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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14대 왕 선조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2. 긍정적인 평가
2.1. 임진왜란 전의 인재 등용
선조는 명종이 죽기 전에 보였던 처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무감각이 좋은 편이었다.[1] 재위 10년 즈음부터는 동인, 서인으로 분열된 신하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등 꽤나 좋은 정치적 수완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붕당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는데 양당의 상호 견제를 통해 결과적으로는 신권 억제에 성공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보했다.그리고 선조는 밑바닥인 인간성과 별개로 절대 멍청한 왕이 아니었다. 권율이나 이순신에 대한 파격적인 발탁과 결단에서 볼 수 있듯 선조의 인재 보는 눈은 매우 뛰어났다.
일단 명종 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우수한 인재들 덕분에 선조는 선택권이 많았다. 전시 총리 류성룡, 성리학의 거두 이이, 도체찰사 전문 이원익,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과 이덕형, 이산해, 정철, 윤두수, 정탁, 이순신, 권율, 정인홍, 정문부, 이준경, 기대승, 홍섬, 권철, 이탁, 박순, 노수신, 이양원, 최흥원, 심수경, 심의겸, 심충겸, 성혼, 김명원, 박계현, 송기수, 오탁, 강사상, 한응인, 허욱, 이헌국, 김응남, 정유길, 유홍, 이헌국, 김계휘, 이호민, 유희춘, 신흠, 오윤겸, 박충원, 성영, 신립, 이일, 김시민, 이시언, 심희수, 이정암, 배흥립, 서성, 박동량, 홍담, 정창연, 허성, 한효순, 이정구, 윤승훈, 유근, 윤방, 송언신, 노직, 이광, 윤선각, 김수 등이 모두 선조 대에 인물이다. 서예 분야에서는 한석봉이 선조에 의해 등용되기도 하였다.[2] 심지어 어의조차도 그 유명한 허준이다.
임진왜란 전 이순신의 파격적일 정도의 승진도 류성룡의 추천이 있었다고는 하나 대간에서 전례 없는 고속 승진을 거세게 반대했던 상황에서 선조가 밀어붙여서 나온 결과이다. 이순신은 이전까지 역임한 최고 관직이 종4품 직위였고[3] 현직으로는 종6품 정읍 현감이라는 낮은 직위에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전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유능한 장수들을 중요 거점에 배치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직책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는 하나의 방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순신의 승진 속도 또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선조가 어찌나 밀어붙였는지 대간이 이러한 빠른 승진은 전례가 없다면서 강하게 반발했을 정도였다. 종6품 현감을 정3품 수사인 전라좌수사 자리에 올리는 것은 당시 관점에서 보나 지금 관점에서 보나 대단히 파격적인 행위였다. 현대로 치면 일개 대위 ~ 소령 수준의 이제 조금 일할 것 같다 싶은 중급 장교에게 뜬금없이 중장급에 준하는 별을 달아주고 해군 최고위 보직인 함대사령관에 임명하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다. 오죽하면 신하들은 물론이고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 본인조차도 이 정도로 터무니없는 파격적인 승진에는 반대할 정도였으나 선조는 순차적으로 승진시키면 되지 않냐며 단 1개월 만에 전라좌수사로 승진시켰다.
또한 40까지 백수로 지내다 뒤늦게 문과에 급제한 권율도 중용해 최종적으로는 도원수 자리에까지 올렸다.[4] 물론 권율 자신의 능력도 있었다지만 중요한 것은 이순신이나 권율이나 그러한 인재 승진에 있어 최종 결재권자는 결국 선조 본인이라는 점이다. 다만 권율은 이순신과는 달리 집안의 배경과 인맥이 크기는 했다. 권율의 인품과 능력이 좋기는 했으나 이러한 배경과 인맥이나 특히 무엇보다도 선조의 인선이 없었더라면 결국 권율도 그저 그런 선비로 말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5]
그리고 이원익과 같이 선조 시절에 중용받은 신하들은 이후에 왕조를 그나마 유지시켜주었던 여러 개혁안에 대해서 탐색했으며 이원익은 결국 광해군 즉위 직후 이후 백 년간 개혁의 효시[6]인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의 초안을 올림으로써 후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외에도 허준을 지원하며 《동의보감》의 편찬을 명했던 사실 역시 그가 제법 안목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7][8][9]
물론 유독 선조 치세에 인재가 많아 보이는 것은 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활약할 인물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능력을 보일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순신도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나라를 구한 성웅이 아니라 그냥 '당대의 엄격하고 유능한 장수이자 사또' 정도로 남아서 사서를 꼼꼼히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이름을 겨우 알고[10]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 시대의 이 인재풀은 세종대왕의 치세와 비교될 정도인데, 실제로 후대의 실록에도 이 비교가 언급되고 있다. #
2.2. 전후 처리
전후 처리 과정도 후계자인 광해군에 비하면 상당히 괜찮았다는 연구가 있다. 적어도 선조는 광해군처럼 무리하게 수없이 궁궐을 짓는다 수선을 떨지도 않았고 검소하게 살며 기껏해야 승하 1년 전에 창덕궁에 대한 재건 공사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전란 중에 《동의보감》의 편찬을 명하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11]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12][13] 전후 토지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 신축년(선조 34년)부터[14] 갑진년(선조 37년)까지 계묘양전(癸卯量田)을 실시해서[15] 전결 확보를 시도했으며[16][17][18][19][20] 납속책을 확대해서[21] 세수증대를 꾀하는 등의 전후 정비를 하였다.선조가 내걸었던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기조에 대해 설명하자면 1600년 9월에 비변사는 12개조를 선조에게 제출했고[22] 본격적으로 전후 복구 사업을 실시했다. 조정에서도 더 이상 민간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왕조 재건의 주체는 조선의 민간 사회와 백성이며 이들의 경제적 성장의 안정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을사년(선조 38년)에 공안개정(乙巳貢案)을 통해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 과감한 감세 정책을 실시했으며[23] 개간장려를 위해서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 등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24]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임진왜란 발발 이후 1년 만에 한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훈련도감을 설치하고[25] 조총 도입 및 개량을 시도했으며[26] 여진에 대한 견제도 계속 실시해서 노토 부락을 정벌하고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건주 여진이 세력을 확장하는 기세를 보이자 정보를 염탐하며 여진의 상황을 명 조정에 알려 대신 처리하게 하는 모습도 보였다. 조선성을 방어력이 강한 왜성을 본받아 개량하려는 시도도 했다.[27]
3. 부정적인 평가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움은 많으시나 덕을 쓰심이 넓지 못하고 좋은 말 듣기를 매우 좋아하나 많은 의심을 버리지 못하십니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이 힘써 건의하는 것을 지나치지 않은가 의심하고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자를 교만스럽거나 과격하다고 의심하십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으면, 그에게 당파가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남의 죄와 허물을 공격하면 편파적으로 모함하지 않은가 의심하십니다. 더욱이 명령을 내리실 때면 말씀하시는 기풍이 곱지 못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며칠전 교지(敎旨)에 말씀하시기를 "대언(大言)을 다투어 아뢰고 전에 없던 일을 행하기 좋아하고 있으니, 마땅히 풍속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올바로 될 것이다."고 하셨는데, 이 교지가 나오자마자 여러 사람들의 의혹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율곡 이이, 만언봉사(1574년). 선조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인품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이다.
율곡 이이, 만언봉사(1574년). 선조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인품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이다.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수(防守)해야 한다."
선조 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2일 신해 3번째기사. 한산을 잘 고수하고 있던 이순신을 끌어내리고 나라면 출격한다면서 헐뜯은 원균을 그 자리에 앉혀놓은 게 바로 선조임에도 하늘 운운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선조 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2일 신해 3번째기사. 한산을 잘 고수하고 있던 이순신을 끌어내리고 나라면 출격한다면서 헐뜯은 원균을 그 자리에 앉혀놓은 게 바로 선조임에도 하늘 운운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 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양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선조 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20일 정축 1번째기사[28]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선조 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20일 정축 1번째기사[28]
"지난날 내가 국세가 위급함을 지나치게 걱정하여 풍진(風塵)의 경보가 뜻밖에 생겨나고 수습할 수 없는 재앙이 조석 사이에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거듭 경들을 번거롭게 하면서 망령되이 물은 일이 있었는데, 끝내 방비책을 진달하지 않았다. 만약 적변이 갑자기 발생하면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릴 것인가. 지난 임진년에 김성일(金誠一) 등이 망령되게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왜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을 기롱하였고, 변방 방비에 뜻을 둔 사람들까지 배척하였으며, 심지어는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파견하는 것까지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다가 왜적이 깊이 쳐들어오자 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은 체찰사(體察使)의 명을 받고서도 가지 않았고, 신립(申砬)은 시정의 건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행장(行長)의 10만 대군을 막다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가 뒤집어졌었다. 이제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선조 수정 실록 35권, 선조 34년 2월 1번째기사
선조 수정 실록 35권, 선조 34년 2월 1번째기사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將士)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權栗)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
그리고 중국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모두가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별도로 훈명(勳名)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생각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종한 사람을 녹훈할 적에 아울러 녹훈하도록 말했었다. 그러나 이는 대신들이 의논하여 처리하는 데 달렸다."
선조 실록 135권, 선조 34년 3월 14일 임자 8번째기사[29]
그리고 중국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모두가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별도로 훈명(勳名)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생각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종한 사람을 녹훈할 적에 아울러 녹훈하도록 말했었다. 그러나 이는 대신들이 의논하여 처리하는 데 달렸다."
선조 실록 135권, 선조 34년 3월 14일 임자 8번째기사[29]
"내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30][31]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32]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휘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33]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자고로 국세가 이와 같으면 반드시 이적(夷狄)의 화를 받는 법인데 우리 나라의 일이 실로 염려된다. 무략만 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집(宰執)들 중에도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고 신진 문사들은 전연 무사(武事)를 모르고 있다. 내가 조신(朝臣)들을 경홀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세(時勢)를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무신은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반드시 독서한 연후에야 고금 성패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열 가지 일을 알아도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 자 또한 드문데 하물며 전연 옛글을 모르는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고사(古史) 뿐 아니라 병가(兵家)의 글을 아는 자 또한 전무하다."[34]
하니, 아뢰기를,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들과 병법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장(武將)은 활을 당기고 말을 달리는 일밖에 다른 기능이 없고, 문신은 오직 시구(詩句)의 연마만을 힘쓸 뿐이다.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경홀히 여기는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에게 숨기지 않고 다 말하는 것뿐이니 말로 본의를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왜적은 한당(漢唐)의 성세에도 당해내기 어려웠으나 북적(北賊)에 이르러는 하나의 양장(良將)이면 충분한 것인데도 이처럼 어려우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축적이 많은 후에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이 부국 강병(富國强兵)이라고 하였으나 부강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축적이 있은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35]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에는 매우 부유하였는처럼 가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36] 그런데 왜국은 몇 개의 도로 나뉘었는지 모르겠다."
선조 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기사
하니, 아뢰기를,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들과 병법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장(武將)은 활을 당기고 말을 달리는 일밖에 다른 기능이 없고, 문신은 오직 시구(詩句)의 연마만을 힘쓸 뿐이다.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경홀히 여기는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에게 숨기지 않고 다 말하는 것뿐이니 말로 본의를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왜적은 한당(漢唐)의 성세에도 당해내기 어려웠으나 북적(北賊)에 이르러는 하나의 양장(良將)이면 충분한 것인데도 이처럼 어려우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축적이 많은 후에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이 부국 강병(富國强兵)이라고 하였으나 부강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축적이 있은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35]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에는 매우 부유하였는처럼 가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36] 그런데 왜국은 몇 개의 도로 나뉘었는지 모르겠다."
선조 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기사
3.1. 이순신을 향한 의심과 박대
400년을 넘어서도 선조가 저평가를 받는 원인 1순위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자 성웅이라 불리는 이순신이 승승장구를 이어가고 민중들이 이순신을 칭송하자 노골적으로 의심하고 박대한 탓에 욕을 많이 먹는다.[37] 그 일련의 행위는 군신관계 이전에 인간 대 인간으로 봐도 정말 한심한 수준이었고, 이는 현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시점에서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기록이 많다. 하다못해 종전 후에 그런 짓을 했다면 그냥 토사구팽의 극단적인 예시 정도로 평가[38]받을 수 있었지만, 한창 전쟁 중에 그러는 바람에 칠천량 해전과 정유재란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와 나라를 망하게 할 뻔했다.[39] 아무리 눈꼴 시려운 부하가 있더라도 평시가 아닌 전쟁 중에는 그 부하가 직접 대놓고 반란을 저지른게 아니라면 넘어가는게 상식인데 그런 상식을 대놓고 어긴 시점에서 군주 이전에 그냥 상사로서의 개념을 말아먹은걸 인증하는 셈이기 때문이다.선조는 전란 직전 현대에는 기록은 없으나 당시 전공을 올리던 원균을 전라좌수사에서 경상우수사[40]로 실질적으로 영전시켰으며[41], 이후 원균의 허풍만을 믿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이후로는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하고 부산포로 진격하라는 명을 내려서 칠천량 해전의 참패에 일조하게 된다. 당시 구국의 영웅이자 현재진행형으로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장수를 의심이 가는 점이 있다는 이유로 적이 흘린 가짜 정보인지 사실인지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적의 본진인 부산을 공격해 부산으로 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어명을 거역했다"라는 핑계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고문한 것이다. 이는 이순신 입장에서도 할 말이 많은 것이, 명을 받고 출정했을 당시 가토는 이미 바다를 건너와 버린 상황이었기에 그를 잡으라고 명령했어도 별 수 없었다. 애초에 이 일을 기획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자신과 가토의 널리 알려진 불화를 이용해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는지, 아니면 진짜로 조선에서 가토를 제거하기를 바란 것인지 두 관점이 있고, 따라서 고니시와 가토가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보거나 고니시의 예상과 다른 전개가 되었다는 것으로 갈린다. 물론 어느 쪽이든 결국 왜군에게만 좋은 짓만 해준 꼴이니 다른 자도 아닌 국가의 지도자가 나서서 이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은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헐뜯고 있습니다. 만일 율로 다스린다면 마땅히 둘을 다 죄주어 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왜변 초에 병선(兵船)을 모아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참괵(斬馘)을 바친 공로가 많았고, 원균의 경우는 당초 이순신과 협력하여 역시 적의 선봉을 꺾는 성과를 올렸으니, 이 두 사람의 충성과 공로는 모두 가상합니다. 위에서 특별히 잘 화합시켜 진정시킬 수 있는 대책을 생각하시어 급히 선전관을 보내 하서하여 국가의 위급을 우선으로 돌보라고 권하면서 마치 한 광무(漢光武)가 가복(賈復)과 구순(寇恂)에게 하듯 하신다면, 저 두 사람 또한 전혀 양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감격한 마음으로 성상의 명령을 공경히 받들어서 옛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성상의 뜻을 몸받지 않고 끝까지 깨닫지 못한 채 그전의 잘못을 영영 고집한다면, 그때에는 자연 나라의 법이 그들을 처리할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두 사람은 틈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으니, 원균을 체차(遞差)하여 그들의 분쟁을 지식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이순신은 대장으로서 하는 짓이 잘못된 것 같으니, 그중 한 사람을 체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혹 이순신을 체차할 경우는 원균으로 통제사를 삼을 수 있거니와, 혹 원균을 체차할 경우는 다른 사람을 차출해야 할 것이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57권, 선조 27년 11월 28일 임인 2번째기사. 비변사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이 다투는 건 양쪽 모두 잘못 처신하는 것이므로 둘 다 벌하거나, 전공을 생각해서 둘을 화해시키거나, 원균을 자르거나 하자는 의견을 내었으나, 선조는 한 명은 꼭 잘라야 하는데 이순신은 하는 짓이 잘못된 것 같다고 자기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직 요시라 사건을 계기로 이순신을 내치기 수년 전임에도 이미 이순신 대신 원균으로 갈아치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막중한 임무가 지워진 자리에 무능한 주제에 허장성세만 높은 자를 떡하니 앉혀놔 조선 수군이 궤멸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국가를 다시 한 번 전란으로 내몰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무서울 게 없어진 일본군은 과거 임진년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던 전라도를 마음껏 유린한다. 이때 남원성과 황석산성, 그리고 전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수천의 백성과 군사들이 죽었고, 조선은 다시 한 번 아비규환에 빠진다. 특히 이 시기 이순신의 통제영이 있던 한산도는 물론이고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까지 일본군에게 넘어간 데다, 이날 이후 이순신은 결국 자신의 본영인 여수에 돌아가지 못한 채 영면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선조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쳐도 정유재란의 원인은 거의 전적으로 선조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유재란 자체는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에 말도 안 되는 중2병급 협상안을 내놓은 순간부터 이미 징조가 보이긴 했으나,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인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 만약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이 승전하거나 최소한 방어에 성공했다면 정유재란은 그냥 무력 시위 정도로 끝났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때까지만 해도 이순신이 꾸준히 전력을 증강한 덕에 일본 수군을 충분히 막고도 남을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7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홀로 200척을 해먹는 지휘관 원균만 아니었다면 정유재란은 거의 확정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정론이다.[42]"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은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헐뜯고 있습니다. 만일 율로 다스린다면 마땅히 둘을 다 죄주어 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왜변 초에 병선(兵船)을 모아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참괵(斬馘)을 바친 공로가 많았고, 원균의 경우는 당초 이순신과 협력하여 역시 적의 선봉을 꺾는 성과를 올렸으니, 이 두 사람의 충성과 공로는 모두 가상합니다. 위에서 특별히 잘 화합시켜 진정시킬 수 있는 대책을 생각하시어 급히 선전관을 보내 하서하여 국가의 위급을 우선으로 돌보라고 권하면서 마치 한 광무(漢光武)가 가복(賈復)과 구순(寇恂)에게 하듯 하신다면, 저 두 사람 또한 전혀 양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감격한 마음으로 성상의 명령을 공경히 받들어서 옛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성상의 뜻을 몸받지 않고 끝까지 깨닫지 못한 채 그전의 잘못을 영영 고집한다면, 그때에는 자연 나라의 법이 그들을 처리할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두 사람은 틈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으니, 원균을 체차(遞差)하여 그들의 분쟁을 지식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이순신은 대장으로서 하는 짓이 잘못된 것 같으니, 그중 한 사람을 체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혹 이순신을 체차할 경우는 원균으로 통제사를 삼을 수 있거니와, 혹 원균을 체차할 경우는 다른 사람을 차출해야 할 것이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57권, 선조 27년 11월 28일 임인 2번째기사. 비변사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이 다투는 건 양쪽 모두 잘못 처신하는 것이므로 둘 다 벌하거나, 전공을 생각해서 둘을 화해시키거나, 원균을 자르거나 하자는 의견을 내었으나, 선조는 한 명은 꼭 잘라야 하는데 이순신은 하는 짓이 잘못된 것 같다고 자기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직 요시라 사건을 계기로 이순신을 내치기 수년 전임에도 이미 이순신 대신 원균으로 갈아치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원균의 무능함을 미리 몰라봤던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밑천이 전부 드러난 칠천량 해전을 겪었음에도 최종 인사 책임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정치질을 시도했다. 선조는 칠천량 해전이 원균을 임명한 자신의 책임이 아닌 엉뚱한 하늘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회피했고, 명량 해전에서 13척으로 300척으로 알려진 일본 수군의 대함대를 상대로 믿을 수 없는 승전을 거둔 이순신을 두려워하며 그가 전사하는 그날까지도 경계하고 시기했다. 일례로 전후 원균이 이후 이순신, 권율과 동일한 선무공신 1등으로 서훈된 것도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시기와 견제로 인한 발로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나마 원균에게 권율, 이순신과 동일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가 아닌 종1품 숭록대부가 추서된 건 아무리 그래도 칠천량 해전이라는 졸전을 일으킨 원균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수군 명장 이순신, 육군 명장 권율과 동일한 반열로 대우하는 건 이들에 대한 모욕이고 지나치다고 신하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신하들은 그나마 선조의 눈치를 봐서 원균을 2등으로 올려놨지만 신하들 입장에서는 원균의 이름이 공신 목록에 올라가 있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결국 선조가 이순신을 싫어한 이유는 그저 질투심 탓인데 더 나아가 자기 아들인 광해군에게도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짓거리를 해서 조선의 미래마저 심하게 훼손했다.
무엇보다 이순신이 잡혀간 정유년은 이순신 개인에게도 매우 불행한 해였다. 아들이 압송되었다는 소식에 어머니 변 씨가 83세의 고령[43]임에도 수도 한양에 투옥된 아들을 보려고 무리하게 여수에서 올라오다가 배 위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선조를 비롯한 수뇌부들에서 나온 수군 폐지론에 맞서가면서 애써 길러낸 최강의 조선 수군은 한순간에 궤멸되었다. 더군다나 이순신이 아끼던 셋째 아들 이면은 의병으로 활동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인 아산으로 쳐들어온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이는 어머니의 죽음만큼 이순신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정유재란이 확대되지 않았다면 이순신의 아들의 죽음도 없었다. 물론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며 내려보낸 교지를 보면 당시 모친상 중인 이순신이 통제사 임무를 거절할까 봐 왕이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비는 문구가 적혀 있긴 하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교의 삼대 덕목인 충, 효, 의 중에서 효에 해당하는 부모상은 가장 큰 중대사 중 하나로, 부모에 대한 효도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동등한 덕목이라 말 그대로 임금조차도 하지 말라며 어명을 내릴 수 없는 일이다. 복직이고 뭐고 이순신이 이 이유를 들어 더 이상 하기 싫다고 하면 조정에서도 별달리 방안이 없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파격적인 교지이긴 하나, 문제는 선조가 이순신의 통제사 직책은 돌려주면서 정작 그의 품계는 돌려주지 않아 휘하 수사들이 맞먹으려 까불어도 뭐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지휘권을 돌려주는 식으로 끝까지 찌질하게 굴었다는 점이다. 시기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정유년 12월에 선조는 이순신이 상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여 그에게 고기 반찬을 하사했다. 이 대목은 어찌 보면 신하의 건강을 염려한 자비로운 왕의 선물로 볼 수 있으나 이순신의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선조가 내린 고기 선물을 결코 순수한 의도라고 볼 수 없었을 것이고, 막말로 고인드립 내지 패드립으로 간주될 수 있는 저열한 짓거리였다. 실제로 이날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선조가 고기 반찬을 하사한 일을 가지고 “비통, 비통하다”[44]라고 적었다.[45] 그런데 그 상중에, 그것도 무슨 목적으로 보냈는지 뻔히 다 보이는 고기를 내놓았으니 이순신에게는 그냥 "너 엿 먹어봐라" 정도도 아니고 패륜적인 모욕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이순신이라고 해도 일기에 대놓고 비통하다는 글을 썼을 정도면 정말 선조가 증오스러웠던 듯하다.
아무튼 이순신은 다시 복귀하여 징하게 질척대는 이런 저런 견제에도 명량 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선조는 칭찬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이순신의 이름이 높아지자 매우 불편해했으며, 여기에 대한 포상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이순신의 전공을 명군에게 설명할때인데, 이순신이 세운 공을 굉장히 하찮은 것으로 낮춰서 보고하면서도 그 성과가 있기에 앞으로는 왜군이 날뛰지 못할 것이라는 앞뒤가 전혀 안맞는 이상한 설명을 한 것이다. 선조의 말마따나 이순신이 거둔 성과가 정말 코딱지만큼 하찮은 것이였다면 적군인 왜군은 그 코딱지만한 손실에도 벌벌 떠는 허접 집단이란 뜻인데, 그러면 그 허접 집단 하나 제대로 못막고 한성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명군을 부른 당사자인 선조 자신은 그 허접 한놈도 제대로 상대 못하는 머저리임을 셀프인증하는 꼬라지가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명군은 자기들 목숨도 걸린 일이니만큼[46] 정확한 정보를 추구해서 선조의 보고와는 별개로 진즉에 따로 조사를 다 마친 상황이였기에 선조의 축소 보고에 어처구니 없어했으며, 실제로 이순신이 정2품 정헌대부로 품계가 복귀된 것도 명나라 경리 양호가 "도대체 왜 이런 전공을 세운 장수에게 치하를 하지 않은 거냐"라며 선조를 계속 압박했기 때문이다.[47]
선조와 이순신 양측이 처해 있는 입장과 전공, 나라를 위한 희생 정신, 부하 관리와 민심의 안정화까지 종합해 결론짓자면 선조의 능력과 선택은 명백히 이순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선조가 어떤 감정과 속셈으로 이렇게까지 이순신을 홀대했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미리 도망친 자신을 대신해 전시 군주로서의 정치력을 보여주던 친아들마저도 칭찬은커녕 정적으로 여기고 학대할 정도로 무지막지했던 권력욕이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송고종과 악비나 숭정제와 원숭환처럼 고군분투하는 장수를 모함으로 아예 죽여버리는 최악의 멍청이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만약 이랬다면 조선은 일본에게 함락당하거나 멸망해 선조는 연산군도 뛰어넘는 조선 최악의 폭군, 망국의 군주가 됐을 것이다.[48][49]
변명을 하자면, 군주의 입장에서 전쟁 영웅은 언제나 위험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 당장 한국사에서 고려와 조선을 건국한 왕건과 이성계는 말할 것도 없으며 옆나라 중국에서는 전쟁영웅의 역성혁명이 수차례 일어난 바 있다. 송태조 조광윤은 후주의 곽위 때부터 심복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운 군인으로 결국 공제 시종훈을 몰아내고 송나라를 세웠으며, 당나라를 멸망시킨 주전충 역시 황소의 난을 진압한 전쟁 영웅이자 당대의 군벌이었다. 이렇다 보니 수없이 많은 승리를 거둔 장수들의 끝이 좋은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앞서 이야기한 한신이나 원숭환 외에도 북제의 곡률광 역시 훌륭한 인품과 수없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이로 인해 황제의 의심을 받아 삼족이 멸족되었고, 전국시대 조나라 최후의 명장 이목 역시 진나라의 반간계에 걸려 숙청당했다. 다만 최소한 전란이 끝난 이후 숙청을 행한 한나라는 400년을 유지했으나 상기한 명나라, 북제, 조나라는 아직 전쟁중임에도 전선을 지탱하던 명장들을 숙청하였고, 이후 빚의 속도로 멸망했다. 이렇듯 전시에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장수를 숙청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그나마 이들을 아예 죽여버렸다 망한 나라들과는 달리, 다행스럽게도 선조는 이순신에게 고문만 한차례 가하고 죽이지는 않았기에 이순신이 다시 복귀하여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신 선조가 처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보면 이순신에 대한 의심까지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왜란 이후 이미 조선 전역에 백성들은 물론, 선비, 양반들까지 수도 버리고 도망간 임금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조정 대신들한테는 나라 버리고 외국으로 튀려고 한 임금으로 비쳐지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나라 구하겠다고 의병 일으킨 인간들 중 일부는 오히려 반란을 일으키고(이몽학의 난), 순왜까지 선조로서는 그 어떠한 것도 믿질 못하는 상황이 되었었다. 그러니 당시 정예군이자 사기가 높았던 수군을 견제하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당장 전쟁도 어느정도 승기를 잡은 상황에 유능한 장군보다는 무능해도 말 잘 듣는 놈을 군의 수장으로 삼는 것이 본인 또한 편할테고 말이다. 문제는 해상에서나 승기를 잡았지 육상에서는 아직도 일본군이 날뛰는 상황에서 의심까지는 몰라도 되지도 않는 숙청질을 한 결과 나라 전체가 망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고 이순신도 기적으로 부르는 대승이 없었으면 정말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망하거나 잘해줘봐야 삼남지방이 일본 손으로 들어갈뻔한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3.2. 명나라 도주 계획
상이 영변 행궁(行宮)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정철이 아뢰길,
"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定州)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귀성(龜城)이나 강변(江邊) 등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세자가 여기에 머무르면 힘이 분산되어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할 성싶고 인심도 역시 요동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종하는 관원을 여기에 많이 머물게 하고 나는 가벼운 행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우선 평양의 소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봄이 어떻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머물자고 권하는 것이나 피하자고 권하는 것이 각각 소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시 갈 만한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말하여 보라. 만약 있다면 내가 따를 것이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왜적의 기세가 꺾이면 북도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심신겸(沈信謙)이 행재소(行在所)에 와 있었는데, 상이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가산까지의 거리를 물어보도록 하니, 입계(入啓)하기를,
"90리 길입니다. 그러나 큰 강(江)이 둘이 있고, 가산에서 의주(義州)까지는 촌락이 다 비어 있으므로 인연(人煙)이 매우 드뭅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서북 지방은 조금 완전하여 우리 나라 강토가 아직은 다 함락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피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강계(江界)는 사람들이 모두 방어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랫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못 갈 곳이 없겠지만 나는 정주(定州)로 피해야겠다. 평양이 함락당하면 함경도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괵이 아뢰기를,
"평양이 함락당하면 우리 나라는 보전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임진(臨津)은 왜적이 주인이 되고 우리가 객(客)이 되었지만, 평양은 우리가 주인이 되고 왜적이 객(客)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김정목(金庭睦)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왜적이 만약 뗏목을 만들어 일시에 진격해 오면 그 예봉(銳鋒)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피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요동으로 들어갈 것을 의논하고 있는데 요동으로 일단 들어가면 조종(祖宗)의 종묘(宗廟)·사직(社稷)을 장차 누구에게 부탁하시겠습니까."
하자, 철이 아뢰기를,
"1주(州)·1읍(邑)만 가지고서도 역시 도모할 수 있습니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중국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고 왜적이 또 뒤에서 핍박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정주(定州)로 이주한다는 분부가 있자 인심이 동요되고 있으니 잘 생각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괵이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을 보내어 조치하는 일을 우선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괵이 아뢰기를,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전일에 왜적과 통신(通信)한 일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그다지 믿어주지 않을 성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요동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왜적의 문서(文書) 중에, 그들의 장수를 8도에 나누어 보내겠다고 하였으니, 우리 나라 지방에서는 피할 만한 곳이 없을 성싶다."
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5번째 기사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정철이 아뢰길,
"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定州)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귀성(龜城)이나 강변(江邊) 등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세자가 여기에 머무르면 힘이 분산되어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할 성싶고 인심도 역시 요동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종하는 관원을 여기에 많이 머물게 하고 나는 가벼운 행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우선 평양의 소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봄이 어떻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머물자고 권하는 것이나 피하자고 권하는 것이 각각 소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시 갈 만한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말하여 보라. 만약 있다면 내가 따를 것이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왜적의 기세가 꺾이면 북도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심신겸(沈信謙)이 행재소(行在所)에 와 있었는데, 상이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가산까지의 거리를 물어보도록 하니, 입계(入啓)하기를,
"90리 길입니다. 그러나 큰 강(江)이 둘이 있고, 가산에서 의주(義州)까지는 촌락이 다 비어 있으므로 인연(人煙)이 매우 드뭅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서북 지방은 조금 완전하여 우리 나라 강토가 아직은 다 함락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피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강계(江界)는 사람들이 모두 방어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랫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못 갈 곳이 없겠지만 나는 정주(定州)로 피해야겠다. 평양이 함락당하면 함경도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괵이 아뢰기를,
"평양이 함락당하면 우리 나라는 보전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임진(臨津)은 왜적이 주인이 되고 우리가 객(客)이 되었지만, 평양은 우리가 주인이 되고 왜적이 객(客)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김정목(金庭睦)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왜적이 만약 뗏목을 만들어 일시에 진격해 오면 그 예봉(銳鋒)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피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요동으로 들어갈 것을 의논하고 있는데 요동으로 일단 들어가면 조종(祖宗)의 종묘(宗廟)·사직(社稷)을 장차 누구에게 부탁하시겠습니까."
하자, 철이 아뢰기를,
"1주(州)·1읍(邑)만 가지고서도 역시 도모할 수 있습니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중국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고 왜적이 또 뒤에서 핍박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정주(定州)로 이주한다는 분부가 있자 인심이 동요되고 있으니 잘 생각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괵이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을 보내어 조치하는 일을 우선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괵이 아뢰기를,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전일에 왜적과 통신(通信)한 일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그다지 믿어주지 않을 성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요동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왜적의 문서(文書) 중에, 그들의 장수를 8도에 나누어 보내겠다고 하였으니, 우리 나라 지방에서는 피할 만한 곳이 없을 성싶다."
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5번째 기사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 갈 만한 지역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였다. 상이 세자(世子)를 이곳에 주류(駐留)시켜 두고 떠나는 것이 괜찮겠느냐고 하문하자, 철(澈)이 아뢰기를,
"만약 왜적의 형세가 가까와지면 동궁도 어떻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50]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7번째기사
"그렇다면 어찌 갈 만한 지역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였다. 상이 세자(世子)를 이곳에 주류(駐留)시켜 두고 떠나는 것이 괜찮겠느냐고 하문하자, 철(澈)이 아뢰기를,
"만약 왜적의 형세가 가까와지면 동궁도 어떻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50]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7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요동으로 가든지 다른 곳으로 가든지간에 부질없이 의논만 할 것이 아니라 속히 결정하여 그 때를 당해서 갈팡질팡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니, 대신들이 아뢰기를,
"당초에 요동으로 가자는 계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의논을 들은 뒤로는 신민들이 경악하였으나 달려가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니 그 안타깝고 절박한 실정이 난리를 만난 초기보다 심하여 허둥지둥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함경 등도 역시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匹夫)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51]
그리고 명나라에서 대접하여 허락할는지의 여부도 예측할 수 없으며, 일행 사이에 비빈(妃嬪)도 뒤떨어져 갈 수 없는데, 요동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여 복색(服色)도 다르고 말소리도 전혀 다르니, 비웃고 업신여기며 무례(無禮)히 굴면 어떻게 저지하겠습니까. 비록 요동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풍토와 음식을 어떻게 견디시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요동으로 가는 문제는 신들은 결코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병사들이 비록 많이 왔지만 우리 나라에서 향도하는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 향도군을 모집하는 것도 시급합니다. 본주(本州)에 토병(土兵)들이 거의 1천 명쯤 되니, 지금 비록 무너져 흩어졌지만 만약 과거(科擧)로써 소집한다면 그들을 모으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병조(兵曹)에서 내일 활쏘는 것을 시험보이려고 하니, 상께서 당분간 여기에 머무르셨다가 다시 왜적의 소식을 들은 다음 수상(水上)을 경유하여 벽동(碧潼)에 이르러 며칠 머무르시다가 또 강계(江界)로 가 형세를 보고 또 설한령(薛罕嶺)을 경유하여 함흥(咸興)에 이르시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4일 임자 1번째기사
"요동으로 가든지 다른 곳으로 가든지간에 부질없이 의논만 할 것이 아니라 속히 결정하여 그 때를 당해서 갈팡질팡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니, 대신들이 아뢰기를,
"당초에 요동으로 가자는 계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의논을 들은 뒤로는 신민들이 경악하였으나 달려가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니 그 안타깝고 절박한 실정이 난리를 만난 초기보다 심하여 허둥지둥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함경 등도 역시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匹夫)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51]
그리고 명나라에서 대접하여 허락할는지의 여부도 예측할 수 없으며, 일행 사이에 비빈(妃嬪)도 뒤떨어져 갈 수 없는데, 요동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여 복색(服色)도 다르고 말소리도 전혀 다르니, 비웃고 업신여기며 무례(無禮)히 굴면 어떻게 저지하겠습니까. 비록 요동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풍토와 음식을 어떻게 견디시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요동으로 가는 문제는 신들은 결코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병사들이 비록 많이 왔지만 우리 나라에서 향도하는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 향도군을 모집하는 것도 시급합니다. 본주(本州)에 토병(土兵)들이 거의 1천 명쯤 되니, 지금 비록 무너져 흩어졌지만 만약 과거(科擧)로써 소집한다면 그들을 모으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병조(兵曹)에서 내일 활쏘는 것을 시험보이려고 하니, 상께서 당분간 여기에 머무르셨다가 다시 왜적의 소식을 들은 다음 수상(水上)을 경유하여 벽동(碧潼)에 이르러 며칠 머무르시다가 또 강계(江界)로 가 형세를 보고 또 설한령(薛罕嶺)을 경유하여 함흥(咸興)에 이르시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4일 임자 1번째기사
신잡(申磼)이 아뢰기를,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52]
...
신잡은 아뢰기를,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1번째기사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52]
...
신잡은 아뢰기를,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1번째기사
임용한: 일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라는 것에 대해서 좀 변명이랄까? 해명을 좀 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너무 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게 있어요. 예를 들면 수도를 버리고 후퇴하는 건 서양 사람들 입장에선 하나도 문제가 안 돼요. (허준: 그럼요.) 단 이건 있어요. 봉건 영주가 적이 쳐들어 왔는데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그 주민들한테 모든 인망을 잊(잃)어버려요. 왜? "내가 영주로도 군림하고 평소에 세금받는 거는 너희들을 지켜주기 위해서야!" (라는 것이 당시 사회 시스템이었으니까요.) 근데 산적이 쳐들어 왔는데 보안관이 도망을 쳤어. 그럼 보안관은 끝이죠. 근데 왕은 보안관이 아니에요. 보안관(일)부터 전체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이지. 그래서 전쟁을 포기하고 자기 할 일을 안 했느냐가 우리가 최종적으로 판단할 일이지 피했다나 피난 갔다는 것을 갖고 우리는 비겁하다라고 말할 순 없는 거에요.[53]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18:22~19:15)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18:22~19:15)
혹자는 선조를 옹호하면서 이 선조의 도주를 전략적 후퇴로 포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일단 결과론적으로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친 것은 '(후술할) 원래 의도를 제외하고 본다면'[54] 맞는 선택이었고 도망을 안 쳐서 왕이 잡혔다면 조선은 그대로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비정하지만 현직 왕이 혹 사로잡히지 않고 죽었다면 세자를 새 왕으로 옹립하고 버틸 수라도 있는 반면 생포당하면 그대로 패배 확정이기에 나라를 위해서라도 왕은 유사시 안전한 곳으로 전략적 후퇴를 할 필요가 있다. 겁쟁이라고 놀리든 뭐든 나라를 위해서라도 국가의 상징인 왕은 살아야 한다. 사실 제일 좋은 것은 도망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겠으나,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도망치는 건 욕을 먹긴커녕 일을 잘 한 것으로 칭찬해 마땅한 행동이다.[55] 왕이 그 도망을 못쳐서 결국 붙잡힌 사례가 40년 뒤의 병자호란이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삼전도의 굴욕이다.
현대에도 국가 원수가 잡히거나 사망하면 거의 패배하는데 과거는 특히 더했다. 게다가 민주국가면 사망하거나 붙잡힐 경우 법적 절차에 따라 다른 내각 인사가 그 권한을 이어받을 수 있지만 절대왕정 국가에서 왕은 곧 국가이다.[56] 당시 일본의 병법도 적장만 잡으면 끝이라는 논리 하에 전국시대를 보냈고[57],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1순위 목표로 선조의 신변 확보를 두고 한성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빠르게 진격해 한양을 점령했으나, 정작 목표였던 왕의 확보에는 실패하면서, 오로지 한양만을 위해 진격하느라 외면했던 각지에서 의병과 관군이 튀어나오며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왜란이 터진 시점에서 빠르게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다는 선조의 선택지는 사실 그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58] 다행히 그 선택지가 먹혀들었고, 명의 원군을 얻어냈으며,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관군과 의병이 일어날 시간도 벌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침략을 당한 전쟁에서 승전해 나라를 지켜냈다는 결론은 적어도 사실이다.
진짜 문제는 선조가 외국으로 도망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기준으로도 국가원수가 전쟁 중에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다. 국가원수의 중요성이 과거에 비해 낮아진 현대에서도 전쟁 중에 국가원수가 외국으로 피난을 가면 사실상의 항복/패배선언으로 해석된다. 당연히 조선시대에는 이런 인식이 더 강했다.
선조의 도주는 "조선이 무사하려면 일단 내가 버텨야 한다!" 같은 이유로 벌인 일시 후퇴가 아니라 국가원수가 책임지기 싫어서 벌인 도주였다. 위에서 말한 대로 선조의 후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후퇴 이후 다시 병력을 모으고 방어선을 재정비하는 등의 일본군에 맞서 조선을 지키려는 행보가 있었어야 하는데,[59] 선조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매우 부족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선조는 피난이 아니라 당장의 군사적 대응은 당시 겨우 10대 중후반이었던 세자인 광해군과 신하들에게 모두 떠넘겨 버렸다. 물론 선조는 조선의 명맥 자체가 망하지는 않게 구심점을 삼도록 자기 딴에는 버리는 패인 광해군을 던졌는데 아마 선조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던 마인드였던 모양이지만 광해군이 생각보다도 뛰어난 활약을 하면서 선조가 쩌리가 되는 효과가 생겨버렸다.[60] 그리고 아예 나라를 버리고 요동을 넘어가려 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피난을 하며 버티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나라로 튄 왕이 난이 평정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확률은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 않다.[61] 그렇기에 선조가 요동에 건너가려는 걸 신하들이 기를 쓰고 반대했고, 명나라도 처음에는 선조를 일본의 첩자라고 의심했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선 기가 찼다. 결국 신하들은 조선의 명맥을 유지할 왕이라는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선조에게 양위를 시켜서 '왕'의 권위를 광해군에게 넘겨 줄 생각까지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하들이 왕을 적대하는 지경까지 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 없이 선조 때문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져 버릴 수 있었고, 누가 봐도 조선이 망해도 상관없으니 나는 살겠다는 제스처였다. 오죽하면 한양에 당도한 왜군도 인프라도 민간인도 군 병력도 다 팽개치고 몸만 빠져나와서 도망간 조선 임금의 한심한 추태를 보고선 황당해했다. 청야전술마저 하지 않고 거의 모든 게 온전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요동 도주가 이루어지지 않은 건 선조가 막판에 나라를 버릴 수 없다고 마음을 돌려서 안 간 게 아니고 신하들의 격한 반대와 명나라 측에서 일국의 왕이 전쟁 중에 왜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오냐며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조가 어찌나 빠르고 간단히 나라를 버렸는지 명나라 조정에서 선조가 도주하는 것이 계략이고 몸을 피하는 척해서 일본과 내통하여 명나라를 치려는 음모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고 국가원수가 싸움다운 싸움도 안 해보고 도주하더니 "도와줘"도 아니고 "받아줘"라고 하면 이상하게 보는 게 당연하다. 일본군의 진군 속도는 가히 경이로울 지경이라 아무 전투도 없이 진격한 것과 거의 비슷한 속도였다. 선조는 자기 딴에는 "안남국도 멸망당한 뒤 입조하니 전쟁이 끝나고 회복시켜줬다"라며 다시 돌아올 마음을 밝혔지만, 안남국의 사례는 운이 좋았던 고사일 뿐이고[62] 왕이 나라를 떠나고 멸망한 사례가 훨씬 더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었다. 계획이 있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자기 목숨 하나 보존하겠다고 나라와 백성의 목숨을 몽땅 버리고 도망쳐서 명과 조선 둘 다 위기에 몰아넣은 인간에게 망명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신하들도 매우 강경하게 반대했다. 음력 5월 4일 윤두수가 갑작스럽게 선조가 요동으로 도주할 계획이 없으면 모두들 열심히 싸울 거라는 식으로 선조의 요동 도주를 반대하는 의사를 밝혔으며[63] 6월 13일 기사에서 선조가 요동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주로 가겠다고 은근슬쩍 운을 띄우자 정철이 평양의 소식을 기다려야 하며 아직 강토가 완전히 함락되지 않았으니 중국으로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지만 끝까지 도망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며, 8월에 이르러서는 선조가 총애하는 신하인 신잡조차 선조에게 대놓고 요동을 건너는 순간 왕이 아니라 필부가 된다며 필부가 되기를 원하면 이 땅에서도 피란할 수 있다는 강도 높은 비판으로 반대했을 정도였다. 의역하자면 정 요동에 가고 싶다면 퇴위하고 서인이 되어 가거라라고 선조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64]
실제로 선조의 행적에 대해서 실망한 명과 조선의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움직임까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진짜로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갔으면 폐위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했을 수도 있다.[65] 조선시대가 한국사 왕조들 중에서 왕권이 가장 강력했다고 하나[66] 이 시기 선조의 권위는 그의 실책들 때문에 밑바닥이었다. 만에 하나 선조의 목적대로 요동 망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미 해외로 도망간 국왕을 위해서 상술했던 의병이나 명나라의 원군이 얼마나 소극적으로 변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67] 또한 선조가 이때 요동으로 넘어갔다면, 왜군 입장에서 한반도는 더 이상 '도요토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략한 타국'이 아니라 '도요토미에게 하사 받을 수 있는 무주지'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이묘가 되고자 하는 왜군 장수들이 더욱 치열하게 싸웠을 수 있다. 특히 왜란 말기에도 왜군이 한반도에 세운 왜성을 조명연합군이 거의 점령하지 못했을 정도로 왜군은 수비전에 강했는데, 스스로를 한반도의 다이묘라고 인식하고 왜군 장수들을 상대로한 공성전은 훨씬 험난해졌을 것이다.
더불어 선조는 의주로 도주하는 과정에서 임진강에서는 배를 불태우고 평양성에서는 앞에서는 평양성을 지키겠다고 백성을 속이고는 밤에 몰래 도주하는 등 백성들의 피난을 방해하는 행보로도 욕을 먹고 있다.
그저 순전히 개인적 안위만을 생각해 적극적으로 나라를 버리려고 했고 결국 그것을 보다 못해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명과 신하가 합심해서 왕을 폐위시키려는 상황까지 만든 것은 결국 선조 본인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왜적이 따라올까봐 임진강의 배를 모두 불태워 백성들마저 도망칠 수 없게 했으며, 평양성으로 도주 후 평양을 지키겠다고 선언해놓고 야반에 몰래 도망친 점은 도저히 옹호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고 나서 종전 후에 "사실 조선군은 한 거 1도 없고 내가 데려온 명군이 다 해준 거임!"이라며 자신의 무책임한 빤쓰런을 포장하기까지 한 점이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68]
이런 옹호하기 힘든 추태를 보인 탓에 현대에는 런조[69]나 최속군주[70]라는 조롱 섞인 새 묘호를 받고 여러 곳에서 신나게 까이는 처지이다.[71] 이런 인식은 중국에서도 어느 정도는 공유하고 있는지, 중국의 대역소설에서 이런 말마저 나올 정도.
3.3. 병법에 대한 무지
선조는 육군과 수군에게 부산으로의 진격을 계속해서 명령했다. 당시 부산이 일본군의 상륙지점이라는 점을 보면 분명 부산에 있는 일본군을 다 없애면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곳을 일본이 그냥 방치할 리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육지에서 싸우는 건 육군이 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조선 육군과 수군 모두 선조의 명령대로 부산의 일본군을 공격할 형편이 안 되는데도 계속 공격하라고 닦달하여 육군 총사령관인 권율과 해군 제독인 이순신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이순신이 거듭 그럴려면 육군이 이쪽으로 와서 합동으로 작전해야 한다고 했겠으며 심지어 그 멍청한 원균마저 나중에는 이를 깨달았겠는가?게다가 전과의 보고에 대하여 사실관계 확인을 명확히 하지 못해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혀서 칠천량 해전을 초래했으며[72] 일본 육군의 육상 보급선을 흔들어놓은 의병 지휘관들에게 이후 공신들의 공과를 논함에 있어 행한 하대는 옹호의 여지가 전혀 없다.
사실 지도자가 전선의 장수들에게 일일이 간섭을 하다 말아먹는 경우는 생각보다 꽤 자주 있었는데, 당장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스탈린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전선의 상황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명령을 반복하다 병력만 말아먹는 일을 꽤 많이 저질렀다. 그나마 다운폴에서 묘사된 것처럼 끝까지 그런 습관을 버리지 못한 히틀러와 달리, 1942년 동안 한바탕 죽을 쑨 후 자기가 하나하나 간섭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장군들에게 판단을 위임해 명장들을 키워낸 스탈린처럼 선조도 칠천량 해전 패배 이후엔 간섭이 줄어들긴 했다. 더구나 당시 조정의 분위기 자체가 강경한 편이었는데, 당장 윤두수같은 경우는 선조조차 회의적이었음에도 왕의 재가도 받지 않고 작전을 밀어붙여 장문포 해전같은 실속없는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3.4. 전쟁으로 떨어진 권위
사신은 논한다. 상(上)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群臨)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奉行)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諫爭)하여 반드시 승락(承諾)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왜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환도한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중국의 조사(詔使)가 공관(公館)에 있으므로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조사가 돌아간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세자(儲宮)가 어려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월을 끌며 말을 바꿔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어린아이가 서로 희롱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사리(事理)인가. 당시에 세자의 나이가 이미 약관(弱冠)이었고 학문도 고명(高明)하였으며 덕망도 이미 성숙하였으니 대위(大位)를 이어받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난을 평정하고 화를 종식시켰을 것인데, 계속 어린 세자(沖嗣)라고 하였다. 옛부터 약관의 어린 세자가 언제 있었던가.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5번째기사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5번째기사
사신은 논한다. 2백 년 동안 신성(神聖)들이 서로 전해오던 큰 왕업(王業)을 전하(殿下)의 몸에 이르러 경솔하게 버리고 파월(播越)했다가 다행히 하늘의 위령(威靈)을 힘입어 구물(舊物)을 회복, 환도하기는 했다. 그러나 전하로서는 통렬하게 자신을 각책(刻責)하는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전위(傳位)하겠다는 분부야말로 간담(肝膽)에서 나온 것이니, 대신들로서는 마땅히 상께서 정사를 떠나 손위(遜位)하려는 지극한 뜻을 몸받는 것이 또한 하나의 도리였을 것이다. 더구나 동궁(東宮)이 인자하다는 소문이 여망(輿望)에 흡족했었으니, 명을 받들어 즉위(傳位)하여 하늘과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안되게 하는 것이 무슨 옳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누구 하나 계책을 정하여 승순(承順)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전하의 아름다운 뜻이 마침내 헛된 데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44권, 선조 26년 11월 10일 경신 1번째기사
선조실록44권, 선조 26년 11월 10일 경신 1번째기사
선조는 사관에게 유례 없이 혹심하게 조롱과 비난을 받은 왕이다. 선위 파동에 대한 기사들에서 그의 졸렬한 인격과 행동에 대한 신랄한 비난을 찾을 수 있다. 요약하자면 '열심히 나라 망치고 2백 년 왕조를 자기 대에 헌신짝처럼 내다 버렸던 왕이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빼어난 세자[73]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데 이거야말로 아주 훌륭한 생각 아니냐. 그걸 왜들 시답잖은 핑계로 말렸냐.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우 안타깝다'는 뜻이다. 보다보다 열받은 사관의 심정이 드러난다. 대놓고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던 선조가 물러날 생각도 없으면서 말려달라는 생각으로 뻔히 보이는 선위 쇼를 벌여 권위를 챙기려는 것을 신하들조차 가당찮은 수작으로 비난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가 붕당의 상호 견제를 통해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고는 하나, 숙종의 환국과 영조의 척신정치와 마찬가지로 선조가 택한 왕권 강화 시도의 방식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국가적으로 전혀 유익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된다. 실제로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광해군 시기 봉산옥사, 계축옥사로 대표되는 대북의 폭주와 연관이 없다 할 수 없고, 더 나아가면 인조반정과 대북의 몰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선조는 한 술 더 떠서 가족 관리 측면에서도 평가가 매우 좋지 못하다. 우선 일찍부터 여색을 탐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특히 후궁들이 뒷배를 믿고 워낙 횡포를 부려 대 원성이 심각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몽진 도중 선조가 특히 총애했던 후궁 인빈의 가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은 선조의 총애를 받는 척신이었고, 이산해와 결탁해 정철을 실각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김공량은 내수사 별좌 시절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유명해 부정축재를 일삼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그의 탐학질로 인해 폭동을 일으키자 진압하거나 사태 해결은커녕 강원도로 도망가는 추태를 벌였다. 이런 사례는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일 때도 나타난다.
더불어 선조가 전쟁 중에 보였던 온갖 추태 때문에 권위가 너무 떨어져서, 평시라면 반역에 버금가는 하야 요구가 대놓고 제기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선조 25년 11월 7일 상소가 바로 그것이다. 현대로 따지면 장 차관들, 일반 민간인들, 미국 정부한테까지 위 아 더 월드로 찍힌 것이다.
유학(幼學) 남이순(南以順)·송희록(宋希祿)이 상소하여 백성들 뜻에 의해 동궁(東宮)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청하니, 비망기(備忘記)로 일렀다.
"전에 동궁으로 하여금 전단(專斷)하게 하도록 전교하였으나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어떤 일이기에 한갓 말뿐이었겠는가.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평소 고질이 있어 날로 심해지는데 40이 되도록 죽지 않을 줄은 평소 생각조차 못했었다. 근일에는 두눈이 침침하여 곧 장님이 될 상황이니 비록 그대로 왕위에 있고자 해도 그 형세가 어찌할 수 없으니 마땅히 전의 뜻에 따라 근신(近臣)을 보내 내 뜻을 유시(諭示)하여 모든 크고 작은 일을 먼저 결단한 후에 아뢰게 하라. 이곳에서는 다만 사대(事大)와 청병(請兵)하는 일 하나만을 조치할 것이니, 이 역시 적을 토벌하는 일이다. 내선(內禪)하는 일 또한 나의 평소 뜻으로서 즉시 행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이 중국과의 경계여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염려되어서이지 감히 욕심을 내어 무릅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마땅히 적을 섬멸하기를 기다려 시행해야 하니, 이런 뜻을 아울러 알라."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7일 계해 3번째기사
상술되었듯 선조는 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이순신을 비롯한 인재들을 잘 등용했는데, 왜란이 터지고 이몽학의 난이 발생한 이후로 생긴 의심병과 타고난 이기주의로 인해 나중에는 이들을 모두 숙청하기에만 바빠 신하들 사이에서도 긴장과 경계심을 이끌어 쓸데없이 적을 만든 것도 있었다."전에 동궁으로 하여금 전단(專斷)하게 하도록 전교하였으나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어떤 일이기에 한갓 말뿐이었겠는가.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평소 고질이 있어 날로 심해지는데 40이 되도록 죽지 않을 줄은 평소 생각조차 못했었다. 근일에는 두눈이 침침하여 곧 장님이 될 상황이니 비록 그대로 왕위에 있고자 해도 그 형세가 어찌할 수 없으니 마땅히 전의 뜻에 따라 근신(近臣)을 보내 내 뜻을 유시(諭示)하여 모든 크고 작은 일을 먼저 결단한 후에 아뢰게 하라. 이곳에서는 다만 사대(事大)와 청병(請兵)하는 일 하나만을 조치할 것이니, 이 역시 적을 토벌하는 일이다. 내선(內禪)하는 일 또한 나의 평소 뜻으로서 즉시 행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이 중국과의 경계여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염려되어서이지 감히 욕심을 내어 무릅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마땅히 적을 섬멸하기를 기다려 시행해야 하니, 이런 뜻을 아울러 알라."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7일 계해 3번째기사
게다가 세자인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며 왜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안, 정작 왕은 적을 막을 생각은커녕 압록강을 건너 명으로 도망가서 살 궁리만 하고 자빠져 있었으니 대체 누가 왕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당시 조선 조정의 대신들 입장에서도 임진왜란 시기에 보여 준 선조의 모습은 너무나도 무책임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다. 선조 25년 6월 18일 기사를 보면 요동으로 피하려는 선조에게 서인인 정철과 남인인 류성룡이 양위를 요구하러 갔다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나왔을 정도다.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11월에 이르러서는 남이순, 송희록 등의 유생들 또한 '동궁에게 양위하라' 며 상소를 올리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반정을 당한 왕들 수준의 정치적 입지에 몰렸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정말 반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지만, 제 그릇에 맞지도 않는 권력에 대한 욕심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렬해서 역으로 이 양위 파동을 자신의 끈 떨어진 권위를 다시 세우는데 이용했다. 선조는 조선 종묘 역사 중에서 선위 선언을 가장 많이 남발한 임금인데, 알다시피 그 선위 파동은 전부 속 훤히 들여다보이는 쇼에 불과했다. 그래도 꼴에 왕이라고, 어쨌든 전쟁 중에도 신하들은 선조를 말리며 자신의 충심을 보여야 했고, 세자인 광해군 역시 쉴 새 없이 대궐 뜰에 엎드려 어명을 거두어 달라며 빌어야 했다. 아래는 임진왜란 발발 첫 해와 이듬해에 벌어진 선조의 선위 소동에 대한 선조 실록의 기록이다.
윤두수 등이 세 번 아뢰고, 양사(兩司)와 【대사간(大司諫) 이해수(李海壽), 사간 이유징(李幼澄), 장령(掌令) 이시언(李時彦), 헌납(獻納) 김정목(金廷睦), 지평(持平) 길회(吉誨)·이광정(李光廷). 】 옥당(玉堂) 【응교(應敎) 구성(具宬), 정자(正字) 윤경립(尹敬立). 】 및 정원이 모두 차자를 올리니, 상이 일렀다.
"고질 때문에 사람들 뜻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이처럼 소란을 떠니 우선 후일을 기다리겠다."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8일 갑자 4번째기사
"고질 때문에 사람들 뜻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이처럼 소란을 떠니 우선 후일을 기다리겠다."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8일 갑자 4번째기사
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제 평양을 이미 탈환하여 명나라 군사가 전진하니 부흥을 기약할 만하다. 다만 거리가 점점 멀어져 소식을 듣거나 책응(策應)하는 등 여러 일이 이 한 모퉁이에 있어 모두 그 편의를 잃었다. 과매(寡昧)한 사정은 지난번에 이미 모두 다 말하였다. 날이 갈수록 병이 고질화되고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심해지니 하루라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위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것이 어떤 일이라고 늘 말하면서 변명하는 자같이 하겠는가. 거기다가 요즈음은 중국 관원을 접대하는 일 때문에 추위를 무릅쓰고 애를 썼더니 한질(寒疾)이 더욱 심하여 전진하기에 쉽지 않은 형편이다. 그러니 승지를 보내어 어보(御寶)를 받들어 먼저 동궁(東宮)에게 선위(禪位)한 다음 빨리 안주(安州)로 나아가도록 하여 협력하여 책응하는 것이 옳다. 나는 뒤를 따라서 출발하도록 하겠다. 다시 말하지 말고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3일 무진 1번째기사
"이제 평양을 이미 탈환하여 명나라 군사가 전진하니 부흥을 기약할 만하다. 다만 거리가 점점 멀어져 소식을 듣거나 책응(策應)하는 등 여러 일이 이 한 모퉁이에 있어 모두 그 편의를 잃었다. 과매(寡昧)한 사정은 지난번에 이미 모두 다 말하였다. 날이 갈수록 병이 고질화되고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심해지니 하루라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위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것이 어떤 일이라고 늘 말하면서 변명하는 자같이 하겠는가. 거기다가 요즈음은 중국 관원을 접대하는 일 때문에 추위를 무릅쓰고 애를 썼더니 한질(寒疾)이 더욱 심하여 전진하기에 쉽지 않은 형편이다. 그러니 승지를 보내어 어보(御寶)를 받들어 먼저 동궁(東宮)에게 선위(禪位)한 다음 빨리 안주(安州)로 나아가도록 하여 협력하여 책응하는 것이 옳다. 나는 뒤를 따라서 출발하도록 하겠다. 다시 말하지 말고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3일 무진 1번째기사
영의정 이하가 임시로 대리하라는 것을 정지하도록 세 번 계청(啓請)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렇게 무익할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어찌 사람에게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하는가. 대신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국가를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기 때문이다. 경들의 이 말은 아마도 대신의 말이 아닌 듯하다. 필부의 뜻도 오히려 빼앗을 수 없는데 경들이 어찌 병이 들어 흙으로 만든 등신 같은 사람을 구박할 수 있겠는가. 천리나 되는 먼 변방에서 반년 동안 풍상(風霜)에 찌들었으니 죽지 않은 것만도 이미 이상한 일이다. 마음 병과 눈병 그리고 머리 병과 다리 병이 반복해서 몸에 얽혀 반신(半身)이 온전하지 못하고 온몸이 모두 아파 방에 드러누워 땅속으로 들어가기만 기다린다."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27일 임오 1번째기사[74]
"이렇게 무익할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어찌 사람에게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하는가. 대신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국가를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기 때문이다. 경들의 이 말은 아마도 대신의 말이 아닌 듯하다. 필부의 뜻도 오히려 빼앗을 수 없는데 경들이 어찌 병이 들어 흙으로 만든 등신 같은 사람을 구박할 수 있겠는가. 천리나 되는 먼 변방에서 반년 동안 풍상(風霜)에 찌들었으니 죽지 않은 것만도 이미 이상한 일이다. 마음 병과 눈병 그리고 머리 병과 다리 병이 반복해서 몸에 얽혀 반신(半身)이 온전하지 못하고 온몸이 모두 아파 방에 드러누워 땅속으로 들어가기만 기다린다."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27일 임오 1번째기사[74]
비망기(備忘記)로 전교하였다.
"나는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반생(半生)을 약으로 연명(延命)하고 있는데, 이는 약방(藥房)의 제인(諸人)들도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전일 옥당(玉堂)에 내린 비답(批答)에 ‘인간 세상에 뜻이 없다.’고 한 말에서 더욱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지금 다시 말하지 않겠다. 겨울이면 방안에 틀어박히고, 봄·가을에도 정원(庭苑)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난리를 만나고부터는 온갖 고생을 다하였는데 이런 기력을 가지고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진실로 이치 밖의 일이니, 천도(天道)가 무지(無知)하다 하여도 가할 듯하다. 전에도 민박(悶迫)한 뜻을 가지고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호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조의(朝議)에 저지당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원수인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리상 병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강서(江西)에 머물면서부터는 몇 달을 먹지 못하였고, 지금은 오직 죽만을 마실 뿐이다. 밤이면 병풍에 기대어 밤을 새우고 낮이면 정신이 혼란(昏亂)하여 멍청이가 되는데, 그런 와중에 광병(狂病)·목병(目病)·비병(痺病)·습병(濕病)·풍병(風病)·한병(寒病) 등 온갖 병이 함께 일어나서 이 한 몸을 공격하니, 한 줌의 원기(元氣)로써 어찌 그 병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광병으로 말하면 때때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곡(哭)을 하기도 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고함을 치며 달려가기도 하며, 무언가를 보고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놀라 머리털을 곤두 세우기도 하니, 예로부터 어디에 광병을 앓은 임금이 있었던가. 목병으로 말하면 두 눈이 어두워 사물을 분별할 수 없어 모든 계사(啓辭)의 글씨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머지 않아 소경이 될 것인데, 예로부터 어디에 소경의 임금이 있었던가. 비병으로 말하면 몸의 반쪽이 허약한 데다가 안개와 이슬을 맞은 뒤로는 그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오른쪽 수족을 전혀 움직일 수 없고 밤이면 쑤시고 아픈데 손으로 만져도 감각이 없어 마치 마른 나무 토막 같으니, 예로부터 어디에 한쪽 수족만 가진 임금이 있었던가.
이 밖에 고질이 된 더러운 병들은 일일이 들어 말할 수도 없다. 가을이 아직 깊지 않았는데도 갖옷을 껴입고 있으니 쇠약하여 숨이 거의 끊어지려는 형세가 하루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이러한데도 체면을 무릅쓰고 그대로 임금 노릇을 한 사람은 일찍이 전고에 없었던 바이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지금은 흉적이 이미 물러갔고 옛 강토(疆土)도 수복되었으므로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세자(世子)가 장성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치적을 이룩할 임금이 되기에 충분하니 선위(禪位)에 관한 여러 일들을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신해 2번째기사
"나는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반생(半生)을 약으로 연명(延命)하고 있는데, 이는 약방(藥房)의 제인(諸人)들도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전일 옥당(玉堂)에 내린 비답(批答)에 ‘인간 세상에 뜻이 없다.’고 한 말에서 더욱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지금 다시 말하지 않겠다. 겨울이면 방안에 틀어박히고, 봄·가을에도 정원(庭苑)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난리를 만나고부터는 온갖 고생을 다하였는데 이런 기력을 가지고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진실로 이치 밖의 일이니, 천도(天道)가 무지(無知)하다 하여도 가할 듯하다. 전에도 민박(悶迫)한 뜻을 가지고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호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조의(朝議)에 저지당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원수인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리상 병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강서(江西)에 머물면서부터는 몇 달을 먹지 못하였고, 지금은 오직 죽만을 마실 뿐이다. 밤이면 병풍에 기대어 밤을 새우고 낮이면 정신이 혼란(昏亂)하여 멍청이가 되는데, 그런 와중에 광병(狂病)·목병(目病)·비병(痺病)·습병(濕病)·풍병(風病)·한병(寒病) 등 온갖 병이 함께 일어나서 이 한 몸을 공격하니, 한 줌의 원기(元氣)로써 어찌 그 병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광병으로 말하면 때때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곡(哭)을 하기도 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고함을 치며 달려가기도 하며, 무언가를 보고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놀라 머리털을 곤두 세우기도 하니, 예로부터 어디에 광병을 앓은 임금이 있었던가. 목병으로 말하면 두 눈이 어두워 사물을 분별할 수 없어 모든 계사(啓辭)의 글씨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머지 않아 소경이 될 것인데, 예로부터 어디에 소경의 임금이 있었던가. 비병으로 말하면 몸의 반쪽이 허약한 데다가 안개와 이슬을 맞은 뒤로는 그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오른쪽 수족을 전혀 움직일 수 없고 밤이면 쑤시고 아픈데 손으로 만져도 감각이 없어 마치 마른 나무 토막 같으니, 예로부터 어디에 한쪽 수족만 가진 임금이 있었던가.
이 밖에 고질이 된 더러운 병들은 일일이 들어 말할 수도 없다. 가을이 아직 깊지 않았는데도 갖옷을 껴입고 있으니 쇠약하여 숨이 거의 끊어지려는 형세가 하루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이러한데도 체면을 무릅쓰고 그대로 임금 노릇을 한 사람은 일찍이 전고에 없었던 바이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지금은 흉적이 이미 물러갔고 옛 강토(疆土)도 수복되었으므로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세자(世子)가 장성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치적을 이룩할 임금이 되기에 충분하니 선위(禪位)에 관한 여러 일들을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신해 2번째기사
세자(世子)가 내선(內禪)의 명이 내렸다는 것을 듣고 즉시 예궐(詣闕)하여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신은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어 어려서부터 학식(學識)이 없었으므로 비록 장성하긴 했으나 덕업(德業)이 전혀 없습니다. 분수 넘게 세자가 된 뒤로 능력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난리를 만날 즈음에 질병이 생겨 반년 동안을 고생하였으므로 정신이 희미하여 평범한 일을 처리하는 것도 결코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찌 감당할 수 없는 명이 변변치 못한 이 몸에 내릴 것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명을 들으니 놀랍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심정을 통찰(洞察)하시고 속히 성지(聖旨)를 거두시어 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분수를 보존할 수 있게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미신(微臣)의 민박(悶迫)한 심정을 천지 신명이 굽어 살피고 계시니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신해 7번째기사
"신은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어 어려서부터 학식(學識)이 없었으므로 비록 장성하긴 했으나 덕업(德業)이 전혀 없습니다. 분수 넘게 세자가 된 뒤로 능력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난리를 만날 즈음에 질병이 생겨 반년 동안을 고생하였으므로 정신이 희미하여 평범한 일을 처리하는 것도 결코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찌 감당할 수 없는 명이 변변치 못한 이 몸에 내릴 것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명을 들으니 놀랍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심정을 통찰(洞察)하시고 속히 성지(聖旨)를 거두시어 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분수를 보존할 수 있게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미신(微臣)의 민박(悶迫)한 심정을 천지 신명이 굽어 살피고 계시니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신해 7번째기사
세자가 새벽에 대궐에 나아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기를,
"신이 민망 절박하고 답답한 심정에서 날마다 혈성(血誠)으로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으나 오래도록 유음(兪音)은 받지 못하였고 성지(聖旨)는 더욱 엄하니 두려움에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어제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심지어 ‘병이 들어서 감당할 수가 없게 되면 자식으로서는 마땅히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먹어야 한다.’고까지 하셨는데, 꿇어앉아 재삼 읽으니 감격하여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어리석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마음을 받들어 따르는 것이 곧 자식된 직분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명을 감히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은 실상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을 위하고 성상을 위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날이 갈수록 천청(天聽)은 더욱 막연하게 되고 있으니, 가슴 조이며 안절부절하다가 통곡할 뿐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용렬하고 불초한 점과 시세의 어렵고 위태로운 점에 대해서는 전후 남김없이 모두 말씀드렸으므로 성상께서는 반드시 충분하게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매양 민망 박절함으로 인하여 천위(天威)를 번거롭혀 드렸습니다. 물러와서 생각해보니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만 그보다 더 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의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면 만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슴속에 있는 진심으로 다시 감히 우러러 번거롭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미미한 정성이나마 통촉하시어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어 속히 윤허하여 주신다면 이는 병들어 죽게 된 목숨이 천지 부모의 은혜에 의해 보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에 있어서도 매우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신은 앓던 병이 다시 극심해져서 심신(心神)이 이미 저상되어서 기(氣)가 막히고 말도 어눌하여 민망스럽고 망극한 심정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간곡한 정성을 제대로 아뢰지 못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져 머리를 들고 대궐문을 우러르며 애절하게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러한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세 번 더 깊이 생각하셔서 속히 윤허의 명을 내리심으로써 국가의 무궁한 복이 연장되게 하소서. 신은 민망 절박하여 간절히 비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땅에 엎드려 아룁니다."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1번째기사[75]
"신이 민망 절박하고 답답한 심정에서 날마다 혈성(血誠)으로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으나 오래도록 유음(兪音)은 받지 못하였고 성지(聖旨)는 더욱 엄하니 두려움에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어제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심지어 ‘병이 들어서 감당할 수가 없게 되면 자식으로서는 마땅히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먹어야 한다.’고까지 하셨는데, 꿇어앉아 재삼 읽으니 감격하여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어리석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마음을 받들어 따르는 것이 곧 자식된 직분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명을 감히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은 실상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을 위하고 성상을 위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날이 갈수록 천청(天聽)은 더욱 막연하게 되고 있으니, 가슴 조이며 안절부절하다가 통곡할 뿐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용렬하고 불초한 점과 시세의 어렵고 위태로운 점에 대해서는 전후 남김없이 모두 말씀드렸으므로 성상께서는 반드시 충분하게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매양 민망 박절함으로 인하여 천위(天威)를 번거롭혀 드렸습니다. 물러와서 생각해보니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만 그보다 더 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의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면 만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슴속에 있는 진심으로 다시 감히 우러러 번거롭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미미한 정성이나마 통촉하시어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어 속히 윤허하여 주신다면 이는 병들어 죽게 된 목숨이 천지 부모의 은혜에 의해 보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에 있어서도 매우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신은 앓던 병이 다시 극심해져서 심신(心神)이 이미 저상되어서 기(氣)가 막히고 말도 어눌하여 민망스럽고 망극한 심정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간곡한 정성을 제대로 아뢰지 못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져 머리를 들고 대궐문을 우러르며 애절하게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러한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세 번 더 깊이 생각하셔서 속히 윤허의 명을 내리심으로써 국가의 무궁한 복이 연장되게 하소서. 신은 민망 절박하여 간절히 비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땅에 엎드려 아룁니다."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1번째기사[75]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백관을 인솔하고 선위하지 말 것을 계청하면서 재차 아뢰니 답하였다.
"민망스럽고 절박하여 눈물까지 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 견딜 수만 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했겠는가. 서울에 돌아가서 능침(陵寢)을 배알한 다음에는 즉시 나의 뜻을 받아 주겠는가? 그렇게 해준다면 지금은 억지로라도 따르겠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8일 기미 1번째기사
"민망스럽고 절박하여 눈물까지 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 견딜 수만 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했겠는가. 서울에 돌아가서 능침(陵寢)을 배알한 다음에는 즉시 나의 뜻을 받아 주겠는가? 그렇게 해준다면 지금은 억지로라도 따르겠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8일 기미 1번째기사
봉서(封書) 한 장을 도승지 심희수(沈喜壽)에게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봉서를 대신들에게 내리라."
하였다. 그 봉서의 대략에,
"과인(寡人)이 왕위에 있은 지 20여 년 동안에 지성으로 사대(事大)해 온 것에 대해 황천(皇天) 후토(后土)는 진실로 내 마음을 알 것이다. 불행히도 역적(逆賊)이 창일하여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파천(播遷)했다가 다행히 황제의 위령(威靈)을 힘입어 환도(還都)하게 되었는데, 온갖 병이 얽히고 설켜 감당하지 못할 듯싶다. 세자(世子)가 영예(英睿)하고 배신(陪臣) 중에 현명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족히 봉번(奉藩)544)(註 544)(봉번(奉藩) : 번방(蕃邦)으로서의 할 일을 해감.) 하게 될 것이다. 이에 선위(禪位)하고자 한다. ……"
하였다. 이어 비망기(備忘記)로 이르기를,
"이 봉서를 소매속에 간직했다가 연회가 끝날 즈음에 승지에게 보이고 나서 장 도사(張都司)에게 친히 주려고 했는데, 뜻밖에 장 도사가 갑자기 일어나므로 나도 창황하여 주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마음에 맹세했으므로 끝내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오늘 송 경략이 한 말을 보건대 매우 불칙했다. 나의 죄는 진실로 주벌을 받아야 하지만 배신들을 무슨 까닭으로 베려 하는가? 이른바 ‘구인(句引)’이라는 것은 또한 무슨 말인가?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게 될 것이다. 바라건대 경들은 국가를 위해 침착한 마음으로 선처해 간다면, 나 한 사람만 경들에게 두터운 은혜를 받는 것일뿐만 아니라 사직(社稷)에 대한 충성도 큰 것이 되니, 구구하게 고집할 생각을 하지 말라.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였다.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1월 16일 병인 5번째기사
"이 봉서를 대신들에게 내리라."
하였다. 그 봉서의 대략에,
"과인(寡人)이 왕위에 있은 지 20여 년 동안에 지성으로 사대(事大)해 온 것에 대해 황천(皇天) 후토(后土)는 진실로 내 마음을 알 것이다. 불행히도 역적(逆賊)이 창일하여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파천(播遷)했다가 다행히 황제의 위령(威靈)을 힘입어 환도(還都)하게 되었는데, 온갖 병이 얽히고 설켜 감당하지 못할 듯싶다. 세자(世子)가 영예(英睿)하고 배신(陪臣) 중에 현명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족히 봉번(奉藩)544)(註 544)(봉번(奉藩) : 번방(蕃邦)으로서의 할 일을 해감.) 하게 될 것이다. 이에 선위(禪位)하고자 한다. ……"
하였다. 이어 비망기(備忘記)로 이르기를,
"이 봉서를 소매속에 간직했다가 연회가 끝날 즈음에 승지에게 보이고 나서 장 도사(張都司)에게 친히 주려고 했는데, 뜻밖에 장 도사가 갑자기 일어나므로 나도 창황하여 주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마음에 맹세했으므로 끝내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오늘 송 경략이 한 말을 보건대 매우 불칙했다. 나의 죄는 진실로 주벌을 받아야 하지만 배신들을 무슨 까닭으로 베려 하는가? 이른바 ‘구인(句引)’이라는 것은 또한 무슨 말인가?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게 될 것이다. 바라건대 경들은 국가를 위해 침착한 마음으로 선처해 간다면, 나 한 사람만 경들에게 두터운 은혜를 받는 것일뿐만 아니라 사직(社稷)에 대한 충성도 큰 것이 되니, 구구하게 고집할 생각을 하지 말라.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였다.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1월 16일 병인 5번째기사
동궁이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망극하고 미안한 분부를 또 내리셨다 하니 놀랍고 몹시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신(微臣)의 못난 점과 나랏일의 망극함을 다시 거론하여 성청(聖聽)을 더럽히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근자에 성지(聖旨)가 엄준하여 신을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셨는데 신은 본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황제의 명이 이미 내려져서 피할 길이 없으니, 하루 바삐 달려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병에 걸려 이토록 지체하고 있으므로 두렵고 떨려서 밤낮으로 근심하는데다가, 더구나 이 막대한 명이 어려움이 많은 때에 또 내려졌으니, 두루 돌아보아도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아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위로 종사(宗社)의 큰 계책을 생각하시고 몹시 절박한 미신을 굽어 살피어 다시 성은(聖恩)을 내리시어 하루 속히 성명(聖命)을 거두소서. 그러면 신의 어리석은 분수가 잠시나마 편안할 수 있을 뿐더러, 국가와 백성 모두가 더없이 다행할 것입니다. 못내 하늘을 바라보고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삼가 엎드려 아룁니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7일 정유 9번째기사
"신이 듣건대, 망극하고 미안한 분부를 또 내리셨다 하니 놀랍고 몹시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신(微臣)의 못난 점과 나랏일의 망극함을 다시 거론하여 성청(聖聽)을 더럽히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근자에 성지(聖旨)가 엄준하여 신을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셨는데 신은 본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황제의 명이 이미 내려져서 피할 길이 없으니, 하루 바삐 달려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병에 걸려 이토록 지체하고 있으므로 두렵고 떨려서 밤낮으로 근심하는데다가, 더구나 이 막대한 명이 어려움이 많은 때에 또 내려졌으니, 두루 돌아보아도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아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위로 종사(宗社)의 큰 계책을 생각하시고 몹시 절박한 미신을 굽어 살피어 다시 성은(聖恩)을 내리시어 하루 속히 성명(聖命)을 거두소서. 그러면 신의 어리석은 분수가 잠시나마 편안할 수 있을 뿐더러, 국가와 백성 모두가 더없이 다행할 것입니다. 못내 하늘을 바라보고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삼가 엎드려 아룁니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7일 정유 9번째기사
윤11월 16일: 선위에 관한 일을 유성룡에게 전교하다
윤11월 16일: 유성룡이 선위하는 일이 시기가 아니라고 비밀히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하는 일의 불가함을 비밀히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재차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다섯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8일: 유성룡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선위하는 일에 관해 대신에게 전교하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5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5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 당상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의 당상을 거느리고 재차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의 당상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박동현 등 간원과 헌부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이 올린 차자
윤11월 27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양사가 선위의 불가함을 합계하다
윤11월 27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다시 아뢰다
윤11월 27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한 홍문관 부제학 이기와 직제학 백유함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7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 등 헌부와 간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 등 헌부와 간원들이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양사가 합계하여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양사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 부제학 이기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8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다시 올린 차자
윤11월 29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합계하여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대신이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대신이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해풍군 이기 등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분관 부제학 이기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9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 부제학 이기 등이 다시 올린 차자
12월 1일: 영의정 유성룡 등이 4번에 걸쳐 선조의 양위를 적극 반대하다
12월 1일: 왕 세자가 돌아오면 양위하기로 하다
선조 26년 11월부터 12월까지 벌어진 선조의 선위 소동에 대한 선조 실록의 기록
그러나 문제는 선조의 양위 파동과 세자 홀대가 후계자 교육의 실패와 조정에 피바람이 불어닥치는 원인을 제공했다. 선조 옹호론자 중에는 광해군이 선조의 잠재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견제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당시 광해군은 라이벌이 어쩌고를 떠나서 결국 선조가 언젠가는 왕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는 아들이자 후계자였다. 당현종이 당숙종에게 한 것처럼 제위를 평화롭게 물려주지는 못할망정, 정식으로 세자 책봉이 되지 않은 것을 빌미로 세자인 광해군의 지위를 흔들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이는 왕이기 이전에 사사로운 부모자식간의 관계로 보더라도 매우 파렴치하고 패륜적인 행위였다. 심지어 선조는 전쟁 후에 맞아들인 후처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을 이용해 공공연히 광해군의 입지를 위협하고, 형제 간의 갈등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더구나 전쟁 직후 선조는 47세, 아들 광해군은 24세였는데 선조의 경우 기대 수명이 짧았던 당시의 시대를 감안할 때 이미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76] 설상가상으로 이때부터 선조는 소화불량, 편두통, 신경질환을 심하게 앓으면서 건강까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미 능력이 검증된 장성한 세자가 존재했기에 보통 이때가 되면 세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거나 대리청정을 시키는 게 상식이다. 당장 조선 초기의 태종이나 세종의 경우 말기에는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 대리청정을 시켰다.윤11월 16일: 유성룡이 선위하는 일이 시기가 아니라고 비밀히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하는 일의 불가함을 비밀히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재차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다섯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8일: 유성룡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선위하는 일에 관해 대신에게 전교하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5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5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 당상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의 당상을 거느리고 재차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의 당상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박동현 등 간원과 헌부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이 올린 차자
윤11월 27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양사가 선위의 불가함을 합계하다
윤11월 27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다시 아뢰다
윤11월 27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한 홍문관 부제학 이기와 직제학 백유함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7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 등 헌부와 간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 등 헌부와 간원들이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양사가 합계하여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양사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 부제학 이기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8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다시 올린 차자
윤11월 29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합계하여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대신이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대신이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해풍군 이기 등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분관 부제학 이기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9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 부제학 이기 등이 다시 올린 차자
12월 1일: 영의정 유성룡 등이 4번에 걸쳐 선조의 양위를 적극 반대하다
12월 1일: 왕 세자가 돌아오면 양위하기로 하다
선조 26년 11월부터 12월까지 벌어진 선조의 선위 소동에 대한 선조 실록의 기록
광해군이 특별히 성정이 못되었거나 선조에게 불손하게 굴었던 것도 아니고, 결국 광해군은 왕자이므로 어차피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를 인물이었다. 광해군을 잘 키워 성공적으로 양위만 했더라면 그가 임진왜란 시절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도 결국 '내가 자식을 이렇게 잘 키웠으니 광해군도 이 정도씩이나 된 것이다'라면서 생색 낼 수도 있었다. 어차피 임진왜란 때 피똥싸며 고생도 했겠다, 태종마냥 적당한 시점에서 상왕으로 물러났더라면 광해군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아 행복했을 것이고, 계축옥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선조도 괜히 쓰잘데기없이 정치질하면서 지 혼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아랫목에 배 깔고 귤이나 까먹으며 느긋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잇속 챙길 욕심만 가득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선조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자식인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긴커녕 전쟁이 끝나자마자 보란 듯이 새 중전을 들여 적자를 낳는 것에 열중했다. 더불어 광해군에게 대리청정과 양위도 절대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질투와 시기 하는 걸 숨길 생각도 안 했다. 당시 선조에게는 정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한 이후로 왕비가 없었기에 중전을 새로 들이는 것은 조선의 법도 상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선조가 대놓고 적통대군의 탄생을 대놓고 노리며 신하들조차 안 좋게 볼 정도로 계비 간택을 서둘렀고, 결국 계비인 인목왕후가 기어코 영창대군을 낳자 대놓고 영창대군을 총애하면서 후계 구도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후에도 선조는 계속 권력을 독점하며 영창대군을 빌미로 광해군을 견제하는 등 파국의 씨앗을 남겼다.
이러한 선조의 주제넘은 권력욕과, 처세 말기에 저지른 분탕질 때문에 발생한 후계구도 붕괴는 가뜩이나 전쟁으로 혼란하던 조선 왕실의 질서를 완전히 박살냈다.[77] 엄격한 성리학 원칙과 법도하에 세워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선조는 스스로의 업보로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킨 주제에, 자기 외에는 누구도 권력의 칼자루를 쥐어 주지 않겠다는 권력독점욕으로 후계자들 간의 질서와 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음은 물론 후대 종묘에도 크나큰 폐를 끼쳤다.[78]
때문에 조정신료들은 이런 분열된 후계자들의 구도 속에서 혼란에 빠졌다. 2백 년 동안 유교 질서와 법도하에 세워진 왕권과 왕위 계승의 룰을 국왕이 갑자기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다.[79] 광해군과 영창대군 중 어느 쪽에 줄을 서도 윗줄부터 썩어버린 이 끈을 함부로 꽉 잡을 수 없으니 조정이 분열되어 버렸고, 차기 권력으로써 온갖 궂은 일은 다한 광해군과 그의 지지세력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 끝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숙청 대상 톱으로 세우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이는 선조 사후 광해군의 즉위 이후에 벌어진 계축옥사로 현실화된다.[80] 또한 그런 광해군의 견제에 휘말려 애꿎은 인목왕후(영창대군의 친모)와 정명공주(영창대군의 친누나)마저 사실상 폐위되어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오죽했으면 광해군이 폭군이자 암군으로 역사에 길이 남은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폐주될 때 백성들의 동정을 받았겠는가. 저런 한심한 아버지 밑에서 전시군주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나름의 전쟁 영웅이었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3.5. 공신 책봉 문제
전란이 종료되면 의례 공신 책봉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공신 책봉에도 많은 문제가 있어 전후 선조의 평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는데 바로 선무공신 책봉문제이다. 선조는 전란 후 전란에서 공을 세운 장수에게 주는 선무공신[81] 왕을 따라 호종한 자들에게 주는 호성공신,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자들에게 내려준 청난공신을 선정하였는데 문제가 되는 부분이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이다. 아래는 선조실록에 기록된 공신 책봉 과정이다. 애초 등급이 확정된 호성공신과 달리 고작 18명을 선정하는 선무공신은 선정 과정에서 추가 혹은 누락이 계속 발생하고, 심지어 등수까지 변경이 일어난다.공신 도감이 아뢰기를,
"정왜(征倭)의 공(功)에 대해서 지금 마련했는데, 신들은 모두 진중(陣中)에 있으면서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 아니므로 단지 그 당시의 장계와 소문에 뚜렷하게 드러난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임진년에 순안(順安)에 진을 치고 적로(賊路)를 차단하여 행조(行朝)의 성원(聲援)이 되고 중국군으로 향도(嚮導)하고 토병(土兵)을 수합(收合)하여 모양을 이룰 수 있게 한 것은 순찰사 이원익의 공인 듯합니다. 전에 신들이 왜적을 치는 데 구관(句管)한 공이 있었다고 계청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바다에서의 승전과 권율의 행주에서의 승전은 전교대로 마련하였습니다. 이억기(李億祺)는 전라 수사로서 초반의 한 곳 싸움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그 후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였습니다.
권응수(權應銖)는 영천(永川)에 있는 적을 공격하여 좌도(左道)를 보전시켰고, 김시민(金時敏)은 진주(晉州)를 지키면서 성을 보전하고 적의 명장을 죽여 왜국에가지 소문이 나게 하였습니다. 이정암(李廷馣)은 연안성(延安城)을 지켜 보전하므로써 강화(江華)를 통행하기에 지장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드러나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진주성을 지킬 때 이광악(李光岳)이 곤양 군수(昆陽郡守)로 성중(城中)에 들어가 처음에는 성 지키는 일을 지휘하다가 시민이 전사한 뒤에는 힘껏 싸워 적을 물리쳤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海上戰)에 있어서는, 이순신은 권준(權浚)·이순신(李純信)·안위(安衛)·배흥립(裵興立)의 공이 크다고 하였고 원균은 이운룡(李雲龍)·우치적(禹致積)의 공이 다른 사람보다 크다고 하였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은 이미 수공(首功)에 참여되었으니 그들의 편장(褊將)들의 논공(論功)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권율의 행주의 싸움에서 조경(趙儆)이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협력하여 지휘하였으니 이 편비(褊裨)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응서(金應瑞)와 고언백(高彦伯) 등은 대진(對陣)하여 승전한 공은 없으나 여러해 동안 싸움을 한 공이 있는데 이들 역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병들은 비록 크게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그 가운데에서 먼저 의병을 일으켜 한쪽 방면을 보전한 자는 불가불 논상하여야 합니다.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실로 곽재우(郭再祐)의 힘에 말미암은 것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개 녹훈(錄勳)을 마련할 때에 호종(扈從)에 대해서는 많게 하고 이들에게는 너무 소략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공로에 보답하고 뒷사람들을 권장함에 있어서도 미안한 듯하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장사(將士)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羊)을 몰아다가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이 수공(首功)이고 그 이외에는 권율의 행주 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사람들의 뜻에 차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하였다. 간혹 그 가운데에 잘하였다고 하는 자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할 뿐이다. 논공(論功)을 함에 있어서는 조정의 의논을 따르겠다. 다만 반드시 지극히 공평하게 하여 외람되지 않게 하라. 또 여러 해 동안 싸운 공을 논한다면 김응서와 고언백 두장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막중한 행사이다. 막중한 행사인데도 사람들에게 가볍게 시행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호종한 것을 녹공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육지(陸贄)가 일찍이 말하였다. 가령 육지가 조금이나마 공로에 보답하는 방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시에 호종한 신하들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더구나 요리나 하고 말고삐나 잡던 천한 자들까지 모두 익운의 반열에 참여시켜 이름이 맹부(盟府)에 들어 있는 자가 35인이나 되게 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정왜(征倭)의 공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비록 중국 장사(將士)들의 공이라고는 하나 대진(對陣)하여 승전한 공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호종한 신하들은 많이 참여시키고 싸움에 임한 장사들은 소략하게 하였으니, 공에 보답하는 방도를 잃었다고 할 만하다.
선조실록 159권, 선조 36년 2월 12일 기해 5번째기사
"정왜(征倭)의 공(功)에 대해서 지금 마련했는데, 신들은 모두 진중(陣中)에 있으면서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 아니므로 단지 그 당시의 장계와 소문에 뚜렷하게 드러난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임진년에 순안(順安)에 진을 치고 적로(賊路)를 차단하여 행조(行朝)의 성원(聲援)이 되고 중국군으로 향도(嚮導)하고 토병(土兵)을 수합(收合)하여 모양을 이룰 수 있게 한 것은 순찰사 이원익의 공인 듯합니다. 전에 신들이 왜적을 치는 데 구관(句管)한 공이 있었다고 계청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바다에서의 승전과 권율의 행주에서의 승전은 전교대로 마련하였습니다. 이억기(李億祺)는 전라 수사로서 초반의 한 곳 싸움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그 후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였습니다.
권응수(權應銖)는 영천(永川)에 있는 적을 공격하여 좌도(左道)를 보전시켰고, 김시민(金時敏)은 진주(晉州)를 지키면서 성을 보전하고 적의 명장을 죽여 왜국에가지 소문이 나게 하였습니다. 이정암(李廷馣)은 연안성(延安城)을 지켜 보전하므로써 강화(江華)를 통행하기에 지장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드러나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진주성을 지킬 때 이광악(李光岳)이 곤양 군수(昆陽郡守)로 성중(城中)에 들어가 처음에는 성 지키는 일을 지휘하다가 시민이 전사한 뒤에는 힘껏 싸워 적을 물리쳤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海上戰)에 있어서는, 이순신은 권준(權浚)·이순신(李純信)·안위(安衛)·배흥립(裵興立)의 공이 크다고 하였고 원균은 이운룡(李雲龍)·우치적(禹致積)의 공이 다른 사람보다 크다고 하였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은 이미 수공(首功)에 참여되었으니 그들의 편장(褊將)들의 논공(論功)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권율의 행주의 싸움에서 조경(趙儆)이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협력하여 지휘하였으니 이 편비(褊裨)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응서(金應瑞)와 고언백(高彦伯) 등은 대진(對陣)하여 승전한 공은 없으나 여러해 동안 싸움을 한 공이 있는데 이들 역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병들은 비록 크게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그 가운데에서 먼저 의병을 일으켜 한쪽 방면을 보전한 자는 불가불 논상하여야 합니다.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실로 곽재우(郭再祐)의 힘에 말미암은 것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개 녹훈(錄勳)을 마련할 때에 호종(扈從)에 대해서는 많게 하고 이들에게는 너무 소략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공로에 보답하고 뒷사람들을 권장함에 있어서도 미안한 듯하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장사(將士)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羊)을 몰아다가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이 수공(首功)이고 그 이외에는 권율의 행주 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사람들의 뜻에 차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하였다. 간혹 그 가운데에 잘하였다고 하는 자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할 뿐이다. 논공(論功)을 함에 있어서는 조정의 의논을 따르겠다. 다만 반드시 지극히 공평하게 하여 외람되지 않게 하라. 또 여러 해 동안 싸운 공을 논한다면 김응서와 고언백 두장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막중한 행사이다. 막중한 행사인데도 사람들에게 가볍게 시행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호종한 것을 녹공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육지(陸贄)가 일찍이 말하였다. 가령 육지가 조금이나마 공로에 보답하는 방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시에 호종한 신하들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더구나 요리나 하고 말고삐나 잡던 천한 자들까지 모두 익운의 반열에 참여시켜 이름이 맹부(盟府)에 들어 있는 자가 35인이나 되게 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정왜(征倭)의 공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비록 중국 장사(將士)들의 공이라고는 하나 대진(對陣)하여 승전한 공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호종한 신하들은 많이 참여시키고 싸움에 임한 장사들은 소략하게 하였으니, 공에 보답하는 방도를 잃었다고 할 만하다.
선조실록 159권, 선조 36년 2월 12일 기해 5번째기사
공신 도감(功臣都監)이 【당상(堂上)은 이항복(李恒福)·이호민(李好閔)·황진(黃璡)·홍가신(洪可臣)·박명현(朴名賢)이다. 】 아뢰기를,
"전후의 왜적을 정벌할 때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의의(擬議)하여 취품(取稟)한 것은, 이원익(李元翼)·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곽재우(郭再祐)·이억기(李億祺)·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이운룡(李雲龍)·우치적(禹致績)·배흥립(裵興立)·박진(朴晉)·고언백(高彦伯)·김응서(金應瑞)·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안위(安衛)·이수일(李守一)·김태허(金太虛)·김응함(金應緘)·이시언(李時言) 등 26인이었습니다. 지금 상의 분부를 받들고서 다시 참작하여 헤아려 보건대, 김시민과 이광악 등을 이미 녹공(錄功)하였으니 이정암이 연안(延安)에서 성을 지켜낸 공도 또한 마땅히 김시민 등의 예에 의해 마련해야겠습니다.
주사(舟師)의 편비(褊裨)에 있어서는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는 권준·이순신(李純信)·배흥립이고 원균의 휘하에는 이운룡·우치적인데, 그 당시의 각 장계(狀啓)를 조사해 보건대, 이순신의 장계에는 권준·이순신의 이름이 일 등의 첫 머리에 있고, 원균의 장계에는 이운룡·우치적의 이름이 등급을 논할 때는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고 또 다른 장계에는 ‘이 두 사람의 공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뽑아 내어 취품한 것은 단지 들은 바 주사(舟師)들의 의논이 그와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는 원균과 이순신의 두 장수가 공을 다투느라 틈이 있는데다가 또한 이운룡·우치적 등의 은상(恩賞)이 복구된 일로 인하여 유감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성명을 먼저 들게 된 것입니다. 나타나 있는 문안(文案)으로 말한다면, 이순신의 장계는 비록 과장한 것인 듯하나 분명히 의거한 데가 있는데 비해 원균의 장계는 당초부터 군공(軍功)의 등급에 있어 분명하지 못하여, 어느 때는 이운룡과 우치적 두 사람을 다른 사람들 밑에다 넣었다가 그 뒤의 장계에는 으뜸 공이라고 했으니 앞뒤의 전도가 심한 편입니다. 공론이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군공은 녹공하기 곤란할 듯합니다.
이순신의 장계에, 이름이 일등에 든 사람은 권준과 이순신(李純信) 두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운(鄭運) 같은 사람에 있어서도 이름이 1 등의 셋째 번에 들었고, 본디 역전(力戰)한 사람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상께서 수효가 지나치게 많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정운이 이미 녹공되지 않았으니 배흥립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합니다.[82] 다만 그때의 편비 중에 일등에 든 사람들은 우열이 없을 듯한데, 이미 주장(主將)이 없으므로 신들이 들은 것을 참작하여 첫머리에 든 두 사람만 뽑았습니다만 공이 같은데 탈락된 사람들이 반드시 원성이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날마다 머리를 마주대고 의논하여 감정했지만 합당하게 하지 못했으니, 부득이 이대로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억기는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서 이미 해상의 전투에 참여하였으니 녹공에 들어가야 함이 의심할 것 없겠으나 안위는 그 당시 일곱 번의 전투에 한 번도 참여 하지 않았으니 삭제하여야 할 듯합니다. 육장(陸將)들에 있어서는 별로 대단하게 적봉(敵鋒)을 겪었거나 적진을 함락시켰거나 한 공이 없었음은 과연 성상께서 분부하신 것과 같습니다. 고언백(高彦伯)은 비록 왜적을 사로잡고 능(陵)을 수호한 공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공로가 고언백과 비등한 사람이 또한 많은데, 고언백은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모두 들어가지 못한다면 뭇사람들의 마음이 반드시 섭섭하고 원통하게 여길 것입니다. 또 호종(扈從)했던 사람들은 많은 쪽으로 마련하고 왜적을 정벌한 사람들은 이처럼 약소하게 한다면 뒷날에 생길 근심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일에 취품하였던 육장(陸將)들 중에서 다시 참작하여 뽑아내서 공로가 있는 사람은 모두 녹공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그 사람들의 공로는 내가 어떻게 알 수가 없으니, 충분히 헤아려 반드시 공평하고 올바르게 하여 사람들의 비난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속담(俗談)에 ‘친구 덕으로 공신(功臣)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농담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런 일이 혹은 틀림없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일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 다만 그 일을 신중하게 하여 종정(鍾鼎)에 녹훈(錄勳)하는 일을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고 혹시라도 외람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약 실지로 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논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조실록 161권, 선조 36년 4월 28일 갑인 2번째기사
"전후의 왜적을 정벌할 때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의의(擬議)하여 취품(取稟)한 것은, 이원익(李元翼)·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곽재우(郭再祐)·이억기(李億祺)·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이운룡(李雲龍)·우치적(禹致績)·배흥립(裵興立)·박진(朴晉)·고언백(高彦伯)·김응서(金應瑞)·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안위(安衛)·이수일(李守一)·김태허(金太虛)·김응함(金應緘)·이시언(李時言) 등 26인이었습니다. 지금 상의 분부를 받들고서 다시 참작하여 헤아려 보건대, 김시민과 이광악 등을 이미 녹공(錄功)하였으니 이정암이 연안(延安)에서 성을 지켜낸 공도 또한 마땅히 김시민 등의 예에 의해 마련해야겠습니다.
주사(舟師)의 편비(褊裨)에 있어서는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는 권준·이순신(李純信)·배흥립이고 원균의 휘하에는 이운룡·우치적인데, 그 당시의 각 장계(狀啓)를 조사해 보건대, 이순신의 장계에는 권준·이순신의 이름이 일 등의 첫 머리에 있고, 원균의 장계에는 이운룡·우치적의 이름이 등급을 논할 때는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고 또 다른 장계에는 ‘이 두 사람의 공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뽑아 내어 취품한 것은 단지 들은 바 주사(舟師)들의 의논이 그와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는 원균과 이순신의 두 장수가 공을 다투느라 틈이 있는데다가 또한 이운룡·우치적 등의 은상(恩賞)이 복구된 일로 인하여 유감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성명을 먼저 들게 된 것입니다. 나타나 있는 문안(文案)으로 말한다면, 이순신의 장계는 비록 과장한 것인 듯하나 분명히 의거한 데가 있는데 비해 원균의 장계는 당초부터 군공(軍功)의 등급에 있어 분명하지 못하여, 어느 때는 이운룡과 우치적 두 사람을 다른 사람들 밑에다 넣었다가 그 뒤의 장계에는 으뜸 공이라고 했으니 앞뒤의 전도가 심한 편입니다. 공론이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군공은 녹공하기 곤란할 듯합니다.
이순신의 장계에, 이름이 일등에 든 사람은 권준과 이순신(李純信) 두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운(鄭運) 같은 사람에 있어서도 이름이 1 등의 셋째 번에 들었고, 본디 역전(力戰)한 사람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상께서 수효가 지나치게 많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정운이 이미 녹공되지 않았으니 배흥립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합니다.[82] 다만 그때의 편비 중에 일등에 든 사람들은 우열이 없을 듯한데, 이미 주장(主將)이 없으므로 신들이 들은 것을 참작하여 첫머리에 든 두 사람만 뽑았습니다만 공이 같은데 탈락된 사람들이 반드시 원성이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날마다 머리를 마주대고 의논하여 감정했지만 합당하게 하지 못했으니, 부득이 이대로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억기는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서 이미 해상의 전투에 참여하였으니 녹공에 들어가야 함이 의심할 것 없겠으나 안위는 그 당시 일곱 번의 전투에 한 번도 참여 하지 않았으니 삭제하여야 할 듯합니다. 육장(陸將)들에 있어서는 별로 대단하게 적봉(敵鋒)을 겪었거나 적진을 함락시켰거나 한 공이 없었음은 과연 성상께서 분부하신 것과 같습니다. 고언백(高彦伯)은 비록 왜적을 사로잡고 능(陵)을 수호한 공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공로가 고언백과 비등한 사람이 또한 많은데, 고언백은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모두 들어가지 못한다면 뭇사람들의 마음이 반드시 섭섭하고 원통하게 여길 것입니다. 또 호종(扈從)했던 사람들은 많은 쪽으로 마련하고 왜적을 정벌한 사람들은 이처럼 약소하게 한다면 뒷날에 생길 근심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일에 취품하였던 육장(陸將)들 중에서 다시 참작하여 뽑아내서 공로가 있는 사람은 모두 녹공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그 사람들의 공로는 내가 어떻게 알 수가 없으니, 충분히 헤아려 반드시 공평하고 올바르게 하여 사람들의 비난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속담(俗談)에 ‘친구 덕으로 공신(功臣)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농담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런 일이 혹은 틀림없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일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 다만 그 일을 신중하게 하여 종정(鍾鼎)에 녹훈(錄勳)하는 일을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고 혹시라도 외람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약 실지로 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논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조실록 161권, 선조 36년 4월 28일 갑인 2번째기사
비망기로 이르기를,
"원균을 2등에 녹공해 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어서는 원균이 재삼 장계를 올려 부산(釜山) 앞바다에 들어가 토벌할 수 없는 상황을 극력 진달했으나, 비변사가 독촉하고 원수가 윽박지르자 원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鎭)을 떠나 왜적을 공격하다가 드디어 전군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순국하고 말았다.[83] 원균은 용기만 삼군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도 또한 지극했던 것이다.
당(唐)나라 때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치면서 동관(潼關)을 나섰다가 마침내 적에게 패전하게 되었고, 송(宋)나라 때 양무적(楊無敵)이 반미(潘美)의 위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싸우러 나갔다가 적에게 섬멸된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고금(古今)의 인물들을 성공과 실패만 가지고는 논평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 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전번에 영상이 남쪽에 내려갈 때 잠시 원균을 민망하게 여기는 뜻을 가졌었는데, 영상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공로를 논하는 마당에 도리어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정운(鄭運)은 배흥립(裵興立)의 일 때문에 삭제하였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구원하러 가기를 의논할 적에 정운이 극력 찬동했었고, 왜적을 토벌할 때에도 정운의 공이 많았었다. 결국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으니 이는 정운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배흥립이 범람하다는 것 때문에 마땅히 녹공해야 할 정운까지 아울러 삭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정운을 녹공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다.[84]
회복(恢復)하게 된 공로가 오로지 중국군에게 있었으니, 청병(請兵)하러 가서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을 호종하지 않았다 해서 빠뜨릴 수는 없다. 심희수·유몽정이 이미 청병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사람들은 버려 둘 수 없으니 다시 참작해야 한다.
홍여순(洪汝諄)은 처음부터 호종했었는데도 지금 빠졌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홍여율(洪汝栗)은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부터 직접 영정(影幀)을 지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보호했었다. 이러한 그의 공로도 역시 빠뜨릴 수가 없으니, 녹공의 합당 여부를 의논해서 아뢰라.
당초에 4등급으로 구분한 뜻을 알지 못해서 이봉정(李奉貞)을 원종(原從)에 녹공하라는 것으로 전교했었다. 지금에 와서 이 녹공된 사람들을 보건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이 아닌데도 역시 다른 공로로 참여된 사람이 있다. 이봉정의 경우는 승전색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아비의 상사를 듣고서 고향으로 돌아갔었으니 사사로이 스스로 물러간 것과는 다르다. 그는 본향(本鄕)인 용천(龍川)에서부터 다시 호종하고 의주까지 가느라 고초가 많았고, 주선한 일도 있었으니, 정훈(正勳)에 녹공하지 않을 수 없음이 또한 이러하다.
내가 비록 잘나지는 못했지만 어찌 감히 한 사람의 환시(宦寺) 때문에 경들을 턱없이 속여서 당연히 녹공해서는 안 될 사람을 함부로 여러 훈신들 사이에도 두려 하겠는가. 이봉정은 4등에 녹공해야 한다.
같은 등급 속에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므로 차례를 논할 수 없으면 당연히 직품에 따라서 기록했어야 할 것인데, 많은 사람이 바뀌어 놓여 있으니 좌차(坐次)에 있어서 온당지 못한 듯하다. 또 각 등급에 있어서의 상격(賞格)에 관한 전례를 알고 싶으니 모두 고찰해서 아뢰라.
산하대려(山河帶礪)의 훈공을 종정(鍾鼎)에 기록하는 것은 국가에 더없이 큰 일이니, 반드시 공평 정대하게 하여 공이 있는 사람을 빠뜨려서도 안 되며 공이 없는 사람을 함부로 써서도 안 된다. 우리 나라에는 전부터 친구 덕분에 공신이 되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이 말이 비록 맹랑하기는 하나 이로 인해 경계하기에는 좋은 말이니, 아무쪼록 조용하게 잘 살펴서 처리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이번의 공신은 원수(元數)가 너무 많으니, 전에는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85]
정운은 수록하겠습니다만, 심희수와 유몽정은 청병하여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삭제하여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여순은 평양까지 호종했다가 북도의 요해지(要害地)를 파수하는 일로 명을 받고서 대가(大駕)를 배사하고 의주로 들어갔었고, 뒤에는 경기의 삭녕(朔寧) 등지에 나가 군사를 모집하다가 9월 초에야 비로소 의주로 들어갔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명이 당초부터 원훈들이 의논하여 결정하는 속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감히 제기(提起)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홍여율과 이봉정은 또한 마땅히 수록하겠습니다. 상격에 관한 전례는 문서가 없어서 사고(査考)할 여유가 없었으니 곧바로 고찰하여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위 헌공(衛獻公)이 망명했다가 위나라로 돌아올 적에 교외에 이르러 수종했던 사람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준 다음 들어오려 하자 유강(柳莊)이 말하기를 ‘만일에 모두가 사직을 지켰더라면 누가 고삐를 잡고 따라갔을 것이며, 모두가 따라갔더라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임금께서 나라에 돌아와 사정(私情)을 쓰려 하시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나누어 주지 않았었다. 환시는 나라 임금의 가노(家奴)로서 녹훈한 일은 고찰해 볼 데가 없다.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선조실록 163권, 선조 36년 6월 26일 신해 2번째기사
"원균을 2등에 녹공해 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어서는 원균이 재삼 장계를 올려 부산(釜山) 앞바다에 들어가 토벌할 수 없는 상황을 극력 진달했으나, 비변사가 독촉하고 원수가 윽박지르자 원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鎭)을 떠나 왜적을 공격하다가 드디어 전군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순국하고 말았다.[83] 원균은 용기만 삼군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도 또한 지극했던 것이다.
당(唐)나라 때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치면서 동관(潼關)을 나섰다가 마침내 적에게 패전하게 되었고, 송(宋)나라 때 양무적(楊無敵)이 반미(潘美)의 위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싸우러 나갔다가 적에게 섬멸된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고금(古今)의 인물들을 성공과 실패만 가지고는 논평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 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전번에 영상이 남쪽에 내려갈 때 잠시 원균을 민망하게 여기는 뜻을 가졌었는데, 영상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공로를 논하는 마당에 도리어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정운(鄭運)은 배흥립(裵興立)의 일 때문에 삭제하였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구원하러 가기를 의논할 적에 정운이 극력 찬동했었고, 왜적을 토벌할 때에도 정운의 공이 많았었다. 결국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으니 이는 정운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배흥립이 범람하다는 것 때문에 마땅히 녹공해야 할 정운까지 아울러 삭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정운을 녹공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다.[84]
회복(恢復)하게 된 공로가 오로지 중국군에게 있었으니, 청병(請兵)하러 가서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을 호종하지 않았다 해서 빠뜨릴 수는 없다. 심희수·유몽정이 이미 청병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사람들은 버려 둘 수 없으니 다시 참작해야 한다.
홍여순(洪汝諄)은 처음부터 호종했었는데도 지금 빠졌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홍여율(洪汝栗)은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부터 직접 영정(影幀)을 지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보호했었다. 이러한 그의 공로도 역시 빠뜨릴 수가 없으니, 녹공의 합당 여부를 의논해서 아뢰라.
당초에 4등급으로 구분한 뜻을 알지 못해서 이봉정(李奉貞)을 원종(原從)에 녹공하라는 것으로 전교했었다. 지금에 와서 이 녹공된 사람들을 보건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이 아닌데도 역시 다른 공로로 참여된 사람이 있다. 이봉정의 경우는 승전색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아비의 상사를 듣고서 고향으로 돌아갔었으니 사사로이 스스로 물러간 것과는 다르다. 그는 본향(本鄕)인 용천(龍川)에서부터 다시 호종하고 의주까지 가느라 고초가 많았고, 주선한 일도 있었으니, 정훈(正勳)에 녹공하지 않을 수 없음이 또한 이러하다.
내가 비록 잘나지는 못했지만 어찌 감히 한 사람의 환시(宦寺) 때문에 경들을 턱없이 속여서 당연히 녹공해서는 안 될 사람을 함부로 여러 훈신들 사이에도 두려 하겠는가. 이봉정은 4등에 녹공해야 한다.
같은 등급 속에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므로 차례를 논할 수 없으면 당연히 직품에 따라서 기록했어야 할 것인데, 많은 사람이 바뀌어 놓여 있으니 좌차(坐次)에 있어서 온당지 못한 듯하다. 또 각 등급에 있어서의 상격(賞格)에 관한 전례를 알고 싶으니 모두 고찰해서 아뢰라.
산하대려(山河帶礪)의 훈공을 종정(鍾鼎)에 기록하는 것은 국가에 더없이 큰 일이니, 반드시 공평 정대하게 하여 공이 있는 사람을 빠뜨려서도 안 되며 공이 없는 사람을 함부로 써서도 안 된다. 우리 나라에는 전부터 친구 덕분에 공신이 되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이 말이 비록 맹랑하기는 하나 이로 인해 경계하기에는 좋은 말이니, 아무쪼록 조용하게 잘 살펴서 처리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이번의 공신은 원수(元數)가 너무 많으니, 전에는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85]
정운은 수록하겠습니다만, 심희수와 유몽정은 청병하여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삭제하여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여순은 평양까지 호종했다가 북도의 요해지(要害地)를 파수하는 일로 명을 받고서 대가(大駕)를 배사하고 의주로 들어갔었고, 뒤에는 경기의 삭녕(朔寧) 등지에 나가 군사를 모집하다가 9월 초에야 비로소 의주로 들어갔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명이 당초부터 원훈들이 의논하여 결정하는 속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감히 제기(提起)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홍여율과 이봉정은 또한 마땅히 수록하겠습니다. 상격에 관한 전례는 문서가 없어서 사고(査考)할 여유가 없었으니 곧바로 고찰하여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위 헌공(衛獻公)이 망명했다가 위나라로 돌아올 적에 교외에 이르러 수종했던 사람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준 다음 들어오려 하자 유강(柳莊)이 말하기를 ‘만일에 모두가 사직을 지켰더라면 누가 고삐를 잡고 따라갔을 것이며, 모두가 따라갔더라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임금께서 나라에 돌아와 사정(私情)을 쓰려 하시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나누어 주지 않았었다. 환시는 나라 임금의 가노(家奴)로서 녹훈한 일은 고찰해 볼 데가 없다.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선조실록 163권, 선조 36년 6월 26일 신해 2번째기사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崐壽)인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정원군(定遠君) 이부(李桴)·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괵(李𥕏)·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姬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海豊君) 이기(李耆)·순의군(順義君) 이경온(李景溫)·순령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인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오정방(吳定邦)·이응순(李應順)·절신정(節愼正) 수곤(壽崐)·송강(宋康)·고희(高曦)·강인(姜絪)·내시(內侍) 김기문(金起文)·내시 최언준(崔彦俊)·내시 민희건(閔希蹇)·의관(醫官) 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이마(理馬) 김응수(金應壽)·이마 오치운(吳致雲)·내시 김봉(金鳳)·내시 김양보(金良輔)·내시 안언봉(安彦鳳)·내시 박충경(朴忠敬)·내시 임우(林祐)·내시 김응창(金應昌)·내시 정한기(鄭漢璣)·내시 박춘성(朴春成)·내시 김예정(金禮楨)·내시 김수원(金秀源)·내시 신응서(申應瑞)·내시 신대용(辛大容)·내시 김새신(金璽信)·내시 조구수(趙龜壽)·의관(醫官) 이공기(李公沂)·내시 양자검(梁子儉)·내시 백응범(白應範)·내시 최윤영(崔潤榮)·내시 김준영(金俊榮)·내시 정대길(鄭大吉)·내시 김계한(金繼韓)·내시 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최세준(崔世俊)·사알(司謁) 홍택(洪澤)·이마 전용(全龍)·이마 이춘국(李春國)·이마 오연(吳連)·이마 이희령(李希齡)인데 충근정량호성 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라 하여, 각각 작위(爵位)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다. 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86]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류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홍가신(洪可臣)인데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2등은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87]인데 분충출기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3등은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인데 분충출기청난 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으로 봉했는데 모두 5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였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만든 것이 당초 어찌 이처럼 구차한 데에 쓰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 김응남(金應南)은 신묘년100)(註 100)(신묘년 : 1591 선조 24년.) 에 부경(赴京)하였을 적에 정신(廷臣)들의 의논을 극력 변론하여 실제 상황을 들어 주문(奏聞)함으로써 마침내 황상(皇上)이 감림(監臨)하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진실로 크다. 그리고 신점(申點)은 중국에 있다가 국가가 병화(兵火)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 7일 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울면서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주청했으니, 중국군이 나오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이겠는가. 정곤수(鄭崐壽)는 구원병을 주청하고 군량을 주청한 공로가 있고, 이호민(李好閔)은 사명(辭命)을 전담한 공로가 있고, 이순신·원균·권율은 혈전(血戰)한 공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삼공(三公)은 조금이나마 대책을 결단한 일이 있었으니 부득이하다면 이들 몇 사람만 녹훈했어야 했다.
선조실록 175권, 선조 37년 6월 25일 갑진 7번째기사
이상이 실록에 기록된 공신 책봉 과정이다. 선무공신은 1등에 이순신과, 권율, 원균을 포함하여 총 18명인 반면 호성공신은 80명이 넘어가며 그 신분도 다양하다.[88] 1602년 4월 공신도감이 공신록에 들 만한 장수 26명을 추려 올린 기사를 보면 선조는 선무공신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 꺼린 정황이 분명하다. 일단 선무공신에 원균이 1등으로 들어간 것은 전적으로 선조의 의지였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 원균옹호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89] 애초 원균은 신하들이 2등에 놓았으나[90] 선조가 원균의 공이 작지 않다며 1등으로 강제로 올렸으며, 그래도 이순신의 공을 부정은 못해 이순신을 1등 중에서도 원훈에 봉했다.[91]호성 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崐壽)인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정원군(定遠君) 이부(李桴)·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괵(李𥕏)·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姬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海豊君) 이기(李耆)·순의군(順義君) 이경온(李景溫)·순령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인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오정방(吳定邦)·이응순(李應順)·절신정(節愼正) 수곤(壽崐)·송강(宋康)·고희(高曦)·강인(姜絪)·내시(內侍) 김기문(金起文)·내시 최언준(崔彦俊)·내시 민희건(閔希蹇)·의관(醫官) 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이마(理馬) 김응수(金應壽)·이마 오치운(吳致雲)·내시 김봉(金鳳)·내시 김양보(金良輔)·내시 안언봉(安彦鳳)·내시 박충경(朴忠敬)·내시 임우(林祐)·내시 김응창(金應昌)·내시 정한기(鄭漢璣)·내시 박춘성(朴春成)·내시 김예정(金禮楨)·내시 김수원(金秀源)·내시 신응서(申應瑞)·내시 신대용(辛大容)·내시 김새신(金璽信)·내시 조구수(趙龜壽)·의관(醫官) 이공기(李公沂)·내시 양자검(梁子儉)·내시 백응범(白應範)·내시 최윤영(崔潤榮)·내시 김준영(金俊榮)·내시 정대길(鄭大吉)·내시 김계한(金繼韓)·내시 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최세준(崔世俊)·사알(司謁) 홍택(洪澤)·이마 전용(全龍)·이마 이춘국(李春國)·이마 오연(吳連)·이마 이희령(李希齡)인데 충근정량호성 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라 하여, 각각 작위(爵位)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다. 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86]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류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홍가신(洪可臣)인데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2등은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87]인데 분충출기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3등은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인데 분충출기청난 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으로 봉했는데 모두 5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였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만든 것이 당초 어찌 이처럼 구차한 데에 쓰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 김응남(金應南)은 신묘년100)(註 100)(신묘년 : 1591 선조 24년.) 에 부경(赴京)하였을 적에 정신(廷臣)들의 의논을 극력 변론하여 실제 상황을 들어 주문(奏聞)함으로써 마침내 황상(皇上)이 감림(監臨)하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진실로 크다. 그리고 신점(申點)은 중국에 있다가 국가가 병화(兵火)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 7일 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울면서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주청했으니, 중국군이 나오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이겠는가. 정곤수(鄭崐壽)는 구원병을 주청하고 군량을 주청한 공로가 있고, 이호민(李好閔)은 사명(辭命)을 전담한 공로가 있고, 이순신·원균·권율은 혈전(血戰)한 공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삼공(三公)은 조금이나마 대책을 결단한 일이 있었으니 부득이하다면 이들 몇 사람만 녹훈했어야 했다.
선조실록 175권, 선조 37년 6월 25일 갑진 7번째기사
이 선무공신 가운데 대다수는 이미 죽어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호성 공신과 비교했을 때도 그 수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이전에는 선무공신 가운데 의병장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처음은 의병장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관군이 된 사람들로서 선무2등공신 권응수와 이정암이 있다.[92] 대표적인 의병장인 곽재우는 1600년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 왕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경상좌병사직을 내버리고 낙향해 대놓고 왕의 권위를 무시했는데, 공신도감에선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넣어주려고 했기 때문에 이때 선조의 신뢰를 잃지 않았다면 이름을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김천일, 고경명, 김면, 조헌, 이정형, 이수일 등 이때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의병장들은 사후 추증이건, 생전에 중용되건 어떤 식으로든 대우를 받긴 했다. 별도로 이몽학의 난 진압으로 선정된 정난공신에 최호 등 일부 무장들이 들어가기도 했다.
공신 책봉 관련해서 진짜 할 말 있는 쪽은 의병이 아니라 관군, 특히 이순신 밑에서 활약한 수군 장수들이다. 소소한 전과는 꾸준히 세웠지만 큰 공은 없는 고언백도 들어갔는데[93] 정운, 우치적, 배흥립, 안위, 김응함은 공신도감에서 들어갈 만하다 했음에도 선조의 견제로 전부 못 들어갔다. 정운은 선조가 공신 수가 너무 많다고 경계하는 바람에 기각[94], 임진년부터 정운과 함께 활약한 배흥립도 같은 이유로 기각, 1594년에 거제현령으로 제수되어 임진년 해전에는 참여할 수 없었던 안위는 임진년에 공이 없다고 기각하는 식으로 전공 많은 수군 장수들을 다 자르고 무의공 이순신과 권준 둘만 위에서 뚝 잘라서 집어넣었다.[95]
선조의 공신 책봉이 비난받는 이유는 원균에 대한 무리한 1등 공신 책봉과 전란으로 선정된 공신임에도 갖은 이유를 들어 선무공신은 그 수를 줄인 반면, 자신을 호종하고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호성공신은 그 수가 선무공신의 4배 이상이 되는데 있다. 한마디로 자신과 함께 의주까지 도망친 관료들 위주로 공신을 책봉한 것에 있다.
원균을 1등으로 강제로 올리기 위해 선조가 한 발언을 보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한 공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비록 도성을 버리고 도망은 쳤으나 결국에는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선조 자신 역시 똑같은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이른바 재조지은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호성공신(선조를 호송한 공을 세운 신하들, 그러니까 피난길 식구들)은 86명인데(내시가 25명이다), 선무공신(무장 혹은 대명 외교의 성과를 거둔 자)는 18명이다. 이 중에는 원균도 포함된다.
오죽했으면 이덕형은 본인이 호성공신이 되자 더러워서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호성공신을 거절했는데 진짜 임금 면전에서 저렇게 말하면 불경죄가 되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으므로 일본 및 명과의 외교 교섭 문제 때문에 선조의 곁을 떠나 있었던 시간이 길어서 본인은 임금을 충분히 모시지 못했다는 적당한 명분으로 둘러댔다. 이항복도 분개하긴 마찬가지였으나 이항복은 장인어른 권율이 선무공신에서 제외당할까봐 호성공신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았다. 이렇듯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조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되레 선무공신을 영광스럽게 생각한 반면 호성공신을 부끄럽게 생각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96]
3.6. 왕자 관리 실패
선조의 자식 농사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망했는데, 광해군과 영창대군, 일부 어린 자식들을 제외한 왕자들의 정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97] 이게 능력만 부족하거나 부패 수준도 아니고[98] 횡령, 폭행, 강간, 연쇄살인을 저질러 왕족만 아니었으면 사형 당하거나 평생 감옥 독방에서 썩어야 할 수준의 흉악범들이 있었다.순화군은 귀양을 간 수원에서도 흉악한 짓을 저질러 백성들과 지방관들이 도망을 가서 수원이 허벌판이 되었다. 민란이 일어났거나 왜구가 침략한 것도 아닌데 사람 하나 때문에 규모가 큰 고을이 망할 지경에 순화군한테서 아버지를 살린 자식이 효자로 인정받았을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순화군의 범죄가 일 단위로 적혀 있다. 결국 선조도 더는 봐줄 수 없었고 신하들의 재촉에 못 이겨 순화군을 폐서인하여 가택 연금시켰고, 후술할 임해군조차 살인을 일삼는 순화군에게 질색하여 지나치다고 질책할 정도였다. 임해군도 순화군 뺨칠 정도의 패악질을 벌여 신하들이 대놓고 죽이라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99] 평시에는 물론 웬만한 전시에도 신하들이 왕에게 자식들을 죽이라고 하면 대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었는데 대놓고 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임해군의 패악질이 왕족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를 받기도 힘들 정도로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임해군은 광해군 즉위 후 역모 혐의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지만, 영창대군 때와는 달리 이항복과 이덕형 등 일부 이들이 은전론[100]을 펼친 걸 빼면 당파를 가리지 않다시피한 채 임해군을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조선의 왕족 중에서도 단연 최악의 인성을 가졌다고 꼽을 수 있는 임해군, 순화군, 정원군이 모두 선조의 자식들인데, 선조는 죄를 저지른 자식들을 훈계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감싸고 돌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격도 유전적 영향이 상당 부분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 역사상 손에 꼽힐 흉악한 망나니들이 한 대에 싸그리 나온 것을 보면 선조의 왕자 교육 방식 수준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알 수 있다.[101] 임해군 등 일부 왕자들이 저지른 만행은 임진왜란 때 항전하는 백성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백성들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일본군에게 넘겨버리는 반역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큰 처벌을 면했고 일본군도 오죽했으면 임해군을 넘겨버린 조선 백성들을 멸시하거나 욕하기는커녕 그럴 만했다며 이해했을 정도였다.[102]
이 개노답 3인방에 묻히지만 늦둥이 아들인 흥안군, 경평군 또한 잦은 비행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중 경평군은 조카인 인조가 직접 실성했다고 할 정도였다.[103]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활약하여 대신들의 인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차남 광해군조차 의심이 많고 권위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인물이 되어버려, 정작 왕위에 오른 후에는 암군이자 폭군으로 흑화했다.[104] 조선 왕 가운데 친국(親鞫)[105] 실행 기록 2위이라는 업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106] 재위 시작부터 재위 내내 궁궐 공사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여 백성의 고혈을 심하게 쥐어짜 민생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어 끝내 의심병과 궁궐병 때문에 참다 못한 신하들에게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망하기에 이르렀다.
재위 중반 들어 슬슬 후계자를 선정하자는 움직임[107]이 나왔는데, 서장자 임해군은 워낙 자질이 엉망이라서 차순위 광해군에게 시선이 쏠렸다. 왕조 국가에서 후계자 선정은 필연적으로 왕의 권위와 연결되는 문제라 전쟁 이전의 선조는 세자 선정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가[108] 전쟁 이후에 도저히 책봉을 미룰 수 없게 되자 광해군을 책봉한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임무를 잘 해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이 사이 왕으로서의 권위가 심각하게 추락한 선조의 가장 큰 정적이 된다.
따지고 보면 선조의 이런 행적은 매우 부적절한 게, 광해군은 적장자가 아닐 뿐 엄연한 선조의 생물학적 자식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정적으로 삼을 일이 과연 몇이나 존재하는가?[109] 그나마 있는 사례를 꼽자면 형제가 많아 그 중 하나가 미리 선수를 쳐서 쿠데타를 벌여 아버지의 권력을 찬탈하고 경쟁자를 숙청하는 경우(태종)가 말이 되는 상황인데 형제들이 하나같이 변변찮은 광해군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다.[110] 영창대군 이전까지는 적장자가 없었던 상태였기에 광해군을 책봉한다고 해서 선조의 권위가 떨어질 리는 없었고, 본래 아들이 걸물이면 그렇게 키워낸 아버지의 권위도 올라간다. 선조 자신의 괴상한 감투 욕심, 관심병이 아니라면 광해군에게 힘을 실어줘도 선조는 전혀 손해볼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거기다가 광해군은 선조에게 불손하게 굴지도 않았고, 권력욕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던 데다 세자로서의 능력이 없는 인간이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잘 크게 뒀더라면 충분히 좋은 왕이 될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111]
때문에 정종이나 태종처럼 세자에게 양위를 하거나, 세종처럼 대리청정을 맡겨보거나, 아니면 다른 일반적인 왕들이 하는 것처럼 아들에게 신뢰를 보여주는 수준이면 족했다. 문제는 선조는 권력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는 왕인 데다 질투심도 심했기에 권력을 끝까지 양보해 주지 않았고, 후계자인 광해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티를 계속 내며 정신적으로 크게 압박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조의 비정상적인 자기애에서 기인하였으며, 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마땅한 자식들에게는 애정을 쏟았으나 조금이라도 자질을 보이는 자식은 자신의 라이벌로 보고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게 굴었다. 결국 광해군을 몰아낼 명분은 없지만 견제는 해야 하는 불편한 관계를 10년 이상 지속해야 했다. 이 와중에 전쟁 직후인 1600년에 광해군의 큰 심리적 지지자인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광해군은 선조의 견제에 더욱 심리적으로 내몰리기만 했는데, 광해군을 다독이던 의인왕후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왕비 대우 정도만 하고[112] 인빈 김씨[113]만 총애하며 거의 홀대하다시피 해 스트레스를 준 남편 선조의 책임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의인왕후와 달리 성격도 정반대에 가깝고, 눈치 없고 철없는 행동으로 본인을 자극하는 계모 인목왕후를 더욱 미워하였고 이것은 광해군이 엇나가고 폐모살제를 저지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처벌할 수 없다면 교육이라도 시켜야 한다. 아무리 왕족이 특별해도 왕의 자식이라고 못된 짓만 골라서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다. 아무리 왕의 아들이라도 개망나니짓만 하고 다니면 백성들은 "왕이 저 모양이니 왕자도 이 모양이지!"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다. 게다가 그것을 넘어서 애당초 왕족이라 해서 뭐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은 아니며, 왕족을 처벌하는데 신하들은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다. 즉, 왕족이라도 사고를 쳤다간 논란거리에 오르고 신하들이 처벌하라는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선조는 이것에도 제대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 이미 임진왜란 전부터 임해군, 순화군의 행동은 막장이었지만 선조는 이를 단속하지 않았고 결국 임해군과 순화군이 일본군에 붙잡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선조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아들들에게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당부라도 해야 하건만 그대로 방치하다시피 했다. 선조는 이쪽으로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다른 왕들과 비교해 봐도 심각했는데 조선의 건국자이자 초대왕인 태조도 왕자의 난이 있긴 했었지만 모두들 인간말종들은 아니었고 2대왕 정종도 그의 서자들 모두 왕위에 욕심을 낼 정도에 인간말종들도 아니며 왕자의 난으로 이복동생을 죽이고 동복형을 몰아낸 전적이 있던 3대왕 태종도 양녕대군 1명을 제외하면 적자들인 효령, 충녕, 성녕뿐 아니라 서자들도 문제가 있던 왕자들은 없었고 4대왕인 세종 또한 계유정난이란 뒷통수만 맞았을 뿐 그의 생전엔 모두들 모범생이 었고 자식이 적은 문종과 세조의 아들 예종, 자식이 일찍 요절한 명종 자식이 없었던 단종과 인종, 경종은 건너뛰더라도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선조의 조상 세조 또한 적자인 의경세자와 해양대군과 서자 덕원군은 살인범죄 경력이 있는 서자인 창원군을 제외하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올곧은 성품들이었으며 세조의 손자인 성종 또한 나중에 폭군으로 흑화하는 연산군과 서자 계성군을 제외하면 다른왕자들은 멀쩡했으며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의 왕자들 또한 아버지와 달리 아무 문제들이 없었고 성종과 연산군의 뒤를 이어 왕이된 선조의 할아버지 중종의 아들들도 선조의 생부를 제외하면 다들 멀쩡하였고 또 다른 폭군인 광해군도 자식농사에 대해 선조보다 나은 수준이다. 오히려 선조를 닮은 것이 자신의 손자인 인조와 자기 아들인 사도세자를 학대하고 죽인 자신의 현손자 영조와 맞먹을 수준이었다.
3.7. 말년의 인재 등용 실패
상기한 대로 전란 전에 선조의 인재등용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권위가 떨어지고 욕심을 너무 부린 탓인지 나이가 들어 사람 보는 눈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인지 집권 후반기 인사에서 계속 실책을 저질렀다.대표적인 예가 선조 말기 영의정을 독점했던 재상 유영경인데, 그는 선배들인 이산해, 이항복, 이덕형 등 명신들에 비해서 이렇다 할 능력이 없고 왜란 중에도 보신주의적인 행태만 보이며 제대로 된 신하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윗사람의 심기를 잘 읽고 그걸 그대로 청하는 아첨꾼의 능력이 뛰어나서 줄을 잘 대고 승진하더니 북인 파벌의 영수에 영의정까지 올라간 것. 문제는 그다음인데 당시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싫어하고 영창대군을 밀어주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노골적으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미는 정치적 도박수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광해군에 대한 선조와 조정의 압박이 심해졌다. 결국 유영경은 광해군의 원한을 사면서 그의 즉위 이후 자신의 업보를 그대로 돌려받는다. 유영경은 광해군 즉위 이후 대북의 탄핵을 받아 영의정 자리에서 쫓겨나 파직과 삭직을 거쳐 유배당한 다음, 끝내 광해군의 명으로 유배지에서 자결하고 시신마저 도로 끄집어내 부관참시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114]
그 밖에 유영경을 비롯한 탁소북이 워낙 유영경의 거수기 체제다 보니 "유영경당", 유당(柳黨)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질이 좋지 못한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장악하는 등[115] 여러모로 건전하지 못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말년의 세자에 대한 견제 등을 볼 때, 왜란 중에 끝도 없이 박살 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친위 세력만을 조성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116]
계비인 인목왕후 또한 실패한 인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목왕후는 흔한 "광해군 명군설"만큼 악랄한 여걸도 아니었고 역심을 품은 것도 아니었지만, 양반집 귀한 아가씨로 자라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라 눈치도 없었고 처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미 왜란 당시 충분히 활약해서 세자로 확정된 것과 다름없는 광해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자 영창대군이 벌써 세자가 된 양 설레발을 치며 궁중 법도를 어기고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차려입히는 위험한 실책을 저질렀다. 또한 인목왕후는 자신의 중궁전 소속 나인들이 광해군의 동궁 소속 나인들을 핍박하거나, 광해군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데도 이를 제어하지 못하며 측근관리에 있어서 무능한 모습만 보였다.[117] 인목왕후 본인도 광해군의 동궁 소속 나인 100명을 멋대로 데리고 가버리는 등, 수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도 치부에 힘을 써서 재물을 모으는데 열중하여 세간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결국 인목왕후도 광해군의 원한을 사고 그의 즉위 이후 보복을 정통으로 맞아 계축옥사로 아들 영창대군은 폐서인이 되어 유배지에서 비명횡사하고 아버지 김제남부터 형제들까지 싸그리 처형당해 친정이 멸문당하는 걸로도 모자라[118], 본인마저 딸 정명공주와 함께 비공식적으로 폐서인당해 서궁에 유폐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나 대비로 복권될 때까지 생필품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도저히 일국의 대비라곤 상상치 못할 만큼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며 온갖 고생을 하는 비극을 겪고 만다. 이는 나중에 인조가 즉위한 뒤에도 변하지 않아서 딸 정명공주의 남편인 홍주원에게 어구마(왕만이 탈수 있는 말)까지 하사하는 등,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생각이 짧다고밖에 할 수 없는 행동을 자꾸 범했다.[119] 인목왕후의 간택에 선조 본인의 의중이 상당히 반영되었던 전후 사정을 생각하면 그저 인목왕후의 외모가 선조의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집안 같은 여러 가지 사정이 고려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별 고민도 없이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고 아들까지 권력다툼에 이용되고만 것이 인목왕후의 비극이었다.
3.8. 치세의 핵심 업적이 부족하다는 견해
명종 대에 화담 학파의 박순, 허엽, 퇴계 학파의 류성룡, 김성일[120] 등은 물론 서인인 정철 등이 이미 출사한 점과 명종이 모친 문정왕후 사망 직후[121] 친사림적 성향의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이명, 권율의 부친 우의정 권철 세 사람의 삼상체제를 완성시킨[122] 점을 들어 명종 대에 이미 사림계가 장악한 정국을 선조 즉위 직후 인선 사항과 관련해 선조가 이어받았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으며 명종 대에 비해 선조 대에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는 학계의 비판도 있기는 있다.[123]직전을 폐지해서[124] 국고를 통일시키고[125] 경국대전의 주석서인 경국대전주해[126]를 편찬하는[127][128] 등의[129][130] 입법실적이 있었던 명종 대에 비해서 전란 전에 25년간 확실히 제도적 개선이나 그 밖에 정부가 주도하는 문화사업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할만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131][132] 즉 25년간 그 인재를 가지고 장기적 관점에서 무슨 발전에 기여했느냐 하는 지적이다. '목릉성세'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기의 한문학 융성이 있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것에 선조가 기여한 부분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명종 대에 사단칠정논변이 명종의 업적은 아니지 않은가? 민간주도 성격의 선조 대에 성리학 발전은 가령 흔히 정조의 업적으로 여겨지는 정부주도 성격의 정조 대에 문예부흥과 그 주체부터 다르다고 하겠다.
일단 통치(내정) 면에서 보면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같은 중종 대에 제기되고 이어진 민생문제에 대한 개혁담론들이 선조 대에 활발히 논의되었다.[133] 물론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를 말한다면 조선은 건국 이후로 체제의 모순이 쌓여 와서 다양한 병폐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선조 시기에 이에 대한 공론화가 점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공납제도와 관련해서는 대동법의 프로토타입인 수미법(收米法)을 율곡 이이 같은 신하들이 제시하자 선조 또한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적절한 정책이라며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본인의 한심한 추진력과 무원칙하고 보신적인 행태로[134]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도 못했으며[135] 문제는 그 과정에서도 논의가 점차 진행되면 될수록 당대에는 사주인(私主人)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136] 등의 소극적인 모습만 보였다는 것이다.[137] 감시강화[138] 처벌강화[139] 이따위의 것들이나 대책이랍시고 내놓기나 하면서 그 어떠한 진전도 없이[140] 제자리걸음만 걸었는데[141] 물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142]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 하기는 했으나 얼마 못 가 폐지되었다.
사실 이상한 말이 아닌 것이 선조에 대한 옹호론이 대중적 비난에 대한 반동에서 상당부분 비롯된 면이 있고 명확한 결과물이 없으니까 그 의도나 능력이 훌륭했다는 식의 변명으로만 대부분 점철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당장 본 문서의 긍정적 평가 문단만 봐도 이렇다 할 업적이 있는가? 명군의 치세라 불리는 전란 전에 25년 그 시기조차도 아니 그 시기야말로 조선 역사상 붕당정치가 가장 비효율적으로 작동되던 시기였다. 성리학이 교조화 되고 붕당정치가 문제가 많았다고 흔히 일컬어지는 현종 대에 숙종 대에 그 정도로 아무 결론도 못 내리거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같은 하나마나한[143] 일을 하려다가 바로 백지화되는 식의 지지부진한 시기가 반세기 가까이나 이어졌는가?[144] 그리고 여기에서야말로 선조라는 인간은 전란 전후 가릴 것이 없이 자기보신 외에 대체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가 의아할 정도로 군주로서 일관되게 보였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약간의 비판의식만 있었더라도 치세의 명군이니 하는 헛소리들은 애초에 나올 수 없었다.
다만 이는 당시의 행정문서들이 소실되었음을 어느 정도는 감안할 필요는 있는데, 보통 그러한 행적을 적는 실록에서 중간 단계가 아예 사라져 다소 세세한 부분은 남기 어려웠다. 그럼 임진왜란 끝나고 나서 전후 복구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는 게 문제. 분명 이런저런 시도는 했지만 성과가 제대로 나오진 못했다. 광해군이 전후 복구는커녕 궁궐 짓느라 말아먹은 게 주로 까이는 이유인데 사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이 즉위하기까지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고, 그때까지도 제대로 수습이 안 되었다.
3.9. 인사관리 차별과 줏대없는 행보
선조의 인사는 자신이 공평함을 가져야 하는 한 국가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공정하지 못하고 차별적인 모습을 매우 강하게 보여왔다. 신립 하면 거의 껌뻑 죽는 모습을 많이 보여왔으며[145], 녹둔도의 일은 되레 이일의 목을 베어도[146] 말이 되는 상황인데도 이일은커녕 만만한 대령급인 만호 이순신, 조정에서 영향력이 없던 장군 이경록을 백의종군 시켰다. 다만, 이일은 선조에게 이순신과 이경록의 목을 베라고 했지만 선조는 적과 싸워 이긴 장수들의 목을 베는 게 얼척 없는 짓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이순신과 이경록을 죽이지는 않았다.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에도 그저 명나라라고 하면 껌뻑 죽는 모습을 보여왔으며, 심지어 몽진을 가면서도 어떻게든 명나라 등 뒤로 숨을 궁리만 했다. 그나마 제4차 평양성 전투를 이겼기에 망정이지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면 선조는 계속 한반도 밖으로 나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곽재우, 김덕령 등 의병장들을 잔인하게 조져서 결국 김덕령을 사망하게 했다. 결국 선조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크게 선전할 만한 일을 한 장수에게는 후하게 대접해 준 반면 별것 아니게 보이는 상대는 잔인하게 찍어 눌렀다.[147]
거기에 위에서 옹호하는 인재등용도 원균, 이일, 신립 같은 정작 제일 핵심적으로 뽑아둔 인사들이 상황을 가장 크게 말아먹으면서 진정으로 옹호할 여지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148]
3.10. 유능한 장수들에 대한 처형
니탕개의 난 때 경원 부사 '김수'와 판관 '양사의'는 약 1만 명의 여진족을 상대로 도망치지 않고 약 400명으로 맞서 싸웠다. 이런 상태로 무기고 및 식량 창고와 같은 주요 거점들을 끝까지 지켜내자 여진족은 도망갔다. 김수는 적은 군사를 데리고 적들의 수급 40명을 베을 정도로 활약했다. 다음날 여진족이 쳐들어왔고 때마침 신립이 합류하자 여진족을 패퇴시켰다. 선조와 조정은 북방사 이제신이 보낸 서신을 통해 뒤늦게 니탕개가 난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선조는 김수와 양사의가 성을 빼앗겼다는 급보를 듣고 한양으로 압송할 것도 없이 죄를 물어 선전관을 보내 참수하라는 명을 한다. 결국 두 장수는 처형되었고 처형을 사흘간 연기시킨 '이제신'에게도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자세히 알아 보지도 않고 도망치지 않고 싸우던 용감한 장수들을 처형할 정도로 불같은 성격이 보인다. 또한 김수와 양사의가 각각 구역을 맡아 방어했는데, 서문을 맡았던 만호 이봉수는 여진족 군세의 규모를 보고 달아나는 바람에 서문이 돌파 당했고 성 대부분이 약탈 당했는데 정작 이봉수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불명이다. 아마도 선조 성격을 잘 아는지 패배해서 참수당할까봐 평생 숨어 살았을 듯하다.
임진왜란기 팔도부원수 신각은 해유령 전투에서 최초의 육전 승리를 거뒀으나, 장계를 제때 안 올려 처형되었다. 김명원은 신각이 연락이 두절 되자 김명원은 조정에 신각이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고 장계를 올린다. 5월 18일 비변사에선 신각을 군법으로 다스릴 것을 청했고,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처형하게 한다. 그리고 잠시 후 해유령 전투의 승전보가 올라오자 그제야 선조가 다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신각은 처형된 뒤였다. 신각은 억울하게 누명으로 처형되었다.[149]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남원에 이르니 반군은 이미 무너져서 잡은 반군들은 놓아주고 진주로 회군하자 내통했다며 누명으로 고문당해 옥사했다. 선조의 의병에 대한 의심과 견제, 명나라가 광해군을 끼고 도는 등 선조의 위기감 때문에 커진 사건이다.[150][151]
4. 복합적인 평가
4.1. 종계변무의 수정
조선의 건국 명분에 관한 핵심사항으로, 조선 200년간 여러 왕들이 하지 못하던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수정하였다. 현대에는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문제지만 당시에는 선조의 핵심 공적으로 여겨졌다.다만 학계에서 내리는 평가는 의외로 거의 혹평일색에 가까운데 별 실리 없는 명분에 집착한 것에 불과했다는 대중적 평가와 의외로 통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성규의 다음 지적은 조선 전기의 종계변무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긴 하지만 대표적 견해라 할 수 있다.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며 중국을 공식 비공식으로 설득하여 대체로 만족할 만한 반응을 얻으면 조선은 ‘전례 없는 대경사’를 강조하며, 중국에 다시 감사의 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대대적인 자축행사를 갖는 것이 관례였다. (...) 물론 필자 역시 ‘낭비’가 당시의 정치적 안정 또는 체제 이념의 강화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었던 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략’ 또는 ‘이념’의 문제였지 실제 정치가 아니라면, 그토록 많은 정력을 조선의 군신들이 정치가 아닌 ‘정치놀음’에 소모한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혹평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런 ‘정치놀음’은 정작 진정한 ‘경세제민’을 통한 정치와 체제의 안정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004[152]...이성규는 역사변무를 일종의 정치놀음으로 보았다. 선조는 변무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수정된 내용이 찍힌 『대명회전』을 입수한 다음, 조선이 부모도 군왕도 모르는 짐승과 오랑캐의 나라에서 인륜이 행해지는 예의의 나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음에 감격했다. 이성규는 “당시 조선의 지배층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곧 왕조 존립의 명분 확보로 생각하였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하면서,005[153] 역사변무를 통치를 위한 ‘명분확보’ 용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공허한 정치의 낭비’ 또는 ‘정치놀음’으로 귀결시켰다. 변무의 의미를 ‘왕조의 명분 확보를 위한 정치놀음’으로 본 이성규의 의견에 대해 아직 본격적인 재론이 없는 듯하다.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의미>, 252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며 중국을 공식 비공식으로 설득하여 대체로 만족할 만한 반응을 얻으면 조선은 ‘전례 없는 대경사’를 강조하며, 중국에 다시 감사의 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대대적인 자축행사를 갖는 것이 관례였다. (...) 물론 필자 역시 ‘낭비’가 당시의 정치적 안정 또는 체제 이념의 강화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었던 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략’ 또는 ‘이념’의 문제였지 실제 정치가 아니라면, 그토록 많은 정력을 조선의 군신들이 정치가 아닌 ‘정치놀음’에 소모한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혹평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런 ‘정치놀음’은 정작 진정한 ‘경세제민’을 통한 정치와 체제의 안정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004[152]...이성규는 역사변무를 일종의 정치놀음으로 보았다. 선조는 변무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수정된 내용이 찍힌 『대명회전』을 입수한 다음, 조선이 부모도 군왕도 모르는 짐승과 오랑캐의 나라에서 인륜이 행해지는 예의의 나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음에 감격했다. 이성규는 “당시 조선의 지배층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곧 왕조 존립의 명분 확보로 생각하였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하면서,005[153] 역사변무를 통치를 위한 ‘명분확보’ 용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공허한 정치의 낭비’ 또는 ‘정치놀음’으로 귀결시켰다. 변무의 의미를 ‘왕조의 명분 확보를 위한 정치놀음’으로 본 이성규의 의견에 대해 아직 본격적인 재론이 없는 듯하다.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의미>, 252
조선은 많은 물력을 동원하여 힘겹게 종계변무를 이루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말하며 명나라의 은혜에 거듭 감격했지만, 명나라는 멸망 직전까지 조선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적어도 역사변무 노력의 결과로 조선의 국가 이미지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역사변무가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의미>, 260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의미>, 260
심지어는 한 술 더 떠서 여건이 어떻든 간에 결국 <조훈조장(祖訓條章)>의 기사 그 자체는 손도 못댔으니까 아예 실패했다는 견해까지도 있는 판국이다.
여하간, 처음부터 『祖訓條章』(皇明祖訓)은 改正될 수 없는 것이었고, 『대명회전』 또한 조선측의 요구로 改修된 것이 아니라 명측의 필요에 의해 改撰된 것이었다. 다만 조선에서 요구한 사항을 附記하는데 그쳤다. 결국 사실상 조선측의 수십 차례 180여 년간의 종계 변무는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종계 문제로, 조선전기의 조·명 관계는, 명측이 처음부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조선이 명측에 끌려가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5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5
V. 『大明會典』 頒賜 이후의 종계 문제
萬曆 15년(1587년)의 『大明會典』도 문제의 『祖訓條章』의 기사는 그대로 두고 상술한 말미에 附記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조선의 일방적인 요청을 허락한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97)[154] 그러므로 180여 년에 걸친 조선의 변무 노력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6
萬曆 15년(1587년)의 『大明會典』도 문제의 『祖訓條章』의 기사는 그대로 두고 상술한 말미에 附記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조선의 일방적인 요청을 허락한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97)[154] 그러므로 180여 년에 걸친 조선의 변무 노력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6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명측의 이러한 종계에 대한 곡해가 너무나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개정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단순한 한 문장을 고치는 것을 떠나 왕조자체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은 자기 조상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불효를 범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國祖인 이성계는 고려의 4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叛逆兒로서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忠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으로, 이것은 조선왕실의 名分論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명측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측에 주도권을 빼았겼다. 그래서 다른 시기와는 달리 전쟁으로 인해 맺어진 외교 관계가 아니면서도 조선은 명측에 저자세의 굴종적인 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명측의 이러한 고자세에서 나타난 歷史曲解는 『明史』 「朝鮮傳」에서 뿐만 아니라, 私撰 野乘 또는 稗官小說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전기 조·명 관계에서 최대의 현안문제였던 종계 문제는 미해결된 채 끝나버린 외교문제였다고 하겠다.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9-220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9-220
실제로 대명회전 105권을 보면 명나라는 결코 조선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 아니다. 뻔히 이인인(임)의 아들이라는 조훈조장을 그대로 두고 조선에서 이렇게 요구했다는 사실을 언급했을 뿐이다. 심지어 그것도 태종 중종 명종 세 왕에 걸쳐서 조선이 이것을 요구했다고 담담하게 기술했을 뿐이다.
祖訓、朝鮮國即高麗。其李仁人、及子李成桂今名旦者、自洪武六年、至洪武二十八年、首尾凡弒王氏四王。姑待之。按高麗併有扶餘、新羅、百濟、其國分八道。洪武二年、國王王顓遣使奉表賀即位、請封、貢方物。
...
萬曆三年、使臣復申前請。詔付史館編輯。今錄于後
李成桂、系出本國全州。遠祖翰、仕新羅為司空。六代孫兢休、入高麗。十三代孫安社。生行里。行裏生椿。椿生子春。是為成桂之父。李仁人者、京山府吏長庚裔也。始王氏恭愍王顓無子。養寵臣辛旽子(社去土改禺)為子。恭愍王為嬖臣洪倫等所弒。李仁人當國、誅倫等、立(社去土改禺)。(社去土改禺)嗣位十六年。遣將入犯遼東。成桂為副將在遣中。至鴨綠江、與諸將合謀回兵。(社去土改禺)懼、傳位于其子昌。時恭愍妃安氏以國人黜昌。立王氏孫定昌君瑤。誅(社去土改禺)昌。逐仁人。已而瑤妄殺戮、國人不附。共推成桂署國事。表聞。高皇帝命為國王。遂更名旦。贍瑤別邸終其身
《大明會典卷之一百五禮部六十三》
...
萬曆三年、使臣復申前請。詔付史館編輯。今錄于後
李成桂、系出本國全州。遠祖翰、仕新羅為司空。六代孫兢休、入高麗。十三代孫安社。生行里。行裏生椿。椿生子春。是為成桂之父。李仁人者、京山府吏長庚裔也。始王氏恭愍王顓無子。養寵臣辛旽子(社去土改禺)為子。恭愍王為嬖臣洪倫等所弒。李仁人當國、誅倫等、立(社去土改禺)。(社去土改禺)嗣位十六年。遣將入犯遼東。成桂為副將在遣中。至鴨綠江、與諸將合謀回兵。(社去土改禺)懼、傳位于其子昌。時恭愍妃安氏以國人黜昌。立王氏孫定昌君瑤。誅(社去土改禺)昌。逐仁人。已而瑤妄殺戮、國人不附。共推成桂署國事。表聞。高皇帝命為國王。遂更名旦。贍瑤別邸終其身
《大明會典卷之一百五禮部六十三》
조훈(祖訓)에서: "조선국은 곧 고려이다. 그 이인인(李仁人)과 및 그 아들 이성계(李成桂, 지금 이름은 단(旦)이라 함)가 홍무 6년부터 홍무 28년까지 22년간 왕씨 4왕을 시해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는 부여, 신라, 백제를 아울러 소유하였으며, 그 나라는 8도로 나뉘어 있다. 홍무 2년에 국왕 왕전(王顓)이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어 즉위를 하례하고 책봉을 청하며 방물을 바쳤다."
...
만력 3년에 사신이 다시 전의 청을 신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사관에 부쳐 편집하게 하였다. 지금 뒤에 기록한다.
이성계는 본국 전주 출신이다. 원조 한(翰)은 신라를 섬겨 사공이 되었다. 6대손 긍휴(兢休)가 고려에 들어갔다. 13대손 안사(安社)가 행리(行里)를 낳았다. 행리가 춘(椿)을 낳았다. 춘이 자춘(子春)을 낳았다. 이가 성계의 아버지이다. 이인인이라는 자는 경산부 리장 경(庚)의 후예이다. 처음에 왕씨 공민왕 전(顓)이 아들이 없었다. 총신 신돈의 아들 우(禑)를 양자로 삼았다. 공민왕이 영신 홍륜 등에게 시해당하였다. 이인인이 나라를 맡아 륜 등을 주살하고 우를 세웠다. 우가 즉위한 지 16년에 장수를 보내 요동을 침범하였다. 성계가 부장으로 파견 중에 있었다. 압록강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과 합모하여 회병하였다. 우가 두려워하여 그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이때 공민비 안씨가 국인들로 하여금 창을 폐하게 하였다. 왕씨의 손자 정창군 요(瑤)를 세웠다. 우와 창을 주살하였다. 인인을 축출하였다. 이미 요가 망령되이 살육하니 국인이 따르지 않았다. 함께 성계를 추대하여 국사를 서리하게 하였다. 표를 올려 알렸다. 고황제(태조 홍무제)가 명하여 국왕으로 삼았다. 마침내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었다. 요(瑤)를 별제(別邸)에서 봉양하며 그 몸을 마치게 하였다.
《대명회전 105권, 예부 63》
그렇다면 조선은 왜 광국공신을 책봉하면서 축제를 벌이는 추태를 보였을까? 어쨌든 내용의 추가도 '수정'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차피 대명회전은 편찬 당시 황제 이전 선황들이자 이전 판이 만들어진 이후 선황들의 내역들을 추가해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조선이 무슨 대단한 노력을 해서 수정되었다고 보는 것은 전장제도(典章制度)라는 이 책의 특수성 즉 분야별 행정내역을 담았다는 이 책의 성격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은 소치이다. 요구만 한다면 관련사항이 자연히 기록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정정이 아니다. 요구했다는 그 사실을 언급하는 것뿐이다. 조선에서 과연 이것을 몰랐을까? 아무리 시대상을 감안해야 한다고 하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도 아니면서 많은 돈과 시간을 쓴 결과는 굉장히 기만적인 방식으로 돌아왔다. 전면적인 것에 가까울 정도로 의견일치를 보이는 학계의 혹평은 일리가 있는 법이다....
만력 3년에 사신이 다시 전의 청을 신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사관에 부쳐 편집하게 하였다. 지금 뒤에 기록한다.
이성계는 본국 전주 출신이다. 원조 한(翰)은 신라를 섬겨 사공이 되었다. 6대손 긍휴(兢休)가 고려에 들어갔다. 13대손 안사(安社)가 행리(行里)를 낳았다. 행리가 춘(椿)을 낳았다. 춘이 자춘(子春)을 낳았다. 이가 성계의 아버지이다. 이인인이라는 자는 경산부 리장 경(庚)의 후예이다. 처음에 왕씨 공민왕 전(顓)이 아들이 없었다. 총신 신돈의 아들 우(禑)를 양자로 삼았다. 공민왕이 영신 홍륜 등에게 시해당하였다. 이인인이 나라를 맡아 륜 등을 주살하고 우를 세웠다. 우가 즉위한 지 16년에 장수를 보내 요동을 침범하였다. 성계가 부장으로 파견 중에 있었다. 압록강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과 합모하여 회병하였다. 우가 두려워하여 그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이때 공민비 안씨가 국인들로 하여금 창을 폐하게 하였다. 왕씨의 손자 정창군 요(瑤)를 세웠다. 우와 창을 주살하였다. 인인을 축출하였다. 이미 요가 망령되이 살육하니 국인이 따르지 않았다. 함께 성계를 추대하여 국사를 서리하게 하였다. 표를 올려 알렸다. 고황제(태조 홍무제)가 명하여 국왕으로 삼았다. 마침내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었다. 요(瑤)를 별제(別邸)에서 봉양하며 그 몸을 마치게 하였다.
《대명회전 105권, 예부 63》
4.2. 전쟁 대비
임진왜란 중의 대처는 왕으로서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기에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책임 자체를 전적으로 선조에게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임진왜란의 원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나 분쟁이 있어서 조선이 빌미를 제공한 전쟁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임진왜란의 성격을 앞에 두고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았어야 했다는 주장은 일본에 대한 내정간섭이나 정복을 시도하라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는다.[155]그리고 실제로 선조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양반들과 백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임진왜란의 규모가 너무 터무니없이 컸기에 크게 도움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만큼 큰 전쟁이 터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기에 선조가 전쟁 대비에 완전히 소홀한 임금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156]
선조가 통신사 파견 이후 대책 논의 과정에서 낙관론을 주장한 김성일을 신뢰했다는 에피소드 때문에 전쟁 대비가 미흡하여 피해를 자초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1591년부터 축성 및 전력 증강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이 실록, 징비록, 난중잡록 등 여러 사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거기에다가 김성일도 낙관론을 주장할 만한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통신사로 일본에 도착할 당시 토목 공사를 한창 진행하는 등 오랜 전란의 상처를 회복하는데 바빠서 도무지 전쟁을 시작할 여력이 있는 나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곧 조선을 칠 거라 생각하는 것은 교통사고를 당해 겨우 고비를 넘기고 재활을 갓 시작한 격투기 선수가 당신을 샌드백으로 삼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것이나 다름 없이 무리한 가정이었다. 심지어 징비록에는 통신사들이 왔음에도 도요토미가 정벌을 나가 있어 통신사들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결국 그때까지의 일본 정치는 불안정했다고 볼 수밖에는 없다.
오히려 준비를 너무 급하게 해서 작은 읍성 위주로 수용 인원을 늘리는 쪽으로 축성했기에 임진왜란 같은 국가 간 전면전 상황에서는 효율이 떨어진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점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1592년 4월 이전까지 10만 명 이상 대규모 침공을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류성룡도 할 말이 없는 것도 맞다. 류성룡 본인부터도 그러한 예상은 못했을 것이니까 말이다. 당시 조선은 이전 역사의 선례, 특히 을묘왜변의 경험을 토대로 약 1만 명 단위의 연안 침략을 상정하고 준비했다. 이는 당시 조선뿐만 아니라 후대의 관점으로 보아도 매우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조선 건국 이래 10만 명의 군대가 쳐들어 온 적도 없고 명이 임진년에 5만 명을, 정유년에 10만 명을 파병하면서 명과 조선이 부담해야 했던 엄청난 인적, 물적 지출을 감안하면[157] 바다 건너 남의 나라에 20만 명을 몰아넣는 국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분열되어 있었던 나라에서 말이다. 나라를 통일시킨 지 1년~2년 지난 나라가 바다 건너 나라에 대규모 침공을 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158] 아무리 가까운 나라라 해도 한번에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해상으로 퍼붓는건 현대에서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비견될만한 건 무려 350년이나 뒤에 일어난 노르망디 상륙 작전 정도이다. 하물며 16세기의 전근대 시대에, 그것도 나라를 평정한지 몇년 되지도 않은 나라가 요즘 말로 캐삭빵을 걸어오리라 예상하라는건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 가깝다.[159]
오히려 지방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이 방위 태세 정비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160] 징비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어떤 관리는 "요 앞에 물길이 있는데 어떻게 왜놈들이 오나요?" 라고 했다는데 이에 류성룡은 바다도 건너는데 작은 물길 하나를 못 건너겠냐고 서술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일단 당시 백성들의 전쟁 대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시궁창이었는데 명종 대에 을묘왜변도 있었고 옆 동네 사정을 뻔히 봤으면서도 전쟁대비에 매우 부정적인 백성들과 유생들은 결국 임진왜란 때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다.
경상감사 김수는 지역 유생들까지 축성 작업에 동원시키는 등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다 지역 사족층과 충돌하고 민심을 이반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유생들까지 동원한 것은 의외에 가까웠는데 유생은 양반 계층이라서 (원래는 군대 가고 성 쌓는 일에 동원되는 것이 정상이지만)[161] "나라를 위해 공부한다!" 라고 하면 아무도 뭐라 못했었기 때문이다. 전라도에서는 전라감사 이광이 했었던 전쟁 준비 과정에서 쌓인 불만이 전쟁 발발 후 근왕병 모집 과정에서 터져버리며 왜군이 쳐들어온 와중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반란군 진압부터 해야 할 정도였다. 선조 역시 과도한 전쟁준비가 민심을 이반케 한 점을 인정하는 교서를 내렸다.
(중략) 내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으나 비록 인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은택을 베풀지 못하고,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하여 국정에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본심인 즉 근년에 북방 국경의 많은 변고가 있었음에 비추어 군정이 해이함을 알고 성지를 높이고 호를 깊이 파고 병갑을 굳게 해서 외환外寇을 막는다고 하여, 중외에 명령하여 감독을 엄히 하였더니, 실지로는 성이 높아지니 국세가 날로 약해지고, 성지의 호가 깊어질수록 백성의 원망도 깊어져서 끝내 와해가 되어 이 지경에 이르고, (중략)
<정만록>, 이호응 역주
<정만록>, 이호응 역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8월 7번째기사
게다가 개전 직전 경상좌수영의 진포 이동 현황과 개전 직후 경상도 내 조선군의 움직임을 추적해 보면 분명히 왜군의 침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고, 각 군현의 군사들이 어디로 모이고, 이동하고, 방어 중심은 어디인지 대응 매뉴얼 자체는 이미 세세하게 짜놨었다. 본래 왜구는 섬이 많은 전라도나 경상 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들어오며 섬이 거의 없고 해안선이 단조로운 경상 좌도는 방어 중심에서 다소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직전에는 경상좌수영 관할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8월 7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