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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51D40><colcolor=#fff> 신사임당 申師任堂 | |
신사임당 추정 초상화 | |
본명 | 불명[1] |
당호 | 사임당(師任堂) |
본관 | 평산 신씨[2] |
출생 | 1504년(연산 9) 12월 5일 |
조선 강원도 강릉 죽헌리 북평촌 (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 |
사망 | 1551년(명종 6) 6월 20일[3] (향년 47세) |
조선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율곡촌 (現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율곡촌) | |
부모 | 부친 - 신명화(申命和, 1476 ~ 1522)[4] |
모친 - 용인 이씨 이사온(李思溫)의 딸 | |
형제자매 | 5녀 중 차녀 |
남편 | 이원수(李元秀, 1501 ~ 1561) |
자녀 | 4남 3녀 # |
장남 - 이선(李璿, 1524 ~ 1570) 장녀 - 이매창[5] 차남 - 이번(李璠) 차녀 - 윤섭(尹渉)의 처 3남 - 이이(李珥, 1537 ~ 1584) 3녀 - 조대남(趙大男)의 처 4남 - 이우(李瑀, 1542 ~ 1609) | |
종교 | 유교 (성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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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만 원권 지폐 속 초상화 |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화가. 호는 '사임(師任)'.[6] 아무 근거없이 이름이 '신인선' 또는 '신선'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름이 나와 있는 문헌은 없는데 1990년대 위인전 출판사가 작명한 것으로 추측된다.[7][8]
신사임당의 이름이 언급된 문헌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정확한 성명은 현재까지도 불명이다. 현대로 치면 '신 모 씨'지만 호가 있기에 이렇게라도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9]
2. 생애
신사임당이 속한 평산 신씨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증조부가 성균관 대사성, 조부는 영월군수, 부친 신명화는 벼슬을 일부러 나가지 않았지만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증조부인 신자승(申自繩)은 멀게는 태종과도 인맥이 이어진다. 신자승의 장인인 남휘는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와 혼인했기 때문이다.외가 쪽도 이름이 상당히 높고 부유해서 엄청나게 강한 집안 내력이 있는데, 외조부 이사온만 해도 강릉 최씨 집안에 둘째 사위로 장가를 들었고 신명화의 경우도 이사온의 외동딸과 결혼을 해서 초년 생활을 처가 오죽헌에서 했으며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댁에서 교육을 받았다. 오죽헌만 해도 이사온이 장인에게 받은 것을 다시 사위인 신명화에게 넘겨준 재산으로 신사임당이 죽은 이후에 유산을 나눈 분재기를 보면 이 집안의 노비가 100명이 넘는다.
어려서부터 시, 글씨, 그림에 매우 능하였다고 하는데 4세부터 글공부, 7세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데도 세종 시대의 화가였던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릴 정도였으며 금강산에 가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인정했을 정도로 출중했는데 신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쓴 사람 중 1명이 조선 중기의 거물 정치가였던 송시열이다. 물론 송시열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입장이었으므로 신사임당이 이이의 어머니이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10]
그뿐만 아니라 먼 훗날 숙종도 신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지었다고 하니 그림 실력이 대단했던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뭐가 그녀의 그림이고 실제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현대에는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녀가 그렸다고 확실히 낙관을 찍은 그림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림들만 잔뜩 전해지는데, 300년 전에 50세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한 사람이 그렸다기에는 전해지는 작품이 너무 많고, 또한 한 사람이 그렸다기에는 화풍이 너무 상이하다. 흔히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진 <초충도>는 그렇게 전해지는 작품일 뿐 진짜 그녀가 그렸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아들인 이이나 동시대 문인들의 기록에서는 포도, 산수,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하지 초충, 화조를 그렸다는 기록은 없어서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 남편 이원수[11] 덕수 이씨 가문 자체는 나름 명문가이지만, 정작 이원수의 집은 가난했다. 벼슬을 하지 못하여 친척[12]이자 우의정인 당대의 세도가 이기[13]를 찾아다니자 적극적으로 만류했다고 하며 이원수에게 자신이 죽으면 재혼하지 말라고 유교 경전까지 인용해 가며 신신당부했을 정도였다.[14]
사임당: "제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7남매(4남 3녀)나 두었으니까 더 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기>의 교훈을 어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원수: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이오?"
사임당: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동거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주 나타나게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원수: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사임당: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공양하는 도리에 어김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해서,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원수: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 같은 일이 없소?"
사임당: "주자가 47살 때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들지 않아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지만, 주자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습니다."
이원수: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이오?"
사임당: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동거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주 나타나게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원수: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사임당: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공양하는 도리에 어김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해서,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원수: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 같은 일이 없소?"
사임당: "주자가 47살 때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들지 않아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지만, 주자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습니다."
과연 남편의 말에 순응하기만 했던 수동적인 여성이었는지 상당히 의문이 들게 만드는 대목. 하지만 남편 이원수는 이 말을 무시하고 장남 이선과 연배가 비슷했던 주막집 여자 권씨를 신사임당 생전에 첩으로 삼았고, 신사임당이 죽자 권씨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았다.[15] 이후 이선과 새어머니 권씨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싸웠을 정도였고, 3남 이이는 어머니의 탈상 후 이원수에게 말도 하지 않고 금강산으로 출가해버렸다.[16]
3. 평가
시, 서, 화는 물론 학문에도 능했던 엄친딸의 표본. 괜히 슬하에서 이이 같은 사람이 나온게 아니며 신사임당 당대에는 '안견에 버금가는 화가'라는 높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예술가로서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나 '이이의 어머니'라는 명칭이 유명하여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현모양처라는 단어 자체나 이이의 어머니라는 점은 절대로 모욕이 아니지만 그녀 개인의 역량이 묻혀버린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1980~90년대만 하더라도 동양화가로서의 신사임당을 조명하는 어린이용 전기가 많았고 초충도 같은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서 예술가로서도 뛰어나고 가정생활도 잘한 먼치킨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그냥 아들 공부 잘 시킨 엄마 정도의 이미지로 국한되었다.
사실 신사임당이 생존하던 조선 전기인 16세기 무렵까지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조선 후기에 비해 비교적 높았고 실제로 신사임당도 아들인 이이를 친정에 가서 낳았다. 이후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사회가 성리학적 관념화에 젖고 남성 중심주의의 가부장제가 공고해지면서 여성의 위치가 격하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확실한 것은 신사임당 생존 당시나 16세기까지 지식인들의 시선에 신사임당은 '이이의 어머니'라는 점보다 '화가 신씨'라는 점이 부각되었다는 것인데 소세양, 정사룡 등은 그녀의 그림에 관한 평을 다수 남겼고 그녀를 뛰어난 화가로 보았다. 신사임당에 현모양처 이미지를 덧씌운 것은 송시열이었는데 송시열이 53세 때 발표한 아래의 <사임당의 난초 그림에 대한 발문>을 보자.
이것은 고 증찬성 이공 부인 신씨의 작품이다.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며 오행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기운을 모아 참 조화를 이룸에는 어떠하겠는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사임당화란발> - 송자대전
<사임당화란발> - 송자대전
이런 송시열의 발문을 시작으로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세력은 이이를 띄우기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 작업의 일환으로 그녀를 격상하는데 힘썼는데 이는 결코 독립된 개인으로서 신사임당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이이의 주변 배경으로만 취급한 것이다. 이런 작업 속에 신사임당은 이정(二程)[17]의 어머니인 후 부인에게 비견되는바 이는 이이와 이정의 위계를 은연 중에 동일시하는 은유로 기능한다. 신사임당은 이로써 '화가 신사임당'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조선 후기 성리학은 여성뿐만 아니라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이단시했고 기예들을 낮고 비천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후기 신사임당의 평가가 바뀌는 것은 여성의 지위 하락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성리학이 근본주의적이고 경직된 구조로 나가면서 신사임당이 재능을 발휘했던 화가의 지위와 평가가 하락했던 점 역시 종합적으로 고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당대 기준으로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현모양처인 동시에 화가이자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재인이라는 점에서나 위인이라고 볼 수 있지만 5만원권에 들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다는 평가가 주류다.
4. 초상화
* 위에 있는 여인 초상화가 신사임당이라고 전해진다. 조선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초상화로, 신사임당일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한다. 현재는 소재불명. 기사
5. 기타
-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등장한다.
- 물론 신사임당이 유능한 것은 사실이고 조선 중기에 여성의 위치가 조선 후기보다는 괜찮았다고는 하나 거의 60년 후에 태어난 허난설헌과 비교를 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배경은 별 것 없는데 남편 이원수가 데릴사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신씨의 아버지 신명화 덕분으로 우선 집안의 돈이 신사임당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신명화는 일부러 이런 사위감을 골라서 자신의 둘째 딸을 시집보낸 것이다. 왜? 딸이 사위에게 눌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이다.[19] 이 때문에 신사임당은 시집살이를 거의 안 하고 결혼 생활을 자기 친정에서 시작했고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3년상을 이유로 시가(媤家)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는 생활을 했다. 이후 한참 지나서 시가로 가기는 했으나 이원수의 집안은 전부가 덤벼도 신사임당 한 사람에게도 정치적/경제적으로 상당히 밀렸다고 보는게 맞으며[20] 실제로 이원수는 충실한 '셔터맨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직전 6대에 걸쳐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고 본인의 오빠 친구 아들과 결혼한 허난설헌과는 스타트 라인이 다르다는 이야기다.[21]
- 유관순과 함께 위인전이 존재하는 사실상 한국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위인이다.
- 강릉아트센터 대공연장인 사임당홀은 신사임당의 당호에서 이름을 취하였다.
6. 대중매체에서
- 1973년 KBS 일요연속극 <신사임당>에서는 탤런트 방인숙이 연기했다
- 2017년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22]에서는 배우 이영애가 연기했다. 방송국에서는 공을 들이며 제작하였지만 좋지 못한 평을 받음과 동시에 시청률까지 점점 하락하며 기대와 달리 축소되어 종영했다.
스틸컷
[1] 신인선으로 알려진 것은 후대의 창작으로 인선이 본명이라고 추정할 만한 근거가 없다.[2] 41세손 성(性), 충(忠), 찬(燦), 덕(德) 항렬이나 항렬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는 항렬을 썼다.(족보)[3] 음력 5월 17일.[4] 정선공주의 외증손자. #[5] 같은 시대에 살았던 여류시인 이매창과는 동명이인이다.[6] 13살 때 주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겠다는 뜻으로 직접 지은 것인데 후대에 여자임을 뚜렷이 알기 쉽게 하도록 안주인이 기거하는 별채라는 뜻의 '당(堂)'을 붙여서 '사임당'이라 부르다보니 통칭이 이렇게 고정되어 버렸는데 생전에는 '사임 신씨'였을 것이다.[7] 위인전의 원본이 무엇인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20세기 초에 활동하던 문학가들이 쓴 소설인 경우가 많은데다 전문적인 역사 서적보다 위인전 같은 교양 서적의 파급력이 더 큰만큼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 마치 상식인양 떠도는 경우가 흔하다.[8] 신인선이라는 아명은 의외로 알려진 역사가 오래된 편으로, 1970년대 중반 국민서관에서 출판된 문고판 위인전에도 등장한다. 또한 본관을 평산 신씨로 알고있는 사람이 많으나 고령 신씨인게 유력하다.[9] 사임당 신씨라고도 부른다.[10]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그림을 감상하고 그림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은 이이의 노선을 따르는 조선의 지파인 서인과 노론에 속한 정치인들에게는 집단 의식과도 같은 의례였다. 그들은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논하며 스스로의 정치적 동질감과 소속감을 다졌다.[11] 명문가였던 신사임당의 집안과는 대조적으로 남편 이원수의 집안은 한미했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형제도 남매도 하나 없는 단 하나뿐인 외아들이었다.[12] 신사임당에게 있어서는 시당숙.[13] 이기의 어머니는 성삼문과 6촌지간이며 외삼촌인 성담수는 생육신 중 1명이다. 이기는 후에 윤원형을 도와 을사사화를 일으키게 된다.[14] 이 대화가 <동계만록>에 남아 있는데 공자, 증자, 주희의 고사까지 인용한다.[15] 단, 조선 시대의 첩은 정식으로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꼭 신사임당의 당부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첩은 정실 부인보다 신분이 낮아 남편에게 정실 부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없고 가정 내 대소사에 평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없으며, 첩의 소생은 서자로서 정실 부인의 소생에 비교해서 차별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16] 다만 이이는 그래도 형제들을 잘 달래며 상대적으로 새어머니 권씨를 존중했다. 그런데 훗날 제자인 정여립은 이이가 새어머니를 핍박하고 불효했으며 서로 으르렁거렸다는 악성 소문을 유포하고 다녔다[17] 2명의 정(程)씨로 곧 송나라의 대유학자인 정이와 정호 형제.[18] 김은호의 제자. 김은호의 제자가 아니라는 논란은 있으나, 김은호와는 달리 친일 문제는 없다.[19] 당대 어르신들과 달리 딸이 편하게 살게 하기 위해 사위를 일부러 저런 자로 고른 것을 볼 때 신명화가 상당히 딸바보였던 모양.[20] 남편도 남편이지만 시어머니도 며느리에게 싫은 소리를 거의 못 했는데 신사임당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고 행실도 바르니 뭐라 할 것도 없었겠지만 말이다.[21] 덕수 이씨가 본격적으로 문/무반 명가로 자리 잡은 건 이이와 이순신 이후이다. 그런데 허난설헌은 신사임당의 아들 이이의 정적인 허엽의 딸이고 자신을 탄핵한 허봉의 누이동생이다.[22] 원제는 사임당, the herstory였지만 여러 조건을 부합하는 마지막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타임루프물인데 역사적 재현도를 고려하면 2013년 MBC 드라마 <기황후>보다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