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의 왕자 [[틀:후백제의 왕자/견훤 ~ 견신검|{{{#!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006666;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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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후백제 견훤의 왕자 견능예 | 甄能乂 | |||
출생 (음력) | 연대 미상 | ||
사망 (음력) | 936년 이후 | ||
묘소 | 미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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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능예(能乂) | ||
부모 | 부왕 견훤 모후 고비(?) | ||
형제자매 | 형 견신검, 견양검, 견용검, 견금강 누이 견애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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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사기에 언급되는 견훤의 막내아들이자 아자개의 막내손자.2. 생애
견훤이 견신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금산사에 갇혀있다가 애첩 고비, 딸 견쇠복, 막내아들 견능예와 함께 탈출했다는 대목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며, 생몰연도 등 상세한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다만 고비와 함께 탈출했다는 점에서 고비의 소생이라고 보기도 하나, 그나마 기록이 조금 더 있는 편인 견금강의 어머니마저 누구인지 특정짓기 힘든 마당에 고비의 아들이라고 볼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견훤과 함께 금산사에서 탈출한 것을 보면 신검 일당의 쿠데타에 협조적으로 나올 리가 없다고 판단되어 같이 감금되었거나 박영규와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신검에게 충성하는 척 하면서 견훤의 탈출을 도왔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금강과는 달리 신검에게 그다지 위협적인 경쟁자로 여겨지지 않았던 모양인지 목숨은 보전받았다.[1]
존재가 밝혀진 견훤의 아들 중에서는 후삼국 통일 이후까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양검, 용검은 이후 처형당한 것이 확실하고 신검 역시 겉으로는 용서받고 벼슬까지 하사받았다고 되어 있지만 이후 따로 처형당했다는 게 다수설인데 능예만큼은 고려 귀부 직후에 병사했다거나 일리천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거나 하지 않은 이상[2]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 딱히 없기 때문. 그렇다면 오늘날 전주 견씨들의 실질적인 조상으로 볼 수도 있으나, 견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실전되었으므로 이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에서는 그의 지위가 나인(內人)으로 나온다. 남성이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기록에 착오가 있는 듯.
3. 대중매체에서
-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견훤의 귀순때 나레이션으로 언급된다. 신검은 동복동생들과 항상 붙어다니는 반면 금강은 동생이 없는 것을 보면 고비의 소생으로 설정된 것은 아닌 듯하며 사서에 유일하게 언급되는 금산사 탈출에서도 견훤 일행이 "노인네와 아녀자들"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없는 셈 친 모양. 어차피 사서에 따르면 견훤의 아들은 10명이나 된데다 후삼국시대의 모든 인물들이 극에 나올 수는 없으니 극 중 전개에 큰 영향을 주는 인물이 아니라 배제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주인공 왕건이 아내를 29명 맞이했으나 모두 등장할 수 없었다고 나레이션이 직접 언급하였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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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부친 아자개 아내 상원부인 장남 견신검 · 차남 견양검 · 3남 견용검 · 4남 견금강 · 7남 견능예 | ||
관련 문서 | 후백제 · 검교태위 · 신라 서면도통 | ||
매체 | 대중매체 |
[1] 막내아들, 그것도 늦둥이라면 금강과 달리 직접 태자 경쟁을 했을 리 없을 터이고, 이미 이복아우를 죽인 신검이 갓난 아기나 매우 어린 아이였을 막내까지 죽인다면 그 후폭풍과 비난이 컸을 테니 이미지 관리를 위해 살려줬을 가능성이 크다.[2] 반드시 참전했을 것으로 볼 근거부터 없으며, 견훤을 보는 것만으로도 후백제군의 사기가 땅을 치고 항복하는 병사가 부지기수였다고 하니 전사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