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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6:53:54

윌리엄 프리드킨

윌리엄 프리드킨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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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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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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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윌리엄 프리드킨
WILLIAM FRIEDKIN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97년 8월 14일
위치 6925 Hollywood Blvd.
}}}}}}}}}}}} ||

}}} ||
<colbgcolor=#00001b><colcolor=#fff> 윌리엄 프리드킨
William Friedkin
파일:external/screen-space.squarespace.com/william-friedkin-publicity-photo-rome-1.jpg
출생 1935년 8월 29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사망 2023년 8월 7일[1] (향년 87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 엔젤레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직업 영화 감독
활동 기간 1962년 ~ 2023년
배우자 잔느 모로(1977년 ~ 1979년)
레슬리 앤 다운(1982년 ~ 1985년)
켈리 레인지(1987년 ~ 1990년)
셰리 랜싱(1991년 ~ 2023년)
자녀 아들 잭슨 프레드킨, 세드릭 프레드킨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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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영화들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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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영화감독. 1970년대를 풍미한 영화 감독 중 한 명이다.

2. 생애

일리노이시카고 출신으로 부모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유대인 이민자다.[2] 시카고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농구를 잘해서 프로 농구선수가 될 뻔 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범생은 아니라서 간신히 졸업할 정도의 성적만 받고 20세 때 2-3년제 전문대학을 졸업을 한 이후부터 방송국에서 수백~수천편의 TV쇼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한 윌리엄 프리드킨은 이렇게 몸으로 익힌 촬영 스타일을 바탕으로 프렌치 커넥션엑소시스트 등의 리얼한 장르 영화들을 만들어서 아카데미를 싹쓸이 하면서[3] 3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피터 보그다노비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과 함께 70년대 헐리웃의 기린아로 떠오르게 된다. 70년대 후반은 명실상부 프리드킨의 리즈 시절로, 젊은 거물이 되어 연예인에 가까운 삶을 사는 등(...)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쥘과 짐,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등에 나온 저명한 프랑스 배우 잔느 모로와 1977년에서 1979년까지 결혼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바닥이 그렇듯 마약 중독[4]과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결국, 엑소시스트 이후로 찍은 작품의 평가가 점점 안좋아지기 시작하더니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프랑스 걸작 ‘공포의 보수 (Le Salaire De La Peur/The Wages Of Fear, 1952)’를 리메이크한 <소서러>를 대차게 말아먹고 명성이 점점 묻히게 되었다. 이는 프리드킨의 개인적인 방탕함도 한 몫하지만, 그의 영화적 방법론인 대중적 장르와 다큐멘터리적 접근을 결합하는 것의 근본적인 한계였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점차 뉴 아메리칸 시네마와 누벨바그에서 시작한 자유롭고 파괴적인 영화 문법이 대중들에게도 익숙해지게 되었고, 프리드킨의 영화들이 더 이상 신선한 무언가가 아니게 된 것. 나름대로 적절하게 두 스타일이 조화된 엑소시스트까지 대히트를 쳤으나, 점점 권한이 커진 프리드킨은 막대한 제작비와 제작기간을 연장해가며 자기 맘대로 영화를 찍게 되었고, 대중들이 외면하면서 커리어는 바닥을 치게 된 것이다.[5] 프리드킨은 커리어 내내 어두운 에너지와 인간의 금기시된 광기를 주목하였는데(지금으로 치자면 나홍진 같은)[6], 이런 어둡고 음습한 에너지의 영화들이 점차 대중들에게 잘 먹히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 결국 프리드킨은 암흑의 8-90년대를 잊혀진 스타로 지내게 되고, 절치부심하여 자신의 정수만 모아 만든 근작 킬러조로 어느 정도 복귀하게 된다.

자기 작품 홈비디오 출시에 열정적인 감독으로 유명하다. 프렌치 커넥션 블루레이처럼 병크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음성 해설이라던가 인터뷰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편. 원래 자기 과시가 심한 감독이기도 했으나 나이 들어 자신의 화려한 리즈 시절(...)을 가감없이 고백하기도 한다. 자기와 잔 여배우만 몇백명이라거나 리스트를 모아놨다는 등...

2023년 8월 7일, 87세의 나이로 타계하면서 베니스 영화제 출품을 앞둔 케인호의 반란 군사재판이 그의 유작이 되었다.

3. 영화들

이후에 1994년에는 <블루 칩스>(국내 제목은 NBA 캠프)라는 샤킬 오닐 주연 농구 영화를 감독하여 실패했다. 이후 스릴러물인 <제이드> (1995)가 엄청난 악평[12]을 받으면서 제작비 5천만 달러에 월드와이드 수익은 고작 약 985만 달러를 벌어 크게 흥행에 실패하면서 휘청한다. 이후에 TV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 (1997)를 찍었고 호평을 받았다. 2000년대에 와서 찍은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 <헌티드>[13]는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그리고 저예산 심리 호러물 <버그> (2006)으로 돌아왔는데, 애슐리 주드와 마이클 섀넌의 연기가 큰 호평을 받았다. 제작비 400만 달러에 월드와이드 수익은 약 809만 달러로 흥행은 본전치기였다. 그리고 <CSI>의 에피소드 두 편(S08E09, S9E18)을 감독했다.

2014년 <트루 디텍티브> 시즌 2 에피소드 감독 논의로 닉 피졸라토와 만났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 2015년 매튜 매커너히, 월튼 고긴스 주연으로 돈 윈슬로의 소설 <프랭키 머신의 겨울> 영화화 감독으로 내정되어있었으나# 제작이 엎어졌다.

4. 여담



[1] 88세 생일을 22일을 남기고 사망했다.[2] 그의 아버지는 세미프로 소프트볼 선수이자 상선 대원, 남성복 판매원이었고, 어머니는 수술실 공인 간호사였다.[3] 특히 프렌치 커넥션은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 각색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4] 70년대 서양 연예계에서 마약은 거의 당연한 문제였지만...[5] 사실 이건 프리드킨만 그런게 아니라 동료 감독들도 비슷했다. 프리드킨은 그나마 최근작 킬러 조로 스타일 면에서는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한 편이었고, 피터 보그다노비치(1939~2022)나 할 애슈비, 제리 샤츠버그(1927~ ) 같은 감독들은 아무도 안 불러줄 정도로 몰락해버렸다.[6] # 나홍진은 윌리엄 프리드킨의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인터뷰했을 정도로, 프리드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이 인터뷰에서도 본인에게 자극을 준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을 정도. # 또한, 프랑스 매체에서도 나홍진의 곡성을 호평하면서 윌리엄 프리드킨을 언급했다. # 영화감독 박수민은 나홍진의 곡성과 프리드킨의 작품을 연관지었다.[7] 막판의 엔딩 및 여러 장면은 지금 봐도 뒤쳐지 않는 장면이다... 오죽하면 당시 이걸 본 이승만이 충격을 받아서 자르라우요! 이랬을까...[8] 애초에 프리드킨부터가 원작을 능가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단다. 원작의 감독인 앙리-조르주 클루조를 만나 리메이크 계획을 밝힌 다음 "하지만 감독님 작품만큼 잘 만들지는 못할 겁니다."라고 말했다고.[9] 제작비가 2200만 불인데 전 세계 흥행은 500만 불에 불과했다! 참고로 같은 해(1977년)에 개봉한 스타 워즈 제작비가 800만 불이었다![10] 당초 리처드 기어가 주인공역을 맡으려 했으나 70년대를 제패하다 시피했던 알 파치노가 흥미를 보이면서 기어는 밀려나게 되었다. 프리드킨은 캐스팅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현재는 파치노의 연기에 만족한다고 밝힌바 있다.[11] 다만 로저 에버트만점을 줬다.[12] 샌프란시스코 카체이싱 장면은 호평을 받았지만, 영화를 뒤집을 만큼 호평을 받지 않았다.[13] 흥행실패에 평은 안 좋았지만,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4점 만점에 별 3.5개를 주며 윌리엄 프리드킨의 긴박한 연출을 칭찬했다. 그 외에 베니시오 델 토로토미 리 존스의 날것에 가까운 나이프 파이팅 장면이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