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나랏말싸미/평가
1. 개요
2019년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와 관련된 논란을 다룬 문서.2. 역사 왜곡
영화 내에서 한글 창제 과정에 신미라는 중이 깊이 관여한다는 것과 하술될 여러가지 이유로 역사왜곡이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글은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했다는 것이 확고한 정설이며 이 영화가 묘사하는 신미 창제설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로 명확한 근거가 없다.
이 영화는 "훈민정음의 다양한 창제설 가운데 하나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역사왜곡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다양한 창제설 가운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저 자막으로 인해 신미 창제설 역시 세종대왕 친제설과 동급의 '학설'이라고 관객에게 인식시킬 우려가 있고,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이 잘못된 상식을 배울 가능성이 생긴다. 차라리 모든 게 픽션이라고 못박아둔 채 시작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비판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1]
더군다나 홍보 포스터 및 줄거리 소개글에는 '역사가 담지 못한 한글의 시작',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처럼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구들이 있어, 영화의 내용은 허구라고 인식할 사람들도 신미 창제설 자체는 학계의 주장 중 하나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국어학자 정광[2]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한글 창제에 불교계의 협력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국어학계에서 정광 교수 정도만 주장하는 소수설일 뿐만 아니라, 정 교수조차도 '신미대사가 주도해서 한글을 창제하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세종대왕이 주도하되 신미가 도와주었다는 것. 하지만 나랏말싸미에 따르면, 한글 창제의 주역은 신미이고 세종은 거기에 숟가락만 얹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감독인 조철현은 위 인터뷰 이미지에서 보이듯 불교계 언론 인터뷰에서 그 자막은 넣고 싶지 않았다거나, 단순한 영화적 인물이 아니라고 하며 신미 창제설을 지지해서 더욱 안 좋은 의미로 주목을 받았다.
2.1. 등장인물의 행동에 대한 논란
2.1.1. 하대받는 세종대왕
일개 중 따위에 불과한 신미가 공식 석상에서 세종대왕의 면전에 "주상은 왕의 탈을 쓴 거지요!"라는 돌발 발언을 하는데, 조선 같은 완전한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이러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즉결 참수다.[4]
국가의 형태가 제대로 구성되지 못한 고대 군장 국가의 왕이라면 왕이 직접 '어허허 배짱 좋은 사내일세' 하고 넘기는 일이 가능했을지 모르나 조선은 완벽하게 중앙집권제와 관료제가 완성된 국가였다. 형식상으로 왕이 모든 것의 소유자이지만 왕 마음대로 할 수 없게 체제가 갖춰진 국가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국가 그 자체인 왕을 공식 석상의 면전에서 매도한다면 왕은 관대하게 넘어가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왕이 설령 봐준다고 해도 주변 신하들이 나서서 저 자를 참하고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셔야 한다는 상소를 끝없이 올리게 된다.
조선에서는 군신관계가 명확하며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을 중시한 성리학이 주류 이념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 속에서 신미와 다른 중들은 물론, 왕과 왕후, 신하들까지 예절도, 군군신신(君君臣臣)의 근본도 없이 행동한다. 신하들이 세종대왕에게 무례하게 대하던 부분은 결말 부분에서 절정으로 치달아 세종이 신하들에게 "너희가 도와주지 않으면 무엇도 될 수 없는 늙고 병든 임금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훈민정음 반포를 도와달라고 빈다.
하지만 실제론 세종대왕 시기는 조선 왕조 중에서도 왕권이 가장 막강했던 시대로 손꼽힌다. 선왕인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권을 차지한 후 반대파와 공신들을 축출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바로 다음에 재위에 오른 세종의 왕권이 얼마나 드높았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게다가 태종이 주변 친인척을 싸그리 정리해줘서 세종에겐 정적이 될 사람도 없었다.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도 최만리, 정창손 등 반포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가차없이 가두거나 귀양 보내며 파직시켰고,[5] 심지어 당시 유력 학자들을 상대로 "너희가 사성 칠음을 아느냐?" 하고 일갈하며 크게 화를 내고는 설전으로 뭉개버렸다.[6] 훈민정음 반포 자체도 세종의 강력한 왕권을 이용해 왕 본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런 세종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어이가 없는 상황.
물론 훈민정음 창제 시기에는 세종이 시력을 상실해가는 중이었으므로 세종이 건강을 잃은 것은 맞다. 그러나 당시에는 장성한 적장자인 문종이 있었기 때문에 왕권 보위에는 상관이 없었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세종을 보필하고 있었다.
또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읽어보면 정인지와 신숙주를 비롯한 소수 엘리트 실무진이 집중적으로 작업했고, 소규모 작업이니만큼 믿고 맡길 만한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신미의 참여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세종 본인이 자녀들 및 최고의 인재들을 실무진으로 구성해서 작업했는데 신미의 입지가 얼마나 클지는 미지수다.[7]
전대 왕 태종이 작정하고 외척을 박살내거나 발언권이 너무 강해질 수 있는 공신들을 냉혹하게 숙청한 이유도 확실한 중앙집권의 기반을 다져 세종대왕에게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주려는 밑작업이었다.[8] 세종대왕이 그 무수한 업적들을 이루며 조선 왕조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것도, 태종이 미리 손을 쓰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을 수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또한 세종 본인도 성군이지만 동시에 철인 군주로서[9] 선정을 펼치고 군사력 강화를 꾀하여 그러한 태종의 기대에 부응하고 더 좋은 모습이 나올 수 있었다.[10] 그런 시기를 세도정치 시기 왕권보다도 못한 막장으로 만든 것도 큰 문제다.
그리고 설령 왕권이 약한 시기였다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한가지 문제점은 남는다. 당시 숭유억불 정책이 매우 강력하였다는 것.[11] 일개 중들이 그것도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은 국가의 최고 존엄인 왕의 면전에다 저런 말을 했는데 게다가 그 시기가 한창 불교계 탄압이 심할 때였다. 유학자들 입장에서는 왕에 대한 충성심이고 자시고 간에 본인들 신념 상 눈엣가시인 불교계를 강력히 탄압할 수 있는 명분이 등장한 셈이다. 이 정도면 왕이 넘어가려 하더라도 대의명분을 가진 대신과 선비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처벌을 피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캐쥬얼한 퓨전 판타지 사극이면 모를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진실을 그려냈다."라는 문구를 캐치프레이즈로 삼는 영화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설정이다.
2.1.2. 입지를 절하당한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본편에서는 예고편의 우려를 종식시키기는커녕 한 술 더 뜸을 보여주어 더욱 논란이 되었다. 예고편에 나왔던 신미가 세종대왕에게 막말을 하는 장면은, 세종과 독대하는 장면도 아니고 바로 뒤에 세종의 아들들을 두고 있는 장면이었다. 헌데 일개 중 따위가 자신들의 아버지이자 조선의 임금에게 감히 막말을 하는데 왕자들은 쥐 죽은 듯 입을 다물고, 심지어 세종마저 울먹거리며 입술만 바르르 떤다. 더군다나 세종 치세 때에도 태조로부터 점차적으로 이어진 숭유억불 때문에 불교의 영향력이 미미해졌던 시기이므로, 일개 중 따위가 왕족에게 훈계는커녕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크게 경을 칠 수도 있었다.영화 내내 일개 중이 궁궐에서 왕과 동급인 양 행세하며, 왕의 아들, 그것도 정실 소생의 '대군'들을 자기 제자들과 동급으로 대한다. 정상적인 제왕학을 배운 왕손이라면 가만 둬서는 안 될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심지어 신미가 중들에게 "파스파 문자와 산스크리트 문자를 가르칠 때까지 대군들이 방을 못 나가게 하라." 하고 명령한다. 후일 세조가 되어 왕권강화를 중요시한 현실의 수양대군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12]
그리고 더 웃긴 사실은 실제 역사에서 수양대군과 신미는 오히려 친했다는 것이다. 훗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월인석보를 만들 때 가장 앞장선 이가 바로 신미이다. 게다가 신미의 동생이자 집현전 학사였던 김수온 또한 수양대군에게 총애를 받았다. 중국까지 이름을 떨친 문학적 천재가 안평대군인데, '감독이 이러한 기록들을 알기는 하는지 의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2.1.3. 유학자들의 비유학적인 태도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미는 제도 바깥에 있는 중이라는 최소한의 변명거리라도 있지[13], 작중 신하들의 태도조차 도저히 조선의 임금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왕의 면전에서 면박을 주질 않나,[14]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직전에는 "이러시면 주상의 신하가 될 수 없습니다!"라는 그야말로 반역을 의미하는 협박까지 해 버린다. 왕이 친히 책을 하사하자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어좌에 앉아 있는 왕을 면전에 두고 궁에서 나가버린다(...).심지어 신하들이 반발하면서 '우리가 주상 신하이기는 하지만 결국 주상도 중국 입장에서 보면 신하니까 당신이나 우리나 다 신하다.'라는 대놓고 계급장 떼고 붙자는 미친 소리까지 한다. 조선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군주제 형식을 따르는 나라에서는 아무리 힘없는 왕이라고 할지라도 왕 앞에서 저따위 소리를 하는 건 '날 죽여서 왕권을 키우십시오' 하는 소리나 다름없다. 심지어 세종대왕 시기는 조선 초기인 데다 세종은 당대에도 엄청난 왕권을 가진 강력한 왕이었다. 왕 앞에서 저런 소리를 했다면 '나는 너를 임금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반역 수준이 아닌 말 그대로 그냥 반역이다.
세종이 흔히 대중매체 등에서 너그럽고 인심 좋은 사람으로 묘사되어서 그렇지, 그가 즉위하기 전 태종 이방원은 그야말로 피바람을 불러일으켜 왕권을 매우 높여 놓았다. 이속의 사례를 보자. 태종이 자신의 서녀와 이속의 아들의 혼인을 추진하자 이속은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니 옹주와 우리 집안이 혼인할 수 없다'고 대놓고 말했다가 곤장 100대를 맞았고, 신하들이 벌이 너무 약하다고 들고 일어나 결국 가문까지 박살났다. 세종은 아버지가 피로 쌓은 강력한 왕권 위에 집권한 왕이고 그 왕권을 스스로 실추시킨 일은 없었다. 또한 조공책봉관계를 마치 군신관계인 것처럼 왜곡하는 짓도 저질렀다.[15] 조신시대의 동앙시아 국제질서에서 조공책봉 관계는 그냥 이름만 신하가 되는 방식이지 현대관점으로 보면 그냥 유엔이나 무역기구 가입에 가까운 일이었다. 조공 자체도 잘 알려져있다시피 뜯기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하사품을 받는 관계였고, 중국 주변 국가들이 그런 조공 관계를 알아서 원하고 신하로 책봉받는 형식을 취한건 중국의 군신관계로 조인이 되어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최대시장의 무역 및 안보기구에 가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를 진짜 무슨 중국의 신하로서 중국 밑에 들어가 조아리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심히 곤란한 일,,, 국뽕 타령하면서 친일파 짓하는 네티즌들이 자주 언급하는게 중국의 속국이었다는식의 언급인데 사실 그 당시는 형식상 일본도 중국의 신하였고 오히려 일본은 변두리 섬나라 취급이라 급이 낮다며 저 관계에 안받아주니 계속 사정하며 가입시켜달라고 보챈 적도 있던게 저 조공책봉관계다.
아무리 허수아비 왕이고, 심지어 저능아라서 정상적인 생활이 안 되는 사람이 왕이라 할지라도, 조선왕조라는 체계는 신하들이 그 왕 앞에서는 대놓고 저런 짓거리를 할 수 없는 체제였다. 아무리 실권이 없고 외척에 휘둘리는 왕이었다고 할지라도 신하들은 임금 면전 앞에서는 용안조차도 함부로 마주보지 않았다. 불안한 기반에서 즉위하고 성격이 유해 보이던 경종조차도 신임사화를 일으킬 수 있었는데,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안정된 기반을 물려받은 세종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하를 숙청할 수 있다.[16]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하소서체는 어디 갔다 버렸는지, 신하들이 왕에게 반대할 때 단골로 나오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같은 공손한 어휘도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히 임금에게 하시오, 하십시오, 하세요 등의 하오체나 해요체와 같은, 동등하거나 친한 관계의 사람에게나 사용할 법한 어미를 대놓고 사용하며 반대한다. 그래도 세종대왕은 굳은 표정으로 듣고만 있다.
유학자들은 모두 고루한 꼰대라는 편견으로 대신들을 부정적으로 그렸지만, 세종대왕 시대는 성리학이 교조화되기도 전인 데다가 조정에 인재가 많았다.[17] 심지어 이 때는 황희도 영의정에 있을 때라, 세종과 신하들을 중재하면 하지, 같이 무시하진 않았다. 게다가 세종은 재위기간 동안 성군으로 추앙받고 왕권까지 강해 신하들의 기본감정은 존경심이지 무시가 아니므로 대신들이 이런 막가파식 행보를 할 가능성이 전무하다. 최소한 "성리학에 밝고 성군이신 주상께서, 어찌하여 중놈과 함께 문자를 만든다는 말씀이십니까!" 하는 대사라도 있어야 그나마 정상적이다.
사실 조선 사대부들이 사적으로는 한글을 무시하고 천대할지라도, 공식적으로는 중요한 업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이유는 당연히 왕이 직접 창제한 문자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까지 무시하는 건 자길 죽여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즉, 한글에 부정적인 사대부라도 '전하께서 언문을 만드신 건 여자들이나 아랫것들이 쉽게 배울 수 있게 하심이니, 우린 예전처럼 한문을 쓰면 된다.'는 정도로 인식했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왕 앞에서 왕이 손수 창제한 글자를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묘사는, 조선시대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는 뜻이다.[18]
그리고 교태전[19]에 중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 신하들이 '중전을 탄핵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중전을 퇴출시키려면 폐한다고 하거나 폐비가 될 것이라고 해야 맞다. 현대인을 위해 알기 쉬운 용어로 바꿨다기엔, 폐비는 폐비 윤씨라는 유명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낯선 용어도 아니다. 또한 조선이 숭유억불했다고 불교와 접촉하는 자체가 군사정권 당시 사회주의 서적을 본 것 정도 되는 양 묘사하지만, 이것도 틀렸다.
조선 왕실은 외유내불이라 할 정도로 불교에 호의적이었고, 불교에 부정적인 유학 군주가 재위할 때도 대비나 왕비는 불교를 믿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궁에 중을 끌어들인 건 사대부들이 용인해줄 정도를 넘어섰다 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중들을 내치라고 주청할 일이지, 폐비를 입에 담는 건 아무리 숭유억불해도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당시 세종대왕은 애처가, 세자는 효자였다. 현재의 왕비, 미래의 임금의 어머니인 소헌왕후를 내쫓을 수도 있다 운운은 선을 한참 넘은 극언으로, 사화의 명분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조선왕조 500년간 불교를 믿지 않은 비빈을 꼽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대부분 비빈들이 불교를 믿었다. 문정왕후마냥 아예 강력한 권력으로 수렴청정하며 여왕과 같은 권력을 손에 쥔 경우는 제외하자. 당장 세종의 생모인 원경왕후 민씨도 궁에 중을 부른 적이 있다. 그때 태종은 어떻게든 본처와 처가를 멀리하려 하였고 왕비를 빈으로 격하시키려는 취지로 발언도 했던, 게다가 철저하게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끌고 갔던 이었음에도 왕비가 불교를 믿고 중을 궁 안에 들였음을 문제 삼지 않았다.
게다가 세종 때는 훗날 성종 때처럼 금승법을 시행하지도 않았기에 더더욱 문제 삼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러니까 신하들은 아무런 죄도 없고, 세자를 비롯한 자녀들을 많이 낳았고(8남 2녀), 친족이 멸문하였음에도 후덕하여 원망하지 않았던 왕비의 폐비를 거론하였다는 것이다.[20]
조선 역사상 폐비는 성종 때의 폐비 윤씨와 중종 때의 단경왕후 신씨 등 몇 사례가 없다. 중종은 반정으로 집권하였다는 그 자신의 특성 때문에 반정 과정에서 제거되었던 신수근의 딸인 신씨(단경왕후)를 폐비하였던 것이므로 세종 때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폐비 윤씨는 끊임없는 투기와 시기심으로 저주 시도를 하기도 하였으며 역모성 발언을 하는 등 반역죄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기에 이 또한 소헌왕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따라서 소헌왕후 폐비 제기 장면은 기록되어 있지도 않으며, 있었을 리도 없고, 있었을 만한 이유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꽉 막힌 신하들과 사대부를 표현하기 위한 역사왜곡'으로서 들어갔다.
조선을 흔히 군약신강의 나라라고 하지만, 유약한 듯 보이던 경종도 선을 넘으면 유약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섭게 돌변해 신하들을 숙청할 수 있었다. 더구나 세종 재위기는 군약신강과 거리가 먼, 왕권이 강한 시대였다. 결국 이 부분도 조선시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 만든 장면에 불과하다. 그렇게 조선시대를 모르는 사람들이 제작하여 흥행에 실패한 사극들 중 본작과 시대적 배경이 겹치는 사극으로 장영실이 대표적이다.
2.1.4. 과하게 강조된 중들의 입지
상술했듯 조선은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 이어져온 강력한 불교적 관념을 철폐하고 유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자리잡기 위해 이성계와 이방원에 걸친 압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중에 등장하는 중들의 입지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점이 큰 왜곡 문제로 지적받는다.신미와 같이 온 꼬마중[21]이 대표적 예시로, 일개 또래 궁녀에게도 존댓말을 쓰지만 국왕 앞에서는 사의도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당당하게 해요체로 말한다. 해요체는 당장 근현대를 거치면서 겨우 보편적인 말투로 발돋움한 말투일 뿐만 아니라, 연장자를 공경하는 당시 시대에 어디 고승이나 마을 어르신에게도 하지 못할 무례한 태도였다. 묵언수행을 하던 어느 중[22]은 "아, 시방-" 하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왕 앞에서 이리저리 삿대질도 한다!
위 문단들에서도 서술했듯 실제 역사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모두 지체 없이 극형을 받았을 터이나,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감독이 충분히 의도하여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중들의 행위들이 역사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다면 영화적 허용으로 볼 여지가 있지만, 이 영화는 이미 선을 넘은지 오래라 그런 관대한 시선도 무의미하다.
신미가 데려온 위 꼬마중과 묵언수행을 하던 중들은 전부 세조 시대 실존인물이다. 단지 세조 초에 신미와 함께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고, 대법회를 주관한 기록이 있기에 억지로 각색한 것뿐이다. 이들이 출가한 곳도 다르므로, 영화와는 달리 동문이 아니다.[23]
이러한 일련의 장치들은 현대보다 더욱 극심했을 조선시대의 '상하관계' 개념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지나친 과장이었기 때문에, 고증 면에서 보나 관객의 재미 면에서 보나 처참한 실패의 사례로 조명되고 있다. B급 코미디 장르를 표방한 퓨전사극물에서나 찾아볼 법한 저급한 표현 방식을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사극물의 형식은 챙기려는 과욕을 부린 셈.
2.2. 한글 창제에 대한 역사 왜곡
영화에서는 한글 창제의 숨겨진 내막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문제는 이 내막들이라는 설정이 전부 허구라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신미가 올라오기 전까지는 국어의 기본적인 음운 정리조차 하지 않았다. 신미가 시작하자고 하자 그제서야 대군들과 다른 중들과 함께 "ㄱ-음으로 시작하는 단어는 개구리, ㄴ-음으로 시작하는 단어는…" 하며 연구를 시작한다.[24]
- 영화 초반부에 "중국 서적을 모두 읽었는데도 글자 창제를 할 수 없었다." 하고 한탄하던 세종은, 중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기 아들들이 들려주는 중국어의 성모와 운모에 대한 해설을 듣고 그제서야 음운에 대해 이해한다. 세종은 과연 무슨 책을 읽었던 것일까?
- 세종은 자음부터 모음까지 자기 손으로 만든 글자가 하나도 없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만 던져주고[25] 실제로 만드는 작업은 신미와 보조하는 중 2명이 열심히 연구하여 한 것이고, 중들이 시연해 보이자 세종 자신은 좋다 나쁘다 검수만 했다.
- 국왕이자 유학자인[26] 세종이 한글을 만들기 위해 불경을 공부하고, 대장경에 들어있는 글자의 원리를 얻고자 노력하고, 신미와 둘이 있을 때는 "불교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따위 말을 하면서 작중 유교를 비판하는 듯한 사상을 내비친다.
- 집현전 학자들 역시 신미가 등장하기 전까지 왕과 다른 공부[27]만 했으며[28], 조정 대신들과 함께 한글 창제를 반대하며 왕에게 쓴소리만 하다가 한글이 완성되자 불교의 공적을 유교의 공적으로 가로채고 역사를 날조해 실록에 적었다.[29][30][31]
2.2.1. 신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
신미가 한글 창제에 도움을 주었다는 설은 재야사학조차 아닌, 이미 거짓말임이 밝혀진 역사왜곡이다. 불교계를 위시한 일부에서 신미가 한글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데 공을 세웠다는 업적에 '창제에까지 참여했다.'는 낭설을 붙인 허구 내지는 미신이다. 신미는 최초의 한글 불경 해설서인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의 저자로 알려졌지만, 이마저도 진짜 한글 창제에 참여한 수양대군과 같이 지었다.[32]법호를 근거로 한글 창제의 공적을 인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 조정이 신미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33]라는 법호를 내리긴 했지만, 이런 법호를 내린 이유가 한글 창제의 공적 때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34] (한글/역사, 불교/대한민국 문서 참조.) 오히려 이 법호는 신미가 한글 창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근거도 되는데, 당장 문종대에 우국이세(祐國利世)가 삭제되기 때문이다.
문종실록에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온다.
- 문종 즉위년(1450) 7월 15일 기사 박팽년이 신미 칭호의 부당함을 상소함.
- 문종 즉위년 7월 16일 기사 사헌부에서 신미의 칭호가 부당함을 상소함
- 문종 즉위년 7월 17일 기사 대사헌 이승손, 어효첨, 신숙주 등이 신미 칭호의 부당함을 아룀
- 문종 즉위년 7월 18일 기사 대사헌 이승손이 신미의 호를 삭제하도록 청함
위처럼 문종 즉위 후 유학자들이 맹렬히 반대하여 신미의 법호 중 일부가 바로 삭제되었다. 만약 한글 창제에 공이 커서 받은 법호였다면 함부로 삭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 한글의 위상은 높지 않았으므로[35] 공으로 인정 못하는 분위기였으리라 가정할 수는 있지만, 명백한 허구이기에 가정은 필요없다.
또한 임금이 중에게 내린 법호나 시호에 '세상을/사람을 이롭게 했다.'는 구절이야 쉬 넣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에서 유일한 공식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1392년 태조로부터 받은 법호에는 '널리 이롭게 하고 중생을 제도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홍리보제(弘利普濟)란 구절이 있다. 무학의 스승이기도 한 고려말의 고승 나옹화상(懶翁和尙)은 공민왕 20년(1371)에 공민왕으로부터 발우와 함께 긴 법호를 하사받았는데, 이 법호에도 '나라에 복이 되고 세상을 도와 널리 구제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복국우세보제(福國祐世普濟)란 구절이 있다.
심지어 고려시대에 의천은 문종 21년(1067), 고작 13살 나이에 아버지 문종으로부터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廣智開宗弘眞祐世僧統)'이라는 거창한 법호를 받았다. 이중 '우세(祐世)'란 구절은 '세상을 도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의천은 본디 문종 9년(1055)에 왕자로 태어났으나, 부왕의 뜻에 따라 11살 되는 문종 19년(1065)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저 법호를 받은 때는 고작 나이 13살, 출가한 지 2년 뒤이다. 의천이 나이 13살, 중이 된 지 2년 만에 무슨 대단한 고승이 되었다고 저런 법호를 받았겠는가? 의천이 무슨 세상에 대단한 일을 했다고 법호에 '우세'라는 거창한 표현이 들어갔겠는가?
대승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즉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함을 이상적인 자세로 삼는다. 그러니 임금이 대승의 중을 칭송하여 내린 법호에 '세상을 도왔다.' 하는 내용이 들어갔다고 특별한 일이 아니다. 대승의 중에게 '깨달음만 구했다.'고 하면 소승불교의 중이나 다름없다는 욕이 될 수도 있으니...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한 것은 다수의 논문과 근거자료가 있는 정사인데, 정사가 아닌 창작된 내용을 가지고 한글 창제의 숨겨진 비밀인 양 찍었으며, 단순히 연출적 요소를 넘어 이를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 양 선전하는 것은 문제가 크다.[36] 또한 조선시대의 기록은 고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속기록처럼 사관이 정확하게 남겨 놓는다. 조선왕조실록에 문종이 직접 '세종이 생전 신미의 이름을 들은 때가 1446년, 만난 때가 1450년'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에 영향을 줄 수가 없다. 즉, 한글이 반포된 이후에 보급에 참여한 것이다.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ruby(大, ruby=대)][ruby(行, ruby=행)][ruby(王, ruby=왕)], [ruby(自, ruby=자)][ruby(丙, ruby=병)][ruby(寅, ruby=인)][ruby(年, ruby=년)][ruby(始, ruby=시)][ruby(知, ruby=지)][ruby(信, ruby=신)][ruby(眉, ruby=미)][ruby(名, ruby=명)], [ruby(今, ruby=금)][ruby(年, ruby=년)][ruby(移, ruby=이)][ruby(御, ruby=어)][ruby(孝, ruby=효)][ruby(寧, ruby=령)][ruby(第, ruby=제)], [ruby(精, ruby=정)][ruby(勤, ruby=근)][ruby(之, ruby=지)][ruby(時, ruby=시)], [ruby(接, ruby=접)][ruby(見, ruby=견)][ruby(優, ruby=우)][ruby(待, ruby=대)], [ruby(卿, ruby=경)][ruby(等, ruby=등)][ruby(所, ruby=소)][ruby(知, ruby=지)][ruby(也, ruby=야)]。
대행왕(세종대왕)께서 병인년(1446)부터 비로소 신미의 이름을 들으셨었는데, 금년에는 효령대군의 사제(私第)로 옮겨 거처하여 정근[37]하실 때에 불러 보시고 우대하신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1450) 4월 6일자 기사 ,(출처:국사편찬위원회),
대행왕(세종대왕)께서 병인년(1446)부터 비로소 신미의 이름을 들으셨었는데, 금년에는 효령대군의 사제(私第)로 옮겨 거처하여 정근[37]하실 때에 불러 보시고 우대하신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1450) 4월 6일자 기사 ,(출처:국사편찬위원회),
또 불교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와 불교와 관련이 있다는 근거로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를 위해 제작한 석보상절이 뜬금없이 한글로 언해되었으니 훈민정음 창제와 불교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끼워 맞추기에 불과해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당시 훈민정음에 유학자들이 냉담하여 세종대왕이 고심하던 차에, 수양대군이 소헌왕후에게 지어 바친 석보를 보고 수양대군에게 '석보를 좀 더 보완하여 언해본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아들이 평소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일로 효행이므로 유학자들이 직접적으로 반발하기 어렵고, 당시 수양대군이 왕세자가 아닌 왕자이기에 큰 부담 없이 공개적으로 훈민정음을 활용하기 편한 입장이었다. 또한 감독이 인터뷰에서 근거로 언급한 용재총화의 훈민정음 기록은 객관적인 기록이라기에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고, <용재총화>는 '개인적인 문집'으로 민속학이나 구비문학연구의 자료로만 사용된다.# <용재총화>의 훈민정음 기록은, 당시 비공개로 진행되었던 한글 창제를 두고 나온 야사에 불과하다. 오히려 산스크리트어와 연관 있다 운운은 유학자들의 부정적인 생각이 드러난 낭설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세종이 불경에서나 쓰이는 문자를 모방해서 내놓았다고 생각했는데도 신미를 언급하지 않음은, 신미의 한글 창제 주장과 상반되는 부분이다.
이처럼 신미가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는 주장의 헛점은 역설적으로 최만리와 같은 한글창제 반대자들에게서 드러난다. 당장 최만리와 같이 훈민정음 창작을 반대한 사람은 넘쳐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유학을 국시로 삼는 나라의 왕이, 망령되이 천한 중과 놀아난다!!" 하고 지적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를 두고 '오랑캐들의 애비도 없는 종교(無父之敎)'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낼 정도로 숭유억불 이데올로기가 강했던 조선에서, 감히 중 따위가 임금을 만나면서 이상한 글자를 만든다고 했으면 반대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먹잇감이었겠지만, 그들 중 누구도 '어찌하여 임금님이 중 따위와…' 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꽤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던 이야기지만, 불교 측 자료조차 없음은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다. 산중에 있는 절에서는 불교의 기록을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 자랑스러워야 할 한글창제의 기록이 도대체 왜 없는지부터 반문해야 될 부분이다. 이미 위서가 등장한 시점에서 음모론으로 끝나버린 이야기였다. '우리들이 못하니까 세종대왕도 못했을 것이다.' 운운은 아집이지 논리가 아니다.
2.2.2. 감독이 관련 저서를 참고했다?
감독이 참고하였다는 <한글의 발명>이나 <훈민정음의 길> 역시 야사의 일화를 기반으로 하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한글의 발명>에서 나오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차녀 정의공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다는 주장은 요 몇년간 한소진의 소설 <정의공주>가 주목받으며 페미니즘 관련 커뮤니티에서 급부상한 설로, 근거 중 하나로 1976년에 편찬된 죽산안씨대동보[39]를 제시한다. 그러나 죽산안씨대동보의 정의공주 문구에는 후대에 공주를 기리고 칭송하기 위해 쓰여진 명백한 과장이 섞여 있으며, 무엇보다 교차검증을 할 수 없는 일방적인 서술에 불과하여 신용하기 어렵다. 게다가 1976년에 편찬된 죽산안씨대동보는 문중 자체적으로 재현을 두고 진위논란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야사를 근거로 역사를 주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흥미롭지만, 그 정도를 넘어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인정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애당초 영화에는 정의공주도 안 나온다.2.2.3. 세종대왕이 글자 발명을 위해 산스크리트어(범어) 등의 자문을 구했다?
창제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한글은 음양, 오행, 삼재 등 성리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청음, 탁음 등 당시 음운학의 이론과 원리에 기반하여 지었다. 자모음을 설명할 때도 자음은 오행, 모음은 음양과 삼재를 기반으로 하여 이러한 원리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범어(산스크리트어)의 문자를 기반으로 하였다면 세종대왕 스스로 밝힌 창제 원리는 거짓말이고 범어에서 사용하는 문자를 성리학에 억지로 끼워 맞추었다는 모순적인 말이 된다.이는 나랏말싸미가 한글 창제의 주체를 유교와 유학자가 아닌, 불교와 불자들로 대체하는 낭설을 주장하기 위해 한글과 아무 연관도 없는 불교적 의미가 진할 뿐인 범어를 언급한 것으로 추정되며, 과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나 범어 문자와 훈민정음의 연관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없는, 그야말로 낭설에 불과하다.또한 작품에서는 파스파 문자까지 창제에 기여했다는 설을 집어넣었다. 물론 한국학 교수인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의 주장대로 파스파 문자가 한글의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조선은 명나라에 사대하며 위화도에서 회군한 반몽주의자들이 만든 나라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해 몽골 문자의 뿌리가 되는 파스파 문자를 배운다는 건, 북한의 김정은이 새 글자를 만들기 위해 알파벳과 가나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선 '범자(梵字)'가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라고 부른다. 관객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조선 초기에 사람들이 '범자' 혹은 넓게 보아 '범어(梵語)'도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라고 부를 리는 없다.
또한 범어는 언어이고 한글은 문자이므로 영화에서 주장하는 범어의 문자는 동북아시아 불교계에서 흔히 진언 등을 적을 때에 사용하던 실담 문자일 가능성이 높다. 한글이 창제된 15세기는 실담자가 동북아 불교계에서만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을 뿐, 인도에서는 이미 데바나가리나 난디나가리 등 나가리 계열 문자에 밀려나 잊힌 지 오래인 시기이다.
2.2.4. 영화 외적 부분
제작사 측에서는 유명 수능 역사 인강 강사 이다지[40]라는 인물을 섭외하여 기존의 한글 창제에 대한 학설을 비판하는 영상[41]을 영화의 티저 영상으로서 업로드하였다. 그러나 그 근거라는 것이 위서에 기반한 이미 반박된 내용을 다시 들고 오는 수준이거나, '세종이 창제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는 등 제대로 된 근거가 아니어서 비판을 더 키웠다. 이를 두고 역사왜곡 논란이 일자 인스타그램에 해명글을 올리고 영상을 삭제했다.#애초에 홍보를 위한 영상 제작이었다고 할지라도, 감독의 신미창제설을 뒷받침하려면 사학과 학부 전공자 및 역사 강사보다는 해당 학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국문학자나 역사학자, 못해도 국문학 전공자를 섭외하는 것이 옳았다. 사학과 학부 수준의 커리큘럼에서 한글 창제 부분을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을 뿐더러, 한글 창제의 원리나 언어학적인 측면에서의 접근보다는 창제 당시의 정황만을 배울 뿐이다. 국문학과에서는 음운론과 중세 한국어사 등 한글 창제와 원리를 심화하여 배우는 전공필수 과정이 있고, 관련된 역사서와 학술서도 다수 참조한다. 하지만 애초에, 제대로 된 국어 전공자라면 신미대작설을 지지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리고 비사학과 출신들이 많이 오해하는 점인데, 사학과 학부 과정에서 배우는 내용은 상당히 제한된다. 진짜 사학 전공자, 전문가 대우를 받기 시작하는 건 사실상 석사학위 이후부터다. 애당초 학자들이 제시한 학설을 학부 졸 수준의 강사가 비판하는 것부터가 전문성이 떨어진다. 애당초 직업의 본분부터가 학자는 학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직업이고, 강사는 수강생들의 고득점을위해 학자들이 연구한 내용을 효과적으로 수강생들에게 전달해주는 직업인데 학자들의 학설을 비판하려면 신미창제설을 본인이 직접 연구한 학자를 섭외하는 것이 전문성과 신빙성 면에서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이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한 설 중 하나임을 짧은 문구로 밝히긴 했지만, 감독은 공식 석상에서 "이 문구를 넣기가 싫었다." 발언하며 본인이 한글 신미 창제설을 진지하게 따름을 밝혔다. 공식 포스터에서도 "역사가 담지 못한"이라는 문구를 중앙에 배치하며 마치 본래 기록되었어야 할 역사적 사실이 당시 사관들이 부당한 외압 혹은 주관 탓에 진실을 기록하지 못하였으며, 영화의 내용이 학문적 근거가 확보된 진정한 한글 창제의 역사인 양 호도하려 했다. 하지만 역사가 담지 못했다느니,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다느니 말을 강조할수록, 그건 거꾸로 자신들의 말에 아무런 증거도 없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감독은 물론 분명 시나리오를 읽고 출연을 결정했을 송강호, 전미선[42], 박해일 등 주역을 맡은 출연 배우들도 비판을 받았다.나랏말싸미 감독 "어디까지 사실, 허구인지 나도 헷갈려"
불교신문 기사에는 조철현 감독 본인이 '신미의 한글 창제설을 확신한다.'고 했는데, 이 부분이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퍼져 역사왜곡 논란에 불을 지폈다. 조철현 감독은 영화 촬영을 마친 후 2018년 10월 불교TV와 한 인터뷰에서 신미에 대해 "각종 언어를 통달한 천재이며, 세종대왕과 나란히 세워야 할 위인이다." 하고 말하기도 했다.
경악스럽게도 이 영화는 해외인 북미, 일본, 대만 등지에서 개봉이 확정되었다.
다른 경악스러운 점은 영화 평론가들 사이에선 대부분 호평일색이라는 것이다. 분명 평론가와 일반평론가의 관점은 다를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나랏말싸미 개봉이 끝난 몇년후 불교계 방송에서 평론가들이 극찬을 했다고 광고를 하며 나랏말싸미엔 역사왜곡이 부당하다는 황당한 궤변을 하기 때문이다.
2.3. 신미의 인적 사항 관련 문제
진짜로 저랬다면 이속과 다르게 절차도 간략하여 저 날 안에 신미의 목이 잘렸을 것이며 숨겨진 역사가 아니라 대놓고 조선 승유억불 정책의 대표적 명분으로서 대한민국 교과서의 한 페이지에 실렸을 것이다. 작중 신미가 절을 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조선이 불교를 배척하고 중들을 개 취급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역적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영화적 허용, 아니 백번 양보하여 숭유억불의 당시 시대 배경을 고려한 것이라 쳐도[44] 둘째는 완전히 거짓이다. 이는 역적(심온)의 자식인 소헌왕후와 접점을 만들고자 각색한 장치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미는 '죄인의 자식'이긴 해도 '역적의 자식'은 아니다. 게다가 이때쯤 되면 이미 태종은 죽은 지 오래라, 심온 사건이 억지임은 암묵적으로 다들 인정하는 상황이었다.[45]부왕의 결정을 쉽게 뒤집지 못해서 심온을 아직 공식적으로 사면하지 못했을 뿐, 소헌왕후를 '역적의 자식'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다음 임금이 될 세자(미래의 문종)도 소헌왕후의 자식이지 않은가.설령 진짜 본인이 역적의 자식이라고 해도, 현직 중전 앞에서 영화처럼 저런 말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나도 아버지랑 똑같은 역적이 될 테니 그냥 죽여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상식적으로 진짜 역적의 자식이면 오히려 더더욱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
신미의 속명은 김수성(金守省)이고, 태종 시기 문반[46] 김훈(金訓)의 장남이다. 태종 15년(1415)에 김훈은 조모의 상을 당했는데도 근신하며 아버지와 함께 상을 지내기는커녕, 임지를 내두고 한양으로 올라와 몇 달 동안 인덕궁에 드나들며 정종과 만나는가 하면, 인덕궁에서 창기[47]를 끼고 놀았다. 조모의 상을 당했으니 아버지와 함께 근신해야 하는데도 하지 않았으니 불효하고, 임지를 내버려두고 무단으로 몇 달 간이나 한양으로 상경하였으니 임무 거부이며, 인덕궁에서 창기를 불러 놀았으니 성적인 문란이다. 더구나 조모의 상중인데도 말이다. 태종 16년(1416) 사헌부는 김훈이 불효하니 무부(無父)한 자요, 함부로 임지를 내팽개쳤니 무군(無君)한 자이므로 극형이 필요하다 주장했지만, 태종은 출사불복명률(出使不復命律)[48], 즉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임무거부'의 죄를 물어 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김훈은 장 1백 대를 맞은 뒤 전라도로 귀양을 당했다. 이렇게 김훈이 임무거부와 불효한 행실로 탄핵을 당했을지언정 역적일 리는 없다.
또한 신미가 정말 역적의 자식이었다면, 성종 시대까지 왕을 보필하고 살았던 자신의 동생 김수온(金守溫)의 행적 또한 입증이 될 수 없다. 김수온은 세종 시기부터 집현전 학사였고, 그 후 병조정랑부터 호조판서까지 숱한 커리어를 밟았으나 영화에 나오지는 않았다. 신미의 동생이 유학자이자 집현전 학자면 감독이 망상하는 불교 한글창제설에 있어 불리할 수 있으니, 일부러 동생 김수온을 영화에서 뺀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49]
3. 기타 재현 오류
2차 예고편 |
- 2차 예고편의 중간 즈음에 나오는 신미의 "그 자리에 앉았으면 왕 노릇 똑바로 하란 말입니다." 하는 대사는[50] 상대가 세종대왕임을 생각하면 대사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특히 조선 초는 유학자들이 나라의 암묵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불교 박해를 가하던 시기인데, 저런 일이 있었으면 전국의 사대부들이 일어나 죽이라고 왕에게 고하거나, 아예 직접 죽이려[51] 들었을 것이고, 국시와 왕권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왕이 이를 거부할 이유도 없다. 왕이 관대하게 넘어가도[52][53] 이런 걸 실록편찬자들이 넘어가기는커녕, 실록으로 박제한 후 아주 작정하고 비난했을 것이다.
- 일본 중들이 팔만대장경판을 달라고 요구하자 세종은 반대하지만 대신들이 '그냥 주자.'고 하는데, 실제로는 반대였다. 오히려 세종은 '대장경 따위 줘도 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대신들이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긴 해도, 한번 주면 나중엔 주면 안 되는 것까지 요구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즉 불교를 생각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오로지 정치적 논리만 고려하였다. 영화는 이 사실을 왜곡하여 신미를 유능하게 해결한 인물로, 대신들은 무조건 불교를 배척하는 꼰대로 왜곡했다. 실제 역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팔만대장경 문서 참조.[54][55]
- 일본 중들이 선왕인 정종 때 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지만, 정종은 훗날 숙종이 노산군의 단종 복위와 함께 올린 묘호고 세종 때는 그냥 '공정왕'이란 시호만 올렸다. 그나마 이건 이 사실을 모르는 관객들이 많음을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칭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아예 재현을 무시하기보다는 자막을 띄워 보충설명을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 ㄱ으로 시작하는 단어로 고구마를 말한다. 그러나 고구마는 영조 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작물로, 처음 들어왔을 땐 감저라고 불렸고, 고구마라고 불리는 것은 훨씬 나중인 20세기부터다!
- 쌍기역의 예로 '까치는 까까, 꾀꼴꾀꼴 꾀꼬리, 까마귀'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도 역시 역사상 오류다. 까치는 15세기 중반에 '가치'라고 언급되며, 까마귀도 15세기 문헌에서 '가마괴'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 세자의 곤룡포는 광해군이 세자이던 16세기 말쯤부터 아청색이었다. 세종 시절에는 빨간색이었다. 그리고 세조 이전까지 신하들과 동일하게 사모를 쓰고 익선관은 세조 때부터 세자들도 착용했다.
- 세종의 대사 중에 기하학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세종 대에는 '기하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기하학이란 단어는 16세기 명나라 후기에 기하학이 들어오면서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가 geometry를 '지허(幾何)'[56]로 음/의역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 겸 영문학자, 국문학자인 양주동 교수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한문을 통으로 다 떼고 도시로 나가 근대 학교에서 기하학을 배우는데 이 '기하'라는 단어가 그대로 직역하면 '몇 어찌'가 되어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으므로 그 뜻을 당시의 수학교사 안일영 선생에게 물었더니 그 대답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답을 바로 들은 것은 아니었고, "너 진짜 한자 다 뗀 것 맞냐? 근데 왜 몰라?"라는 반문에 "한문에는 '기하'라는 단어가 전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목에 있는 때(부족한 견문에 비유)나 좀 씻어라."라는 핀잔과 함께 얻었다고 한다. 양 교수의 수필[57]에 실제로 나온 내용인 동시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온다. 각본가가 고교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지경이다.[58]
4. 불교 프로파간다 논란
불교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조철현 감독은 시사회장에서 실제로 "영화 제작에 불교계의 지원이 물심양면으로 있었다"라면서 불교계의 지원이 있었음을 밝혔다. 불교계의 물적 지원이 있었던 이상, 의도적이든 아니든 일정 부분 불교 프로파간다 영화가 아닌가 의심을 받는 대목. 물질적 지원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 과정 자체에도 불교계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광흥사 주지 범종은 영화 제작 과정에 참여한 것을 두고 소회하기를 "한글 창제의 주역이었으나 역사에서 감춰진 인물들을 스크린화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하고 밝혔다.한글의 신미 창제설은 이미 불교계에서 주장하다 그 근거가 되는 문건이 위서임이 드러나면서 이미 오래 전에 폐기당한 설이다. 하지만 불교계는 이 설을 버리지 못하고 2018년 11월에 속리산에 신미한글공원을 조성하는 등 여전히 허구를 가설로 포장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마치 신미가 한글을 창제했다는 설이 사실인 양 포장하는 영화가, 그것도 불교계에서 직접 관여하고 물적 지원까지 하여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불교계가 이 영화를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삼았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불교계 언론에서는 이 영화를 두고 '아시아 표음문자 모두 스님이 만들어'[59][60], 한글 창제와 불교 재조명'이라며 일제히 찬양하는 기사를 쏟아내었다. 한국 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도 이 영화의 개봉에 맞추어 신미의 생애를 다룬 허구의 영상을 배포하는 등 신미 창제설을 퍼뜨리고자 애를 썼다. 게다가 나랏말싸미 예매권을 주는 얄팍한 이벤트까지 열었다. 영화 제작사 측과 연계하여 하는 이벤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칼같은 타이밍에 이벤트를 열었으므로 영화 개봉에 맞추어 준비해두었음은 분명하다. 이미 폐기당한 허구를 대중매체를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퍼뜨린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불교계의 프로파간다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영화는 불교계가 세종대왕에게 품은 애증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런 점에서 영화가 단순한 픽션이라고 보기 어렵다. 신미가 다소 모자라 보이는 세종에게 "왕 노릇 잘하라!" 하며 호통치는 장면[61]은 불교계의 욕망이 날것으로 드러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이 공적으로 불교를 탄압했지만 사적으로는 불교에 친화적인 면모도 보였기 때문에, 불교계 일각에서는 예전부터 세종을 두고 '뒤늦게 회의한 숭불군주'라고 평했다. 영화는 이런 관점에서 세종을 중들이 가르치고 일깨워줘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한글 창제를 신미가 주도했다는 허구를 의도적으로 퍼트리려 한 듯하다. 단순히 상세한 기록이 없다는 정황에 일관하여 근거 없는 주장을 내세우며 영화를 통해 불교계의 논조를 홍보하는 것이, 설득력이 없는 주장을 대중에게 퍼뜨리려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영화와 불교계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사실이 알려지고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포털 사이트에는 반기독교 성향의 시민들이 '개독들이 발광한다.'며 은근슬쩍 물타기를 하려는 듯한 댓글이 달렸다. 하지만 이번 건은 개신교와는 아무 관계도 없고 불교의 명백한 잘못인데도, 마치 개신교에서 불교에 트집을 잡는 것처럼 악질적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다. 정작 개신교 언론인 크리스천투데이나 뉴스앤조이 등은 이 영화에 대해 별다른 기사를 내지 않았고, 개신교 단체 및 인사들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냥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고 싶어서 다른 종교에게 누명을 씌우는 천박한 짓거리일 뿐이다.
'한글 창제설 중의 하나를 픽션으로 제작한 영화인데 역사왜곡이라고 하는 것은 과하다.'고 주장하는 댓글들이 있음을 보면,[62] 불교계의 프로파간다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일지도 모른다. 신미 한글 창제설은 근거가 없는 허구의 이야기로[63] 불교계의 일부가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음모론에 불과하지만, 영화를 통해 소개되면서 일부 대중에게는 그동안 잘 몰랐던 학설인 양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일부 누리꾼 사이에서 불교의 이미지가 역으로 크게 나빠지기도 했고, 오히려 이번 사건으로 인해 기록된 신미의 실제 업적[64]까지 폄하당하는 등 거시적으로는 프로파간다가 성공하기는커녕 되려 역효과만 났다. 결국 흥행은 95만 선에 그치면서 불교 신자조차 설득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촬영과 홍보에 종교계가 부적절하게 개입했다가 얼마나 심하게 망가질 수 있는가'를 불교 측에서 매우 처절하게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65][66]
4.1. 역사 왜곡을 옹호하는 대한민국 불교 언론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대한민국 불교계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자, 불교계의 '나랏말싸미 살리기, 신미대사 살리기'는 오히려 더 거세졌다. 여러 불교계 언론에서 <나랏말싸미>를 옹호하고 영화에서 그려진 신미의 행적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기사와 기고를 송고한 것.- <현대불교> 19년 7월 29일자 '나랏말싸미는 옳다'
: "지난 7월 23일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때 아닌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개신교계 일간지인 국민일보와 통신사 뉴시스를 비롯한 몇몇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된 <나랏말싸미>의 역사왜곡의 요지는…"으로 기사를 시작하고는 정찬주라는 소설가의 기고를 통해 나랏말싸미의 내용이 사실이라며 뒷받침하려고 했지만, 그 내용은 이미 반박된 내용에 정찬주의 망상을 더한 것에 불과하였다. 정찬주는 이 기고에서 '예술가의 상상력이 정설만 신봉하는 학자들을 일깨울 수 있다.'며 역사학계를 싸잡아 모독하는 발언을 하였다. 학자들은 '정설만 신봉하는 이들'이 아니라 각자가 연구를 통해서 증거를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주장을 펴는 이들이고, 그들의 주장이 여러 논의를 거쳐 설득력을 얻어야지 기존의 정설을 밀어내고 새로운 정설이 되는 것이다. 예술적 상상력은 근거가 없이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상상이 현실로 들어 오고자 한다면 앞서 말했듯 이를 증명하고자 하는 시험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과정도 없이 얄팍한 상상력만으로 만든 자작소설로 그 과정의 프로페셔널인 다른 분야의 학자들을 일깨우겠다고 운운하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망언을 하였다. 이는 불교계가 신미창제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영화 각본가나 소설가 말고는 학술적으로 기댈 곳이 없음을 드러낸다.
- <불교신문> 7월 30일자 중앙승가대학교 교수이자 중인 자현이 쓴 기고
: 나랏말싸미의 내용을 옹호하였다. 그 기고의 내용은 이미 반박된 내용에, '집현전도 안 도와줬다는데 세종이 어떻게 혼자 만들었겠냐, iPhone도 잡스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는 억지를 더한 것이다. 거기에 나랏말싸미의 내용이 '이설(異說)의 환기를 통해서 사고의 지평을 열도록 촉구했다.'[67]고 자화자찬하기까지 하며, 중앙승가대가 제대로 된 고등교육기관인지 의심스럽게 하였다.
- <불교닷컴> 8월 1일자 기사
: 나무위키의 평가를 의식하여 인용하면서 억지를 부렸다. 내용 중에는 "신미 한글 창제설을 주장하는 책의 각주가 1,374개나 되니 허구가 아니다."라는 황당한 부분도 있다.
- <법보신문> 8월 6일자 기고문
: 역사왜곡이 아니라면서 '~일 것이다.'라거나 '~가 맞을 것이다.' 하는 감정적인 희망사항을 근거처럼 들었다. 기고문 중에는 "영화 나랏말싸미의 주인공이 스님이므로 '불교계만을 위하여 특별 제작된 영화'라고 혹평을 하고 '영화를 보지 말자'고 캠페인을 펼치는 특정 종교인들의 편협하고 불순한 의도가 오히려 세인(世人)들의 관심을 자극하여 흥행에 기여하고 있다." 하는 문장이 있는데, 까놓고 말해서 기고자가 말한 특정 종교란 기독교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기독교계는 <나랏말싸미>에 대해서 별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기독계계의 반응(?)이 '세인의 관심을 자극하여 흥행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었던가? 오히려 반감 때문에 흥행이 폭망했음이 현실이다. 기고자는 글에서 허상의 적을 만들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명백한 현실까지도 왜곡했다. 만약 정말로 기독교에서 '불교가 주역인 영화이므로 보면 안 된다.'는 식으로 주장했다면, 오히려 역으로 공격당했을 것이다. 나랏말싸미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기독교가 선동해서가 아니라, 일반 민족주의 성향의 대중들이 역사왜곡에 반감을 품었기 때문이다. 기고자는 "참고로 나에게는 현재 종교가 없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를 존중한다."라고 썼지만, 실제로는 <나랏말싸미> 논란과 아무 관계도 없는 기독교에 탓을 돌리며 친불교적인 태도를 취했다.
- <불교신문> 8월 7일자 중 자현이 쓴 2번째 기고
: 같은 사람이 같은 매체(불교신문)에 또다시 기고했다. "현존하는 사료로는 신미가 한글 창제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증명할 수 없다." 하고 인정하면서도, 은근슬쩍 신미가 한글 창제에 기여했다는 부분을 '기정사실화'하며 논지를 전개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면서 기존 사료와 역사학을 폄하했다. 세종대왕이 '네가 사성칠음을 아느냐?' 하고 최만리를 누르던 부분은 군주의 위엄을 드러내는 찍어누르기면서, 동시에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세종의 자신감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이 부분을 단지 '군주의 찍어누르기'만으로 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문자의 창제란, 제아무리 천재라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명백히 '혼자서' 문자를 만든 사람들이 있다. 19세기 북미의 체로키족 사람 시쿼야는 아무 언어학적 지식이 없는데도, 북미 대륙에 정착한 백인들이 알파벳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혼자서 체로키어의 음소값을 파악하여 체로키 문자를 만들어냈다. 톨킨은 (비록 소설에 쓸 용도긴 하지만) 자신이 언어'들'과 그 언어에 씔 문자까지 창작했다. 또한 기고문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높기 때문에 영화 때문에 역사적 판단에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대중문화의 역사왜곡, 또는 사실왜곡에 사람들이 민감한 이유가 뭘까?[68] 잘 만든 상업작품의 관점에 사람들이 그만큼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만약 반대로 불교를 폄하하는 영화가 흥행했더라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69]
이런 불교계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2주차 목요일 이후 일 관객수가 1만 명 밑으로 떨어지자 다급해진 불교계는 단체관람을 하는 등 조기종영을 막아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자비명상 이사장이라는 중 마가는 "우리 힘으로 나랏말싸미 천만 명 기록 세울 수 있습니다. (중략) 이제 우리는 3백 개의 씨앗을 가지고 가서 여러분 씨를 심으십시오. 천만 명 금방 됩니다."이라고 단체 관람 운동을 독려했다. 이는 이 영화가 불교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70]
감독인 조철현 역시 논란이 거세지자 한 발 물러선 태도를 보이는 와중에도 불교계는 영화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온갖 불교계 인물들이 튀어나와 영화를 옹호하는 모습은 이 영화와 불교계의 연관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계의 행보가 관객 100만도 동원하지 못한 나랏말싸미에 대한 평을 나쁘게 하면 나쁘게 했지, 좋게 하진 않았다. 불교 외부의 요소를 억지로 불교와 연결하려는 것은 삼성화현술[71] 등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런 억지와 달리, 이 영화는 흥행에서 철저하게 무너지게 되었다. 개봉 3주가 되어가니 이젠 전국에서 관객도 100명 이하로 내려가며, 전국 95만을 가까스로 넘기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정도 흥행은 제작비 1/3조차도 못 되는데, 불자들은 유치하게 영혼 보내기 같은 생쇼도 하지 않았고 집단 관람을 부르짖자는 저런 소리를 무시하면서 폭망. '그래도 불교계의 이런 왜곡 홍보 덕분에 전국에서 관람객 수 95만 정도는 거두었으니, 자전차왕 엄복동에 견주자면 대박이라고 할 만하다.'는 비웃음까지 덤.
영화가 완전히 폭삭 망하고 나서도, 불교 언론들의 민망한 행위는 계속되었다. 불교신문은 영화가 망한 이유를 역사왜곡 논란이 아닌 '특정 종교 세력의 조직적 방해' 때문이라고 가짜뉴스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 방해를 했다는 주장이나 (국민일보를 제외하고) 나랏말싸미를 비판하는 기사를 별도로 실은 개신교계 언론은 거의 없었으므로, 이런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다. 국민일보는 개신교계 언론이기는 하나 종교언론이 아닌 종합지이므로 <나랏말싸미>에 비판적 의견을 소개함은 당연하고, 또한 개신교계 언론이 아님에도 <나랏말싸미>를 비판한 신문과 방송은 수두룩하게 많았다. 봉은사역 역명 논란이나 템플스테이 논란처럼 실제로 개신교계가 불교계를 트집 잡은 사건들과는 달리 나랏말싸미 건은 기독교계가 뭘 했다는 근거가 없음에도 '흥행 실패는 기독교 탓'이라는 정신승리만 계속한 것이다. 거기에 불교신문은 "조선왕조실록만으로 조선시대 역사를 봐서는 안 된다."라는 음모론적 망언까지 계속 이어나갔다. [72]
5. 총평
한글 창제라는 애국심을 자극하는 주제[73]로 한글 창제에 언어와 문자를 깊이 연구할 줄 아는 중이 돕지 않았을까 하는 시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점은 참 신선하고 괜찮은 소재임이 분명하다.[74] 하지만 아무리 영화라 하더라도 당시 천한 취급을 받던 일개 중 따위가 당시 나라의 최고 권력을 쥐고 있는 임금에게 왕 노릇이나 잘하라는 둥 큰소리를 친다든지, 백성들을 위해 임금으로서 최선을 다해 올바른 정책을 펼치기 위해 애쓰고 임금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등, 현대까지도 성군이라 칭송 받는 세종대왕을 능력 없는 할 줄 아는 거라곤 신미에게 매달리는 것 밖에 없는 졸장부로 그린 부분도 현실과는 이질감이 너무 심하다.물론 영화를 영화로만 보아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신미창제설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결말에 더해져 결국 영화의 태도, 톤앤 매너가 문제라는 것이다. 영화가 완성된 이후 홍보 과정은 역사 강사를 초빙하여 홍보하였고, 또 다른 숨겨진 역사처럼 그린 것은 이 영화가 영화로만 끝나지 않겠다는 의지나 다름이 없었고, 이런 태도는 역사 왜곡으로 받아들여지기 충분했다. 즉, 영화부터 홍보까지 아예 없는 역사를 그렸다는 태도가 아니라는 게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정치에 관상가가 개입했다는 판타지적인 요소를 첨가했지만 최대한 역사적인 사건과 이야기의 흐름에 대해서는 최대한 팩트를 기반으로 줄거리를 이어가는 관상과 비교되는 대목이다.[75] 또한 아무리 종교적인 요소가 들어갔다지만 앞서 설명된대로 안 그래도 역사 왜곡이란 논란이 있는데 거기에 너무 불교 측의 입맛에만 맞춰준다는 느낌이 다소 강하다.
정말로 신미 창제설이 입증이 가능한 '정설'이라면 불교방송에서 말로 잊힌 역사, 숨겨진 역사로 주장하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 관련 부서 행정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 자문을 구하고 불교측이 주장하는 근거 자료들을 검증하여 세간에 드러내는 편이 대중들에게 납득시킬 당위성이 있다.
[1]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 등장하는 밀본이 좋은 예. 내용 대부분이 완전 허구인 이 드라마도, 적어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만은 건드리지 않았다.[2]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사촌동생이다.[3] 대중들에게 욕을 한바가지로 먹는 장면으로서, 감독의 조선시대역사 이해도가 극히 낮거나 또는 대한민국 사극연출의 고질적인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하대하면 멋져보인다는 착각, 거기에 은연중에 불교의 중이 조선의 군주보다 위에 있다는 은연중 욕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당연히 세종은 누군가에게 애원해서 왕의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리고 임금 노릇 똑바로 하라고 하는데 불교계가 주구창창 주장하는 신미의 한글창제 8년전인 1435년에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를 만들었으니 한글은 신미가 먼저 만들었다는 위서 시기를 감안해도 당시엔 세종이 태종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세력으로 조정을 장악한 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성군의 전성기 시절에 왕 노릇 똑바로 하라고 외치는 꼴이다.[4] 조선은 대명률에 의거해 법치주의를 표방하기는 했으나 유일하게 예외를 둔 부분이 바로 국가 반역죄였다. 조선 시대 국가 반역죄에는 고문, 투옥, 재판 없는 사형 등 모든 것이 허용됐다.[5] 이들은 단순히 세종의 정책을 반대한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유학자라면서 유교 국가인 조선의 통치 철학을 부정하는 언행을 보였기에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나마 평소 능력이나 인품 면에서 굉장히 우수한 인재들이라 정상참작되어 목숨을 부지한 거에 가깝다.[6] 이 장면 자체는 영화에도 나온다. 다만 자신의 학식과 능력을 보여줘 신하들을 압도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그러니 중들과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는 식으로 묘사된다.[7] 사실 신미는 한글 창제가 아니라 월인천강지곡을 짓는데 도움을 줬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애시당초 월인천강지곡이 부처님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기도 하고.[8] 자세한 배경은 태종(조선) 문서의 6.4.4, 6.4.5 문단 참고.[9] 중의적인 의미로 둘 다 해당된다. 세종은 위의 사성칠운 일화에서 보이듯 학문을 시험받고 올라온 관료들을 학식과 능력만으로도 찍어누를 수 있는 천재적인 학자기도 했으며, 세종이 누구 밑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배웠는지를 생각해보라.[10] 더군다나 세종 시대는 유능한 왕뿐 아니라 그 밑에 신하들의 라인업도 엄청났다. 당장 그 황희를 당근과 채찍을 써서 늙어 죽기 직전까지 허허~하는 얼굴로 부려먹었던 왕이고, 이외에도 이런 사례가 간간히 등장한다. 세종대왕의 강인한 멘탈과 신출난 인술이 신(臣)밀레의 핵심이었고, 그 내용은 실록을 조금만 봤다면 모를 수도 없는데, 영화의 각색을 위해 뻔한 사실을 왜곡하고 유약한 군주로 묘사한 것이다.[11] 특히나 세종은 숭유억불이라는 이념을 걸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뒤 얼마 지나지 않은 4대 왕이었다. 좀 더 후대로 간다면 모를까, 그 당시에 불교의 입지는 그야말로 바늘구멍 수준이었다.[12] 수양대군은 한명회로 하여금 자신의 왕권 찬탈에 반대하거나 걸림돌이 될 만한 이들을 추려내 살생부에 적어두었다가 모조리 죽여버렸을 정도로 냉혹한 군주다. 심지어 정난공신들 중에서도 자신이 진지하게 반역자로 판정한 양정과 봉석주를 처형하기까지 했다.[13] 보편적 역사드라마에서 그려진 형태로는 그러하나, 실질적으로는 태종 때부터 중이나 불당이라는 것이 면죄부를 주거나 혹은 성역으로서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14] 신하들의 행동이 임금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저런 식의 태도를 보였다가는 강상죄에 당장 걸렸을 것이다.[15] 그런 요소가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실제로는 내정간섭은 조선 초기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고 사실 이것도 명과 조선 간의 관계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로를 견제하느라 벌어진 일이다. 이후 태종이 관계를 깔끔히 정립하면서 내정간섭도 사라지게 된다. 애초에 조선은 명과 다른 화폐도 스스로 발행하였으며, 법도 명나라 법과 전혀 다른 독자적 법을 구축, 그리고 중국의 인가를 받긴 했어도 중국의 '허락'을 받는게 아니라 조선이 세종이 왕이 되었다 식의 '통보'에 가까웠기에 속국과 거리가 멀었다. 이게 감독이 은연중 주장하는 군신관계 속국이라고 주장하려면 신성로마제국이 교황령의 속국이라는 헛소리와 하등 다를바가 없다.[16] 세종은 능력만 있으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물도 중용했는데, 이건 반대로 세종이 신하들의 약점도 쥐고 있다는 뜻이므로, 숙청이 필요하다면 역모를 조작할 것도 없이 각자의 약점으로 유배를 보내버릴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17] 신하들 역시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법가, 도가, 심지어 풍수지리 같은 것에 능통한 신하들도 있었다.[18]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편지 같은 것에 실린 내용을 보면 왕실이나 사대부 남자들도 일단 한글부터 배우고 한자로 들어 간다. 어떤 사대부 편지에는 아내에게 이 교육을 장모에게 부탁드리라는 내용도 있다. 사실 한글을 먼저 배우면 한자를 배우기도 더 쉬워서 사대부에게도 유용하다. 실제 조선 중기의 천자문에는 한글로 음과 훈이 달려 있다.[19] 왕비의 거처[20] 더군다나 소헌왕후는 한양 대화재 당시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던 세종과 세자 문종을 대신해 만삭의 몸으로 화재 진압을 지휘했던 적이 있었다. 세종 본인도 이 사건 이후 급한 일은 중궁에게 보고하라고 할 정도로 소헌왕후를 크게 신임했다.[21] 학조(學祖) 화상. 세조부터 연산군까지 지낸 왕사였으며, 세조의 명으로 여러 불경을 한글로 간행하였다. 홍길동의 스승이라는 황악산인(黃岳山人)은 학조의 호이다.[22] 학열(學悅) 법사. 15세기 중엽 세조 시기 고승으로 간경도감을 감독하여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했고, 상원사의 불사를 감독하기도 했다.[23] 신미는 일본 중들이 올라와서 '대장경을 우리에게 달라.'고 시위할 때, 합천군 해인사에서 학조와 학열을 데리고 법주사를 거쳐서 한양으로 들어갔다. 이는 재현에 어긋난다. 신미와 학조 등 세 중들은 해인사에 온 적도 없고, 법주사는 원래 신미가 출가하여 대장경을 배운 곳이다.[24] 그리고 여기서도 재현 오류가 등장한다. ㄱ을 가진 단어 중에 고구마가 등장하는데, 고구마는 영조 시절 조엄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잠시 들른 대마도(쓰시마섬)에서 키우던 작물을 국내에 도입한 것이라, 세종대왕 시대에서 무려 300년이나 지난 후의 이야기다. (비유하자면 숙종이 장길산이란 도적을 잡겠다고 무전기와 총, 야간투시경 같은 첨단장비로 무장한 경찰특공대를 투입했다는 수준이다.) 심지어 고구마는 한반도에 처음 들어올 당시에는 고귀마나 감저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으니, 빼박 재현 오류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창작이 가미되었다고 하더라도, 실화기반을 표방하는 영화가 역사서를 조금이라도 읽었다면 알 수 있는 부분임에도 넘어갔다는 게 문제.[25] "글자가 많으면 안 되니 개수를 적게 하라."라고 하니 중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직선과 점으로 간결하게 하는 게 어떠하냐." 하니 중들이 또 "예."라고 답하면서 열심히 연구한다. 참고로 이 부분은 감독과 제작진이 한글과 표음문자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표의문자가 수가 많고 갈수록 모양새가 복잡하여 쓰기가 힘드니, 이를 대체하는 문자는 이와 반대되는 특징을 가져야 한다. 문자와 음을 연결하여 개발된 표음문자들은 많지만, 알파벳이나 한글처럼 대중적으로 많이 쓰이게 된 표음문자는 모두 30 문자 이내에 간결한 모양을 가진 문자들이다. 즉 신미창제설을 미는 영화에서 보여준 신미가 음과 문자를 연결하는 작업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저 두 규칙을 확립한 세종대왕에 도달한 이는 얼마 없고 중요한데, 정작 이렇게 중요한 부분을 세종의 꼰대짓으로 무시한 것.[26] 세종대왕은 유학을 공부하는 장인 경연을 휘어잡을 정도로 유능한 유학자였다. 원래 경연은 왕이 배움을 받는 곳이지만 조선사에서 단 두 임금, 세종대왕과 정조대왕만이 경연을 가르치는 수단으로 썼다.[27] 1번에 쓰여 있듯이 글자를 만들기 이전에 기초적인 언어학 연구조차도 중들이 온 뒤에야 꼴을 갖추었다.[28] 심지어는 왕과 독대하는 정인지를 제외하고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냥 중간에 "예전에 이러이러한 책도 읽었었다"며 회상하는 역할, 왕의 글자 창제를 반대하는 역할, 신미가 글자를 완성하자 집현전의 이름으로 반포하는 역할 이렇게 딱 3개만 나온다. 보통 한글 창제 조력자로 나오는 정인지도, 이 영화에선 불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작업할 뿐이다.[29] 감독이 신미창제설을 맹신하는 것을 보아, 중의 공을 집현전 유학자들이 가로채고 조선왕조실록이 조작되었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정작 실록에는 세종대왕이 주도적으로, 아니 거의 홀로 만들었다고 나온다. 집현전의 한글창제설은 세간에 퍼진 대표적인 낭설로, 조선왕조실록 등 공식 기록만 봐도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도 확인하지 않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했음을 보면, 감독과 제작진이 얼마나 기존의 사료를 무시하고 원하는 전개만 망상하는지 알 수 있다.[30] 조선왕조실록 항목을 통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한번 살펴보자. 그런데 어떻게 저런 전개를 망상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럼에도 저런 전개를 생각해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이 무엇인지, 어떠한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볼 수 있고, 그런 사람이 감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각본했다는건 조금 격하게 말해 수준 미달이라고 봐도 좋다.[31] 웃긴건 신미창제설 근거인 정황증거는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에서 신미가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이다. 즉 세종이 창제했다는것은 조작이고 신미가 세종에게 총애를 받았다는것은 한글창제에 숨겨진 진실이라는 자기들 편한 잣대를 보여주고 있다.[32]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공이 있는 편이다. 초기 한글 보급에 관여하고 관련 작품을 왕족과 같이 냈다는 점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하다. 이를 불교계가 당치도 않은 욕심으로 당사자를 욕되게 한 것.[33] 뜻을 풀이하면 '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했으며 지혜를 깨우친 존귀한 분'[34] 실록 상 이미 신미는 세종대왕부터 세조까지 신임을 받은 사실상 왕사였고, 왕의 불사를 전담했기 때문에 받은 것이다. 그 때문에 대신과 유학자들에게 가끔 '요사스러운 중'이라고 욕을 먹어도 자주 비호받았다.[35] 반대는 있었으나 드라마나 영화처럼 극렬히 반대하진 않았다. 그저 별 가치가 없는 '문자가 아닌 그냥 표기'일 뿐이라는 입장으로, 문자로 인정하지 않고 '이두'보다 못한 것이라 치부했다. 그러므로 한자서적을 언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시간낭비, 재원낭비라고 반대하였다. 물론 세월이 지나 조선 중기쯤 되면 백성들에겐 가뭄의 단비였고, 사대부들에게도 한자의 보완재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중기에 가면 정철처럼 한글로 문학작품을 남기는 사대부도 나타난다. 문제는 그 한글 가사들이 죄다 평가원의 무기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지만...[36] 세종대왕, 신미 논란 모든 관련기록 정리글[37] 원래 정근(精勤)이란 말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지만, 현대 한국 불교에서는 어떤 부처나 보살의 이름, 또는 진언을 거듭하여 낭송하며 기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문종실록의 맥락에서는 반복적으로 행하는 불교적인 기도 행위를 의미하는 듯하다. 세종대왕이 죽음을 앞두고 불교적인 종교행위를 실행하며 마음을 달래었을지도 모른다.[38] 이 위서 원각선종석보에 대해서는 불교계는 아쉬워하거나(?)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위서의 첫 소유자 일타스님이 사망하여 책임을 물을수 없으나 정황상 어떠한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유추할수 있는데도 말이다.[39] 정의공주는 죽산 안씨 가문으로 시집갔다.[40]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출신.[41] 역사왜곡 논란이 일면서 해당 영상은 삭제됐다.[42] 영화 개봉 시점에서 고인이다.[43] 실제로 일본의 넷 우익을 중심으로 한글 파스파 문자 기원설이 퍼져 세종의 업적이 평가절하되기도 했다.[44] 물론 실제로는 저런 이유를 대면서 왕에게 절 안 하면 죽는다. 노비가 사람보다는 재산 취급을 받는다고 해서 노비가 왕에게 "저는 사람이 아니니까 절 안 할게요." 하면 과연 목이 남아나겠는가?[45] 애초에 심온사건을 재조사 하지 않은 것도 세종 초기에는 상왕이었던 태종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 이 짓을 했다가는 큰일나기도 하고, 세종 때도 태종이 이룬 업적을 폄하하면 자신의 권력도 위험할 수 있음을 알았기에 문종 때가 되어서야 재조사 후 복권하였다. 세종 때가 지나 이미 관련자는 물론이고 심온 사건이 거의 잊힐 무렵이던 문종 재위 초기에 일사천리로 재조사하여 복권된 것만 봐도, 이미 신하들조차도 사건이 억지라고 인지했다는 뜻이다.[46] 옥구진(구 전북 군산시 옥구군)의 병마사를 지냈다.[47] 창녀, 천한 기생.[48] 관직에 있는 자가 명령에 불복종한 죄를 묻는 법률[49] 허나 김수온 또한 산스크리트어의 전문가였으며, 석보상절 등 신미의 업적에 일부 참여했었던 점을 보아, 신미 한글 창제설에 이용당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참여한 불경 사업으론 석가보(釋迦譜), 금강경(金剛經) 등이 있고, 세조의 명을 받고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하기도 하였다.[50] 신분 낮은 인물이 신분 높은 인물에게 팩폭, 사이다, 일침을 날리는 모습이 너무나 진부해진 클리셰기 때문에 많은 커뮤니티에서 조롱받았다. 특히나 상대가 세종대왕인 만큼 더욱.[51] 농담이 아니고, 당시 사대부들은 왕실이 불공을 드리는 사찰에까지 쳐들어가 깽판치는 게 한두 번이 아닐 정도로 극성이었다.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귀양을 갔다가 왕의 재가도 없이 제주목사 변협의 손에 목이 잘렸을 정도.[52]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직장에서도 윗사람에게 신미처럼 말하면 대접이 극도로 나빠지고, 대통령에게 막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신상이 털리거나 SNS가 악플로 도배되는 등의 고초를 겪는 판국인데, 여기서 상대는 조선시대의 절대권력자인 국왕이다. 이런 무례한 발언을 했다간 왕의 관대함이고 뭐고 목숨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왕권이 약했던 시기냐?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무자비한 숙청으로 왕권을 극도로 안정화시켰다.[53] 세종대왕은 성군이지만, 15세기 절대군주답게 임금의 권위가 손상되는 현상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간의 아들인 이맹종이 방간의 반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전적이 있자, 세종대왕도 사촌인 이맹종을 위험시해서 왕자의 난이 터진 뒤부터 유폐된 이맹종을 끝내 사형장으로 보냈고, 전대 왕조를 구성한 일족인 개성 왕씨도 남들 몰래 죽였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이런 면모가 가장 드러나는 일화로 (전에 나무위키의 세종/부정적 평가에 있었던) 온천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세종은 몸이 나쁘고 격무에 시달린 바람에 자주 온천에서 피로를 풀었는데, 새로운 온천을 알면 그곳으로 행차했다. 그런데 온천이 있는 고을의 향리와 백성이 왕이 온천을 사용하면 일대의 활동이 제한받는다고 생각하여 길을 막고 온천이 없다고 잡아떼었다. 이는 기군망상(欺君罔上)이라 하여 임금을 기만하는 중죄라 세종은 당연히 격노했고, 후에 주동자들을 고문으로 다스리고 그 일대 백성들을 모조리 노비로 만들어버렸다. 실제 역사에서 일개 중이 세종에게 영화에서 나온 것과 같은 태도를 보이면, 전국의 절이란 절이 모두 불타고 중들의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성군 대다수는 평범한 백성에게는 관대하여도,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냉혹하다. 세종은 분명히 이상적인 지배자였지만, 그건 군주와 백성이 구분되는 시대였던 15세기 조선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이지,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준이 아니다. 참고로 실권이 별로 없다시피 상징적 존재이던 빅토리아 여왕조차도 어느 정도는 그런 면모를 보였다.[54] 요약하면 영화 속에서 신미가 해결한 것이 아닌 정치적 판단하에 그냥 달라는 대로 주면 나중에 더 큰 것을 요구할 수도 있으니 일단 거절하라고 신하들이 의견을 내었다. 감독이 팔만대장경을 조사할 때 알 수 있는 일화임에도 왜곡시킨 것을 보면 1. 대충 조사했다. 2. 알고는 있었지만 신미의 유능함을 묘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왜곡을 저질렀거나, 두 가지 중 하나다.[55] 팔만대장경판을 지키는 신미 스님과 세종대왕을 만나는 영화 속 연출이라고 하지만 이는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감독은 팔만대장경과 훈민정음 사이에 신미 스님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음을 알게 되어서 영화를 제작했다고 하고 팔만대장경을 조사했다고 나온다. 그러고 나온 게 역사왜곡이라면 나중에 나오는 한글창제의 설은 그냥 설도 아닌 왜곡으로 봐도 무방하다. 위의 왕권 약화된 모습을 감독이 '고증 오류'라고 표현할 수 있어도 적어도 팔만대장경에 관한한 연출은 의도적 역사 왜곡이다.[56] '얼마인가?' 라는 뜻. 당시 중국의 수학 서적에 이런 표현이 많아서였다고 한다.[57] 이 '몇 어찌' 일화 외에도 양 교수에게는 꽤나 괴짜스러운 모습이 많다. '면학의 서'라는 다른 수필을 보면 영어의 '3인칭 단수' 개념을 아무리 정독해도 이해가 안 되어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의 영어교사에게까지 찾아가 그 뜻을 물었을 정도. 그리고 나중에 교수가 되고 나서는 이러한 일화들을 나열하면서 "나만큼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녀석 있으면 나와 보셈 ㅋㅋㅋㅋ"라고 자랑하는 나르시시스트의 모습을 보인다. 택시를 타도 "'조선의 국보'가 탔으니 조심히 운전하이소."라고 할 정도였으니...[58] 6차 이전 교과서에는 없는 내용이긴 하다.라떼는 마리야[59] 종교인이 문자를 만드는 것 자체는 흔한 일이기는 하다. 파스파 문자도 그렇고, 서구권에서는 키릴 문자의 원형을 동로마 제국 선교사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만들었다. 문제는 한글은 그런 경우가 아닌데 불교계에서는 '이 문자들도 종교인이 만들었으니 한글도 스님들이 만들지 않았겠냐.'는 오류(내지 의도적 왜곡)를 범하고 있다는 점.[60] 무엇보다 아시아 표음문자를 모두 중들이 만들었다는 명제부터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페니키아부터 아랍까지 아우르는 아브자드 체계들과 기독교 선교사가 만든 조지아, 아르메니아 알파벳 같은 서아시아의 사례를 제외해도 그렇다. 예컨대 만주 문자는 누르하치 때 몽골 문자를 개량해 만들었고, 몽골 문자는 칭기즈칸 때 위구르인 타타통가가 위구르 문자를 개량해 만들었다. 위구르 문자는 소그드 문자에서, 이것은 다시 시리아 문자에서 유래했으며 여기에 중들이 관여하지 않았다. 그 외에 크메르 문자, 참파 문자 역시 힌두문화권이던 시절에 생긴 문자로, 인도 남부 팔라바 왕조의 팔라바 문자가 뿌리이며, 팔라바 왕조 역시 힌두교를 믿었다. 돌궐 문자도 불교와 아무 인연이 없다.[61] 신미 일행이 직접 만든 한글을 집현전의 공으로 돌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려는 세종대왕의 명령에 대한 반발이다. 작중에서 신미가 한글 창제에 참여한 이유는 한글을 이용해 조선을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서였다.[62] 반박하자면, 관객들에게 잘못된 사실을 주입할 수 있는 위험이 있고, 노골적으로 그것을 노리고 숨겨진 진실이다 같은 투로 역사를 왜곡하는 이상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하나로 비판을 피하려는 개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대장 김창수, 자전차왕 엄복동, 군함도 등 역사왜곡을 자행한 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쉴드. 이런 주장은 백이면 백 쿨게이들이나 악성 빠들이 하는 헛소리이니 속아넘어가지 않길 바란다.[63]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건 '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존재하는 제대로 된 기록들이 다 뒷받침하는 유일한 정론이다. 세종시대가 기록이 부족한 고대도 아니고, 왕의 사소한 발언 하나까지 기록해 실록으로 남기던 시대인데 기록으로 명확히 드러난 사실을 근거도 없이 뒤집으려는 건 말 그대로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64] 한글로 작성된 서적의 발간에 참여하여 한글의 보급에 기여한 업적.[65] 불교 신자들 입장에서도 불교계가 감히 세종대왕의 위업을 폄하하고 가로채려는 도굴꾼과 같은 행위(정작 영화의 내용은 세종대왕이 신미의 공을 가로챘다는 식으로 전개시켰다. 하지만 대중들 입장에서는 제작진들과 거기에 관여된 불교가 세종대왕의 공을 가로채려고 하니 그야말로 엄청난 이중잣대다.)를 묵과할만큼 불교계의 행보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미가 한글의 보급에 기여했다는 사실적 업적에 만족하지 못한 불교계 인사들의 무절제한 야욕, 탐욕에 의해 그나마 남아있던 신미의 행보마저도 평가 절하되어버린 것은 말그대로 현 불교계 인사들부터 시작해서 과거부터 신미의 한글 창제설을 퍼트린 우매하고 삐뚤어진 불심에 의해서 비롯된 일이다.[66] 사실 까닥 잘못하면 현대적 법난이 일어날 명분을 줄 뻔했다. 당연히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는 대한민국에서 대놓고 법회나 불교방송에 난입하여 비판할수 없으나 불교를 믿지 않는 일반 대중들이 불교를 기피하는 명분을 준 셈이다. 가뜩이나 시간이 지날수록 탈종교 현상이 증가하는데다, 불교 자체의 교리적 특성상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탓에, 불자 수가 줄어들고 남은 신자들도 고령화되는 상황에서.[67] 유사과학이나 유사역사학, 음모론 등을 설파하다 실패할 때 흔히 나오는 구차한 변명인데, 이설은 타당한 근거와 논리를 갖추었을 때 의미가 있을 따름이지, 그 것이 궤변이라면 도리어 사회에 해악이 될 수 있다.[68] 참고로 역사왜곡은 어느나라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수인데 위(중국), 아래(일본)의 역사왜곡에 시달린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민감하다. 애초제 전제 자체가 우리가 쉽게 접하는 한글인 만큼 이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데 더 민감하다.[69] 애초에 같은 조선 초기의 시기인 만큼 숨겨진 역사의 진실이라며 조선 불교를 폄하할 플롯은 아주 쉽게 만들수 있다. 나랏말싸미는 고려는 중들이 지식을 독점했고 썩어서 망했다고(이건 절대 고려 멸망의 핵심이 아니다. 거기에다 아주 동떨어진 가설이다.) 세종의 입으로 표현 한 뒤에 왜 그런건지 예시도 없이 그저 이거 하나 끝으로 당시 시대상의 불교의 폐단은 아예 조명하지 않고 유교 폄하를 하는데, 승유억불이라는 법난이 왜 태종때 이르러서 크게 일어났는지 조명하며 여기에 백성들을 수탈하며 세를 불리는 중들의 모습과 교리로 여인을 탐하는 모습을 묘사한다면 불교계는 당연히 반발할 것인데 여기서 제작진이 태종은 명군인데 그가 왜 숭유억불을 하겠느냐 (당시 불교가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것을 근거로)다 불교가 타락해서 그런거 아니냐고 나랏말싸미가 한것처럼 제작했는데 뭐가 문제냐 고 반론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불교계는 반박할 자격이 안된다.[70] 오히려 92만이라는 숫자에 그친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SNS로 조사가 쉽게 가능한 시대에서 나랏말싸미를 본 관객 92만명중 몇할이 불교계를 좋게 생각할까?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를 했다는 걸 한국사에서 배우는 마당에. 영화속에서 세종은 뒷전이고 신미가 창제했다고 나오면 당연히 기존 역사의 괴리가 심해 진위여부를 쉽게 파악할수 있을것이며 대놓고 역사왜곡을 저지른 불교계에 대해 반감을 가질것이다.[71] 석가모니가 중국으로 유동보살, 광정보살, 마하가섭 등 제자 3명을 파견하여 각각 공자, 안회, 노자로 태어나게 하였다는 설.[72] 철저히 있는 사실만 기록하는 사관이 주재한 기록인 조선왕조실록보다 신빙성있는 왕조에 관한 역사서는 없다. 불교계에서 사서를 출간한다고 쳐도 이미 그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는 시점에서 그 기록이라는 것은 신빙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연산군급의 폭군이 아닌 이상 그 어떤 철혈군주도 감히 어쩌지 못한 성역이었을 만큼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했다. 과거 불교계에서 써왔던 사서들 문헌들에서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극적 표현이 남발되지 않은 경우가 전무한 점에 비교해볼 때 객관성과 정확도에서는 비견될 수 없는 압도적 차이를 보여준다.[73] 애국심을 자극하는 영화지만 강하게 말해 망작이라 불리는 또다른 영화로는 자전차왕 엄복동이 있다[74] 실제 한글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하더라도 한자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분위기였고 한글은 여자와 노비 그리고 당시에 정말 무시당하던 불교의 중들이 주로 사용했다. 심지어 언문이라고 낮춰부르기까지 했다.[75] 둘 다 송강호가 주연으로 출연했다는 것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