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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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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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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f> 1884 1885~1886 1887 1888 1889
샘 킴버 존 하킨스 헨리 포터 밥 카루더스 미키 휴즈
<rowcolor=#fff> 1890 1891 1892 1893 1894~1896
밥 카루더스 조지 헤밍 데이브 푸츠 에드 스테인 브릭야드 케네디
<rowcolor=#fff> 1897 1898~1900 1901~1902 1903 1904~1905
할리 페인 브릭야드 케네디 빌 도노반 헨리 슈미트 오스카 존스
<rowcolor=#fff> 1906 1907 1908 1909 1910
해리 맥인타이어 엘머 스트릭렛 냅 루커 카이저 윌헬름 냅 루커
<rowcolor=#fff> 1911 1912~1913 1914 1915 1916
사이 바거 냅 루커 에드 로일백 제프 페퍼 래리 체니
<rowcolor=#fff> 1917 1918 1919~1921 1922~1924 1925
위저 델 루브 마쿼드 레온 카도어 더치 루더 대지 밴스
<rowcolor=#fff> 1926~1928 1929~1930 1931 1932 1933
제시 페티 와티 클락 잭 퀸 웨이트 호이트 와티 클락
<rowcolor=#fff> 1934~1935 1936 1937~1938 1939 1940~1941
밴 먼고 조지 언쇼 밴 먼고 레드 에반스 위트 와이엇
<rowcolor=#fff> 1942 1943 1944 1945 1946
커트 데이비스 에드 헤드 할 그렉 커트 데이비스 할 그렉
<rowcolor=#fff> 1947 1948 1949 1950 1951
조 하튼 렉스 바니 조 하튼 돈 뉴컴 칼 어스킨
<rowcolor=#fff> 1952 1953~1955 1956~1957 1958~1961 1962
프리처 로 칼 어스킨 돈 뉴컴 돈 드라이스데일 자니 포드레스
<rowcolor=#fff> 1963 1964 1965 1966 1967
돈 드라이스데일 샌디 코팩스 돈 드라이스데일 클로드 오스틴 밥 밀러
<rowcolor=#fff> 1968 1969 1970 1971 1972~1978
클로드 오스틴 돈 드라이스데일 클로드 오스틴 빌 싱어 돈 서튼
<rowcolor=#fff> 1979~1980 1981 1982 1983~1986 1987
버트 후튼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제리 로이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오렐 허샤이저
<rowcolor=#fff> 1988 1989 1990 1991 1992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팀 벨처 오렐 허샤이저 팀 벨처 라몬 마르티네즈
<rowcolor=#fff> 1993~1994 1995~1998 1999~2000 2001 2002
오렐 허샤이저 라몬 마르티네즈 케빈 브라운 박찬호 케빈 브라운
<rowcolor=#fff> 2003~2004 2005~2007 2008 2009 2010
노모 히데오 데릭 로우 브래드 페니 쿠로다 히로키 빈센트 파디야
<rowcolor=#fff> 2011~2018 2019 2020 2021 2022
클레이튼 커쇼 류현진 더스틴 메이 클레이튼 커쇼 워커 뷸러
<rowcolor=#fff> 2023 2024
훌리오 유리아스 타일러 글래스노우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3278> 파일:텍사스 레인저스 화이트 로고.svg텍사스 레인저스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191919,#ffffff
<rowcolor=#ffffff> 1961 1962 1963 1964 1965
딕 도노반 베니 다니엘스 돈 루돌프 클로드 오스틴 필 오르테가
<rowcolor=#ffffff> 1966~1967 1968~1969 1970~1973 1974 1975
피트 리처트 카밀로 파스쿠알 딕 보스만 짐 비비 퍼거슨 젠킨스
<rowcolor=#ffffff> 1976 1977 1978 1979 1980~1981
게일로드 페리 버트 블라일레븐 존 매틀랙 퍼거슨 젠킨스 존 매틀랙
<rowcolor=#ffffff> 1982 1983 1984~1985 1986 1987~1989
찰리 허프 마이크 스미슨 찰리 허프 호세 구즈만 찰리 허프
<rowcolor=#ffffff> 1990~1992 1993 1994 1995 1996~1997
놀란 라이언 크레이그 레퍼츠 케빈 브라운 케니 로저스 켄 힐
<rowcolor=#ffffff> 1998 1999 2000 2001 2002
존 버켓 릭 헬링 케니 로저스 릭 헬링 박찬호
<rowcolor=#ffffff> 2003 2004 2005 2006~2009 2010
이스마엘 발데스 케니 로저스 라이언 드레스 케빈 밀우드 스캇 펠드먼
<rowcolor=#ffffff> 2011 2012 2013 2014 2015
C.J. 윌슨 콜비 루이스 맷 해리슨 태너 셰퍼스 요바니 가야르도
<rowcolor=#ffffff> 2016 2017 2018 2019 2020
콜 해멀스 다르빗슈 유 콜 해멀스 마이크 마이너 랜스 린
<rowcolor=#ffffff> 2021 2022 2023 2024
카일 깁슨 존 그레이 제이콥 디그롬 네이선 이볼디
}}}}}}}}}}}} ||

박찬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체육훈장.png
<colbgcolor=#EF8B01><colcolor=#F8D1A6> 연도 <colbgcolor=#F8D1A6><colcolor=#EF8B01> 1998년
이름 박찬호
분야 스포츠
사유 국위선양
체육훈장맹호장(2등급)

파일: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로고.svg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1998

파일:2001 MLB 올스타전 로고.sv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2001

파일: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2006 WBC ALL-WORLD TEAM AWARD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OF

파일:미국 국기.svg OF

파일:일본 국기.svg OF

파일:미국 국기.svg SS

파일:쿠바 국기.svg 2B

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3B

파일:일본 국기.svg P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B

파일:쿠바 국기.svg DH

파일:일본 국기.svg C

파일:쿠바 국기.svg P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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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BC 로고.svg 방송연예대상 버라이어티 부문 남자 신인상
육성재 & 슬리피
(2015)
박찬호
(2016)
이시언
(2017)

파일:한국갤럽 CI_White.svg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04년
※ 200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승엽 박찬호 안정환 박세리 홍명보
6위 7위 8위 공동 9위
허재 박지성 차범근 이종범 선동열
2009년
※ 200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박지성 김연아 이승엽 박태환 박찬호
6위 공동 7위 10위
김태균 이용대 이종범 박세리 안정환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김연아 박지성 류현진 손연재 박태환
공동 6위 공동 8위 10위
손흥민 이승엽 추신수 박찬호 기성용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선정.
{{{#!wiki style="margin: -16px -11px" 1위 2위 3위 4위 공동 5위
손흥민 류현진 김연아 박지성 추신수 이대호 }}}
7위 공동 8위 공동 10위
박찬호 기성용 차범근 이승엽 이동국
2024년
※ 202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손흥민 이강인 류현진 김연아 김연경
{{{#!wiki style="margin: -16px -11px" 6위 공동 7위 9위 공동 10위
김민재 박지성 이정후 박세리 김하성 박찬호 }}}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예능인, 좋아하는 유튜버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ff>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 2.svg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C
}}} ||
{{{#!wiki style="color:#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998
방콕 AG
1999
아시아야구선수권
2000
시드니 올림픽
2002
부산 AG
2003
아시아야구선수권
2006
WBC
심재학 김동수 김기태 이종범
2006
도하 AG
2007
아시아야구선수권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WBC
2010
광저우 AG
2013
WBC
박재홍 박찬호 진갑용 손민한 봉중근 진갑용
2014
인천 AG
2015
프리미어 12
2017
WBC
2017
APBC
2018
자카르타 AG
2019
프리미어 12
박병호 정근우 김재호 구자욱 김현수
2020
도쿄 올림픽
2023
WBC
2022
항저우 AG
2023
APBC
2024
프리미어 12
2026
WBC
김현수 김혜성 송성문
ⓐ 1998년 이전의 올림픽과 야구선수권대회에는 아마추어 선수만 출장했으므로, 따로 주장 경력을 기재하지 않았다.
ⓑ U-24 대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주요 대표팀 | 역대 로스터 | 역대 감독 | 역대 주장 | 역대 유니폼 | 역대 BI | 세대별 대표팀 | 주요 경기
}}}}}}}}} ||

}}} ||
박찬호의 보유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보유 기록
단일 시즌 최다 만루홈런 허용 4개 1999년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200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최저 H/9
케빈 밀우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6.632
박찬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6.889
랜디 존슨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6.525
}}} ||
박찬호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1번
얼 로빈슨
(1958)
<colbgcolor=#ccc> 박찬호
(1994~2001)
결번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61번
제임스 허스트
(1994)
박찬호
(2002~2005)
케빈 리차드슨
(2009)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번호 61번
결번 박찬호
(2005~2006)
닉 헌들리
(2008)
뉴욕 메츠 등번호 61번
제프 던컨
(2003)
박찬호
(2007)
리반 에르난데스
(2009)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1번
결번 박찬호
(2008)
조시 베켓
(2012~2014)
필라델피아 필리스 등번호 61번
케인 데이비스
(2007)
박찬호
(2009)
션 오설리반
(2014)
뉴욕 양키스 등번호 61번
빌리 트레이버
(2008)
박찬호
(2010)
로이스 링
(2010)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번호 61번
앤서니 클라겟
(2009)
박찬호
(2010)
제프 로크
(2011)
오릭스 버팔로즈 등번호 61번
이토 히카루
(2008~2010)
박찬호
(2011)
이하라 마사키
(2012)
한화 이글스 등번호 61번
김경태
(2011)
박찬호
(2012)
김주
(2013)
}}} ||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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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ff>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1998 아시안 게임
주성노호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6 김원형 · 20 김병현 · 21 경헌호
26 서재응 · 27 강철민 · 37 임창용
45 최원호 · 61 박찬호
포수 12 진갑용 · 42 홍성흔 · 44 조인성
내야수 6 황우구 · 7 백재호 · 11 강혁
14 신명철 · 18 김동주 · 24 강봉규
외야수 9 이병규 · 10 심재학 · 31 장영균
33 박한이 · 62 박재홍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5''' 주성노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1 박병준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2 이기호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4 신현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tablebordercolor=#fff>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김인식호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 손민한 · 17 오승환 · 15 구대성 · 21 정대현 · 26 서재응
27 박명환 · 28 전병두 · 36 배영수 · 41 정재훈
45 봉중근 · 49 김병현 · 51 김선우 · 61 박찬호
포수 20 진갑용 · 22 홍성흔 · 44 조인성
내야수 3 박진만 · 5 정성훈 · 6 김재걸
11 최희섭 · 14 김민재 · 16 김종국
25 이승엽 · 52 김태균 · 55 이범호
외야수 7 이종범 · 9 이병규 · 12 송지만
33 박용택 · 35 이진영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1''' 김인식
타격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0 김재박
수비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5 류중일
투수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90 선동열
주루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6 류지현
배터리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0 조범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ff>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2007 야구선수권 대회
김경문호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3 장원삼 · 14 류택현 · 17 전병호
19 정대현 · 22 한기주 · 47 권혁
51 류제국 · 61 박찬호 · 99 류현진
포수 26 박경완 · 44 조인성
내야수 2 김민재 · 3 고영민 · 7 박진만 · 8 정근우
10 이대호 · 18 김동주 · 31 이현곤
외야수 1 장성호 · 9 이병규 · 29 이택근
39 이종욱 · 53 이대형 · 69 민병헌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4''' 김경문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8 김기태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7 김광수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90 선동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 ||
파일:61PARK.jpg
<colbgcolor=#2f241d><colcolor=#fff>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특별 고문
키움 히어로즈 스프링캠프 투수 인스트럭터
박찬호
朴贊浩 | Park Chan-ho
출생 1973년 7월 28일[1] ([age(1973-07-28)]세)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읍
(現 충청남도 공주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공주중동초등학교 (졸업)
공주중학교 (졸업)
공주고등학교 (졸업 / 65회)
한양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 92 / 명예학사)[2]
신체 185cm, 95kg, O형[3]
포지션 투수(선발 투수, 중간 계투)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4년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LAD)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4~2001)
텍사스 레인저스 (2002~200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5~2006)
뉴욕 메츠 (200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8)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9)
뉴욕 양키스 (2010)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0)
오릭스 버팔로즈 (2011)
한화 이글스 (2012)
국가대표
[ 펼치기 · 접기 ]
하계 유니버시아드 1회 (1993)
아시안 게임 1회 (1998)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1회 (2006)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1회 (2007)
프런트 키움 히어로즈 스프링캠프 투수 인스트럭터 (2019, 2023~)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특별 고문 (2019~)
해설위원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해설위원 (JTBC)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해설위원 (SBS)
2020 도쿄 올림픽 해설위원 (KBS)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해설위원 (KBS)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해설위원 (KBS)
병역 예술체육요원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정보 더 보기{{{#!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bgcolor=#2f241d><colcolor=#fff> 가족
<colbgcolor=#2f241d><colcolor=#fff> 배우자 박리혜(1975년생)[4](2005년 결혼 - 현재)[5]
자녀 장녀 박애린(2006년생)
차녀 박세린(2008년생)
삼녀 박혜린(2014년생)[6]
부모 아버지 박제근[7], 어머니 정동순
형제자매 3남 1녀 중 셋째[8]
친척 사촌 누나 박현순[9], 매형 김만섭[10], 5촌 외조카 김윤하[11]
종교 불교
본관 충주 박씨[12]
응원가 지누션 - A Yo[13]
서진필 - 사나이 순정[14]
}}}}}}}}}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파일:MLB 로고.svg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선수 경력2.3.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4. 수훈5. 방송 활동
5.1. 광고(CF)5.2. 해설
6. 박찬호에 관련된 이야기
6.1.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6.2. 역대 연봉6.3. 가족6.4. 작품 속 선수 박찬호6.5. 자서전6.6. 투 머치 토커
7. 논란 및 사건 사고8. 미담9. 여담10. 주요 기록
10.1. 긍정적 기록10.2. 부정적 기록10.3. 기타 기록
11. 어록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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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저 녀석을 앞으로 10년 동안 상대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마크 그레이스[15][16]
대한민국의 前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 선수이자 KBO 국제홍보위원.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불 같은 강속구[17]와 낙차 큰 커브로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100승을 달성한 투수. 메이저리그 아시아인 최다 승(124승)을[18] 기록한 투수이며, 2001년에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개막전 선발이었다.[19] 또한 한국인 야구선수로서 최초로 메이저 리그에서 홈런을 기록한 타자이기도 하다.[20]

다저스 소속으로 활약할 당시 1997년 외환위기로 어려웠던 국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던 것으로 유명하며[21][22] 이러한 인기를 반영하듯이 박찬호 경기 중계의 시청률은 낮방송이 25% 이상이 나왔었다.[23] # 참고로 외환위기로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있던 상황에서 국내 언론사의 LA특파원 파견은 오히려 늘었는데 이는 오로지 LA다저스에서 활약하던 박찬호의 선전 때문이었다.[24]

LA 다저스에서 5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올리는 등 활약했지만 텍사스 레인저스에서의 3년 반 동안 68경기에서 380⅔이닝 소화에 그치며 22승23패 평균자책점 5.79로 부진에 시달렸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텍사스 구단 역사상 최악의 계약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결국 2005년 도중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 됐다. 이후 여러 구단에서 저니맨 생활을 이어가다가 메이저리거 생활을 마무리한 뒤 일본 프로야구를 거쳐 2012년 고향팀 한화 이글스에서 한 시즌을 뛰고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는 야구 중계, 여러 TV 프로그램, 강연, 행사에 출연하고 있으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특별 고문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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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7월 28일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전파사[25]를 운영하던 가정의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났는지 교사의 추천으로 공주중동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2013년 출연한 무릎팍도사에서 한 발언에 따르면 그 당시 야구부는 라면을 먹을 수 있어 그 라면이 먹고 싶어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가 82년도인데, 80년대면 경제도 어느 정도 커질 만큼 커졌고 라면이 그때 기준으로도 비싼 음식은 아니었으나, 초등학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없고 학교에 매점도 없으니 학교에서 간식을 사먹을 수 없다. 박찬호의 회고에 의하면 박찬호의 집은 부잣집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운동하는 아들을 위해 가끔씩 통닭을 사 줄 정도의 여력 정도는 있었다고 하니. 집이 가난해서 라면을 못 먹은 건 아니고 그냥 100원짜리 하나 가지고 다니지 않는 초등학생이라서 못 먹은 것.

어릴 적부터 야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으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공에 대한 공포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 공동묘지에 가서 담력 훈련 겸 스윙 훈련을 했다는 얘기는 요즘도 종종 회자되곤 한다. 또한 하체 단련을 위해 공산성을 토끼 뜀을 하며 오르내렸다는 트레이닝 일화가 유명하다. 그 때문인지, 도로명주소 개편 당시 박찬호가 살았던 공주산성 근처 있는 작은 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산성찬호길이 생기기도 했다.

5~6살 때부터 매일 팔굽혀펴기 했었고,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부터 매일 턱걸이 10~20개, 6학년 때부터는 매일 턱걸이 30개 이상, 팔굽혀펴기 100개 이상 했다. 선수 시절에 어깨, 팔꿈치 부상 없었던 비결이라고 한다. 실제로 맨몸 운동, 닫힌 사슬 운동(CKC)은 관절, 인대 부상 확률 낮으면서도, 근력 향상 효과 높은 좋은 운동이다.

한양대학교 입학 후, 기저귀 고무줄 30개 사서, 다양한 각도로 수 백 번 당기는 튜빙 운동도 매일 했다. 기구 운동, 맨몸 운동과는 다른 각도, 장력 사용하는 운동이라 구속 150km/h 돌파에 큰 역할했다고.

공주중학교 3학년 시절 당시 감독이었던 오영세[26]의 권유로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투수 전업 전까지 박찬호는 3루수였는데, 얼마나 잘했는지 오죽했으면 당시 야구부 감독이 학부모들에게 왜 전향시키냐고 욕을 먹고 경질까지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박찬호의 반대급부로 3루수 전업을 했던 홍원기는 당시 공주중 야구부의 에이스였다. 그 이후 공주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동기로 홍원기손혁이 있었고, 이 셋은 당시 공주고등학교 야구부의 주축이었다. 특히 홍원기는 나중에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한 유일한 한국 야구인일 정도로 각별한 사이. 여담으로 박찬호가 지금의 부인을 처음 만날 때 3명의 지인을 데리고 왔는데, , 한양대 2년 선배 류지현, 그리고 홍원기였다고 한다.

2.2. 선수 경력

박찬호의 선수 경력
통합 선수 경력: 박찬호/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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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05 TEX 05 SD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10 NYY 10 P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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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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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시절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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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2007년

2.3.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박찬호/플레이 스타일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박찬호 플레이스타일.jpg

4. 수훈

5. 방송 활동

경인지역 민영방송의 밥줄이었다. iTV 때도 그랬고 OBSMLB중계를 시작했다. 그러나 돈이 안 돼서 결국 2010시즌의 중계권은 포기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다시 중계를 시작했다. 2010시즌 중계권을 소리소문 없이 구매해서 잘 방영했다. 다만 추신수 위주의 중계방송을 시도하는지라 박찬호의 비중은 많이 줄었다.

2009년 초 1박 2일에 출연해 적극적으로 촬영에 참여[37]하여 여전히 많이 남아 있던 박까들을 팬으로 전향시키는 기적을 실현하기도 했다. 한겨울에 계곡의 얼음을 깨고 멤버들과 계곡물에 입수한 장면은 당시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멤버들과 돈독한 우정이 쌓였는지 녹화가 끝난 뒤에도 장문의 문자를 멤버들에게 일일이 보내고 일상적인 통화도 했다고 한다. 그해 KBS 연예대상에도 1박 2일 멤버들과 함께 참석했으며, 이로부터 2년 뒤에 혹한기 특집에도 다시 찾아와 멤버들을 한 번 더 계곡에 입수시키기도 했다.[38] 탁구대 위에서 플라스틱 병뚜껑치기를 해서 만약에 반대쪽 끝 흰선에 병뚜껑이 정확히 멈추면 전원 실내취침한다는 사실상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 거짓말처럼 병뚜껑을 탁구대 맨 끝선에 세워 무수한 짤을 생산해 낸 이력도 있다. 2010년 시청자 투어 때는 치킨과 ‘콜라’를 보내줬으며, 2011년에는 이승기 - 이수근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박찬호의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특히 2009년 국가대표 은퇴 기자회견 이후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호동, 이수근, 김C와 자리를 가졌었는데, 강호동의 말로는 "국가대표가 아니라 야구 자체를 그만두는 기분이 들어서 눈물이 났다"라고 한다.


그리고 방문해서 통닭 주고 토크만 한 뒤 돌아가려고 했으나 멤버들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하루 자고 가기로 결정하며 잠자리 복불복까지 참여했다.[39] 하지만 탁구에서 무려 초짜인 김종민에게 지는 굴욕을 보이며 패배에 한 몫했고, 병뚜껑 멀리 날리기에서는 막판에 판 엎기에 동참하는 등 예능감을 제대로 보여줬다.[40] 이때 나영석 PD와 협상하면서 탁구대 맨 끝 선에 걸치면 얻는 혜택이 걸친 사람 1명 빼고 나머지 야외 취침, 혹은 다 밖에서 취침이었다가 전원 구제로 바뀐 것인데, 안 바꿨으면 박찬호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이 밖에서 잘 뻔했다. 참고로 1명 빼고 야외 취침을 제안했던 사람은 은지원, 나영석 PD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자 얼빠진 상태로 전원 실내 취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41] 그래도 1박 2일 역사에 손꼽히는 명장면을 건졌으니 야외 취침으로 재미를 뽑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득은 봤다. 조작 논란이 생길까봐[42] 앞 타자 이수근이 치는 장면부터 노 컷으로 한 앵글로만 내보냈고, 직후에 이승기도 조작 논란을 의식해서 일부러 입바람을 불어 병뚜껑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 정도면 조작하려 해도 밤새 해야 하는 만큼 애초에 아침해가 떠 버려서 조작 못 한다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봐줘야 하는 수준이라며 치켜세웠다.

2011년 12월 1일, 주병진 토크 콘서트 첫 방송의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2013년 7월 18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

2015년에 냉장고를 부탁해신승훈과 함께 출연했다. 그런데 훗날 2016년 9월 12일에 그의 아내 박리혜 셰프가 여성 셰프 최초로 냉장고를 부탁해스페셜 셰프로 참여하게 되었다.

배우 정준호[43]와의 오랫동안 친분을 계기로 그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달콤살벌 패밀리에 특별출연했다. 영어 쓰는 충청도 학부모 역.

2017년에는 JTBC 예능 프로그램 잡스(JTBC)에서 송재우와 함께 게스트로 출연했다.

2018년에는 SBS에서 방영한 빅픽처패밀리에도 출연하였다.

2019년 10월에는 집사부일체에 출연했다.

2020년 정글의 법칙IMF 금융위기 시절 국민 영웅으로 같이 불린 박세리와 함께 출연했다.

2020년 축구선수 이영표, 오마이걸 승희와 함께 축구 야구 말구에 출연했다.

2021년 2월 14일부터 4월 18일까지 박세리, 박지성과 함께 쓰리박에 출연했다.

방송 사고급 기타 영상 #

2024년 12월 14일 KBS 2TV 살림하는 남자들 372회에 출연했다.[44]

5.1. 광고(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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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였던 90년대 후반에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었고, 그 시절 대한민국 광고계의 블루칩이었다.

2010년대에도 LG패션 타운젠트, 플렉스파워 등을 통해 여전히 활발한 CF 활동을 하고 있다.


나이키의 전속모델로도 활동했다. 위의 광고는 미국과 한국 모두 방영됐었다.


2002년에 모델을 맡았던 국민카드 광고. "같이 쓰실래요?" 라는 멘트로 유명하며 당시 박찬호가 수염을 많이 기르고 나와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참고로 박찬호의 부인인 박리해 씨가 이 광고를 보고 한 때 한국에서 박찬호가 신랑감 1등으로 뽑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


건축자재회사 KCC의 광고에 출연하였다. 투머치토커의 컨셉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나와 큰 웃음을 선사하였다.

5.2. 해설


투 머치 토커라는 친화적인 별명과 이미지와는 달리, 해설위원으로서의 평가는 좋지 않고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2020 도쿄 올림픽 KBS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발탁되며 처음으로 올림픽을 경험하게 되었다. 캐스터인 이광용과의 호흡이 좋은 편.[45] 가끔 말을 버벅이고 발음이 어눌한 단점은 있지만 피칭에 대한 디테일한 해설이[46] 강점이다. 특히 투수의 초구 스트라이크를 매우 강조하는 편. 또한 대표팀 주장 김현수의 타석에서 '캡틴큐'라는 유행어를 줄기차게 밀고 있는데[47], 은근히 적중률이 높아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 한편으로 방송상에서 투 머치 토커를 직접 인용하는 유머도 꽤 나왔다.

선수 시절 국가대표가 어떤 의미인지 정말로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다 보니, 도미니카와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강백호가 8회에 10:6으로 역전당한 상황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껌을 씹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자 저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해설로 도쿄 올림픽 대표팀 내에서 성적이 좋았던 강백호를 고로시했다는 논란도 불러일으켰다. 혹자는 김경문 감독의 고등학교 후배였으니(부산고에서 전학) 운용을 잘못한 김경문 감독을 일부러 감싸고 애꿎은 강백호를 희생양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박찬호가 도쿄 올림픽 폐막 이후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강백호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정작 올림픽에서의 졸전에 대해 비판받아야 할 김경문 감독을 "힘든 위치에 있는 리더다"라며 감싸는 모습을 보여준 것. 물론 해설위원으로서, 박찬호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비판이었기에 발언자체만 놓고 봤을 땐 큰 문제가 되지않았다. 이후 정우영 캐스터 역시 박찬호를 두둔하는 뉘앙스의 글을 남겼으며, 투수교체 때 찍힌 영상을 인플레이 도중에 뜬금없이 내보내 마치 강백호가 지금 경기도중에 집중을 안 하고 껌을 씹고있듯이 보이게 만든 현지 카메라진들의 행태가 뒤늦게 밝혀지면서 강백호는 억울한 피해자고, 그로 인해 박찬호도 저격성 발언은 조심해야하는 입장이지만 박찬호 역시 속아버린 피해자다.라는 여론이 차츰 확산되어왔다.

올림픽 해설 당시 평이 나쁘지 않았고, 시청률도 괜찮았던지라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KBS 해설위원으로 활약했다. 조별 예선 호주전과 일본전에서 대표팀 선수들이 극도의 부진을 보이자 말이 없어지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호주전 강백호의 2루타 타구를 보고 아이같은 눈을 하다 강백호의 주루사가 나오자 침울해 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https://youtube.com/shorts/_cc2UNdb6po?si=0jyUiREr1_oUV_al 하지만 '외야수'인 '박'건우를 '3루수' '김'건우라고 이야기하는 등 대표팀 선수들에 대한 최소한의 파악도 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 비판을 받았다. 특유의 줄줄 새는 말투에 억양은 덤. 물론 박용택이 선수들에 대한 얘기를 하는 쪽으로 해설역할이 나뉜 것도 있다.

전술한 강백호 논란까지 겹쳐 박찬호의 해설을 듣기 싫어하는 야구 팬들이 급격히 늘었으나, KBS는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도 박찬호를 해설로 기용했다. 그리고 조별리그 1차전 홍콩전에서도 여전히 철지난 정신력과 투지 타령만 하고 KBO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해설을 하며 코리안 특급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이제는 그 이순철과 동등한 수준의 비호감 해설위원으로 등극하고야 말았다.[48]

슈퍼라운드 2차전 중국과의 경기에서 강백호가 부진을 씻어내는 솔로 홈런을 때려내자 강백호가 돌아왔다며 칭찬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2년 전 강백호에 대한 마녀사냥의 시발점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린 거냐는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 강백호의 껌 씹는 장면만 보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49]

현재 야구 팬들에게 받는 주요 비판 원인은 다음과 같다.

특히 강백호 관련 건은 박찬호의 잘못이 되었다. 2020 도쿄 올림픽 강백호 사건의 경우 강백호가 껌을 씹던 모습은 투수 교체 때 찍은 장면을 현장 중계진들이 경기 도중에 송출한 것으로, 실제 경기가 진행되는 상황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박찬호는 중계석과 야구팀 덕아웃 사이에 거리가 있었기에 녹화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축 쳐져있는 덕아웃 분위기를 지적했는데, 하필 이때 강백호의 단독샷이 화면이 나오면서 박찬호는 강백호를 직접적으로 거론했고 언론과 커뮤니티에서는 앞뒤 문맥을 자르고 화제성을 위해 "강백호를 저격한 박찬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에 네티즌들은 사실관계 확인 없이 동조되어 강백호를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건 이후 박찬호는 의도와 다른 뉘양스로 퍼진 논란이 맞다며 일부 몰상식한 야구 팬들이 이 사건을 악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전했으나, 이 일로 강백호는 국수주의 성향이 짙은 중장년층 야구팬들에게 단단히 찍혔고 강백호와 관련된 기사와 유튜브 영상들에는 악플과 싫어요 테러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54]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호란 사람이 한국야구에 끼친 영향력, 나아가 단순한 야구선수로서의 위상을 가진 선수가 아닌지라 박찬호의 해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물론 많다. 워낙에 은퇴 이후 현장에 있지 않고 예능 출연도 많이 안 하는 사람인지라 더더욱 박찬호의 모습을 보고싶어하는 국민들의 관심이 앞으로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6. 박찬호에 관련된 이야기

6.1.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전성기 시절 새가슴이라는 일부 비난이 있었던 데다,[55] 한만두처럼 잘 던지다 한 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 '멘탈이 약한 선수가 아닌가' 하는 이미지가 강했으며, 의외로 이 이미지는 아직도 많은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홈페이지에 남기는 글이나 인터뷰[56] 등을 보면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사실 박찬호는 국가대표급 멘탈이다. 메이저리그 자체가 치열한 정글이다. 제 아무리 최고의 선수라도 잠시 부진하면 가차없이 팬들에게 질타를 당하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수 있기에 정신적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게다가 박찬호는 선발 때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엄청난 한국기자들이 항시 쫓아다녀서 심적 부담도 훨씬 컸을 것이다. 김병현은 기자와 싸움까지 벌여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김병현의 고백을 보면 가뜩이나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기자들이 자꾸 옆에 와서 사진 찍고 이런 것 자체만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또한 박찬호는 IMF 당시 우상급이었기에 유혹도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헌데 10년 이상 큰 기복 없는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았고 딱히 사생활적인 측면이나 언론과의 마찰 등 별다른 트러블 없이 묵묵히 야구에 정진했다는 점에서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멘탈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축구 등 다른 분야에서 어린 나이에 과도한 관심과 집중을 받아서 부담감에 무너지거나 혹은 유혹에 넘어가 술이나 유흥에 빠져 막장 테크 탄 선수들과 비교해보자.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면서도 PED에 손대지 않았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박찬호가 풀 타임 메이저리거로 뛰던 시기는 스테로이드 시대 중에서도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고, 메이저리거들 상당수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PED를 사용했지만, 박찬호는 그러지 않았다.

새가슴이란 비난을 받았던 건 볼넷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면 승부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피칭을 하다 보니 겁이 많다고 안티들이 조롱했던 것인데, 그렇게 도망가는 피칭을 했어도 박찬호의 피홈런수는 꽤 많았다. 다저 스타디움은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라 점수가 잘 나지 않는 구장이다 보니 홈런 맞고 점수를 내주면 치명적인지라 굳이 무리하게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 안되면 내보냈던 것인데, 박찬호는 삼진도 많이 잡던 투수였다. 오히려 주자를 내보내면 부담스러워서 무리하게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다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헌데 박찬호는 주자를 내보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며 주자 내보내도 다음 타자 잡으면 그만이란 전략으로 무리하지 않았으며, 실제 볼넷 위기 상황에서도 볼넷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유인구를 던져 삼진도 많이 잡은 것을 보면 여유가 느껴지기도 하고 굳이 무리하게 승부하지 않았을 뿐이다.

올림픽 유도 김재범은 유도는 3초 만에 결정된다는 명언을 남겼는데, 한번 상대를 맞잡아보면 '어 오늘 할 만하다'라든지, '오늘은 좀 느낌이 안 좋은데' 이런 식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이는 다른 스포츠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박찬호도 일단 첫 타자 상대해보면 '오늘 제구와 구위가 괜찮다'라든지, '컨디션이 안 좋다'라든지 느껴질 텐데, 박찬호도 삘 받았을 때는 상대를 윽박지르며 압도하는 강속구 투수로 변신한다. 완봉승을 거둔 날이라든지 컨디션이 최고조에 달한 날에는 메이저리그 강타자를 상대로 과감한 정면승부로 많은 삼진을 뽑아내는 등,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한국 야구에선 타자를 압도했던 류현진도 떡대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선 기교파 투수에 가까워졌고, 박찬호 전성기 때는 약물러들 전성기였는데 그때 동양인 박찬호가 힘 좋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강속구로 압도하는 피칭을 했었다. 다만 박찬호가 제구가 안 되는 날에는 여지없이 가운데로 몰리면 홈런을 맞았기에 이럴 때는 무리하지 않고 볼넷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가급적 유인구로 승부하는 전략을 취했을 뿐이다.

잘 던지다 한 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멘탈이 약하다는 오해도 받았는데, 이는 멘탈에 과도한 환상을 갖는 한국인들의 잘못된 인식이다. UFC 김동현은 국내에 '멘탈전도사'로 유명했고 연승 중에 드디어 강자와의 대결이 잡히자 언론에서는 김동현이 구름을 넘어선 경지라는 둥 극찬했고 실제 경기 시작하자마자 백스핀 엘보우를 날리며 '멘탈지존'의 모습을 보여줬으나, 상대가 가볍게 피하고 카운터 날리니까 한 방에 뻗어버렸다. 멘탈은 신기루 같은 것이다. 흔히 '전사의 심장' 운운하는데, 그것도 맷집이 받쳐주니까 한 대 맞고 두 대 치는 전략으로 그렇게 나온 것일 뿐이다. UFC에서 K-1챔피언 출신 타격가 마크 헌트와 5라운드 내내 전율의 타격전을 벌이며 '전사의 심장', '최고의 멘탈'로 찬양받았던 안토니오 실바는 약물 적발 뒤 맷집이 급격히 저하된 모습을 보이며 KO 패를 당했고, 마크 헌트와 재대결 때는 헌트의 주먹에 심하게 움찔거리며 심지어 뒷통수를 보이며 도망가는 모습까지 나오고 결국 무기력하게 KO 패당했다. 결국 멘탈도 실력에서 파생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먹을 맞아도 맞을 만하다고 느껴지면 '오 더 때려봐' 이렇게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고, 내가 한 번 휘둘렀더니 상대가 데미지를 받고 휘청이는 모습을 보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내가 한대 때렸는데 상대가 반응이 없으면 멘탈붕괴가 일어날 수 있고, 실제 멘탈지존 코너 맥그리거는 좀비 파이터 네이트 디아즈에게 패했는데, 자신의 필살 펀치를 맞고서도 끄떡도 안 하고 덤벼드는 모습에 멘탈붕괴됐다고 한다.

여하튼 박찬호가 종종 무너졌던 건 멘탈이 약한 게 아니고 그게 실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너졌어도 18승을 거두기도 하고, 방어율 3점대 초반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무너진 경기들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 사이 영 상급 투수가 된다. 원래 야구에선 투수들이 유리하다.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이라고 해봐야 3할인데, 즉 강타자들 상대해도 10번 중 7번은 투수들이 잡아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못하는 투수들을 보면 계속 안타 맞는 게 아니고 잘 던지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등의 패턴을 보이는데, 그게 바로 정상급 투수냐, 아니냐를 가르는 요소인 것이다. 오히려 박찬호가 한계에 부딪힌 것은 피지컬 문제에 가깝다. 박찬호가 가장 빛나던 시절은 00~01년 전반기까지인데, 특히 올스타에 뽑혔던 01년 전반기에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허리 문제로 후반기에 무너졌다. 박찬호의 피칭 스타일은 신체에 상당히 무리가 가는 스타일이고, 타고난 피지컬이 (메이저리그치곤)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그의 스타일상 이를 악물고 한계까지 쥐어짜는 스타일이었다. 실제로 박찬호는 90년대 후반~00년대에 활동한 메이저리그 파워피처치곤 체격이 큰 편이 아니다. 게다가 그가 활약하던 시기는 악명 높은 스테로이드 시대로, 타자들이 전대미문의 파워를 자랑하던 시절이었다.[57] 이 시절에 파워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던 로저 클레멘스가 193cm/107kg의 거구인 데다 약의 힘까지 빌렸던 걸 생각해보자. 즉, 메이저리그 투수치고 평범한 체구인 박찬호가 역사상 타자들의 파워가 가장 강한 시대에 저렇게까지 버틸 수 있던 것도 피지컬의 한계를 정신력으로 버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계에 부딪히는 걸 이를 악물고 버텼으니 힘이 떨어지면 무너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실제로 그는 FA 전 부상을 참고 뛰었고, 이렇게 무리한 것은 나중에 심각한 기량 저하로 돌아왔다.

사실 박찬호는 큰 기복이 없는 투수인데, 대표적인 예로 전성기에 퀄리티 스타트(6이닝 3실점 이하)를 많이 기록했다. 한창때는 랜디 존슨보다도 많이 기록해본 적이 있다. 퀄리티 스타트의 가치가 큰 기복 없이 안정적으로 던질 수 있느냐를 측정하는 잣대이고, 특급 투수들을 보면 한 시즌에 퀄리티 스타트를 많이 기록하고 무너지는 경기가 거의 없기에 평균자책점이 낮은 것이다. 종종 무너졌다고 해도 방어율 3점대 초반도 기록한 적이 있는데, 그 시즌에 부진한 경기를 제외한 경기들에서 안정적인 피칭을 했다고 가정하면 평균자책점을 2점대를 기록할 것이고 20승도 기록할 수 있게 된다면 결국 특급 투수가 되는데 아쉽게도 박찬호 커리어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전성기가 길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따름.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인 클레이튼 커쇼라도 컨디션이 안 좋거나 부상이 있을 때는 제구가 안 돼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 자기 소개밖에 할 줄 몰랐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구단에서 붙여준 통역을 과감히 사양했다든지[58], 첫 차를 사기 전에 교통비를 아끼려고 경기장에서 숙소까지 뛰어갔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보면 고생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자세가 엿보인다. 또한 메이저리그에서 생존하기 위해 프로 초창기 때 던졌던 슬라이더를 봉인한 대신 빠른 공과 궁합이 맞는 커브를 장착한 이야기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절 장출혈이나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신종플루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자기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프로정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 중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생업에 정착할 가능성은 쉽지 않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의 특별한 프로 정신 덕분에 아메리칸 드림 하면 먼저 떠오르는 한국인이 되었다. 물론 은퇴 후에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고 있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사람에겐 최고의 롤모델로 손색 없는 사람이 바로 박찬호. 미국 문화를 이해하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어떤 업계에 진출하더라도 저런 근성 없이 성공을 바라면 안 될 것이다.

6.2. 역대 연봉

연도 액수 소속팀 소속리그
1994년 10만 9,000 달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995년 11만 4,000 달러
1996년 12만 4,000 달러
1997년 27만 달러
1998년 70만 달러
1999년 230만 달러
2000년 395만 달러
2001년 990만 달러
2002년 688만 4,803달러 텍사스 레인저스
2003년 1,300만 달러
2004년 1400만 달러
2005년 1,500만 달러 텍사스 레인저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6년 1,550만 5,142달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7년 60만 달러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마이너)
2008년 50만 달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9년 250만 달러 필라델피아 필리스
2010년 120만 달러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1년 2억 5,000만엔 오릭스 버팔로스 일본프로야구
2012년 2,400만 원[59] 한화 이글스 한국프로야구
박찬호가 여태껏 벌어들인 돈[60][61]
리그 금액 원화로 환전 시
메이저리그에서 번돈 8,665만 6,945달러 1,019억 856만 7,320 원
일본프로야구에서 번 돈 2억 5천만 엔 25억 8,315만 원
KBO 리그에서 번 돈 2,400만 원[62]
총액 1,045억 1,571만 7,320원

원래 94년경 첫 출국 당시 당당히 100억 벌어오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약 10배를 벌어 온 것이다!

6.3. 가족

2019년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소개된 박찬호 가족
부인인 박리혜는 일본 대학인 조치대학[63]과, 미국의 명문 요리학교인 CIA 요리학교[64]를 졸업하였고, 프랑스의 미슐랭 레스토랑인 '피에르 오르시(Pierre Orsi)'에서 근무한 요리사이다. 일본 이름은 '가츠다 리에'. 한때 일본 이름 때문에, 박찬호의 아내는 일본인 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교포 한국인 이다.

CJ의 요리 전문 케이블 채널 O'live에서 홈메이드 쿡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부인이 요리사라는 사실을 두고 DC인사이드 야구갤러들은 박찬호 선발 경기에서 특별한 활약을 보이는 선수(박찬호의 선발승을 위해 적시타나 홈런을 치거나 호수비 등을 하는 팀원이나, 결정적 에러로 상대방 팀 분위기를 일순에 꺾는 상대 팀원)를 '박사장 회식 초청자 명단'에 추가하기도.

부인이 재일교포 이기 때문에 한국어 실력이 영 좋지 않다고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일본어로 된 라벨링이 많이 나왔으며, 잘못 적은 한국어 라벨링도 보였다.[65] 맵고 짠 음식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듯하며, 박찬호도 현 시점에선 그 입맛에 길들여진 듯. 아내가 풀코스로 요리하는 걸 선호하는지라 러시아워인 아침밥 시간에는 싸움도 벌어진다고. 박찬호의 냉부 출연 이후 부인을 냉부의 스페셜 셰프로 등판시키기도 했다.

부인 박리혜씨의 아버지이자 박찬호의 장인은 일본 부동산 재벌 박충서다.[66] 이와 관련 거짓 소문으로는, 그가 박찬호에 대해서 "우리 사위가 야구하느라 돈은 별로(!) 못 벌었지만 사람은 좋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박찬호가 결혼발표 이전 야구선수 김재현 장인이 이런말을 했다는 소문이 야구계에서 떠돌아 다녔는데, 박찬호 결혼발표 이후 장인이 부자라는 얘기가 나오자 야구 커뮤니티에서 이걸 갖다붙였다. 스즈키 이치로의 WBC 당시 발언이나, 2002 월드컵 당시 프란체스코 토티의 발언이 의도와 다르게 변질되어 한국 사회에 퍼진 것을 보면, 이 발언도 비슷한 기레기의 소행이 아닐까 싶을 정도. 이미 스포츠 신문이나 가십거리를 다루는 케이블 프로그램 등에 저런 말을 인터뷰에서 했다고 나오는데 해당 인터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박찬호가 장인이랑 비슷하게 벌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건 아니고 실제로 박찬호보다 장인이 부자는 맞다. 국내 기사에 따르면 장인도 야구를 좋아했다고 하니, 최소한 박찬호가 번 돈의 규모를 모를 리 없으며 일본 사회에서 프로야구 선수가 가지는 위상은 한국 사회에서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들보다 더 대단한 大리그(일본에선 메이저리그를 이렇게 부른다)에서 장기간 활약한 박찬호를 장인이 폄훼할 이유는 없다. '돈보다는 야구를 열심히 한 그 인품을 보았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있으며 해당 언급이 장인의 막대한 재산 규모로 인해 와전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진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참고로 박찬호는 연봉으로 번 돈도 많지만 여기저기 산 건물들도 있는데 그 건물의 시세도 오르고, 임대료로 알차게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이 소문 자체는 워낙 많이 퍼지다 보니, 이게 거짓 소문이라는 걸 잘 아는 박찬호의 팬들조차 농담 삼아 말하기도 할 정도다.

여담으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KLPGA에서 활약하던 프로 골퍼 박현순이 박찬호의 사촌누나다. 박현순의 아들들도 야구를 하는 중.#

KBS2 '축구 야구 말구'에 그의 사촌 동생인 박현용 씨가 출연하였다. 고깃집을 운영 중이며 단골. 한의사 경력자다.

배우자가 재일교포 2세(특별영주자)이므로, 박찬호는 일본의 특별영주자의 배우자로서 일본에 거주 및 일본 영주권 신청도 이론상 가능하다.

자녀로는 딸만 3명 있으며 세 딸은 모두 대한민국과 미국의 복수국적이다. 3자녀 모두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영어와 한국말이 매우 유창하다.

차녀 세린양에 의하면 장녀 애린양이 아버지를 닮아 똑같이 말이 많다고 한다.# 박찬호는 이에 대해 흐뭇한듯.

6.4. 작품 속 선수 박찬호

6.5. 자서전

6.6. 투 머치 토커

선수 시절부터 은퇴 후 지금까지 박찬호의 적극적인 팬 서비스로 사람들이 붙여준 애칭.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냥 말 많은 사람에게 붙이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는 프로야구 선수의 팬 서비스가 안 좋은 사례가 나올 때마다 거듭해서 재평가를 받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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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논란 및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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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미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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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담

10. 주요 기록

10.1. 긍정적 기록

10.2. 부정적 기록


여러모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기록을 많이 세웠다. 좋은 기록이든 나쁜 기록이든 간에.

10.3. 기타 기록

11. 어록

"저에게 있어서 야구장은 학교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야구는 제가 선택한 인생 과목이었습니다."
ㅡ 박찬호. 2014년 7월 18일, 올스타전 은퇴식에서.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전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자기 자신을 믿으면 시행착오는 겪을지 모릅니다. (강한 어조로) 그러나 그걸 통해 분명히 성장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제가 절 믿고 이 자리에 섰듯이요.
ㅡ 201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의 정신-개척자 상을 수상한 후 인터뷰 中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며 살 겁니다. 그리고 목표를 세울 거에요. 전 목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봐요. 목표를 향해 오늘과 내일 똑같은 스텝을 밟아 걷는 것. 전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생 최고의 목표가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현역 시절의 제 목표도 통산 124승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요. 제 가장 큰 목표는 오늘도 내일처럼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거였어요.
매거진S 인터뷰에서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200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HBP 1위
제이미 라이트
(MIL)
박찬호
(LAD)

제이미 라이트
(MIL)
케리 우드
(CHC)
페드로 아스타치오
(NYM)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200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HBP 1위
팀 웨이크필드
(BOS)
박찬호
(TEX)
빅터 잠브라노
(TBD)


[1] 음력으로 1973년 6월 29일[2] 당시 한양대는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한 학생들도 체육대학이 아닌 일반 학과에 분산시켰다. 중퇴했지만 2000년 10월 명예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3] #[4] 재일 한국인 2세이며 일본 중앙토지 부동산 회사 사장 박충서의 딸이다. 미국 요리 대학교 출신이다. 참고로 처가는 반남 박씨라고 한다.[5] 2005년 11월 30일, 박찬호는 미국 하와이에서 가족과 친지 등 30여 명이 참석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12월 11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야구 선후배 300여 명을 초청해 피로연을 열었다. #[6] 박찬호의 세 딸은 모두 대한민국미국복수국적이다. 가족이 함께 출연한 MBC '쓰리박'에 의하면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세 딸 모두 한국말이 유창하다.[7] 대한민국 해군 수송전대 백구부대로 월남전에 파병했었다고 진짜사나이에서 언급했다.[8] 남동생 박헌용 씨는 미국 LA에서 한의학을 전공한 한의사로, # 2021년 1월 4일 방송된 축구야구말구에 깜짝 출연했다. #[9] 프로 골퍼 출신이다.[10] 박찬호의 국내 매니지먼트사인 '팀61'의 대표이다. # 사명은 당연히 박찬호의 등번호였던 61번에서 따왔다.[11] 2024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 키움 히어로즈에 지명됐다. #[12] 충주 박씨 참판공파 26세손 '憲' 자 항렬이지만 남동생 박헌용과는 다르게 항렬자를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 박제근은 참판공파 25세손 '濟' 자 항렬이다.[13] 초구 던지기 전 / 완투승 / 완봉승[14] 묻지 마라. 욕하지 마라. 찬호는 계속 던진다. 야구와 함께 살아왔다. 나의 과거를 묻지를 마라. 던지고 던진 인생이었다. 후회 없지만 눈물이 난다. 야구를 하면서 난 너를 만났고 사랑을 알았고 꿈을 가졌다... 이 생명 다 바쳐 널 위해 던진다. 사나이 한평생 내 사랑 팬을 위해 실패를 해도 욕하지 마라. 찬호의 도전이란다. 박찬호 순정이란다.[15] 1997년 시카고 컵스전에서 완투승을 한 박찬호를 보고 당시 시카고 컵스의 1루수였던 그레이스가 한국인 기자에게 박찬호의 나이를 물어봤는데 기자가 24살이라고 답하자 한 말이라고 한다. 다만 그레이스는 당시 1964년생으로 만 33세의 중견급 선수였고, 2003년 은퇴해서 그가 실제로 10년 동안 박찬호를 상대하는 일은 없었다. 참고로 최희섭이 은퇴 당시 후배를 위해 길을 비켜주는 마크 그레이스처럼 되고 싶다고 회고한 바 있다.[16] 마크 그레이스는 임팩트 있는 몬스터 시즌은 없었지만 꾸준하고 기복없는 활약을 통해 통산 45에 달하는 war과 120의 wRC+를 기록한 컵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17] 단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000-2001 시즌에는 속구 구위가 상당 부분 감소한 상태였고, 기교파로 변신을 시도 했었다.[18] 다만 순수 선발승이 아니라 계투로 등판하여 챙긴 승리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선발승의 경우 노모 히데오가 123승으로 최다).[19] 21세기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 위에서 공을 뿌린 첫 번째 선수가 되는 것이다.[20] 최희섭이 아니다. 박찬호가 선수 초기부터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기 전까지 뛰었던 내셔널 리그에는 지명타자 제도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돈트렐 윌리스잭 그레인키처럼 타격 실력을 뽐내는 투수도 곧잘 등장한다. 2024년 현재는 내셔널 리그도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상태.[21] 당시 한국인들이 국제 정세에 어둡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기로 인한 경제 성장, 1996년 OECD 가입으로 인해 국민들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었다. 일각에서는 일본을 넘는다고까지 할 정도로 국민들의 자긍심이 높았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환위기로 나라가 폭삭 망하고 직장까지 잃으니 그 당시 사람들의 패배감과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박찬호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며 국민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은 것이다. 당시 골프선수 박세리가 LPGA에서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서 스윙을 하는 투혼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과 박찬호가 "코리안 특급"으로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22] 최전성기인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거의 스포츠계에서 박찬호의 인기는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까지 가요계 원탑 자리를 차례대로 차지했던 H.O.T., 조성모, god 급의 위상과 비슷할 정도의 인기였다.[23] 시청률의 차이는 당시 시청 환경의 차이로 볼 수 있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케이블, 유튜브 등 채널이 다각화된 상황이었다. 스포츠 경기 시청률 뿐만아니라 드라마 시청률 또한 시대적 환경의 변화로 인해 줄어들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24] 당시 박찬호를 전담으로 담당하던 특파원에는 파견된 시기는 각기 다르지만 스포츠조선 민훈기, 일간스포츠 장윤호, 스포츠서울 문상열, 스포츠투데이 성일만 등이 있다.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256[25] 지금의 가전제품 판매 및 수리 점포. 전자기기 업체 노릇을 하던 전파사도 있었고, 웬만한 동네에는 개인이 직접 운영하는 전파사가 하나 둘 정도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 거의 사장된 점포 형태이다.[26] 공주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1977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포수 김경문과 배터리를 이루며 공주고등학교 야구부 창단 첫 우승 및 충청도 팀 최초로 전국 대회 정상을 이끌어 낸 투수 출신이었다. 기사 1, 후에 박찬호가 한화이글스 소속으로 국내 데뷔전을 가졌을 때 시구자로 초청되기도 했다.기사 2[27] 변화구가 땅바닥에 튀자 "피아자는 블로킹을 못해서 항상 2스트라이크 잡고는 직구를 요구했었죠."라고 말했다.[28] 2002년 한화그룹에 인수된 뒤 2012년 10월 9일부로 사명이 바뀌었다.[29] 박찬호가 고향 팀인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밝혀왔으며 대전에서 은퇴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한국 프로야구의 올스타들이 모이는 올스타전에 은퇴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전에서 올스타전을 하려면 6년 뒤. 대전에서 올스타전은 박찬호의 현역 시절인 2012년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 올스타전 은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한화 이글스에서도 공식 은퇴식 외에도 홈구장인 한밭구장에서 박찬호의 은퇴와 관련된 컨텐츠를 박찬호와 조율하고 있다고 하니 한화 이글스 팬이라면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30] 양학선 선수는 카잔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31] 절을 하지 않고 묵념만 한다.[32] 야구선수들 중에는 유백만, 김재박, 방수원, 윤석민 등 골프에 재능이 있는 선수들이 꽤 많다. 앞뒤로 치는 야구의 스윙 궤적과 위아래로 치는 골프의 스윙 궤적은 다르지만 막대기를 휘둘러서 공을 앞으로 보내는 것은 원리가 같아서 스킬을 습득하는 능력이 매우 빠르다.[33] 해당 기사를 쓴 기자는 야구를 담당하는 스포츠매체 기자가 아니라 신세계그룹을 출입하는 경제매체 유통 담당기자다. 신세계그룹이나 이마트 홍보실에서 떠도는 얘기가 와전됐을 가능성이 있다.[34] 정용진 구단주와 종종 골프 라운딩을 같이 하기도 하고 SNS를 통해서도 대화를 자주 나눌 정도로 친분이 깊다. 정 구단주의 주방에도 초대돼 요리 대접을 받는가 하면 SSG 홈경기에서 시구를 한 적도 있다.[35] 선수 생활은 다저스에서 더 길게 했고, 샌디에이고에서는 1년 반 정도 활약했으나 은퇴 후 구단 특별 고문으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36] 그나마 다른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시구자로 나섰거나,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인물이 마운드에 섰다면 조금 나았겠지만, 만약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시구자로 등장했다면 엄청난 비판을 받았을 상황이다.[37] 박찬호의 고향인 공주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38]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던 은지원이 가장 먼저 입수를 함으로써 다른 멤버들은 빼도박도 못하고 전원 입수를 하게 되었다.[39] 상술한 입수도 자기가 머무는 대신 건 조건이다.[40] 심지어 자기는 안 그랬다고 잡아떼면서 직접 재연하려다가 꽈당 넘어지는 등 몸개그도 했다.[41] 정작 박찬호는 멤버들의 코골이 소리 때문에 차라리 밖에서 자는 게 나았겠다며 텐트로 가겠다고 했다. 다만 이미 텐트는 걷어버려서 안에서 잤다.[42] 당시 1박 2일은 조작논란에 항상 시달려왔다. 그 몸값 높은 스타들이 밖에서 자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결국엔 밤새 텐트를 촬영하고, 발자국도 남지 않게 그 주변으론 지나다니지도 않았다. # 스태프 전원이 호우가 내리는 날에 야외취침까지 한 적도 있는데[43] 박찬호와 최용수의 결혼식때 사회를 봐주기도 했다. 양준혁, 홍명보랑도 친분이 있다.[44] 류현진 편 출연[45] 이광용 아나운서는 박찬호의 말이 길어질 것 같은 상황이면 적당히 끊으면서 '토크 방지턱'이라는 칭호도 얻게 되었다.[46] 이런 상황에선 투수가 부담을 느낀다, 저런 모습은 투수가 타자를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공을 던진 직후 투수는 한 명의 내야수다 등등등.[47] 김현수가 타격에 나설 때 박찬호가 "캡틴… 큐!"라고 외치면 김현수가 큐 사인에 맞춰 실제로 의미 있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물론 박찬호의 큐 사인과 김현수의 타격 성공에 과학적인 연관 관계는 없다.[48] 사실 동등한 수준이라는 것도 그나마 후한 의견이고, 박찬호가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본인의 인지도만으로 국제 대회에서 해설을 맡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이순철보다 훨씬 심한 케이스다.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아예 "내가 그 이순철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라는 말이 나올 정도.[49] 추가로 항저우 아시안 게임 결승전 당시 "깡 있는 깡백호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는데, 정작 그 '깡'을 없앤 장본인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해설이 아니더라도 껌 씹는 장면만 보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강백호의 소속팀인 kt wiz 팬들에게 비판과 지탄을 받고 있다.[50] 해설을 하는 도중 문장의 끝맺음을 못하는 경우가 잦고, 상단에도 서술했듯이 어눌한 말투와 말을 버벅이는 단점이 있다. 처음 해설할 당시에만 해도 큰 비판을 듣지는 않았으나 해설 경험이 꽤나 쌓이고 나서도 발전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 야구 팬들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51] 최소한 대표팀으로 발탁된 선수들의 기본 정보 정도는 숙지하고 있는 게 해설위원으로서의 자질이라고 볼 수 있는데, 상단에 서술했듯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다.[52] 국가대표 선수로서 국가를 대표한다는 책임감과 정신력, 투지, 태도 등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박찬호의 경우 특정 상황에 대해 정확한 피드백을 제시하기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열심히 해야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정신력과 투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식의 구시대적 가치관을 들이미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53] 박찬호는 한국 야구인 중 가장 큰 영향력이 있다고 볼 정도로 아구계의 큰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방송에서의 발언 하나가 한 선수의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목이라는 점은, 박찬호도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야구 팬과 비 야구 팬 모두에게 유명해진 강백호 껌 사건 외에도 구설수가 생겼던 적이 있는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야구 예선전 경기 도중 박찬호는 오재원이 타석이 들어서자 자신을 힘들게 했던 기억이 있는 선수라며 오재원에게 정정당당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

해설을 하던 박찬호는 과거 한화 이글스 시절 오재원과의 승부에서 몸 맞는 공에 대한 시비가 있었는데 박찬호는 당시 상황에 대해 "풀카운트 승부였는데 오재원이 땅볼을 쳤다. 그런데 발에 공이 맞았다고 우겨 파울로 인정됐다."라면서 "안 맞은 공이었다"고 덧붙혔다. 이를 들은 네티즌들이 팩트 체크도 없이 오재원을 비난하기 시작하자 오재원은 절대로 그런 적 없다며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했고 이후 박찬호는 대만과의 결승전 중계에서 다시 오재원을 언급하며 "후배를 힘들게 한 것 같다, 팬들이 내 홈페이지에 당시 경기 장면을 캡쳐해 보내줬다"면서 오재원이 타구에 맞았음을 뒤늦게 인정했다.

이 때의 갈등으로 인해 피해자인 오재원이 2023년 덴 메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박찬호를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만 오재원 역시도 자신이 피해를 받았던 내용을 대중에게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했고 오히려 상황에 맞지 않는 언행을 보여 여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박찬호/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의 6.2 문단 혹은 오재원/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의 4.2 문단 참고.
[54] 강백호가 소속된 kt wiz는 팀 역사가 짧은 신생 팀이다 보니 중장년 팬층이 다른 팀보다 작다. 문제는 중장년 팬들은 갈매기 마당처럼 국수주의, 지역주의, 유교탈레반 기질이 워낙 강하다 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특정 선수를 기용해주지 않거나 여러 이유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야구를 잘하든 인성이 어떻든 신경도 안쓰고 무조건 찍어놓고 욕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 강성 팬 커뮤니티들이 좌우 가리지 않고 중장년층 커뮤니티를 강하게 탄압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55] 실제 박찬호는 고등학교 때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밤에 공동묘지에 혼자 가서 방망이질을 하거나(이 일화는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일부러 미팅에 나가는 등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대학 1학년 때는 선배였던 구대성이 뻔뻔함을 길러주기 위해 지하철 잡상인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잡상인은 불법이라 현 시점에서 한다면 바로 지하철보안관이 승차하여 제재한다.[56] 내가 원하는 것은 선발투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꿈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현실을 이해하고, 그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57] 배리 본즈가 73홈런을 때려낸 게 박찬호의 전성기인 2001년이다.[58] 이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은 뒤에는 히스패닉 선수들과 제대로 소통을 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추가로 공부했다고 한다.[59] KBO 리그 최저 연봉이다. 박찬호/2012년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사실상 연봉 0원이다. 한화는 박찬호를 영입하면서 적지 않은 연봉을 준비하였었는데, 박찬호가 오히려 연봉 0원으로 하겠다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규정상 선수에게는 최저 연봉은 줘야 하므로, 딱 그만큼만 받은 것. 대신, 한화는 박찬호에게 주려고 했던 6억 원 상당의 금액을 유소년 야구에 사용하라고 기부를 했다. 박찬호 역시 연봉 전액을 같이 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사비를 더 기부하였다고 한다. 사실상 박찬호는 자기 돈을 써가며 KBO에 봉사하면서 뛴 셈. 덤으로 박찬호는 KBO 리그 최저 연봉이 이렇게 적은 줄 몰랐다고 언급하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대략 2,000이닝을 던지면서 969억을 벌었으며, 이닝당 4,800만 원 정도로 계산할 수 있다. 박찬호가 2,400만 원을 어떻게 보는지 대충 가늠할 수 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은 5억이 넘는다.[60] 달러와 엔화는 모두 2021년 10월 23일 환율 기준으로, 해당 시절 가치가 반영되지 않았으니 참조만 하길 바란다. 광고 등의 추가 수익도 있으니 오차범위도 생각해야 한다.[61] '외화 벌이'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박찬호를 보기 위한 야구 팬들의 입장료, 한국에서 박찬호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들어간 돈 등등을 제외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메이저 당시 세금은 미국에 낸다. 물론 단순 외화 벌이로 국위 선양하는 선수들의 가치를 폄하할 순 없다.[62] 물론, 서류 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본인이 계약 후 전부 기부 했다.[63]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게이오기주쿠대학와세다대학을 잇는 일본 3위의 명문 사립대학이며 김수환 추기경이나 호소카와 모리히로 前 일본총리 같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대학이다. 일본 성우계에서 부자로 유명한 성우 우에사카 스미레도 이 대학 출신.[64] 정식 명칭은 '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한국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미슐랭 2스타를 획득한 임정식 쉐프나, 마스터 쉐프와 냉장고를 부탁해로 유명한 송훈 쉐프등을 배출한 명문 요리학교다.[65] 흑마늘을 훅마늘로 적어놨다.[66] 여담이지만 박충서의 아버지 박용구는 개혁 성향의 인물로 조용수의 민족일보 창간에 큰 기여를 한 결정적 후원자였다. 훗날 이와 관련해 시국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박정희로부터 모종의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 이후 박정희가 박용구 대신 선택한 사람이 신격호라는 이야기가 있다. 박용구는 재능 있는 유학생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고 아들 박충서가 이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혁 성향의 박용구가 세운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인물 중 하나가 허문도. 이래저래 박찬호는 한국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집안에 사위로 들어간 셈.[67] 'i'll be Nomo. You can be Jose Canseco.'[68] 마늘 문서에 나와있다시피, 알리신은 입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특유의 냄새를 발산한다. 그런데 마늘은 한국 음식의 아이덴티티로 여겨질 만큼 거의 모든 한국 음식에 들어가며, 한국인의 1인당 마늘 소비량은 외국인에 비해 넘사벽 수준이다. 보통 적응하여 느끼지 못하지만, 외국에서 오랜 기간 살다 입국한 사람이나 오신채를 먹지 않는 승려의 경우, 그냥 거리에서조차 약간의 마늘 향을 느낄 정도라고 한다.[69] 치즈 냄새도 그렇지만 특히 덩치가 크고 땀이 많이 나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인들 입장에선 아주 심한 암내가 난다.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이들과 땀 흘리면서 운동하는 건 여간 곤욕이 아니다. 근데 반대로 외국인 입장에서 마늘은 안 그래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인데 마늘 좋아하는 사람도 한국 사람처럼 몸에 배어 있는 정도로 나면 엄청나게 괴롭다(치즈 좋아하는 외국인도 백인들 냄새는 괴롭듯이). 이걸 갖고 인종차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식습관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몸에 배어 있는 냄새는 진짜 견디기 힘들다.[70] 아마 참기름 냄새가 원인이지 않았을까 싶다. 2020년도에 진입한 시대에도 간간히 영미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71] 당시 이런 분위기와 언론을 비판했던 딴지일보의 기사 제목은 '박찬호가 노모를 줘패란 말이냐?'였다.[72] 다른 한 명은 현재 키움 히어로즈 감독인 홍원기.[73] 근데 컬투정찬우는 "왜 울지? 돈 많이 벌지 않나? 연봉이 얼만데 울어? 더 이상 태극마크를 달 수 없다는 게 슬프다니, 은퇴는 자기가 하는 거 아닌가? 나라에서 강제로 시킨 거 아니잖아. 자기가 은퇴해놓고 왜 울어? 그럼 그냥 계속 하면 되잖아"라는 말을 진심을 담은 말투로 해서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74] 당시 동인천 인근에는 미림극장, 애관극장 등 오래된 극장들이 많아 옛날식 영화 판넬을 그리는 화백들이 많았다.[75] 한때 박찬호가 부진했을 때 역술인이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했는데 바꾸면 좋은 이름 중 하나가 찬빈이었다.[76] 미국 한의사인 박찬호의 친동생인듯 하다.[77] 당시 자기 월급을 꼬박꼬박 한국 가족한테 송금한터라 박찬호 자신한테는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78] 실제로 극 중에서 진짜 싸인볼이라는 언급이 있다.[79] 북미 수출명은 몬테로로, 한국에서는 현대 갤로퍼로 라이센스 생산된 차 맞다.[80] 여담이지만 이 당시 쌍용자동차는 박찬호에게 자사의 SUV 차량을 한 대 제공하려고 했지만 미국 내 수입실적이 없는 자동차 회사의 모델은 통관시킬수 없다는 규정으로 인해 불발됐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 쌍용차는 마라토너 황영조에게 자사 SUV인 쌍용 무쏘를 협찬해 준 바 있는데 정황상 박찬호에게도 무쏘를 협찬해주려고 했던 걸로 보인다.[81] 1위는 총액 2000억 3000만원을 기록한 추신수로 총액 1521억 4000만원을 기록하면서 2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류현진이 향후 연봉에 따라 1위 자리에 오를 가능성도 있으나 이 기록 또한 1497억 5700만원을 벌어들인 이정후가 갈아치울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82] 가장 어린 선수는 당시 다저스의 동갑내기 팀 동료 이스마엘 발데스였다.[83] 1위는 당시 애리조나 소속의 랜디 존슨. 무려 347개.[84]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전 8이닝,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전 17이닝, 밀워키 브루어스 전 7이닝,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회 실점까지 무실점 피칭을 펼쳤으며 당시 타고투저시대에 나온 값진 기록, 참고로 ML최고기록은 오렐 허샤이저의 59이닝 무실점[85] 당시 다저스 선발 최다이닝. 2013년 클레이튼 커쇼가 236이닝으로 경신한다.[86] 랜디 존슨은 이닝 2위, 삼진 1위였고 커트 실링은 이닝 1위, 삼진 2위였다.[87] 자책점 2점은 당시 알루미늄 배트가 허용된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허용한 실점이었고 이후 참가한 국제 대회에서 13이닝 무실점 3세이브 활약을 펼쳐 합법적 병역 브로커의 면모를 보여주었다.[88] 1호 2000년 8월 24일 몬트리올 엑스포스 홈 경기(허용 투수 하비에르 바스케스), 2호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원정 경기(허용 투수 우디 윌리엄스), 3호 2009년 4월 25일 플로리다 말린스 원정 경기(허용 투수 크리스 볼스태드). 재미있게도 세 홈런 모두 투수에게 극도로 유리한 구장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홈런을 달성한 경기와 얽힌 사연도 있는데, 1호 홈런 경기가 있던 날 경기 전 행사로 당시 유학 중이던 가수 양파다저 스타디움에 공식 초청되어 미국 국가를 불렀고, 2호 홈런 경기는 박찬호의 프로 첫 완봉승 경기였다.[89] 사실 옆으로 안 차고 돌려차기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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