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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4:10:22

알 파치노

알파치노에서 넘어옴
알 파치노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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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가 예술 훈장 수훈자
20세기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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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colbgcolor=#FFFFFF,#1F2023>엘리엇 카터, 랄프 엘리슨, 호세 페레, 마사 그레이엄, 루이스 네벨슨, 조지아 오키프, 레온타인 프라이스
1986년매리언 앤더슨, 프랭크 카프라, 에런 코플런드, 빌럼 데 쿠닝, 아그네스 드 밀, 에바 르 갈리엔, 앨런 로맥스, 루이스 멈퍼드, 유도라 웰티
1987년로메어 비어든, 엘라 피츠제럴드, 하워드 네메롭, 알윈 니콜라이, 이사무 노구치, 윌리엄 슈먼, 로버트 펜 워런
1988년솔 벨로, 헬렌 헤이스, 고던 파크스, 이오밍 페이, 제롬 로빈스, 루돌프 제르킨, 버질 톰슨, 시드니 프리드버그,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레오폴드 아들러, 캐서린 던햄,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 마틴 프리드먼, 디지 길레스피, 워커 핸콕,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체스와프 미워시, 로버트 마더웰, 존 업다이크
1990년조지 애보트, 험 크로닌, 제시카 탠디, 메세 커닝햄, 재스퍼 존스, 제이콥 로렌스, 비비 킹, 이안 맥하그, 비벌리 실즈
1991년모리스 아브라바넬, 로이 에이커프, 피에트로 벨루스치, J. 카터 브라운, 찰스 콜스, 존 O. 크로스비, 리처드 디벤콘, 키티 칼리슬, 펄 프리머스, 아이작 스턴
1992년마릴린 혼, 제임스 얼 존스, 알란 하우저, 미니 펄, 로버트 소득, 얼 스크럭스, 로버트 쇼, 빌리 테일러, 로버트 벤츄리 & 데니스 스콧 브라운, 로버트 와이즈
1993년캡 캘러웨이, 레이 찰스, 베스 로막스 하웨스, 스탠리 쿠니츠 , 로버트 메릴, 아서 밀러, 로버트 라우센버그, 로이드 리차드, 윌리엄 스타이런, 폴 테일러, 빌리 와일더
1994년해리 벨라폰테, 데이브 브루벡, 셀리아 크루즈, 도로시 딜레이, 줄리 해리스, 에릭 호킨스, 진 켈리, 피트 시거 , 웨인 티보, 리차드 윌버
1995년리차 알바네세, 그웬돌린 브룩스,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디, 데이빗 다이아몬드, 제임스 잉고 프리드, 밥 호프, 로이 리히텐슈타인, 아서 미첼, 빌 먼로
1996년에드워드 올비, 사라 콜드웰, 해리 칼라한, 젤다 피챈들러, 랄로 게레로, 라이어널 햄프턴, 벨라 루이츠키, 로버트 레드포드, 모리스 센댁, 스티븐 손드하임
1997년루이즈 부르주아, 베티 카터, 댄 킬리, 안젤라 랜스버리, 제임스 리바인, 티토 푸엔테, 제이슨 로바즈, 에드워드 빌렐라, 독 왓슨
1998년자크 드엠보, 패츠 도미노, 잭 엘리엇, 프랭크 게리, 아그네스 마틴, 그레고리 펙, 로베르타 피터스, 필립 로스, 그웬 버든
1999년아레사 프랭클린, 마이클 그레이브스, 오데타, 노만 레어, 로제타 르누아르, 하비 리히텐스타인, 리디아 멘도자, 조지 시걸, 마리아 톨치프
2000년마야 안젤루, 에디 아놀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베니 카터, 척 클로즈, 호톤 푸트, 클래스 올덴버그, 이작 펄만, 해롤드 프린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21세기 수훈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2001년<colbgcolor=#FFFFFF,#1F2023>루톨포 아나야, 조니 캐시, 커크 더글러스, 헬렌 프랑켄탈러, 주디스 제이미슨, 요요마, 마이크 니콜스
2002년플로렌스 놀, 트리샤 브라운, 필립 드 몬테벨로, 우타 하겐, 로렌스 핼프린, 알 허쉬펠드, 조지 존스, 밍 조 리, 스모키 로빈슨
2003년비버리 클리어리, 라프 에스퀴스, 수잔 파렐, 버디 가이, 론 하워드, 레너드 슬래트킨, 조지 스트레이트, 토미 튠
2004년레이 브래드버리, 칼리슬 플로이드, 프레데릭 하트, 안소니 헥트, 존 루스번, 빈센트 스컬리, 트와일라 사프
2005년루이스 오킨클로스, 제임스 데프라이스트, 파키토 드 리베라, 로버트 듀발, 올리 존스톤, 윈튼 마살리스, 티나 라미레즈, 돌리 파튼
2006년윌리엄 볼컴, 시드 챠리시, 로이 데카라바, 에릭 쿤젤, 그레고리 라바사, 빅토르 슈레켄고스트, 랄프 스탠리
2007년모르텐 로리젠, 스콧 모마데이, 크레이그 노엘, 레스 폴, 조지 투커, 앤드루 와이어스
2008년스탠 리, 리처드 M. 셔먼, 로버트 B. 셔먼,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행크 존스, 헤수스 모르폴스
2009년밥 딜런, 클린트 이스트우드, 밀튼 글레이저, 마야 린, 리타 모레노, 제시 노먼, 프랭크 스텔라, 마이클 틸슨 토머스, 존 윌리엄스
2010년로버트 브러스타인, 밴 클라이번, 마크 디 수베로, 도날드 홀, 퀸시 존스, 하퍼 리,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제임스 테일러
2011년윌 바넷, 리타 도브, 알 파치노, 마틴 퍼이어, 멜 틸리스, 안드레 왓츠
2012년허브 앨퍼트, 조안 마이어스 브라운, 르네 플레밍, 어니스트 J. 게인즈, 엘스워스 켈리, 토니 쿠슈너, 조지 루카스, 일레인 메이, 로리 올린 , 알렌 투생
2013년줄리아 알바레즈, 빌 T. 존스, 존 캔더, 제프리 카첸버그, 맥신 홍 킹스턴, 앨버트 메이즐스, 린다 론스태드, 빌리 첸 & 토드 윌리엄스, 제임스 터렐
2014년존 발데사리, 핑 총, 미리암 콜론, 샐리 필드, 앤 해밀턴, 스티븐 킹, 메레디스 몽크, 조지 셜리, 토비아스 울프
2015년멜 브룩스, 산드라 시스네로스, 모건 프리먼, 필립 글래스, 베리 골디, 산티아고 지메네즈, 랄프 레몬, 오드라 맥도널드, 루이스 발데스, 잭 위튼
2016년없음
2017년없음
2018년없음
2019년앨리슨 크라우스, 샤론 퍼시 록펠러, 미군 군악대, 존 보이트
2020년토비 키스, 리키 스캑스, 메리 코스타, 닉 우트, 얼 A. 파웰 3세
2021년브루스 스프링스틴, 글래디스 나이트, 민디 케일링, 줄리아 루이드라이퍼스, 호세 펠리시아노, 베라 왕, 조안 시게카와, 주디 바카, 프레드 아이커너, 안토니오 마르토렐, 빌리 홀리데이 극장, 국제흑인댄스협회
출처: National Medal of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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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니스 국제 영화제 로고.svg

베니스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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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1971년1972년
오슨 웰스 잉마르 베리만 마르셀 카르네 존 포드 찰리 채플린
1972년1982년
아나톨리 골로브냐 빌리 와일더 알레산드로 블라세티 루이스 부뉴엘 프랭크 카프라
1982년
조지 큐커 장뤽 고다르 세르게이 유트케비치 알렉산더 클루게 구로사와 아키라
1982년1983년
마이클 파웰 사티야지트 레이 킹 비더 세자르 자바티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985년1986년1987년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존 휴스턴 페데리코 펠리니 타비아니 형제 루이지 코멘치니
1988년1989년1990년1991년
요리스 이벤스 로베르 브레송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얀초 미클로시 마리오 모니첼리
1991년1992년1993년
지안 마리아 볼론테 잔느 모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파올로 빌라조 스티븐 스필버그
1993년1994년
로버트 드 니로 로만 폴란스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알 파치노 수소 체키 다미코
1994년1995년
켄 로치 우디 앨런 모니카 비티 마틴 스코세이지 알베르토 소르디
1995년1996년
엔니오 모리코네 주세페 드 산티스 조프레도 롬바르도 알랭 레네 로버트 올트먼
1996년1997년
비토리오 가스만 더스틴 호프먼 미셸 모르강 제라르 드파르디유 스탠리 큐브릭
1997년1998년1999년
알리다 발리 워렌 비티 소피아 로렌 안제이 바이다 제리 루이스
2000년2001년2002년2003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에릭 로메르 디노 리시 디노 드 로렌티스 오마 샤리프
2004년2005년2006년
스탠리 도넌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미야자키 하야오 스테파니아 산드렐리 데이비드 린치
2007년2008년2009년
팀 버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에르만노 올미 존 라세터 브래드 버드
2009년2010년2011년
피트 닥터 앤드루 스탠튼 리 언크리치 오우삼 마르코 벨로키오
2012년2013년2014년2015년
프란체스코 로시 윌리엄 프리드킨 델마 스쿤메이커 프레더릭 와이즈먼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2016년2017년2018년
장폴 벨몽도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제인 폰다 로버트 레드포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18년2019년2020년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줄리 앤드류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허안화 틸다 스윈튼
2021년2022년2023년
로베르토 베니니 제이미 리 커티스 카트린 드뇌브 폴 슈레이더 양조위
2023년2024년2025년
릴리아나 카바니 피터 위어 시고니 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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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I 평생 공로상
파일:미국영화연구소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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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973년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존 포드 제임스 캐그니 오슨 웰스 윌리엄 와일러 베티 데이비스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헨리 폰다 앨프리드 히치콕 제임스 스튜어트 프레드 아스테어 프랭크 카프라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존 휴스턴 릴리안 기시 진 켈리 빌리 와일더 바버라 스탠윅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잭 레먼 그레고리 펙 데이비드 린 커크 더글러스 시드니 푸아티에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엘리자베스 테일러 잭 니콜슨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틴 스코세이지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로버트 와이즈 더스틴 호프먼 해리슨 포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톰 행크스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로버트 드 니로 메릴 스트립 조지 루카스 숀 코너리 알 파치노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워렌 비티 마이클 더글러스 마이크 니콜스 모건 프리먼 셜리 맥클레인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멜 브룩스 제인 폰다 스티브 마틴 존 윌리엄스 다이앤 키튼
2018년 2019년 2022년[1] 2023년
조지 클루니 덴젤 워싱턴 줄리 앤드류스 니콜 키드먼
[1] 2020년 시상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으로 인해 시상식 개최가 2년 연기되었다. }}}}}}}}}}}}

파일:Kennedy Center honors.jpg
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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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000000> 1978년 <colbgcolor=#fff,#1f2023>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 조지 애벗, 릴리안 기시,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 베티 콤덴, 로이 에이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푸아티에, 닐 사이먼
1996년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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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000000>2001년<colbgcolor=#fff,#1f2023>줄리 앤드류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 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 제임스 브라운, 캐롤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 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 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 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 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 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 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 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 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 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 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맥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 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 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 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먼 리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 셰어, 필립 글래스, 레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2019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세서미 스트리트, 샐리 필드, 린다 론스태드, 마이클 틸슨 토머스
2020년 데비 엘렌, 조안 바에즈, 가스 브룩스, 미도리, 딕 반 다이크
2021년 저스티노 디아즈, 베리 골디, 론 마이클스, 베트 미들러, 조니 미첼
2022년 조지 클루니, 에이미 그랜트, 글래디스 나이트, 타니아 레온, U2 (보노, 디 에지, 애덤 클레이튼, 래리 뮬렌 주니어)
2023년 퀸 라티파, 르네 플레밍, 빌리 크리스탈, 디안 워윅, 배리 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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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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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1956년
세실 B. 드밀 월트 디즈니 대릴 F. 재넉 진 허숄트 잭 L. 워너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1961년
머빈 르로이 버디 아들러 모리스 슈발리에 빙 크로스비 프레드 아스테어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1966년
주디 갈랜드 밥 호프 조셉 E. 레빈 제임스 스튜어트 존 웨인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찰턴 헤스턴 커크 더글러스 그레고리 펙 조안 크로포드 프랭크 시나트라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1977년
앨프리드 히치콕 새뮤얼 골드윈 베티 데이비스 핼 B. 월리스 월터 미리쉬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레드 스켈튼 루실 볼 헨리 폰다 진 켈리 시드니 푸아티에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로런스 올리비에 폴 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바버라 스탠윅 안소니 퀸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도리스 데이 오드리 헵번 잭 레먼 로버트 미첨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로렌 바콜 로버트 레드포드 소피아 로렌 숀 코너리 더스틴 호프먼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셜리 맥클레인 잭 니콜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알 파치노 해리슨 포드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진 해크먼 마이클 더글러스 로빈 윌리엄스 안소니 홉킨스 워렌 비티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로버트 드 니로 모건 프리먼 조디 포스터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우디 앨런 조지 클루니 덴젤 워싱턴 메릴 스트립 오프라 윈프리
2019년 2020년 2021년 2023년
제프 브리지스 톰 행크스 제인 폰다 에디 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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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scar_logo.svg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
'''[[틀: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Academy Award for Best Actor]]'''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000,#e5e5e5
제1회
(1929년)
제2회
(1930년)
제3회
(1931년)
제4회
(1932년)
제5회
(1933년)
에밀 야닝스
(최후의 명령)
(육체의 길)
워너 백스터
(추억의 아리조나)
조지 알리스
(디즈레일리)
라이오넬 배리모어
(자유의 혼)
프레드릭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월레스 비어리
(챔프)
제6회
(1934년)
제7회
(1935년)
제8회
(1936년)
제9회
(1937년)
제10회
(1938년)
찰스 로튼
(헨리 8세)
클라크 게이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빅터 맥라글렌
(밀고자)
폴 무니
(과학자의 길)
스펜서 트레이시
(굿바이 마이 라이프)
제11회
(1939년)
제12회
(1940년)
제13회
(1941년)
제14회
(1942년)
제15회
(1943년)
스펜서 트레이시
(소년의 거리)
로버트 도나트
(굿바이 미스터 칩스)
제임스 스튜어트
(필라델피아 스토리)
게리 쿠퍼
(요크 상사)
제임스 카그니
(성조기의 행진)
제16회
(1944년)
제17회
(1945년)
제18회
(1946년)
제19회
(1947년)
제20회
(1948년)
폴 루카스
(라인의 감시)
빙 크로스비
(나의 길을 가련다)
레이 밀랜드
(잃어버린 주말)
프레드릭 마치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로널드 콜먼
(이중 생활)
제21회
(1949년)
제22회
(1950년)
제23회
(1951년)
제24회
(1952년)
제25회
(1953년)
로런스 올리비에
(햄릿)
브로데릭 크로포드
(모두가 왕의 부하들)
호세 페레
(시라노)
험프리 보가트
(아프리카의 여왕)
게리 쿠퍼
(하이 눈)
제26회
(1954년)
제27회
(1955년)
제28회
(1956년)
제29회
(1957년)
제30회
(1958년)
윌리엄 홀든
(제17 포로수용소)
말론 브란도
(워터프론트)
어니스트 보그나인
(마티)
율 브리너
(왕과 나)
알렉 기네스
(콰이 강의 다리)
제31회
(1959년)
제32회
(1960년)
제33회
(1961년)
제34회
(1962년)
제35회
(1963년)
데이비드 니븐
(애수의 여로)
찰턴 헤스턴
(벤허)
버트 랭카스터
(엘머 갠트리)
막시밀리안 셸
(뉘른베르크의 재판)
그레고리 펙
(앵무새 죽이기)
제36회
(1964년)
제37회
(1965년)
제38회
(1966년)
제39회
(1967년)
제40회
(1968년)
시드니 푸아티에
(들백합)
렉스 해리슨
(마이 페어 레이디)
리 마빈
(캣 벌루)
폴 스코필드
(사계절의 사나이)
로드 스타이거
(밤의 열기 속으로)
제41회
(1969년)
제42회
(1970년)
제43회
(1971년)
제44회
(1972년)
제45회
(1973년)
클리프 로버트슨
(찰리)
존 웨인
(트루 그릿)
조지 C. 스콧
(패튼 대전차군단)
진 해크먼
(프렌치 커넥션)
말론 브란도
(대부)
제46회
(1974년)
제47회
(1975년)
제48회
(1976년)
제49회
(1977년)
제50회
(1978년)
잭 레먼
(호랑이를 구하라)
아트 카니
(해리와 톤토)
잭 니콜슨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피터 핀치
(네트워크)
리처드 드레이퍼스
(굿바이 걸)
제51회
(1979년)
제52회
(1980년)
제53회
(1981년)
제54회
(1982년)
제55회
(1983년)
존 보이트
(귀향)
더스틴 호프먼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로버트 드 니로
(분노의 주먹)
헨리 폰다
(황금 연못)
벤 킹슬리
(간디)
제56회
(1984년)
제57회
(1985년)
제58회
(1986년)
제59회
(1987년)
제60회
(1988년)
로버트 듀발
(텐더 머시스)
F. 머레이 에이브러햄
(아마데우스)
윌리엄 허트
(거미여인의 키스)
폴 뉴먼
(컬러 오브 머니)
마이클 더글러스
(월 스트리트)
제61회
(1989년)
제62회
(1990년)
제63회
(1991년)
제64회
(1992년)
제65회
(1993년)
더스틴 호프먼
(레인 맨)
다니엘 데이루이스
(나의 왼발)
제러미 아이언스
(행운의 반전)
안소니 홉킨스
(양들의 침묵)
알 파치노
(여인의 향기)
제66회
(1994년)
제67회
(1995년)
제68회
(1996년)
제69회
(1997년)
제70회
(1998년)
톰 행크스
(필라델피아)
톰 행크스
(포레스트 검프)
니콜라스 케이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제프리 러시
(샤인)
잭 니콜슨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제71회
(1999년)
제72회
(2000년)
제73회
(2001년)
제74회
(2002년)
제75회
(2003년)
로베르토 베니니
(인생은 아름다워)
케빈 스페이시
(아메리칸 뷰티)
러셀 크로우
(글래디에이터)
덴젤 워싱턴
(트레이닝 데이)
에이드리언 브로디
(피아니스트)
제76회
(2004년)
제77회
(2005년)
제78회
(2006년)
제79회
(2007년)
제80회
(2008년)
숀 펜
(미스틱 리버)
제이미 폭스
(레이)
필립 시모어 호프먼
(카포티)
포레스트 휘태커
(라스트 킹)
다니엘 데이루이스
(데어 윌 비 블러드)
제81회
(2009년)
제82회
(2010년)
제83회
(2011년)
제84회
(2012년)
제85회
(2013년)
숀 펜
(밀크)
제프 브리지스
(크레이지 하트)
콜린 퍼스
(킹스 스피치)
장 뒤자르댕
(아티스트)
다니엘 데이루이스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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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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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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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주연상
제28회
(1975년)
제29회
(1976년)
제30회
(1977년)
잭 니콜슨
(차이나타운)/(마지막 지령)
알 파치노
(대부 2)/(뜨거운 오후)
잭 니콜슨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역대 프라임 타임 에미상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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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주연상 - 미니시리즈 부문
제55회
(2003년)
제56회
(2004년)
제57회
(2005년)
윌리엄 H. 머시
(도어 투 도어)
알 파치노
(엔젤스 인 아메리카)
제프리 러시
(피터 셀러스의 삶과 죽음)
제61회
(2009년)
제62회
(2010년)
제63회
(2011년)
브렌던 글리슨
(폭풍 속으로)
알 파치노
(유 돈 노우 잭)
배리 페퍼
(케네디스)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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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주연상 - 드라마(영화)
제30회
(1973년)
제31회
(1974년)
제32회
(1975년)
말론 브란도
(대부)
알 파치노
(형사 서피코)
잭 니콜슨
(차이나타운)
제49회
(1992년)
제50회
(1993년)
제51회
(1994년)
닉 놀테
(사랑과 추억)
알 파치노
(여인의 향기)
톰 행크스
(필라델피아)
남우주연상 - 미니시리즈
제60회
(2003년)
제61회
(2004년)
제62회
(2005년)
알버트 피니
(윈스턴 처칠의 폭풍전야)
알 파치노
(엔젤스 인 아메리카)
제프리 러시
(피터 셀러스의 삶과 죽음)
제67회
(2010년)
제68회
(2011년)
제69회
(2012년)
케빈 베이컨
(챈스 일병의 귀환)
알 파치노
(유 돈 노우 잭)
이드리스 엘바
(루터)

파일:SAG-AFTRA_Log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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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영화/미니시리즈부문 남우주연상
제9회
(2003년)
제10회
(2004년)
제11회
(2005년)
스톡카드 채닝
(매튜 세퍼드 스토리)
알 파치노
(엔젤스 인 아메리카)
제프리 러시
(피터 셀러스의 삶과 죽음)
제16회
(2010년)
제17회
(2011년)
제18회
(2012년)
케빈 베이컨
(챈스 일병의 귀환)
알 파치노
(유 돈 노우 잭)
폴 지아마티
(투 빅 투페일)

역대 토니상 시상식
파일:tonyawards.png
남우주연상 - 연극 부문
제30회
(1976년)
제31회
(1977년)
제32회
(1978년)
존 우드
(트라베스티)
알 파치노
(파블로 험멜의 기본 훈련)
바나드 휴즈
(다)
남우조연상 - 연극 부문
제22회
(1968년)
제23회
(1969년)
제24회
(1970년)
제임스 패터슨
(생일파티)
알 파치노
(호랑이는 넥타이를 매는가?)
캔 하워드
(차일드스 파티)
}}} ||
<colbgcolor=#00001b><colcolor=#fff>
알 파치노
Al Pacino
파일:140915_r25455.jpg
본명 알프레도 제임스 파치노
Alfredo James Pacino
출생 1940년 4월 25일 ([age(1940-04-25)]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1]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배우, 프로듀서, 영화감독
가족 장녀 줄리 마리 파치노(1989년생)
장남 안톤 제임스 파치노(2001년생)
차녀 올리비아 로즈 파치노(2001년생)[2]
차남 로만 파치노(2023년생)[3]
학력 라과디아 예술고등학교 (중퇴)
HB 스튜디오
액터스 스튜디오
신체 168cm[4]
활동 1967년 ~ 현재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학창 시절2.3. 연기 활동2.4. 아카데미 시상식 7전 8기
3. 연기 스타일4. 은둔형 예술가의 언론 나들이5. 가족6. 여담7. 필모그래피
7.1. 영화7.2. 연극7.3. TV
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알파치노(대부1).jpg
1972년 영화《대부》공식 프로필 사진[5]
대부 촬영 당시 알 파치노에게 말을 아꼈지만, 나는 그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배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이런 내 생각을 똑똑히 증명했다. 허풍처럼 들리는가? 글쎄, 나는 살면서 절대로 과장을 해 본 적이 없다. 난 내 본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어디 가서 다른 배우들 찬사를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6]
말론 브란도 (대부1 개봉 직후)출처

미국배우.

대부 시리즈, 스카페이스, 여인의 향기, 칼리토, 히트, 형사 서피코, 뜨거운 오후, 허수아비, 인섬니아, 인사이더, 아이리시맨 등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영화들에 출연했으며 특히 할리우드 갱스터, 느와르 장르의 상징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또한 할리우드(영화계)와 브로드웨이(연극계) 양쪽에서 모두 최정상급의 성공을 거둔 보기 드문 커리어를 지닌 배우이기도 하다.[7][8]

2. 생애

2.1. 어린 시절

뉴욕맨해튼에서 이탈리아계 집안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민자 출신이다. 아버지 살바토레 파치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산 프라텔로에서 캘리포니아 주의 코비나로 이민을 와서 보험 판매원으로 일하고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외할아버지 제임스 제랄디와 외할머니 케이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콜레오네 출신이다.

이런 이유로 알 파치노가 <대부>에서 시칠리아 후손인 마이클 콜레오네를 연기했던 것이 운명적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코폴라 감독이 제작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명의 연극배우였던 그를 끝까지 고집했던 것에는 알 파치노의 연기력 뿐만 아니라도 이런 배경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 파치노 본인도 관련 질문에 대해 "운명이냐고요? 네, 그럴지도요. 정말 신기한 일이죠."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9][10]

뉴욕의 이스트 할렘에서 몇 년을 살다가 만 2세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 외조부모와 함께 뉴욕의 브롱크스로 이사했고 이곳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아들로 자라면서 과보호를 받기도 했는데 어린 알 파치노는 외로운 소년이었다고 한다. 10대 시절에는 뉴욕의 뒷골목에서 아주 터프한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유명한데, 9살에 음주와 담배를 처음 배웠고 13살에 마리화나를 경험했지만 남용한 적은 없다고 한다.[11] 싸움꾼 기질이 있어서 자주 전학을 다니며 문제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항상 생사가 오가는 뉴욕 뒷골목의 거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 시절엔 그것도 모른 채 행복하고 자유로웠다고.

어머니 로즈는 퇴근 후에 외동아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 다니곤 했는데, 집에 돌아온 어린 알은 자신이 본 모든 연기를 그대로 재연해 낼 수 있었고 연기 재능을 발견한다.[12] 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이미 배우를 꿈꿨고 배우가 아니면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엔 가족과 친구들에게 '써니(Sonny)'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배우(The Actor)'라는 별명도 있었다. '써니'라는 별명은 <알 졸슨(Al Jolson)>의 '써니 보이(Sonny Boy)'라는 노래때문에 붙여진 별명인데 약 3살 6개월의 어린 알 파치노는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이웃들은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봤는데, 당시 진지했던 어린 알은 이웃들이 즐거워 보이긴 했지만 대체 왜 웃는건지 궁금해 했다고 한다.[13]

2.2. 학창 시절

파일:edd21138c56e64b6a97a8dbbd98cef31.jpg
20대 초 불법 총기 소지 혐의로 붙잡힌 연기 지망생 시절의 알 파치노

허만 리더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영어를 제외한 모든 수업을 낙제할 정도로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바로 이 시기에 뮤지컬과 연극으로 나름 공식적인 연기를 시작했다.[14] 12살 무렵에 굉장히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연극이 끝나고 어떤 남자가 다가와 "너는 차기 말론 브란도가 될거야."라는 찬사를 보냈고 그때만 해도 브란도를 몰랐던 어린 알 파치노는 "말론 브란도가 누군데요?"라고 대답했다고.[15] 13살 때는 연극 무대에서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토하는 연기를 하며 실제로 무대 위에 토해버리기도 했다.[16]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디션을 통해 페임의 주무대로 유명한 뉴욕 예술고등학교[17]에 합격하지만 역시 잘 적응하지 못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연기를 정말 배우고 싶었지만 당시 너무 어렸었고, 15살이었지만 마치 10살,11살 정도로 뒤쳐진 것만 같았다고. 알 파치노는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자 약 17살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취업을 결심하게 된다.[18][19] 그리고 아들의 결정을 반대했던 어머니와 의견 충돌을 빚게 되자 싸움 끝에 결국 가출을 한다. 뉴욕 중심부로 이동한 알은 어머니를 부양할 돈과 연기 공부를 위한 학비를 모으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자전거 심부름꾼을 할 때에는 하루에 11시간이나 자전거를 타기도 했고 이때 맨하탄의 지리를 배웠다고. 버스 보이, 문지기, 우체국 직원 등 정말로 안 해본 일이 없었는데 코멘터리 잡지사의 우편물실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10대 끝자락에 유명 연기학교인 <액터스 스튜디오>에 지원하였지만 고배를 마신 뒤 이탈리아로 향하게 된다. 알 파치노는 이 시절에 대해 스스로 고백하길 "20살 때, 시칠리아에 살던 시절에 저는 제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걸 팔며 생계를 유지했어요. 제 유일한 자산은 바로 몸이었죠." 당시 이탈리아어도 할 줄 몰랐던 젊은 알은 집과 음식을 제공해줬던 나이 든 여인에게 그 대가로 잠자리를 제공했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 자신이 정말 싫었어요."[20]

미국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알 파치노는 결국 유명 연기학교였던 <HB 스튜디오>에 합격하고 첫 연기 스승인 <찰리 로튼>을 만나게 된다. 후일에 찰리 로튼은 알 파치노의 인생 멘토이자 최고의 친구가 되는 인물. 이 시기에 알은 종종 실직 상태이거나 집을 구하지 못해 노숙자 신세가 되곤 했는데, 길바닥이나 극장 또는 친구의 집 등지에서 불편하게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러던 1962년, 어머니 로즈가 4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연이어 외할아버지마저 사망하면서 22세의 알 파치노는 인생의 격변기를 맞이하게 된다. 노년의 알 파치노는 이 시기를 회상하길 "어머니 로즈와 할아버지가 한 해에 같이 돌아가셨던 일은 제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이던 시기였어요. 고작 22살이었던 저는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했죠. 그 일은 저를 나락에 빠지게 했어요."라고 인터뷰했다.[21]

<HB 스튜디오>에서 4년을 공부하고 졸업한 알 파치노는 오디션을 성공적으로 치러 10대 때 한 번 고배를 마셨던 <액터스 스튜디오>에 입학하게 된다. 전설적인 연기 스승인 <리 스트라스버그>[22]를 만나 사사하고 인연을 시작하게 된 것도 바로 이곳. 스트라스버그는 후에 알 파치노를 따라 <대부 2>와 <용감한 변호사>에 출연하기도 했다.

<액터스 스튜디오>에 다니던 이 시기에는 길거리의 극단이나 카페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스스로 극본을 짜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광대로서 쇼를 펼치며 가게 앞에서 직접 호객 행위를 하기도 했다고. 당시 알은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우울감에 시달리고 정말로 불행했는데 오로지 코미디 연기만을 하면서 "삶의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고 이 시기를 회상하며 "뭐든 웃기는 건 좋은 치료법이었어요. 효과가 있었죠. 저는 항상 웃긴 사람들에게 매료되고 그들의 주변에 있길 좋아했어요."라고 말했다.[23]

알 파치노는 "제 인생에서 <액터스 스튜디오>는 정말로 큰 의미를 지닌다"며 "엄청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고 수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리 스트라스버그>의 가르침 아래 연기 커리어를 지탱하게 될 메소드 연기법을 습득하고 "모든 부업을 그만두고 연기만 해야겠다고 직접적으로 결심하게 된 시기"였다.[24]

2000년 [25] 모교 <액터스 스튜디오>의 공통 대표직을 맡게 된 알 파치노는 2024년 현재까지 대표직을 유지하고 있다.[26]

2.3. 연기 활동

연극 배우로 시작한 알 파치노는 승승장구하며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 [27] 호로비츠의 극들을 성공적으로 연기해낸 그는 평생의 동업자가 될 매니저 마틴 브레그만에게 발굴되고, 1969년에 영화 배우가 되었다. 2년 뒤인 1971년 제리 샤츠버그 감독의 백색공포로 첫 주연으로 데뷔, '마약 중독자'를 잘 연기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1968년 알 파치노가 출연한 '호랑이는 넥타이를 매는가?'의 연극을 보고 그의 연기력에 반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그와 함께 영화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한글자막 버전 이후, 인간적으로 알 파치노를 더 알아가기 위해 1969년에 둘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였고 상당히 친해진 결과 함께 영화를 찍자고 서로 약속했다. 알 파치노를 생각하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대부 각본 제작에도 참여한다.[28] 이후, 1970년에 알 파치노를 비공개로 스크린 테스트[29]에 참여시켰고 이후에는 그를 공식적으로 마이클 콜레오네역에 캐스팅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제작사의 반대에 부딪히자 1971년 7월에 개봉한 백색공포에서의 알 파치노의 연기를 파라마운트 제작사에 보여주며 설득하였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강단있게 그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오히려, 대부1의 첫 촬영일은 그보다도 앞선 1971년 3월 23일로, 해당 촬영은 알 파치노가 분한 마이클다이앤 키튼이 분한 케이가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는 장면이었다. 즉, 개봉일 보다도 더 전에 알 파치노의 대부 캐스팅이 확정됐기에, 1971년 7월에 개봉한 백색공포를 대부 감독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보고 캐스팅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사실관계에 맞지않다. 단지, 촬영이 들어가고도 지속해서 반대하는 제작사 설득에 쓰였을 뿐 백색공포가 알 파치노의 대부 캐스팅에 도움이 된 영화는 아니다. 여하튼 제작사와 다른 배우들의 온갖 반대 속에서도 강행한 촬영 속에서 알 파치노는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으나 그 유명한 식당 암살씬을 찍고나서야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대성공. 이후 당시의 일을 회상하길 "대포에서 막 쏘아진 대포알" 같았다고 한다.

이후 1년뒤 1973년 개봉한 거장 시드니 루멧감독의 작품 형사 서피코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처음으로 노미네이트 되었고, 2년 전 백색공포 작품으로 인연을 맺은 제리 샤츠버그와 재결합하여 만든 작품 허수아비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는 대부 2, 1975년에는 뜨거운 오후를 통해 1970년대 명실상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알 파치노는 극심한 권태감에 시달린다. 정작 본인이 그 시기를 회상하기엔 항상 우울함과 술에 취해 있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며 1983년 스카페이스로 다시 명성을 되찾고 술을 끊기 전까지 알콜 중독은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외모와 목소리[30]를 본격적으로 망가뜨리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후 자전적 이야기로 보여지는 1977년 작 바비 디어필드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고 2년 뒤인 1979년 작 용감한 변호사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다시 노미네이트 되었다. 다만, 이 1979년에 놓친 명작들이 제법 많다. 우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더스틴 호프만보다도 먼저 주연역을 제의 받았으나 거절하였다.[31] 또한, 1979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윌라드 역할[32] 제의를 거절한 채[33][34]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로 활동지를 옮긴 후 당시 세간을 충격에 빠트렸던 파블로 험멜의 기본훈련을 통해 토니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시대가 바뀌고 1980년 윌리엄 프리드킨과 함께한 광란자에서 게이 살인자를 쫓다가 자신이 게이가 되어버리는 형사 역할로 비평계를 충격에 빠트렸으며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다시 노미네이트 되었다.[35] 람보를 거절하고 찍은 1982년 작 <브로드웨이의 막이 오를때>는 비평과 흥행 모두 실패했지만, 실패를 딛고 바로 1년만에 알 파치노의 80년대 연기를 상징하는, 역대급의 캐릭터를 창조해낸다. 1년 뒤 1983년 브라이언 드 팔마, 올리버 스톤 등과 합작하여 그의 1980년대를 규정짓는 작품이자 대표작 중 하나인 스카페이스에 출연해 명연을 펼치며 토니 몬타나라는 캐릭터를 컬트 아이콘의 지위에 올려 놓았다. 이 영화는 당대에 괜찮게 흥행한 여러 작품들 중 하나였지만[36] 이 후에 힙합 문화를 비롯한 수많은 서브컬쳐들을 형성시키거나 성장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작품으로서 걸작의 위치에 오르게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특히, 토니 몬타나는 범죄 영화계의 상징같은 캐릭터로 자리잡았으며 알 파치노는 특유의 인물 묘사와 창조력을 발휘해, 인물에 독보적인 개성과 존재감을 불어넣었다. 이 덕에,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토니 몬타나는 마치 실존 인물인 양 사람들에게 묘사되는 경지에 올랐다.[37]

허나, 1985년 작품 '혁명(Revolution)'의 대실패[38]로 헐리우드를 다시금 떠난 그는 줄리어스 시저와 같은 작품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명연으로 브로드웨이의 명배우의 위치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본인이 직접 제작한 The local stigmatic으로 The Museum of Modern Art에 개봉하는 등 알게 모르게 영화계와도 간접적인 인연을 이어갔다.[39]

이후, 1989년 작품 '사랑의 파도'로 영화계에 돌아오며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다시 노미네이트되고 1990년 대부 3편으로 주류 할리우드에 다시 진입했으며 출연한 작품들은 흥행에도 성공했다. 1991년에는 ‘프랭키와 자니’에서 미셸 파이퍼와 ‘스카페이스’ 이후 8년만에 만나 로맨스 영화를 찍으며 멜로 연기도 선보였다. 1992년에는 케빈 스페이시, 잭 레먼으로 대표되는 명배우들과의 협연으로 글렌 게리 글렌 로스[40]를 완성시켰으며 이후 이듬해 1993년에는 여인의 향기의 프랭크 슬레이드 역으로 마침내 숙원이었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칼리토, 딕 트레이시, 도니 브래스코로 스카페이스에서 시작된 거친 갱스터로서의 독창적인 캐릭터를 영화속에서 발전시켰고 투 비츠, 애니 기븐 선데이, 히트, 인사이더 등에서 호연을 펼치며 90년대에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2000년대 이후 작품은 전성기에 비해 비교적 소규모 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자신의 감독하에 만들어진 차이니즈 커피, 살로메(2013)가 대표적이다. 다만 전성기에 비해서 영화 작품 선구안이 비교적 안 좋아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41]

하지만, 2000년대 알 파치노가 출연한 작품 중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2년 작 인섬니아만큼은 예외로 평단에게 호평받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또한, 베니스의 상인(2004)은 그의 전성기를 연상시키며 Angels In America(2003)은 그가 연극배우로써의 내공의 결실이라 해도 좋은 시대의 명연기라 불릴 만하다. 이 연기로 그는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영화, 뮤지컬, TV 드라마의 연기 삼관왕(Triple Crown of Acting)의 일원으로 올라섰다. 전성기 시절의 활약에 비교하면 기세가 약해지긴 했으나 80대를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배우 스스로의 역량과 연기력은 여전히 걸출하며, 이미 젊은 시절에 이루어 놓은 출연, 수상들만으로도 전설의 반열에 오른 연기 거장이다.[42]

2010년대에 들어서 유 돈 노우 잭으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다시 한번 수상하고 크리스토퍼 워컨과 스탠드 업 가이즈로 협연했으며 배리 레빈슨과 더 험블링으로 재회하고 대니 콜린스로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다시 한번 노미네이트 되었다.2019년에는 아이리시맨에서 로버트 드 니로,조 페시와 함께 출연하여 명연기를 보여주었고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43]

2.4. 아카데미 시상식 7전 8기

아카데미 최다 노미네이트 순위: 남배우
순위 이름 노미 수상
1위잭 니콜슨 12 3
2위로런스 올리비에 10 1
공동 3위스펜서 트레이시 9 2
덴젤 워싱턴 9 2
폴 뉴먼 9 1
알 파치노 9 1
공동 7위말론 브란도 8 2
잭 레먼 8 2
피터 오툴 8 0
미국 3대 시상식인 <아카데미상>, <에미상>, <토니상>을 모두 받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알 파치노는 아카데미 시상식과 지독한 악연이었다. 아이리시맨으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을 포함하여 남우주연상 5번, 남우조연상 4번, 총 9번의 후보 지명을 받았고 역대 최다 노미 순위 3위에 올라 있지만 수상은 한 번에 그쳤다.[44] 심지어 역대급 연기로 꼽히는 <대부> 시리즈로도 수상을 실패했는데, 대부 2로 1975년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놓친 것은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일로 평가 받는다.[45] 또 하나의 대표작인 <스카페이스>로는 골든글로브 후보에만 올랐고 아카데미에는 노미네이트조차 되지 못했다.[46]
파일:1974oscar2.gif
파일:1974oscar.jpg
1974년 제 4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들

3. 연기 스타일

지금의 마초적 이미지와는 달리, 알 파치노는 본래 길거리 스탠드업 코미디로 연기를 시작했다. 온갖 농담과 과장된 익살로 사람들을 웃기던 그에게 이 시절은 매우 배고팠지만 그 어떤 시기보다도 행복했다고 술회한다. 이 후 메소드 액팅을 철저하게 훈련하며 자신의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연기법을 터득하고, 본격적으로 전업 배우 생활을 시작한다. 초창기엔 폭발적이면서도 절망과 불안을 탁월하게 표현해내는 것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실제로 1970년대의 전설로 회자되는 알 파치노의 연기들은 모두 타고난 신체적 조건(커다란 눈망울, 예쁘장한 이목구비, 왜소한 신체, 쩌렁쩌렁한 목소리 등)을 탁월하게 이용하여 극단적인 폭발력 이면에 숨겨진 불안함과 절망감을 표현하는 작품들이었다.[59][60] 다만 현장에서 몰입도를 위해 본 촬영 때 외에는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이었던, 모조리 발가벗겨지는 식의 메소드 방법론은 자연인으로서의 알 파치노를 황폐화시키는 면이 있었고, 한 작품 찍어낼 때마다 전세계의 찬사를 받았지만 다음 작품을 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술회한다. 타고난 우울함과 히스테릭함을 갖고 있었던 알 파치노는 1970년대의 성공적인 연기 활동 이면에서 24시간 알콜중독에 시달리며 지쳐갔고, 곧 방법론을 바꾸기 시작한다.

1983년 스카페이스를 통해 1970년대의 자기 자신을 완전히 지워낸 알 파치노는, 자신의 남성성을 극단적으로 과장하여 나약함을 숨기는 방식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불안과 절망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끝까지 운명 앞에 맹렬히 저항하다 파멸하는 갱스터 캐릭터를 본격적으로 확립해나가기 시작한 알 파치노는 1990년대에 이르러 대중들에게 익숙한, 괴팍하지만 세상 물정에 통달한 중년 신사의 이미지 역시 확립하였고 지금의 알 파치노는 1970년대에 비해 1990년대 이르러 정착시킨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흔히 남아있다.

연극 배우로 레전드이기도 한만큼 연기스타일 자체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적으로 손을 아주 효과적으로 쓰는 배우 중 하나며(연극에서는 관객들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섬세한 표정 연기 외에 손동작이나 움직임으로도 표현을 잘 해야 한다) 공간 활용에도 능하다. 또한 애드립에 아주 강한 배우로 뜨거운 오후의 명장면인 대낮에 경찰과 대치 장면, 여기서 나온 일장연설 대부분은 애드립이고[61] 평상시에도 애드립을 종종 친다. 히트에서 "Because she's got a...GREAT ASS!!"하면서 눈을 부라리는 장면 또한 애드립.

4. 은둔형 예술가의 언론 나들이


* 2002년 ≪레이트쇼 with 데이비드 레터맨≫에 첫 출연했을 때는 레터맨으로부터 '토크쇼에 나온 걸 본 적이 없는데 대체 얼마만에 출연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아마 30년 만의 첫 토크쇼 출연이라는 대답을 했던 알은 이 날 출연을 계기로 레터맨과도 친구가 되었다. 2015년, 레터맨이 레이트 쇼를 하차할 때까지 이 쇼에 수 차례 출연했던 알은 같은 해 깜짝 출연한 이후 오랫동안 토크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2020년, ≪아이리시맨≫,≪헌터스≫ 홍보차 처음 ≪지미 키멜 라이브!≫에 출연한 알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역시나 시작부터 키멜에게서 '이런 자리를 불편해하신다고 들었다'는 말을 들었고 인터뷰의 끝무렵에는 키멜의 마무리 멘트가 끝나기 전에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 팬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같은 해 2월, 영국 ≪one show≫에 출연했을 때는 사회자의 중간 마무리 멘트를 듣는 도중 일어나려고 시도했는데 "방금 전에 나가려고 했어요. 아직 안 끝났군요."라고 고백하여 좌중을 폭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5. 가족

사생활이 상당히 비밀스러웠는데 다이앤 키튼과 오랜 연애 관계를 가졌고, 다이앤은 결혼하고 싶었지만 알 파치노의 플레이보이 성향이 깊어 결국 헤어졌다. 이후 튜즈데이 웰디, 질 클레이버그, 마서 켈러, 캐슬린 퀸란, 프로듀서 린달 홉스 등등 여러 배우 및 영화인들과 낭만적인 관계가 많았다. 자식들이 다 늦둥이인데 알 파치노가 결혼이나 자식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1989년 연기코치 얀 태런트와의 관계에서 첫 딸 줄리를 얻었다. 그렇지만 얀 태런트와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2001년에 파트너 관계였던 여배우 베버리 디안젤로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 올리비아와 아들 안톤을 얻었다. 하지만 이후 2003년에 또 베버리와 헤어졌는데 양육권을 두고 치열하게 싸워 원수 관계가 됐다. 이때 파치노의 변호사는 베버리를 두고 자식들을 인질로 쓴다고 맹비난을 했다.# 결국 합의하여 공동 양육하기로 했고, 지금은 화가 풀어졌는지 좋은 친구관계로 지낸다고 한다.

첫딸 줄리는 아버지의 영향인지 단편영화 감독과 제작자를 하고 있으며, 둘째 딸 올리비아는 아직 학생으로 인스타그램에서 가끔 아버지 사진을 올린다.# 아들 안톤은 학생이며, SNS도 안하고 외부에 노출을 별로 하지 않고 있다.#

2008년에서 2015년까지 아르헨티나 여배우 루실라 솔라와 연인 관계였고 헤어진 뒤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인 것으로 보인다.[63] 이후 이스라엘 여배우 Meital Dohan와 2020년까지 교제하였으나 헤어졌다. 이렇게 파트너들은 많았지만 한 번도 공식적으로 결혼하지는 않았다.

2022년 방송 프로듀서 겸 제작자인 53세 연하 1993년생 누어 알팔라와 교제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64] 그리고 다음 해인 2023년 5월, 알 파치노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 [65][66]

알 파치노는 믿지 않았고 자신이 불임이라며 임신을 시킬 수 없다며 친자 검사를 요구했고, 누어 알팔라는 흔쾌히 응하며 검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알 파치노의 자식인 것이 입증되었다.[67]

그리고 6월 15일(현지시간) 득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름은 로만 파치노라고 한다.# 알 파치노는 공식적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앞선 연인들과의 관계에서 세 자녀를 두고 있으며 로만 파치노는 그의 네 번째 자녀다. #

9월 7일(현지시간) 로만 파치노가 태어난지 3개월 만에 누어 알팔라와 결별해 누어 알팔라가 법원에 아들의 양육권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11월 초 월 3만 달러(3천936만원)로 양육비가 타결되었으며, 아들의 접견권은 보장 받았다. #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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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필모그래피

7.1. 영화

연도 제목 배역 기타
1969미 나탈리토니단역
1971백색 공포바비데뷔작[74]
1972대부마이클 콜레오네[75]
1973허수아비프랜시스 라이오넬 델부치
형사 서피코프랭크 서피코[76]
1974대부 2마이클 콜레오네[77]
1975뜨거운 오후소니 워칙[78]
1977바비 디필드바비 디필드
1979용감한 변호사아서 커클랜드[79]
1980광란자스티브 번스
1982브로드웨이에 막이 오를 때아이번
1983스카페이스토니 몬타나
1985혁명[80]
1989사랑의 파도[81]프랭크
1990로컬 스티그매틱그라함프로듀서 겸 배우
딕 트레이시알폰스 '빅보이' 카프리스[82]
대부 3마이클 콜레오네
1991프랭키와 쟈니쟈니
1992글렌게리 글렌 로스[83][84][85] 리차드 '리키' 로마[86]
여인의 향기프랭크 슬레이드 중령[87]
1993칼리토칼리토 '찰리' 브리간테
1995투 비츠할아버지
히트빈센트 한나 경위
1996씨티홀존 파파스 시장
뉴욕 광시곡본인 & 리처드 3세감독 데뷔작
1997도니 브래스코벤자민 '레프티' 루지에로
데블즈 애드버킷존 밀튼
1999인사이더로웰 버그만
애니 기븐 선데이토니 다마토
2000차이니스 커피해리 레빈감독 겸 배우
2002인썸니아윌 도머
시몬빅터 타란스키
목격자앨리 워맨
2003갱스터 러버스타크먼
리크루트윌터 버크
2004베니스의 상인샤일록
2005투 포 더 머니월터
200788분잭 그램 박사
오션스 13윌리 뱅크
2008의로운 살인데이빗 '루스터' 피스크 형사
2011화이트 밀크스탠포드 형사
잭 앤 질본인[88]
와일드 살로메본인&헤롯 왕감독 겸 배우
2012멋진 녀석들발렌타인
2013살로메헤롯 왕감독 겸 배우
2014알 파치노의 은밀한 관계사이먼
맹글혼맹글혼프로듀서 겸 배우
2015대니 콜린스대니 콜린스
2016미스컨덕트찰스
2017더 파이러츠 오브 소말리아시모어
행맨형사 아처
2019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마빈 슈워즈
아이리시맨지미 호파[89], [90]
2021아메리칸 트레이터제임스 러플린
하우스 오브 구찌알도 구찌
미정스니프하비 스트라이드
미정리어왕리어왕

7.2. 연극

연도 제목 배역 기타
1965The Creditors
1966Why Is a Crooked Letter [91]
1967어웨이크 앤 싱!
1967아메리카, 만세
1968인도인은 브롱크스를 원한다머프[92]
1969호랑이는 넥타이를 매는가?비컴[93]
1969로컬 스티그매틱그레이엄
1970랫츠 감독 데뷔작[94]
1970카미노 리얼킬로이
1973리처드 3세리처드 3세[95]
1975아르투르 우이의 출세아르투르 우이[96]
1977파블로 험멜의 기본 훈련파블로 험멜[97]
1979리처드 3세리처드 3세
1981아메리칸 버팔로월터 '티치' 콜
1983아메리칸 버팔로월터 '티치' 콜
1988줄리어스 시저마크 앤소니
1992차이니스 커피해리 레빈
1992살로메헤로데 안티파스
1996휴이에리 스미스감독 겸 배우
1999휴이에리 스미스감독 겸 배우
2002아르투르 우이의 출세아르투르 우이
2003살로메헤로데 안티파스
2005고아들해롤드
2010-2011베니스의 상인샤일록[98]
2012-2013글렌게리 글렌 로스쉘든 '셜리' 르빈
2015-2016차이나 돌미키 로스
2017갓 룩 어웨이테네시 윌리엄스

7.3. TV

연도 제목 배역 방송사/분류 기타
1968N.Y.P.D존 제임스ABC 드라마시즌 2 5화만 출연
2003엔젤스 인 아메리카로이 콘HBO 6부작[99]
2010유 돈 노우 잭잭 케보키언HBO TV 영화[100]
2013필 스펙터필 스펙터HBO TV 영화[101]
2018패터노조 패터노HBO TV 영화
2020헌터스마이어 오퍼만아마존 드라마

8. 관련 문서



[1] 본인 말에 따르면 태어난 곳은 맨해튼이며 어린 시절 자란 곳은 이스트 할렘, 사우스 브롱스이다[2] 안톤과 올리비아는 이란성 쌍둥이다.[3] 누어 알팔라 사이 소생. 참고로 엄마보다 누나 줄리가 더 나이가 많다.[4] 젊었을 때는 170cm 였다.[5] 알 파치노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준 영화이다. 촬영 당시 나이가 30대 초였는데, 어리숙한 20대 청년 대학생과 30대의 카리스마 있는 마피아 패밀리의 보스라는 서로 상극된 두 이미지를 완벽하게 연기해내며 밑에서도 볼 수 있듯 성격 까칠하기로 유명하며 거의 남 칭찬을 하지 않는 선배 배우인 말론 브란도에게 격찬까지 받을 정도다.[6] 원문: I didn't say much to Pacino when we were making The Godfather(1972) but I not only consider him one of the best actors in America but in the world. The picture just reinforced my opinion. That sounds like a put on? well, I never meant anything more in my life. I don't go around touting other actors, the profession means too much to me.[7] Triple Crown of Acting을 달성한 배우이자 그의 브로드웨이 최신작 차이나돌 공연쯤에 가디언지는 그를 브로드웨이의 대부라 칭했다. 기사 링크[8] 미국 3대 시상식인 <아카데미상>, <에미상>, <토니상>에 오비상까지 포함하여, 알 파치노는 네 개의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모두 수상한 역사상 유일무이한 배우이다.[9] 2015년 가디언지 인터뷰 중에서 "My grandparents came from a town in Sicily called Corleone. Fate? Yes, maybe – it’s very strange." 출처[10] 다만 이런 우연은 당시 대부 시리즈를 준비하던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파라마운트 이사들은 대부 시리즈는 이탈리아 문화를 잘 아는 이탈리아계로 팀을 꾸리기를 원했고, 배우들은 그나마 자유로웠으나 감독으로 앉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알 파치노를 강력히 주장했다.[11] 절친한 친구 두 명이 마약 남용으로 19살, 30살에 사망한 일화를 보면 어린 시절 얼마나 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12] 1983년 abc 인터뷰 영상[13] 2007 AFI 공로상 시상식 08:40~ 영상[14] ABC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하여 춤을 좋아하는 점과 연기 생활의 시작이 뮤지컬이었다고 밝혀 대중을 놀래킨 바가 있다. 아쉽게도 찍어놓은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고. 영상[15] 2007 AFI 공로상 시상식 09:25~ 영상[16] 2016년 알 파치노에게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 중에 이 일화를 밝히며 당시 관객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도 안간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백악관 리셉션 한글자막 영상[17] High School of Performing Arts, 흔히 PA로 불리는 뉴욕의 공립 예술고등학교이다. 1947년에 설립되었다.[18] 2019년 12월 open 매거진 인터뷰 " I went to a performing arts school and I remember that I loved the things that I learned, but I was too young, I was 15 but I might as well have been 10 or 11, I just was behind.", "I had to quit school and go to work because my mother was ill. So I was living in the Village by myself when I was 16, 16 and a half. I was working odd jobs to make money and support myself and my mother." 링크[19] Focus On: 100 Most Popular Tony Award Winners의 2017페이지 출처[20] 2009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이 때의 일을 밝혔다 "At 20, I lived in Sicily by selling the only asset I had — my body," "An older woman traded food and housing in return for sex. I woke mornings not really loving myself."[21] 2015년 가디언지 인터뷰. "The lowest point of my life was losing my mother, Rose, and grandfather – they died within a year of each other. I was 22 and the two most influential people in my life had gone, so that sent me into a tailspin."라고 말한 뒤 "I lost the 70s in a way, but then I gave up drinking in 1977 and decided to focus on the work."[22]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는 알 파치노를 비롯해 제임스 딘, 더스틴 호프만, 마릴린 먼로, 제인 폰다, 로버트 드 니로를 가르친 미국 연기사의 전설적인 인물이다.[23] 1983년 abc 인터뷰 한글자막 영상[24] 2006년 발간된 Al Pacino In Conversation with Lawrence Grobel에서 "The Actors Studio meant so much to me in my life. Lee Strasberg hasn't been given the credit he deserves ... Next to Charlie, it sort of launched me. It really did. That was a remarkable turning point in my life. It was directly responsible for getting me to quit all those jobs and just stay acting."라고 인터뷰했다.[25] 2000년 6월 뉴욕 타임즈 기사 홈페이지 링크[26] 액터스 스튜디오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홈페이지 링크[27] 참고로 알 파치노는 샘 셰퍼드와 함께 오프-오프-브로드웨이가 배출한 스타 배우로 꼽힌다.[28] 인터뷰에서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각본을 쓸 때, 알 파치노라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을지 고려해서 서술했다고 밝혔다. 마이클 콜레오네를 떠올리며 알 파치노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29] 이미, 코폴라의 마음 속에는 알 파치노를 마이클 콜레오네로 내정했지만, 제작사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몰래 스크린 테스트에 포함시킨 것이라 한다. 이 스크린 테스트에서 상대역 다이앤 키튼도 알 파치노가 제일 맘에 든다고 했고, 당시 조지 루카스의 아내인 마샤 루카스가 테스트 필름을 편집하던 중 “알 파치노로 하세요, 눈빛으로 옷을 벗기는 재주가 있어요”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30] 30대 시절 목소리는 맑고 미성이었으나, 40대를 들어서자 허스키하고 걸쭉해졌다. 하지만 알 파치노하면 허스키한 목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상징적이게 되었다.[31] 다만 파치노 본인은 후일 바버라 월터스와의 인터뷰에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주인공 역 제안을 거절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32] 본 작품에서 윌라드 역할은 마틴 쉰이 맡게 된다.[33] 비슷한 시기에 알 파치노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한 솔로 역할, 미지와의 조우의 로이 네리 역,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의 칼 번스타인 역의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다.[34] 이외에도 영화사에 길이남을 명작인 1976년 작 택시 드라이버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맡은 트래비스 비클 역을 먼저 제의 받았으나 거절한 바 있다. 이 영화의 제작을 맡은 줄리아 필립스의 자서전 'You'll Never Eat Lunch in This Town Again'의 내용에 따르면, 마틴 스코세이지가 아닌 토니 빌이 감독으로 처음 물망에 오르고, 토니 빌이 파치노를 주연으로 원하자 이 영화의 각본을 맡은 폴 슈레이더가 알 파치노에게 대본을 보냈지만 결국에는 알이 거절하였다. 이유는 불명. 이후에는 토니 빌도 감독직에서 하차했고 지금의 마틴 스코세이지 연출,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가 만들어졌다.[35] 이 시기에는 마틴 스코세이지와 합작하여 모딜리아니의 전기 영화를 촬영하기로 하였으나, 제작비 부족으로 무산되었다. 묘하게 재밌는 점은, 훗날 대부 3에서 같이 협연한 앤디 가르시아가 2004년 작 <모딜리아니>에서 모딜리아니 역을 맡았다는 점이다. 알 파치노의 AFI 공로상 수상 당시, 찬조 연설자로 가르시아가 나와 파치노에게 "당신이 제 모딜리아니입니다"라고 칭송한 것은 뜬금 없이 괜히 모딜리아니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유대와 비하인드가 있었기 때문.[36] 다만 개봉 당시에는 평론가들의 악평에 시달려야 했고, 영화가 시종일관 자극적인 탓에 보수적인 아카데미에 구미에도 알맞지 않았다. 때문에, 스카페이스는 어떠한 부문에도 노미네이트 되지 못하였다. 물론 파치노도 연기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던 것은 당연지사. 희대의 명연, 신들린 연기라는 찬사에 비해서는 초라한 결과였다. 오죽 안타까웠던지, 당시 동료 배우들이 노미네이트 실패 소식을 듣고 간이로 상을 제작해 알 파치노에게 상을 선물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37] 일례로, 토니 몬타나의 피규어는 지금까지도 생산되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38] 무려, 3000만 달러로 제작해 그의 100분의 1 수준인 30만 달러를 벌어들인 희대의 망작이다.[39] 훗날 알 파치노는 인터뷰에서 이 시기에 월 스트리트의 고든 게코역, 다이하드 시리즈의 존 맥클레인 역, 귀여운 여인의 에드워드 루이스 역을 거절했다고 밝히기도 했다.[40] 이외에도, 에드 해리스, 알란 아킨, 알렉 볼드윈, 조너선 프라이스 등 쟁쟁한 연기파 배우들이 함께하였으며, 그야말로 배우들 일면이 화려하다.[41] 후술하겠지만 골든 라즈베리를 수상하거나 비평, 흥행적으로도 졸작이나 다름없는 의로운 살인, 88분, 잭 앤 질, 미스컨턱트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영화 커리어 자체가 전성기에 비해 떨어진 것은 팩트다. 이는 연기력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이는 자신을 발굴하고 키워준 마틴 브레그만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로, 마틴은 알 파치노에게 가장 어울리는 시나리오와 감독을 고르는 선구안이 매우 뛰어난 제작자였다. 실제로 최전성기인 1970년대 알 파치노의 영화들은 모두 마틴 브레그만의 손길이 닿은 영화들이었다.[42] 오죽하면, 로빈 윌리암스도 알 파치노의 AFI 평생 공로상 수상 당시 찬조연설자로 나와 70년대 초반 찍어놓은 작품들만으로도 공로상 수상이 가능했겠다고 반농담식으로 얘기한다.[43] 수상자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할리우드의 [[브래드 피트].][44] 아카데미 역대 최다 노미네이션 배우 순위 링크[45] 다른 필모들은 차치하더라도 대부 2로는 오스카를 받았어야 됐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 해의 남우주연상은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알버트 피니마저 제치고 <해리와 톤토>라는 아주 묻혀진 영화의 <아트 카니>가 수상했다.[46] 스카페이스는 현재는 명작 취급을 받지만 당시는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잔인한 영화라서 논란이 되었는데, 보수적인 면이 있는 아카데미상은 이런 영화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외국어영화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게 기생충이 사상 최초일 정도로 다소 보수적인 면이 있다.[47] 1979년 플레이보이지 인터뷰에서 "Oh, sure. Definitely. That was outrageous. It’s things like that that get you a little sour. I decided to pass the ceremonies by. There were certain people around me who wanted to write a letter, who wanted to announce that I would not accept the nomination. I would always say, “Let it go. Let it go. Don’t make waves.” But then, even though I didn’t go, I watched it on TV. I felt bad. I didn’t care for that kind of contradiction."라고 인터뷰했다.링크[48] 2020년 1월 지미 키멜쇼에 첫 출연하여 이 때 일을 상세히 회고했다.[49] Al Pacino by Lawrence Grobel 45p 링크[50] 다만, 이 80년대에 드 팔마 연출 작 스카페이스에서 알 파치노의 경력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평가되는 명연을 펼치고도 수상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반면, 1984년도 골든글로브에서는 남우주연상으로 노미네이트 되었고 알 파치노 팬들 사이에서는 대부 2부 남우주연상 수상 실패와 더불어 스카페이스 토니 몬타나역으로 노미네이트 실패가 가장 아쉬운 사례로 거론된다. 당시, 아카데미는 보수적 성향이 강해 처음부터 끝까지 자극적인 이 영화를 대놓고 외면했었고 알 파치노도 결국 그 피해를 봤다. 오죽 안타까웠던지, 동료 배우들이 노미네이트 실패 소식을 듣고 간이로 상을 제작해 알 파치노에게 상을 선물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한 일화. [102][51] 대부 2의 명대사 'You broke my heart!'를 자체 패러디했다.[52] 다만, 피츠제럴드의 경우에는, 나의 길을 가련다(1944)에서 늙은 신부 역할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후보에 동시에 올랐다. 즉, 한 역할로 주연상과 조연상 후보에 모두 이름을 올린 셈. 이는 1929년 1회 시상식으로 포문을 연 오스카의 이후 모든 역사까지 통틀어도 하나 밖에 없는 특이 케이스이다. 피츠제럴드의 수상 후, 아카데미가 한 영화에서의 역할 당 한 후보 노미네이션으로 규칙을 변경함에 따라, 피츠제럴드는 할리우드 역사상 전무후무한 케이스로 남았다. 또한, 두 후보 중에서 조연상만 수상을 성공하였기에, 여러모로 제이미 폭스와 알 파치노와는 미묘하게 다른 케이스이다.[53] 참고로, 제이미 폭스는 2004년 작 레이콜래트럴로 이듬해 2005년 아카데미 각각 주연상과 조연상의 후보로 올랐다. 그리고 레이에서의 호연으로 남우 주연상 수상에 성공했다. 1993년 둘 다 후보에 올랐지만 남우주연상만을 수상한 알 파치노와 같은 케이스.[54] 공교롭게도 파치노와 제이미 폭스 모두 남우주연상을 수상케 한 캐릭터가 시각 장애인 역이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55] 추가로, 말론 브란도는 4년 연속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유일무이한 배우이다. 반면, 알 파치노는 대부 1에서의 역할이 남우주연상이 아닌 남우조연상으로 노미네이트됨에 따라 3년 연속 남우주연상 후보 노미네이션에 그쳐야 했다.[56] 참고로, 델마 리터는 이후에도 오스카 연기상 후보에 계속해서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모두 수상에 실패했다. 이에 비하면 후일 수상에 성공한 알 파치노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57] 실제, 아카데미의 전초전 격으로 평가받는 골든글로브에서는 잭 니콜슨이 수상에 성공하였다.[58] 이외에도, 대부1, 형사 서피코, 용감한 변호사, 글렌게리 글렌로스, 히트, 여인의 향기, 칼리토, 도니 브래스코 등 숱한 영화들 에서도 명연을 보여주었고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59]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알 파치노의 70년대 영화 중 73년작 허수아비와 79년작 용감한 변호사에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허수아비에서는 초반부에서는 삶을 긍정하며 순수한 모습들이 드러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피폐해져가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잘 표현했다. 용감한 변호사에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사법의 부정한 이면에 이골이나 그 부정함을 호소하는 장면들에서 폭발적인 모습이 잘 나타난다.[60] 알 파치노가 연기한 대표적인 캐릭터인 마이클 콜레오네를 연기한 방식만 봐도 작중 초반부에는 큰 눈망울에 순둥한 모습을 연기했다면 버질 솔로초맥클러스키 서장을 죽인 이후 목소리톤과 표정 자체가 달라지며 작품 후반부에는 우리가 잘 아는 알 파치노의 연기 스타일이 나온다.[61] 이 장면은 시퀀스 전체가 명장면이니 강력추천. 마치 연극 무대에서 원맨쇼를 펼치는 듯 알 파치노 연기력의 정점을 볼 수 있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소니의 불안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 그와 대치하는 경관들 사이의 긴장감이 압권인데 대부분이 대본에 없다보니 실제로 경관들이 황당해하거나 당황하는 리액션을 실감나게 한다. 자주 언급되는 부분은 소니가 "Kiss me. I like to be kissed when I'm being fucked"로 fucked가 엿먹이다와 성관계하다란 의미가 둘 다 있는 걸 이용한 말장난이고, 단연 영화 최고의 명장면은 역대 최고의 영화 대사 중 하나로 꼽히는 "Attica! Attica!!"이다. 뉴욕 주에 위치한 Attica 감옥에서 죄수들이 비인간적 대우에 항의하며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때 죄수 33명과 교도관 10명이 사망하며 과잉진압 논란을 불렀다. 즉, 소니는 "우리도 한번 짓밟아보시지!"하며 구경꾼들을 선동한 것. 당연하지만 평상시 인격이 짓밟히던 죄수들과 은행강도를 동일시 할 순 없다. 그러나 소니의 카리스마 때문에 구경꾼들이 일제히 소니의 편으로 돌아선다.[62] CNN에서 은퇴한 래리 킹은 2020년 현재까지 여전히 개인 쇼를 진행하고 있는데 알 파치노 성대모사가 가능한 사람이 출연하면 자신이 알 파치노의 절친임을 밝히며 알의 성대모사를 시키곤 한다.[63] 참고로 루실라 솔라Lucila Solá(1976년생)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교제했던 카밀라 모로네의 어머니이다. 알 파치노 보다 36살 디카프리오보다 2살 어리다(...).[64] 딸보다 몇 살 어리다는게 백미(...)[65] 누어 알팔라는 믹 재거와도 연애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돈 많은 노인들만 골라 사귄다는 이야기가 돌았다.[66] 이외에도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유명인 커플로는 36살 연하남과 교제하는 마돈나, 46살 어린 25세의 여자친구와 교제하는 지미 페이지가 있다.[67] 알 파치노가 자신 있게 초반에 부정한 이유도 납득할 의학적인 문제, 이유가 확실하게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80대의 노인이니...[68] 이병헌이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호흡 곤란같은 증세가 있느냐.'라고 물어보며 공황장애 증상이 있음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래서 시상자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서기 전 이병헌이 조언을 구했는데 "촬영할 때는 긴장을 안 하지 않나, 나 자신이 아닌 새로운 캐릭터를 입혀서 시상식에 올라가 봐라."라고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69] 최근작이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라면 베니스의 상인에서의 샤일록.[70] 재밌는 점은 알 파치노는 이 작품에서 위노나 라이더를 주연 중 하나로 앤으로 기용했는데 2002년 시몬에서 극초반에 작중 유명 여배우로 나오는 위노나 라이더에게 퇴짜 맞는 감독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당시 위노나 라이더는 2001년 절도 사건으로 영화에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71] 목소리가 굉장히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함을 지를 때 나오는 특유의 밀도 높은 목소리는 초창기와 말년이 거의 비슷하다. 그가 얼마나 발성과 기본기가 좋은지 보여주는 부분.[72] 대부 1은 아무리 일러도 1970년 이후에 촬영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코폴라 감독 특유의 오랜 촬영기간 때문에 그 이전이라는 이야기도 많지만. 정확히는 1971년 3월에 대부는 첫 촬영을 했고, 첫 촬영 신은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마이클과 케이가 선물을 사는 신이었다.[73] 파치노는 전설이 된 대부 시리즈는 물론이고 스카페이스에서 마약왕이나 도니 브래스코에서 마피아 일원을 연기하는 등 매력적인 범죄자 캐릭터를 연기한 경험이 많다. 대부 자체가 (작품성과 별개로) 마피아를 엄청나게 미화한 작품이기도 하고.[74] 미 나탈리는 단역이기 때문에 백색 공포가 필모상 첫번째 영화로 알려져있다. 알 파치노 본인도 대부를 두번째 영화로 꼽으며 이 작품을 첫 작품으로 꼽는다.[75] 제45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76] 제4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77] 제47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78] 제48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79] 제52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80] 알 파치노랑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으로 불의 전차로 유명한 휴 허드슨이 감독하고 당시 거액인 3천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서 미국에서 겨우 35만 8천달러를 벌어들이며 전설적으로 망한 영화로서 혁명을 일으켰다는 비아냥까지 듣었으며 또한 다음 미국 독립 혁명을 다룰 영화는 이 영화가 너무나도 망해서 2776년 1000주년을 기념해서 나올 것이다라는 비아냥적인 평까지 듣었다. 덕분에 알 파치노도 4년이나 영화를 쉬면서 연극무대에서나 활동했다.[81] 원제목은 '사랑의 바다'인데 한국에선 이 제목이 하두 쓰인 제목이라 사랑의 파도로 개봉했다. 파치노 연기일생 전성기의 에너지 넘치는, 불타는 듯한 연기스타일과 대비되는 비교적 정적인 (그러나 폭발할때는 폭발하는) 후반기의 연기스타일이 확립된 첫 작품으로 보통 여인의 향기를 꼽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먼저 나왔다. 과도기적인 작품이라 젊은 시절 파치노 특유의 에너지도 어느 정도 남아있긴 하다. 평은 괜찮았지만 크게 흥행하진 못했는데 파치노 본인으로선 나름 의미가 있는 작품인것이, 80년대 초중반 찍은 영화들 중 스카페이스를 빼곤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연극판에서 주로 활동 중이다 돌아와 찍은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82] 제63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83] 극작가 데이빗 마멧의 연극 각본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 조연상 후보이긴 하지만, 부동산 중개업체 내 5명의 직원을 소재로 하는 내용으로 사실상 주연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른 출연배우는 잭 레먼, 케빈 스페이시, 에드 해리스, 알란 아킨, 조나단 프라이스, 알렉 볼드윈 등으로 어마어마한 이름값들을 가진 배우들이다. 여인의 향기로 주연상을 받긴 했지만, 글렌게리 글렌 로즈의 로마 역을 더 높게 치는 경우도 있다. 알 파치노의 깐족거리는 연기가 일품이다. 이에 덧붙여, 영화 막판부 본인의 영업에 훼방을 놓은 케빈 스페이시에게 알 파치노가 욕설을 섞어가며 꾸짖는 장면은 지금도 알 파치노 팬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는 명장면이다.[84] 다만 이는 주목도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여인의 향기에서는 원맨쇼에 가까울 정도로 알 파치노 혼자서 영화를 이끌어 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글렌게리 글렌 로스에서는 잭 레먼알렉 볼드윈의 연기가 매우 훌륭했던 탓도 있다. 이 때문에 아무래도 주목도 측면에서 원맨쇼를 펼친 여인의 향기에서 보다는 수상에 있어 손해 아닌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알렉 볼드윈이 세일즈맨들에게 호통에 가까운 일장 연설 하는 장면과 잭 레먼이 케빈 스페이시와 설전을 벌이며 비굴한 모습과 화난 모습을 경계 없이 드나들며 세일즈맨의 애환을 표현하여 세일즈 맨 그 자체로 잘 담아낸 모습은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될 정도의 퍼포먼스였다.[85] 참고로 알 파치노는 2012년 리바이벌한 연극에서는 셜리 르빈(92년 영화에선 잭 레먼이 연기) 역을 연기했다. 참고로 연극 내 로마 역할은 바비 카나베일이 연기.[86] 제65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87] 제65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88] 골든라즈베리 남우조연상 수상[89]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90] 의외로 알 파치노가 출연한 최초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장편영화다.[91] 오비상 남우주연상 후보[92] 오비상 남우주연상 수상[93] 제23회 토니상 연극부문 남우조연상 수상[94] 뉴욕 브로드웨이가 아닌 보스턴의 Charles Playhouse에서 공연했다. 소규모 카페 공연을 연출한 경험은 많았던 알 파치노이지만 정식으로 극장에서 연출을 맡은 건 이때가 처음.[95] 뉴욕 브로드웨이가 아닌 보스턴의 Loeb Theater에서 막이 올랐고 이후 교회로 장소를 옮겨 진행되었다. 당시 뉴욕 타임즈 평론 링크[96] 뉴욕 브로드웨이가 아닌 보스턴의 Charle Playhouse에서 공연했다.[97] 제31회 토니상 연극부문 남우주연상 수상[98] 제65회 토니상 연극부문 남우주연상 후보[99] 제56회 프라임 타임 에미상 시상식 TV영화/미니시리즈부문 남우주연상 수상[100] 제62회 프라임 타임 에미상 시상식 TV영화/미니시리즈부문 남우주연상 수상[101] 제65회 프라임 타임 에미상 시상식 TV영화/미니시리즈부문 남우주연상 후보


[102] 추가로, 알 파치노가 직접 인터뷰에서 해당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