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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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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_Bild_146-1972-025-10,_Hitler-Attentat,_20._Juli_1944.jpg
폭탄이 터진 현장을 둘러보는 헤르만 괴링마르틴 보어만

1. 개요2. 발단 및 암살 계획3. 암살 실행과 실패4. 발키리 작전의 발동, 뒤이은 쿠데타5. 실패로 돌아간 쿠데타
5.1. 만약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다면?
6. 사건 이후7. 평가
7.1. 전후의 평가7.2. 순수하지 않았던 쿠데타 측7.3. 평가의 변화
8. 미디어9. 기타10. 주요 가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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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as Attentat vom 20. Juli 1944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최후의 아돌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다른 히틀러 암살계획은 이전에도 여러 건 더 있었으나 흔히 히틀러 암살 시도라고 하면 이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2. 발단 및 암살 계획

“미친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을 때, 기독교인의 본분은 그 버스에 치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 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운전기사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1944년 7월 20일에 이루어진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시도는 배경사가 길다. 이 배경사에서 깊이 얽혀서 드러나는 것은 드높은 윤리 의식, 숭고한 도덕적 의무감, 명예율, 정치적 이상주의, 종교적 신념, 개인적 용기, 보기 드문 이타심, 강한 인간애, 나치의 국수주의와는 몇 광년은 떨어진 조국애 같은 것의 복잡한 가닥이다. 이 배경사는 또 불화, 의혹, 실수, 착오, 도덕적 딜레마, 근시안, 우유부단, 이념적 균열, 개인적 반목, 엉성한 조직, 불신, 순전한 불운으로 가득차 있다.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
이안 커쇼 - 히틀러 2권 14장 (악마의 행운) 802 page
독일 국방군(Wehrmacht), 특히 육군(Heer)은 프로이센의 군대라는 정통성과 자부심이 강했고 정치적 영향력도 큰 데다 나치의 영향을 거부하는 통칭 융커라고 불리는 노장 보수파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2] 이들뿐만 아니라 18세기부터 이어져 온 프로이센 왕국의 유명한 군인 집안 출신 장성들도 상당했다.[3]

육군의 정신적 지주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등의 지향점은 바로 독일 제2제국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육군 상층부의 목표는 전제군주제[4]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퇴역 군인이 중심이 된 철모단 등의 사상도 이와 유사하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나치는 대중주의 같은 것을 내세워 민중을 선동하고 머릿수만 끌어모았지 (귀족 혈통이나 신분, 과거의 지위라는 측면에서) 국가 지도자로서의 정통성이나 자격은 없고 별 같잖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인 수준 낮고 근본 없는 집단이었다. 한마디로 어르신들이 보기에는 영 탐탁지 않은 집단이었던 것. 독일 군부 계통 정치 세력과 나치가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어디까지나 반공주의, 반민주주의라는 이념 면에서 공통분모가 있었으며 나치의 세력이 워낙 급격히 커졌기 때문이었고 프로이센 군국주의나치즘 사이에는 의외로 갈등의 소지가 깊이 잠재되어 있었다.

같은 국방군에서도 크릭스마리네(해군)와 루프트바페(공군)는 규모가 작았던 데다 해군은 총수였던 해군원수 에리히 레더 제독카를 되니츠 제독 등이 전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편[5]이었고 공군은 총수였던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 장군 등의 성향에 따라 제2의 친위대에 가까울 만큼 친(親) 나치적인 조직이었으며[6] 또 해공군 모두 툭하면 육방부화를 시키려던 육군에 그닥 좋은 감정을 가진 편이 아니었으므로[7] 이런 반(反) 나치 성향 운동은 전반적으로 육군 장교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러한 국방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 노장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국방군, 특히 육군 내 장교들은 반히틀러 세력을 규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 1938년 주데텐란트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전쟁 발발의 기미가 보이려던 때 반(反) 히틀러 세력이 쿠데타를 모의한 것이 대표적이었으나 뮌헨 협정이 이뤄지면서 쿠데타를 취소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계획은 차후로 미뤄졌다. 하지만 그때 쿠데타를 준비하던 인물들은 고스란히 남아서 7월 20일의 암살 음모까지 준비했다. 7월 20일의 암살 시도, 즉 이 문서에서 다루는 암살 시도 이후 반(反) 히틀러 세력이 대거 숙청되면서 쿠데타 및 암살 시도는 종전시까지 소강 상태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국방군 내 반(反) 히틀러 비밀조직검은 오케스트라(Schwarze Kapelle)는 히틀러를 암살한 뒤 1942년에 세워진 비상 계획 발키리 작전을 이용하여 독일 국내를 장악한 후 미국 및 영국과 종전 협상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가장 중요한 히틀러를 암살하는 임무는 독일 육군 보충군(Ersatzheer)[8] 참모장교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일반참모 대령이 맡기로 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큰 부상을 입어 왼쪽 눈과 오른팔, 그리고 왼손 손가락 두 개를 잃었기 때문에 중증 장애인으로 동정을 받았고, 더불어 퇴역해도 됨에도 자진해서 육군에 남아 충성심 높은 장교로 인식되어 몸수색도 그리 까다롭게 하지 않는 편이어서 히틀러에게 접근하기 용이한 인물이었다.[9] 이에 따라 슈타우펜베르크는 폭탄이 든 서류가방을 들고 히틀러가 머물던 동부전선 사령부인 볼프스샨체(Wolfsschanze)에 가서 히틀러의 회의실에 서류가방을 놓고 나오기로 계획을 세우고 조금이라도 의심을 덜 받도록 거사 몇 달 전부터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는 용의주도함까지 보였다.

계획의 대략적인 내용은 슈타우펜베르크가 폭탄을 놓고 와서 히틀러가 사망하면 독일 보충군 총사령관인 육군 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이 발키리 작전을 발동하여 독일 국내를 장악한 후 육군 상급대장으로 퇴역했던 루트비히 베크 장군이 국가섭정[10], 라이프치히 시장을 지낸 정치인 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Carl Friedrich Goerdeler)가 국가총리, 육군 원수 에르빈 폰 비츨레벤 장군이 국방군 총사령관을 맡는 것이 었다. 그리고 실질적인 암살 작전을 입안, 기획했던 실무자인 육군 대장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Friedrich Olbricht) 장군과 소장 헤닝 폰 트레슈코프 장군이 각각 국방장관과 경찰총감을 맡기로 하였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국방차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영국과 종전협상을 벌이면서 소련을 막는다는 복안이었다.

3. 암살 실행과 실패

당초 거사는 1944년 7월 11일에 이뤄질 예정이었지만 히틀러의 회의에 참석하면서 폭탄을 놓고 오려고 했던 계획이 그날 하인리히 힘러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지막 순간에 취소[11]되었다. 7월 15일에는 히틀러, 힘러, 괴링 셋 모두가 회의에 참석했고 슈타우펜베르크도 폭탄을 들고 갔으나 시한폭탄이 작동하려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 히틀러가 방 밖으로 불려 나가는 바람에 역시 취소되었다.

이러던 와중에 7월 17일 괴르델러가 체포되었고 설상가상으로 7월 18일에는 게슈타포에서 음모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가 곧 체포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있었다.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으나 검은 오케스트라는 이 소문 때문에 게슈타포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고 있다고 판단,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기회를 영영 놓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침 7월 19일, 늑대 소굴[12]의 총통 본영에서 보충군에 다음 날 1시에 열릴 작전회의에 병력동원 현황을 보고하기 위해 보충군 참모장교를 보내라는 통보를 보낸 까닭에 검은 오케스트라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보냈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전속부관 베르너 폰 헤프텐(Werner von Haeften) 육군 보병중위가 늑대 소굴의 총통 본영에 도착하고, 검은 오케스트라 멤버들과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한 각 장성 및 장교들은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에 모여 상황을 주시하며 암살기도와 동시에 그 날 오후 1시를 기해 발키리 작전을 발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3시로 예정되어 있었던 작전회의는 히틀러가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하기로 했기 때문에 30분 앞당겨진 12시 30분으로 변경되었다. 그렇게 작전회의는 시작되었고 회의에 살짝 늦은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실로 가던 도중 모자와 벨트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둘러대며 대기실로 들어갔고, "날씨가 더워 이 나 셔츠가 젖었으므로 좀 갈아입겠다"며 대기실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헤프텐 중위와 함께 가방 속의 폭탄 신관을 작동시켰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장애가 있어 경계를 덜 받았지만, 손가락이 세 개 밖에 없는 한 손만으로 급히 폭탄을 기폭시키느라 두 개의 폭탄 중 하나만 작동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중간에 도움을 주던 헤프텐 중위가 대령에게 재촉하는 다른 장교들로부터 시간을 끌기 위해 도중에 나오는 바람에, 중간부턴 혼자 해야 했다. 시한 장치[13]펜치로 캡슐을 짓눌러서 약품을 혼합시키는 화학식이라 매우 번거로웠기 때문에 고생이 심했다. 그리고 12시 36분 회의실로 들어간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와 가장 가까운 곳에 폭탄이 든 자신의 서류가방을 두고서 베를린에서 급하게 올 전화가 있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떠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72-025-12%2C_Zerst%C3%B6rte_Lagerbaracke_nach_dem_20._Juli_1944.jpg
사건 직후, 현장의 모습
"소련군은 막강한 병력으로 뒤나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선봉은 이미 뒤나부르크 남서 지구에 도달했으며 페이푸스호 주위의 아군을 즉각 후퇴시키지 않으면, 파국이 ㄷ..."[14]
12시 42분, 육군 참모총장인 육군대장 아돌프 호이징거(Adolf Bruno Heinrich Ernst Heusinger) 장군이 동부전선이탈리아 전선에 대한 브리핑을 하던 중 폭탄이 터졌다. 당시 히틀러는 육중한 참나무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서 지도상의 항공 정찰 위치를 살피고 있었던 때였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으며 유리 파편 나무 조각 종이와 잡동사니가 사방으로 튀었다.

폭발이 일어났을 당시에 회의실에는 24명이 있었는데 속기사 두 명 중 한 명인 하인츠 베르거가 즉사했고 2명이 사건 하루 ~ 이틀 뒤, 1명이 부상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2개월 뒤 사망해 총 4명이 사망했다. 20명의 부상자들 중 몇명은 폭발의 충격으로 멀리 날아갔고 대부분이 머리와 옷에 불이 붙거나 뇌진탕으로 쓰러지고 고막이 터지는 부상을 입었다. 히틀러 본인도 폭발로 인해 에 나무조각이 박히고 고막 파열과 약간의 다리 화상을 입었다. 다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기에 폭발의 충격에서 벗어난 뒤 그냥 바지에 붙은 불길을 탁탁 두드려 끄고 불에 그을린 뒷머리를 털면서 문으로 다가갔다. 한편 폭발이 있었지만 큰 부상을 입지 않았던 빌헬름 카이텔도 폭발을 피해 나가려던 도중 문에서 히틀러를 보자 "살아계셨군요, 살아계셨군요"라고 반가워하며 거동이 불편한 히틀러를 부축하여 건물 밖으로 나왔다. 곧이어 총통 주치의 테오도어 모렐 박사가 황급히 뛰어왔고 그의 시종인 링게가 혼비백산하여 뛰어오자 히틀러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누가 나를 죽이려 했네, 링게"라고 말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rafik_-_Lagebesprechung_Wolfsschanze%2C_20._Juli_1944.png

폭탄 폭발 직전, 회의실의 인원 위치 표시다. 해당 인원들은 번호별로 다음과 같다.

암살이 실패한 이유는 폭약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15], 원래 회의장이었던 밀폐된 콘크리트 벙커가 아니라 창문 등이 있어 환기가 가능한 일반 건물인 것도 원인이었다. 사실 거사 당일이 한여름이라 콘크리트 벙커 내부가 더웠기 때문에 일반 건물에서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폭약을 소량만 가지고 간 것도 바로 사람 폭사시키기 좋은 벙커에서 진행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예정대로 벙커에서 폭발했다면 적은 폭발력이라도 튼튼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구조물의 손상을 최대한 줄이고 자연스레 폭풍과 폭압이 여기저기 부딪히며 배로 강해지지만 환기 잘 되는 일반 건물이면 폭풍과 폭압이 창문 등으로 새어나가고 회의실이 있던 내구성 약한 목조 건물같은 경우는 구조물도 함께 날아가 폭발력이 분산되는 걸로만 끝나고 자연스레 위력이 약해진 것이다. 만약 벙커에서 회의했다면 테이블 다리쪽에 가방을 놔뒀어도 강한 폭발력 때문에 방패가 되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슈타우펜베르크가 폭탄이 든 가방을 아쉬운 대로 폭사시키기 좋은 위치에 놓고 간 뒤 호이징거 장군의 전속부관인 하인츠 브란트(Heinz Brandt) 대령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방에 걸려 넘어질 것을 우려해 히틀러 가까이에 놓인 폭탄 가방의 위치를 테이블 다리 너머로 바꾸면서 결국 두꺼운 목재로 된 회의장의 테이블 다리가 히틀러의 방패가 된 탓이었다. 정작 가방을 옮긴 브란트 대령은 그 가방의 위치 덕에 자신도 사망자 중 한 명이 되고 말았다. 폭발로 그 자리에서 다리 1개를 잃고 다음날 사망한 브란트 대령의 상태를 생각하면, 가방의 위치만 그대로였어도 히틀러를 즉사시킬 수는 없어도 얼마 뒤 사망하게 할 수준의 부상은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폭약의 양이 적다는 문제는 대령 본인도 알고 있었으며 콘크리트 벙커의 폭발력 증대 효과를 기대했으나, 위처럼 예상 외의 변수가 몇 개 겹치면서 히틀러 암살은 실패하고 말았다.
파일:부상자들을 위문하는 히틀러.jpg
암살 시도 당일에, 현장에 있던 부상자들을 위문하는 히틀러의 모습[16]

단, 당장은 멀쩡해 보였던 히틀러도 이 폭발로 인해 심신의 피해를 꽤 보긴 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건 이후 약간의 반신 마비 증세 및 왼손 경련 증세 등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의심병이 깊어지는 등 성격도 더더욱 나빠졌다.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이 폭탄이 터짐과 동시에 암살 대상자의 죽음을 확인하지도 않은채 암살의 성공을 확신하는 오판을 저지르며 늑대 소굴을 다급히 떠났다.[17] 폭발 직후 늑대 소굴 외부의 공군 비행장에 대기중인 정기공수편인 Ju 52 수송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둘이 탄 차량의 운전을 맡은 육군 소위가 폭발 와중 대령이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서둘러 늑대 소굴 밖으로 나갈 것을 재촉하고, 남은 폭탄을 길 옆 풀숲에 내버리는 등 수상쩍은 모습을 보긴 했으나, 짬이 딸려서 제지하지 못하였고, 정문 위병소에서 위병조장인 육군 부사관에게 잠시 제지당했으나, 슈타우펜베르크가 늑대 소굴에서 근무중인 친구인 장교 한 명과 통화해 통과, 무사히 수송기에 탑승해 베를린으로 갔다.

그 둘이 돌아오는 사이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에 모여있던 장성들은 오후 1시 15분, 총통 본영의 통신부대 사령관이었던 육군 통신대장[18] 에리히 펠기벨(Fritz Erich Fellgiebel) 장군의 연락으로 히틀러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도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평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철저히 수상쩍은 행동을 자제해 왔고, 히틀러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를 중증 장애로 퇴역해 여생을 보내도 됨에도 자진해서 군에 남은 충성심 강하고 성실한 모범적인 장교로 여겼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소련이 저공비행으로 폭탄을 투하했거나 이미 오래 전에 연합군 스파이가 폭탄을 미리 설치 해두고 나중에 터뜨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부하 장교들에 의해 슈타우펜베르크의 여러 수상한 행동들이 보고되자 히틀러는 슈타우펜베르크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체포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펠기벨 장군이 13시경에 늑대 소굴의 통신선을 몰래 절단했기 때문에 이곳은 연락두절로 고립되었다.

4. 발키리 작전의 발동, 뒤이은 쿠데타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는 발키리 작전을 발동할지 여부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슈타우펜베르크와 연락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히틀러가 살아 있다고 연락한 펠기벨 장군이 전한 소식도 단편적인 것이라서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은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암살시도와 쿠데타를 실패로 이끈 결정적인 순간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오후 3시 45분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에 도착하여 폭발 성공을 보고했다. 곧이어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켜 총통을 암살했다'는 위조된 군령에 의해 발키리 작전이 발동되었고 친위대 사령부가 봉쇄되었다. 올브리히트 장군은 프롬 장군에게 보충군의 동원을 요구했지만 쿠데타 가담 여부를 그때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프롬 장군은 올브리히트 장군에게 총통이 죽었다는 증거를 대라고 말했다. 그런데 마침 늑대 소굴의 통신선이 복구되어 카이텔 원수로부터 히틀러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프롬 장군은 쿠데타 모의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하고 상황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올브리히트 장군은 일단 도망쳤다.

오후 5시, 늑대 소굴에서는 통신선이 복구되고 올브리히트 장군이 각 군에 발신한 발키리 작전 발동의 통신이 접수되었다. 그와 함께 각처의 반란 소식들이 히틀러에게 보고되자 히틀러는 이 암살사건이 슈타우펜베르크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그 뒤에 거대한 배후가 있음을 직감하고 장검의 밤 사건(Nacht der langen Messer)[19]보다 더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작전명 발키리의 한 장면.

오후 4시 30분 베를린에 도착한 베크 장군, 올브리히트 장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행동을 개시하고 프롬 장군에게 다시 찾아가 쿠데타에 가담할 것을 촉구했다가 발키리 작전의 발동을 알고 분개해 자신들을 체포하려는 프롬 장군을 그대로 체포했다.

오후 5시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러 온 친위대 장병들이 오히려 역으로 체포되고, 반나치 병력이 행동을 개시해 베를린에 있던 나치 당 고급 관료들을 체포했다. 오후 6시에는 쿠데타 세력의 명령에 따르던 육군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수도경비대대 예하 병력들이 친위대와 보안국 사령부를 점령하기 위해 부대를 이동시켰다.

5. 실패로 돌아간 쿠데타

그러나 6시 28분 히틀러가 자신의 생존을 알리며 음모자들에게 처절하게 복수하겠다는 라디오 연설을 발표하자 쿠데타 세력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발키리 작전의 발동과 히틀러의 생존이라는 정보와 지령들이 쏟아지면서 병력들의 혼란이 심했던 판에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에서는 라디오 연설이 조작이라고 주장하면서 전군에 발키리 작전의 발동을 알렸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수의 장교들이 이탈하여 결국 암살 기도와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특히 쿠데타 세력의 유일한 정예부대였던 육군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수도경비대대 오토-에른스트 레머(Otto-Ernst Remer) 보병소령[20]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잡으러 갔다가 히틀러와 직접 통화한 후 히틀러 편으로 돌아선 것이 결정타였다.

오후 10시경에는 쿠데타에 가담했던 장교 10여명이 배신했고 총격전 끝에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쿠데타측의 장교들이 체포되었다. 감금되어 있던 프롬 장군도 풀려났고 곧이어 프롬은 자신이 쿠데타 세력과 접촉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2시간 뒤인 자정에 긴급 군법회의를 소집하여 베크 장군에게는 자살을 요구하고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 등에게 사형을 언도한 뒤 바로 집행에 들어갔다. 총살의 집행은 예비군 사령부 뜰 내에서 군용 차량의 전조등을 사수들의 뒤에서 켜 총살 대상들을 비추고, 프란츠 허버(Franz Herber) 육군 보병 중위가 사수들을 지휘해 집행했다. 총살은 군번순으로 집행되어 올브리히트 장군이 제일 먼저 사살됐고, 그 뒤로 퀴른하임 대령이 사살됐으며, 그 직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처형하고 마지막으로 헤프텐 중위를 처형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령이 총살될 때 그를 몸으로 보호하기 위해 헤프텐 중위가 뛰어들어서 대령과 동시에 사살당했다. 유일하게 육군상급대장 에리히 회프너(Erich Hoepner) 장군만은 프롬 장군이 절친을 죽이기를 꺼린 덕에 현장에서 사살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2시 30분 오토 스코르체니 SS 중령이 현장에 들이닥쳐 아직 살아 있었던 회프너, 비츨레벤, 프롬 등을 체포했다. 쿠데타 중간에 진상을 알고 진압군 측으로 돌아선 레머 소령이나 단순 처형 지휘만을 맡은 허버 중위 등은 체포되지 않았다.

한편 프랑스 파리에서도 검은 오케스트라 그룹의 일원인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Carl-Heinrich von Stülpnagel) 육군대장이 휘하 한스 폰 보이네부르크-렝스펠트 중장의 제325 방어사단을 동원해 파리의 SS와 게슈타포들을 체포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파리에 있었던 서부전선 해군 사령관 해군대장 테오도어 크란케(Theodor Krancke) 제독이 이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예하의 해군 병력 1천여명을 육전대로 동원하겠다며 대치했고 보다못한 주 파리 대사의 중재로 슈튈프나겔 장군은 반란을 포기했다. 슈튈프나겔 장군은 "오해였다"며 상황을 무마한 뒤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해군과 SS 지휘관들과 건배를 하며 훈훈한 분위기로 헤어졌다. 슈튈프나겔 장군은 베를린에서의 거사 실패 소식을 접하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이후 체포되어 8월 30일에 처형되었고, 보이네부르크-렝스펠트 장군은 운 좋게도 체포조차 되지 않은 채 종전시까지 육군에 남아 복무하다 미국 측에 포로가 되어 종전 1년여만에 석방된 뒤 헤센의 사유지에서 평온한 여생을 보내며 90대까지 장수했다.

5.1. 만약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다면?

쿠데타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히틀러를 암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 암살을 성공했다면 쿠데타가 실패하더라도 히틀러가 이리저리 꼬아놓아 막장이 돼버린 독일군 지휘체계만큼은 일시적으로 마비되면 이 틈을 타서 히틀러가 그렇게 꺼리던 협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더라도 쿠데타가 성공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발키리 작전이 실행될 때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Großdeutschland), 즉 대독일사단 소속 수도경비대대의 특성에 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군사반란 발발시 즉시 진압에 투입할 정예 수도 방위 부대를 모체로 한 베를린 근위연대를 기반으로 창설된 정예 부대였다. 진압 부대가 역으로 반란 모의에 적극 동참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21]

게다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육군 최정예 부대로 주력 부대는 막대한 전과를 올리면서 동부전선 곳곳에서 맹활약 중이었고 쿠데타 측이 동원할 수 있었던 베를린 내 주둔군은 고작 4개 중대 뿐이었다. 그렇다면 부대를 직접 통솔하게 될, 그 4개 중대 내의 중간급 간부들을 포섭해야 했는데 그 많은 수의 간부들을 포섭하는 것은 쿠데타 사전 발각의 위험이 너무 컸다.

결국 쿠데타 측은 SS가 히틀러를 암살하고 군사반란을 시작했다는 거짓 정보를 발표하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간부급 장교들을 쿠데타에 포섭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발키리 작전을 따라 부대를 통솔해 작전을 계시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히틀러의 생존과 SS의 연락이 닿으면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이것이 쿠데타였음을 인지하고 이 작전은 실패하게 된다.

또한,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에 따르면[22] 나치당내의 주요인사들을 체포하거나, 정보교환을 차단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살해하는 등 이러한 행동으로 쿠데타 성공 확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들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쿠데타 당시 괴벨스는 슈페어와 같이 있었고, 이들의 무장은 그들이 각자 소유하던 권총 뿐이었다. 1개 소대도 아니고 1개 분대만이라도 이들을 해하려 시도했다면 이들은 결코 무사할 수 없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방송국을 점령해서 독일 전역에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이들은 위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쿠데타 계획을 세웠으면서도 자신들의 집권 방법은 도덕적이어야 하고 나치에 대한 단죄는 합법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 아래 나치 고관을 암살하지 않고 그냥 체포해서 후에 법정에 세운다는 아마추어적인 생각 때문에 이렇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쿠데타 계획을 세운 군인들이 전쟁을 잘 알 뿐 정치적인 공작에는 서툴렀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특성을 고려해서 반히틀러 쿠데타라는 점을 숨긴 채로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는 쪽이 사실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이 계획에서 군부를 대표한 루트비히 베크에 대해서 구데리안은 자기 회고록에서 쿠데타에 가담하라고 권유가 있었으나 주모자가 루트비히 베크인 것을 알고 그렇게 결단력 없는 인물이 성공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구데리안이 주모자가 베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담했을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쿠데타는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특성상 '완벽한 계획'을 만드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다. 실제로 역사상 성공한 쿠데타들도 계획 자체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진압을 해야 하는 정권 측의 실수가 겹치거나 뜻하지 않은 행운을 통해 성공한 사례가 많다. 무엇보다 쿠데타 계획이 허술했다 하더라도 쿠데타 측의 반히틀러 저항 정신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계획이 허술했건 아니건 이들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걸고 한 것이다.

당시 쿠데타 측의 계획은 히틀러와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마르틴 보어만 등을 비롯한 나치당 수뇌부를 제거하고 독일 제국 시절과 같은 군주국을 세운 뒤 연합국과 강화하고 그들과 함께 소련에 맞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패망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연합군 수뇌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설령 그들이 히틀러 암살에 성공하고 주요 인사들을 제거한다 치더라도 힘러의 경우 테러가 일어났을 땐 저 혼자서 멀리 떨어진 채 SS 호위 병력의 경호를 받으면서 무장 열차 안에 있었고 힘러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한 뒤 자신이 독일의 총통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23] 파울 하우서요제프 디트리히SS 소속 장성들은 힘러를 싫어하며 오로지 히틀러에게 충성하였으나 이들도 쿠데타 측을 그냥 보고 있었을 리도 만무했다.

결국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한 데로 쿠데타 측과 SS의 충돌로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고 전선이 붕괴되어 연합국이 12월 크리스마스 전에 베를린에 입성하는 것으로 상황은 전격 종료됐을 것이다. 진짜 많이 잘 해서 쿠데타 측이 힘러까지도 제압하고 SS의 진압도 물리친 후 신정부를 설립했다고 치자. 그러면 이미 독일 내부의 혼란으로 전선의 붕괴는 더 빠르게 이루어졌을 테고 신정부가 협상을 시도할 즈음엔 연합군은 이미 지크프리트동프로이센까지 밀려오고 있었을 것이고 이미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으로 추축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만 받을 것을,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받기 이전까지 그 어느 국가도 단독 강화를 맺지 않을 것을 결의한 상태였다.[24] 즉, 쿠데타 측이 암살과 신정부 수립에 성공했어도 독일을 끝까지 조지기로 연합군이 결의한 이상 쿠데타 세력이 원한 연합국과의 협상은 성공했을 가능성은 매우 제로였다. 정말 만에 하나 독일을 끝까지 조지기로 결정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윈스턴 처칠이 계획을 틀어 테헤란 회담의 결의를 위반하고 독일과 강화를 체결했다고 한들 이미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압도적인 전력의 소련군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 확실. 게다가 병사들의 사기도 쭉쭉 내려가고 국민들의 신뢰도 내려간 마당에 소련군에 쳐발리는 독일 군부표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에 의해 제2, 제3의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도 없다. 이 점은 안네의 일기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즉, 쿠데타 측이 암살과 신정부 수립과 서방 연합국과의 협상에 상관없이 독일의 패망은 정부만 바뀌었을 뿐 결국엔 이루어졌을 일이고 더욱이 이들은 총통을 죽이고 자국을 멸망시킨 매국노들로 후대에 부정적으로 기록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되면 철저한 나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한 번 배후중상설이 돌면서 독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세력이 재집권하는 결과를 불러왔을 것이며, 제3제국으로 회귀하거나 나치 독일 그 이상으로 맛탱이가 가버린 제4제국으로 탄생했을 수도 있다.[25] 설령 민주화됐더라도 현재 일본마냥 과거사 문제로 프랑스, 폴란드, 체코, 네덜란드 등 유럽 주변국과의 관계가 매우 시끄러웠을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차라리 히틀러 암살보다는 연합군 측에 내통해서 한패가 되는 쪽이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설령 벌을 받더라도 죽지는 않을 테니까...

6. 사건 이후

"소련에서 세운 그 모든 거창한 계획이 몇 년 전부터 왜 하나같이 실패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결국 반역 때문이었다! 반역자들만 아니었어도 우린 진작에 이겼을 것이다. 이래서 역사 앞에 난 당당하다."[26]
암살 작전 실패 직후 히틀러
이후 히틀러는 자신이 공언한 대로 처절한 복수를 단행했다. 히틀러는 암살 작전 실패 직후 "몇 년 전부터 내가 하는 일에 발목을 잡아 온 놈들을 잡아냈다, 참모본부 전체가 오염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야비한 짐승들이 군복을 걸치고 다녔다. 오래전부터 번식해 온 이 무리들을 완전히 쓸어버려야 한다"면서 군부 지도자들에게 오래전부터 품어 온 뿌리깊은 불신감을 드러냈다.

히틀러는 "이 범죄자들에게는 총살형도 과분하다"면서 국방군에서 내쫓고 민간인 신분으로 법정에 세워서 사형을 선고한 후 두 시간 안에 처형해야 하며 절대로 봐주지 말고 바로 목을 매달라는 사실상 즉결처분과 다를 게 없는 지시를 내렸다. 교수형을 집행할 때도 밧줄이 아닌 갈고리에 걸린 피아노줄을 이용해 가축처럼 매달라고 명령하여 최대한 오랫동안 고통받도록 조치한 것은 덤이었다.
롤란트 프라이슬러 인민재판소장이 주도하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재판 장면[27]
이후 무려 7,0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어 그 중 4,980명이 '피의 판사'라고 불리던 롤란트 프라이슬러[28]가 주관한 인민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암살 계획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암살계획과 무관한데도 한꺼번에 몰아서 숙청된 사람들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했고 프롬 장군은 불고지죄[29]로 1945년 3월 15일 총살형을 당했다. 프롬은 죽기 전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배신하지 않는 거였는데..."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이들의 처형 장면은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영사기와 녹음기를 동원해 철저히 녹화되었다.[30]

하지만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최전방이 되어버린 프랑스, 특히 파리 지역의 반란 인사들은 그나마 숙청의 칼날을 피해갔다. 사건 실패 직후 서부전선 총사령관 룬트슈테트의 참모장 귄터 블루멘트리트 보병대장이 당시 파리 지역 친위대 최고 지휘관급이던 카를 오베르크헬무트 크노헨을 만나 그들을 잘 구슬려서 대충 덮자고 해서 그렇게 됐다는 설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둘을 구슬렸는지부터가 참 궁금하다. 웃긴 것은 블루멘트리트 본인도 히틀러 암살 시도 소식을 접하자마자 상관이던 클루게 원수에게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가 거부당했음에도 정작 히틀러가 그가 무관하다고 철석같이 믿는 통에(...) 살아남았다는 거다. 어쨌거나 실제로 파리 내 쿠데타의 주동자격이던 슈튈프나겔은 책임을 피할 수 없었지만, 휘하에서 쿠데타를 이행했던 보이네부르크-렝스펠트나 여타 많은 장교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 원수는 게슈타포의 수사에서[31]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는 식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롬멜 본인은 거사 며칠 전(7월 17일) 공습으로 부상을 입으면서 암살 계획의 실행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또 롬멜은 총통 암살 미수 사건을 병상에서 보고받고 그 누구보다도 경악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게슈타포의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격노했지만, 롬멜이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던 까닭에 히틀러도 롬멜을 멋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때문에 히틀러는 롬멜에게 사후에 국장을 치러 주고 가족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자살하든지 아니면 반역자로서 재판을 받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두 선택지 중 전자를 선택한 롬멜은 10월 14일에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최신 연구는 슈퇼프나겔의 진술이나 한스 슈파이델의 주장과 달리 롬멜이 히틀러 암살 계획에 적극 동참하지 않았다고 본다. 다만 귄터 폰 클루게와 함께 접촉을 했다는 것은 게슈타포의 심문기록을 통해 확실히 밝혀졌는데, 이때 접촉한 것도 슈타우펜베르크의 사촌인 베르톨트 솅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해군 판사로 암살에 대한 내용조차 아니었으며 오로지 서부전선에서의 연합군 공세의 심각성과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이 결코 완전히 연합군을 몰아내지 못하고 결국엔 패망할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 정도였으며, 이 둘 모두 히틀러에게 휴전을 요청해야만 하고 필요시 총통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으며 베르톨트 슈타우펜베르크가 물은 총통에 대한 조치가 없으면 휴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한 것, 그리고 힘러괴링, 괴벨스가 히틀러가 휴전을 결정하는데 방해하고 있으며 이들이 총통의 식견을 막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것에 동의하며 주장한 것까진 맞다고 한다. 다만 이때 말한 총통에 대한 조치는 히틀러가 휴전협상을 하도록 하는 일련의 고위 장교들의 행동이지, 히틀러에 대한 암살은 아니었다.

검은 오케스트라의 주도자 중 한 명인 헤닝 폰 트레슈코프 장군은 당시 육군 제2군단 참모장으로 재직중이었고, 거사 실패 소식을 듣고는 주둔지였던 폴란드 비아위스토크 근교의 숲 속으로 운전병과 전속부관만 대동한 채 들어간 뒤 수류탄으로 자살했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원수의 후임이자 롬멜의 상관으로서 서부전선 사령관을 맡았던 귄터 폰 클루게(Günther "Hans" von Kluge) 원수도 패전 책임이 두려운데다가 역시 암살계획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발각될까 우려하여 롬멜에 앞서 8월 19일에 자결했다. 암살계획에 가담했던 국방군 정보국(Sicherheitsdienst) 국장인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 제독, 베를린 경찰청장인 경찰대장[32] 볼프 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Wolf-Heinrich Graf von Helldorf) 장군과 제국사법경찰 사령관인 경찰중장[33] 아르투어 네베(Arthur Nebe) 장군, 육군 원수였던 에르빈 폰 비츨레벤도 처형되었다. 대표적인 민간인 반나치 인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34]도 체포되어 수용소에 투옥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총살당했다.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레머 소령은 사건 종결 후 대령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1월에는 육군 소장이 되어 베를린 방어를 맡았다. 레머 장군은 전후에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시 자신의 역할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니, 후회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전후 네오나치 정당인 사회주의제국당을 창당했다.[35] 이후에도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책을 출간하는 등 각종 나치 짓은 다 하다가 말년에 법정 소송에 휘말려 스페인으로 도피해 1997년에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사건 이후 히틀러의 육군에 대한 불신감은 당연히 극도로 강해졌고, 이는 육군과 무장친위대 사이의 대립에서 친위대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립이 끝나기는커녕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또 히틀러의 불신감에 불안감을 느낀 육군 인사 중 일부는 무장친위대로 전군 신청을 하기도 했다.

7월 20일 사건 이후 독일 육군 장교들은 '용의자'로 하룻밤새 게슈타포에 연행되어 사라지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고 누구든지 가족이 소환되어 조사받으면 이에 연루되어 끌려가는 상황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숙청의 파도가 몰아치는 가운데 히틀러는 암살자들이 처형되는 장면을 녹화한 필름을 자신의 벙커에서 상영했는데, 대부분은 친위대 하급 장교들과 민간인들이었고 드물게 해•공군 장교가 섞여 있었을 뿐 육군 장교는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이 사건 이후 군부는 이제까지 히틀러에게 반대하는 의견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원로 장성들마저 눈치를 보게 되었으며 그렇게 히틀러는 자신의 최고 도박수를 본격적으로 밀어붙였다.[36] 그리고 그렇게 그나마 마켓 가든 작전으로 단련된 서부전선의 잔여 독일군 정예병력은 연합군에게는 정말 고맙게도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다.

히틀러는 사건 후 자신을 제외하고 회의실에 있었던 모든 사상자들에게 기존의 전쟁 사상자들에게 수여되는 전상장과 별개로 사건 당일의 년월일이 새겨진 특별 전상장을 사망 및 부상 등급에 따라 수여했다.

7. 평가

7.1. 전후의 평가

독일군 병사들은 노르망디에서 공군의 지원 없이 연합군 군대와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그들에게는 고위 지휘 체계가 무질서해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또 7월 20일에는 여러 장군들이 히틀러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함으로써 독일군이 위기를 맞았다. 내가 보기에 그 장군들은 옳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을 '축출'하는 것은 장군들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정치인들 스스로 해내는 것이 최선이다.[37]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회고록 <전쟁의 역사>, 1968년
종전 직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한스 슈파이델을 위시한 암살자 그룹 멤버들의 회고록이 먼저 발간되었다. 이들은 히틀러에 의해 목숨을 잃은 옛 동료들을 추모하며 자신들의 높은 이상에 동참하지 않았던 독일군 장교들을 있는 사실, 없는 사실을 모조리 동원하며 매도했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마무리되고 국방군의 유명 지휘관들이 석방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프로이센 장교들은 "군인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방향성은 조금 다르지만 위의 몽고메리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무려 암살 미수 사건 24년 후에 출판된 회고록임에도)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참전한 연합군 고위 장성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1950년대에 발표된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위의 몽고메리의 글과 비슷한 내용으로 암살자들에 대한 평가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암살자들의 높은 이상에는 동의하지만 나치 친위대와의 유혈 투쟁으로 내전이 발생했을 것이고 외교적으로도 아무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연합군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완전히 승기를 잡은 1943년 1월 개최된 카사블랑카 회의에서 추축국에 대해 무조건 항복만 받아들이겠다는 방침을 세워 둔 상태였기 때문.[38]사실 이 평가조차 제일 잘 내준 평가이다[39] 아울러 다른 장성들에 대한 암살자 그룹들의 비난에 대하여 비방에 가까운 사실 왜곡이라며 이를 반박했다.

독일군의 명장 구데리안만슈타인, 파울 하우서 등은 '그놈들은 그냥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니까 어떻게든 자기 살길 찾으려고 일을 벌인 기회주의자들임에 불과하며 오늘날 가담자들이 받는 대우는 놈들이 아닌 전선에서 싸운 장병들이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암살 미수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도 이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으며 조지 S. 패튼은 '멍청한 놈들'이라며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나치당 관헌들은 전투 부대원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고 이들에 대한 불만이 치솟으면서 종전 후에 이러한 현실을 바꾸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음에도 히틀러 암살 미수 소식이 전해졌을 때 장병들은 매우 분개했으며 암살자 그룹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칠 때까지 그들의 임무를 다했다. 국내에도 발간된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에는 '1945년 이후, 저항 조직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들은 진정한 이상주의자들의 특징인 겸손함을 잃어버렸다. 유감스럽게도 1944년 7월 20일 사건으로 인해 처형당했던 사람들은 독일 국민에게 어떤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저항 조직원들의 죽음이 일선의 장병들의 죽음보다 덜 존귀하지도, 더 존귀하지도 않다.'고 평가한 내용이 있다.

고위 장교들을 비롯한 국방군의 젊은 하급장교들을 비롯한 일선의 장병들의 인식이 이토록 부정적이었던 대표적인 이유는 당시 독일군 내부에는 이 전쟁은 이미 졌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가지고 암살자 그룹들은 작전을 짜 나아갔다. 즉 서부 전선 방어군 원수 에르빈 롬멜귄터 폰 클루게그리고 구데리안을 비롯한 주요 OKH 즉 국방군 육군 총참모부에서 양면에서 압박을 가해오는 소련군과 연합군을 막기 힘들며 협상을 해서 전쟁으로 국토가 망해버리기 전에 휴전을 하자는 아이디어를 기존의 히틀러 반대 장교들이 발전시켜서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에서 명시된 최고위 장교들이 생각한 협상이란 '어느 정도 프랑스에서 격전으로 연합군이 힘을 빼고 있는것을 이용해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설득하여 우선 연합군과 휴전하고! 서부전선의 전 독일군을 동부전선으로 투입하여 소련군의 공세로 분쇄된 독일 동부군을 재건하여 전선을 안정시킨 후 휴전한다'였다.

즉 최고위 장교들은 히틀러 없는 휴전이 아니라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나치 독일의 휴전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안네의 일기에서 지적된 내용처럼 한숨을 돌린 후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히틀러에게 휴전을 할 것을 조르던 고위장교들이 당연히 암살자 그룹의 생각에 동의할 리가 없었다.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슈타우펜베르크의 사촌[40]에 대해 실시된 게슈타포의 심문기록이 전후 연합군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7월 3일 클루게롬멜을 만난 그는 이들에게 서부전선에서 서둘러 휴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를 총통이 끝까지 반려할 경우 총통에 대한 일련의 최종적인 제재나 행동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것은 바탕으로 서부전선 고위 장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한 제재나 행동은 결코 히틀러 제거를 의미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의 제재나 행동은 군사적 부분이었다는 것과 정치적 부분을 비롯한 타 부분에서의 권력을 박탈할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는것이 모든 연구의 동의사항이다. 동부전선 고위 장교들은 서부전선보다 더 뼈저리게 전쟁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히틀러를 위시로 한 제국의 휴전만 지지했을 뿐 총통 없는 독일 공화국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일선의 독일군 장병들과 하급 장교들, 그리고 심지어 독일 국민들에게도 공통적인 사항이었는데 이들 모두 전쟁이 이 꼬라지가 난것에 대해 분명 총통에 대한 의심과 불만은 있었지만 오직 군사적 역량에 대한 것이었지 정치적 역량에 대한 것은 없었다. 아니 심지어 있었지만 앞서 몽고메리가 지적한 것처럼 독일군 전장병들과 장교들 그리고 국민들은 그걸 정치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았지 군인들이 쿠데타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았다.

프로이센 왕국의 위대한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 독일 민족에게 있어서 군인으로서 서약한 것을 목숨으로 지킬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뇌리 속에 강렬히 박혀있었다. 즉 전쟁에서 밀려 매일같이 연합군으로 부터 열심히 얻어맞고 있었지만 전쟁 전 총통의 정치적 역량, 그리고 무엇보다 저 유명한 선서인 국방군 서약에 따라 죽음으로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게슈타포를 위시한 친위대의 악행에도 독일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총통의 정치적 역량과 독일 민족을 이끄는 리더십을 부정하고 뒤집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그 무엇보다 전쟁 발발 후 폴란드, 프랑스, 영국 본토와 대서양, 발칸 반도 그리고 지옥같은 소련 영토에서 앞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다하고 전사한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장병들과 장교들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독일인들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독일 국민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련의 암살 행위는 앞서 참혹하게 전장에서 전사한 전우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안위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개시했다고 보는것도 무리가 아니었으며 실제로 이 암살 미수작전에 참여했던 장교들 중에는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장교들도 있었다. 아인자츠그루펜 장교들은 그저 총통에 대한 높은 충성심과 잔악상을 기준으로 뽑힌 사병들과 달리 SS 나치 친위대 중에서도 히틀러 유겐트, 갈색 셔츠 돌격대나 청년 돌격대, 나치당 입당 절차를 거친후 그중에서도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충성과 이해도가 높은 이들로만 구성된 게슈타포와 제국 보안부 그리고 SD 방첩대에서 잔악성을 인정받은 이들로 구성된 장교들이었다. 독일 국민들에게는 이들이 안위를 위해 암살을 시도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히틀러에게 충성을 하던 작자들이었다. 이들이 독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전쟁으로 초토화될 독일을 염려하여 암살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는 게 당시 자연스러웠을까? 독일 국방군의 하급장교들과 장병들이 서부와 동부에서 각각 히틀러에게 저항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그럴 일은 전혀 없다고 봐도 됐다. 그만큼 독일군과 국민들은 히틀러와 나치당 그리고 나치 수뇌부의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히틀러를 1932년 이래 전폭적으로 지지해온 이유, 즉 독일 국민들을 이끌어 나갈 역량을 갖춘 유일한 지도자라는 것을 부정할 만큼은 아니었고 부정할 생각조차 없었다.
큰 뉴스! 히틀러 암살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유대인 공산주의자도, 영국자본가도 아닌 훌륭한 독일의 장군으로, 그것도 아주 젊은 백작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히틀러는 가벼운 상처와 화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히틀러와 함께 있던 수 명의 장군과 장교가 죽거나 다치고 주범은 사살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전쟁에 지쳐 히틀러를 없애려는 장군이나 장교가 많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히틀러를 제거하면 군인 출신 독재자를 옹립하고, 연합군과 강화를 맺은 다음 재군비를 해서 20년 쯤 지나면 다시 전쟁을 시작할 속셈이겠죠.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로 히틀러의 죽음이 늦춰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적의 독일군들끼리 서로를 죽여준다면 연합군측은 훨씬 유리하고 편하겠죠. 그렇게 하면 소련군과 영국군이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겪는 고생이 가벼워질 테고, 그만큼 빨리 파괴된 자기 나라의 도시 부흥에 착수할 수 있을텐데요.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1944년 7월 24일[41]
당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네의 일기에서도 그녀는 이 사건을 은신처에서 듣고 일기로 썼는데 암살 계획에 대해서 비슷하게 다음에 다시 전쟁이나 일으키겠지라는 식으로 적혀 있다. 히틀러가 죽었다고 해도 암살범들은 유대인을 마찬가지로 미워하던 자들이라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는지 자못 냉소적으로 씹고 있다. 암살 주도자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자들은 아니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유대인을 학살하고 다닌 아인자츠그루펜 장교들이 함께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10대 청소년이 스스로 논평을 내렸다기보단 그런 인식이 이미 대중 사이에 짙었다고 보는 게 좀 더 타당할 것이다.

7.2. 순수하지 않았던 쿠데타 측

가담자들이라고 해서 전부 자신들의 저서에서 주장하거나 언론에서 보도했던 것처럼 인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가담자 중 아르투어 네베 경찰중장은 무려 아인자츠그루펜 B의 지휘관 출신으로, 벨라루스 지역의 민간인들과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고 절멸수용소라는 아이디어를 최초로 입안한 자였다. 그리고 국방군 병참감 에두아르트 바그너 대장은 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공조하여 국방군과 친위대 사이의 협력 지침을 마련하고 동부전선에서 파르티잔 토벌전을 명목으로 벌어지는 대량 학살을 총감독했다.

쿠데타 주역이었던 헤닝 폰 트레슈코프 소장도 전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는 제2군단 참모장으로 재직하던 1944년에 건초 작전(Heuaktion)으로 알려진 폴란드 청소년 유괴 작전을 직접 실행했다. 그가 유괴한 5만 명의 아이들은 독일화 교육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독일 영내의 노동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였으며 심지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은 개인적으로는 무장친위대 토텐코프 사단의 범죄행위를 매우 싫어하던 인물이었으나 정작 자신도 학살에 적극 부역했다. 그는 히틀러가 내린 인종주의를 철저하게 신봉했으며 유대-볼셰비즘과 모스크바의 아시아 놈들을 뿌리부터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제4전차군을 이끌 당시에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 SS소장의 아인자츠그루펜 A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협력에 힘입어 아인자츠그루펜 A는 발트 3국 지역 유대인들을 거의 전부 살해했다.

심지어 가장 충실한 반나치 인사 중 하나였던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대장조차도 전쟁범죄에 일부 책임이 있다. 그는 방첩국 국장으로서 국방군의 게슈타포라는 평가를 받던 비밀 야전 경찰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비밀 야전 경찰은 독일 점령지 곳곳에서 파르티잔 토벌전을 명목으로 숱한 학살을 벌였다. 그리고 카나리스 대장도 그들이 정치장교 명령에 따라 소련군 정치장교 포로들을 고문학살하는 것을 승인한 바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이 명령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방첩국 국장으로서 이를 승인해야 했다. 1930년대부터 이어진 기나긴 반(反) 나치 행적 덕에 카나리스 대장의 이러한 범죄 가담 행위는 일부 참작되거나 넘어가는 편이지만 그런 그조차도 나치 범죄에 있어 완전히 깨끗한 인물은 아니었다.[42]

7.3. 평가의 변화

즉, 정리하자면 전쟁에 대해선 독일군 장병들과 국민들, 그리고 장교들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을 멈추기 위해 총통을 죽여야 한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히틀러와 나치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조차 히틀러와 힘러. 괴벨스를 제거한다고 나치 독일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전국민이 단결해서 국가적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판에 암살자들이 국가 혼란을 가중시킬 뻔했다는 것이다. 전후 연합군이 독일 국민들에게 탈나치화 교육과 노역을 시켰던것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연합군은 독일 국민들에게 폐허가 된 자신들의 도시를 직접 수리하도록 노역하면서 이 참혹한 광경이 독일군에 의해 전 유럽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상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 탈(脫) 나치화 영상물, 즉 여러 독일군 종군기자들이 찍은 얼마 안 되는 국방군과 친위대에 의해 이루어진 학살 장면, 그리고 연합군이 해방시킨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참혹함을 보여주며 나치의 전쟁범죄를 각인시키고 나서야 탈(脫) 나치화를 이룰 수 있었다.[43]

애초에 설령 쿠데타가 성공해서 연합군과 협상을 하려고 시도한들 연합군은 하인리히 힘러를 체포 대상으로만 생각했을 뿐 그 자신의 착각처럼 협상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 즉시 체포해서 전범 재판에 넘겨서 사형을 내렸을 인물이었다. 이렇듯 정작 독일군은 물론 적국에서조차 평가가 분분했다가 갑자기 이들이 추앙받게 된 것은 서독 정부가 사실 독일에도 히틀러의 압제에 저항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란 비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독일 내 좌파 언론에서 국방군의 인종 학살 연루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면 반대쪽에서 암살자 그룹 영웅화로 무마하려는 모습이 많았기 때문이다.

암살 그룹에 대한 재조명은 전후 독일의 재무장과 냉전 질서의 영향 하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냉전기 생산된 많은 대체역사 텍스트들에서 암살단원들은 히틀러를 제거한 후 연합군과 동맹을 맺어 소련에 대항할 것으로 서술되고는 하는데, 이러한 내러티브는 당시 서구인들의 국방군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추진한 재무장 정책을 통해 독일은 나치와 연관되지 않은 군사 전통을 찾아야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7월 20일의 암살 사건이 발굴되었다. 그들의 모습은 민주적 질서를 따르고 소련에 대항하는 연방군과 유사하다고 간주되었다. 초대 대통령 테오도어 호이스의 노력도 적지 않았다. 1951년만 하더라도 암살미수사건에 대한 전직 국방군 장병의 인식은 60%가 '반역자'였으나 이러한 노력으로 암살단원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되찾았다.

하지만 이 저항인물 강조에서 아르투어 네베 경찰중장 같은 기회주의적 성격으로 참여한 범죄자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1970년대부터 독일 좌파를 필두로 한 역사 청산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암살단원에 대한 평가 역시 엄격해지게 되었다. 독일 재통일 이후 동독과 서독이 보유한 나치에 대한 기록 그리고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나치에 대한 기록을 모아 많은 검증된 역사학자들의 토론을 통해 앞서 제기된 비판 사항을 보완하기 위해[44] 노력했으며 아르투어 네베 중장 같은 케이스를 가진 장교들은 기존의 서독 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암살 작전 애국자 목록에서 삭제하고 나치 부역자이자 전범으로 명시하였다. 현 독일 정부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히틀러 그리고 국가사회주의 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슈타우펜베르크와 중요 5인, 그리고 선별적으로 반나치, 반히틀러, 반전 사상을 가진 것이 확인된 인물들에 한해서만 영웅으로 추앙 중이다.

7.3.1. 독일 연방군의 전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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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우펜베르크의 조직은 군인들 역시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절대복종(Kadavergehorsam)에[45] 저항하고 자신의 도덕적 양심을 따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사례는 전후 독일에서 새로이 창설된 연방군의 자아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슈타우펜베르크 조직은 모든 여성과 남성 군인들의 롤 모델이 된다. 국가와 시민에 대해 책임감 있게 봉사한다는 의미의 "제복을 입은 시민(Staatsbürgers in Uniform)"이라는 표어는 오늘날 모든 군인들의 이상적 모습이다. 독일 군대의 모든 구성원들은 명령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복무해야 한다. "내적 지휘(Inneren Führung)" 개념의 이 중요한 기둥들은 연방군의 방향을 설정하는 핵심(Markenkern)이다.
{{{#!folding [ 독일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Die Gruppe um Stauffenberg hatte bewiesen, dass sich auch Militärangehörige dem Kadavergehorsam gegenüber den Nationalsozialisten entziehen und ihrem moralischen Gewissen folgen konnten.

Ihr Beispiel wurde deshalb im Nachkriegsdeutschland identitätsstiftend für die neu gegründete Bundeswehr. Die Gruppe um Stauffenberg wurde zum Vorbild für alle Soldatinnen und Soldaten. Das Leitbild des „Staatsbürgers in Uniform“, der seinem Land und seinen Menschen aus eigenem Antrieb verantwortungsvoll dient, ist heute zum Ideal aller Soldatinnen und Soldaten geworden. Alle Angehörigen der deutschen Streitkräfte sind angehalten, Befehle auf ihre Rechtmäßigkeit zu hinterfragen und ihren Dienst im Einklang mit dem eigenen Gewissen zu versehen. Diese wichtige Säule des Konzeptes der „Inneren Führung“ ist zum Markenkern der Bundeswehr geworden.}}}

- 현대 독일 연방군의 공식적인 평가.#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은 현대 독일 연방군의 전통에도 큰 의미를 지닌다. 국방군으로부터 유무형의 유산을 이어받았던 연방군은 초기에는 국방군 무오설을 통해 국방군의 전통을 포용했다. 하지만 독일 시민사회의 자기 반성이 이루어지며 연방군 역시 국방군의 역사에 보다 엄격한 잣대를 드리우게 되었으며, 2018년에는 조직으로서의 국방군이 자신들의 전통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국방군의 저항자들은 예외로 두었으며 이 덕에 슈타우펜베르크는 반나치 운동의 대표적 인물로서 존경받게 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하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중요 5인의 기념비가 베를린의 국방성 청사인 "벤틀러블록" 건물에 세워져 있다. 그들이 히틀러에게 처형당한 곳 옆에는 독일 레지스탕스 기념관이 자리한다. 예비군 사령부가 있던 거리는 슈타우펜베르크 거리로 개명되어 애국자들을 기리고 있다. 매년 독일 연방군 입대식이 슈타우펜베르크 거리에서 이루어지면서 그를 비롯한 나치에 저항하고자 했던 장교들의 정신을 이어받을 것을 선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7월 20일이 되면 추모식도 매년 열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독재자에 대항했기에 현 독일 연방군 지휘철학의 핵심인 "내적 지휘" 개념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2024년 7월 20일, 사건 발생 8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독일 대통령, 수상 등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8. 미디어

브라이언 싱어가 감독하고 톰 크루즈[46]가 슈타우펜베르크 역을 맡은 영화《작전명 발키리》는 이 사건을 다룬 영화다. 영화의 평가는 좋지만, 사건에 대한 통찰은 제바스티안 코흐 주연의 2004년작《슈타우펜베르크》가 더 낫다는 평가가 많다.

9. 기타

10. 주요 가담자


[1] 루트비히 베크의 말이라는 설도 있다.[2] 이들은 히틀러의 벨기에 침공을 매우 부정적으로 봤고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으로 좌초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벨기에 침공의 선봉장격인 롬멜의 88대공포를 이용한 전술로 영프 연합군을 격퇴하고 승리한 것에 깜짝 놀라했다.[3] 대표적으로 에리히 폰 만슈타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자세한 내용은 융커 문서 참조. 다만 만슈타인은 타 융커들에 비해 친나치 성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나치가 바이마르 정부를 장악하던 시기에 이들은 군비 확장을 주장한 나치에 대하여 대체로 동조적인 태도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중 일부가 나중에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기는 하였으나 그 시기는 이미 나치의 패배가 어느 정도 점쳐질 시기였다.[4] 황제 제도, 귀족 제도 등[5] 특정 정치집단이나 정당 등에 대한 충성은 경계하는 편이었으나 일단 누가 정권을 잡든 현재의 정권에 닥치고 충성하라는 경향에 가까웠다. 아니 무슨 바랑인 친위대도 아니고 일부 해군 내 광적인 친나치 인사들도 존재했으나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그 활동이 미약했던 것은 이런 분위기 탓도 있다.[6] 시기적으로 이때에 공군이라는 조직이 별도로 구성된 국가가 거의 없었다. 당장에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육군 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했으며 일본도 육군과 해군에 별도의 항공대가 존재하였다. 영국은 공군이 존재하였으나 영국에게 있어서 육군이 본토가 아닌 식민지 방위 담당에 가깝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특이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독일은 공군 출신 괴링이 나치당 내에서 얼굴마담으로 국회의장까지 하는 등 몇 명의 2인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서 조직된 측면이 크다.[7] 나치 집권 초기에 군을 확장하면서, 육군은 육군총사령부(OKH)의 권한을 키워 사실상 육군이 곧 국군처럼 굴려고 하였고 해공군은 이에 반발하여 상급 기관인 국방군총사령부(OKW)의 권한 강화를 보다 원하고 있었다. 육군을 눌러둬야 했던 나치 정권 입장이 마침 이들 해공군과 맞아떨어진 점도 있다.[8] 보충군이란 예비군보다는 한국으로 치면 동원사령부와 교육사령부를 합친 것 비슷한 개념인데 독일 국내의 13개 군관구 전체를 통제하는 행정사령부로서 각 군관구는 각 육군 사단들과 직결되어 육군의 신병 모집 및 동원병력 보충, 국내에서의 군사훈련 등 군정 업무를 맡았다.[9] 원래 작전 실무를 담당했던 육군 소장 한스 오스터 장군이 있었다. 하지만 오스터가 유대인을 몰래 빼돌려 주다가 체포된 바 있었기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를 포섭하게 된다.[10] 한국에는 흔히 국가대통령 내지 임시 대통령의 직위에 취임할 계획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독일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베크는 바이마르 헌법상의 국가대통령(Reichspräsident)이 아니라 국가섭정(Reichsverweser)으로 취임할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7월 20일의 암살을 모의했던 일련의 육군 장교들은 바이마르 헌법의 부활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이 다시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제위를 잇는 의회주의적 군주제 국가를 수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계획에 참여한 사민당(SPD)계열의 정치가들과 장교들 간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그런데 당시 히틀러 자체가 힌덴부르크 사망으로 독일의 총리 겸 대통령 대행 및 나치당의 당수, 곧 국가와 나치당의 퓌러(지도자)라는 괴상한 직위에 앉아 있었다. 이에 따라서 임시대통령이던, 섭정이던 아무 상관이 없었다.[11] 검은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은 계획을 제대로 발동시키려면 히틀러와 힘러, 그리고 헤르만 괴링을 한꺼번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2] "Wolfsschanze"라고 불렸다. 직역하면 늑대 소굴. 독일 육군의 작전지휘본부.[13] Time pencil이나 pencil detonator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서 연필로 위장한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연필과 비슷하게 얇고 길쭉하게 생겼다 뿐이지 실제 생김새는 전혀 다르다. 압축된 스프링으로 작동되는 격발장치를 철사 하나로 붙들어맨 후, 부식성 염화구리(CuCl2) 수용액이 들어있는 유리 캡슐을 동봉한 형태로, 이 바이알을 펜치나 구둣발로 짓눌러서 깨면 염화구리 용액이 새어나와 철사를 부식시키고, 부식된 철사가 끊어지며 격발장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14] 이 말과 동시에 폭탄이 폭발했다.[15] 미국의 호기심 해결사 프로에서 증명해 냈다. 벙커 안에서 같은 양의 같은 폭약을 사용해도 치사량만큼의 폭압이 나오지 않았다.[16] 사건이 있던 그날임에도 히틀러는 다른 부상자들을 위문다닐 정도로 부상이 경미했다. 히틀러 앞 환자는 10번 위치에 있던, 히틀러의 해군 보좌관 푸트카머 제독이다.[17] 만약 이때 폭발 이후 확인삼아 구조행위를 통해 히틀러의 암살 여부를 파악했다면 의심을 사지 않았고 오히려 더 충성스러운 군인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다급하게 떠나는 행위 자체가 캥겨서 도망치는 것이었기에 종합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암살 주도범을 바로 확신하였다.[18] General der Nachrichtentruppe. 당시 독일 육군의 경우 특이하게 장군 계급 중 대장 계급에만 출신 병과 이름을 정식으로 붙였다. 독일 육군에서 통신 병과로 대장 계급을 받은 장교는 에리히 펠기벨, 알베르트 프라운 두 장군뿐이다. 프라운 장군은 대전 초기 육군상급대장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 밑에서 통신 지휘관으로 활약하면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9] 1934년 6월 30일 히틀러가 나치 돌격대(SA;Sturmabteilung) 참모장 에른스트 룀 및 돌격대 내 반히틀러 조직을 반역죄로 몰아 숙청한 사건이다.[20] 레머는 수많은 원수가 있었던 독일군에서 겨우 소령 계급이었지만 곡엽기사철십자장에 대독일십자훈장 금장, 전상장 금장, 보병 돌격장, 백병전 기장 은장 등을 수훈한 전쟁 영웅이었다. 괜히 독일 국방군 육군중에서도 최정예 중 하나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소속 수도경비대대 지휘관이 아니었던 것이다. 히틀러 암살 사건 이후에는 대령 특진 등 초고속으로 진급해 소장까지 갔다. 다만 대대장까진 꽤 능력을 발휘했지만 이후엔 역량의 한계가 찾아왔는지 연대장 이후부턴 무능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21]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근위 부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독일 전관구에서 징병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치 독일의 특성상 타 사상을 가진 것을 나타냈으면 바로 수용소행이었겠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독일 전군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나치 사상도 국방군 전군과 동일한 정훈 교재를 사용해 교육을 하였고 프랑스-독일인 혼혈인 기 사예르를 받아들인 것처럼 본토로 인정받고 독일인이기만 하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착각은 무장친위대에도 적용이 되는데 흔히 무장친위대는 히틀러에 엄청난 충심을 가진 자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쟁초반의 일로 전쟁 중반부부터 무장친위대 규모가 늘어나기 시작하며 그런거 없이 다 받았다.[22] 괴벨스가 한 말을 자서전에 작성한 것이다.[23] 진압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외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 조건까지 충분히 갖추어진 상태였다.[24] 이는 서로 단독 강화 체결을 의심한 연합국이 1차 대전때 소련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며 협상국 전열에서 이탈하여 독일이 동부전선 병력까지 합쳐 백일 공세를 실시했던 것이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협상국이 이 조약을 빌미로 소련에 쳐들어가는 등 후폭풍이 여러모로 심각했다.[25] 여기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애초에 나치스와 그릇된 이념과 독일의 전쟁범죄 때문에 현재 금기에 가까울 정도의 역사가 된 것이라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독일 전역에 깔려 있었던 아우슈비츠나 유대인 절멸 계획에 관한 문서들을 모조리 인멸하고 수많은 독일의 이해당사자들이 입을 맞추고 죽을 때까지 쉬쉬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승자로서 죽음을 맞이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가려졌던 추악한 진실들이 여럿 파헤쳐지며 현재는 자국에서도 그저 강했던 소련 시기의 향수로서나 그리워할 뿐 부정적 여론이 훨씬 대세이며, 블라디미르 푸틴도 히틀러보다는 스탈린이 더 낫다는 정도의 평가를 내렸을 뿐 스탈린의 집단수용소나 수백만 학살에 대한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며 그의 긍정적 평가에 대해 거리를 두었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스탈린에 대한 정당화 시도에 단호하게 러시아의 국익을 해치는 역사 왜곡에 대응하겠다고 특별위원회까지 발족한 적도 있었다.[26] 이언 커쇼는 이 발언에서 히틀러가 기라성 같은 게르만 영웅들의 반열에 자기 이름을 올려놓고 싶어했다는 촌평을 남겼다.[27] 이 영상은 요제프 괴벨스가 선전용으로 촬영을 지시한 것이지만 영상에서 단번에 볼 수 있듯 프라이슬러가 피고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하면서 고함을 질러댔기 때문에 '나치에 대한 불신감'을 안겨주는 등 국민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해 주간뉴스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후 헤르만 괴링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증거자료로 상영된 이 영상을 보고 '홀로코스트 기록 영화보다도 불쾌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프라이슬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전해주는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는데 이전에 있었던 하얀 장미 회원들의 재판에서는 한술 더 떠 배심원이 아무 말 없이 그에게 형법책을 건네자 프라이슬러는 그 즉시 형법책을 피고석 쪽으로 던졌다고 한다.[28] 참고로 프라이슬러는 종전 3개월 전이었던 1945년 2월 3일에 베를린 법원 청사에 있다가 미군폭격으로 청사가 붕괴되어 그 잔해에 깔려 죽었다.[29] 계획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았다는 죄.[30] 그러한 방식으로 처형을 당한 인물 중에는 전술했던 라이프치히 시장을 역임한 유명 정치인 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Carl Friedrich Goerdeler)도 포함되어 있었다.인물설명 영화 <작전명 발키리>의 후반부에 그의 처형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시청주의[31] 롬멜의 참모장을 지낸 한스 슈파이델(Hans Speidel) 중장이 파리검은 오케스트라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롬멜 본인에게도 검은 오케스트라 소속인 케자르 폰 호파커(Caesar von Hofacker) 공군 중령 등이 접촉한 바 있었다. 슈파이델 장군은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나 발터 모델, 하인츠 구데리안, 알베르트 슈페어 등의 도움으로 군사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지 않았다. 종전 후 서독 연방군 재건시 합류해 육군 대장까지 진급하였고 NATO 중부 유럽 연합지상군 사령관을 지내면서 롬멜 신화의 정립에 앞장섰다. 슈파이델의 저서를 읽어보면 과도한 롬멜 추켜세우기로 다른 육군 장성들을 열심히 깎아 내린 것이 눈에 띄는데 이 배경으로 슈파이델이 살기 위해 롬멜의 음모 사실을 밀고했던 죄책감 때문이라는 연구가 있다. 슈파이델 본인은 이미 그들이 먼저 롬멜의 가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수긍한 것 정도라고 술회했지만 실제로는 초기 심문 단계에서 롬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롬멜 부인은 굳게 믿었다. 그녀는 남편의 히틀러 암살 계획 연루 자체를 부정하였고 슈파이델을 '배신자'라 칭하며 평생 만나지 않았다.[32] 나치당 창립 멤버 중 하나였다.[33] 당시 독일 경찰은 친위대의 편제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경찰 계급과 아울러 친위대 계급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친위대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34] 본회퍼는 카나리스 제독 밑에서 민간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는데 이는 은밀히 반나치 운동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잘못된 기차에 올라탔다면 복도의 반대 방향으로 뛰어봐야 소용없다"고 말한 사람이기도 하다.[35] 결국 1952년 독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었다.[36] 사건 이전까지 히틀러는 그래도 휘하 참모들이나 군부 인물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사건 이후 군부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버리면서 아예 독단적인 판단에 이르렀고 그나마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발터 모델 같은 극소수뿐이었다.[37] 결국 히틀러 청산은 연합국의 철저한 탈나치화 교육에도 불구하고 이뤄지지 않다가 서독에서 1970년대부터 새로 집권한 세대가 히틀러의 반인륜 범죄를 제대로 공개 및 단죄하기로 합의하면서부터 제대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반나치화 교육을 받고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권위에 따르다가 국가가 초토화된 이유에 의문을 갖던 세대가 결국 전 세대의 행적을 다시 파면서 시작된 것이다.[38] 물론 처칠이 독일을 조지고 나서 잔존 독일군과 서방 연합군을 동원해서 소련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언싱커블 작전을 실행하려 했지만 몽고메리를 비롯한 주요 영국군 장성들이 강력하게 반대한 덕에 없던 일이 되었다.[39]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Panzer Battles>. 다만 멜렌틴 소장은 전후 깨끗한 국방군 신화 건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목되는 인물이므로 그의 평가는 걸러 들어야 한다.[40] 루프트바페 연락장교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1944년 8월 5일 총살되었다.[41] 안네의 일기 중 마지막 내용 중 하나다. 이로부터 정확히 10일 후 그녀의 은신처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42] 사실 빌헬름 카나리스는 나치에 환멸을 느끼기 전까지는 스파르타쿠스 봉기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에 연관된 정황과 카프 폭동에 가담하였다는 의혹이 있는 등 철저한 반공 극우 인사였으며 이외에도 각종 우익 테러 사건이나 당시 독일 국가방위군의 불법 재무장 사건에 연루되는 등, 반 바이마르 공화국 행보를 보였으며, 심지어 나치 집권 초기에는 재무장이라는 차원에서 나치의 집권을 열렬히 환영하기도 했다. 그가 반나치 인사로 변한 것은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참상을 목격한 충격에 더해 나치의 무모한 군사적 도박이 독일을 파멸시킬 것이라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43] 홀로코스트포로슬라브 민족 대량학살을 독일인들이 몰랐던 것은 아니다.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나치 수용소와 그곳의 참혹함을 분명 알고 있었다. 다만 정확한 진행 상황이나 죽음의 행진, 죽음의 열차, 가스 처형 같은 상상도 못할 인간 문명을 배신한 방법으로 살해한 것,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을 그저 슬라브인이라는 이유로 잔인하게 죽인 것, 심지어 독일인들 중 장애인들까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 수뇌부의 주도 그리고 국방군 고위장교들의 협력 또는 묵인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은 잘 모르고 있었다. 연합국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된 뒤에야 독일인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1960년대까지만 해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인식은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 냉전으로 독일을 재건할 필요가 있었던 서방소련이 모두 반(反) 인륜 범죄를 제외하면 나치의 만행을 적당히 덮어 버렸기 때문. 유대인 학살 등 반(反) 인륜 범죄에 대해서만 잘못을 인정했을 뿐 나치의 통치 방향 자체는 나쁘지 않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며 히틀러가 전쟁만 패하지 않고 유대인 및 기타 점령지 주민 학살만 안 했으면 영웅이 됐을 거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다가 68운동 이후 전쟁 중에 숱하게 죽어나가고 전후에도 젊은 시절을 경제 재건에 바쳐야 했던 다음 세대가 사회 주류가 되면서 제대로 파고들게 됐고 그때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탈(脫) 나치화가 이뤄진 것이다.[44] 에르빈 롬멜을 비롯한 여러 국방군 장교들에 대한 재평가, 즉 어쨌든 나치의 부역자다라고 결론내려진 것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45] 나치즘 독재 정권과 국방군 군국주의가 하급자들에 강조한 '절대복종'을 지칭한다.[46] 톰 크루즈사이언톨로지 신봉자이고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서 이 캐스팅에 좀 말이 많았다.[47] 그는 전후 한 방송국을 개국하는데 바로 TV도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