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군인에 대한 내용은 김흥원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번지에 있는 조선의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이 안장된 묘소.과거에는 흥선대원군묘라고도 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원'과 '묘'의 격 차이를 고려하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무덤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 1978년 10월 10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됐다.
2018년 10월 20일에 경기도와 문화재청은 흥선대원군묘를 본래명칭인 "흥원"으로 회복하기로 하고 부기명으로는 흥선대원군의 책봉명인 흥선대원왕을 붙여서 "흥선대원왕 흥원"으로 표기를 회복시켰다.
2. 상세
말년에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흥선대원군이 한성 운현궁을 떠나 도성 밖에 있는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現 서울 마포구 공덕동)[1]에 사저 아소정[2]을 짓고 기거하였다가 1898년 흥선대원군이 병으로 죽게 되면서 아소정 뒷편 야산에 안장되었다. 이후 1906년 고종의 황명(皇命)에 따라 경기도 파주군 대덕리(現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로 이장되었고, 1966년에 미군 기지가 들어서게 되면서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現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현재의 묘자리로 이장되었다.공식적인 국왕 지위는 아니었지만 대한제국 수립 후 '흥선헌의대원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왕릉 수준으로 조성되었으며 양석과 마석이 세워졌지만 특이하게도 묘비 등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남양주에 아들인 고종과 며느리 명성황후의 왕릉인 홍릉과 손자인 순종의 왕릉인 유릉이 있는데도 흥원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금곡동에 있다. 을미사변 이후 부자관계가 소원해진 영향 때문이었는지 부자의 묘소거리도 상당히 떨어져있고 고종도 부친상에 참석하지 않았던 점과 부자지간임에도 불구하고 홍유릉에 포함되지 못하였던 차이도 있다.
2018년 운현궁 사손 이청과 후손들이 묘소 및 그 주변 토지를 경기도 측에 기증하였다. 대원군묘로 가는 길목에 철문이 길을 막고 있는데 옆으로 통행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철문은 대원군묘가 있는 야산이 사유지였던 흔적이다.
최근 경기도 주도의 역사공원화 정비사업이 진행 중이다.
흥원 왼쪽 100m 지점(창현리 산22-14번지)에는 낙천군, 은신군, 흥친왕, 이문용, 영선군, 이우, 이종의 납골묘인 흥친왕가족묘가 있다.#
한편, 네이버 지도에는 흥원 옆의 무너져가는 무덤 1기를 완은군 이재선의 묘라고 적고 있으나#, 카카오맵과 현지 이정표에 따르면 이곳은 화장하기 전의 흥친왕묘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이미 납골당이 조성되어 있는데도 파묘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에#, 이곳이 실제로 완은군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3. 여담
대한제국 황족 일가 사이에 6.25 전쟁 당시 대원군의 묘소에 관한 전설이 내려온다 한다.6.25 당시 인민군이 공격을 해 왔을 때의 일이다. 인민군들은 무차별하게 양민을 학살하는 등 갖가지 만행을 일삼았다. 따라서 그들의 존재가 사람들에게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무서울 것 없는 것 같은 인민군들이었지만 대원군의 묘소가 있는 사당(祠堂) 근처에만 가면 그런 기세가 싹 가시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웬일인가 하여 사람들이 그 곳을 가보니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몇몇 사람의 특별한 느낌이 아니라, 거기를 지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밤에는 물론, 낮에도 혼자서는 도저히 그 곳을 지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민군은 거기에 대원군의 혼령이 나타나 있는 것이라고 여기며 무서워 도망갔고, 사당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도 이내 가셨다고 한다. #
4. 외부 링크
5. 경기도 기념물 제48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이다.
그는 철종이 후계자 없이 죽은 후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조대비와 힘을 합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뒤의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대원군이 되어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 세도정치 근절, 서원철폐, 세제개혁, 법전정비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서양세력의 접근에 대해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그들의 침략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졌으며, 집권 후반기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어 정치에서 실권을 잃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옮겼으며 1966년 4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묘 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져 있고, 묘역은 2단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상단에는 둘레석을 두른 봉분과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고, 하단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그는 철종이 후계자 없이 죽은 후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조대비와 힘을 합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뒤의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대원군이 되어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 세도정치 근절, 서원철폐, 세제개혁, 법전정비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서양세력의 접근에 대해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그들의 침략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졌으며, 집권 후반기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어 정치에서 실권을 잃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옮겼으며 1966년 4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묘 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져 있고, 묘역은 2단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상단에는 둘레석을 두른 봉분과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고, 하단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