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김석주(독립운동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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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김석주 金錫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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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34년 9월 26일 (음력 인조 12년 윤8월 5일) |
사망 | 1684년 10월 28일 (향년 50세) (음력 숙종 10년 9월 20일) |
봉호 |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청풍 김씨 |
자 | 사백(斯百) |
호 | 식암(息庵) |
부모 | 부친 - 김좌명[1] 모친 - 평산 신씨 신지강(申止康, 1617 ~ 1667)[2] |
부인 | 초실 전주 이씨 이수강(李壽康, 1634 ~ ?)[3] 계실 창원 황씨 - 황일호(黃一皓)의 딸[4] |
자녀 | 장남 - 김도연(金道淵, 1664 ~ 1689) 황씨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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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숙종 연간의 권신. 숙종 연간의 정국을 주도한 공작 정치로 유명하다. 김식의 후손이며, 김육의 손자이고 김좌명의 아들이다.2. 생애
1634년(인조 12) 한성부 회동(현 회현동)에서 김좌명과 평산 신씨 부인 신지강(申止康, 1617 ~ 1667)[5] 사이에서 태어났다.할아버지 김육은 명재상으로 유명했고 아버지 김좌명 또한 당대의 수재이자 우수한 행정 관료로 유명했다. 작은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현종의 장인으로 명성왕후의 아버지였다. 이러한 가문의 기질을 잘 이어받은 것인지 그는 일찌감찌 명석함을 드러내 과거에 장원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할아버지 김육은 어린 김석주를 '석아(錫兒)'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험악한 외모와 달리 정략과 문무겸비는 물론이고 글씨도 잘썼다.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할 정도였다니 글과 학문은 확실했을 듯. 동료들 사이에서 외척 출신으로 분류된데다 일찍이 할아버지 김육이 대동법 확대를 둘러싸고 송시열 등의 산당과 대립한 것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같은 서인 계통임에도 주류인 산당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674년(현종 15) 2차 예송논쟁이 터지자, 대공복(9개월)을 주장한 서인들과 달리 1년설을 주장하던 남인들과 뜻을 같이했다. 결국 현종이 남인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산당 계열이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승승장구하며 왕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현종의 뒤를 이어 14세의 숙종이 즉위하자 청남-탁남 연립 정권 내부에서 주요 외척이었던 그는 몇 안되는 서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의 삼촌인 김우명은 삼복이라 불리던 숙종의 5촌 당숙들(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남인과 결탁하며 잘 나가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서 제어하려 했다가 왕에게 '친족을 무고한 남' 소리까지 듣고 굴욕을 당했지만 김석주 본인은 한동안 허적을 비롯한 남인, 그 중에서도 탁남 세력과 잘 지냈었다.
하지만 권력의 타성에 젖은 남인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김석주는 이들을 내쫒고 자신의 위치를 더 확고히 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야사에 의하면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6]가 자객을 사주하여 김석주의 집 뜰에 보내놓고 허적의 소행이라고 모함을 하는 등 이간질을 했다고 하나 김석주가 그 정도에 속을 바보는 아니니 결국 자신의 의사였다고 봐야할 것이다.
남인들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유부녀를 납치하여 행패를 부리고 김우명의 첩을 폭행해 이빨을 부러뜨리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피해자들을 협박하여 사건을 묻으려는 등 안하무인으로 굴었고, 청남과 탁남은 조정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허구한 날 으르렁거려 숙종의 눈밖에 나고 만다. 결국 1680년(숙종 6) 숙종은 경신환국을 일으켜 급작스런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일반적으로 허적이 왕의 허락도 없이 유악(천막)을 가져간 것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일단 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으며, 허적 본인도 매사에 신중한 성격이었던 것을 감안해 보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이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 후 정원로 등이 허적의 유일한 아들인 허견과 복선군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함으로써 남인은 허적이나 윤휴 같은 명망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사사되며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 때 김석주는 주도적으로 남인의 혐의를 잡아내면서 보사공신 1등에 책록되어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이 되었다. 사실 정원로는 바로 김석주가 부리던 이중첩자였다. 그 외에 김석주가 부리던 여러 정보원들이 대거 공신에 봉해졌다.
이 무렵 청남과 탁남은 송시열의 죄를 종묘에 고하고 처벌하라는 주장을 일치단결하여 아뢰고 있었는데 덕분에 송시열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김석주가 남인 정권을 몰아내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자 송시열과 그의 제자 김수항 등은 모두 김석주를 높게 떠받들었다.
허나 김석주는 아직 남인이 남아 있다는 것에 불안을 느껴 김장생의 손자이자 처숙부인 훈련대장 김익훈 등과 연합해 남인 김환을 꾀어내어 남인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나 첫 번째 시도는 허새, 이의, 권대운, 민암을 비롯한 남인 계열 대신들이 포함되었다는 허세에 넘어가서 허탕만 쳤고[7] 이에 열받은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인 전익대을 압박하여 남인 계열 대신들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고 사건을 조작하려다가 전익대가 이를 실토하는 바람에 들통나고 만다. 이후 전익대는 유배 후 처형됐다.
이에 젊은 서인들이 김석주를 직접 비난하지는 못하고 대신에 상대적으로 만만한 김익훈을 맹렬히 비판했는데, 송시열은 김익훈이 송시열의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로 우회적으로 김익훈에 대한 공격을 그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 행동이 오히려 젊은 서인들의 반발을 일으켜 송시열의 위신이 깎이고 박세채, 남구만, 윤증을 중심으로 소론이라는 새 당파가 분당되는 결과만 낳았다.
어쨌거나 김석주는 숙종을 거의 협박하다시피 해서 자신을 공격하던 오도일을 비롯한 서인 소장파를 맹공하여 대관령 너머로 귀양보냈다. 숙종은 대관령 안쪽인 김화로 귀양보내려 했지만 김석주가 왕의 말을 끊으며 거긴 너무 가까우니 영동의 아홉 고을 중에 골라 보내라고 압박했고 왕은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행동은 숙종의 눈 밖에 나기에 충분한 행동이었지만 얼마 안 되어 병을 이유로[8] 관직에서 물러났고 1684년(숙종 10) 세상을 떠났다.
3. 사후
살아서는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죽고나서는 굴곡진 운명을 겪게 됐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보사공신이 통째로 삭제되면서 관작이 추탈되었다.[9] 이 때 외아들 김도연[10]이 자살하고 아내는 유배되는 등의 비극도 있었다.[11] 남인들이 끈질긴 탄핵으로 부관참시될 뻔하기도 했지만 숙종이 끝까지 반대함으로서 면할 수 있었고 그나마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복권되었다.거기다 원래 배향공신이었는데 출향됐다가 한참 뒤인 고종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배향되기도 했다.
4. 평가
숙종실록에서는 이렇게 평하였다.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졸(卒)하였다. 김석주는 바로 명성왕후의 종부제(從父弟)인데, 침의(沈毅)하고 과감(果敢)하여 기국과 도량이 있었으나, 권모술수를 숭상하였다. 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여 대비에게 도움을 받아 이루었는데, 탁룡(濯龍)[12]의 근친(近親)으로 청현(淸顯)한 자리에 있는 자는 오로지 김석주 한 사람뿐이므로, 드디어 차례를 밟지 아니하고 뛰어올라서 조정 정사에 참여해 들었다. 김석주가 본래 사(士)와 화목하지 못하여 갑인년의 번복(飜覆)에 혹은 몰래 알선한 바가 있음을 의심하였으나, 흉당(凶黨 : 남인)의 세력이 이루어지자, 김석주가 그 사이에 끼어 이미 서로 알력의 혐의로움이 없지 아니하였고, 이남(李柟)ㆍ허견(許堅) 등의 역모가 처음 싹틀 때에 김석주가 또 그 정상을 정탐해 얻어서 묵묵히 심기(心機)를 운용하며 은밀히 정탐을 일삼다가, 마침내 예단(睿斷)을 도와 흉얼(凶孼)을 소탕하니, 종사(宗社)를 보존한 공을 사류(士類)가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나 역적을 토벌하고 공을 논할 즈음에 김석주가 임의로 올리고 낮춘 것이 많이 있어서 청의(淸議)가 진실로 이미 이를 병통으로 여겼다. 또 김석주가 처음에는 비록 흉당을 제거하는 데 급급하여 한결 같이 정도로 나가지 못하였다 하나, 성공한 뒤에는 오로지 옛 자취를 일변시키고 물러가서 본분을 지켰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자기의 공을 과대(夸大)하여 조정의 권한을 장악하고, 유음(幽陰 : 어둡고 음험함)한 길과 밀고(密告)하는 문을 만들어 농간을 부리는 것이 이미 익숙해졌고, 수단이 더욱 교활해져 은연 중에 한편을 제거할 뜻이 있었다.
『숙종실록』 15권
간단히 정리하자면 똑똑하지만 권모술수를 잘 쓰고 교활하다는 것. 이덕일은 '천하의 경세가 김육에게서 어떻게 이런 후손이 나왔냐'라고 할 정도다. 하지만 이건 이덕일의 개인적 사견에 가깝다. 왜냐하면 김육 역시 대동법 시행을 위해 정치적 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것. 당시 대동법 반대 세력을 김육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김육 항목에 자세히 나온다. 오히려 김석주는 할아버지인 김육의 기질을 어느 정도는 물려받았다고 봐야한다.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추진했다가 실패하기도 했으니 개혁가로서는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그러나 역적을 토벌하고 공을 논할 즈음에 김석주가 임의로 올리고 낮춘 것이 많이 있어서 청의(淸議)가 진실로 이미 이를 병통으로 여겼다. 또 김석주가 처음에는 비록 흉당을 제거하는 데 급급하여 한결 같이 정도로 나가지 못하였다 하나, 성공한 뒤에는 오로지 옛 자취를 일변시키고 물러가서 본분을 지켰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자기의 공을 과대(夸大)하여 조정의 권한을 장악하고, 유음(幽陰 : 어둡고 음험함)한 길과 밀고(密告)하는 문을 만들어 농간을 부리는 것이 이미 익숙해졌고, 수단이 더욱 교활해져 은연 중에 한편을 제거할 뜻이 있었다.
『숙종실록』 15권
그러나 김육은 사림 세력의 정치적 인정과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 활동, 탁월한 실무 능력에 기반한 왕의 절대적 신뢰가 있었지만 반대로 김석주는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또한 김육의 경우 엄연히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정치적 생명을 걸고 싸운 것이지만, 김석주의 정치 공세는 말 그대로 권력 투쟁 이상으로 봐주기 어렵다는 점도 있다. 서인과 남인이 피를 흘리고 죽일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것도 이 사람의 책임이 크다. 물론 숙종의 비이성적인 정략과 송시열의 비타협적인 성향도 원인이지만 같은 편은 군자, 충신, 상대편은 소인, 역적이라는 흑백논리를 바탕으로 한 노골적인 공작 정치로 환국을 유도하여 상대편을 역모로 얽어 피의 보복을 감행하는가 하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숙종의 정치 행태를 미루어보건대 조금만 오래 살았더라면 그 자신도 환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 명을 못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실제로 그가 죽고 난 뒤 불과 5년 뒤에 기사환국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권신이 되어간 김석주를 숙종도 고깝게 보고 있을 차에 적당한 시점에 곱게 죽었다는 평. 실제로 김석주와 손잡고 전횡하던 김익훈은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일흔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국문장에 끌려나와 곤장을 맞다 죽었고 그가 부리던 정보원인 김환, 이회 등도 모조리 참수되었다.
여담으로 초상화가 굉장히 험악하게 생긴걸로 유명하다.
5. 의외의 면모
문과 장원 급제 출신으로 조선 후기 산문사에서 형식미로 손꼽히는 문인이다. 여러 차례 문형(文衡)[13]을 역임했고 개성 있는 문체를 확립했다. 한문사대가(=월상계택) 등 이전 문인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후대 문인에게 영향을 주었다.[14] 후대의 문인 홍직필(洪直弼, 1776 ~ 1852)은 우리나라 8대 문장가로 이색, 김종직, 최립, 장유, 이식, 김석주, 김창협, 김창흡을 뽑았고 2명을 더 넣는다면 이정구, 신흠을 더할 수 있다고 했다.조부 김육이 기존에 조선이 써오던 대통력(大統曆)을 시헌력으로 교체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역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처럼, 김석주 또한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관상감(觀象監)[15] 직장이던 송형구(宋亨久)가 청나라의 시헌력을 폐지하고 다시 명나라의 대통력을 사용하자는 주장을 펼치자, 송형구의 주장이 시헌력의 정기법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임을 파악하여 시헌력의 정확성을 옹호하였다.링크 참조
조선 최초로 지전설을 주장한 대곡(大谷) 김석문(金錫文, 1658 ~ 1735)의 12촌 형이다. 김식의 후손으로 김석주는 김식의 장남 김덕수(金德秀)의 후손이며, 김석문은 4남 김덕무의 후손이다. 김석문은 '역학도해(易學圖解)'를 저술하여 우주론을 그림과 글로 상세히 정리하였다. 김창흡과 이희조가 그의 학문을 알아주었다고 하며, 김석주 또한 역학에 뛰어난 김석문을 보고 '대성공大成公(=김식)의 성리학이 전해진 바가 있다'고 칭찬한 것이 전해진다.[16] 청풍 김씨 집안이 가학으로 역학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6. 기타
- 김석주는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덩치를 보듯이[17] 무인으로서의 자질도 굉장히 뛰어났고 또 탁월한 정치 감각까지 지녔다고 한다.
7. 대중매체
[1] 김육의 장남.[2] 선조의 3녀인 정숙옹주의 4녀.[3] 이후원의 장녀.[4] 이이명의 이모.[5]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딸이다. 즉 김석주는 선조의 외증손자이다. 밑에도 나오지만 김석주의 외아들은 숙정공주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는데, 숙정공주가 효종의 딸이므로 김석주의 아들은 자신의 9촌과 결혼한 것이다.[6] 인경왕후의 아버지. 그의 동생이 유명한 대문장가 김만중으로 두 형제 모두 송시열의 추종자로 골수 서인이었다. 또한 김석주의 부인 이씨의 처외사촌이고 처외숙부인 김익훈의 조카이기도 하다.[7] 허새가 일을 꾀하려 한건 사실이지만 권대운, 민암 등의 일은 사람들을 더 잘 설득하려고 꾸민 거짓말이었다.[8] 관직에서 물러나고 금방 죽은것을 보아 병 자체가 이유 중 하나인건 맞지만 정황상 당시 김석주의 큰 뒷배였던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난 영향도 컸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김석주가 생전 갖은 어그로를 끌고도 천하의 숙종조차 김석주를 못 건드렸던데에는 가까운 혈연이란 점도 있지만 어머니이자 대비인 명성왕후의 비호가 꽤 컸다. 당연히 명성왕후가 죽고 좌불안석이 되어 병환까지 겹친 상황에서 명성왕후의 장례절차를 치르고나면 숙종이든 누구든 김석주를 물어뜯을게 뻔하니 재빨리 물러난 것.[9] 이 때 김익훈, 김환도 처형되었다.[10] 숙정공주의 딸과 결혼했다.[11] 야사 중에서는 김도연에게 김석주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남인 귀신이 김석주 귀신 행세를 하고 나타나 가문을 파탄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12] 궁궐. 여기서는 왕실의 비유로 쓰였다.[13] '학문의 저울'이라는 뜻. 조선 초에는 예문관대제학과 성균관대사성을 겸임한 자를 일컬었고, 홍문관이 법제화된 뒤에는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한 자라야만 문형의 칭호를 얻을수 있었다. 당대 학문의 수장인 셈.[14] 참고: 이영환, 식암 김석주의 책문 연구[15] 조선 시대 천문, 지리, 역학 등 업무를 관장하던 현재의 기상청에 가까운 기관.[16] 참조: 김성환, 김석문의 학문 배경과 역학도해의 전승 과정[17] 다른 인물들과 같이 보아도 훨씬 큰 덩치를 가지고있다.[18] 같은 시기를 다룬 2010년 MBC 드라마 동이에서는 오태석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