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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1-01 18:32:24

장익환(1881)

성명 장익환(張益煥)
이명 장익환(張翼煥)
자 / 호 응규(應奎) / 학산(學汕)
본관 인동 장씨
생몰 1881년 6월 22일 ~ 1930년 2월 19일
출생지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흑송리[1]
사망지 경상북도 문경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익환은 1881년 6월 22일(음력 5월 26일)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흑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장치문(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이다. 1903년 12월 4일 대한제국 궁내부 수륜원 주사에 임명되었으나 나라의 형편이 날로 글러가는 것을 보고 낙향하여 두시 등을 읽으며 국가의 명운을 개탄하고 앞날을 걱정하였다. 을사늑약이 있은 뒤인 1907년 7월 7일 운강 이강년이 다시 기의할 때 분연히 떨쳐나선 아버지 장치문과 함께 국권을 회복할 것을 결심하고 의병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 장치문이 같은 마을 사람으로 의병이 된 장복삼, 장복흥, 장해진, 장경한, 장필진 등과 함께 적과 싸우러 출진할 때, 이강년 의병진의 좌종사(坐從事)로 임명되어 마을의 서록에 있는 구릉을 무기고로 삼는 한편, 사방 10여리의 시계를 살필 수 있는 마을의 주산 삼봉산의 지세를 이용하여 동, 서, 남 3개소로 나누어 군사훈련을 하는 등 후원의 소임을 맡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 장치문이 전사(1907.10.8)하자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소백산을 중심으로 풍기, 단양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7월 2일(음력 6월 4일) 의병장 이강년이 까치성 전투에서 적에게 잡힌 바 되어 의병진이 해산되자 일경의 눈을 피해 문경군 동로면 마광리에 은신처를 마련하여 숨어들었다. 이후 향리에 은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지내다 1930년 2월 19일(음력 1월 21일)에 사망했다. 학산선생유고집에 한시(칠언율시) 100여 수가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장익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장복흥장치문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