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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공로상 | ||||||||||||||||||||||||||||||||||||||||||||||||||||||||||||||||||||||||||||||||||||||||||||||||||||||||||||||||||||||||||||||||||||||||||||||||||||||||||||||||||||||||
제13회 (1956년) | ||||||||||||||||||||||||||||||||||||||||||||||||||||||||||||||||||||||||||||||||||||||||||||||||||||||||||||||||||||||||||||||||||||||||||||||||||||||||||||||||||||||||
제임스 딘[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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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1719 Vine Street |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 제임스 딘 James Dean | |
본명 | 제임스 바이런 딘 James Byron Dean |
출생 | 1931년 2월 8일 |
미국 인디애나주 매리언 | |
사망 | 1955년 9월 30일 (향년 24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촐라메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1cm |
학력 | UCLA (연극학 / 중퇴) |
종교 | 퀘이커[2] |
별명 | 지미 딘(Jimmy Dean)[3] |
서명 | |
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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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라.
Dream as if you'll live forever. Live as if you'll die today.
미국의 영화 배우.Dream as if you'll live forever. Live as if you'll die today.
2. 위상
자신이 출연한 영화명이기도 한 "이유 없는 반항"의 완벽한 전형으로 떠올라 1950년대의 십대들 전체를 대변했다. 그가 사망한 지도 무려 [age(1955-09-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젊음, 스포츠카[4], 청바지 하면 사람들이 바로 떠올릴 정도로 당대 영화계 최고의 아이콘 중 한 명이자, 소위 "청춘(靑春)"의 영원한 상징이기도 하다. 이후에 등장한 무수한 후배들이 "제2의 제임스 딘"으로 호명됐지만, 그의 아성을 넘진 못했다.생전 뿐만이 아니라 사후에도 이 정도로 수많은 팬을 끌어들인 남자 배우는 루돌프 발렌티노 이후 딘이 최초라고들 한다. 다만 루돌프 발렌티노는 여성들의 마음만 사로잡았다면 딘은 남녀를 불문하고 비트 세대 전체를 열광시킨 급이 다른 파급력이라 평가받는다. 어딘가 음울하면서도 로맨틱한 구석이 있는 기존의 남성 성별 배우들이 여성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반면, 딘은 이례적으로 여자들과 남자들 모두를 끌어들이는 매력을 뿜어냈다.
말론 브란도와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동경했는데, 실제로 섬세한 연기는 클리프트를 닮았고, 감정에 북받쳐 두서없이 말하는 분노 장면과 성적 매력은 브란도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몽고메리 클리프트, 말론 브란도와 함께 50년대 청년문화 비트 세대들의 상징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부문 최초로 사후 후보에 올랐다. 당시 불과 25세 10일이란 기록이었다.
3. 생애 및 활동
1931년 미국 인디애나 주 매리언(Marion)에서 농부인 아버지 윈튼 딘[5]과 어머니 밀드레드 마리 윌슨[6] 사이에서 태어났다.1937년 아버지가 치과기공사가 되기 위해 농사를 그만 두는 바람에 가족이 다함께 아버지가 취직한 병원이 있는 캘리포니아 주 산타 모니카로 이사를 했다. 여기서 딘은 브렌트우드 초등학교[7]를 다니다 매킨리 초등학교[8]로 전학했다. 이미 이때부터 딘은 배우가 되는 꿈을 꾸며 탭댄스를 배우고 미술공예품을 만들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는 1930년대 소년들의 평범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어린 딘은 아버지와는 사이가 서먹했고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던" 존재인 어머니와 유독 친했는데, 1940년에 그 어머니를 자궁암으로 잃고 만다. 아버지는 딘의 양육을 책임질 생각이 없었고, 딘은 다시 고향인 인디애나 주로 홀로 보내진다.
인디애나 페어마운트(Fairmount)는 퀘이커 공동체로 고모 오텐스 윈슬로[9]와 고모부 마커스 윈슬로[10] 역시 교도였다. 우연히 교도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된 마을이 아니라 처음부터 퀘이커 교도들끼리만 살기 위해 형성한 기획 거주지였다. 아버지는 자신도 곧 따라가겠다고 약속했지만, 딘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딘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친구였던 배우 마크 라이델[11]에 따르면 이때 딘은 실질적으로 "고아"가 된 거나 다름 없었다. 딘은 고모를 엄마라고 부르게 됐다. 고모집에 맡겨지고 3년 뒤에 사촌동생인 마커스 "마키(Markie)" 윈슬로 주니어가 태어나 형제처럼 컸는데, 마키 윈슬로에 따르면 딘은 매우 상냥하고 자상한 형이었다고 한다.
딘은 인디애나에서 라디오극에 빠져지내며 배우의 꿈을 더욱 강하게 키워나가는 한편, 감리회 목사 제임스 드위어드[12]와 어울리며 투우와 영화, 자동차 경주 등에도 관심을 지녔다. 그런데 1997년 절친이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사후공개를 조건으로 했던 인터뷰에 따르면, 어린 딘은 이 드위어드 목사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이로 인해 평생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13][14]
딘은 페어마운트 고등학교에서 학업 성적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야구, 농구, 달리기 등 운동에 우수한 소질을 보였으며 "모범적으로" 생활했다. 장대높이뛰기로 그랜트 카운티[15] 지역내 신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고교 재학 4년 내내 3루수로 뛰며 아메리칸 리전 리그[16]에서 활약했다. 타율은 0.333. 딘은 지독한 근시로 안경 없인 눈 뜬 장님이나 다름 없었는데 승부욕이 엄청나서 잘못된 판정으로 파울을 맞으면 안경을 벗어 바닥에 내던지곤해 졸업 때까지 안경을 무려 15번이나 새로 맞춰야했다. 동시에 학교 연극 교사였던 애들라인 널[17]은 딘의 뛰어난 연극적 재능을 발견하고 딘이 이쪽으로 진로를 정하도록 격려했다. 인디애나 고등학교 웅변 협회[18]에서 웅변 실력을 경쟁하기도 했다.
딘은 1949년 5월, 고등학교 졸업 후 애견 비글 맥스[19]를 데리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새 부인과 살기 위해 산타 모니카로 돌아왔다. 산타 모니카 시티 칼리지[20]에서 법학[21]을 배웠다. 딘이 변호사가 되길 바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일 년 뒤인 1950년 가을 UCLA로 편입한 뒤엔 한 학기가 지나 연극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로 인해 딘은 다시 아버지와 사이가 멀어졌다.
딘은 UCLA에서 올라간 연극 '맥베스'에서 350명의 지원자를 물리치고 말콤 역을 맡기도 했다. 1950년 학생 사교클럽인 시그마 누[22]에서 사귄 친구 제임스 벨라[23]의 주선으로 펩시 광고에 보조 출연해 처음 직업연기자로서 돈을 벌어보게 되었다. 단순히 엑스트라로 계약하고 촬영하는 일이었지만, 촬영 현장을 지켜보다 딘의 젊고 잘생긴 외모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에이전트 이자벨 드래서머[24]를 만나 바로 계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딘에게서 이웃집 소년[25]과 같은 친근한 매력을 발견한 광고제작자는 바로 다음 날 딘을 다시 불러 새로운 버전의 펩시 광고에서 두 번째로 비중이 큰 역할을 맡긴다.
피아노 모양의 주크박스에 동전을 넣는 사람이 딘이다. |
연기 워크숍에서 같이 연기 공부를 했던 제임스 휘트모어의 조언대로 리 스트라스버그 밑에서 메소드 연기를 배우기 위해 1951년 1월 UCLA를 자퇴하고 그해 가을 맨해튼으로 떠났다. 생활비를 위해 각종 궂은 일을 했다. 퀴즈쇼 "Beat the Clock"의 스턴트 사전 테스트를 하기도 했다. 잠은 액터즈 스튜디오(Actors Studio)에서 침대 자리 하나를 얻어 해결했다.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낮 드라마에서 작은 역할들을 맡았다.
이전 펩시 광고 제작자는 딘에게 부활절 기념 1시간 짜리 TV 드라마 "Hill Number One"(1951)의 사도 요한 역을 주기도 했다. 6.25 전쟁이 터져 한국에 주둔 중인 미 육군 중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군종 목사가 예수의 십자가형 후 3일 동안 벌어진 일을 들려주며 기운을 북돋운다는 내용이었다. 로디 맥도웰 등 당시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배우들이 많이 나온 이 드라마 덕분에 LA에 위치한 가톨릭 사립여학교인 티없는 마음 고등학교[26]에서 티없는 마음 제임스 딘 팬클럽[27]이라는 최초의 딘 팬클럽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딘 마틴 주연의 <Sailor Beware>(1952) 같은 영화에서 크레디트에도 안 올라가는 단역을 맡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전직 배우 로널드 레이건과 TV 단막극 "The Dark, Dark Hours"(1954)에 함께 출연한 적도 있다.영상, 풀버전 딘은 동시에 "See the Jaguar" 등 연극 무대에도 출연했다.
54년 딘은 제랄딘 페이지가 출연한 "배덕자"(The Immoralist)라는 연극에 동성애자인 아랍 하인 역으로 나오게 됐다. 우연히 이 연극의 시사회를 보게 된 엘리아 카잔은 딘에게 <에덴의 동쪽> 주연을 제안하게 되었고, 안 그래도 아랍인 연기도 동성애자 연기도 탐탁지 않았던 딘은 개막 첫날 연극을 때려치우고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에 들어갔다. 딘은 이때 이미 자신이 스타가 되었다는 걸 알고 스태프에게 무례하게 굴어 카잔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딘은 동료들로부터 오해를 많이 사기도 했지만,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진지하고 훈련이 잘 되어있는 지적인 배우였다.
딘은 "젊은이들에겐 잘 없으며 보통은 외화 시키지 않는 상처"를 경험을 통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고통의 기억, 그로 인해 유발된 감정, 이를 대하는 개인적 태도까지 전부 연기에 접목 시켜 동시대 같은 세대의 배우들로부터 차별화를 이뤄냈다. 딘은 "날 것의 연약함"을 "지독할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관객들은 허구의 서사에 등장한 배우 제임스 딘을 통해 인간 제임스 딘의 내밀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 마틴 랜다우에 의하면 이 영화는 딘에게 "(돌아가신) 어머니와 재회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게 유기 당했던 고통과 직면하는" 기회가 됐다. "부정을 절실히 갈구하는" 딘의 심리를 알고 있던 카잔은 그 기분을 "실제로 연기에 활용하라고 지시"했다. 딘의 불우한 가정환경은 카잔이 배역에 맞춰 딘을 캐스팅한 이유이기도 했다.
딘은 심지어 대본을 무시하고 자기 대사를 즉석에서 급조하곤 했다. 이렇게 줄글보다는 본능과 감정에 의지함으로써 딘은 진실된 연기를 끌어낼 수 있었다. 배우 일라이 월랙에 따르면 딘은 "그날 그날 자기 기분에 따라 연기"해 동료 배우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는데, 레이먼드 매시[28]는 딘의 변덕에 불만을 품고 카잔에게 따지기도 했다. 그런데 카잔은 매시가 돌아가자 딘에게 "하던대로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매시가 (지금처럼) 짜증이 나있는" 상태가 "(매시와 딘이 나오는) 장면에서 원하는 때깔"이라며.
딘의 두 번째 영화였던 <이유 없는 반항>의 짐 스타크(Jim Stark) 역시 딘이 성장배경은 물론 부모님과의 관계까지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딘은 그 유명한 붉은 잠바를 입고 당대 미국의 10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재현하여 청춘을 상징하는 불멸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연기에 대한 평도 좋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젊은 나이에 거론되었다.
딘은 실제로도 반항아였고, 당시 청춘스타들에게 요구되던 단정하고 전형적인 규준에 따르지 않았다. 화려하고 요란한 한편 쉽게 침울해지는 성향이었고, 촬영에 자주 지각하는가 하면 촬영장에서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딘은 영화출연료를 전부 고급 스포츠카를 사는 데 쏟아부었고, 할리우드 도로에서 마개조를 한 차량들과 경주를 벌이곤 했다.
<자이언트>를 찍기 전 레이싱 드라이버로 활동 중이던 딘에게 워너 브라더스는 영화를 끝낼 때까지 경주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계약의 일부로 서명하게 했는데, 이 편지는 2013년 발행된 "James Dean Ultimate collector's edition"에 부록으로 첨부되었다.
<자이언트>를 촬영하면서 딘이 6주간 머물렀던 파이사노 호텔은 딘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묵었던 호텔이라는 점을 여전히 가장 큰 특징이자 홍보거리로 삼고 있으며 관련 물품들을 전시 중이다.
4. 사진들
죽은지 [age(1955-09-30)]년이 지나 아주 옛날 사람 취급을 받지만 딘이 담긴 사진들은 전부 현대 사진들이라고 보아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이다.특히 무명 시절부터 친구였던 사진작가 데니스 스탁[29]이 남긴 일상사진들이 유명하다. 매그넘 소속이었던 스탁은 1954년 말 겨울, 감독 니콜라스 레이가 샤토 마몽[30] 호텔에서 열었던 파티에서 무명이었던 딘을 처음 만났다. 딘의 지인 자격으로 <에덴의 동쪽> 비공개 시사회에 참석하게 된 스탁은 자신이 전설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함께 아침식사를 나누며 딘으로부터 페어마운트에서의 소소한 일상에 대해 듣던 스탁은 고모 부부의 시골농장과 곧 편입될 할리우드라는 전혀 다른 두 세계 사이에서 부유 중이던 딘의 초상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한다.
사진 중 일부는 사진 에세이 형식으로 <에덴의 동쪽> 개봉 직전인 1955년 3월 라이프에 실리기도 했다. 이때 딘은 여전히 무명이었기 때문에 편집부는 쉽게 설득되지 않았으나 가까스로 통과됐다고 한다.
스탁은 나중에 "DENNIS STOCK: JAMES DEAN"이라는 사진집을 내기도 했다.
▲ 사촌동생 마키 윈슬로와 놀아주는 딘 | ||
▲ 딘이 태워줬던 장난감 나무 차를 잘 보관했다. | ||
▲ 농장의 소들에게 콩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
영화 <자이언트>의 현장을 찍도록 고용됐던 샌포드 로스(Sanford Roth)의 사진들도 유명하다. 로스도 딘의 친구가 되어 카메라와 인물 간의 심적 거리가 가까운 좋은 사진들이 많이 나왔다.
웹에 돌아다니는 제임스 딘 사진들은 보통 이 두 사람이 찍은 것으로, 스타 초상 사진의 역사에서 가장 아이코닉한 것들로 여겨진다.
5. 사망
1955년 9월 30일. 마지막 작품 <자이언트> 촬영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딘은 자신의 애마였던 포르쉐 550 스파이더를 타고 설리너스[31]의 자동차 경주로로 향했다. 시속 55마일 구간에서 시속 65 마일로 달리다 적발돼 경찰이 2번이나 딱지를 뗐다. 5시간 뒤 캘리포니아주 46번 주도(State Route)를 180km/h로 달리다 46번 주도와 41번 주도의 교차로에서 맞은편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하던 포드 튜더(Tudor)와 충돌해 목이 부러지고 내, 외부에 큰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가던 구급차 안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24세. 이 사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수사 중인 사건들이 많다.당시 사고 장면.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왼쪽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가 제임스 딘이다.[32]
배우 알렉 기네스는 딘이 사고를 당하기 얼마전에 함께 식사를 하던 중, 딘이 새로 뽑은 차를 보고는 "그 차를 처분하지 않으면 사고를 당할 것이다"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딘은 가볍게 웃어 넘겼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예언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불과 사고 64일 전인 1955년 7월 28일에 찍은 공익광고 |
사촌동생 마키 윈슬로에 따르면 평소 그림 그리기와 조각이 취미였던 딘은 사망 직전 자화상 조각을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장례식은 고향 페어마운트 퀘이커 교회에서 치러졌다. 페어마운트 역사상 가장 큰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언론의 광적인 취재로 인해 시골 유족들과 주민들의 삶이 여러 측면에서 상당히 파괴되기도 했다.
무덤은 페어마운트의 공원묘지에 있다. 딘이 묻힌 무덤 비석이 딘 집안의 전통에 따라 분홍색으로 칠해졌는데 후사가 없는 탓에 사촌 마키 윈슬로가 관리해왔으나, 2000년대에 와서까지 수십 번이나 도난 당했다고 한다. 몇몇은 범인이 잡혔는데 역시나 딘의 팬들. 디너(Deaner)라고 불리는 열혈팬 중 일부는 딘의 무덤가에서 커플 간의 성행위를 가지거나 일종의 컬트 집단을 조성해 강령회를 열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되곤 한다.
LA 그리피스 천문대[33] 앞 제임스 딘의 동상 |
1956년 <에덴의 동쪽>으로 영화사 최초로 사후에 아카데미상 연기 부문 후보에 오른 남성 연기자가 되었다.[34] 그리고 1957년 <자이언트>로 다시 한 번 후보에 올랐다. 아카데미상 연기 부문에 사후 두 번이나 후보로 오른 사람은 아직까지도 딘이 유일하다.
딘이 사고 당시 타고 있던 포르쉐 550 스파이더는 일명 리틀 바스터드라 불린다. 친구가 불길하니 타지 말라고 충고했으나 타서 사망했다는 썰이 전해지는 등 저주 받은 물건으로 여겨진다. 사고 수습 후 멀쩡한 부품을 회수하기 위해 유명 차개조업자 조지 배리스[35]가 구입했으나 차가 정비소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트레일러에서 저절로 굴러나와 직원 다리가 골절됐고, 이 정비소에 숨어든 한 도둑은 이 차의 핸들을 훔치던 중 팔이 부러졌고, 이 차에서 회수된 변속기와 엔진을 탑재한 2인승 레이서 차량은 타이어가 빠져 마침 거기에 있던 경찰관이 부상 당하고 차는 나무에 충돌해 1명이 즉사했으며, 이 리틀 바스터드를 훔치려던 도둑 2명도 부상 당했다고 한다.[36] 이후 이 차는 전시 되었지만 여전히 사고를 일으켰고, 지금은 뿔뿔히 분해되어 행방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사고 당시 딘의 옆좌석에 타고 있던 딘의 정비사는 1981년 수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음주운전 사고로 사망했다.
데니스 스탁이 찍었던 사진 중에 페어마운트의 가구판매점에서 관을 팔고 있는 걸 보고 딘이 자기가 관에 들어가있는 모습을 찍어달라고 해서 남기게 된 작품이 있다. 이를 두고 마치 딘 본인의 죽음을 예언한 것 같다고들 한다.
영화감독 로버트 올트먼은 1957년 <The James Dean Story>라는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82년에 같은 잡화점(five-and-dime)에서 일하는 제임스 딘 팬클럽 회원들을 다룬 <컴 백(Come Back to the 5 & Dime, Jimmy Dean, Jimmy Dean)>이란 영화까지 연출했다. 샌디 데니스[37], 셰어, 캐런 블랙[38] 주연.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제임스 딘 박물관[39], 제임스 딘 팬클럽[40], 제임스 딘 기념 개조 차량 클럽[41]은 서로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서[42] 추모 행사를 각기 따로 열곤 했다. 이를 워싱턴 포스트 등에서 비꼰 적이 있다.
외아들이면서 독신으로 요절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가장 가까운 방계후손은 5촌 조카의 혈통이다.
소위 베르테르 효과로 인해 사고 당시 딘의 옆좌석에 타고 있던 딘의 정비사를 포함한 수많은 전세계 팬들이 자살을 감행했다. 사고 당시 딘의 옆좌석에 타고 있던 딘의 정비사는 1981년 음주운전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수차례 자살시도를 하였으며, 1959년 11월 독일 함부르크에선 18살, 21살 짜리 딘의 팬 두 명이 14층 창문에서 떨어져 동반자살했다. 슈피겔 지 등의 보도에 따르면 이웃들은 이때 이들이 "딘! 우리도 가요!"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들이 주고 받은 편지에는 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들이 죽으면 딘이 자기를 따라왔다고 기뻐하며 무덤에서 나와 자신들(의 영혼)을 데려갈 거라는 믿음이 적혀있었다.
신화화 되었다는 말 그대로 사망 후 다양한 신화적 존재들에 자주 비유되었다. 안티노우스, 두무지, 아티스, 아도니스, 심지어 예수도 있다.
6. 사생활
현재 미국에서 딘은 양성애자였던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딘은 자신이 게이는 아니지만 한 손을 등 뒤에 묶인 채 살지 않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몇몇 유명 남성 배우들과도 성적 관계를 맺었다는 업계 주장들도 많다. 한편 이 때문에 '이성애자임에도 배우로서의 성공을 위해 업계의 거물들과 성관계를 가져왔다'는 악의적 소문이 돌기도 했다.또한 연인이었던 게 거의 확실시된, 유명하지 않은 남성 업계인들이 있다. UCLA에서 만나 사귄 친구인 작가 빌 배스트[43]와는 산타 모니카 아파트에서 동거했는데, 성관계를 맺은 적도 있고, 한편으론 같은 여성과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반 남성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라이더 친구들의 증언도 존재한다.
딘의 이성 연인들 중 가장 유명한 건 이탈리아 출신의 배우 피어 안젤리[44]다.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에서 안젤리는 폴 뉴먼의 데뷔작 <은술잔(The Silver Chalice)>(1954)을, 딘은 <에덴의 동쪽>(1955)을 각자 찍었는데, 두 영화의 촬영장이 가까이 붙어있던 덕에 자연스레 만나기 시작했다. <에덴의 동쪽>의 감독 엘리아 카잔은 둘이 딘의 분장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은술잔>은 원래 딘이 먼저 제의 받았던 영화였는데, 딘이 시나리오가 형편없다고 거절하면서 뉴먼에게 돌아갔다. 해당 영화는 완성된 뒤 뉴먼이 신문에 공개사과문을 게시할 정도로 졸작으로 뽑혔다.
그러나 안젤리의 엄마는 딘이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둘이 강제로 헤어지게 만들었다.[45][46][47] 1954년 안젤리와 가수 빅 더몬[48]의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 일부는 오토바이를 몰고 온 딘이 식장 건너편에서 일부러 엔진 소리를 크게 내며 결혼식을 지켜봤다고 증언했다. 딘이 식장 앞 도로를 고속으로 질주하며 돌아다녔다는 증언들도 있었다. 딘 본인은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둘이 딘의 사망 직전까지 몰래 만났다는 증언도 있다.
1955년 9월 27일 죽기 사흘 전에 더몬과 만난 딘이 피어 안젤리를 행복하게 해달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다.(또는 더몬이 '내 아내이니 제발 잊어주시오'라고 하자 쓴웃음 지으며 알았다는 답변을 했다고도 한다.) 이 만남 이후 딘이 미친듯이 차를 몰았다는 얘기도 있다.
딘의 유품 속에선 교회 결혼식 신청 팜플렛이 나왔는데 신부 이름을 적는 칸마다 연필로 "Pier(피어)"라고 적혀있었다.
안젤리는 딘이 사망한 직후 또 한 번 폴 뉴먼과 영화를 찍었는데, 이 <상처 뿐인 영광(Somebody Up There Likes Me)>(1956)에서 안젤리는 실존인물인 범죄자 출신 권투선수 록키 그라지아노[49]를 연기한 뉴먼의 아내 역이었다. 원래 뉴먼의 배역엔 딘이 캐스팅 돼있었는데 딘이 사망하면서 뉴먼이 대타가 되었다. 즉 딘이 살아있었다면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돼있던 안젤리와 딘이 영화 속에서나마 부부가 되는 영화가 만들어질 뻔 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안젤리의 대표작이 되었다.
안젤리는 딘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고, 매일밤 딘이 나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생전 안젤리는 딘이 자신이 사랑한 단 한 명의 남자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안젤리는 더몬과 갈등 끝에 1959년 이혼했고 이때부턴 주로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류에 나오게 된다. 1962년 이탈리아 작곡가 아만도 트로바졸리[50]와 재혼했다. <벌지 대전투>(1965) 등에 출연하며 영화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두 번째 남편과도 1965년 별거하게 됐고, 이즈음부턴 괜찮은 배역은 아예 들어오지도 않게 되었다. 1971년 멕시코과 미국 합작으로 만든 <옥타맨>이라는 저예산 괴작[51]을 유작으로 남기고 39세의 나이에 바르비투르산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안젤리와 헤어진 뒤 딘은 우슬라 안드레스 등과 데이트했다.
딘은 성에 대한 넓은 포용성, 자기애, 삶의 역경을 이겨내는 정신력, 화려한 활동, 개인사에 얽힌 비극적 사연 등 성 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열광하는 요소들을 갖춰 게이 아이콘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이는 딘 본인이 게이라는 뜻은 아니다. 게이 아이콘은 우상 당사자의 성적 지향과는 별 관계가 없다.
7. 필모그래피
총 31편의 영화 및 TV 드라마에 나왔지만 대부분 보조출연이었다. 대신 주연한 영화 3편이 모두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서 영구히 보존 중이다.[52] 딘의 위대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3작품 중 제임스 딘 본인이 직접 본 자신의 개봉작은 <에덴의 동쪽> 단 한편이 유일하다. 나머지 2작품 모두 사후 개봉. 2013년 James Dean Ultimate Collector Edition이란 이름으로 그의 3부작이 블루레이 화질로 다시 편집되어 나왔다.#주연작 | ||
에덴의 동쪽 (1955) | 이유 없는 반항 (1955) | 자이언트 (1956) |
주연 칼 트래스크 역 | 주연 짐 스타크 역 | 주연 제트 링크 역 |
단역 및 조연 | ||||
개봉 연도 | 작품명 | 배역 | 감독 | 비고 |
1951 | Fixed Bayonets! | 도기 (Doggie) 역 | 새뮤얼 풀러 | |
1952 | Sailor Beware | 복싱 트레이너 역 | 할 워커 | |
1952 | Deadline – U.S.A. | 카피보이 역 | 리처드 브룩스 | |
1952 | Has Anybody Seen My Gal? | Youth at Soda Fountain 역 | 더글러스 서크 | |
1953 | Trouble Along the Way | 축구 관중 역 | 마이클 커티즈 |
8. 여담
- 극적인 죽음으로 인해서 실체 이상의 과대평가, 일종의 허명을 얻은 대표적인 케이스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인기를 2~3년 반짝 끌고 사라진 배우는 꽤 많으며, 생전에 주연작 3편, 전성기 2년 정도의 딘이 실제보다 오래 살았다면 대배우가 되었을지 아니면 그냥 잊혀졌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딘은 청춘스타, 반항아 이미지로 세계적으로 인기몰이를 했지만 미국에서 이런 이미지의 원조로 평가받는 건 말론 브란도였으며, 딘은 브란도를 벤치마킹하여 반항아 이미지를 구축해 50년대 초반에 반항아 이미지 유행의 끝을 불태우고 사라진 케이스였다.[53] 그리고 제임스 딘은 냉정히 말하자면 과속운전을 하다가 자업자득으로 요절한 것이었기 때문에, 만약 그가 과속운전에 대한 영미권 대중의 인식이 엄청나게 냉혹해진 21세기의 인물이었다면 해당 대체역사에서도 긍정적인 의미에서 전설적인 배우로 남았을지는 미지수다.[54]
- 〈에덴의 동쪽〉 촬영장을 방문해 제임스 딘의 연기를 지켜보던, 《에덴의 동쪽》 원작자 존 스타인벡은 "Jesus Christ, he IS Cal!"(신이시여, 이 친구 '칼'이잖아!)란 배우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원작자가 인정하는 연출, 연기 등등이 최고의 찬사라는 사실은 둘째치고, 《에덴의 동쪽》은 존 스타인벡 자신의 실제 부자간에 갈등을 녹여낸 작품으로, 작가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녹여낸 원작일 경우 웬만해선 원작자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어려움에도 제임스 딘에게 이런 찬사를 남긴 것이다.
- 사후 골든 글로브에서 딘에게 드라마 부문 최우수 남우주연 특별공로상을 시상했지만 이는 딘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그해에만 잠시 신설했던 것이다. 경쟁분야인 최우수 남우주연상 항목으로 치지 않는다. 골든 글로브는 4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매해 다양한 주제로 특별상 항목을 넣어 그해 가장 화제가 된 작품이나 업계 인물들을 치하하곤 했다.
- 데니스 호퍼에 따르면 딘은 안경을 쓰지 않으면 1미터 이상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심각한 근시였는데 "그 시점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선 오로지 상상으로만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을 오히려 연기자로서 축복으로 여겼다고 한다.#
- 어려서 인디애나 농장의 공중그네를 타다가 앞니 두 개가 나갔다. 나중에 딘은 자동차 사고로 잃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55] 사람들이랑 대화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의치를 쏙 빼서 사람들을 놀래키는 걸 좋아했다.
- 빌 배스트에 따르면 딘은 "어린 왕자를 거의 성경 수준으로 신성시"했다. "다른 별에서 왔고" "비범한 매력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끌고" "아름다운 인생관을 갖고 있으며" "(주변과) 감동적인 관계를 맺다가" "때가 되어 가야할 시간이 되자" "뱀이 자신을 물게 하고" "자신의 작은 별로 돌아가는" 이 이야기는 딘 본인 그 자체였다.
- 같은 인디애나 출신의 시인 제임스 윗컴 라일리(James Whitcomb Riley)를 좋아했다. 라일리는 시에 자주 인디애나 사투리를 섞어쓰곤 했다.
- 한국에서 여러 번 상영 및 더빙 방영, 2차 매체 판매 등도 했는데, 1981년 9월 12일 한가위 특선으로 KBS 2TV에서 아침 11시 40분에 더빙 방영했으며 이후 <자이언트>와 <에덴의 동쪽>을 더빙 방영했으며 1996년 KBS2에서 이 3편을 토요명화로 3주에 걸쳐 제임스 딘 특집 화질 보정판으로 더빙 방영한 바 있다. 5월 4일에 <에덴의 동쪽>, 11일에 <이유 없는 반항>, 18일에 <자이언트>를 방영했는데 제임스 딘 역은 장세준이 맡았다. 1989년에 SKC를 통해 <이유 없는 반항>과 <자이언트> 등이 비디오테이프로 발매된 바 있는데, 제작은 서륭프로덕션이 맡았다. DVD는 워너브러더스코리아가 배급했다.
- 1955년 친구 어사 키트와 댄스 스튜디오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 배우 벰파이라와 친구였다. 다만 딘이 벰파이라에게 실망해 사이가 멀어졌다는 소리도 있고 딘의 사망 후 딘과의 친분을 본인과시용으로 써먹는 걸로 비춰져 여론이 좋지 않았다.
- 앤디 워홀이 관심을 갖고 작품 주제로 삼은 유명 인사 중 하나다.
* 대한민국의 가수 DEAN의 이름은 제임스 딘처럼 반항적인 음악을 하고 싶어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 DEAN의 2016년 발매 미니(EP)앨범 '130 mood'중, 130은 제임스 딘의 포르쉐 550 스파이더의 보닛에 적혀있었던 숫자이다.
- 테일러 스위프트의 5집 앨범 1989 트랙 중 Style 가사에도 "You got that James dean day dream look in your eyes" (넌 제임스 딘의 꿈결같은 눈을 닮았어)" 라는 가사가 있다. 가사의 주인공은 해리 스타일스. 제목의 Style은 해리 스타일스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 아리아나 그란데의 정규 앨범 3집 Dangerous Woman 트랙 중 Moonlight 가사에 "He's giving me Elvis With some James Dean in his eyes(그는 내게 두 눈에 제임스 딘을 머금고 있는 엘비스 같죠) " 라는 가사가 있다.
- 주병진이 설립한 속옷 브랜드를 무단으로 "제임스 딘"이라고 지었다가 유족들의 항의로 보디가드로 바꾸기도 했다. 팬티나 속옷을 지정상품으로 하여 "제임스 딘"으로 상표 등록했던 것이 상표법 제34조 제1항 제2호, 즉 국가·인종·민족·공공단체·종교 또는 저명한 고인(故人)과의 관계를 거짓으로 표시하거나 이들을 비방 또는 모욕하거나 이들에 대한 평판을 나쁘게 할 우려가 있는 상표에 해당하느냐의 문제도 중요한 이슈였다. 결론적으론, 고인드립이 아닌 이상 아무 수식 없이 그냥 "제임스 딘" 이라고 출원하는 행위 자체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 한국의 배우 이순재가 tvN 《꽃보다 할배》에서 우연히 제임스 딘이 나오는 영화를 봤는데, 그를 보고 제임스 딘 형이 나온다고 얘기했다.[56]
- 2001년 딘의 인생을 소재로 제임스 프랭코가 주연을 맡은 TV영화 <James Dean>이 나왔다. 우연찮게 이름이 둘 다 제임스다. 프랭코의 연기가 좋은 평가를 받아 골든 글로브를 수상하고 에미상과 배우조합상의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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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딘을 연기한 두 배우 제임스 프랭코와 데인 드한은 시리즈는 다르지만 모두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에서 해리 오스본 역을 연기한 적이 있다. 해리 오스본/각종 매체 문서 참조.
- 아날로그 호러 시리즈인 The Monument Mythos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지 않아 리처드 닉슨을 제치고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으로 나온다.
- 2019년 11월, 제임스 딘이 네 번째 영화로 부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레스 크로커의 소설 "파인딩 잭"을 영화화하는데, 외형은 CGI로, 목소리는 다른 배우가 녹음하는 형태로 구현될 것이라 한다. 딘의 유족도 이 기획에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소식이 발표되자 할리우드 배우들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크리스 에반스는 "컴퓨터로 피카소의 새 그림이나 존 레넌의 새 노래를 얻을 수도 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라면서 비판했고 일라이저 우드는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대놓고 비판을 날렸다. 로빈 윌리엄스의 딸인 젤다 윌리엄스도 기술 발전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수년전부터 말해왔다면서 우려를 표한 상황.# 이후, 제작 여부는 미지수인 상태다.
- 말론 브란도와의 관계에 대해선 말이 많이 엇갈린다. 딘이 브란도를 유독 의식했던 것은 딘의 생전 인터뷰만 봐도 분명하지만, 실제론 친분이 일체 없어 딘이 브란도와 친해지고 싶어했다는 얘기가 있는 반면 한때 성관계까지 가졌다는 전혀 상반된 주장도 있다. 말론 브란도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는 확실히 같이 잤다(...). <젊은 사자들> 촬영 당시 주위에 "나 드디어 먼티(Monty)랑 잤어!"를 자랑질 하고 돌아댕겼으니(...). 반면 제임스 딘은 '재능 있고 귀여운 후배' 정도로만 인식했었을 수도 있다. 아래 함께 찍은 사진들 말고도 딘과 브란도의 우정을 보여주는 사진은 많지만, 친하다고 해서 반드시 성관계를 갖는 건 아니다. 이는 역도 성립하듯. 참고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제임스 딘과 말론 브란도 키스 사진은 합성이다. 애묘가 브란도가 고양이와 입 맞추는 사진에 딘에 얼굴을 덧붙인 것이다.
눈높이가 맞지도 않는다.
말론 브란도와 제임스 딘 |
- 요절한 다른 슈퍼스타들처럼 생존설이 있다. 대중의 지나친 관심에 염증이 나서 가짜 교통사고를 일으켜 죽음을 위장하고 은둔해 산다는 이론이다.
- 시트콤 사인펠드의 주인공 어머니 역으로 유명한 리즈 셰리던[58]이 2000년 자서전에서 1951년 딘을 만나 동거 및 약혼을 했었다고 주장해 잠시 화제가 됐었다. 다만 다른 증인이나 증거가 전혀 없어 아무도 믿지 않았다. 밑에 크리스토퍼 존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활동하던 그녀는 죽기 전까지 이걸 외쳤지만 주변에선 아네... 이러고 무시하기 일쑤였고 친구들조차도 딘 생전에 그런 거 본 적도 없는데? 라면서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전기 작가들은 셰리던의 주장을 책에 쓰기도 했으나 유족들에게 책에 부족한 것 채우려고 대충 넣었다고 비난받았다.
- 올리비아 허시에게 데이트 폭력을 저지른 배우 크리스토퍼 존스(Christopher Jones, 1941~2014)는 제임스 딘 닮은 외모로 유명했고[59][60], 본인도 제임스 딘 재연배우라 불려도 될 정도로 딘 흉내내기에 열을 올렸는데 단순히 딘의 영화나 동종업계 종사자들 증언을 통해 딘의 표정, 말투, 걸음걸이 등등을 따라한 게 아니라 인디애나주에 있는 딘의 집까지 찾아가 딘의 유족들을 직접 탐문할 정도로 딘 흉내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배우로서 인지도는 그저 그런 조연배우였기에 라이언의 딸 이후에 배우를 그만두고 조각 및 여러 직업으로 살아가다가 〈트리거 해피〉(Mad Dog Time/1996)에 조연으로 나온 게 은퇴작이었다. 존스는 그나마 인기가 있던 건 드라마 〈제시 제임스의 전설〉(1965~1966)에서 주인공 제시 제임스를 맡은 것 정도였을 뿐. 드라마가 끝난 뒤로 잊혀서 이탈리아 영화에서 주연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그리 성공하지 못해 이후론 조연으로 나온 게 고작이었으며 드라마 3편(〈제시 제임스의 전설〉 빼고 나머지 2편은 조연으로 1회씩만 나옴)과 영화 7편에 나왔을 뿐이었다.
- 주병진 역시 제임스 딘을 좋아해 연예계 은퇴후 방배동 카페골목에 개업한 카페 이름으로 제임스 딘을 사용했었다. 이 상호는 주병진 항목에 기술되어있듯, 상호 등록관련해 중요한 상표등록 대법원 판례까지 남았다.
[1] 네이버 영화의 1956년 제1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남우주연상 - 드라마 정보는 잘못된 것.[2] 독실한 편은 아니었다.[3] 고향 페어마운트에서 어려서부터 주민들에게 불리던 애칭인데 팬들도 그대로 부르게 되었다.[4] 6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하는 폴 뉴먼과 스티브 맥퀸도 제임스 딘 못지않은 스피드광들이었다.[5] Winton Dean. 1907 – 1995.[6] Mildred Marie Wilson. 1910 – 1940.[7] Brentwood Public School.[8] McKinley Elementary School.[9] Ortense Adeline Dean Winslow. 1901 - 1991.[10] Marcus Winslow. 1900 - 1976.[11] Mark Rydell. 1934-.[12] James DeWeerd.[13] 이는 필요한 폭로였다. 이 목사는 "배우 제임스 딘을 만들어낸 대단한 인물"로 잘못 우상화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관련 전문가들이 이 목사를 정도 이상으로 찬양했던 글들은 현재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14] 테일러를 취재했던 케빈 세섬스는 약속대로 이를 테일러의 사후에 공개했다. 세섬스는 유명인사 인터뷰 분야에서 정평이 나 있는 기자다.[15] Grant County.[16] American Legion League. 여름마다 열리는 청소년 리그.[17] Adeline Nall.[18] Indiana High School Forensic Association.[19] Max.[20] Santa Monica City College.[21] pre-law. 로스쿨 입학을 준비하는 과정이다.[22] Sigma Nu. 가입 서약은 했으나 소위 신고식은 거치지 않아 정식 입회된 것은 아니었다.[23] James Bellah. 아버지가 할리우드 서부극 작가였다.[24] Isabelle Dreasemer.[25] the boy next door.[26] Immaculate Heart High School. "티없는 마음(Immaculate Heart)"은 성모 마리아의 성심을 가리킨다.[27] Immaculate Heart James Dean Appreciation Society.[28] Raymond Massey. 1896 – 1983.[29] Dennis Stock. 1928 – 2010.[30] Chateau Marmont.[31] Salinas.[32] 저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있었으나, 구급차에 실려가던 도중 의식을 잃고 숨졌다.[33] 딘의 대표작 <이유 없는 반항>의 촬영지이다.[34] 여성연기자는 1930년의 진 이글스(Jeanne Eagels)가 최초다. 1929년에 39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킴 노백이 1957년 동명의 전기 영화에서 진 이글스를 연기한 바 있다.[35] George Barris.[36] 다만 배리스의 주장은 과장이 많이 섞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37] Sandy Dennis.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38] Karen Black. <위대한 개츠비>(1974)로 골든 글로브를 수상한 바 있다.[39] 원래 이름은 페어마운트 역사 박물관(The Fairmount Historical Museum)이었고, 만화 가필드의 작가 짐 데이비스의 고향이기도 해서 딘에 국한된 역사 물품들만 전시한 공간은 아닌데, 대중들은 이를 무시하고 그냥 제임스 딘 박물관(The James Dean Museum)으로 불렀다. 결국 2022년에 정식으로 이름을 바꿨다. 고모네 가족들이 이것저것 대여해줘 딘 관련 물품 개수로는 세계 최대다.#
[40] James Dean Fan Club.[41] James Dean Memorial Rod Club.[42] 퀘이커 교도인 지역사회 대표들 vs 대중문화 소비자 vs 라이더로, 딘이라는 교집합 외엔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을 띤 무리들이라 서로 상대 집단들을 격렬히 싫어했다.[43] Bill Bast. 1931 - 2015.[44] Pier Angeli. '피어'는 영어권에서 통용되는 발음이고 출신지인 이탈리아어식으로 발음하면 '피에르'다.[45] 이는 가톨릭의 일상생활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당시 이탈리아의 시대상 때문이다. 일부 교회법이 민간의 법으로 그대로 작용해 이혼이 전면금지 됐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딘이 부모나 다름 없는 고모네와 퀘이커 공동체인 고향 전체를 배신하고 개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46] 미국도 당시엔 종교의 영향력이 지금에 비해 유별나긴 했지만 안젤리 본인이 아니라 어머니의 의지로 헤어진 것이고 미국과 이탈리아의 종교적 생활상에도 큰 차이가 있어 딘 사망 후 한국과 마찬가지로 안젤리의 어머니를 성토하는 분위기가 있었다.[47] 이 일화가 국내에선 와전되어 한국의 올드 시네필들 사이에선 <자이언트> 촬영 중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반한 제임스 딘이 그녀와의 교제를 허락해 줄 것을 테일러의 어머니에게 요구했지만, 집안 배경을 이유로(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Uptown Girl이다.) 거절당하고, 이 때문에 제임스 딘이 비관해 자동차 사고로 자살한 것이란 카더라 통신이 떠돌기도 했다.[48] Vic Damone.[49] Rocky Graziano.[50] Armando Trovajoli.[51] <혹성탈출>(리메이크판)을 비롯하여 할리우드에서 털복숭이 영화 분장으로는 둘도 없다는 특수분장전문가(아카데미 특수분장상을 7번이나 수상한 거물이다) 릭 베이커(1950- )가 바로 이 영화로 분장 데뷔(21살 때)했다. 영화 <그렘린 2>에 잠깐 나오는, 버스에서 문어인간이 나오고 촉수로 사람을 두들겨 패던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이다.[52] <에덴의 동쪽>(2016년 등재), <이유 없는 반항>(1990년 등재), <자이언트>(2005년 등재).[53] 일본 아이돌로 치면 일본 정통파 아이돌 유행의 끝을 불태우고 사라진 오카다 유키코와도 다소 비슷하다.[54] 비슷한 예로 음악적 천재성에 묻혀서 그렇지, 사고로 요절한 유재하 역시 친구의 음주운전 사실을 알고도 방관하고 음주운전자인 친구의 차에 같이 타고 다니다 사고가 난 것이다.[55] 공교롭게도 상술한 것처럼 제임스 딘 본인이 훗날 자동차 사고로 요절했다. 당시의 제임스 딘은 그저 자신의 앞니 두 개가 빠진 진짜 이유를 감추고 싶어했을 뿐이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의도치 않게나마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말을 했던 셈이다.[56] 이순재가 제임스 딘보다 3살 어리다.[57] Kenneth Anger. 1927-.[58] Liz Sheridan. 1929.4.10 – 2022.4.15[59]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이 〈라이언의 딸〉에 '제임스 딘과 닮았다.'라는 이유만으로 닮은꼴 크리스토퍼 존스를 캐스팅 한 건 꽤 유명한 일화다.[60] 대략 이 정도 닮았다.#
[40] James Dean Fan Club.[41] James Dean Memorial Rod Club.[42] 퀘이커 교도인 지역사회 대표들 vs 대중문화 소비자 vs 라이더로, 딘이라는 교집합 외엔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을 띤 무리들이라 서로 상대 집단들을 격렬히 싫어했다.[43] Bill Bast. 1931 - 2015.[44] Pier Angeli. '피어'는 영어권에서 통용되는 발음이고 출신지인 이탈리아어식으로 발음하면 '피에르'다.[45] 이는 가톨릭의 일상생활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당시 이탈리아의 시대상 때문이다. 일부 교회법이 민간의 법으로 그대로 작용해 이혼이 전면금지 됐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딘이 부모나 다름 없는 고모네와 퀘이커 공동체인 고향 전체를 배신하고 개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46] 미국도 당시엔 종교의 영향력이 지금에 비해 유별나긴 했지만 안젤리 본인이 아니라 어머니의 의지로 헤어진 것이고 미국과 이탈리아의 종교적 생활상에도 큰 차이가 있어 딘 사망 후 한국과 마찬가지로 안젤리의 어머니를 성토하는 분위기가 있었다.[47] 이 일화가 국내에선 와전되어 한국의 올드 시네필들 사이에선 <자이언트> 촬영 중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반한 제임스 딘이 그녀와의 교제를 허락해 줄 것을 테일러의 어머니에게 요구했지만, 집안 배경을 이유로(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Uptown Girl이다.) 거절당하고, 이 때문에 제임스 딘이 비관해 자동차 사고로 자살한 것이란 카더라 통신이 떠돌기도 했다.[48] Vic Damone.[49] Rocky Graziano.[50] Armando Trovajoli.[51] <혹성탈출>(리메이크판)을 비롯하여 할리우드에서 털복숭이 영화 분장으로는 둘도 없다는 특수분장전문가(아카데미 특수분장상을 7번이나 수상한 거물이다) 릭 베이커(1950- )가 바로 이 영화로 분장 데뷔(21살 때)했다. 영화 <그렘린 2>에 잠깐 나오는, 버스에서 문어인간이 나오고 촉수로 사람을 두들겨 패던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이다.[52] <에덴의 동쪽>(2016년 등재), <이유 없는 반항>(1990년 등재), <자이언트>(2005년 등재).[53] 일본 아이돌로 치면 일본 정통파 아이돌 유행의 끝을 불태우고 사라진 오카다 유키코와도 다소 비슷하다.[54] 비슷한 예로 음악적 천재성에 묻혀서 그렇지, 사고로 요절한 유재하 역시 친구의 음주운전 사실을 알고도 방관하고 음주운전자인 친구의 차에 같이 타고 다니다 사고가 난 것이다.[55] 공교롭게도 상술한 것처럼 제임스 딘 본인이 훗날 자동차 사고로 요절했다. 당시의 제임스 딘은 그저 자신의 앞니 두 개가 빠진 진짜 이유를 감추고 싶어했을 뿐이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의도치 않게나마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말을 했던 셈이다.[56] 이순재가 제임스 딘보다 3살 어리다.[57] Kenneth Anger. 1927-.[58] Liz Sheridan. 1929.4.10 – 2022.4.15[59]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이 〈라이언의 딸〉에 '제임스 딘과 닮았다.'라는 이유만으로 닮은꼴 크리스토퍼 존스를 캐스팅 한 건 꽤 유명한 일화다.[60] 대략 이 정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