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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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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파일:attachment/이승훈/11.jpg
출생 <colbgcolor=#fff,#191919>1864년 3월 25일
조선 평안도 정주목 갈지통 익성리[1]#
사망 1930년 5월 9일 (향년 66세)
평안북도 정주군
본관 여주 이씨(驪州 李氏)
별칭 본명(本名)은 이인환(李寅煥)
아명(兒名)은 승일(昇日)
자(字)는 승훈(昇薰)
아호는 남강(南岡)
직업 독립운동가, 목사, 교육가, 사업가
가족 이석주(부), 홍주 김씨(모), 이승모(형)
학력 오산학교(설립)
종교 유교 (성리학)기독교 (개신교, 장로회)
조직 만민공동회, 신민회, 자면회, 조선 교육 협회
의거 3.1 운동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교육자. 호는 남강. 본관여주(驪州). 본명은 이인환.

2. 생애

1864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태어났다. 양민 출신.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지만 16세에 유기상 알바를 시작으로 보부상을 거쳐 10년만에 대상인이 되었다.[2][3]

하지만 그 무렵 하필이면 청일 전쟁이 발발하고 남강이 사업을 벌이던 지역인 평안도가 전장이 되고 말았다. 그 탓에 재산을 모두 잃게 된다. 몇 년 후 다시 재기에 성공했더니 이번에는 러일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처음 이승훈이 사업을 시작했을 때, 자본이 없어 중국인삼 사무역으로 치부했던 조선 제일의 거부 오삭주[4]를 찾아가 돈을 빌렸다. 오삭주는 이승훈의 재목을 보고 거리낌없이 돈을 빌려주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사업이 거덜나자, 이승훈은 오삭주에게 다시 찾아가 "다시 자본을 대주시면 이번에는 제대로 일해 갚겠습니다"라며 당당히 요구했고, 이승훈의 진솔함에 탄복한 오삭주는 일전에 빌린 빚을 탕감해주며 물심양면 이승훈을 지원했다.[5]

이승훈은 불굴의 의지로 다시 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그 돈으로 능참봉직을 사서 여태 못해봤던 양반 행세를 하였다.[6] 그러다가 안창호의 교육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그의 화려한 언변[7]에 감동을 받아[8] 신민회에 들어가 평안북도 정주군에 신식 교육 기관인 오산 학교[9], 강명의숙 등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교육자의 길을 가게 된다. 서적 출판을 담당하던 태극 서관도 이 사람의 작품.

그 후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를 가고, 105인사건으로 인해 유배 중에 감옥으로 끌려가 10년형을 언도받고, 5년만에 가출옥하였다. 그 동안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개신교 대표로 참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로 인해 또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고, 33인 중 가장 늦게 출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 오산학교 교장으로 살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며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에 힘쓰는 한편, 농촌 진흥에 노력을 기울이다 1930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3. 기타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내 사랑하는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10]
나라가 있어야지 종교가 있지! 그럼 일본이 종교만 인정하면 일본이라도 상관없는 거 아니냐? 제발 경솔하게 종교부터 따지지 마라!

4. 대중매체에서



[1] 시인 백석도 이 마을 출신이다.[2] 남강의 형 이승익의 고손자인 사학자 이기백 선생에 의하면, 남강의 가문은 사실 천민 집안이었다고 한다. 이기백이 생전에 쓴 <남강 이승훈의 일면>에서는, "여주 이씨 족보를 뒤져도 남강의 가계인 평안도 일파의 존재가 아예 없다"고 했다. 아마 윗대에서 조선 말기 사회적 혼란을 틈타 양반을 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남강의 고향 평안도조선 시대부터 차별받던 지역이었다(홍경래의 난 등). 그러니 멀쩡한 양반 가문일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3] 젊은 시절부터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던 덕분에 체력도 튼튼했고, 딱히 잔병치레한 적도 없었다. 특히 다른 사람들 눈에 축지법이라 보일 정도로 평소 걸음걸이가 엄청 빨랐다고 전해진다.[4] 본명은 오희순. 평안북도 삭주군 군수직을 돈으로 사서 '오삭주'라 불렸다. 이때 이승훈이 오삭주 눈에 뜬 계기가 재미있다. 오삭주는 나이가 들자 돈을 노리고 꼬이는 아첨배들의 아부를 들으며 매일을 소일거리로 보내고 있었다. 젊은 남강이 오삭주의 사랑채에 돈을 빌리기 위해 모여있는데 오삭주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기 친척의 치부를 까발리고 흉을 보는 것이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오삭주의 말에 굽신거리며 맞장구를 쳤지만, 오직 이승훈 혼자만이 떳떳하게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지적했다. 오삭주는 순간 무척 화가 났지만 생각해보니 자신도 남들 앞에서 자기 친척을 욕했으니 결과적으로 자기 체면 깎아먹는 짓이였다. 자신의 실수를 지적해준 남강의 행동에 오삭주는 그동안 자신의 행실을 반성하고 보답으로 그를 전력으로 후원해주었다.[5] 공교롭게도 정주영이나 신격호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6] 이승훈이 불법으로 능참봉직을 산 것은 아니다. 당시 조정에서 공명첩을 통해 조정에 일정 금액 이상의 돈을 기부하면 능참봉 벼슬을 주고 양반으로 인정하였다.[7]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나혼자 호의호식하면 무엇하느냐[8] 비슷한 예로 여운형과 조만식이 있다. 여러모로 안창호는 놀라운 인물이다.[9] 지금의 서울 오산 중학교, 오산 고등학교.[10] 물론 지켜지진 않았다. 일본의 방해였다는 설도 있으나, 애시당초 유교적 윤리가 남아 있던 조선에서 고인의 유해를 함부로 하긴 어려웠을 터이다.[11] 숭실학교, 숭의여학교도 이와 같은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