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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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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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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지연의》는 원형인 삼국지평화 등의 이전 작품에 비해서 사서 내용을 상당히 많이 참고해서 반영했지만, 어쨌든 역사서가 아니라 군담 소설이므로 흥미를 끌기 위한 과장이나 각색 등이 많이 덧붙었다. 그리고 소설의 중심 이야기축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축을 벗어나는 사람들은 활약했건 삽질했건 간에 묻혀서 인상이 약해진다.

더구나 당대의 주요 사서인 《정사 삼국지》가 조위정통론을 따르는 반면[1], 이 소설에서는 전반부의 유비가, 후반부의 제갈량이 주인공이고 촉한정통론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정사 삼국지》와는 다르게 취급되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민중에게 어필하기 위한 소설이기 때문에 이런 띄워주기와 낮추기는 당시 민중의 생각과 큰 연관이 있다. 이전에 나온 삼국지평화와 차별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도 있으며, 나관중의 개인적인 취향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2]

"전사(戰死)"에 대해서는 피해인가 아닌가를 좀 고민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재중동포 작가 리동혁은 《삼국지가 울고있네》라는 책에서 고대 군담소설에서는 장수가 전사로 목숨을 잃는 것을 오히려 명예롭게 보았다고 쓰고 있다. 이는 현대에도 작용하여 전쟁 비판이나 클리셰 비틀기를 제외하고서는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는 것을 명예롭게 묘사하는 전쟁 미디어매체가 대다수다.

2.

사마의, 곽가유엽을 제외한 조조 휘하의 책사들이 특히 너프를 당한 편이다. 또한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에서 조연 역할을 해냈던 인물들이 너프를 당하였고, 이민족과의 싸움에 매진한 장수들 역시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 등 많은 너프를 당했다.

2.1. 곽회

정사에서도 촉나라 장수들에게 패하는 묘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사마의가 중용할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후방을 추스르고 이민족들의 관리 등의 전투 보조적인 일에 더 뛰어나고 진태, 등애 등을 기용하여 그들의 조언을 들어 가며 최적의 전술을 찾아내는 능력도 뛰어났다. 오장원에서 제갈량의 계획을 위군의 누구보다도 먼저 파악하여 전투를 장기전으로 이끈 일등공신이기도 하며, 강유를 잘 파악해서 북벌을 막은 명장으로 평가할 수 있다. 화려하기보다는 견실한 타입의 장수다.

연의에서는 사마의의 주목을 받았다는 부분이 빠졌고, 제갈량을 까다가 장포에게 쫓겨 산으로 도망가는 추태를 저지르고 강유를 무작정 추격하다가 강유가 쏜 화살을 머리에 맞아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그것도 강유 본인은 화살이 소진되었는데 곽회가 괜히 화살을 날렸다가 오히려 강유가 그 화살을 잡아서 역으로 곽회를 사살한 거다.

2.2. 마균

정사에서 보여준 공돌이로서의 면모는 부각되지 않고, 여러 실용적인 발명 전적들은 모두 빠져 궁궐 개축이나 거대 동상 제작을 감독하면서 조예불로장생 망상을 부추기는 엉뚱한 역할로 변형되었다. 원융노 개량 등도 구상에 그친 데다가 원융노는 소설상 늦게 등장하기 때문에 시기를 놓쳤고 발석차 개량의 공은 실제보다 한참 전인 관도대전에서 유엽이 가져간다.

2.3. 만총

정사에서는 원소군 잔당이 집결했던 여남을 격파하고 오의 침공을 몇 번이나 막아내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거기에 태위, 군사도독을 역임하였고 식읍만 1만 호에 가까웠음에도 개인적으로 재산을 모으지 않는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 반면에 연의에서는 서황을 등용하는 장면이나 조조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유비에게 공손찬이 원소에게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리러 오는 장면, 형주 공방전 당시 우금의 대패로 낙심한 조인에게 절대 항복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장면, 오와 동맹을 맺으러 가는 장면 등 소소하게만 등장한다. 오의 침공을 막아냈다는 것을 들은 제갈량이 놀라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

2.4. 사환

하북 평정 마지막까지 종군하고 열후에 봉해져 자연사한 인물이 연의에선 원상과 싸우다 거짓퇴각에 속아 전사한다. 물론 상기된 대로 전사로 각색된 최후 자체는 논의의 여지가 있겠으나, 이 킬마크로 교만해진 원상이 자기 무력을 과대평가하다가 장료에게 깨지고 달아나는 내용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원씨 집안의 용렬함을 강조할 목적을 띠고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억울한 케이스.

2.5. 서황

관우를 띄워주기 위하여 뜬금없이 안량에게 도전했다가 일기토로 패한다든가, 동관에서 마초와 싸우다 달아나는 등 은근히 굴욕이 많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대 원소전, 마초전에 활약을 해서 적의 장수를 잡거나 뒤를 쳐서 패퇴시키는 장면들만 나오고, 져서 도망가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말 그대로 허구.

한중전에서는 조조가 길잡이로 붙여준 왕평이 옳은 말로 간언하는 걸 공연히 무시했다가 패해 놓고 찌질하게 왕평만 갈구고, 빡친 왕평이 강 건너가 촉에 항복해 버리는, 마속의 실책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당연히 왕평과의 일화는 실제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서황은 자신이 총지휘관이었을 때, 한 번도 진 적이 없다.[3] 정사에서 서황은 전투를 무지하게 잘 해서 조조로부터 주아부의 품격을 가진 명장이라는 더 이상 추켜세울 수 없을 만큼 추켜세워진 것으로 묘사될 정도다. 그나마 번성에서의 활약은 정사대로 구현이 되었고 모종강도 이부분에서는 그 능력을 인정해서 서황을 장료에 맞먹는 인재라고 평하긴 했지만, 문제는 이 과정에서 서황이 관우와 친분을 나누는 척하다가 갑자기 부하에게 관우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는 내용이 정사에 있다. 최대한 중립적으로 봐주려 해도 공사구분을 제대로 하는 건 그렇다쳐도 이런 식으로 통수를 때린 것까지 좋게 보긴 어렵다. 게다가 연의에서는 관우가 화용도에서 서황을 놓아보낸 일화도 있고[4], 서황은 관우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나오기 때문에 졸지에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되어버렸다.

결국 번성에서 패한 관우는 이후 오의 계책에 형주를 잃고,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연의에선 많이 폄하되어 나오는 듯하다. 정사에서 서황은 우금, 장합, 장료, 악진과 함께 오자양장이라고 불리며 위나라의 오대장격으로 실렸지만, 연의를 거치면서 버프를 받은 장료에 비하여 서황은 그 공적이 더하면 더했지, 모자람이 없었음에도 많이 애매한 B급 장수처럼 폄하된 경향이 너무 크다. 그리고 훗날에 반란을 일으키는 맹달을 토벌하러 나섰다가 맹달이 쏜 화살을 맞고 사망한다.[5] 이를 '장수는 전사하는 것이 명예롭다'라는 나관중의 사고방식의 일환으로 보기도 하는데, 서황만큼은 그렇다고 보기 힘들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자연사가 전사로 처리된 인물들은 뭔가 비장미가 넘치거나[6], 아니면 뛰어난 상대와의 겨룸에서[7] 사망하는 케이스이지만 서황은 승리가 뻔한 싸움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B급 장수의 눈 먼 화살에 맞아 허무하게 사망한 거라 그냥 개죽음이다.[8][9]

2.6. 손례

정사에서는 양주 지역(서량으로 알려진 그 양주와 다른 지명)의 수문장으로 활약하고 조예과 함께 사냥 중에 호랑이를 만나 칼을 꺼낼 정도의 용장이었다. 유능한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렴했고 간언을 잘 해 명망이 높았으며, 사공의 자리까지 올랐다.

연의에서는 곽회과 같이 세트로 제갈량에게 매일 털리는 잡장으로 격하되었다. 특히 진창전에서 화공을 준비하려다가 제갈량에게 당한다. 그나마 무력은 상향되어 호랑이를 칼로 죽이는 묘사가 있지지만, 관흥과 장포에게 털리는 것을 보면 상향을 받았든 말든 무능해 보인다. 더군다나 대촉전이 아니라 대오전에서 활약한 인물인데, 촉과의 전쟁에서 활동한 인물로 나와서 오나라에 맞서 활약한 내용은 없어졌다.

2.7. 순유

정사에서 순욱, 가후와 함께 최고의 문신으로 엮이는 반면, 연의와 기타 창작물에서는 곽가한테 밀린다. 자신의 공적이나 혹은 다 함께 이뤄낸 계책을 곽가 혼자서 독차지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가령 여포와 싸울 때 하비성의 수몰을 제안한 사람 역시 순유였으나 연의에서는 곽가가 이 공을 가져가고 있다.[10] 창작물에서 곽가가 이렇게 띄워진 반면, 정작 순유는 진수와 배송지가 곽가와 같은 선으로 분류한 정욱과 비슷한 수준으로 묘사된다. 정욱은 나이가 나이다 보니 늙은 모사라는 이미지상 뭔가 존재감이라도 있는 경우가 있는데, 순유는 작품에 따라서는 순욱 때문에 존재감 자체도 없다.

또 정사에서 조조가 위왕이 되기 전에 죽었고[11] 위왕에 대해 찬성한 인물인데, 연의에서는 위왕 반대했단 이유로 조조에게 "네 삼촌과 같은 꼴 당하고 싶냐?!"라고 협박당해 충격으로 병사하는 것으로 나온다. 정사에서의 순욱의 최후와 유사한 각색이다. 물론 이는 한의 충신으로 각색한 것이므로 수혜에 속하는 부분이지만, 요점은 연의의 순유는 결국 순욱 열화판 정도의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

2.8. 왕랑

제갈량에게 편지 한 번 보냈다가[12] 작가에게 찍혀서 인격 자체가 바뀐 경우다. 연의에서의 왕랑의 이미지란 손책한테 깨진 후[13]에 그저 존재감을 상실했다가 늘그막에 재등장하여 북벌 온 제갈량에게 "말싸움"을 신청했다가 그저 자폭[14]하고는 죽어버리는 평생 발리는 인생으로 나온다. 앞에서 말했지만 사실 존재감 자체가 없으며, 손책에게 깨진 왕랑과 제갈량에게 죽은 왕랑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몇 번 더 나와 봤자 '조조 휘하의 어용 지식인 1' 정도의 존재로 아부를 떨거나 헌제를 협박하는 잔챙이 악역이나 맡는다. 김홍신 평역판 삼국지에는 화흠의 눈짓을 알아채고 헌제의 멱살을 잡고 윽박지른다. 물론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왕랑이 사마의와 사돈이라는 점도 괘씸죄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대의 태위 양사의 제자이자, 경전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잠시 도겸 밑에 머물렀으나 곧 회계태수로 부임했다. 손책에게 패하여 달아난 것은 맞으나 연의 같은 자존심만 남은 골목대장이라서 맞선 것이 아니라, 한실의 신료로서 임지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는 의지 때문에 맞섰다. 이후 잠시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손책에게 포로로 잡혔다. 기록에 따르면 "손책은 왕랑이 교양이 있고 곧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문책만 했을 뿐 죽이지는 않았다. 왕랑은 비록 유랑과 곤궁한 생활을 하여 아침에도 그날 저녁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였음에도 친척과 친구를 포용하여 위로하고, 가진 것이 많든 적든 항상 나누어 도의에 바탕을 둔 행동이 매우 빛났다"고 되어 있다.

이후 조조가 초빙하여 수 년간 산 넘고 물 건넌 끝에 간신히 중앙 정부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한다. 비슷한 직위에 있던 종요와 비교했을 때, 종요는 깐깐한 원리원칙주의자로 명성이 있었다면, 왕랑은 가능하면 죄를 적게 주고 융통성 있는 너그러운 인물로 통했다.[15] 이후 벼슬을 사공과 사도를 지냈으며 낙양의 자택에서 천수를 누리고 228년에 사망했다. 자식이 열후에 봉해졌을 정도였다.[16]

공교롭게도 이 해가 바로 1차 북벌이 있던 해였기에 나관중은 이를 십분 활용하여 촉한 띄우기에 왕랑을 써먹었던 것이다. 어쨌든 결국 연의에선 손책과 제갈량에게 두 번 죽은 셈이 되어 버렸다. 연의에선 칼춤을 추며 태사자와 맞짱을 떴다는 구절에다가 한 나라의 중신이란 인간이 또한 산적떼 두목인 엄백호와 친구라는 괴이한 동인설정까지 붙어 버려서 도대체 뭐 하는지 알 수 없는 수상한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한술 더 떠서 연의의 설전이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묘사되었는데, 이게 드라마 종영 20년이 지나고 밈이 되면서 죽음마저 네타거리가 되고 말았다.

2.9. 왕필

정사에서는 218년 허도에서 일어난 경기, 위황, 김의의 난을 진압한 인물로, 정사에서는 조조가 직접 유능하다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그가 죽자 분노하기도 했다. 반면에 연의에서는 충성심은 있지만[17] 무능한 관리로 등장한다. 임무는 뒷전이고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가 반란 통에 화살을 맞고 죽었으며, 조조에게 고인드립까지 당한다.

2.10. 이통

정사에서는 남양 일대의 중소 호족에서 시작해 여남까지 세력을 구축했다가 조조에게 귀부했으며, 이후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다가 동관 전투 중에 병사했다. 반면에 연의에서는 엑스트라로 나와, 마초에게 바로 사망하는 역이다. 그것도 우금장합 등이 먼저 나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저 혼자 독단으로 뛰쳐나가 싸우다 죽은 걸로 묘사되어 있다. 사실 연의에서도 첫 등장은 장수에게 쫓기는 조조를 구출하는 것으로 나름 대접이 좋았는데, 그 뒤 증발해 버렸다가 뜬금없이 재등장해서 전투력 측정기가 된 괴상한 케이스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최훈삼국전투기에선 병에 걸려 허약해진 상태에서 마초를 상대하다가 결국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그렸다.[18]

2.11. 우금

정사에서는 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장이며, 관도대전에서 특히 크게 활약했다.

연의에서는 공기도 아니고 바보 멍청이가 되어 버렸다. 일단 관도대전에서의 활약이 모두 잘렸다. 그리고 채모 일당이 형주를 조조에게 갖다 바치려고 할 무렵엔 강제로 청주 태수가 되어 청주로 쫓겨가는 유종과 채부인을 조조의 밀명에 따라 죽이는 장면 때문에 악당의 똘마니같은 모습도 추가되었다.

가장 이미지가 망가지고 대중에게 유명한 장면은 역시 번성 전투. 부장을 자청한 방덕[19] 관우의 팔에 독화살을 날려 행동을 막고 목을 베려고 하자, 돌아갔을 때 평가가 깎일 것을 염려하여 방덕이 날뛸 때마다 징을 울려 억지로 불러들인다. 그것도 모자라 "상대가 관우이니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방덕을 자신의 후방에다 처박아 아예 활약을 못 하게 막는다. 나중에 비가 많이 와서 관우가 홍수를 이용한 수상전을 계획하자 방덕은 물론 일개 무장인 성하도 이를 예상했으나, 우금은 개소리 집어치워라며 무시하다 홍수에 휘말려 대패한다.[20] 그렇게 꼴사납게 잡혀 관우 앞으로 끌려가자 살려달라고 했으나, 관우는 '너 같은 놈 때문에 내 칼에 피 묻히기 싫다'며 가두기만 한다.

이후 관우가 동오의 공격을 받고 죽으면서 구출되어 위로 복귀했으나 조조는 '방덕은 알겠다만 당신은 뉘신지?'라며 개무시했고, 조비 역시 조조 사후 우금을 무덤 공사 관리인으로 보내놓고는 번성 전투 당시 당당한 방덕과 달리 관우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벽화를 보게 하여 돌려서 깠다. 결국 우금은 이 때문에 화병으로 죽고 만다. 물론 여기서 찌질한 쪽은 조비다. 유비의 부하였지만 퇴로가 끊겨 조비에 투항한 황권은 우대했는데도 말이다.[21] 이에 대해서는 우금 항목에 더 자세하게 있다. 하기사 잘 생겼다고 태수를 주는 조비의 취향이라 이런 점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그의 상대가 삼국지 최고의 아이돌인 관우였기에 대비효과가 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하지만 마냥 피해자라고 볼 수 없는 부분도 있는데, 청주병들이 기강을 어지럽히고 약탈을 일삼자 직접 처벌을 빙자한 토벌을 했을 때 모습이 지나치게 윗선에 잘 보이기식 처신이라는 시선도 있다.

형주에서 관우와 싸울 때 홍수가 관우만 피해 간 것도 아닌데 관우는 미리 수상전을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마냥 억울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있으나 이는 양번의 지리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관우가 있던 강릉에서 번성을 공격하기 위해선 반드시 한수를 넘어야한다. 한수는 동네 하천 수준이 아니고 과거 주나라의 소왕이 초나라를 공격하다가 한수에 익사했을 정도로 험한 강이다. 한수를 건너기 위해선 배가 필요하니 관우가 배가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또 홍수가 관우만 피해서 간 것도 아니라는 의견 또한 지리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우금이 지원온 허도 방면에는 7군이라는 대군이 비를 피할 만한 고지가 없다. 하지만 관우가 있는 양양 쪽에는 남쪽에 산이 있기 때문에 홍수가 일어나도 피할 수 있다. 허도에서 지원온 우금이 배를 끌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번성을 구원해야 하는데 비를 피하기 위해 멀리 산이 있는 곳 또는 홍수의 피해를 받지 않는 곳까지 후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관우가 홍수를 예측하였고 수전을 준비했는가와 별개로 우금은 운이 없는게 맞다.

2.12. 유복

정사에서는 200년에 여남의 이술이 반란을 일으키고 수춘이 함락당하자 양주자사로 임명되어 합비로 파견되었다. 당시 여남에서는 이술뇌박의 무리들이 치고받고 했는데, 여강의 주민들이 피해를 입으니 뇌박의 무리들을 설득하고 합비에 있게 되었다. 더블어 합비에 학교 건설, 둔전, 제방과 관개 정비, 성벽 강화 등의 공적을 남겼다. 적벽대전이 끝나고 합비 공방전이 시작되기 전에 사망했지만, 그가 만든 합비 방어선은 오나라의 입장에서는 통곡의 벽이 되었다.

반면에 연의에서는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술잔치를 벌여서 취했던 조조가 단가행을 읊다가 유복에게 지적을 당하고,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죽여버리는 것이 전부다. 뛰어난 목민관이 순식간에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한 일개 문관 수준으로 격하된 것. 이후 잘못을 뉘우치고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긴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 이렇게 따지면 본래 수명보다 적게 살아버린 셈이 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유복만 엑스트라로 격하했을 뿐만 아니라 조조가 실제로 하지도 않은 악행을 날조해서 덩달아 피해자로 만들어 버렸다.

2.13. 장간

정사에서는 조조의 문신이자 당대의 거상 출신으로 재주와 말솜씨가 뛰어났다. 209년에는 적벽 전투에서 패배한 조조로부터 주유를 설득해 귀순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주유는 손권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강조하였고, 장간은 웃으며 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조조에게 주유를 칭찬하며 말로 움직일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반면에 연의에서는 본의 아니게 희대의 이중간첩이자 트롤러가 되어 버렸다. 문서 참고.

2.14. 장합

정사에서의 모습은 뛰어난 전략가형 장수인데도 연의에서 나오는 모습은 이상하게 멧돼지처럼 한 자루 꼬나쥐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장수이다. 그나마도 전투력 측정기화 돼 버렸다. 인간흉기급의 장비, 장료일기토로 맞짱을 뜨기도 했고 한수에서는 뜬금없이 마초에게 1:1로 싸움을 걸었다가 캐발리고 도망쳤다. 장판파에서는 유선을 품고 가던 조운의 앞길을 막아서는 임팩트 있는 악역을 맡았으나 핸디캡이 있는 조운을 잡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

장비와의 전투도 장합이 조홍에게 "장비 그까이꺼 뭐가 무섭답니까?"라며 내가 지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고 코웃음치고 군령장 쓰고 나간 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정사대로 지긴 하지만, 그랬다고 조홍에게 두 번이나 목이 베일 뻔한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을 막아낸 공은 사마의가 가져간다. 가정 전투 자체는 그대로 묘사했지만 이것이 사마의의 통솔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마의의 입장은 장안에서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고 있던 정도였다. 조진이 끙끙대다가 조정에 지원군을 불렀는데, 이 소식을 장합이 들고 왔다. 이 때 사마의가 "우리가 이겼으면 촉군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가 졌다면 물러났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전했고, 진짜 그렇게 돼서 조진을 빡치게 한다.

제갈량이 사마의를 꾀어내어 죽이기 위해 목문도(木門道)에 함정을 파 놓은 것을, 그 대신 추격하다 사망[22]하였고 이를 본 공명은 '오늘은 말(여기서 말은 사마의의 성에 있는 司馬에서 딴 의미)을 잡으려고 했는데 노루(장합의 성인 張과 獐의 음이 일치한다. 여기서 장은 노루)를 잡았구나'라고 말하였다. 사마의가 한사코 추격을 말리는데 괜히 공명심에 들떠 우격다짐으로 출병했다가 전사한다.

실제로는 사마의가 추격을 명령하였고, 당시에는 경험 많은 역전의 장수인 장합이 불길하다며 추격하지 말 것을 주장하다 어쩔 수 없이 출격한 것이다. 연의에서 제갈량을 띄워주다 보니 숙적인 사마의를 띄워주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피해를 봤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15. 조예

제갈량의 북벌에서 사마의의 혼자의 원맨쇼 전개를 위해서 무능하게 묘사되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다른 신하들이 우왕자왕하고 있을 때 조예 혼자 평성심을 같고 신속하고 빠른 대응으로 촉군을 물리치는 위엄이 넘치는 업적이 삭제되었다. 손권의 침공에서도 여유롭고 현명한 대응으로 손권을 물리친 모습도 삭제되었다. 거기에 제갈량의 반간계에 속아 사마의를 경계하는 추태가 추가되는 등 정사보다 내리깎인 면모가 많다. 곽회, 장합처럼 사마의를 뛰어주기 위한 연의의 피해자가 되었다.

2.16. 조인

조씨 일족 중에 조조의 세력확대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무장이다. 적벽에서 대패한 조조가 형주 방면의 수비를 그에게 맡기고 떠났다는 것만으로도 조조 진영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 가능하게 해준다. 주유를 상대로 1년이 넘도록 강릉에서 수비전을 펼치는 등 나이가 들수록 강해졌다. 이 당시 전투에서 소수의 아군이 적 대군에게 포위당하자 몸소 수십 기를 이끌고 적 포위망을 교란시키며 병사들을 구출해 냈다. 용맹함과 근면함과 침착함을 두루 갖춘 위나라의 에이스. 결국 이 싸움은 졌지만[23] 그 외에는 패배한 일이 거의 없다.[24]

연의의 이미지 때문에 조인의 위상이나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한 마디로 위나라를 대표하는 하후연이나 장료, 서황에 비해서도 적지 않은 전공을 가진 삼국시대 최고의 무장 중 하나이다.

연의에서는 그런 거 없이 엄청 깨지고 맨날 진 것만 나오기에 조인이 왜 계속 하후씨 듀오 다음의 에이스 취급인지 절대 알 수 없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서서유비 측에서 처음 활약한 전투인 신야 전투[25]라든가, 제갈량의 책략에 놀아난 백하 전투 등이 있다.

그리고 예형이 조조의 부하들을 까댈 때 "조자효는 요전태수(돈에 환장한 태수)라고 하면 되겠다."라고 했는데 오히려 조인은 청렴하고 검소한 인물이었다. 진짜로 인색하고 돈에 환장한 작자는 조홍으로 조자효가 아니라 조자렴이라고 해야 옳다.

신삼국에서는 유비와 같이 재평가를 받아서 조조의 주력무장으로 나온다. 아예 허저와 같이 조조군 장수로서의 독점으로 인해 다른 무장들은 병풍이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특히 하후돈이 여기선 병풍으로 전락한다. 사실 하후돈은 그저 인격만 좋은 장수였으니.[26]

유능한 사령관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연의의 패장 이미지와 엮인 탓에 다른 장수들에 비해 더 많은 패배를 떠안은 안타까운 케이스.

2.17. 조진

조진이 연의로부터 입은 피해는 사마의-제갈량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 위해 조진의 성격이나 그의 재능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희화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제갈량을 띄워주기 위해 제갈량의 편지 한 방에 울화통이 터져 죽었다는 점이다.

연의에서도 조진을 "유능하긴 하지만 제갈량의 상대로는 부족한 장수"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다. 제갈량이 이간계를 펼쳐 사마의를 모함할 때 혼자 그를 변호한 점, 몇 차례 복잡한 작전을 세워 제갈량만 아니면 성공 직전까지 가는 점, 왕쌍을 선봉장으로 천거한 점, 조상이 사마의에게 항복할 때 환범이 "그 아비는 뛰어난 인물이었는데..."하고 탄식한 점, 병법에 제법 능통한 인물이라고 위연이 평가했다는 점[27], 조진이 통솔하는 위나라 군대는 하후무와 크게 달랐다고 묘사되는 점 등을 보면 연의가 그를 졸장으로만 묘사하지 않은 점은 분명하다.

아무튼 조진은 실제로 죽을 때까지 대촉전선의 사령관으로서 제갈량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연의에서는 1차 북벌 때부터 사마의가 제갈량을 상대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던 것이다. 연의에서 제갈량의 맞수로 사마의를 띄워주기 위해 조진은 공을 도둑맞았고 결국 무능하지만 종친인 덕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졸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희대의 명장이 무능한 도독으로 격하되었다는 인식은 수정의 여지가 있지만, 딱히 못난 도독이 아닌 인물인데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한 도독임에도 무능한 도독으로 묘사된 것은 사실이고 엄연히 연의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인 것은 맞다.

나관중이 장수가 전장에서 전사하는 걸 나름 그 장수에 대한 명예로 보아, 많은 장수들을 실제와 달리 전사하는 것으로 각색하였지만, 조진의 경우 가장 명예스럽지 못한 방식으로 죽게 서술하면서, 그 죽음을 통해 제갈량을 띄워주는 소모품이 되어 버렸으니, 이 점에 대해서도 분명 피해를 본 것이 맞다.

2.18. 종요

정사에서는 해서체로 유명한 서예가이면서 위나라를 통틀어서도 중압감 있는 정치가로 유명했으며, 순욱과 더불어 조위 최고의 사대부인 영천 호족의 수장이기도 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여러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연의에서는 활약 대부분이 삭제되고, 마초의 관동 대거병에 장안을 뺏기는 엑스트라 문관으로 격하되었다. 아들인 종회도 피해를 본 구석이 있어, 부자가 나란히 피해를 본 셈이 되었다.

다만 수혜를 본 면도 있기는 한데, 종회의 어머니 장창포와의 일화가 삭제됐기 때문이다.

2.19. 주령

정사에서는 제법 오랫동안 조조를 섬기면서 여러 전투에서 부장급으로 참여한 성실노력파 베테랑이다. 그 명성은 서황에 버금갔다고 한다. 조비 때는 고당후로 봉해지기까지 했고, 처음 임관했을 때부터 조조에게 별 이유 없이 미움을 받았지만 나중엔 조조가 다른 무장들에게 "너네들은 왜 주령만도 못하냐?"라고 할 정도로 능력면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연의에서는 노초와 함께 유비를 지원하러 갔다가 병사는 못 돌려받고 돌아오는 바보가 되었다. 근데 이것도 아예 조조한테 목이 날아가는 신삼국보단 나을지도.

2.20. 하후무

정사나 연의 양쪽에서 모두 무능하다고 까는 인간이 웬 피해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사에서의 무능함은 주변 인물들의 평가나 간접디스에 그치고 실제 행동은 별로 없었던 반면, 연의에서는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무려 제갈량을 상대하겠다고 설친다거나, 왕랑이 경험이 없어서 안된다고 말리는데도 되도않는 고집과 어거지를 부리고 육도삼략 드립까지 쳐가며 기어코 출전을 하다가 공을 세우기는 커녕 한덕과 그의 아들 4명을 모두 잃고 조운을 사로잡는 것도 실패하고 한번도 못 이기고 계속 대패를 하며 삽질로 훌륭한 인재를 적 편으로 만들고 본인은 오히려 제갈량한테 잡히는 등 그 무능함을 아예 실천하며 출전하기 전 제갈량을 사로잡지 못하면 다시 돌아와 천자를 뵙지 않겠다고 했는데 정말로 제갈량에게 대패한후 천수까지 버리고 부랴부랴 강족의 땅으로 도망가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 추태의 끝을 보여주고 제갈량한테는 강유는 봉황이고 하후무는 오리새끼라며 디스당한다. 특히 정사에서는 동생들의 막장 행각을 꾸짖을만큼 적어도 인간성은 그나마 조금 나았을 수도 있었는데 연의는 그딴 거 없다. 그냥 멍청이가 나대는 트롤러 수준으로 폄하된 것으로 연의에서 하는 행동들이 워낙 우스꽝스럽고 한심해서 하지도 않은 육도삼략 운운 등이 하후무의 상징처럼 거론되는 것은 피해를 봤다고 할 수 있다.

2.21. 학소

제갈량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제갈량을 완벽하게 격퇴한 것은 연의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다만, 나관중은 어떻게든 제갈량에게 설욕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 제갈량이 후퇴한 사이 학소가 병에 걸려 누워 있다가 역습에 놀라서 죽었다는 창작을 억지로 연의에 집어넣었다.

2.22. 한호

정사에서는 하후돈의 부관으로 여포에게 인질로 잡힌 하후돈을 구출하는 데 활약했으며, 둔전제의 시행에 기여했다. 연의에서는 하후돈 구출이나 둔전제 시행에 관한 내용은 깔끔히 날아가 버리고, 박망파 패배에서 잠깐 모습을 내비친다. 그리고 이후에 한현의 동생으로 한호라는 인물이 나와 황충에게 끔살당하는데, 둘이 동일인인지는 논란이 있다.

2.23. 화흠

벽에 숨은 복황후를 끌고 가는 장면은 정사의 내용이 맞기 때문에 이 내용에 한해서 피해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 무능한 높은 분의 이미지가 되었는데 조비를 부추겨서 조웅조식을 죽이게끔 충동질하며 조예의 대에는 마속의 계략으로 사마의가 반란 의혹을 받자 즉시 척살할 것을 주장하고, 이후 반란 혐의가 불확실해지자 병권을 빼앗고 좌천시키라고 진언한다. 반면 청백리로서의 모습, 관노를 하사받았으나 이들을 해방시켜준 어진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정사가 알려진 지금도 황후를 죽인 자 vs 청백리라는 괴리감 있는 두 모습 때문에 청백리 행세는 그저 세상에 잘 보이기 위한 위선이었을 거라며 까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사 속 화흠은 복황후의 죽음에 책임이 있긴 하지만 그 외에 적극적으로 한실을 핍박하는 행위에 가담한 적은 없으며, 조비가 제위를 양위받을 때는 진군과 함께 기뻐하지 않는 얼굴을 보였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화흠의 행적은 어진 선비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나 '충신으로서 절개를 지켜 죽기 vs 까라면 까기'의 선택을 강요받은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3. 촉한

3.1. 간손미

간손미 드립의 경우 간손미, 손간미, 손미간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리며 여러 삼국지 커뮤니티에서만 쓰였지만, 이말년이말년씨리즈에서 간손미를 엘롯기에 빗댄 후 대중화되었다.

행정 및 외교 방면에서 활약한 촉 개국공신들. 입촉 후에는 그에 걸맞은 높은 대우를 받았으며 특히 미축은 지위만 따지면 제갈량보다도 높았다. 그런데 문제는 연의가 행정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 거기다가 연의 때문에 미축을 그냥 돈만 대준 스폰서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실제로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 무인이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이미지답지 않지만 실제로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본인, 동생, 아들, 손자 모두 무관직을 수행했다.

초창기부터 유비가 위기에 빠질 때 마다 직접 위기에서 끄집어내주는 중요한 역할의 인물들이였으나, 하필 연의에선 전투가 아니면 크게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피해를 본 인물들. 나관중이 그렇게 좋아한 촉의 최고급 개국공신들이나 연의에선 공통적으로 뭔가 없으면 안되는데 그렇다고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을 크게 하는 것은 아닌 애매한 인물들로 나오며 애초에 간손미라는 단어가 그런 모습을 지칭하여 만들어졌다. 사실상 간손미라는 비하적인 의미의 단어 자체가 피해인 것. 그리고 셋다 갑자기 중, 후반부터 공기화되어 언제 죽었는지 모를만큼 대우가 처절한 것이 특징.[28]

3.1.1. 간옹

유비와 동향이자 친구. 유비가 거병한 이후로 그의 막료로 활약했다. 유비의 신하들 중에서는 전체 다 따져서 관우, 장비와 함께 최고참.

익주 정벌 때, 마침내 유비가 성도를 포위하자 간옹을 보내 유장을 잘 설득해서 항복시켰고, 간옹은 소덕장군(昭德將軍)에 임명되었다. 익주가 평정되자 대우를 이적, 손건 등과 동등하게 우대받았다.

사실 정사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히 어떤 능력을 보여주었는지 확언하긴 힘들고 연의도 대충 상황이 비슷하여 크게 피해를 받았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일 수 있다.

확실한 점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싸가지가 없는 행동들을 일삼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누군가 싫어했다던가 벌을 받았다던가 했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인성이 모자라던 인간들이 어떤 비참한 최후들을 맞이하였는가를 생각해 보면 간옹은 그저 선을 넘지 않고 적당히 장난도 곧잘 치는 당시 기준으로 꽤나 유머러스한 인물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연의에서 이런 흥미로운 캐릭터성은 사라졌다.

그리고 입촉 과정에서 초반에 유장에게 사자로 가서 유장이 그를 아꼈다는 점으로 보아 외교 실력이 꽤나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차후에 유비가 속내를 드러낸 이후에도 종장에 유장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의 중요한 공이 있다. 이는 연의에서도 정확히 표현되나, 괜히 유장에게 허세 부렸다가 일침 먹고 조용해지는 등 약간의 깨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3.1.2. 손건

유비가 조조를 배신하고 손건을 외교 사자로 보내 원소와 관계를 맺게 하였는데 유비군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외교를 실수없이 잘 성취했다. 또한 유비가 원소에게서 벗어날 때 미축과 함께 유표에게 사자로서 향했고 이 외교 또한 깔끔하게 성취했다.

유비가 형주에 이르자 간옹, 미축과 함께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 유표는 원상에게 편지를 보내 원상과 원담의 항쟁에 대해서 유비, 손건 등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만큼 유표는 손건을 우대하고 인정하였다.

외교 능력에 있어선 당시의 명사 중 하나이나, 이런 강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 연의에선 그냥 서신 셔틀처럼 표현된다. 실제로 지지 기반을 잃은 유비가 다른 세력에게 빌붙으러 갈 때엔 손건이 사자로 가서 해당 세력의 걸걸한 책사들로 이루어진 반대파와 서로 디스전을 치르고, 세 치 혀로 수장의 마음까지 돌려놓아야 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그냥 마음에 안 들면 거절만 하면 다행이고 모가지를 날려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다.[29] 이런 피말리는 외교를 수 없이 성공한 손건의 능력은 실로 엄청났던 것. 그러나 연의에서는 그냥 가서 '우리좀 받아주셈' 하면 '아 애들이 반대하는데 인의에 어긋나니까 내가 넓은 아량으로 받아줌' 등의 본인의 능력이 선택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실상 여러번 어디에 묻힌지도 모르게 될 뻔한 유비를 살린 인물이나 간손미 공통으로 연의에선 후반에 몰랐는데 알고보니 죽어있던 공기화된 인물 중 하나로 나온다.

3.1.3. 미축

집안 대대로 서주에 근거지를 둔 유지로서, 엄청난 재산을 소유했음에도 행실이 겸손하고 인덕이 넘쳤다는 평이 자자하여 도겸이 그의 덕행을 듣고 불러 문관 벼슬을 내려 등용하였다.

유비가 도겸에게 양도를 받아 그를 이어 서주를 통치하게 되었을 때 미축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근거지가 없고 미래도 불투명하던 시절부터 유비의 장래성을 높게 평가했는지, 서주를 상실하고 도주하는 유비를 대대로 서주지역의 유지였음에도 예주, 형주, 심지어 완전 반대 지방인 서촉까지 따라가면서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또다른 서주 지역의 유지인 진규 부자는 그대로 서주에 있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특이 케이스.

중앙 권력에 조조 측 인물로 입신양명할 뻔하였는데 서주에 자자한 미축의 명성을 들은 조조가 태산군의 일부 현을 갈라내 영군을 설치하면서 당시 편장군을 지내던 미축을 영군 태수로 임명하기도 하였다.[30] 하지만 이를 사양하며 유비를 따라 서주를 떠났고, 이로써 그의 중앙 권력에서의 입신양명은 없던 일이 되었다.[31]

간손미 중 최고의 연의 피해자. 정사에도 기록된 그의 의외로 뛰어난 무인의 모습이 사라졌으며, 연의에선 크게 하는 것 없는 유비 돈셔틀로 표현된다. 그나마 외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손건과 달리 유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결국 역사에 유비라는 크나큰 이름을 남겨준 인물 치고는 너무 분량과 캐릭터성이 처절하다. 심지어 촉 건국의 최고 수훈자 중 한명이자 제갈량보다 높은 벼슬을 받았던 그가 동생이 하필 최악의 배신자가 되어 버린 바람에 분사해버리는, 비참하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그의 극적인 삶을 포장해줄 최후의 기회조차 연의는 허락하지 않아서 그냥 언젠가부터 언급되지도 않는다.

3.2. 마충, 장억

정사에서는 주위의 이민족들을 잘 다스린 명장들이다. 마충은 그가 죽자 그를 기리는 묘당이 만들어져 해마다 장사가 지내졌다고 할 정도이며, 장억도 그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송덕비까지 있다. 연의에서는 이민족들에 대한 내용이 많이 축소되었기에 이러한 공적들이 나오지 않으며,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서 축융부인에게 일기토에 패해 사로잡히는 꼴을 당한다. 더구나 장억은 그나마 강유를 구하다 전사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지만 마충은 노환으로 죽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아예 언급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둘 모두 정사에서는 마충이 4차 북벌에 잠깐 합류한 것을 제외하면 제갈량의 북벌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연의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장들로 참전하는 것으로 설정했기에 온전히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좀 미묘하다.

3.3. 법정

행적 자체는 정사나 연의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정사에서 제갈량 등이 고평가했던 게 잘 드러나지 않으며, 주로 활약했던 정군산 전투도 법정의 지략보다는 황충의 용맹과 장비장합 낚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존재감이 약한 편. 사실 제갈량이 연의에서는 책사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정치가 및 지휘관으로서 우수했고 법정이 오히려 뛰어난 책사로서 유비한테 사랑받았다. 제갈량이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 법정이 살아있었으면 황제가 전쟁간다고 난리치는거 막았을텐데..."라고 탄식하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중대사항에선 유비가 오히려 제갈량보다 법정의 간언을 쉽게 수용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3.4. 염우

정사에서는 어느 정도의 능력과 공적이 있었다고 평가되지만, 황호와 결탁하여 강유를 대신하려고 했다는 사실 하나로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었다. 하여 연의에서는 한 치의 공적도 없이 강유의 자리만 탐낸 간신배로 나온다.

사실 황호 외에도 제갈첨, 동궐, 번건 등 많은 신하들이 염우로 강유를 대신하려 한 걸 보면, 수단에 문제가 있었을지언정, 염우를 무능하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간신배로 보기엔 억울한 감이 있다. 게다가 성도가 공격당할 때에도 나름 나라를 구하려고 지원군을 이끌었다.

다만 이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되는 것은, 사서에서 "능력과 명성이 마충에 미치지 못했다."라는 내용이 굳이 적혀있다는 점[32], 황호와 친분 및 결탁이 있었다는 점, 당시 강유에 대한 촉한 내정의 여론이 최악이라 제갈첨 등 대신들에게는 강유 탄핵이 우선적인 목적이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염우를 능력있고 청렴한 인물로 해석하기에는 더욱 무리가 있다. 하지만 설령 염우가 정사에서 어느 정도 하자와 한계가 있는 인물이라도 연의 수준으로 엉망인 건 아니었으므로 피해자인 건 맞다. 중간 정도는 가는 인물을 완전 쓰레기로 폄하하는 것 역시 피해다.

3.5. 오의

정사에서는 강인하면서도 자애로웠던 장군으로, 눈부신 무용은 없지만 통솔력이 뛰어나 적은 군사로 많은 병력을 제압했고 좀처럼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황실 외척으로서 북벌에 종사했고 거기장군까지 역임한 거물에다가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사후 조운, 위연과 견줄 만한 무장이었다.

연의에서는 위연과 양계에서 함께 위장 곽회비요를 격파한 전공을 연의에서 강유에게 빼앗기고, 유비유장이 다스리는 촉을 공격할 당시 장임의 부장으로 나온다. 장임의 계략에 따라 유인된 장비를 장임과 같이 양쪽에서 협공해 장비를 위기에 빠뜨렸지만, 때마침 구하려고 달려온 조운에 의해 사로잡힌다. 비록 장임과 같이 둘이서 달려든 것이지만 혼자서 만 명을 이긴다는 천하의 맹장 장비를 그 두 명이서 수세로 몰아넣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무예 실력이 있는 편으로 인정되는 점이 위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존재감 없는 무장으로 전락했다.

3.6. 왕평

정사에서는 오호대장군, 위연, 오의, 장억, 마충, 강유 등과 더불어 촉한 최고의 용장으로 꼽힐 만한 인물이다.

연의에서는 제갈량 사망 전에는 위연, 사망 후에는 강유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 조운이 죽은 뒤 촉한 최고의 무장을 위연으로 만들어 버리고 위연의 반골의 상 운운하느라 후기 최고의 명장을 전혀 묘사하지 않았다. 또한 강유의 고군분투를 묘사하기 위해서 왕평의 흥세 전투를 그냥 통째로 삭제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왕평이 가다가 하평으로 이름이 바뀌기 때문에 거의 정사 삼국지 그대로 묘사한 위연을 제압한 장면에서도 왕평이 하평인 줄 사람들이 몰라서 그나마 있는 공적이 잊혀지기도 한다. 게다가 이때 위연을 무력화시킨 것은 왕평이지만 결국 죽인 것은 마대라서 왕평보다 마대가 위연의 난을 묘사할 때 더욱 기억난다.

다만, 연의를 유심히 보면 왕평이 뻔질나게 많이 나온다. 남만정벌에서 북벌까지 꽤 많이 나오고 꽤나 통찰력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는 일화도 나름대로 있다. 문제는 일기토씬 같은 임팩트 있는 이벤트가 별로 없고, 일기토를 해도 장합 같은 강자거나 위연을 제압할 때처럼 거짓 퇴각을 밥 먹듯이 하기 때문에 무력이 강조되지 않는다. 그래도 제갈량이 죽기 전에 믿을만한 장수로 지명했지만 그때도 제갈량의 후계자 강유가 비중이 훨씬 더 많았다. 실제로는 왕평이 죽을 때까지도 별 지분이 없던 강유가 위연 사후의 비중을 다 가져갔으며, 촉이 위나라에게 이긴 가장 큰 전투이자 왕평의 커리어 하이였던 흥세 전투가 잘리면서 부장급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한다.

왕평이 이렇게 묘사된 이유는 후반기의 비중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대에게 묻힌 것은 굴욕. 사실 왕평의 활약이 묻히는 건 마대를 비롯해 관흥, 장포 등 당대에 활약하지도 않은 인물들이 연의에서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는 바람에 손해보는 면이 크다.

3.7. 진식

정사에서는 제갈량의 3차 북벌 당시에 제갈량의 도움으로 무도와 음평을 점령하고 곽회를 물리치는 활약을 했다. 연의에서는 한중 전투에서 무모하게 덤비다가 하후상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제갈량의 북벌에서도 말을 무시하고 홀로 움직이려는 위연에게 동조했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온 뒤 제갈량 앞에서 위연의 말을 듣고 나섰다가 패한 것이라고 변명하자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물어뜯는다며 제갈량에게 요참형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실 제갈량도 위연이 주도한 것이라는 걸 알지만 일단 위연의 용맹을 의지할 필요가 있어서 결국 진식 혼자서 덤터기를 쓴 것.

3.8. 사인(부사인)

정사에서도 관우와 사이가 안 좋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는 임지인 공안을 지키려고 했으며, 배신자로 인해 오나라 군대가 공안을 포위하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항복했다. 그래서 우번은 이는 휼병[33]이니 사인을 남군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고, 공안성을 수비해야 하므로 여몽이 사인을 공안에서 끌어내고 남군으로 데려갔다. 진짜 배신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던 미방이다. 이후 사인이 어찌되었는지 기록은 없다.

연의에서는 일단 본명으로 나오지 못하며, 이릉대전유비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34] 실제 역사상 사인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3.9. 유선

정사 기준으로도 그렇게 좋은 군주였는지는 의문이 드는 인물이고 적한테 까지 까일 정도라서 대체 이 인간이 여기 왜 있나 싶겠지만 정사에서의 행적은 그래도 어느정도 옹호할 거리도 있고 암군이지만 폭군은 아니었다 정도의 쉴드는 가능한데 비해 연의에서는 한술 더 떠서 제갈량을 의심해 군을 물리게 하는 등 무능하고 멍청한 면이 더욱 부각되었으며 강유를 좀 더 불쌍하게 보여주려는 모양새 때문에 미신을 믿는 경향이 더욱 부각되어 정말이지 답이 없는 군주가 되었다. 정사에서도 진지와 황호의 전횡에 무감각하고 대장군인 강유에게 도움이라곤 되지 않기야 하지만 연의에서 묘사되는 유선은 정사보다도 훨씬 자질이 부족한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연의의 영향을 받은 다른 매체 등에서는 국가 건립 이념도 못 외우는 저능아로 묘사되는 등의 피해를 입기도... 덕분에 그의 아명인 아두는 바보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비록 말년에 암군적 면모를 보였다지만 역사상 암군 중에는 인성파탄자나 진짜 지적장애인도 있던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무능한 건 그만이 아니었던 점에서 다소 억울한 면도 있다. 게다가 그는 암군일지언정 폭군은 아니었고 민생이 그렇게까지 파탄난게 아니라는 반론도 있는만큼 연의에서 너무 무능력하게 나온 감도 있다.

3.10. 조광[35]

정사에서는 아문장의 직위로 강유를 수행해 답중 싸움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 적어도 활동 영역이 불분명한 관흥, 장포와 달리 군사 지휘관이기는 했다는 뜻이다.

연의에서는 조운이 죽었다는 것을 제갈량에게 알리는 보고를 했으며, 유선이 조광을 아문장으로 봉하면서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게 했다는 게 끝이다. 조광의 행적이 삼국지 최후반에 있어서 서술하기 귀찮았는지 소소한 너프를 받았다. 그래도 나관중의 아이돌 가운데 하나인 조운의 아들이고 또 다른 아이돌인 강유를 수행하기까지 했고 심지어 나관중이 좋아하는 '적과 싸우다 전사한 인물', 그것도 촉한의 장렬한 마지막인 촉한멸망전에서 전사한 인물인데도 나관중이 띄워주지 않았다. 무장으로서의 행적이 있는 조광은 연의에서는 겨우 이 정도 비중인데 관우, 장비의 2세대인 관흥이나 장포가 맹활약하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미묘하다. 하긴 진도 같은 경우엔 조운에 버금간다고 하지만 기록이 없어서 아예 나오질 않는데 조통, 조광은 조운 아들이라고 단역으로나마 등장이라도 시켜준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그래도 연의에서는 관흥, 장포가 맹장 취급인데 조광은 '왜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은 남는다. 아마 조광이 버프를 먹지 못한 이유는 바로 아버지 조운의 역할을 뺏어올수 있는 일종의 경쟁상대이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관흥, 장포, 마대 같은 오호대장군 2세 무장 포지션의 캐릭터가 투입된 이유가 비교적 일찍 죽은 관우, 장비, 마초의 역할을 잇기 위함이다. 관흥과 장포는 부친들인 관우랑 장비가 형주 공방전/이릉대전 시점에 사망해 이릉대전부터 "아버지를 잇는다"는 유지를 가지고 화려하게 등장해 이릉대전부터 제갈량의 북벌 시기까지 쭉 활약할 수 있었다. 죽은 아버지들을 대체할 2세 무장 캐릭터로 등장해 훌륭한 맹활약을 몰아줄 분량이 있었고 또한 그만큼 관우와 장비의 공백이 길었기에 등장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것. 비슷하게 오호대장군인 마초의 2세 무장 보정을 받은 마대 역시 마초가 비교적 일찍 죽기에 남만 정벌부터 활약할 충분한 분량이 주어진다. 하지만 조광은 아버지의 자리를 대체해서 2세 무장 보정을 받을 분량이 너무 짧다. 바로 아버지 조운이 1차 북벌까지 생존해서 맹활약하기 때문. 조광을 키우려면 조운의 말년 활약상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부러 가공 인물인 한덕 일가를 등장시켜 처참히 도륙내는 등 마지막 장면까지 조운을 챙겨준다. 조운이 그만큼 늦게까지 활약하기에 조광이 활약할 만한 분량도 적고 그로 인해 그가 활약해야 할 필요성도 적어지는 것이다. 대신 관흥, 장포와는 다르게 제갈량 사후에도 강유의 북벌과 촉한멸망전까지 활약할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지만.

비슷하게 황충의 아들인 황서는 아예 연의에 등장하지 못했다.

4.

사실 오나라쪽 인물들의 경우 삼국정립 이전에는 거의 모두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삼국정립 이후에도 상당 부분 그렇다. 연의의 초점이 조조-유비, 제갈량-사마의에 맞춰져 있어 공적의 상당 부분이 축소되어 버렸기 때문. 같은 이유로 오를 주로 상대했던 위나라 인물들 역시도 피해를 입었다.

특히나 오나라 장수들은 그 "관우"를 죽이는데 일조했다는 면에서 상당히 많이 저평가받고 까인 케이스가 많다. 아래 항목에 보면 잘 나오지만 관우를 토벌했던 대부분의 장수들은 나관중에 의해 정말 비참한 죽음들을 맞는다.

4.1. 손견

관점에 따라서는 피해자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피해자라고 보는 편이 맞을 듯하다.

애매하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피해도 입었지만 수혜도 입었으므로 애매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정사에서는 영지를 잃고 원술의 후원으로 세력을 유지했는데 연의에서는 처음부터 동등한 군벌로 나오고, 왕예장자 같이 애꿎은 사람을 핍박해서 죽인 것도 연의에서는 안 나오기에 연의에서 수혜를 입었다는 것이다.[36]

또한 옥새를 손에 넣자 천하를 노린다는 야심을 갖는 건 폄하라기보단 캐릭터성의 변화이며, 손견의 행적은 나쁘게 보면 원술의 부하, 아무리 좋게 봐도 원술의 객장에 불과한데도 연의에서 확실히 원술과 동격의 제후로 나오니 이 부분에서도 이득이고 제후로서의 능력이나 위상은 오히려 올랐기에 마냥 피해자라고 보기엔 애매하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손견을 제후로 보는 관점에서는 그렇고, 전통적인 관점대로 한에 충성하는 무장으로 본다면 확실한 피해자다. 손견 본인의 본심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서 손견 또한 야심을 가진 제후로 간주하고, 그리고 충성하는 무장보다 제후를 위급으로 보는 시각이라면 수혜를 입은 부분이 있으니 애매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관점대로 본다면 충성스러운 무장을 나관중 맘대로 예비 역적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애매한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아무래도 전통적인 관점을 따르는 편이 안전할 것이기에 피해자라고 보는 편이 온당할 듯하다.

더군다나 동탁군을 무찌르고 화웅을 참살한 손견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삭제되었으니 이것도 큰 피해다. 손견이 패전을 한 번 하기는 했으나 결국 자기 혼자서 동탁을 무찌르고 낙양을 수복한 것인데 연의로 보자면 손견은 원술의 속좁음으로 인해 배고파서 졌는데, 화웅과 여포를 유관장 3형제가 무찌르고 동탁이 도망간 낙양을 제일 먼저 달려간 정도가 되어버린다. 솔직히 이 부분은 엄청난 피해를 봤다.

다만 나관중의 소설적 능력과 복선깔기로 인해 죽은 다음 손책이 동오를 정벌할 때 손견이 워낙 명망이 높아 반쯤 손책이 거저먹는 부분이 있기에 이 부분은 확실히 손견의 위상이 올라간 케이스이다.

4.2. 노숙

등장 당시 대범하게 손책군에게 군량을 내주는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제갈량과 주유 사이에 끼어서 어리바리한 모습만 보여주거나, 손건과 비슷한 메신저 역할로만 등장하는 등 어딘가 빵셔틀스러워진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주유가 죽이려 하면 제갈량이 말발로 압도하는 상황에서, 노숙은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도 모자라 양쪽에게 까이기까지 한다.[37]

그렇다고 동병상련의 처지인 유비나 간손미처럼 인격적으로 온전하게 성실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주유가 계책으로 채모, 장윤을 제거했을 때, 제갈량은 자신이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주유에게 알리지 말 것을 노숙에게 부탁하였지만, 노숙은 다 일러바친다. 익양대치 부분도 오히려 노숙이 관우를 초대한 것으로 변하면서 정사와 바뀌었다. 물론 온전한 연회를 베풀고 정정당당히 협상을 하려 했다기보다는, 보험으로 병사를 매복시켜서 기다린 것이므로 정인군자의 이미지도 날려먹었다. 심지어 관우는 노숙을 붙잡고 사실상의 인질극을 하는 것으로 맞대응하므로 더욱 체면이 추레해졌다. 실제로는 양쪽이 칼 하나만 가지고 회담에 참여했을 정도로 담대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정사의 노숙은 주유와 함께 오나라 중심으로 장강 이남을 통일하여 조조의 세력에 대항한다는 웅대한 천하이분지계[38]를 수행하던 주축이었으며, 형주 문제로 관우와 대립할 때도 관우를 압박하는 등 절대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관우와 대립하면서도 유비 세력과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강온 양면에서 활약한 인물이었다. 사실 익양대치 때 관우를 언변으로 압박한 건 연의에도 나오는데 나관중이 이걸 이상하게 비틀어서 결과적으로 관우 버프에 써먹기까지 했다.

실제로는 주유와 노숙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오나라 내에서 유비 세력과의 연합을 의문시하는 세력이 힘을 얻고 손권이 여몽의 말에 따라 서주를 먹는다는 것에 회의감을 느껴서 관우를 쳐 양국의 동맹은 파탄을 맞는다.[39] 확실히 손권은 노숙이 살아 있을 당시에도 노숙과 제갈근을 번갈아 갈구면서 형주 받아오라고 징징댔다.

하지만 등장 초반에는 역할이 많다. 손책(주유라고도 한다.)에게 군량을 내주는 모습[40]을 비롯해, 막 군주가 된 손권에게 대의를 설파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41] 신삼국에서는 유비, 조인처럼 재평가를 받아서 셔틀 이미지를 벗어나간다. 게다가 "촉나라에는 유비, 제갈량이 있다면 위에는 조조, 사마의, 오에는 노숙이 있다."라는 말이 생겼다.

그리고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제갈량은 립서비스로나마 노숙의 지휘 능력을 칭찬한 적이 있다. "길에 매복하거나 관문을 지키는 건 노숙이고[42] 강에서의 수상전은 주유다"라는 말 자체만 보면 노숙이 오나라의 지상전 에이스까지는 아니라도 나름 스페셜리스트로 평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당시 상황은 정말로 제갈량이 노숙의 지상전 실력을 칭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니들은 수상전 아니면 지상전밖에 할 줄 모르지만 나는 올라운드다."라는식의 자뻑+도발에 가깝다. 무엇보다 그 발언의 주요 타겟은 자신을 조조의 군량고라는 사지로 몰아버린 주유이며, 오히려 그런 식으로 자신을 죽이려 한 주유에게 그 일을 떠넘기려는 책략으로 나온다.

4.3. 반장

관우를 생포해서 관우의 죽음에 일조했다.[43] 이후 그 공로로 손권한테 관우의 청룡언월도까지 하사받는다. 연의에서는 이릉대전 초기에 황충과 일기토 뜨고 패하고 어느 민가집으로 도망갔다가[44] 그 곳에서 반장 본인보다 먼저 와 있던 관흥과 본의 아니게 마주쳐 버렸고, 몹시 분노한 관흥을 피해 도망가던 도중 관우의 원혼을 만나 놀라 당황한 상황에서 더는 도망도 못 가고 있다가 뒤에서 관흥에게 사망하는 굴욕[45][46]을 당하지만, 실제는 달라도 너무 다른데, 이릉대전에서 육손과 함께 오를 지켜낸 구국의 영웅 중 하나로 유비군 격퇴에 공을 세우고, 이후 위나라와의 전쟁하후상과 맞서는 등 활약하다가 234년에 자연사하였다.

아마도 관우를 생포한 데다가 그것도 모자라 복수를 위해 출전한 유비군까지 개박살내었고, 그러면서도 저자 본인이 중시한 인간성조차 나쁜 인물[47]이었기에 나관중이 정사를 완전히 왜곡하고서라도 저런 최후를 안겨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능력상으로도 반장은 나름대로 문과 무를 겸비했으며, 무예의 분야에서는 반장이 이끄는 병력은 일당백이 된다는 기록이 있고, 두뇌적인 분야에 있어서 반장이 시장을 열면 시장이 번창한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막장스런 인간성 때문에 사고를 친 적도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때마다 손권이 옛 공을 들어 커버해 줘서 실제 역사에서는 제 명에 살다 죽었다지만, 손권이 아낀 것은 어디까지나 그 능력일 뿐 반장이란 인물 자체를 아낀 건 아니라 최고위직에는 올라가지 못했다.[48] 물론 그와 별개로 승전한 전투에서 패전해 한심한 죽음을 맞는 것으로 각색되었기 때문에 피해자는 맞다.

4.4. 반준

미방, 사인(부사인)과 함께 관우를 배신하고 형주여몽에게 넘긴 반역자 취급을 받는 인물. 연의에서는 왕보가 "(손권군에게서 형주를 방어할 때, 후방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 그는 사리(私利)에 밝은 인물이므로 중용해서는 안 됩니다. 조루를 보내 지키도록 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며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반준은 미방이나 부사인처럼 바로 배신한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후 황권이나 황충처럼 절의를 지키며 끝까지 버티다가 손권이 직접 찾아와 위로를 해주자 귀순했으며 그 후에는 육손과 함께 형주 무창의 수비를 맡고 후일 손권황제에 오르자 시중의 자리까지 오른다.

하지만 촉나라 양희가 쓴 계한보신찬에서는 미방, 사인, 학보와 함께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없고 위와 오의 웃음거리가 됐다며 마구 씹혔다. 이것으로 보면 반준에 대한 반역자 취급은 이미 당시 촉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던 모양. 하긴 습진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자살한 것과 비교해 보면 그의 행동은 촉나라 사람들로선 까고 또 깔 짓이겠지만.

일단 위와 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말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우번이 항장인 우금이나 미방은 대차게 깠음에도 반준은 깐 적이 없고 후에 손권의 총애를 받는 간신 여일이 승상 고옹을 감금하거나 하면서 횡포를 저지를 때 혼자 매일매일 암군이 된 손권에게 강경하게 진언하고 심지어 관리들과 공모해 스스로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여일을 죽이려 하여 결국에는 정신차린 손권이 여일을 처형시키게 만들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다.

이에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양희와는 달리 반준을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항상 국가의 대사를 논하였다.라며 높게 평가하였다.

4.5. 보즐

오의 승상 중에서 한 명인데 그냥 장소, 고옹과 세트로 까이는 일만 하는 놈으로 나온다.[49] 거기다가 그냥 문관으로 나와서 승상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말년에 손패를 지지해서 욕을 먹어서 그런 것 같다. 동오의 승상들이 연의의 대표적인 피해자들이다. 존재 자체가 해로운 손준, 제갈각, 손침은 제외하면 말이다.

4.6. 송겸

이릉대전까지 종군하는 장수인데, 연의에서는 이전에게 죽었다. 나름 숙장에 속하는 장수지만 사실 정사에서도 존재감이 아예 없다.

4.7. 엄준, 고옹, 낙통, 설종

연의에서 제갈량에게 설전으로 패한 것으로 인해 무능한 문관처럼 나왔다. 특히 엄준은 제갈량이 엄준과 친해지고 싶다고 정사에 나왔는데, 연의에서는 이러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4.8. 여몽

연의에서는 관우의 귀신에게 빙의당하고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한다.

특히 여몽은 관우를 잡아죽인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인물인지라 나관중 등 관우 신봉자들의 미움을 많이 받았는데, 연의에서는 괄목상대의 일화도 없고[50], 형주 공략 때 세운 계략이 연의에서는 육손의 계략으로 나오는 등 전공이 축소되었으며, 정사에서 보이는 좋은 일화들이 연의에서는 많이 삭제되어 있다.[51]

게다가 관우 사후의 에피소드는 조조의 죽음에서부터 뭔가 쑥덕거릴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당대의 민간설화도 엄청나게 많다. 지병이 도져 급사한 것을 극적인 요소를 집어넣어 화려하게(?) 연출한 것. 물론 지병을 앓고 있었어도 형주를 공략할 당시까지만 해도 업무수행은 가능할 정도였는데 관우를 죽이자마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던 만큼 정말 저주를 받은 걸로 비칠수 있긴 했다.

이러한 서술 때문에 여몽의 후예인 여씨 집안 사람이 관우사당에 들어가면 관우의 원혼에 의해 즉사한다는 미신이 생겨났으며, 임진왜란 이후로 명나라에 의해 조선에 관우신앙이 퍼져 관우사당이 곳곳에서 생겨난 이후로 조선에서도 이런 미신이 성하였다고 한다.[52]

실제로 중일전쟁 당시 관우를 상당히 존경했던 일본군 장교가 난징에 소재한 여몽의 묘를 훼손하기까지 했다는 루머도 존재.[53] 이런 루머가 나올 정도로 1990년대까지 연의에서는 여몽을 악역 수준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

그리고 명성황후임오군란 때 군인들을 피해 도망다닐 때 관우의 귀신이 씌웠다는 무당을 만난 일화도 있다. 그 무당이 여씨 집안을 관우를 죽인 여몽의 후예라고 저주하는 신탁을 내려서 안 그래도 소론이라 비좁았던 여씨 집안의 등용길이 막혀버렸다고 한다.

참고로 이것은 선무당이 사람 잡은 선례 중 하나. 아니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1,700년전 조상이 한 행동을 1,700년도 더 지난 뒤의 후손에게 따지는 건 뭔 짓거리란 말인가. 이것은 명성황후에 대한 민심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일화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4.9. 여범

연의에서는 손책이 강남을 평정하던 시절에 여범이 잠시 등장하지만 이후로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2대에 걸쳐 손가에 충성하고 여러 공을 세운 인물이지만 연의에서 부각되는 손가의 인물은 군사분야에서는 주유, 노숙, 정치 및 외교분야에서는 장소제갈근 정도. 정사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군을 이끌고 손가의 주요 전투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대사마에 오를 정도로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연의에서 이러한 모습은 거의 묻혔고 문관, 혹은 유비손부인을 맺어준 중매쟁이로서의 이미지가 크게 부각되어 삼국지연의의 피해자가 되었다.

4.10. 우번

정사에서는 투항한 미방이나 우금을 대놓고 멸시하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연의에서는 손책의 강동 정벌 때 왕랑에게 투항을 권고하고[54] 조조의 남정 때에는 손권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등, 전적으로 주군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매국노 같은 이미지다.

4.11. 육손

정사에서는 여몽이 병으로 사망한 뒤 여몽의 뒤를 이어 대도독의 직위를 승계받아 이릉대전에서 유비의 촉나라 군대를 맞아 싸워 이겼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돌로 만든 장병들이 육손의 군대를 계곡으로 유인해서 육손에게 엄청난 혼란을 주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연히 육손은 당황하여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한탄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홀연히 나타나 육손의 군대를 무사히 탈출시키고 육손에게 "제 사위인 제갈량 몰래 당신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절대로 타인에게 이 일을 발설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연의에서도 팔진도 다음 장면에서는 장병들에게 위나라 때문에 철수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팔진도 때문에 겁먹고 철수하면서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좋게 봐줘봐야 팔진도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위나라의 습격도 생각해야 한다는 정도.

이궁지쟁이 언급되지 않아 곱게 죽은 것이 되었는데, 이것을 수혜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사 속 육손의 말로는 오히려 국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임금을 위해 바른 말을 하는 충신으로서의 모습이며 손권이 구국의 영웅이자 명신을 자신의 의견을 거슬렀다 하여 괴롭혀 분사시킨 막장짓을 저지른 것이지 육손 본인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니 육손은 '관우의 죽음에 일조하고 복수를 위해 나선 유비까지 패퇴시킨 (촉한에 감정이입을 하는 독자들로서는) 얄미운 애송이'라는 미움을 끝내 벗지 못했다. 전사 처리된 여러 장수들이 피해자라 보기는 애매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4.12. 잠혼

정사에서는 그냥 간신이었지만 연의에서는 환관, 즉 고자가 되었다. 그러나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고자로 만든 것 외에 이 사람의 행적은 연의와 실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 워낙에 한 짓거리가 있어 동정은 못 받는다. 불쌍하지도 않다. 악행의 대가를 소설에서 그대로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4.13. 장소

손책이 죽기 전에 손권이 능력이 모자르다면 대신 나라를 취하라는 유언과 탁고를 받았지만 적벽대전에서 항복을 주장하다 평가와 정치력이 깍인 신하. 손책에게 고평가 받은 것 때문인지 연의에선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묻고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어라" 라고 나온다, 서주 출신인데 제갈량과의 설전에선 오나라 호족들 중에 하나로 그대관중악의와 같다면 그대의 주군은 왜 패배만 거듭하냐라고 비꼬다가 제갈량에게 말빨로 털려버린다. 손권이 조조와 전쟁을 각오하자 제갈량에게 넘어갔다며 손권에게 반대하고 시상으로 귀환한 주유에게는 항복을 은근슬쩍 강요하는 등 X맨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래도 이릉대전 때는 손권을 진정시켰다. 다만 이릉대전 이후 에서 등지를 사신으로 보내자 "역이기제나라를 설복하려다 튀겨져 죽은 일화를 얘기해 겁을 주십시오."라며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을 한다.[55] 사실 오나라 체계(호족연합)를 생각한다면 조조에게 맞서는건 명분상 어려웠던점이 있었다. 다만 항복을 주장한것과 다르게 오히려 손권이 승리하여 장소는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약해졌으며 나중엔 정사 기준으로 손권이 칭제했을때 장소가 축하하러 오자 손권은 "장공(장소)의 계책을 받아들였으면 나는 지금 거지가 되어 구걸하고 있었겠소"라고 핀잔을 준다. 장소는 황망해 하며 엎드렸다. 연의에서는 이 부분이 없어졌으니 마냥 피해자는 아니긴 하다.

4.14. 제갈근

제갈량의 형이었기 때문에 손해를 본 경우. 연의에서는 촉을 상대로 실속 없는 외교를 하는 사람으로 나오며 '그대가 군사의 형만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다' 같은 소리만 클리셰 급으로 얻어맞는 무능한 이미지가 강해졌다.

하지만 제갈근이 나올 때쯤에는 이미 상황이 개판 5분 전인 상태였다. 형주 반환 문제는 양쪽 다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제갈근과 노숙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가며 외교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릉대전 때는 이미 유비의 꼭지가 돌아가다 못해 뽑혀 있는 상태였으니, 이 전쟁은 제갈근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56] 애초에 한 나라의 2인자를 죽이고 주요거점을 빼앗아가 놓고 외교로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바보짓.

즉 제갈근의 외교 실패는 본인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실패할 게 뻔한 상황임에도 그렇기에 제갈근을 꺼내야 했을 정도로 오나라의 대촉 외교 최후의 조커 카드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제갈근은 한 국가의 외교관으로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하며, 그 동시에 정무에도 뛰어난 문관이자, 동시에 공을 세우기 위하여 적들에게 피해를 많이 입히는 것보다는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훌륭한 무관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적을 만들지 않고 모두에게 온후하게 대하는 훌륭한 정치인이기까지 했다. 비록 동생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이 사람도 엄청난 인물인 것은 확실하며 대장군과 동시에 중요한 요직인 예주목과 좌도호를 겸임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4.15. 주연

주치의 양자로[57], 손권의 학우이며, 문무 겸장에, 대륙의 중심인 형주의 중심인 강릉을 철벽같이 지켜낸 자로서, 문빙(본래 유표의 부하로 유종의 항복 후에 위나라 휘하 장수로서 강하를 30년동안 지켜낸다.)과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수문장 병사들이 대부분 병에 걸려, 싸울 수 있는 자가 5천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황, 장합, 하후상, 조진이 이끄는 위의 대군을 맞이하여 강릉을 6개월간 지켜내 위는 강릉 함락에 실패하지만 연의에서는 이릉에서 패주하는 유비를 추격하다가 유비를 구하러 온 조운에게 사살당했다. 연의에서의 묘사만 보면 뭐 이런 놈이 기라성 같던 대도독 라인에 끼어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릉대전가 일어난 것은 222년인데, 실제 주연이 사망한 연도는 249년이다.[58] 주연은 연의에서 자신을 죽인 조운보다도 20년이나 더 오래 살았는데, 소설적 재미를 위한 조운 띄워주기라고 하기에는 죽은 시기가 너무 이르다. 그래서 오나라의 이궁의 변이라든가, 작피 전투 등 오나라의 합비신성 침공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마도 관우의 죽음과 관련해서 피해를 본 거라고 할 수 있는 케이스.

정사에서는 오나라 최고의 문무겸장 겸 중진 중 한 명으로, 심지어 관직은 좌대사마, 우군사[59]까지 오른다.

반장과 함께 관우를 생포한 공으로 관직을 제수받았고 3대 도독인 여몽이 죽기 전에 자기 후임으로 주연을 추천한 것도 있고 하여[60] 나관중의 미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판본에 따라서는 그냥 조운에게 당해서 쓰러졌다고만 나오지 죽었다고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게다가 아들인 주적도 대도독인데, 아버지가 빨리 죽어서 아예 나오지 않았다.

4.16. 주유

제갈량을 띄워주느라 적벽대전의 공로를 상당수 빼앗겼으며, 캐릭터 자체도 제갈량에게 열폭하는 소인배 이미지가 씌워졌고, 죽음조차도 제갈량으로 인해 죽는 것으로 완전 각색되었다. 모두 실제 정사에는 전혀 없는 내용들이다.

연의에서는 일찍이 손책과 의형제를 맺고 강동제압의 공로자일 적에는 이미지가 좋았지만, 이후 제갈량이 등장하면서 항상 몇 수 뒤지게 설정되었다. 적벽대전에서 10만 개 화살 일화와 바람을 바꾸는 장면 등으로 항상 자신이 뒤지거나 속았다는 사실에 열폭하는 이미지이다. 최후의 순간에도 주유가 유비 대신 촉을 공격할테니 길을 내달라는 핑계로 쳐들어 오는 것을 제갈량은 간단히 파악하고 그를 물러가게 해버렸다. 그 직후 제갈량의 조롱 편지를 받고 旣生瑜何生亮(기생유 하생량), 즉 "이미 주유를 낳았거늘 제갈량을 왜 또 낳았는가"라는 대사를 남기고 죽는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주유는 보다 대형 세력인 오나라의 2인자 자리를 꿰차고 있었으니 "기생유 하생량"하고 한탄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주유 입장에서 제갈량은 그냥 친구 동생이다.

심지어 주유 최대의 공인 적벽대전도 제갈량의 동남풍으로 승리한것으로 묘사되었으며 조인과의 치열한 싸움인 남군 공방전도 제갈량의 계략으로 성을 탈취당해서 피를 토하는 장면으로 각색되었다.

연의에서는 유비를 죽이기위해 온갖 계략을 쓰는 악역 포지션으로 나오지만 정사에서는 관우장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손권에게 건의했다가 거절당한 것이 전부다.[61]

5. 서진

5.1. 사마사

실제 역사에서는 서진의 사실상 시조인데다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부인 하후휘를 권력욕을 위해 죽여버렸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중상모략가였다. 서진의 건국에서 가장 지분이 큰 인물이고 실제로는 동생 사마소보다 리더십이나 정치력이 비교 불가 수준으로 우위인 인물인데 연의에서는 아버지 사마의와 동생 사마소 사이에 껴서 은근 투명한 감이 없지 않아 있고 능력도 동생과 엇비슷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다소 피해를 봤다고 할 만하다. 일단 삼국지 후반부가 전반적으로 관심을 못 받는 시대인데다가 사마소는 배경이야 어쨌든[62] 촉한멸망전을 지도한 인물이기 때문에 촉한 중심의 이야기인 연의에서는 어느 정도 비중이 있어야 한다.

5.2. 문앙

관구검의 난, 제갈탄의 난에서의 활약은 나오지만 또다른 그의 업적인 독발수기능 토벌은 해당 파트 자체가 연의에서 생략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망이 서진의 삼국통일 이후 시점이라 더 이상의 등장 없이 흐지부지 처리되었다.

6. 그 외 세력

6.1. 가비능

정사에서는 상당히 유능한 선비족 수장이었다. 위나라의 대 유목민족 전쟁 성과가 32승 1패 1무였는데, 이 1패 1무가 가비능과의 대결이다. 연의에서는 이름만 언급되고 마는데, 위나라의 요청에 응하여 촉나라 정벌에 나섰지만 마초가 나서자 데꿀멍하며 퇴각한다. 게다가 정체성도 심각하게 오락가락하는데 분명 요서 선비국의 국왕 이라면서 정작 이끄는 건 서강병 이라든가, 아니면 "서번왕", "서강왕"으로 호칭마저도 수시로 변한다. 실제로는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다만 나관중이 살던 당시는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여 한족을 천대시하던 시대였으며 선비족은 그들의 조상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시 정서상 이들을 멋있게 묘사하기엔 큰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6.2. 국의

정사에서는 양주 일대에서 활약한 인물로 한복을 섬기다가 원소를 섬겼다. 공손찬과의 싸움에서 그가 이끄는 기병을 상대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여러 번 승리하는 뛰어난 활약을 했다. 이로 인해 북방의 최강자였던 공손찬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성공했고 기주를 차지한 원소가 북방을 넘어 전 중국의 최강자가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연의에서는 조운의 등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희생양 & 엑스트라. 그나마 공손찬의 장수인 엄강을 격파해서 죽인 것은 묘사되어 있다.

6.3. 독우

실제 정사의 기록을 보면 뇌물을 요구하는 부패한 관리도 아니었다. 자기 업무를 하러 내려왔다가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하는 유비를 거절하여 기분 상하게 만든 것 밖에 잘못이 없다. 게다가 무려 200대를 맞았다는 것을 보면 그 독우는 죽거나 불구가 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독우 구타는 오히려 유비가 애매한 사람에게 행패를 부린 흑역사인데 연의에서는 독우를 부패관리로 왜곡하여 놓았다. 워낙 엑스트라이다 보니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도 조명되지 못하거나 그냥 연의의 설정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실명이 남아 있지 않아 왜곡된 오명으로 이름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6.4. 서영

정사에서는 반동탁 연합군이 손발이 안 맞아 답답해진 조조포신이 독자적으로 동탁을 공격해 오자 요격을 맡아 이들을 격파하고 장막 휘하의 위자와 포신의 아우 포도를 전사시켰다. 이어서 북상하는 손견도 무찔러 쫓아냈으니, 조조와 손견과 싸워서 이긴 셈이다.

연의에서는 조홍의 이벤트를 발생시키기 위한 엑스트라로, 하후돈과 겨루다가 몇 합 만에 죽는다. 게다가 손견을 이긴 것도 정작 정사에서는 그에게 죽은 화웅이 받아갔다.

6.5. 순우경

실제로는 원소, 조조가 소속되어 있던 서원팔교위의 우교위로 발탁되었을 정도로 실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사실 원소의 장수 중에서도 순위권에 있던 인물이었다.[63] 물론 관도대전에서 군량저장소를 지키다[64] 조조군에게 패하긴 했으나, 필사적으로 싸우다 졌으며, 조조도 그에게 자신을 섬길 것을 제안할 정도였다. 물론 순우경은 "내가 진 건 다 하늘의 뜻이다"라며 쿨하게 거절하고 최후를 맞이했다. 애초에 원소도 군량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순우경이라는 믿음직한 심복 장수를 보낸 것이다. 실제로 조조군은 오소 함락이 조금만 더 늦었어도 궤멸당했을 상황으로, 조조군이 죽을 각오로 싸워 겨우 이겨서 원소의 지원 기병대에 대처할 수 있었으며 조금만 늦었어도 협공으로 조조군이 그대로 박살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65]

연의에서는 그저 듣보잡으로 나오며, 관도대전에서 술을 마시고 태만하게 있다가 조조에게 패한 것으로 왜곡되었다. 최후도 꽤나 비참하게 변형되었는데, 정사에선 순우경이 조조의 제안을 거절하자 별 수가 없던 조조가 그를 처형한 것으로 나오나, 연의에선 조조가 그의 코를 베고[66] 원소 진영으로 보내자 빡친 원소가 그를 처형했다고 나온다.[67]

6.6. 유우

능력과 인품을 겸비한 명군의 재목으로, 삼국지 초기 가장 유력한 군웅이었던 공손찬과 대립했고 원소는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고 싶어했다. 동탁 또한 그를 중앙의 고관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난세가 일어났음에도 평시와 다를 바 없는 곡물가를 유지해 정치 및 경제적으로 능력을 입증했고, 공손찬의 악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군을 일으켰을 때에는 겨우 유주 하나 그것도 공손찬 때문에 절반 정도만 거느리고 있었으면서도 무려 10만의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우의 신하들 중 공손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자가 배신해서 공손찬과 내통하는 바람에 공손찬이 기습을 성공시켜 유우가 패망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공손찬이나 원소, 조조와 달리 이민족들에게도 신뢰와 존경을 받아 그가 다스리는 동안 이민족의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공손찬에 의해 유우가 사망한 뒤에는 그의 신하와 군병들이 이민족들과 협력해서 복수를 명분으로 공손찬를 끈질기게 괴롭혀 결국 원소에게 패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68] 연의에서는 공손찬의 비중이 공기에 가깝게 변하면서 공손찬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유우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69]

다만 유우는 공손찬만을 잡고 주위에 피해가 가선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10만 대군이라는 것도 어중이 떠중이들만 모았는지 막상 공손찬의 수백명 무리가 기습하자 그냥 무너지고 만다. 이래서 그의 행동은 군주는 너그럽기만 해서는 안되고 그 너그러움을 잘 이용할 능력도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인용되기도 하였다.

6.7. 원소

실제로는 엄청난 효웅이었으며, 주관 확실하고, 백성들에게 칭송 받고... 연의에서 캐릭터가 완전히 변해버린 인물. 가문빨이라는 인식이 크나 사실은 유복자로 태어난 데다 어머니는 노비였던 얼자 출신.[70]

하지만 이런 출신에도 불구하고 원술을 제치고 원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대단히 능력있는 인물인 동시에, 자부심도 큰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론 동탁에게 옹립된 당시 황실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한다거나, 황실은 명분적인 도구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등 당시 군벌들 사이에서 가장 패도 지향적인 경향을 보였다.[71]

이런 모습은 연의에선 초반 플롯이 정사의 모습과 철저히 다르게 진행되는 바람에 전부 잘려나갔지만, 나관중이 이런 걸 좋게 생각하진 않은 듯. 십상시의 난 무렵부터 은근히 캐붕스럽게 묘사되더니 반동탁 연합 파트쯤 되면 노골적으로 소인배로 전락해서 권위적, 무능, 비겁, 치졸함, 위선, 우유부단함 등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게다가 자신뿐만 아니라 그 부하들과 친자식들마저 대부분 평가가 별로다. 이렇게 총체적으로 한 집단이 폄하된 케이스는 삼국지연의 내에서도 사실상 유일하다.

단 연의에서는 소인배가 된 것과 동시에 그의 패도적인 면도 거의 삭제되어 의외로 인간적으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게 나오는 소소한 이득을 봤다. 이게 어째서 이득이라 할 수 있냐면, 상당수의 원소빠들이 정사의 원소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다가 연의의 내용으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그의 능력에 경탄하는 것과 동시에, 지나치게 무자비하고 냉혹한 인간됨[72]에 충격을 받고 다른 의미에서 원소까로 전향하는 사태도 종종 벌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창작물에서 조조의 이미지로 내세우는 감정을 거의 안 드러내는 냉혹한 카리스마 독재자의 이미지는 오히려 정사의 원소 쪽이 더 가깝다는 평까지 있을 정도.[73]

6.8. 원상

원소만큼이나 큰 피해자. 십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어린 나이와 거의 전무한 경력, 원소의 급사로 상속 싸움에 휘말리긴 했으나 사실 굳이 따지자면 원소의 정통 후계자가 맞다. 원소가 이미 한참 전부터 원담을 폐출시켜 후계 구도에서 제명하고, 원상을 후계자로 할 것을 거의 기정사실화[74]하고 있었기 때문.

심배가 후견인을 맡으면서 후사 계승을 마치긴 했지만 동시에 원담을 필두로 하는 내부에서의 집단 불신임과 조조의 공격이라는 극심한 위기를 맞았음에도 안으로는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밖으로는 조조를 격퇴하는 데 성공하는 등 제법 활약을 한 편이다. 막장 형제들 간의 후계자 싸움이라는 인식과 달리 내전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기도 했으나 원담과 심배의 대립에서 결국은 끝내 심배의 손을 들어 주면서 심배의 폭주를 묵인하는 식으로 이어졌던 것이 실책이라면 실책.[75]

하북을 잃고 오환으로 망명한 이후에도 잔당들의 반란을 사주하고 변경지역을 여러차례 공략해 큰 피해를 주면서, 조조 진영에서 유주와 병주는 곧 확실하게 넘어갈 것이고, 기주, 청주도 시간문제라는 분석이 나오거나 유표는 원상에 비하면 별 위험거리도 못된다고 평가되는 등 극도의 위험인물로 분류되던 정황을 감안한다면, 대내외적 상황이 모조리 개판인 상황에서도 무서운 저력을 보이던 능력 있는 후계자가 맞다.

연의에서는 사환을 일기토로 참살하는 등 무용 면에서는 다소 버프를 받았으나, 원소의 총애를 믿고 원소 생전부터 파벌을 조성해 원담과 대립하고, 조조가 침공해 오자 원소를 대리해 나섰다가 졸렬한 지휘로 참패해 복장이 터진 원소의 쇼크사를 유발하고서는 원소의 유언을 조작해 후계자의 지위를 차지한 뒤 원담을 대놓고 핍박하는 등 패륜아에 가깝게 묘사되었고, 사환을 잡은 것 역시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다가 조조와의 싸움에서 경거망동하여 참패하는 내용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버프로만 보기는 어렵고, 조조를 한 차례 격퇴하는 데 성공했던 전적이 킬마크 하나랑 맞바꿔진 격이기 때문에 손해본 것이나 다름없다. 원담과의 내전 또한 곽도, 신평의 부추김을 받은 원담에게 일방적으로 습격당했던 것이 오히려 먼저 선공을 거는 것으로 나오는 등 전반적으로 원담의 막장도가 희석되는 대신 원담 이상급의 막장으로 묘사되었다.

6.9. 이각, 곽사

흔히 찌질세트로 취급되고 실제로 이각이나 곽사나 정치에 대한 개념이 뇌 속에 전혀 들어있지 않은 듯 찌질행보가 극을 달리지만 군사적 능력만큼은 진퉁이었다. 연의의 영향력으로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많지만 동탁은 그 시기 가장 강력한 군벌이었고 그 휘하 핵심무장은 호위직 전전하던 여포가 아니라 이들이었다. 위치로만 비교하자면 여포는 유비측에서의 조운, 이각과 곽사는 관우와 장비로 비교할 수 있다. 다 떠나서 위치만 비교하면 그렇다.

이각은 원술과 내통하던 주준을 격파한 뒤 형, 예주 일대의 백성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고 곽사는 이각과 싸울 때 수백의 군사로 수만의 적을 무너뜨렸고, 패하긴 했지만 여포와 1:1 대결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맹장으로 일신의 용맹이든 용병술이든 무장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다만 정사상에서도 이들의 무용보다는 패악질에 포커스가 맞추어지기 마련이라 그렇게 티나지는 않는다.

비록 가후의 계책이지만, 여포를 격파해 장안을 장악한 후 장안에 쳐들어온 마등, 한수를 물리쳤고, 마등을 지원한 유언도 패퇴시킨 활약을 하지만, 연의에서 겨우 15살의 꼬맹이 마초에게 겁먹는 모습으로 나와 군사적 능력도 없는 무능한 장군들로 나온다.

미신과 무당을 믿어 가산을 탕진하거나 독에 중독되자 똥물을 먹고 살아나는 등 굴욕적인 에피소드가 추가되기도 한다.

6.10. 장로

한중의 태수.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장로의 업적 중 제일 돋보이는 것은 "의사"라는 빈민 구호 & 여행자 숙박시설을 만들어서 쌀과 고기를 공짜로 먹을 수 있도록 해 준 것인데, 코딱지만 한 한중 땅에서 이렇게 쌀과 고기를 백성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면서도 거대한 익주(유장이 다스릴 때의 촉)와 맞먹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봐서 이 인간도 나름 유능한 지도자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가공의 인물 양송에게 속아 마초와 방덕을 소홀히 대하는 암군으로 그려진다. 마초가 의롭고 충성스러운 인물로 그려지면서 반대로 그런 마초가 버리고 갈 정도의 못난 군주로 그려진 것이다. 다만 그 와중에도 창고를 불태우고 가자는 동생 장위의 간언을 "나라의 것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순 없다"면서 자물쇠만 채우고 도망가는 의외의 모습도 보여주었기에 무작정 못났다고 보기는 힘들다.[76] 그리고 유비와 척을 지게 된 유장이 급하게 동맹을 제안하자 일단 한 번 씹었다가 아쉬운 처지인 유장이 성 몇 개를 덧붙여 다시 제안하게 유도하는 수완도 보여주었다. 오히려 한중의 어그로 담당 양송에게 휘말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오두미도의 교주인 건 맞으나 "쌀도둑놈"[77]이라는 타이틀도 획득했다.[78] 물론 이건 실제 오두미도도 그렇지만 어째 돋보이는 것도 사실. 그리고 단순한 삼국지 군담 팬덤이 아니라 장기적인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 도교 발전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문화사상, 종교사적으로는 사실 오호대장군 오자양장 이딴 거 없이 딱 조비 치하 구품관인법 다음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양반이다.

6.11. 엄씨

여포가 조조의 군량보급로를 끊으려 하자 여포의 처 엄씨는 남편의 출진을 만류한다. 반대한 이유는 진궁은 고순과 불화하니 둘이서 성을 제대로 지켜내기 어려울 것이고, 조조가 진궁을 우리보다 후대해줬는데도 배신한 전적이 있는 만큼, 의리없는 진궁한테 성 전체를 맡기면 안된다는 것. 실제 진궁은 원술의 사주로 학맹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전적이 있는 만큼, 진궁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은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의에서는 학맹과 진궁의 반란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엄씨 부인의 의견은 감정에 치우친 생떼가 되고 말았다.

6.12. 육강

수혜자 항목의 옛 버전에서 손책, 원술을 언급할 때, 육강 토벌이 연의에서 잘렸다고 서술하지만, 실제 모종강본 기준으로 육강 토벌은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이 직접 나온 것은 아니고, 그냥 짧게 언급되는 정도에 그쳤다. 너무 짧게 언급하였기 때문에, 정사를 잘 모르는 사람은 육강이 그저 군벌A 정도인 줄로 안다.

6.13. 포신

연의에선 포신이 조조의 기반을 다지도록 도와줬다는 내용은 조조와 함께 황건적 토벌 시 전사한 것으로 바뀌었고 반동탁연합 당시 공을 세우려고 가공인물인 동생 포충[79]을 죽게 만들었다는 창작이 붙어 버렸다.

그나마 가정본 삼국지연의에서는 "지혜와 꾀가 많고, 문무에 능하다"는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사실 18로 제후들을 소개할 때 누구나 이렇게 거창한 수식어는 받았던 거라 말 그대로 립서비스일 뿐.

유능한 모습이 전혀 묘사되지 않고, 찌질하게 창작된 모습만 나오는 연의의 영향으로 여러 매체에서 찌질하고 무능한 인물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므로 일단 피해자라고 볼 만하다.

실제 정사에서는 정세를 읽는 눈이 밝고 죽자 조조가 슬퍼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였다.

6.14. 한현

연의와 마찬가지로 장사태수인데,정사에서는 유비의 형주 4군 정벌로 항복했다고 나오지만 연의에서는 전형적인 탐관오리로 등장한 데다가 비참하게 끔살당하는 등. 정사의 기록은 얼마 없는데 연의에서는 처참한 대우를 받았다. 같은 편이자 충신인 황충을 디스하다가 위연에게 살해당하는 걸로 최후를 장식. 항복한 것밖에 없는 것치고는 박한 대우다. 황충과 위연의 무용을 띄워주면서 동시에 이리 튈지 저리 튈지 모르는 위연의 반골적 면모를 강조하고, 그를 경계하는 제갈량의 통찰력까지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서 쓰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 그의 묘비명부터가 이미 漢忠臣 韓玄之墓(한충신 한현지묘)라 써 있으나 연의에서는 그의 묘비명과는 완벽하게 정 반대로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유선을 필두로 하는 백하팔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6.15. 헌목황후 조씨

조조의 딸이자 헌제의 계후, 그럼에도 끝내 조위의 공주이기보다 후한의 황후이기를 택한 인물. 조조가 외척에 의한 축출 시도를 여러 번 당하자 스스로 외척이 되어서 적대 세력을 없애고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헌제에게 시집보낸 딸이지만, 정작 그 딸은 마지막까지 헌제와 후한 황실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력 분류도 위나라가 아니라 기타 세력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남편이 선양을 하고 오빠가 옥새를 받아가겠다고 사람들을 보냈을 때, 못 준다고 한참을 버티다가 끝내 강요에 못 이겨 옥새를 내던지면서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라고 울며 저주했다는[80] 기록이 있다. 이후 산양공부인이 되어 남편을 따라가서 남은 평생을 함께 했고, 죽고 나서까지 후한의 황후이기를 택해 그 장례식도 후한의 예법에 따라 치러졌다고 한다. 그런데 나관중은 이 사람을 자기 오빠와 편을 먹고 불쌍한 헌제를 핍박하는 악인으로 그려 놓았다.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으며 이쯤 되면 고인 모독이다.[81]

이를 비판한 것인지, 모종강본에서는 조 황후의 행적에 대한 묘사를 정사의 모습으로 도로 회귀시켜, 헌제에게 선양을 강요하는 조비와 황실이 아닌 조비의 명에 따르는 조씨 가신들을 꾸짖는 지조 있는 인물로 그렸다. 이희재 만화 삼국지에서는 역적질을 돕는 조홍에게 집안 어른이라고 봐주지 않고 삿대질을 하며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82] 그 외에도 대부분의 삼국지연의 미디어 매체에서는 고인모독 수준의 나관중본 묘사보다 실제 역사에도 맞고 드라마틱한 요소도 갖춘 정사와 모종강본의 묘사를 따라간다. '악인의 집안에도 선하고 올곧은 사람이 있어 가문과 대립하며 선을 지키려고 한다'는 구도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6.16. 황건적

백성들이 폭정에 못 이겨 민란을 일으켰으나,연의에서는 만악의 근원 혹은 스토리 초반 몹(?)으로 묘사된다. 물론 나라가 어지럽다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을 살육/약탈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연의의 영향으로 인해 민중들의 봉기가 단순한 도적/초반 악역 및 영웅들의 떡밥급 상대로만 기억된다는 것이다.[83]

황건적의 난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종교집단이 일으킨 민란이자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란 사건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황건지란(黃巾之亂)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나 긍정적으로 평가해 황건기의(黃巾起義)[84]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다만 삼국지연의 등의 영향으로 한국일본에서는 역사 전공자를 제외한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황건적을 단순한 도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삼국지의 주요 군웅들인 유비, 조조, 손견, 원소, 황보숭, 동탁 등이 처음 등장할 때 군공이라고 내민 게 황건적 토벌이기 때문에 만약 황건적을 미화하면 이들은 모두 악당이 되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황건적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을 띄워주기 위해 일개 도적 집단으로 폄훼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황건적의 난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정말로 민중을 위한 혁명이었는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고 현대에는 오히려 민중반란이라는 명목 하에 좀 고평가받는 감도 없지 않아 있다.

이런 시각이 있어서인지 최훈삼국전투기에서 작중 유비의 말을 빌어 명분이 없어져서 결국 도적이나 다를 게 없게 되었다며 은근히 비판하기도 했다. 반면 영국 게임인 토탈 워: 삼국에서는 황건잔당이 유명 군웅들과 대등한 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나오기도 하고, DLC로 황건적의 난을 다루면서 주인공 위치에 올려놓기도 한다.

이와는 별개로 파재등 일부 인물이 나오지 못하고, 장량의 전적이 상당히 안좋게 나왔다.

7. 엑스트라

7.1. 문관 계열

이들 중에서는 많은 책을 집필한 학자들, 또는 군주에게 많은 상소를 한 문관들 등등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한 인물들도 있다. 허나 대부분은 연의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며, 거의 전쟁, 일기토, 전투 중심이기에 묻혀 버렸다.

반대로 생각하면 정사가 문관 중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정사에서는 뛰어난 무장이나 군사가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열전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이 있다. 반면, 뚜렷한 업적 없이 고위직에 올라 현상유지 정도에 성공한 문관도 열전을 받는 등 행정직 관료들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런 현상은 후대로 갈수록, 즉 진수 생전의 시대에 근접할수록 심해지기 때문에 모든 역사서에 있어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 기록을 써서 남기는 당사자들이 문관인지라...

어떻게 보면 간손미가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이 셋은 유비군이 방랑 시절에 (외교적으로) 거의 손발 노릇을 했음을 잊지 말자. 이들 없었으면 유비는 원소나 유표에게 의탁하지도 못했다. 손건은 유비의 외교문제 대부분을 해결해 준 장본인이고 미축은 그 자체가 유비의 돈줄이었다. 일단 유비의 병력을 모집하고 유비의 군수품을 구매하는 등 유비 자체를 먹여살린 게 미축이다.

7.2. 일기토 계열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단 한 번이라도 1:1 대결을 벌이는 무장은 10명도 되지 않는다. 연의에서 벌어지는 숱한 일기토는 어느 한 장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85] 맹장들의 칼밥으로 사라져 간 수많은 엑스트라들도 알고보면 억울한 사람들이라는 얘기. 연의에 나오는 가공인물이라고 하면 대부분 이쪽 계열이다. 실존인물을 일찍 죽여버리면 오류가 생기니까, 허구적 인물을 칼받이로 양산하는 셈.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존인물들이 무사한가 하면 그것도 아닌데 실존인물이라도 정사에서 엑스트라 수준의 비중이라면 역시 끔살당한다. 하후란, 고람, 주찬 등이 좋은 예. 심지어 서황을 비롯한 일부 위나라의 장수들도 이런 역할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서황의 경우 실제론 문추, 마초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운 장수이나 연의에서는 안량, 문추, 마초 등에게 일기토에서 패하고 달아나는 역으로 나온다. 물론 정사라고 해도 서황 같은 장수들이 무예로 이름을 날린 적은 없지만.

하지만 애초에 실존인물을 띄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되었는데 피해자라고 보는 건 지나치다. 적어도 오늘날처럼 실제 역사에 허구의 인물을 끼워넣다가 도가 지나쳐서 실제 역사를 해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나관중이나 모종강은 굉장히 절제를 잘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8. 미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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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항장들

배신자는 죽여도 곱게 죽이지 않는 것이 나관중의 스타일. 거기다 패악질을 견디지 못해 배신해도, 특히 목숨을 구해주거나 이득을 보는 은혜가 있을지라도 주인을 배신했다는 이유 하나로 예외 없이 비참한 최후를 선사하는 배은망덕의 극치를 보여준다. 무장의 경우는 떡밥매치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전사이므로 무장으로서는 명예로운 최후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공을 서두르거나 계략에 말려들어 끔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기 때문에 간지나는 전사와는 경우가 다르다.

항복한 뒤로 정사에서 행적이 좀 묘연하다 싶으면 연의에선 거의 이쪽 루트를 타고 있다. 가상의 인물들도 대거 포진. 살기 위해서는 장합이나 문빙, 그리고 장료처럼 눈부신 공적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기록이 확실히 남으니까. 근데 여기에서 문빙은 어차피 연의 후반에 거의 등장시키지 않았으니 그냥 죽여도 될법한데 왠지 그냥 어정쩡하게 살려뒀다.[86]

단, 조조를 배신하거나 유비에게 편입되는 경우는 OK. 이는 그들이 유비(=한나라)에게 충성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도 없지 않다.

10. 미묘한 경우

10.1. 유비

능력 부분에서 많은 것이 폄하되었다.

정사에서 그려지는 유비는 지용겸비의 효웅이다. 황실의 후손이라지만 사실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현장에서 부딪쳐가며 성장한 인물이었다. 군주로서 뛰어난 판단력과 카리스마를 갖추고 있었고, 인재를 보는 안목도 뛰어났으며[93] 전투에서도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정사의 유비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이라고 할 정도로 유파에게 집착하여 유파를 어떻게든 데려오기 위해 혼자 동분서주했는데 유파에게 내정을 맡기자 촉한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된 것,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제갈량의 삼고초려, 양의의 직위해제[94] 등은 유비의 인재선발능력이 발군임을 입증해준다.

연의에서는 이런 모습 대신 인자하고 온화한 군자상의 인물로 묘사된다. 개인적인 전공은 모두 다른 인물들의 공(특히 제갈량)으로 돌려지고[95] 자신은 그저 큰 덕으로 백성과 부하들을 보듬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정사에서는 유비 자신이 직접 인재를 배치해서 전쟁에서는 승리를, 내정에서는 풍요로운 재정상태를 추구했음에도 연의에서는 그저 제갈량에게 의존하는 모습만 보였다. 스스로 독우를 매질하던 모습은 연의에서는 장비가 떠맡았다. (유비는 되레 말린다.) 걸핏하면 눈물을 보이는 우유부단함을 보이는 등 다른 군웅들의 호쾌한 모습과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나관중의 작중 의도, 조조와의 대립구도 등을 살펴본다면 연의가 단순히 유비를 깎아내리고 있지만은 않다.

먼저 연의에서 재탄생된 유비의 '무위의 치'로서의 캐릭터는 한고제 시절부터 중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아온 친숙한 영웅상이다. 이런 인물상은 당시 군주들의 행동원리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으로, 유비는 이를 취함으로써 여느 군웅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의를 저버린 세상에 있어 단 하나 남은 이상적인 군주가 되는 것이다. 촉을 먹기를 염려한 것은 유장이 종친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난세에서 살아남은 것이 조조와 반대의 행동을 했기 때문임을 알기에 조조와 똑같은 짓을 하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해서다.

실제로 유비는 어진 정치를 폈기에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그가 구축한 집단도 이상하리만치 끈끈한 유대로 묶여 있었다. 실제로 적군의 처자를 인질로 잡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데리고 함께 피난가거나 서주를 구원하러 갈 때 난민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또한 도둑질이 성행할 때 재물을 풀어 도둑질을 막는 걸 보면 호족들에게 비추어진 모습은 어떨진 몰라도 백성들에겐 좋은 사람으로 여겨진 듯하다.[96]

그러나 정사에서는 인의를 강조했으되 강단있는 효웅의 모습인 반면 연의에서는 지나치게 인의만을 따르는 유약한 모습으로 묘사된 만큼 정사에서의 유비의 행적과 결합되는 부분에서는 이중성이 느껴지게 된다. 이는 여포의 유언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정사에서야 여포의 일방적인 배신이자 뒷치기 수작질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연의에서는 여포의 배신의 원인이 모두 유비측에 있기 때문에 진짜 원흉은 유비라고 볼수도 있으며 이유야 어찌됐든 배신한 여포가 잘못이라 쳐도 여포가 먼저 배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여포를 용서하고 화해해서 오히려 여포를 감복시켜 서로 친하게 지내다가 뒤통수를 치는 식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이상햔 모습이 됐다.

차라리 여포의 배신 때문에 계속 사이가 안 좋았다면 단순히 여포 탓이라고 하면 그만이었겠지만, 대인배스럽게 여포를 용서하는 묘사가 나오는 바람에 그런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은 여포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음흉한 수작이라고 해석할 여지를 만든 것. 게다가 그렇게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서 화해한 후 원술이 유비를 공격했을 때 여포가 기령과 유비를 불러 놓고 창의 가지를 화살로 쏘아서 유비를 구원하는 유명한 장면까지 나왔고, 그러다 유비가 다시 여포와 싸우게 된 것도 1차적으론 장비가 여포의 말을 도둑질한게 원인이고 2차적으론 조조가 유비에게 여포를 공격하자고 포섭했을 때 유비가 동의한 서신이 여포 손에 들어갔기 때문인 것으로 나오니 결과적으로 유비가 대인배스러운 척 연기해서 여포를 속이고 이용해 먹다가 뒤통수를 치려던 수작이 들통난 형국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여포가 사로잡혔을 때 조조에게 여포를 죽여야 한다고 권하기까지 한 셈이라...게다가 여포가 총 3번 유비를 배신했는데 첫번째는 장비가 여포의 장인어른인 조표에게 술강요를 하고 매질을 한것과 두번째는 장비가 여포의 말을 훔친것 세번째는 여포를 뒤치기 하자는 조조에게 동의한 서신이 진궁에게 발각된거라 이정도면 여포가 아니라 당대에 인의군자로 이름난 유우라 해도 화를 안낼수 없는 지경이라 여포가 공격할 명분을 유비가 줘놓고선 저자를 믿으면 안되니 죽이라고 권한 유비가 이상한놈이 되어 버린것.

사실 여포의 유언 부분은 정사에서는 이중성과는 관련이 없는 장면이다. 다시 말해 정사에서는 전부 여포탓이라 문제가 없는데 연의에서 유비의 성격을 뜯어고쳐버리고 여포에게 명분을 만들어 주다보니 결과적으론 음흉한 캐릭터가 되어버린 것.

그 외에도 백성에게 인기가 높은 모습도 별로 나타나지 않았고, 말과 행동이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정사에서 유비가 참수한 인물 외에 다른 인물들을 참수하는 경우도 많다. 연의에서 유비는 말년에 거의 살인광 수준으로 참수를 일삼았는데 대표적으로 부사인, 미방, 유봉 등을 참수했다.[97] 하지만 이중에 실제로 죽은 건 유봉이 전부이며, 유봉은 형주 문제 및 후계구도 등의 이유로 제갈량이 유비에게 권해 자결을 명한 것. 그리고 미방과 사인은 죽기는 커녕 오나라에서 잘먹고 잘 살다가 천수를 모두 다 누렸다.

여하간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능력 부분을 약화시키고 인의를 강조시킨 것이 "우유부단 찐따"로, 찌질하게만 보이는 역작용이 되었으며, 이렇게 능력치를 희생시켜 가면서 부여한 인의 이미지는 후세에 와서는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되어 오히려 음흉한 위선자라는 인상만 남기게 되었다. "유비의 후덕함을 나타내려 하였으나 오히려 위선자처럼 되었다." 는 루쉰의 평가가 좋은 예시.

당대의 다른 소설들도 연의의 유비와 비슷한 유형을 가진 주인공이 많다. 송강, 삼장법사 등이 그러한데 부하들의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 주인공 캐릭터가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드라마 삼국의 경우, 유비의 캐릭터를 재조명하자 관우, 장비의 캐릭터가 묻혀 버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부분으로 인해 어느 정도 피해를 본 부분도 있는 반면 수혜를 입은 부분도 분명히 존재하는지라 삼국지연의/수혜자 항목에도 유비가 들어가 있을 정도이다. 물론 그 쪽에서도 애매한 경우에 들어가지만.

10.2. 장비

삼국지평화와 그 이전의 민담 등에 따르면 지혜롭고 용맹한 최고의 장군이었지만 연의에 와서는 인덕의 유비와 충성스럽고 근엄한 관우에 맞춰서 캐릭터를 만들어야 했고, 당시 관우의 인기가 상당했기 때문에 성질 급하고 포악하게 변해서 종종 사고를 친다.

일단 병사들을 혹독하게 대한 것은 정사에도 나오니 완전한 날조는 아니다. 정사의 기록은 이렇다.
관우는 병사들에게는 잘 대해 주었지만 사대부들에게는 오만하였고, 장비는 군자는 아끼고 존경했지만 소인은 보살피지 않았다. 유비는 항상 이것을 경계하여 말했다.

“그대는 형벌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치고, 또 매일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그들을 측근에 임용하고 있으니, 이것은 화를 초래하는 길이오.”

그러나 장비는 깨우치지 못했다.

하지만 정사의 장비는 적어도 능력이 있거나 명망있는 이에게는 존경심을 표했으며, 이렇다 할 사고, 특히 술 먹고 사고 친 기록은 없다. 아니, 술을 좋아했다는 기록 자체가 그 어디에도 없다. 정사에서 독우를 구타한 건 유비이며,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긴 것은 장비의 실책이라기보단 서주의 유력인사였던 조표(를 포함한 서주내 반 유비세력)가 여포와 연합한 탓이었다. 또한 병사들을 혹독하게 대한 것도 더 과장되었기 때문에, 나관중본에서는 장판에서 장비를 따라간 병사가 적은 건 '맞아 죽을까봐' 라고까지 적혀 있을 정도이다.

군자는 존중했으나 소인은 경멸했다는 것을 보면, 오히려 연의에서의 관우의 성격이 실제 장비의 성격처럼 보인다.[98][99] 상급자나 강자에게 굴하지 않고 약자에게는 너그러웠던 관우는 오히려 연의 장비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100][101] 엘리트 의식 내지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냉혈한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장판파 전투에서도 삼국지평화에선 조조를 내쫓고 다리를 끊은 것을 유비가 칭찬하는 데 비해 연의에서는 머리가 나쁘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 장면은 정사에는 조조의 병사들이 장비를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유비가 화를 면했다고만 나온다. 연의에서 장비가 다리를 끊은 것 때문에 유비군이 낭패를 보게 되는 것은 삼국지평화뿐만 아니라 정사보다도 너프된 셈이다.

유비가 익주를 정복할 때도 장비는 엄안을 사로잡았고 한중공방전에서도 장합을 격파하는 등 절대 바보라는 말을 들을 장수는 아니다.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호걸 장비가 일만 터트리는 이미지가 된 건 연의의 영향이 크다. 다만 삼국지평화에선 지나치게 강한 감이 있긴 했다.

그러나 장비는 연의에서도 절대 무식한 장수가 아니다! 난폭하고 급한 성격으로 나오는 바람에 언뜻 보면 무식한 장수로 묘사됐다고 알기 쉽지만, 연의 작중에서는 장비가 머리쓰는 장면(!)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유대를 잡은 것도, 엄안을 잡은 것도, 장합을 털어버린 것도 장비의 지략에 의해 달성된 것으로 묘사된다.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소패에서의 조조 기습작전과 장판파에서의 허장성세 또한 장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들이 실패한 건 그저 상대가 이런 면에서 훨씬 더 뛰어났던 조조였기 때문이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전략이었다. 제갈량도 장비가 지략을 쓸 줄 아는 것을 유비에게 경하드린다고 하기까지 한다.

다만 연의에서의 장비의 이미지는 역시 지적인 모습이 아닌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치거나 성질이 급하고 생각없이 움직이는 모습이다. 또한 장비가 머리를 쓴 장면을 묘사할 때마다 유비나 제갈량 등이 장비가 머리를 쓴다고 놀라거나 기뻐하는 식으로, 장비가 '평소에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연의에서 심어놓은 장비의 이미지가 워낙에 강렬해서인지, 2차 창작물에서는 장비가 머리쓰는 모습은 거의 반영되지 않고 선입견마냥 무식쟁이 고주망태 망나니로만 나온다.[102] 특히나 코에이가 연의를 기반으로 만든 삼국지 시리즈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장비는 성미 급하고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인물 이미지를 만드는 것에 크게 기여했다.

참고로 서화에 능했다는 설은 근거가 없으므로 낭설에 불과하다.

10.3. 허저, 전위

자잘한 일기토 여럿을 추가하여 용력을 강조한 것 같기도 하지만, 연의는 원래 일기토에 있어서 상향평준화된 작품이며, 무조건 일기토가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예컨대 관우도 일기토 장면이 많이 추가되었지만, 무력에 있어서의 위상은 오히려 정사보다 떨어졌다는 평가가 있다. 허저와 전위 역시 비슷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데, 정사에서 허저를 보고 조조 암살을 포기했던 마초가 연의에서는 허저와 호각으로 싸운다. 여포가 연의에서 하후돈, 하후연, 악진, 이전, 허저, 전위와 한꺼번에 맞서 싸운 것을 보면, 허저와 전위 둘 다 무력 측면에서 정사보다 낮게 평가된다.[103]

이렇게 무력에서의 버프가 의심스러운데, 성격 면에서는 피해를 입었는지 애매한 측면이 있다. 한중 전투에서 허저는 자신의 용력을 믿고 술을 거나하게 먹었다가 취중에 장비에게 당하는 장면이 있는데,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군량 수송에 실패하는 큰 잘못을 저지른다. 장비가 아군의 군량을 노린다는 첩보가 이미 들어온데다 자기가 자진해서 군량 수송의 임무를 맡아놓고서도 방심하다가 패배하고 군량을 다 뺏겨버리는, 후술하는 전위의 술 먹다가 호위에 실패한 일 못지 않은 엄청난 실책이다. 정작 정사에서 진수는 허저의 성격이 신중하다고 평가했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호치라는 별명을 보면 허저가 모자란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뒤를 가리지 않는 저돌적인 성격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조인의 사적 대화를 거절한 것을 보면 꽤나 사리에 밝고 언변에도 간결하지만 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신 허저가 처음 조조군에 들어오는 장면에서는 좀 더 띄워준 부분이 있다. 조조군이 황건적의 잔당과 싸웠을 때, 하의라고 하는 황건적의 총대장이 나와, 조조에게 단판 승부를 도전해오는 장면이 있다. 조조는 전위에게 명령하여, 하의를 붙잡는 것을 행하도록 하였다. 그때 허저가 나타나 하의를 붙잡아 데리고 가려고 했다. 전위는 허저를 뒤쫓아 하의를 내놓으라면서 맞대결을 벌였지만 박빙으로 싸우게 되었다. 이 허저의 용맹을 들은 조조는 "그 정도의 사내를 죽이는 것은 아깝다."라고 생각하여, 부하들에게 올가미를 놓게 하고 붙들어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그 뒤 전위가 허저와 싸우고 있는 곳에서 신호를 받아 전위는 일부러 달아났다. 허저는 전위를 쫓아갔지만, 도중에 허저는 덫에 걸려 조조의 아래로 끌려갔다. 조조는 다른 적장과 같은 취급을 받는 허저를 보면서 "누가 이런 대접을 하라고 했나."라고 말하며 곧 줄을 풀어주어 허저에게 사과를 하고, 부하가 되는 것을 권유하였다. 허저는 자신을 부하로 삼아준다면 기꺼이 맡아 모신다고 하였다. 연의에서의 케미 때문인지 흔히 전위와 허저가 같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사에서 그들이 서로 만난 적은 없다. 사실 이 장면은 어떤 측면에서는 허저를 정사보다 더 높이 평가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조조군이 여포와 싸울 때 여포와 일기토를 벌여 20합을 버티기도 하였다. 여남에서는 조운과 50합을 싸운다. 서황, 방덕과도 50합을 싸웠으며 이외에 하후연이 정공법으로 잡지 못한 양임을 양앙과 함께 2vs1 상황에서 털어버렸고 한당과 주태를 한꺼번에 상대하면서도 안 밀리고 30합을 버텼다. 마초와 조조의 회담 중 조조를 호위하던 허저는 마초를 노려보는 것도 모자라 "내가 바로 초군의 허저다! 무슨 일로 날 찾느냐!"라고 외쳤다. 거기에 눌린 마초가 진영으로 돌아갔으며, 양군 모두 "마초도 허저만은 두려워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는 정사에도 나오는 장면이며, 허저가 이런 측면에서는 약간의 수혜를 입지 않았을까 싶다.

전위 역시 마찬가지인데, 연의에서 술 먹고 취해서 무기까지 잃어버렸단 건 군주의 호위무장으로서 실격이다.[104] 전사의 비장함에 묻히지만, 분명 주군을 위험에 빠뜨리고 주군의 아들과 조카가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도 좋은 평가를 듣기 힘들다. 요새로 치면 북한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방북을 했는데 대통령 경호실장이란 사람이 북한 보위부에서 주는 술에 계속 받아먹다가 취해서 자신의 무기까지 보위부원에게 맡기고 추태를 부리다가 대통령이 죽을 뻔 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건 무예가 뛰어나고 뭐고 그냥 자격 미달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반면 전위가 바람에 흔들려 떨어진 깃발을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도 세우지 못하던 것을 혼자서 한 손으로 세워 뛰어난 힘을 보이자 조조가 그를 옛날의 악래에 비유하며 감탄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떤 측면에서는 수혜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정사에서 전위가 악래에 비유된 적은 없고, 허저를 번쾌에 비유한 것과 같은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연의 한정으로 전위의 이름을 '악래'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더욱이 복양 전투에서 조조가 탈출하려다 불타는 기둥에 깔려 기절하자 그를 구해내는 것은 정사에서는 누이가 하지만 연의에서는 전위가 한다. 또한 부하에게 '적들이 다가오면 나한테 알려라' 하는 장면은 판본에 따라 엄청나게 뻥튀기되기도 한다. 앞으로 돌진하느라 뒤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기에 부하에게 뒤를 맡겼는데, 부하가 열 보 다섯 보라고 알려줄 때마다 단검을 뿌려서 전부 헤드샷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연의에서 조조가 장수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병사 및 장수들을 위한 위령제를 허도에서 시작하는데 거기서 자기를 바쳐서 아버지를 살린 자신의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을 잃은 것보다 전위를 잃은 것이 더 슬프다고 말한다. 정사에서는 하지 않은 말이다.

결국 종합해 보면, 허저와 전위 둘 다 수혜를 입은 측면도 있고 피해를 입은 측면도 있어서 확연하게 피해자라고 보기엔 상당히 애매하다.

10.4. 방통

연의에서는 외모가 추하다는 설정이 붙었고 뿐만 아니라 죽음 역시 경솔하게 나오는데 공명이 점괘를 보고 조심하라는 유비한테 충고했지만 공명에 대한 경쟁 심리와 공명이 한 충고를 자신에 대한 시기나 질투로 혼자 오해해서 무리하게 유비를 설득해서 전투에 참가하다가 장임의 복병때문에 죽는 한심한 최후를 맞게 된다.[105] 그 대신에 연환계를 성공시켜서 연합군이 조조군을 이기는데 중요한 공을 세우는 버프를 받았고 업무를 보지 않아 쌓인 업무를 반나절만에 처리해서 장비를 놀라게 하고 유비한테 직접 능력을 보여 중용되는 수혜를 입었다.

10.5. 위연

제갈량의 X맨, 내부의 적이라는 이미지. 유래가 없는 "반골의 상"에서부터 제갈량의 수명연장기도를 방해한 점까지, 연의에서는 시종일관 한결같이 제갈량을 태클하는 인물로 기술되어 있는데다가 제갈량도 이런 위연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연의만 읽은 사람들 중에는 위연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사를 살펴보면 꼭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수혜를 더 받았다고 될 정도이다.

일단 군공 면에서는 수혜와 피해를 동시에 입었다. 제갈량의 공적들이 연의에서 많이 구체화되고 포장되면서, 그 일선에 선봉을 많이 섰던 위연 역시 그 덕을 많이 보았기에, 전장에서의 업적 면에서는 실제 정사에서보다 많은 수혜를 입었다. 하지만 왕평처럼 관흥, 장포 같은 2세대 장수들이 활개치고 다니다 보니 위연이 연의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줄어들면서 손해를 보았다. 또한 위연은 북벌시에 양계에서 곽회를 격파하고 노성 전투에서 활약하는 등 위군을 상대로 승승장구를 했는데 연의에서는 중간에 진식과 함께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멋대로 나서다 사고치는 장면을 넣어 군공에 흠집을 내기도 했다.

위연이 일방적으로 수혜를 얻은 건 바로 성격 관련이다. 정사의 위연은 그 막장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주변인물들과의 관계가 최악에 가까웠으나 연의에서는 대부분 제갈량과의 갈등만이 부각된다. 제갈량 이외의 인물과의 관계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묘사되는 편이다. 한중 정벌 당시엔 황충보다 앞서나가려는 과욕을 잠깐 보여주었지만 그 황충이 자신을 구하러 온 뒤엔 분발하여 적장을 사로잡아 그 실수를 만회했다.[106] 또한 남만 정벌 당시엔 제갈량에게 조운과 함께 '용맹하긴 한데 지리를 몰라 못 쓰겠다'는 소리를 듣자 굴욕으로 합심하여 현지인을 잡아 길잡이로 사용하거나, 목록대왕을 보자 첫인상[107]을 주고받는 등 현장직(?)으로서의 의리가 묘사되었다.

더구나 제갈량이 위연을 갈구는 것도 '반골의 상'이라는,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기 때문에 연의의 위연은 괜히 미움받는 불쌍한 이미지가 되어버렸다.[108] 정사에서의 실제 성격은 교만해서 모든 사람들이 위연을 피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위연 최고의 단점이었던 이러한 면이 연의에서 희석된 것은 분명한 수혜이다. 연의 내에서도 제갈량이 그러한 성정(물론 연의이니만큼 성격이 아닌 배신)을 알면서도 인재 부족과 위연의 용맹이 아까운 점이 겹쳤기에 쓰고 있다는 말이 분명히 몇 번 언급된다.[109] 반면 정사에서는 제갈량은 공인 왕따 1호 위연을 어떻게든 감싸주면서 공인 왕따 2호와 사이가 나쁜 걸 안타깝게 여겨 제발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일렀지만 이 둘은 들어먹지 않다가 결국 제갈량 사후 서로에게 칼을 겨누며 사실상 순차적으로 공멸했다.

그리고 반역의 의도는 없다 하더라도 제갈량의 군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건 명백한 사실이고, 정사에 따르면 왕평의 사자후 한 방에 군사가 흩어져 버려 맨몸으로 한중으로 도주했다가 듣보잡인 마대[110]에게 추격을 당해 맞이해 버린 최후는 원술의 꿀물 드립이 무색할 정도의 찌질한 죽음. 오히려 (함정이긴 했지만) "누가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라고 패기있게 외치다가 죽는 모습이 멋있을 정도다. 반골의 상 드립은 위연의 죽음을 포장하기 위한 재료이자 기나긴 떡밥이라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10.6. 조조

유비의 활약이 적은 초반부를 장식하는 1부 주인공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허자장으로부터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인물평을 들으며 껄껄 웃는다든가[111] 동탁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달아나 반동탁연합군을 주도하며[112]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자 다른 군웅들을 질타하고 자신의 군세만으로 동탁을 추격한다. 실제 형양 변수 전투는 보통 교전. 사방에 적을 둔 연주에서 일어나 사방에서 몰려오는 여포, 원술, 유표, 장수, 원소 등 당대의 쟁쟁한 군웅들과 사력을 다한 혈전을 벌인다. 이각, 곽사로부터 핍박받는 천자를 구해내고 허도에 새로운 조정을 새우는 등 사직을 받들며 나라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동탁 암살 등의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어느 정도 보정을 받기도 했다. 방통을 처음부터 높이 평가하고 매우 정중하게 대접한 유일한 군주이기도 하며, 관우를 휘하에 두고 벌어졌던 에피소드에서는 대인배급의 폭풍간지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종 보스인 원소를 쓰러뜨리면서 상당한 포지션 변화가 생긴다. 유비가 형주에서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주인공 자리를 가져가는 데다가 조조 스스로도 천자를 홀대하고 외척들을 숙청하는 등 본격적인 악행을 시작해 페이크 주인공 겸 최종보스에 등극해 버린다.(그나마도 사마의의 등장으로 사실상 페이크 최종보스로 끝난 셈이지만) 실제로 연의에 등장하는 조조의 악행은 이 때를 전후하여 폭발하듯 늘어난다. 술김에 유복을 죽인다든가, 복황후를 죽이고, 마등을 속여 죽이고[113], 그를 고발한 묘택도 배신자라고 죽인다. 공융은 불효했다고 죽이고[114] 양수닭갈비 알아챘다고 죽인다. 양수 같은 경우는 조조의 셋째인 조식의 지지자였다. 멀쩡한 장남 놔두고 삼남을 지지한 것만으로도 이미 양수는 조조 눈밖에 난 상황에서 마침 자기 묫자리를 자기 입으로 판다.

아무튼 막 죽인다. 원래는 원소가 최종보스였는데 조조는 그 원소를 쓰러뜨리고 자신이 최종보스가 되어버렸다.

이와 함께 전장에서도 추태를 보이기 시작하여 적벽, 위수에서 비참한 몰골로 생사를 넘나들더니 결국 생애 마지막 군사행동인 한중 공방전에서 유비에게 패배한다. 한중에서의 패전은 유비의 수성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퇴각한 정도였으나, 연의에서는 이를 한층 과장하여 위연[115]의 화살을 맞아 이가 부러지는 등 수모를 당했다. 더불어 군사적으로도 참패한 것으로 바뀌었다. 근데 군사적으로 참패할 뻔한 것은 정사에서도 언급된다.

그래도 기실 연의는 기존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조조에게 상당히 우호적이다. 조조의 악역화는 연의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위에 언급된 인물들중 유복과 가공 인물인 묘택을 제외하면 정사에서도 전부 조조가 죽였으며 연의는 오히려 조조가 죽인 사람의 수를 대폭 축소시켰다. 연의는 조조의 위치를 어느 정도 복권시켜 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조의 평가가 이미 부정적이 되어 있었고 나관중과 당대 중국인들의 이상향과는 멀었으므로 연의 초반에 언급된 대로 간웅의 모습이 되었다. 즉 연의에서도 악역은 맞지만, 일방적으로 나쁘고 찌질하기만 한 악역이 아니라 나름 포스 있고 입체적인 악역으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조조의 가장 큰 악행인 민간인과 포로학살 부분은 대부분 간접적으로 언급되지 대부분 연의에서는 묻힌다.

이에 대해 이나미 리츠코는 그녀의 저서 "삼국지 깊이 읽기"에서 삼국지연의의 다원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비 대 조조라는 한실부흥의 구도로 보면 조조는 악역이지만 관우를 중심으로 본다면 조조는 준 선역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상으로도 조조가 관우를 대접했다는 얘기가 있고 이는 연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충의 깊은 관우라는 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선 충성의 대상 유비 외에도 그의 충성을 뒤흔들만한 누군가가 필요했고 조조가 그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조는 명분상으론 악역이지만 주역인 관우와의 관계로는 제 2의 영웅이 되는 묘한 위치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이나미 리츠코는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폄훼된 것은 손권의 오라고 주장한다. 조조와 위는 관우에게 잘해주었기에 그나마 반쪽이라도 영웅적인 면이 돋보일 수 있었지만 손권의 오는 관우를 죽였기 때문.

10.7. 종회

가정본이나 모종강 판본에서 종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정사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종회에 대해 불리한 서술이 좀 있다. 제갈량의 제사를 지낸 것은[116] 제갈량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제갈량의 혼령이 큰 바람을 일으키고 고스트(?) 병사들을 지휘하여 종회군을 공격[117]하게 하는 이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며, 등애를 모함한 내용은 정사에도 있지만, 연의에서는 단순한 야심이 아닌, 등애가 큰 공을 세운 것에 대한 질투였으므로 좀 더 찌질하게 보인다. 반란 내내 강유의 꼬드김에 휘둘리는 터무니없이 호구스러운 모습까지 보여주지만 놀랍게도 이것은 실제로도 그랬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대신 혜강에게 누명을 씌워 죽인 일은 연의에서 삭제되었으므로 확실한 버프라고 볼 수 있겠다. 또 정사나 연의나 종회가 등애를 축출하게 된 꼴이 된 건 맞지만 사실상 등애는 위관에게 잡혔다고 할 수 있는데 위관의 활약이 빠져버리고 종회 단독으로 일을 한 것마냥 되어 있다. 이 부분은 확실히 버프라고 할 수 있는데 연의에서도 강유의 꾐으로 성도에서 난리가 일어나고 세 장수(강유 자신, 등애, 종회)가 죽었다는 식의 기술이 있는데 거의 철저하게 강유에게 농락당한 듯한 기술이라 이 부분은 종회에게 우호적인 서술만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종회의 캐릭터는 정사나 연의나 비슷한 편이다. 연의에는 안 나오지만 그는 죽림칠현의 필두이자 당시 현학의 권위자였던 명사 혜강과 친교를 쌓고자 온갖 짓을 하다가 일을 그르치자 혜강을 와룡이라고 하여 죽였으며[118] 위나라 최고의 공신 중 한 명인 허저의 아들인 허의를 함부로 참수했다.[119] 또 자신과 함께 싸운 위장들을 가두어 놓고 정작 주변에서 죽이라고 할 땐[120] 망설인다. 때문에 종회는 부하들에게 원한을 산 상태였으며 강유는 하필이면 이런 종회와 손잡는 바람에 끔살당하고 말았다. 강유와 종회가 패하자마자 끔살당한 대목에서 휘하 병력들이 종회에 대해 얼마나 불만이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애시당초 사마소에게 잘 붙어먹으면서 권력을 휘둘렸던 인간이 하루 아침에 사마소의 전횡을 비판하며 반역을 하는데 대체 누가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겠는가. 반란씩이나 되는 큰일을 도모하는데 정작 명분이 없는 게 문제였다. 그런 주제에 타이밍이 좋은 것도 아니고 상술했듯이 부하들한테 민심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모만은 확실히 비상하여 제갈탄의 난을 진압한 사마소가 '날이 갈수록 종회를 더욱 후하게 대접하고 중요시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자방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종회전에 있다. 그래서 나무위키에 갈모형제의 예에 종육과 종회가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종육은 머리는 종회보다 못할 지 몰라도 반란을 일으키면 선대의 공과 무관하게 3대가 몰살당하는 게 당연시되던 그 때에도 본인의 공으로 자식들이 용서를 받고 이전 직위를 유지할 정도로 인품면에서 비교도 안 되게 좋았으며 동생의 야망을 꿰뚫어보고 지속적으로 간언을 한 걸 보면 머리도 결코 나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연의 때문에 종회와 종육의 인지도 차이가 압도적으로 갈리면서 종육이 종회보다 못하다는 평가까지 받게 된 것.

강유가 종회와 손을 잡은 것도 대체적으로 연의와 정사가 비슷한 편이다. 강유가 종회와 손을 잡은 것은 사실상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성도 및 전 촉 지역이 점령당하고 촉장들은 군권을 잃어버리고 유선도 위군의 수중에 넘어간 상황에서 강유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포기하고 조용히 여생을 마치든가, 아니면 빠른 시일 내에 위나라 세력을 이용해 내분을 일으켜 촉의 부활을 시도하는 도박뿐이었다. 시간을 오래 끌 수도 없었다. 오래 끌면 국력이 넘사벽인 위 정부에 의해 촉 영토 전체가 완전히 통제되고[121] 유선을 비롯한 황족들은 위로 갈테니까. 실제로 성도 반란 이후 촉의 구신들과 황족들은 낙양으로 끌려가고 남아있던 촉장들은 진나라 장수로서 서촉을 다스리는 처지가 된다.

결국 강유는 도박을 선택했고, 이런 강유와 함께 도박에 뛰어들어 위군에서 내분을 일으켜 줄 만한 사람은 종회밖에 없었다. 종회가 아니라면 등애나 위관 급은 되어야 일을 꾸며볼 만했을 텐데, 등애나 위관이 강유와 편먹고 반란을 일으킬 리 있겠는가. 실제로 강유는 종회를 만나자 마자 그의 야심을 꿰뚫어보고 종회를 꾀어 반란을 일으키도록 교묘하게 설득하고 위장들을 다 죽이라고 종용하고 군권을 다시 자신의 손에 들어가게 만드는 등 종회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오죽했으면 배송지가 '종회는 위장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강유에게 대군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자 하였다. 만약 위장들이 모두 죽고 병사가 강유의 손에 주어졌다면 종회를 죽이고 촉을 회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라고까지 평가했을 정도로 종회는 강유에게 빠져 있었는데 이쯤되면 연의에서도, 정사에서도 종회가 강유에게 이용당한 뉘앙스가 강해진다.

10.8. 미방

관우 사망 사건의 희생자 중 하나. 연의에서는 유비가 분노하여 쳐들어오자 다시 투항했지만 용서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반면, 정사에서는 오나라로 투항한 후 이릉전투 이후에도 살아 있었다. 참고로 우번하고 사이가 나빴다.[122] 역시 계한보신찬에서 사인, 반준, 학보와 함께 마구 씹혔다. 그리고 삼국지대전에선 사인과 함께 등장하며 찌질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근데 문제는 연의에서는 항복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항복하기라도 했지 정사에선 사적인 감정으로 적한테 투항한 것은 까여도 마땅한 데다가 자기가 잘못한 걸로 처벌받을까 봐 두려워서 적과 대놓고 내통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을 믿고 남군 태수를 맡긴 주군과 친형까지 배신했다. 오히려 정사의 행적으로 보면 더 문제가 많은 인물이다.

10.9. 초주

정사에서는 정치적, 학문적으로도 실적을 쌓았으며, 시류와 현실에도 어둡지 않은 유능한 인물로 나왔으며, 제갈량의 북벌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갈량이 죽었을 때 먼저 달려간 사람은 초주였다. 물론 마지막 순간에 항복을 주장했지만 이는 무조건 항복이 아니었으며, 협상을 통해 유선의 안위문제 및 성도의 치안문제 등을 해결하였다. 항복하자는 행동도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초주를 매국노라 욕하는 건 너무 심한 평가다. 정치적 스탠스 자체가 연의의 십자포화를 맞기 딱 좋은 위치여서, 연의에서는 그저 제갈량 북벌 반대론자에 항복주의자로 나왔다. 게다가 첫 등장 장면이 유장에게 항복을 권하는 것이었는데 유비가 익주를 접수할 당시 초주는 아직 어린이일 뿐이었다.

다만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라 시종일관 부정적인 발언을 하고 틈만 나면 "항복해야", "전쟁은 하지 말아야","우리 군주 이름이 재수가 없으니 망할 것 같네요"라고 도참론에 빠져서 주장했던 것은 역사적으로도 사실이다. 위나라가 공격해 오기 전에도 이미 왜 반역죄로 처벌받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의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으며 천명은 위나라에 있다거나, 유비의 이름자인 '비'는 준비한다는 뜻이고 유선의 이름자인 '선'은 바친다는 뜻이니 촉나라는 위나라에 바쳐질 운명이라는 등등. 이 때문인지 초주의 제자들 가운데 필두로 취급받은 나헌이나 진수 같은 사람은 촉한 조정에서 중용을 받지 못했고 촉내에서 그를 존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며 진지의 협조 하에 지은 구국론을 사람들이 살펴보려 함이 없었다(人莫察焉)거나 하는 기록들이 나온다.

거기에 촉한 멸망 이후 당대 인사들이나 후대의 역사가들이 강유나 염우, 곽익, 나헌의 군대가 오고 있었고 그 근왕군을 가지고 싸울 수 있었는데 왜 항복했냐의 문제에 따라 유선과 초주의 처지를 비판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판단은 알아서 할 것. 또한 정사의 저자인 진수의 스승인 만큼 정사에서의 묘사를 참고할 때도 어느 정도 필터링이 필요하다.

10.10. 하후돈

역시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다.

원래 정사에서 묘사되는 하후돈의 모습은 후방 경영에 탁월한 목민관이며, 인격적으로 매우 완성되어 있는 덕장의 모습을 보인다. 허나 싸움에는 연전연패하는 등 장수로서의 기량은 농담으로도 뛰어나다고는 말하기 힘들 정도. 그 머리 나쁘기로 소문난 여포의 계략 같지도 않은 계략에 빠져 포로로 잡혔다.[123]

반면 연의에서는 조조의 상장으로 관우와 비슷한 용맹을 가진 장수로 등장한다. 관우와 일기토를 떠서 비기는 위엄을 뽐내는 정도. 대신 연의에서 하후돈의 인품은 조조의 명으로 복황후를 죽이는데 앞장 서고, 후에 복황후의 유령을 보고 죽는 등 결코 좋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물론 자신이 아끼던 진기가 관우에게 베이자 복수하러 관우를 공격하는 장면이나 유비에게 패하여 스스로 몸을 묶고 처벌을 바라는 장면 등도 들어있어 일방적인 악한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으나, 실제 정사에서의 하후돈의 모습을 볼 때, 인품에 있어서는 확실한 페널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덤으로 양수의 계륵에 농락당해 같이 철수를 준비하려다가 조조에게 까이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양수의 목을 베어버렸으니 거기 동조한 하후돈도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거짓으로나마 같이 목을 베라고 하고 당연히 주변 사람들이 말리자 조조도 물론 하후돈을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꾸짖어 쫓아낸다.

계륵 사건이 있긴 했지만 연의에서도 조조가 최후까지 믿었던 심복은 하후돈이었는지 죽기 직전에 제일 먼저 하후돈부터 불러 뒤를 부탁하려고 하나 상술한 복황후의 유령에 홀리는 바람에 병에 걸려서 조조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조조가 죽은 후 얼마 안 가 그도 죽으면서 함께 퇴장한다.

연의에서 조조가 주역→악역으로 변하는 과정을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

나관중에게는 외눈에다가 대장군까지 오른 그가 인상이 강한 적의 심복으로 가장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관련 2차 창작에서는 연의의 용장 이미지를 바탕으로 성격 면에서 정사를 참고한다. 창천항로가 이런 시도의 대표적인 시초이고,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도 최신 시리즈로 넘어오면서 이런 면모가 조금씩 뒤섞이며,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용맹한 장수이면서도 부하들을 아끼는 덕장이라는 완전체 무장으로 평가가 상승한다.

10.11. 황보숭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는 정사와 크게 다를 게 없기 때문에 일방적인 피해자라 부르기 애매하지만, 문제는 삼국지연의가 편찬되고 나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크게 떨어진 것. 당송 대에는 왕실에서 무성왕 태공망의 묘에 제사를 지낼 때 상을 만들어 무성왕 옆에 세울 명장들을 뽑았는데, 여기에 늦게라도 항상 뽑히곤 하는 인물이 황보숭이다. 특히 총 70여 명의 명장들을 뽑았고, 이 중 삼국시대의 인물이 10명 + 분야가 다른 제갈량이었는데, 이 11명 중 유일하게 위/촉/오 소속이 아닌 인물이 바로 황보숭이다. 제갈량 외에 삼국시대 출신의 장수들의 명단은 관우, 장비, 여몽, 육손, 육항, 주유, 장료, 등애, 양호, 황보숭이었다. 그러던 것이 원나라 이후 연의가 편찬되면서 극초반 시기의 인물이라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묻혀버렸다. 심지어 동탁이 황건적에게 연패하자 대신 부임했는데 때마침 장각이 병사해서 공을 거저먹은 운 좋은 놈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10.12. 진등

정사에서는 능력과 인품 모두 흠잡을 곳이 없는 훌륭한 인사로 등장한다. 연의에서도 상당히 유능한 배역으로 등장하지만, 초반부에 유비를 도와주는 조연으로 격하된 편. 게다가 정사에서는 단순히 여포와 진등이 서로를 믿지 않았고 이후 진등이 조조와 내응해서 여포를 토벌하는 정도로 나오지만, 연의에서는 적극적으로 여포의 충신인 진궁 등을 모함하고 잘못된 계책을 펼치는 등 간신 짓을 일부러 행하여서 여포를 파멸시키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나마 연의에서는 이것이 모두 선역인 유비를 진심으로 흠모하고 그를 도와주기 위한 방편으로 등장하고 이후 조조에게 항복한 것도 유비를 배신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힘에 눌린 것으로 등장한다. 즉 연의에서는 진등을 '선역이지만 유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간계를 부린 인재'로 묘사한다. 하지만 아무리 유비를 위해서라지만 온갖 간교를 꾸미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만은 않아서 이후의 2차 창작물에서는 아예 사악한 소인배로 재해석해버리는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이문열은 그가 섬긴 상관들을 줄줄이 열거하면서 맹달보다도 더한 변신의 명수라고 표현했다.

10.13. 왕윤

후한 최후의 충신으로 역적 동탁를 주살하지만 동탁의 부하들을 용서하지 않다가 이에 분노한 동탁의 부하 이각에게 죽은 인물. 연의에서는 양녀인 초선을 통해 동탁과 여포를 이간시켜 여포가 왕윤과 협력하게 만들어 동탁를 주살하는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여성인 초선을 이용했다는 것 때문에 이기적이고 간교한 인물로 해석이 되어서 주로 현대에서 후한의 충신이라면서 동탁만큼 더러운 일 했다고 까인다. 하지만 정작 정사에서는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간통하다가 동탁에게 미움받아 왕윤의 편이 된 것으로서, 왕윤이 여자를 이용한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다. 물론 정사든 연의든 동탁과 여포는 여자 때문에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하튼 연의 때문에 창천항로신삼국에서 간신으로 왜곡당하기도 하고 몇몇은 아예 후한을 망쳤다는 악의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 다만 오늘날에는 동탁을 죽인 저의가 순수하지 않았다는 등의 해석도 꽤 보이는 편이다.

10.14. 하후연

정사에서는 조조의 친척 장수 4인방인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중 조인과 더불어 군의 상장 노릇을 제대로 수행해 주었다. 그러면서 관도대전, 창희 토벌, 서화 토벌, 뇌서 토벌, 상요 토벌, 관중 평정, 장로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다.

연의에서는 난폭하며 지모가 모자란 장수로 묘사되었는대 정사에서도 하후연은 조조가 백지장군이라 불릴 정도로 지모가 모자란 장수라고 했다.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가 '하후연은 성급하니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라는 누군가의 참소를 듣고 글을 써서 하후연에게 보내었다. 글에는 "경의 '기묘한 재주'를 보고자 하니, 신중하게 전투하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저 기묘한 재주를 한자로 쓰면 묘재(妙才), 즉 하후연의 자다. 오히려 이 글이 기폭제가 되어 하후연이 더 날뛰었다. 다만 몇몇 판본에선 이 글을 보고 나름대로 느낀 게 있었는지 계략을 짜서 황충의 부하 장수 진식을 사로잡기도 한다.

황충과의 일기토에선 접전을 이루면서 황충을 물러나게 하는 등 촉의 명장들과 일기토를 했을 때 꿀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앞서 장합장비한테 내리 깨지고 온 것 때문에 장합의 충고를 무시하고 패기있게 기마병 몇 기와 진군했지만 황충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

연의에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조조가 관로의 점괘를 듣는 장면이 있는데, 관로는 '삼팔종횡(三八縱橫) 황저우호(黃猪遇虎) 정군지남(定軍之南) 상절일고(傷切一股)'라는 정체불명의 시를 한 수 써 준다. 이는 그냥 해석하면 '3과 8이 종횡하면 누른 돼지(하후연)가 호랑이(황충)를 만나 정군산 남쪽에서 다리 하나가 부러진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3과 8을 곱하면 24, 즉 건안 24년이 되고 누른 돼지는 돼지해인 기해년, 호랑이는 범의 달인 정월을 의미하니 하후연이 죽는 시기까지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정사의 한중 공방전때 전투 중에 몸소 목책을 수리하다가 황충에게 기습받아 죽었고 애초에 하후연은 지모보단 선공을 중시한 단순한 편이다. 오히려 정사에 비해 연의에서 초반에 많이 등장한다. 정사에서는 첫 출전이 창희전이란 것을 감안해도 수혜라고 하나 딱히 비중이 없다.

황충과 비견된 명궁 실력이 있지만 그것도 서황에게 밀린다.

요약하자면 수혜을 받은 것도 있지만 딱히 수혜나 피해를 본 것은 아니다고 할수 있다.


[1] 정사는 서진 때 편찬됐으니 조위정통론, 까놓고 말해서 위진정통론 입장으로 작성할 수밖에 없다. 위를 띄워줘야 위에게서 선양받았음을 주장하는 서진도 자연스럽게 그 이상 띄워진다.[2] 단순히 그뿐만은 아니고 나관중이 살았던 시절에는 위진정통론보다는 촉한정통론이 대세였기 때문이기도 했다.[3] 창천항로 영향으로 무패장군이 진짜라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적벽대전과 조비의 오나라 정벌 때 종군하였기에 최소한 두 번은 패전했다. 본인이 총대장이었을 때 졌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는 건 맞다.[4] 정확히는 적벽에서 패배한 조조와 그 부하들을 모두 놓아보냈는데 그 중에 서황이 있었다.[5] 실제 사망 원인은 노환이며 사망 시기도 이미 사마의가 맹달을 치러 가기 이전이다.[6] 관우의 복수를 위해 나섰다가 전사한 황충, 사망한 뒤 까마귀들이 그 시체를 지켰다는 감녕 등.[7] 합비 성 공략에서 장료에게 계책을 역이용당해서 전사한 태사자, 서성의 활약으로 위기에 몰린 조비를 구하기 위해 화살에 맞은 장료 등.[8] 이 부분에서 서황의 죽음에 대하여 모종강도 관평의 복수라고 볼 수 있다는 협평을 남겼다. 위에서 서황의 능력을 인정하긴 했지만 이런식으로 관우 부자를 몰아붙인 건 꽤나 얄미웠을 듯. 그런데 지휘관급 장수들이 교전 중 눈 먼 화살에 허무하게 죽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어 왔기에 어떤 면에서는 현실적인 최후이기도 하다.[9] 교전중이라고 하는데 교전중도 아니었다. 사마의가 맹달에게 조롱하는 식으로 성밖에서 말을 하니 그 조롱을 듣고 빡친 맹달 그냥 쏜 화살이었다. 난전중에 교전이라면 현실적이라고도 하겠지만 멀쩡히 서있다가 맹달이 막 쏜 화살에 맞은거니 이건 그냥 싫어서 죽인 게 더 맞아보인다.[10] 곽가는 이 때 직접적으로 수몰을 제안하지 않았고, 순유와 뜻을 같이하면서 하비성 공세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진언한 바는 있다.[11] 조조의 위왕 즉위 연도가 216년, 순유의 몰년이 214년.[12] 정사에 따르면 왕랑과 진군 등은 제갈량에게 "천하의 평안을 위해 에 귀순하는 게 어떠냐."는 편지를 보내지만 제갈량은 끝내 답변하지 않고 단지 "정의(正議, 옳은 것을 논함)"라는 글을 지어 반박을 한다. 이것은 제갈량의 문집인 <제갈량집>을 통해 전해진다. 이렇게 보면 제갈량 입장에서는 적절하게 병먹금을 한 셈이지만 팬 입장에서 왕랑은 한마디로 '괘씸한 놈'이 되었다.[13] 동오의 덕왕을 돕다가 손책에게 털렸다. 이때 우번이 왕랑의 수하에 있다가 손책 편으로 건너갔다.[14] 기세 좋게 "우리 군사(위군)가 대단하니, 너네(촉군)들은 항복하는 것이 하늘의 순리여."라고 선빵을 날렸는데, 제갈량은 이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맞섰다. 즉 "그건 상관없고, 넌 하는 짓이 왜 그러냐?"라며 왕랑의 일생을 꾸짖어서(한나라 시절에 효렴(추천을 받아 관직 임명)이 되고도 왜 역적 조조를 섬겼나는 식), 왕랑이 할 말을 잃고 화병으로 사망했다.[15] 다만, 종요가 사형제를 반대했을 때(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시대를 앞선 것이다.) 이것을 까서(즉 반대) 사형제를 그대로 유지하게 한 적이 있다. 근데 이게 그럴만도 한 게, 그 대신에 종요가 제안한 형벌이 발뒤꿈치를 자르게 하는 것이었다.[16] 서진에서 일족이 영화를 누린 만큼 별로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연의에서의 모습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손녀는 사마소의 아내이기도 한 왕원희인데, 왕원희 개인은 지혜로웠지만 남편인 사마소가 촉 멸망에 많은 역할을 한 인물이고, 왕원희와 사마소 사이에서 태어난 사마염은 개노답. 시아버지 사마의는 단순히 제갈량의 숙적 차원을 넘어 사변을 일으켜 권신이 되고, 공손연 토벌 때 15세 이상 남자 7천명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해골을 쌓아 전승 기념비까지 만드는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후손조차도 훗날 이를 알고 진이 이래서 오래 못 간 거라고 탄식했을 정도다.) 왕숙은 학식이 대단한 경학자였지만 경전을 위조한 적이 있고, 사치의 대명사인 왕개는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돈을 잘못 두고 손녀를 제외한 못난 자식들 몫까지 덤터기를 쓴 거나 마찬가지다. 다만, 왕랑 자신이 한실의 신료 타령을 할 때는 언제고 한실을 빼앗은 위의 신하로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갔다며 나관중에게 트집잡힐 구석이 있기도 했다.[17] 화살에 맞은 상태에서도 기어이 반란이 일어난 사실을 고한다. 정사에서도 화살에 맞은 상태였음에도 직접 진압했으니 고증에는 어느 정도 맞는 셈.[18] 다만 삼국전투기에서 처음부터 이통을 정사대로 그렸다. 최후씬이 병사면 멋 없으니 정사와 연의를 반쯤 섞는 식으로 채용한 것뿐.[19] 실제로는 조인의 부장이었다고 한다.[20] 방덕은 나름대로 준비를 했으나 역부족이어서 동형&동초를 죽이고 성하를 격려하며 끝까지 버티다 주창에게 잡힌다.[21] 물론 황권도 나중에 '유장 휘하에서 충성 운운할 땐 언제고 유비 휘하에선 항복질이냐'라며 사람들에게 까였다.[22] 아까 와우관에서 장비와 싸울 때와 마찬가지로 사마의가 말렸는데 장합이 어거지를 부려서 나갔다가 죽은 것으로 해 놨다.[23] 상기했듯, 적벽대전의 대패배 후 남은 병력 조금+불안하기 짝이 없는 형주+전무한 외부 지원을 토대로, 한창 기세가 등등했던 주유를 상대로 1년여를 홀로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훗날 관우상대로 한 승리에서도 알 수 있듯, 수성장으로서 조인의 가치는 위장 중 최고라 할 만하다. 성 안에 있는 군사들과 백성들 모두가 합심해서 싸워야 수성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정치가로서 무능하거나 평판을 잃으면 백성들이 지휘관을 따라주지 않으니 수비할 수가 없다. 즉 수성은 전투능력뿐 아니라 행정/정치능력까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이기에 더욱 부각되는 면.[24] 말년에 주환을 상대로 대패하긴 하나, 조인 본대는 한 차례 이겨 추격하던 중 뒤따르던 휘하 장수들이 격파된 것이었다.[25] 팔문금쇄진을 쳤는데 서서한테 깨져서 발렸다고 나온다. 이것도 모자라서 이전의 충고를 씹고 야습(야간 습격)을 감행했다가 패배, 번성까지 빼앗기고 만다.[26] 그러나 하후돈의 행보를 보면, 그는 선봉장보다 군정(軍政)에 더 탁월했다. 게다가 하후돈이 큰 전쟁에서 자주 맡았던 직책 중 하나였던 후방 군량보급은 매우 중요한 요직 중 하나이다. 즉, 충분한 공을 세운 군인이다. 다만 그 무대가 전장이 아니었을 뿐이다.[27] 1차 북벌에서 조진을 처음 상대할 때 제갈량이 야습 명령을 내리자 조진도 병법을 잘 아는 놈이라 방비가 있을 거라며 위연이 이의를 제기했다.[28] 이는 약간 정사에 이들이 기록이 부실한 점이 한몫했다. 미축은 동생 미방 때문에 스스로 죽었고.[29] 연의에서도 주유가 적벽대전 당시 조조가 보낸 사신을 죽인다거나, 한수가 조조에게서 회유 편지를 받자 사신을 죽이는 등 사신을 죽이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다고는 해도 안 죽으면 다행인 게 사신의 입지였다.[30] 동생 미방도 이때 팽성상으로 같이 천거되었다.[31] 미씨가 해양세력이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팽성과 영군은 내륙 지방으로 미씨 권력의 근원인 바다로부터 떨어트려 놓는 일이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록과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32] 물론 마충이 뛰어난 인물이긴 했지만.[33] 譎兵, 기만술에 의한 군사행동.[34] 정사에서는 그다지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연의에서는 손권이 유비의 화를 달래기 위해 관우의 원수인 미방과 사인을 넘기는 것으로 나온다.[35] 조운의 차남이다.[36] 왕예나 장자를 죽인 것은 나관중이 극렬하게 손견을 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면 이야기 흐름상 넣고, 비난하기까지 할 부분이 아니다. 18로 제후가 그냥 한 번에 다 모였는데 뭐하러 손견의 여행길만 따로 조명해주는가. 그리고 반동탁연합군이 지들끼리 싸운 건 대단한 것도 아니기도 하고.[37] 표현이 그렇지 사실 제갈량&주유 모두에게 까이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제갈량은 "제가 알고 있단 얘기, 주유에겐 하지 말라"라고 부탁했을 뿐. 대신에 눈 앞에서 제갈량의 행동을 보고도 계책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식으로 화자인 나관중에게 까인다. 또한 주유 사후 도독에 임명된 뒤로는 묘사가 부족해 딱히 뭘 하는지도 알 수 없다.[38] 김홍신, 이문열 평역판에서는 제갈량이 처음 제시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천하삼분지계" 역시 노숙을 비롯한 당대 선비들 사이에 이미 오고가던 가설이라고 얘기하고 있다.[39] 하지만 오가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형주보다 오히려 합비가 더 중요했고 또 관우의 뒤통수를 쳤을 때가 가장 합비를 먹기에 좋을 시점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40]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주유가 노숙에게 임관을 권고하러 갔을 때, 노숙의 집이 "거대한 농장 안에 있었다"라고 나온다. 주유가 노숙을 소개할 때 "제가 수군을 거느리는 동안 군량이 없을 때 선선히 창고를 열어서 가져가게 했습니다."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는 나중에 주유가 노숙을 까댈 때 "(전략)내가 예전에 위급할 때 공(노숙)이 나에게 군량을 준 일은 잊을 수가 없소."라고 화를 자제하는 모습에서 재등장.[41] 또 적벽대전 시발점에서 조조가 동오에 항복을 권고할때 대부분 문관들은 항복에 찬성했고 노숙만이 유일하게 손권을 위해서 반대한 점은 나오기도 한다.[42] 문맥을 보면 단순히 매복, 수성전 정도가 아니라 전체 지상전을 뜻한다.[43] 정확히는 반장의 부하인 마충이 관우를 포획.[44] 참고로 그 민가집에는 관우의 초상화가 있었는데, 집주인이 관흥에게 말하기를 관우를 흠모하여 영정을 모시고 있다고 하였다.[45] 거기다가 시신은 민가의 주인이 그냥 불태워 흔적을 없애 버린다.[46] 그리고 관흥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음은 물론 청룡도도 되찾았다.[47] 반장은 실제로 강한 물욕으로 금전에 집착했고, 신분에 맞지 않는 복장을 좋아하며(반장이 오나라의 맹장으로 고위 벼슬아치였음을 감안하면, 신분에 맞지 않는 복색이란 곧 왕의 그것과 비견될만한 것이었으리라 추정된다.), 자신의 밑에 있는 부유한 관리나 병사를 살해해 재산을 몰수하는 등 요즘 시대로 치면 범죄자라고 까여도 진짜 할 말 없는 불법 행위를 자주 일으켰다.[48] 손권은 실제로 반장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의 인간성이 최악이었기 때문에 반장을 우장군에 임명한 뒤로 진급을 일절 시키지 않았다.[49] 특히 적벽대전에서 항복하자고 하고, 육손을 천거하는 감택을 비난하는 등 손권 진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역으로 나온다.[50] 김홍신 평역판의 경우 안쓰러웠는지 괄목상대의 일화를 추가했다. 단, 본인 입으로 얘기하진 못했고 남의 입을 통해 "그랬다더라"는 식으로만 언급된다.[51] 그러나 여몽은 형주 공략 당시 투병 중이었다. 병상에서 육손에게 조언했을진 몰라도 형주 공략의 아이디어를 육손에게 돌리는 건 무리가 아니라는 시각도 엄연히 있다.[52] 임진록에서는 만력제조선에서 원군을 청하러 온 사신을 내쫓고 잠을 자다 보니, 꿈에 관우가 나타나서 만력제에게 말하길 "황제 폐하께서는 저의 형님이신 유비가 환생한 것이며, 조선의 임금 선조장비가 환생한 것이옵니다. 그러니 형제의 의로써 도와주십시오"하고 사라졌다는 서술이 나온다.[53] 이 부분은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에도 전혀 없이 인터넷에서만 퍼져 있는 루머라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중국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의 문화유산을 훼손했다는 죄로 UN의 배상 권고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54] 정사에서는 그냥 피하라고 권고했을 뿐, 투항하라고는 하지 않았다.[55] 역이기가 튀겨죽은 것운 역이기의 문제가 아니라 제나라의 항복을 받아냈음에도 한신괴철의 꼬임에 넘어가 무방비인 제나라를 공격했던게 문제였다. 항복했음에도 공격받아 화가 난 제나라 왕 전광이 역이기가 자신을 속였다며 튀겨죽인 것.(역이기는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다.) 인과관계를 봐도 역이기의 잘못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당대에 이름 날릴 만큼 비범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았다.[56] 사실 나라끼리 전쟁할때는 사신을 죽이는건 일도 아니다. 특히나 오나라라면 치를 떨었던 유비군에게는 당연. 오히려 제갈근이라 살수 있었지 다른 사람이 갔다면 백프로 참수 당했을 것이다.[57] 주치의 여동생의 아들이였으나, 후사가 없던 주치가 그가 13세 때 손책에게 건의해 양자로 맞이했다. 원래 이름은 시연.[58] 향년 68세. 그가 죽자, 손권이 여몽과 능통 다음으로 슬퍼했다 한다. 직접 상복을 입고 장례식을 거행했다.[59] 좌대사마=대사마. 오나라는 대사마가 좌, 우 두개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대사마는 최고등급인 1품관.[60] 주연 대신 도독이 된 게 바로 육손. 대신 주연은 나중에 좌대사마까지 승급한다.[61] 실제로 정사에서는 실제로 유비의 허락을 받아 장비에게 2천의 병사를 주어 나름 자신의 말로써 써먹은 적이 있다.[62] 왜냐면 실제 이유가 조모 시해 사건으로 떨어진 명분과 지지율을 끌어올려서 제위를 찬탈할 목적이였기 때문이다.[63] 저수, 곽도와 같은 지위였다.[64] 심지어 조조군이 화공으로 기습한 상황이었다. 설령 조조군을 물리친다고 해도 군량이 불에 타면 진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아무리 순우경의 군사가 적군보다 수가 많아도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순우경군은 적군을 죽여야 하지만 조조군은 그냥 적군을 무시하고 군량에 불만 지피면 그만이니. 이러면 순우경 쪽은 불을 끄기 위해 군사를 분할해야 했음으로 오히려 이 상황에서 조조군과 오래 싸운 순우경의 지휘 능력이 돋보인다.[65] 사실 이건 순우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원소가 어설프게 잔머리를 굴린 것이 문제였다. 이 때 원소는 그냥 오소에 구원군을 보냈어야 했는데 위위구조의 고사를 흉내낸답시고 조조의 본진에 꼴아박았다가 죽도 밥도 안되었던 것. 위위구조 고사는 당연히 상황 자체가 달랐으니 그때는 유효한 계책이었어도 지금은 아니었기 때문에(당시에는 조나라가 시간만 끌어주기만 하면 되었고 또 설령 조나라가 시간을 못 끌어 패배한다고 해도 본국에 피해가 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할 만한 계책이었지만 이 때는 자기 군량을 걸고 모험을 한 것이다.) 실패했던 것.[66] 김홍신, 이문열 평역판에서는 코뿐만 아니라 코, 귀, 열 손가락이 잘렸다고 한다.[67]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술 한 잔만 줘요라는 말이 순우경의 유언으로 나온다.[68]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원소보다 공손찬이 훨씬 더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계교 전투에서 원소가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기 전까지 원소는 반격은 커녕 공손찬의 포위망에 갇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만 있었다. 이러한 공손찬 세력의 강성함은 연의에서도 그 흔적이 드러나는데, 도겸이 조조의 공세에 노출되어 각지로 사자를 보냈을 때, 그를 돕기 위해 움직인 군대는 유비뿐만이 아니라 공손찬의 원군도 함께였으며, 군병은 공손찬의 군병이 훨씬 더 많았다. 사실 이 때 유비는 독립적인 군벌이 아니라 공손찬의 수하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본거지가 유주에 있는 공손찬이 원소의 본거지인 기주를 관통해 청주를 지나 서주까지 원군을 보낼 정도였으니 그 세력이 얼마나 강성했었는지 알 수 있다.[69] 애시당초 유비가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벗어난 것도, 조운이 형의 장례를 위해 낙향하는 것도 실은 유우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때 유비는 서주에 가 있다가 유우가 죽은 이후 공손찬에게 복귀하지 않고 눌러앉았고 조운이 형의 장례를 핑계로 낙향한 것도 비슷한 시점이다.[70] 진짜 가문빨은 사실 원술 쪽이다.[71] 하지만 실제로 원가의 지지는 원술이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원소는 동탁에 의해 원가가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고만 있다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었다.[72] 예를 들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십상시의 난 당시 원소는 십상시를 숙청하기 위해 특정 지역의 무고한 백성들을 대량학살하고 이걸 흑산적의 소행으로 조작해 당시 영제와 십상시가 추진하던 흑산적 유화정책을 탄핵한 전적이 있다. 이런 미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인들에게 매장당하지 않은 것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포장술의 달인이였는지 알수있다. 그 밖에 자신과 인연이 거의 없었던 양부모 2명의 삼년상을 연속으로 지내 스스로를 효자로 포장하면서도, 조정(특히 동탁)의 어그로를 끌어 자신의 친족이 몰살당함에도 도리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다.[73] 사실 조조는 서주대학살과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것 때문에 냉혹하고 잔인하단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정사에 따르면 희노애락이 얼굴에 드러내는 굉장히 감정표현이 다양한 인물이었다. 사실 서주대학살도 냉혈적인 판단보다는 오히려 분노에 눈이 뒤집혀 판단력을 상실한 것, 즉 열혈적인 성향에 가깝고. 반면 원소가 감정표현을 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을 정도. 또한 관도대전 이후에도 조조보다 월등히 강한 세력을 자랑할 정도로 강력했던 원소 진영이 그가 죽고 나서 급격히 무너진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막강한 카리스마와 압도적인 능력, 철저히 계산적인 행보를 보이는 정치괴물이자 죽기전까지 중원 최강자였던 인물이다.[74] 원담이 폐출된 이상 원희가 장남이 되는데, 원희의 행적과 평가로 볼때는 후계를 노리기에 능력이든 야심이든 한참 모자랐던 것으로 보이며, 폐출되지 않은 것 또한 애초에 위험거리로 인식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원희는 원상을 지지할 뿐 후계 욕심을 내지 않았고, 원담과 원상이 싸울 때도 홀로 유주에서 중립만 지키고 있었다.[75] 이조차도 심배는 원담의 처우에 대해 원상이 지나치게 물러터졌다고 깠다. 원상 입장에서 권위가 거의 전무한 자신의 최대 지지자이자 실질적인 섭정격이 심배였음을 생각하면 사실상 딜레마에 가까운 상황.[76] 조조도 한중을 손에 넣은 뒤에 이 부분을 극찬했다.[77] 교리를 배우기 위해선 쌀 다섯 말(그래서 오두(五斗)이다)을 바쳐야 했다. 오두미도 항목 참고.[78] 사실 이건 번역한 뒤의 어감 문제도 있다. 그냥 쌀도둑이라 하면 쌀을 훔치는 도둑놈 이미지이지만 중문 원문인 미적은 그러한 뉘앙스가 없다. 애초에 미적이라는 단어는 고유명사에 가깝기 때문에 쌀도둑이라는 의역은 적절하지 않다. 황건적을 노랑 머리수건 도둑이라고 번역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79] 다만 포신의 동생 포도가 전사했는데 여기서 따온 인물로 보인다.[80] 왕망이 찬탈을 시도하자 옥새를 숨기고 버티다가 끝내 강요를 이길 수 없자 옥새를 집어던지며 호통을 쳤다는 효원황후 왕씨의 일화를 생각나게 한다. 헌목황후의 말은 결과적으로 적중하여, 황후 본인의 생전에 이미 위나라 황후황제사마씨 권신에게 살해 및 폐위를 당하고 그 뒤를 이은 황제는 아예 백주대낮에 권신 일파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등, 조위 사직은 후한 말 이상으로 비참한 꼴들을 겪으며 망조가 단단히 들고 말았다. 이 기도 안 차는 꼴들을 모두 살아서 본 헌목황후는, 황제 시해 사건이 일어난 당해이자 자신의 고종 조카 조환이 꼭두각시 황제로 즉위한 해인 260년에 사망했으며, 불과 5년 후 조위도 후한과 똑같은 방식으로 멸망하였다.[81] 추측하기론 나관중은 소설가이지 역사가가 아닌 만큼, 헌목황후의 행적을 정확히 모른 채 그냥 "조조 네 딸래미니까 자기 친정이랑 한 패였겠지, 뭐."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저술했을 수도 있다.[82] 그러나 조홍은 "왜 이래, 삼촌한테~" 하며 황후의 말을 능글맞게 무시하고, 황후가 울면서 들어간 뒤에는 부보랑 조필을 불러내 옥새를 내놓을 것을 강요하고 조필이 반발하자 당장 목을 쳐버린다.[83] 그래도 황건적의 우두머리인 장각에게는 단순한 포교 활동으로는 세상을 구제하기엔 역부족이라 거병했다는 설정을 붙었다.[84] 중국 수나라 말기에 이연이세민 등이 태원 지방에서 봉기한 것도 '태원기의(太原起義)'라고 한다.[85] 이는 삼국시대를 무대로 한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꾼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진법이나 전략보단 이해하기 쉬운 일대일 결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다보니 일기토가 많아진 영향도 있다. 원나블vs놀이와 같은 맥락.[86]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채모 일당처럼 조조에게 적극적으로 충성한 건 아닌데다 무장으로서 적절한 선을 지켰다. 그래서 나관중 기준으로 배신자로 간주되진 않은 듯.[87] 디만 정사에서 기록마다 다른데 장비에게 죽었다고 나오고 성문만 열었다고 서술되었다.[88] 정작 같이 항복한 후성은 재등장하지 않는다.[89] 실제론 나름 항복을 반대하기도 했고 끔살당하지도 않았다. 근데 이 인간은 정사에서도 그다지 안 좋은 놈으로 나온다. 실제로 조조가 천자에게 표문을 올려 그를 칭찬했을 정도라지만... 이건 그냥 띄워주는 말일 뿐이다. 아니, 애초에 "자식 낳으려면 손견처럼 낳아야지. 유표 아들 놈들은 개돼지 수준이야." 라고 조조가 직접 말했는데 더 말이 필요한가? 거기다가 연의에서는 유기와 친한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이가 안 좋았고(유기가 형주를 계승 못 한 것도 유종과 채모가 힘합쳐서 저지른 걸로 보인다.) 나중엔 아예 연을 끊고 서로를 원수라고 생각할 정도니... 연의의 최후는 나관중이 이런 유종의 모습을 까려고 그렇게 묘사한 듯하다.[90] 암살 계획을 알려 조조를 구해준 진경동도 서적마다 다르게 나오지만 주인을 배신했다고 처형당해 조조의 배은망덕함을 보여줬다.[91] "관우의 사망에 얽힌 자들(여몽, 반준, 미방, 부사인, 반장, 마충)은 모두 죽었는데, 이 둘까지 그냥 죽이게 하면 사건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라는 좌우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92] 정확히는 제갈량이 받아들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동다나&아회남보다는 맹획이 우선순위였기에 그랬던 것으로 추정된다.[93] 대표적인 예가 마속. 이건 연의에도 언급되었다.[94] 양의는 위연 사후 자신이 승상에 오르지 못하자 비의 앞에서 위나라로 귀순할 걸이라고 외쳤다.[95] 박망파 전투 등 유비가 직접 작전을 짜고 지휘했던 전투의 공을 제갈량에게 빼앗겼다. 적벽의 승전에선 패잔병 뒤치기나 하는 존재가 되었다. 심지어는 무제기에는 '공이 적벽에서 유비와 더불어 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비군 2만, 오군 3만 정도로 연의의 묘사처럼 유비군 수가 적거나 약한 것도 아니었다. 오나라보다 적은 병력을 이끌고 있었던 이릉전의 패배가 75만을 끌고 가서 5만에게 털린 삽질로 바뀌었다.[96] 서주의 호족인 미축은 한평생 유비를 지원했고 진등도 유비를 맘에 들어 했기에 호족들에게도 유비의 평가는 나쁘다 할 수 없다.[97] 살인광 살인으로 참수를 일삼았다고 한 건 뭐한 게 미방, 유봉, 부사인 이 세 인물 모두 다른 사람도 아닌 유비의 의형제 관우의 죽음에 직접적인 개입이 되어 있었다. 유봉의 경우는 그나마 변명의 구실이라도 있지만 미방, 부사인은 그 조차도 없다.[98]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 장비전[99] 장비의 이런 성격은 연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례로 방통이 유비에게 갓 합류했을 무렵에 나태하고 무례하게 굴었지만 그의 능력을 본 장비는 개의치 않고 방통을 크게 대접했다.[100] 예를 들어 관우가 장료의 절개를 보고 조조에게 그를 살려줘야 한다고 청한다든지, 혹은 장막 뒤에서 방자하게 술을 마시다가 실수로 불을 낸 미방사인을 군법을 밝히기 위해 참하려다가 부하들의 만류로 그냥 곤장 40대를 쳤다든지, 또는 우금이 항복하면서 관우에게 살려달라고 빌자 관우가 우금에게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개돼지를 잡는 것과 뭐가 다르겠느냐?"라고 묻는다는지, 아니면 방덕이 항복을 거부하자 다시 항복을 권유하는 것을 보면, 관우는 연의에서 군자는 경애했으나 소인은 돌보지 않은 장수로 나오는 걸 알 수 있고, 장비가 동탁이 유비 3형제를 무시하는 걸 보고 화를 내며 동탁을 죽이려고 한다든지, 다른 경우에는 유비를 모욕하는 독우를 매질한다든지, 또는 절대적인 무력을 지니고 있는 여포를 그의 성격을 핑계로 경멸한다든지, 아니면 여포의 장인으로 나오는 조표가 여포의 체면을 이유로 계속 술을 거부하자 장형에 처한다든지, 게다가 산을 올라 와구관으로 향하는 한중의 백성들에게 와구관으로 향하는 길을 정중하게 물어본다든지, 혹은 기득권층, 즉 사대부에 속한 부하 범강장달이 사흘 내에 백기와 흰 갑옷을 준비하라는 명을 받자 사흘 내에는 불가능하다고 하니 채찍질을 하는 걸 보면, 장비는 연의에서 병졸들에게는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하였던 장수로 나오는 걸 알 수 있다.[101] 관우의 이런 성격은 연의 최고의 수혜자 버프로도 채 지우지 못한 것인지 도발 내성이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다혈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몹시 많다. 평소 보이는 침착함과는 괴리감이 있다. 사실 이 점 때문에 현대에 와서 관우의 이미지가 이상하게 된 감이 있는데, 실제 관우는 아랫사람들에게 따뜻했음에도 이 점이 연의에서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정사와 연의의 이미지가 섞여 '오만하면서 성격이 더러운 엘리트'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실제 역사상의 관우는 인간적이고 솔직한 성격이었다. 사실 연의는 소설이라 사건을 단순화하기 때문에 관우가 일방적인 수혜자라고 보기도 애매하다. 예를 들어 관우가 번성 공방전손권을 욕한 것은 당시 유비 측과 손권 측의 관계는 형주 때문에 이미 파탄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번성을 포위하고 있는 관우에게 손권이 사신을 보내 진격을 만류한 것이 8월, 손권이 조조에게 칭번하며 관우를 치겠다고 편지를 보낸 것이 10월이다. 배송지는 이를 두고 '겉으론 가깝지만 속으로 사이가 나빠서 손권이 관우를 습격하며 군대를 숨겨 몰래 출발했다'며 적고 있다. 손부인과 유비의 혼인동맹도 정치적 쇼에 가까웠기 때문에 유비는 손부인이 반란할까 겁내고 둘이 같이 살지도 않았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있을 정도. 손부인은 유비의 입촉 직후 오에 돌아갔기 때문에 당시 유비와 손권의 동맹은 배송지의 기록처럼 사실상 파탄난 상태였다.(손권이 애도 아니고 욕 한번 먹었다고 바로 동맹에서 적으로 돌아설리도 없다. 애초에 그전에 손부인을 익주에서 빼낸 것도 이미 두 세력간 동맹이 사실상 끝장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갈등이 생략된 소설에선 유비가 손권 측과 사돈 맺고 손부인과 깨를 볶으며 잘 살고 있는데, 관우가 난데없이 급발진하면서 손권을 욕하고 동맹을 파탄내는 트롤로 보이는 것이다.[102] 예외로 지적인 이미지가 남아있거나 오히려 부각되는 작품이 있다면 화봉요원, 삼국전투기, 시, 연 삼국지화에서 묘사되는 장비.[103] 간단하게 생각해서 여포와 마초를 띄우기 위해서다. 연의에서 무용 원탑은 이론의 여지 없이 여포이고, 정사에서는 관우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정사에서 별 기록이 없는 여포를 최강자로 만들려고 하니 관우+장비 vs 여포라는 기묘한 일기토를 만들고, 여기에 추가해 여포 vs 위의 6무장 일기토를 만들어둔 것. 마초 역시도 비슷한데, 정사에서 마초는 염행과 싸우다 죽을 뻔했다는 기록이 있고 용력을 뽐내는 장면은 별로 없다. 관우와 장비야 정사에 이미 용력이 엄청나다는 서술이 있으니 문제가 안 되고 조운은 작가가 공들여 키워준 캐릭터니 괜찮은데 마초와 황충은 아무래도 오호대장군에 같이 집어넣으려니 실적이 필요한 것. 황충은 관우와 대등하게 싸운 실적을 만들었고, 마초는 허저와 대등하게 싸운 실적을 만들어낸 것이다.[104] 다만 판본에 따라서는 장수 측의 가후호거아가 계책을 짜내, 술을 좋아하는 전위에게 계속 술을 권해 취하게 한 후 전용무기인 쌍철극을 훔쳐낸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본인이 잃어버리든 간수를 못해 뺏기든 실격인 건 마찬가지. 게다가 술을 먹었다보니 더워서 갑옷도 벗고 잤다고 한다. 잠재적인 적군의 한복판에서 말이다.[105] 웃긴 것은 장임은 유비를 노리려고 매복하다가 방통을 죽였다. 그야말로 소 뒤걸음짓을 하다가 쥐 잡은 꼴.[106] 덧붙여 황충이 위연의 실수를 깨닫고 유비에게 처벌을 요구했지만, 위연이 적장을 사로잡아 온 걸 알자 유비가 '황충이 특별히 부탁했으니 용서한다'라고 말하여 두 장수를 모두 감쌌다.[107] 조운 왈, "내 평생을 싸움터에서 지냈지만 저렇게 흉악한 인물은 처음"이라고.[108] 진삼국무쌍 시리즈가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위연을 비운의 충신, 제갈량은 괜히 위연을 갈구며 북벌에 집착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놈으로 만들었다. 다른 창작물에서도 종종 묘사되거나 나무위키 위연 항목에서도 제갈량을 음해하고 위연을 비운의 인물로 포장하는 시도가 틈만 나면 벌어지는 중이다.[109] 한 번은 손권을 만나고 온 비의가 '손권이 위연이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제갈량에게 말했을 때, 다른 한 번은 제갈량 사후 양의와 비의(?)가 위연의 반란 소식을 듣자 넋두리삼아 주고받은 말이다. 정사에서도 비의가 손권을 찾아갔을 때 손권은 '위연과 양의는 인성 쓰레기인데 능력도 미미한 놈들이니 제갈량에게 민폐만 끼치는 거 아니냐.'고 둘을 깠는데 비의는 '그 둘 인성에 흠이 있는 건 분명한데 그래도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고 답변한 적이 있다.[110] 연의를 읽은 독자라면 다들 알다시피 마등의 조카이자 마초의 종형제씩이나 되는 인물이지만 정사에서 스스로의 공적은 사실상 이게 다. 다만 평북장군 진창후라는 고위직을 받은데다 진도의 사례도 그렇고 촉한의 기록에 부실하다보니 기록되지 않은 다른 공훈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111] 치세의 간적 난세의 영웅이라는 말도 따로 전해진다.[112] 실제로 밀서를 위조하고 계획한 사람은 동군태수 교모.[113] 정사에서 마등은 조조 세력권 안에서 별 생각 없이 있는데 서량에서 아들인 마초가 조조에게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마초는 여포, 원소 이후 조조를 위험하게 한 인물 중 하나니 당연히 그 아비는...[114] 조조가 여포와 원소를 잡고 세력권으로 떠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같은 레벨의 태수였던 공융은 조조를 고깝게 보는 시점이 있었고 게다가 조조와 진짜 상성 안 맞는 유학자 + 이빨파라 이미 조조 눈밖에 났다.[115] 다만 황충이 쏘았다는 판본도 있다.[116] 이 장면에 대해 "종회가 아무리 반란분자라도 적의 사당에 제사 지내는 게 말이 되냐, 나관중이 구라친 거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근데 사실 이거 정사에도 있는 걸 나관중이 고친 것이다. 촉서 제갈량전에 '경요 6년(263년) 봄, 조령을 내려 제갈량을 위해 면양(한중군 면양현)에 사당을 세웠다. 가을, 위 진서장군 종회가 촉을 정벌해 한천(漢川)에 도착하자 제갈량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군사들에 명해 제갈량의 묘 근처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거나 땔나무를 캐지 못하게 했다.'라는 기록이 분명히 있다.[117] 병력 손실은 없고, 난리 때문에 부상자가 생겼다.[118] 와룡드립은 세설신어에 나오는 얘기긴 한데 종회가 혜강과 틀어지자 원한을 품고 죽인 건 정사에도 나온다.[119] 단 허의의 경우는 허의의 실수로 종회가 건너던 길이 무너져 말이 넘어지고 바로 촉이 공습해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가긴 했다.[120] 강유전에 따르면 강유가 그러라고 종회에게 말한 것으로 나온다.[121] 실제로 등애는 익주를 통해 동오를 칠 구상을 벌써부터 하고 있었다.[122] 우번은 주군을 배신한 미방의 행동 자체를 좋게 보지 않았다.[123] 근데 여포가 사실 정말 머리가 나쁜지는 여지가 있다. 여포의 초기 커리어는 무려 문관이기 때문. 여포의 진짜 문제는 개차반 같은 인성과 탐욕이지, 머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