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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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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의 한반도 통치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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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朝鮮總督府 | Government-General of Chō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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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
1910년 10월 1일 ~ 1945년 9월 28일
설치 이전 해체 이후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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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정
미군정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광화문통 (조선총독부 청사[1])
시대 구분 무단통치 (1910~1919)
문화통치 (1920~1936)
민족말살통치 (1937~1945)
주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토 마코토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

1. 개요2. 기관3. 조선총독
3.1. 역대 총독
4. 건물5. 산하 행정기구6. 주요 정책
6.1. 전력 정책
6.1.1. 수력 발전
6.2. 도로교통 정책
7. 기타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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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조선총독부.jpg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조선총독부()는 일본 제국일본령 조선경성부에 설치한 통치 기관이다.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1910년에 설치되어,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고 연합군한반도에 진주한 1945년 미군정에 행정권을 이양하면서 해체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영어로 'Government-General of Chōsen'이란 표기를 했으나, 현대 한국에서는 주로 'Government-General of Korea'로 표기하며,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of Korea'란 표기를 쓰기도 한다.

2. 기관

1910년 8월 29일 병합 조약의 공포와 함께 칙령 제318호로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한반도조선으로 개칭한 일본은, 종래의 한국통감부를 대신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총독부는 천황에게 직속되어 총독 아래 5부 9국의 체제를 갖추고, 총독은 일본 육군일본 해군의 대장들 가운데 임명되었다.

또한 조선의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정무를 총괄,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천황에게 상주, 재가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천황에 대한 상주권이 중요한 이유는 대일본제국 헌법이 국가 통치에 대한 천황의 전적인 대권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상주권이 없는 인사는 상관이 "천황 폐하의 명령을 거부하나!"라고 하면 무조건 따라야 하지만, 반대로 상주권이 있다면 명목상의 상관이 명령을 하더라도 직접 천황을 만나 뒤집고선 역으로 상관에게 "천황 폐하의 명령을 거부합니까?"라고 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서로의 체면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정면으로 들이받는 경우는 드물었고, 상주권이 있는 인사끼리는 명목상의 서열과 직제가 무의미해지고 사실상 동급이 된다는 점에 주목하면 된다.

아울러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 육군일본 해군의 통수권자이자 위임에 따라서 총독부령 및 명령, 그에 추가하는 벌칙을 내릴 수도 있었다. 즉 도쿄의 제국의회로부터 분리독립한 독자적인 정부였다. 사실상 내각총리대신 다음가는 제2인자 격의 요직이었다.

별개의 정부로서 기능할 수 있던 것은 총독에게 무지막지한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 지배에 대해 제국헌법을 적용하는 대신, 제국 헌법상 천황의 권한으로 규정된 '천황대권'을 총독이 위임받아 통치하는 형식을 취했다. 헌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함께 '권리'를 부여한다는 의미이므로 식민지 주민들에게 본국 국민들과 동일한 권리를 준다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당시 천황대권은 행정, 입법, 사법, 군 통수권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를 위임받은 총독의 권한은 사실상 부왕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제령'이라고 하여 법률 제정이 필요한 부분을 총독의 명령으로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행정권을 가진 총독에게 사실상의 입법권을 준 것이나 다름없으며 긴급한 경우에는 총독이 제령을 먼저 반포하고 사후에 천황에게 재가를 얻는 요식 행위를 거칠 수도 있게 하여 조선 내의 독립운동을 신속히 탄압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재판소의 설립과 판사의 인사 관리를 총독이 담당함으로써 사법부는 단순히 행정부의 관청이 됐고 자율성을 갖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총독은 조선에 주둔한 육해군 부대를 통솔할 수 있었으며 필요시 만주 지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이 총독에게 주어졌다.

다만 예산 문제 때문에 내각총리대신과 노골적으로 대립하기는 힘들었다. 식민지 조선을 경영하는 일은 상당한 지출이 요구되었다. 19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은 공업이 덜 발달해서 끊임없는 투자가 필요했는데, 그 와중에 치안 문제로 인한 지출도 만만찮게 투입되는 지역이었다. 그 때문에 총독은 항시 도쿄의 제국의회에게 손을 벌려야 했고, 제국의회는 주로 이 예산권을 통해 경성의 총독부를 통제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내외지 행정 일원화 조치가 취해져 총독이 내지의 주무대신의 감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조선총독의 권한은 약화되고 내각총리대신(도조 히데키)의 의사에 따라 조선의 통치정책이 집행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도 38선 이남에서는 잠시 통치 기능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 이유는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한 이후 9월 9일 미군정을 수립하기 전까지 권력의 공백으로 사회적 혼란이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반면 38선 이북에서는 이미 소련군이 빠르게 육로로 한반도에 진입했기 때문에 광복 즉시 통치 기능을 상실하였다. 최후의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자기 재산을 빼돌리고 일반 일본 민간인들을 조선에 남겨둔 채 홀로 도망갔다. 그리고 미군정이 경성에 진주할 때까지 불과 한 달여 남짓 동안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자신들을 비롯한 한반도 거주 일본인들이 무사히 재산을 가지고 일본 본토로 귀환할 수 있도록 화폐를 미친 듯이 발행했다. 이 조치로 미군정부터 6.25 전쟁 때까지 엄청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서 사실상 경제 붕괴 상황이 초래되었다.

원래 8월 15일 항복 직전 조선총독부는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 중 가장 명망이 높던 여운형과 접촉해서 행정권 이양 교섭을 진행하였다.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해서 광복 이후를 대비하고 있던 여운형과 항복 이후 신변 안전과 본토로의 무사 귀환을 원하고 있던 조선총독부 사이에 행정권 이양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광복 당일부터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의 행정·치안권 이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8월 말경 미군이 38선 이남은 자신들이 상륙할 때까지 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 유지하라는 포고령을 내리면서 총독부는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다. 결국 행정권 등은 미군정에 이양되었다. 지방의 경우 건준이 행정권과 치안권을 대부분 쥐고 있었지만 청사 소재지인 경성부 같은 경우는 조선군 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8.15 광복여운형 문서로.

조선총독부 관보

3. 조선총독

조선 총독은 조선의 통치자이면서 일본 제국 내에서 높은 직책의 관료 중 하나였다. 1926년 일본 황실 의제령에 따른 궁중 석차 의전상 조선총독은 제6위에 해당하고, 대만총독은 제11위에 해당하는 친임관이다.[2] 친임관은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직위로, 현재로 치면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장관급 이상의 최고위직 관료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일본 제국 특성상 천황이 친임식을 통해 직접 임명한 관료와 그렇지 않은 관료의 차별성은 더욱 높았다. 따라서 일반적인 친임관보다 더 높은 직위였던 조선총독은 말할 필요가 없다.[3]

그러나 실질적인 정치적 위상이나 실권 면에서는 오히려 의전서열보다 더 높았고, 총리대신 바로 다음가는 직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실제로 조선 총독은 천황을 제외한 본토의 모든 간섭을 피하면서 조선 내 모든 권한을 틀어쥐고 있었다. 마치 유럽 식민제국의 국왕 밑에서 거대 식민지를 다스린 부왕에 비견될 만한 수준이었다.

정치적 위상이 높은 만큼 조선총독을 역임하고 일본 본토의 총리로 올라가는 케이스도 많았다.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한국통감부의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아예 초대 총리대신을 포함하여 총리직을 세 번이나 역임하고 부임했다.[4] 아베 노부유키 같은 경우에도 짧게라도 총리직에 있다가 부임했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토 마코토, 고이소 구니아키는 역으로 총독을 하다가 나중에 총리대신으로 영전했다. 물론 우가키 가즈시게는 덴노에게 지명은 받았으나 육군의 반발[5]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3.1 만세 운동의 영향[6]으로, 야마나시 한조는 부정부패와 타이완에서의 의거로 정계 은퇴 등으로 마무리되는 케이스도 있긴 했다.

역대 조선총독은 모두 현역 육군, 해군 대장 계급이었는데, 특히 해군 대장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육군 출신이었다. 1919년 3.1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여파로 일본 본토에서 '무력 통치'에 대한 반발이 일었다.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3.1 운동을 전후로 격동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중국에선 5.4 운동이 터졌고, 일본은 한창 다이쇼 데모크라시 바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갔고 군부에 대한 대립이 극심해져 있었다.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간인인 문관 출신도 총독이 될 수 있도록 법령이 개정되었다. '

실제로 3대 총독으로 문관이 고려되었다. 당시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있었던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후보자로 내정했으나(#) 일본 육군, 그중에서도 조슈 번의 수장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무산되었다. 그런데 이사부로는 아리토모의 양자로, 아리토모는 자기 파벌의 이익을 위해 아들의 출세도 포기한 것이었다.

이후 겨우 타협점을 찾아서 선출된 인물이 상대적으로 리버럴한 해군 출신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였다. 이마저도 해군 출신이란 이유로 조슈 번의 반대가 극심했었다. 결국 일본 제국이 패망하는 그날까지 단 한 번도 문관 출신 총독이 부임한 적이 없다. 이 점은 실제로 문관 출신 총독들이 부임하였던 대만총독부와 구별된다. 다만 대만도 식민통치 말기에는 다시 무관총독이 부임하였다.

일본(특히 육군)에게 있어 조선은 가장 크고 가치가 높은 식민지였고, 지정학적으로도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는 핵심지였다. 때문에 군부의 집착도 그만큼 심했다.

3.1. 역대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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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대행 제4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야마나시 한조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
한국통감 · 군정사령관 }}}}}}}}}}}}}}}
<rowcolor=#fff> 순서 이름 재임 기간 설명
임시 /
초대 총독
파일:Masatake_Terauchi.jpg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08.29.
~ 1916.10.14.
야마구치현 출신. 한국통감부와 총독부가 공존한 시기에 통감으로서 직무 대리함. 이후 기존의 지위에 이어 총독으로 승격, 초대 조선총독으로서 무단 통치를 실시한다. 총독 사임 후 총리 취임.
2대 총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segawa_Yoshimichi.jpg 하세가와 요시미치 1916.10.14.
~ 1919.08.12.
야마구치현 출신. 3.1 운동을 무력진압하는 등 무단 통치로 비판을 받아, 토지 사업을 완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3년 만에 교체되었다. 여담으로 한국통감부 당시 통감부의 임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선대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3대 총독 파일:attachment/사이토 마코토/sa431.jpg 사이토 마코토 1919.08.12.
~ 1927.04.04.
이와테현 출신으로, 역대 총독 중 유일하게 해군 출신이다. 형식상의 문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여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방향을 돌렸다.
권한 대행 파일:우가키 가즈시게.jpg 우가키 가즈시게 1927.05.10.
~ 1927.12.10.
사이토 총독이 군축협상 전권대신으로 제네바에 파견되면서 대행을 맡았다. 이후 6대 조선총독으로 재임.
4대 총독 파일:조선 총독 야마나시 한조.jpg 야마나시 한조 1927.12.10.
~ 1929.08.17.
가나가와현 출신. 부패한 '금권 장군'. 조선총독부의옥(朝鮮総督府疑獄) 사건에 관련되어 사임하였다. 일설에는 타이완에서 조명하가 일본 황족(국구)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쇼와 덴노의 장인)을 칼로 찌른 사건의 책임까지 겹쳤다는 말이 있다.
5대 총독 파일:attachment/사이토 마코토/sa431.jpg 사이토 마코토 1929.08.17.
~ 1931.06.16.
재취임. 1기 집권기를 포함해서 약 10년간 조선총독으로 재임했다. 총독직 사임 후 1932년 일본 총리가 된다.
6대 총독 파일:우가키 가즈시게.jpg 우가키 가즈시게 1931.06.17.
~ 1936.08.04.
오카야마현 출신. 경제 개발 정책을 표방하면서 한국어 시간을 축소시키는 등 문화 말살 정책의 초석을 다졌다.
7대 총독 파일:미나미지로.jpg 미나미 지로 1936.08.05.
~ 1942.05.28.
오이타현 출신. 내선일체 등을 주장하고, 지원병 제도를 실시해 강제징용으로 조선 청년들을 중일전쟁에 참전시켰으며, 일본어 사용 창씨개명, 신사참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등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8대 총독 파일:고이소 구니아키.jpg 고이소 구니아키 1942.05.29.
~ 1944.07.21.
도치기현 출신.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며, 조선 소년소녀들을 하시마섬위안부로 끌려가게 했다. 1944년 도조 히데키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총리가 되었다.
9대 총독 파일:아베노부유키.jpg 아베 노부유키 1944.07.22.
~ 1945.09.28.
이시카와현 출신. 총리 출신이 총독이 된 경우. 마지막 해의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와 인력의 수탈에 총력을 다하였다. 국민 의용대를 편성하여 비협조적인 조선인을 대규모로 탄압, 검거했다. 패전 후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4. 건물

4.1. 조선총독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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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총독부 청사는 남산에 있던 구 통감부 건물을 이어받아 사용했다. 이 건물은 6.25 전쟁 당시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자리잡고 있었다.[7]

한편 우리가 흔히 조선총독부 청사로 알고 있는 경복궁의 건물은 1926년에 완공 되었다. 이 청사 건물은 해방 이후에도 각종 공공기관 건물로 사용되었다. 1995년 8월 15일[8],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잘못된 역사는 바로잡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의미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실시, 그 일환으로써 철거되었다.

4.2. 총독 관저

조선총독이 거주하는 총독 관저는 처음엔 남산 왜성대의 구 통감 관저를 이어받아 사용했다. 그러다가 1937년 경복궁 북쪽 경무대(景武臺) 자리에 있던 경복궁 후원 건물들을 철거하고 관저 건물을 신축해서 1939년 완공했다. 관저는 벽돌조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였다. 이 건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였고 윤보선 정부 때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0년에 청와대의 본관을 신축한 이후 1993년 10월 15일에 철거하였다. 경무대로 이전한 뒤의 남산의 구 총독 관저는 역대 통감과 총독의 초상과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으로 개편되어 1940년 11월 22일에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광복 이후엔 국립민족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가 1950년에 국립박물관 남산 분관으로 흡수되었다.

남산과 경무대 외에 용산에도 총독 관저가 있었다. 이 건물은 하세가와 요시미치조선군(일본 제국) 사령관 시절 사령관 관저로 세운 건물로, 1909년에 완공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총독 관저로 사용했으나 서울 시내와 멀고 유지비가 많이 들며 건물이 지나치게 커 월권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는 이 건물을 대규모 연회 등의 행사용으로만 사용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때 파괴되었으며, 부지는 용산기지에 편입되어 미군 병원이 들어섰다.#

5. 산하 행정기구

총독부 설치 당초의 직제다. 당시 직급은 일제강점기와 비교 항목 참조.

5.1. 조선총독부 중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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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초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제2대

미즈노
렌타로
제3대

아리요시
주이치
제4대

시모오카
주지
제5대

유아사
구라헤이
제6대

이케가미
시로
제7대

코다마
히데오
제8대

이마이다
기요노리
제9대

오노
로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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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다케오
제11대

엔도
류사쿠
부의장
초대

김윤식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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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박영효
제4대

민병석
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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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이진호
제7대

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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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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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상 이근택 이완용 이재곤 이지용
이하영 임선준 장석주 조중응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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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희 권봉수 김만수 김사묵 김영한
남규희 민상호 박경양 박승봉 박제빈
박중양 염중모 유맹 유정수 윤치오
이건춘 이겸제 이재정 이준상 정인흥
조영희 조희문 한창수 홍승목 홍종억
부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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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규 김명수 김준용 김필희 김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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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요 정책

6.1. 전력 정책

조선총독부와 식민지 기술관료들은 대규모 전원개발 계획을 조선에 정착시켰다. 당시 일본은 지리적 특성상 수력발전 기반의 원거리 송전망 전력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는데, 여러 회사들이 하나의 수계로 몰리면서 소규모의 전력시스템이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 내 대도시 중심의 투자는 일본 전력시스템 발전을 더디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아래는 조선총독부가 펼친 전력 정책의 시기별 양상이다. 아래 내용은 해당 논문을 참조함. #

6.1.1. 수력 발전

이 단락에서 다룰 일본질소[18], 부전강수력발전소 사례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정책은 아니었으나, 수력발전이 조선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총독부가 간접적으로 관여한 바가 일부 존재하므로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19]

이외에도 일본질소의 부전강수력발전소 건설은 수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6.2. 도로교통 정책

이 문단에 서술되는 도로 정책은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던 도로교통정책을 포함하고 있으나, 정책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통감부가 진행했던 정책의 일부분도 포함하여 서술하였다. 아래 내용은 해당 논문을 참조함.##
한편, 도로 증축에 따라 자동차 대수도 함께 늘어나면서 조선총독부는 1933년 조선자동차교통사업령을 제정해 자동차 사업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또한 도로 인근 토지 소유자에게 수익세를 부과하고 자동차업자에게 도로손상부담금을 부과하는 등, 도로의 손실을 일반 사업자로부터 채우고 자동차사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석간2면 참조석간 6면 참조. 이처럼 조선총독부의 권한을 강화한 배경에는 전시총동원체제가 입각함에 따라 자동차운송사업을 통제하고 전쟁물자 수송에 전력을 쏟기 위해서라고 추측된다.

1938년 4월 4일, 조선도로령이 공포됨에 따라 조선의 도로건설사업은 큰 변화를 맞는다. 기존의 도로규칙으로 구분된 도로의 등급을 국도, 지방도, 부도(府道), 읍/면도(邑面道)로 구분하여 관리주체를 각각 설정하였다. 도로 책임자를 이관한 것 역시 전시에 도로를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7. 기타

파일:조선총독부 인장.svg
<colcolor=#fff> 조선총독부의 봉함지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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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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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는 광화문근정전 사이 흥례문 권역에 존재했었다. 그야말로 경복궁의 핵심 위치에 총독부 청사 건물을 박아 놓았던 셈.[2] 1위 대훈위 국화장 수여자(즉, 황족들)
2위 내각총리대신
3위 추밀원 의장
4위 원로
5위 국무대신 및 원수
6위 조선총독
7위 전임의 내각총리대신·추밀원 의장
10위 육·해군 대장
[3] 물론 총리나 조선총독도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친임관에 해당한다. 다만 별도로 기재되어 있을 정도로 여타 친임관들보다 더 상위 직급이라 볼 수 있다.[4] 물론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직을 설령 안 했더라도 이미 당대에 일본 정계의 거물로 인정받았다.[5] 육군 출신이 왜 같은 육군에게 반대를 당했냐면, 우가키가 육군 내에서는 비교적 온건파에 속해서 군축을 단행해 육군 내 강경파들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6] 1904년 대장 진급과 8년간의 조선 주차군 사령관, 참모총장을 거쳐서 총독까지 오르면서 승승장구하였으나 결국 몰락.[7] 2022년 현재 이 건물은 재건축중이며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중구 명동에 위치한 우리금융디지털타워 1,2층에 입주하여 있다.[8] 이 날은 광복 50주년이기도 한다.[9]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6월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박탈하면서 경무총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주둔군 헌병대 사령관이 이를 겸직했다. 1919년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경무국으로 바뀌었다.[10] 조선총독부령 제 24호 전기사업취체규칙[11] 1지역 1사업이란 하나의 지역에 하나의 전력사업주체만 관리할 수 있고, 허가제란 전기요금을 변경하기 위해서 조선총독부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뜻[12] 조선총독부령 제 13호 회사령, 회사를 설립하려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함[13] 참조한 논문에서는 이를 초전력연계(超電力聯系)라고 지칭한다.[14] 그의 이상향에 대해 조금 더 궁금하다면 하이모더니즘과 관련한 논문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된다.#[15] 당시 전기회사들은 단일화된 하나의 회사를 설립하여 전원시스템을 이끌어가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앞서 본 평양전기 공영화 사례처럼 시민들의 공영화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지지를 받기는 어려웠다.[16] 당시 조선을 일본의 병참기지로써의 역할로 활용해야한다는 의견이 강했다.[17] 발전, 배전[18]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의 준말로 해당 단락에서는 일본질소의 수력발전사업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19] 아래 내용은 해당 논문을 참조함.#[20] 예를 들면 갑작스러운 수문 개폐로 인한 홍수[21] 참조논문에 수록된 예시의 원문1[22] 참조논문에 수록된 예시의 원문2[23] 양지혜. (2020). 일제하 대형 댐의 건설과 ‘개발재난’: 일본질소의 부전강수력발전소 건설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 89, 267-268p 참조[24] 1911년 4월부터 1917년 10월까지로 계획된 사업[25] 조병로. (2009). 일제 식민지시기의 도로교통에 대한 연구(Ⅰ) -제1기 治道事業(1905~1917)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9, 17p[26] 적절한 보상금 지급도 없었다.[27] 기존에는 1917년 11월부터 1922년까지로 계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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