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 주요인물에 대한 약사(略史)이다.2. 목록
- 정도전 - 태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 강력한 권력을 가진 경우로 간신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1차 왕자의 난으로 숙청된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역신으로 규정당해야 했지만.
- 남은 - 정도전과 함께 조선을 건국한 1등 공신으로, 태조의 신임을 받아서 정도전과 함께 조선의 관제를 확립하는 데에 기여했다. 하지만 1차 왕자의 난으로 살해되었다.
- 성석린, 남재[1] -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태종 때 정승을 지냈다. 그리고 조선왕실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공을 세웠다.
- 심효생 - 정도전의 측근으로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기여했고,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태조 이성계와 사돈까지 맺었다. 그리고 예문관 대제학까지 지냈지만, 1차 왕자의 난으로 살해되었다.
- 이방원: 고려 시대 때부터 과거에 합격한 정식 관료였으며 조선 개창 이후 왕족이 되었다. 왕족이 된 이후 자신을 견제하는 정도전 일파에게 불만을 가져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 정종을 바지사장격으로 왕위에 올리고 본인은 세자가 되어 대신 정사를 돌보며 국정운영을 주도하였다. 이후 정종이 정식으로 양위하면서 조선의 3대 국왕 태종으로 즉위한다.
- 조준, 김사형, 심덕부 -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태조의 신임을 받았고 정승도 지냈다. 다만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 편에 섰다.
- 하륜 - 부정부패 때문에 간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업적도 많아 능신의 요소도 있으며, 권신의 면모도 있지만 태종의 신뢰하에서 군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수준의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상당히 규정하기 애매한 인물. 그리고 이직과도 사촌동서지간이다.
- 이숙번 - 위의 하륜과 함께 태종의 양팔이었지만 하륜보다 자제력도 결여돼 권세를 마구 휘둘렀다. 물론 이를 태종이 그대로 놔둘리 만무. 결국 숙청당하고 세종 때에도 《태종실록》 편찬을 위해 잠시 서울로 올라온 걸 빼고는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 이거이, 이애 부자 - 태종을 보필한 권신.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나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바람에 태종 치세의 공신 숙청의 일타를 찍고 만다.
- 조영무 - 태종의 신임을 받은 무신이자 공신으로 우정승까지 지내면서 태종의 왕권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위의 권신들과는 달리 처신을 잘해서 살아남았다.
- 이천우 - 왕족이자 종친. 이성계의 조카인 그는 여말선초 황산대첩 등 수 차례의 왜구 토벌과 이후 이방원에 편에 가담하여 '왕자의 난' 을 평정하는 등 조선 개국 공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동지중추원사 겸 병조 전서 의흥 시위사 상장군 지삼군부사라는 상당한 직책을 받음과 동시에 자신의 형인 이양우와 함께 정사공신 2등을 책록받게 된다.
- 박은 - 세종 초반기에 좌의정을 지냈으며, 심온의 옥사를 잔혹하게 다스려서 처리한 바가 있다.
- 유정현 - 태종과 세종 때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내면서 세종의 태평성대 확립에 큰 공헌을 했지만, 심온의 옥사를 잔혹하게 다스렸다. 그리고 '수전노 재상'이라는 혹평도 들었다.
- 심온 - 세종 즉위 후 영의정으로 입각했으며, 동생과 형도 군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은 야심은 없었다. 하지만 태종의 왕권 강화 정책으로 인해서 '심온의 옥'으로 사사되었다. 그런데 민무휼과도 사돈 지간이었다.
- 이원 -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내면서 세종의 태평성대 확립에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뇌물사건으로 인해 귀양을 가게 된다.
- 이직 - 조선 건국 공신이고, 태조 때와 태종 때에 조선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기여했으며 태종 후반기에 우의정을 지냈지만 '염치용 사건'으로 위기에 처함과 동시에 '민무휼 옥사'에도 연루되어 귀양을 떠났고[2] 양녕대군 폐위에도 반발하다가 태종의 분노를 샀다. 뿐만 아니라 '심온의 옥사'에도 연루될 뻔 했다.[3] 하지만 세종 즉위 이후 사면되어 영의정과 좌의정을 지내면서 세종의 태평성대 확립에 큰 공헌을 한다.
- 황희, 맹사성 - 세종 때 유능한 재상들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에 공헌했다.
- 최윤덕 - 세종 때 무장이었으며, 4군 6진 개척에 큰 공헌을 했고 좌의정까지 지냈다.
- 허조 -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문신으로 대단히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악명 높은 대신이었다. 단 이 꼬장꼬장한 성격은 태종과 세종에게 직언을 하는 데 썼고 부정부패와 완전히 담 쌓고 산 진짜배기 청백리였다.
- 신개, 권진, 노한 - 세종 때 정승을 지내면서 태평성대에 큰 기여를 했다.
- 하연 - 세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유능한 청백리로 세종의 태평성대에 큰 공헌을 했다.
- 남지 - 개국공신 남재의 아들로 좌의정까지 지냈고 세종의 태평성대 정착에 큰 공헌을 했다.
- 김종서, 황보인 - 단종 시기의 국정을 모조리 장악했는데 이는 수양대군 일파[4]에게 그를 축출할 명분을 만들어 주었지만, 기록을 보면 이들이 특별히 전횡을 저지른 기록은 없다. 최영과 마찬가지로 권신임에도 자기 절제에 충실한 케이스. 그리고 똑같이 쿠데타로 숙청된 것도 똑같다.
- 정분 - 단종 때 우의정을 지냈는데 김종서와 황보인과 더불어서 어린 단종을 보호하다가 계유정난 때 귀양을 가게 되었고 결국 사사된다.
- 민신, 조극관 - 세종, 문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쳤고 단종 때는 각각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냈는데 김종서와 황보인의 측근으로서 어린 단종을 보필하는 데 앞장서다가 계유정난으로 살해되었다.
- 허후 - 세종과 문종의 신임이 두터웠고 우참찬, 좌참찬의 벼슬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계유정난 때 김종서, 황보인 등과는 다르게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주는 우찬성의 관직을 받지 않고 김종서와 황보인을 옹호하다가 귀양을 가고 사사된다.
- 수양대군: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을 제거한 후 영의정을 맡아 국사를 관장했다. 결국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여 세조로 즉위.
- 이사철 - 세조의 공신이자 종친으로, 좌의정까지 지냈다.
- 한확 - 세조의 사돈이자 인수대비의 아버지로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권력욕도 상당히 강했다.
- 권람 - 계유정난을 기획한 세조의 책사로, 역시 좌의정까지 지냈다.
- 한명회 - 조선 전기 전형적인 보스형 권신. 두 딸을 각각 예종, 성종에게 시집보냈으나 모두 단명했다. 비리와 축재가 많았기에 간신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그래도 국정은 잘 이끌었고, 북방 개척에서도 활약했으며 일처리 능력도 매우 유능했다. 다만 실제로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파의 존재감이 조선 중기의 혼란에 영향을 끼친 감은 있다.
- 신숙주 - 신숙주는 관료로서의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권신이라서 비난받는다기보다는 변절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편이다.
- 구치관 - 세조 때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권력을 행사한 대신이었으며 세조 사후 원상이기도 했다. 비리와 축재가 많았던 한명회와는 다르게 청렴결백했다.
- 정인지 - 훈구파의 원로대신이었으며 세종 때는 장영실 등용 및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우는 등 관료로써 활약했지만 계유정난에 동참한 뒤에 세조, 예종, 성종 때의 권신으로 활약했고 세조와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또한 역시 한명회처럼 비리와 축재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한명회의 위험함을 모르지는 않았는지 그와 거리를 두었다.[5]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 정창손 - 역시 훈구파 대신 중에 한 명이며 청렴한 사람이고 집현전 출신이기도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했고 계유정난에 동참한 뒤로는 세조, 예종, 성종 때 권신으로써 활약했다. 그리고 성종 때 원상이기도 했다. 세조 때 2번, 성종 때 10년 가까이 영의정을 지냈다. 후술한 김질의 장인이기도 하다.
- 조석문 - 훈구파 대신이고 세조 때 호조판서로 국가 재정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영의정까지 지냈고 세조의 총애도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성종 때는 원상도 지냈다.
- 윤자운 - 훈구파 대신 중에 한 명이고 신숙주의 처남이며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성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원상도 지낸다.
- 최항 - 훈구파 대신이며, 집현전 관료 출신으로 세종의 태평성대에도 기여를 했고 세조, 예종, 성종 때 여러 관직을 지냈고 영의정까지 지냈다.
- 심회 - 심온의 아들이자 소헌왕후의 동생이다. 세조에게는 외삼촌인만큼 예우와 신임을 받아서 영의정까지 지냈고 예종과 성종 때도 권신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 김국광 - 세조의 신임을 받아서 여러 관직을 지냈고 이후에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성종 때는 국가 원로로 활약하기도 했다.
- 김질 - 상술한 정창손의 사위이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밀고하여 세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좌의정까지 지냈다. 이후 예종과 성종 때도 국가원로로 활약했다. 상술한 정창손의 사위이기도 하다.
- 박원형 - 세조의 총애를 받아서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이후 예종 때 '남이의 옥'을 처리하고 귀성군을 영의정 자리에서 끌어내리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파 대신들의 추천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 홍윤성 - 양민 출신 하급 무신으로써 계유정난을 실행할 때 수양대군에게 큰 힘을 보태주어 출세한 인물이다. '살인마 정승'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의 희대 사이코패스였던 잔혹한 막장 인물로 같은 세조의 공신들에게서조차 비난받았으나 세조가 즉위하는데 군사적 공을 세워 끝까지 보전되었고 직접 병력을 이끌어 여진족들을 특유의 잔혹성(?)으로 토벌하여 세조가 추진한 국가 안보 안정에 큰 기여(...)를 했다.
- 홍달손 - 무사 출신이며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무관으로 계유정난에 앞장섰고 그 공으로 세조 때 병조판서와 좌의정을 지냈다.
- 김수온 -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정희왕후 윤씨의 총애도 받아서 훈구파의 핵심으로 군림하지만 부정축재를 많이 해서 탄핵을 많이 받았다.
- 성봉조 - 세조의 왕후인 정희왕후의 인척으로,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평안도 관찰사 시절에는 이징옥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
- 한백륜 - 세조의 총애를 받은 대신이고,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외척이기도 하고 예종의 장인이었다.
- 윤사분, 윤사흔, 윤계겸 - 세조의 외척이자 정희왕후의 친척으로 윤사분, 윤사흔 형제는 모두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아들인 윤계겸 또한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내면서 정희왕후 일가는 성종 초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 - 세조의 외척이기도 하며 정희왕후의 인척이기도 하고 한명회와는 재종간으로 세조, 예종, 성종 연간에 도총관과 판서, 좌우찬성의 벼슬을 하면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다.
- 어유소 -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적개공신이며 세조, 예종,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서 좌찬성이 되었고 조선에서 병권을 많이 쥐었던 대신이기도 했다.
- 현석규 - 성종 치세에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권신으로 승승장구했으며, 게다가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의 사위까지 되었다.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했다.
- 유자광 - 오랫동안 간신이라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재평가되는 분위기다. 게다가 유자광이란 사람 자체가 얼자 출신인데도 세조의 총애 덕분에 벼락출세한 사람이라서 생애에 걸쳐 군주의 총애를 받거나 큰 주목을 받은 일은 있어도 권신이 되어 일을 처리한 일은 사실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자광의 리즈 시절이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벼락출세하던 때인데 그때도 권력은 없었고 성종 치세에선 한명회를 탄핵하면서 존재감을 보이긴 했어도 얼마 못가 소인 취급받으며 몰락했다. 이후 연산군 때 다시 떠오르지만 연산군이란 양반 자체가 권신을 용납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오히려 임사홍이 성종조 중반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바 있다.
- 강희맹 - 세조, 예종, 성종 때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였으며 판서 벼슬을 거쳐서 좌찬성에 이르렀고 성종 때의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 공헌했다.
- 서거정 - 세조, 예종, 성종 때 6조 판서와 좌우찬성을 지내면서 성종 때의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에 공헌을 했으며 학문과 문장, 시에도 뛰어나다.
- 양성지 - '세조의 제갈량'이라 불릴 정도로 세조의 총애를 많이 받았으며 역사학과 지리학에도 밝았다. 성종 때의 태평성대에 크게 기여했다.
- 이극배 -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예종, 성종 때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국가 원로로 행사했다. 연산군 때 영의정이었다. 후술한 이세좌, 이극돈, 이극균과도 가족 관계를 형성했다.
- 윤호 - 자순대비(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로,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 정괄 - 영의정 정창손의 아들로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성종과 연산군 때 국가 원로로 활약했다.
- 홍응 - 조선 세조, 예종, 성종 때의 문신으로 성종 때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냈고 막강한 명문가였으며, 정희왕후의 측근이기도 했다.
- 윤필상, 한치형, 신승선, 노사신, 성준, 이극균, 어세겸 - 조선 성종과 연산군 때 권신이었다.[6] 특히 윤필상, 한치형, 신승선은 외척이었다. 윤필상은 자순대비의 6촌 오라버니이고 한치형은 인수대비의 사촌 오라버니이며 신승선은 연산군의 장인이다.
- 이세좌 - 이극균의 조카이자 이극감의 아들로 성종 때는 6방 승지와 6조 참판, 한성부 판윤을 모두 지냈고 연산군 때 예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권력을 나름 누렸으나 갑자사화 때 선왕인 성종 치세 좌승지 시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갖고 간 일이 들통이 나면서 사사당했다.
- 이극돈 - 연산군 때 좌찬성을 지냈으며, 무오사화의 주동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무오사화가 확산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으며 전례에 밝고 사장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이었다.
- 홍귀달 - 조선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때 문신이고 성종 때 당상관에 올라 도승지, 호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연산군 때도 좌우참찬까지 지냈다. 그리고 뛰어난 학자이자 훈구파와 가까웠던 관료였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 임사홍 - 일반적으로는 연산군의 큰 신임을 얻고 큰 권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단, 간신이라고 보기엔 좀 부족한 편이기도 하고[7] 《실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종 후반부터의 임사홍은 권신이라 하기도 부족한 감이 있다. 임사홍은 성종 때 사림에 의해 소인으로 낙인찍인 후 연산군 시대에도 아들 임숭재 덕택에 복권될 때까지 정계에서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다. 애당초 연산 시대에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자랑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연산군 본인이다. 그의 정치 철학 자체가 '신하가 임금을 만만히 보는 풍습[8]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권신'을 용납했던 군주가 아니다. 유자광이나 임사홍은 본인들의 권력이 막강했다기보다는 최고권력자 연산군에 기생하여 권력을 누린 케이스에 가깝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반정 세력에게 절대적인 간신으로 낙인찍혀 살해당했다. 다만 성종조에는 조선왕실과 사돈관계를 맺는 등 승승장구했고 본인도 상당한 권세를 누렸지만 도승지 현석규를 씹은 일 때문에 소인으로 낙인찍혀서 죽는다.
- 신수근 - 누이(폐비 신씨)가 연산군의 중전으로 아버지는 전 영의정인 신승선이다. 딸이 중종의 왕비(단경왕후)로 들어간 외척 중 최고의 권신이었다. 임사홍과 함께 중종반정 때 살해되었다.[9]
- 임숭재 - 임사홍의 차남이자 연산군의 총신으로 "아비는 큰 소인, 아들은 작은 소인이나 작은 소인이 더 악독하다"란 말을 들었을 정도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의 비위를 맞추는데 천재적인 행보를 보였고 연산은 민가 40여 채를 허물고 그의 집과 궐을 잇는 길을 닦았을 정도였다. 연산이 쫓겨나기 직전에 죽었는데 죽을 때조차 "미인을 바치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이옵니다."라고 아부를 하며 죽었고 연산군은 그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다 한다. 죽은 후에는 그 시체가 부관참시된다.
- 허종, 허침 - 형제가 모두 정승을 지냈으며 허종은 세조, 예종, 성종 때 판서와 정승을 지내면서 성종의 신임을 받았고 여진족 토벌에도 기여했다. 동생 허침은 성종 때 3사와 옥당의 관직, 승정원의 승지를 두루 거쳐 연산군 때는 참판,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승진했다. 허침은 갑자사화 때 화를 피했음에도 연산군에게 직언을 했던 충신이다.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중종반정 공신 - 공신 버프로 이들의 전횡이 대단히 심각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헌데 이들은 정작 모두 중종이 즉위한지 10년이 채 되기 전에 젊은 나이에 시름시름앓다 죽고 만다. 특히 박원종은 영의정이 된지 불과 몇달만에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겨우 44세였다.
- 신준 - 영의정 신숙주의 아들로, 좌찬성까지 지냈으며 훈구파의 중진이었다.
- 송질, 김수동, 김응기, 신용개 - 중종 초반기에 영의정과 좌의정을 각각 지내면서 국가 원로로 활약했으며, 공신들과도 친했다.
- 이손, 박건 - 중종반정에 협력한 대신으로, 반정공신들과 친분을 유지했으며 좌찬성까지 지냈다.
- 안당 - 연산군 때 당상관에 올랐고, 중종 때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내면서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날렸고 조광조를 추천하면서 조광조의 개혁을 후원했지만 기묘사화로 한직으로 좌천되었으며 연이어 '신사무옥'으로 사사된다.
- 정광필 -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조광조의 현량과에 반대했지만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살려줄 것을 주청했고, 또한 김안로가 횡포를 부리자 그의 횡포를 견제하려 했다. 그리고 청렴하였고, 인품이 온화했다.
- 남곤 - 조광조 숙청(기묘사화)때문에 악명을 얻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청렴하고 유능한 관료였으므로 간신은 아니다.
- 김전 - 청렴한 정승이지만 조광조 숙청에 가담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김안로의 숙부이며, 김감과도 친척관계에 있다.
- 이행, 이항, 심정, 김극핍, 홍경주 - 남곤 사후 김안로가 대두하기 직전에 잠깐 집권한 신하들. 사림파 사관들에게는 욕심만 많은 간신들로 분류되지만 현실은 그냥 평범한 권신들이다.[10] 김안로와 적대했다가 그에 의해 처참하게 죽고 만다. 홍경주, 김극핍 등도 이 그룹에 포함되기도 하나 홍경주는 너무 일찍 죽어 권세를 누리지 못했고 김극핍은 존재감이 없다. 이행의 형 이기는 명종 시기에 권신이 된다.
- 권균, 이유청 -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모두 정승을 지냈다. 조광조와는 대립관계였고, 중종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인 기묘사화에 협조했다.
- 김안로 - 조선 초기 최강의 권신+간신. 반대파를 경빈 박씨 일파, 이행, 심정, 이항 일파 등으로 몰아 참혹하게 죽였고 중종의 아들 복성군의 사사까지 주도한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다. 그의 지나치게 잔혹한 정치는 후대에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의 '양비양시론'은 훈구와 사림의 교체기에 권력의 정점을 향유한 인물다운 견해랄까. 나중에 중종의 아들인 복성군을 죽인것까지 주도하면서 중종의 눈 밖에 나고 만다.
- 장순손, 한효원, 김근사 -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들인데, 김안로의 오른팔들로 활약하면서 권력을 누렸다.
- 윤은보 -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국가 원로로도 활약했다.
- 홍언필, 윤인경 - 인종과 명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국가 원로로도 활약했다.
- 윤임 - 인종의 외척으로, 장경왕후의 친척이기도 하며 인종 때 권신이었으나 을사사화로 사사되었다.
- 유관, 유인숙, 성세창, 권벌 - 윤임과 함께 인종을 지지했으며 유관과 성세창은 좌의정까지 지냈고 유인숙과 권벌은 각각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그리고 덩달아 좌우찬성의 자리에도 오르지만 을사사화로 실각하고 유관, 유인숙은 사사되었으며 성세창, 권벌은 귀양지에서 별세한다.
- 윤원형 - 김안로와 함께 조선 전기 최강의 권신이자 간신. 덕분에 덩달아 문정왕후가 함께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 윤원형과 함께 경원대군을 명종으로 옹립한 소윤의 실세들, 허나 이기를 제외하곤 거의 다 요절하여 권력을 제대로 누려보진 못했으나
을사사화의 저주.살아남은 이기만큼은 77세까지 장수하며 윤원형에 맞먹는 세도를 구축했다. - 허자, 민제인 -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데 동조한 신하들이다. 하지만 이기, 정순붕 등과는 다르게 양심이 있었고, 선비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는 데에는 반대한 신하였다. 나중에 민제인은 문정왕후 일파가 《시정기》를 고치려 들자 이를 반대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고 허자 또한 민제인의 동생 민제영을 현감으로 앉혔다가 귀양을 가게 된다. 허자는 예조판서, 대사헌, 한성부 판윤, 우참찬, 형조판서, 공조판서, 호조판서, 좌참찬, 우찬성, 좌찬성 등을 지냈고 민제인 또한 형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찬성, 좌찬성 등을 지냈다. 또한 허자의 후손은 밑에 있는 허목인데, 허목은 남인 청남 계열의 영수였다. 그리고 민제인의 후손은 역시 밑에 있는 민유중, 민정중, 민진장, 민진원, 민진후 등이 있고 인현왕후도 있으며, 명성황후와 그의 척족들도 있는데 그들은 노론계 인사가 된다.
- 이량 -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사의 권신이자 간신. 윤원형에 맞먹는 세도를 구축했으며 한때는 윤원형을 뛰어넘는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명종의 외척으로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각종 요직에 두루 앉히면서 밀어주었으나 윤원형을 견제하라는 일은 안하고 다른 외척인 심씨를 모함하고 전횡이나 일삼다가 명종의 눈밖에 나서 전격적으로 숙청되었다.
- 심연원, 심통원 - 명종의 외척이며, 심연원은 영의정까지 지냈고, 심통원은 좌의정까지 지냈다.
- 상진 - 명종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청백리였고 심연원, 심통원 일가와도 사돈을 맺었으며 국가 원로로도 활약했다.
- 이준경 - 명종 말 선조 초의 영의정으로 을묘왜변에서 공을 세우는 등 나름 준수한 능력을 가진 재상. 형인 이윤경은 을묘왜변에서 활약한 명장이고 본인도 윤원형을 막지는 못했으나 그에게 영합하진 않았다고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선조 초의 기대승 일파의 탄핵에 맹렬히 맞서 싸우기도 했다. 사림을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윤원형 일파의 잔존세력의 요청을 거부하는 등 제2의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것을 막았고 야사에 의하면 선조의 즉위를 확정시켰다 카더라. 16세의 선조가 즉위한 후에 매우 믿고 신임했던 재상인데 몇년 안 있어 죽었다. 죽으면서 붕당의 폐해에 대해 충고하고 죽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붕당이라도 만들거란 소리냐?'라고 불쾌해했고 이이는 "사람이 죽을때는 그 말이 선해진다던데 이준경은 죽으면서 어찌 말이 악해지냐?'라고 깠다.(...)
- 홍섬, 권철, 이탁 - 선조 때 정승을 지냈으며 선조를 옹립하면서 선조의 정치를 도운 신하들이다.
- 박순, 노수신, 정유길 - 선조의 즉위를 도와주었으며, 윤원형을 탄핵했다. 선조 중반기에 정승을 지냈다.
- 유홍, 심수경, 김귀영, 이헌국, 김응남 - 선조 때 중신들이며,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대신들이고, 나중에 좌의정까지 지낸 재상들이다. 임진왜란의 폐해를 치유하려고 했다. 다만 김응남은 이순신을 모함하기도 했다.
- 김명원 - 선조 때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지만, 신각을 모함해서 죽는 데에 기여를 했다. 나중에 좌의정까지 지낸다.
- 이이 - 권력과는 무관해보이는 이이지만 선조의 신임 아래 10개월 정도 조정을 주도한 바가 있으나 반대파들의 미움을 사서 군주를 능멸했다는 모함을 당했고 선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낙향해버리며 49세를 일기로 얼마 안 가 사망한다.
- 성혼 - 이이, 정철과 서인의 거두 중 한명이다.
- 정철 - 정여립을 개박살낸 후에 한동안 서슬퍼런 권력자로 조정에서 군림했으나 '건저 사건'이 계기가 되어 개발살난다. 선조는 한 마리의 독수리와 같다고 정철을 칭찬했으나 그가 1593년에 죽고 난 후에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뭉치 독기로 사람을 해친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기록상 정적을 가혹하게 숙청하는 독선적인 성격이었고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작품으로 선조에게 아첨과 아부를 하는 작품들이 있어 간신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원칙에 충실하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자신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일례로 명종 21년의 기록을 보면 종친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군주인 명종은 자신의 종형이 간여된 일이므로 이를 조용하게 넘기려고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중지하도록 하였지만 정철이 명종의 요청을 거부해 명종의 눈 밖에 나서 파면되고 한직을 전전하게 된 적이 있었고, 선조에게도 '아무리 청천벽력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분노한 선조에 의해 삭탈관직당한적도 있기 때문이다.
- 이산해 - '건저 사건'으로 정철을 실각시키고 한동안 잘 나갔다. 반대파에 대한 강경 노선은 정철 못지 않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 한 원인이 되었으며 그나마도 정철만큼의 업적조차 찾기 힘들다.
- 류성룡 - 임진왜란 당시의 전시 재상이자 남인의 수장으로 명나라의 외교 등을 담당하며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나 선조와 조선왕실을 모함하는 보고서가 명나라 조정에 올라간 일을 해명해줄 것을 요청하는 선조의 요청을 부득불 거절하여 선조의 미움을 샀고 이이첨 등의 탄핵으로 권력에서 물러난다.
- 윤두수 - 임진왜란 당시에 무능한 원균을 총애하며 명장 이순신을 불신했으며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유성룡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에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곧 북인의 탄핵을 받아서 영의정에서 물러난다.
- 정탁 - 임진왜란 당시에 선조를 호종했고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같은 명장을 발탁하여 그들이 왜적을 물리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순신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는 그를 변호하여 구명했다.
- 류영경 - 광해군 즉위 직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초고속으로 영의정까지 승진했으며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다가 실패하여 사형되었고 그 시신은 부관참시 되었다.
- 허욱, 한응인 -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거나 임진왜란의 상처를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고 광해군 즉위 직전에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각각 좌의정, 우의정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유영경과 뜻을 같이하다가 광해군 즉위 후 관직에서 잘려나갈 위기에 처했으나 유영경과는 다르게 공도 있어서 자리를 유지했고 한응인은 광해군 때도 판중추부사로 조정에 있었으며 허욱은 파직되었지만 광해군의 배려로 조정에 다시 나갈 수 있었다. 이후 한응인은 광해군 3년에 대북 세력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되었다가 곧 다시 조정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응인은 계축옥사로 인해서 다시 삭탈관직되었고, 허욱 또한 '능창군 추대사건'으로 관직이 삭탈되면서 결국 귀양에 처해진다. 인조반정 이후 허욱, 한응인은 다시 신원된다.
-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 임진왜란 시기에 전시내각에 참여해서 선조의 신임을 받고 판서에 이어 정승까지 했으며, 광해군 때도 정승에 있었지만 이이첨의 무고로 관직에서 밀려났고 이덕형은 식음을 전폐하다가 별세하고, 이항복 또한 폐모살제에 반대하다가 귀양을 간 뒤에 별세했으며 이원익도 귀양을 떠난다. 하지만 이원익은 인조 때 복권되어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 심희수 - 역시 임진왜란 시기에 전시내각에 참여해서 선조의 신임을 받고 판서를 거쳐 정승까지 올랐지만, 광해군 때 이이첨의 악행에 항거를 한 뒤에 관직에서 물러나서 은거를 한다.
- 홍여순 - 선조 때의 문신이지만, 간신배 짓거리를 많이 했다. 선조 때 병조판서로 있을 때 삽질을 저지르다가 탄핵을 받았고 광해군 즉위 이후에도 형조판서로 악행을 저지르다가 탄핵을 받고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죽는다.
- 류희분, 박승종 - 류영경이 숙청된 직후 이이첨이 부상하기 전까지 소북 정권을 운영하면서 권세를 누렸다. 특히 류희분은 광해군의 처남으로 외척이라 탁소북 출신인 박승종도 그와 손잡아 무사할 수 있었다. 봉산옥사 이후 이이첨과 함께 '삼창'이라 불렸으며 폐모에는 반대했으나 후금과의 외교 문제로 둘은 엇갈린다. 이이첨은 오랑캐 사신의 목을 치자고 강하게 주장했고 류희분은 거기에 좋다고 응했는데 박승종이 "류희분의 분 자는 똥 분이냐?" 비웃으면서 이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틀어진다. 인조반정 이후 류희분은 아우 류희발과 함께 목이 잘렸고 박승종은 아들과 함께 자결했다.
- 이이첨 - 왕권 침해와 권력 남용면에서 간신이기도 하다. 다만 정치적 파트너였던 정인홍의 영향 때문인지 의외로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 정인홍 - 인조반정 때 89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북의 영수였고 광해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는 이유로, 인조 정권이 그를 참수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도 맹활약을 했으며 심지어 최고령의 나이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 기자헌 - 대북의 거물로, 광해군을 강력하게 지지했고 그 덕분에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이이첨과는 다르게 강직했고 '폐모살제' 등을 반대했으며, 이이첨의 악행에 항거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에 동의하지 않고 광해군에 대한 의리를 지켰으며 이괄의 난 때 사사된다.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평이 좋지 않은데 방납 브로커 짓을 했다.
- 한효순, 민몽룡 - 대북의 영수이자 거물로, 정승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고 광해군의 브레인으로 활약했지만 광해군 때 폐모론에 동조하여 많은 지탄을 받았다. 특히 한효순은 더덕을 광해군에게 바치면서 아부를 많이 하여 '더덕 정승', '사삼 각로'으로도 불렸다.
- 박홍구, 조정 - 광해군 말기에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내면서 북인의 실세로 군림했지만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뒤에 박홍구는 이괄의 난 때 사사되고, 조정은 귀양지에서 죽었다.
- 이충 - 광해군 때 호조판서와 좌찬성을 지냈지만 광해군에게 잡채를 많이 바치면서 아부를 하면서 '잡채 판서', '잡채 상서'으로도 불렸다.
- 황신 - 임진왜란 당시에 전쟁 영웅으로 활약했으며 광해군의 분조에서도 활약한 바가 있고 광해군 때는 호조판서까지 지냈지만 계축옥사에 연루되면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귀양지에서 별세한다.
- 서성 - 선조, 광해군, 인조를 섬긴 중신으로 율곡 이이의 제자이며 선조의 고명을 받은 유교 7신이었다. 판서까지 지냈으며 그의 집안은 정승판서가 많이 나와서 명문가로서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 한준겸 - 선조, 광해군, 인조 때의 중신으로 임진왜란 때 난국을 수습했고 선조의 고명을 받은 '유교 7신'이었으며 도원수로 군권도 쥐었고 인조의 장인으로 외척 반열에도 올랐다.
- 정창연 -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중신인데, 임진왜란 때 세자였던 광해군의 분조에서 활약을 했고 그 이후 승승장구하여 광해군 때 좌의정까지 지냈지만, 폐모론에 반대를 했고 인조 때도 좌의정을 지냈다. 김상헌, 김상용 가문과 광해군의 외척인 류희분 가문과도 인척이었다.
- 장유 - 최명길, 조익, 이시백과 '4우정'으로 불렸고 신흠, 이정구, 이식 등과 '월상 4계택'으로 불렸다. 또한 김상용의 사위이자 효종의 장인으로, 우의정까지 지냈다.
- 이정구 - 선조, 광해군, 인조 때 문신으로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월상 4계택'으로 불렸다. 그리고 외교에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후유증을 해결하려 한 명신이다. 이후 이정구의 가문은 명문가로서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 신흠, 오윤겸 - 광해군과 인조 때 중신으로 청백리였으며 전쟁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정승이다.
- 윤방 - 아버지 윤두수의 뒤를 이어서 영의정에 올랐는데, 전후 복구에 힘을 기울였고, 전쟁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정승 중에 한 명이다.
- 김류 - 반정의 4대장 중 이서와 신경진은 무인이라 천대받고 이귀는 난폭하다는 이유로 인조의 미움을 산 와중에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잘 나갔으나, 정원군의 추숭에 반대하고 강빈 사사에 반대하면서 인조의 눈 밖에 났다.
- 이귀 - 반정의 4대장 중에 한 명인데, 좌찬성,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이귀는 난폭하다는 이유로 인조의 신임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귀의 아들들인 이시백과 이시방 형제가 청빈하여 명망이 높고 인조와 효종의 권신이 됐다.
- 이서, 신경진 - 반정 4대장 중에 무인 출신의 반정 공신으로 권력을 행사했는데 이서는 판서를 지냈고 신경진은 무인 출신으로 유일하게 영의정에 올랐다.
- 구굉 - 인조반정 공신이며 무인 출신이자 외척으로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하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 김상용 - 후술한 김상헌의 형이며 우의정까지 지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 최명길 - 인조반정 공신이며 병자호란 때 주화론자였고 그 때 당시는 이조판서였다. 영의정까지 지내면서 조선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후술한 손자 최석정도 영의정을 지냈다.
- 김상헌 - 재야 서인이고 병자호란 때 척화론자였으며 그 때 예조판서였다. 나중에 좌의정까지 지낸다.
- 심열, 홍서봉, 이성구 - 광해군과 인조 때 실무관료였으며 영의정까지 지내면서 병자호란으로 혼란에 빠진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다.
- 강석기 - 소현세자의 장인이자 소현세자빈 강씨의 아버지로 광해군과 인조 때 실무관료였고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사후 '강빈 옥사'에 가문이 연루되면서 몰락한다.
- 심기원 - 인조 때 좌의정이었으며, 인조반정 공신이지만 김자점이 조작한 '심기원의 옥'으로 인해서 누명을 쓰고 참수당한다.
- 김자점 - 주군 인조의 치세 초반부터 무능하기로 악명이 높았으나 인조반정에서 세운 공 하나로 권세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병자호란에서는 아예 대놓고 막나가기까지 했는데 그 결과는... 그러나 잠깐 유배를 갔다가 돌아온 뒤로는 승승장구하여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인조 후반기에는 영의정까지 되면서 다른 공신 세력들과도 대립했지만 효종 즉위 이후 청나라와의 내통 의혹으로 귀양을 갔다가 사형되었다.
- 김집 - 서인 산림의 영수이며, 서인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이 그의 제자였다.
- 이경석 - 인조 때 판서와 정승을 지냈고 송시열을 비롯한 산림 학자들을 천거했다. 병자호란 이후에 <삼전도 비문>을 짓기도 했다. 효종 때는 영의정을 지냈다. 하지만 후에 송시열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 김육 - 효종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영의정이 되어 대동법 확대 등에 힘쓴 명재상. 충청도와 전라도의 대동법 확대를 주도했고 화폐 유통에도 힘을 썼다.
- 조익 - 효종의 신임을 받은 명재상으로,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의 병폐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정승이다.
- 정태화, 정치화, 정지화 - 숙종 때 영의정과 좌의정을 각각 지냈으며 정태화와 정치화는 형제간이고 정지화는 친척이다. 청렴했으며 효종, 현종, 숙종 때 각종 사회 개혁도 주관했다. 게다가 당색이 옅어서 군주들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
- 심지원 -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역시 김육 등과 함께 사회개혁을 주도했다.
- 이시백 - 반정공신 이귀의 아들이고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김육 등과 대동법을 주도했다.
- 원두표 - 인조 말기와 효종, 현종 때에 서인의 영수였으며 좌의정까지 지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 조계원 - 자의대비 조씨의 친척이자 왕실의 외척으로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 김우명, 김좌명 - 명성왕후의 친척이자 숙종의 외척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고 송시열을 견제하기 위해 허적과도 연합을 했다.
- 송규렴 - 송준길의 문인이며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와 가까웠고 후에는 노론 세력의 핵심인물이 된다.
- 유혁연 - 효종, 현종, 숙종 조에 무신이며, 무신으로써 승지, 판서를 지냈고 군영의 대장도 지냈는데 남인 1차 집권기에 남인 병권의 핵심 인물이었다.
- 민희, 민점 - 효종, 현종, 숙종 조의 문신인데 남인 1차 집권기에 민희는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냈고, 민점은 좌찬성까지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탁남의 영수였다.
- 오시수 - 문과 급제 후에 빠르게 초고속 승진을 하여 40대 후반에 우의정에 올랐는데 청남의 영수로 남인 과격파였다. 그런데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서인의 영수인 우의정 이숙과 그의 아들이자 노론의 중진인 병조판서 이만성과도 가족 관계로 얽혀져 있었다.
- 이원정 - 남인의 거두이고 청남의 거두였는데, 과격파로 송시열과 김수항의 사사를 주청했다.
- 홍우원 - 남인의 거두이자 청남의 영수였으며 소현세자빈 복권을 주장하기도 했고, 여러 사회 개혁법안을 내기도 했다. 남인의 과격파였다.
- 허목 -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조에 문신이었는데, 청남의 영수였고 우의정까지 지내면서 남인의 과격파로 활동을 했다.
- 윤휴 - 효종, 현종, 숙종 조의 문신이며 청남의 영수인데 숙종 초기 남인 집권기에 여러 개혁 법안을 내기도 했고, 남인의 과격파이기도 했다. 송시열과의 악연으로도 유명하다.
- 송시열 - 조선 후기 최강의 권신. 세도정치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의 권세의 크기를 따라갈 사람은 없었다. 명성면에서는 세도정치 시기의 권신들조차 감히 따라가지 못할 지경. 조선사에서 사관없이 군주와 독대를 한 유일한 신하이다.
- 송준길 - 송시열과 함께 서인 사림의 영수로, 서인에 영향력을 많이 행사했다. 인현왕후의 여흥 민씨 가문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남인 허적과도 인척 관계에 있다. 또한 류성룡의 문하생인 정경세가 그의 장인이고, 광산 김씨 가문과도 인척이다.
- 허적 - 현종, 숙종조의 재상으로 적절한 과단성, 신중한 처신과 일처리로 현종과 숙종의 신임을 모두 한몸에 받았다. 탁남의 영수이자 오랫동안 영의정을 지냈으며 강력한 외척인 김우명, 김석주 등과 연계했고 자신과 적대적인 김만기, 김만중 형제에게도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당했다.[11] 허나 말년에 자신의 서자인 허견을 관리하지 못하다가 허견이 복선군 등과 역모를 꾀하는 바람에 세트로 처리당한다. 야사에선 숙종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유악을 썼다가 나가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록》에는 관련 내용이 없으며 그가 처형될 때 읊어주는 죄목에도 없었다.
- 김석주 - 인조, 효종조의 명재상 김육의 손자이자 효종, 현종조에 군주의 신임을 받은 김좌명의 아들이며, 숙종의 외가쪽 친척으로[12] 2차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서인을 실각시켰다가, 권력을 잡은 남인을 치기 위해 다시 서인과 손잡는 등의 행보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게다가 병권도 쥐고 있었다. 그는 숙종 10년에 51세를 일기로 요절했는데, 숙종의 역사상 행적을 볼 때 더 오래 살았으면 험한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기사환국으로 공신호를 추탈당했다가 나중에 복구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재상 중 하나인 김육. 참고로 초상화에 묘사된 생김새가 굉장히 독특하다.
- 김익훈 - 숙종의 외척이자 무관이며 광산 김씨 명문가 출신으로 경신환국 이후에 총융사, 수어사, 어영대장 등을 하면서 군권과 병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과거에는 병마절도사도 했다. 그리고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 우윤도 했고 광주 부윤으로 지방관도 했다. 무예에 뛰어났으며 이재에도 뛰어났다. 김석주와 모의해서 경신환국을 기획했고, '임술고변'으로 남인들을 다 쓸어버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 이사명 - 숙종 때 문신으로, 경신환국에 가담하고 김석주의 공작정치를 도우면서 승승장구하면서 형조판서, 병조판서까지 했지만 기사환국으로 인해 사사된다.
- 민유중, 민정중 형제 -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인현왕후의 아버지, 숙부이고 숙종의 외척으로 민유중은 병조판서, 민정중은 좌의정까지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또한 민유중은 상술한 송준길의 사위이다. 민정중은 후술한 소론의 남구만과도 인척을 맺었다. 후술한 민진후, 민진원, 민진장은 각각 민유중, 민정중의 아들들이다.
- 김만기, 김만중 형제 -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인경왕후의 아버지, 숙부이고 숙종의 외척으로 김만기는 병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내면서 실권을 행사했고 김만중도 공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 대사헌, 대사성을 지내면서 실권을 행사했다. 그 뿐 아니라 김만기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훈련대장, 호위대장을 하면서 병권까지 쥐고 있었다. 그리고 동생 김만중은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썼다. 후술한 김진구, 김진규는 김만기의 아들들이다.
- 김수항, 김수흥 형제 -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영빈 김씨의 일족들이다. 둘 다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기사환국으로 사사되거나 유배되어서 죽는다. 후술한 아들 김창집도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신임사화로 사사되었다.
- 조사석 - 숙종의 외척이고 인조, 효종, 현종의 외척이기도 하며 장렬왕후의 친척으로 좌의정까지 지냈고 희빈 장씨를 추천하기도 했다. 상술한 조계원의 아들이다. 아들이 후술한 조태구고, 조카 역시 후술한 조태억과 조태채다.
- 이단하 - 효종, 현종, 숙종 조의 문신으로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송시열의 수제자로 서인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 이정영 - 효종, 현종, 숙종 조의 문신이고 숙종 때 서인 중진이며, 공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김수항, 김수흥 가문과도 인척 관계이고 영빈 김씨의 외조부이기도 했다.
- 신여철 - 서인 병권의 핵심으로 군영의 대장은 물론, 판서 자리도 지냈다.
- 이상진 - 숙종 때 우의정을 지냈으며, 서인의 영수로 송시열과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경신환국 이후 소론이 되면서 다소 송시열과 사이가 멀어진다.
- 남용익 - 숙종 때 서인 중진이었고, 형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의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서인의 핵심으로 활약을 했다.
-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 남인의 2차 집권기 당시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을 차지했으며 남인의 영수였고 실세였지만 민암보다는 권력이 밀렸고, 송시열의 사사를 주장하는 등 강경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장희재와 민암과 그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김덕원은 중간에 우의정을 민암에게 내주고 물러났다. 그러나 목내선, 김덕원은 경신환국 이후 서인 집권 시절에도 능력을 인정받아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남인 1차 집권기 때도 이들은 요직에 있었는데 권대운은 허적의 측근으로써 예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목내선 또한 도승지, 이조참판, 형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으며 김덕원도 승지, 대사간, 병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형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의 요직을 거쳤다.
- 민암 - 숙종 치세, 남인의 2차 집권기 당시의 최고 실세로 남인의 영수였다. 남인 재집권 이후 예조판서, 병조판서, 대제학을 거치다가 우의정에 올랐다.[13] 숙종이 장희빈에게 서서히 질려가면서 숙빈 최씨를 총애하는 것을 보고 한중혁, 함이완 등의 모의를 고변하여 남인 정권을 탄탄히 하려다가 숙종의 주특기인 환국에 휘말려서 죽고 만다.
- 장희재 - 장희빈의 오빠로 여동생의 위세를 등에 업고 남인 영수 민암의 우대를 받으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좌포도대장, 총융사 등을 거쳐 한성부 좌윤까지 임명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이 중전에서 쫓겨나면서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세자의 외숙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건지고 유배되었다. 하지만 장희빈이 죽을 때 같이 사형당했다. 영의정 남구만은 세자의 얼굴을 봐서라도 장희재를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옹호할 게 따로 있지 저딴 놈을 옹호하냐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정작 인현왕후를 복위하려던 한중혁 등에게는 가혹하게 군 것도 서인의 심기를 건드렸고 거기에 소론의 박세채가 남구만을 비판하며 장희재를 죽일 것을 청하자 이에 탄복한 많은 소론들이 장희재의 엄벌을 청한 노론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 민종도 - 민암의 친척으로 남인의 2차 집권기에 민암, 장희재와 결탁하고 공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 이의징 - 남인 군권의 핵심인물이며, 이인좌의 아버지이다. 민암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장희재를 옹호하다가 갑술환국으로 사사된다. 무관으로서는 드물게 형조판서, 공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의 정경 반열에 오른 적이 있다.
- 오정위 - 남인의 거두이며, 효종, 현종, 숙종 조의 문신이고 남인 1차 집권기와 남인 2차 집권기에 모두 판서를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 이우정 - 남인의 중진이며, 2차 남인 집권기에 형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남인이었지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했고 장희재의 포도대장 임용을 반대했다. 경신환국 이후에도 서인 조정에 있었다.
- 오시복 - 남인의 중진으로, 남인 2차 집권기에 공조판서를 지냈고 특히 이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내면서 인사권과 재정권을 움켜쥐었고 수어사로 병권까지 움켜쥐면서 승승장구했고 장희재, 민암과 결탁한 재상으로 그들을 옹호했지만 갑술환국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 목창명 - 역시 남인의 중진이며 이미 1차 남인 집권기에 탁남으로 젊은 나이에 당상관에 올랐고 2차 남인 집권기에는 대사헌, 형조판서를 지내면서 사법권과 대간권을 움켜쥐었고 병조판서까지 지내면서 병권까지 움켜쥐고 민암 일파와 결탁했지만 갑술환국으로 귀양을 가게 되고 1년 후에 귀양지에서 죽는다.
- 심재 - 남인의 중진이며, 효종, 현종, 숙종 조의 중신이다. 기사환국 이후 이조판서가 되어서 민암과 장희재의 일파로 행동했고 송시열의 사사를 주청했다. 그러나 서인 집권 시절에도 요직을 두루 거쳤을 뿐만 아니라 경신환국 이후에도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 이현일 - 남인의 거두로, 영남 남인의 중심이었다. 이조판서까지 지냈으며 남인이었음에도 인현왕후에 우호적이었다.
- 유명천, 유명현 형제 - 남인의 2차 집권기에 여러 판서를 지낸 인물들인데 민암과 장희재의 측근으로 권력을 행사하다가 갑술환국으로 숙청되어 귀양을 간다. 맏형 유명견 또한 이조참판까지 지냈다.
- 남구만 - 숙종 치세의 명재상. 서북인의 차별을 언급하며 서북인 등용을 주장했으며[14] 북방 방어선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안용복의 독도 수호 행위를 쾌거라고 칭찬했으며 소론의 영수이면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 박세채 - 숙종 치세의 명재상으로 탕평책을 주장했으며 남구만, 윤증 등과 같은 소론이지만 장희재의 중벌을 주장했다.
- 윤지완, 윤지선 형제 - 숙종 치세의 명재상이며 인현왕후의 인척으로 각각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지낸다. 하지만 윤지완은 인현왕후와 한 식구임에도 희빈 장씨에 우호적이었다. 그래서 노론과 대립하기도 한다.
- 민진장, 민진주 - 민진장은 위에 상술한 민정중의 아들이자 인현왕후의 친척이고 숙종의 외척으로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리고 민진주 역시 민시중의 아들이자 인현왕후의 친척이자 숙종의 외척으로 이조판서까지 지냈고 소론 조태동과 사돈지간을 형성했다.
- 이세백 - 숙종 때 좌의정을 지냈는데, 장희빈의 사사를 강력히 주청했다.
- 유상운 -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남구만과 함께 소론에 속한 대신이었고, 무고의 옥 때는 장희빈의 사사를 반대했다.
- 서문중 -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남구만과 함께 소론에 속했고 조선왕실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했다.
- 최석정 - 상술한 최명길의 손자로 영의정을 9차례나 지냈으며, 능력이 뛰어났다.
- 민진후 - 민유중의 장남이며, 송준길의 외손자이고 게다가 인현왕후의 큰오빠에다가 숙종의 큰처남으로,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좌우참찬, 판의금부사를 여러 번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인품이 뛰어나고 학문도 뛰어났다. 후술한 동생인 민진원보다는 좀 온건적이었다.
- 김진구, 김진규 - 위에 상술한 김만기의 아들들이자 송시열의 문인들이고 인경왕후의 오빠들이며 게다가 숙종의 처남들로 대제학, 이조판서를 제외한 공조, 형조, 병조, 예조, 호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좌우참찬 등의 벼슬을 지내면서 노론 체제를 굳건히 했다. 게다가 김만기의 장남 김진구는 수어사와 어영대장을 지내며 군권도 장악했다. 또한 김진구는 김춘택의 아버지이다.
- 이여 -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송시열의 수제자로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고 노론 체제를 튼튼히 했다.
- 이유 -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이며, 북한산성을 증축한 영의정이기도 하다.
- 서종태 - 조선 숙종 때 역시 영의정을 지냈으며, 서문중과도 친척 관계에 있었고 조선왕실과도 인척 관계에 있었다.
- 권상하 - 송시열의 문인이자 수제자로 노론의 원로였으며, 좌의정까지 지냈다.
- 김일경 - 소론 급진강경파인데, 경종 때 목호룡과 공모하여 신임사화를 일으켜서 승승장구했고 판서와 좌우참찬을 지내면서 노론 잔존세력들을 제거하려다가 영조 즉위 이후 전세가 역전되면서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다.
-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 숙종 말엽에서 경종 초의 노론 영수들로 '4대신'이라 불렸다. 실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으며 숙종과 야합하여 경종을 페세자하려고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섣불리 경종 길들이기에 나섰다가 삼수의 옥 사건으로 모조리 죽음을 맞는다. 이중 김창집과 이이명의 권세가 가장 강력했으며 김창집의 아버지는 위에 상술한 숙종, 현종 조의 재상이자 송시열의 애제자인 김수항인데 김수항 역시 환국으로 사사된다. 이이명도 위에 상술한 김만중의 사위에다가 대사헌 이민적의 아들이다.
- 조태구, 조태억, 최석항, 유봉휘, 이광좌 - 숙종 말엽에서 경종 초의 소론 영수들로 '5대신'이라고 불렸다. 노론 4대신이 숙청된 이후에 권세가 가장 강력했는데 이 중에서 조태구와 최석항의 권세가 가장 강력했지만, 영조 즉위 이후 권세가 조금씩 떨어진다. 그래도 조태억과 이광좌는 영조 때 좌의정이나 영의정까지 지내지만 죽은 후 '나주 괘서 사건'으로 관직이 추탈된다.
- 민진원, 정호, 이관명, 홍치중 - 영조 때 노론 영수들이며 영조 때의 '노론 4대신'으로 불렸다. 민진원은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이자 위에 상술한 민유중의 차남이며 숙종의 작은 처남이기도 하다. 영조 때 노론 4대신 중에는 민진원과 정호의 권세가 가장 강력했다. 홍치중은 탕평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민진원은 위에 상술한 송준길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 송상기 - 숙종, 경종 때의 문신으로 도승지와 대사헌을 수차례 지내고 대제학을 여러 번 지낸 것은 물론, 한성부 판윤과 6조판서, 좌우참찬 등 정경의 반열을 모두 거친 재상이고 게다가 송규렴의 아들에 송시열의 문인으로 노론의 핵심 인물이었다. 특히 이조판서를 무려 아홉 번이나 했고, 호조판서도 두 번이나 했으며, 예조판서도 무려 다섯 번이나 했다. 또한 공조판서도 두 번이나 했다. 형조판서의 자리에도 있었다. 경종 때는 병조판서로 있다가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고 배소에서 사망했다. 숙종의 신임하에 여러 사회개혁안을 많이 내기도 했다.
- 이만성 - 숙종, 경종 때의 문신으로, 김수항, 김수흥과도 인척 관계에 있고 남인 오시수의 증조부인 오백령과도 가족 관계였다. 숙종 때 '병신처분' 이후로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또한 경종 때도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노론의 핵심인물로 활약했지만 신임사화에 연루된 뒤에 귀양을 가서 죽는다.
- 권상유 - 숙종, 경종 때의 문신으로 권상하의 동생이며 송시열의 수제자였다. 노론의 핵심 인물이며 이조판서까지 지냈다.
- 이태좌 -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고, 위에 있는 영의정 이광좌의 형인데,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밑에 있는 아들 이종성도 영의정까지 지냈다.
- 최규서 - 경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하지만 소론 중에서는 온건파였고, 영조의 즉위를 지지했으며,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했다.
- 심수현 -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소론이었지만 노론과도 사이가 원만했고, 탕평책을 많이 주선하기도 했다.
- 이의현 -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위에 있는 좌의정 이세백의 아들이고 노론 강경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 김흥경 - 영조 때 역시 영의정을 지냈는데, 정순왕후와도 친척 관계에 있고 아들이 영조의 부마가 되면서 권력을 누린 재상이다.
- 서명균 -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영조의 탕평책에 찬성했고 아들인 서지수도 영의정을 지냈을 만큼 명문가를 형성했다.
- 김재로 -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노론 선봉으로 활약했다.
- 조관빈 - 아버지가 유명한 노론 4대신인 우의정 조태채이며 영조 때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는데, 노론 중진 중에 한 명이었다.
- 조현명, 조문명 - 영조의 탕평책에 크게 기여했으며, 모두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 송인명 - 영조의 탕평책에 상당히 많이 기여했으며, 좌의정까지 지냈다.
- 정우량, 정휘량 - 영조 때 각각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고 영조와 사돈관계가 되어서 막강한 가문으로 성장한다.
- 김약로 -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노론의 일원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 이천보, 이후, 민백상 - 영조 때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지냈고 사도세자의 스승들이었다. 이천보는 영의정을 세 번씩이나 지냈으며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외손자이자 인경왕후의 조카, 그리고 연안 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이후는 역시 명문가 출신으로 이시백의 5대손이며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민백상은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인 민진원의 손자로 우의정까지 지냈다. 하지만 사도세자 평양 원유 사건으로 음독자살을 했다.
- 유척기 - 노론이었으며 사도세자의 보호막 역할을 했고, 영의정까지 지냈다. 한 때 안동에 김상헌의 사당을 건립하려고 시도했지만 무산되었다.
- 이종성 - 좌의정을 지낸 이태좌의 아들로, 영의정까지 지냈으며 사도세자의 보호막 역할을 했다.
- 홍봉한 - 사도세자의 장인으로서 영조 시대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영조 때에는 홍봉한 외에도 그의 동생인 홍인한을 비롯한 풍산 홍씨 자체가 득세했다. 아래에 있는 홍국영 역시 홍봉한과 같은 풍산 홍씨.
- 김상로, 신만 - 노론 탕평당의 일원으로 모두 영의정까지 지냈으며 영조의 신임을 받으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 홍인한, 정후겸 - 영조 말년을 지배한 실세, 겁도 없이 정조를 어떻게 해보려다가 정조의 교묘한 대응에 박살났으며 정조 즉위 후에 모두 사사된다.
- 김귀주, 김관주 - 정순왕후의 친척들이며, 정조를 해치려 했다는 풍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고 실제로는 정조를 보호했다. 그리고 김관주는 순조 때 우의정을 지냈다.
- 김상복, 김양택, 한익모, 신회, 이사관, 이창의, 이은 - 영조 말에 정승을 지냈는데, 명문가 출신이고 게다가 홍봉한, 홍인한의 일파로 홍봉한 세력과 가깝게 지냈고 정조와도 가까웠다. 하지만 이들 중에 몇몇이 정조 즉위 후 척신세력 숙청 과정에서 홍봉한, 홍인한 계열 척신들과 가깝게 지낸 것이 발각되면서 김상복, 신회, 한익모 등이 유배를 떠났고,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양택은 아들 김하재가 역모를 꾸민 것이 발각되며 관직을 삭탈당했다. 다만 이사관, 이창의, 이은은 관직이 삭탈되지 않았고 편하게 죽거나 정조 때도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김상복, 한익모, 김양택, 신회도 나중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 김상철 - 영조 말기에 영의정을 지냈고 정조 때도 두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색이 옅고 청렴하여 영조와 정조의 신임을 받았고 오랫동안 국정을 보좌했으나 아들 의혹으로 삭탈관직된다. 그러나 후에 신원된다.
- 김치인 - 영조와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아버지 김재로와 함께 부자 영의정으로 유명하고, 정조의 탕평책 추진을 도왔다.
- 서명선 -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정조를 보호하고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웠지만 정책 면에서 정조와 대립을 하기도 했다.
- 정존겸, 이복원, 김익, 이성원, 이재협, 이휘지 - 정조 때 정승을 지냈는데 정조의 개혁을 도왔고 정조를 잘 보필했다.
- 홍낙성 -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정조의 즉위에 공을 세웠고 풍산 홍씨 일가 척신으로써는 정조의 정책에 많이 찬성했다.
- 김종수, 심환지, 유언호 - 노론 벽파의 영수들이며, 이덕일식 사관과는 달리 실제로는 정조와 가까웠다. 정조 사후 심환지는 영의정에 올라서 천주교를 탄압했다.
- 홍국영 - 정조의 신임을 얻어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일찍 숙청당했다. 그를 세도정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 홍낙순 - 홍국영의 숙부로 홍국영이 권력을 독점할 때 좌의정이었으나 홍국영이 실각하면서 같이 실각한다.
- 구선복 - 영조, 정조 때 무관이자 정치 군인으로, 황해도 수군절도사, 충청도 병마절도사 등을 하면서 지방 군권을 쥐었으며 포도대장도 하면서 경찰권도 쥐었고, 총융사, 금위대장, 훈련대장, 어영대장 등을 하면서 중앙 군권도 쥐었다. 또한 한성부 좌윤은 물론, 한성부 판윤까지 하면서 한성부를 총괄하기도 했고, 판의금부사도 하면서 의금부 수사권도 쥐었고 병조판서를 하면서 병권까지 쥐기도 했으며 형조판서를 하면서 사법권도 쥐고 공조판서도 했을 정도로 무관 출신으로는 조선시대 내각에 많이 입각을 했고 홍국영 세력의 측근으로 경찰권과 병권, 사법권과 지방과 중앙의 군권, 한성부 총괄권, 의금부 총괄권 및 수사권, 치안유지권도 쥐면서 권신으로 행사하지만 잔인하고 극악무도하고 포악하여 인심을 잃었고 방자하게 행동하다가 역모를 꾸민 죄로 사형을 당한다.
- 서매수, 한용귀, 김재찬, 이병모, 이시수, 김사목, 이경일 - 정조의 신임을 받았고 순조 때 영의정과 좌의정 등의 정승을 지낸 신하들이며, 정조 사후 시파로써 김조순의 세력을 후원했다.
- 이서구, 임한호 -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정조 사후 순조 때 우의정에 올랐으며 김조순 세력을 상당히 많이 후원했다.
- 남공철, 이상황, 심상규, 이존수, 정만석, 박종훈, 홍석주 - 젊은 시절에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순조 때 여러 벼슬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에 오르면서 권력을 행사했고 김조순 세력을 후원했다.
- 김조순, 김좌근, 김유근, 김문근, 김수근, 김흥근, 김홍근 - (신)안동 김씨 일파. 김조순은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이긴 했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점에선 권신에는 속하나 간신으로 보기는 좀 애매하다.[15] 그리고 김좌근, 김홍근, 김유근 등을 비롯한 그 후손들의 막장짓들로 조선은 뿌리가 거의 뽑힐 지경에 이른다. 그 외에 풍양 조씨의 조병헌, 조병구, 조득영, 조만영, 조인영 등이 득세했으나 안동 김씨의 수준을 넘어서진 못했고 철종 조에 이들이 대거 죽으면서 풍양 조씨 권세는 사실상 끝난다.
- 조만영, 조인영, 조득영, 조병구, 조병현 - 풍양 조씨 일파. 신정왕후의 외척으로 외손자 헌종이 즉위하면서 (신)안동김씨와 경쟁했고, 막강한 권력을 행세했다.
- 권돈인 - 헌종의 총애를 받은 중신이자, 영의정까지 지낸 원로대신이다. 안동김씨와 대립했지만 결국 안동김씨 세력들의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서 죽게 된다.
- 이지연, 이기연 형제 -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헌종의 총애를 받아서 정승과 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천주교를 탄압한 전력이 있다.
- 정원용 -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네 명의 군주를 섬겼으며, 조선 말의 유일한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영의정까지 지냈으며 정광필의 후손이기도 하다.
- 김도희, 박영원, 이헌구, 박회수 - 철종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조선말의 국정을 보필했다.
- 흥선대원군 - 섭정이고 고종의 생부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아들 고종의 신하였다. 이는 '대원군의 가마 논쟁'에서 드러난 것인데 본래 조선의 예법에 종친들은 여덣 명이 드는 '팔인여'를 타고 정승급 대신들은 4명의 가마꾼이 드는 교자를 타는 것이 예법인데 안동 김씨 일파는 대원군에게 종친의 예를 적용하려 했으나 대원군은 끝내 대신들처럼 교자를 타고 다녔고 조대비 역시 대원군에게 교자를 타도록 했다. 본래 종친은 정치 참여를 하지 못하는 게 원칙이므로 안동 김씨가 대원군에게 오히려 더 사치스런 팔인여를 타게 하려고 했던 것. 하지만 고종이 20세가 넘어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조정을 장악하려고 한 것은 얄짤없는 권신의 모습이다. 단적으로 고종이 15세가 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완전히 뒤로 물러난 것이나, 최익현이 고종이 20세가 되었으니 친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을 처벌하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실권에서 밀려난 대원군은 고종을 밀어내고 다른 아들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죽을때까지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지 몇개월 뒤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도 황제의 친할아버지라고 순종때 대원왕 작위를 받았다.
- 민승호, 민규호, 민태호, 민겸호, 민영규, 민영소, 민영준, 민응식, 민영익, 민형식 - 여흥 민씨 일파. 고종의 외척으로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의 주도세력으로 꼽힌다. 그리고 특히 민승호, 민겸호, 민영준 등은 탐관오리로 나라를 망쳤다. 그나마 괜찮은 인물은 급진개화파였다가 온건개화파로 전향한 덕분에 악당취급당한 민영익과 함께 민씨일족의 신진으로 유명하였던 민영환 정도다.
- 김홍집 - 갑오개혁을 총지휘한 인물이자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대한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다. 당대 인사 중 업무능력이 탁월해서 여러 세력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관파천으로 인해 완전히 역적으로 몰려서 죽음을 맞이했다.
[1] 위의 남은의 형이다. 하지만 동생과 뜻이 달라 제거당하지 않았다.[2] 당시 그래도 이직이 실세인 하륜과 사촌동서 지간이었기 때문에 나름 파직으로 끝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태종의 왕권 강화 노력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3] 심온과 민무휼은 사돈 간이고, 이직은 민무휼의 장인인데, 심온과 이직은 민무휼을 통해서 인척으로 엮어져 있었던 것이다.[4] 이 일파에는 수양대군 포함한 종친들은 당연하고 이후에 사육신에 포함되는 집현전의 신진관료들까지 모조리 포함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진급 불만이다. 어린 군주 주변을 세종 시기부터 활동하던 노대신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그 이하층에서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자세한 것은 계유정난 참고.[5] 1998년에 방영된 KBS의 왕과 비가 이를 잘 묘사했다.[6] 다만 윤필상은 행적이나 처신이 별로 좋지 못했기 때문에 후대에는 사관들의 비평을 받는다.[7] 성종 때는 바른 말 잘하기로 유명했으며, 권신 중의 권신인 한명회를 탄핵한 적도 있다.[8] 연산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위를 능멸하는 풍습"[9] 원래는 중종반정 세력이 신수근을 자기편으로 끌여들일려고 회유를 시도했지만 거절했다.[10] 이렇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바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무고로 내쫓았기 때문이다.[11] 허적과 김만기, 김만중 형제는 인척이기도 하다.[12] 정확히 말해서는 그의 삼촌인 김우명이 바로 숙종의 장인이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삼촌은 아니다.[13] 이로 인해서 남인 재집권 초반기에는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쪽에 붙어있는 조정 대신들과 남인 중진들이 많았지만 중반기 이후 민암 쪽의 세력이 강해진다.[14] 뒷날 홍경래의 난이 터지면서 그의 주장은 예언이 되었다.[15] 물론 위선적인 행동으로 보는 것도 설득력이 있지만 적어도 간신으로 보일 만한 행동은 겉으로는 저지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