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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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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보와 출생2. 성장과 봉기3. 후백제 건국4. 후삼국시대5. 고려와의 쟁패6. 폐위와 망명7. 일리천 전투8. 말년

1. 계보와 출생

867년에 상주의 농부였던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1] 출생지는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2]인 상주 가은현[3]이었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본래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광계 연간[4]가문을 일으켜 지방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견훤에게는 여러 형제가 있었는데 남동생들로는 능애, 용개, 보개, 소개 등이 있었으며, 여동생으로 대주도금이 있었다.[5] 당시 이름을 떨쳤다는 사람인데 이름을 떨칠만한 행적이 남아있지 않으며, 견훤 자신과 형제들이 모두 유명했던 듯하다.

견훤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자세한 내용은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 김구륜, 소비 부여씨 등 항목 참조. 광주광역시 북촌 출생설도 있으나 그곳은 견훤이 가장 먼저 낳은 아들들인 신검 양검 용검 형제의 출생지로 주로 추정되며,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이 현재로선 가장 유력하다.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의 비범함을 나타내는 설화를 하나 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 아자개에게 식사를 날라 주기 위해 포대기에 싸인 어린 견훤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을 때 지나가던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견훤에게 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아자개가 직접 농사일을 하고, 하인 없이 어머니가 직접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는 기록은 견훤 가문 부농설과는 상충하기 때문에 여기에 근거해 아자개와 견훤 가문을 부농 지주집안이 아니라 소규모 자영농이라 보는 학계의 시각도 있다.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견훤의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무언가를 했는데 남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남자가 밤에 떠나기 전 옷에 바늘을 꽂아 을 엮어서 날이 밝은 뒤에 실을 따라갔더니 연못으로 이어져 있어서 파보니 큰 지렁이가 바늘에 꽂혀 상처가 덧나 죽어 있었다더라[6]는 이야기가 있어 '토룡'(지렁이)[7]의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고 한다. 실제 전승은 지렁이가 아닌 이었지만 역사의 패배자를 폄하하기 위해서 지렁이로 격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지렁이가 "토룡(土龍)"으로도 불리고, 지렁이의 어원 역시 '지룡(地龍)'에 접미사 '-이'가 붙은 말임을 참고.

지렁이에 대한 또다른 설은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견훤의 '견'은 '진'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진훤이'라고 말하면 발음상 '지렁이'와 비슷하기에 견훤을 폄하하려는 쪽에서 '지렁이' 혹은 '지렁이 자식'이라고 부른데서 나왔다는 얘기가 있다. 유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견훤이 살아 있을 때도 지렁이란 별명이 있었던지 견훤을 공격하러 가기 전에 왕건 쪽에서 소금을 뿌리는 의식을 치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렁이에게 소금을 뿌리면 삼투압으로 인해 수분이 빠져나가 죽기 때문이다.[8] 다만 지렁이가 당대에도 견훤(甄萱)과 비슷한 발음이었을지 알 수 없음이 문제다. 甄의 음 중 하나인 진은 원래부터 초성이 'ㅈ' 계열이었지만 지렁이의 어원인 地龍의 地는 원래 '디'였다가 조선 후기에 '지'가 되었기 때문에 발음상 차이가 있다. 그래서 진훤이라는 이름에서 지렁이라는 별명이 나왔다는 추측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이름과 무관한 다른 연유로 지렁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수는 있다.[9]

한편 아자개가 중국식 작명방식으로 지은 이름인 '이원선'이라는 이름도 따로 있었고 성은 물론 이씨였으며, 후백제의 수도가 전주였다는 점을 합쳐서 견훤의 가문은 사실 전주 이씨였으며 따라서 견훤이 상주 출신이란 것은 그냥 거기로 이주하여 근거지를 잡은 것일 뿐이라 여기는 설도 있다. 그러나 아자개가 전주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전주를 근거지로 삼았던 견훤과 관련된 기록에서도 가문이 원래 거기 출신이었다거나 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견훤의 후손이 후백제 멸망 후에 그들에게 가장 우호적이었을 전주에 터잡고 살았을 개연성이 높은 것과 별도로, 견훤 본인은 상주 가은현 호족 출신임이 현재의 정설이다.

2. 성장과 봉기

견훤은 성장하면서 체격이 남달리 커졌으며 용모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장성한 견훤은 갑작스레 고향을 떠나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로 올라가 군인이 되었다. 이 당시는 바로 경애왕경순왕의 외조부 헌강왕의 재위 시절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는데 상주에서 부와 권력으로 제법 세력을 자랑하던 아자개가 가문의 격을 높이고자 아들을 경주로 보냈다는 말도 있으나, 격을 높이고 말고 이전에 서라벌에 소재한 군부대에 아들을 입대시킬 수 있는 집안 자체가 이미 무려 그 진흥왕 때부터 거의 정해져 있던 터라[10] 이 설은 가능성이 매우 낮고 상수리 제도일 가능성은 아예 없다.

계모와 이복동생들의 등쌀에 떠밀려 아버지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남으로써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그의 동생들 중에 능애를 제외한 용개, 보개, 소개 등이 모두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능애만 친동생이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이복동생들이라 이래저래 눈치밥 먹고 살아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견훤이 아자개의 성씨인 이씨 성을 버리고 견씨 성을 취했는데 이는 태조왕건 드라마에서 나오듯 아버지에게 대놓고 등 돌리겠다는 각오 없인 매우 힘든 일이었다. 만약 견훤이 견씨 성을 정작 쓴 일이 없고 견훤 자체가 이름이었을지언정, 고작 상주 지방 유력자에 불과한 아자개한테도 중국식 이름인 이원선이 따로 있는 상황에서 소위 '백제 왕'으로서 국제무대에서 중국, 일본, 고려와 교섭했던 견훤에게 제대로 된 중국식 성과 이름이 없었다는 건 더욱 더 이상한 얘기가 된다. 개연성이 대단히 낮은 얘기지만 백번 양보해서 견훤이 견씨 성을 쓴 사실이 없다고 한들 '이씨'성을 쓴 일은 분명코 없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견훤 자신의 후손들은 고려 왕조가 두려워서 할아버지 아자개의 성씨인 '이씨'성을 쓴 걸 볼 때 이는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때문에 견훤이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나름대로 일리 있는 설이다. 물론 아자개가 견훤을 신라 중앙군에 입대시킨 건 견훤이 그나마 장남이라 가장 큰 출세의 기회를 부여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였다면 훗날 문경과 상주를 제압하느라 숱하게 고생하게 되는데도 굳이 성까지 갈아가며 본가와 원수 같이 될 수가 없었으므로 가족내 갈등이 있었을 개연성을 아주 부정하긴 어렵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 상경해서 군인이 된 견훤은 남다른 용맹함과 비범함으로 빠르게 출세하였다. 서남 해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된 견훤은 창을 베개삼아 적을 대비하였다(寢戈待敵)[11]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기상이 남달랐다. 덕분에 당시 진성여왕의 실정(失政)으로 암운이 드리워진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 상경하여 군인이 된 견훤은 착실히 경력을 쌓았으며 이후 왕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서남해 일대의 호족해적의 무리(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삼고 있던 호족과 군진 세력)들을 공격하러 나섰는데 상당한 공을 세워 비장(裨將) 벼슬을 받기도 했다. 이 당시 견훤은 나이가 겨우 20대였는데도 그 정도까지 간 건 그 시대 기준으로 봐도 엄청나게 출세한 것이다. 여기서 만족했다면 이후 서라벌로 복귀해서 근위대장까지도 무난하게 승진할 수 있었겠지만..... 견훤은 거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칭왕 이전 자칭한 관작
작위 한남군 개국공(漢南郡 開國公) / 전주왕(全州王)(?)[12]
훈위 상주국(上柱國)
직위 서면도통(西面都統)[13] -
지휘병마제치(사)(指揮兵馬制置(使)) -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兼) 어사중승(御史中丞)[14]

892년(진성여왕 6년), 부임한 서남해를 평정하고 나서 보니 신라 조정의 기강은 이미 해이해졌고, 먼 지방을 통제할 여력이 없어보였다. 이에 견훤은 마침내 숨겨왔던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해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무리를 불러 모아 주변 주, 현을 공격하며 한창 명성을 떨치던 견훤이 봉기하자 그가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열흘에서 보름 사이에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5,000여 명이나 되었다. 라이벌인 북쪽의 궁예가 몇 년 동안 다른 군벌들의 부하 신세를 전전하다 명주를 차지하고 나서야 간신히 3,5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왕을 칭한 반면, 견훤은 불과 한 달 가량만에 5,000명의 병력을 확보한 것이다. 이는 도적떼를 한땀한땀 모아서 세력을 키운 궁예와 달리 견훤의 초기 군사적 기반은 반란을 일으키기 전부터 지휘하던 신라 정규군 출신이 핵심을 이뤘다고 해석되고 있다.

여기서 잠깐만 시간선을 앞으로 돌려서 말하자면, 견훤이 나름 대단하긴 했어도 일단 신라군 안에서의 최종 커리어는 장보고보다 아래였음은 잊어선 안 된다. 견훤은 분명 진골이나 6두품은 아니었어도 두품 자체는 있었는지 의심되는 장보고보다 분명히 신분이 꽤 좋은 편이었다. 그는 무려 눌지 마립간 때부터 300년 넘게 신라 왕실에 정예병과 왕궁 근위병을 제공하던 지역 호족 자제였는데 이 정도면 적어도 5두품급 이상은 되었을 개연성이 높았다. 장보고는 그리고 엄연히 한 개 지역군 총사령관인 청해진 수장이었는데, 견훤은 그 청해진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선 서남해 방수군의 부지휘관. 서남해 방수군 총사령관은 '도호'였고 비장은 그 바로 아래 참모인데 이는 요즘 한국군 기준으로 말하면 일종의 참모장에 가깝다. 이를테면 상당한 실권은 분명히 있었으되 분명 명목상 상관인 도호가 있는 상황에서, 참모장에 불과한 견훤이 어떻게 서남해 방수군을 손아귀에 넣고, 전라도 일대를 접수해 왕을 칭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만약 견훤이 직속상관을 살해했다면 견훤에게 불리한 기록은 최대한 찾아내 기록한 삼국사기 경향상 없을 수가 없는데, 삼국사기에 관련 기록은 전무하다. 특히 아래 내용에서 보듯 무진주 도독을 쫓아낸 것은 기록에 남아있어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당시 서남해 방수군 도호 자리가 공석이어서 견훤이 비장 자격으로 권한대행했든지, 아니면 도호가 있었는데 조용히 쫓아내버렸든지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서남해 방수군 도호 자리는 당대 신라군 계급 체계로 봐선 진골 내지는 6두품 서라벌 귀족 출신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자리였는데, 고려나 조선의 권세가나 귀족 자제들 같은 경우 위험한 자리로 발령나면 가급적 피하거나 부임하지 않으려 했던 전례로 봐선 공석이었을(혹은 명목상으로만 임명하고 부임하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공석이었을) 가능성도 마냥 배제할 순 없다.[15]

서남해 방수군을 손에 넣은 견훤은 무진주(오늘날 광주광역시)를 습격해 신라에서 파견한 지방관인 도독 김일[16]을 쫓아내고 전남 일대를 장악한 뒤에는 스스로 이라고 칭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일으켜 신라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러나 아직 외부에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는 못하고 '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라고 자칭했다.[17] 그 많은 관작을 따지면 한남군 공작(혹 전주의 왕)으로써 도통, 지절 도독 주군사, 제치사, 자사, 어사대 어사중승 직위를 가진 '신하이자 제후'임으로 일단 왕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으로는 '신라 왕의 신하'를 자칭했으므로 '왕이면서도 왕의 신하'라는 애매한 스탠스를 취했고, 완전한 의미인 칭왕과 건국은 아니었다.[18]

《삼국유사》에서는 889년(진성여왕 3년)에 거병했다는 설이 실려 있다. 정확히는 889년[19] 거병과 칭왕 기사에 이설로 892년을 실었으며, 930년 고려와의 고창전투에서 42년 경인(四十二年庚寅) 기사를 근거로 드는데[20] 해당 설에 따르면 892년보다 3년 앞서 거병한 셈이다. 또다른 추측도 있는데 견훤이 비장 벼슬을 얻고, 서라벌 조정의 명령을 받아 서남해의 해적과 호족을 소탕한 것은 사실이나 그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사불성을 근거지로 하여 군사를 일으켜 독립 세력을 이루자 견훤 역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반역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다만 《삼국유사》에 아자개가 세력을 일으킨 것은 광계 연간(885년~887년 사이)의 일이기에 조금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 군사를 일으켜 무진주를 점령함으로써 큰 세력을 떨치던 견훤은 당시 북원(오늘날 강원도 원주시)에서 세력을 떨치던 호족 양길에게 비장[21] 벼슬을 내리는 등 자신이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자임을 자처하였으나 양길은 이를 거부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양길이 훗날 견훤의 첫번째 라이벌이 될 궁예의 주군이었다는 점이다.

3. 후백제 건국

900년, 서쪽을 순행하던 견훤이 완산주(오늘날의 전북 전주)에 이르자 완산주 백성들이 몰려나와 견훤을 크게 환영했다. 마침내 자신이 인근 지역의 민심을 장악했음을 알게 된 견훤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22]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23]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黃山)을 거쳐 사비(泗沘)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다만 실제 역사와 위의 선언은 좀 다른 부분이 있는데, 백제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인 금마산에서 개국했다는 부분이다. 실제 백제는 후백제의 영역 바깥인 위례성에서 개국했다. 이는 익산과 가까운 완산주(전주시)를 수도로 삼기 위해 완산 백성들을 불러두고 한 발언인만큼 일부러 현지 주민의 구미에 맞는 전승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보다 사소한 오류지만, 총장(摠章) 연간은 당나라 고종연호로서 668~669년을 말한다. 백제는 660년에 멸망했고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했으므로 이것도 사실과 살짝 다르다. 이런 오류들을 보면 '백제가 익산에서 건국해 668년에 멸망했다'고 써 있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정확도가 약간 낮은 역사책이 신라 말 전주 지방에 전해지고 있었으며, 그걸 참고한 견훤이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다만 이 대목에서 호남의 백제 편입이 늦었다 운운이 나오는데, 백제의 직접 지배화가 늦었다는 걸로 치면 전북 서북부보다 충남북 북부가 목지국의 저항 탓에 더 늦었다. 애초에 호남이니 충청이니 하는 얘기들은 백제는 커녕 후백제가 망한 지 500년도 더 지나 등장하는 개념이므로 이 대목에서 호남, 충청 하는 건 해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한성백제 초기 건국지 일대가 이 후백제에서 빠져 있는 것이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는 약간 의아하겠지만, 한강 유역 일대는 475년 한성 공함 이후 웅진백제 이래로 늘 변방지에 불과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무령왕 때 수복해서 529년 오곡원 전투에서 고구려에게 패배해 다시 상실하기 전까지 점유한 바 있고, 성왕 때 아주 잠깐 수복했다가 신라에게 빼앗기긴 하였으나, 그 일대는 웅진 및 사비가 중심지인 시절에도 변방에 불과했다. 이유는 이미 사비성에 익숙해진 대성팔족의 한성 복귀 반대에 있었고, 부여와 대전이 후삼국시대 내내 후백제 강역이었던 것도 이 부분에서 다시 고려해 볼 부분이다.

다만 나주가 통일신라 시대부터의 광주 우대 정책을 지속하는 견훤이 싫어 태봉과 고려를 일관되게 지지하였던 점이 후백제로서는 뼈아픈 점이었으나, 애초에 광주가 통일신라 이전부터도 다름 아닌 그 한성백제가 침미다례를 해체하기 위해 키운 거점이었던 것도 생각해 볼 부분.[24][25]

그러므로, 위 선언은 곧 견훤이 멸망한 백제의 뒤를 이어 신라를 무찌르고 새로운 포부를 세상에 알린 백제부흥 선언이었음에 손색이 없다. 당시 완산주 일대는 과거 백제의 중심지였던 부여, 익산에서 멀지 않았던 곳으로써 백제 유민의식이 강하게 배어있었고, 이곳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옛 백제의 역사가 있었던 지역의 백성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야 했기에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견훤이 서남해부터 북상하여 무진주(광주)를 전쟁으로 점령하고 그 후 다시 북상하여 완산주에 도착했을 땐 완산주의 관리와 백성들이 신라의 쇠락을 알고 견훤 세력에 큰 대응없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자신의 세력하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이 신라에 대응하는 것에는 명분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백제를 다시 세운다는 이념을 널리 드러냈다.

거점을 무진주 대신 완산주로 옮긴 이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백제 부흥의 명분을 살리기에는 백제의 제2수도권이었던 익산 일대가 더 유리했다는 것이다. 광주 일대는 웅진백제가 말을 좀처럼 듣지 않으면서 대고구려 복수전에도 시큰둥하게 비협조적인 나주 일대를 제압하기 위해 백제 부여씨 왕실 차원에서 키운 거점이었다. 당연히 물론 직접 지배 영역 편재도 나주 일대보다 30~50년 더 일찍 이뤄졌다고 해석된다. 이러한 상황은 견훤이 세운 후백제 때도 반복되었다. 견훤 또한 영산강 유역권, 즉 나주 일대를 완전히 제압하거나 포섭하지 못한 상태에서 광주를 거점으로 삼기는 아무래도 불안했던 걸로 보인다.[26]

게다가 완산주 일대는 백제의 제2수도권이자 마한의 최초 수장국인 건마국이 위치했던 익산에 훨씬 더 가까웠으니, 백제를 부흥시킨다는 목적에는 광주보다 적합했다.

둘째, 890년대부터 이미 나주를 비롯한 서남해 호족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무진주가 서남해와 가까웠기 때문에 옮겼다는 설이다. 이는 나중에 나주가 왕건에 붙는 원인이 초반부터 잉태되어 있었다고 소급하는 주장인데, 기록이 부족해 확실하진 않다.

첫째 설과 둘째 설은 모두 일리가 있고, 실제로 보면 서로 별개의 설이 아니라 표리일체의 인과 관계가 있는 설로 해석된다.

일단 전북으로 거점을 옮긴 이 선택은 백제 유민의식을 활용할 수는 있었지만 후에 영산강 유역 호족들이 왕건에게 협력하면서 후백제가 고려에게 남북으로 둘러싸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국 이 지역은 고려의 편을 들어버려 후백제는 멸망 직전까지도 고려나 신라보다 농업 생산력이나 인구가 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양면 전선 탓에 고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견훤보다 역사성, 정통성, 군사력, 명분이 비교도 안 되게 강력했고 시간도 꽤 길게 주어졌던 한성백제나 웅진백제조차도 순조롭게 흡수하는데 대단히 애먹었던 지역이었다. 견훤의 후백제는 웅진백제와는 달리 이 과업에 실패한 끝에 고려와의 쟁패에서 패배했지만, 그가 딱히 무능해서 이 과업에 실패한 게 아님은 유념해야겠다.

때문에 견훤은 완산주를 수도로 삼아 마침내 후백제를 건국했다. 이후 견훤은 관부와 정치 체제를 갖추고, 군사력을 정비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정식으로 왕(王)을 칭하고 국호를 정하는 한편, 편운화상의 부도에서 알 수 있듯이 901년부터 독자적인 연호인 정개(正開)를 사용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고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처음 무진주에서 세력을 일으켰을 때 스스로를 신라의 부용 세력이라 칭했던 태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한편 견훤은 외교에도 힘을 써서, 나라를 세운 바로 그 해에 중국오월과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며, 후삼국 중에서도 국제 외교에 가장 신경을 기울였다. 견훤은 오월에 사신을 보내고 책봉을 받았는데, 망해가던 당나라에게 책봉받았던 신라와 발해, 중국과의 조공-책봉 관계는 아오안이던 태봉[27]에 비해서 중국 내에서 정통성은 후백제 쪽이 더 높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오월이 연호를 제정하고 독립국화했으면서도 5대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았음을 생각하면, 견훤이 "내 등 뒤에 중국 황제 있다"라고 해도 100% 거짓은 아니다.[28]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자 백제 유민들이 호응한 이유로 견훤의 혈통을 꼽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는 얘기다. 《전주 견씨 족보》에 따르면 견훤은 의자왕의 맏아들 부여융의 9대손, 즉 의자왕의 10대손이었고,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 중에 세력이 있었던 사람은 견훤밖에 없어 왕위에 추대되었다고 한다.[29] 그러나 견훤이 실제로 백제 부여씨 왕실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견훤이 광주 일대 호족의 자제란 뉘앙스가 담긴 지렁이 설화도 대단히 의문시되는데 부여융 후손 전승 자체는 아예 그냥 현대 학자들 중에선 진지하게 거론조차도 되지 않는다.

당시는 신라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각 지역 호족 위주로 조상의 급을 뻥튀기하는 숭조사업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시기였다. 동 시대 왕건은 당숙종의 후손이라고 약을 팔았고[30]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신라 진흥왕의 후손이라는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이제가기》의 상반된 전승도 있듯이, 결국 의자왕의 후손이라는 일설도 보잘 것 없었던 신라 변방의 호족에 불과했던 견훤의 조상 대신, 옛 백제 땅을 순조롭게 지배하기 위해서 숭조사업 차원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라 정규군도 그걸 뒷받침하는 혈통과 신분이 없인 아무나 될 수가 없었다. 견훤이 신라군 내에서 그래도 나름 출세했던 건 그의 대단히 뛰어난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그 전에 그가 어디까지나 신라 혈통의 호족의 자제였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31]

4. 후삼국시대

901년 8월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러 나섰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 때 대야성을 방어한 지휘관이 누구였는지 남아있지 않으나 훗날 신라가 대야성을 잃은 후에도 김억렴이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때 이름높은 화랑 출신이자 당시 신라의 유력인물이었던 김효종-김억렴 일가가 지휘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32] 견훤은 신라 본토로 들어가기를 단념하고 군사를 돌려 금성(나주) 남쪽으로 옮겨 연해변의 부락을 습격해 약탈하고 돌아왔는데 아직은 나주 일대가 후백제의 세력권이 아니었는데 이 전투를 계기로 들어간 듯하다. 그러나 '약탈'이라는 표현을 봤을 때 매우 거친 처우가 있었을테고 나주 일대 호족들은 본격적으로 견훤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북원경(원주)의 호족양길의 수하에 있었던 궁예가 마침내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는데 이후부터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물론 양웅의 주 전장은 두 나라가 직접 인접한 한강~충청권 지역이었지만 한편으로 후고구려가 수군을 우회시켜 후백제의 배후인 나주 일대를 장악해 이 곳을 중심으로 일어난 나주 공방전 전역도 중심이 되었는데 여기서 견훤은 수전에 능통했던 궁예 휘하의 명장 왕건에게 번번히 패배하는 수모를 당했다.[33] 903년 궁예는 휘하 장수였던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배후를 치도록 명령했다.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남해로 내려와 후백제의 해변가를 기습 공격하여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았다.[34] 이 싸움이 견훤에게 안겨준 타격은 엄청났는데 나주를 비롯한 영산강 유역은 서해와 남해의 수운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실제로 909년에 견훤이 중국 오월에 보냈던 사신단이 해상에서 왕건의 군사들에게 붙잡히는 일까지 있었으며 나주 지역 자체의 농업 생산력도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주는 견훤의 초기 거점인 무진주의 코앞이자 후백제의 도읍인 완산주와도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이로써 후고구려는 나주를 발판으로 삼아 언제든지 후백제의 내륙 지방에 침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두고두고 후백제의 아킬레스건이 되어 늘상 뒤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견훤은 905년 궁예가 진출한 상주 지역으로도 영토를 넓히려고 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906년 상주 사화진에서 견훤은 궁예가 파견한 왕건, 정기장군 금식 등과 교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허나 907년 견훤은 일선군(구미) 이남의 10여 성을 빼앗으면서 상주 지역 일부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견훤은 나주에서 얻은 손실을 크게 만회했고 군사적인 가치 측면에선 그 이상이었다. 이 일대는 자비 마립간~법흥왕 시대를 거치며 요충지화되어 고구려, 백제, 당나라 등의 위협을 수없이 좌절시킨 신라를 수호한 철벽이었는데 신생국 후백제에게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상주 일대는 이미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을 때부터 신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낮아져 있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직까진 아무도 모른다.[35] 일단 견훤이 보유한 군사력만으로 이 중요한 지역을 차지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36]

909년 견훤은 수군을 이끌고 다시 나타난 왕건과 나주에서 싸웠는데 왕건은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도를 함락시킨 후에 고이도로 나아갔다가 덕진포에서 견훤과 싸우게 되었다. 왕건군이 워낙 기세등등한 탓에 후백제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왕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을 질러 화공을 감행하였다. 결국 이 싸움에서 후백제군은 또다시 패배하여 500명이 전사하였으며 견훤은 작은 선박을 타고 달아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또한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즈음에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견훤이 처음 세력을 일으켰던 요충지인 무진주를 공격해오기도 했으며 당시 무진주의 성주였던 견훤의 사위 지훤이 필사적으로 싸워 이를 막아내기는 했으나 이 역시 견훤에게 있어서는 실로 위기의 순간이었다. 910년 견훤은 보병과 기병 3,000명으로 나주를 10일 동안이나 포위 공격했으나 궁예가 수군을 내어 이를 방어하는 바람에 끝내 나주를 되찾지 못했다. 912년에는 덕진포에서 궁예와 맞붙었는데 두 왕이 친정해 직접 충돌한 이 싸움의 결과를 전하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궁예가 이겼을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하다. 선각대사비에 따르면 궁예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견훤을 격퇴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913년 나주에 있었던 왕건을 궁예는 수도 철원으로 불러들여 시중으로 삼았고 대신 왕건의 부장인 김언에게 수군을 맡겼다. 왕건이 빠졌다는 걸 안 견훤은 나주를 공격해 잠시 서남해의 제해권을 되찾았으나 914년 왕건이 전함 70척에 2,000명의 병력으로 나주로 되돌아와 다시 제해권을 빼앗아갔다. 916년 15년만에 또다시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5. 고려와의 쟁패

5.1. 고려와 화친하다

918년, 궁예가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자, 그의 수하였던 왕건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는 역성혁명이 일어났다. 왕건은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고려로 선포했다. 견훤은 호전적인 궁예에 비해 꽤나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왕건과 화친하고 그 틈을 타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해에 견훤은 일길찬 민합을 사신으로 보내 이를 축하하였으며, 또한 공작 깃털로 만든 부채인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했다.

비록 왕건이 궁예를 치고 새로 나라를 열기는 했으나 아직 고려에는 친궁예파 호족이 많이 존재했기 때문에 초기 왕건의 정권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흔암환선길 등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왕순식처럼 자립해버렸고, 후백제와 인접한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인 웅주, 운주 등 10여 주현과 매곡성공직 등이 후백제로 알아서 들어와버렸다. 이처럼 고려 건국 초기의 혼란을 틈타 백제 고지의 핵심 권역을 손에 넣고 교착 상태의 금강 전선을 북상시킨 견훤은 신라 방면 공세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한편 견훤은 같은 해 중국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 좋은 을 조공했는데, 이에 오월은 사신을 보내 답례했으며 견훤에게 '중대부(中大夫)'의 관직을 더하여 주었다. 이러한 와중에 상주의 세력가였던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왕건에게 투항했다. 아자개가 자신의 아들을 두고 고려에 투항한 이유는 정확하지 않으나, 아자개와 견훤 사이에 불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아자개가 왕건에게 투항했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 보이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와는 이름의 표기가 달라서 다른 인물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한가지 주의해야할 사항은, 고대의 인명 표기는 대충 음이나 뜻만 통하면 그만이라 봐서 왔다갔다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가 심했는데, 중고기의 금석문만 봐도 동일인물의 이름을 비석마다 다르게 새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앞서 파견한 일길찬 민합과 선물들은 페이크이고, 사실은 옛 백제의 중심지역이였던 웅천주의 금강 일대로 진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왕건의 쿠데타 직후 웅천주를 지키던 이흔암이 갑자기 자신의 부대를 데리고 철원으로 상경하면서 방위에 큰 구멍이 생겼고, 연이어서 매곡성(보은)의 공직과 서원경(청주) 일대의 반왕건파 호족들이 견훤에게 귀부했다. 이로써 청주와 공주 일대는 견훤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서원경 일대 반란은 왕건이 보낸 군대에게 조기 진압되었다지만 일단은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고, 금강 이북의 충남지역은 왕건과 비교적 가까운 호족인 이치와 홍기의 세력권이었기에 대체로 금강을 경계로 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이 겉으로는 왕건과 화친하였으나 속뜻은 완전히 달랐다고 비판했다.

920년 10월, 견훤은 10,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대야성 공략에 성공했다. 과거 대야성을 2차례(901년, 916년) 공격했다가 김억렴의 분전으로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지만 기어이 점령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대야성은 중요한 요충지로, 후백제군은 대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신라의 본토를 습격할 수 있는 지름길을 열게 되었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진례성까지 공격하려 했으나, 신라 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다시 물러났다. 그러나 견훤은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는 반왕건파로 인한 고려의 내부 혼란을 이용하여 웅진(오늘날의 공주시)까지 진출했다.

5.2. 조물성 전투

924년 7월, 견훤은 아들인 견수미강[37]으로 하여금 대야성과 문소성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고려의 조물성(오늘날의 경북 김천시)을 치도록 하였다. 후백제군은 야전에서는 고려 구원군의 지휘관 애선을 전사시킬 정도로 선전했으나 조물성 군민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해 8월에는 고려 조정에 사신을 보내 절영도[38]의 준마를 선물로 바쳤다.[39] 이처럼 견훤은 한동한 고려를 상대로 싸움과 화친을 반복했다.[40]

한편 이 시기에 중요한 사건이, 925년에 오늘날 청주시 읍내를 포함하는 상당 부분이 고려에게 함락된 것이다. 오늘날 청주시 일대를 다 내준 건 아니었지만 거의 절반 이상을 내준 것.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견훤은 오늘날 경상남도 방면으로 진격하여 옛 금관가야였던 일대까지 손에 넣어 오늘날 경남 전체를 석권했고, 이로써 옛 백제가 대신라 전쟁에서 형성했던 동부 전선보다 더욱 동쪽까지 밀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후백제 입장에서는 청주시 일대를 넘겨주는 대신 경남 동부를 손에 넣은 것인데, 옛 백제 유민 의식이 있는 충남 일대보다는 신라 공략을 우선시했던 후백제 특유의 패턴이 여기서도 다시 확인된다. 앞서 절영도 일화도 그래서 가능했다. 고려의 왕건 입장에서는 상당히 약이 오르고 화가 났을 일이었다.

925년 10월, 마침내 견훤은 직접 3,0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조물성 공략에 나섰다. 이에 왕건 역시 직접 정예병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으나, 견훤의 군세가 워낙 강하여 싸움은 결판이 나지 않았다. 결국 왕건이 화의를 청해 서로 볼모를 교환했다.[41] 견훤은 자신의 조카(혹은 사위)인 진호를 인질로 보냈으며, 왕건은 사촌 동생인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그로부터 겨우 몇 달이 지난 이듬해 926년 4월, 고려에 인질로 파견되었던 진호가 병으로 급사하였다. 왕건은 진호의 시신을 정중히 수습하여 후백제로 보내주었으나, 견훤은 진호가 고려 측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크게 분노하여 볼모로 와 있었던 왕신을 옥에 가둬 죽였다.[42] 이로 인하여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고, 양국의 군사적 대결이 본격화되었다.

926년부터 927년에 걸쳐 견훤은 웅주, 근품성(문경시), 대목군(칠곡군), 성산(성주군), 고울부(영천시) 등 고려와 신라의 거점을 공격해 승리했다. 특히 성산에서는 고려의 장수 색상(索湘)이 전사했다.

왕건 역시 왕신의 죽음에 크게 노하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용주(경북 영주시 지역)를 빼앗았다. 이에 상황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견훤은 고려에 사신을 보냈으나, 왕건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견훤이 간신히 함락시켰던 대야성마저 함락당하고 말았다.

5.3. 서라벌 기습공산 전투

924년 경애왕 즉위 이후 신라는 과거의 무기력한 대응에서 벗어나, 고려와 신라가 마치 과거의 나제동맹마냥 서로 군사지원을 주고받는 공수동맹으로 후백제를 포위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 상황에서 견훤은 상황을 타개할 특단의 조치를 생각하게 된다.

당시 고려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서부를 점령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927년 고려-신라 연합군이 친후백제로 기운 강주(진주시경남 서부) 호족 왕봉규를 멸망시키고, 후백제 장수 추허조가 지키는 대야성까지 함락해 경상남도 서부까지 고려-신라 연합군이 이제 막 주둔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후백제를 포위한 형세 같았지만 두 지방 가운데, 지금의 경북 서부 방면은 아직 후백제 점령지가 많이 남아있었고 연합군의 대비도 허술했다. 물론 좌우에 적의 대부대가 있는 상황에서 가운데를 뚫고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행동이었지만, 견훤은 직접 정예 부대를 이끌고 들어가 신라의 심장부 서라벌를 타격할 대담한 기습 계획을 세웠다.

927년 9월, 왕건의 거센 공격을 받은 견훤은 반격을 위해 환갑에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소 친정하여 전장에 나타났다. 견훤은 신라의 근품성(문경시 인근)을 빼앗았다. 고려군과 신라군은 후백제군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때 엉뚱하게도 견훤은 경북 북부로 진격하려던 것 같던 군사를 돌려[43] 고울부(高鬱府)(경북 영천시)를 습격하고, 신라의 왕도인 서라벌(경주시)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이에 신라의 경애왕은 다급히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후백제군은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여 마침내 서라벌에 이르렀다.[44] 서라벌에 나타난 후백제군은 궁성을 점령하고, 결국 서라벌 남쪽 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여기서 경애왕이 술놀음하고 있었다는 게 두고두고 까이지만 놀던 게 아니라 천지신명에게 제사 지내고 있었던 거라는 설도 유력하며, 설령 거기서 놀고 있었더라도 그것이 경애왕이 늘상 놀고 먹었다는 설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비판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견훤은 포로가 된 경애왕에게 항복의 예를 받은 뒤 그를 자진케 했다. 고려 측에서는 견훤이 왕에게 자살하도록 강요하고, 그의 왕비를 능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견훤이 고려에 보낸 서신에는 경애왕이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적혀 있다.

경애왕을 주살한 견훤은, 박씨에게 왕위를 잃은 김씨 일족이자 경애왕의 사촌 동생인 김부를 왕으로 옹립시키니 그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었다. 견훤은 신라 왕실을 완전히 없애 신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박씨 대신 김씨에게 왕위를 돌려주는 형식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었는데, 이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위협 편지[45]에 이 사건에 대해서 '위태로운 나라를 바로잡았다'고 기술했다. 후백제 입장에서는 고려의 원군이 달려오는 시점에서 무리하게 신라를 집어 삼킬 여력이 없었다.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시중 공훤으로 하여금 1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서라벌로 진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려군이 한발 늦어서, 이미 견훤은 서라벌을 뒤집어 엎어버리고는 막대한 전리품을 챙겨서 떠난 후였다. 이 시점에서 경덕왕이 창설 혹은 재건한 바 있는 서라벌 수도방어 사단 육기정 부대가 거의 편제가 와해된 것으로 추정된다.[46]

왕건은 철수하고 있는 후백제군의 후미를 쳐서 급습하기로 계획하였으며, 신숭겸과 김락 등의 장수들과 함께 정예 기병 5,000명을 이끌고 공산[47](오늘날의 대구광역시 팔공산)에서 매복, 견훤의 퇴각을 기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왕건의 작전을 간파한 견훤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였다. 후백제군은 오늘날의 대구광역시 공산 동수 일대인 팔공산에서, 매복을 위해 진격해오던 고려군을 기습하였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일대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고려군은 견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예기치 못하게 역습당한 고려군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선봉을 이끌던 김락이 전사하였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참패를 면치 못하였으며, 견훤은 왕건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갔다. 이때 고려의 개국 공신인 신숭겸이 왕건에게 병졸의 복장을 입힌 뒤, 스스로 왕의 복장을 갖추고는 목숨을 내던져 후백제군을 유인했다. 왕건은 덕분에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으나, 신숭겸은 끝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맞았다. 이것이 공산 전투다.[48]

왕건을 크게 무찌른 견훤은 곧이어 승세를 타고 나아가 대목군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왕건에게 위협투의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견훤은 자신이 신라의 국정이 어지러워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과정에서 본의아니게 신라의 왕이 죽는 바람에 새로운 왕을 세웠을 뿐이라며 서라벌 습격을 정당화하였다. 또한 왕건이 그런 자신의 대의를 알지 못한채 공격했다가 참패하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활을 평양성 문루에 걸어놓고, 말에게 패강의 물을 먹이고 싶다."라고 위협하였다. 왕건 또한 이에 거칠게 응수하는 내용의 답서를 써서 견훤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여기서 왕건은 견훤이 이전에 자신에게 패배한 점을 수차례 상기시키는 한편, 의롭고 정당한 군사를 일으켰다는 견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 싸움을 후대에는 공산 전투라 부른다. 이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군사를 궤멸시키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한 견훤은 이후로 승승장구하며 위세를 떨쳤는데, 그 영역이 오늘날의 충북 및 경북 일대에까지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견훤은 드디어 문경과 상주를 강제로 후백제의 산하에 데려와서 오랜 숙원을 해소한다. 상경해서 서라벌의 말단 군인이 된 뒤부터는 43년, 후백제를 세운 후에는 26년 만이었다.

견훤은 그 다음 해인 928년 5월에 강주를 공격하여 300명을 죽였으며 장군 유문의 항복을 받았다. 그해 8월에는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고려에 빼앗겼던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또한 11월에는 부곡성을 공격하여 1,000여 명의 고려군을 죽이고 장군 양지명식 등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직접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하여 왕건에 복속했던 호족인 홍술를 전사시켰다. 홍술이 전사했을 당시에 왕건은 "나의 좌우 팔을 잃었다."라고 말하며 통곡할 정도로 고려의 상황은 심각한 지경에 빠졌다. 하지성(안동시 풍산읍)의 호족 원봉은 견훤이 친정하는 후백제군에 겁에 질려 바로 항복해 버렸다.

또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929년 즈음에 견훤은 승세를 타고 과거에 빼앗겼던 나주를 탈환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왕건이 수군을 몰고와서 나주 일대 군현을 빼앗아간지 무려 20여년이 흐른 후였다. 비록 해전에 능한 왕건이었으나, 이미 공산 전투에서 큰 참패를 당하고 친고려파 호족이 많았던 경북 북부가 견훤에게 유린당하는 상태에서 나주를 구원할 엄두를 내지 못햇던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고려사》 <유금필 열전>에 왕건이 '6년전에 나주를 견훤에게 빼앗겼다'[49]는 언급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로써 견훤은 고창전투에서 패배를 겪기 전까지 일생 최대의 세력을 거느리고 한반도 최강의 패왕으로 군림했다. 그때 견훤의 나이는 무려 62세였다. 하지만 이 시기 즈음에 927년도에 굴복시킨 바 있었던, 다름아닌 견훤의 출생지인 문경 일대가 또 이탈하고 만다. 견훤으로서는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는 차에 또 겪어야 했던 통한의 일격이었다.

5.4. 고창 전투

고려와의 싸움에서 연승하며 기세를 휘어잡았다고 생각한 견훤은, 마침내 고창(오늘날의 안동시 시내지구)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견훤은 경상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고려군을 패퇴시켜 왔으며, 고창 지역은 경상도에 남아있는 고려군 최후의 보루였다. 929년 12월, 견훤은 3,000명의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고창을 포위했다.

후백제군의 군세가 워낙 기세등등하였기에 한창 수세에 몰려있던 왕건은 차라리 고창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게 된다. 그러나 이때 고려군의 명장 유금필이 나서서 왕건에게 고창을 구원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때마침 견훤이 서라벌에서 경애왕에게 저질렀던 만행에 분개해있던 고창의 호족들인 '삼태사'가 적극적으로 왕건에게 협력해왔다.[50] 이들은 대대로 고창에 살아왔었기 때문에 고창의 지리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지라 고려군에게 있어 막강한 지원 전력이 되어주었다.

견훤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고창의 병산에 진을 친 왕건과 맞붙었다. 그러나 고창 토착 세력의 지원과, 희대의 명장 유금필의 활약에 힘입은 고려군을 감히 당해내지 못했다. 이 싸움에서 후백제군은 참패를 당했으며, 8,000명이나 되는 병력을 통째로 잃고 물러나야 했다.[51] 이를 고창 전투라 부른다.

이 싸움의 여파는 실로 대단해서, 신라의 왕도인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를 거의 다 집어삼키고자 했던 견훤의 뜻은 완전히 좌절되었으며, 신라에 대한 영향력도 싸그리 잃고 말았다. 싸움의 주도권 또한 고려 측으로 넘어가, 공산 전투 이후로 구원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나주도 다시 고려군이 탈환을 시도했다.[52] 이에 따라 후백제에 속했던 호족들의 이탈도 가속화되었다.

5.5. 예성강 전투

932년 6월, 견훤의 심복으로써 지략과 용맹이 남달랐던 장군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견훤은 공직의 투항에 격분하여 그의 두 아들 직달, 금서, 그리고 공직의 딸을 잡아 뒷발꿈치의 힘줄(아킬레스건)을 불로 지져서 끊어 버렸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고창 전투 이후로 견훤의 세력이 다시 꺾이면서 후백제의 여러 호족 세력이 고려에 투항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같은 해 9월, 견훤은 다시 고려에 반격을 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는 이전의 싸움과는 달리 배를 이용한 수전이었다. 견훤은 수군장군인 일길찬 상귀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고려의 바다를 공격하도록 했다. 왕건은 본래 수전에 능했고, 그동안 견훤과 수전에서 맞붙어서는 패한 일이 없었는데, 견훤은 오히려 이 점을 노려 빈틈을 치고 들어간 것이다.

상귀가 거느린 후백제의 함대는 서해를 통해 예성강으로 들어와 무방비 상태의 고려 수군을 급습하였다. 상귀는 예성강 일대에서 3일을 머무르면서 염주, 백주, 정주 등에 정박해있던 고려의 선박 1,000여척을 불지르고 300필의 군마를 약탈해 돌아왔다. 참고로 예성강 하류에는 바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 있었다. 즉 후백제 수군은 적국의 수도 코앞까지 쳐들어가서 수군을 궤멸시키는 대모험에 성공한 것이다.

견훤은 예상 밖의 대승에 고무되었는지, 곧 이어서 장군 상애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대우도를 약탈하도록 하였다. 왕건은 이에 맞서 대광(大匡) 만세를 보냈으나, 그 역시 후백제의 수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 근방의 백령도에 귀양가 있었던 고려의 명장 유금필이 인근 어부들과 병사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노략질을 일삼는 상애와 맞서 싸워 간신히 몰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견훤은 수세에 몰려 있던 중에도 허를 찌르는 계략으로 왕건의 뒷통수를 치고, 고려 수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하였다.

5.6. 운주성 전투

933년, 견훤은 맏아들인 견신검에게 군사를 주어서 신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아마도 지난번 싸움에서 고려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으니, 그 여세를 몰아 다시 서라벌을 점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려의 명장 유금필이 후백제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80기에 불과한 병력을 급히 모아서는 신검이 지휘하는 후백제군을 뚫고 지나가 서라벌을 구원해냈을 뿐 아니라, 돌아가는 길에 다시 신검의 군사를 만나 이를 물리치는 등 후백제군을 철저히 농락하며 큰 굴욕을 안겨다주었다.

이듬해인 934년에 들어 왕건이 반격을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오늘날의 충남 홍성)를 공격해오면서 견훤 역시 친정을 감행, 다시 고려군과 맞붙었다. 견훤은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군과 대치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고려군에 사신을 보내 싸움을 멈추고 화친을 권했다. 이에 왕건도 마음이 흔들렸으나, 고창 전투에서 맹활약했던 명장 유금필이 이를 반대하면서 후백제군과 결전을 벌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이 싸움에서 후백제군이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유금필이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기습을 가했고, 고려군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유금필의 기세에 밀린 견훤은 또다시 참패하여 3,000명의 군사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백제의 용장인 상당과 최필 등이 고려군에 사로잡혔는데, 왕의 최측근에서 보좌해야 할 심복과 주요 장수들이 사로잡혔다는 사실은 당시 견훤이 유금필의 기습 공격에 사령부까지 붕괴되어 일방적으로 달아나기 급급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사령부가 붕괴되었다는 것은 견훤의 가장 핵심 주력군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견훤으로서는 치명적인 패배였을 것이다.

이 운주성 전투로 인하여 고려는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은 반면, 후백제는 점점 나락행 테크를 밟기 시작했다. 공주 일대의 30군현, 동해 연안의 110여 개의 성이 고려에 투항하는 등 호족들의 이탈도 심해져만 갔다.

6. 폐위와 망명

운주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돌아온 노년의 견훤은 뒤를 이을 후사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견훤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이미 고창 전투 패배 이후부터 대립이 시작되어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견신검, 견양검, 견용검 등은 견훤이 이미 늙어 판단력이 흐려져 있자 좀 더 고려에 강경하게 나설 것을 주장했다. 견훤은 평소에 자신이 총애하던 총명한 넷째 아들 견금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는데 견훤의 장남이었던 견신검은 이를 알고는 번민하다가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찬 벼슬을 지내던 능환은 견신검과 결탁하여 견신검의 두 아우인 강주도독 견양검, 무주도독 견용검 등과 은밀히 음모를 꾸몄다. 마침내 935년 3월 파진찬인 신덕과 영순 등이 견신검에게 권하여 난을 일으켰다. 견신검은 아버지인 견훤을 폐위하여 금산사에 가두고 견금강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로써 견훤은 실각하여 왕위를 잃고 말았는데 892년에 을 칭하며 세력을 일으킨 지 43년 만이었다. 후백제를 건국했던 900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왕위에 35년간 있었다. 견훤의 실각 소식은 쿠데타 당일,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바로 고려신라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견훤을 몰아낸 견신검은 반발 세력을 억누르고 대왕을 자처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멀리 궁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므로,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初, <萱>寢未起, 遙聞宮庭呼喊聲, 問「是何聲歟?」

신검이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연로하시어 나라와 군대의 업무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인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한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告父曰: 「王年老, 暗於軍國政要, 長子<神劍>攝父王位, 而諸將歡賀聲也.」

그리고는 곧이어 금산 불우(金山佛宇)로 아버지를 옮기고, 파달(巴達) 등 장사 30명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俄移父於<金山>佛宇, 以<巴達>等壯士三十人守之.

《삼국유사》는 견훤이 금산사에 감금당한 후에 노래가 널리 퍼졌다며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사는 이와 같다.
가엾은 완산(完山) 아이 / 아비를 잃어 울고 있도다[53]
童謠曰: 「可憐<完山>兒, 失父涕連酒.」[54]

졸지에 장남에게 배반당해 권좌와 자식을 잃고 금산사에 유폐당한 견훤은 실로 엄청난 울분을 터뜨렸고 반드시 빠져나가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결국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935년 6월 견훤은 막내아들인 견능예와 딸 견애복, 애첩인 고비 등과 더불어 금산사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55]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은 고려군의 영향권에 있던 나주로 향해 고려 조정에 입조하여 귀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 이에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유금필과 대광 만세 등을 보내 4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가서 견훤을 해로를 통해 데려오도록 했다.[56]

견훤이 마침내 개경의 왕궁에 이르자 왕건은 견훤을 깍듯이 예우하며 모셨는데 그 대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을 노리고 으르렁대던 숙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다고 하여 '상보(尙父) 어르신'이라 높여 불렀으며 남쪽 궁궐에 거처를 정해주고 그 지위는 고려 백관의 위에 두도록 하였다. 또한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금과 비단, 병풍과 금침, 노비 40명, 말 10필을 주었고 후백제에서 투항해 온 자를 가신으로 붙여주어 불편함이 없게 하는 등 무진장 애를 썼다. 공식적으로는 군주신하를 대하듯 '상보'라는 호칭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상 대접은 상왕급으로 해준 것이었다. 이처럼 왕건이 견훤을 환대한건 단순히는 손윗어른이요, 그동안 미운 정이 들어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견훤이 후백제 침공을 위해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명분이 될 수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후백제군이 연이어 패배했지만 아직 비옥한 곡창 지대와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결코 고려보다 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견훤에게 아무리 억만금을 주며 대접을 하더라도 후백제군의 사기 뿐만 아니라 후백제 민중들의 민심, 통일 후의 정통성 등 물질적으로는 가늠이 안되는 이익이 고려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견훤의 고려 귀순은 후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57]했으며 견훤이 고려에 귀순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라경순왕 역시 그 해 11월에 고려 조정에 귀순했다.
고려 항복 이후의 관작
국적 고려(高麗)
존호 상보(尙父)[58][59]
관저 남궁(南宮)
봉토 양주(楊州)[60]

7. 일리천 전투

견훤이 쫓겨난 후 그렇지 않아도 연이은 패배로 국운이 기울던 후백제의 앞날은 더욱 어려워졌다. 후백제를 건국한 주역인 견훤을 몰아내고 왕이 된 견신검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대단했기 때문이다.[61] 게다가 견훤이 적국인 고려에 귀순하자 후백제에 속한 호족들은 심한 동요에 휩싸였다. 이 와중에 936년 2월에는 견훤의 부마였던 장군 박영규가 그 아내와 더불어 왕건에게 내통하여 항복할 의사를 전해오기까지 하였다. 936년 6월 견훤은 왕건에게 견신검의 토벌을 주청하였다. 왕건은 이에 호응하여 태자인 왕무(武)박술희 등으로 하여금 출정 준비를 서두르도록 명령하니 마침내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마지막 일전이 벌어지게 되었다.[62] 그 해 9월에 왕건은 앞서 군사를 이끌고 천안에 가 있었던 태자 왕무, 박술희 등과 군사를 합쳐 나아갔고 견신검 역시 이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는데 이 때 견훤 또한 왕건과 함께 출정했다. 그 해 9월 고려군은 일리천[63]을 사이에 두고 견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대치했다. 이미 70이 다 된 나이로 다시 전장에 나선 견훤은 왕건과 함께 고려군을 열병했다. 곧 100,000여 명[64]이 넘는 고려의 대군이 행진을 시작하니 마침내 한 시대에 종막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역사적인 일리천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축출되었다지만 한때 자신들이 모시던 주군이 적진의 선봉에 서있는 모습을 본 후백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후백제군의 좌장군인 효봉과 덕술, 애술, 명길 등은 고려군과 견훤의 위세에 겁을 먹어 무기를 버리고 견훤이 탄 말 앞으로 와서 항복하였다. 이들은 한술 더 떠서 견신검이 후백제군의 중군에 있다는 기밀도 알려주었다. 왕건은 곧 군사를 몰아쳐 견신검이 지휘하는 중군을 공격하였으니 이미 기세가 꺾여있었던 후백제군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이 싸움에서 후백제군 3,200여 명이 사로잡혔으며 5,700여 명이 죽었다. 크게 패배한 견신검은 황산[65]까지 달아났다가 그 곳에서 동생인 견양검과 견용검, 장군인 부달과 소달,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는데 공헌했던 이찬 능환 등과 더불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견신검의 패배로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으며 견훤은 자신이 세운 국가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하는 세계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사례의 주인공이 된다. 왕건은 능환이 견신검을 꼬드겨 아버지인 견훤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게 하는 등 반역죄를 저지르게 만든 책임이 있다고 하여 참수형에 처하였고 견양검과 견용검 등도 를 물어서 진주로 유배보냈다가 몇 년 후 처형시켰다. 그러나 폐주 견신검만큼은 남의 강요에 의해 원치 않게 왕이 되었으니 근본적으로는 죄가 가볍다 하여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목숨을 보전하게 해주었으며 한술 더 떠서 관직까지 내렸다.[66][67]

8. 말년

자신이 일으켰던 나라 후백제의 멸망에 기여한 견훤은 번민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자식들과 벌였던 권력 투쟁으로 인해 받은 마음의 상처와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킨 데에서 온 정신적인 고통이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68] 결국 견훤은 936년 황산[69] 근처의 사찰[70]에서 등창(종기)으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치게 된다. 자신이 세운 후백제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겨우 며칠 만이었는데 이 때가 향년 70세.

하지만 독살 또는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죽기 직전까지 전투에 참전할 정도로 나름 혈기왕성했던 인물이 갑자기 등창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석연치 않다는 점. 예를 들어 임용한은 '전쟁과 역사'에서 왕건이 견훤에게 경순왕과 같은 대우를 약속했으나 경순왕과 달리 위험인물인 견훤에게 그런 대우를 해줄 생각이 없어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독살했다고 주장했으며, 옛 기록에서 등창이 독살의 은유로 사용된 점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다지 신빙성은 없는 추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견훤이 일리천 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창칼 들고 전투를 벌이는 역할을 직접 하지는 않았다. 고령의 나이인 탓도 있었지만 얼굴만 보였는데도 후백제군의 사기가 바닥을 쳤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기도 했다. 또한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기가 나서서 멸망시키고 자신이 낳은 아들들을 처단하는 심적 고통이 병세를 악화시켰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등창 자체도 예상 외로 만만히 볼 것이 아닌데 조선 시대까지도 국왕들의 주요 사망 원인 중 하나가 등창이었을 정도로 당시에는 꽤나 심각한 병이었다.[71] 또한 왕건이 굳이 견훤을 제거할 필연적 이유도 없는 것이 당시 후계자도 없는 견훤이 고려 왕의 상보로서 최대한 오래 살수록 후백제 부흥 운동을 더 오랫동안 억제할 수 있기도 했다.[72] 그의 나이는 사망 당시 70이었는데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고령의 나이이고 건강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 경우가 왕왕 있다. 특히나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갈아엎는데 크게 일조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을 듯.[7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훤 독살설이 계속 제기되는 이유는 박영규가 정종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 것과는 별개로 견훤이라는 인물 자체가 왕건에게 꽤 껄끄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보라는 실권은 전혀 없더라도 국왕 위에 있는 존재를 두는 것부터가 왕건에게는 정치적 부담이기도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후백제를 부흥시킨다고 하면 가장 큰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인물은 견훤 이외에는 없었다. 견훤을 보자마자 후백제군 상당수가 창자루를 거꾸로 쥐었다는 공식적인 기록까지 남아있는 형국이다. 견훤이 후백제였던 지역에 가지는 영향력은 매우 컸으며 왕건에게는 그 영향력이 부담스러웠을 공산이 큰 것이다.[74] 그러나 이는 반대로 말하면 견훤만 자신의 편으로 두고 있으면 후백제 세력이 고려에 대적할 명분이 없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괜히 왕건이 나서서 암살을 했다가는 고려가 우리의 왕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또 반란이 날 가능성이 있는데 굳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이처럼 독살설에 대한 근거는 역으로 반론의 근거가 될 수도 있는만큼 확실하게 답을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왕건이 견훤을 독살했거나 그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증거는 정황증거 외엔 찾아볼 수 없다. 사료가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그리 석연찮을 것은 없는 것이, 현대에도 정정하던 노인이 갑작스레 큰 스트레스나 충격을 받아 명을 재촉하는 경우는 흔하다. 그러니 견훤도 말년에 겪은 사건들 탓에 건강을 해쳐 칩거하다 세상을 떴고, 견훤을 굳이 제거할 이유도 없었지만 살려둬도 나름의 부담이 있는 왕건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마지막 숙적이 없어진 정도였으리라 생각해도 아귀가 대충 들어맞는다.

다른 의혹으로는 분명 왕건이 견훤이 살아있을 때는 무려 상보 어르신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견훤이 죽은 후에는 시호도 지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견훤과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항복하여 나라를 바친 경순왕과는 너무나도 비교되는데 망국의 군주임에도 경순왕은 사후에 무덤이 왕릉으로 만들어지고 경순왕이라는 시호까지 받으며 죽어서도 왕으로 대접받았다.[75] 경순왕은 투항 후에도 후한 대접을 받고 죽은 후에도 왕릉이 만들어지고 시호까지 받으며 왕 대접을 받아서 독살설 의혹이 아예 없으나, 견훤은 생전에 왕건으로부터 상보라고 불릴 정도로 대접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시호도 받지 못했으니 왕건이 쓸모가 없어진 견훤을 암살하고 왕 취급도 안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에서 견훤 독살설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견훤의 아들 견신검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니까 부자가 둘 다 적국 군주에게 항복하여 나라를 바쳤는데 사후에 시호도 받지 못하고 왕 취급을 받지 못했으니 정말 비참하다. 신라의 경순왕이 받은 대접과 견훤, 견신검 부자가 받은 대접을 비교해보면 견훤 독살설이 나올만도 하다. 사실 삼한일통의 정통성이 있었던 신라 왕실과, 2대 만에 망한 후백제 왕실이 당대인들에게 동급인 집안으로 여겨지진 않았을 터이긴 하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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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이 사망한 황산(오늘날 충청남도 논산시)에는 견훤의 무덤이라 전하는 일명 견훤릉이 남아있다. 오늘날에는 견훤왕릉이라 하여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본래 비석에 견훤릉이라는 글귀가 있었으나 사극 태조 왕건이 대히트를 치자 지역 사회의 관심이 늘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새로 비석을 세우고 글귀도 견훤왕릉으로 바뀌었다.

한편 견훤의 고향으로 알려진 경상북도 상주에서는 견훤을 산신으로 추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에 지역 주민들이 견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그의 사당은 아직도 남아있는데 내부에는 '후백제 대왕 신위'를 모시고 있다. 다만 일국을 창건한 왕의 사당치고는 너무도 작고 협소하여 망국의 한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견훤이 사망한 후에도 그의 후손들은 살아남아 고려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계를 이어갔다. 아직까지도 견훤을 시조로 섬기는 전주 견씨[77]가 남아있으며 무엇보다 견훤의 후손이 가문의 가계에 대해 남긴 기록으로 짐작되는 《이제가기(李帝家記)》의 일부가 고려 시대에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어 당시까지도 견훤의 가계에 대한 전승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능히 짐작케한다. 아쉽게도 이 기록은 현존하지 않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일부 내용만이 전해질 뿐이다. [78]

일설에서는 견훤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를 바라볼 수 있도록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설이 있어 논산에 묻혀 멀리 전주를 보고있다고 한다. 사극 <태조 왕건>도 이 설을 반영하여 견훤이 200화 때 죽기 전 "완산주(전주시)가 그립구나"를 유언으로 남기며 사망했고 견훤왕릉이 지나갔다.


[1] 견훤의 출생년도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2]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구비 문학 답사를 가면 견훤 설화가 나온다.[3] 이때의 상주는 현재의 상주시가 아니라 9주 5소경 체제의 상주, 즉 경북 북부 일대를 포괄하는 훨씬 넓은 행정구역이다.[4] 885년~887년 사이 시기다.[5]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의 박술희와의 로맨스는 사실이 아니고 대주도금이 장군이었다는 것도 드라마에서 사료를 일부러 잘못 인용한 것이지만, 이 이름들은 모두 엄연히 기록에 남아 있다.[6] 또는 새벽에 남자가 거대한 지렁이의 등에 그 실이 꿰인 바늘을 뽑아 꽂아놓고 어딘가로 가버린 후 다시는 여자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도 한다.[7] 견훤을 상징하는 동물이 지렁이다. 견훤의 아버지가 인간으로 둔갑한 지렁이라는 설화도 존재한다.[8]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과 견훤 세력 둘 다 전염병으로 고초를 겪고 있을 때 견훤이 지렁이를 달여먹어 병을 고쳤다는 묘사가 나온다. 여기서는 견훤의 친부가 살아 등장하기 때문에 태몽이 지렁이였다는 식으로 변형했다.[9] 견훤 탄생 설화인 지렁이 설화의 원형인 지네 설화는 동북아시아의 보편적인 설화였다. 일본에만 지네가 아버지인 설화와 민담이 약 1,000여 개이며 중국에도 많이 발견된다. 후삼국시대에는 이미 신화에 의한 지배 이념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는 증거다.[10] 상술했듯 서라벌이 아니면 이게 가능한 집안들은 추풍령 아니면 죽령 일대 호족 가문들 뿐이었다. 게다가 경덕왕 때부터 왕궁 근위대장은 진골이 아니면서도 장군 계급을 역임하는 게 가능한 유일한 직위가 되었고, 왕궁 근위대장은 역으로 진골 이상 신분을 임명하는 건 강력하게 금지되었다. 고려나 조선에는 없는 특이한 제도인데 이는 신라가 고려나 조선과는 달리 국왕에게 초월적인 위상이 불교의 힘을 빌었어도 다소 부족했던 탓에 이론적으론 왕위 계승권까지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는 진골 출신에게 왕궁 근위대장을 도저히 맡길 수가 없었던 원인이 크다. 고대 로마도 때문에 신라,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근위대장은 아예 원로원 계급에겐 절대로 맡기지 않았다.[11] '침과대단(枕戈待旦)'이라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고사성어의 파생어로, 군복무에 매우 성실히 임했다는 뜻의 비유어다.[12] 일본 측 기록으로 서술이 애매해서 견훤이 자칭한 것인지, 일본이 견훤이 전주 지역의 통치자라 부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13] 견훤이 일본에 외교사신을 보냈을 때 일본은 견훤을 도통(都統) 견공(甄公)이라 칭했다. 《고려사》 <전라도 지리지>에선 서면도통(西面都統) 견훤이라고 기록했다.[14] 이상 직위 및 훈작의 뜻은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 참조.[15] 일단 여기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적어도 신라가 880년대 초반까지는 그럭저럭 어떻게든 겉으로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으로, 서라벌 왕궁 근위대에서 근무했을 견훤이 오늘날 순천 일대로 간 건 정상적인 인사 발령을 통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 비장 자격으로도 아무렇게나 월권할 수 있었다는 추측은 다소 개연성이 떨어진다.[16] 성주사 낭혜화상 탑비에서 890년 당시 무주 도독이 소판 김일이었음이 기록되어 있다.[17] 이자연, 이자겸, 척준경, 김부식, 신돈, 최충헌의 관직명과 함께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긴 관작명이다.[18] 사실 견훤의 후백제 건국 이후에도 마치 신라 왕이 고려 왕이나 백제 왕보다 명분상 상위에 있었다는듯한 언급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 기록에까지 계속 등장한다. 예를 들어 견훤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틀 것을 요청하자 일본 조정에서는 견훤이 왕이 아니라 신라의 도통(위에서 나오는 서면 도통)에 불과하다는 핑계로 이를 거절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의 신라 왕실이 비록 실권은 잃었어도 마치 전국시대주나라 천자나 《삼국지》의 한나라 황실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하자 왕건은 견훤을 후한의 간신 동탁에 비유하며 비난하기도 했다.[19] 원종 애노의 난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20]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21] 다만 5두품 취급받은 양길이 기분 나빴을 가능성은 높다. 태봉이나 후백제 같은 경우 세력가들은 진골이나 6두품 아니었으면 못받았을 벼슬들을 하면서 원을 풀었는데, 고작 오늘날 한국군 기준 대령에 불과(?)한 비장이라니.....양길이 거부한 것도 당연했다.[22] 원문은 '赫世'인데, 이를 혁거세로 해석할 경우 혁거세가 일어난 후 진한이 따라 일어났다는 오류가 생겨, '대대로 혁혁하다' 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23] 총장이란 당고종이 668년 2월에서 700년 2월까지 사용한 연호다.[24] 그렇다면 왜 신라는 굳이 친백제적 감정이 컸을 백제가 키운 거점을 지역중심지로 삼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는 있으나, 어차피 백제 멸망기에는 침미다례 일대 또한 사비백제 성립 이후에는 백제 왕실과 일종의 대타협을 이루어 백제 왕실을 끈끈하게 지배했고 일각의 오해와는 달리 백제에게 반감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다만 광주나 전주 일대보다는 살짝 백제에 대한 호감이 덜했을 뿐. 게다가 안 그래도 홀로서기 성향이 강한데다 독자적인 경제력도 강한 나주 세력을 파트너로 삼는다면 이는 백제가 지방통제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맞춰놓은 균형을 오히려 깨는 짓으로서 통일신라 또한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백제부흥운동을 사전에 막는 측면에서라면 친백제 성향이 보다 강하면서도 여전히 나주에 비해 언더독인 광주 일대를 회유하는 게 일종의 일석이조였다. 실제로 신라의 이런 회유는 효과를 발휘하여, 순천 일대를 장악한 견훤이 광주에 입성하는 데 애먹으면서 정복 사업이 몇 년 늦어진 상당한 이유가 되었다. 실제로는 광주 내에서도 견훤의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하기로 마음 먹은 여론이 결국 이기긴 하였으나,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찮았기 때문이다.[25] 다만 때문에 나주는 그 전 백제와 마찬가지로 광주 우대를 지속하는 통일신라 중앙정부에게 반감을 품게 되고 말았다. 이는 거꾸로 나주가 광주 세력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을 하는 원신라 출신 장수 견훤에게 합류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26] 조선-대한제국기에 성립된 행정 구역에 익숙한 현대 한국인들에겐 이 광주 VS 나주 대결 구도가 대단히 생소하겠지만, 광주와 나주는 이미 마한 시기부터 각 소국들이 별개로 영향력을 형성해서 각기 따로 노는 세력권들이었고, 한성백제가 무너진 이후 정치적 견해마저 달리하였다. 나주가 영산강 물류의 시종착점인 사실상 항구도시로서 서남권 해상세력을 대표=외부 세력과의 연계로 중앙 정권에 대응이 용이한 지점인 데 반해, 광주는 그 수운망에서 이탈한 서남권 육상세력의 중심지로 보다 북쪽의 중앙세력과 긴밀하게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웅진백제의 산하에 각기 따로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재되었고, 통일신라가 힘을 잃으면서 약 200년 만에 우연찮게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 것이었다.[27] 사실 궁예는 거란과 몇 차례 사신을 주고 받으며 외교 관계를 이어간 적이 있지만 중원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후의 왕건은 초기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다가 중국의 후당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정통성 강화와 거란 견제를 위해 중원과의 외교 관계를 맺어 자체 연호를 폐지하고 933년부터 후당과 후진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28] 하지만 오월의 책봉이 정통성이 아주 높았다고 할 수는 없는데, 당은 번진들에게 자신들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위치에 있었고, 오대의 국가들은 당을 계승하면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또한 오월은 십국들 중에서 유일하게 오대 국가들을 상대로 외왕내제를 할 정도로 약소한 국가였다. 당장 후백제조차 국서에서 오월왕을 '전하'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였다.[29] 족보대로라면 굳이 백제의 대성팔족 중에 하나인 진씨와 같은 발음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단 부여융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부여 서씨의 경우를 보면, 원래 성씨였던 扶餘씨가 夫餘로 바뀌고, 이후 徐로 글자를 변형시켰을 것이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논거를 내세우지만, 견훤의 경우에는 아주 오랫동안 신라의 영토였던 상주 출신에, 본래 성씨도 이씨였다고 하니 부여융의 후손이라고 볼만한 근거가 영 부족하다. 그리고 족보의 특성상 과장이나 미화가 있을 수 있다.[30] 이게 시기상으로도 맞지 않는지라 훗날 원나라 사신한테 이게 진짜냐고 거의 망신을 당했다. 결국 사실 당선종인데 기록의 오기로 당숙종이 되었다고 뻥을 치고서야 넘어갔다.[31] 여기에 더해 견훤이 현지의 지방군들을 반란에 수월하게 회유할 수 있었던 데에도 출신성분이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방군은 사병들이 신라 본토가 아닌 옛 백제 지역의 주민들로 구성됐을 개연성이 큰데, 견훤의 신분이 지방에서 큰 반감을 사고 있던 신라 조정 출신은 아니면서도 그렇다고 무지렁이 농민처럼 아주 낮은 출신도 아닌 적당한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는 점이 현지인들에게 그럭저럭 먹힐 만한 메리트를 훨씬 더해줬을 것이다.[32] <태조 왕건>에서도 김효종이 신라의 마지막 명장으로서 견훤의 공격을 대야성에서 방어해낸 것으로 묘사하였다.[33] 나주 공방전에 대한 기록은 특히 《고려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34] 본래 나주는 금성이라 불렸으나 이후로 이름이 바뀌어 나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게 신라 중대까지 무진주(광주)가 전남을 대표하던 지역이였으나 이후에는 나주가 전남을 대표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35] 한 가지 힌트로는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에서 일어난 육진의 난이 비교대상이 될 수도 있다. 북위의 육진은 선비족의 유목적 전통을 간직한 군인계층의 집단거주지로서 북위 황실의 군사적 기반 역할을 했지만, 북중국이 평정되고 전란의 시대가 지난 뒤에는 북위의 지배층은 날이 갈수록 한화되며 북중국 문물의 풍요에 젖은 반면, 꾸준히 선비족의 전통을 간직했던 군인 계층은 홀대를 받다가 급기야는 대규모 반란까지 터지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삼국전쟁이 종결된 뒤 신라 조정은 풍요로운 남해안 루트를 따라 구 백제, 가야 일대가 수도 금성과 연계될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개발하게 되는데, 수도의 귀족들은 이에 따라 훨씬 다채로워진 풍요에 젖게 되는 한편, 그나마 군사적 업적과 실력 있는 중하계층의 우대를 통해 권위를 유지하던 무열왕계 왕실마저 갈리고 나선 신라의 귀족층은 더욱 보수화된다. 이러한 이유로 군인으로서의 필요성마저 떨어진 데다 내륙에 있어 물류가 비교적 불편했던 상주 일대는 홀대를 받게 되었으리란 추측도 가능하다.[36] 역시 마찬가지로 고려군과 신라군 또한 이 지역에서 후백제군에게 숱하게 쓴맛을 보게 된다.[37] 견훤의 맏아들인 견신검 혹은 넷째아들인 금강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연개소문의 사례를 보면 금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38]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섬의 이름의 유래는 삼국지 미디어에서 조황비전과 함께 명마로 나오는 절영과 같다.[39]고려사》에서는 준마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서는 갈기와 꼬리가 푸른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런 말을 섬에 따로 마련한 목장에서 기르는 경우가 많았다.[40] 여담으로 일설에 따르면, 후에 견훤이 한 점술사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술사가 이르기를 "왕의 무용과 위세가 훌륭하니 후에 큰 대업을 이루실 것이로되, 혹 한 준마가 고려에 간다면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라 하니, 견훤이 놀라 급히 왕건에게 말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고, 왕건은 웃으면서 말을 보내주었다고 한다.[41]삼국사기》에서는 왕건이 전세가 불리해져 화친을 청했다고 기록했지만, 《고려사》는 견훤이 먼저 화의를 청했다고 기록했다.[42] 이에 대해서는 진호가 정말로 암살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왕식렴 암살 배후설을 썼다.[43] 이는 견훤의 전략이라 볼 수 있는데, 근품성은 지금의 문경시 산양면 일대로 예천군 용궁면과 인접해있기에 왕건과 경애왕의 입장에서는 견훤이 근품성을 함락시킨 뒤 예천을 거쳐 안동(당시의 고창)이나 영주 등 경북 북부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라 예상하고 병력을 그쪽으로 보내게 될테고, 그렇게 되면 견훤 본인은 좀더 쉽게 경주로 진격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44] 이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영천과 경주는 서로 인접해있는 지역인데 저멀리 떨어진 개성의 왕건에게 구원 요청을 한다한들, 병력이 개성에서 영천이나 경주까지 오는 사이 견훤은 경주로 들어가 왕궁과 수도를 뒤집어놓은 뒤 돌아가고도 남는 시간이었다.[45] 이 편지에서 '내 소원은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나왔다. 즉 고려를 멸망시키고 싶다는 뜻이다.[46] 실은 바로 이것이 신라가 왕건의 고려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47] 이후 공산 전투에서 전사한 고려군 지휘관 8명을 기리기 위해 팔공산이 되었다[48] 후에 왕건은 수급이 효수된 신숭겸의 시신을 찾아내, 황금으로 수급을 주조하여 후히 장례를 치러줬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49] 935년에 해당하는 해에 말했다.[50] 이들 삼태사들은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었는데, 훗날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들이 되었다.[51] 이 때 고창 일대의 30개 군현이 고려에 투항하여, 신라 조정은 이후 멸망할 때까지 약 5년 동안은 수도 경주와 인근 동해안 일부 지역만 직할 통치했고, 그 일대를 제외한 경상도를 집어삼킨 고려에 포위되면서 일방면해국으로 전락했다.[52] 다만 함락했는지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명장 유금필을 필두로 한 공세작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53] 이 노래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한데, 평생의 가업을 망친 견훤의 탄식이라는 견해, 강력한 군주였던 견훤을 잃은 후백제 백성들의 한탄이라는 견해, 부왕을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신검의 고뇌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마지막 해석의 경우 신검이 자의로 반란을 일으켰다기보다는 견훤에게 불만을 품은 파벌들에 의해 옹립되었다는 견해와 맞물리는 듯하다.[54] 원문출처[55]삼국유사》에서도 《고려사》나 《삼국사기》와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감금당한 지 1달 만인 935년 4월에 견훤이 금산사를 지키던 파달 등 30명의 장사들에게 을 먹여 취하게 한 후 달아났다고 전하고 있다.[56] 현재 시판 중인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한국사 서적에서는 견훤이 폐위 후 후백제를 탈출할 때 당시 고려의 월경지였던 나주에서 배를 타고 해로로 고려에 가지 않고 후백제-고려 국경을 넘어 육로를 거쳐 고려 본토를 통과해서 왕건을 만나 고려에 귀순했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57] 후백제의 정치 체계는 견훤 1인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후백제의 모든 시스템은 견훤 1인의 지배 체제에서만 굴러갔다. 당장 신검이 왕이 되고 사면령을 내린게 쿠데타 7개월 후인데, 뒤집어 말하면 후백제는 신검의 쿠데타 이후 7개월 간 혼란기였음을 의미한다.[58] 고려에 항복 후 태조로부터 받은 존칭.[59] '父'의 독음이 '부'가 아니라 '보'인 이유는 링크 참고.[60] 현 대한민국 경기도 일대.[61] 견신검은 935년 3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본격적으로 국정을 장악하여 사면령을 내린 것은 수 개월이 지난 10월의 일이었는데 견신검에 반대하는 세력이 그만큼 많았음을 뜻한다.[62] 견훤이 청할 때까지 고려가 출병하지 않았던 것은 후백제와의 결전에 있어서 견훤의 존재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일부 후백제 장수들과 군사들이 맨앞에 있는 견훤을 보고 항복하는 등 일리천 전투에서 견훤의 존재는 크게 작용했다.[63] 오늘날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64]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진 것이고 《고려사》에는 80,000여 명이라고 적혀 있다.[65] 오늘날 충청남도 논산 연산면, 공교롭게도 사비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은 황산벌이다.[66]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견신검 역시 견양검, 견용검 등과 함께 처벌을 받아 죽었다는 설이 있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67] 실제로 학계에서도 후백제 멸망 몇 년 뒤에 비밀리에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유력하게 보고 있다. 사실 견양검과 견용검 형제도 진주로 유배를 보냈다가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처형이 집행되었는데 견신검은 후백제의 임금이기도 했으니 당연히 당장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여러모로 부담이 갔을 것이다. 관직까지 하사받았음에도 이후 더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은 것도 수상한 부분이다. 총체적으로 보면 제거된 게 유력해보인다.[68]고려사》에서는 자신을 배신한 견신검이 멀쩡히 살아나가자 이에 울화가 치민 탓에 병이 들었고 곧 승하했다고 전한다.[69] 훗날 왕건이 '천호산'으로 개칭한다.[70] 개태사로 추정된다.[71] 고려조선의 여러 국왕들도 등창이나 종기가 직간접적으로 작용하여 승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려 예종이나 조선 효종이 대표적인 케이스.[72] 사실 후백제의 견씨 왕족과 지배층들 다수가 견신검의 쿠데타와 일리천 전투에서의 패망으로 몰락해버렸고 왕실의 중심 인물이자 견훤의 사위이던 박영규도 견신검에 반기를 들며 고려와 내통한데다 고려 왕씨 왕실과 혈연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후백제 부흥 운동의 주체가 될 인물이 없었다. 견훤 본인이야 이미 노령이었기에 그럴 기력도 없었다.[73] 다른 예시긴 하지만 2차대전에 참전한 미군 고위직 장교들 중에도 전쟁 중의 스트레스로 인하여 종전 이후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한 케이스도 상당하다. 즉 전쟁이 주는 스트레스는 심적인 것 뿐만 아니라 신체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74] 실제로 현재 후백제의 도성이 있었던 전주에는 그 흔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데 후백제가 추후에 해당 지역에 미칠 파급력을 경계한 왕건의 주도로 수몰되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다.[75] 다만 경순왕 본인은 내심 사직을 끝냈다는 고통이 있었는지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음에도 가지 않고 정반대편 충남 보령군성주사에서 은거하였다. 이후로는 개성에서 살다 죽어 끝내 경주에는 돌아가지 않는다.[76]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 때 고구려, 백제 출신 관리들 신분에 1개 두품의 차이를 준 것은 이것과 전혀 비교할 수 없다. 백제쪽이 고구려보다 대우가 박했던 건 백제측 귀족들이 신라의 벼슬 하사를 거부하고 거의 전원 백제부흥운동에 투신하면서 신라에게 격렬하게 반항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부흥운동은 그것이 주로 신라보다는 당나라와의 투쟁과 엮여 있어 신라의 국익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고 고구려 자체는 신라와 서로 주고 받은 핏값이 크게 적어 악감정도 훨씬 덜했다. 그러나 백제부흥운동은 그런 면이 크게 적었다.[77] 2000년 기준으로 전주 견씨는 219가구 총 748명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에도 딱히 크게 벼슬을 했던 인물이 없어 족보 위조의 영향도 적었을테니 아마 실질적인 견훤의 후손들이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탤런트 견미리가 바로 전주 견씨이다. 참고로 견훤의 이복동생들이 남긴 후손들은 어느 순간 아자개의 성 이씨가 아닌 견훤의 성 견씨로 모두 성씨를 바꿨는데 이걸 보면 이들은 고려에 귀부했어도 어쨌든 백제왕이었던 견훤을 나름 자랑스러워했던 걸로 여겨진다.[78] 그러나 견훤의 후손 대부분은 한동안 견씨를 쓰지 못하고 할아버지 아자개의 성씨인 이씨를 쓰다 끝내 가문 내력을 남긴 책도 이제가기가 되어버렸던 걸로 봐선, 고려초 분위기가 다소 후백제의 남은 세력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견훤의 이복동생들이 남긴 후손이야 상주나 문경에서 견씨를 쓰든 말든 크게 경계할 게 되지 못했으나, 그래도 백제 왕이었던 견훤의 후손들이 전주 일대에서 견씨 행세를 하고 다니는 건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전주 견씨가 오늘날까지 남은 걸로 봐선 이들이 어느 순간 견씨로 성을 되찾았던 것도 분명하지만, 어쩌면 견훤의 후손인 이씨들 중 일부는 본인들이 견훤의 후손인 걸 잊었을 수도 있다. 사실 구씨, 임씨, 백씨 등은 대성팔족인 그 진씨, 목씨, 백씨의 후손일 개연성이 매우 높은데도 관련 전승이 남은 집안은 고작 나주 임씨 하나 뿐이다. 그 나머지는 본인들 선조가 백제의 대성팔족이었던 것 자체를 잊은 것이다. 견훤의 후손 일부도 이런 과정을 겪었을 수 있다. 신라에게 크게 나쁜 감정이 없었던 고구려와 발해의 경우 이런저런 과정으로 유입된 박씨들도 당당한 고구려, 발해인이었던 걸 보면 매우 대조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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