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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의 정후 순명효황후 | 純明孝皇后 | |||
<colbgcolor=#E8CB2D><colcolor=#B22222> 대한제국 황태자 이척의 황태자비 순명비 민씨 | 純明妃 閔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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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릉 전경 | |||
출생 | 1872년 11월 8일(음력 10월 20일) | ||
조선 한성부 북부 양덕방 계동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 |||
사망 | 1904년 10월 23일(음력 9월 28일) (향년 32세) | ||
대한제국 한성부 경운궁 강태실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
능묘 | 유강원(裕康園) → 유릉(裕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빈 | ||
1882년 4월 6일 ~ 1895년 1월 12일 | |||
대조선국 왕태자비 | |||
1895년 1월 12일 ~ 1897년 10월 12일 | |||
대한제국 황태자비 | |||
1897년 10월 12일 ~ 1904년 10월 2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8CB2D><colcolor=#B22222> 본관 | 여흥 민씨 | |
부모 | 부친 여은부원군 민태호 (驪恩府院君 閔台鎬, 1834 ~ 1884) 모친 진양부부인 진천 송씨 (鎭陽府夫人 鎭川 宋氏, 1849 ~ 1882) | ||
형제자매 | |||
배우자 | 순종 효황제 | ||
자녀 | 없음 | ||
전호 | 의효전(懿孝殿) | ||
휘호 | 경현성휘(敬顯成徽) | ||
시호 | 순열비(純烈妃) → 순명비(純明妃) →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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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의 원후(元后).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좌찬성을 지낸 여은부원군 충문공 민태호의 딸이자 민영익의 동생이다.2. 생애
한성부 양덕방에서 태어났다. 1882년(고종 19년) 왕세자빈으로 책봉받고 안국동 별궁에서 가례를 행하였다.시어머니 명성황후는 순명효황후와 같은 여흥 민씨 출신으로, 민진원의 현손이며 두 사람은 13촌 고모 - 조카딸 사이다. 또한 친오빠인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양오빠 민승호의 양자였기에, 명성황후와는 여러 겹으로 얽힌 사이였다.
그러나 명성황후와의 관계는 임오군란 이후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군란 당시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태호에게 자신을 구명하라고 장호원에서부터 편지를 보냈으나 민태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분노한 것, 그래서 환궁한 후 여러가지 방식으로 시집살이를 시켰다고 전해진다.
한 사례로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도 아침에 문안인사를 하러 가면, 방 안에 있으면서도 11살짜리 며느리가 전각 앞에 무거운 가체를 하고 서 있자 문안 인사를 일부러 받지 않아 세자빈이 그 추운 겨울에 문 밖에서 서서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 될 때까지 하루종일 서있게 만들곤 했다고 한다.[증언A][증언B]
이러한 노골적인 명성황후의 시집살이 탓에 나인들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하는데 일례로 명성황후가 나인들 앞에서도 노골적으로 증오감을 드러내었으므로, 이것이 나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어 세자빈이 좋아하는 음식 장조림을 그 시어머니 생전에는 그것 한 번 해드리지 않았고, 국도 빈약하게 언제나 맑은 소금국을 간단히 끓여 드렸다는 것이다.[5]
일국의 지체높은 세자빈이 낮은 궁인들에게까지 저런 취급을 받으며 궁생활을 이어간와중에 아버지 민태호은 갑신정변때 급진개화파들의 손에 죽음을 맞고 이후 더욱 험난한 궁 생활을 했다 전해진다.
그런 그녀의 삶은 을미사변으로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그녀는 해당 사건 당시 순종과 같이 있었던 모양인데 세자가 낭인들에게 머리채가 잡히자 옆에 있던 그녀에게 일본 낭인들이 그녀를 쓰러트린 후 복부를 여러차례 가격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이 일이 있고 나서 정신병을 얻었다고 나오며 그녀가 죽기 전까지에도 이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매일 그녀의 처소에 가구를 망가트리며 폐인이 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고종은 이런 이상 증세를 보이는 그녀를 보며 "동궁비 처소에 남아나는 가구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녀는 죽은 병 원인이 암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당시 의관들이 암으로 복수가 찬 것을 그대로 회임이라 오진했다고 한다. 그리해서 치료시기를 놓쳤고 그대로 훙했다고 전해진다.
평소에도 그녀는 "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 유달리 지통을[6] 품은, 부모형제도 없는 혈혈단신에 겸하여 사고무친한[7] 사람이 밤낮으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더니, 영감의 전부터 알려져 있는 명성을 듣고 한 가족 못지않은 정이 생전에 변치 않기를 기약했는데, 운수가 박하고 때를 못 만나 하루아침에 국가의 망극함이 이 지경이 되오니, 다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으며, 그때의 망극함과 기구함이 어찌 지금 살아 있다가 지금 올라오시는 말씀 들을 줄 알았겠습니까.” 라는 말을 자주 하며 망해가는 국가에 대한 한탄, 부모형제의 부재에 대한 외로움, 자신의 처지를 늘 밤낮으로 말했다고 하며,
유언은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는, 붉은 산문을[8] 다시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휠을 떠나갈테야"를 말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황태자비로 책봉받았다. 1904년(광무 8년) 11월 5일[9]에 경운궁 강태실에서 훙서하였다.[10] 향년 32세.
죽은 직후 받은 시호는 순렬비(純烈妃)였다가 12일만에 순명비(純明妃)로 고쳤다. 남편 순종이 황제가 된 후 황후로 추존받아 경현성휘순명효황후(敬顯成徽純明孝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능은 현 서울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조성하였다가[11], 1926년 순종황제가 붕어한 이후 경기도 남양주시의 홍유릉으로 이장하였다.
3. 매체에서
- 2002년 KBS2 《명성황후》 - 이유리(아역: 박은빈, 김소영)
박은빈이 연기한 유년기 순명효황후 김소영이 연기한 청소년기 순명효황후 이유리가 연기한 성인 순명효황후
마음 약하고 여린 성품으로 묘사되었다. 비록 자식은 없었지만 남편 순종과의 사이는 매우 돈독한 것으로 나왔다. 다만, 명성황후에게 아들을 못낳는다며 구박받는 장면도 나왔는데, 순종이 명성황후에게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후궁과 합방한 날이 하필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태호의 기일이었고, 이에 펑펑 울다가 명성황후에게 호되게 혼나는 상황을 겪었다.
[1] 민승호(명성황후의 오빠)의 양자로 출계[2] 친일반민족행위자. 친부 민술호(閔述鎬)[증언A] 조선의 마지막 궁인 성옥염 상궁께서 증언하길, 임자님(명성황후)은 "동궁비가 발덕기(덕)가 없어 시집오고 난리(임오군란)가 났다"면서 며느님을 옥살려 조석으로 동궁비가 큰머리에 대례복을 입고 문안을 가면 그 문안을 얼른 받지 않고, 그냥 송 밖에 세워두곤 하여서 무거운 큰머리와 대례복 차림을 오래 견디느라 11세 아기인 동궁비는 몹시 고생을 하였다. 그 난리는 군인들 녹에 쌀대신 모래를 채워쥐서 난 것이라 했고 임자님 잘못인데도 며느리 잘못본탓을 심히 하여 끝내 동궁비 민씨는 병환 끝에 돌아갔다.[증언B] 김명길 상궁께서 증언하길, 윤황후는 아침문안을 드릴 때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셔서 어여머리에 장엄을 새로 꾸미고 고종황제 처소 밖마루에 서서 침소에서나오실 동안 기다려야 했다. 순종의 선후셨던 순명황후께서는 명성마마의 늦잠 때문에 몇 시간이고 꼬박 기다리셨다고 하나 윤마마는 다행히 그런 고초는 안겪으셨다.[5] 대궐에는 2대, 3대를 내려오는 백년이 넘는 간장이 있어서 이를 진장이라 부르며, 수저로 뜨면 조청같이 묻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나인들이 1년된 햇장도 아까워 소금국을 끓여 드렸다는 것이다.[6] 지극한 아픔[7]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음[8] 대궐문[9] 음력 9월 28일.[10] 薨逝. 제후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왕비였기에 제후의 예에 따라 훙이라고 한다. 천자(天子)는 붕(崩), 제후(諸侯)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祿), 서인(庶人)은 사(死)라 한다.[11] 지명 능동(陵洞)이 여기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