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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10:58:31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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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원3. 원인4. 여파5. 과정
5.1. 세력 포섭5.2. 국가 기간망 장악5.3. 정치적 회유
6. 공산권 국가7. 변형된 쿠데타
7.1. 친위 쿠데타7.2. 역쿠데타7.3. 연성 쿠데타
8.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가능성
8.1. 현대에는 쿠데타의 성공이 어려운 이유
8.1.1. 철저히 금지된 사조직8.1.2. 정보 기술의 발전8.1.3. 교통망 혼잡8.1.4. 두터운 부사관단8.1.5. 군인의 위상 변화8.1.6. 국민장병의 의식 변화8.1.7.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쿠데타 방지책
8.2. 종합
9. 사례10. 여담11. 이를 소재로 한 대중매체12.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권력총구에서 나온다."
마오쩌둥[1]
[2] Coup ďÉtat, Coup[3]

쿠데타는 일반적으로 군사 조직이나 기타 정부 엘리트가 현직 지도부를 축출하려는 불법적이고 공공연한 시도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 수많은 쿠데타가 있었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신생국 다수에서 1960년대를 전후로 동시다발적으로 쿠데타가 발생했다.

한자어로 군사정변()으로 번역되어 자주 쓰이고 있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군대가 무력으로 주동하지 않고 정치인과 같은 엘리트 계층의 조직이 권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4]

2. 어원

프랑스어의 쿠데타(coup d'État, [ˈku.d̪e.t̪ɐ])에서 유래된 말로, 직역하면 '나라(État)의(de) 타격(Coup)'이라는 뜻이 된다. 영어로 번역하면 'stroke of state' 정도가 된다. 영어권에서는 /ˌkuːdeɪˈtɑː/(쿠데이타) 정도로 발음하며, 일반적으로 간단히 쿠(coup, /kuː/)라고 줄여서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군사 쿠데타'임을 강조할 때는 'Military Coup'(밀리터리 쿠)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프랑스어가 어원이므로, '쿱'[5]으로 발음하지 않고, 반드시 '쿠'라고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다.

독일어는 프랑스어를 그대로 안 쓰고 슈타츠슈트라이히(Staatsstreich)[6]라고 번역해서 쓰거나, 알레만어에서 유래한 푸취(Putsch, 갑작스러운 소동이나 타격, 또는 폭동)라는 용어를 쓴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부 세력에 대해서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훈타(junta) 혹은 군사 정권(military regim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조선 시대 때는 반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였는데,[7] 실질적인 의미의 쿠데타로는 조선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이 더 알맞다고 하겠다.

대한민국에서는 자주 '쿠타'라고 잘못 표기되거나 발음되는데, 아마 바리케이포르투의 예처럼 앞 음절의 거센소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설사 쿠타라고 쓰더라도 발음할 때는 쿠타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꽤 많다.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구테타'라고 읽기도 하며, 심지어는 구데타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일례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나온 나레이션 부분에서도 '5.16 군사 구테타'로 나왔으며. 디즈니 헤라클레스 애니매이션 더빙판에서도 김환진 성우가 '구테타'라고 발음했다.

3. 원인

사실 군대정부의 역학 관계만 보자면 쿠데타는 매우 일어나기 쉬운 조건에 있다. 과거의 봉건주의 시대와는 달리 현대적인 개념의 국가에서는 정치와 군사가 분리되어 정부는 정치를 전담하는 조직이 되었다. 그런데 국가와 정치권력이란 건 실체가 없는 규정과 문서, 체계와 관념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물리력이 존재하지 않고, 반면에 군대는 정부의 명령을 받아야 하지만 물리적 힘 자체는 더 강한 집단이 되었다. 따라서 군대가 물리적으로 정치 권력까지 침탈하고자 하는 상황이 오면 정부는 이를 막을 방도가 없다.

정치적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하여 정교한 문민통제를 이루고 있다. 인사권이 철저하게 민주정부에게 있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인사를 대부분 걸러내는데다, 국민이나 정치인, 대부분의 군인들까지 민주주의 의식이 높고 이를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환경에서 몇몇 군인들이 쿠데타를 시도해봐야 실패 가능성이 높고, 성공하더라도 그렇게 얻은 권력을 유지하는 건 훨씬 더 어렵다. 만일 권력 쟁취와 보존에 실패하면 그 순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어진다. 에 몸 담는 사람들도, 늘그막에 퇴역연금이나 받고 편하게 살고 싶지, 목숨을 건 도박은 본능이 거부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민주의식이 부족한 국가는 정치와 군의 분리가 가능할만큼 사회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아무리 군부를 통제하려 해도 쿠데타를 통해 군권과 정권이 통합되는 현상을 막을 방법이 딱히 없는 것이다.

4. 여파

군사정변이 일어나면, 반란군은 필연적으로 정부군과 맞붙어야만 하는데,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군부가 집권하면, 정치적 발전도 멈추기 때문에 군사독재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어렵다. 주로 남아시아서아시아북아프리카동아프리카서아프리카남아메리카의 나라들이 이런 상황이다. 경제적 빈곤과 문화적 요인으로 국민은 정치 개혁에 신경쓰지 못하고, 쿠데타와 암살 같은 일들이 빈번해 정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민족, 종교, 정치, 이념, 역사, 외교 등 갖가지 변수로 국가가 찢어지고 내전테러로 얼룩지고 있다.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이 성공하고, 정치와 경제가 안정된다면 문민통제를 실현할 수야 있지만, 문제는 저 3개 모두 엄청 힘든 일이다. 특히 오랜 식민지배와 수직적 문화가 지나치게 뿌리 깊은 아시아 지역의 나라들 가운데 국민경제가 발전하면서 정치민주화경제자유화를 이륙한건 아래에서 언급하는 나라들 뿐이다.
여기서 일본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인도부탄스리랑카는 외세[8]에 의해서 자유민주주의가 반강제로 철두철미하게 주입된 경우이다. 이 나라들은 역사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거나 많지 않기 때문에 국민들의 압력으로 정권을 교체한 경험이 부족하다. 서아시아에서 자유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들은 시민사회의 본류(本流)를 주도하는 다수민족 공동체[9]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무려 1000년간 서유럽 문화를 앞장서서 받아들인 덕택이며, 자연지리의 방면에서는 아시아에 속할지언정, 인문지리의 방면에서는 유럽에 속한 나라들이다. 더 나아가 키프로스유럽연합의 회원국이다.

5. 과정

대부분의 경우, 쿠데타 계획은 사후에 보면 어떻게 이렇게 일이 흘러갈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허술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거꾸로 생각해보면 현실적으로 정권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쿠데타 계획을 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공한 쿠데타는 정권 측의 더 어이없는 실수가 겹쳐진 경우가 많다. 5.16 군사정변도, 장면의 진압요청에 대해 그린 대사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윤보선 대통령을 접촉할 것을 권유했고#, 윤보선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다가 쿠데타를 승인해주고 만다.[10] 12.12 군사반란의 경우도 "반란군과의 신사협정을 믿는다."는[11] 육군본부의 뻘짓이 아니었다면 반란군 측인 1, 3, 5공수여단보다 진압군 측의 9공수여단이 먼저 서울에 진입하여 보안사령부와 30경비단을 제압하고 반란을 조기에 진압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반란 진압에 실패했던 것은 진압군의 총 지휘자인 노재현 국방장관의 행동이 묘연했던 것도 큰 원인 중 하나인데, 노재현은 총소리가 들리자 가족들과 함께 도망 다녔지만 하나회 수중에 떨어진 육군본부로 왔다가 결국 붙잡혔다.

5.1. 세력 포섭

쿠데타 세력은 일단 소수의, 믿을 만한 군사 지휘관들을 포섭한다. 의외로 규모는 전군에 비해서 그리 크지 않으나, 수도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정예 병력이 필수적이다. 대체로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쿠데타 병력은 1개 사단 내외가 된다.[12] 쿠데타에 끼어든 사람의 규모가 너무 크면 보안 유지가 어렵고, 반대로 너무 적으면 일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쿠데타는 극비리에 진행해야 하므로 어지간히 문민 정부가 막장이거나 쿠데타 주모자가 어지간히 적이 없고 인망이 높지 않으면 모든 장성들을 사전에 음모에 끼워 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 과정이 지지부진하게 정체되면, 즉시 다른 장성들이 나서서 쿠데타 군을 진압한다. 이것도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는 영예를 얻게 될 기회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사례과 같이 말 그대로 국군으로서 국가와 국민에만 충성하는 장성들[13]도 있으므로 이런 사람들에게 괜히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일을 벌이기도 전에 잡혀 들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회처럼 쿠데타 모의 수년~수십년 전부터 암약하던 군부 사조직이 주동하는 경우가 확실히 믿을만한 지휘관들만 참여시킬 수 있으므로 성공 확률이 높다.

또한 장군, 영관급의 지휘관들은 포섭할 수 있지만, 그 아래의 위관급이나 부사관, 일반 사병들까지 광범위하게 포섭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구체적인 계획은 모르고 단지 지시에 따라서 쿠데타 병력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많은데, 상황이 지지부진하다보면 바보나 로봇이 아닌 이상 자신들이 명분이 없는 불법 행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이렇게 되면 쿠데타 병력은 통솔력을 상실하고 공중분해되어버린다.[14] 궁성사건이 실제 병력 동원에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것.

쿠데타에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야 하는데 명분이 있어야 장성들을 한 명이라도 더 음모에 가담시킬 수 있다. 가령 박정희의 쿠데타는 이승만4.19혁명으로 퇴진한 이후에 출범한 장면 내각에서 곽영주 등 이승만을 등에 업고 국가를 어지럽힌 무리들을 처벌하는둥마는둥 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박정희가 이런 곽영주 등의 무리들을 확실하게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또한 전두환의 경우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이 10.26 사건 당시 김재규의 초대를 받아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점을 빌미삼아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최고지휘관으로서의 자격이 없으며, 박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와의 공모 여부를 철저히 밝혀야 한다."는 점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15]

5.2. 국가 기간망 장악

쿠데타가 벌어지면 사전에 계획된 방침에 따라 주요 요인들을 제압하고 병력을 동원해 방송국, 통신 시설, 공항 등 국가 기간망을 장악한다. 최종적으로 의회와 정부 주요 기관을 통제하고는 무력을 통해 반대파를 제압한다. 어떤 경우는 의회 같은 세력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인 정권 획득 과정을 거친다.

쿠데타의 과정은 기존 정권이 무슨 사태인지 모르고 헤매고 있을 동안에 매우 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뜸을 들였다간 기존 세력의 반격으로 인해 쿠데타는 거진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쿠데타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에는 한계가 있고, 보급 능력도 여의치 않아[16] 정국을 빠르게 장악하지 않으면 쿠데타 군의 군사력과 통제력은 빠르게 한계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5.3. 정치적 회유

일단 쿠데타에 성공한 다음에는 반대파와 중도파를 제압 또는 회유한다.[17] 이 과정에서 피아 식별이나 진압군의 병력 동원 문제 등으로 인해 상시 일정 병력을 통제하고 있는 소장 및 고급 영관급 장교들이 공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18] 쿠데타 과정의 복잡한 상황은 정치 드라마 제3공화국(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MBC)과 코리아게이트(SBS)에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6. 공산권 국가

의외로 냉전 시절의 공산주의 국가들, 정확히는 소련을 위시한 제2세계 국가의 경우에는 쿠데타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은 정치장교 제도를 기반으로 한 문민통제가 매우 튼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산 세력 내의 권력 투쟁도 무력을 동반한 쿠데타보다는 형식상 합법적인 정치 투쟁 및 숙청으로 행하였다.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쿠데타는 소련의 8월 쿠데타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친위 쿠데타 정도인데 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인 군부 주도의 쿠데타는 아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공산당이 통제하는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라는 개념은 그리 틀린 개념은 아니다. 소련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안정을 확립하지 못했기에 군을 통해 사회를 통제해 왔다. 하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통제를 통해 국가를 운영했지만 군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유복했기 때문이다.

폴란드, 중국 등의 국가들은 수많은 대중적인 저항에 직면했고, 이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제2세계의 패권국답게 사회가 안정화되어 있어서 군의 중요성이 많이 떨어졌었다. 특히 소련의 브레즈네프 시기는 비록 임금이 서구에 비해서 열악했지만 물가가 미친듯이 저렴해고, 맞벌이가 국책사업이었기에 가처분소득은 비슷했다.[19] 소련사람들은 당시 서구에 비해서 많은 부분이 열악했지만, 기다리면 일자리와 집, 차, 별장을 국가에서 지급해 주었다. 이러한 보장이 있었기에 많은 것이 열악하고 부족해도 소련 사람들은 참고 지냈다. 예를 들어 신혼부부에게는 3인 가족용 아파트가 지급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물량이 부족해 10년 후로 밀렸지만 그냥 1인 아파트에서 가족이랑 살았다. 어차피 자신들이 살 아파트가 나올테니까. 이러한 믿음은 소련사회가 많은 것이 부족하고 문제점이 촉발되는 지점까지 소련을 버티게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소련 사회는 사회적 안정도가 매우 높았고, 그 결과 군에 의한 쿠데타는 현실화되기 어려웠다. 쿠데타는 사회불안을 틈타 발생하는 것이지 사회안정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성공하기가 어렵다. 실제로 8월 쿠데타의 경우만 해도 장병들이 쿠데타를 거부했고, 시민에 합세했다.

기본적으로 다른 공산국가들도 공산당의 당군임과는 별개로 정신교육에서 "우리는 인민의 무력"이라는 관념을 계속 주입을 받았기 때문에 막상 민중봉기가 있더라도 유혈진압을 매우 꺼렸다. 동독국가인민군베를린 장벽 붕괴시점에서 시위군중을 진압하라는 당중앙의 명령을 지휘관들이 거부해서 동독은 붕괴했고,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에도 시위가 일어난 베이징 군구의 여러 지휘관들은 유혈진압을 거부했고, 쉬친셴 중장 같은 경우는 명령을 따를 수없다고 항명하여 체포되었다. 결국 북경군구의 병력을 빼고, 시위군중과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제남군구의 병력을 동원해 진압했을 정도였다.

7. 변형된 쿠데타

7.1. 친위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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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이 현재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일으키는 쿠데타.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7.2. 역쿠데타

반대로 쿠데타 세력에 대해 반대하는 또 다른 세력이 쿠데타 정권을 뒤엎는 것은 역쿠데타라고 한다. 쿠데타 정권 대다수가 장기집권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역사의 후퇴를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역쿠데타까지 일어나면 그 나라의 혼란상은 몹시 위태로워진다. 남베트남이 바로 이런 경우인데, 남베트남은 북베트남과 싸우는 중에서도 쿠데타가 너무 많이 일어나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

글라이스틴 전(前) 주한미국대사에 의하면 12.12 군사반란 직후에도 역쿠데타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일부 장성들이 미국에 역쿠데타 지원 여부를 타진했으나, 미국이 거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 드라마《제5공화국》에서도 이 부분이 다루어졌는데, 역쿠데타를 추진한 장성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드라마에서도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채로 등장한다. 여기선 하나회 이외 장교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항간에선 12.12 사태에 불참한 장성 일부가 주도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한 하나회를 고깝게 보던 해군과 공군 장성들이 하나회가 없는 해병대 같은 휘하 육전부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2021년 9월 비밀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를 인용한 보도에서는 이범준이란 장군이 미국에 역쿠데타 의사를 타진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외의 자세한 내용은 여전히 불명이다.

과거 남미 대부분 국가들도 역쿠데타로 집권한 경우가 잦았다.

그리스의 마지막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는 요르요스 파파도풀루스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그를 몰아내기 위한 친위 쿠데타[20] 겸 역쿠데타를 사주했다가 축출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1차 왕자의 난 쿠데타로 아들 이방원에게 축출되자 역쿠데타인 조사의의 난을 일으켜 이방원을 몰아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려 무신정권 시절에도 최충헌이의민을 제거한 쿠데타를 진행하고 있던 와중에 친이의민세력이었던 길인, 박공습, 유광이 역쿠데타를 일으켜서 최충헌의 군대와 시가전을 벌였으나 길인의 병력이 오합지졸이라서 실패로 끝났고 길인, 박공습, 유광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또한 최충헌은 수창궁에서 길인에게 붙은 역쿠데타 세력을 학살했다.

7.3. 연성 쿠데타

군사력을 포함한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쿠데타. 주로 헌법, 법률상의 헛점을 이용하거나 사법권을 남용하여 누명을 씌우는 식으로 이뤄진다. 지우마 호세프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에게 이뤄진 정치공작에 이은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집권이 대표적인 연성 쿠데타로 언급된다.

8.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가능성

국가정보원이나 국군방첩사령부와 같은 각 정보기관[21]은 항상 군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하나회가 쿠데타에 성공한 이유는 군내 요직에 자신들 세력을 철저히 심어둔 것 이외에도 이들 정보기관을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22] 막아야 했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주모자였기 때문에 못 막았다.[23] 이후 청명계획이나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24],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25]을 볼 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5.16 군사정변12.12 군사반란쿠데타를 막아야 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국군보안사령관전두환이 주모자였기 때문에 못 막았고, 집권기에도 미국의 압박으로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친위 쿠데타를 준비하였던 적이 있으며, 5공 말기인 1987년 11월에도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노태우 정권에서도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에서 보듯 보안사가 청명계획을 수립, 노태우를 위한 친위 쿠데타를 준비했던 적도 있다.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도 친위 쿠데타 의혹이 있지만 진짜로 친위 쿠데타 시도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인식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론이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 차라리 독재자가 더 낫다!"고 하거나 "지금 정치 상황은 독재나 다름 없다!"고 돌아서는 순간,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전세계 쿠데타의 역사를 보면 민간 영역의 정치가 실패하여 국민들이 민간 정치나 아니면 기성 사회 질서 자체를 혐오하고 불신하게 되며 군부가 일부 민간 정치세력의 지지를 얻거나[26] 혹은 아예 민간 정치세력과 군부가 그냥 합작해서 일으키는 식으로 쿠데타 과정에서 민간이 나름 숟가락을 얹은 케이스가 전세계적으로는 주류였다.[27] 특히 SNS의 발달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은 2014년 태국 쿠데타2021년 미얀마 쿠데타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제보로 쿠데타군이 진격하고 있음을 알아도, 진압할 기무부대나 특수부대까지 쿠데타군의 편이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고, 여기에 쿠데타군이 통신시설까지 장악하여 휴대전화망이나 인터넷망을 일시 차단한다면 민간이 쿠데타를 막을 방법은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28]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법이다. 이미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면 막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가능성은 낮지만, 쿠데타군이 해공군과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한다면 막을 방법이 아예 없다.

일단 AP통신이 인터뷰한 군사전문가 5명 중 어느 누구도 21세기 한국에서 쿠데타의 성공은 불가능하다고 봤으며,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 원장은 "그럴 가능성은 0.1%도 없다"고 보았다. #

8.1. 현대에는 쿠데타의 성공이 어려운 이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긴 했다. 이에 대해, 2000년대 중반 어떤 잡지에 실린 익명 장군의 인터뷰가 있다. 이 글도 참고하면 된다.

8.1.1. 철저히 금지된 사조직

일단 한국에서 쿠데타를 모의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군 내 사조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과거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저지른 12.12 군사반란의 영향이 크며, 그 이후로 군 내 사조직이 철저하게 금지된 탓이 크다.[29] 특히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한반도 어디든지 몇 분내로 출동할 수 있는 최정예부대인 대한민국 공군제11전투비행단제17전투비행단 및 서울 코앞 수원에 주둔하고 있는 제10전투비행단[30], 그리고 반란행위를 색출하는 역할인 국방부육군본부, 육군특수전사령부 등 전국 부대 각지에 배치된 군사경찰대와 전군의 군사보안을 담당하는 국군방첩사령부 중에서 하나라도 알아차리기 전에 기갑부대를 끌고 가서 대통령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 중에 하나라도 쿠데타 계획을 알아차리는 순간 실패다.[31] 공군, 군사경찰대, 그리고 그 밖의 육군 내에서 반란군 측에게 적대하는 군사조직을 상대하기 싫다면, 그들과 장교단, 부사관단, 준사관단 등 굵직한 중하부 단체들과 심지어 민간단체 등 어지간한 단체를 반란군 측 인맥으로 잠식하여 완전 장악하거나 전부 포섭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들 중 하나라도 포섭하는 것에 실패할 경우, 자기 세력을 제외한 대한민국 국군 전군을 전부 적으로 돌리게 된다는 뜻이 되므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쉽지 않다.

설령 어떻게든 쿠데타에 성공했다고 해도 가까운 주변국이 자국의 안보를 내세워 외교를 끊어버리거나 군대를 파견시킬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주한미군이 개입을 해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32]

8.1.2. 정보 기술의 발전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금융 전산화 또한 쿠데타를 방지하는 큰 역할을 한다. 기껏 반란군을 움직이고 있는데, 지나가던 시민들이 폰카메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기만 해도 전국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다는 정보가 퍼지게 된다. 비밀리에 동원할 수 있는 쿠데타 병력은 아무리 커도 사단급인데, 이것이 정보기관이나 지나가던 시민의 제보로 쿠데타 정황이 포착되면 경찰, 헌병대, 방첩대 등이 즉각 진압에 나서고, 쿠데타는 당연히 실패로 끝난다. 상기 링크된 장군의 인터뷰에도 나오듯, 서울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교통체증 때문에 민간인에게 대거 노출되기 마련이다. 쿠데타 하겠다고 출발했는데 차가 막혀서 도로위에 멀뚱멀뚱 서있다가 시민들에게 사진찍히고 체포되는 것만큼 웃긴꼴이 또 있을까.

그리고 완전 전산화된 금융 덕도 크다. 국가 간 전쟁이든 내전이든 상관 없이, 전쟁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쿠데타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면 바로 돈의 흐름이 추적되기 때문에, 허가되지 않은 군 작전은 즉시 발각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비밀 자금을 만들고 관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인터넷, IT 기술의 대중화는 쿠데타의 현실성과도 이어질 수 밖에 없는 문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인터넷은 국민들의 생활과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가 없다. 하다못해 푼돈 송금을 하더라도 대부분의 국민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한 스마트뱅킹을 이용하며,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더라도 대부분의 국민은 인터넷을 이용한 IPTV로 시청한다. 동네 구멍가게는 물론이고 온갖 산업, 직종 분야의 예약결제와 같은 작업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한 거래 방식을 이용한다. 사회 생활을 하는 성인은 대부분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생계 문제를 떠나서 인터넷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된지 오래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IT 산업이 가장 발달한 축에 속하고 이는 쿠데타 발생시 인터넷만 끊으면 장땡인 후진국과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쿠데타군이 언론사를 장악하고 인터넷을 검열하기 전에도 쿠데타군의 모습이 SNS, 유튜브로 다 퍼질 수 밖에 없다는 소리다.

만약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쿠데타군은 정보 차단과 시민들의 저항 방지를 위해 반드시 장시간 인터넷을 완전히 차단해야만 한다. 모든 인터넷이 먹통이 되고 일상과 생계가 붕괴된 국민들이 과연 쿠데타 세력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국민적인 저항은 필연적이다. 인터넷이 장시간 차단된다면 시민들의 저항 이전에 경제와 내수부터 붕괴되면서 국가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인터넷이 완전히 차단된다는 것은 상상이상의 엄청난 숫자의 소비와 투자, 금전 거래, 커뮤니케이션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자본의 흐름이 멈추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쿠데타 세력이 민심을 가다듬고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지극히 희박하다.[33]

8.1.3. 교통망 혼잡

앞서 말한 정보 기술의 발전 때문에 쿠데타 기도 세력은 민간인에게 들키지 않고 빠르고 은밀하게 침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든 기습적으로 전차장갑차를 끌고 가고 싶어도 교통 체증 때문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34] 교통 체증을 피하려면 헬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대한민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국회, 대통령 집무실, 정부청사, 대법원, 방송국 등 주요 타겟을 빠르게 점령해 통제권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2020년대의 서울은 밤낮으로 차가 매우 많이 다닌다.[35] 특히 종로, 광화문광장, 여의도, 용산을 어떻게 대규모 군대 진군과 함께 전차장갑차를 끌고 빠르게 간다는 말인가?[36]

2016년 튀르키예에서도 도로 위에서 반군 차량이 민간 차량과 뒤엉켜 진군하지 못했고, 도로를 봉쇄해도 쿠데타군이 진군하는 쪽 도로만 봉쇄하면서 이런 꼴이 났다.(...) 결국 도로 위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2,800여 명의 군인들이 체포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8.1.4. 두터운 부사관단

한국군에서 부사관은 단순히 장교의 하급자가 아니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하급자이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부사관은 장교의 지시, 명령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군 내에서 부사관은 환로宦路도 조직도 다르다. 그리고 각 제대 주임원사는 부대장과 동일한 수준의 부대 내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 명목상 국군 의 직속상관은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지휘관(자)이지만, 이들은 병사와 거리를 둔 채 작전 계획을 짜고 서류 처리만 할 뿐, 실제로 병력을 관리하고 병력을 움직이는 건 주임원사-행정보급관-부소대장으로 이어지는 부사관단이다. 그리고 이들은 장교보다 한 부대에 오래 있는 경우가 많아 부대 내 사정을 꿰고 있고, 수직적인 공문하달 혹은 육사(공사, 해사) 선후배 정도로 제한되는 장교에 비해 인적 네트워크가 촘촘하여 정보 공유가 매우 빠르고 일사불란하기에 장교들이 뭘 해도 오랜 숙련도를 바탕으로 한 병과의 마이스터들이 만든 네트워크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따라서 부대 내에 혹은 군 내에 어떤 이상징후가 발견되면 아무리 함구를 요구해도 전혀 소용이 없으며 재빨리 부사관단을 통해 그 내용이 퍼져나가게 되고 부사관단 전체가 이를 알게 되며 병사들에게도 하달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병사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37], 고급 부사관이 병사들더러 가족 및 지인,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 등 외부에 쿠데타 정보를 발설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 따라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은 부대에도 소식이 새 나가기 마련이고, 쿠데타가 일어나는 부대 또한 고급 부사관들 사이에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다 이야기가 순식간에 끝난 상태일 것이다. 부사관들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 같은 곳까지 쿠데타 정보를 발설하는 식으로 명령에 복종할 경우 멀리는 민간인들에까지 쿠데타 정보가 들어가서 이를 접한 사람이 예비군, 민방위라면 어떻게 해야할지 시민군 조직 등의 사항까지 이야기가 오갈 수 있다. 어학병에게는 외신 등에 쿠데타 정보를 외국어로 발설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질 수 있는데, 여기까지 복종하게 된다면 국제 사회가 분노할 게 뻔하다. 이런 네트워크 탓에 반란군이 사람을 심어봤자 이들의 발을 절대 묶지 못하고 실행 이전에 붙잡힐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전투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준장과 소장 전속부관을 갓 임관한 소위, 중위 대신 장기복무에 선발된 부사관으로 대체하고 있는 추세이다. 신병교육대 중대장도 부사관으로 규정 되어있다. 부관으로 있으면서 장성을 모시면서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접할 경우 일선 부사관단에게 전달되기 쉽다. 원래 그런 목적으로 부사관을 전속부관으로 두는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효과를 본 셈이다.

사관학교 인맥으로 이어지거나 초급장교 뿐인 장교단이야 지휘관의 명령 및 공문 하달로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계절이 가면 항상 교체되는 장교 밑에서 구르고 20~30년을 짬먹은 부사관은 이미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지 아닌지 다 알고, 각자의 숙련된 기술로 행동 매뉴얼마저도 다 꿰고 있다. 이들이 반란군의 명령에 불복하여 군사 행위에 필수인 탄약고 개방과 물자 보급을 거부하면 반란군은 쿠데타에 필수적인 탄약과 물자를 보급할 수 없고, 이들이 병력 통솔을 해주지 않으면 반란군 장성들이 와서 항명이니 명령 불복종이니 윽박질러도 병력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상관의 명령이라도 쿠데타 등의 불법적인 지시 또는 명령에는 저항할 것, 저항할 수 있음이 군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명령불복종, 항명으로 쿠데타를 저지한다면 이후에 불법행위를 저지한 공로로 표창특진을 받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38]

8.1.5. 군인의 위상 변화

과거 대한민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을 즈음에는 군인, 특히 장교의 위상이 지금과는 아주 달랐다. 1950~60년대에 장교라고 하면 사회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초특급 엘리트 계층이자 이른바 가장 많이 '배운' 사람들이었다. 그 시절에는 한국에 지식인 계층이 워낙 적었고 학술 기관도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장교 정도가 되면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엘리트로 대접받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혹은 자연스럽게 군부 정권을 받아들였다. 쉽게 말해 장교의 위상이 지금과는 아주 달랐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때와는 아주 다르다. 오늘날 장교들은 더 이상 특별한 엘리트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도 않고 또 학력의 최상단을 점하고 있지도 않다. 까놓고 말해서 장군이라 해봐야 군복입은 공무원이다. 게다가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지식인이 한국 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국민들이 장교를 엘리트로 우러러 보지도 않는다. 근래에는 사회적인 위상을 얻고 싶다면 연예계로 입문하거나, 판검사가 되거나 정치인이 되려고 하지 군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한들 그 정권에 정당성이나 설득력이 생길 수가 없다. 군인이 이 사회에서 엘리트의 위치를 독점하던 시절은 이미 한참 전에 끝이 났기 때문이다.

8.1.6. 국민장병의 의식 변화

한국에서 쿠데타의 성공이 어려운 가장 중요한 이유로, 국민들이 그런 초헌법적인 만행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1세기 현재는 각종 사건과 정보를 실시간/초고속으로 생산/획득할 수 있는 모바일 정보화시대가 되었으며, 이미 5.16 군사정변12.12 군사반란과 같은 군사 독재와 이에 대한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세계에서도 모범적인 민주화 정착을 이루어낼 정도의[39] 시민의식이 정착된 고로 허무맹랑한 명분으로 국민을 속여먹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시민 중에는 군인, 특히 현역, 예비역 군인도 포함된다. 12.12 쿠데타 당시에는 정보도 없고, 지금에 비해 지능과 학력수준이 낮아 국방부북한군이 침투했으니 진압하러 간다는 말을 정말로 믿었고,5.18 민주화운동 때는 광주에 무장공비가 준동하고 있으니 때려잡으러 간다는 상관들의 말을 당시 공수특전여단 장병 대부분은 정말로 믿고 출동에 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全) 장병의 스마트폰 사용이 허가되어 정보 접근 수준이 매우 높아졌고 간부들에 의한 정보 통제도 불가능하며 오늘날의 현역 기간병 및 초급 간부 대부분은 대한민국 제6공화국 성립 이후 태어난 세대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면 고분고분 말을 들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12.12 군사반란 당시에는 대부분의 육군 수뇌부가 젊을 시기 5.16 군사정변을 경험했고, 그에 동조했던 세력이다. 그렇지 않은 세력은 진작에 진급이 누락되거나 숙청되었다. 쿠데타를 막을 세력도, 일으키는 세력도 20년 전 쿠데타로 집권했으므로 거부감이 낮을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하자, 국회의사당에 투입되었던 특수부대 군인들은 명령대로 국회 진입까지는 하였으나, 내부에서 저지당하자 더 이상 진전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고, 가벼운 물리적 충돌을 제외하면 시민들과도 큰 문제가 없었다.[40] 명령에 따라야 하는 군인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항명을 한 셈.[41]

무엇보다 한국은 군사정권 시절이 1961년부터 1987년(총 26년)까지였다는 걸 감안해 보면 2014년부터는 이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군부 독재 시절보다 민주주의를 누리는 시대가 더 길다.[42]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가치와 권리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먼 과거처럼 쿠데타로 군인들이 불법적으로 권력을 탈취하는 행위를 용납할 리가 없다. 군부 독재 시대에는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낯선 존재였고, 국민들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누린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쿠데타로 인한 권력 탈취에도 그 충격이 덜했지만[43] 요즘은 절대 그럴 수가 없다. 독재에 대한 거부감, 쿠데타에 대한 국민적인 거부감을 생각하면 총칼로 권력을 탈취하려는 자는 내전에 준하는 혼란을 감당해야만 한다. 당장 한국보다 민주화 기간이 훨씬 짧은[44] 동남아 최빈국 미얀마에서조차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져 내전으로까지 번질 정도였는데, 게다가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강국으로 미얀마보다 국제적 입지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클 뿐더러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나라이고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이 한국의 그러한 혼란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아니, 미얀마에서 일어난 쿠데타에도 전세계가 즉각적으로 항의하는 마당에 한국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가만히 둘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다.

예를 들어, 친위 쿠데타 모의 사건인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이 실제로 실행되었다고 해도, 성공했을 가능성은 거의 진리국 건국과 2022년 독일 쿠데타 모의의 성공 가능성과 동급 수준으로 전무했다.[45] 왜 이런 시위가 일어나고 있고, 얼마나 평화적으로 진행되는지 모두가 뻔히 아는 상황에서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져도, 과거와 다른 인식을 가진 장병들이 이런 위법한 명령에 고분고분 따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다. 장병들의 세대 변화를 생각하면 더더욱. 아무리 상관의 명령이라도, 위헌/위법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그 자체로 중대한 범죄가 된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8월 쿠데타에서도 특수부대와 장병들이 쿠데타 군 상부에 항명하고 시민과 합세하기도 했다.

위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서울신문 백무현 만평.[46] 여기서 쿠데타 계획이 휴대전화로 유출될 것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병사 휴대폰 사용이 허용되기 10년도 더 전에도 이러던 판이었는데 스마트폰 사용이 허용된 지금은 어떤 상황일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민주화 극초기이던 노태우 정부 시기 보안사가 모의한 청명계획이등병에게 계획이 털리는 마당이었으니 현재 쿠데타 계획이 얼마나 쉽게 유출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8.1.7.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쿠데타 방지책

박정희, 전두환 같이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여,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때문에 한국에서 여러 쿠데타 방지책들이 마련되었다. 대표적으로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에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했고, 전두환은 자신의 반란 세력에 의해 무기력하게 뚫린 육군특수전사령부를 보고서 사령부를 보호할 목적으로 707특임대를 창설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결정타를 날린 사람은 집권하자마자 15일 만에 전격적으로 하나회를 해체해버린 김영삼이다.

현재 한국에서 쿠데타 방지 업무는 국군방첩사령부가 맡고 있다. 수도권 주위에 배치된 부대의 지휘관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방첩사의 주요 임무 중 하나이다. 대통령이 괜히 자신과 밀접한 연줄이 있는 인물을 방첩사 사령관에 앉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실제로는 쿠데타 방지 업무를 맡은 방첩사와 같은 군내 정보기관이 오히려 쿠데타의 주역이 되는 경우에는 이러한 업무분장을 통해 쿠데타를 막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 역사적으로도 방첩사의 전신인 보안사령부가 12.12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에서도 방첩사의 전신인 당시 기무사령부가 권한을 유월하여[47] 계엄 계획을 임의로 작성 보고했다는 의혹이 있다. 말 그대로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이외에도 문재인 정부 들어서 장병의 휴대폰 소지를 허용한 것도 부수적으로 쿠데타 방지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48] 위에서 언급했듯 외부에 쿠데타 정보를 발설하라는 고급 부사관들의 명령을 받아 가족, 지인 및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 같은 곳에 쿠데타 정보가 새나갈 것이라는 것.[49]

8.2. 종합

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그만큼 현 정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쌓여 군 장병과 장교들, 타 부대는 물론 일반 시민들[50]과 주변국에 이르기까지 무력 개입의 정당성에 대한 폭넓은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51] 한국이 전체적으로 막장이 되지 않는 이상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한국 현대사의 성공한 쿠데타 중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경제와 정치는 물론 사회 전반의 발전 정도가 낮아서 군 장교가 최고 엘리트 그룹이자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직업군 중 하나인 시대였으나, 21세기에는 장교가 독보적이지 않고 과거와 같은 권력을 가지지 못하는 직업군이 된 지 오래되었기에 그 때와 상황이 다시 오긴 쉽지 않다. 5.16 군사정변으로부터 불과 18년 후의 신군부도 계엄령 하에서 일단 군부를 장악한 후 다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완전히 탈취했지, 바로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다.

결정적으로, 2024년 12월 3일 심야에 윤석열 정부가 일으킨 친위 쿠데타도 시민사회의 극렬한 저항과 일선 병력의 국회 돌입 의지 부족, 여당 및 야당의 속전속결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 통과 등으로 실패하며 "현대 대한민국에서 쿠데타의 성공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었다.

9.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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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담

11. 이를 소재로 한 대중매체

워낙에 정치적인 사건인 관계로 여러 의미에서 논란을 일으키기 쉬워서 문화 매체에서는 그다지 즐겨 사용되는 소재는 아니다. 다만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반란쿠데타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는 여럿 있다. 아무튼 정상적인 의미의 쿠데타를 다룬 작품들 중에서 유명한 작품은 명장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조국 그리스의 군사정권을 비판한《Z(1969)》나 칠레피노체트 군사정권의 실상을 고발한 엘비오 소토의《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Il pleut sur Santiago, 1975)》를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군사독재 시기에 쿠데타를 부정적으로 다루는 건 금지됐다. 1967년 한국영화장군의 수염》원작 소설은 쿠데타군을 다룬 것인데, 영화에 나오던 군대는 쿠데타랑 상관도 없는 무슨 남북 전쟁 당시 북군 차림 군대로 잠깐 애니메이션으로 등장해야 했다. 더불어《Z》나《계엄령》같은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들은 20년이나 한국에 개봉 금지됐다. 황미나는 만화에서 이세계를 무대로 했다고 해도 쿠데타군이 악역으로 나온 점으로 연재하던 작품(제목 미상)이 연재 중지되었다. 그나마, 1989년에서야 이런 금지령이 풀리면서《Z》나《계엄령》,《》같은 영화가 차례로 개봉했다.

미국에서의 극우 쿠데타 음모를 다룬 정치 스릴러《5월의 7일간(Seven Days in May, 1964)》은 존 F. 케네디 재임 시기 제작이 진행되었으나 케네디의 암살로 인해 개봉이 연기되기도 하여 유명해진 작품이다.[58] 사실 미군은 민병대 소집법에 의해 연방 의회의 동의 없이 군이 자체적으로 계엄을 선언하거나 치안 유지 활동을 하면 불법이라서 미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기 쉽지 않다.

미국의 군사사가 에드워드 루트웍이 쓴 쿠데타 연구의 고전《쿠데타 입문서(Coup d'État: A Practical Handbook, 1968)》를 원작으로 영화화한 작품《Power Play(1978)》도 한국에서는 김영삼 정부 이후에 공개되었다.

이태행이 90년 초중반에 소년 챔프로 연재한 만화《바이오 솔져 가이》에선 미국 고위 장군 카인이 쿠데타를 일으켜버린다. 근미래사이보그에서 온갖 무인 무기 개발을 해내버린 것을 쿠데타군이 독점해 쿠데타를 벌여 미군을 그야말로 쓸어버리지만 연중을 밥먹듯이 해버리던 이태행답게 갑자기 끝내버려 끝도 허무하게 대충 끝내버렸다.

게임 스플린터 셀: 컨빅션에서는 정체불명의 흑막인 메기도서드 에셜론의 국장인 톰 리드와 루시우스 갈리아드를 조종하여 워싱턴 D.C.EMP로 공격한 다음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를 벌이려다가 샘 피셔에게 저지당한다.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에 주요 스토리 라인 중 하나가 중동 지역에 어느 국가[59]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친서방 성향 대통령이 죽고 2인자였던 칼레드 알아사드가 정권을 잡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군 병력들이 파견된다는 것이다.

배틀필드 4도 배경은 중국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설정으로 이를 둘러싼 미국 vs 중국 vs 러시아의 삼파전을 다루고 있다.

메탈기어 시리즈빅 보스도 일으킨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빅 보스는 쿠데타군형 정치군인이 아닌 자유의지주의를 군사집단에 부여한 것이라 일반적 쿠데타보단 분리독립운동에 가깝다.

블레이즈 유니온에서는 구(舊) 브론키아 제국 황제 솔티에가 쿠데타를 일으켜 친동생 아이크를 시해하고 폭정을 일으켜 주인공 가롯트에게 저지당하는 일대기를 다룬다. 정사 엔딩에선 가롯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모함을 받고[스포일러], 가르카사에게 쿠데타를 당해 유그드라 유니온으로 이어진다. 비정사에서는 판타지니아 왕국이 극우 과격파 '신생교단'에 의해 쿠데타를 당하다가 사병단 그람 블레이즈의 도움으로 저지하는 데에 성공한다.

일본평화헌법이라는 제한 & 문민통제 원칙 때문에 군사조직에 해당하는 자위대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전개가 대표적인 쿠데타 시나리오인데, 1975년부터 연재되었던 부론손이 원작을 쓰고 히라마츠 신지가 그린 경찰 만화 도베르만 형사(ドーベルマン刑事)의 에피소드 중에도 주인공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 경찰이 자위대의 쿠데타 부대를 진압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 등 현실의 일본에서는 여러가지 제약 때문에 있기 힘든 시나리오라 이를 다룬 창작물[61]은 찾기 힘들지만 그래도 자위대의 쿠데타라는 소재 자체는 역사가 좀 되는 편이다.

자위대의 쿠데타를 다루는 작품 중 하나로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2가 있는데, 사실 이건 겉으로만 자위대의 쿠데타일 뿐 사실 자위대로 위장한 어느 조직의 일종의 '테러'에 가까운 행위에 대해 다루는 애니메이션이다.

최대한 현대 일본의 현실을 따져서 창작된 '일본식 쿠데타'가 나오는 작품으로는 시큐리티 폴리스를 소재로 다룬 일본 드라마 "SP(원제: SP 警視庁警備部警護課第四係)" 시리즈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작품의 쿠데타 주도 세력은 일본에서 관료 양성소로 불리는 도쿄대학 법학부(관련 기사) 출신의, 국가 공무원 1종 시험에 합격한 캐리어 공무원들이다.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도 왕정에 반하여 조사병단에 의해 쿠데타가 진행되었고, 히스토리아 레이스가 여왕으로 즉위하여 최종적으론 성공했다.[62] 그 전까지만 해도 한창 작품에 우익 논란이 일었지만 쿠데타 관련 내용 이후에는 별로 그런 구설수는 나오지 않는 편이다.

라이온 킹은 등장인물이 동물로 묘사되었을 뿐이지 스카의 쿠데타를 비중있게 다룬다.

디아블로 이모탈에서 불멸단과 그림자단간의 추방 의례가 있는데, 그림자단이 이기면 불멸단으로부터 불멸단 지위를 뺏아올 수 있다.

블루 아카이브에서는 총학생회 쿠데타 복선이 계속 깔려있다가 결국 2부에서 카야 상대로 일으켜 그녀를 실각시키고 대행 자리에 오른다. 또 붉은겨울 연방학원은 하루가 멀다하고 쿠데타가 일어나 학생회장이 매번 바뀌는 실정이다.

북한 관련 액션, 스릴러, 첩보 창작물에서는 북한 강경파가 온건파를 숙청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우주소전쟁,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우주소전쟁 2021,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아프리카 대모험, 진구의 아프리카 모험: 베코와 5인의 탐험대은 아예 쿠데타를 중요한 소재로 다룬다.

원신에서는 유라 로렌스의 전설임무와 수메르 마신임무에서 비중있게 다뤄진다.

전자는 유라의 숙부 슈베르트 로렌스우인단의 힘을 빌어 몬드를 1,000년 전의 로렌스가 독재정권으로 회귀시키려다가 여행자와 유라의 활약으로 실패한다.

후자의 경우는 여행자를 리더로, 계획에 알하이탐, 사이노, 조력에 닐루를 비롯한 주바이르 극장 단원들, 사막 지역 측에서는 데히야라흐만 휘하 도금 여단이 합류한 나히다 복위 쿠데타로, 수메르 아카데미아가 500년 간 나히다를 감금해 착취하는 걸 구출 및 수메르 아카데미아와 우인단이 합동으로 벌이는 새로운 신 프로젝트를 저지하기 위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이 복위 쿠데타는 성공해 나히다가 수메르의 집정관으로서 복귀해 친정을 하고, 이전 대현자 아자르와 그에게 찬동한 현자들은 종신 유배형을 갔다.

프로스트펑크 2에서는 도시가 혼란에 빠졌을 때,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플레이어가 경비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독재자가 되는 선택지가 있다.

한국에서는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창작물로 드라마 제4공화국 5, 6회, 코리아게이트 4~6회,[63] 제5공화국 4~9회가 있고, 영화는 서울의 봄이 있다.

12. 관련 문서


[1] 1987년 민주화 이후의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일 수 있지만, 중국은 현재까지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중국의 실질적 영도자인 체제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살았던 1910~1940년대 중국 대륙군벌 시대에는 군사력이 곧 권력이었기에, 그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발언이다. 지금도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적 실체보다, 중국공산당중국 인민해방군이 성립 순서도 먼저이고, 권력의 우열 측면에서도 우위이다.[2] 군사 (軍) 일 (事) 정사 (政) 변할 (變)[3] 본래 명칭은 Coup ďÉtat이지만 영어권 등에서는 일반적으로 Coup로 표기된다. 프랑스에서 유래한 어휘이기 때문에 쿠프는 잘못된 발음이며, 영어권에서도 /kuː/(쿠)라고 발음한다. coup은 쿠데타 이외에도 갑작스러운 성공, 이루기 어려운 성취 등을 지칭하는 의미도 있다.[4] 그 이유는 무력을 사용하는 집단이 꼭 군대라는 법칙은 없기 때문이다. 쿠데타가 군사정변으로 주로 번역되는 이유는 그러한 집단이 대부분 군대였기 때문이다. (예: 소련8월 쿠데타) 따라서 사안의 형태에 따라 무장봉기 등으로도 지칭되는 경우도 있다.[5] 이는 유리잔의 종류 또는 자동차 바디 종류 중 하나인 쿠페의 영어식 발음과 혼동된다.[6] 나라(Staat)와 영어의 's와 같은 뜻의 s에 타격(Streich)을 붙인 합성어[7]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이 있다.[8] 미국영국[9] 튀르키예인그리스인유대인아르메니아인[10] 당시 군부에서 박정희를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이한림 대장이 지휘하던 제1야전군에서는 본격적인 출동 준비까지 마쳤으나 끝내 군통수권자의 진압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서 결국 쿠데타를 인정하고 만다.[11] 육군본부의 수뇌부들이 전두환신사협정에 응한 가장 큰 이유는 "남침의 절호의 기회를 맞은 김일성을 눈앞에 두고 서울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벌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상대는 휴전선에 구멍이 나는 것을 알면서도 최전방 예비사단인 9사단을 무단으로 동원한 놈들이며, 또한 쿠데타가 실패하면 내란죄운명은 뻔한 것이므로 반란군들이 신사협정을 지킨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일 것이다. 그야말로 상대를 잘못 봐도 너무 잘못 본 어리석은 선택이었다.[12] 예시로 5.16 쿠데타 당시의 병력은 약 6천 명이었다. 2021년 미얀마 쿠데타 때도 에어로빅 영상 뒤에 지나가던 쿠데타 병력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만 미얀마 쿠데타의 경우는 해당 문서에 적혀있는 것처럼 원래부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가 민간에 넘겨줬던 정권을 다시 빼앗은 것에 가깝고, 군이 정부 소속이 아니라서 진압군 걱정을 할 일이 없기에 쿠데타에 필요한 병력은 윈 민 대통령과 아웅 산 수 치 국가고문, 민주주의민족동맹 소속 국회의원들을 체포할 극소수 인원이면 충분했다.[13] 대표적으로 12.12 사태 당시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함께 끝까지 쿠데타 진압을 주장했던 김진기 육군헌병감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있다. 아예 군인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대에 붙어버리거나 시민군을 훈련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국민에 충성하는 경우다.[14] 대표적인 사례가 이괄의 난인데 한양까지 진격하는 와중에 병력이 이탈하거나 도주하는 바람에 수가 많이 줄어들은 상태였다. 사실 이괄 개인의 원한이 컷던 탓에 반군 세력내에 이괄의 협박 내지 엉겁결에 동참한 이들이 많아서 명분이 없다 여기고 관군에 투항하거나, 관군 측 선전에 넘어간 자들도 있었다.[15] 장포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장태완과 쿠데타 세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두고 설전을 벌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장태완 관점에서는 당연히 불법이지만 쿠데타 세력에게는 쿠데타 명분인지라, 애초에 쿠데타부터가 불법일지언정 정권 장악을 위해선 장태완이 뭐라 해도 풀어줄 수 없었다.[16] 전투부대 포섭도 바쁘고 잘 안 되는데 군수관련 부대를 포섭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는데다 쿠데타군이 아닌 3군 공병부대가 훼방을 놓으면 쿠데타군 소속 군수부대라고 해도 그 발목이 끊긴다.[17] 실제로 5.16 당시 이성호 해군참모총장은 쿠데타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이후 해 · 공군만으로는 쿠데타를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끝에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18] 군단급 정도 되면 예하 부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당연한 일이다.[19] 소련사회에서 여성도 노동자의 한 명으로 노동을 해야 했다.[20] 물론 국왕에게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친위 쿠데타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나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인 까닭에 친위 쿠데타로 분류할 수도 있다. 친위 쿠데타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21] 특히 21세기 민주화 이후로는 경찰의 치안정보 관련 역량도 막강해졌다. 치안정보의 특성상 경찰 산하 정보부서에서 군수뇌부에 대한 세평도 항시 수집할 것이며, 경찰은 과거 치안본부에서 외청인 경찰청으로 격상된 이후로 소위 5대 권력기관 중 하나로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비하여 위상이 높아진 조직 중 하나다. 물론 이는 원래부터 법무부의 외청이었으며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직접수사권을 꽉 쥐고 있던 검찰도 마찬가지지만 경찰은 검찰이 갖지 못한 무장병력을 거느린 기관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22] 중앙정보부김재규대통령암살초유의 사태 때문에 정보부 자체가 보안사의 수사를 받고 있었다. 이후 정보부는 한동안 보안사의 시녀 역할을 하는 반쪽짜리 정보기관이 된다.[23] 심지어 6.29 선언이 나온 뒤에도 친위 쿠데타를 계획하기도 했지만, 실행은 못했다.#[24] 물론 이쪽은 4문단에서 상세히 언급되듯 실현 가능성이 0을 넘어 마이너스였다는 것이 중론이다.[25] 이 사건은 “3시간 천하“라는 조롱을 받으며 사실상 한국에서 쿠데타가 불가능한 이유를 아주 잘 보여주는 예시가 되어버렸다.[26] 정치세력, 재벌, 종교세력 등, 최초의 근대적 쿠데타인 나폴레옹의 쿠데타부터 애초에 시에예스가 나폴레옹에 협조를 요청했기 때문에 일어났다.[27] 스페인 내전은 좌파가 집권하고 스페인의 법질서를 유린하여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되던 와중 몰라를 위시한 소수 장교들과 팔랑헤가 기획했고 여기에 프랑코를 포함한 다른 군인들이나 카를로스파나 왕당파, CEDA 등 지켜보던 다른 우익과 중도가 가담했다.[28]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도 쿠데타군이 수도 네피도의 모든 인터넷과 전화망을 차단시켰다.[29] 그 후에도 하나회 노태우계의 청명계획, 알자회의 계엄령 문건 사건까지 있었으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쿠데타와는 정반대 의도를 가지고 군인노조를 창설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30] 공군을 언급하는 이유는 수방사와 더불어 대통령의 명령에 바로 움직이는것이 가능한 전력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평도포격전때도 당시 대통령의 명령으로 F-15K가 보복을 위해 출격하자 미공군이 F-16을 긴급출격하여 이를 막은 실제사례도 있다.[31] 거기다 인구 절벽으로 국군의 가용 병력이 부족해진 탓에 무인화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고 글로벌 호크와 피스아이 등 감시자원도 점점 확충되고 있다.[32] 물론 한국은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중에도 두 번의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이는 냉전기라서 미국이 적당히 묵인하여 가능했던것이다.[33] 2011년 농협 전산 사고 때 온라인 거래를 비롯한 각종 서비스가 3일간 중단되자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다시피 했다. 또 2022년도 SK C&C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인터넷 서비스 장애 사건으로 카카오톡을 포함한 모든 카카오의 거의 모든 서비스가 다운되었으며, 해당 IDC를 사용하는 서비스들이 먹통이 되어버려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었다. 2022년 10월 15일 서비스 장애가 발생하고 20일 완전히 복구되기까지 5일 정도 걸렸다. 공기업도 아니고, 인터넷 전체가 아닌 농협 은행, 카카오톡만 먹통이 되어버려도 이런 난리가 나는데 인터넷이 차단되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34] 알보병으로 가려고 하면 진군 속도가 너무 느려서 거의 불가능하며, 더 강력한 무기를 끌고 올 진압군으로부터 너무 취약해진다. 그리고 반란에 필요한 장비를 다 보병으로 대체하려면 당연히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해지는데, 오늘날에 이 정도의 대규모 부대면 당연히 민간인에게 사진 찍히고 다 들킨다. 따라서 차량은 반드시 필요하다.[35] 새벽에도 교통 체증이 있을 정도이다.[36] 군대가 민간 차량을 깔아뭉개고 갈 수도 없다. 군부가 시민을 학살해서 민심을 완전히 잃게 되면 쿠데타는 반드시 실패하기 때문이다.[37] 문재인 정부가 장병들의 휴대폰 소지를 허용한 건 겉으로는 장병 복지를 위해서라지만 쿠데타 방지라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38] 만에하나 이 과정에서 사망한 경우에는 반란을 저지하다 사망한 것으로 되어 전사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으며, 현충원 안장 등 여러 특전이 주어진다. 실제로 12.12 때 김오랑 중령 등이 전사자로 인정받았다.[39] 2020년 기준 이코노미스트 정보분석기구에서 발표한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8.01로, '완전한 민주주의'에 해당한다. 세계의 자유 지수 역시 노태우 정부~문민정부 시절부터 빠짐없이 아시아 최상위권이었다.[40] 해당 특수부대는 마음만 먹으면 현장 시민들을 전부 무력진압하고 국회의사당도 장악할 수 있는 최정예 병력이다.[41] 물론 위법한 명령을 따를 경우 그 개인도 법적 책임을 진다는 판례가 있으나, 군대의 상명하복의 현실을 생각하면 지휘부만 법적 책임을 지고 개개인은 책임이 조각될 가능성이 높다.[42] 다만 이것은 군부독재에 한한 것이다. 문민 독재정권 시절인 이승만 정권(1948~1960)까지 합치면 한국 현대사에서 독재정권 시절보다 민주주의를 누리는 시대가 더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는 2026년이다.[43] 1988년 이전 유일한 민주정권이던 장면 내각은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혼란스러운 시대라는 인식이 강해 그렇게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다.[44] 민주화되었던 기간이 2015~2021년까지 단 6년밖에 되지 않았다.[45] 빈말이 아닌 게 당장 2017년으로부터 36년 전인 1981년 스페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7시간도 안 되어 완전히 진압당한 바가 있다. 당시 스페인은 민주화가 된 지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았던 만큼 군부독재의 잔당들이 여전히 현역이었는데도 이런 결말을 맞이했던 것이다. 실제로 쿠데타를 일으킨 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가 쿠데타 가담을 거부했다.[46] 이 만평이 개재된 2006년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47] 계엄계획을 담당하는 부서는 합참 산하 계엄과이지 기무사가 아니다.[48] 기무사 계엄령 폭로로부터 얼마 안 가 휴대폰 사용이 허용되었다. 다만 문재인은 과거부터 군 장병의 휴대전화 사용을 공약해왔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49] 군대 내에서 윗선에 알리려고 했다간 자칫 그 알리려는 윗선이 쿠데타 동조자라면 말짱 꽝이나 주변 사람이나 군대의 일이 관심 많은 곳에 알리면 그만큼 여론이 환기되고 그 자체만으로도 쿠데타가 어렵게 된다.[50] 실제로 5.16 쿠데타 때는 윤보선-장면 내각이 꽤나 국정운영을 못하던 상황이었기에 일부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고 이를 토대로 2여년 동안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열 수 있었다.[51]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정도의 지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쿠데타를 일으킬 필요도 없이 적법한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가져와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킬 이유가 없다. 물론 국민들의 오판으로,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마자 제1당이 개헌을 통해 나라를 꾸준히 망가뜨리게 된다면 그 땐, 무력 개입밖에 방법이 안 나온다.[52] 이건 정권 장악까지 걸린 시간이 6개월이라는 것이지 실제로 쿠데타가 6개월이 걸렸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12.12 사태 당시 군부의 장악에 걸린 시간은 불과 10시간 정도였다. 12.12 사태의 결과는 군부의 장악에만 제한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5.17 내란을 또 일으켜야 했다.[53]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는 쿠데타군 팔에 혁명군이라는 검은글씨가 쓰여진 하얀완장을 메개 하였다.[54] 여수·순천 10.19 사건 때 진압군의 방탄모에 하얀띠를 두르게 하였다.[55] 지금 보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1970,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에 대한 공포심은 어느 정도는 정부에서 부채질했던 것을 감안해도 현재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휴전선 일대에서는 크고 작은 교전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일부 학자들은 한국 전쟁의 연장선인 DMZ 분쟁으로 묶어서 취급할 정도다. 당연히 그만큼 특전사의 대간첩작전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감안하면 저런 반응은 그리 이상한게 아니다. 평화의 댐 같은 사기극이 먹혀들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56] 12.12 군사반란은 좀 특수한 사례다. 군부 쿠데타를 막아야 하는 기관이 오히려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상황이기 때문이다.[57] 고문 혹은 가혹행위, 포로 학대, 민간인 학살 등이 있다.[58] 실제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에 대한 선제 공격 및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군 상층부와 계속 대립했다. 쿠바 핵 위기 당시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고, 군부가 대통령의 지시없이 핵실험을 무단 실시해서 소련과의 대결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하였다. 커티스 르메이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는 내용의 대체역사물도 있을 정도였다.[59] 인게임 상에 나오는 지도를 통해 예측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로 보인다.[스포일러] 가롯트는 가명. 가르카사가 진명.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모함을 받고 진명을 모르다가 알게 된 이후 선량한 성격이 180도 변모하여 냉혹한 패권주의 황제로서 솔티에에게 쿠데타를 성공시킨다.[61]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들, 세이기노 히로, 솔저 블루 등이 있다.[62] 이 내용은 무슨 탓인지 애니메이션 3기 1쿨에서는 각색되었다.[63] 제4공화국과 코리아게이트는 1995년 가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방송되었으나 방송 시간이 달랐기 때문에 당시 시청자는 같은 내용을 다른 배우들의 연기로 마치 복습을 하듯 두 번 본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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