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 |
이명 | 自强, 페르트, 뾰뜨르 알렉산드로비치, 吳聖默, 吳聲默 |
출생 | 1886년 |
함경북도 명천군 | |
사망 | 1938년 |
USSR |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그는 함북 명천에서 태어났지만 1892년 부모를 따라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했다. 길림 도립중학을 졸업한 후 북간도에서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에 종사했다. 1913년 간민회 결성에 참여했고, 1915년 중국당국의 박해를 피하여 러시아 극동 연해주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다. 수천명의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징집되어 우랄지방 베름스크 벌목장에서 일했는데 이때 항일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인 김알렉산드라를 만나 그의 영향 아래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했다.1917년 10월 혁명 직후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하여 1918년 4월 노령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4월 하바로프스크 청년회장으로서 전로청년결사단을 조직했고,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한인사회당 의사원, 4월에는 재무부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한인공산당위원회에서 번역원으로 활동했고, 1922년 치타지방에서 선인내지선전원 감독으로 활동했다. 1924년 블라디보스톡에서 3·1운동 기념식을 주도했고, 같은 해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선전부를 맡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29년 1월 소련공산당 극동국 및 쏘비에뜨 집행위원회 한글 기관지 『선봉』의 사장이 되었다. 1937년 하바로프스크 극동국립출판사 조선부장으로 재임 중 1938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처형되었다. 1956년 12월 8일 튀르키스탄군관구 군법회의에서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