츠, 문화활동 등의 다양한 여가를 노동자에게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다. 노동의 아름다움은 공장의 환경을 개선하고 합리화함으로써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통합을 촉진하려는 시도였다.
사회보험분야에서 나치는 조직을 통합하여 행정합리화를 추진하는 한편 보험료는 올리고 급여는 낮추어 재정의 안정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사회보험의 구체적 운영은 인종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며 군수산업과 전쟁준비에 복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복지분야에서 민족복지회는 나치 최대의 조직으로서 인종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적 약자가 아닌, 민족의 동지와 ‘가치있는 자’에게 다양한 후생복지혜택을 제공하여 미래의 건강한 민족을 재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에게 복지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민족복지회의 활동은 근대적 성격의 가족·인구정책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은 철저히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월동구호단은 민족은 스스로 돕는다는 구호 아래 전국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자선모금활동을 벌였고, 이것은 민족공동체의 실현의 징표로서 선전되었다.
나치 사회정책의 많은 부분은 독일제국과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이어지는 근대화 과정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나치의 사회정책은 복지국가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제거하고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자리에 민족을 대치함으로써 퇴행적인 특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신명훈, 독일 복지국가 담론의 역사: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와 사회정책, 독일연구 2015, vol., no.29, pp. 155-198 (44 pages)#
나치의 사회정책은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와와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나치는 계급투쟁을 극복하고 민족공동체를 수립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파트너쉽에 기초한 바이마르의 노동질서를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기업공동체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새로운 나치적 노동질서를 수립하였다. 민족공동체와 업적공동체를 수립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노동전선은 노동자들을 규율하는 동시에 체제 내로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정책적 활동을 벌였다. 노동전선의 산하조직인 기쁨을 통한 힘은 여행, 스포츠, 문화활동 등의 다양한 여가를 노동자에게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다. 노동의 아름다움은 공장의 환경을 개선하고 합리화함으로써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통합을 촉진하려는 시도였다.
사회보험분야에서 나치는 조직을 통합하여 행정합리화를 추진하는 한편 보험료는 올리고 급여는 낮추어 재정의 안정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사회보험의 구체적 운영은 인종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며 군수산업과 전쟁준비에 복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복지분야에서 민족복지회는 나치 최대의 조직으로서 인종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적 약자가 아닌, 민족의 동지와 ‘가치있는 자’에게 다양한 후생복지혜택을 제공하여 미래의 건강한 민족을 재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에게 복지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민족복지회의 활동은 근대적 성격의 가족·인구정책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은 철저히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월동구호단은 민족은 스스로 돕는다는 구호 아래 전국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자선모금활동을 벌였고, 이것은 민족공동체의 실현의 징표로서 선전되었다.
나치 사회정책의 많은 부분은 독일제국과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이어지는 근대화 과정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나치의 사회정책은 복지국가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제거하고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자리에 민족을 대치함으로써 퇴행적인 특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신명훈, 독일 복지국가 담론의 역사: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와 사회정책, 독일연구 2015, vol., no.29, pp. 155-198 (44 pages)#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자가당착, 그리고 이 두 이념의 종합은 독일 사상사의 핵심 내용이다. 1918년에서 1945 사이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이를 둘러싼 것이었다.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이에 따라 과거로부터 전승된 자부심이 손상되고 전통적인 프로이센 군주 질서가 파괴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변화된 정치 조건에 대항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획득하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의 핵심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종합하려는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논의이다. 이러한 이론적 논의의 전개는 NSDAP(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나치당)의 건설과 확장과정과 일치한다. 1933년의 나치의 권력 획득과 함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종합은 공공연히 사회전반에 적용된다. 민족 부르주아지 측에서 보면 “사회주의적”인 것은 “민족사회주의”나 좀바르토(Sombart)가 말하는 “법치 사회주의”이며, 이들은 좌파 사회주의, 즉 맑스 사회주의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스스로 이해되고 있다. 1933년 이전까지의 논쟁에서는 여러 입장들이 주장되었지만 1933년 이후에는 단지 히틀러를 사회주의 혁명가로 표현하고 우상화하는 글들만이 만연된다. (1933년 이전의 논쟁에서 사회주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정리중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특이할 사항은 사회주의를 민족의 공동체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민족과 사회주의를 접합시키려는 노력이외에도 1890년대에 발행되어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퇴니스 (Toennis)의 저작 “공동체와 사회(Gemeinschaft und Gesellschaft)가 1920-30년대에 6판까지 발행되었다는 점이다 자세한 논쟁은 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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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부르주아지 이론가들에게는 자본주의 역시 “서구적인 것” 또는 “유대인의 상인정신”의 전형적인 산물로써 비난받았다 (대표적인 학자가 좀바르트). 민족적인 입장으로 정리한 사람은 자본주의를 어떤 “낯선 것”, “서구로부터 강제된 체제” 또는 “증오스러운 자유주의의 경제체제”로 간주하였다.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의 차용으로 독일은 서구의 규칙에 종속되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민족사회주의로의 이행: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독일 논쟁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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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부르주아지 이론가들에게는 자본주의 역시 “서구적인 것” 또는 “유대인의 상인정신”의 전형적인 산물로써 비난받았다 (대표적인 학자가 좀바르트). 민족적인 입장으로 정리한 사람은 자본주의를 어떤 “낯선 것”, “서구로부터 강제된 체제” 또는 “증오스러운 자유주의의 경제체제”로 간주하였다.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의 차용으로 독일은 서구의 규칙에 종속되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민족사회주의로의 이행: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독일 논쟁정리#
그렇기에 이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차별화되는, 오히려 반동주의인 모습을 띄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국가사회주의에서 고대 민족인의 순수한 사회주의를 애기하던 이들은 좌파를 이루게 되며 대표적인 인물로 에른스트 룀, 그레고어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 파울 요제프 괴벨스(이후에 당내 좌파 숙청이후 히틀러의 딸랑이가 됐지만)가 있으며 이들은 철저하게 반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소련을 지지했다.[4][5] 당내 우파는 고대 민족의 순수한 사회주의보단 현대 독일을 만든, 현대 독일이라는 개념을 만든 이들의 순수성을 더 지향했다, 즉 이들은 독일 민족이란 개념이 만들어진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위시로 한 민족주의적 체제를 애기했다.
슈트라서 진영은 그동안 히틀러가 독일국가인민당에 접근하는 것과 유력 실업가들의 호의를 얻으려는 알랑거림을 비판해 왔고, 거침없는 반자본주의 노선을 과시하면서 포괄적인 국유화 조치와 소련과의 동맹을 주장했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258~259p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258~259p
그렇기에 이런 순수성, 민족성을 애기했기에 이들은 신이교주의에 꽤나 빠저있었다. 특히 하인리히 힘러가 그 대표주자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경험한 독일에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자유/자본주의 이념 및 체제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으며, 이는 1920년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포괄적인 의미의 반(反)서구주의적 ‘보수혁명(Konservative Revolution)’으로 나타났다. 그들 중 일부는 10월혁명에서도 사회주의적 성격보다 반서구적 측면에 주목했으며, 볼셰비즘을 자신들의 명칭으로 삼을 만큼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의미상 대립적인 단어들의 결합인 민족볼셰비즘은 일견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19/20세기 유럽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주의와 치열하게 싸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계급 대 민족, 국제주의 대 민족주의의 대립으로 표현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서 특히 첨예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변적인 현실정치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갈등도 확고하고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민족볼셰비즘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민족볼셰비즘의 핵심 인물인 니키쉬(Ernst Niekisch)는 자신이 주도한 운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저항운동은 순전한 서구의 이념들을... 거부한다. 로마의 지배사상, 로마법, 1789년의 사상, 문명의 이념들,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부르주아적 세계관과 경제관 등 이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은 독일의 자유 투쟁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전제이다. ... 저항운동은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단호하게 동구로 시선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 모든 수단을 동원한 군사력의 강화, 로마법적인 사유재산의 거부. 사유재산권의 제한, 자본주의적 경제 및 사회 체제의 폐기. 세계경제 체제로부터 포괄적이고 무조건적인 탈퇴.” 이처럼 민족볼셰비즘의 핵심은 자유/자본주의로 상징되는 서구의 거부와 친(親)동구에 있었다.
따라서 민족볼셰비키는 서구와 다를 뿐 아니라 대립적인 러시아를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
...
독일에서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이 끼친 영향은 공산주의자들마저 민족주의적으로 만들만큼 컸다. 1차 세계대전을 시장의 분할을 둘러싼 자본들 간의 싸움으로 보고 전쟁을 거부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를 외쳤던 독일 공산당조차 조약이 야기한 프랑스에 대한 증오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종전 직후 독일에서 반(反)프랑스 정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민족을 배제한 채 계급만으로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이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허구였지만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민족볼셰비즘을 처음 언급한 인물들은 1918년 독일 공산당 창당 멤버들이기도 했던 라우펜베르크(Heinrich Laufenberg)와 볼프하임(Fritz Wolfheim)이었다. 두 사람은 계획경제와 함께 독일이 러시아에 접근할 것을 촉구했다. 정복당한 독일은 두 ‘프롤레탈리아 민족국가’의 동맹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베르사유 늑약’이 독일 제국을 조각내자, 독일 민족 거의 전부가 프롤레타리아화했고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민족을 대표하는 집단은 노동자계급이라고 보았다. 이들 두 사람은 민족해방의 주체를 노동자계급으로 보았다는 면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였으나 베르사유 조약과 관련해서는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윤용선, 러시아 10월 혁명과 독일 보수혁명, 1920년대 민족볼셰비즘(Nationalbolschewismus)을 중심으로, 2018, vol., no.39, pp. 5-33 (29 pages)#
의미상 대립적인 단어들의 결합인 민족볼셰비즘은 일견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19/20세기 유럽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주의와 치열하게 싸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계급 대 민족, 국제주의 대 민족주의의 대립으로 표현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서 특히 첨예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변적인 현실정치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갈등도 확고하고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민족볼셰비즘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민족볼셰비즘의 핵심 인물인 니키쉬(Ernst Niekisch)는 자신이 주도한 운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저항운동은 순전한 서구의 이념들을... 거부한다. 로마의 지배사상, 로마법, 1789년의 사상, 문명의 이념들,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부르주아적 세계관과 경제관 등 이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은 독일의 자유 투쟁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전제이다. ... 저항운동은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단호하게 동구로 시선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 모든 수단을 동원한 군사력의 강화, 로마법적인 사유재산의 거부. 사유재산권의 제한, 자본주의적 경제 및 사회 체제의 폐기. 세계경제 체제로부터 포괄적이고 무조건적인 탈퇴.” 이처럼 민족볼셰비즘의 핵심은 자유/자본주의로 상징되는 서구의 거부와 친(親)동구에 있었다.
따라서 민족볼셰비키는 서구와 다를 뿐 아니라 대립적인 러시아를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
...
독일에서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이 끼친 영향은 공산주의자들마저 민족주의적으로 만들만큼 컸다. 1차 세계대전을 시장의 분할을 둘러싼 자본들 간의 싸움으로 보고 전쟁을 거부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를 외쳤던 독일 공산당조차 조약이 야기한 프랑스에 대한 증오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종전 직후 독일에서 반(反)프랑스 정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민족을 배제한 채 계급만으로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이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허구였지만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민족볼셰비즘을 처음 언급한 인물들은 1918년 독일 공산당 창당 멤버들이기도 했던 라우펜베르크(Heinrich Laufenberg)와 볼프하임(Fritz Wolfheim)이었다. 두 사람은 계획경제와 함께 독일이 러시아에 접근할 것을 촉구했다. 정복당한 독일은 두 ‘프롤레탈리아 민족국가’의 동맹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베르사유 늑약’이 독일 제국을 조각내자, 독일 민족 거의 전부가 프롤레타리아화했고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민족을 대표하는 집단은 노동자계급이라고 보았다. 이들 두 사람은 민족해방의 주체를 노동자계급으로 보았다는 면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였으나 베르사유 조약과 관련해서는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윤용선, 러시아 10월 혁명과 독일 보수혁명, 1920년대 민족볼셰비즘(Nationalbolschewismus)을 중심으로, 2018, vol., no.39, pp. 5-33 (29 pages)#
나치즘이라고 말하는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의 푈키셔 내셔널리즘과 반유대주의에서 영향을 받고,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사회 유기체론에서 시스템을 빌려왔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한창 인기를 얻던 보수주의 혁명 운동의 방식과 혼합되었다.
흔히 사용되는 '나치'라는 말은 'Nationalsozialistische'의 'Nati'의 독일어 발음으로 정식명칭이 아니라 멸칭이었다.[6]
국가사회주의 지지자들은 이른바 게르만족이 대표라고 주장한 '아리아'이 타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게르만족'의 우월성과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지지하였다. 게르만 민족이 동유럽을 되찾아 생활권을 확보해야 하며 게르만 민족 이외의 아리아인들 역시 그들의 땅에서 지배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매우 강경한 순혈주의와 국수주의. 나치즘은 전후의 독일에서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여전히 잔존 국가사회주의자들과 새로운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기원
국가사회주의는 단순한 이념의 집합체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다. 특히,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형성 과정에서 루돌프 융(Rudolf Jung)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사상은 독일 노동자당(DAP)[7]의 기틀을 잡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융은 푈키셔 내셔널리즘과 노동자 평의회 중심의 사회주의를 결합한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하였으며, 이는 후일 '국가사회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루돌프 융은 독일 노동자당(DAP)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이념적 기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푈키셔(Völkisch) 민족주의와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를 결합한 독창적인 사상을 제시하며, 당의 초기 방향성을 설정했다. 그가 제안한 '이글라우 프로그램'은 범독일적 통일, 독점 산업의 사회화, 노동자와 농민의 협력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사상은 후일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융은 또한 중앙유럽의 영토 확장과 같은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요소는 나치당의 기본 정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19년, 히틀러가 나치당에 참여하기 전부터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DNSAP)'이라는 정당이 이미 있었으며, 당의 주요 이념적 기틀을 제공한 것은 바로 루돌프 융이었다. 또한, DNSAP는 1919년에 당 상징으로 스와스티카(만자)를 채택하였고, 이는 이후 히틀러가 나치당의 상징으로 발전시켰다.
국가사회주의는 루돌프 융뿐만 아니라 많은 유럽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의 '국가사회주의자'였던 에두아르 베르트(Édouard Berth)와 피에르 비에트리(Pierre Biétry)의 사상은 민족사회주의 이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는 그의 저서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에서 독일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히틀러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히틀러는 또한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의 '윤리적 사회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피히테는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와 민족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윤리적 사회주의 사상을 제창하였으며, 이는 히틀러의 사상적 기초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국가가 개인을 초월하여 사회적 통합을 이룩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에서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윤리적 사회주의는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 사상에서 국가가 노동과 사회를 조화롭게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의 바탕이 되었다.
히틀러의 경제적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 고트프리트 페더(Gottfried Feder)였다. 페더는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 특히 '이자 노예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통해 히틀러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경제 이론은 나치 경제 정책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그는 국제 금융 자본을 독일의 적으로 간주하며, 독일 경제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강조하였다. 페더는 국제 금융 자본을 비판하면서 독일 경제의 독립성을 강조하였고, 이는 나치당의 경제 정책으로 이어졌다.
4. 국가사회주의에 관한 일화
국가사회주의는 반유대주의에 기초해 유대인을 탄압했으며, 나치는 혈통에 근거해 유대인 여부를 결정했다. 그런데 유대인의 기원은 고대 중동이긴 하나, 고향에서 쫓겨난 이래로 근 2000년 동안 유럽의 민족들과 섞일 대로 섞였으니 현대의 유대인들은 원래의 셈족 유전자나 표현형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의 정체성은 흔히 유대교로 구분되지만, 심지어 개신교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도 있었다.[8] 결국 민족적 구분도 종교적 구분도 모호해진지 오래인 가운데, '스스로가(혹은 남들이) 유대인이라고 믿으면 유대인'이라는, 그야말로 허상과 같은 관념이 되었다. 나치는 조부모대에 유대인이 있으면 유대인이라고 판정하는 식으로 유대인을 정했는데 이미 유대인은 혈통으로 구분 가능한 게 아니다보니 유대인임에도 유대인임을 알아채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위대한 아리아인으로 판정되는 웃지 못할 사례가 많이 나왔다.- 1935년에 베를린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스러운 아기'를 뽑는 대회가 있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직접 1등을 선정했다.
그리고 저 아기의 부모에게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고, 아기의 사진은 게르만의 우월성을 알리는 선전 잡지와 포스터에 자주 실리기도 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실 저 아이는 유대인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헤시 레빈슨 태프트(Hessy Levinsons Taft)로, 부모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몰래 노란색의 다윗의 별을 붙이고 다니지 않았고 철저하게 자신이 유대인임을 숨기고 살아갔다. 그리고 간도 크게도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스러운 아기를 뽑는 대회에까지 나갔던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치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싶어서 대담하게 태프트의 사진을 출품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로 유대인인 자신들의 아이가 최고의 아리아인으로 선정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1938년, 아이의 부모는 게슈타포에게 붙잡혀가기도 했으나, 그것은 아이가 유대인인 것을 들켜서가 아니라 단순한 탈세 문제였다. 심지어 감옥에 아주 잠깐 갇혔다가 일주일만에 풀려났다. 그리고 괴벨스도 히틀러도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그 날까지 저 아이와 저 아이의 가족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진 속 아기는 자라서 뉴욕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했다.
- 야사로 한 유대인 소년 한스가 있었다. 그의 부모는 신분을 세탁하는 데 성공하여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독일인으로써 정상적으로 살게 되었으며, 한스도 아리아인으로 인정받은 다른 독일인 아이들과 함께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하루는 교사가 말하길, "내일은 골상학적, 그리고 유전학적 측면에서 우리 게르만족이 얼마나 우월한 민족인지 배울 거란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스는 겁이 덜컥 났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유대인인 것이 들통나면 학교에서 퇴학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소문으로만 어렴풋이 들리는 강제 수용소라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 아닌가?[9] 갑자기 병을 핑계로 학교에 가지 않으면 그 또한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와 그의 부모는 크게 걱정하면서 살얼음판 같은 하루를 보냈고, 결국 그 다음 날 한스는 덜덜 떨면서 등교를 했다. 그리고 결국 수업이 시작되었고 교사는 줄자와 계측기로 한스의 키와 두상 형태를 측정했고, 체중계로 체중을 검사하고, 또한 유전자를 검사했다. 이윽고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스는 동프로이센 지역 바이킹 계통의 아리아인이네요! 아주 우월한 혈통이구나, 한스!"
한스는 크게 안심함과 동시에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속으로 계속 헛웃음만 나왔다. 훗날 그는 독일 국방군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였는데, 종전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 나치당의 간부들 가운데에 그들이 말하는 순혈 아리아인의 조건에 만족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나치당에서 추구하는 우월한 아리아인이란, 금발에 벽안, 그리고 건강한 신체와 운동능력, 뚱뚱하지도 않고, 너무 마르지도 않아야 하며, 웬만하면 시력도 좋아서 안경을 끼지도 않아야 한다"였다. 전직 SS 친위대 장교 출신들은 나치즘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이 개념을 '독일 제국에서 중대한 건까지는 아니고, 그냥 오늘날의 이상적 패션 모델 같은 개념이었다'라고 회상했다.
- 아돌프 히틀러 - 벽안이었지만 흑발이었다(어린시절엔 금발벽안이었으나 성장한뒤 흑발로 바뀜.). 그리고 홀고환증[10] 환자였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흑발인 것도 모자라, 소아마비 장애인이였으며, 굉장히 말랐다.
- 헤르만 괴링 - 벽안인 것은 맞으나 갈색 머리였고, 약물 중독으로 인한 심각한 비만이었다.
- 하인리히 힘러 - 흑발갈안이었고, 얼굴의 생김새가 '매우 동양인스럽게' 생겼으며, 안경도 꼈다.
- 루돌프 헤스 - 흑발갈안이었다.
- 알베르트 슈페어 - 흑발갈안이었다.
- 마르틴 보어만 - 벽안이긴 했으나 흑발이었고, 비만이었다.
- 롤란트 프라이슬러 - 흑발에 탈모였으며, 말랐다.
- 발터 풍크 - 흑발에 탈모였으며, 비만이었다.
- 헤르베르트 바케 - 벽안인 것은 맞으나 흑발이었고, 머리숱이 적었으며, 안경도 꼈다.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벽안인 것은 맞으나 흑발이었다.
확실히 그냥 국가의 이상적 모델이라서 그런지 당장 국가원수인 히틀러부터가 아리아인 기준 미달이었고, 저렇게나 많은 고위 간부들이 아리아인으로는 실격점이었다. 저것도 극히 일부만 소개한 것 뿐이지, 실제로는 아리아인 기준 실격인 나치 간부들이 훨씬 더 많았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정도만이 아리아인 기준에 얼추 맞아떨어질 뿐이었다.
- 뿐 만 아니라 독일 국방군과 슈츠슈타펠에 속하는 주요 인물들 중에서도 순혈 독일인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동프로이센 일대가 원래 부터 폴란드, 리투아니아 계통 집안이 독일 문화권에 동화되었거나 독일 계통과의 혼혈이 잦았기 때문에 장성들 중에서도 혈통이 비독일인인 경우가 많았다. 분석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국방군과 친위대에서 복무했던 유대인 계통 병사가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특히 패색이 짙어지는 전쟁 말기가 되면 각종 유색인종들의 지원도 받아들이는 모순을 저질렀다.[11]
- 에리히 폰 만슈타인 - 육군의 유명한 명장. 그의 집안은 아주 오래전 부터 독일 문화권에 동화된 폴란드 카슈브 계통 귀족이었다.
에르하르트 밀히- 루프트바페의 원수. 독일인 사이에서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지만 그의 양아버지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 혈통 논란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인물이었다.- 아돌프 갈란트 - 루프트바페의 에이스이자 장성. 그의 조상은 위그노 탄압을 피해 독일로 이주해온 프랑스인이었다. 성씨를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갈랑'이 된다.
-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 - 루프트바페의 에이스. 그의 조상은 위그노 탄압을 피해 독일로 이주해온 프랑스인이었다. 성씨의 철자가 Marseille로 프랑스 지명인 마르세유를 뜻한다.
- 발터 크루핀스키 - 루프트바페의 에이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조상 역시 폴란드 계통이었다.
- 오딜로 글로보츠닉 - 슈츠슈타펠의 장성으로 홀로코스트를 주동한 악명 높은 인물. 성씨부터 슬라브계통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독일-체코 혼혈이었다.
-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 슈츠슈타펠의 도살자로 악명 높은 인물. 아이러니하게 그의 모친부터 폴란드인이었으며 그의 부계 조상 역시 폴란드 계통이었다.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 마찬가지로 슈츠슈타펠의 학살자였지만 폴란드-독일 혼혈이었다.
- 헬무트 빌버그(Helmuth Wilberg) - 루프트바페의 장성으로 유대인이었다. 최종계급은 공군 항공대장(General der Flieger)이었다. 전형적인 참모형 군인으로 루프트바페의 교리와 전술 수립에 주력하다가 1941년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 베른하르트 로게(Bernhard Rogge) - 크릭스마리네의 제독으로 그 역시도 유대인이었고 히틀러도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혈통 조작을 가해 아리아인이라고 인정해주었다. 최종계급은 중장이었고 전후에도 서독 해군 제독에 부임했다.
- 에밀 마우리스 - 슈츠슈타펠 소속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운전수였는데 독일인과 유대인 혼혈이었다. 그럼에도 히틀러에 의해 명예 아리아인이라고 인정되었고 전후에도 살아남아 연합군이 설치한 노동 수용소에서 4년을 복역한 뒤 석방되어 시계공으로서 여생을 살다 1972년에 사망했다.
-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 아버지가 유대인이었지만 히틀러는 그를 명예 아리아인으로 대우했고 1차 세계 대전 참전 경력을 되살려, 독일 국방군 소령으로 동부 전선 보안 연대에서 빨치산 소탕 작전에 참여했다. 1944년엔 대령으로까지 진급했지만 하필이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결국 1944년 10월, 강제 예편되었다.[12] 그는 1945년, 국민돌격대로 재징집되었으며 베를린 전투에서 전사했다.
- 디터 베르크만(Dieter Bergmann) - 독일 국방군 병사였으며 유대인-독일인 혼혈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포들을 박해하는 정권에 충성을 바친다는 사실에 자괴감에 빠져 지냈다고 한다. 실제로 베르크만의 친척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베르크만 자신은 '우수한 병사'로 호평받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뉘른베르크 법으로 인해 많은 제약을 받았고 정신적으로도 괴로움을 겪었다고 한다.
- 베르너 골드버그(Werner Goldberg) - 평범한 독일 국방군 병사였지만 나치 정권의 선전 포스터에 활용되면서 유명해진 케이스.[13] 그 역시 유대인 계통이었다.[14]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으며 1940년에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군대에서 추방당한 뒤 의류 직종에 종사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2004년에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미디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국 중 하나인 미국의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이 프로파간다 목적의 애니메이션 여러 편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나치 독일 치하에서 고통받는 서민(도날드 덕이 이 역할을 맡았다.)을 묘사한 '총통각하의 낯짝'이나 그리고 아래 설명할 '파멸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Death)'같은 나치즘 세뇌 실태를 풍자하는 애니메이션도 포함되어 있다.파멸을 위한 교육은 나치 독일의 어린이들의 성장과정과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이 군인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 또한 프로파간다의 일종이기는 했고 애니메이션이라 그런지 조금은 과장되게 그려진 면이 있다. 하지만 이 만화에서 나오는 묘사들은 대부분 실제로 존재했던 것들이며,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는 전부 저러한 세뇌 속에 자라나 역사상 가장 잔인한 군대가 되고 말았다.
이 만화에서 나왔던 것들을 짚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 출생신고에 여러가지 증명서를 잔뜩 들고 가는 건 과장이지만, 어찌 됐건 나치 독일에서 생존하려면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더 많은 군인을 양성하기 위해 출산을 장려했던 것 또한 사실. 신혼부부에게 독일의 베스트셀러를 한권씩 선물로 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 동화 조작은 이 만화의 유일한 개그씬이지만 히틀러는 나치 독일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을 프로파간다에 포함시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당연히 동화로도 프로파간다를 만들었을 것.
- 병을 가진 아이들이 나치에게 끌려가서 아무 소식이 없었다는 것 또한 어느 정도 사실이다. T4 작전 문서로.
- 토끼와 여우를 언급하는 장면 또한 당연히 나치즘의 약육강식에 기반한 사상을 프로파간다적으로 표현한 장면.
- 교회를 불태우는 장면은 조금 애매한데, 실제 나치 독일의 사상 검열을 반영했다기보다는 종교적인 미국인들의 분노를 이끌어내도록 유도한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더 크다. 물론 나치 독일이 기독교의 신앙보다는 나치즘 숭배를 더 강조했을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15]
- 마지막 장면인 한스의 행진 중 청소년 부분은 당시 나치 독일이 창설했던 히틀러 유겐트[16]를 묘사하며 나레이션 또한 그런 뉘앙스로 말한다.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을 1943년에 모아 같은 이름의 개별 부대로 편성하기까지 했을 정도.
나치당의 집권은 1933년이며, 1934년 히틀러가 공식적으로 총통 자리에 올랐는데 집권 직후 수권법으로 아예 나라 전체를 히틀러 혼자서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데다 그 전부터 이미 교육에 대한 체계를 빠른 속도로 나치식으로 정비하여 적어도 1920년대 중반 이후 출생자라면 영상에 등장한 한스와 비슷한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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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와 자본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하며, 자유로운 개인들의 개성과 차이가 존중되는 공동체적 삶을 꿈꾸는 사상적 경향. 자본주의 시장 경제나 그를 지지하는 정치 체제를 거부하고 삶의 전 부문에서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한다는 것이 특징[2] 물론 집권 이후 극우파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에는 자본가 역시 말살하려는 입장이었던 좌익 파시즘 계열 역시 존재하긴 하였으나, 이들은 장검의 밤 등의 숙청 과정을 통해 사실상 소멸한다.[3] 중앙집중적이긴 하였으나 공산주의 국가에서 생산수단은 기본적으로 자치제로 운영되었으며, 냉전 시기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개 지니계수가 0.2~0.25 즈음에서 형성되는 등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행보를 다수 보이긴 했다.[4] 이들은 소련은 서구권의 타락을 배제한, 오직 슬라브인만의 슬라브식 사회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도 투하쳅스키처럼 신이교주의적 사회주의자가 있기는 했다.[5] 출처: Minakov, Sergei Timofeevich (2017-09-05). Заговор "красных маршалов". Тухачевский против Сталина (The Conspiracy of the Red Marshals: Tukhachevsky vs. Stalin) (in Russian). Algoritm Publishing[6] 다만, '나치'라는 말이 'Naonalsozialismus'에서 따와 'Nazi'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7] 나치당의 전신[8]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무종교인 경우도 많았다.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한 시오니스트들도 대부분이 무종교였다.[9] 다하우와 같은 강제 수용소는 나치 사회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아우슈비츠등 절멸 수용소의 경우 나치가 "공식적으로는"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단 최근 학계 연구의 정론은 독일인 대부분이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게 밝혀지고 있다. 동부전선에 복무한 국방군 및 SS 대부분이 무차별 학살에 가담 또는 최소한 방관했고, 홀로코스트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만 백만명 단위이며 거리에선 '추방'된 유대인 집들의 가구를 떨이로 팔고 있는데 이걸 몰랐다는건 방어기제에 불과하다.[10] 한 쪽 고환이 잠복고환인 질병[11] 물론 순수하게 인정해준 것은 아니었고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내세워서 알아서 '절멸'당하게 하는 또 다른 홀로코스트의 일종이었기도 했다.[12] 블로흐가 히틀러 암살에 관여하진 않았지만 군부를 정리하던 히틀러의 입장에선 유대인 혈통을 지닌 블로흐도 정리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블로흐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유대인 혈통의 독일 장교들이 이 때에 강제 예편되었다.[13] 독일 군인을 생각하면 바로 이 사람이 떠오른다.[14] 애시당초 골드버그를 비롯한 '골드'(Gold)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 자체가 유대계 혈통들이 쓰는 성씨이다.[15] 물론 본회퍼와 같은 진보적 저항적 목회자나 신학자도 있었기에 교회 탄압이 실재하긴 했지만 이것은 정치 탄압이었지 종교 탄압은 아니었기에 유대인을 절멸시키려 한 것처럼 조직적이고 극단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사실 슈페어에 따르면 히틀러는 이슬람을 좀 더 선호했다고 한다. 딱히 감화되거나 한 건 아니고 아리아 인종에게는 유약한 기독교보다는 이슬람이 더 맞는다고 했다던가 어쨌다던가... 아리아인들이었던 페르시아인들이 이슬람을 믿고 있던게 영향이 있다. 정작 이슬람을 처음 믿은 아랍인은 유대인처럼 셈족 계열이지만, 나치는 아랍인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편이었다고 한다.[16] 1936년 12월 독일 청소년 전체 의무가입 조직이 되었으니 한스 또한 가입했을 것이다.[17] 나치당 초기에 슈트라서 형제 등 나치당내 좌파 사회주의 성향의 당원들이 만든 제3의 위치 성향의 나치즘이다.[18] 말 그대로 나치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뜻이나, 21세기 들어 러시아가 이 단어를 불순한 쪽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