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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26호 | |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靑磁 ‘淳化四年’銘 壺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분류 | 유물 / 생활공예 / 토도자공예 / 청자 |
수량/면적 | 1개 |
지정연도 | 2019년 5월 2일 |
제작시기 | 고려 성종 12년(993) |
<colbgcolor=#315288>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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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靑磁 ‘淳化四年’銘 壺. 청자 '순화4년' 명 항아리는 고려청자 항아리로, 항아리의 아래 밑바닥에 '순화 4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여기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청자 '순화4년' 명 항아리는 현전하는 고려청자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할 것으로 추정되며, 명문이 남아있는 청자 가운데서는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1] 순화(淳化)는 북송의 연호로 순화 4년은 고려 성종 12년, 서기 993년이다. 이에 따라 이 항아리는 993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또한 이 항아리가 고려왕실의 태묘에서 향을 피우기 위한 용도였다는 것 역시 명문에 적혀 있다. 태묘는 왕실의 종묘를 뜻하는데,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에 고려왕실의 태묘 터가 위치하고 있다.[2] 하지만 이 항아리에 남은 명문에 태묘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었음이 적혀 있긴 하나, 이 항아리가 개풍군에 위치한 태묘 터에서 출토된 것인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아마도 태묘 터에서 출토된 것이겠으나, 출토지 등의 관련 정보가 확실하지 않아 도굴로 유출된 유물로 추정된다.
청자 '순화4년' 명 항아리는 이미 1963년에 보물 제237호로 지정되었으나,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2019년 5월 2일에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보 제326호로 승격 지정되었으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2. 내용
높이 35.3cm, 입지름 20cm, 밑지름 6.8cm 크기의 황갈색의 항아리로, 표면에 특별한 문양은 발견되지 않으며 유약이 흘러내린 자국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또한 이런저런 흠집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는 상당히 우수하다.유물의 이름에는 청자가 들어갔는데 육안으로 보이는 색깔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청자의 비색과는 영 딴판인 황갈색인지라 왜 청자라는 명칭이 붙었는지 의구심이 들 수 있다. 실제로도 이 때문에 '순화4년' 명 항아리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서 이 항아리를 청자로 봐야할지 백자로 봐야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일반적으로는 중국에서 청자 제작 기술이 고려에 전래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인, 기술적 완성도가 아직은 꽤 미흡한 초기 상태에서 만들어진 불완전 청자로 보고 있다. 언뜻 보았을 때는 황갈색만 보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전체적으로는 약하게나마 담녹색이 발견된다는 것과 항아리의 형태, 항아리에 발린 유약의 특질을 통해 초기 고려청자로 간주하는 편이다.
청자 '순화4년' 명 항아리는 그 밑바닥에 새겨진 명문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밑바닥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淳化四年癸巳太廟第一室享器匠崔吉會造
순화사년계사태묘제일실향기장최길회조
뜻을 풀이하자면, '태묘의 제1실에 (안치한) 향그릇으로 장인 최길회가 순화 4년인 계사년에 만들었다' 는 것이다. 여기서 태묘의 제1실은 고려의 태조인 왕건을 모시는 곳으로, 이 항아리는 왕건의 신주를 모신 방에서 향을 피우는 항아리였던 것이다. 유교가 자리잡고 있던 시기인 고려시대에, 왕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종묘 시설에 안치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그것도 특히 나라를 건국한 태조의 신주를 모시는 방에서 쓰는 물품이라면 대단히 심혈을 기울여 당대 최고의 장인이 만들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물품이 청자로서는 아직은 턱없이 미흡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청자 '순화4년' 명 항아리가 만들어진 993년 경에는 청자 제작 기술이 미숙한 단계였다는 것도 역시 추측 가능하다.순화사년계사태묘제일실향기장최길회조
사실 현전하는 고려청자들 거의 대다수에는 이와 같은 명문이 없고, 그 태반이 도굴로 출토된지라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관련 정보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청자 '순화4년' 명 항아리에 새겨진 명문이 가지는 가치는 아주 높다. 제작년도, 용도와 사용처, 제작자 등의 정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청자 '순화4년' 명 항아리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항아리가 출토된 장소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과 만들어진 장소는 명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본래의 고려 태묘는 고려 성종 8년인 989년에 건설을 시작해서 성종 11년인 992년에 완공되었다고 나오는데[3], 그 위치는 개성 근처에 위치한 현재의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였다. 하지만 이후 몽골의 침략이 있자, 고려 왕실이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함과 함께 태묘도 같이 옮겨가게 되면서 본래의 태묘는 폐허가 되었고, 고려 원종때 다시 개성으로 돌아오면서 폐허가 된 태묘를 재건 하였다가, 고려가 멸망하면서 또 다시 헐리는 등 부침을 반복하였다. 그런데 이 항아리가 과연 저러한 과정 동안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태묘를 계속 따라 다녔을지, 아니면 중간에 버려져 어딘가 폐허에 남아 있다가 발견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항아리가 만들어진 장소는 어느정도 추측이 가능한데, 역사학자들은 이 항아리의 제작지를 황해도 배천군 원산리에 있는 도요지[4]로 추정한다.[5][6] 1989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에 의해 행해진 원산리 도요지 1~4호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잔이나 파편 등에서 순화3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청자 '순화4년' 명 항아리 역시 제작 스타일이 비슷한 원산리 도요지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산리 도요지는 고려의 수도 개성과도 약 20km 가량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기도 하다.
청자 '순화4년' 명 항아리는 익히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본 항아리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청자의 발전 과정에서 현전하는 제일 초기 작품으로 볼 수 있다는 점, 절대 연대와 제작 정보가 명확하다는 점 등의 학술적인 여러 측면에서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2019년 5월 2일에 국보 제326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 한국 미의 재발견 - 도자공예: '순화 4년'이 새겨진 항아리
- 시사상식사전: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 두산백과: 청자순화4년명호
4. 국보 제326호
고려 태조의 태묘 제1실의 향을 피우던 높이 35.2㎝의 항아리로 최길회가 만들었다.
『고려사』에 보면 태묘는 고려 성종 8년(989) 4월 15일에 착공해서 성종 11년(992) 12월 1일에 만들었으며, 이 항아리는 태묘가 준공된 이듬해인 ‘순화 4년〈성종 12년(993)〉’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에 태묘 터가 있지만, 이 항아리의 출토는 알 수 없다. 항아리의 굽 밑에 ‘순화 4년…’으로 시작되는 18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유색은 청자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은 담록빛을 띠는 회색 계열이며, 바탕 흙은 회백색의 자기에 가깝다.
형태와 유약 등의 특질을 보면 중국 당나라 후기 5대의 중국 월주 청자의 여운을 짙게 풍기고 있으며, 고려 청자가 만들어지는 초기의 상황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유물이다.
『고려사』에 보면 태묘는 고려 성종 8년(989) 4월 15일에 착공해서 성종 11년(992) 12월 1일에 만들었으며, 이 항아리는 태묘가 준공된 이듬해인 ‘순화 4년〈성종 12년(993)〉’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에 태묘 터가 있지만, 이 항아리의 출토는 알 수 없다. 항아리의 굽 밑에 ‘순화 4년…’으로 시작되는 18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유색은 청자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은 담록빛을 띠는 회색 계열이며, 바탕 흙은 회백색의 자기에 가깝다.
형태와 유약 등의 특질을 보면 중국 당나라 후기 5대의 중국 월주 청자의 여운을 짙게 풍기고 있으며, 고려 청자가 만들어지는 초기의 상황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유물이다.
[1] 애초에 명문이 남아 있는 청자 자체가 거의 없기도 하다.[2] 개풍군은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 상으로는 개성시에 속한다. 남북분단 이후 경기도-개성시-황해북도-개성시의 순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본 문서에서는 이북 5도에 대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라 경기도로 표기한다.[3] 여기서 이 항아리가 태묘가 완공된 다음해(993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陶窯址=요지 또는 가마터[5] 배천군은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 상으로는 황해남도에 속한다. 남북분단 이후 황해도-황해남도의 순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앞서 언급된 개풍군과 마찬가지로, 본 문서에서는 이북 5도에 대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라 황해도로 표기한다.[6] 원산리는 본래 봉천군 소속이었다가 1992년 배천군으로 이관되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원산리 도요지의 소재지가 봉천군과 배천군 두 개로 혼용되는데 2003년 기준으로는 배천군 소속이다.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 : 황해남도 배천군 역사(행정구역) 이는 2019년 현재도 변경없이 동일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