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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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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또는 빈칸은 동아시아 황실/왕실 체제에서 해당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거나 관련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 경우를 나타낸다. 당시에는 이러한 경우 특별한 호칭 없이 이름이나 관직명을 사용했다. 그러나 본 틀에서는 문헌 기록이 없더라도, '왕세녀', '국서'처럼 근현대에 새롭게 자리잡은 번역어의 경우 포함해 기재한다.
별칭이나 그 외 나라의 용어는 황실/왕실 용어 및 별칭 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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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발 과정3. 조선 왕세자빈
3.1. 삼간택3.2. 왕세자비3.3. 특이한 간택 기준
4. 황태자비/왕세자빈5.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황태자비들
5.1. 실존 인물5.2. 가공 인물

1. 개요

太子妃

황위를 계승할 황자인 태자의 아내를 이르는 말인 황태자비(皇太子妃)를 줄여서 태자비라고 했다. 태자비는 장차 황후가 될 사람으로서 특별한 예우와 격식을 누렸는데 궁궐 내에서 독립된 처소가 제공되었고,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또한 종묘 제례, 국가의례 등의 중요한 행사에 참여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등 정치적, 문화적 의무를 수행했다.

2. 선발 과정

선발 과정은 매우 엄격하고 공적인 절차를 거쳤다.

3. 조선 왕세자빈

왕세자의 정부인은 왕세자빈(王世子嬪)이라고 한다. 줄여서 세자빈.

조선에서는 빈궁(嬪宮), 동궁빈(東宮嬪), 춘궁빈(春宮嬪)이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동궁과 춘궁은 모두 세자를 뜻하는 말. 경칭은 세자와 동일한 '저하(邸下)'이다. 간택이 확정되면 책봉의 가례를 거행하며, 임금의 교지가 전달된다. 세종 때까지 세자빈들은 무조건 봉호를 받았는데, 이후로는 과부가 된 세자빈들만 봉호를 받았다.

호칭의 경우, '마마'라고 불렸다. 참고로 세자빈이 낳은 딸은 적녀의 작호는 군주(郡主)라 하고 서녀는 현주(縣主)라 하였다.

영어로는 Crown Princess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해당 칭호는 왕세녀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사실 서양권에서는 왕세자 자체가 별도의 작위를 가지기 때문에(예: 웨일스 공 등) 왕비나 공비 등 작위를 가진 군주의 아내에게 사용하는 명명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렇게 작위를 가진 사람의 아내를 지칭할 때는 그 작위명의 여성형을 쓰기 때문에, Prince의 경우에는 그 아내에게는 여성형인 Princess를 사용한다. 따라서 우리말로 번역할 때 '공주'와 혼동하는 때가 있다. 프린세스 메이커를 포함하여 여러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프린세스들이 이렇게 '공주'가 아닌 '왕자의 아내'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프린세스 참조. 얘네도 이게 헷갈리는 걸 알아서, 정확한 구분이 필요한 법률 등에는 작위를 가진 쪽을 Regnant를 붙여 구별하고, 그 배우자에겐 Consort를 붙인다.

3.1. 삼간택

의외로 조선시대에는 딸이 세자빈이 되는 것을 꺼렸다고 하는데, 실제로 세자가 별 탈없이 왕이 되는 경우가 드물었던 데다 자칫하면 가문이 망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외척이 되면 그 순간 사헌부의 집중 사찰 대상이 되어 툭하면 탄핵을 먹을 수 있고, 세자빈이 왕실의 분란에 휩싸일 경우 세자빈을 직접 족칠 수 없는 만큼 대신 끌려가 처벌을 당하는 동네북이 되기 쉬웠다. 더군다나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인데, 의례적으로 행하는 간택에 단자를 내는 것 자체를 꺼렸다.

세자빈을 간택할 때에는 삼간택을 거치는데, 앞서 서술했듯 대부분 내정자가 정해져 있었다. 마지막까지 올라온 후보자들은 떨어지더라도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만 했다는 말이 잘 알려져있는데, 왕실의 며느리가 될 뻔 하였으므로 다른 혼처는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과 왕세자의 아내가 될 뻔 했으니 재가는 불가하다는 이유. 영친왕의 약혼자였던 민갑완이 파혼 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간혹 최종간택에서 떨어진 이들을 후궁으로 들인 경우도 있었다.
헌데 삼간택 정절설은 속설에 불과하며, 사실과는 다르다고 한다. 당시 삼간택 후보자들을 족보 등으로 추적해 보니 어지간하면 다들 시집갔다고. 사실 삼간택에 올라갈 정도면 상당한 수준의 명문가 여식일 텐데 그런 전통이 있었다면 당시 상류층의 반발이 심했을 것이고, 아무런 문제없이 그런 전통이 존재하거나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최종간택까지 갔던 규수라는 것이 프리미엄이 되어 굉장히 좋은 조건의 혼처를 찾을 수 있게 되는 일종의 출세의 보증수표 같은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있고, 민갑완의 경우는 이후에도 혼담이 들어와 결혼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다 영친왕의 본래 약혼자가 독신인 것이 부담스러워 일제 측에서도 결혼을 종용했다.

물론 민갑완은 '약혼'이었으므로, 조선시대 기준으로 보면 최종간택에서 뽑혀 가례만 기다리고 있었다가 강제 폐빈을 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삼간택 정절설이 사실이 아니라도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폐빈된 거라면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당연히 재혼을 못한다.

다만 민갑완에게도 혼담이 들어왔다는 것만 봐도 딱히 전 약혼녀였다는 것이 혼처가 들어오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독신을 지킨 것은 오로지 민갑완 자신의 의지였다. 근대이긴 해도 아직 전통이라는 게 남아있었을 텐데 영친왕의 약혼자에게 혼담이 들어오는데 문제없을 정도면 삼간택 정도는 시집가는데 문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3.2. 왕세자비

특이한 점은 세자빈이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명칭이란 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친왕의 지위를 잇는 세자의 아내 명칭은 세자비였다. 친왕을 잇는 사람은 세자이고 그외 친왕의 다른 아들은 군왕이었으며 세자가 군왕보다 높았다. 군왕의 아내가 비(妃)를 쓰니 군왕비보다 높은 세자의 부인 역시 비(妃)를 쓰지 않으면 이상하다. 한편 조선같은 제후국을 자처한 정씨왕국에서 세자비라는 명칭을 썼다.

왕실 부인의 지위는 후(后)-비(妃)-빈(嬪) 순인데, 외왕내제를 행한 고려 중기까지는 임금의 정비를 '왕후(王后)'라 부르고 왕태자의 아내에게는 '왕태자비'나 '태자비'로 불렀다. 그러나 원 간섭기충렬왕 때 왕실 칭호가 격하되는 동시에 이전 방식과 혼재돼서 나타난다. 임금의 정비였던 원나라공주는 본래 왕비로 불리었어야 하나 고려가 부마국임을 강조해 원나라에서 공주로 부르고 시호를 올렸다. 고려에서 제국대장공주에게 태후의 시호를 올렸으나 원나라에서 다시 ㅇ국대장공주로 시호를 올린다. 그리고 다른 정식 아내들이나 후궁들은 예전처럼 'ㅇ비(妃)'라 불렀다. 이 과정에서 세자의 정부인을 '비(妃)'를 사용해 '세자비'라 불렀다. 고려사에 의하면 세자이 아닌 세자가 등장한다.

공양왕 3년 8월에 임금의 정부인이자 내명부의 최고 수장인 왕비에게만 '비'를 사용하고, 세자비는 후궁과 같이 '빈'을 사용하여 '세자빈'이란 용어를 만들었고,[1] 조선에서도 그대로 세자빈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다만, 세자빈은 후궁인 정1품의 '빈'과 달리 품계를 초월한 무품의 지위였다.[2]

3.3. 특이한 간택 기준

세자빈을 간택하기 전에는 우선 전국에 금혼령이 실시된다. 장래 유망한 처녀들을 궁으로 소집하여 처녀들의 부친의 계급이 높은 순서대로 한 명씩 입궁시키고, 내시들이 각자 맡은 처녀들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는데,[3] 이성주 作의 《엽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건에 맞는 처녀를 골라내는 기준이 참 기이했다.

...등등으로 현대 상식으로 따지자면 상당히 황당무계하고도 재미있는 기준이 있었다. 그것도 당시 조선에서는 궁내, 민간을 막론하고 저런 황당한 기준들이 증명된 사실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4. 황태자비/왕세자빈

황태자비/왕세자빈 모두 같은 국가내에서는 비슷한 지위이다. 차이가 있다면 황태자비는 황제국, 왕세자빈은 제후국 세자의 정궁이라는 것. 태자비의 경우 비궁(妃宮)/세자빈은 빈궁(嬪宮)이라 한다.

5.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황태자비들

5.1. 실존 인물

5.2. 가공 인물

※ 남편이 제·왕위를 계승해 왕비가 된 경우는 굵게 표시.
※ 모종의 이유로 왕비가 되지 못한 경우는 ◇ 표시.


[1] 예로부터 천자(天子)의 배필은 후(后)가 되고 제후(諸侯)의 배필은 비(妃)가 되며 천자의 딸은 공주(公主)라 이르고 제후의 딸은 옹주(翁主)라 하여 상하(上下)의 예법을 문란하지 않게 하는 것은 그것으로 명분을 정하고 신분을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생략). 금후로는 엄격한 규정을 두어 국왕의 정배(正配)는 비라 칭하고 책봉하여 금인(金印)을 주고, 세자의 정배는 빈(嬪)이라 칭하고 책봉하여 은인(銀印)을 주며...[2] 당연하지만 세자는 명백한 차기 왕이었고 그런 세자의 아내인 세자빈은 명백한 차기 왕비다. 이러니 무품일 수 밖에. 한편으로 그렇기에 왕과 세자의 관계가 군신관계이듯 세자와 왕자의 관계도 군신관계였다. 괜히 손권이 이궁지쟁으로 욕먹는 것이 아니다.[3] 초간택 때는 대비나 왕실 종친들이 발을 쳐 놓고 그 뒤에서 처녀들을 살폈다고 한다.[4] 이 경우에는 높은 확률로 간택되었다고.[5] 다만 선택의 기준이 이렇고 예나 지금이나 미의 기준은 비슷한지 미의 기준으로는 가슴이 큰 여자가 선호되었다고(...)[6] 애매한 경우다. 트로이의 제1왕자 헥토르의 아내로 왕비가 될 운명이였지만 전쟁으로 인해 나라를 잃는다. 하지만 전리품으로 끌려간 후 에페로이스의 왕비가 되거나 네오프톨레모스와 결혼해 아이아키다이의 왕비가 되기도 한다.[7] 결혼 전의 이름은 파나 델 모랄이고 레밤은 황가의 성이다. 레밤령 구 아마츠카미 영토인 샨 마르틸리아를 통치하는 공작의 딸로, 아름다운 외모에 반한 황태자가 청혼한다.[8]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으므로, 황태자의 약혼자로서 예비 황태자비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이미 평민들이 프시케를 황태자비니 전하니 하고 부르는 것을 보아, 사실상의 황태자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9] 세자가 사망하면서 세자빈도 서인으로 강등되었다.[10] 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않고 드라마가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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