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03:13:22

류혁연

유혁연에서 넘어옴
남인
南人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동인
선조
(1575 ~ 1608)
이황 정개청 김명원 김성일 류성룡
우성전 정구 김응남 이원익 심희수
허성 윤승훈 신식 이광정 신용
이덕형 정경세 정온 이성구 이준
광해군 - 인조
(1608 ~ 1649)
근기남인 (북인) 영남남인
정구 장현광 윤선도 윤휴 이현일
이하진
효종 - 숙종
(1649 ~ 1720)
윤선도 허목 민희 민점 윤휴
목내선 류형원 이서우 김덕원 민암
이의징 신경제 이운징 신필청 장희재
청남 탁남
허목 홍우원 윤휴 허적 권대운
이원정 오시수 오정창 류혁연 허견
경종 이후
(1720 ~ )
실학 (중농학파) 탁남
이익 이중환 류득공 정사효 이인좌
청남
신서 공서(벽파)
채제공 이가환 이승훈 신후담 안정복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홍낙안 목만중
세도 정치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순신 원균 이순신 이시언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류형 이경준 이운룡 이기빈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이경준 우치적 성우길 이정표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이영 류지신 정기룡 김예직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정기룡 원수신 구인후 이수일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이항 구굉 신경원 변흡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구인후 신경인 윤수 신경인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류림 류정익 이확 류림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이현달 이완 김응해 류정익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황헌 이원로 남두병 류혁연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정익 조필규 김적 박경지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김시성 정전현 박경지 이지형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이도빈 류비연 김경 류여량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신여철 이지원 노정 신유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윤천뢰 이인하 전동흘 민섬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원상 변국한 김세익 류중기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이세선 신여철 이성뢰 심박
제69대 제70대 제71대 제72대
목림기 최숙 김중기 이기하
제73대 제74대 제75대 제76대
정홍좌 이홍술 민함 류성추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원덕휘 홍하명 이창조 이상전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남오성 오중주 정홍좌 조미중
제85대 제86대 제87대 제88대
김중원 이우항 이석관 이택
제89대 제90대 제91대 제92대
윤의 이상집 오중주 김중기
제93대 제94대 제95대 제96대
이수민 이봉상 신익하 남태징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윤오상 이재항 이복연 김흡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이수량 정수송 박찬신 김집
제105대 제106대 제107대 제108대
윤택정 구성익 조경 송징래
제109대 제110대 제111대 제112대
이우 이의풍 이언상 장태소
제113대 제114대 제115대 제116대
정찬술 구선행 조동점 김윤
제117대 제118대 제119대 제120대
이장오 이경철 오연제 이윤성
제121대 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이태상 이은춘 정여직 윤태연
제125대 제126대 제127대 제128대
이주국 이한응 이국현 장지항
제129대 제130대 제131대 제132대
원중회 조제태 구현겸 조완
제133대 제134대 제135대 제136대
이방수 이창운 장지항 이경무
제137대 제138대 제139대 제140대
서유대 신대겸 구이겸 이한창
제141대 제142대 제143대 제144대
이방일 김영수 류진항 심대겸
제145대 제146대 제147대 제148대
조심태 이한풍 신응주 이윤경
제149대 제150대 제151대 제152대
서유방 이득제 신대현 이득제
제153대 제154대 제155대 제156대
이유경 윤득규 임률 이인수
제157대 제158대 제159대 제160대
이윤겸 류효원 이당 신대영
제161대 제162대 제163대 제164대
오재광 조계 서영보 신홍주
제165대 제166대 제167대 제168대
서춘보 오의상 신경 박기풍
제169대 제170대 제171대 제172대
조화석 이석구 이유수 김영
제173대 제174대 제175대 제176대
이항권 류화원 이완식 임성고
제177대 제178대 제179대 제180대
이정회 이승권 이응식 허계
제181대 제182대 제183대 제184대
백은진 서상오 김건 류기상
제185대 제186대 제187대 제188대
이응서 이규철 김한철 이희경
제189대 제190대 제191대 제192대
류상정 임태영 심락신 이경순
제193대 제194대 제195대 제196대
신관호 정규응 이재봉 김건
제197대 제198대 제199대 제200대
이현직 이현직 정규응 채동건
제201대 제202대 제203대 제204대
이주철 권용섭 이종승 신환
제205대 제206대 제207대 제208대
이규석 정낙용 정기원 이원회
제209대 제210대 제211대 제212대
정운익 이규안 민경호 정기택
제213대 제214대 제215대
민형식 민영옥 홍남주 }}}}}}}}}

류혁연
柳赫然
본관 진주 류씨[1]
출생 1616년 12월 19일
사망 1680년 5월 20일 (향년 63세)
회이(晦爾)
야당(野堂)
시호 무민(武愍)
부모 부친 - 류효걸(柳孝傑)
모친 - 의령 남씨 남이흥(南以興)의 딸
부인 전주 이씨(1617 ~ ?) - 이억(李繶)의 딸[2]
붕당 남인, 탁남

1. 개요2. 생애
2.1. 당쟁과 유혁연2.2. 경신환국
3. 가족관계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무신. 남인 집권기 당시 병권의 상징이었다.

2. 생애

1616년(광해군 8) 12월 19일 대대로 무반으로 출사한 집안에서 황해도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류효걸(柳孝傑, 1594. 8. 18 ~ 1627. 8. 27)과 어머니 의령 남씨(1594. 10. 28 ~ 1645. 6. 4)[3]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를 갖고 있다가, 1644년(인조 22) 정시(庭試) 무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해 덕산현감, 선천도호부사 등에 제수되었다. 1653년 6월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고, 이듬해엔 수원부사를 역임했다.

효종서인, 특히 산당의 제어와 북벌론[4]을 실행하려 이완(李浣)과 함께 승지로 파격승진된 뒤 북벌론을 지원했다. 이후 충청병사, 삼도수군통제사, 공조참판, 어영대장, 형조참판, 한성좌윤 등을 지냈다.

2.1. 당쟁과 유혁연

남인 계열이라 송시열에게 미움을 샀고,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한 김수항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피혐한 뒤 한직 동지중추부사와 지중추부사를 지내기도 했다. 다만, 이때 어영대장직에선 물러나지 않았다. 1669년엔 어영대장의 직위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하여 도제조 잠시 보직을 옮겼다 우포도대장으로 복귀했다.

여기서 그의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훈련도감 소속 5,000명 군사들에게 쓰이는 운영비가 많이 들자, 그는 훈련별대를 분리시켰다. 급료병의 수는 줄어서 운영비는 덜 들고 군액은 그대로였다. 훈련별대는 금위영(禁衛營)으로 합쳐진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현종 앞에서 현종이 조총의 길이를 묻자 손으로 조총 길이만큼 벌려서 "이만합니다"라고 했는데 그걸 옆에서 사관이 우물쭈물하면서 못 받아 적고 있는 것을 보고 사관을 욕하면서 '上問鳥銃之長於柳赫然. 然擧手尺餘, 以對曰如是'[5]라고 쓰면 되지 그걸 뭘 고민하고 앉았냐라고 일갈했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앞서 효종이 활 쏠 때 기존의 조선에서 쓰던 숫깍지 대신 만주족이 쓰는 암깍지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면서[6] 만주족들이 하는 것처럼 깍지를 밤낮으로 끼고 다니면서 손에서 풀어 놓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숙종 6년에 유혁연이 김석주와 함께 암깍지 대신 숫깍지를 다시 쓸 것을 진언하면서 "지금 두어 겹으로 된 갑옷을 달아 놓고 쏘아 보니 혀가 있는 것(숫깍지)으로는 꿰뚫을 수 있는데 혀가 없는 것(암깍지)으로는 꿰뚫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숙종은 일단 효종이 명한 것이라 함부로 고칠 수는 없지만 숫깍지도 암깍지랑 같이 사용할 것을 권했다고.

이로 인해 공조판서로 다시 중앙 정계에 발을 들였으나 또 문신들이 반발하여 잠시 중추부로 갔다가, 형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다시 훈련대장, 한성판윤, 포도대장 등 요직을 지낸 뒤 역임하고 본업인 훈련도감에 훈련대장으로 돌아왔다. 이때 윤휴의 북벌론에 '윤휴는 일을 맡아보지 못해서 쉽게 말을 하옵니다'[7]라고 여타 당시 대신들과 같이 반대 입장을 보였다.

2.2. 경신환국

허적의 연회 때, 숙종은 비가 오는 것을 보곤 유악과 차일을 가져가 주라고 했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류혁연, 김만기와 신여철을 패초(부름)한다. 여기서 유혁연의 훈련대장직은 김만기에게 넘어가며 유혁연은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가 되고, 남인은 병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옥사가 시작된다. 허견과 인평대군의 삼남인 복선군김석주를 제거하기 위해 체찰부를 설치하고, 심지어는 숙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복선군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한 발언을 했다. 그후 고변자 정원로가 말하기를, 2,000명 정도의 군사들을 사적으로 훈련시켜 김석주를 제거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유혁연에게 책임이 갔다. 유혁연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반박했고, 잠시 유배된다. 위리안치까지 갔고,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결국 사사된다.

정조 때 신원된다.

3. 가족관계

. *. 동생: 류탁연(柳卓然)
( * 동생 : 류병연(柳炳然) 백부 : 류충걸(柳忠傑) 의 아들로 4촌지간)* 부인 : 전주 이씨 - 이억(李繶)의 딸* 손자 : 류득장(柳得章)* 외손부[10] : 복녕군의 딸* 백부 : 류충걸(柳忠傑)[11]* 숙부 : 류신걸 류예걸 류제걸 류지걸·류의걸

부인은 이억(李繶)의 딸 전주 이씨[12]이며, 아들은 누구고 몇 명이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 1남 1녀는 둔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해남현감 유득장이 류혁연의 손자인데, 더한 짓을 저질렀다며 국문하라는 기사와, 복녕군의 딸이 류혁연의 외손자와 혼례를 치렀다는 기사가 나온다.


[1] 이류계 북부령공파 22세 연(然) 항렬.[2] #[3] 남이흥(南以興)의 딸이다.[4] 다만 효종의 북벌론은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5] 해석하면 "임금께서 조총의 길이를 유혁연에게 물으시니, 이에 손을 한 자 남짓으로 벌리고 이로써 대답하기를 이와 같나이다 하였다." 정도.[6] 숫깍지와 달리 암깍지는 튀어나온 부분이 없이 완전한 반지 형태를 띤다.[7] 한마디로 "군사 업무를 맡아본 적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전쟁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8] 경원부사[9] 삼도수군통제사[10] 외손자의 아내[11] 주막 항목에 이 사람과 수원부사를 지내던 시절 류혁연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