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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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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랑
金五郞 | Kim Oh-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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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44년 4월 5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남역리[1]
사망 1979년 12월 13일 (향년 35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거여동 육군특수전사령부 공관[2]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9묘역-2923호
본관 김해 김씨
부모 아버지 김종수, 어머니 임순이[3]
형제 4남 1녀 중 4남
형 김태랑
배우자 백영옥 (1948년 11월 27일 ~ 1991년 6월 28일)
친척 조카 김영진
학력 김해삼성국민학교 (졸업)
김해중학교 (졸업 / 10회)
김해농업고등학교 (졸업 / 34회)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공병학교 (졸업)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4]
1969년 ~ 1979년
임관 육군사관학교 (25기)
최종 계급 중령 (대한민국 육군)[5]
최종 보직 육군특수전사령부 비서실장
주요 보직 육군특수전사령관 전속부관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
병과 보병
상훈 보국훈장 삼일장
참전 베트남 전쟁

1. 개요2. 생애
2.1. 12.12 이전2.2. 12.12 당시2.3. 순국 후
3. 추모 사업4.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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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1944년 김해에서 태어나 김해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 육사 25기로 임관하였다. 맹호부대 소속 지휘관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 한 뒤 귀국 후 특전사로 보직을 받아 활동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반란군으로부터 지키다 교전 중 전사했다.

1990년 1계급 특진해 중령에 추서되었고, 2014년 보국훈장 삼일장에 추서되었다.

2. 생애

2.1. 12.12 이전

1944년 4월 5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남역리(現 김해시 삼정동) 119번지에서 아버지 김종수와 어머니 임순이 사이에서 4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6] 1957년 김해 소재 삼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또래보다 1년 늦게 김해중학교(10회)에 입학했으며 김해중학교를 졸업하고 김해농업고등학교[7]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부산대학교 공과대학합격했으나 학비 문제로 인해 등록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65년에야 육군사관학교(25기)에 입교했다. 육사 동기로는 강창희국회의장, 남재준국가정보원장, 황진하국회의원 등이 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69년에 보병 소위로 임관해 제2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첫 부임하게 되었다. 중위 진급 후 1970년 7월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파병을 다녀왔고 이듬해인 1971년 10월에 귀국했다. 1972년에는 육군3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충남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 교관에 부임했고 1974년에는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맡음으로써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작전장교, 정보장교, 사령관 전속부관 등 여러 보직을 거치면서 3년 8개월 동안 특전사에 몸담았다가 육군대학 과정에 입교했고 육군대학 졸업 후에는 소령으로 진급해 특전사로 원대복귀했다.

장교들이 특전사로 오래 복무하다가 육군대학을 마치면 통상 진급이 유리한 야전부대나 후방 지역에서 본인이 원하는 편한 보직을 맡을 수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굳이 특전사로 복귀한 것은 아내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에게 심각한 시력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치료가 용이한 서울 인근에 계속 머물고자 했다. 특전사 복귀 후 제5공수특전여단 부대대장으로 발령받았으나 불과 한 달 만인 1979년 3월에 특수전사령부 행정장교로 발령받아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비서실장으로 차출되었다.

자력을 보면 엘리트 장교였음을 알 수 있다. 3사, 학군단 교관 보직이나 당시 주요 부대였던 특전사의 참모처 보직 모두 좋은 자리이고 특히 사령관 전속부관과 비서실장을 맡아 사령관을 지근거리에서 2차례나 수행했는데 이는 당연히 군내에서 인정받는 장교였음을 방증한다. 어느 조직이나 고위직 수행원은 아무나 시키지 않고 현재도 전속부관/비서실장은 엘리트 장교의 상징이다.[8]

2.2. 12.12 당시

12.12 군사반란의 성패는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와 육군특수전사령부를 조기에 제압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는데 당시 수도권에 주둔했던 부대 중에서 쿠데타에 대처 가능한 부대는 수경사와 특전사였기 때문이다.[9] 이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지시로 제3공수특전여단이 정병주 특전사령관 제압을 포함한 지휘부 무력화를 위해 동원되었다. 이날 저녁, 김오랑 소령은 아내 백영옥에게 ‘오늘 저녁도 못 들어갈 것 같아. 미안해.’라는 마지막 전화를 남겼고 백영옥은 남편이 마지막으로 한 ‘미안해’라는 말이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고 한다.

12월 13일 새벽 제3공수특전여단장최세창 준장이 특전사령관실을 방문하여 마지막으로 정병주 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최세창 여단장은 곧 박종규 중령 부대병력을 동원해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고 했다. 당시엔 이미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1공수에게 점령당하는 등 진압군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고, 특전사에 있는 대부분의 군인들이 신군부의 회유에 넘어간 상태였지만[10]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한 후 혼자서 권총을 장전하고[11] 사령관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약 10분 뒤 평소 친분이 깊던 박종규 중령의 반란 특전사 부대가 사령관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김오랑 소령은 교전 중[12] 반란군에게 가슴과 배 등에 6발의 흉탄을 맞고 현장에서 전사했다.

시신은 사건 발생 직후 특전사령부[13] 뒷산에 가매장되었으나 사건 다음날인 12월 13일 후임 특전사령관으로 부임한 정호용의 지시로 부대장이 거행되고 국립서울현충원 유골 안치소로 옮겨졌다. 당시 특전사령부 보안반장이었던 김충립의 증언#에 의하면 당초 반란을 주도한 보안사령부 측에서는 시신을 조용히 가족에게 인계하고 더 이상의 예우(부대장 또는 국립묘지 안장)는 절대 하지 말도록 지시#했다고 하지만 대구의 제50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있던 바람에 군사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신임 특전사령관 정호용은 총격전의 전말을 보고 받은 뒤 "부대 내에서 부하가 상관을 체포하기 위해 총격전을 벌인 것은 잘못된 일이고, 김오랑은 목숨을 바쳐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훌륭한 군인이며 부당하게 피살당했기에 부대장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고 한다.[14] 이를 전해 듣고 당시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이었던 허삼수 등은 격노했으나 정호용은 전두환노태우와 절친한 육군사관학교-하나회 동기였기 때문에 끝내 그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었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보안사 소속의 쓰리 허라지만 상대는 6기수나 위인 하나회 선배였고 대령 주제에 소장을 이길 순 없었기 때문이다.[15] 김오랑의 시신은 사건으로부터 3개월이 지난 1980년 2월 28일에서야 정식으로 국립서울현충원 제29묘역에 안장되었다.

2.3. 순국 후

김오랑 중령의 양친은 막내아들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아 홧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아내인 백영옥(白榮玉)[16]은 김오랑 중령의 사망 당시,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다니다가 김오랑을 의무실로 호송한 당번병을 찾았다. 그 역시 상관들에 의해 함구령을 받은 상태였으나, 설득 끝에 친하게 지낸 이웃인 박종규 중령이 저지른 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전화로 왜 그랬냐고 원망하듯 따지자 박종규 중령은 "난 군인이니까 명령대로 한 거요!"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 백영옥이 "군인이 반란 일으키라는 걸 명령대로 하나 보죠?"라며 일갈하자 반론하지 못하고 끊어 버렸다고 한다. 백영옥은 지병으로 시력약화증을 앓고 있었는데, 이때 받은 충격으로 두 눈을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다.

1986년 한 여성지에서 백영옥을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이후 매달 30만원씩 나오는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17] 백영옥은 맹인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던데다가, 군인아파트에서도 쫓겨나는 바람에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복지시설에서 전화 상담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김오랑-백영옥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백영옥의 건강 문제로 인해 자녀 계획 자체를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백영옥이 거둔 수양딸 두 명이 있었다.

백영옥은 1990년 12월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고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다.[18]

이후 2023년 12월 5일 영화 《서울의 봄》을 감상한 문재인 前 대통령[19]의 회고에 따르면 한겨레 부산주재기자 이수윤의 권유로 백영옥이 손배소에 대한 법률적 자문을 의뢰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소송 논란이 지나간 후, 1991년 6월 28일 자신이 운영하던 부산 불교 자비원 마당에서[20]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실족사로 수사가 마무리되었으나 백영옥의 유족들은 의문을 제기했는데, 떨어진 난간의 높이가 고작 사람의 허리 정도인데, 어떻게 거기서 실족해 떨어졌냐는 것이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자살로 발표했으나,[21] 유족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자 경찰에서 슬쩍 실족사로 수정한 것이다.[22]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였음에도 남편과 합장되지 못했다. 백영옥은 사후 친정 오빠들에 의해 수습되고 화장 처리되어 1991년 11월 15일 친정오빠였던 백영도가 부산영락공원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를 신청하여 20년 가까이 무연고자로 방치되어 있다가 2008년 3월 31일 개장되면서 무연고자들과 합동으로 산골되었다고 한다.

김오랑을 사살한 박종규 중령은 김오랑 중령과 가까운 선후배 사이였다는게 밝혀지면서 더욱 충격을 주었다. 두 사람은 관사에서도 위아래층에 살던 이웃이었고, 12.12 군사반란이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부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이후 박종규는 소장 계급까지 진급하였으나, 문민정부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예편되었고, 군사반란 가담 혐의로 군인연금도 박탈되어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다가 2010년 12월 7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6세. 뒤늦게나마 참회했는지 죽기 1년 전인 2009년 12월 9일 참군인 김오랑기념사업회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지금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하늘의 벌이라면서 12.12에 참여했던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남재준국정원장이 그와 육사 동기였다. 물론 강경보수 성향으로 이후 범죄까지 저질러 처벌받은 그였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그도 김오랑의 편인지 시간이 지나서도 친구의 무덤에 찾아가서 울분을 토했던 걸 보면 서로 꽤나 친했던 모양이다. 이 사건이 당시 남재준은 소령 계급으로 육군대학 교관을 맡고 있었고, 친구가 사망한 직후 강의 도중 군의 정치 개입을 강력히 성토했을 뿐만 아니라, 상기했듯 김오랑의 무덤을 찾아가 울분을 터뜨렸다고 한다. 덕분에 육군 내부의 청년장교들 중 전두환 반대파로 단단히 찍혔다고 한다. # 남재준의 전두환에 대한 증오는 나이를 먹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남재준은 국정원장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전두환의 은닉재산을 추적하였고, 모은 정보를 검찰에 넘겼다. 이 때문에 전두환은 끝내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았지만, 대신 그의 차남을 노역 신세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23]

2022년 대한민국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김오랑 중령의 사망을 순직이 아닌 전사로 판정하였다. 김오랑 중령은 적 교전-무장 반란 등을 방지하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전의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되었다. 그의 죽음 직전을 전투로 인정하는 노력이 무려 42년 만에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3. 추모 사업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수십년이나 지났지만 김오랑 중령을 비롯하여 반란군에 대항하다 사망한 장병들에 대한 추모사업은 신군부의 핵심 장본인들을 반란수괴로 단죄한 뒤에도 진행이 지지부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전반기 국회의장직을 맡게 된 강창희 의원은 김오랑 중령과는 육사 동기지만 하나회 출신이라 특별법 상정을 꺼린다는 카더라가 돌 정도다.

2009년 고 김오랑 중령 추모사업회는 "지난 11월 11일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건의안'을 여야 국회의원 48명이 공동 발의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고인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국회의원들은[24] 단 한 명도 이 법안에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4월 22일에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고(故)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과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법', 군사반란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안 2건을 심의 및 의결하면서 추모사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들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서훈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김오랑 중령에게 "무공" 훈장이 적절한지에 대한 여부와 추모비를 "육사" 내에 세우는 안에 대한 호오가 갈렸다.[25]

송영근 의원은 "12·12는 법원 판결로 군사반란으로 규정이 돼 있다. 국방부에서 이와 같은 사람의 공적을 기려줘야 앞으로 상무정신이 살아나고, 진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인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반면 김종태 의원은 "여기 예비역, 현역군도 반역군의 후배다. 그 당시 임무 수행에서 김관진 장관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며 "안보 상황이 위태로운 이 시기에 군을 분열시키는 논란은 중지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김종태 의원과 김성찬 의원도 굉장히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김관진조차 "상관 신변을 보호하고 경호를 하는 것은 부관으로서의 임무이고 또 그분(김오랑)의 정신이나 행위를 높이 평가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거나 적접 지역에서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인지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사실상 반대 의사를 밝혔고 육사도 "검토 중"이란 말을 반복했다. 결국 무공훈장 대신 보국훈장으로 수정하여 통과되었다.[26] 그리고 해가 바뀌어 2014년 1월 14일 국무회의에서 김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는 안을 통과시켰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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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랑 중령의 형인 김태랑(왼쪽)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전수하는 전인범 특전사령관

2014년 4월 1일 특전사령부 연병장에서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전수식이 열렸다. 특전사는 김오랑 중령의 가족에게 최고의 예를 갖춘 공식 부대 행사로 훈장을 전수했다.국방일보 기사[28]

이때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이 훈장 수여를 추진한 유승민 당시 국회 국방위원장과 민홍철 의원은 이후 보답으로 김오랑의 유가족에게 감사패를 받았다.[29] 여담으로 유족에게 감사패를 받은 유승민 전 의원은 12.12 군사반란 당시 하나회 소속 김진영 대령이 단장으로 재임하던 제33경비단 소속[30] 일병으로 사병 복무 중이었다. 본인의 자서전이자 회고록인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와 '야수의 본능으로 부딪쳐라'에도 관련 일화가 언급되어 있는데 당시 부대에는 비상이 걸려 완전 무장 상태로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상황이었고 이후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체포되어 상황이 종료되었으며 그 밤이 지나고 다음날 수경사 연병장에서 노태우 신임 사령관의 취임식이 열렸다고 한다.

2014년 6월 7일 김해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고인의 모교인 김해 삼성초등학교 앞 (삼정중학교 사이) 공원에 고인을 추모하는 흉상을 세웠다.# 추모비 뒤에는 "12월 12일 사태 때 상관을 지키고 군과 국가의 체제 수호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맹렬히 대항. 정의를 수호하다 장렬히 순직[31]…"이라고 적혀 있다. 육사 내 흉상이나 추모비는 결국 2023년에도 세워지지 않고 지지부진하며 추모비 건립을 위한 1인 시위에 나서기도 했던 김준철 사무처장에 따르면 국방부가 회의적이라고 한다. 2022년에는 정선엽 병장이 사망한 육군본부 지하벙커에 김 중령과 정 병장, 박윤관 일병 등 12.12 희생자 3명과 관련된 조형물을 하나 세워 달라고 용산 대통령실에 문서로 요청한 적이 있지만 이 역시 답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4. 미디어

사령관과 제9공수를 제외하면 하나회의 온상지 그 자체였던 특수전사령부에서 유일하게 사령관을 지키다 사망한 이력이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눈에 띄어 꾸준히 창작물속에 등장하게 되었다. 김오랑은 경남 김해 출신이지만 딱히 말투에 대해 언급된 적은 없어서인지 재현 다큐멘터리나 상업예술 작품에서는 으레 영남 방언 억양이 전혀 없는 표준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만 김오랑의 형과 조카를 비롯한 가족들은 전형적인 영남 사투리를 사용한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김오랑 또한 생전에 영남 방언을 사용했거나, 못해도 억양이 강하게 남은 표준어를 구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1]경상남도 김해시 삼정동 119번지 #[2]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3] 아들의 죽음에 치매에 시달리다 1981년 별세했다.[4] 군번 19536[5] 1990년, 사후 특진 추서된 계급으로 전사 당시의 계급은 소령이었다.[6] 다소 특이해 보이는 오랑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되는데, 일본에서 5남에게 주로 붙여주던 고로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오랑이기 때문. 그렇다고 친일파 같은 것과는 관련없고 당시에는 흔하던 일이었다.[7] 現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34회[8] 다만 전속부관은 지금은 소위, 중위들을 부대에 적응시킨다는 명목으로 소대장으로 활용하고 대신 짬 있는 중/고급 부사관이 맡는 경우도 있는데 부사관이 전속부관을 하는 경우에도 부관이 되기 전 우수한 성적으로 장기복무에 선발되었으며 그 후에도 근무평정이 우수한 엘리트 부사관이라는 것이다.[9] 수도권에 있는 특전사 부대 4개 여단 중 3개 여단(제1공수특전여단, 제3공수특전여단, 제5공수특전여단)이 하나회 소속이었으며 여단장들은 12일 저녁부터 제30경비단에 와서 앉아 있었다. 수경사는 특성상 서울을 방위하지만 기본적인 편성 자체에서 주요병력이 청와대 경비를 위한 제30경비단과 제33경비단이었는데, 이들은 하나회 소속이었다. 이외에 그나마 병력이 있는 것이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수도경비사령부 제10방공포병단이었지만 특성상 제10방공포병단은 대공방어를 위한 곳이니 필요가 없었고 헌병단은 하나회 출신들이 아니었음에도 전두환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다만 부평의 제9공수특전여단과 수도권 인근 사단들(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26기계화보병사단 등)을 필요시 충정부대라는 명목으로 수경사 예하에 둘 수 있어서 위협이기는 하였다.[10] 5공화국에선 몇몇 남아있으나 3공수여단이 진격해오자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기에 바쁜 식으로 묘사되고, 서울의 봄에선 정병주의 지시로 다시 돌아온 김오랑만 제외하고 밖으로 나가 무장해제된다.[11] 이때 김오랑 소령이 가진 무기는 총알 7발이 들어있는 권총 1자루에 불과했다.[12] 상황이 끝난 뒤 반란군의 M16 3정이 총을 맞아 찌그러진 채 발견되었다.[13] 당시 특전사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에 위치했다.[14] 아울러 정호용은 부임 후 주재한 첫 여단장 회의에서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에게 부대 안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김오랑을 희생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주의를 줬다고 한다. 정호용의 입장에서도 남의 일 같지 않은 게, 자기가 저 자리에 있었을 때 '나를 지켜 줄 부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군사반란으로 반란군, 진압군이 갈려 뒤숭숭한 특전사 내부 분위기를 수습하기도 해야 했다.[15] 대신 허삼수 등은 정호용에게 사건 경위를 이실직고한 김충립에게 "분란을 일으킨 자"라고 화풀이를 하여 김충립은 1980년 10월 강제 전역을 했다고 한다.[16] 1948년 생. 평안도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이주한 뒤 부산 봉래초등학교-경남여중-경남여고-부산대학교 간호학과를 나와 1973년 김 중령과 결혼했다.[17] 당시 기준으론 기업 사원 월급 정도는 되는 규모였다고 하며 부친도 도움을 준 모양이다.[18] 당시가 노태우 정부 시절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19] 실제로 문 전 대통령은 5.17 내란 당시 불법 체포되어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 자격이 있으나 받지 않았다.[20]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위치한 인 미룡사도 거론되는데, 자비원이 미룡사에 위치한 것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21] 김오랑 소령의 조카 김영진도 2023년 YTN라디오에 출연해 "(백씨가) 다른 질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며칠 후 독일에 가서 눈 수술을 하기로 했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22] 사실 1988년 10월에도 김오랑 중령의 상관이었던 정병주 소장이 12.12 진상조사 및 김오랑 중령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와중에 갑자기 실종된 후 130여일이 지난 1989년 3월 변사체로 발견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생전 정병주 소장은 백영옥 여사도 만나 위로하면서 남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하는데 그가 사망하면서 백영옥이 나선 건데 이 사람도 또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23] 남재준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이었지만, 박근혜전두환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24] 권경석, 김성회, 김장수, 박상돈, 서종표. 이진삼, 황진하. 특히 특히 권경석, 서종표, 황진하는 김오랑 중령과 동기이기도 하며. 그 중에서 서종표는 12.12 군사반란 당시 장태완 소장이 사령관으로 있던 수도경비사령부의 야포단 소속으로 반란 진압군측에 속했음에도 여기선 슬쩍 빠졌다.[25] 2023년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과도 엮이는 일이지만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육사 내 기념물조차 이중잣대가 작용한다. 단적인 예로 정작 원조 쿠데타 군인이자 남조선로동당 부역자인 박정희 휘호를 새긴 이른바 호국비는 지금도 육사에 버젓이 있다. 호오를 따질거 면 아예 전부 다 없애는 게 논리적이다.[26] 무공훈장은 '전투에 참가해 무공을 세운 자'를 대상으로 하며 보국훈장은 '전투 이외의 공적으로 국가안보에 기여한 자'를 대상으로 수여한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김오랑 중령과 반란군의 전투를 전투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27] 보국훈장은 총 5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위에서부터 보국훈장 통일장-국선장-천수장-삼일장-광복장. 참고로 서훈자가 국가에 바친 공헌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가장 높은 통일장은 대장, 두 번째 국선장은 중장, 세 번째 천수장은 소장과 준장 및 군무원 1급, 네 번째 삼일장은 영관급과 군무원 2~4급, 가장 낮은 광복장은 위관급 장교와 병, 부사관들 전용인 식으로 공헌과 상관없이 단순히 계급에 따라 등급이 미리 정해져 있다. 김 중령이 4등급인 삼일장인 이유는 고인의 공헌과 상관없이 그저 계급이 중령이라서다.[28] 그러나 이 전수식을 다룬 국방일보 기사는 김오랑 중령의 살신성인 정신을 칭송하면서도 김 중령이 누구에 대항해서 그 살신성인 정신을 발휘하다가 전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슬그머니 넘어가고 말았다.[29] 파일:김오랑유승민.jpg
유승민 의원이 받은 감사패.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하던 2023년 12월 CBS '한판승부'에도 김오랑기념사업회 김준철(특전사 예비역 대위) 사무처장이 나와 유승민 전 의원을 언급하며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서울의 봄'을 총 3번 봤는데 3번째 볼 땐 유승민 전 의원과 같이 봤다고 한다. 해당 영상 약 5분경부터.
[30] 군 공식 지휘 체계상 12.12 당시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직속 부대였으나 하나회 출신 김진영이 상관을 배신하고 반란군에 가담했다.[31] 상기되어있듯이 2022년 국방부에서 순직이 아닌 전사로 공식 판정하여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