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인전투 | ||
시기 | 191년 2월 | |
장소 | 사례 하남윤 양현 양인 (現 허난성 뤄양시 남부) | |
원인 | 반동탁 연합 결성. | |
교전세력 | 원술군 | 동탁군 |
지휘관 | 손견 | 호진 |
참전 장수 | 정보 주치 | 화웅† 여포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원술군의 승리 | |
영향 | 동탁의 장안 천도 및 손견의 낙양 수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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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기 원술 휘하 손견군과 동탁군의 대결.2. 배경
원소가 하진과 짜고 십상시를 몰살시키긴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하진은 십상시에게 잡혀 죽고 하진이 죽기 직전 정태등의 간언을 무시한 채 동탁을 사례에 불러들이는 바람에 동탁은 계속 관망하고 있다가 십상시가 처단당하자마자 낙양에 입성해서 하진의 부하들을 가로채고 이를 바탕으로 황실을 끼고 전횡을 일삼는다.이후 반동탁연합이 결성되었으나 연의처럼 한 곳에 모든 제후가 집결한 것은 아니고 여러 지역에 나누어 집결했다.
1. 원소, 왕광은 하내에 주둔하고
2. 한복은 업에
3. 공주는 영천에
4. 원술은 노양에
5. 조조, 유대, 장막, 교모, 포신 등은 산조에 집결했다.
이에 동탁은 서영을 시켜 왕광에게 선제공격을 했고 왕광을 무참히 격파했다.
조조는 사비를 털어 마련한 군대를 이끌고 장막의 지원을 받아 동탁을 공격했지면 서영에게 패배했다. 더구나 패배하고 돌아온 조조는 제후군이 술판을 벌이는 모습이 기가 막혀 남쪽 양주로 떠나버린다. 이때 원소가 조조를 지원하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이 많지만 사실 조조 항목에서 써있듯 조조를 띄우고 그 외를 전부 겁쟁이였다는 식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기록을 애매하게 했을 뿐 원소는 산조에 없고 하내에 있었다. 정작 원소는 한복이 군량공급을 끊으면서 하내에 집결한 군대가 무력화되어 버렸다.[1]
한편 손견은 거성인 장사에서 남양까지 장장 2,800리[2]에 달하는 기나긴 행군을 한 끝에 남양에 도착해서 남양태수 장자를 죽이고 남양을 점령한다. 보급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장자가 보급을 거절하자 죽이고 남양의 물자를 마음대로 취하던 손견은 노양에서 원술과 만나 결합한다. 원술은 손견의 가세로 무력과 더불어 넓은 땅을 손에 넣게 되었다.[3] 손견군은 상당히 지쳤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일단 기록에 따르면 이후 노양에서 군사를 조련했다는 기록을 볼 때 바로 싸우지는 않고 병력을 정돈했던 듯하다. 정사 손견전의 제목이 되기도 하는 파로장군 직도 이때 원술에게 받았다.
3. 전개
동탁은 또 다시 서영에게 명령해서 손견을 기습하게 했다. 야밤에 서영이 지휘하는 동탁군에게 포위된 손견은 부장이자 심복인 조무에게 자신의 두건을 벗어서 쓰게 한 다음 자신에게로 향하는 집중포화를 조무에게 향하게 했다. 이 상태로 손견은 포위망을 뚫었는데 손견의 부대는 야밤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손견은 무사히 서영의 포위망을 뚫었고 조무는 서영의 부대를 몰아서 어떤 사람의 무덤으로 유인했다. 이때 조무는 기지를 발휘해서 망부석[4]에 손견의 두건을 씌우고 자신은 말에서 내린 뒤 무덤 뒤로 숨었다. 서영의 군대는 망부석에 화살을 실컷 쏘고 나서 망부석임을 확인한 이후 후퇴했다. 그 이후 조무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서영의 기습에서 벗어난 손견은 패잔병들을 다시 불러모아 수습한 뒤 전열을 가다듬고 양인성에서 주둔하고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동탁은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 호진을 시켜서 손견의 잔당들을 섬멸하라고 시켰다. 동탁은 과거 손견을 만났던 적도 있고 손견에게 털리고 남들에게 말할 때 전부터 손견의 군사적 식견을 높게 평가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병력은 적지 않았던 듯하다. 이에 호진은 화웅, 여포와 같이 손견과 다시 싸우러 양인에 갔다. 동탁은 분명 여포에게 기병을 이끌고 호진과 화웅을 보조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여포는 공명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를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장거리를 행군하고 지친 동탁군은 휴식을 취하려고 했는데 여포가 강행군을 주장해 지친 상태로 손견군에 이르렀고 이후 휴식을 취하려고 하자 여포가 난데없이 손견군이 나타났다고 오인보고를 한 탓에 십리 나 도망쳤다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돌아왔다.
정보전에 보면 정보가 양인에서 동탁을 격파한 후 성을 공격하고 야전을 치르느라 몸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다.
4. 후일담과 여파
동탁은 손견의 용맹하고 굳센 것을 꺼려, 이에 장군 이각(李傕) 등을 보내 가서 화친을 구하게 하면서 지금 손견의 자제들 중 자사나 군수로 임명할만한 자를 나열해 상소하며, 그 표를 허락하고 등용하겠다고 했다. - 정사 오서 손파로토역전 |
이 전투는 당시 여러 제후군을 격파하며 강력함을 뽐내던 동탁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동탁은 이후 이각을 사신으로 임명해서 손견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이각은 손견 앞에 나타나서 동탁과 화친을 맺어주면 손견의 아들들 중 10살 이상의 아들들[5]에게 그들이 원하는 자사 자리를 하나씩 주겠다고 제의하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손견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각을 꾸짖으며 동탁의 화친 제의를 거절했다.
동탁은 하늘을 거슬러 무도하여, 왕실을 쓸어 뒤집어엎었으니, 지금 너의 삼족을 주살하여 사해에 내걸어 보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눈을 감지 못하는데, 어찌 장차 같이 화친하겠는가? |
이각은 물러갔고 손견은 전열을 완전히 가다듬은 뒤 다시 대곡으로 진군했다.
이에 동탁은 손견에 맞섰으나 손견은 동탁을 대파했다. 이에 동탁은 장안으로 도망쳤고 여포를 낙양에 보내어 방어하게 했으나 손견은 그 여포마저 깨뜨렸다. 여포 역시 장안으로 도망쳤고 그렇게 낙양은 수복되었다.
5. 평가
당시까지 여러 제후군을 격파하며 강대한 위세를 뽐내던 동탁군을 격파한 전투. 이 전투 이후 손견이 연달아 동탁군을 격파하면서 동탁은 낙양에서 물러나 장안으로 천도해야 했으며 다른 연합군이 군량 공급이 중단되어 막히거나 부하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할 만큼 큰 패배를 당하거나 이곳저곳에서 패하던 상황에서 손견이 승리함으로써 동탁의 위세를 꺾게 된다. 사실 반동탁 연합군의 성과는 거의 대부분 손견이 세운 것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그 계기가 된 양인 전투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손견이 패배했다면 동탁의 위세를 꺾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삼국지의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이 전투를 보면 좀 심하다 싶을 만큼 동탁군의 문제가 드러나는데, 지휘관인 호진부터가 손견의 목만 베면 된다는 식으로 강행군을 재촉했고 이후 도착한 뒤에 휴식을 취해야 할 때는 여포가 계속 진군을 강행했으며 진짜로 지쳐서 쉬어야 할 때 여포의 오인보고로 인해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다. 손견은 서영에게 패배한 후 불리할 수도 있던 상황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아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이때 여포는 거의 내부의 적 수준으로 동탁군을 고생시켰는데 이후로도 여포는 후대의 창작물의 무신, 전신 이미지와는 달리 조금만 불리해도 도망치거나 겁을 집어먹는 기록이 여러 있다.
동탁이 흔히 연의의 이미지만으로 포악한 폭군이기만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동탁군은 서량에서 백전 이상을 치렀다고 말해지는 강군이었고 하진의 중앙군을 흡수해 병력도 충실했다. 실제로 손견 역시 초전에 서영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양인전투에서 지휘관들끼리 불화하고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며 손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탁군을 격파해 당시 좋지않던 관동군의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었다.
추가로 동탁은 유애(劉艾) 앞에서 손견을 극찬하며 "저렇게 센 놈을 무슨 수로 이기냐"며 징징 거렸고 심지어는 동탁이 자신이 천하를 장악하는 큰 걸림돌로 원소, 원술, 유표, 손견을 골랐는데 원소, 원술, 유표가 당시 강한 세력과 명망을 떨치던 인물들인 반면 손견은 군사적 성과 이외에는 특별히 두드러지는 점이 없었으니 손견의 군사적 역량을 매우 높게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6. 기타 창작물
중국 삼국시대가 삼국지연의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나머지, 삼국지연의에서 생략된 이 전투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대신 나관중 임의대로 관우의 맹활약을 묘사한 사수관 전투가 이 전투 대신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인터넷이 개발되고 정사가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창작물에서도 정사와 연의를 모두 반영하는 경향이 생겨나면서 그에 따라 세상에 알려진 전투가 바로 양인전투이다. 연의와 달리 호진의 일개 부장 정도의 위상인 화웅의 목을 벤 이 전투를 묘사하려면 관우가 화웅의 목을 베는 사수관 전투를 생략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삼국지 매체에는 거의 묘사되어있지 않고 일부에서만 묘사가 되어 있다.- 김경한 삼국지에서는 손견이 참했다는 원문에 살을 더해 손견과 화웅의 일기토가 나온다. 손견은 장창으로 단번에 화웅의 옆구리를 찔러서 말에 떨어뜨린 뒤 화웅의 목을 베어버렸는데 이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창천항로에서는 나온다! 근데 화웅을 죽인 것은 하후돈이다. 그나마 거짓으로 들어갔지만 하후돈은 손견의 휘하이고, 손견이 직접 죽인 것이 아니니 정사기준으로 하후돈의 존재를 제외하면 어느정도 고증에 맞추었다고 할수있다.
-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손견전의 7번째 전투로 이 전투가 묘사되는데, 호진이 이끄는 동탁군과 양인에서 대치하고 호진, 화웅은 군사들을 쉬게 한다. 여포는 호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손견군을 공격하기 위해 성의 동문 앞으로 나서며, 정보가 제안한 유인책으로 조무가 손견으로 위장해 성문 앞으로 나와 성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동쪽으로 유인하자 여포는 그대로 조무를 추격한다. 그러자 여포가 멀리 성과는 반대편으로 간 것을 보고 화웅이 서둘러 성문의 동쪽으로 나오자 군사가 셋으로 갈라진 것을 본 손견의 본대가 성에서 나와 화웅을 공격하며, 손견과 화웅이 단기접전으로 겨루어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손견군에게 패한 화웅은 전사한다. 호진은 화웅이 공격당한 것을 알고 손견군을 공격하러 가지만 패배해 철수하며, 여포는 조무를 그대로 추격하다가 뒤늦게 손견군의 본대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여포는 단기접전으로 황개를 압도적으로 이겨 퇴각시키지만 손견군에게 전멸당해 퇴각한다.
- 카츠마타 토모하루 삼국지에서도 나와있는데 화웅이 사수관에서 나와 손견군과 분전하나 손견의 장수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며 사수관을 넘겨주는것으로 묘사되었다.
[1] 이 사건으로 한복은 동탁이나 다를 바 없는 놈, 동탁을 친 후에는 한복을 쳐야 한다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욕을 먹었다.[2] 한반도로 따지면 거의 부산에서 온성에 필적한다.[3] 손견의 경우 이 결합에서 도대체 무슨 이득을 봤는지 알기 어려워서 손견이 원술같은 사세삼공 명문 귀족에게 약했다느니 하는 여러가지 추측이 많다. 기록 자체가 미비하니 어느 것도 틀렸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고, 원술로부터 왕예와 장자 살해를 무마해주고 벼슬을 받는 명분을 얻었다는 얘기가 많다. 그런 게 완전히 없진 않았겠지만 물리적으로 보자면 일단 손견은 장자를 살해하여 부유하고 인구수도 많은 남양을 차지하며 보급을 마련했다. 남양이 크긴 해도 낙양이 있는 하남의 바로 아래 있는 군이니 낙양탈환의 코앞에 온 셈이다. 동탁과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원술과 연합해 후방기지를 마련하고 휴식과 조련에 힘쓰는 것은 있을 만한 일이다. 원술은 여남의 서쪽인 예주 여남 등지에서 세력을 떨쳤으므로 같은 반동탁세력끼리 연합하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든든했을 것이다. 남양까지 다다른 손견이 바로 위의 하남을 쳐서 낙양과 한실을 수복하면 현실적으로 반동탁토벌에 소극적이었던 장자를 죽인 것 정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장자 살해 무마 같은 것은 현실적으로 영천에 주둔하던 공주 정도와 싸울 위험은 있었겠지만 동탁을 코앞에 두고서 굳이 반동탁토벌군끼리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싸우거나 제재가 들어가거나 하는 것은 좀 이상하므로 그냥 손견도 후방안정화와 세력 불리기 등 여러 모로 연합할 만해서 했던 듯하다.[4] 무덤 좌우에 사람 모양으로 깎아서 만들어 세운 돌기둥이다.[5] 그래봤자 175년생의 손책과 182년생의 손권. 단 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