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8080, #008080 20%, #008080 80%, #008080)" {{{#!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8080><tablebgcolor=#008080> | 견훤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fbe673><colcolor=#fbe673> 생애 및 활동 | <colbgcolor=#fff,#1f2023>생애 · 일리천 전투 | |
가족 | 부친 아자개 아내 상원부인 장남 견신검 · 차남 견양검 · 3남 견용검 · 4남 견금강 · 7남 견능예 | ||
관련 문서 | 후백제 · 검교태위 · 신라 서면도통 | ||
매체 | 대중매체 |
1. 개요
檢校太尉 兼 侍中 判百濟軍事 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海東 四面都統 指揮兵馬制置等事 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 사면도통 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이천오백호
후백제의 왕 견훤이 925년 중국 후당의 장종에게 책봉 받은 관작들로 892년에 자칭한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의 47자 보다도 더 길다. 총 52자다.
2. 해석
- 검교태위(檢校太尉): 검교는 명예직을 뜻한다. 즉 명예 태위. 태위는 삼공 직 중 하나.
- 겸(兼): (직위를 겸하다.)
- 시중(侍中): 당 중서성의 장관. 검교태위와 겸으로 묶여 있는 것을 보면 이 직위도 검교직으로 보인다.
- 판백제군사(判百濟軍事): 백제군을 통솔하는 장관. 판사는 특정 부서 혹 부대의 장관이란 뜻이다.
-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전주, 무주, 공주 등 주의 군사. 당의 사지절도독, 지절도독, 가절도독 중 지절도독.
-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행수법으로 본인의 관등보다 낮은 관직을 받았을 때 그 앞에 행을 붙인다.
- 해동(海東): 당 동쪽의 모든 지역.
- 사면도통(四面都統): 해동사방, 즉 동쪽 천하를 관장한 도통.
- 지휘병마제치등사(指揮兵馬制置等事): 군대 및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제치사. 원래 당 관직은 제치사(制置使)인데 견훤은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제치등사(制置等事)로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 백제왕(百濟王): 백제국의 국왕.
- 식읍이천오백호(食邑二千五百戶): 하사받은 식읍이 2500 가구.
풀이하면 후당의 검교태위 및 시중이며, 백제군 장관, 지절도독주군사, 자사대행, 도통, 제치사, 백제국왕인 것.
3. 특징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와 비교해보면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백제왕이 있다.이전 관작은 신라의 신하였기 때문에 왕을 붙이는 것을 피하여[1] 신라의 공(公)이었으나 이젠 백제의 왕(王)이 되었다.
따라서 아직 후백제를 창건하기 전인 892년에는 신라의 지방호족에 불과하였지만 900년 후백제를 개국한 이후인 925년에는 어디에도 신라란 단어가 없으며 당당하게 백제란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거기에 신라서면도통이었던 도통직이 해동사면도통으로 바다 건너 천하를 지배하는 도통이 되었으며 제치사도 일반적인 제치사가 아니라 제치등사가 되었다. 최고급 직위인 삼공 태위와 중서성 시중을 하사받아 넣었으며[2] 식읍도 이천 호에서 이천오백 호로 더 늘어나서 올라간 위상을 반영하여 관작의 격이 더 높아졌다.
다만 아무리 봐도 '도통'이란 칭호는 총사령관이란 뜻인데, 신라왕 밑 '공'이라면 모를까 이미 '백제왕'인 그로서는 굳이 차지할 필요도 없는 호칭이었다. 신라군 총사령관을 끝내 못해본 아쉬움이 견훤의 인생에서 나름 컸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3]
4. 같이 보기
[1] 신라 왕의 신하이면서 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신라에는 신라왕 아래 갈문왕, 보덕국왕, 탐라국왕, 우산국왕과 같은 왕 아래 제후왕이 있던 나라다. 이는 고려도 마찬가지인데, 고려왕 아래에 낙랑왕, 실직군왕, 필영대왕, 문영대왕, 정간왕, 양헌왕같은 제후왕이 있었다.[2] 검교직은 작위처럼 하사하는 명예직으로 실권은 없다. 명예 태위와 시중이라는 뜻이며 후당의 관리로서 실무를 보는것은 아니다.[3] 사실 일반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들 특유의 총사령관직에 대한 집착인데, 그 노태우도 사실은 대통령보다 육군참모총장을 간절히 원했지만 노태우의 정치력이 필요한 전두환이 그걸 들어주지 않고 중장 계급에서 예편시켜버렸다. 견훤은 불과 20대 중후반에 오늘날 기준 대령급인 '비장'까진 갔었으나, 그 시점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신라 조정에 대장급인 '도통'직을 요구했기에 장군까진 올라가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