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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폴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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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Paul Sar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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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BDBDBD,#5D5D5D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수상거부]
본명 <colbgcolor=#fff,#191919>장폴 샤를 에마르 사르트르
(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출생 1905년 6월 21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80년 4월 15일 (향년 74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모교 파리 고등사범학교
파리 대학교 (철학 · 사회학 · 심리학 / 학사)
경력 기관 경력 없음[2]
직업 철학자, 작가
사상 대륙철학, 현상학, 실존주의, 서구 마르크스주의, 제3세계주의, 프랑스 신헤겔주의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3]
종교 무신론[4]
서명
파일:장폴 사르트르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전기3.2. 후기
4. 어록5. 작품
5.1. 소설5.2. 철학서5.3. 희곡
6. 관련 문서7. 여담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프랑스철학자이자 소설가, 극작가.

실존주의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명명한 최초의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알베르 카뮈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자이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 및 현상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실존주의의 교황이라는 별명이 있다.

유명한 페미니스트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며 보부아르와는 부부적인 관계 이외에도 학문적인 동반자로서 서로의 원고를 검토해주는 평생 관계를 유지했다.[5]

그 유명한 소설적 자유에 대한 개념을 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들은 철학에는 관심이 없더라도 사르트르라는 이름은 익숙한 경우가 많다.

또 반자본주의, 친 공산주의적 사상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해 파블로 피카소, 존 레논, 알베르 카뮈 등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좌파 예술가로도 불린다.

2. 생애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바티스트 사르트르(Jean-Baptiste Sartre)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의 프랑스 해군 장교, 어머니독일어 교사였던 샤를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의 딸 안마리(Anne-Marie)이고, 1904년에 결혼했다. 그가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아버지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후유증인 열병으로 사망하고, 10살이 될 때까지 외가에서 엄격한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 1844년~1935년) 슬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6] 후일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선천적 근시사시(斜視)[7] 그리고 외갓집의 낯섦 등으로 이 시절에 겪은 심리적 부담에 대해 밝히고 있다. 한편 외할아버지의 깊은 교양은 사르트르의 학문적 탐구심을 크게 자극하였고, 이에 사르트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외갓집과 외할아버지의 관심을 받기 위해 글쓰기에 점점 전념했다고 한다.

파리의 부르주아지 지식인 계층에서 자라난 사르트르는 1915년에 파리의 명문 리세(중고등학교) 앙리 4세 리세 ・ 루이 르 그랑에 입학하는데, 이때에 훗날 작가가 되는 폴 니장(1905년~1940년)을 알게 되었다.[8] 그로부터 2년 뒤인 1917년 어머니가 당시 공장장 조제프 망시와 재혼하게 되면서, 의붓아버지를 따라 1917년에 라로셸(La Rochelle) 학교로 전학하며 이주하게 되는데, 사르트르는 전학한 곳에서 잘 적응하지 못했고[9] 이 시기에 어머니의 돈을 훔쳐 할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한 일이나, 아름다운 소녀에게 다가갔다가 실패하고 자신의 추함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라로셸에서의 그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을 염려한 가족들에 의해 사르트르는 1920년 다시 앙리 4세 리세로 돌아왔고, 폴 니장과도 재회하였다.

1922년부터 2년 동안 리세 · 루이 르 그랑에서 국립 고등사범학교인 파리 고등사범학교 입학을 위한 준비반 과정에서 니장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해에 간행한 동인지 「무명 잡지」(Revue sans titre)에 단편소설 「병든 사람의 천사」를 발표하였는데, 고등사범학교에는 불합격되었다가 이듬해인 1924년 고등사범학교에 수석 입학한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레몽 아롱모리스 메를로퐁티 등과 교제하였으며, 1927년에는 니장과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교정하기도 했다. 1928년에 아그레가시옹(1급 교원 자격) 철학시험에 낙제하였는데, 사르트르의 지인들은 모두 이에 놀랐지만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1929년 수석으로 합격했다.[10] 같은 시험의 차석은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르트르의 집을 방문한 그녀에게 사르트르는 1929년에 계약 결혼을 제안하게 된다.

사범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해 11월 프랑스 육군에 입대하여 기상 관측병으로 18개월간 복무한다. 독일 육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도 있었으나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제대 후인 1931년 그는 파리와 파리 근교에 있는 르아브르의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 이때 그는 20페이지 분량의 「진리의 전설」을 집필하는데, 순전히 사르트르 자신의 지식만으로 저술된 이 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출판은 거부되었다. 1932년 베를린 프랑스 문화원의 강사로 있던 레몽 아롱으로부터 처음으로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에 관해 듣고,[11] 다음 해에 프랑스 문화원의 장학생으로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현상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한다. 1935년에 상상력에 대한 실험을 위해 친구였던 의사 라가슈로부터 메스칼린 주사를 받았는데, 이때 온몸을 게와 낙지가 감싸고 도는 환각을 겪었고 때문에 반년 동안 우울증 증세로 괴로워했다.[12]

파리로 돌아와 다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36년 단편 「벽」을 완성했고 소설 《구토》를 출판(1938년)함으로써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소집되었다가 1940년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1941년에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13]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파리로 귀향, 메를로퐁티 등과 같이 대독 저항 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1943년에 마르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존재와 무》를 내놓아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그리 활발하지 않은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당시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인 알베르 카뮈를 알게 된다.

1943년에 발표한 희곡 「파리떼」는 독일군 점령하에 파리에서 뒤랭에 의해 상연되었다. 그 후 「출구는 없다」가 성공을 거둔 이후 「무덤 없는 사자(死者)」 「공손한 창녀」 「더러운 손」과 「악마와 신」 「네크라소프」 「알토나의 감금자」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고 알렉상드르 뒤마의 「키인」,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의 번안(飜案) 등을 합하여 실존주의 연극시대를 가져오게 했다. 사상적인 뒷받침과, 고전적인 극작법의 기술과, 철학자로는 보기 드문 무대적인 감각과, 시사적인 소재 등을 고루 갖추어 세계적인 성공을 얻었다. 양식이나 내용상 희곡으로서의 신선미는 약간 부족하나 연극에 코뮤니즘과 크리스차니즘 이외의 사상을 가져오게 한 것은 큰 공적이다. 그리고 종전 후인 1945년 10월 제3의 길을 알리기 위한 잡지 『현대』지를 창간하여 실존주의에 대해서 논하면서 소설, 평론, 희곡 등 다채로운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다. 또 1945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제3의 정치 세력을 위해 민주 혁명 연합 준비 위원회를 결성했으나 친미화, 우경화로 내부 분열이 생겨 1949년 11월 해산되고 말았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벌어지자 사르트르도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에 동조하며 대한민국이 북한을 침략했다가 격퇴당했다 말하면서, 1950년대 초 대한민국의 북침설을 주장하며 북한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14] 북침을 확신했다가 레이몽 아롱, 메를로 퐁티[15]와 심하게 다퉜다. 그 후 북한의 남침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자 사르트르는 다시 남침유도설로 입장을 바꾸는데, 이후로도 죽을 때까지 북한 정권을 계속 옹호했다.[16] 그러나 그도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소련 지지를 거둔다.

1960년에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주저인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출간했는데, 이것은 그의 정치적 참여(앙가주망) 정신을 잘 보여준다. 1964년 <말>을 출판한 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올랐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자 사르트르는 버트런드 러셀 등과 함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반전시위를 벌였다.

1968년 5월의 68운동에서 사르트르는 청년들을 향해 정치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하였고, 그를 체포할 것을 권하는 참모들에게 당시 샤를 드골 대통령은 "내버려 둬. 그도 프랑스인이야.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가둘 셈인가?" 라면서 사르트르의 체포를 말렸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한국의 시인 김지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되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을 때,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의 번역본을 받아 읽어보고는 곧바로 석방 호소문에 서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김지하는 풀려났다.

이후 문학 저술을 계속해 1971년 귀스타브 플로베르 평전 『집안의 천치』 1, 2권을 출판하였으나 1973년에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문학 저술을 중단했다. 특히 사르트르에게 실명은 죽을 때까지 큰 고통을 주었다.

1980년 4월 15일에 지병인 폐기종이 악화되어 치료를 받다가 병원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프랑스의 신문사들에 특보로 실렸으며 그의 장례행렬에 무려 5만 명이 모여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3. 사상

3.1. 전기

사르트르 철학은 기본적으로 에드문트 후설현상학의 변용이다. 국내에는 소위 "실존주의" 딱지가 붙어 가려져 있지만, 전기 사르트르 철학은 현상학의 연장선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현상학의 핵심 개념은 "지향성"(intentionality)이다. 지향성이란 의식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의식일 수 밖에 없다는 개념이다. 의식은 항상 예를 들어 사과에 대한 의식이거나 나무에 대한 의식이거나 타인에 대한 의식이란 뜻이다.

사르트르는 이 지향성 개념을 급진화하여, 의식은 항상 외부의 어떤 무엇에 대한 의식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의식은 외부 대상에 기생해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맥락에서 외부 실재를 의식의 내용으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 에른스트 마흐버클리실증주의라든가 — "소화철학"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의식이 항상 어떤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면, 의식 자신에 대한 의식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르트르는 여기서 후설에 대해 적인 비판을 가한다. 후설 현상학에서 세계는 "초월론적 의식"에 의해 "구성"된다. 초월론적 의식은 경험적 자아와 경험적 세계 양자를 함께 구성한다. 그런데 이 초월론적 의식이 세계를 구성한다면, 이 초월론적 의식 역시, 구성된 것이 아닌가?[17] 사르트르는 초월론적 의식 역시 구성된 것이고, 구성된 "자아"에 불과하다고 『자아의 초월성』에서 주장한다. 나아가 자아는 의식이 사후적으로 구성한 것, 그러니까 의식 외부에 있는 것이라고 논한다. "자아는 의식의 거주자가 아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의식이 어떠어떠하다는 모든 주장은 의식이 구성한 "자아"에 대해 말하는 것에 불과하지, 구성하는 의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의식 자체는 우리에게 소여될 수 있는가? 소여되는 순간, 그것은 의식이 구성한 "자아"가 아닌가? 현상학의 기본 주장은, 소여되는 것, 즉 현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칸트의 물자체니 그런 건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의식은 소여될 수 없는데, 이것이 물자체와 다를 것이 있는가? 따라서 사르트르는 의식이 무라고 주장한다. 무이기에 본질이 없고, 그저 실존할 뿐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의 의미이다. 무이기에 항상 사물에 기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헤겔을 빌려와 사물을 "즉자존재", 즉 그 자체로 있는 존재, 의식을 "대자존재", 즉 무엇에 대한 존재로 규정한다. 『존재와 무』의 제목에서 전자가 "존재"이고 후자가 "무"이다.

그런데 사르트르에 따르면 의식은 즉자대자존재, 즉 신이 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의식은 존재의 3번째 영역인 "대타존재", 즉 다른 의식을 필요로 한다.

의식은 시선을 통해 상대를 즉자화하고 자신을 대자화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나 자신은 여러 모습이 있을 수 있다. 그날 따라 배가 고파 밥을 허겁지겁 먹을 수도 있으며, 그날 따라 속이 이상해 밥을 깨작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타인이 나를 보기에 나는 그저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으로 고정되어버린다. 즉 본질이 생기고, 고정되어버리고, 즉자존재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시선이다.

그런데 의식은 즉자이자 대자가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의식은 즉자대자존재가 되기 위해 타자, 즉 대타존재의 시선을 요한다. 그러나 타자의 시선을 통해 내가 즉자로 되는 순간, 나는 대자이기를 멈춘다. 그리고 내가 타자를 바라보는 순간, 타자는 즉자로 변해 나를 즉자로 만들어줄 시선을 잃는다. 따라서 의식은, 타자에 의해 대자로서 즉자가 되어야 하지만, 타자에게 자신을 대자로 볼 것을 강제하는 순간 그 타자는 시선을 가진 대자가 아니라 나에 의해 고정된 즉자이다. 애초에 즉자이자 대자인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을 무용한 정열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대타존재로 삼아 시선을 돌리는 경우는 어떨까? 사르트르는 이를 자기기만이라고 하고, 여러 예시를 들어 그것이 실패함을 보인다.[18]

3.2. 후기

4. 어록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19]
타인은 지옥이다. (L'enfer, c'est les autres.)[20]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L'homme est condamné a être libre.)
모든 것이 해결되어 왔다. 사는 법 빼고는.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수중에 달려있다.
무릎 꿇고 사느니 일어서서 죽는게 낫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함 속에 존재를 이어가다가 우연하게 죽는다.
나는 존재한다. 그게 전부이고, 그래서 구역질이 난다.
3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간이다.
체 게바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다.
반공주의자는 다. 나는 이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바꾸지 않을 것이다.
배신자는 죄인의 기생충이다.
인생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이다.
본 문장은 사르트르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21]

5. 작품

5.1. 소설

5.2. 철학서

5.3. 희곡

6. 관련 문서

7. 여담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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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집권 이후로는 좌파 진영의 인사로 분류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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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거부] 사르트르 본인은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2] 사르트르는 강단에 서지 않은, 몇 안 되는 영향력 있는 20세기 철학자이다.[3]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감과 소련에 대한 찬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좌파적 경향의 정치 참여는 잘 알려져 있으나, 놀랍게도 사르트르는 공산당 당원이 된 적은 없다.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공산주의자가 된 것도 상당히 나중의 일로, 스페인 내전 이후에서야 공산주의적 성향이 드러난다. 그리고 1952년부터 1956년까지 공산당과 제휴관계를 맺었지만 1956년 헝가리 혁명을 계기로 프랑스 공산당과도 단절했고,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현실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의미로 마오주의를 지지했다.[4] 말년에 메시아주의 유대교적인 믿음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무신론자였다.[5] 보부아르는 현대 페미니즘의 원론을 제시한 <제2의 성>의 저자이다. 철학 교수 자격 시험에서 보부아르는 최연소 차석을 기록했고 사르트르는 수석을 기록했다.[6] 샤를 슈바이처는 소르본 대학교의 독문학 교수로서 훗날 의료선교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백부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모친과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사촌, 사르트르와 슈바이처는 오촌 관계가 된다.[7] 독감 후유증 때문에 각막에 백반이 생겨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게 결국 사시로 발전했다고 한다.[8] 덧붙여 2002년에 제국 이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에마뉘엘 토드는 니장의 손자이다.[9] 사르트르 본인은 이 시기가 '좌절의 세월'이라고 술회했다. 그런데 이건 사르트르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등 본인이 너무 설쳐댄 탓도 있다.[10] 참고로 폴 니장도 같은 해에 합격했다.[11] 1929년 후설이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한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를 놓친 것으로 보인다.[12] 갑각류에 대한 공포는 이후 평생 지속되었다.[13] 사시 증상을 실명이라고 우겨서 군의관을 속여 나왔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독일군에게 협력했다는 음모론으로 발전하기도 한다.[14] 출처:국사편찬위원회/한불수교사#,#,#,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2004년)[15] 메를로퐁티현실사회주의 체제로 인해 비롯되는 폭력에 회의감을 느꼈는데, 이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사이에 현상학에 대한 견해 차이 및 성격 차이로 인한 갈등과 더불어 두 철학자의 사상적 결별로 이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Jackson, Debra. Sartre Studies International 6, no. 2 (2000): 67-70. Accessed March 16, 2021. http://www.jstor.org/stable/23513020.)[16] 참고로 북침설과 남침유도설은 모두 완전히 사장된 학설이다. 한국사학계에서는 추측성이 강한 연구는 사라졌으며, 이미 박명림 교수의 연구로 '북한에 의한 남침설'이 정설임이 확인되었다. 처음 주장했던 1950년대와 분명 다르다. 미국의 자료와 소련 붕괴로 인해 전달받은 자료로 연구가 진행되었고, 지금도 남침설을 증명해주는 새로운 증거가 구소련 자료에서 나오고 있다. 사르트르가 생존하던 1900년대 중후반기에는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정보와 실상들이 잘 알려지지 않던 시대였다.[17] 실제 논의는 더 복잡하지만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18] 헤겔의 인정투쟁이 생각났다면 정답이다.[19] Jean-Paul Sartre,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Paris: Nagel, 1970, p. 17[20]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 나온 대사이다.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세 남녀가 지옥에 갇힌 후 살아있을 때처럼 비극적인 치정관계로 치닫는 내용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지만 실존을 위해서 타인을 필요로 하며 그런 타인의 감시하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이 대사를 제목으로 인용한 것이 웹툰 타인은 지옥이다.[21] 프랑스인인 사르트르가 B, C, D 등 영어 단어여야 성립되는 문장을 썼을 리도 없을 뿐더러, (프랑스어로 "탄생"은 "Naissance", "죽음"은 "Mort"로 영어와 많이 다르다) 정확한 출처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같은 내용의 영어 글귀는 2010년 이전에 여러명의 인도인 구루들이 말한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2013년도 쯤에, 일부 개신교단에서 이 말을 사르트르의 말로 둔갑시켜 인터넷 선교하는 데 사용했는데, 때마침 'B와 D 사이의 C는 치킨(Chicken)'이라는 드립이 인터넷에 유행하면서, 이 말이 아예 사르트르의 말로 굳어져 버리고 아예 교과서에도 들어갔다. 2020년 기준,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의 영향으로, 본 문장이 사르트르의 말로 미국 등지에 역수출되고 있다.[22] 사르트르의 자전적 소설이다.[23] 정확히 말하자면 저서라기보다는 연설문에 가까운데 이는 이 책이 그가 한 동명의 연설을 엮어 낸 책이기 때문이다.[24] 당시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을 텐데 저런 이야기를 골랐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것이다.[25] 카뮈의 <부조리와 반항의 관계>에서 공산주의와 소련의 정치 현황에 대한 카뮈의 날선 반감과 함께 폭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던 카뮈의 내면을 짐작하게 한다.[26] 이는 서구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대부분이 취했던 자세로, 게오르크 루카치, 루이 알튀세르도 소련과 공산당 지도부에 개인적으로 당한(?) 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반면 알튀세르 이후의 세대인 샹탈 무페 등 소위 말하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비 공산당, 비 소련, 비 중국의 경향이 두드러진다.[27] 인터내셔널가 1절의 가사이기도 하다.[28] 사실 유머감각이 있어 사람들을 잘 웃기는 성격이었다.[29] 프랑스가 세속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적인 색이 강해지면서 그 서유럽에서도 성관계가 무척 자유로운 편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나 파리 코뮌 등의 역사적 사건 이전의 프랑스는 지금의 한국보다 보수적인 나라였으며, 성관념에 대한 역사적 변혁이 많았다. 프랑스도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많기도 하고 개인에 따라 성관념은 천차 만별이기 때문이다.[30] 말년까지 계약결혼을 계속했으며, 아를레르를 양녀로 들였다.[31] 예수를 받아들이는 유대교[32] 그전에도 프랑스의 소설가 장 주네의 책에 서문을 본문보다 길게 쓴 적도 있었다고 한다.[33] <광기에 대한 잡학사전> 미하엘 코르트, 을유문화사.[34] 재미있는 사실은 드골은 우리나라의 김구처럼 現 진보진영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우파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르트르에 대해서도 진보적인 지식인·철학가라면서 좋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이러니.[35] 정작 동구권인 유고슬라비아는 북한과 소련의 북침설에 만평까지 내놓으면서 비웃었다. 이것은 당시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정권이 친서방 정책으로 소련은 물론 북한과도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36] 이 주장을 전체주의론이라고 한다. 1950년대 유행했다. 대표적인 주장자로는 한나 아렌트가 있었는데, 전체주의 = 파시즘이란 공식에 입각해서 전체주의 사회인 소련이 파시즘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이는 1970-80년대 수정주의에 의해서 반박되었다. 파시즘은 전체주의를 포함하고 있긴 하나 그 하나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37] 아예 한술 더떠서 보수적인 자유주의자들같은 경우에는 아예 '사회주의라는 사상 자체가 정부가 국민을 통제할 것을 주장하기에 파시즘이랑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주장을 한 대표적인 자유주의자로는 프레디 하이에크가 있다.[38] 동시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려진 사회개혁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여져서 시위세력 간의 동질감이 있었고, 68운동 주도세력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39] 참고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사실 동료 공산주의자였던 메를로 퐁티였는데, 위에 나온 것처럼 정작 퐁티는 현실공산주의가 독재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반대로 돌아서게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40] 덤으로 '오르셰'도 틀린 발음이다. 외래어 표기에도 맞지 않는다.[41] '샤르트르'로 발음이 되기 위해서는 'Sartre' 가 아닌 'Chartre' 정도로 표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