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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08 22:14:30

김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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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랑(金五郞)
1944년 ~ 1979년
복무대한민국 육군
기간1969년 ~ 1979년
임관육군사관학교 25기
최종계급중령[1]
최종보직특전사령관 비서실장
1. 소개2. 12.12 이전의 이력3. 12.12 당시의 상황4. 순국 후의 이야기들5. 추모6. 미디어 매체에서7. 관련 문서

1. 소개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 특수전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소장비서실장.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려던 신군부 측 무장 병력에 홀로 맞서다가 박종규에게 피살당했다. 사망 당시의 계급은 소령. 사후 1990년에 중령으로 추서되었다.

2. 12.12 이전의 이력

경상남도 김해군 태생.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김해농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1965년 육사에 입교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25기) 1969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남재준이 그와 육군사관학교 동기. 그의 첫 병과는 보병이었다.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파병을 다녀온 후 1974년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맡음으로써 특전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여러 보직을 거치며 44개월 동안 특전사에 몸담았다가 육군대학과정에 입교한 뒤, 육군대학 졸업 후 특전사로 원대복귀했다.

사실 장교들이 특전사로 오래 복무하다가 육군대학을 마치면 통상 후방 지역에서 본인이 원하는 편한 보직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특전사로 복귀한 것은 아내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심각한 시력장애를 앓았기 때문에 그나마 치료가 용이한 수도권에 계속 머물고자 했던 것이다. 특전사 복귀 후 제5공수특전여단 부대대장으로 발령 받았으나 불과 한 달 만인 1979년 3월에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차출되었다.

3. 12.12 당시의 상황

12.12 군사반란의 성패는 수경사특전사를 조기에 제압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당시 수도권에 주둔했던 부대 중에서 쿠데타에 대처 가능한 부대는 수경사와 특전사였기 때문이다. 이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지시로 제3공수특전여단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를 담당한다.

12월 13일 새벽, 제3공수특전여단장최세창 준장이 특전사령관실을 방문하여 마지막으로 정병주 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최세창 준장이 돌아간 지 10여 분 뒤 제3공수특전여단 제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 이끄는 체포조가 특전사령관실로 진입했는데, 이는 특전사령관이 근무하는 사령부 건물이 바로 3공수특전여단의 영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오랑 소령만이 정병주 장군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장교들, 심지어 자신이 모시는 장군과 제독을 목숨바쳐 지켜야 할 전속부관이 포함된 대부분의 장교들이 신군부 측에 회유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김오랑 소령에게도 신군부 측의 회유가 들어오기는 했다. 그러나 김오랑 소령은 이를 거절하고 상관을 호위하기로 결심하였다. '한겨레 포커스' 관련영상 체포조가 투입될 당시 김오랑 소령이 가진 무기는 8발이 들어있는 권총 한 자루에 불과했다. 결국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에게 6발의 흉탄을 맞고 현장에서 전사했다. 시신은 암매장되었으나 동료 장교들의 항의로 3개월 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에 따르면 당시 보안사에서 김오랑의 장례식을 가족장으로 치르도록 지시했으나,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부대장으로 치르고 현충원으로 이장시켜 주었다고 한다. 정호용 장군이 쿠데타 주역은 아니지만 전두환의 측근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꽤 의외의 일. 정호용 장군이 특전사령관 부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김오랑 비서실장의 빈소를 차린 일이었다는 말도 있다. 아무래도 뒤숭숭한 특전사 내부 분위기를 수습하고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함이거나 혹은 정호용 장군 개인의 양심 문제였을 수도 있다.

4. 순국 후의 이야기들

김오랑 소령의 양친은 막내아들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홧병으로 사망했다. 김오랑의 부인인 백영옥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 실명했다. 체포조를 지휘했던 박종규 중령과 김오랑 소령은 가까운 선후배라서 충격은 더했다. 두 사람은 쿠데타가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에도 부부 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훗날 백영옥이 박종규에게 전화로 왜 그랬냐고 원망하듯 따지자. 박종규 중령은 "난 군인이니까 명령대로 한 거요!"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 백영옥이 "군인이 반란 일으키라는 걸 명령대로 하나 보죠?" 라며 일갈하자 반론하지 못하고 끊어버렸다고 한다.

1986년 한 여성지에서 백영옥을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매달 30만원씩 나오는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2] 김오랑-백영옥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백영옥의 건강문제로 인해, 자녀 계획 자체를 미루고 있었기 때문.

백영옥은 1990년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으며, 1991년 6월 28일 자신이 운영하던 부산 자비원 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실족사로 수사가 마무리되었으나 백영옥의 유족들은 의문을 제기했다.[3] 그나마도 처음에는 자살로 발표했으나 유족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실족사로 수정한 것이다.[4] 또한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였건만, 괴상망측한 까닭에 걸려서 남편과 합장되지 못했다. 백영옥은 사후 친정 오빠들에 의하여 수습되고 화장처리되어 1991년 11월 15일 친정오빠였던 백영도씨의 신청으로 부산 영락공원에 안치 되었으나 친정 오빠였던 백영도씨가 행불되어 관리하는 사람도 없어지자 무연고자 처리되어 무연고자실에 안치되어 있다가 2008년 3월 31일 개장되어 무연고자들과 합동으로 산골되었다고 한다.

김오랑을 사살한 박종규 중령은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당시 강제예편되었고 2010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

5. 추모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33년이나 지났음에도 김오랑 중령을 비롯하여 반란군에 대항하다 사망한 장병들에 대한 추모사업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신군부의 핵심 장본인들을 반란수괴로 단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모사업의 진행은 지지부진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전반기 국회의장직을 맡게 된 강창희 의원은 김오랑 중령과는 육사 동기이지만 하나회 출신이라 특별법 상정을 꺼린다는 카더라가 돌 정도.

2013년 4월 22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고(故)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과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법', 군사반란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안 2건을 심의 및 의결하면서 추모사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이 과정에서 군 출신 국회의원들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고 김오랑 중령에게 "무공" 훈장이 적절한지에 대한 여부와 추모비를 육사 내에 세우는 안에 대한 호오가 갈렸다. 김관진 국방장관마저 "대법원 판결은 존중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거나 적접 지역에서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인지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고, 결국 무공훈장 대신 보국훈장으로 수정하여 통과하게 되었다.[5] 그리고 2014년 1월 14일, 국무회의에서 김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는 안을 통과시켰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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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랑 중령의 형인 김태랑(왼쪽)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전수하는 전인범 특전사령관
2014년 4월 1일 특전사 연병장에서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전수식이 열렸다. 특전사는 고 김오랑 중령의 가족에게 최고의 예를 갖춘 공식 부대 행사로 훈장을 전수했다. 국방일보 기사 그러나 이 전수식을 다룬 국방일보 기사는 김오랑 중령의 살신성인 정신을 칭송하면서도 김 중령이 누구에 대항해서 그 살신성인 정신을 발휘하다가 전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슬그머니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이 훈장 수여를 추진한 민홍철 의원과 유승민 의원은 보답으로 김오랑의 유가족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아이러니한 게, 여기서 유승민은 반란 당시 문제의 33경비단에서 복무했다. 당시 유승민은 일반 병이라서 당연히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만 묘한 인연이긴 하다. 그래서 유승민이 이 경험을 통해 김오랑에게 부채 의식을 가지고 훈장 수여를 추진했다는 루머도 있다.

6. 미디어 매체에서

"적과 동지. 불과 몇시간 전만해도 전우였고 아래윗집에 살며 형과 동생처럼 지냈던 박종규와 김오랑. 이날 밤 이들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차가운 총구를 겨누었다. 과연 이들에게 쿠데타는 어떤 의미였고 조국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7. 관련 문서


[1] 추서 계급으로 당시 계급은 소령.[2] 당시 대기업 사원 월급이 보통 30만 원 정도였으니 제법 큰 돈이었다.[3] 떨어진 난간의 높이가 고작 사람의 허리정도인데 어떻게 거기서 실족해 떨어졌냐는 것.[4] 사실 이전인 1988년에 김오랑 중령의 상관이었던 정병주 소장이 12.12 진상조사 및 김오랑 중령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와중에 갑자기 죽었다.[5] 무공훈장은 '전투에 참가해 무공을 세운 자'를 대상으로 하며, 보국훈장은 '전투 이외의 공적으로 국가안보에 기여한 자'를 대상으로 수여한다.[6] 보국훈장은 총 5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위에서부터 보국훈장 통일장-국선장-천수장-삼일장-광복장. 문제는 이게 서훈자가 국가에 바친 공헌도와 전혀 상관이 없다. 가장 높은 통일장은 대장, 두 번째 국선장은 중장, 세 번째 천수장은 소장과 준장 및 군무원 1급, 네 번째 삼일장은 영관급과 군무원 2~4급, 가장 낮은 광복장은 위관급 장교와 병, 부사관들이 받는 식으로 공헌과 상관없이 단순히 계급에 따라 등급이 미리 정해져 있다. 김 중령이 삼일장인 이유는 고인의 공헌과 상관없이 그저 계급이 중령이라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