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7 09:04:40

레오 맥캐리

리오 맥캐리의 주요 수상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oscar_logo.svg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
'''[[틀: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Academy Award for Best Director]]'''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000,#e5e5e5
제1회
(1929년)
제2회
(1930년)
제3회
(1931년)
제4회
(1932년)
제5회
(1933년)
코미디:
루이스 마일스톤
(미인국 2인 행각)
드라마:
프랭크 보제이지
(제7의 천국)
프랭크 로이드
(정염의 미녀)
루이스 마일스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노먼 터로그
(스키피)
프랭크 보제이지
(나쁜 여자)
제6회
(1934년)
제7회
(1935년)
제8회
(1936년)
제9회
(1937년)
제10회
(1938년)
프랭크 로이드
(캐벌케이드)
프랭크 카프라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존 포드
(밀고자)
프랭크 카프라
(천금을 마다한 사나이)
레오 맥캐리
(이혼 소동)
제11회
(1939년)
제12회
(1940년)
제13회
(1941년)
제14회
(1942년)
제15회
(1943년)
프랭크 카프라
(우리 집의 낙원)
빅터 플레밍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존 포드
(분노의 포도)
존 포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윌리엄 와일러
(미니버 부인)
제16회
(1944년)
제17회
(1945년)
제18회
(1946년)
제19회
(1947년)
제20회
(1948년)
마이클 커티즈
(카사블랑카)
레오 맥캐리
(나의 길을 가련다)
빌리 와일더
(잃어버린 주말)
윌리엄 와일러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엘리아 카잔
(신사협정)
제21회
(1949년)
제22회
(1950년)
제23회
(1951년)
제24회
(1952년)
제25회
(1953년)
존 휴스턴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
조셉 L. 맨키위즈
(세 부인)
조셉 L. 맨키위즈
(이브의 모든 것)
조지 스티븐스
(젊은이의 양지)
존 포드
(말 없는 사나이)
제26회
(1954년)
제27회
(1955년)
제28회
(1956년)
제29회
(1957년)
제30회
(1958년)
프레드 진네만
(지상에서 영원으로)
엘리아 카잔
(워터프론트)
델버트 만
(마티)
조지 스티븐스
(자이언트)
데이비드 린
(콰이 강의 다리)
제31회
(1959년)
제32회
(1960년)
제33회
(1961년)
제34회
(1962년)
제35회
(1963년)
빈센트 미넬리
(지지)
윌리엄 와일러
(벤허)
빌리 와일더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로버트 와이즈
제롬 로빈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데이비드 린
(아라비아의 로렌스)
제36회
(1964년)
제37회
(1965년)
제38회
(1966년)
제39회
(1967년)
제40회
(1968년)
토니 리차드슨
(톰 존스의 화려한 모험)
조지 큐커
(마이 페어 레이디)
로버트 와이즈
(사운드 오브 뮤직)
프레드 진네만
(사계절의 사나이)
마이크 니콜스
(졸업)
제41회
(1969년)
제42회
(1970년)
제43회
(1971년)
제44회
(1972년)
제45회
(1973년)
캐럴 리드
(올리버!)
존 슐레진저
(미드나잇 카우보이)
프랭클린 J. 샤프너
(패튼 대전차군단)
윌리엄 프리드킨
(프렌치 커넥션)
밥 포시
(카바레)
제46회
(1974년)
제47회
(1975년)
제48회
(1976년)
제49회
(1977년)
제50회
(1978년)
조지 로이힐
(스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대부 2)
밀로스 포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존 G. 아빌드센
(록키)
우디 앨런
(애니 홀)
제51회
(1979년)
제52회
(1980년)
제53회
(1981년)
제54회
(1982년)
제55회
(1983년)
마이클 치미노
(디어 헌터)
로버트 벤튼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로버트 레드포드
(보통 사람들)
워렌 비티
(레즈)
리처드 애튼버러
(간디)
제56회
(1984년)
제57회
(1985년)
제58회
(1986년)
제59회
(1987년)
제60회
(1988년)
제임스 L. 브룩스
(애정의 조건)
밀로스 포먼
(아마데우스)
시드니 폴락
(아웃 오브 아프리카)
올리버 스톤
(플래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마지막 황제)
제61회
(1989년)
제62회
(1990년)
제63회
(1991년)
제64회
(1992년)
제65회
(1993년)
배리 레빈슨
(레인 맨)
올리버 스톤
(7월 4일생)
케빈 코스트너
(늑대와 춤을)
조나단 드미
(양들의 침묵)
클린트 이스트우드
(용서받지 못한 자)
제66회
(1994년)
제67회
(1995년)
제68회
(1996년)
제69회
(1997년)
제70회
(1998년)
스티븐 스필버그
(쉰들러 리스트)
로버트 저메키스
(포레스트 검프)
멜 깁슨
(브레이브 하트)
안소니 밍겔라
(잉글리쉬 페이션트)
제임스 카메론
(타이타닉)
제71회
(1999년)
제72회
(2000년)
제73회
(2001년)
제74회
(2002년)
제75회
(2003년)
스티븐 스필버그
(라이언 일병 구하기)
샘 멘데스
(아메리칸 뷰티)
스티븐 소더버그
(트래픽)
론 하워드
(뷰티풀 마인드)
로만 폴란스키
(피아니스트)
제76회
(2004년)
제77회
(2005년)
제78회
(2006년)
제79회
(2007년)
제80회
(2008년)
피터 잭슨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클린트 이스트우드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안
(브로크백 마운틴)
마틴 스코세이지
(디파티드)
조엘 코엔
에단 코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제81회
(2009년)
제82회
(2010년)
제83회
(2011년)
제84회
(2012년)
제85회
(2013년)
대니 보일
(슬럼독 밀리어네어)
캐스린 비글로
(허트 로커)
톰 후퍼
(킹스 스피치)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아티스트)
이안
(라이프 오브 파이)
제86회
(2014년)
제87회
(2015년)
제88회
(2016년)
제89회
(2017년)
제90회
(2018년)
알폰소 쿠아론
(그래비티)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버드맨)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데이미언 셔젤
(라라랜드)
기예르모 델 토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제91회
(2019년)
제92회
(2020년)
제93회
(2021년)
제94회
(2022년)
제95회
(2023년)
알폰소 쿠아론
(로마)
봉준호
(기생충)
클로이 자오
(노매드랜드)
제인 캠피온
(파워 오브 도그)
다니엘 콴
다니엘 샤이너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제96회
(2024년)
제97회
(2025년)
제98회
(2026년)
제99회
(2027년)
제100회
(2028년)
크리스토퍼 놀란
(오펜하이머)
----
}}}}}}}}}}}}}}}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원안상
제16회
(1944년)
제17회
(1945년)
제18회
(1946년)
윌리엄 서로이언
(더 휴먼 코미디)
리오 맥캐리
(나의 길을 가련다)
찰스 G. 부스
(92번가의 집)

}}} ||
<colbgcolor=#000><colcolor=#fff> 레오 맥캐리
Leo McCarey
파일:Leo-McCarey.png
본명 토머스 리오 맥캐리
Thomas Leo McCarey
출생 1898년 10월 3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사망 1969년 7월 5일 (향년 70세)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직업 각본가, 감독, 프로듀서
영화 데뷔 1928년, 'The Tonic'
정당

종교 가톨릭
맥캐리는 할리우드의 어느 누구보다 인간을 잘 이해하고 있다.
- 장 르누아르[1]

1. 개요2. 생애3. 기타4. 작품

[clearfix]

1. 개요

<나의 길을 가련다>, <이혼 소동>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감독.

2. 생애

189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가톨릭 신자였으며, 맥캐리 또한 가톨릭 신자로 자라났다. 학교를 졸업한 후 맥캐리는 복싱 선수, 변호사, 광산 사업가, 작곡가 등 여러 직업에 손댔지만, 딱히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919년 토드 브라우닝[2]의 조감독으로서 파라마운트 글로벌에서 영화계 일을 시작하게 된다.

초기에는 로렐과 하디해롤드 로이드 등을 주연으로 한 코미디 영화들을 주로 감독했으며, 이 시기 그가 만든 영화들은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유성 영화의 시대가 온 이후로 그의 작품의 다양성은 더욱 커져갔다. 그러던 중 1937년 그는 <내일을 위한 길>을 감독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전의 맥캐리 영화들에 비하면 몹시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였고, 흥행에도 실패한다. 심지어 파라마운트 글로벌은 흥행 참패를 이유로 그를 해고하기까지 한다.

다행히도, 그가 다음으로 찍은 스크루볼 코미디 영화인 <이혼 소동>은 흥행 성적에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맥캐리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기까지 한다. 이후로도 <나의 길을 가련다>나 <러브 어페어> 등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을 거두어 맥캐리는 일류 감독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1945년 이후 맥캐리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으며, 그의 작품 세계도 이전에 비해 살짝 냉소적으로 변한다. 실제로 그는 1945년 이후 고작 5편의 작품밖에 발표하지 못한다. 1962년 <사탄은 잠들지 않는다>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맥캐리는 1969년 세상을 떠난다.

3. 기타

세련된 패션, 말투, 매너를 지니고 있었다. 케리 그랜트가 교본으로 삼고 따라했다고 한다.
파일:Leo_McCarey.jpg

맥캐리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자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으며, 이러한 그의 정체성은 그의 영화 이곳저곳에서 드러난다. 특히나 가톨릭 교회는 그의 많은 영화에서 배경으로 등장한다.

현장에선 상당히 즉흥적인 편이었다고 한다. 피아노를 치면서 즉석에서 장면들을 구상해냈다고... 맥캐리와 <나의 길을 가련다>와 <성 메리 성당의 종>에서 함께 작업했던 가수이자 배우인 빙 크로스비는 약 75%의 장면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가톨릭적 정체성 때문인지 반공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나의 아들 존>이나 유작인 <사탄은 잠들지 않는다>가 대표적.

자신의 영화 가운데서는 <내일을 위한 길>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이혼 소동>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훗날 "<내일을 위한 길>에 주어졌어야 할 상이 잘못된 작품에 주어졌다"라고 했을 정도.

프랭크 카프라,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장 르누아르 등과 같은 감독들이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그의 <내일을 위한 길>을 몹시 좋아하였다고 한다.[3]

다만 사후 한국 인지도는 존 포드하워드 혹스, 앨프리드 히치콕보다 확실히 떨어진다. 직접 리메이크한 어페어 투 리멤버가 한국 개봉 이후 추억의 영화로 사랑받았지만 반대로 이혼 소동이나 내일을 위한 길 같은 이전 대표작은 잘 언급되지 않아 전반적으로 감독보다는 한 편으로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비슷한 상황.

4. 작품



[1] 출처[2] 드라큘라프릭스 등 고전 호러 영화들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감독.[3] <내일을 위한 길>은 오즈의 <동경이야기>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4]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색상, 원안상, 주제가상 수상[5] <나의 길을 가련다>의 후속작.[6] 1939년작 <러브 어페어>의 리메이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