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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생육정책

1자녀 정책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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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위해 늦게 결혼하고 계획생육을 합시다!"[1] "국가계획생육정책을 안정시켜 조화롭고 아름다운 가정을 함께 만듭시다."[2]

1. 개요2. 역사3. 꼭 1자녀여야 하는가?4. 비판 및 논란
4.1. 인권 억압4.2. 저출산 고령화 문제4.3. 소황제(小皇帝)
5. 결과
5.1. 1자녀 정책 폐지5.2. 2자녀 정책 실패
6. 한국과의 비교

1. 개요

계획생육정책(计划生育政策)은 1978년에 시작되어 현재는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시행중인# 중국의 국가적 산아제한책을 말한다. 자녀를 1명만 허용할 때는 '한자녀 정책'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사상 최대 규모의 인구조절정책이다. 근래에는 자녀를 세명까지 낳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그 이상을 낳는 것은 금지된다. 한국에서 펼친 "가족계획정책"의 대륙판인데 대륙의 스케일과 중국공산당의 강제력이 겹쳐서 국내외적으로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초기에는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었지만 너무 오래 시행했고 궁극적으로 막대한 해악이 되었다는 점은 한국과 공통점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두 부부가 모두 외동이면 둘을 낳을 수 있도록 허용했고 2013년부터는 두 부부 중 한 명이라도 외동이면 둘을 낳을 수 있게 허용하면서 한 자녀 정책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리고 3년 뒤인 2016년에는 2자녀까지, 8년 뒤인 2021년에는 공식적으로 3자녀를 낳을 수 있게 하고 초과 출산시 벌금도 폐지했으며 다자녀 출산시에 혜택을 주는 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며 출산장려정책으로 전환하였다.
国家提倡适龄婚育、优生优育。一对夫妻可以生育三个子女。
(국가는 적령의 혼인∙출산과 잘 낳아 잘 기르기를 제창한다. 한 쌍의 부부는 세 자녀를 낳을 수 있다.)
인구 및 계획생육법(中华人民共和国人口与计划生育法) 제18조 제1항.[3]

2. 역사

파일:China population BC 400 to 2015.png

중국의 역사적 인구. 기원전부터 꾸준히 증가하다 전한, 후한 시기에 6,000만명 선을 유지했고 혼란했던 위진남북조시대에는 5천만 정도로 감소했다.

이후 당나라 중후반까지 8,000만명까지 증가하다 오대십국시기까지 다시 5,000만 정도로 감소했다. 이후 송나라~명나라 시절까지 1억~ 1억 5,000만명 근처에서 머무르다가 청나라 시절 평화가 계속되고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자[4]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미 청나라 말기에는 4억명에 이르렀다.

바로 위에 서술했듯이 중국에서는 평화가 정착되고 농업기술이 발달한 명나라, 청나라 시절 인구가 폭증했다. 20세기 전반에 중국의 혼란 때문에 인구증가 속도는 어느 정도 둔화되었어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이 당시 합계출산율이 4명대 후반~5명대 초반 가량을 기록하였기 대문에 높은 영아사망률과 전쟁, 기근이라는 악재에도 인구증가율 자체는 낮았음에도 인구증가 자체는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천안문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할 때 중국의 인구는 5억 4,000만을 기록했다. 계속해서 늘어나던 인구 때문에 북양정부 말기부터 중국 지식인 사회는 마거릿 생어의 영향을 받아 산아제한을 논하기 시작했으며 국민정부 시대 들어서는 여성의 의무는 가정에서 건강한 아이를 길러내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국가가 과학적으로 우량아의 출산과 양육을 도와야 한다는 이유로 피임, 낙태, 인공유산 등을 정당한 권리로 인정하고 무통분만을 비롯한 선진적인 산부인과 기술들을 적극 도입하고 있었다. 남녀가 동등한 사회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공산주의적 양성평등론에 비하면 유교보수적인 국민당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태도가 낙태권에 있어선 좀 더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 또 테크노크라트와 유학파의 발언권이 높았으며 이들이 정책 결정과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국민당 치하에서는 국가의 경제구조가 감당할 수 없는 과중한 인구는 오히려 경제적 부담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과잉인구로 인한 기아, 폭동 등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인구수를 적정선에서 유지하면서 과학기술을 통한 생산력 증진을 꾀하였다.[5]

그러다가 1949년 국민당을 뒤엎고 집권한 마오쩌둥은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정면으로 제동을 걸었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기에 인력이 갈려나간 경험을 했던 사람이었던 것도 있었기에 '人多力量大' 즉 '사람이 많으면 국력도 크다'고 말하며 다산을 장려하였다. 마오쩌둥은 "소련이나 미국이 핵공격을 해서 6억명 중 3억명이 날아가도 나머지 3억명이 더 많이 낳으면 강해질 것이다"란 발언을 한 다산론자였다. 당연히 생어의 산아제한론은 물론이고 멘델의 유전 법칙을 비롯해서 계획생육에 관련된 모든 학문은 제국주의 학문으로 규정되어 금지되었고 낙태, 인공유산, 피임은 모조리 금지되었다. 흔히들 국공내전 이후 사회가 안정되어 먹고 살기 좋아져 인구가 늘어났다고 미화했지만 국가에서 낳아야 할 애 숫자만 안 정해 주는 수준이지 사실상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마냥 출산 강요를 하던 상황이었고 더욱이 기계적인 공산주의 양성평등의 원칙에 따라서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사회노동을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중국의 상황상 여성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임신 8개월, 9개월의 만삭이라 하더라도 출산휴가는 언감생심이고 오히려 일 못 한다고 두들겨맞는 상황이니 불법 낙태가 판을 쳤고 임산부들이 중노동을 자처하여 노동으로 낙태하려는 목불인견의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공산당원들조차도 여성들을 중심으로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하니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 등을 필두로 여성 정치인들이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중앙정부에 요청하였다. 여기에 마인추를 비롯한 학자들도 멜서스를 비판하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되었으나 불과 몇 년 후 마오쩌둥이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면서 산아제한 정책은 폐기되었고 산아제한을 주장했던 학자들은 "제국주의의 사주를 받아 사회주의 분열책동을 벌인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한 후 줄줄이 하방당했다. 마인추도 베이징대학 총장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 뒤의 대약진 운동에서 마오쩌둥의 개삽질로 상상을 초월하는 아사자가 발생하자 마오쩌둥도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피임 금지를 철회하여 중국의 출산율은 감소세에 접어들었지만 그럼에도 1970년대 초반까지 5명대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기 때문에 중국의 인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약 10년마다 2억명씩 불어나 1970년대 말에는 10억명에 이르렀다. 대약진운동 직후에 보상성 출산으로 1963년 출산율이 7.5명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고 이러한 베이비붐은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이 당시에는 대약진 운동으로 인구가 감소하였기에 당국에서 산아제한을 시행하려 들지는 않았다. 1960년대 중반에 산아제한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다시금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 앉았고, 1970년대 초반까지 베이비붐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82년에 인구조사를 할 땐 10억명을 돌파했다. 즉, 30여년만에 인구를 2배 폭증시킨 것이다.

헌데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1950년대에 출생한 1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로 진출하여 노동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국가에서 늘어나는 노동인구에 맞추어서 막대한 양의 일자리를 만들고 인프라를 건설해야 했기에 이 점에 있어서 과부하가 걸렸고 식량 생산 또한 한계에 다다르는 등[6]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 대규모 기근으로 약 3,000만명이 아사한 이후 대규모 아사 사태는 없었지만 그래도 중국의 식량사정은 빠듯했다. 경제가 마비된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식량 증산을 위해서 대규모 개척 사업이나 간척 사업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윈난성 여러 밀림이나 내몽골의 여러 초원들도 농경지로 개척되었다. 이런 개척의 후유증으로 그곳이 아예 사막으로 변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둥팅호나 쿤밍의 톈츠처럼 호수를 낀 여러 명승지가 간척사업 때문에 상당히 파괴되었을 정도. 그러나 인구는 1970년대 초반까지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그로 인해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식량배급이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매 가구에 지급되는 양표(粮票)라는 식량쿠폰이 없으면 돈을 아무리 줘도 배급소에서 식량을 살 수 없었다.[7] 또한 중국같은 큰 나라는 식량이 안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식량자급은 꼭 필요하다.

아울러 중국은 한국 못지 않게 인구 분포가 불균형하고 서부 지역이나 내몽골 같은 데는 사람이 살기가 어려운 환경이므로 평야나 해안 지역에 인구가 주로 몰리는 문제가 있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지나치게 높은 인구증가는 경제 발전에 좋지 않다고 여겨진다. 자녀 양육 비용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가계당 잉여자금이 줄어들어 저축이 늘어나지 않는다. 개발도상국에서 국내 투자자금을 조성하는 데 필수적인 저축이 정체 상태라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다. 게다가 그 자녀 양육비용이 효율적으로 쓰이는 것도 아니다. 자녀 둘이면 둘 모두 대학 보낼 수 있는 것이, 자녀 다섯이면 하나 대학 보내기도 벅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1970년대 초반부터 저우언라이가 산아제한을 건의했고 이를 마오쩌둥까지 동의하면서 농어촌지역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산아제한 운동을 펴기 시작했으며[8] 그 결과 출산율은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하여 1970년 5.65명이던 출산율이 1972년을 기점으로 5명 아래로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1973년에는 4.57명, 1974년 4.18명, 1975년 3.81명, 1976년 3.47명, 1977년 3.18명, 1978년에는 2.94명, 1979년에 2.75명 순으로 매년 큰 폭으로 떨어졌고 출생아 수도 1970년대 초반에는 3,000만명에 육박하던 수준에서 2,000만명 아래로 떨어지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9] 하지만 이러한 출산율 감소에도 1963년~1971년도에 출생한 2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막 아기를 낳으려는 시기가 다가왔고, 출생아 수의 감소가 어려워질 것을 염려한 집권한 새 지도부는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안보적 문제도 고려하여 1980년부터 아예 한족들에게 1자녀만 낳을 것을 강제하며 강압적으로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10] 이러한 산아제한 정책 시행에 대해서 이미 출산율이 충분히 감소되었는데 뭘 더하라는 반발이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나오고[11] 서방국가로부터도 인권침해라는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 식량 문제와 난민 발생 발언 등으로 묻어 버렸다. 그래도 무조건 1자녀는 농촌지역에서 호응을 얻기 힘들다는 목소리가 당내에서도 나왔고 결국 시골 지역에서는 특정 조건만 충족시키면 2자녀, 경우에 따라서 4자녀까지 낳을 수 있도록 했는데, 그래서 도시 지역에서 출산율이 1명대를 기록할 동안 농어촌 지역은 2010년대 중반까지도 2명대를 유지해서 농어촌 지역일수록 다산가정이 많은 편이다.

3. 꼭 1자녀여야 하는가?

영미권에서는 One Child Policy라고 번역하므로 일반적으로 반드시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출산율이 1.0보다 높을 수가 있을까?

이는 제도가 적용되었을 당시에 도시에서는 1자녀만을 낳도록 했지만 농어촌에서는 첫째가 딸이면 둘째까지 가질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남아를 선호하는 관념이 강하다보니 아들을 낳을때까지 벌금을 감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산아제한 정책이 시행되었을때에도 출산율이 일정수준 이상 유지했던 이유였다. 역설적으로 중국의 출산율이 산아제한을 철폐 및 출산장려로 전환했음에도 출산율이 1명대 초반대로 급감하게 된것도 이러한 관념이 쇠퇴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수민족에 대한 일종의 보호책으로 보통 2자녀 이상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중국 정부 공인 55개 소수민족 중에는 인구수가 수천 명에 불과한 민족도 여럿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1자녀만을 갖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 절멸책이 되어버린다. 중국은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때부터 소수민족 보호를 약속했기 때문에, 소수민족 보호를 위해 도시에 살고 있을 경우는 2명, 농촌지역은 3~4명까지도 허용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위구르족은 2010년대 전반기까지 인구수가 크게 늘어났었다.[12] 반면 만주족의 경우 청나라 때 한족들을 변발령, 문자의 옥 등으로 탄압했고 그 보복으로 태평천국 운동신해혁명으로 자신들이 한족들에게 대거 학살당했던 것 때문에 대부분 자신들이 만주족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 한족인 척 연기하며 살았으므로 자신들이 자녀를 2명까지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족으로 위장하기 쉽게 일부러 1자녀만 가진 경우가 많았다.

벌금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도 많이 낳을수 있었다.[13] 유명한 중국 영화감독인 장예모는 2013년에 아이를 몰래 7명을 낳은 게 밝혀져서 748만 위안(약 12억원)에 가까운 벌금을 냈다. 더군다나 한자녀 정책이 전국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 아니고 지역별로 몇 명까지 낳을 수 있을지 정책이 달랐기 때문에 1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구의 수는 총가구의 40%에 못 미쳤다. 게다가 쌍둥이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둘째나 그 이상을 만든 게 아니므로 불이익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래서 중국 여성들이 부작용을 감수하고 '쌍둥이 낳는 약'을 구해서 먹는 사례도 있었다.

또 2000년대에는 둘째 만든다고 해서 낙태시키거나 감옥에 넣는 것도 아니고 벌금을 내거나 이런저런 불이익이 주어졌는데 문제는 이게 재산비례 벌금이 아니라 누구나 같은 액수의 벌금이기 때문에 서민층에는 이러한 불이익이 치명적이지만 상류층은 그깟 벌금 내고 말지 뭐 하고 둘째를 낳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 교원들은 둘째를 낳으면 벌금은 물론이고 직장을 잃을 각오도 해야 하기에 위장이혼을 하는 경우도 2000년대에는 빈번했다.

정부 몰래 낳으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중국의 사회통제 정책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이렇게 호적에 올리지 않고 몰래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단 1자녀를 가진 여성은 무조건 정기적으로 보건소에 출두하여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운 좋게 신체검사를 통과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한들 호적에 올리지 않은 아이는 절대로 학교에 입학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1자녀 정책을 위반하고 출생하여 호적에 오르지 못한 인구는 문명화가 거의 안 된 농촌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호적에 오르지 않은 아이의 수는 1,300만 명(추정치) 정도에 불과(?)하다. 중앙에서 책상머리로 입안된 대약진 운동이 겨우 1년만에 중국 전역에서 철저히 실시되었다가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정도로 중국의 사회통제는 강력하다.

중국 입양법(中华人民共和国收养法)은 양자도 1명만 들일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14] 이 또한 이 정책의 일환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친자를 양자로 위장해서 우회출산하려는 꼼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다산을 선호한 농업국가였던 중국에서 전통을 갑자기 180도 바꾸는 데는 어려움도 많았다. 1990년대의 중국 신문을 보면 이 계획생육정책이 실시된 지 10년이 넘었지, 농촌 지역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다. 지역별로 보자면 베이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주요 대도시나 동북 3성 일대의 출산율은 이미 1980년대에 1명대 중반 수준으로 재빨리 떨어트렸지만[15] 소수민족 자치구역이나 농촌지방은 합계출산율이 인구대체선을 훌쩍 뛰어넘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강력한 산아제한에도 중국의 출산율이 동시기 한국이나 대만에 비교해서 높았던 이유도 농어촌 지역의 출산율이 대도시 지역에서 떨어지는 출산율을 보충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온 인민일보나 중국청년보의 기사를 보면 초생촌(超生村), 즉 계획생육정책이 잘 지켜지지 않는 마을이 어떻게 가난하게 허덕이고 있는지, 다산 가구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사는지에 대한 르포기사가 자주 실렸다. 이는 계도성 보도로, 사람들에게 다산의 폐해를 인식시키기 위한 것. 중국 정부가 1970년대 말부터 이런 강제정책을 밀어붙였지만 농촌 지역에서는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마을 사정에 따라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에서는 비교적 잘 지켜진 반면 농촌에서는 자녀가 노동력이자 노후보장이라는 2가지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중앙에서 한두명만 낳으라고 명령을 해도 편법으로 3명 이상. 심지어 1985년에는 쓰촨성에서 쩡잉룽(曾应龙)이라는 사람이 이 정책에 반발해서 폭동을 일으켜 병원을 점거한 뒤에 스스로 대유국 황제라고 칭제하다가 인민해방군에게 진압당한 사태도 있었다고... 그래서 이 시대에도 다산가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아이돌 가수인 화전소녀푸징(1995년생)이 4남매 중 둘째, 중국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의 에이스 주팅(1994년생)이 6남매 중 맏이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4. 비판 및 논란

4.1. 인권 억압

대부분의 나라의 산아제한 정책은 아이를 덜 낳도록 유도[16]하는 것이지만 중국의 계획생육정책은 '강제'였다. 처벌은 더욱 강경해서 일반적으로는 벌금을 내야 하지만 정책 시행 초기에는 임산부를 가축 축사로 끌고 가서 강제로 낙태시킨 바 있다. 정책 시행 이후에도 사람들이 정책을 따라주지 않아서 공포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강제낙태는 실시하지 않고 있다.[17]

아울러 벌금 낼 형편이 안되는 하류층에선 자식을 더 가지기 위해서 신고 안 하고 몰래 임신했다가 산이나 숲에서 출산해 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 경우 자식은 당연히 등록이 안 되는 유령인구가 되는데 이들은 인신매매를 비롯한 각종 인권유린 범죄의 표적이 되곤 했다.

거기에 남아선호사상 문제로 여아낙태와 영아살해 또한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다. '무작정 1명만'이었을 때는 특히 영아살해가 심각했다. 출생성비 불균형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가 절정으로 이 당시에는 출생성비가 남자 121명당 여성 100명까지 벌어졌다. 또한 도농격차 문제와 도시 여성들의 만혼화 경향까지 겹쳐서 미혼남성들이 결혼하기가 매우 힘들어져서 미혼남성 대 미혼여성으로 따지면 성비가 더욱 커진다는 통계도 나오며 특히 농촌남성의 경우에는 결혼 대상에서 비선호되다 보니 불균형 문제가 도농격차를 상기하는 중요지표가 되었다. 그래서 농촌 남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거금을 내고 동남아시아 여성들과 국제결혼을 하는 실정이며 이조차도 여의치 않으면 1명의 아내를 가지고 여러명의 남편이 아내를 공유하는 다부일처제 혹은 외국 여성이나 소수민족이나 탈북자 여성을 납치 또는 인신매매하여 강제로 아내로 삼는 일도 일어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볼 때 2040년대까지도 미혼남성이 짝을 찾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또한 1자녀 정책은 인구 1,000만 이상인 민족에만 적용되는데 조건을 충족시키는게 한족과 좡족, 만주족, 후이족, 위구르족[18] 등등 몇 없었다. 그래서 출산이 제약되는 한족들이 정부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거나 소수민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위구르족이 중국 내지에서 분쟁의 불씨가 되어 있다는 점이 체험담으로 자주 거론되기 때문에 한족 인구가 이런식으로 계속 줄어들고 반대로 소수민족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 한족이 "주류 민족"의 지위를 빼앗기고 소수민족의 밥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까지 가지고 있다. 굳이 이런 피해망상적인 생각이 아니더라도 민족 불평등으로 생각하고 "왜 주류 민족인 한족이 오히려 차별받냐"며 반발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인구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문제는 소수민족 책임이 아니므로 억지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한족보다 더 낮은 출산율을 보이는 민족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족만주족이 있다.[19]

4.2. 저출산 고령화 문제

현재 와서는 경제적으로도 고령층이 비대해지고 노동인구가 감소하면서 아직 한창 개발도상국인 중국을 급격한 고령화사회로 인도하게 되었다는 시각이 있고 중국 당국에서도 세대차이[20]나 도시지역의 부동산 문제를 간과하고 지나치게 농민들의 의식수준을 의식해서[21] 산아제한 철폐 시기를 늦춘 것은 심각한 실책이었다는 것이 중국 인구학자들의 평이다.

4.3. 소황제(小皇帝)

소황제 (小皇帝, 샤오황디)는 중국 정부가 1979년 채택한 '한가정 한자녀 정책'에 따라 각 가정에서 부모의 과보호 속에 자라난 독자(獨子)들을 지칭한다. 부모 세대와는 달리 개혁, 개방으로 비교적 풍요롭게 자란 세대로써, 부모 세대가 이들을 과보호하여 심각한 인성문제를 야기했다.

중국 지하철 발길질 사건에서 그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외동딸이 모친을 향해 패악질을 부리는데도 모친이 이를 타이르기는커녕 외려 당연한 것처럼 가만히 있었으며, 심지어 이를 보다못한 행인이 붙들고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기고만장하여 더욱 성을 내는 등 인성교육 자체가 결여된 모습을 보였다. 이 사건은 중국 내에서도 논란거리가 될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5. 결과

만약에 계획생육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인구는 어떻게 되었을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효과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시당초에 인구를 줄이려는 주민의 자발적 의지는 이 정책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다. # 대만, 싱가포르의 중국계와 같은 흐름으로 인구가 감소하던 흐름이 있고 나서 정책이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하여간 이렇게 인구 증가 압력이 덜해지자 중국의 가계 저축율은 끊임없이 늘어나 세계 최고수준이며, 이런 저축률을 바탕으로 한 자본형성은 중국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말 가까스로 식량자급(100%)을 달성한 이후 현재도 110%의 식량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는데[22], 계획생육이 아니었다면 이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인도의 경우와 비교해 봐도 중국의 성과는 눈에 띄는데 1960~70년대 인도 국민회의 집권 시절 인도도 빈민층의 강제 불임화 등을 통해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했지만 실패했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반발 때문에 국민회의는 정권을 잃었고 그 다음부터는 이런 정책을 꺼내는 것은 인도에서는 정치적 자살행위로 간주되었다.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산아제한 정책과 피임 정책을 시행했지만 출산율 하락 속도는 더뎌서 중국의 출산율이 이미 1970년대 말에 2명대로 진입했고 1993년에 1명대로 떨어진 데 반해, 인도의 출산율은 2000년대가 들어서야 2명대로 떨어졌다. 이마저도 인도의 경제 발전 및 서구 문화 유입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에 의한 것이지, 인위적인 인구 조절이 성공한 결과가 아니다. 인도는 인구도 가파르게 증가하여 2023년에 중국을 추월하여 세계 1위가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 출산율이 2명대 아래로 떨어지고 2010년대 들어 내수시장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었음에도 산아제한 정책을 한번에 확 풀지 않고 단계적으로 천천히 푸는 방식으로 나아갔고, 결과적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너무 오래 유지하게 되어 일본이나 한국, 대만과 비슷하게 저출산이 사회 활력을 떨어뜨리고 차후 중국의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결국 2021년부터 산아제한정책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출산장려 정책에 성공한 선진국들의 출산율도 2명대 초반 안밖임을 감안하면 빈부격차, 성비불균형, 과도한 도심지 부동산, 지나친 교육열 등의 여러 사회문제들이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는 이상 중국이 출산율을 인구대체선으로 올리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중국 당국에서도 산아제한의 철폐에도 출생인구가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지자 코로나 19의 여파가 어느정도 잠잠해진 2021년 중순부터 공동부유를 내걸며 학생 대상 사교육을 사실상 금지하고 부동산 시장의 규제도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인구문제가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5.1. 1자녀 정책 폐지

2010년대부터 국책연구기관에서도 1자녀 정책을 폐지하고 2자녀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2015년부터 중국의 생산가능 인구(만 15~64세)가 급속히 줄기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 폐지될 거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시진핑 정부 들어 2013년 11월, 한 자녀 정책을 다시 완화해 앞으로 부부 중 1명이 독자이면 두 자녀까지 허용하는 쪽으로 바꾸기로 했다. 중국 정부는 이 제도를 실시한 뒤 수년 뒤 '두 자녀 정책'을 도입할 것으로 전망되어 사실상 계획생육정책은 폐지 수순을 밟았으며 2015년 10월 29일에 시진핑이 1자녀 정책의 완전폐지를 시사했고 결국 2016년 한 자녀 정책이 완전 사라지고 두 자녀 정책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기사 참조. 일단 2자녀까지는 누구든지 허용되는 셈이다.

이미 2010년대 들어 당원이나 공무원같은 경우를 제외한 일반인의 경우에 이 제도 거의 유명무실해졌으며 인권유린 시비를 불렀던 강제낙태 제도는 완전히 없어졌고 벌금으로 대체되었다지만 일부 성에서는 그 벌금도 안내고 버팅겨도 되는 수준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2자녀 정책을 시행하면서 한자녀 정책 모범지역으로 선정된 지역에서 공무원들에게 자녀 2명을 낳을 것을 강요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고 한다.

또한 산아제한 완화 이전에 둘째 자녀를 낳아 처벌을 받은 부부들이 지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일도 늘었다.

2016년 들어서 헤이룽장성에서는 부분적 3자녀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헤이룽장성 일대의 고령화가 한국 수준으로 심각해서 나온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중국 헤이룽장성서 부분적 '3자녀 정책 시행'…국경지역 주민·소수민족 대상

다만 두 자녀 정책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계획 생육 정책을 완전히 없앤 것은 또 아니었다 보니 자녀를 3명 이상 낳은 경우 그 아이의 호적 등록이 거부되는 등의 사례가 남아 있었다. 또 일반인들은 덜해도 당원이나 공무원의 경우엔 셋째를 가질 경우 출당되거나 불이익을 당할 각오 정도는 해야 했다. 그리고 호적에 없는 아이들은 독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혜택을 못 받는 건 또 당연하다.

청년들이 과도한 집값[23]과 교육비용 등[24]의 이유 때문에 출산율 기피하는 현상은 중국도 예외가 아니라서 2자녀 정책을 펴는 것만으로도 한참 모자라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이어지고 있으며, 3자녀 정책시행이나 산아제한 완전 폐지 및 출산장려 정책 얘기도 나왔다. 중국 정부도 2017년도 출생아수 감소를 나름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인지, 2018년 3월에 국가위생 계획생육위원회를 폐지하고 국가위생건강위원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으며 중국인구협회 홈페이지도 폐쇄되었다. 이후 2020년이 되면 산아제한이 완전히 폐지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며 고령화로 인해서 출산장려부서를 신설하는 등의 대책 마련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남초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딸이 둘인 가정에도 보조금을 지급한다.

5.2. 2자녀 정책 실패

산아제한 정책을 조기에 폐기하지 않아 중국은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구 위기에 다가가고 있다. 중국의 과도한 산아제한정책은 결과적으로 패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은 2015년 한 자녀 정책을 폐지했지만 출산율은 2016년에만 소폭 반등했고 2017년부터 출산율이 폭락해 심각한 저출산 위기 상황이 되었는데도 산아제한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2자녀 정책 전면 시행 초기인 2016년 출생아수는 1,786만명대를 기록하면서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출산율도 한국의 1990년대 초중반 수준(합계 출산율 1.7명)으로 올라갔다. 저출산은 도시화율과 직접적인 역상관관계가 있는데, 중국은 90%에 육박하는 한국과는 달리 도시화율이 58%에 불과하기 때문에 저출산을 벗어날 여지가 더 높다는 예상이 있었다.

일단 2017년에는 신생아 수가 2016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2015년보다는 많기 때문에 저출산 경향을 멈출 수 있을지 아니면 일시적인 붐에 불과할지는 더 지켜봐야 했다. 차이나포커스 봉황망코리아, 봉황망 기사와는 다른 시각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한데, 중국에서는 출산아 수는 줄었지만, 출산아의 상당수가 둘째라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는 입장이고 서방에서는 출산아 감소를 들어 "효과가 없었다"는 주장을 했다.

결국 두 자녀 정책은 출산율 반등에 실패했다. 중국 정부는 두자녀 정책으로 선회한 후 2017년부터 연간 출생아수가 다시 2천만을 넘어서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했으나 출산율은 2016년에만 소폭 반등했고 2017년에는 오히려 출생아수가 2016년보다 63만명이 줄고, 2018년 출산율은 더 크게 하락해, 2017년 대비 무려 200만 명이나 감소한 1,523만 명을 기록하며 효과가 전혀 없다는걸 보여주고 말았다. 사실 규제같은 외부적 요인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가난해서 못 낳는 것인데 "규제를 철회한다"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로 해결될 리가 없다. 결국 한 자녀 정책 폐지만으로 저출산 경향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서방의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2019년 출산율은 역대 최저인 1,46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2020년에는 호적 등록까지 마친 신생아 기준으로 2019년보다 176만 명이나 감소한 1,003만 명을 기록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최저치이다. 이미 인구감소가 시작될 것으로 예측되는 시기도 2028년에서 2023년으로 앞당겨진 상태이며, 게다가 절망적이게도 이미 생산가능 인구와 가임여성의 수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어[25] 중국 정부의 노력에도 저출산 문제가 나아지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중국 중앙정부는 산아제한 정책 완전 폐지에 과도하게 조심스러워하다 심각한 인구 위기를 자초했다. 출산율은 1990년대 초중반에 1명대로 감소했고 이미 2000년에 전인대에서, 2004년과 2009년에 중국 인구학자들이 한 자녀 정책 폐기를 요구했으나 중국 중앙정부는 시기상조라며 외면하다 2015년에야 한 자녀 정책을 뒤늦게 폐기한 것이다. 결국 중앙정부의 공식 발표가 없었는데도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심각한 중국 농촌에서는 노골적으로 다산 장려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과거 산아정책시기의 한 자녀 정책을 강요하던 태도가 180도 선회한 것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두 자녀 출산을 하면 상을 주고, 한 자녀를 출산하면 벌금을 부과하며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 딩크족은 처벌하겠다고 협박하는 표어가 쓰여진 벽보를 중국 농촌에서는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출산을 멈추지 않으면 전 주민을 불임수술하겠다고 협박하는 벽보를 볼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정반대로 출산을 하지 않으면 전 주민을 강제 임신시키겠다고 협박하는 표어를 공개해 비판과 반발이 있었다. 오히려 농촌의 강압적 출산 강요로 분노한 여성들이 농촌을 탈출해 역효과만 냈다.

그러나 중국 중앙정부가 산아제한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정책을 180도 선회해 국가적인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한다고 해도 성공 확률은 낮다는 예상이 강하다. 중국 정부보다도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이었던 나치 독일과 스탈린 시대의 소련도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했으나 한계가 있었고 루마니아는 출산장려가 아닌 출산강요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독재국가들 중에서도 특이한 사례이며 이마저도 결국 정권붕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2021년 5월 31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회의에서 세 자녀 출산이 허용되었으나# 3자녀 정책도 인구 감소를 막을 수 없을 것으로 인구학자들은 보고 있다.#

2000년대생 1,200만명을 새로 통계에 넣었다고 한다.#

한편 1자녀에서 2자녀로의 완화는 엉뚱한 문제를 가져왔는데 둘째 자녀의 취학이 본격화되면서 곳곳에서 학교 포화 상태가 발생했다. 학생 수용 규모가 기존 1자녀 정책에 맞추어져 있었는데 정책 완화로 갑자기 학생 수가 일시적으로 폭증하면서 기존 규모로는 감당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이징시에서는 이를 대비해 학교 시설을 확충했지만, 다른 많은 도시들은 산아 제한을 완화한다고 해서 신생아 수가 증가하는 추세로 돌아설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학교 시설 확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출산율이 2016년 반등했다가 2017년 다시 폭락 후 감소세로 돌아섰기 때문에 지금 학교 시설을 확충한다고 해도 머지않아 학생 수 급감으로 학교 시설과 교사가 지나치게 남아도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학생 수용력 늘리기에 선뜻 나서기 힘든 상황이다. #

6. 한국과의 비교

한국의 경우 중국과는 달리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거나 강제낙태까지 시행하지는 않았다. 한국도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1950년대 중반~1960년대 초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이 아기를 낳을 시점이 되고 인구 4,000만이 넘는다는 얘기가 나오고 결국 인구가 4,000만명을 넘어서자 빨리 출산율을 줄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둘도 많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셋부터는 부끄럽습니다" 식의 자극적인 캠페인 표어를 쏟아냈다. 심지어 1974년 주부클럽연합회는 정부의 지원으로 "임신하지 말자"는 캠페인까지 벌였다. 일명 "아이 안배기 운동"까지 했으며,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1986년에 출산율을 1.5명대까지 떨어뜨리는 데에는 성공했다.

당시 한국에선 아파트 분양자들 대상으로 불임 수술을 하면 분양권을 우선으로 주기도 했다.[26][27]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산아 제한 정책을 너무 오래 끌었다는 것. 만약 출산율이 인구 대체 수준 밑으로 내려간 1980년대에 풀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무려 1996년까지 유지되었다. 덕분에 한국은 이제 도리어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인한 폭발적인 고령화와, 외환 위기 등의 부작용과 청년실업으로 대표되는 불황, 그리고 지속된 입시위주 학업으로 인한 육아 비용의 급상승 등의 이유로 노동인구 격감 등을 걱정해야 되는 초저출산 국가가 되었다. 당시의 인구증가 문제가 그만큼 심각한 과제였다는 반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과제가 생길 것이라는 데까지는 예상이 못 미쳤다.

한국은 비록 강제적이진 않았지만 중국과는 달리 농촌 포함 전 지역까지 확대하면서 넷째아 이상 비율은 1% 남짓인 반면, 중국의 경우 농촌 소수민족, 특히 위구르족이나 티베트족의 경우 4남매, 5남매 이상 둔 가정도 많았었다.

거기다 당시 아직 중국은 한국과는 달리 산업화가 덜 되어 농촌 인구가 절대 다수였기에 한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정의 수가 생각보다 적고 편법을 쓰거나 벌금을 물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 경우가 워낙에 많았기 때문에 출산율 저하 속도는 한국보다 느려서 1990년대 들어서야 출산율이 2명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서 1980년대 중후반생들의 인구 비중이 의외로 높아서 1970년대 후반생들보다도 수가 많다. 하지만 중국 역시 한국처럼 산아 제한 정책을 너무 오래 끌었고, 그 결과로 생산 인구의 감소가 한국보다 빠른 2013년부터 시작되었으며(한국은 2017년부터 시작), 1인당 GDP는 2019년에 들어서야 1만 달러를 겨우 넘었는데, 이미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은 2019년 기준 12.6%에 달해서 2021년 고령사회, 2031년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

[1] 계획생육정책 초기인 1970년대 후반의 포스터로,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리얼리즘 스타일이 포스터에 짙게 배어 있다.[2] 2000년대 계획생육 포스터다. 위의 포스터와는 다르게 문화대혁명 시절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색채가 상당히 희석되어 그냥 평범한 공익광고가 되었다.[3] 법 개정 전에는 "国家提倡一对夫妻生育两个子女。"(국가는 한 쌍의 부부가 두 자녀를 낳을 것을 제창한다.)였다.[4] 생산력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에서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고산량 농작물 재배도 보급되었다.[5] 실제로 장제스는 중국의 위협에 직면한 데다 대만의 인구와 국토가 적어서 대만군 인력충원에 한계가 있었음에도 산아제한 정책을 도입하였다.[6] 다만 이 시기의 식량 문제는 생산성 문제가 컸다. 물론 생산성이 급락한 것이 아니므로 인구증가가 비정상적이였단 게 맞다.[7] 이 양표는 각 성이나 지방마다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는 수집가들의 아이템이 되고 있다.[8] 다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지방정부에서 실적 거두기용으로 무리수를 두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강제 낙태나 영아살해 같은 악습도 1자녀 정책 실행 때보다 덜할지라도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된것 이었고 이는 2010년대까지 지속되었다.[9] 1979년 당시 한국의 출산율은 2.90명으로 오히려 중국보다 높았으며 1980년에도 중국보다 높은 출산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농촌 인구가 많아 1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구 수가 생각보다 적은 데다 아들을 무리해서 낳으려는 사람이 많아 출산율 하락폭이 낮아서 이후 쭈욱 중국이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게 집계되었다.[10] 당시 미사일과학자인 쑹젠이 당시의 출산율 통계를 기준으로 삼아서 중국의 출산율이 3명대 수준을 유지한다면 2080년까지 중국의 인구가 42억 6천만까지 폭증하리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덩샤오핑은 이 보고서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1] 그래서인지 1980년대 당시 중국의 출산율은 강압적인 산아제한에도 불구하고 몽골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높았다.[12] 다만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이 워낙 경제가 발전되지 못한 지역이다 보니 이렇게 인구압력이 팽창하자 그 불만이 이슬람 근본주의나 독립열기로 확산되고 있다.[13] 돈은 있는데 법망을 피해서 낳고 싶은 사람들은 미국이나 홍콩, 마카오원정출산 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14] "收养人只能收养一名子女."(제8조)[15] 그리고 2010년대 이후로 해당지역들의 노인인구가 중국 전국에서 가장 높은 결과를 낳았다.[16] 한국에서처럼 불임시술자에게 아파트 분양권을 먼저 주는 등 몇 명을 낳든 자유이지만 적게 낳는 사람한테 혜택을 주는 식이다.[17] 2012년에 산둥성에서 강제 낙태를 실시하다가 엄청난 반발을 받았던 바가 있다. 관련 기사[18] 위구르족은 건드리기가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로 지역에 따라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도 한다. 또한 중국의 위구르족 인구가 1,000만을 돌파한 건 21세기의 일이다.[19] 문제는 이것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 함정이다. 사실 동북 3성 자체가 중국에서 진작에 출산율 최하위를 찍는 동네인지라 한족도 출산율이 낮다.[20] 실제 중국의 설문조사들을 보면 1980년대생까지는 출산의욕이 높지만 1990년대생 이후로 출산의욕이 크게 꺾였다.[21] 실제로 농촌 지역의 출산율은 2010년대 중반까지는 인구대체 수준을 넘기는 지역이 다수 있는 등 출산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산아제한을 폐지할 무렵은 농촌 지역에서도 의식의 변화로 출산율이 낮아진 때와 겹쳤다.[22] 한국은 25%에 불과하다.[23] 베이징상하이, 선전 지역의 집값은 세계적으로도 비싸기로 악명이 높다. 집값높기로 유명한 홍콩이 부럽지 않을 정도. 하지만 평균 봉급 수준은 홍콩보다 낮은지라 이들 지역에서 사는 젊은층들은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24] 소황제라는 말이 많이 나돌기는 하지만 교육열이 심하다 보니 중고등학생이 되면 지옥이 열려서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것은 예삿일이고 집안이 부유한 경우에는 각종 사교육으로 아이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많다.[25] 중국은 한 자녀 정책의 부작용으로 남녀 출생 성비가 심각한 남초라서 인구 유지를 위해 필요한 대체출산율도 2.1명이 아닌 2.2~2.3명대다.[26] 그래서 과거 반포 주공아파트의 별칭이 '고자아파트'였다.[27] 채널A의 재연드라마 충격실화극 싸인에서 소재로 다루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