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로이드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
<colbgcolor=#000><colcolor=#ffffff> 해럴드 로이드 Harold Lloyd | |
본명 | 해럴드 클레이턴 로이드 시니어 Harold Clayton Lloyd Sr |
출생 | 1893년 4월 20일 |
미국 네브래스카 주 버처드 | |
사망 | 1971년 3월 8일 (향년 77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8cm |
직업 | 배우, 코미디언, 스턴트맨, 프로듀서 |
활동 | 1913년 ~ 1937년, 1944년 ~ 1963년 |
배우자 | 밀드레드 데이비스(1923년 결혼 ~ 1969년 사별) |
자녀 | 3명 |
서명 |
[clearfix]
1. 개요
본명은 해럴드 클레이턴 로이드(Harold Clayton Lloyd). 별명은 스피디(Speedy).1893년 4월 20일 ~ 1971년 3월 8일. 미국의 코미디 영화배우, 프로듀서.
2. 상세
1893년 4월 20일 네브래스카 주 버처드에서 태어났다. [1] 부모님은 웨일스계였다고 한다. 로이드의 아버지는 사업을 연이어 실패했고 고압적인 성격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계속해서 충돌한 끝에 결국에는 1910년 이혼을 하게된다.부모님의 이혼 후, 집에서 독립하여 각종 허드렛일을 하면서 먹고 살던 해럴드 로이드는 1912년 토머스 에디슨의 영화특허회사(MPPC)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하였고 곧, 할리우드가 세워지자 1913년에 할리우드 최초의 코미디 전문 제작소인 멧 세넷((Mack Sennett)의 키스턴 프로덕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배우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해럴드 로이드는 키스턴 프로덕션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유니버설 픽처스의 영화들에서도 각종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1915년, 무명 생활에 지쳐서 키스턴 프로덕션을 나온 해럴드 로이드는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알게 된 동료 배우 핼 로치와 함께 영화 스튜디오를 만들고 핼 로치 제작, 감독[2] / 해럴드 로이드, 비비 대니얼스[3], 스넙 폴러드[4] 주연이라는 협업 체계를 구축하여 본격적으로 주연으로 데뷔하게 된다. 배우 생활 초기에 로이드는 '항상 남들에게 당하는 불운한 사나이'라는 컨셉을 가진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라는 캐릭터로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외톨이 루크의 외모가 찰리 채플린의 방랑자(The Tramp) 캐릭터의 외모와 지나치게 유사하였기 때문에 채플린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게 되자 [5][6] 1917년부터는 동그란 뿔테안경과 모자를 쓴 청년이라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둥그란 뿔테안경은 해럴드 로이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으며[7] 로이드가 평상시에는 안경을 쓰지 않고 생활한 것에서 만화가들이 영감을 얻어 슈퍼맨이 클라크 켄트로 변장하는 설정이 만들어졌다.
1919년, 해럴드 로이드는 비비 대니얼스와 헤어지고 새 여주인공으로 밀드레드 데이비스[8]를 발탁했다. 1919년 8월 24일, 해럴드가 영화 촬영 중 수류탄 오발 사고를 당하여 오른손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잃고 우울증에 빠졌을 때 밀드레드가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9] 마침내 1923년 2월 10일 결혼했다. 밀드레드는 결혼 후 해럴드의 요구를 받아들여 배우업에서 은퇴했고 둘의 결혼 직후 촬영한 영화인 Why Worry(1923)부터 1927년 1월 17일에 개봉한 해럴드 로이드의 마지막 무성영화 The Kid Brother까지 그의 영화의 여주인공은 조비나 랠스턴[10]이 맡았다. 해럴드 로이드가 최초로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시험한[11] 영화 Speedy부터는 다양한 여배우들을 여주인공으로 기용하였다.
그의 주된 코미디 스타일은 버스터 키튼과 비슷하게 몸개그로 웃기는 것이다. 단, 두 사람의 스타일은 좀 다른데 버스터 키튼은 계단에서 넘어져서 구르거나 무언가에 발이 걸려서 엉덩방아를 찧는 등 박진감 넘치는 스턴트를 주로 선보였고 해럴드 로이드는 자동차 뒷편에 매달려있거나 높은 건물의 벽을 기어오르는 등 긴장감 넘치는 스턴트를 주로 선보였다. 로이드는 자신의 스턴트를 '스릴 시퀀스(thrill sequence)'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해럴드 로이드가 선보인 스턴트 중 가장 대표적인 <마침내 안전!>에서 등장한 시계탑 시퀀스. 해당 장면은 성룡의 프로젝트 A와 백 투 더 퓨처에서 오마주되었다.[12] 성룡에게 버스터 키튼이 큰 영향을 주었지만, 로이드 역시 만만치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폴리스 스토리에서 성룡이 버스에 매달려가는 장면 역시 로이드가 직접 스턴트를 맡은 무성영화 Girl Shy(1924)를 참고한 것이고 성룡의 미라클에서 밧줄 타고 올라가려다가 밧줄이 떨어지는 통에 떨어지는 밧줄을 잡고 안 떨어지려고 하던 장면 또한 로이드가 찍은 영화에서 나온 것을 따라한 수준이다. 로이드는 소방차에 매달리다가 소방차 뒤에 있는 밧줄을 잡고 도로에서 저렇게 한다든지 마침내 안전!에서도 나오듯이 밧줄을 이용한 개그씬을 꽤 자주 등장시켰다.
이외에도 해럴드 로이드는 주인공에게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예측불허의 고난이 계속된다는 스토리 작법을 영화계에 최초로 선보이고 유행시킨 코미디언이었다. 참고로 로이드는 자신의 영화를 크게 "character story"와 "gag film" 두 가지로 나누어서 분류하였다.
1919년 8월 24일 해럴드 로이드는 <Hauted Spocks>라는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수류탄 오발 사고로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잃었고 손가락을 잃은 이후부터는 오른손 모양을 한 특수장갑을 끼고 생활하였다. 사고 이후 로이드는 영화를 촬영할 때면 안전 장치를 꼼꼼히 준비한 것은 물론, 당시 개발되어 있는 각종 특수 효과를 총동원했다.
일례로 위의 시계탑 시퀀스는 이렇게 찍었다. 이 사진은 3D로 재현한 세트장 모습이며 실제 촬영장 사진을 보면 촬영 중 실수로 침대 시트 바깥에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건물 바닥 전체에 안전장치를 해두었다.
해럴드 로이드는 매우 부지런하고 영리한 배우로 유명했고 실제로 사업 수완도 뛰어났다. 특히 할리우드의 영화 배우들 중에서 저작권의 중요성을 최초로 인식한 인물들 중 하나였던 해럴드 로이드는 1924년부터 핼 로치와 결별하여 자신의 영화사를 설립해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13] 자신의 영화사를 설립한 후, 해럴드는 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극장에 개봉하기 전 미리 영화를 공개,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서 평가가 안 좋은 부분의 촬영과 편집을 다시하는 프리뷰(시사회) 시스템을 영화계에 정립시켰다.
매해 꾸준히 작품을 내며 1920년대까지 최고의 코미디 스타로 활약하던 해럴드 로이드는 1930년대에 들어서도 활동을 지속했으나 1927년 10월 개봉한 재즈 싱어로 유성 영화의 시대가 열리고 1929년의 경제 대공황까지 발생함에 따라 관객들의 취향이 완전히 달라져서 해럴드 로이드의 안경을 쓴 도시 청년 캐릭터는 더 이상 공감을 얻지 못했다. 로이드는 정치 풍자 요소가 담긴 <The Cat's-Paw(1934)>, 당시 유행하던 스크루볼 코미디[14] 인 <The Milky Way(1936)> 등의 영화를 통해 나름대로 30년대의 시대상에 맞게 자신의 캐릭터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영화들이 계속 흥행에 실패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조짐까지 보이자 1937년 3월 23일, 자신의 영화 스튜디오를 팔고 영화계에서 은퇴를 선언, 라디오를 통해 복귀하기까지 베벌리힐스에 위치한 자신의 대저택 Greenacres에서 자선 활동 및 사진 작가[15]로 소일하면서 지낸다. 또한, 로이드는 영상 기술에 큰 관심을 가져서 테크니컬러와 3D 영화 기술의 연구 비용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해럴드 로이드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없다는 자신의 신체 콤플렉스 때문에 자선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최초의 할리우드 배우들 중 한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해럴드 로이드는 프리메이슨 단원이다 ." 라는 소문이 생겼을 정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전성기를 이륙한 라디오 방송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느낀 해럴드 로이드는 1944년 10월부터 1945년 6월까지 라디오 코미디 쇼 The Old Gold Comedy Theater[16]의 감독 겸 메인 MC를 맡으며 영화 배우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라디오 방송에 고정 출연해서 큰 성공을 거둔다. 그 후 로이드는 적극적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무성 영화 시절의 동료 배우들에게도 라디오 방송 출연을 강력하게 권유하였다. 그러나 영화계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라디오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칠 것'이라면서 출연에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1951년부터 TV 방송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자 해럴드 로이드는 라디오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여러 TV 쇼에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고 동시에 자신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무성 영화들[17]에 소리를 입혀서 TV로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무성 영화의 재발굴에 기여하였다. 다만 해럴드 로이드 본인이 출연했던 영화들은 해럴드가 방송국에 너무 많은 로열티를 요구하여 TV에서 방영되지 못했다. 일부 영화들은 1962년 해럴드 로이드 자신이 직접 재편집하여 극장에서 재개봉하였다.
해럴드 로이드는 무성영화의 시대를 지배했던 3대 코미디 배우들 중 가장 말년을 평온하게 보냈다. 한창 코미디 스타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할리우드에서 가장 출연료를 많이 받는 코미디 배우였던데다가 영화계를 은퇴한 이후 사업에서도 승승장구하면서 그야말로 역대급 부자가 된 덕분. 사생활도 평온해서 아내와 잉꼬부부로 잘 살았다. 아내 밀드레드는 1969년에 사망했고 로이드도 아내의 죽음 후 2년 뒤에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찰리 채플린은 그놈의 매카시즘 때문에 말년 대부분을 피곤하게 보내야 했고, 버스터 키튼은 경제적으로 제대로 몰락했다는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인생의 승리자.
현역시절 채플린이나 키튼에 비해 돈을 많이 번 데는 다작도 한 몫 한다. 실제로 로이드와 채플린이 각자 1920년대 발표한 장편 영화들의 흥행을 비교하면 이런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해럴드 로이드 | 찰리 채플린 |
A Sailor-Made Man (1921) $485,285 Grandma's Boy (1922) $975,623 Doctor Jack (1922) $1,275,423 Safety Last (1923) $1,588,545 Why Worry (1923) $1,476,254 Girl Shy (1924) $1,550,000 Hot Water (1924) $1,350,000 The Freshman (1925) $2,651,167 For Heaven's Sake (1926) $2,591,460 The Kid Brother (1927) $2,403,130 Speedy (1928) $2,287,798 | The Kid (1921) $2,500,000 A Woman of Paris (1923) $634,000 Gold Rush (1925) $4,250,000 Circus (1928) $3,800,000 |
로이드가 영화를 꾸준히 뽑아내며 계속 안타를 쳐냈다면 채플린은 큰 홈런 한 방을 노렸다고 볼 수 있다. 키튼도 채플린도 본인 작품 수가 백 편을 못 넘는데 이 사람은 혼자 200편을 찍었다.
3. 후세의 평가
현역시절에는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과 동등한 인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두 사람보다 묻혔다. 월간 키노나 스크린, 로드쇼 같은 90년대를 풍미한 국내 영화지에선 채플린이나 키튼은 종종 상세하게 소개하는 반면, 해럴드 로이드에 대하여 소개한 게 거의 없을 정도이다. 해외 평론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현재 평론가들의 해럴드 로이드에 대한 평가는 대략 신(채플린)과 우주(키튼)의 싸움에 낀 인간류 최강(로이드) 정도. 그나마 로이드는 인간류 최강 소리라도 듣지 전성기엔 저 셋에 버금간 유성 영화 시기의 막스 형제는 훨씬 심하게 묻혔다.로저 이버트는 채플린, 키튼, 로이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채플린은 완벽주의자였고, 키튼은 꿈 꾸는 사람[18]이었으며, 로이드는 사업가였다."
해럴드 로이드가 채플린이나 키튼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서 이유로는 주로 이 세 가지가 제시된다.
- 첫째,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에 비해 해럴드 로이드의 캐릭터는 단순했다.
- 둘째, 해럴드 로이드는 '감독'이 아닌 '배우'와 '프로듀서'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중요시했기에 영화의 예술성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평론가들에게 박한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로이드의 영화 크레딧을 보면 당대 할리우드 스타들처럼 직접 각본이나 감독을 맡아서 영화를 만들기보다는 각 분야의 전문인들을 고용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해럴드 로이드는 MGM의 프로듀서 어빙 솔버그와 함께 오늘날의 할리우드 시스템을 확립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 셋째, 해럴드 로이드는 1924년 독립 스튜디오를 세운 뒤부터 자신의 출연작들을 전부 직접 관리했으며 1937년 영화계에서 완전히 은퇴할 때 원본 필름들을 모조리 수거해서 저택 창고에 보관했다.[19] 다시 말해서, 대다수 영화팬이나 영화학도들은 그의 영화를 볼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상태였다. 심지어 그 유명한 로저 이버트조차 해럴드 로이드의 영화들이 DVD로 발매된 후에야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다행인 점은 덕분에 필름들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제작 년도가 오래된 영화로 갈수록 필름 관리를 제대로 하지않아, 재수가 없으면 아예 필름이 사라져서 볼 수 없는 영화들도 많다.(한국만 해도 90년대 영화 중 필름 상태가 엉망인 영화들이 많다.) 로이드는 자신이 출연한 작품의 필름을 엄격히 관리했기 때문에 리마스터링에 필요한 자금이 충분하다면 개봉 당시보다 더 좋은 화질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20] 판권 문제로 필름이 사방팔방 흩어져 복원하기 힘들기로 악명높은 버스터 키튼과 대조되는 상황. 로이드 사후에는 UCLA 필름 & 영화 보관소에서 필름을 관리하고 있다.
그래도 DVD 시대부터 로이드의 영화들이 DVD로 재발매되기 시작하면서 그럭저럭 재평가되고 있는 추세이긴 하다. 로이드의 대표작인 마침내 안전!(1923) 같은 경우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나오기도 했고 The Freshman (1925)은 American Film Institute recognition이 2000년도에 뽑은 100년 동안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들 중 가장 웃긴 영화 100편 중 7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4. 기타
- 늦게 낳은 외아들인 해럴드 로이드 주니어는 배우와 가수로 데뷔했으나 동성애자였던데다 알코올 중독 문제로 트러블을 일으켰고, 로이드는 아들인 그를 최대한 감싸줬으나 아들의 폭주를 버티지 못해 종종 구타했다고 한다. 그는 1965년 뇌졸중으로 활동 중단 뒤 아버지가 죽은 지 3개월 뒤인 1971년 6월 9일 40살에 세상을 떠났다.
- 워낙 성공한 스타였고 돈도 잃지 않았기에 1928년부터 살고 있던 저택 그린에이커스도 장난 아니게 으리으리했다고 한다. 로이드 사후 일부 부지는 재개발되었으나 저택과 근처 부지는 남아 여러 사람 손을 거쳐갔다. 198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메리 픽포드가 살던 픽페어하고 가까웠다고 한다.
[1] 이를 반영해 마침내 안전!에서는 네브래스카 주 옆인 캔자스주 그레이트 밴드 출신으로 설정되기도 했다.[2] 로치는 배우로 활동하는 동시에 에세네이 영화사에서 감독일을 배우고 있었다. 참고로 핼 로치는 1992년에 만 100살 장수를 누리고 눈을 감았다.[3] Bebe Daniels (1901년 1월 14일 ~ 1971년 3월 16일) 1915년부터 1919년까지 해럴드 로이드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배우. 실제로 두 사람은 연인 관계였고 할리우드의 The Boy, The Girl로 불리면서 대중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19년, 정극 연기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해럴드 로이드와 헤어졌다. 이후 그녀는 특히, 뮤지컬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1971년 사망할 때까지 총 230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4] 호주 출신의 조연 전문 배우로 특유의 카이저 수염으로 유명했으며 1915년부터 1919년까지 해럴드 로이드가 주연인 영화에서 감초 역할을 수행했다. 조연 배우로서 나름 인기를 얻어서 핼 로치가 폴러드가 단독 주연인 영화 <It's a Gift>를 찍기도 했다. 두번째 아내와 결혼한 직후인 1923년 고향인 호주로 돌아가면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5]
당시 모습이 이렇다.[6] 해럴드 로이드는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 시절을 흑역사로 여겼기에 영화계에서 은퇴하며 자신이 찍은 원본 필름들을 모조리 수거해서 저택 창고에 보관했을 때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 영화들은 수거하지 않았고 덕분에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 영화들은 몇 몇 작품들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7] 현재 로이드가 나온 영화에 대한 판권을 가진 해럴드 로이드 엔터테인먼트 로고부터도 뿔테안경이고 지금도 그가 즐겨 썼던 동그란 뿔테안경은 '로이드 안경'이라고 불린다.[8] Mildred Davis (1901년 2월 22일 ~ 1969년 8월 18일)[9] 해럴드 로이드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 밀드레드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마치 프렌치 푸들마냥 귀여워서 마음에 들었고 그녀와 영화 촬영을 하면 할 수록 그녀에게 빠져들었다고 한다.[10] Jobyna Ralston (1899년 11월 21일 ~ 1967년 1월 22일) 랠스턴은 로이드와의 협업이 종료된 후에도 1929년에 열린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전쟁 영화 날개(1927)에 실비어 역으로 출연하는 등 커리어를 이어가다가 유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1930년 영화계를 은퇴하였다.[11] 비록 영화는 전반적으로 무성영화이지만 오케스트라로 배경음악을 녹음해서 영화에 삽입했고 3번의 대화 장면에서도 음성이 들어갔다.[12] 에밋 브라운 박사의 연구실에 진열된 시계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대놓고 시계에 매달린 해럴드 로이드 선생이 나온다.[13] 로치는 이미 아워 갱 시리즈를 제작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로이드의 독립에 대해 그다지 불만을 품지 않았다고 한다.[14]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에 유행했던 코믹극의 한 종류.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장르로 두 남녀가 만나 우여곡절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이야기에, 희극적이고 재치있는 대사를 더한 코믹극을 말한다.[15] 사진 작가로서의 해럴드 로이드는 여성의 나체를 아름답게 찍는 것으로 유명했다. 로이드는 모델 베티 페이지, 스트리퍼 딕시 에반스 등의 누드 사진을 찍은 후 이를 성인 잡지에 팔아서 큰 소득을 올렸다. 그가 찍은 수영복을 입은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마릴린 먼로 사후에 공개되기도 하였다.[16] 브로드웨이에서 상연했던 희극이나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를 30분짜리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하여 송출한 라디오 코미디 쇼.[17] 해럴드 로이드는 저작권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아서 배우 시절부터 인기리에 상영되던 영화들 중 판권이 명확하지 않던 작품들의 소유권을 사들여서 돈을 벌고 있었다.[18] 긍정적인 의미로 쓴 표현이다. 이버트도 다른 평론가들처럼 채플린과 키튼을 무성영화시대 최고의 인물로 꼽았다.[19] 로이드는 이렇게 수거한 필름들을 자신의 저택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에게 가끔 보여주는 걸 낙으로 삼았다.[20] 실제로 로이드 영화 복원판/블루레이는 그 시절 영화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좋은 화질을 자랑한다. 화질 평점도 매우 높다.
당시 모습이 이렇다.[6] 해럴드 로이드는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 시절을 흑역사로 여겼기에 영화계에서 은퇴하며 자신이 찍은 원본 필름들을 모조리 수거해서 저택 창고에 보관했을 때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 영화들은 수거하지 않았고 덕분에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 영화들은 몇 몇 작품들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7] 현재 로이드가 나온 영화에 대한 판권을 가진 해럴드 로이드 엔터테인먼트 로고부터도 뿔테안경이고 지금도 그가 즐겨 썼던 동그란 뿔테안경은 '로이드 안경'이라고 불린다.[8] Mildred Davis (1901년 2월 22일 ~ 1969년 8월 18일)[9] 해럴드 로이드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 밀드레드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마치 프렌치 푸들마냥 귀여워서 마음에 들었고 그녀와 영화 촬영을 하면 할 수록 그녀에게 빠져들었다고 한다.[10] Jobyna Ralston (1899년 11월 21일 ~ 1967년 1월 22일) 랠스턴은 로이드와의 협업이 종료된 후에도 1929년에 열린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전쟁 영화 날개(1927)에 실비어 역으로 출연하는 등 커리어를 이어가다가 유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1930년 영화계를 은퇴하였다.[11] 비록 영화는 전반적으로 무성영화이지만 오케스트라로 배경음악을 녹음해서 영화에 삽입했고 3번의 대화 장면에서도 음성이 들어갔다.[12] 에밋 브라운 박사의 연구실에 진열된 시계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대놓고 시계에 매달린 해럴드 로이드 선생이 나온다.[13] 로치는 이미 아워 갱 시리즈를 제작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로이드의 독립에 대해 그다지 불만을 품지 않았다고 한다.[14]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에 유행했던 코믹극의 한 종류.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장르로 두 남녀가 만나 우여곡절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이야기에, 희극적이고 재치있는 대사를 더한 코믹극을 말한다.[15] 사진 작가로서의 해럴드 로이드는 여성의 나체를 아름답게 찍는 것으로 유명했다. 로이드는 모델 베티 페이지, 스트리퍼 딕시 에반스 등의 누드 사진을 찍은 후 이를 성인 잡지에 팔아서 큰 소득을 올렸다. 그가 찍은 수영복을 입은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마릴린 먼로 사후에 공개되기도 하였다.[16] 브로드웨이에서 상연했던 희극이나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를 30분짜리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하여 송출한 라디오 코미디 쇼.[17] 해럴드 로이드는 저작권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아서 배우 시절부터 인기리에 상영되던 영화들 중 판권이 명확하지 않던 작품들의 소유권을 사들여서 돈을 벌고 있었다.[18] 긍정적인 의미로 쓴 표현이다. 이버트도 다른 평론가들처럼 채플린과 키튼을 무성영화시대 최고의 인물로 꼽았다.[19] 로이드는 이렇게 수거한 필름들을 자신의 저택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에게 가끔 보여주는 걸 낙으로 삼았다.[20] 실제로 로이드 영화 복원판/블루레이는 그 시절 영화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좋은 화질을 자랑한다. 화질 평점도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