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삼국시대 때 유수구에서 조조 진영과 손권 진영이 여러 차례 싸운 전투를 말하며, 유수구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여몽이 조조 진영에 대한 방비를 대비해서 손권에게 건의해 유수오라는 작은 보루를 설치했다.2. 212년 ~ 213년 유수구 전투
212년 10월. 조조는 손권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40만 대군이라고 자랑하면서 유수로 진군한다. 40만이라고 큰 소리를 치며 조조군이 다가오자 손권이 유비군에게 급하게 SOS를 치는데 유비는 이것을 듣고 동쪽으로 가려다가 장송과의 모의가 들통나는 바람에 유장과 사이가 나빠져 본격적으로 유장을 치게 된다.결국 213년 1월 손권은 7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조군을 막으러 유수구에서 만난다.[1]
조조는 먼저 장강 서쪽에 있던 손권의 둔영을 격파하고 도독 공손양을 포획하고 그때부터 투닥투닥 싸우기 시작한다. 조조는 유선을 만들어 중주를 건넌다. 하지만 손권군은 피해가 꽤 있기는 했지만 막강한 강동의 수군을 이용해서 포위, 조조의 군사 삼천 명을 붙잡는다. 그 뒤 손권이 몇 차례 나가서 싸움을 걸었으나 조조는 지킬 뿐 응하지 않았다.
한번은 손권이 적의 진채에 다가가자 조조가 궁노수를 시켜 화살을 마구 쏘게 해 배에 꽂힌 화살의 무게로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상황에 이른다. 손권은 이에 배를 반대쪽으로 돌려 다시 한쪽 면에 화살을 꽂히게 하여 균형을 맞춘 다음에 유유히 돌아가는 간지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짤리고 주유과 제갈량이 화살을 얻기 위해 쓰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렇게 대치하기를 한 달, 손권은 직접 빠른 배를 타고 유수구로 직접 들어간다. 조조군의 장수들은 적이 공격하는 줄 알고 싸울 준비는 했으나 조조는
이는 필시 손권이 우리 군대의 대오를 보려고 오는 것이다.
궁노를 쏘지 말고 엄숙함을 갖추어 손권에게 보여준다. 손권은 5, 6리를 나아가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 북을 울린다. 조조는 북소리에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들을 낳으려면 응당 손중모(손권) 같아야지 유경승(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와 같구나!
라고 하며 이때가 손권의 리즈 시절임을 인정해 주고(…) 자기 밑에서 일하고 있는 유종을 강하게 디스한다.[2][3]
한편 자신이 세운 유수오를 지키고 있던 여몽의 방비 또한 조조는 뚫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양쪽 다 지쳐갈 무렵 손권이 먼저 쪽지를 보낸다.
봄물이 바야흐로 불어나니 공은 속히 떠나십시오! |
하지만 퇴각했다가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기에 결코 따를 수 없는 말이었지만 손권은 별도로 작은 쪽지를 하나 더 보낸다.
당신이 죽지 않으면 나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4] |
조조는 이 편지를 보고 진짜로 손권이 지쳤다는 것을 알고
손권이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하고는 철수한다.
3.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216년 10월 다시 조조는 공격을 결심하고 217년 1월 거소에 도착한다. 2월에는 학계에 주둔했고 손권은 유수구에서 조조와 다시 투닥투닥 거린다.유수구에서 손권군의 장흠과 여몽은 모든 군권을 얻어 함께 조조에게 대항하는데 여기서 장흠은 평소에 자신이 싫어하던 서성을 이 자리에서 천거한다. 손권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이유를 물어보니 장흠은 공사를 구별해야 한다고 발언하고, 손권은 장흠에게 훌륭하다 치켜세운다.
여몽의 경우는 예전에 자신이 미리 세워둔 유수오를 또 다시 점령하고 강노 10,000 대를 설치해서 저항하니 조조의 선봉이 군영도 세우지 못하고 퇴각했다고 한다.
한편, 장패와 하후돈은 거소에 도착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역병크리.[5] 사마랑은 군사들을 생각해서 친히 순시하며 의약품을 보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장패의 경우는 장료와 함께 선봉이 되었는데 도중에 큰 비를 만났다. 그런데 손권의 대군이 먼저 도착한 데다가 주위의 수위가 높아져 적의 배가 점차 전진해왔으므로 모두 불안에 떨고 장료는 철퇴를 생각 중이었는데 장패가 이를 막으며 반드시 연락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다음 날, 과연 철퇴 명령이 내렸다. 귀환한 장료가 장패의 말을 조조에게 전하자 조조는 감동하며 장패에게 양위장군의 관직을 내리고 가절로 삼았다.
그리고 3월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면서 하후돈, 조인, 장료, 장패 등을 감겨서 거소에 주둔하게 한다.
그리고 여기서 손권은 주태를 유수 지역을 감독하게 하는데 이제 주연과 서성 등이 복종하지 않으니 손권이 모두에게 술을 먹이고는 상처를 가리킨 사건이 일어난다. 자세한 것은 주태 문서로.
4. 유수구 전투에서 있던 일화들
동습은 누선 5척을 이끌고 있었는데 밤 사이 폭풍으로 인해 누선 5척이 모두 전복된다. 부하들이 모두 달아나고 동습에게도 달아날 것을 권하지만 동습은 호기있게 나서지만 그날 밤 결국 익사.몽충선에 타고 있던 서성은 바람에 휘말려 적의 강안까지 떠내려간다. 다른 자들이 모두 두려워서 움직이지 못할 때 서성 혼자 군사를 이끌고 적 좀 때려잡고 바람이 멈추니 다시 되돌아간다.
주연은 유수구로 적이 오자 대오와 삼관둔을 방어하고 있다고 나오는데 역시 언제인지는 모른다.
손관의 경우는 첫 번째 유수구 전투에서 활약해서 가절이 되었으나 다시 정벌을 갈 때 유시에 맞고도 전투에 신경쓰느라 상처를 돌보지 않자 조조는 손관을 진위장군에 영전하였으나 결국 상처가 곪아 세상을 떠난다.
손교의 경우 조조가 유수구로 올 때마다 매번 달려나가 저항해 정예(精銳)라는 호칭을 얻었다고 한다.
손유는 조조가 공격해오자 손권에게 자중할 것을 청했으나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과연 군대는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4.1. 감녕의 일화
손권은 감녕을 전부독으로 임명해 병사를 출동시켜 적의 앞 진영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하며 특별히 쌀과 술, 많은 안주를 하사한다. 감녕은 이것을 수하 1백여 명에게 내려 먹도록 한 후, 감녕은 먼저 은 술잔에 술을 따라서 자기가 두 잔을 마시고, 그런 연후에 수하의 도독에게 따라 주었다. 도독 입장에서는 미친 수십만 명 사이로 100명을 이끌고 들어간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얼른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감녕은 칼을 꺼내 무릎 위에 놓고 꾸짖자 도독은 감녕의 안색이 사나운 것을 보고 즉시 일어나 공손히 술을 받았으며, 그런 연후에 병사들에게 각기 한 잔씩 따라 주었다.이경(二更)이 되었을 때, 나뭇가지로 위장하고 적을 쳐부수러 갔다. 감녕은 빠른 길로 조공의 진영 아래로 가서, 녹각을 뽑아 불며, 보루를 넘어 진영에 들어가, 수십 급을 참수했다. 북군은 놀라 시끄럽게 북을 울리며 불을 별빛처럼 환하게 드니, 감녕이 이에 진영으로 돌아와 북과 나팔을 불며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는 밤에 손권을 알현하니, 손권이 기뻐하며
늙은이를 너무 놀라게 한 것 아니오? 오로지 경의 담력만 지켜봤소.
라 하며 비단 1,000 필과 칼 100 자루를 하사했다. 그리고는
맹덕(조조)에겐 장료가 있지만, 나(손권)에겐 흥패(감녕)가 있으니, 족히 서로 상대해볼 만하다!
조조는 한달 간 머무르다가 물러났다.
5. 시기의 모호함
그런데 왜 위의 내용들이 시기별 전투가 아니고 일화들에 정리되어 있을까? 이유는 이 기록들이 모두 시기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유수구에서의 전투는 오주전과 무제기에 모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장수들의 열전에는 연도가 안 나와있어 언제의 유수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치통감에 실린 내용이면 그때의 일로 기록을 할 수 있지만 자치통감에 없는 내용들이다.대표적인 것이 동습, 서성의 경우로 유수에서의 기록이 있으나 딱히 언제의 기록인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다. 동습의 경우 마지막 기록이 208년 황조 격퇴이고, 서성의 경우는 황조의 아들 황역을 물리친 것이 바로 전 기록, 그 후 기록은 221년에 손권이 오왕으로 임명되기 전이다. 즉, 범위를 열전으로 잡기에는 도움이 전혀 안 된다. 다만 장패와 장료의 일화에서도 악천후가 있기에 동습과 서성도 이때의 기록이 아닐까?하며 의심을 가지는 정도. 주연 역시 219년 전의 일이라는 것만 나왔기에 도움이 안 된다.
손교와 손유의 경우는 두 가지 기록이 모두 손유가 죽기 전인 215년 전이라는 것이 끝. 주태 또한 남군에서 208년 조인을 공격한 뒤의 일이고 222년 전의 일이라는 것밖에 알려져있지 않다. 손관의 경우도 두 번 유수에 참가했다는 것이 전부일 뿐 시기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장패의 경우는 장패전에는 언제인지 나와있지 않으나 뒤의 하후돈과 거소의 방어를 맡았다는 것을 통해 무제기, 하후돈전을 비교해보면 217년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여몽의 경우는 지켰다는 것은 214년 5월에 있던 환성 전투 전에 유수구 전투가 있기 때문에 213년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노를 설치해서 싸웠다는 기록은 215년의 합비 전투 뒤니 217년의 일이 된다.
장흠의 경우 215년 합비 전투 이후 유수독으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온 이후 여몽과 함께 유수에서 조조를 공격했는 것에서 217년의 일이 확실하다.
한편 216년의 일인지 219년의 기록인지는 알수 없으나 손권은 서상을 보내 항복을 하겠다고 하는데 여기서 표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천명에 관해 진술한다. 즉, 조조에게 천자가 되라는 것. 조조는 이를 보고
이 아이가 나를 화로 위에 앉히려 하는구나!
라고 하지만 사마의가 여기에 대해 몇 마디 해주자 결국 손권의 항복을 받아 서로 우의 관계를 맺고 혼인 관계를 맺기로 했다.
손권이 항복하면서 조조한테 황제에 오르라고 한 기록은 삼국지 무제기 주석 위략에는 219년 관우를 잡은 후의 일로 기록되었으며 진서 선제기(사마의)는 유수구 전투 후의 기록으로 하고 있다. 자치통감은 이 일을 관우를 잡은 다음의 기록으로 하고 있다.
6. 그 외 유수구 전투
222년 조인과 주환의 전투가 있던 것도 이 유수. 자세한 내용은 조비의 남정 문서로.[1] 이 40만과 7만이라는 것은 감녕전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나오는 말인데 자치통감은 이때로 기록했다.[2] 참고로 유기는 유표 사후 유비의 밑으로 들어갔으나, 병약한 체질로 인해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3] 이는 조조가 손권을 이기기 쉽지 않음을 드러내는 말이자,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치는 아들들을 견주면서 후계자 선정에 마음을 쓰고 있던 상황임을 어느 정도 간접적으로 확인해 준다. 또한 굳이 원소 아들들을 언급하지 않고 유표의 아들들을 언급한 것은, 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쉽게 꿀꺽 처리했다는 것 더 나아가서 유표는 자기한테도 좀 빡센 상대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까지 엿볼 수 있다.[4] '족하가 죽지 않으면 고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현대어로 치면 '노친네 댁 때문에 X 같으니까 나가 뒤져라!'는 소리급이다. 뭐 원래 내용은 똑같은 내용을 말해도 말투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법이다.[5] 사실 이 시기(215년 ~218년)를 전후로 해서 사망한 인물들이 제법 있다. 사마랑, 능통, 악진, 이전, 감녕, 손관, 진무, 동습 등 합비, 유수구 전투에 참전한 장수들 외에도 왕찬, 진림 등의 조조와 유수구에 동행한 건안칠자들, 덤으로 노숙까지 이 시기 즈음에 죽었다. 장강 유역에서 퍼진 역병의 영향이 생각보다 컸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