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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SS기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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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친위대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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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무장척탄병사단
(제1벨라루스인사단)
31 SS의용척탄병사단
발로니엔
32 SS무장척탄병사단
1월 30일
33 무장기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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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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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SS의용기병사단
뤼초프
38 SS척탄병사단
니벨룽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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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12. 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파일:제12SS기갑사단 엠블럼.svg
창설일 1943년
해체일 1945년
소속 무장친위대
상급부대 제1SS기갑군단
규모 사단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역사3. 미디어

[clearfix]

1. 개요

히틀러유겐트 단원 출신 소년들로 편성되었던 무장친위대의 기갑사단으로, 창설기에 병 인력을 히틀러유겐트 단원에서 차출해 채웠을 뿐, 유겐트 산하가 아닌 무장친위대 소속 부대이다.

2. 역사

1943년 1월, 고틀로프 베르거(Gottlob Berger) SS중장이 제안한, 1926년에 출생한 히틀러유겐트 단원으로 전원 구성된 전투 사단을 만들자는 계획은 곧 하인리히 힘러아돌프 히틀러의 찬성하에 승인, 제1SS기갑사단의 프리츠 비트 SS 상급대령을 사단장으로 하여 창설을 시작했다.

신규 부대에 쓰일 문장 도안을 위한 경연대회가 열렸고, 수많은 도안 중 채택된 것은 제1SS기갑사단의 문장으로 쓰인 열쇠에 히틀러유겐트의 하부조직인 독일소년단(Deutsche Jungvolk) 상징들 중 하나였던 시겔(지크) 룬[1]이 엇갈리게 교차된 문장이었다.

1943년 9월 1일 16,000명이 넘는 신병들이 6주간의 기초 훈련을 마치고 SS 이병으로 군적을 올렸다. 벨기에 베베를로(Beverloo)에서 훈련을 계속하던 중 기갑척탄병사단이 아닌 기갑사단으로 편성하라는 통고를 받았고, 그에 따라 사단은 SS 기갑 사단 히틀러유겐트로 재편성되었다. 대부분의 신병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기호식품으로 담배 대신 비흡연, 비음주자에게 대체 지급되는 과자사탕이 주어졌다.

판터 전차도 일부 보이나, 숫적 주력은 4호 전차였다. 그나마 히틀러가 친히 관심을 기울여 편성한 사단이라, 1944년 기준으로는 전차 등의 장비가 잘 배치되었다.

1943년 10월, 제12SS기갑사단이라는 단대호와 히틀러유겐트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수여되었다.

당연히, 이제 막 입대한데다 나이도 어린 이병들만으로 사단을 구성할 순 없었기에, 아돌프 히틀러 사단에서 장교부사관들을 차출해 배치했고, 그러고도 부족한 인력은 다른 SS 사단 및 육군에서 차출했다. 비트 사단장이 수많은 규칙과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최대한 빨리 전투 준비를 끝마치려고 했기에, 현실적인 전투 시나리오와 실사격 훈련이 주가 되었다. 당시 훈련을 담당한 베테랑들은 이들 신병들이 대부분 가혹한 훈련들을 소화해내자 매우 신뢰했고, 신병들 역시 근 4년여 간의 전쟁 와중에 살아남은 베테랑들을 존경하고 의심없이 따랐기에 사단 내 장병들의 분위기는 매우 화목했다고 한다. 이는 나치의 선전도 있겠지만 실제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거짓은 아니다. 전투와 거리가 먼 후방인 프랑스에 주둔해 있었다는 점과, 선술했듯 신병들은 베테랑 장교와 부사관들을 존경했고 이들 고참들 또한 나이가 어렸던 신병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겠다는 사명감에 훈련을 가혹하게 시키면서도 애들이라는 점 때문에 훈련 이외의 시간에는 굉장히 자상하게 대해 준 점이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초반에는 베테랑 장병들의 배치도도 낮았고 나치의 약육 강식 사상에 입각한 가혹한 통제와 훈련에 어린 신병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훈련의 효과가 크게 나지 않았다. 이후, 사단에 합류한 언제나 최전선에서 부하들과 함께 싸워 존경을 받아 "판처 마이어"로 유명한 쿠르트 마이어 SS대령의 제안으로 교육 방침을 크게 바꿨는데, 훈련 강도는 강하게 유지하되 병들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여 약간의 두발이나 복장 불량은 좀 덜 터치하고, 훈련병들을 상하 관계로 깐깐하게 대하기보단 집을 떠나 온 아이들에게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장교와 부사관들이 신병들을 보다 자상하게 대해 주도록 바꿨다. 선배격인 독일 제국군에 비해서 병영 부조리가 거의 없는 수준의 병영 문화가 잡혀있었다. 국방군 병영, 무장친위대 가리지 않고 병영 부조리가 없는 단결된 군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독일군의 베테랑 병사들과 신병들의 완벽한 시너지를 이루어냈고, 강력한 독일군의 전투력의 원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방침은 위에서 언급한 시너지 효과를 내어, 신병들은 높은 전투력을 발휘하고 단결할 수 있었다. 또한, SS 대원이 되었음을 뜻하는 엄숙한 분위기와 웅장한 규모의 선포식을 열어 이들에게 자긍심도 심어 주었다.

1944년 4월에는 전략 예비 기갑 부대로서 노르망디 캉 근방으로 이동, 현지 적응 및 지형 숙달 훈련과 사단장 비트 장군의 SS소장 진급 및 36세 생일 축하 파티 등으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 이달 빌뇌브다스크에서 철로 사보타주가 있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근처에 살던 프랑스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데 히틀러유겐트 사단 장병들이 동원되었다. 사단 장교들은 어린 신병들이 학살을 주저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것과 달리 묵묵히 자신들의 명령에 따라 민간인들을 주저없이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교육 방침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됐다. 2달 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맞았다. 전투 초반, 비트 장군이 영국 해군의 함포 사격으로 전사하는 바람에 전선에서 마이어 대령이 히틀러유겐트 사단을 지휘했다.

총통의 열렬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병력 숫자 외엔 모든 장비가 부족한 와중에도,[2] 강력하게 세뇌된 히틀러유겐트 출신 신병들은 캐나다군을 상대로 싸웠다. 팔레즈 포위전에서 후미를 지키면서 연합군의 공세를 지연시켰다. 이 와중에 캐나다 육군 포로를 학살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후에 마이어 장군은 "포로들을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밝혀져 이 일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3. 미디어



[1] 룬 문자 소윌로가 두 개이면 말 그대로 SS를 뜻하는 것이지만, 하나만 쓰면 이 융폴크단 상징이다. 소윌로를 현대 독일어로 옮기면 'Sieg'(승리)가 되기 때문이다.[2] 다만 국방군 내의 여러 기갑사단들에 비해선 양호한 편이였다. 1944년 6월 시점에서 대전차대대는 돌격포가 정원의 절반을 못 채우고 있었지만 판터 대대는 완편된 상태였고 4호 전차는 정원보다 17대 더 배치되어 있었다. 동시기 다른 기갑사단들은 전차가 부족해 돌격포를 전부 전차대대에 소속시키고 대전차대대는 편성하지도 않는 케이스가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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