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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음력) | 580년대 추정[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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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647년 2월 20일[A] (향년 60대 추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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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 낭산(狼山) 선덕여왕릉 | ||
재위기간 | 신라 제27대 국왕 | ||
632년 음력 1월 ~ 647년 2월 20일[A] (15년 1개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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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덕만(德曼)[6] / 만(万)[7] | ||
부모 | 부왕 진평왕 모후 마야부인 | ||
형제자매 | |||
국서 | 음갈문왕 | ||
종교 | 불교 | ||
신장 | 150.3cm 전후[9] | ||
시호 | 선덕대왕(善德大王)[10] | ||
칭호 | 성조황고(聖祖皇姑)[11] | ||
연호 | 건복(建福, 632년 ~ 633년) 인평(仁平, 634년 ~ 647년) | ||
골품 | 성골(聖骨) | }}}}}}}}} |
유황이 그린 선덕여왕 상상화 어진.[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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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 27대 국왕이자 기록상 확인되는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다. 연호는 '인평'(仁平).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의 딸이며, 최초의 진골 출신 국왕인 태종 무열왕의 이모이기도 하다. 진덕여왕, 진성여왕과 함께 신라 3대 여왕들 중 한 명. 현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까지 포함해 한국사에 단 4명 있었던 여성 국가원수들 중 첫 번째였다.삼국사기에서는 여왕이 아니라, 여(女) 자가 빠진 '선덕왕'(善德王)으로 기록되어 있다.[13] 하지만 훗날 제37대 군주이자 남왕인 선덕왕(宣德王) 김양상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 역사상 여왕은 단 3명밖에 없는 예외적인 사례로 평가되기 때문에 제27대 선덕왕을 '선덕여왕'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그냥 조선이지만 구분을 위해 고조선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2. 생애
2.1. 즉위 과정
《삼국사기》에서는 진평왕의 장녀였다고 전한다.[14]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와의 위아래가 뒤집혀 차녀로 기록되어 있는데[15], 어차피 이건 이미 주류 사학계에선 《환단고기》와 마찬가지인 위서인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난 상태이므로 무시해도 좋다. 남편은 《삼국유사》에서는 음갈문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화랑세기》에는 여기에 추가적으로 김용수, 을제 3명의 남자가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써 있다. 다만 《화랑세기》는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적인 가치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부왕인 진평왕은 자신의 삼촌이었던 진지왕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는 즉위 직후부터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당장에 원래 왕위 계승자가 될 뻔했던 사촌 김용수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은 자신의 아버지인 동륜태자의 가문을 높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당연히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 가문을 성골 가문으로 삼았고, 그로 인해 남성 중심 사회였던 고대 동아시아 환경에서도 특히 혈통을 중시하는 신라 사회였기에 여성이었음에도 성골이란 이유로 그녀가 여왕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신라의 전례를 따져본다면 원래 신라에선 아들이 없거나 있어도 문제가 있다면 딸이 아니라 사위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 이사금, 내해 이사금, 미추 이사금이 그랬다. 즉 진평왕의 사위이자 사촌형인 김용수[16]가 관례대로라면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진평왕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이어 받은 핏줄을 꽤나 중시하는 편이었고, 자신의 맏딸을 더 중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사위 계승의 명목은 당시로는 눌지 마립간 이후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면서 사실상 사라진 것이었기 때문에 이쪽을 더 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평왕은 꾸준히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장녀를 차기 왕위계승자로 일찌감치 점 찍어놓고서 결국 왕위를 이어준 것이 아닌가 추정해볼 수 있겠다.[17]
즉위 이전 공주 시절에 뭘 하고 살았는지에 대해선 딱히 기록이 없어서 알기 어렵다. 다만 《삼국유사》에 나오는, 불태워 죽이는 연기를 하던 문희를 선덕여왕이 살려주었던 일화는 이 사건 직후 태어났을 문무왕이 626년생이므로 선덕여왕이 왕이 아닌 공주 신분일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년인 진평왕 재위 53년의 여름 5월에 대규모 반란 기도가 있었는데, 바로 칠숙·석품의 난이었다. 이 시도는 진평왕에게 적발당해 칠숙은 동쪽 시장에서 목이 베어졌고, 9족을 멸족당했다. 아찬 석품은 백제로 도망가다가 처자식을 보고 싶다며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오던 중,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헤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는데, 들통나서 붙잡히고 역시 처형당했다. 이것이 단순히 진평왕에 대항한 반란인지, 아니면 여성인 선덕여왕이 즉위하는 것을 반대한 반란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있은 후 진평왕이 곧 세상을 떠난 것을 보았을 때 이미 고령의 진평왕이 몸이 좋지 않았고, 후계자로 선덕여왕이 지목된 상황에서 일어난 반란이므로 여자가 후계자로 지목돼 왕에 오르는 사태에 반발해 일어난 반란으로 추정하는 설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 주보돈(경북대 교수)에 따르면, 진평왕 말년 '신라 최초의 모반사건'인 칠숙의 난은 선덕여왕의 즉위를 저지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한다.
"이미 진평왕 말년 신라 최초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유력한 귀족인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은 선덕의 왕위 계승 추진에 불만을 품고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다. 사전 발각으로 실패하였지만, 이는 여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632년, 진평왕이 붕어한 뒤 덕만공주가 보위에 오르니 곧 선덕여왕이다.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선덕여왕은 선왕이자 부왕인 진평왕이 딸인 선덕여왕을 위해 준비한 왕권 강화 및 안정 정책들을 토대로 안정된 왕권이라는 유산을 바탕삼아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었다는 평을 받으며, 바지사장이나 얼굴마담이라는 식의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2.2. 즉위 이후
선덕여왕이 정확히 몇 살에 왕위에 올랐는지를 기록한 것은 없다. 다만 선왕이자 아버지인 진평왕이 굉장히 오래 재위한 것과 죽을 때 최소 60살은 되었던 것[18], 조카이자 6촌 동생인 태종 무열왕이 603년생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를 역산하여 보았을 때,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를 아무리 젊게 잡아도 40대가 넘는 중년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원래 20세기 중반 이전에는 10대 중후반에 결혼하는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빠르면 30대에 손자, 손녀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선덕여왕의 나이를 아무리 젊게쳐도 할머니 소리를 듣는게 당연했을 나이였다. 즉위 당시 국인들이 선덕여왕에게 바쳤다는 칭호 '성조황고(聖祖皇姑)'[19]에서도 선덕여왕을 칭송하는 미칭에 굳이 '할머니'를 뜻하는 '姑'[20] 자를 쓴 것을 지적해서 이 칭호도 선덕여왕이 즉위했을 때 고령이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이 있으며, 이를 두고는 단순히 존경의 의미에서 굳이 '姑' 자를 썼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밖에도 《삼국사기》의 편찬 총책임자였던 김부식 역시 선덕여왕 기사의 사론에서 선덕여왕을 '늙은 할미'로 묘사했으므로, 그런 소리 들을 정도의 고령이었다는 주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실제 당시 선덕여왕은 주보돈, 서영교 등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고령으로 묘사되는 편이다.선덕여왕은 즉위 직후 대사면을 단행하여 자신이 왕이 된 것을 널리 알렸다. 또한 모든 주와 군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주는 등 선정을 베풀겠다는 나름의 의지를 밝히기도 하였다.
선왕인 진평왕은 딸인 선덕여왕의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생전에 여러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즉위 직후 주군의 조세 1년 면제라는 건 선덕여왕의 치적에 바탕을 둔 것보다는 부왕이 그간 쌓아 올린 국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일 테니 그 역시 진평왕 나름의 딸을 위한 최후의 노력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년 동안 이어져온 남성 중심 문화는 여왕의 권위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국왕의 권위는 이전보다 약해졌고 내외적으로는 음해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주보돈 등 학자들은 선덕여왕의 권좌가 재위 초부터 불안했다는 해석을 한다. 이렇듯 정치적으로도 그다지 좋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개인적으로도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 고령이었기 때문인지 즉위 5년(636) 3월에 병이 들었는데, 의약과 기도가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 선덕여왕 본인이 사망 시기와 묻힐 장소를 예측한 기록도 보통 선덕여왕이 신이한 능력을 가진 존재였다는 이야기로 해석되지만, 본인이 곧 사망할 것을 예상 가능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추정하는 설도 있다.
재위 3년에(634)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하였다. 재위 4년(635)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주국낙랑군공신라 왕"으로 책봉받으며 국제적으로도 그 권위를 일단은 인정받았다.
그러나 국경의 상황도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압박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신라는 선덕여왕 시대에 들어 상당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고구려와의 충돌은 백제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다. 선덕여왕 시대 15년 동안 기록상으로 드러나는 고구려의 공격 기사는 3번 뿐인데, 재위 7년(638)에 칠중성(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공격이 있었으나 알천이 막아냈고, 선덕여왕은 다음 해(639)에 고구려와 접한 하슬라주(오늘날의 강원도 강릉시)를 북소경으로 삼고 군사를 배치하는 등 북부 전선을 보강했다. 그러나 재위 13년(644), 연개소문이 직접 나선 공격을 받아 끝내 2개 성을 탈취당했고 회복하는 데에는 실패했다.[21] 고구려가 백제만큼 공세적으로 나오지 못한 이유에는 딱히 신라에 대한 호감 같은 것보다는 문자 그대로의 113만 대군을 맞아 싸웠던 여수전쟁의 후유증이나[22] 당나라의 불온한 정세[23], 그리고 곧 이은 여당전쟁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백제였는데 그 공세가 가히 파상공세였다. 재위 3년(633)에 백제 무왕이 서곡성을 침공했고 13일만에 함락시켰다.[24] 이곳은 전북 무주군의 나제통문을 넘어 현재의 경북 성주군으로 이어지는 산악지역이었는데, 백제의 영토인 무주군에서 신라 왕경 경주시로 이어지는 최단거리 코스의 첫 단추가 되는 전략 요충지였다.[25] 이렇듯 흉한 조짐이 나타나며 초기부터 분위기가 좋지 못하였고[26] 특히 재위 11년(642)에 그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시기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으로 미후성을 비롯한 40여개의 성들을 빼앗겼고,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 공격을 계획하여 당항성으로 진격하는 당나라와의 외교 라인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특히 낙하산 인사인 대야주 도독 김품석[27]의 실책이 맞물려 윤충에게 대야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28]
선덕여왕 시대에서도 특히 중대한 위기로 여겨지는 사건이다. 당장 이 당시 신라 본인들의 기록에서조차 이런 기록이 나타난다.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를 여러 차례 하여 수십 개의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제 두 나라가 군대를 연합하여 기필코 우리나라를 빼앗고자 이번 9월에 크게 병사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이리 되면 우리나라의 사직은 보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보려 하오니, 약간의 병사라도 빌려주어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임금은 일의 사정이 궁하고 계책도 다하여, 오로지 대국에게 위급함을 알려 나라가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라본기> 선덕왕 12년(643)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를 여러 차례 하여 수십 개의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제 두 나라가 군대를 연합하여 기필코 우리나라를 빼앗고자 이번 9월에 크게 병사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이리 되면 우리나라의 사직은 보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보려 하오니, 약간의 병사라도 빌려주어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임금은 일의 사정이 궁하고 계책도 다하여, 오로지 대국에게 위급함을 알려 나라가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라본기> 선덕왕 12년(643)
주보돈 교수 등에 의하면 귀족들을 견제하며 그때껏 위태롭게 유지되던 여왕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무너져버린 사건으로서 역시나 신라의 상당한 위기였음을 재확인하였다. 여왕은 물론이거니와 그 지지 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을 위시한 가야계 세력의 입지도 위기에 내몰렸고[31], 더 나아가 국토 방위 실패의 책임이 심각하게 제기되며 여왕으로서의 권위에 심대한 타격이 가는 등 그 기반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32] 이밖에도 선덕여왕의 시대 전반을 위기의 시대로 해석하는 학계 인사들의 해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33]
사족이지만 백제의 공세는 선덕여왕의 다음 대로도 계속되어 진덕여왕 시대에 신라가 빼앗긴 성의 수는 총 20개나 되었고,[34] 그 다음 대인 태종 무열왕 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말갈 연합군의 공격에 총 33개나 되는 성을 빼앗겼는데, 선덕여왕을 포함하여 3대에 걸쳐 무려 100개의 성이 세 나라에 의해 함락당했던 것이고, 연합군을 통솔한 사람들이 바로 백제 최후의 왕 의자왕과 고구려의 연개소문이었다.
이렇듯 외침이 이어지는 가운데 자연재해도 끊이지를 않았다.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여러 재해가 끊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 11년(642) 가을에 있었던 가야 전역의 참패와 그 위기를 타개하고자 선덕여왕은 바로 그 해 겨울에 먼저 고구려에 김춘추를 파견하여 백제를 치도록 군사를 빌려달라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그 대가로 죽령 이북의 땅 즉 진흥왕대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했는데, 고구려 본인들도 그 땅을 정말 이런 식으로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동맹을 거부하고 김춘추를 욕보이고자 대답하기 곤란한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라는 기록이 존재한다.[35] 김춘추는 이런 제안에 "차라리 나의 목숨을 가져가라"며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며, 보장왕은 김춘추를 별관에 유폐하였다. 김춘추가 위기에 빠지자 선덕여왕은 김유신에게 명을 내려 구출하도록 하였고 이에 김유신이 3,000명[36] 내지 10,000명의[37]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 남쪽에서 무력시위를 하였다. 그러던 중 김춘추는 <구토지설>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다음 보장왕과 연개소문에게 땅을 주겠다 거짓말하고 빠져나왔다. 물론 발언을 꺼낸 당사자인 고구려조차도 별 기대를 안 했던 일이니만큼 실제 땅을 돌려주는 일은 없었으며, 다음 해에 연개소문이 마치 "너희가 알아서 주지 않으니 우리가 직접 가져가겠다"고 말이라고 하는 듯 직접 신라의 두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38]
사실 죽령 이북의 문제도 문제거니와 고구려가 이렇게 나오는 게 그다지 이상한 결정은 아니었던 것이, 다름 아닌 바로 그 해 가을에 백제한테 대야성까지 무너져 난리가 난 것을 고구려라고 모를 수가 없는데[39] 불과 3개월 정도 지난 그 해 겨울에 찾아와서는 백제를 치도록 군사를 부탁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니 땅을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무리한 부탁을 해 내쫓아버린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셈.
아무튼 당나라는 후에 고구려에게 신라를 치지 말라고 상리현장으로 하여금 교섭하게 했는데(644), 연개소문은 으레 김춘추에게 말한 것처럼 "수나라랑 전쟁할 때 신라가 가져간 땅 500리를 내놓으면 가능하다." 라는 대답을 했다. 신라를 버림으로써 양면전선이라는 부담이 남게 되기는 하지만 신라 정도는 백제가 맡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 당나라의 개입 직전까지 나제 양국 간 분쟁에서 백제가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기는 했다. 선덕여왕 이후에도 당나라의 지원군을 애타게 기다리며 사직의 명운을 두고 근심하는 무열왕 김춘추의 모습은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사실이다.[40] 이러한 고구려-백제-왜의 협력 관계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에 마지막 수단으로 다음 해인 643년에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군사를 빌리는 데에 또다시 실패한다.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가 간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어리석고 못난 자' 정도로 기록된 사신이 당나라에 가서 위와 같이 사직을 구해달라며 읍소하였던 것. 여기에 당태종은 "나의 사촌을 보낼 테니, 신라의 국왕으로 받아 섬겨라."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며 비웃었고, 사신은 그 앞에서 당황한 나머지 다만 "예."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걸 보고 당태종이 '어리석고 못난 자'라고 또 비웃어서, 기록에도 이름 대신 '어리석고 못난 자'라고 남게 된 것. 삼국의 기록 중에 신라만이 이 시기에 당사국이 쓴 기록을 확실히 남겼기에 웬만해서는 중요한 사안을 담당한 관원의 이름이 남았고, 당에 파병 요청을 할 정도의 중요한 사안이면 사신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남길터인데 익명 처리를 한걸 보면 명예를 생각해서 일부러 이름을 남기지 않은 면이 있다. 때문에 이때의 사신이 김춘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이 당시 당태종은 고구려-당 전쟁 준비에 한창이었으므로 신라에 당군을 빌려줄 생각도 여력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풀기 힘든(실제로는 풀리지도 않는) 방책을 제시하면서 청병을 거절한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41] 아무튼 선덕여왕의 친당 외교는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실제 당면한 적성국 고구려라는 국제적인 문제도 있었던 관계로 나당 양국은 그나마 우호 관계로는 남을 수 있었다. 다만 선덕여왕 시대에 김춘추가 직접 입당하거나 대당 외교 행보에 나선 적은 없다. 나당연합의 신라 측 주도자로 평가 받는 김춘추는 다음 왕인 진덕여왕 시대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당 외교 행보를 밟기 시작한다. 《삼국사기》 외에도 《구당서》 <고려전> 정관[42] 18년조(644)에는 '신라가 수 차례에 걸쳐 원조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걸 보면 신라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에 걸쳐 군사를 빌려달라고 요청했음이 확인이 된다. 다만 당은 끝내 군사를 빌려주지는 않았다. 사실 고당전쟁 시기를 감안하면 안 빌려준 게 아니라 못 빌려준 것에 가깝다.
이렇듯 나라가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선덕여왕은 나름의 자구책을 내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김유신이었다. 선왕인 진평왕 시대 낭비성 전투에서 이미 이름을 떨쳤던 김유신을 재위 11년의 가야 전역 이후 김춘추 감금 사건 등을 기점으로 중용하기 시작하였고[43] 김유신은 선덕여왕 시대에 본격적으로 유력한 차기 왕위 계승자인 김춘추와 더불어 조정 내 신흥 세력의 양대 거물이 된다. 실제 선덕여왕 13년(644년) 가을에는 백제 변경 7개 성을 빼앗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의지할만한 구석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듯 그나마 실적도 내어주니 "나라의 존망이 그대(김유신)에게 달려 있다"는 칭찬을 하면서 더 열심히 굴린다. 실제 이 말 했을 때가 언제냐면, 재위 14년(645) 3월에 백제가 한 번 쳐들어왔다가 김유신에게 격퇴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직후 또다시 쳐들어오자 집에 아직 가지도 못했던 김유신에게 명을 내려 도로 나가 싸우도록 명령을 내리던 때의 일이다.[44] 아무튼 김유신은 이렇게 조정 거물로서의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해 5월에 선덕여왕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30,000명의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협공했는데, 이 틈을 타서 백제가 신라의 7개 성을 빼앗음으로써 그나마 챙겼던 그 군사적 성과마저 고작 1년을 채 못 버티고 무색하게 만든 모양새가 되었다. 참고로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침공해오는 적군을 저지하는 것 외에 선덕여왕이 치세 15년 내내 거둔 영토적 성과는 이 해의 7개 성이 전부다. 게다가 고당전쟁은 나당연합군의 패배로 막을 내렸는데, 선덕여왕은 30,000명의 대군을 파병하고도 국내에 내놓을만한 성과가 없었다. 이것이 또 선왕인 진평왕과 비교되었을 것이 자명한데, 선왕인 진평왕은 고수전쟁 당시 선덕여왕이 그랬듯이 수나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협공하여 500리의 영토를 빼앗는 성과를 거두는 등 고구려의 침공이라는 위기를 보란듯이 타파하는 명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바가 있었기 때문.[45] 군사상의 실정이 위와 같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국가에 사직의 존망이 입에 오르내릴 정도의 심대한 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또다시 이어진 이 30,000명의 대군 파병의 실패는 귀족들의 분노가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46]
이렇듯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 강도높은 숭불정책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각지에 수많은 사찰들이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남아서 확인되는 바로만 여왕 재위기간 내내 무려 25개나 되었다. 참고로 신라 중고기 때 창건된 절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와 금석문 등 여러 자료들을 통틀어서 전해지는 것들의 숫자가 약 45개 정도임을 고려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인 셈이다. 가령 재위 3년(634)의 분황사 건립[47], 재위 4년의 영묘사 건립, 재위 14년의 황룡사 9층 목탑 등. 사찰을 짓는 것 외에도 본인의 병에 차도가 없자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어 승려를 모아 《인왕경》을 강론케 하고 10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거나 신라십성 중 하나로 추앙받는 자장율사를 후원하여 당나라로 유학보내는 등[48] 불교 후원에 아낌이 없었다. 이러한 정책은 기본적으로는 국난을 맞은 여왕이 왕권 강화, 대민 통제, 민심 안정, 내부 결속 강화 등을 이루기 위한 의도하에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학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그 의도나 효과를 두고 이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위 9년(640) 경에 당태종이 국학을 1,200칸으로 늘려 짓고 학생 수를 늘려 3,260명으로 채우는 등 유학생 받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원수 국가들인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에서까지 자국의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키는 중이었는데, 선덕여왕이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신라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때 당나라 수도 장안에 이러한 여러 나라의 자제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2.3. 비담의 난과 죽음
말년인 재위 14년(645)이 되자 귀족들의 반발이 더이상 억누르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해진 듯, 선덕여왕은 그 해 겨울 11월에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하지만 불과 2개월 뒤인 15년(647) 정월에 비담이 염종 등과 더불어 난을 일으키고, 이때 내건 명분이 바로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즉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신라 정계에 한 바탕 물갈이가 벌어지고 이후 정국을 무열왕계가 장악하게 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 사건이지만 정작 기록은 적고 따라서 논란도 많다. 원문의 '여주'가 선덕여왕 개인을 말하는지, 여성이라는 성별 자체를 말하는지, 아니면 이미 후계자로 내정돼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진덕여왕을 말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고, '여주'의 해석 문제를 넘어서서 비담과 염종 등 귀족들이 난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많이 있다.
가령 이도학 교수는 당태종의 '여왕 폐위론'이 비담의 난에서 똑같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들어 당태종의 여왕 폐위론에 자극받은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해석을 하는데[49] 다른 학자들 사이에서도 확인이 되는 학설이고[50], 주보돈 교수는 진덕여왕의 즉위에 반발하여 벌어졌다는 해석을 하기도 하고, 노태돈 교수는 고당전쟁 당시 파병이 또다시 신라의 패배로 막을 내리는 등 군사상의 실정이 귀족들을 자극하는 데에 일조하였다는 해석을 하기도 하며[51], 후술할 '부정적 평가' 문단에 나오다시피 선덕여왕의 숭불정책을 비판하는 경우에는 무리한 숭불정책이 일조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하는 등. 어쨌든 상대등 이하 귀족들이 선덕여왕의 정치에 반발을 품은 결과로 일어난 일임은 분명하다.
'여주'가 무엇이고 난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선덕여왕의 정치가 인정을 받았다면 나올 이유가 없는 구호이자 벌어졌을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지어는 아예 처음부터 비담의 반란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선덕여왕의 후계자로 사촌 승만(진덕여왕)을 세워 성골 계승 원칙을 유지하려던 김춘추, 김유신 세력이 구 귀족 세력의 완전한 제거를 위해 선수치고 나선 친위 쿠데타이고, 여기에 비담에 반발하여 '여주불능선리'의 명분을 내걸고 대치하였던 것이라는 설까지 있을 정도다.[52]
아무튼 보통 반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반란의 주동자가 여느 귀족이 아니라 화백회의 수장인 상대등이었고, 왕성을 둔 공방전이 10일 이상 지속되었으며, 유성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선덕여왕이 근왕군이 패배할 것이라면서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는 묘사가 나타나는 등 근왕군이 상당히 위기에 몰려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존재한다.[53] 이 반란은 김유신이 불 붙인 연을 띄우는 기지를 발휘하여 전세를 뒤집고 진압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상 최초로 연이 문헌상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선덕여왕은 1월 8일에 죽었는데[54], 반란이 그 1월에 일어난 이래 왕성을 둔 공성전이 분명 10일 이상 지속되었다고 한다.[55] 따라서 기록상으로 그저 '봄 정월'에 시작되었다는 이 반란이 가장 이른 1월 1일에 시작된 반란이라 해도 선덕여왕이 반란 와중에 세상을 떴다는 계산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실제 반란을 일으킨 비담에 대한 처벌이 선덕여왕 본인이 아니라 다음 왕인 진덕여왕의 손으로 행해지고 그 날짜는 그 달 17일이다. 이때 포로가 된 비담 이하 관련자 30명이 참수되며 그들의 9족까지도 멸족된다. 선덕여왕이 반란의 진압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그 와중에 세상을 떴다는 것은 이렇듯 기록상으로 확인이 가능하며, 실제 주보돈 교수 등 학계 인물들 역시 선덕여왕이 반란 와중에 죽었다고 보는 등 전반적으로 이견이 없어 보인다.[56]
이렇듯 어수선한 정국을 정리하지 못한 와중에 죽었으니 그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 설들이 존재하는데, 비담이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피살설, 이미 병중에 있었으므로 병으로 죽었다는 병사설, 반란의 충격으로 인해 죽었다는 쇼크사설 등이 있다. 다만 선덕여왕이 비담군에 피살당했다기엔 선덕여왕은 당연히 김유신이 이끄는 근왕군의 제1순위 호위 대상이었을 텐데 김유신은 멀쩡하고 선덕여왕만 피살되는 상황을 상정하기 어려워 설득력이 낮다. 보통은 원래 고령이라 건강이 좋지 않았고 비담의 난이 일어난 타이밍도 선덕여왕의 건강 악화를 틈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무튼 반란을 거쳐 즉위하고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반란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니 참으로 혼란한 시대를 살다 간 군주였던 셈이다.
2.4. 선덕여왕릉
자세한 내용은 선덕여왕릉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이 문단은
본 문단에서는 선덕여왕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나눠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다. 다만, 양자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며, 긍정적인 면을 서술하는 문단에서 부정적인 서술을 본문 글 및 주석 등으로 반박하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3.1. 《삼국사기》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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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선덕왕 본기>
一年春一月 선덕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二月 대신 을제가 정치를 총괄하다
一年夏五月 가물다가 비가 왔다
一年冬十月 백성들을 진휼하다
一年冬十二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七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秋八月 백제가 침략하다
三年春一月 연호를 인평으로 바꾸다
三年 분황사가 완성되다
三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四年 당나라에서 왕을 책봉하다
四年 영묘사가 완성되다
四年冬十月 이찬 수품을 보내서 위문하다
五年春一月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왕이 병이 들다
五年夏五月 옥문곡에서 백제의 군사를 치다
五年 자장이 당나라에 들어가다
六年春一月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삼다
六年秋七月 알천을 대장군으로 삼다
七年春三月 큰 돌이 저절로 옮겨갔다
七年秋九月 누런 꽃이 비처럼 내리다
七年冬十月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다
七年冬十一月 알천이 칠중성에서 고구려 군사와 싸우다
八年春二月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삼다
八年秋七月 동쪽의 바닷물이 붉게 되다
九年夏五月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을 청하다
十一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一年秋七月 백제가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다[57]
十一年秋八月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빼앗으려 하니 당나라가 상리현장을 보내 만류하여 물러나다
十一年秋八月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하다
十一年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빌려달라고 청하나 이루지 못하고 모욕을 당하다
十一年 김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삼다
十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二年春三月 자장이 돌아오다
十二年秋九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빌려달라고 청하나 이루지 못하고 모욕을 당하다
十三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春正月 고구려가 북쪽의 성 2개를 빼앗다[58]
十三年 당태종이 상리현장을 고구려에 보내 신라를 향한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나 고구려가 무시하다
十三年秋九月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백제를 치게 하여 7성을 빼앗다
十四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四年 김유신이 백제의 침입을 막다
十四年春三月 황룡사 9층 목탑을 창건하다
十四年夏五月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니 여왕이 3만 군사를 모아 지원하였으나 패배하고, 김유신이 빼앗았던 7성은 백제에게 도로 다 빼앗기다
十四年冬十一月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六年春一月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켜 왕성을 두고 대치하다
十六年春一月八日 반란군과 대치하는 와중에 왕이 죽다
선덕여왕부터 《삼국사기》 5권이 시작된다.
긍정적, 부정적 평가와 관계없이 《삼국사기》에 그대로 남아 있는 역사적 객관적 사실들이다. 실지의 기록만으로도 잃어버린 성만 무려 대야성 포함 최소 44개에서 최대 52개. 반면에 회복한 성은 단 한 개도 없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가 전례 없는 대위기에 봉착했음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3.2. 긍정적 평가
즉위 직후 나라 안의 '환과고독'(홀아비, 과부, 고아, 무의탁 노인) 등 혼자 살아가기 곤란한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59]숭불정책을 통해 황룡사 9층 목탑으로 상징되는 불교 문화를 융성시켰다. 경주시라고 하면 떠오르는 첨성대, 분황사, 영묘사 등이 바로 선덕여왕 대의 작품이다. 실제로 분황사 탑에서 신라시대 여성(특히 여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장엄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분황사 탑에서 발견된 수정화주(火珠) 영묘사를 비롯하여 여왕의 재위 15년 동안 현재 확인되는 바로만 무려 25개의 절들이 신라 각지에 건립되었다. 신라 중고기에 창건된 절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와 금석문 등 여러 자료들을 통틀어서 전해지는 것들의 숫자가 대략 45개 정도이니, 선덕여왕 15년 동안에 지어진 사찰의 수가 그 중 절반 가까이 해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덕여왕은 신라십성 중 하나로 추앙받는 자장율사를 후원하여 당나라로 유학보내는 등 불교 후원에 아낌이 없었다. 이러한 불교 후원은 왕권 강화와 대민 통제, 민심 안정, 내부 결속 강화 등을 위한 작업으로서 예로부터 행해진 일들의 연장이자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된 일이었다. 그러한 의도가 있었음에 대해서는 하단 부정적 평가 등에서도 인정받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선덕여왕의 모습을 본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60] 주장과는 별개로 선왕인 진평왕은 똑같은 모양의 목상을 당시 여성 군주 스이코 덴노가 즉위한 일본으로 보냈는데, 그것이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고류지 반가사유상이라는 해석이 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또는 대한민국의 보물 제198호인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일명 '남산 감실부처'로 불리는 불상이 선덕여왕의 모습을 본뜬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61][62]
불교 문헌들은 전반적으로 선덕여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실제 《삼국유사》 등에 남은 <선덕왕지기삼사>를 비롯한 불교계 설화들에서 선덕여왕은 지혜롭고 신비로운 여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지귀 설화>에서는 선덕여왕이 미녀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선덕여왕이 불경이나 주역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려주는 측면도 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63] 이러한 불교의 고평가는 물론 선덕여왕이 불교의 후원자였기 때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도 있다. 바로 선덕여왕이 (불교를 처음 수용한 법흥왕 때부터도 그랬겠지만) 불교를 통해서 왕을 신성스러운 존재로 묘사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종교를 이용해서 왕을 신성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하는 행위는 보편적인 현상이였고, 선덕여왕이 줄기차게 시행한 중앙집권 노력과도 부합하는 일이였다는 것이다.
또한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하다고 할 수도 있다. 대야성 성주인 김품석을 고려하면 이것도 그냥 저 두 명(김춘추, 김유신)이 유명한거 아니냐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애초에 이들은 모두 선덕여왕이 중앙집권을 위해서 자신의 친척들을 기용한 것이다. 김품석 같은 예외도 있지만 수많은 친척들 중에 김유신, 김춘추 같은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내고 이들에게 일을 맡겼던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 인재를 보는 눈이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또 하나의 중요한 업적은 비담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서 중앙집권화에 방해요소가 되던 대귀족 세력을 일소함으로서[64] 신라를 하나의 통일된 명령 및 권력체계에 통합시킨 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큰 업적인데,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서 전력이 밀리던 신라가 이 둘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중앙집권 정책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사실 이 중앙집권화는 증조부인 진흥왕 때부터 이루어진 정책으로, 기존 기득권층인 중앙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가야 출신들을 대거 등용시켰다. 김유신의 어머니인 신라 공주를 가야 왕족 출신과 결혼시키고, 나중에 선덕여왕이 김춘추가 김유신의 누이와 결혼시키는 것도 그 일환이다.[65]
선대인 진평왕이 다소 무리하게 딸인 선덕여왕을 후계자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줌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고 중앙집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비담의 난도 이렇게 점점 밀려나는 중앙귀족들이 마지막 저항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서 말하였듯이 중앙집권을 위해서 (대부분의 왕조가 그리하였듯이) 자신의 친척들을 요직에 앉히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 반란을 선덕여왕 대에서 완전히 진압하고 그 후로는 군과 명령 체계를 통합시켰다. 이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에게 밀려서 국력이 하락하는 와중에도 (위에서 언급한) 백제와 고구려와는 다르게 지배층의 갈등을 겪지 않았다.
또한 외교적으로 성공을 거둔 시기이기도 했다. 증조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가져오고, 아버지 진평왕때에 고구려의 뒤를 쳐서 땅을 넓히는 등 다른 두 나라와 외교관계가 극도로 험악해져 있었다. 그 결과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신라는 상대적으로 전력 집중이 쉬운 백제에게 압박을 당해 가야 방면의 땅을 잃고 있었다.
선덕여왕이 성을 대량으로 상실한 것도 이런 외교적 상황에서 서쪽의 백제, 북쪽의 고구려, 그리고 동남쪽의 왜나라(왜구)를 견제하기 위해서 전력을 분산시켜야만 하는 외교상황의 연장선이였던 것이다. 실제로 선덕여왕과 싸운 의자왕 뿐만 아니라 그 이전 대인 진평왕과 백제 무왕 때부터 신라는 백제에게 밀려서 땅을 조금씩 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춘추를 기용해서 상대적으로 원한이 덜한 고구려와 화해하고자 했었고, 그 시도가 실패하자 고구려와 전쟁 중이던 동아시아 최강국인 당나라와 접촉해서 동맹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당시 동아시아 유일의 패권국이던 당나라의 위상과 당나라가 동원한 신라의 몇 배에 달하는 군사들이 신라가 얼마 안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선덕여왕은 비록 군사적으로 성을 많이 상실하기는 했지만, 한강 유역 등 가장 중요한 지역을 사수해내는 것에는 성공했고, 백제와 고구려에 점차 밀려났어도 외교적으로는 이 둘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선덕여왕은 중앙집권된 권력을 후대에 넘겨줌으로써 김춘추와 그 아들인 문무왕 때 기어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게 될 기반을 닦아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3.3. 부정적 평가
<선덕왕지기삼사> 같은 불교발 설화들은 그 비과학적인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다시피 프로파간다, 용비어천가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내용들도 개인의 총명함을 나타내는 단편적인 일화들에 불과하다.[66] 때문에 선덕여왕의 치적을 논하는데 <선덕왕지기삼사>를 평가의 근거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 도리어 <지기삼사>의 내용을 제하고 보면, 선덕여왕의 치세, 특히 말년은 신라 최악의 내우외환의 시기 중 하나였으며, 불교 후원 외에는 마땅히 업적이라고 볼 만한 것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해석할 여지는 있을지언정 선덕여왕을 '태평성대의 지혜로운 명군' 으로 볼 근거는 전혀 없다.선덕여왕의 시대 전반이 내우외환의 시대였음에는 본문 등에서도 나온 바와 같이 주보돈, 노태돈, 서영교, 이도학 등 여러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또한 본격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사실 전근대에는 평가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는데, 이는 실제로 선덕여왕이 업적은 거의 전무한 반면 실책은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학계에서도 선덕여왕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매우 압도적이다. 이는 선덕여왕의 단순히 위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이나 전쟁에서 거둔 성과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국가적 위기를 마주한 상황에서의 태도에 대한 평가이다.
후술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기를 마주한 상황에서 본인이 그 위기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본인 스스로 더욱 키워나갔다'는 것이다.
우선 서영교 교수의 경우, 저서인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2015) 등에서 선덕여왕을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는 데 실패한 채 자신의 현실도피를 목적으로 불사에만 치중한 암군으로 평가하였다. 다음은 저서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의 관련 내용이다.
젊었을 때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그녀의 모습도 초췌한 노파가 된 당시에는 빛을 잃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쏟아부어야 할 경제력을 불사에 탕진했다.
그녀는 신앙에서 고난을 견디는 힘을 빌려오고 있었고, 영혼은 이미 부처님의 경이로운 세계에 가 있었다. 그녀의 정신을 담고 있는 몸도 건강하지 못했다.
늘 아팠고, 잔병에 걸려도 잘 낫지도 않았다. 즉위 5년이 되던 해에 깊은 병이 들었다. 어떠한 의술과 기도도 효과가 없었다. 황룡사에서 백좌법회를 열고 10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는 4개월 만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그녀는 부처님의 영험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더욱 굳게 믿게 됐다.
현재 우리가 경주시에 가면 여왕이 남겨 놓은 분황사의 탑과 첨성대를 보고 로망에 젖는다. 하지만 그녀의 화려한 사찰과 탑도 수많은 신라인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 641년 백제 의자왕의 맹공으로 낙동강 서안의 모든 지역을 상실했다. 신라가 절명의 위기에 처했지만 그녀는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에 비용을 쏟아부었다. 각 층마다 신라가 정복할 나라의 이름을 붙였다.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은 그 전란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하기는 커녕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대신 ‘공상적인 기대’로 주관적인 세계를 머리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냈다.
서영교,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중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쏟아부어야 할 경제력을 불사에 탕진했다.
그녀는 신앙에서 고난을 견디는 힘을 빌려오고 있었고, 영혼은 이미 부처님의 경이로운 세계에 가 있었다. 그녀의 정신을 담고 있는 몸도 건강하지 못했다.
늘 아팠고, 잔병에 걸려도 잘 낫지도 않았다. 즉위 5년이 되던 해에 깊은 병이 들었다. 어떠한 의술과 기도도 효과가 없었다. 황룡사에서 백좌법회를 열고 10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는 4개월 만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그녀는 부처님의 영험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더욱 굳게 믿게 됐다.
현재 우리가 경주시에 가면 여왕이 남겨 놓은 분황사의 탑과 첨성대를 보고 로망에 젖는다. 하지만 그녀의 화려한 사찰과 탑도 수많은 신라인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 641년 백제 의자왕의 맹공으로 낙동강 서안의 모든 지역을 상실했다. 신라가 절명의 위기에 처했지만 그녀는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에 비용을 쏟아부었다. 각 층마다 신라가 정복할 나라의 이름을 붙였다.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은 그 전란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하기는 커녕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대신 ‘공상적인 기대’로 주관적인 세계를 머리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냈다.
서영교,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중에서
서영교는 선덕여왕의 군사적 실정을 비판함과 동시에, 숭불정책으로 묘사되는 무리한 사찰 건립에 따른 국력의 탕진 등을 비판한다. 선덕여왕의 숭불정책이 단순히 정치적 목적 외에도 여왕 개인의 현실 도피성 정책이었음은 후술할 주보돈 교수 등도 지적하고 있으며, 황룡사 목탑 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박승범(2014)조차도 대규모 토목공사에 대한 당대인들의 우려를 부정하지 않는다.[67] 이 우려는 후술하는 《삼국유사》에서도 감지된다.
이런 측면은 '불교 문화의 발달'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명백히 안정기는 아닌 시점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반복한 것이 과연 당대를 살았던 민중들에게 좋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지적하는 것이다. 사찰 건립을 업적이라고 해봤자 결국엔 대규모 토목공사이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하물며 정치적 실패가 반복되고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이 이어지던 당시 정세에서 백성의 부담을 가중할 뿐인 대규모 토목공사를 업적이라고 꼽는 것은, 마치 로마의 네로 황제가 '도무스 아우레아'를 준공한게 건축학에 도움이 되었으니 업적이라고 꼽는 수준의 어처구니 없는 소리이다. 물론 불교계에서야 좋게 평가하겠지만.
이 외에도 이도학 교수 역시 정치적 실패와 무능에도 불구하고 정변 최종 승리 세력인 김춘추 세력의 사후 옹호 때문에 '현명한 군주'로 추앙된 지도자라고 혹평하였다.[68]
주보돈 교수도 선덕여왕에 대해 동정을 하면서도, 그다지 우호적인 평가는 내리지 않고 암군으로 묘사하였다. "상당히 불행한 개인사와 정치사 속에서 회피, 도피의 수단으로 불교를 믿고 사찰을 지으며 침잠했다."[69] "선덕여왕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리더십이 없었다. 오히려 나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70]
이희진과 은예린 등도 역시 공저 《그들은 어떻게 시대를 넘어 전설이 되었나》(2014) 등에서 선덕여왕에 대해 최초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에 가려진 무능한 암군으로 평가하였다. 수세에 몰린 채로 거듭되는 패전에 대한 비판에 더해, 그 숭불정책에 대해서는 법흥왕 때부터 이어진 것이었으므로 새삼스럽게 의미를 가질 상황도 아니었고 특히 사찰 건립 등에 대해서는 이미 지어진 다른 시설들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데도 위기 상황 속에서 오히려 쓸데없는 공사를 벌인 것, '신라 시대판 전시행정'으로서 무리한 불사에 대한 집착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현대 대중 사이에서 선덕여왕이 유독 태평성대의 명군 등으로 묘사된 이유에 대해서는 현대에 대두한 페미니즘 세력의 정치적 필요를 그 이유로 들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이다. 그러니 여성 통치자도 남성 못지 않은 능력을 보였다고 하는 편이 이른바 '페미니즘'의 논리를 정당화시키는 데에 중요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최초'가 아닌 여성 통치자라고 이런 이미지가 필요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최초'가 가지는 의미와 인상은 강렬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덕여왕의 업적을 최대한 포장하려는 성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는 이른바 '페미니즘'적 필요에 의해 과대포장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의 권리'를 찾는 거야 나무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역사를 만들어내거나 왜곡시키면서까지 여성 통치자의 위상을 높이려 하는 것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희진, 은예린 공저, 《그들은 어떻게 시대를 넘어 전설이 되었나》 중에서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는 이른바 '페미니즘'적 필요에 의해 과대포장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의 권리'를 찾는 거야 나무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역사를 만들어내거나 왜곡시키면서까지 여성 통치자의 위상을 높이려 하는 것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희진, 은예린 공저, 《그들은 어떻게 시대를 넘어 전설이 되었나》 중에서
특히 여왕이 대내외적으로 위기상황에 직면한 상황에서 행했다는 그 숭불정책이라는 것에는 이 밖에도 아래와 같은 비판이 따른다.
조원숙(2009)은 선덕여왕의 당초 의도와는 별개로 숭불정책의 결과가 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71]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립 목적이 아니라 건립 후의 상황 변화일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 배경이나 과정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지만, 실제 그것이 조성된 이후의 상황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된 바가 없다. 당시 신라가 외침에 시달리고,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종의 토목공사를 수행하는 것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즉 거듭되는 토목공사는 민심을 이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조원숙]
박순교(2000) 역시 선덕여왕이 국난을 극복하고 민심을 달래고자 하는 의도와 달리, 무리한 불사 조영 사업을 추진한 결과, 지배층 내부는 물론이고 하층민들의 불만까지도 키우며 여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확산시켰으며, 말년에 신하들의 대표인 상대등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반란을 불러일으키는 계기의 하나로까지 작용하였을 가능성을 묻는다.[72] 이인철(1999)[73] 역시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안한 선덕왕대의 대내외적인 주변 환경은 탑을 세우는 행위를 낭비적인 사안으로 인식하게끔 했을 개연성이 크다. 선덕왕은 진평왕대로부터 이어지는 대외 전쟁으로 인해 파탄된 민생 경제를 배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영 사업을 시행했기 때문에 기층민의 불만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순교]
선덕왕은 여왕 통치가 갖는 정치적 허약성을 극복하고 외침을 방어할 수 있다는 예언적 신념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분황사를 창건했고 그 외침 방어의 효험이 떨어져 다시 백제의 침략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질적인 대책이 되지 못함으로써 여왕 통치의 모순만 드러낸 채 여왕의 즉위와 통치에 반대 입장을 견지해왔던 귀족 세력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이인철]
노태돈 교수도 선덕여왕의 군사적 실정과 사찰 정책이 비담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74] 사찰을 짓고 탑을 올려서 나라의 결속과 왕권을 공고히 한다는 당초의 취지는 결국 무색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사찰 정책은 정치적으로 실패작이었다.
특히 비담의 난은 비록 진압되었다고 하지만, 난이 진압되었으니 문제가 없다는 평가는 상당히 결과론적인 평가다. 사찰을 짓고 탑을 올려서 나라의 결속과 왕권을 공고히 한다는 당초의 취지는 결국 무색해진 것이다. 물론 그 난을 진압한 게 선덕여왕이 중용한 김유신이기는 했으나 역시 선덕여왕의 인사에 대한 평가라면 모를까, 숭불정책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식의 변호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75]
상술한 선덕여왕 시대의 위기로 말미암아 현실 정치에서 정치, 군사적인 실패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짐으로써 여왕이 그와 같이 힘을 기울였던 숭불정책조차도 그 효험을 잃게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선덕여왕 시대에 그렇게 열심히 사찰을 지은 이유가 여왕의 정치적 허약성을 극복하고 부처의 힘으로 외침을 방어할 수 있다는 예언적 신념을 신민에게 심어주기 위한 행보였다면, 마냥 사찰만 올려서 끝날 일이 아니라 정말로 외침을 막아내는 실질적인 성과를 냄으로써 군주의 위엄을 드러내고 백성들과 지배층에게 그 소위 숭불정책이라는 것의 효험, 부처님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다는 예언적 신념에 대한 증명을 해냈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덕여왕은 기록상으로 보이다시피 현실에서 연전연패를 면치 못하였던 탓에 그런 위엄을 세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재위 3년(633)에 서곡성이 무너지고 나니 백제의 침략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아내겠다며 분황사를 세웠음에도(634) 백제는 다음에 기어이 가야 40여개 성과 대야성을 무너뜨렸고, 그리하여 신라에서는 "사직이 무너지겠다"는 비명이 터져 나오는 위기 상황 속에서 다시 그러한 외침을 불심으로 극복하겠다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올렸는데도(645) 고당전쟁이 나당연합의 패배로 막을 내리고 신라의 정세가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이러니 기존에 '불심으로 외침을 극복한다'는 슬로건이 사람들에게 더는 통하지가 않게 되었고, 이렇듯 실질적인 대책이 전혀 제시되지 못하면서 여왕 통치의 모순만을 드러내, 여왕의 즉위와 통치에 반대 입장을 견지해 왔던 귀족 세력에게 더욱 불만을 사는 한편 여왕 폐위의 명분만을 더욱 던져주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76]
게다가 학자에 따라서는 정말로 그 사업이 '왕권 강화, 민생 안정' 등의 목적으로 진행된 사업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가령 주보돈 교수의 경우에는 그러한 목적이 있었음을 긍정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덕여왕이 본인의 불행한 인생으로부터의 현실 도피처로서 불교를 이용한 측면이 있으며 본인이 거기에 침잠했다는 평가를 한다. 이는 서영교 교수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황룡사 9층탑의 실상이란 숭불정책이라는 명분에 앞서 선덕여왕이 자장의 사술(詐術)에 속아 넘어간 결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무언가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자장이 자신이 가져온 불사리의 거국적인 봉안을 통해 자신과 불교계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도모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위해 평소 여왕의 콤플렉스였던 여성이라는 성별을 이용하여 '여주에게 위엄이 없다'면서 여왕을 자극하였고[77] 그렇게 선덕여왕을 사술로서 조종하는 데에 성공한 결과가 바로 황룡사 9층탑이라는 지적이다.[78]
또한 자장의 권유를 받아들이려던 선덕여왕이 건탑 의지를 밝혔을 때의 기록도 주목할 만 하다. 해당 《삼국유사》 기록 속의 '신하'들은 적어도 이러한 사탑 조영 사업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해석이다.
자장 법사의 건의를 받아들이려는 선덕여왕에게 이들은 "백제에게 장인들을 청한 이후에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즉 "우리나라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고 외국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선덕여왕의 건탑 의지에 우회적으로 우려 내지는 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장인을 부탁하였다.', '소공의 숫자가 200명이었다'는 등의 기록은 건탑에 기울인 경제적 부담을 비롯한 나라의 부담이 컸음을 재확인하는 부분.[79]
상술했다시피 주보돈, 서영교, 이도학 등 여러 학자들이 선덕여왕에게 비판적 평가를 남겼다. 단순히 '선덕여왕이 처한 시대적 배경을 무시했다'고 평가절하하기에는 해당 인사들의 숫자나 면면은 그렇게 양적, 질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그녀의 재위 기간은 안팎으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왕위도 심히 불안정하였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었지만 반란을 거쳐 즉위하고, 마침내 반란 속에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주보돈)
4. 대외적 압박에 대해
“우리 임금께서는 일의 사정이 궁하고 계책도 다하여, 오로지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나라가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2년(643), 신라 사신이 당태종에게 구원병을 간청하며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2년(643), 신라 사신이 당태종에게 구원병을 간청하며
선덕여왕의 시대가 위기의 시대였다는 부분에는 학계 여러 인사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보돈, 노태돈, 서영교, 이도학 등은 여왕의 시대를 내우외환의 시대, 심각한 위기로 규정하고 있다. 한림대 인문학부 김명준 교수 역시 2013년 논문을 통해 선덕여왕 대를 군사적, 외교적, 내부적 위기의 시기로 규정하고, 여왕이 불교치국책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고 해석하였다.[80]
"선덕여왕 대는 삼국 간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로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군사적 공격을 받았다. 게다가 ‘여성’ 군주가 갖는 한계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한에 이르게 하였다. 당태종의 꽃씨 선물에 담긴 희롱, 대리 통치 요구와 대내적으로 비담과 염종의 반란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당대 긴장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축적된 위기의 유산과 여성 군주로서의 한계를 가졌던 군왕이라 할 수 있다. 여왕은 이러한 위기와 한계를 ‘불교치국책’으로 극복하려 했다."
선덕여왕 시대를 심각한 위기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국사편찬위원회 측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산하 사이트인 우리역사넷 등은 선덕여왕 시대에 대해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도발을 받아오던 중 특히 백제의 빈번한 침입으로 자국의 國土守護(국토수호)마저 불안하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던 상황이었다." 고 평가한다.[81]
비담이 상대등에 오른 것과 비담의 난을, 사건 4년 전 당태종의 여왕 비하에 이어지는 맥락으로 규정하는 것도 비담의 난을 바라보는 학계의 유명한 설 중 하나이며, 이도학 교수 등도 지지하고 있다.[82] 한편으로 주보돈 교수 등은 이 난을 진덕여왕의 즉위에 반대하여 벌어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노태돈 교수는 선덕여왕의 군사적 실정이 비담의 난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분석하기도 했다.[83]
"당의 동진이 저지된 상황에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시달리는 형편이었으며, 백제와 연결된 왜의 동향도 우려의 대상이었다. 아울러 신라 내부에선 645년 전쟁에 직접 참전하였다가 실패로 끝난 정책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논란이 조정 내에서 있었던 것 같고, 후사가 없는 여왕의 후계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여성이라는 성별이 주변 각국에 웃음거리가 되어 공세가 더욱 강화되었다는 해석이 존재하는데, 실제 당태종이 신라의 위기를 두고 내린 평가라든가[84] 자장이 황룡사 9층탑을 건의하면서 내놓은 의견 등[85] 기록상으로도 나타나는 부분이다.
반대로 그러한 해석이 과도하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한성대 한국고대사연구소의 박승범 학술연구원은 2014년 논문[86]을 통해 643년 대야성의 함락을 제외하면 신라의 국가적 위기는 없었으며, 다만 김춘추-김유신의 사륜(진지왕)계-금관가야계의 정치적 실각 위기를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주장하였다.
"황룡사 9층 목탑에 대한 기존 인식은 7세기들어 심화된 국가적 위기에 처한 신라가 이를 타개하고, 신라 중심적 천하관을 더하여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탑이 논의되었던 643년까지도 대야성의 함락을 제외하면 국가적 위기의식을 초래할만한 상황은 없었다. 위기의 실상은 당대 신라사회를 주도한 사륜계-금관가야계의 정치적 실각의 가능성이었다." # [87]
선덕여왕이라는 '개인으로서의 여주'가 아니라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별로서의 여주'가 진짜로 문제가 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88] [89]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가 강해졌다는 부분도 역시 불명확하다. 이미 선대 진평왕 시절부터 드러나는 전쟁 기사들이나, 당나라에도 고구려가 길을 막고서 조공을 못 하게 하며 또 자주 침입한다고 하소연하는 기록 등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90], 신라 조정 내부의 사정과는 별개로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는 선덕여왕의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로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이어지고 있던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기록에 기초한 해석.
5.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
필사본 《화랑세기》는 역사학계에서 위서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신뢰성이 낮은 기록인 것은 참고할 것.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의 적차녀이다.[91] 천명공주의 친 여동생이자 진평왕의 후비 승만부인이 낳은 늦둥이 왕자의 배다른 누나.
진평왕은 적장녀 천명공주의 남편이자 자신의 사촌 동생인 용수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지만, 천명과 덕만의 생모인 마야부인이 죽고 차녀인 덕만이 장성하여 왕위를 이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자 천명에게 남편 용수와 함께 출궁할 것을 권한다. 천명이 이를 받아들여 출궁하자 진평왕은 차녀인 덕만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다.
그러나 진평왕이 뒤늦게 들인 후비 승만부인이 적통 왕자를 생산하자, 덕만의 지위는 흔들리게 된다. 허나 진평왕의 적장자이자 천명, 덕만 자매의 이복 남동생인 왕자는 이른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이에 승만부인은 덕만의 최측근인 용춘을 의심하고, 이에 용춘은 변명 한 마디 하지 않고 스스로 지방으로 좌천된다. 왕자 의문사 사건은 이 선에서 종결된다.[92]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아버지 진평왕을 졸라 5촌 당숙인 용춘과 혼인한다. 당시 용춘은 덕만의 언니 천명과 사통관계였다. 영문도 모르고 덕만의 남편이 된 용춘은 후에 덕만과의 사이에 아이가 없음을 핑계로 물러나 천명과 재결합한다.
덕만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용춘과 용수 외에도 을제, 흠반 등 많은 남자들을 남편으로 들였지만 끝까지 자식은 없었다. 씨내리용 남자를 계속 갈아치웠음에도 불구하고 소생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덕만의 문제였던 듯하다.[93]
여담으로, 마야부인은 진골정통 지소태후의 외손녀이므로 덕만 또한 진골정통이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모계로 이어지므로 덕만에게 소생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누구든 간에 상관없이 진골정통이었겠지만, 앞에서 나왔다시피 소생은 없었다.
6. 기타
- 《삼국유사》 <기이> 제1의 -선덕왕지기삼사-에서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라는 표기도 나오는데, 같은 내용에 '善德王'이라는 표기도 혼재돼 있다. 다만 《삼국유사》의 '대왕'이란 현대처럼 대단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미칭이 아니다.[94] 과거 삼국 및 고려, 조선까지는 정식 왕호가 '대왕'(大王)이었다. 황제를 부를 때 무슨 황(당 문황), 무슨 제(헌제) 이렇게 줄여서 부른 것처럼 선덕'대왕'을 선덕'왕'으로 줄여서 부른 것이다. 그러니 《삼국유사》가 선덕대왕이라고 표시한거는 그냥 왕호를 표기한 것일 뿐이다.
- 불교를 대단히 밀어줬던 왕으로, 본인의 즉위 정당성과 외국의 침략에 맞서 사상적 결집을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이름 '덕만'이나 시호 '선덕'부터 모두 불교적인 호칭이다. 덕만이란 이름은 불경인 《열반경》의 '덕만우바이'(德曼優婆夷)에서 따 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덕만우바이'는 원래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존재로 묘사돼 있다. 즉 비록 여자이지만 원래 운명은 남자고, 석가모니처럼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구제할 인물이니 여왕으로 올라도 손색이 없다는, 불교 교리적으로 여왕의 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름으로 볼 여지가 있다. 시호의 경우 '선덕'이란 이름을 쓴 사람은 불경에 여러 명 나오는데 그 중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에서 따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선덕왕지기삼사> 등의 설화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실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사실을 각색한 비현실적인 설화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왕실과 밀접한 불교 세력이 '왕이 곧 부처다'라는 왕즉불 사상을 전파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퍼뜨린 일종의 프로파간다 등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선덕여왕을 상대로 일반 대중이 곧잘 떠올리는 일화들과 더불어 '지혜로운 여왕', '명군이자 성군'이라는 이미지들은 대개 이러한 설화들로부터 비롯된다.
- <서동 설화>의 내용을 생각해보자면 백제 무왕의 처형이자 의자왕의 큰이모가 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매부, 외조카와 전쟁을 치른 구도가 된다. 그러나 <서동 설화> 역시 신빙성 논란에 휩싸여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로망 때문인지 선덕여왕은 여러 매체들에서 젊고 아름다운 미모의 여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선덕여왕은 실제로는 즉위 당시에는 젊은 여왕이 아니었다. 부친 진평왕은 김동륜의 아들이었는데, 김동륜은 572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에겐 아우 국반 갈문왕이 있었으니 적어도 572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고, 632년 사망할 당시 나이는 최소 61세였다고 봐야 한다. 국반 갈문왕이 유복자였다고 쳐도 632년에는 61세가 되기 때문이다. 진평왕은 국반 갈문왕의 형이므로 그보다 많은 62세 이상으로 잡아야 한다. 그 점을 고려하면 선덕여왕은 추정 나이가 즉위 당시엔 최소 40대 중후반 이상의 중년 여성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 사촌 동생 진덕여왕도 마찬가지다. 한국 역사 속에서 진짜로 젊은 여왕은 10대 후반 ~ 20대 초반에 즉위한 먼 훗날의 제51대 진성여왕 단 1명 뿐이다.
- 발음은 일반적으로 [선ː더겨왕], [선:덩녀왕]이라고 한다.
전자의 경우 선덕^여왕의 두 단어를 잇지 않고 구(句)로서 발음하여, 연음만을 허용했기 때문이고, 후자의 경우 앞의 말에는 받침이 있고 뒤의 말이 [ㅣ]나 반모음 [j]로 시작할 때 연음을 막기 위해 일어나는 'ㄴ' 첨가 현상이 일어나고, 추가된 'ㄴ'으로 인한 비음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선 합성어로 등재돼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에 대해 따로 표준발음을 규정하진 않았다.
-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용례로 정해진 건 없지만, 선덕여왕릉이 Seondeogyeowangneung인 것으로 미뤄 Seondeogyeowang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만 선덕여왕릉은 문화재로서, 로마자로 적을 때 띄어쓰기(선덕^여왕릉)를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문화재가 아닌 선덕여왕이 반드시 Seondeogyeowang이란 근거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띄어쓰기를 반영하면 Seondeok yeowang이 되며, [선ː덩녀왕]을 반영하면 Seondeongnyeowang이 된다.
7. 가계
8. 설화
자세한 내용은 선덕여왕/설화 문서 참고하십시오.9.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선덕여왕/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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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8년에 그려졌으며 대구시 부인사에서 안치하였는데, 여기서는 실제 복식에 가깝도록 외관만을 그렸다.# 실제 선덕여왕의 용안에 대해서는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대한민국의 보물 제198호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일명 남산 감실부처로 불리는 불상이 선덕여왕을 본떠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2] 이는 건국대 김기흥 교수의 주장이다.#[3] 진평왕과 국반 갈문왕의 추정 생년으로 역산한 것이다.#[A] 음력 1월 8일, 율리우스력 2월 17일[A] [6] 불경 불설불명경(佛說佛名經) 및 현재현겁천불명경(現在賢劫千佛名經)에 등장하는 ‘덕만불’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를 수용한 이후의 신라는 기독교를 수용해 국교로 삼은 로마 제국처럼 상당히 종교적으로 변했는데, 성골 왕실은 아예 자신들을 불교의 찰제리종이라고 주장하며 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백정’, 어머니는 ‘마야부인’으로 이름을 썼다. 모두 석가모니 부처의 부모 이름이다.[7] 《삼국유사》 기록.[8] 선화공주가 실존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9] 정연식의 선덕여왕의 이미지 창조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위엄이 없다는 기록과 체구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선덕여왕이 평범하거나 또는 왜소한 체구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신라 여성들의 평균키인 150.3cm 전후로 추정된다.[10] #[11] #[12] 1990년대에 전각을 다시 지으면서 유황(당시 경북대 교수)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것이다. 참고로 복식에서 고증 오류가 한 가지 있다. 왕관의 외관은 다음 진덕여왕 때까지 전통적인 금(동)관을 썼을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삼척이나 단양 등에서 7세기식 금동관이 출토된 바 있기 때문에 세부 형태를 제외하면 큰 문제가 없지만, 새 날개 모양 관장식을 꽂은 고깔 모양의 내관은 상투를 꽂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자 왕이나 왕족들만이 쓰던 것이다.[13]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선덕왕'인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선덕여왕'으로 표기된다.[14] 단, '진평왕의 장녀'라는 서술이 '진평왕의 모든 딸들 중에서 맏이'가 아니라 '진평왕과 그 정실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 공주 중에서 맏이'라는 주장도 있다.[15]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이 설을 차용했다.[16] 김춘추의 아버지. 김춘추가 무열왕에 오른 후 김용수를 왕으로 추존했다. 즉 돌고 돌아서 훗날 왕이 되기는 했다.[17] 물론 신라 왕조는 하대에 접어들어 다시금 사위에게 왕위를 계승하기도 한다. 그리고 당장에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는 것도 사실 그의 어머니의 핏줄을 통해 진평왕 직계가 되기 때문에 가능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사위가 계승 순위상 엄청 밀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 다만 신라는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진평왕은 자신의 핏줄에 꽤나 집착한 측면이 엿보이기 때문에 여성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당장에 하대의 진성여왕 역시 가문으로 인해 여성임에도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18]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태자가 572년에 죽었고, 진평왕은 동생 2명까지 있었다.[19] 한자를 직역하면 '성스러운 조상의 황제 할머니'라는 뜻이다. 역사학자에 따라서 해석을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 '신성한 조상의 황통을 이은 여인' 등으로 서술하기도 한다.[20] 일반적으로 시어머니를 뜻한다. 고부갈등 할 때의 '고'가 바로 이 글자를 쓴다.[21] <고구려본기> 보장왕 3년(644)[22] "우리나라도 역시 지치고 쇠약한 상태였다" <고구려본기> 영양왕 25년(614)[23] 이를 고구려 역시 감지하여 축조되기 시작한 게 천리장성.[24] <백제본기> 무왕 34년(633)[25] 서영교,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2015)[26] 이 다음 해에 분황사가 지어진 이유가, 바로 서곡성 함락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추스르기 위한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인철 ,<분황사 창건의 정치, 경제적 배경>,《신라문화제 학술 발표집》20, 1999[27]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와 결혼한 자로서 김춘추의 사위. 그 혈연적 관계와 더불어 대야주 도독이라는 요직을 고려했을 때 당시 김춘추 세력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28] <신라본기> 선덕왕 11년(642)[29] 오늘날의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 압량주라고도 한다. 지금의 압량읍사무소에서 경주시 동궁과 월지까지 국도로 가도 불과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30]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8년(661) 5월. 참고로 백제 멸망은 바로 전 해인 660년의 일이다. 다만 거창군의 거열성 등 서부 경남의 백제부흥군 잔존 병력을 완전히 축출하는 건 663년 2월이었다.[31] 국토 방위 실패의 책임 문제도 그렇거니와, 특히 잃어버린 영토가 또 하필이면 가야계의 세력 기반 노릇을 해야 할 구 가야 지역이었다.[32] 역사스페셜 2009년 9월 19일자 방송 등.[33] 우리 역사넷 1. 삼국통일. 1. 삼국통일 과정 1) 7세기 신라의 내정변화[34] 그래도 이때는 김유신도 2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35]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36] <김유신 열전>[37] <신라본기> -선덕여왕-[38] <고구려본기> 보장왕 3년(644)[39] 고구려는 백제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공격한 당사자다.[40]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6년(659)[41] 다만 이 고당전쟁의 실패로 고구려부터 공략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이후 의자왕의 반당행보로 백제가 고구려 정복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신라 측의 설득이 겹쳐 당나라도 인식하면서 659년이 되어서야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이듬해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백제 협공이 성사된다.[42] 당태종의 연호.[43] 선덕여왕 시대 김유신의 활동 기록은 이 이전에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44] 《삼국사기》 선덕왕 14년(645) 3월[45]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13년 봄 정월 연개소문의 발언.[46] 노태돈, <古代 東아시아 國際秩序의 再編과 韓日關係> (2010)[47] 절 이름부터가 '향기로운 임금의 절'(芬皇寺), 즉 선덕여왕을 염두에 둔 이름이다.[48] 《삼국사기》 선덕여왕 5년 3월[49] 여왕실록② 진덕여왕, 굴욕을 견뎌내고 신라를 亡國 위기에서 구하다[50] 우리 역사넷 1. 삼국통일. 1. 삼국통일 과정 1) 7세기 신라의 내정변화[51] 노태돈, <古代 東아시아 國際秩序의 再編과 韓日關係> (2010)[52] 우리 역사넷 1. 삼국통일. 1. 삼국통일 과정 1) 7세기 신라의 내정변화[53] 《삼국사기》 -김유신 상-[54] 《신라본기》 -선덕왕-[55] -김유신 상-[56] 주보돈, 영남문화산책 제52호: 선덕여왕 이야기 (2)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 김춘추 비담의 난 네이버캐스트 선덕여왕[57] 40개라는 게 아니라, 최소 41개에서 최대 49개라는 소리다.[58] 고구려 본기 보장왕 3년조에 나온다.[59]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60] 국보 미륵반가상이 선덕여왕 닮은 사연(2000)[61] [사찰문화기행] 아쇼카순례단-사찰 순례 경주 남산(1)(2017)[62] 이는 건국대 김기흥 교수의 주장이다.#[6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덕왕지기삼사설화[64] 백제에서 의자왕이 귀족들과 갈등을 일으켜서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고구려가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이 권력투쟁한 것과는 다르게[65] 능력도 없는 김품석을 대야성 성주로 임명시키는 무리수도 이 정책의 영향이다.[66] 삼국시대의 불교계는 왕권의 강화를 꾀하던 왕가의 후원을 받는 세력들이었고, 특히 선덕여왕기의 신라 불교는 왕의 비호 아래 상당한 후원을 받았다.[67] "진평왕대 추진된 각종 불사에 따른 재정위기는 선덕왕 즉위시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다시 시작되는 거대 건축물의 조영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는 조영 기간의 단축이 무엇보다도 요구되었을 것이다."[68] 여왕실록① 선덕여왕은 '실패한 지도자'였다!(2014)[69] <역사스페셜> 2009년 9월 19일 방영분. 그러한 난세에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군주가 이와 같이 정사에서 눈을 돌리고 종교로 현실도피하며 '침잠'하는 바람에 나라가 파탄난 사례 중의 하나가 바로 말년의 양무제로, 전형적인 암군의 행보에 해당한다.[70] 강의 '한국 고대사 속 백제 여성' 후기(2014) "선덕여왕의 업적을 알려 달라"는 청중의 질문에 신라사 최고의 권위자라는 사람이 내놓은 평가가 저러해서 당혹스러웠고, 그 날 청중의 반응은 꽤나 싸늘했다고 한다.[71] 조원숙, <新羅 善德王代 度僧 施行과 佛敎政策> (2009)[72] 박순교,<黃龍寺 9層塔의 歷史的 虛實>,《淸溪史學》16․17, (2000) 박순교, <선덕왕대 정치운영과 비담의 난>,《淸溪史學》14 (1998)[73] 이인철, <분황사 창건의 정치, 경제적 배경>, 《신라문화제 학술 발표집》20, 1999[74] 노태돈, <古代 東아시아 國際秩序의 再編과 韓日關係> (2010)[75] 더구나, 비담의 난 도중에 선덕여왕이 사망한 터라, 진압 과정에 차기 후계자로 확정된 진덕여왕이라면 모르되, 선덕여왕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담의 난 발발 자체가 선덕여왕 재임기에 펼친 왕권 강화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고, 선덕여왕이 사망한 후 비담의 난이 진압되고 나서 왕권이 강화된 것은 진덕여왕 혹은 진덕여왕 재임기 권력의 중추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업적으로 보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76] 이인철, <분황사 창건의 정치, 경제적 배경>, 《신라문화제 학술 발표집》20, 1999[77] "지금 그대 나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구려. 그래서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고 있는 것이오. 그대는 빨리 돌아가야만 하오.", "고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할 것이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할 것이며,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과 불상, 승복과 폐백 등을 가지고 귀국해서 탑을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삼국유사》 <황룡사 구층탑>[78] 박순교, <선덕왕대 정치운영과 비담의 난>, 《淸溪史學》14 (1998)[79] 조원숙, <新羅 善德王代 度僧 施行과 佛敎政策> (2009)[80] #[81] #[82]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5108[83] 노태돈, <古代 東아시아 國際秩序의 再編과 韓日關係> (2010)[84] 《삼국사기》 선덕왕 12년(643) '여성이 보위에 앉은 탓에 도적떼가 들끓고 사방이 우습게 안다.'[85]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위엄이 없으므로 외침이 끊이질 않는다.'[86] <7세기 전반기 新羅 危機意識의 실상과 皇龍寺9층木塔>, 《신라사학회보》 제30호, 2014[87] 다만 해당 논문은 "이 과정에서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검토 결과가 반영되겠지만, 논지 전개 과정에서 소개될 것이며 따로 연구성과 검토 형식으로 다루지는 않겠다" 라는 주석이 존재하거나 내용상으로도 기존 연구로부터 지나치게 돌출되어 있어, 많은 부분을 인용하는 것은 좀 조심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고구려는 20년간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데, 이러니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하려는 박승범의 주장으로 인해 선덕여왕의 대외적 약세를 양면전선이라는 논리로 변호하기 불가능해진다는 역설이 발생하게 되기도 한다.[88] 비담이 난을 일으키며 내건 명분인 '여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라는 구호 때문이다. 여기서의 '여주'가 그저 '선덕여왕 개인'을 말하는 것인지, '여성 군주 자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후계자인 진덕여왕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89] 다만 주보돈 교수 등의 진덕여왕 즉위 반대설에 따르면 비담의 난 등은 그러한 부담이 현실로 드러난 셈이다.[90] 《삼국사기》 진평왕 48년(625)[91] 《삼국사기》의 기록과 자매 순서가 바뀌어 있다. 또한 선덕여왕은 중년의 나이에 즉위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지만, 《화랑세기》에서는 친언니 천명공주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여성으로 등장한다.[92] 덕만이 여왕이 되기 위해 이복 남동생의 암살을 사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피할 수 없지만, 《화랑세기》는 주류 사학계에서 소설책 취급을 받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듯하다.[93] 사실 근친혼의 부작용 중 하나가 불임이다.[94] 같은 예로 《삼국유사》는 진성여왕의 이야기에도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하나 '위홍, 잡간 등 서너 명의 총애받는 신하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부려서 정치가 흔들렸다. 그러자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등 말기의 혼란상을 묘사하는 부정적인 기록만이 남아 있고, 고려에 항복한 마지막 왕 경순왕의 경우에도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고 표현하였다.[95] 자매인 천명공주의 손윗 언니인지 손아래 여동생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이 장녀로 기록되어 있으나 《화랑세기》에는 천명이 장녀이고 덕만이 차녀라고 기록되어 있다. 《화랑세기》에서는 부왕 진평왕이 차녀인 덕만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뜻을 보이자 효심이 지극했던 천명공주가 스스로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고 나와 있다. 왕조 국가에서 제 1계승권자가 왕의 적장자가 아닌 경우, 후계 구도에 있어서 형제간의 순서나 종법상 순서에 약간이라도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왕의 장녀가 제 1계승권자인 이 상황에서 왕의 차녀가 왕이 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천명과 덕만이 이복자매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천명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고 천명의 아들인 김춘추는 진덕여왕 사후 알천보다도 계승권이 낮았다. 만약 천명이 서녀라면, 신분이 낮은 후궁의 자식은 방계 종친보다 계승권이 낮았던 고려 이전의 풍습상 서녀 천명을 어머니로 둔 김춘추의 왕위 계승권이 낮았던 이유가 설명된다. 물론 아직까지 천명과 덕만이 이복자매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 참고만 할 것.[96] 《삼국유사》에서 진평왕의 3녀로 기록되어 있지만 설화상에만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실존하더라도 진평왕의 딸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녀와 무왕이 얽힌 <서동요 설화>에 대해서 가능성은 커녕 진위조차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