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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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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안 배경2. 생애 초기
2.1. 교현허소의 평가2.2. 건석의 숙부를 때려 죽이다2.3. 황건적의 난 이후 낙향2.4. 하진의 패망을 예견하다2.5. 여백사를 죽이다2.6. 반동탁 연합
3. 군웅할거4. 협천자
4.1. 유비를 받아들이다4.2. 전투(장수와의 대결)4.3. 수춘 전투(원술과의 대결)4.4. 양 전투(유표+장수와의 대결)4.5. 하비 공방전(여포와의 대결)
5. 관도 전역
5.1. 수고를 격파하다5.2. 관도대전 전초5.3. 유비를 격파하다5.4. 백마 전투5.5. 연진 전투5.6. 관도대전5.7. 관도대전5.8. 창정 전투
6. 하북 전역
6.1. 여양 전투6.2. 원가 내분6.3. 여광여상의 귀순6.4. 전투6.5. 하북 평정
7. 적벽 전역8. 적벽 이후

1. 집안 배경

삼국지》〈무제기〉에는 조조가 전한개국공신조참의 후손이라고 한다. 한편으로 조조는 권력의 정점에 서자 자신이 쓴 《가전(家傳)》에서 스스로 조숙진탁(曹叔振鐸)의 후예라고 하였다. 진사왕 조식은 《무제뢰(武帝誄)》에서 목무황(穆武皇)은 직(稷)의 후예라고 하였는데 배송지는 '이는 앞에서 말한 것과 다르다.'라고 하고 있다.

한편 조조의 아들 조비는 자신의 종족이 (舜)[1]전욱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나 이 역시 후세의 조작으로 보인다. 한나라의 화덕을 순의 토덕을 이은 조씨가 이었다는 논리로 주장한 것인데, 경초(景初)에 이르러 조예고당륭의 견해에 따라서 위를 (舜)의 후예라 하였다. 그러다 나중에 위는 《선진문(禪晋文)》에서 “옛날 우리 조상은 (虞)였다.”고 하였는데 이 쯤되면 자기네 조상을 누구로 하고 싶은 건지 헷갈릴 정도. 오죽했으면 위의 신하인 장제고당륭의 견해를 반박하고 역시 조씨의 조상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언급을 않았으나, "위는 순의 후예가 아니므로 종족과 함께 나란히 제사를 올릴 수는 없으므로 태조를 끌어내려서 하늘과 함께 제사를 올리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지》〈무제기〉에 주석으로 달린 《조만전》에선 조숭하후씨(夏侯氏)(즉 한나라의 개국 공신이었던 하후영)의 자손으로 하후돈의 숙부이기에 조조는 하후돈에게 있어 종부형제(從父兄弟)가 된다고 한다고 적혀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자식이 없던 중상시 조등의 양자로 들어갔다.[2] 조등은 환관이었고 결국 조조는 환관의 손자가 되는 셈.

십상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환관들의 세력은 대단했고 조등은 그중에서도 엄청난 인물이었다. 아니, 엄청난 수준이 아니라, 저 십상시들이 따위로 보일 정도의 전설 중의 전설이자, 당장 저 십상시 대장이었던 장양이 수발을 들며 시종 노릇을 했을 정도다. 따라서 재산이며 권력이 어마어마했고 조숭 역시 그 덕으로 관직을 살 수 있었다.[3] 조조 역시 그 덕을 본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분명 조조보다도 더 뒷배경이 좋은 인물들[4]은 존재했으며 조조는 그들보다 유능했기 때문에 화북의 1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생애 초기

일부 문헌에서 조조가 덕행과 학업을 닦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해지는 바람에 조조가 양아치짓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조조가 남긴 글이나 행적으로 봐서는 이런 고사는 어느정도는 과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조의 문학적, 군사적 재능이나 정치력을 볼 때는 도저히 조조가 젊었을 때 놀기만 하고 학문을 닦지 않았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학식이 거의 없는 자가 조조처럼 손자병법을 주해[5] 하고 많은 시를 남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아래 나오는 고사들중에는 조조를 폄하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 고사들의 출처인 <조만전>과 <세설신어>의 내용을 공식사서처럼 보는 것은 조금 무리하다. 조만전은 적국인 오나라에서 펴낸 서적인데다가 조조의 아명을 직접 제목으로 쓴 것으로 봐서는 조조를 폄하할 의도도 있었을 것이며, 이는 현대에도 특정 정치인을 깎아내리기 위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면 무리가 없을 것다. <세설신어>는 이미 남북조시대부터 대부분의 내용이 픽션으로 알려져 있었다. 픽션의 한자어 번역인 "소설"이 바로 이 세설신어의 작은 단편들을 가리키는데서 유래했다. 즉 이 두 책의 내용이 조조의 어린시절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한다면 오류가 될 가능성이 많다.

실제 위나라의 공식 사서《위서》[6]에서는 조조가 공무에서 물러났을때는 학문과 사냥에 열중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위서가 어용사서라는 비판은 있지만 최소한 실제 조조의 생애에서 그가 보여준 학문적인 배경을 잘 설명한다는 점에선 오히려 조만전이나 세설신어 류보다 더 이 부분에선 기록상 설득력이 있다. 다만 조만전과 위서 공통으로 조조가 사냥을 매우 좋아했다는 부분은 교차검증이 되므로 어릴적부터 사냥을 즐기며 야외에서 노니는 걸 즐긴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조만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조조는 어려서 사냥을 좋아하고 방탕무도(遊蕩無度)하여 그의 숙부가 이에 관해 여러 번 조숭에게 일러바쳤다.

조조는 그 뒤 길에서 숙부를 만나자 거짓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입을 삐뚤어지게 하고는 "갑자기 심한 풍병에 걸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숙부가 이를 조숭에게 말하자 조숭이 경악하여 조조를 불렀는데 조조의 얼굴은 멀쩡했다.

조숭이 "네 숙부가 말하길 네가 풍에 걸렸다고 하는데 이미 나았느냐?"고 물으니 조조는 "애초에 풍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숙부의 사랑을 잃었으니 이 때문에 무함을 받은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이에 조숭이 (숙부의 말에) 의심을 품게 되었고 이후로 숙부가 고하는 일이 있어도 끝내 다시 그 말을 믿지 않아서 조조는 더욱 제멋대로 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設新語)》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건 위나라 시대에 나온 야사라서 딱히 신뢰성은 없다.
명문 가문의 원소와 환관 가문 출신 조조는 서로 배경은 달랐지만 의협심이 강한 청년들이었다. 젊은 시절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는데, 유협(遊俠)놀이에 빠져 있던 어느 날, 고을에 시집가는 아가씨를 몰래 보쌈해 가지고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일이 실패하여 도망치다가 원소가 가시덤불에 걸렸다. 가시에 찔린 통증 때문에 원소가 꼼짝 못하고 주저앉자 조조가 "범인이 여기 있다!"라고 외친 후 자신은 내뺐다고 한다. 이에 원소는 뒤쫓아오는 사람들을 보고 통증도 잊고 가시덤불에서 빠져나와 도망쳤다.

한숨을 돌린 뒤, 원소가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자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네가 가시덤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겠나?"

손성의 《이동잡어》(異同雜語)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조조의 무예 실력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 기록에 대한 판단은 알아서 하자.
태조가 일찍이 중상시 장양(張讓)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장양에게 발각되었다. 그러자 뜰에서 수극(手戟)을 휘두르다 담을 넘어 달아났다. 무예가 남들보다 뛰어나니 능히 그를 해칠 수 없었다.

태평어람》에 기재된 《위씨춘추(魏氏春秋)》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무왕(조조)은 체구는 왜소하지만 의기양양하였다.

2.1. 교현허소의 평가

오직 양국(梁國)의 교현남양하옹만이 그를 남다른 인물로 여겼다. 교현은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인물인데 조조를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지면 세상을 구제할 인물로 평했고 교현의 평으로 조조의 명성이 더욱 늘어났다.[7]

이에 조조가 허소를 방문하니 당대에 인물 평론으로 유명했던 허소가 조조를 보고 평가한 말은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8] 조조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2.2. 건석의 숙부를 때려 죽이다

조조는 진수 공인으로 젊은 시절 (총명하긴 하나) 방탕한 생활을 하며 학업을 게을리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뒷배경 덕분에 20세가 되자 무난히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곧 낙양북부위(落陽北部尉, 수도 북문의 경비대장)에 봉직하였다.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가 네 문(門)을 수리하고 5가지 색깔의 봉(棒)을 만들어 문의 좌우에 각각 10여 매씩 걸어 두고 금령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는 자들을 피하지 않고 모두 예외없이 규정을 칼같이 적용해서 봉으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십상시의 한 명인 건석(蹇碩)의 숙부를 엄정하게 다스린 일화는 유명하다. 건석의 숙부가 조카의 권세를 내세우며 통금 시간 이후에 지나가려 하자 "이곳은 천자가 계신 도성의 관문이고 사사로이 열어주었다간 도적들도 쉽게 드나든다"며 기어이 곤장을 때렸다.[9] 그런데 판본에 따라 약간에 차이는 있긴 하지만 매를 맞다가 숙부란 자가 죽어버렸다.[10] 헌데, 그러든 말든 조조는 난 법대로 했다면서 당당히 굴었고, 이로 인해 조조의 명성이 더욱 알려졌다.

이에 십상시들은 머리 끝까지 빡치긴 했는데 조조는 난 규정대로 했을 뿐이다로 일축하니 대놓고 처벌도 못하는 데다가 자기네들의 최종보스의 손자이기까지 하니, 명분으로도 인맥으로도 감히 조조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이후 십상시가 이 사건으로 인해 조조에게 지불한 대가라는 게 고작 보직이동이 전부였다. 심지어 법으로 철저히 따지기에도 명분이 마땅치가 않았던지라 결국 조조를 잘라내기는 커녕, 승진이라는 명목 하에 지방 현령이라는 한직으로 보내버리는 걸로 끝났다.

사실 이런 짓을 하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벼슬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조조의 뒷배경이 만만치 않았던 덕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십상시의 친족을 엄격하게 벌주었던 왕윤은 나중에 십상시에게 보복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2.3. 황건적의 난 이후 낙향

북부위의 사건 이후 곧 승진하여 돈구현 현령으로 임관되었고 그 뒤 승진하여 의랑이 되어 낙양으로 돌아온다.

조조는 의랑 시절 영제에게 여러 일을 상소하였는데, 이는 부정부패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영제는 조조를 기특하게 여긴 듯하였고 그의 청을 들어주는 듯하였으나 십상시들이 득세하던 조정에서 그것이 먹힐 리가 없었고 곧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에 낙담한 조조는 상소를 그만둔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로 임명되어 싸움에 참여하였고 영천(潁川)의 적(賊)을 토벌한 공으로[11] 제남상이 된다. 제남상이 되자 그곳에서 조조는 관내의 18현 가운데 8현의 장리를 면관시키고 사당을 때려[12] 부숴 재물을 갈취하는 일을 막는 등의 선정을 베푼다.

그 뒤에 경사(낙양)로 불려가 동군태수로 전임되나, 그동안 황제 측근의 권신들에게 여러 번 밉보였기 때문에 집안이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해 질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낙향한 뒤에는 성 밖에 별장을 짓고 독서와 사냥에 매진하며 지냈다.

이 무렵 왕분, 허유 등이 영제 폐위 계획에 조조를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거부한다. 결국은 계획은 실패하여 왕분은 자살하고 만다.
영제 말년, 유비는 일찍이 경사(京師-수도)에 있다가 그 뒤 조조와 함께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다. 때마침 영제가 붕어하자 천하에 대란이 일었는데, 유비 또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 데 종군했다.

한편 《영웅기》에 따르면 정확한 시점을 특정하기 어렵지만 영제 말년에 조조는 유비를 수도에서 만난다. 이 시기 유비는 여러 미관말직을 전전하면서 떠돌고 있었는데 이때 잠시 경사에 있다가 조조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조조는 이후 유비와 함께 고향 패국의 무리를 모으는 일을 공동으로 맡았는데, 보면 조조는 영제 사후 나라의 혼란이 올 것을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고향에서 은근히 무리를 모으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13] 만나자마자 의기투합을 했는지 아니면 서로 나름대로의 꿍꿍이 속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거나 조조는 이때 유비와 함께 고향 패국에서 향후 있을지도 모르는 환란을 대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렸던 것 같다. 이 병력들은 영제가 붕어하고 동탁 집권 당시 혼란기에 수도에서 도망쳐 진류에 머물며 봉기한 조조의 군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조인전>에 따르면 당시 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자 조조의 종제인 조인도 또한 은밀히 젊은이들을 모아 천여 명을 얻어 회수(淮水), 사수(泗水) 사이에서 활약하다 마침내 조조와 합류해 별부사마가 되었다고 한다. 또 <조홍전>에 따르면 조조가 서영에게 변수에서 패한 후 고향인 초로 같이 도망친 조홍이 바로 가병 천여 명을 가지고 진온에게 가서 병력을 얻었다고 하니 만약을 대비해 고향에서 모은 무리의 수가 상당했었던 듯하다. 어쨌거나 최소 몇 개월 내지 몇 년간 조조와 유비는 같이 패국에서 머무르고 이후 동탁 토벌 때도 유비가 군사를 일으켜 진류에 머물던 조조와 합류해 행동을 같이 했던 셈인데 생각해보면 이 시기 관우, 장비조인, 하후연, 하후돈, 조홍 등이 패국에 모여있었다는 얘기가 되니 후일을 생각하면 기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4. 하진의 패망을 예견하다

한수의 반란이 일어나자 영제는 중앙군 강화를 위해 서원팔교위를 창설했는데 이 무렵 조조는 다시 수도로 돌아가 서원팔교위의 창설에 맞춰 전군교위(典軍校尉)의 직책을 받는다. 서원팔교위 창설 이후 동탁이 집권하기까지 정치적 격변의 시기였으나 당시 조조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다만 기록으로 보면 조조는 원소처럼 적극적으로 정계에 나서기보단 뒤에서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나름대로의 꿍꿍이가 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우선 영제 사후 건석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하진이 환관들을 폐하기 위해 원소의 계책에 따라 동탁을 불러들인 것을 비웃으며 하진의 패망을 예견했다는 《위서》의 기록이 있는데 그 예견은 다음과 같다.
"엄수의 관원들(=환관)은 예나 지금이나 의당 있는 것으로 다만 세주(世主, 당대의 군주)가 부당하게 권력과 총애을 내린 것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미 그 죄를 다스리기로 했으면 응당 원흉을 주살하면 되는 것으로 이는 옥리(獄吏) 한 명으로도 족하다. 그런데 어찌 분분(紛紛)하게 바깥의 장수를 부른다는 것인가? 그들을 모두 주살하고자 하면 일이 필시 드러날 것이니, 나는 그 일이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겠구나."

조조가 신이 아닌 이상 급변하는 정세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세세한 변수까지 예측하며 하진의 패망을 알기란 불가능하므로, 위서에서 조조를 미화하기 위해 결과에 끼워 맞췄다고 보는 설이 우세하다. 하작은 거의 빈정거리듯이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그의 조부어떤 사람인데, 내시를 배척하며 말하겠는가?'라고 언급한다.

《위서》의 과장을 제하고 본다면 조조 자신부터가 조등의 손자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십상시처럼 영제의 측근 노릇을 하며 전횡을 휘둘렀던 일부 환관들에게는 비판적이었으나, 환관 세력 전체를 극단적으로 약화시키려던 원소 등 급진파의 의견에는 찬성할 수 없었으며, 동탁, 정원 등 외부의 장군들이 중앙 정계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파벌 대립이 시작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의견이 모이는 편.

삼국지집해》가 인용한 항세준(杭世駿)[14]이 조별전(操別傳)을 참고해 이른 말에 따르면 이 당시 조조를 전군도위(典軍都尉)[15]로 임명해 초(谯)로 돌려보냈다. 이때 패(沛)의 사졸이 함께 배반하여, 그를 습격했다. 조조는 위험에서 벗어나 달아날 수 있어, 평하정장(平河亭長)의 집에 숨고는, 조제남(曹濟南) 처사(處士)라고 칭하며, 8, 90일을 숨어 살며 발의 상처를 치료했다. 정장에게 이르길 "저 조제남이 비록 패했으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으니, 공께서 은혜를 베풀어 우차로 바래다주셔, 4, 5일을 왕래할 수 있다면, 저는 공께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정장이 이에 우차로 조조를 전송했는데, 아직 초까지 수십 리를 이르지 못해서, 기병이 조조를 찾음이 많았다. 조조가 휘장을 열고 그들을 꾸짖었다. 모두 크게 기뻐하며, 비로소 조조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2.5. 여백사를 죽이다

아직까지 크게 두드러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나름대로 입지가 있긴 있었는지 189년 9월에 소제 유변을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삼고 헌제 유협을 세운 동탁은 정권을 장악하자 조조를 효기 교위[16]로 임명했으나 조조는 임관을 거부하고 이름을 바꾼 채 샛길을 통해 동쪽으로 달아났다.[17]

조조가 고향으로 달아나는 과정에서 조조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여백사를 죽이게 되는데 이에 대해 《정사 삼국지》에서는 <무제기>에 단 배송지의 주석의 내용들이 서로 다르다. 《위서》는 조조의 행위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세어》나 손성의 잡기에서는 조조가 거나한 현상금이 걸린 자신의 목을 염려한 나머지 의심하여 그들을 죽인 것이라고 나온다.
태조(조조)는 동탁이 필시 패망할 것이라 여겨 끝내 취임하지 않고 향리로 달아났다. 수 기(騎)를 좇아 옛 친구인 성고(成皐)의 여백사(呂伯奢)를 방문했다. 여백사는 집에 없었는데, 그의 아들이 빈객들과 함께 태조를 겁박하여 말과 재물을 뺏으려 하니, 태조가 손수 칼로 쳐서 여러 명을 죽였다. - 왕침의 위서
태조가 여백사를 방문했는데, 여백사는 출행 중이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집에 있어서 빈주례(賓主禮)를 준비했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을 저버린 일로 자신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의심하여, 밤중에 손수 칼을 휘둘러 8명을 죽이고 떠났다. - 곽반의 세어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이를 자신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중에 그들을 죽였다. 그 뒤 몹시 처량하고 구슬프게 말하길,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고 하고는 길을 떠났다. - 손성의 잡기

관(關)을 나와 중모(中牟, 하남군 중모현)를 지나다가 도망자로 의심을 받아 붙잡혀 현으로 구금되었는데 읍인 중에 몰래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자 그에게 청하여 풀려났다.[18]

이 내용이 《조만전》에는 약간 다른데 하급 관원들이 이미 동탁의 글을 받아 보았으나 오직 공조(功曹)만이 내심 이 사람이 조조임을 알아보고 세상이 바야흐로 어지러워지는데 천하의 웅준(雄俊)을 구금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현령에게 아뢰어 조조를 풀어 주었다고 한다.

2.6. 반동탁 연합

한편 당시 중앙에서 입지가 전무했던 동탁은 지지도 확보를 위해 소제 폐위를 두고 자신과 격렬히 대립하다 낙양에서 도망친 원소를 사면하고 발해태수로 임명하는 것을 비롯해 명망 높은 인물들을 각지의 자사와 태수로 임명했다.

물론 발언력이 높은 원소가 반기를 들 것을 경계해 어사중승 한복기주으로 삼아 감시하게 하는 등 나름대로의 견제책을 세워두긴 했으나, 동군태수로 있던 교모가 동탁을 칠 것을 촉구하는 삼공부의 격문을 날조해 전국에 배포하자[19] 조야가 들끓었고, 이에 기주목 한복은 여론이 동탁을 떠났으며 원소에게 있다고 판단하여 원소의 거병을 추인하며 원소에게 붙어버려 각군의 무력 봉기가 현실화된다. 동탁에게 반기를 든 각 주군의 자사와 태수들은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며 연합해 하내, 산조에 제각기 모여든다.

당시 조조는 동탁에게서 막 벗어났고, 최종적인 관위가 중앙직인 효기교위였기에 지방에선 아무런 공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으나 연주 진류군에 이르자 가산을 처분해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주살하려 했다. 이때 조조는 진류 기오현에서 병사를 일으켰는데 이때 진류의 효렴인 위자가 조조와 만나 의기투합해 가산을 조조에게 대어 주어 병사를 일으키게 하니, 그 무리가 5천 명이었다.(189년 12월)[20] 이후 분무장군을 자칭하며 연합에 가담해 장막, 장초, 유대, 교모연주 지역의 관리들이 집결해 있던 산조에 도착한다.(190년 1월)[21][22]

제후국도 아니고 훗날의 절도사마냥 사실상의 군벌 케이스도 아니라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파견나간 관리들[23]이 서로 연합하고 군대를 조직해 중앙 정부를 공격한 일은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보기 힘든 사건이었다.

이는 동탁 정권이 기존의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하고 겨우 9살이었던 유협을 사실상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던 만큼 그 정통성이 바닥을 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탁은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경악하였고 이에 곧바로 소제를 살해했는데 이는 소제가 연합군의 구심점이 되어 복위 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제를 죽인 동탁은 190년 2월에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낙양에 남아있던 원씨 일족 60명을 주살한다. 원소가 연합군의 맹주이기에 그에 대한 보복을 저지른 것인데, 가뜩이나 명분이 모자란 동탁이 원씨 일족을 지나치게 잔인하게 죽이다 보니 원소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되면서 원소에 대한 평가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벌어지는데, 이걸 보고 있던 기주 한복은 원소의 위상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통제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군량 수송을 차단해 원소의 군대를 와해시키고자 했고, 이에 원소 등 하내에 집결한 연합군은 공세는커녕 고사 직전에 놓인다.

조조가 주둔하고 있던 산조의 연합군도 서로 눈치를 보며 나서지 않았는데 조조는 교전을 적극적으로 촉구했으나 장막 등 산조 지역의 관리들은 이를 거부했다.[24]

조조는 자신의 병력만을 이끌고 독단으로 공격해 들어갔으나 변수에서 서영의 반격을 받아 군이 와해되었다. 조조는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타고 있던 말이 상처를 입었는데, 종제(從弟)인 조홍이 조조에게 말을 주어 밤중에 달아날 수 있었다. 이때 서영은 조조군 다수가 궤멸되어 거느린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하루종일 신나게 조조군을 공격했으나 조조군을 완전히 궤멸시키는 데는 실패한듯, 산조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후퇴한다.

군대를 잃은 조조는 양주자사 진온의 협조를 받아 하후돈, 조홍양주로 가서 4천의 병력을 징병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예주 패국 용항현에서 병사들의 반란을 겪어 500여 명을 제외하곤 모두 흩어지게 된다. 이때 병사들이 밤중에 반란을 일으켜 조조가 머물던 장막을 불태우자 조조가 손수 검으로 수십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위서》에 남아있다. 이에 패국 질현, 건평현에 이르러 다시 군사 천여 명을 모으고 진군하여 원소가 있는 하내로 간다.

조조는 연합군의 행태에 질린 것으로 보이나, 상술한 상황 때문에 하내에 모인 연합군도 개판이긴 마찬가지였는데 유대교모가 서로 미워하여 유대가 교모를 죽이고, 왕굉으로 하여금 동군태수를 겸하게 했다.

원소는 한복과 타협해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 헌제는 동탁에 의해 옹립되어 정통성이 없으므로, 인격과 평판을 갖춘 황족 유우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조조는 이러한 계획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조조는 과정이 어떠하건 황제는 황제이니 황제가 두 명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현재의 황제를 인정하자는 쪽이었다. 그럼에도 원소는 유우 추대를 강행하고자 했지만, 막상 당사자인 유우가 완강하게 거절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반동탁 연합군은 초반에는 엄청난 위세를 보였지만 내부의 반목으로 동탁과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시간을 끌었고, 유우 추대로 구심점을 만드는 것에도 실패하면서 지리멸렬하게 해산되고 만다.(191년 1월)

3. 군웅할거

3.1. 동군 전투

반동탁 연합이 해산한 뒤 조조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으나 계속 하내에 머물면서 원소와 행동을 같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년 7월, 원소가 한복을 협박해 기주의 지위를 강탈한다. 당시 원소와 대립하고 있던 흑산적의 두령 수고, 우독, 백요 등은 연주동군과 원소가 다스리는 기주 위군을 침입했는데, 동군태수 왕굉이 이를 막지 못하고 패하자 원소는 조조에게 동군에 있는 흑산적을 치게 했고[25] 조조가 백요를 격파하고 승리하자 조조를 동군태수로 만든다.

조조는 동군을 근거로 흑산적, 황건적의 잔당, 흉노 어부라를 모두 대파한다.

3.2. 연주 구원전

한편, 연주황건적 잔당의 공격을 대규모로 받는다. 무리는 백만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큰 세력이었고 이를 격퇴하고자 하였던 연주자사 유대는 전사한다. 이때 조조의 부하였던 진궁[26]은 유대의 부하들을 설득해 조조를 후임자로 추대해 황건적과 싸우게 해야 한다고 했고, 제북상 포신[27]이 이를 적극 지지하고 나서면서 조조는 연주를 구원하고 유대의 세력을 흡수하게 되었다.

또한 조조는 항복해 온 병졸 30여만과 남녀 백여만 명 중에서 정예(精銳)한 자를 거두어 청주병(靑州兵)이라 불렀다.

이를 본 원소는 조조를 연주으로 삼고[28] 조조는 황건적과의 싸움 중에 포신이 죽는 등 상당히 고전했지만 결국 여러 차례 승리하면서 그들의 항복을 받고 100만에 이르는 인구를 흡수하여 막대한 자산을 갖게 되었고 연주의 최강 세력으로 부상한다.[29] 포신이 전사해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하자 조조는 매우 슬퍼하며 나무로 그의 형상을 깎아 후한 장례를 치렀다.

연주목이 된 조조는 속좁은 복수를 시작했다.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는 원한이 있으면 모조리 죽이고 울며 빌어도 끝내 살려주지 않았다. 당초 원충이 패상(沛相)이었을 때 조조를 법으로 다스리려 했고 또한 패국(沛國)의 환소(환엽)가 조조를 업신여겼던 일이 있었다. 조조가 연주목이 되었을 때 진류변양이 조조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자 조조가 변양을 죽이고 그 집안을 멸족하자 원충, 환소가 함께 교주로 피난을 갔다. 조조는 사자를 교지태수 사섭에게로 보내 그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환소가 자수하여 와서 뜰에서 절하며 사죄하자, 조조가 말하길, "무릎을 꿇는다한들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며 끝내 죽였다고 한다.

3.3. 원소공손찬의 대립

한편 원소공손찬계교 전투에서 대파했으나, 공손찬이 거마수에서 최거업을 격파하면서 전세가 장기화되고 있었다. 공손찬은 평원상 유비[30], 연주자사 선경[31], 서주 도겸[32]과 함께 원소를 사방에서 협공한다. 이때가 192년 겨울이다.(삼국지 무제기)

위치상으로 봤을 때 조조는 원소가 공손찬, 유비와 상대하는 사이 선경과 도겸을 정리하고 원술을 막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이며, 공손찬 진영은 모두 격파된다. 공손찬 본인도 용주에서 패배해 193년 초에 조정의 화친을 받아들이게 된다.

3.4. 원술을 격파하다

이듬해인 193년, 유표와 싸우던 원술은 잘 풀리지 않는 남쪽 전선에 질린 것인지, 조조의 성장세에 남북으로 협공당할 위협을 느꼈는지[33] 방향을 돌려 연주를 침입한다.[34] 당시 조조는 도겸을 견제하기 위해 견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곧바로 반격에 나서 원술을 격파한다.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꽤 큰 규모의 전쟁이었는지 원술은 흑산의 맹주 장연과 연합하고, 흉노선우 어부라를 끌어들여 조조를 남북으로 압박했다. 조조 또한 원술을 막기 위해 원소와 공동 전선을 펼쳤고 유표는 원술의 후방을 공략한 것으로 보인다.

원술이 진류군 봉구현에 주둔하며 부하 장수 유상을 광정에 주둔시켰으나 조조가 반격에 나서 유상을 공격하자 원술이 친히 이를 구원하러 나서 일대 접전이 벌어졌고 여기서 원술이 참패하면서 전세가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조는 퇴각을 거듭하는 원술을 계속 쫓아 예주까지 들어갔으며 원술은 아예 예주에서의 영향력을 포기하고 양주로 달아났으며 그곳에서 재차 기반을 잡는다.(193년 3월) 조조가 매우 승승장구하며 잘 나갔던 시기.

3.5. 서주 침공

한편 조조가 원술과 싸우는 사이 도겸은 천자를 자칭하는 도적 궐선과 연합하며 태산군연주서주의 경계 지역을 약탈하고 있었다. 이 무렵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이 도겸의 병사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원술을 격파하고 돌아온 조조는 가을부터 반격에 나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도겸을 격파하고 10여 성을 점령한다. 도겸은 담성을 지키며 농성하는데, 조조는 공성에 실패하자 분풀이로 시체가 강을 메울 정도로 서주민들을 학살하여 사방의 비난을 받는다. 이에 대해서는 서주 대학살 참조.

서주 대학살의 경우는 후한 13개주 중 하나인 서주 전체가 초토화된 학살이었다. 이 당시 서주의 크기는 우리나라 남한보다 넓었고 기록에 따르면 '인구가 100만이 넘고 물산과 인재가 풍부한 곳'이라 되어 있었다. 거기 전체에 걸쳐 씨가 말랐다고 표현될 정도인데 이때 죽은 사람이 기록으로만 수십만이다. 거기다 어린이, 노약자, 심지어 닭이나 개와 같은 가축까지 모두 전멸시켜버린 것.
동탁의 난을 만나서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다가 동쪽으로 빠져나가 많은 사람이 서주 땅에 의지하였는데, 조조가 부임하여 남녀 수십만 명을 사수에서 파묻어 죽이니 물이 흐르지 않았다. 조조가 담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가 없자 마침내 떠났으며, 여, 수능, 하구를 공격하여 빼앗고 모두 도륙하였는데, 닭과 개 역시 다 없애니 텅 빈 읍에는 다니는 사람이 다시 없게 되었다.
- 자치통감
조조는 지나는 길에 있던 취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를 함락시키고, 모조리 도륙(屠戮)하였다. 무릇 남녀 수십만 명이 살육(殺戮) 당했고, 닭이나 개도 살아남은 것이 없었으며, 사수(泗水)는 이들의 (시체) 때문에 (막혀) 흐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섯 현의 성읍에는 사람의 종적이 다시는 없었다.
- 후한서

3.6. 복양 전투(장막+여포와의 대결)

한편 조조가 다시 서주 원정을 떠난 사이에, 진궁장막을 끌어들여 배반한다. 진류태수이자 조조와 연합하고 있던 장막여포를 보내 연주를 공격하자 연주는 모두 장막의 편으로 돌아선다.[35](194년)

순욱을 필두로 한 측근들의 활약으로 간신히 몇 개 지역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하였는데, 그럼에도 장막의 공작에 말려들지 않고 여전히 조조의 영향권 아래 있던 곳은 동군의 범현과 동아현, 견성현으로 2군도 아닌 단 3현뿐이었다. 당시 연주는 9개군 80현으로 이루어졌으니 단순하게 계산할 경우 조조는 대략 96.25%의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다.[36]

장막의 배반에 연주가 호응을 하고 유익을 시켜 순욱에게 가 "도겸을 치는 것을 도우러 왔으니 군사와 식량을 주시오"라며 속이려 하였으나 오히려 반란을 간파하고 군사를 이끌어 대비하며 하후돈을 불러 방비하였다. 예주자사 곽공이 군사를 이끌고 성 앞에 당도하자 하후돈 등은 두려워하며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을 진언하였으나, 순욱은 "아직 완전히 어느 편을 들지 정하지 않아 빨리 도달하였을 것인데 그를 의심하면 분노해 장막의 편을 들 것"이라며 그를 만났고 곽공은 군사를 물렀다.

이때 아직 장막에게 호응하지 않는 이 현들을 치려 군사를 일으키자 동요하였는데 이에 정욱을 보내 각 지역을 설득하게 하고, 정욱은 이를 성공해 범현과 동아현의 수비 의지를 확고히 하였고 동아현에 도착해 이들과 같이 싸워 조조가 돌아올 때까지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조조는 황급히 철수하면서 여포가 서주와 연주 사이에 있는 태산 길목을 봉쇄한 뒤 장기전으로 나가는 것을 우려하였으나 조조의 귀환 소식을 들은 여포는 복양에 돌아가 주둔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해 이런 기회를 놓쳤고[37] 조조는 여포를 비웃으며 그대로 복양을 쳐서 승기를 잡고자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했던 것과 반대로 조조는 복양에서 여포에게 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만다. 조조는 말을 달려 불길을 벗어나다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 사마 누이(樓異)가 조조를 부축해 말에 오르게 하고 빠져나왔다.[38]

군을 수습한 조조는 재차 공세에 나서 농성하는 여포를 100일 동안 포위하다가 또 다시 패배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원소의 지원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데 성공한다.[39]

원소의 구원으로 연명에 성공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조조에게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때마침 메뚜기떼가 창궐해 군량 조달이 어려워지자 조조와 여포는 서로 군대를 물린다. (194년 9월)

한편 원소는 사람을 보내 조조를 으로 소환했고(혹은 처자식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 조조는 이를 승낙했지만 정욱의 필사적인 반대로 태도를 고쳐 원소의 요구를 거절한다.[40]

이에 대한 원소의 반응은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이후로도 우호 관계를 쭉 유지한 것으로 봤을 때 조조의 연주 상실 직전까지 다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던 상하 관계를 확실히 하는[41] 선에서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장막 진영은 여포가 승씨현에서 반기를 든 호족 이진에게 격파당하는 등 초반의 기세를 놓치자 내분으로 지리멸렬해지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듬해 195년부터 반격에 나선 조조는 제음, 거야 등에서 여포를 연패시켰고, 여포는 진궁과 합류해 동민이라는 곳에서 만 명을 이끌고 조조와 결전을 벌였는데 이때 조조는 참호를 파서 절반의 병력을 숨겼다가 전투가 무르익자 이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여포군을 대파한다.[42]
다음 날, 여포가 다시 오자 태조(조조)는 둑 안에 병사들을 숨기고 나머지 절반의 군사는 둑 밖에 두었다. 여포가 점차 진격하자 영을 내려 경병(輕兵)으로 싸움을 걸게 했다. 서로 맞부딪치자 복병들이 일제히 둑 위로 오르며 보병과 기병이 함께 진격하여 여포군을 대파하고 북과 수레를 노획했다. - 위서

여기서 패배하자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판단한 여포는 서주의 유비[43]에게로 달아났고, 장막원술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양주로 가는 도중 부하에게 살해당했으며, 옹구에서 장막의 합류를 기다리다가 고립된 장초는 조조에게 포위당해 3개월 동안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면서 조조는 연주를 완전히 차지하는 데 성공한다. (195년 12월)

연주를 평정한 조조는 장막의 일족을 멸족시켰다. (195년 12월) 장안에 있던 이각, 곽사에게 사신을 보내 정식 연주으로 인정받은 것도 195년의 일이다.

4. 협천자

조조패업의 시작
장안 조정에서 정식 연주으로 인정받은 조조가 여포, 장막과 싸우고 있던 195년 7월에 헌제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향했고 동승(董承), 양봉(楊奉) 등이 이를 호위했다.

옹구를 함락시킨 직후인 196년 1월, 조조는 예주 진국을 공격해 원술이 임명한 진국상 원사(袁赦)의 항복을 받았으며 조홍을 보내 헌제를 맞이하려 했으나 동승은 원술과 연합해 조홍의 군대를 저지하였다.

조홍이 실패하자 조조는 유벽(劉辟), 하의(何儀), 황소(黃劭), 하만(何曼) 등 원술과 연계하고 있던 예주황건적 잔당들을 격파하여 예주에 남아있던 원술의 영향력을 일소했으며 그 뒤에는 조조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해 한섬을 내쫓고 헌제를 영접한다. (196년 7월)

헌제를 옹립한 조조는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허현으로 천도한다. 헌제가 허도로 향하자 한섬과 양봉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요격했지만 조조에게 격파당하자 원술에게로 달아난다.[44] 헌제를 옹립한 조조는 유비의 서주목 지위를 공인하고 진동장군, 의성정후로 삼는다.[45]

또한 조조는 황제를 통해 원소를 힐난하는 조서를 보낸다. 원소는 장문의 상소를 써서 이를 반박하는 등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헌제에게 직접적인 반기를 들지는 않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에 조조는 대장군, 녹상서사, 사례교위의 직위를 차지하고, 원소에게는 태위의 직위를 내렸으나[46], 원소가 분노하며 이를 받지 않자 기세가 꺾였는지 원소에게 대장군을 양보하고 자신은 사공 겸 거기장군을 역임한다.

후한서》에 따르면 조조가 '크게 두려워하며' 원소에게 대장군을 양도했다고 서술하고 있고 아예 구석 특진[47]의 일부를 내리기까지 했다. 협천자 카드만 믿고 들이대던 조조가 밀당에서 원소한테 발렸다는 의견이 지배적.

천자를 옹립하기 전까지 조조는 원소에게 종속된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천자를 손에 넣고 조정을 주무르는 권신의 직위를 획득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원소와 완전히 독립된 세력이 되었다.

사실, 이 당시 황제를 옹립하는 것에 대해서 조조도 리스크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남아있는 황제 측근들은 황제를 이용해먹는데 걸림돌이 될게 뻔하며 애초에 황제 자체가 동탁에 의해 옹립되었다는 명분적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조는 이 협천자로 인해 위의 리스크를 다 채우고도 남을 이익을 얻었는데, 바로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명분이었다. 한 황실이 힘은 없다 한들, 아직 대부분의 지식인 계층과 민중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 점은 곧 조조가 황제의 보호자를 자칭함으로써 자신의 적을 황실의 적으로 낙인 찍어버리는, 우월한 명분을 가지게 하였으며, 이는 조조의 패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장군이 된 원소는 중앙 정부를 조조가 독점하는 것이 여전히 고까웠는지 허창이 습하고 지반이 낮아 침수의 위험이 높다는 이유를 들며 업과 가까운 견성에 천도하도록 권하였으나 당연히 조조도 여기까지는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다. 이에 전풍은 그대로 조조를 칠 것을 권하였으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48]

4.1. 유비를 받아들이다

한편 이 무렵 여포유비를 배신하여 서주를 차지하자, 유비는 달아나 조조에게 귀순한다.

정욱이 조조를 설득하며 말하길
"살펴보건대 유비는 웅재(雄才)가 있고 민심을 크게 얻었으니 끝내 남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빨리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조조는
"이제 바야흐로 영웅들을 거두어들일 때인데, 한 사람을 죽이고 천하인의 마음을 잃는 것이니 불가하오."
라고 말하고 유비를 받아들였다. 이는 대외적으로 자신이 서주 대학살을 저질렀을 때 자신에 맞섰던 유비를 받아들여 과거의 원한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는 대외용 이미지와 서주의 민심을 자기에게 끌어오려는 계산을 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원톱을 다투는 최정상 지휘관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잔뼈가 굵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유비와 그를 따르는 관우와 장비까지 있으니 조조로서는 유비를 확실하게 수하로 둔다면 유관장이라는 특급 카드를 손에 넣게되니 약간 욕심을 부렸다고 해석이 된다. 물론 이는 조조 혼자만의 행복회로가 됐지만...

사실 조조는 유비에게 엄청난 특혜를 베풀었는데, 여포 토벌 이후로 유비를 예주목으로 삼고, 좌장군의 벼슬까지 내려주었다. 일단 명목적인 지위로는 조조 파벌 내에서 최고였다.[49] 심지어 자기와 동등하게 대접하기까지 했다.[50] 형주, 익주는 각각 황실 종친인 유표, 유장이 점거하고 있고 세력도 나름 탄탄한 군벌이였는데, 당시 상황에서 황실의 종친인 유표와 유장이 이를 명분으로 유비를 지원하면 삼국지 최강 세력이 또 하나 탄생하게 된다. 실제로도 유장과 유표는 황실의 종친에다 나름 유비에게 호의적이었다.[51] 특히 초반에는 조조마저도 충신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52] 문제는 조조는 몰라도 유비는 조조를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유비 자신보다 헌제를 황제로서 지지하는 입장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황제가 되기는 하지만 그때는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았기 때문에 유비 입장에선 어떻게든 대립황제를 자처해서 한의 정통성을 회복하는게 우선이였던 상황이었다.

4.2. 전투(장수와의 대결)

조조는 먼저 남양을 점거하고 있던 군벌 장수에게 선공을 개시했고, 장수의 배후에는 유표가 있었다. 당시 유표는 형주를 점거하여 안정된 강역을 유지한 채 중앙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장수는 유표의 사주로 막 남양을 점거한 채 전적으로 유표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남양이 남으로는 한수를 경계로 형주 본토와 맞닿고, 북으로는 허도와 지근거리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유표의 존재는 조조에게 심각한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순유는 유표와 장수의 결속이 아직 깊지 않으니, 직접적인 개입에 나서며 결속의 명분을 주기보다는 느슨히 내버려 두면서 이들의 분열을 유도해야 한다는 요지의 진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조의 군대가 도착하자 장수는 의외로 맥없이 항복했는데, 장수가 부득이하게 유표의 수하 노릇을 하고는 있었지만 장수에게 유표는 숙부 장제의 원수이기도 했다.[53] 이미 장수와 유표의 결속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흔들면 무너뜨릴 수 있다는 조조와 참모진이 의도했던 바에 가까워 보이며,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순유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지만, 결국 장수가 맥없이 항복했기 때문에 이는 기우에 그치는 듯 했다.

그러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이는 철저히 조조 개인의 방심과 추태로 인해 비롯되었는데 조조는 장제의 처이자 장수의 숙모인 추씨를 범해 장수의 격분을 샀고, 장수가 이를 원망하는 것을 알고는 그 참에 장수의 측근들까지 회유해 장수를 숙청하려 했기 때문이다.[54]

모욕에 가까운 조조의 노골적인 무시와 추태에 격노한 장수는 모반했고 조조는 장수의 습격을 받는다. 조조가 타고 있던 말의 이름은 절영이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아 뺨과 다리에 상처를 입었고 아울러 조조의 오른쪽 팔에도 화살이 적중했다고 한다. 아들 조앙이 말을 탈 수 없어 조조에게 말을 바치니 조조는 살았으나 조앙은 죽었다. 이 사건으로 조안민, 조앙, 전위 등이 희생되었다.[55]

이에 조조는 군을 이끌고 무음(舞陰, 남양군 무음현)으로 돌아갔는데, 장수가 기병을 이끌고 와서 노략질하자 조조가 이를 격파했다. 장수는 양(穰, 남양군 양현)으로 달아나 유표와의 연대를 공고히했다.

조조는 제장들에게
"내가 장수 등을 항복시켰으나 실수로 인질을 잡아 두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내가 패한 이유를 알만 하오. 제경(諸卿)들은 이를 잘 살펴 지금 이후로 다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라고 말하곤 허도로 돌아왔다.

4.3. 수춘 전투(원술과의 대결)

천자 봉대에 실패한 원술은 황제를 자칭했는데 원술의 칭제는 그저 고립을 자초할 뿐이었지만[56], 헌제를 옹립하고 있던 조조로서는 원술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허창의 지근거리에 강대한 유표가 버티고 있었고, 유표는 조조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원소 또한 북방의 공손찬을 정리하는 것에 전념하면서 조조와의 대립을 잠시 유보했지만 조만간 불화가 표면화될 것은 시간 문제가 되어 있었고, 조조가 오랫동안 빈틈을 보인다면 언제 쳐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조조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여포가 중앙 정부를 장악한 조조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는 것으로, 여포는 조조와 원술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예전에 원술이 자신의 망명을 받아주지 않았던 일로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57], 여포 자신으로서도 유비를 몰아내고 서주을 자칭한 입장이었기에 조정에서 정식으로 서주목의 지위를 인정받으면서 자신의 세력 내 입지를 확고히 하고 싶어했다.

여포는 원술이 사신으로 보낸 한윤(韓胤)을 체포해 조조에게 보냈으며 한윤이 허도의 저자에서 처형되면서 원술과 여포의 전쟁이 시작된다.

한편 원술은 여포에게 참패한 상태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예주진국을 침공해 진왕 유총을 죽이지만, 그 사이에 조조가 원술의 근거지인 수춘을 공격한다. (197년 9월)

조만전》에는 조조가 군량이 부족하자 관리의 건의대로 군량을 조금만 주다가 군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관리를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화의 시기도 불명확하고 관리의 이름도 나오지 않지만 연의에서는 수춘을 함락하는 시기에 나오며 관리의 이름은 왕후가 되었다.
항상 적을 토벌할 때 녹미와 양식이 부족하였는데, (조조가) 담당 관원에게 "사정이 어떠한가?"라고 은밀히 물었다.

담당 관원이 말하길, "작은 곡(斛, 용량을 재는 용기)을 쓰면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태조(조조)가 허락했다.

그 후 군중 사람들이 태조가 군사들을 속인다고 하니 태조가 담당 관원에게 말하길 "특별히 그대를 죽여 군사들을 진정시켜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참수하고 그 머리를 취해 이마에 글을 써놓길, "작은 곡(斛)을 써서 관곡(官穀)을 도적질했으니 군문(軍門)에서 참수했다"고 했다.

그 혹학변사(酷虐變詐, 혹독, 잔인하고 요리조리 속임)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조조는 마침내 원술의 수춘을 함락시키고 원술은 치명타를 입게 된다.

4.4. 양 전투(유표+장수와의 대결)

원술을 치는 동안 조조는 조홍을 남겨 장수와 맞서게 했지만 유표장수는 여러차례 후방을 교란했으며 조홍은 이를 막지 못한다. 수춘을 함락시킨 조조는 직접 남하하여 남양으로 향하여 유표군의 장수인 등제(鄧濟)를 사로잡자 호양현이 항복했고 무음(舞陰)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197년 11월)

이듬해인 198년 5월, 유표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출병한다.

<무제기>에 주석으로 달린 《조만전》에는 머리카락을 잘라 목을 대신한 일이 나온다. 조만전에서는 시기가 어느 때인지 나와있지 않지만 연의에서는 이 시기에 나온다.
항상 출군하여 보리밭을 가로질러 행군할 때는 영을 내리길, "사졸들은 보리를 망치지 말라.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한다."고 하니 기병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보리에 붙어서 서로 지탱했다.

그런데 태조(조조)의 말이 날뛰다 보리밭으로 뛰어들자 주부(主簿)에게 명해 그 죄를 논의하게 했다.

주부가 대답하길, "춘추의 뜻으로 볼 때 죄는 존귀한 자에게 미치지 않습니다."고 했다.

태조가 말하길, "법을 제정해놓고 스스로 어겼으니 어찌 아랫사람들을 통수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군의 우두머리이므로 스스로 죽을 수는 없으니 스스로 형을 받기를 청한다."

그리고는 검을 쥐고 머리카락을 잘라 땅에다 두었다.

또한 《세어》에서는 망매지갈(望梅止渴)의 유래가 된 일화가 나온다. 시기가 어느 때인지 나와있지 않지만 연의에서는 이 시기에 나온다.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행군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섰다.

군사들이 모두 갈증에 시달리자 (조조가) 이렇게 말했다. "저 앞에 매화나무 숲이 있는데, 매실이 많이 열렸으므로 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군졸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입에서 침이 나와 물이 있는 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조조는 장수를 양성에서 포위하였으나 유표가 배후를 끊으려 하자 철수한다. <무제기>에서 인용한 《헌제춘추》에 따르면 전투가 길어지면서 원소가 배후를 노린다는 첩보를 들은 조조가 스스로 군대를 물린 것으로 나온다.

철수 도중 안중에서 조조는 험지에 가로막히게 되었는데 이통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조조군에 합류하였고 그 뒤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병사를 매복시켜 이미 군이 달아난 것처럼 속인 뒤 이통을 선봉으로 삼아 급습하여 유표의 추격군을 격파하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공은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奇兵)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공이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奇兵)을 풀고 보기(步騎)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무제기

조조는 돌아와서 순욱에게 자신이 뛰어난 계책을 발휘했다고 자화자찬하였으나 허도와 맞닿아 있는 요충지 남양을 점령해 장강 이북의 유표 세력을 정리하고 유표의 배후 공략 위협을 차단하는 것이 원정의 목표였던 이상 조조의 패배였고, 유표의 승리였다.

4.5. 하비 공방전(여포와의 대결)

198년 7월, 허창에 돌아온 뒤 조조는 예주으로 소패에 주둔하던 유비여포의 불화를 트집잡아 유비를 도우며 이용가치가 없어진 여포를 친다. 선발대로 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구원하게 했으나 하후돈고순에게 패하고 유비는 조조에게로 도망친다.

198년 9월, 조조가 직접 서주로 가서 여포를 치자 그제서야 여포는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며 손을 내밀었는데, 그 유명한 여포의 배신 행각을 몸소 겪은 원술로서는 충분히 질릴 법도 하건만 직접 군을 이끌고 여포를 구원하러 나선다. 오오 대인배 원술 10월, 조조는 서주 팽성국을 도륙하고 팽성상 후해(侯諧)를 사로잡아 진격하여 하비에 이르니 여포는 본인이 직접 성밖에 나와 기병으로 요격하나 패배했고 원술 또한 원군을 보내기 위해 직접 출전했다가 패하면서 여포는 하비성에 포위된다. 이에 여포가 성으로 돌아가 굳게 지키니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

198년 11월, 순유곽가의 계책을 따라서 기수의 물길을 바꿔 수공을 벌이자 하비성은 침수되었고 한달이 지나 후성, 송헌, 위속 등이 성문을 열고 투항하면서 여포도 붙잡혀 교수된다. 이로써 조조는 서주를 평정한다.

5. 관도 전역

5.1. 수고를 격파하다

199년 2월, 하내태수 장양(張楊)이 부하 양추(楊醜)에게 살해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양추는 조조에게 투항하려고 했으나 장양의 부장인 수고(휴고)에게 살해당했고 수고는 원소에게 투항했다.

이때 원소는 한창 공손찬과 마지막 결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조조는 조인사환(史渙)을 보내 수고를 공격하였다. 수고는 원소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조조는 원소가 대응을 하기 전에 수고를 격파하고 하내를 점령한다. 원소가 역경에서 공손찬을 멸망시킨 때는 199년 3월이고, 조조가 하내를 점령하고 수고를 참수한 시기는 같은 해 4월이다.

이후 원소가 남하할 때 작성한 격문에서 원소가 역경에서 공손찬을 칠 때 조조와 공손찬이 은밀히 연합하며 배후를 치려 했으나 전령이 붙잡혀 그 전모가 드러난 데다 마침 공손찬도 죽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당시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후한서》에 주석으로 인용된 《헌제춘추》에 따르면 조조는 을 쳐서 공손찬을 구원하려 했으나 공손찬이 예상보다 일찍 격파되었고, 원소도 조조의 의도를 파악했기에 황하를 건너 철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격주군문과 비슷하다.

조조는 수고를 격파하면서 예전에 자신을 배반했던 위충(魏种)을 사로잡았는데, 위충을 하내태수로 삼아 하북의 일을 맡기곤 퇴각한다.

인재를 아끼는 조조의 대범함을 보이는 일화로 알려져 있으나, 적진 한복판을 점령한 뒤 태수로 삼곤 버리고 간 셈이니 대놓고 버리는 패였고, 사실상 죽으란 소리나 다름없다.[58]

5.2. 관도대전 전초

하내 공략 사건으로 원소와 조조의 대립은 노골적으로 표면화한다.

이때 원소공손찬을 병합하여 4개 주를 차지하고 군사는 10여 만으로, 장차 진군하여 허도를 공격하려 했다. 제장들이 원소를 대적할 수 없다고 하자 조조가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뜻은 크나 지략이 부족하고 겉으로 사나운 척 하나 담력이 약하오. 질투심이 많고 각박해 위엄이 적고, 병사는 많으나 분획이 불분명하고, 장수들은 교만하여 정령(政令)이 통일되어 있지 않소. 비록 토지가 광대하고 양식이 풍족하나 오히려 우리에게 바치게 될 것이오."
라고 말했다.

조조는 장패 등을 보내 청주의 일부인 , 북해 등을 격파한다. 조조가 제, 북해 등을 점령한 것인지 타격을 준 뒤 철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도시들을 공격한 이유는 태산황하의 좁은 길목에 있었으므로 이곳을 제압해 두면 원소군이 동쪽으로 우회해서 남하하는 것을 봉쇄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조는 관도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허도로 돌아왔으며, 이 무렵 장수가후의 조언을 듣고 조조에게 항복한다.

5.3. 유비를 격파하다

한편 원술은 재정 적자에 시달리며 세력이 쇠퇴하자 원담이 있는 청주로 가기 위해 북상한다. 조조가 유비주령(朱靈), 노초(路招)를 보내 이를 요격하게 했다.

정욱, 곽가가 조조가 유비를 보냈다는 말을 듣고 조조에게 말하길 "유비를 놓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이에 조조가 후회하고 추격했으나 이미 떠난 뒤였다.

원술은 유비에게 저지당하고 병이 들어 꿀물을 찾으며 죽는다. (199년 여름) 유비는 조조가 맡긴 토벌군을 이끌고 원술을 공격하러 가다 이미 원술이 죽었음을 알고 그대로 서주를 공격,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고 서주를 점거했으며 원소와 연합한다. 또한 유비는 조조가 보낸 유대[59], 왕충의 군도 격파한다.

이 시기에 여강태수 유훈(劉勳)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자 열후로 봉했다.

200년 1월. 동승조조 암살 시도가 실패한다. 동승, 왕자복(王子服), 충집(种輯), 오석(吳碩), 오자란(吳子蘭) 등 유비를 제외한 모든 관련자들의 삼족이 멸해지고[60], 당시 임신 중이던 동귀인도 예외없이 처형되었다.

유비도 이 암살 시도의 관련자였고 이로 인해 조조가 동쪽의 유비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장수들이 이를 틈타 원소가 공격할까봐 말렸다. 조조는 유비는 인걸이니 공격하지 않으면 후환이 되지만 원소는 사세를 보는 것이 느려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했다. 곽가도 유비를 공격할 것을 권하면서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손건을 보내 원소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원소는 움직이지 않았다.[61] 조조가 이끄는 군사가 유비군을 격파하여 하후박을 사로잡았다. 《위서》에 따르면 유비는 조조의 본대가 도착하자 싸우지 않고 원소에게로 달아난다.[62] 다만 사마광은 통감고이에서 이 기록을 매우 터무니 없다고 비판했으며 다른 기록들에서도 유비가 조조와 싸워서 패배했다고 나온다.

조조는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고 관우는 하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다시 진격하여 공격하니 관우가 사로잡혔다. 창희(昌希)도 유비 편에 서서 모반했었으므로 또한 이를 공파(攻破)했다.

5.4. 백마 전투

원소안량, 곽도를 보내 백마를 공격하였고 그 자신은 여양에 주둔하여 황하를 건너려고 하였다. (200년 2월)

여타 전들에서는 백마가 포위당했다는 서술 이후로 곧바로 조조 측이 안량을 공격한 이야기가 나와서 종종 조조가 "신속한 대응"을 통해 백마를 구원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안량, 곽도가 형성한 백마 포위망은 군세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였다. 따라서 포위망을 성급히 공격하면 안량의 군세와 더불어 원소의 주력까지 한번에 상대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조 측은 이 포위망에 대해 어떠한 군사적 움직임도 취하지 못하고 2개월 동안 이 포위망을 방관하게 된다.[63]

4월이 되어서야, 조조는 순유의 계책을 따라 군사를 나누어 원소가 머무는 여양의 배후로 기동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원소가 이에 대응하자 주력군을 직접 이끌고 백마에 주둔하고 있었던 안량을 기습하였다.
순유가 공(조조)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으므로 적의 세력이 분산되도록 해야 합니다. 공께서 연진(延津)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 원소군의 배후로 향하는 것처럼 하면 원소는 필시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경병(輕兵)으로 백마(白馬)를 기습하여 엄기불비(掩其不備, 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함)하면 가히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공이 이 말에 따랐다.

이 기습은 성공하여 안량관우에 의해 참수된다. 이때 관우가 안량의 목을 벤 상황에 대해 무제기에 의하면 조조가 원소군 몰래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마로 접근하였으며 안량은 조조군이 10리까지 접근하자 매우 놀라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나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관우전에는 관우가 적진에 돌진하여 진의 가운데에 있는 안량을 참수하였다고 하는데 이 공적은 이 교전 중에 나온 상황으로 보인다.
원소는 (조조의) 군사들이 도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하게 했다. 그러자 공은 군을 이끌고 급히 진군하여 백마로 나아갔다. 10여 리 떨어진 곳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 안량이 매우 놀라 (군을 이끌고) 와서 맞서 싸웠다. 장료(張遼), 관우(關羽)를 선봉에 세워 이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 백성을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옮겼다.
무제기

5.5. 연진 전투

조조가 안량의 포위망을 격파하였지만, 원소군의 본대는 황하를 성공적으로 도하하여 연진 일대를 장악[64]하였다. 조조는 백마를 지키는 것을 사실상 포기하고 백마의 백성을 이주시키고 서쪽으로 향했는데, 연진의 남부에서 유비와 함께인 선봉대 문추군과 전투를 벌였다. 5~6천의 기병으로 구성된 문추군을 상대로 조조군은 말을 풀어놓아 혼란에 빠진 듯 위장하여 문추군을 유인한 뒤 격파한다. 문추는 전사한다.
원소의 기장(騎將) 문추(文醜)는 유비와 함께 5~6천 기를 이끌고 앞뒤로 이르렀다. 제장들이 다시 말하길, "말에 올라야 합니다"고 하자 공은 "아직 아니오."라 했다. 얼마 후 기병이 점차 많아지고 혹 나뉘어 치중으로 향했다. 공이 말했다, "이제 되었소.” 이에 모두 말에 올라탔다. 이때 기병이 6백을 채우지 못했으나 마침내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수했다. - 무제기

두 차례의 승리가 있었으나 상황은 그다지 조조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조조는 연이은 승리에도 원소의 본대와 맞붙는 것을 회피하고 관도로 돌아갔으며, 원소군은 또 다시 진군하여 양무에 주둔했다.

한편 유비의 소식을 접한 관우는 조조의 정성어린 대우에도 불구하고 받은 재물과 관직을 모두 내놓은 뒤 떠났으며, 모두가 관우를 추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으나 조조는 이를 만류하며 그를 쫓는 걸 단념했다.

5.6. 관도대전

8월, 원소가 진영을 연결하여 차츰 전진하여 사산(沙山)에 의지하여 둔영을 삼으니, 동서로 수십리였다. 조조 또한 진영을 나눠 서로 당해내게 하였는데, 합전(合戰)하니 불리하였다.
무제기

"합전하였는데 불리했다"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대전의 초반부 어느 정도의 승리를 거둔 조조가 원소와의 정면 승부(회전)에서 패배하였음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의 여백이 생긴 이유는 진수가 양측이 둔영을 설치한 뒤 벌인 교전에서 조조가 패배한 상황을 누락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65] 이어지는 서술은 "조조군의 극심한 부상병 비율"과 관도에서의 농성전이다.[66]

'동서로 수십 리에 이르는' 원소군의 진영에 대항하여 마찬가지로 진을 펼칠 수 있었던 조조[67]는 이 '불리하여 관도로 퇴각'한 사건 이후로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 당시의 상황은 <무제기>의 다음 묘사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이때 공의 병력이 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부상당한 자는 열에 두셋이었다."[68]

이렇게 조조는 당시 세력 범위의 절반에 해당하는 예주 전역의 지배권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는데, 예주는 황제가 있는 허도가 위치한 지역임을 고려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예주에서는 오로지 양안군만이 여전히 조조를 지지할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군 내에서 원소에 호응하는 인물들(구공, 강궁, 심성)이 나타남으로써 불안정한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통전, 조엄전)

예주 전체에서 일어난 반란과 지배권 상실로 조조군은 이후 군량 문제로 고심하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원소군의 보급선에 대한 공격으로 남은 보급라인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임준전) 또한, 원소의 본적이 있는 여남군에서는 선비와 문객들이 들고 일어나 원소의 편에 붙어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고, 원소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유비를 파견했다.

원소는 계속 진군하여 관도에서 버티는 조조와 공성전을 벌였다. 원소는 토산(土山)을 세우고 땅굴을 팠고, 조조 또한 안에서 이를 만들어 서로 대응했다. 원소가 둔영 안으로 활을 쏘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덮어써야 했고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세력 내부에서의 반란이 가속화되고, 조조의 본대가 급격히 피폐해져 공성전에서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조조군의 내부에는 원소와 밀통하는 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조 암살 미수 사건까지 발생했다.
조조의 호사 중 하나인 서타가 조조의 암살을 시도하나 허저에 의해 좌절된다.
허저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조조는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갈지 고심하며 의견을 묻는다. 순욱은 조조에게 버틸 것을 간언[69]했고 조조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계속해서 관도에서 버티게 된다. 사실 이제 와서 천도를 한다고 한들 어디로 도망치겠는가? 조조는 이미 친원소 세력에게 포위되어 물러날 곳이 없었다.

5.7. 관도대전

그러는 와중에서 조조는 순유의 계책을 받아들여 서황, 우금, 사환 등을 투입해 원소군의 군량 수송을 공격하여 수천 수레를 불사르는 데 성공한다.

한편 우금은 두지진에 단독 주둔하며 연진 남쪽에 있는 원소군의 별영을 공격하는데, 수천 명의 병사를 죽이고 스무 명이 넘는 장수들을 항복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조조군의 숨통은 조여진 상태 그대로였다. 이러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원소 측의 군량이 부족하다는 묘사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조조 측이 군량 부족으로 오늘내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황이 본격적으로 호전된 것은 허유가 갑작스레 항복해 오소에 군량이 집결해 있다는 발언을 한 뒤인데, 조조는 허유의 귀순이 너무나 반가웠기 때문에 맨발로 허유를 맞았다고 한다.[70] 여기서 허유는 조조와 만나 조조에게 오소의 위치와 병력을 알려주었는데[71] 이것은 중대한 군사 기밀이었다.

10월. 조조는 원소로부터 투항한 허유에게서 정보를 얻어 보기 5천과 함께 오소를 기습하였다. 이때 배송지가 인용한 주석인 《조만전[72]에 따르면 조조군은 원소군으로 군기를 사용하는 등 원소군으로 위장해서 원소군의 진영을 그대로 무사통과 했다고 한다.

원소는 군량 수송하는데 1만을 파견하였고 저수는 조조가 군량을 노릴 것으로 생각하여 원소에게 추가 병력을 따로 보내자고 말하지만, 원소는 이 조언을 물리친다.
원소가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군량) 운반 수레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저수가 원소를 설득하길 "장기(蔣奇)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원호하는 지군(支軍)으로 삼으면, 조공이 노략질하는 것을 끊으실 수 있습니다"라 했다. 원소가 다시 따르지 않았다. - 원소전

조조는 직접 보기 5천을 이끌고 오소에 숙영하는 오소를 급습하였고, 허를 찔린 순우경은 우세한 병력으로 맞섰으나 패배하였고 그는 조조에 생포되어 코가 잘리는 신세가 된다. 조조는 오소의 군량을 불태운다.

오소가 공격받는 첩보는 원소에게 도착하였고 원소는 기병을 구원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이 이르기 전에 오소는 이미 함락되었다.

원소는 오소를 구원과 동시에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기 위해 장합고람을 보냈는데 이들은 조조 측에 항복해 버린다.[73]

그 뒤로 원소군이 갑자기 붕괴해버리고 달아나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오소가 불탔다는 사실만으로 원소군이 갑작스럽게 무너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소와 원소의 총 패배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암시하는 구절들을 <무제기>, <원소전>이 아닌 다른 기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순유전에서 장합과 고람이 아군 측 진영을 공격하여 불지르고는 조조군에 투항해 버린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장합과 고람은 조조에게 항복한다는 의사 표시로 원소군에 불질러버리고 원소군을 공격하였다는 것이다.[74]

결국 오소의 함락과 장합, 고람의 이탈 등의 일련의 사건으로 그날 밤 안으로 원소의 군대는 완전히 붕괴한다. 원소는 800여기만 가지고 패퇴했고 조조는 거짓항복한 남은 원소군 포로(삼국지 원소전)를 잡아 그대로 파묻고 소와 말까지 다 죽여 보낸다.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때 전후로 죽임을 당한 원소군 병사가 7만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75][76]이 사건은 조조의 대표적 악행 중 하나로 손꼽힌다. (200년, 8월)

조조가 원소 진영에 있었던 서신들을 거두었는데 허도와 군중(軍中) 사람들의 서신들이 발견되었다. 원소와 내통하던 이들은 처벌하는게 마땅하지만 조조는 그냥 이것들을 열어보지 않고 모두 불태운 다음 이 일을 입에 올리지 마라고 당부했다.
공(조조)이 말하길 “원소가 강성할 때는 나도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뭇 사람들이겠느냐!”
위씨춘추

5.8. 창정 전투

201년 4월, 조조는 창정에서 원소군을 또다시 격파해 관도에서 패한 원소의 잔류한 세력을 완전히 연주에서 몰아내고 황하 일대에서 군사 시위를 벌인다.[77] 다만 창정의 전투에 대해서는 <무제기>에서만 간략히 언급되고 있고 다른 기전엔 전혀 기록이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조조는 연주에서 원소군을 완전히 쫓아냈고 관도 전투의 여파로 기주의 여러 군현에서 원소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조조에게 투항하는 곳도 다수 있었으나 조조는 황하를 건너 원소와 정면으로 싸우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하다고 여겼으므로 순욱의 진언에 따라 황하 강변에 따로 군대를 주둔시켜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허도로 돌아온다.

산해경에 이 시기의 일화가 기록되어있다. 조조가 원소를 공격한 어느 날, 조조가 사냥을 나가서 암수 모두 갈기가 있는 푸른 사자 두마리를 보고 사람을 시켜 사자를 잡아 가죽을 벗기게 했다. 그 후, 이기고 돌아왔을 때 사자 가죽도 같이 가지고 왔는데, 돌아오는 도중 마을을 지날 때마다 개들이 짖지를 못했다고 한다.

한편 원소는 남은 군을 수습한 뒤 반란이 일어난 군을 모두 평정한다. 이렇게 관도대전에서 원소군이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두 세력간의 영토 변동이 거의 없었다.

또한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여남에 있는 유비를 공격해 그를 격파한다. (201년) 여남의 적(賊) 공도(共都) 등이 이에 호응했다. 채양(蔡揚)을 보내 공도를 공격했으나 불리했고 공도에게 격파 당했다. 조조가 남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유비는 조조가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유표에게로 달아났고 공도 등은 모두 흩어졌다.

6. 하북 전역

6.1. 여양 전투

202년, 원소가 사망하고 원상이 그 뒤를 잇는다. 원담은 관도대전의 전초기지였었던 여양에 머무르며 거기장군을 자처한다.

203년 3월, 조조가 황하를 넘어 북상하자 원상과 원담은 협력해서 싸우고 203년까지 봄까지 계속된 싸움에서 조조는 우세함을 점하여 업성까지 전진한다.

하지만 갑자기 조조가 군을 이끌고 허도로 돌아오는데 정황상 조조가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조조는 허도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여태껏 패배한 장수에겐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앞으론 책임을 묻겠다"는 명을 포고했기 때문이다. 조조가 말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마법에서 '장군이 퇴각하면 사형에 처한다'(將軍死綏)고 했으니 이 때문에 조괄(趙括)의 모친은 조괄에 좌죄되지 않기를 빌었다. 이는 옛 장수들은 군이 밖에서 패하면 안에서 그 집안이 죄를 받았다는 말이다. 나는 장수들에게 정벌한 명한 이래 다만 공(功)에 대해 상을 내릴 뿐 죄를 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국전(國典, 나라의 전범)이 아니다. 출정을 명받은 제장들로, 패군(敗軍)한 자는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고 실리(失利)한 자는 관작(官爵)이 면탈될 것이다.

또한 <장료전>에서는 까지 진군했으나 원상이 굳게 지켰으므로 함락시킬 수 없었다는 기술이 있어 조조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는 데다, 제갈량후출사표에서도 여양 전투는 조조군의 대표적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후한서에서는 조조가 업까지 계속 진군했으나 원상이 이를 역격해 깨뜨리자 허도로 퇴각했다는 기술이 있다. (203년, 5월)

6.2. 원가 내분

곽가의 진언으로 조조는 뜬금없이 유표를 공격하였다. 조조가 유표를 공격하려고 떠나자마자 원담원상이 내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78]

원상에게 연패한 원담은 평원성에서 포위되었고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하였고 제장들이 모두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가 권하니 조조가 이를 허락했다.[79] 203년 10월, 조조는 이것을 핑계로 유표 공격을 멈추고 군대를 이끌고 북상한다.
공(조조)이 말했다, “내가 여포를 공격할 때 유표는 침범하지 않았고 관도 전투 때에도 원소를 돕지 않았으니 유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에 불과하므로 의당 뒷날 도모해야한다. 원담, 원상은 교활하니 마땅히 그들이 어지러워진 것을 틈타야 한다. 설령 원담이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어 끝내 항복하지 않더라도 내가 원상을 격파하고 그 땅을 거두어들인다면 이로움이 절로 많을 것이다.” 이에 (원담의 구원 요청을) 허락했다. - 위서

겨울 10월, 여양(黎陽)에 이르러 아들 조정(曹整)과 원담의 딸을 결혼시킨다.[80]

원상은 조조가 북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으로 퇴각했다.

6.3. 여광여상의 귀순

이 때 여광여상이 함께 동평에서 반란을 일으켜 양평을 점거한 다음 조조에게 귀순하여 열후에 봉해진다.

더 중요한 점은 여기서 멍청한 원담은 원상의 포위가 풀리자 여광, 여상에게 인수를 파서 준 적이 있었는데 이 둘은 바로 조조에게 이 인수를 보여주어 조조는 원담의 배신을 확신하게 된다. 여광과 여상이 보기에도 원담은 섬길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또다시 증명된 셈.
조조가 말하길 “나는 원담에게 작은 계책이 있을 줄 알았다. 나로 하여금 원상을 공격하게 하고는 그 틈에 백성들을 노략해 무리들을 모으고 원상이 격파되면 가히 스스로 강성해져 내가 피폐해진 것을 틈타려는 것이다. (그러나) 원상이 격파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강성하니 무엇을 틈탈 수 있겠는가?” - 위서

6.4. 전투

원상과 잠시 대치하던 조조는 황하를 건너 돌아갔고, 하북으로의 군량 수송이 원활하도록 수로 공사를 벌이는 등 장기전에 대비했다.

한편 원상원담에게 화해를 제안했으나 원담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심배에게 맡기고 의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원담을 치기 위해 청주로 떠났고, 조조는 원상의 움직임을 파악하자 다시 황하를 건너 기주를 공격한다. (204년 2월)

이때 심배는 업성 수비의 주요 책임자[81]였던 소유(蘇由)가 조조와 내응하던 것을 적발했으나 조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소유와 시가전을 벌였다. 결국 소유는 패배해 조조에게 달아났는데, 이 사이 조조는 황하 도강 이후 제대로 된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업성 50리 앞까지 진군해 있었고 업은 포위되었다.

하지만 원상이 본진을 비우면서 준비한 방어 체계가 단지 업의 수비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는데, 견초병주고간(高幹)에게 보내 지원을 감독하게 했으며, 무안 현령 윤해(尹楷)는 병주와의 경계 지역인 모성에 주둔하며 병주와 기주를 잇고, 저곡(沮鵠)이 한단에 주둔하며 모성을 통한 지원으로 업과의 기각지세를 이루는 상황이었다. 조조는 조홍에게 업의 포위를 맡기고 한단과 모성의 공략에 나서 저곡, 윤해를 격파하여 병주와의 연결을 끊고, 업을 고립시켰다.

저곡, 윤해가 격파된 이후로 고간은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고 방관하는 모습을 보였으며[82] 조조는 업성을 거세게 공격했지만, 심배의 저항이 의외로 굳자 장하의 물길을 바꿔 업에 수공을 펼쳤고, 수공에 식량이 썩으면서 성내 인원의 절반이 아사하는 등, 업의 상황은 막장이 되었지만 심배는 6개월에 걸쳐 저항을 계속한다.

한편 원상은 평원성에서 농성하는 원담을 포위하고 있었으나, 업의 상황을 전해듣고 황급히 귀환, 조조는 원상이 큰 길을 통해 귀환하며 포위망의 후방을 공략할 것을 두려워했으나, 원상은 그렇게 하지 않고 서산으로 향했고 조조는 승리를 확신한다.[83]
원상은 1만의 원군을 이끌고 업성에서 70리 떨어진 부수에 도착했는데, 심배에게 도착을 알린 후 밤중에 심배와 양동하여 조조의 진영을 야습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여 몸만 탈출하여 달아나고 원상의 군은 괴멸된다.[84] 심배는 끝까지 버티고자 하였지만, 원상의 원군이 괴멸되자 간신히 유지되던 성내의 사기는 이미 박살이 났고, 업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상황이 이미 결정났다고 본 조조는 업성에서 육안으로 얼굴이 확인될 정도로 포위망 가까이를 시찰하는 등 방심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심배는 이를 놓치지 않고 매복해 있던 노병들을 시켜 조조를 저격했다. 이때 조조는 화살을 몇 발 맞는 부상을 입었으나 이후의 행보를 볼때 큰 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배의 조카 심영(審榮)이 배신하고 성문을 열면서 업은 함락되었고, 조조는 포로가 된 심배에게 노병으로 조조를 저격했던 것에 대해서 "그때는 어찌 그리도 많은 노를 준비하셨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심배는 "다만 그 수가 부족하였음이 원통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심배는 참수되었고, 병주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고간은 원상에게서 파견된 인물들을 죽이고, 조조에게 투항한다.

6.5. 하북 평정

원담원상이 조조와 싸우는 사이 원상의 배후를 쳐서 기주의 절반을 장악했다. 조조는 맹약 위반을 빌미로 원담과의 관계를 끊고 원담을 공격했으며, 원담은 남피에서 저항하다가 좌절감으로 성장한 사나이에게 전사한다.(205년 1월)

원상중산으로 달아나 세력을 수습하다가 원담의 공격을 받자 원희가 있는 유주로 달아났으나, 초촉(焦触), 장남(張南) 등이 반기를 들자 만리장성을 넘어 오환족에게 달아났으며, 초촉은 유주를 장악한 뒤 유주자사를 자칭하고 조조에게 투항한다.

그 해 4월, 원상의 사주를 받은 오환족이 유주를 치고 조독(趙犢)과 곽노(霍奴) 등이 호응해 유주자사탁군태수를 죽이는 등 상황이 커지자 8월에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조독, 곽노를 격파해 참수했으며, 오환족은 장성을 넘어 달아난다.

여전히 병주자사로 있던 고간은 조조가 오환을 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반기를 든다. (206년 1월) 반중앙 정서를 선동한 모략으로 하내, 하동, 홍농사예 지역의 3군을 장악하고 업성의 전복까지 시도하는 등 스케일이 큰 반란이었으나, 순욱의 활약으로 고간의 계략은 상당 부분 무산되었고[85] 그 사이 조조는 고간이 농성하던 호관을 포위, 석달에 걸친 싸움 끝에 점령한다.

고간은 부장에게 호관의 수비를 맡기고 직접 흉노에게 가서 원군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호관을 버린 채 심복 몇 명만을 데리고 그대로 도주, 유표에게 망명하지만 도주로 중간에 있던 상락현에서 도위 왕염(王琰)에게 붙잡혀 참살당한다.[86]

조조는 군을 이끌고 지금의 산둥 반둥 인근으로 이동하여 해적 관승(管承)을 격파했다.(206년 8월) 한편 오환과 손잡은 원상은 조조가 고간의 토벌로 여념이 없는 동안 여전히 변경을 침입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이는 조조의 근심거리였다. 조조는 군량 운반을 위한 운하 건설에 착수한 뒤 자신은 업으로 돌아온다. (207년 1월)

조조가 오환 원정을 계획하자 대부분의 신료들은 원정에 나선 사이 유표가 유비를 시켜 배후를 공략할 것을 우려했으나, 곽가는 유표가 유비를 견제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예측하며 원상과 오환을 도모할 것을 권했다. 본디 무종을 거쳐 유성으로 진군하려 했는데, 장마로 인해 대로가 진창이 되고 샛길들은 원상, 오환군이 선점하여 고전하고 있었으나, 때마침 조조에게 합류하여 길안내를 자처한 전주(田疇)의 계책을 따라 2백 년간 잊혀져 있던 노룡의 샛길을 보수하며 오환의 근거지인 유성을 급습, 백랑산에서 결전을 벌여 승리하고 유성을 도륙내었다. 원상, 원희는 공손강에게 달아났는데, 조조가 업으로 회군하자 공손강은 원상 형제를 참수한 뒤 머리를 보낸다.

조조는 공손강을 몰아세우면 원상과 연합하겠지만 느슨히 풀어주면 원상을 견제할 것이라 예측했는데, 공손강에게서 소식이 오길 기다렸기 때문인지 9월에 회군을 시작해 11월이 돼서야 역수에 이르는 등 회군의 속도는 극도로 느렸다.[87]

7. 적벽 전역

7.1. 형주 정벌

이듬해인 208년 1월에야 업에 도착한 조조는 에 도착하자마자 현무지를 파서 군대를 조련했다. 유표를 칠 수군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같은 해 6월에 조조는 삼공을 폐하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조정의 전권을 독점했으며, 그 직후 유표를 공격하러 떠났는데 유표는 공교롭게도 조조가 딱 형주에 도착할 때쯤 타이밍 맞춰 죽는다. (208년 8월) 조조가 신야에 도착하자 유종은 항복한다.(208년 9월) 그리고 양양에 도착한 조조는 유비가 군사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호표기 5천기를 뽑아 치중도 버린채 밤낮으로 직접 추격하여 도주중이던 유비군을 장판에서 격파한다.(장판파 전투)

결과가 워낙에 일방적인 전개인지라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조조가 감수한 리스크는 칼날 위로 성큼 발을 내딛은 수준이었고, 그 과감한 결단력은 조조의 수많은 군사적 활약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점이 있었다. 즉, 치중/본대/선봉이 토막토막난 상태에서, 보급은 커녕 본군 후속부대도 없이 기병만을 이끌고, 몇달 전까지만 해도 적지였던 곳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추격전을 펼치는 짓을 벌인 것이다.

게다가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겠다만) 조조는 스스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 보다 더 위험한 입장이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항복한 유종의 부하 중 왕위라는 장수가 '조조가 헤이해진 틈을 타 그를 요격해 사로잡을 수 있다'는 진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물론 원소를 막는데 실패한 한복의 신하 경무/민순처럼 허황된 용기로 볼 수도 있겠으나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만 해도 '유종이 왕위 말만 들었더라도!'라며 그 제안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으로 봐서 이런 급속한 기동전은 자칫 조조 자신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었다. 거기다 당시 사람들은 채모가 유종을 돕고 유기를 모함했던 까닭에 그를 경멸하였다고 하니 유표의 정당한 후계자는 유기라는 명분을 들고 유비와 유기가 만나 형주의 인심을 뒤흔들 수도 있었다.

설령 그런 드라마틱한 전개는 벌어지지 않는다해도. 애초 반조조 성향이 강한 형주에서 납득이 힘든 형태로 이루어진 항복인 이상, 만에 하나 이 추격전에서 조금이라도 조조가 약한 모습을 보일 경우 왕위와 같은 불만분자들이 급속히 힘을 얻고 형주의 불온기류가 고조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정 내외의 모든 리스크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조조는 유비를 공격하는 길을 택했다. 물론 그것은 '유비의 강릉 점거'라는, 전쟁 장기화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전략적 목적이 있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과감성'이 유달리 부각되는 장판 추격전에서도 간교할 정도로 치밀한 일면이 드러나 웃음 터트리게 만드는 조조의 모습이, 바로 문빙을 대동한 것. 당장 형주의 숙장으로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지였던 곳에서 추격전을 벌여야 하는 조조 입장에서는 길잡이 역할만으로도 본전이고, 지금 막 항복한 장수를 자신의 최측근 정예와 나란히 종군하게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이제 막 복속시킨 유표군 구성원에 대한 선전적 효과도 컸다.

나아가 일단 조조를 새 주인으로 인정하긴 했지만 스스로 마음 속 찜찜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던 문빙에게, 형주민들 입장에서 조조의 대안인 유비 토벌을 맡기는 것은 문빙에게 그런 미혹/미련을 끊도록 강요하는 대내적 효과가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왕위와 같은, 유표 구신 중 불평분자들이 야기할 수도 있는 '돌발사태'에 대한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조의 날카로운 판단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이미 자기가 이끌던 일부의 무리를 관우를 통해 한수로 별도로 내려가게 한 상황이었고 장비가 분전하는 활약 등으로 인해 가까스로 장판을 벗어나 한진 나루터에 도달해 수군 별동대 관우와 접촉하는데 성공한다. 조조는 곧바로 강릉을 점령했고 유비는 하구의 유기에게로 달아나 손권과 동맹을 맺는다. (208년, 9월)

7.2. 적벽대전

조조는 그대로 남하하여 적벽에서 손유 연합군과 싸운다.[88]

때문에 적벽에서 맞붙었는데 겨울에는 전투를 벌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조조군은 먼 거리를 행군하여 지쳤고 수전에 익숙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 전투는 조조가 직접 지휘하긴 했으나 수군을 지휘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한 주유유비는 뛰어난 군략가였다. 유비와 주유는 양자 간의 압도적인 전력 차를 화공으로 역전시켰으며, 서로 연합해 조조군을 무찌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조조는 적벽에서 상당한 손실을 보았는지 점령한 형주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대로 철수한다.[89] 장병의 희생을 무릅쓰고 화용도를 황급히 빠져나와야 할 정도로 위급했던 것으로 보인다.[90]

조조는 남군조인을 남겼는데, 적벽의 손실로 조인은 서황, 악진, 문빙, 이통과 함게 소수 병력만 가지고 주유와 유비에게 맞서야 했다. 조인은 주유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분전하며 일년을 버티나, 마침내 남군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 사이에 유비군은 형남 4군을 빼앗으며 조조를 따르지 않은 옛 유표의 병사들까지 접수한다.(208년 12월)

조조는 적벽에서의 패배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에 내정에 전념하며 군사 행동을 중지한다. (209년, 210년)

8. 적벽 이후

8.1. 동관 전투

211년, 조조는 종요를 보내 장로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보고 조조가 관중을 노린다고 판단한 지역 제후들이 연합하여 반기를 든다. 마초한수가 이들을 이끌었다. 《전략》에 따르면 211년, 마초는 관중의 제장들인 후선, 정은, 이감, 장횡, 양흥, 성의, 마완, 양추, 한수 등과 함께 도합 10부로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그 군사가 10만으로 하수, 동수 일대를 점거하고 진영을 벌여 세웠다. 한수, 마초가 반역한 때, 홍농빙익에서는 많은 현읍이 거병하여 그들에게 호응하였다. 하동은 역도들에 인접한 곳이었으나, 주민 가운데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유웅명은 마초 등이 모반하였을 때, 마초를 따르지 않아, 마초가 그를 격파했다.

7월,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해 이들과 싸운다. 조조는 마초와 급박하게 대치하는 한편, 몰래 서황, 주령 등을 보내 밤중에 포판진을 건너 하서를 점거해 둔영을 세우게 했다. 당초 조조의 군대가 포판에 있으며 서쪽으로 하수를 건너려 하자 마초가 한수에게 말했다.
의당 위수 북쪽에서 저들을 막으면 20일이 지나지 않아 하동의 곡식이 다하여 필시 달아날 것입니다.

한수가 말했다.
하수를 건너게 해주어 하수 가운데서 몰아붙인다면 오히려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마초의 계책을 펼치지 않았다. 조조가 이를 듣고 말했다.
마초 저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묻힐 땅이 없겠구나.

이후 조조가 동관에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려 했는데 미처 건너기 전에 마초가 배를 향해 달려와 급박하게 싸웠다. 선두 부대가 막 건널 때 마초 등이 돌연 당도했는데 조조는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조조를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 마초는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군을 추격하여 왔는데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군은 더욱 빨리 추격하였고 군사들은 배에 오르려는 자들을 죽이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자, 허저는 오른손으로 배를 저어 나아가게 하여 가까스로 황하를 건넜다. 이 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한편 이때 교위 정비(丁斐)가 소와 말을 풀어 유인하자 적들이 소와 말을 취하느라 어지러워졌고 이에 조조가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제장들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았는데다 또한 조조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모두 황망하고 두려워했는데, 조조를 만나보고는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마터면 좀도둑들에게 곤란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 조조는 황하를 따라 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를 만들며 남쪽으로 진군했다. 적(마초)이 물러나 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를 지켰다. 이에 조조는 자신의 장기인 허허실실을 이용 속이는 군사를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로 들어가 부교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적이 밤중에 둔영을 공격하자 복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그 뒤 결전을 앞두고는 수레와 목책으로 진영을 쌓고 최대한 허약한 것으로 위장하여 그들을 방심하게 한 뒤 결정적일 때 전력을 쏟아 이들을 격파한다.

8.2. 위수 전투

9월, 조조군은 진군하여 위수를 건넜다. 이때 모래를 쌓아올려 성벽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91]

마초 등이 여러 번 싸움을 걸었으나 조조는 응하지 않았고 이들이 위수 남쪽에 주둔하며 서신을 보내 황하 서쪽을 떼어줄 것을 요구하며 화해를 청했으나 조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조조는 한수, 마초와 더불어 홀로 말을 타고 대화했는데 마초는 자신의 힘이 강함에 의지해 돌진하여 조조를 붙잡으려 은밀히 꾀했으나 조조 좌우의 장수 허저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고 이에 마초는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마초가 자식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제안하자, 조조는 가후의 이간책을 받아들이고 이를 거짓으로 허락했다.

한수와 조조가 회담을 가졌는데 군사에 관한 일은 하지 않고 과거 수도에서 있었던 옛 일만을 이야기했다. 마초가 돌아 온 한수에게 조조와 한 이야기가 어떠했는지 묻자 한수는 “별 말 없었소.”라고 하자 마초 등이 한수를 의심했다.

《위서》에 따르면 한수와 회동할 자신을 구경하러 온 호인들을 보고 조조는
"너희들이 조공(曹公)을 보고 싶은가? 나 역시 사람일 뿐이다. 눈이 네 개도 아니고 입이 두 개도 아니나 다만 지모가 많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뒷날, 조조가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 마치 한수가 고친 것처럼 보이게 하니, 마초 등이 더욱 한수를 의심하게 되었다.

적들이 이간계로 분열하자 조조는 서량군과 기일을 정해놓고 평지에서 양측의 군대가 대결해서 결판냈는데 이것은 중국사에 몇 안 되는 회전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맞짱.(…)

정사에서는 매우 간략한 나머지 어떤 전술을 썼고 어떤 식으로 포진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는다. 다만 '먼저 경병(輕兵)으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호기(虎騎)를 풀어 협격(夾擊)하여 대파했다.'라고 당시에 활용된 전술에 관한 기록이 간략하게 남겨져 있다.

만약 기병이 배후로 움직여 아군과 싸우는 적군의 보병 라인을 향해 돌진한 것이 맞았다면 이것은 망치와 모루 전술을 구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조조군은 안정까지 군을 이끌고 이동하여 양추의 항복을 받아낸다.

8.3. 212년~213년 유수구 전투

조조는 봄에 으로 돌아간 뒤 그해 가을에 손권을 공격하기 위해 남하한다. 하지만 역시나 수전에 익숙지 못한 탓인지 전황은 지지부진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지겨움을 못 견딘 손권에게 철군을 제안받는 편지를 받고, 이에 응하여 결국 소득을 얻지 못하고 전투가 끝난다. 여기서 조조가 손권의 군사들이 엄정한 것을 보고 '아들을 얻으려면 손중모 같아야지, 유경승아들돼지와 같다.' 는 말을 했다고 한다.

213년 정월 3일, 조조는 후한 14주를 9주로 합쳐 고대 우공(禹貢, 상서에 나옴)의 구주를 회복했다.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9주로 되돌렸다는 것은, 사주(司州)의 하동(河東), 하내(河内), 빙익(馮翊), 부풍(扶風)과 유주(幽州), 병주(幷州)의 두 주를 모두 기주(冀州)에 병합하고, 양주(涼州)가 다스리던 곳을 모두 옹주(雍州)에 병합하고 또한 사주(司州)의 경조(京兆)를 (옹주에) 병합했으며, 또한 사주(司州)의 홍농(弘農), 하남(河南)을 예주(豫州)에 병합하고 교주(交州)를 형주(荊州)에 병합했으니, 즉, 사주, 양주(涼州), 유주, 병주, 교주를 없애 우공(禹貢)의 9주로 되돌린 것이다. 이는 조조가 스스로 기주을 겸했으니 자신이 다스리는 곳을 넓혀 천하를 제압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213년 그해, 자신의 세 딸(조절, 조헌, 조화)을 헌제에게 시집보낸다. 또한 조조는 여름 5월 병신일(10일), 스스로 즉위해 위공(魏公)이 되고 구석을 받았다.[92] 그 직후 조조는 손권을 공격하였으나 일찍 회군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8.4. 마초의 재기

한편, 서량에서 패퇴했던 마초강족을 데리고 양주를 침입한다. 마초는 여러 융족들을 이끌고 농상의 군현들을 공격하니 농상의 군현들이 모두 이에 호응했고 양주자사 위강을 죽이고 기성을 점거하여 그 군사들을 차지했다. 마초는 정서장군, 영(領) 병주목, 독양주 군사를 자칭했다. <하후연전>에 따르면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양주 천수군 기현에서 포위하자 하후연이 위강을 구원하려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위강이 패했다. 기성에서 2백여 리 떨어진 곳까지 마초가 와서 이에 맞서 싸웠는데 군이 불리했고 견저가 모반하자 하후연은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213~214년)

그러나 마초를 싫어하던 양부, 왕이 등의 활약으로 마초는 금방 패배하고 하후연, 장합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중으로 달아난다.

한편 그 틈을 타 한수도 저왕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나 하후연이 이를 제압하고 한수는 서평으로 달아난다.

8.5. 214년 유수구 전투

214년 7월, 조조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손권과 싸우기 위해 남하한다. 1년 전의 싸움과는 달리 이 싸움에서는 조조군이 패퇴한다.

송건(宋建)은 동탁이 멸망한 뒤, 관중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딸랑 현 하나를 점거하고 30여 년간 왕노릇을 하고 지냈다. 214월 10월, 하후연을 보내 토벌했다.

8.6. 복황후와 그 일족을 죽이다

그해 말, 조조가 으로 돌아왔을 때 복황후가 자신의 아버지 복완에게 사사로이 보낸 편지가 발각되어 복황후와 그 일족이 몰살당하는 일이 생긴다.[93] (214년)
공이 화흠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황후를 잡아오게 했다. 황후는 문을 닫고 벽 속에 숨었는데 화흠이 문을 부수고 벽을 열어 황후를 끌어냈다.

이때 황제가 어사대부 치려와 함께 앉아있었는데 황후가 머리가 풀어헤쳐진 채 맨발로 걸어 지나가다 황제의 손을 잡으며 말하길, "다시 살아날 수 없겠습니까?"

황제가 말하길 "나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오."

황제가 치려에게 말하길 "치공,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소!"

마침내 장차 황후를 죽이려 하였고, 복완과 그 종족으로 죽은 이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 조만전

215년 1월, 헌제는 조조의 딸인 조절을 새 황후로 삼는다. 다른 두 딸 조헌조화도 귀빈이 되어 헌제를 섬기게 되면서 조조는 아예 외척 자리까지 자기가 차지해 더욱 자기 입지를 굳힌다.[94][95]

8.7. 장로 정벌

조조는 장로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이때 장로 뿐만 아니라 저족한수도 조조에게 맞섰는데 두 달에 걸친 싸움에서 이들은 패배하고 한수는 참수된다.[96] (215년, 3월) 장로는 격파되고 달아난다.

이때를 틈타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하는데 장료, 이전(李典)은 소수로 맞서 이를 격파한다. (215년, 7월)

11월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한다. 때를 마쳐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다. 사마의유엽이 조조에게 그대로 촉을 공격하라고 권하나 조조는 사람은 만족을 알아야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는 한중하후연을 남기고 자신은 으로 돌아와 건안 21년(216년) 여름 4월 갑오일(25일), 스스로 작호를 올려 위왕(魏王)이 되었다.
이후 낭야왕 유희(劉熙)를 죽였고 낭야국(國)이 폐지되었다. 장강을 건너려 꾀한 죄로 주살되었다고 전한다.

가을 7월, 흉노 남선우(南單于, 호주천)가 내조(來朝)했다. 당시 흉노오환족의 고위 관리들이 조조와 헌제를 만나고 우호 관계를 다졌던 것이다. 조조는 종요를 조씨 정권의 상국으로 삼는다. (216년)

8.8. 216년~217년 유수구 전투

그리고 그해 말 조조는 다시 군대를 출병하여 손권을 공격한다. 조조와 손권유수구에서 맞붙는다. 그러나 이번엔 폭우와 전염병으로 제대로 싸울 환경이 되지 못하였다. 결국 손권은 조조에게 조공을 보내기로 하며 화해를 청했고 조조는 이에 응하여 혼인을 논의하면서 군을 물린다. 조조는 화흠을 어사대부로 삼는다.[97]

그해 말,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吳蘭)을 보내 한중을 침공한다. (217년) 한중 공방전의 전초다.

8.9. 길비의 난

218년 1월, 길비소부(少府) 경기(耿紀), 사직(司直) 위황(韋晃), 김의(金禕) 등과 허도에서 반란을 일으키나 조조에 의해 진압된다.[98] 이때 이들은 한 조정과 헌제를 장악한 뒤 조조가 역적이라는 조칙을 내리게 한 뒤 유비를 불러들이고자 하였다.[99] 연의에서는 이들의 동기를 순수한 한나라 황실의 애국충정 때문으로 묘사하는데 정사에서도 비슷하다. 김의의 경우엔 그의 선조인 한의 충신 김일제(金日磾)의 풍모가 있었다고 할 정도의 인물로 한(漢)의 제위가 장차 옮겨가려 하는 것을 보고 가히 중흥해야 한다고 말하며 탄식하고 발분하여 마침내 이들과 결모했다고 한다.

이때 관우가 강성했기에 조조는 에 머물러 있으면서 왕필(王必)을 남겨 군무를 관장하며 허도의 일을 감독하게 했다. 길막 등이 집안 사람들과 기타 잡인들을 모아 천여 명을 이끌고 밤중에 문을 불태우고 왕필을 공격하니, 김의가 사람을 보내 내응하여 활을 쏘아 왕필의 어깨를 맞혔다. 왕필은 공격하는 자가 누군지 몰랐고 김의와 평소 친했기에 김의에게로 달아나 의탁하려 했다가 반란의 주목자가 김의인 것을 알고 도주했다고도 하고 왕필이 김의에게 몸을 맡기고자 하니 그의 장하독(帳下督)이 왕필에게 말하길 "오늘 일이 누구 짓인지 아는데 거기에 의탁하려 하십니까?" 라고 하며 왕필을 부축해 남성(南城)으로 달아났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때마침 날이 밝았고 왕필이 여전히 건재하니 이들의 무리가 궤멸되어 패했다. 그 10여 일 뒤 왕필은 끝내 상처로 인해 죽었으니 이들 입장에선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경기는 이미 위왕이 된 조조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뜻을 살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끝내 아이 같은 것들 때문에 일이 그르쳐졌도다!"라고 말하면서 죽었고 위황은 머리를 땅에 부딪치게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조는 이 사건을 빌미로 한 황실 문무백관의 절반 이상을 숙청한다. 워낙 행동이 어처구니 없어서 이를 연의의 창작 내용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정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죽음의 OX퀴즈라고들 불린다.(...)
왕은 왕필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해 한(漢)의 백관들을 불러 업으로 오게 했다. 불을 껐던 자를 왼쪽에, 끄지 않은 자를 오른쪽에 서도록 명했다.

뭇 사람들이 불을 끈 자가 필시 무죄일 거라 생각하여 모두 왼쪽으로 붙었다.

이에 왕이 말하길, "불 끄러 나오지 않은 자는 난을 돕지 않은 자들이고, 불을 껐던 자가 실제로는 적(賊)이다."라 하고는 모두 죽였다. - 산양공재기

연의에서는 오른쪽에 붙은 사람들에게 상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미화된 것이고 정사에서는 누가 봐도 왼쪽으로 붙을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조성해 놓고는 황당한 핑계를 붙여 모조리 학살했다. 애초에 허도에 남아 있는 한나라 조정의 관료들을 이참에 싸그리 정리해 버릴 의도였던 것이다.

8.10. 한중 공방전

그 뒤 한중에 침입한 마초, 장비, 오란을 맞아 조홍이 오란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나[100] 유비가 직접 북진하여 하후연과 싸운다.

218년 9월,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장안에 도착하지만 바로 한중으로 향하지는 않고 주둔한다.

이때를 틈타 10월에 에서 후음이 반란을 일으켜 완성을 점령하고 관우와 내통한다. 이러자 남군에 머물던 관우는 이에 호응하여 북진한다. 조인은 이때 번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완을 포위 점령하고 후음의 반란을 진압한다. 그 뒤 북상한 관우와 조인은 한수를 가로질러 서로 대치한다. (219년)

하후연이 한중에서 황충에게 전사한다. 조조는 뒤이어 한중으로 도착하였으나[101] 하후연의 죽음으로 요충지는 유비에게 넘어간 상태였고 때문에 불리한 형세였다. 조조는 다섯 달에 걸쳐 유비군과 싸우나 고지를 선점한 유비군은 지키기로 일관했고 조조는 결국 한중을 내주고 철수한다. (219년 연초. 장안으로의 회군은 5월)
이때 왕이 환군하고자 하여 계륵(닭갈비)이라는 영을 내리니 관속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주부(主簿) 양수(楊脩)가 스스로 군장을 엄히 꾸리니 사람들이 놀라 양수에게 묻기를 “이를 어찌 알았습니까?”

양수가 말하길 “무릇 계륵은 버리기에는 아깝고 먹기에는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 이를 한중(漢中)에 비유한 것이니 왕께서 환군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소이다.” - 구주춘추

8.11. 번성 공방전

장안에 도착한 조조는 우금에게 원군을 주어 조인군에 합류시킨다. 그러나 우금의 지원군과 조인군은 한수가 범람하여 수몰되고 관우의 부대는 배를 타고 이들을 남김없어 쏘아 죽이거나 포로로 사로잡았다. 결국, 우금은 포로로 잡히고 조인은 번성으로 탈출하다 관우에게 포위당했으며 조조에게 대항하는 무리들이 관우의 인수를 받아 허도 인근에까지 출몰하였다. 이에 조조는 당황하여 한때 천도를 논하기까지 했으나 사마의장제의 간언으로 인해 곧바로 서황에게 군대를 주어 원군으로 보낸다. (219년 7월)

업에서 상국으로 있었던 종요위풍을 고용하였는데 위풍은 몰래 사람들을 모아 을 점령할 것을 모의한다. 하지만 이에 가담한 사람 중 하나가 조비에게 밀고하여 이 반란은 진압되고 종요는 면직된다. (219년 9월)

조조는 낙양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손권이 밀서를 보내 관우 기습 계획을 알렸다. 조조는 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는데 죽기 불과 3개월 전이었는데도 친정한 것이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서황이 미리 관우를 격파하였고 만총이 성 밖을 공격해 번성의 포위가 풀리게 되었다. (219년 10월) 관우는 배들로 오히려 면수를 점거하고 양양으로 가는 길을 막고 단절되어 통하지 않게 했으나 손권이 남군을 습격하니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조조는 표문을 올려 손권을 표기장군으로[102] 삼고 가절을 주어 형주목의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고 남창후에 책봉했다. 또 예전 손권이 합비 남쪽 환현을 정벌할 때 포로로 잡힌 주광(朱光)을 돌려보냈고 조조에게 칭신하면서 천명을 들먹이며 유세했다. 이는 곧 칭제를 의미하니 조조는 손권이 자신을 화롯불 위에 올려 놓으려 한다며 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103] 시중 진군, 환계 등이 말하기를 '한나라의 운명은 이미 끝났고 전하의 공덕은 드높으니 손권이 칭신한 것이다. 무엇을 의심하느냐'고 했다. 조조는 '천명이 나에게 있다면 자신은 주문왕 같이 되리라'고 찬탈의 마음을 드러냈다.[104]

이때는 조조 말년 최대의 위기였지만 결국 서황이 관우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여몽이 강릉을 기습공격하며 관우는 몰락했다. 이렇게 조조는 말년의 위기를 넘겼고, 결국 조조 사후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받으며 위를 건국하게 된다.

8.12. 죽음

세설신어》와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가 낙양에 건시전을 세우면서 장인 소월(蘇越)에게 탁룡사에 있는 아름다운 배나무를 옮기게 하였는데, 이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나무를 베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그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멋대로 나무를 파내게 하다가 뿌리가 상처를 입었는데, 피가(...) 흘러나왔다. 신령들의 혼이 작용한 것일까? 소월이 이를 조조에게 보고하자 조조는 직접 살펴보고는 이를 꺼리면서 상서롭지 못하게 여겼는데, 돌아온 직후에 조조는 급작스레 두통이 생겨서 드러눕게 된다.

이 시기 손권이 조조에게 관우의 머리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유비의 화가 자신에게 돌아올까 하는 두려움과 한때 부하로 아꼈던 과거를 고려해서 후히 장사지냈다.

그 뒤 얼마 안 있던 220년 1월, 조조는 낙양에서 눈을 감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결국 조조는 평생의 꿈이었던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조는 대신들과 후계자 아들 조비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해 옛 법을 따를 수 없으니 장례가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도록 하라. 군을 이끌고 둔영을 진수하는 장수들은 마땅히 그곳을 떠나지 말고 유사(有司)들은 각자 직임을 다하라. 평상복으로 염(斂)하고 금, 옥, 진기한 보물 따위를 묻지 말라."[105]

처음 위공 논의부터 위왕 즉위 이후까지 유비 세력과 한 황실의 충신들에 의한 내외부로 권력 기반을 흔드는 위태로운 사건을 몇 번이나 경험하고 순욱, 최염, 모개 같은 공신들도 죽인 조조의 입장에선 당연히 할 만한 소리였다. 과연, 그 걱정대로 병사나 백성들은 노역으로 고통스러웠으며, 또 역병이 있었고 그 때문에 군대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이 상사를 발표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위 조정 내부에선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관료들은 천하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걱정하고, 장례 의식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에 조조의 정예병인 청주병들과 장패에게 속한 부대는 천하가 어지러워지리라 여겨 모두 북을 울리며 순식간에 멋대로 군영을 벗어나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조창은 북방에서 수만 명을 이끈 국경방위의 총책임자로 그대로 있었고 조조는 관우가 북상하자 중앙의 유일한 정예군인 7군을 조식에게 맡겨서 내보내려 했었다. 조식이 술취해 우금으로 바뀌었기에 망정이지 조식이 조창과 함께 수만 명의 강력한 군권을 갖고 조식이 야심이 있었다면 조조의 맏아들이라는 타이틀밖에 없는 조비는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조조가 죽자 조창은 군사를 데리고 밀고 들어오고 군신들은 조씨 정권이 망했다며 장례도 안하려 하고 대혼란에 빠진다. 이 상황에서 가규만 제정신 차리고 일갈하자 조창이 쫄고 무엇보다 조창의 반란 제안에 조식이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씨 정권이 이어졌던 것이지 조씨 정권은 조조가 죽자마자 망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가규가 나서 신료들을 설득해 정식으로 조조의 상을 발표하고 달아난 청주병을 토벌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장문의 격문을 만들어 창고에 있는 식량을 지급한다고 알려 일어날지도 모르는 내환을 방지했다. 이럼에도 몇몇 관리들은 조조의 죽음에 불안해하며 요충지를 지키는 장수들을 모두 조조와 동향안 , 패현 출신으로 바꾸자는 뻘스러운 제안까지 하기도 했는데 서선(徐宣)이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면 군부의 충성심이 꺾여 더한 혼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사후 아들 조비에게 무왕(武王)이란 시호를 받았으나 얼마 후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서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다. 그리고 조조는 황제로 추존되어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란 묘호와 시호를 받았다. 태조가 보통 나라를 세운 군주에게 올리는 묘호인 데 반해 조조가 받은 것을 보면 조비도 아버지의 업적만큼은 인정했던 듯.

조조는 부장품도 거부하고 자신의 상이 끝나면 상복을 벗으라고 하긴 했지만, 그의 아들 조비는 조조가 죽은 바로 그 해에 고향에서 잔치를 벌였고 그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술 더 떠서 다음 해 221년에 조조의 장례식을 조조의 무덤이 있는 이 아닌 낙양에 위치한 건시전에서 행했는데, 위왕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무황제로 추존됐으니 제왕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를 해야함에도 자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일반 평민이 받는 장례로 치렀다. 즉 조비는 그 인성에 걸맞은 불효자였던 셈.

중국 고서인 《광고금오행기》에는 조조의 유령에 대한 일화가 있다. 유수 나루터에 큰 배가 하나 뒤집혀져 있는데, 강물이 줄어들면 그 모습이 보였다. 나이든 사람이 말하길 "저것은 조공(조조)의 배다." 강에서 어부가 밤을 새기 위해 그 배에다 밧줄을 걸어 놓곤 했다. 그런데 밤이 되면 풍악 소리가 들리며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부가 막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길 "관기를 가까이 하지 마라." 다음날 그 사람이 소문을 들어보니 그 배는 조공이 기생을 태우고 가다가 그 자리에서 배가 뒤집혔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조만전》에 따르면 총애하는 첩이 있어 조조가 낮잠자는 것을 늘 수종했는데, 어느날 조조가 "조금 있다가 나를 깨워라"라고 했다. 그녀는 조조가 편안히 잠든 것을 보고 깨우지 않았는데, 조조가 스스로 잠이 깬 뒤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청성잡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 온다.
조조가 한여름에 손님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다가 술에 얼큰하게 취하자 시첩(侍妾)을 불러 참외를 들여오라고 하였다. 한 시첩은 참외를 쟁반에 가지런히 담아 올리면서,
"참외가 무척 잘 익었습니다."
하고, 또 한 시첩은 몸가짐을 다소곳이 가다듬고 참외를 받들면서,
"설익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조조가 크게 화를 내면서 그들을 목 베었다. 다시 시첩을 불러 참외를 들여오게 하자, 시첩들이 감히 나서지를 못하고 모두 난향(蘭香)이라는 시첩에게 미루었다. 그러자 난향은 이내 두 손으로 쟁반을 눈썹 높이로 받들고 들어갔다. 조조가 참외 맛을 묻자 입을 오므리고 대답하였다.
"매우 답니다."
조조는 또 즉시 목을 베었다.
손님들이 모두 질려서 까닭을 묻자, 조조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앞서의 두 시첩은 나를 섬긴 지 오래되었는데, 참외를 올릴 때에 반드시 눈썹 높이로 해야 하는지를 어찌 몰랐겠는가. 게다가 모두 입을 벌리고 대답하였으므로 그 어리석음을 벌하여 목을 벤 것이다. 난향은 나를 섬긴 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손을 높이 들어 쟁반을 받들고 입을 오므리고 대답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내 마음을 잘 알았는가. 그래서 목을 베어 그로 인한 화근을 끊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해도 지랄 안해도 지랄


[1] 요순 할 때 그 순이다.[2] 위에서 언급했듯이 환제를 옹립해준 대가로 환제는 조등을 비롯한 내시들에게 양자를 들일 수 있는 엄청난 수준의 큰 상을 내렸다. 원래 환관은 양자 갖는 거 아니다.[3] 무려 1억 전을 주고 삼공 중 하나인 태위를 샀다.[4] 대표적인 예로 원술을 예로 들 수 있다. 흔히 원소로 착각하는데, 사실 원소는 노비의 자식으로서 좋은 배경을 가졌다기보단 6년상 등의 개인기로 성장했다고 봐야 한다.[5] 본인이 손자병법을 아예 편집한 수준으로 주석을 달았다.[6] 삼국지 위서의 원본이며 배송지 주석으로도 일부 내용이 전해지는 사서로 왕침이 편찬했다.[7] 당시는 과거제 같은 게 없고 이런 주변 평가 같은 걸로 관직에 오르던 시절이라, 평가를 받는 게 매우 중요했다.[8]정사 삼국지》 <무제기>에 따르면 치세엔 훌륭한 신하, 난세엔 간악한 영웅(子治世之能臣亂世之奸雄)이라고 평했다. 후한서에서의 기록에 따르면 평화로운 시기의 간적, 난세의 영웅(君淸平之奸賊亂世之英雄)이라고 평했다.[9]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그리고 이희재 만화 삼국지에서는 으스대는 건석의 숙부를 조조가 아예 그 자리에서 단매에 때려죽였다.[10] 곤장을 때리는 형벌이 사극이나 소설에 친숙하게 등장해서 그렇지 사실 이게 사람 죽이는 형벌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였기에 골절뿐만 아니라 2차적인 세균감염 등으로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조선시대 환국기의 유배죄인들은 사형으로 죽는 경우보다 유배가기 직전에 맞은 곤장의 후유증으로 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 흔히 '장독 올라 죽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11]후한서》 <황보숭열전>에 황보숭, 주준, 조조가 같이 황건적 파재를 격파한 일이 기록되어있다.[12] 당시 청주는 성양경왕사를 받드는 신앙이 퍼져있고 제남이 특히 심했다고 한다.[13] 대략적으로 만남의 시기를 유비가 장거, 장순의 난 토벌에 참여한 187년 6월 이후 ~ 영제가 붕어한 189년 5월 사이라고 보는게 맞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제 말년에 유비의 연대가 정확하게 확인되는 게 187년 6월 장거, 장순의 난 토벌 참여뿐이기 때문이다. 이후 유비가 안희위를 언제 버렸는지, 관구의와 단양에 언제 갔는지는 추측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기 때문. 실제 만남의 시기 추정 범위는 좀 더 좁을 것이다. 밑에서 나오듯이 영제 말년에 조조가 초현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났을지도 모른다.[14] 청나라 절강(浙江) 인화(仁和, 杭州) 사람. 자는 대종(大宗) 또는 근보(堇甫)고, 호는 태정노민(秦亭老民) 또는 아준(阿駿)이다. 옹정(雍正) 2년(1724) 거인(擧人)이 되고, 건륭(乾隆) 원년(1736) 홍박(鴻博)으로 불려 한림원(翰林院) 편수(編修)가 되어 무영전(武英殿)에 있던 『13경(經)』과 『24사(二十四史)』를 교감했으며, 『삼례의소(三禮義疏)』를 편수했다. 어사(御史)로 옮겼다. 8년(1743) 대책(對策)에서 “만주와 한인의 진역은 크게 나눌 수 없다.(滿漢畛域不可太分)”고 말해 파직되었다. 만년에는 광동(廣東) 월수서원(粵秀書院)과 양주(揚州) 안정서원(安定書院)의 주강(主講)을 지냈다. 후진들을 이끌어주기를 좋아했다. 저서에 『속예기집설(續禮記集說)』과 『석경고이(石經考異)』, 『예경질의(禮經質疑)』, 『예례(禮例)』, 『경사질의(經史質疑)』, 『독방언(讀方言)』, 『사기고증(史記考證)』 등이 있다.[15] 전군교위(典軍校尉)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16] 수도를 지키는 오교위의 하나로 관품 자체는 지방의 듣보잡 교위보다는 넘사벽으로 높지만 태수에 비하면 살짝 떨어진다. <동탁전>에 따르면 동탁은 수도에서 실 병력을 거느리는 교위의 임명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당시 조조는 황건적을 평정하면서 군재를 인정받았기에 동탁은 서원군을 해체하고 조조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서원군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반란군 진압에 써먹으려 했던 것 같다.[17]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동탁 암살에 실패하여 도망가는 걸로 나오나 허구.[18] 삼국지연의에서는 중모현의 현령이 진궁으로 나오지만 허구.[19]삼국지연의》에선 격문을 날조한 사람이 조조로 나오지만 허구.[20] <무제기>에는 이때 홍농왕하태후가 살해당해서 병사를 일으켰다고 되어 있는데 정작 《후한서》<효헌제기>를 보면 홍농왕 살해는 다른 이들의 거병이 일어난 다음 해 1월의 일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반동탁의 명분으로만 거병을 했는데 때마침 소제가 살해되자 이로 인해 거병했다고 나중에 명분을 가져다 붙인 것으로 보인다(...).[21] 이때 종제였던 조인, 조홍도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하후돈의 경우엔 조조가 처음 거병한 이래 하후돈은 늘 비장(裨將)으로 조조 밑에서 정벌을 수행했고 분무장군이었을 때, 하후돈을 사마(司馬)로 삼아 백마(白馬)에 따로 주둔시켰다는 기록이 있다.[22]영웅기》에서는 이때 유비가 연의에서처럼 공손찬이 아니라 단독으로 가담해 조조와 같이 행동했다고 나온다. 어쩌면 조조가 단독으로 동탁을 추격했을 때 유비도 따라갔을 수 있다.[23] 삼호법에 따라 모두 현지 출신이 아니다.[24]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연합군이 산조와 하내에 따로 모인 정황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원소는 동탁을 두려워해 싸우지 못했다는 식으로 나온 뒤 조조가 전투를 촉구하는 일장연설을 해서 연합군이 모두 산조에 모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정작 이때 원소는 산조에 있지도 않았다(…). '위태조 폐하 빼고는 모두 겁쟁이였다'는 식으로 막 띄워주려다 보니까 생긴 오류(…). 물론 하내에 집결한 연합군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전혀 언급이 없으며, 원소와 한복의 불화는 《후한서》에서 언급된다.[25] 흑산적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고 연주에 거점을 만들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26] 동군 사람으로 유대를 섬겼다는 서술은 없고 처음부터 조조를 따랐다. 조조가 동군태수로 임명되면서 기용한 것으로 보인다.[27] 유대의 부하로 보긴 어려운 것이 관품상으로는 자사와 태수가 동렬이고, 더군다나 제북국은 연주가 아니라 청주 소속이기에 유대의 지시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유대가 연주자사로 임명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제북상이 되었으니 실력자 유대가 개인적으로 포신을 임명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유대에게 간언했던 것은 황건적 토벌을 둔 협력 체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포신이 황건적에게 패하고 임지에서 쫓겨나 유대의 보호를 받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28] 진수는 조조가 유대의 후임으로 추대된 합법적인 연주목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유대는 연주목이 아닌 연주자사였고 관직의 사적인 양도, 증여는 당연히 불법이다. 조조가 연주를 무력 점거하자 그 배후에 있던 원소가 조조를 연주목이라고 인정해준 것이고, 조조는 중앙 정부에서 유대의 후임으로 파견한 연주자사 금상을 공격해 쫓아냈다(...). 후한서 원소전과 배송지주로 달린 삼보결록에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29] 유대가 연주자사였지만 연주 전역을 다스렸다고 보긴 어렵고, 실제로는 각 군국의 태수들마다 비슷비슷한 지분을 가졌다고 봄이 옳다. 하지만 조조는 동군태수로서의 지분에 더해 원소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유대의 세력을 고스란히 흡수했고, 황건적 잔당들의 항복을 받으면서 상당한 인력을 얻었기에, 웬만한 태수 레벨을 초월하게 된다.[30] 이 당시 평원 고당현에 주둔하고 있었다.[31] 원소와 마찬가지로 공손찬도 연주에 자사를 파견하고 있었으나 세력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불명.[32] 공손찬이 사적으로 임명한 유비, 선경과 달리 도겸은 정식 서주목으로 독자적인 기반을 꽤 다진 상태라 공손찬과는 전략적인 제휴 관계에 가깝다.[33] 원술은 원소를 최대의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유표는 원소와 제휴하고 있었고, 조조 또한 원소의 종속적인 위치에 속해 있었다.[34] 원술 입장에서는 상당히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다. 이는 원술 항목을 참조할 것.[35] 흔히 여포와 조조와의 싸움으로 알려졌으나 실질적인 수장은 장막으로 여포는 장안에서 지낸 높은 관직, 장막에게 오기 전 원소 휘하에서 군공을 쌓으며 널리 알려진 무용 등을 고려해 장막이 바지사장으로 고용한 것에 가깝고, 장막은 연주를 점거한 뒤에는 여포에게 약간의 지분을 주며 떼어낼 생각이었다.[36] 물론 장홍의 존재에서도 알 수 있지만 당시 연주 전국이 모두 조조의 영향력에 닿고 있었다고 보긴 어렵기는 하나 아무튼 사실상 세력 멸망 수준으로 장막 세력에게 홀라당 넘어간건 확실하다.[37]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포가 하루 아침에 한 주(州)를 얻었으나, 동평(東平, 연주 동평국)을 점거하고 항보(亢父, 연주 임성국 항보현)와 태산의 길을 끊은 채 험지에서 나를 요격하지 못하고 복양에 주둔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알겠다.'[38] 삼국지연의에서는 전위가 구해주는 것으로 바뀌었다.[39]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이 무렵의 기록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지만, 《삼국지집해》에 주석으로 인용된 사승의 《후한서》에 따르면 조조가 복양에서 여포를 포위하다가 패하고 원소에게 항복을 구걸하자 원소가 불쌍히 여겨 5천의 병사를 지원해줘서 조조가 연주를 취했다고 한다. 장막이 궐기한 동기로는 하나같이 원소와의 대립 때문이라 언급되고 있으니, 원소로서도 이를 무시하긴 어려웠을 것. 진수가 이 기록을 대놓고 생략한 건 조조가 원소에게 구걸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기록할 수 없는 상황이다보니 뺀 걸로 보인다.[40] 진수는 원소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했고, 조조가 이를 받아들였으나 정욱이 제지하자 정욱의 말을 따랐다고 적고 있으며, 집해에서는 원소와 조조가 연합 관계라는 것은 이미 너무나 새삼스러운 일이라 원소가 조조를 업으로 소환해 직속 부하로 삼으려 한 것을 진수나 위나라 사람들이 흑역사로 간주해 숨긴 것으로 보는 쪽이 유력하다.[41] 조조가 원술을 격파하면서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진 반면, 원소는 조조를 지원해 원술의 북상 야욕을 저지하는 것은 성공했으나 딱 원술이 격파될 때쯤 흑산적의 기습을 받아 근거지인 업이 함락되었고 이를 틈탄 공손찬의 재침공을 받으면서 큰 위기를 겪었다.[42] 조조는 이후에도 기습적인 전략과 기만책을 통해 전황을 타개하며 승리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준다.[43] 마침 도겸이 병으로 죽으면서 유비에게 서주목의 지위를 양도한 상태였다.[44] 이토록 원술이 적지 않게 헌제의 측근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정황을 보았을 때 원술 또한 천자의 옹립을 목표로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나 이때 원술은 서주를 두고 유비와의 싸움이 길어지고 있었기에 조조처럼 직접 개입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45] 이때 조조는 시중 대숭(臺崇), 상서 풍석(馮碩), 의랑 후기(侯祈)를 죽였다.[46] 원소는 명예직으로 올려버리고 자신이 실세임을 천명한 것이다.[47] 이렇게 받게 된 원소의 권위가 그야말로 ㅎㄷㄷ한데 군부 최고위직인 대장군 + 기주목 + 유, 병, 청주 도독으로 여기에 지절을 더하였기에 관할 구역 내 민간인과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법에 따라 처결할 수 있으며, 부월의 특진을 받아 자의적인 사법적 재량권을 행사해도 면책받는다. 호분의 특진을 받았으니 자체적으로 군을 편성할 수 있으며, 궁시를 받았으니 역적으로 간주된 인물을 토벌할 수 있다. 까놓고 말하면 자기 관할 구역 내에서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48] 전풍의 진언은 천자를 옹립하고 있는 조조와 전쟁을 개시하면서 전선을 둘로 늘리자는 얘기다. 명분, 실리 양쪽에서 모험을 벌이자는 얘기니 당연히 쉽지 않았을 것. 더욱이 북쪽에서 공손찬을 몰아붙이고 있던 국의가 크게 패한 것이 이 무렵임을 감안하면 악수에 가깝다.[49] 가후를 데리고 있던 장수조차도 고작 양무장군이었다.[50] 사실 유비가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충고한 책사들 말을 씹은 것도 조조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수 있다. 어쩌면 원소도 본래는 세력가인 유우를 황제로 삼으려고 했듯이 '유비를 황제로 만들면 유비는 명목상이나마 남의 밑이 아니게 되고 나는 유관장이라는 치트키를 얻게 되니까 윈윈 아닐까?'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뭐 관련 언급은 하나도 없는 뇌피셜인데다 본인 손으로 올린 헌제의 황위를 뺏는 게 정치적 자살행위라 현실성 없는 추측이지만, 조조가 수상할 정도로 유비에게 이것저것 챙겨줬다는 것은 사실이다.[51] 다만 유표, 유장이 유비에게 호의적이였던 것과 별개로, 이들이 천자를 끼고 있던 조조를 지지했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반한다. 당장 유표는 원술처럼 황제 참칭만 안했을 뿐이지 천자의 의복을 입으며 하늘에 제례를 행해는 등 사실상 형주의 황제 노릇을 즐기고 있었고, 유장은 선대 유언장로를 핑계로 중앙 정부와 연락을 차단했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자기만의 왕국을 조성하고 있었다.[52] 조조는 황제들에게 실망하기 전까지는 간웅이라기에는 자신의 세력이 약해서 얻을 것이 별로 없었을 수도 있었던 시절에 목숨을 걸고 십상시나 동탁 등에게 대항했던 적도 있었다.[53] 장제가 유표와의 싸움에서 죽고 장수가 군권을 물려받자 유표가 장수를 회유해 남양에 주둔시켰다.[54] <장수전>에서는 추씨의 일로 장수가 원한을 품었고, 조조가 이를 알고 은밀히 장수를 죽이려다 누설되어 습격을 당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배송지의 주석으로 조조가 호거아에게 금을 내리자 장수는 측근들을 매수해 자기를 치려 한다고 여기며 분노했다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55] 이 일로 조앙을 친아들로 여겼던 정실 정부인과 이혼했다.(정부인이 조조를 떠난거지만 훗날 조조가 재결합을 하려고 했을 때 문전박대만 당한다.) 그리고 조앙의 죽음으로 인해 조위 왕조는 정통성이 완벽한 후계자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계속 후계자와 관련된 정통성 문제로 고통받는 신세가 되고 만다[56] 주위에 적이 많았고 유협의 정통성을 옹위한다는 대의명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원술의 입지상 적대 세력인 조조가 조정을 장악하자 자신의 지지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대외적 입지는 포기한 채 나름의 내부 결속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된다.[57] 처음엔 원술도 여포를 후대했지만 여포가 방약무인으로 날뛰며 원술의 영내에서 노략질을 일삼다가 쫓겨난 것이라 원술에게도 타당한 이유는 있다.[58] 위충의 기록은 여기에서 끝이지만, 이후 우금이 관도대전 당시 별동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급, 획가에 주둔하던 원소군 수천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뒀는데, 급과 획가는 하내군 소속의 현이다(...) 관도대전 이전에 원소는 이미 위충을 정리하고 하내군을 점령했을 것이다.[59] 사공장사이며, 연주자사 유대와는 동명이인이다. 자세한 내용은 유대(후한) 참조.[60] 연의에서는 마등도 관련되었으나 자신의 본거지인 서량에 있어서 무사했다고 나온다.[61] 전풍은 원소에게 조조의 뒤를 치라고 했지만, 원소는 자신의 막내아들이 아프다며 거절한다.[62] 이렇게 유비가 싸우지 않고 달아난 것은 성급한 판단일지 모른다. 원소는 유비가 서주를 버린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조조를 침공한다.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한 달 조금 되는 기간만 버텼어도 조조는 원소에게 배후를 급습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원소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시당초 원소는 유비를 도울 마음이 없어 아들 핑계를 댔고 유비가 그를 눈치채고 도와주지 않을거라는걸 알았을수도 있다. 원소 문서 참조.[63] <무제기>의 서술은 2월에 백마가 포위된 사실을 서술한 이후 4월로 갑자기 널뛰기한다. 다른 어떤 기전에도 2월과 4월 사이의 백마 포위망을 다룬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64] 후에 <우금전> 등에서 연진이 원소의 별영이 있는 것으로 기술된다.[65] 이렇게 진수가 조조가 패배한 전투를 누락하고 철수한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은 무제기에서 일관적으로 보인 모습이다. 가령 진수는 여양 전투, 적벽 대전의 전투를 생략하고 조조가 철수한 사실만을 기록한 바 있다. 거기다가 "불리하였다"는 적벽대전에서도 마찬가지의 용도로 쓰인 바가 있다.[66] 다만 합전을 했다는 것이 단판 회전을 벌인 것인지 지속적으로 자잘한 교전을 벌인 끝에 전선이 밀린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과정이 단기 결전이든 게릴라전이든 서전을 잘 풀어나가던 조조가 원소 본대의 진군 이후 전선을 유지하지 못한 채 극심한 부상병과 함께 관도까지 밀린 것은 확실하다.[67] 그러나 이것이 원소와 조조의 병력이 대등하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밀도에 관계없이 병력을 진영을 세우면 되는 거니까... 물론 조조만한 전술가가 그런 뻘짓을 할 가능성은 낮지만. 게다가 이 당시 조조는 사방이 친원소 세력으로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라 자신의 전력을 대 원소 전선에 모두 투입할 수 없다는 페널티도 안고 있었다.[68] 다만 배송지는 자신의 주에서 이 만 명의 숫자의 신빙성을 의심하였다. 동서 수십리의 군영도 주요한 이유로 뽑았지만 조조군이 농성하면서 군량을 습격하는 별동대를 돌리고 또한 8만 명을 생포하여 매장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지적은 타당하지만 일단 병력이 축소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열의 두셋의 부상병이라는 비율은 전투의 패배와 같은 큰 타격을 받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수치인 만큼 그만큼 조조군이 극단에 몰렸단 묘사로 봐야 한다.[69] 연의에서는 순욱이 조조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전략) 원소군 측에서도 큰 사건(=군량 수송)이 벌어지리라 예상합니다."라면서 복선을 뿌렸다. 여담이지만 연의에서 조조가 순욱에게 보낸 서신은 전달 도중 원소군에게 붙잡혀 허유가 갖고 있다가 조조에게 투항할 때 보여준다.[70] 허유가 조조에게 절을 올리자 조조가 그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친구 사이에 그런 예의를 보이다니 자네답지 않네."라고 하는 등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71]조만전》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부풀려서 허유와 조조가 아웅다웅(…)하는 것으로 나온다. "군량 얼마나 있어?" "1년." "장난하냐?" "사실 반 년 있어." "나 안 믿지?" "…3달." "아, 끝까지 거짓말하네. 나 빈정 상해서 그냥 갈래." "사실은 1달 있어." 이런 식(…). 그러고 되돌아오는 허유의 대답은 "작작해라 니네 군량 없잖아."[72] 항목 참고, 조만전은 편찬자의 주관과 불확실한 정보가 많이 섞인 것으로 논란이 많은 사료이다.[73] 장합전에서는 곽도의 주도하에 장합에게 오소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안과 밖의 적에게 몰린 장합은 조조에게 투항했다고 한다.[74] 장합과 고람이 이끄는 병력은 조조군의 본대를 공격하기 위해 차출된 것이므로 주력에 가까운 병력이라서 조조가 의심없이 자신의 진영 내로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래서 장합과 고람은 원소 측 진영을 불태움으로써 분명히 조조 편이라는 의사를 확실히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75] (무제기-배송지 주) "여러 책에서 이르길 공이 파묻은 원소의 군사가 8만 또는 7만이라고 한다."[76] 범엽의 《후한서》에서는 8만명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배송지 주 헌제기거주에서 조조가 직접 올린 표문에 따르면 참수한자가 7만이라고 한다.[77] 창정의 전투에 대해 <무제기>에서는 “황하 상류에서 군세를 떨치고 창정에서 원소군을 격파했다.(揚兵河上, 擊紹倉亭軍)”고 하는데 당시 창정은 연주에 있었고 훗날 황하의 대범람으로 물길이 바뀌어 하북에 속했다. 당시 사서상에 하상이란 표현이 몇 번 등장하는데 황하 인근을 뜻하는 지명으로 쓰였던 것 같다.[78] 연의에서는 이 장면을 대부분의 모사가 반대했지만, 곽가가 계책을 내자 조조가 따르는 것으로 묘사하였다.[79] 즉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이자 호시탐탐 기주를 노리는 적세력의 힘을 빌려 자신의 동생을 도모하겠다는 말이다. 당시의 기준으로도 이것은 상식 밖의 행동이었다. 원담이 조조에게 파견한 신비도 이를 한심하다고 여겼는지 조조를 만나자마자 그에게 붙는다.[80] 이에 대해 배송지는 원소가 죽고 다섯 달이 흘렀을 뿐이기에 원담이 집안을 나와 백부의 후사를 계승했어도 3년상을 치르지 않고 아내를 맞이해 혼례를 치르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조조가 임기응변으로 결혼이라 해도 올해에 치르는 것이 아니라 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81] 심배와 나란히 언급되었다.[82] 업성 공방전 당시 기주 방어 체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음에도 관련 기록이 아예 전무하다가 원상이 패하자마자 곧바로 통수를 치고 조조에게 투항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까지 통수를 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립을 꾀하며 간을 봤다는 설이 유력하다.[83] 큰 길로 오면 피해야 하지만 서산으로 가면 이길 수 있다고만 기록되어 있어서 조조가 두려워한 것과 원상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한나라 시대의 지도 자료를 살펴보면 서산은 병주와의 경계 지역이며, 원상은 서산을 간 뒤 한단을 경유해 업으로 돌아갔는데, 기록이 전무하지만 고간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모성, 한단 일대의 패잔병들을 규합하는 등 아득바득 병력을 끌어모아 결전을 벌이려는 의도였을 것이 확실시된다. 한편 대로는 청주에서 기주 남부를 거치는 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 경우 조조의 보급선이 공격받기 쉽다.[84] 일종의 올인성 전략인데, 당시 원상의 군대가 고작 1만이었다는 기록과 이후 고간의 행보, 앞의 주석 내용과 연계해서 고간이 결국 원군을 안 보냈기에 생긴 원상의 극심한 숫적 열세가 올인성 전략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있다.[85] 사실 순욱의 '직접적인' 활약은 없지만, 고간의 계략을 제각기 하나하나씩 무산시킨 사람들이 죄다 순욱의 배치로 이뤄진 인선이었다.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전략안.[86] 이때 고간의 사촌동생 고유(管承)는 위에 투항하여 조조 사후 사마의반정을 일으킬 때 협조하였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87] 앞에서 말한 대로, 연의에서는 이 부분 역시 곽가가 죽기 전에 냈던 계책이 이루어지는 식으로 묘사했다.[88] 조조는 애초에 형주를 공격할 생각이었고 또 유표가 조조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으므로 항복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었으므로 손권과의 전쟁은 계획에 없었던 일임이 분명하다. 아마도 조조는 생각보다 쉽게 형주가 점령되자 내친김에 손권도 항복시키자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89] <무제기>에서는 전염병 때문에 더 크게 피해를 받기 전에 물러났다고만 나오며 조조빠인 이문열평역 삼국지에서 별로 피해 안 받고 물러났다며 아득바둑 우겨댔지만 그동안 적극적인 공세를 내세우던 조조가 적벽대전 패배 후에는 수동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준 점과 남군에서 고군분투하는 조인을 도와주지 않은 점 등을 보면 전염병은 그냥 핑계이거나 전염병 징조가 있을 때 하필 화공을 당하자 전의를 상실해서 대패했을 가능성이 높다.[90] 물론 유비군의 매복에 고생하는 연의에서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조조삼소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러나 정사에서 퇴각할 때 모습을 보면 패주할 때 화용도가 진흙탕이라 부상병까지 동원해 서둘러 길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추가적인 사상자들이 나올만큼 초조해함을 알 수 있다.[91]조만전》에서는 누규가 얼음성을 만드는 계책을 낸 것이라고 기록했다.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때가 9월인데 얼음이 언단 말이야?'라는 의혹에 "위서를 보니, 조조의 군대가 8월에 동관에 도착해 윤월에 북쪽으로 황하를 건넜다 하니 즉 그 해의 윤 8월임. 그러니까 이때 남쪽으로 내려와 위수를 건넌 때에는 가히 큰 추위가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92] 이 무렵에 순욱은 조조가 본격적으로 찬탈 의사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위공과 구석에 반대하여 조조는 순욱에게 불만을 품어 틀어졌고, 항상 본거지에 남아 수비와 행정을 맡던 순욱은 난생 처음 조조를 따라 정벌을 위한 종군하게 됐다가 군중에서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 순욱 사후 다음 해에 조조는 위공에 올라 구석을 받았다.[93] 삼국지연의에서는 복완과 환관 목순도 죽는데 사실 복완은 그 이전에 이미 죽었고 목순은 가공 인물.[94] 두 번(동귀인동승, 복황후복완)씩이나 황후와 국구(황제의 장인)가 일을 꾸미자 자신이 직접 국구가 되어 그런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평가된다.[95] 아이러니하게도 조조가 헌제에게 시집보낸 헌제의 세 번째 황후 조절은 조비의 제위선양을 끝까지 반대했고, 후한이 멸망하고 헌제가 제위를 빼앗긴 뒤에도 그를 계속 따랐으며, 훗날 자신이 임종을 맞이할 때 후한의 예법으로 장례식을 해달라 유언을 남겨 먼저 죽은 헌제의 무덤에 합장된다.[96] 한수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날 때부터 집요하게 조정에 반발하였다. 조조를 상대로도 계속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하였는데 마침내 이때 죽은 것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한다.[97]진서》 <선제기>는 이때쯤 밑에 나오는 화롯불 일화가 나오고 사마의가 그에 답한 것으로 나오는데 진서의 편집이 잘못된 것이다. 《자치통감》에서는 기재하지 않는다.[98] 연의에서는 유명한 점술가 관로가 조조에게 이 일을 예견해 주자 미리 대비하였고, 그 덕분에 경기와 위황의 반란이 쉽게 진압되었다고 나온다.[99] 만약 이랬다면 유비는 물론이고 관우도 당장 북쪽으로 진격했을 것이다.[100] 마초와 장비의 군은 오란이 격파되자 바로 퇴각하였는데, 애초부터 이들은 주병력이 아닌 의군이었다[101] 이때 조조는 이미 장안에 도착했기에 마음만 먹었으면 얼른 하후연을 구원할 수 있었음에도 하후연이 전사할 때까지 장안에 머물며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하후연의 전사와 한중을 빼앗긴 것에는 조조의 지분이 굉장히 크다는 시선도 있다.[102] 이전까지는 행 거기장군이었다.[103] 한나라는 화덕으로 일어난 나라이니 그 위에 올라가는 것은 황제의 위를 뜻한다. 그러나 조조가 손권의 편지를 이렇게 외부 사람들에게 보인 것은 무리들의 마음을 떠보려 했음이다.[104] 주문왕은 천하의 2/3을 가지고도 은을 섬겼는데 그 아들 주무왕은나라를 뒤엎고 주나라를 건국하여 천자가 되었다. 이는 자신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를 뒤엎고 위나라를 건국하여 황제가 되리라고 암시한 것이다.[105]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시집가고 장가갈 때의 사치하고 어그러짐을 우려하여 공녀(公女)를 시집보낼 때 따르는 계집종을 10명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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