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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초대 궁주 | |||
<colbgcolor=#6d1b43><colcolor=#ffd400> 조선 장조의 증손 | 조선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 |||
대한제국 장조의 증손 | 대한제국 고종의 생부 흥선헌의대원왕 | 興宣獻懿大院王 | |||
출생 | 1821년 1월 24일 | ||
조선 한성부 북부 안국방 안동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운니동 일대) | |||
사망 | 1898년 2월 22일 (향년 77세) | ||
대한제국 한성부 서서 용산방 공덕리계 염동 아소당[1] (現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139-55 일대) | |||
능묘 | 흥원(興園) | ||
재위기간 | 조선 대원군 | 조선 국왕 섭정 | ||
1864년 1월 21일 ~ 1873년 11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6d1b43><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하응(昰應)[2] | ||
부모 | 부친 남연군 모친 여흥군부인 민씨 | ||
형제자매 | 4남 1녀 중 4남[3] | ||
배우자 | 여흥순목대원비 | ||
자녀 | 3남 3녀[4] | ||
종교 | 불교 | ||
신장 | 150cm | ||
자 | 시백(時伯) | ||
호 | 석파(石坡), 노석(老石), 해동거사(海東居士) | ||
별칭 | 대로(大老) | ||
작호 | 조선: 흥선부정(興宣副正) → 흥선정(興宣正) → 흥선도정(興宣都正) → 흥선군(興宣君)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대한제국: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5] | ||
시호 |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 |
흥선대원군 초상[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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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략>⋯ 조정에서는 어떤 변이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게 간언하기를,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므로 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대원군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백성에게 해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현을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랴." 했다. ⋯<후략>⋯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상(上)[7]
사도세자의 양증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손자이며, 고종의 친아버지.[8] 조선 시대에 4명[9] 있었던 대원군[10] 중 마지막 대원군이며, 유일하게 생전에 대원군이었다. 섭정으로 오랜기간 실권을 가졌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의 친아버지로서 조선 말기의 핵심 인물이다. 그런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가져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만을 고유명사처럼 지칭해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상(上)[7]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7년(융희 원년)에 손자 순종이 그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숭하고 시호 '헌의(獻懿)'를 내렸다. 그래서 이를 합친 최종 정식 작호는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다.[11]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부인이며 고종의 생모인 여흥부대부인도 '여흥순목대원왕비(驪興純穆大院王妃)'로 추숭받았다.
19세기 조선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당대는 물론 현대까지도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며, 실제로도 한 쪽으로 단언하여 평가하기 매우 어렵다.
그의 인생 역정은 대단히 파란만장했으며, 세도정치 시기부터 대한제국의 성립까지 조선 말기의 역사적 주요 사건에 많이 엮였으니 조선 말엽의 거시적인 역사 그 자체로 봐도 무방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시작이 되는 인물로서 한국 근·현대사 교육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이 가장 먼저 언급된다.
2. 호칭
그를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 "대원위 대감(大院位大監)", "대원위 합하(閤下)" 등. 말년에는 "국태공 저하(國太公邸下)"라고 불리기도 했고 갑오개혁으로 조선 왕실의 호칭이 격상돼서인지[12] 독립신문의 기록을 보면 그를 가리켜 '대원군 전하', '국태공 전하'라고 한 기록들이 존재한다.[13] 아마 '살아있는 대원군'은 그가 처음이어서 호칭을 정립하기 어려웠기에 이렇게 많았을 수도 있다. 또한 조선 시대 백성들은 유명한 재상급 인사들을 부를 때 그가 사는 곳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는데[14] 흥선대원군은 생전 운현궁에 주로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를 '운현 대감(雲峴大監)'이라고도 불렀다.3. 가족 관계
<colbgcolor=#6d1b43> 2018년 9월 9일에 방영된 KBS 〈역사저널 그날〉에 등장한 철종-고종 가계도 | <colbgcolor=#6d1b43> 흥선대원군 일가 가계도 |
그런데 효종의 남자 후손들은 헌종이 즉위할 당시에 이미 많지 않아 절손 위기였기 때문에[17], 여차하면 그나마 혈통으로 가장 가까운 다른 인조 아들들 중의 후손들 중에서 왕위 계승 후보가 나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효종의 왕위 정통성 문제와 정치적 문제로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사실상 제외되었기 때문에 만약 직계 왕통이 단절된다면 실제 혈통으로는 인조 아들[18]의 후손이면서 법적으로는 은신군의 후손인 남연군의 자손 중에서 왕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간혹 이 집안을 경계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19]
흥선대원군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태어난 순서대로 적으면 서장남 완은군 이재선, 적장남 흥친왕 이재면, 적차남 고종이다. 딸들의 나이는 기록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장녀가 임천 조씨 조경호의 처, 차녀가 풍양 조씨 조정구의 처, 서녀가 우봉 이씨 이윤용의 처라는 것만 선원속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적차남인 고종이 즉위한 후 흥선대원군의 아들과 손자들은 대부분이 프리패스, 빽으로 그냥 출세했다. 흥선대원군이 대놓고 왕실만 뽑아주는 특별 과거를 열어서 공부수준을 안보고 그냥 다 합격시켜 버렸고, 이 사람들은 당연히 흥선대원군의 주요 최측근으로 활동했다.[20] 고종과 그의 일족들의 관계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했던 짓들 때문에 정말 끝장나게 안 좋았다. 나중에 이재면은 소극적 친일, 이준용[21]은 적극적 친일파라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정식 등재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셋째형 흥인군 이최응과 그렇게도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흥인군이 욕심 많고 무능해서 싫어한 듯. 거기다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민씨 일파의 편에 섰는데, 오죽하면 임오군란 당시 난을 일으킨 구식 군대와 민중이 흥인군을 죽이면서도 흥선대원군에게 적극 기댈 정도였다.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昌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晸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아버지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항렬자에 맞게 붙인 것으로 보인다.[22]
외가, 처가, 사돈이 모두 여흥 민씨라는 기이(?)한 기록을 갖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공조판서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의 어머니인 군부인 여흥 민씨[23]의 조카뻘(13촌)이다. 또한 며느리인 명성황후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동생뻘(12촌)이며[24] 손자며느리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명성황후의 조카뻘(13촌)이다.[25]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이종찬 광복회장(前 국가정보원장)이 그의 외외증손자이다. 이종찬의 외할머니(1861~1898)가 흥선대원군의 둘째 딸이다. 즉, 흥선대원군은 이종찬 어머니 조계진에게 외할아버지가 된다.
전 노동당 대표 홍세화도 그의 후손이다. 홍세화의 외증조부가 이종찬의 어머니 조계진과 남매관계이다. 즉, 흥선대원군은 홍세화에게 외증조부의 외조부, 즉 5대조 할아버지가 된다.
4. 생애
자세한 내용은 흥선대원군/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5. 평가
자세한 내용은 흥선대원군/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여담
자세한 내용은 흥선대원군/여담 문서 참고하십시오.7. 대중매체
자세한 내용은 흥선대원군/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8. 관련 문서
- 갑신정변
- 갑오개혁
- 갑오경장
- 경복궁 중건
- 경원군 이하전
- 고종
- 고종실록
- 공자
- 김병학
- 김옥균
- 김좌근
- 김정희
- 김홍집
- 남연군
- 남연군묘
- 당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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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 대한제국/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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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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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 소황제 | 장조 의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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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선황제 | 은언군 | 은신군 | 은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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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숙황제 | 상계군 | 전계대원군 | 남연군 | 풍계군 | 진안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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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익황제 | 철종 장황제 | 익평군 | 회평군 | 영평군 | 흥녕군 | 흥완군 | 흥인군 | 흥선헌의대원왕† | 완평군 | 완성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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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성황제 | 고종 태황제 | 덕안군† | 경은군 | 청안군 | 완림군† | 완순군 | 완영군† | 흥친왕 | 완은군† | 인양군† | 의양군 | 예양정 | 완창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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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효헌친왕† | 순종 효황제 | 의친왕 | 의민황태자 | 풍선군† | 영선군 | 경원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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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군 | 창산군 | |||||||||||||||||||||||||||||||
※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
[1] 흥선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한 곳으로, 지금의 서울디자인고등학교와 동도중학교 운동장 부지에 걸쳐 있었던 99칸의 대저택이었다.[2] 조선 왕실에서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세종 이도 다음으로 이름이 크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3] 남자 4형제로는 흥녕군 이창응, 흥완군 이정응, 흥인군 이최응, 흥선대원군 이하응 등이 있다.[4] 3남은 흥친왕 이재면, 고종 이명복, 서자 완은군 이재선 등이다.[5]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제의 친부로서 손자 순종이 직접 추증.[6] 대원군의 초상화는 정본 6점과 초본 2점이 전해지고 있는데 정본은 흑단령포본#, 금관조복본(이것), 와룡관학창의본의 44세 초상 3점, 흑건청포본, 복건심의본의 61세 초상 2점이 있으며 나머지 한 점은 또 하나의 똑같이 생긴 금관조복본이다. 3점은 모사본이라서 그려진 시점 자체는 50세 때인 1869년(고종 6년)이고 2점은 실제로 61세 때인 1880년(고종 17년)에 그려졌다. 대부분 같은 얼굴과 구도의 전신상이면서 복장, 의관, 기물이 제각각이라서 패션쇼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3점은 이한철이 얼굴을, 유숙이 몸을 그렸으며 2점은 이한철이 얼굴을, 이창옥이 몸을 그렸는데 유숙이 세상을 떴기 때문.[7] 김태웅,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근대》, 가람기획, 2019, 30쪽.[8] 고종은 다음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대통을 잇기 위해 효명세자(익종)와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래서 고종의 법적 아버지는 익종인 효명세자이다.[9] 국왕으로 추존받은 정원군을 제외하면 최종적으로는 3명.[10] 왕위가 방계로 계승될 시 새 임금의 친아버지가 받는 작호[11] 이를 두고 대원군도 임금으로 격상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왕은 국가 원수(King)의 개념이 아니라 황제국에서 황족들에게 수여하는 작위(친왕, Prince)의 개념이다. 즉 왕국의 대원군과 제국의 대원왕은 실질적으로 똑같은 위치이기에 황제 추존을 안 받은 이상 격상된 게 사실상 없으나 왕국의 왕에 준하는 예우와 존경을 받는다.[12] 주상 전하는 대군주 폐하, 왕비 전하는 왕후 폐하라고 불렸다.[13] 네이버 지식 백과 독립신문 1897년 7월 31일.[14] 이를 택호(宅號)라고 한다. 보통 남성을 일컫는 경우 지명이나 관직에 어른(ex 승지어른, 개성어른)을 붙여 불렀으며, 여성을 일컫는 경우엔 댁이나 안어른(ex 춘천댁 아주머니, 군수댁 안어른 등) 등의 호칭을 붙여 불렀다.[15] 철종과 같은 항렬이긴 하나 무려 16촌이나 되었기 때문에 헌종이 즉위할 시기에는 국왕이 될 왕위계승권이 멀어도 정말 한참이나 멀었다. 그냥 남남인 무일푼 평민.[16] 인평대군의 장남 복녕군, 복녕군의 차남 의원군, 의원군의 아들 안흥군, 안흥군의 아들 이진익, 이진익의 차남 이병원, 이병원의 차남 이구가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어 남연군이 되었다.[17] 현종과 숙종 두 왕이 적자는 물론 서자인 장성한 남자 형제마저도 없는 사실상 외동아들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경종의 후사 없음,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요절, 사도세자의 임오화변으로 죽음,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의 요절,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홍역으로 인한 요절은 덤.[18] 효종의 사실상 유일한 동복 남동생 인평대군. 더 밑에 남동생은 용성대군이 또 있기는 한데 5살 때 요절했다. 당연히 후손도 없다.[19] 철종 시대 말기의 왕족들은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후손들이었다. 은언군의 후손은 종손(宗孫) 익평군과 전계대원군의 가계를 이을 영평군 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자식이 없어 입양을 했는데(사실 익평군은 경은군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서자인데다 익평군이 죽을 때 너무 어려서 가문을 잇지 못했다.) 익평군은 덕흥대원군의 후손, 영평군은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을 들였다. 은전군의 가계 역시 입양으로 이어졌는데 역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었다. 실제 혈통상으로는 인평대군의 직계후손인 은신군-남연군의 가계가 왕통과 가장 가까웠다.[20] 특히 장남 이재면의 아들로 흥선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은 실제로도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준용은 흥선대원군이 수차례 일으킨 쿠데타 음모 중 마지막이자 가장 끈질기게 다음 보위를 노릴 차기 대상자로 꼽혀서, 명성황후 등에게 여러 차례 목숨을 위협받았다. 그래서 일본으로 상당 기간 도피해서 살았고, 스트레스 및 흥선대원군의 장손이자 왕의 큰조카라는 입장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해왔던 것과 왕실에 대한 환멸감이 심한 나머지 오래 못 살고 죽었다.[21] 이재면의 아들[22] 이는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이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旲, 日 + 大)'이며, 철종은 왕이 된 이후 원범에서 '변(昪, 日 + 弁)'으로 개명했다.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첫 이름은 '병(昺, 日 + 丙)' 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으며,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 였다. 은언군의 장손인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고 철종의 큰형인 회평군도 원래 이름은 원경이었는데 '명(明, 日 + 月)'로 고친 것이다. 영평군 역시 원래 이름은 '욱(昱, 日 + 立)' 이었다가 후일 '경응(景(日 + 京)應)'으로 개명했다.[23]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좌의정 민정중의 5대손이다.(실제 혈통 상으로는 민정중과 민유중의 형 민시중의 5대손)[24]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동생(처남) 민승호가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갔다.[25] 따라서 명성황후-여흥부대부인과 흥선대원군은 민씨 집안 기준으로는 서로 14촌 조카 남매이다.[26] 흥선대원군이 개인적으로 후원한 왕실 원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