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a122d, #6d1b43 20%, #6d1b43 80%, #4a122d)" {{{#!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6d1b43><tablebgcolor=#6d1b43> | 흥선대원군 관련 문서 | }}} |
생애 · 섭정 배경 · 평가 · 여담 · 매체 |
1. 개요
흥선대원군의 여담을 다룬 문서.2. 여담
- 노련한 정객답게 뛰어난 화술(話術)을 가졌으며, 음담패설의 달인으로 좌중을 자주 웃음바다로 만든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개인적으로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을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를 풍미한 인물답게 그 재치나 언변과 관련한 많은 에피소드가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다. 다만 본문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흥선대원군 일화는 거짓 일화가 많다. 가장 큰 이유는 김동인의 소설 속 창작들이 실제 일화인 것처럼 퍼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 《국태공의 귀환》, 《젊은 그들》의 내용을 모아놓으면,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긍정적인 흥선대원군 상이 거의 정립될 정도로 흥선대원군 위인전 작가들이 복붙을 해댔다. 그리고 근대화도, 명성황후가 설치는 것도, 일본도 싫었던 당시 양반들이 그나마 긍정적으로 밀어준 것이 흥선대원군이기에, 풍문으로 도는 여러 미담들을 흥선대원군과 연관시킨 것도 많다. 결국 재미로만 보고, 실제로 이 일화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하는데, 공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剗泰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於諸公何如?)
(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剗泰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於諸公何如?)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거라면 비록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할 수 없다."
- 위의 두 발언이 유명하긴 하지만,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 이 발언은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에 나와있다. 이 책은 흥선대원군을 띄워주려는 목적으로 저술되었는데, 왜냐하면 박제형은 갑신정변에 참여한 인사이기 때문이다.[1] 해당 문서에도 적혀 있지만, 갑신정변은 정국 안정을 위해서 흥선대원군 일파를 정권에 포함시키고, 청에 납치당하여 톈진으로 잡혀간 흥선대원군의 귀국을 시도했을 정도였다. 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는 이 책을 쓴 목적이 '일본에 의해서 왜곡된 흥선대원군의 모습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일본의 힘을 빌려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이들이 '임오군란 시기에 청나라로 납치된 흥선대원군을 옹호'하면서 일본에게 왜곡된 흥선대원군 운운하는 게 말이 안 된다. 참고로 이 책은 갑신정변 참여했다가 죽은 인물의 책이라고 당대 일본에서 정식 출판되었다.
- 흥선대원군이 젊었던 시절 기생 춘홍(春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옆자리의 금군 별장 이장렴[2]과 시비가 붙게 되었다. 이때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한 나라의 종친이 창가(娼家)의 외상술이나 먹냐?"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3] 뒷날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직접 불러 "아직도 내 따귀를 한번 갈겨볼 테냐?"고 묻자, 이장렴은 당당하게 "대원위께서 기생의 집에 드나들 때처럼 행동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흥선대원군은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며 술상을 차려 이장렴을 후하게 대접했다고. 혹은 그 자리에서 바로 "여봐라, 금위대장 오셨으니 술상 차려라!"라고 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금군별장은 왕을 최측근에서 직접 경호하는 요직이라 금위대장이 된다면 오히려 좌천이라 여길 만 하다. 다만 뺨 때리고 벼슬 얻은 얘기는 송시열 쪽도 존재한다.
- 청나라 사신이 조선의 경복궁을 둘러보고 "이 궁궐을 짓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라고 흥선대원군에게 물었더니 흥선대원군은 "약 3년 정도 걸렸습니다"고 대답하자, 청의 사신은 "이 정도 건물은 우리 대청국은 1년이면 뚝딱 지어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흥선대원군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다음으로 창덕궁을 보더니 청나라 사신은 또 "이 궁궐을 짓는 데에는 얼마나 걸렸습니까?"고 물었는데 흥선대원군은 "1년 정도 걸렸습니다"고 대답했다. 이번에 사신이 또 "이 정도는 우리 대청국은 몇 달이면 다 지을 수 있지요"라고 말하며 또 흥선대원군의 심기를 건드렸다. 다음으로 숭례문에 다다르자 사신이 또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은 이런 대답으로 사신의 입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여기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없었던 곳이외다!".[4]
- 전라도 영광에 살던 한 선비가 흥선대원군에게 벼슬자리를 청하고자 운현궁을 방문했는데, 선비는 흥선대원군을 보고 절을 올렸다. 흥선대원군은 그냥 선비 하나가 자신에게 인사나 드리러 온 줄 알고 대충대충 대했는데, 그러자 선비는 다시 한 번 대원군에게 절을 올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을 2번 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나 하는 일이다. 열받은 흥선대원군이 "너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이 무슨 막돼먹은 행동이냐?"라고 화를 내자, 선비는 천연덕스럽게 "처음 절은 인사를 올리는 절이었고, 2번째 절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라고 올린 절이었사옵니다."라고 받아쳤다.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흥선대원군이 이 선비에게 한 자리를 내려준 이야기는, 흥선대원군의 일화 중 유명한 편.[5]
- 어느 날 흥선대원군에게 한 무관이 찾아왔는데, 때마침 조 대비(신정왕후)의 친척이 찾아와 청탁을 하던 중이었다. 조 대비의 친척은 흥선대원군에게 "마침 황해도 백천군수 자리가 비었다니 그 자리에 저를 앉혀 주십시오."라고 했는데, 친척이 말한 황해도 '백천'은 한자로 白川이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배천'이라고 읽었다.[6] 어이가 없어진 흥선대원군이 기본도 모르는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도중 방 안에 방귀 소리가 났다. 그 방귀는 무관이 뀐 것이었는데, 무관은 자신이 뀐 줄도 모르고 친척에게 "어느 안전이라고 큰 방귀 소리를 내느냐!"며 성을 냈다. 그런데 이 친척은 아무 변명도 대꾸도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음식이 나와서 식사를 들게 했는데, 친척은 또 체면치레 하느라고 좀처럼 음식을 먹지 않았고 무관은 "제가 가난하게 살아서 이런 진수성찬은 먹은 적이 없습니다."라며 맛있게 음식을 다 먹었다. 그러고 흥선대원군에게 "제게 늙으신 부모가 있는데, 집이 가난해서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배천군수 자리가 비었다고 들었는데 소인을 거기 보내주시면 열심히 일하며 부모님을 잘 부양해 모시겠습니다."라고 배짱 좋게 말했다. 흥선대원군은 이 무관이 마음에 들었는지 즉석에서 그렇게 하도록 힘써 주겠다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조 대비의 친척이 "대원위 대감, 제가 먼저 부탁드렸는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묻자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말했다. "제 밥그릇도 찾아먹지도 못하고, 방귀 뀌지 않고서도 방귀 뀐 것처럼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곳의 이름도 모르고. 어찌 자네 같은 자를 군수로 쓸 수 있겠는가! 당장 집으로 돌아가게!"
- 하루는 흥선대원군이 별장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있는데, 별장 밖에서 어떤 노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무료했던 흥선대원군이 그 노인과 함께 시간을 때울 생각으로 종자를 시켜 그 노인을 불러오고는 어디 사는 누구냐고 물었는데, "저 앞에 사는 장가이며 아직 환갑은 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흥선대원군이 "심심한데 바둑이나 한판 두세. 바둑 둘 줄 아는가?"라고 묻자 그 노인은 둘 줄 모른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장기를 두자고 했는데도 이것도 둘 줄 모른다고 했다. 흥선대원군이 "그렇다면 자네 고누놀이[7]는 할 줄 아는가?"라고 묻자 이 노인은 그것도 할 줄 모른다고 대답하고 만다. 싫증이 난 흥선대원군은 결국 그 노인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이 이야기가 장안에 퍼지자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고 한다. "그 노인도 참 멍청하구만. 어떻게든 대원위 대감의 무료함을 풀어드렸다면 무슨 벼슬자리라도 하나 얻었을 텐데 말이야."[8]
- 어떤 선비가 흥선대원군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운현궁을 찾았다. 그런데 이 선비가 좀 '아는 척, 잘난 척'을 했는지 흥선대원군은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흥선대원군이 문득 "자네 처가가 어디인가?"라고 묻자 선비는 또 있어 보이게 말하려고 문자를 써서 "황문(黃門)에 취처(娶妻)하였습니다(=황씨 문중에서 아내를 들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흥선대원군 왈, "항문[9]이라니. 자네는 똥구멍에 장가를 들었단 말인가?" 선비는 결국 데꿀멍하고 버로우.
- 흥선대원군이 되기 전 불우했던 시절에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그 집에 땔나무를 해다 준 한 나무꾼이 있었다. 이를 잊지 않던 그는 흥선대원군이 된 후 이 나무꾼을 운현궁 연회에 초대했는데, 조정의 고관들과 장안의 부호들까지 초대했고 이 연회에서 자신이 상석에 앉고 자신의 바로 옆에 그 나무꾼을 앉혔다. 그리고 귓속말로 나무꾼에게 그간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면서 "앞으로도 나무를 해다 줄 거면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지 않을 거면 고개를 저으라"고 하자 나무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뜬금없이 흥선대원군이 귓속말로 나무꾼에게 "자네 어머니께 내 수청 좀 들게 하게."라고 말하자 깜짝 놀란 나무꾼은 고개를 저으면서 안 된다고 했고, 그래도 흥선대원군이 계속 이 청을 하자 결국 "절대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연회장을 발로 꽝 박차고 나와 버렸다. 흥선대원군은 이 나무꾼을 버선발로 쫓아가며 청을 했으나 나무꾼은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이 나무꾼의 집에는 엄청난 양의 재물들을 가져온 부호들이나 고관들의 하인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알고보니 당시 연회석에 있던 고관들이나 부호들이 "대원위께서 저리 간청하는데도 들어주지 않는 걸 보면, 저 사람은 분명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실력자거나 대원위의 측근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그냥 나무꾼인지도 모르고 아부할 생각으로 재물들을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즉 흥선대원군은 자기 재물은 한 푼도 안 쓰고 그 나무꾼에게 보답을 한 셈.
- '2대에 걸쳐 제왕이 나올 명당'(二代天子之地)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가야사를 불지르고 살인까지 저질렀다. 거기에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쓰기로 했는데, 이장하기 전 형제들 모두가 신인(神人)이 '내 본진 건드리다니 니네 다 끔살'이고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악몽을 꿨다. 다른 형제들은 덜덜 떨었지만, 흥선군만은 '여기가 진짜 명당인가 보다! 까짓 거 한 번 죽고 말지!' 하고 흥분해 이장을 고집했다. 또한 무덤 자리에 큰 돌이 깔려 있어 도끼로 찍어도 불꽃이 튈 뿐 깨지지 않았는데, 흥선군이 하늘에 대고 "나라고 왜 임금의 아비가 되지 못한단 말인가!"하고 크게 외치고 도끼질을 하니 그제야 돌이 깨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결국 화를 입게 되었는데, 명당이라고 아버지 무덤을 새로 만들었다만 그 다음 이야기는.
- 인왕산 인근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을 강탈(?)한 야사도 유명하다. 석파정은 본래 안동 김씨 세도의 일원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는데, 이미 당대부터 수려한 경치와 건물로 유명했다. 이에 석파정을 가질 욕심을 가지게 된 흥선대원군은 집권한 뒤 한 가지 묘수를 고안해 냈다.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석파정에서 하루 기거하게 한 것이었다. 조선의 전통 관례에 따르면 임금이 하루라도 머문 장소는 일종의 불가침 장소가 되어서 신하가 머물 수 없었고, 결국 김흥근은 눈뜨고 코베이듯 흥선대원군에게 석파정을 어쩔 수 없이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별장의 이름 또한 흥선대원군 자신의 호인 '석파(石坡)'를 따서 다시 붙였다는 이야기.
- 본인부터가 사군자의 명인으로 명성이 높은 예술가이기도 했던 만큼 당대 문화, 예술의 애호가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다. 판소리를 대단히 좋아해서, 운현궁엔 전국의 내로라하는 소리꾼들이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현대의 판소리를 정립한 신재효와 그의 여제자인 진채선도 운현궁에서 소리를 기가 막히게 불러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그 외 많은 화가들도 운현궁에 드나들었고, 심지어는 남사당패까지 운현궁으로 불러들여 공연을 감상하기도 했다. 이 당시 남사당패에 '바우덕이(한자로는 김암덕 金巖德)'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유일한 남사당패 꼭두쇠[10]로 5세 때부터 남사당패에 들어가 뛰어난 기예로 유명했으며, 경복궁 중건 현장에서 공연한 후 흥선대원군이 당상관 벼슬의 인물들이 쓰는 관자[11]인 옥관자를 내려주기도 했다. 이후로도 1860년대에 전국을 돌며 공연을 펼쳤으나, 불행하게도 1870년(고종 7년)에 23세로 폐병으로 요절했다.
- 사진이나 초상화로 봐도 알 수 있듯이, 카리스마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를 한번 본 영국인 기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표정과 생명력과 정력, 연로했음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눈빛과 위엄이 넘치고 원기왕성한 제스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기록했을 정도.
- 대원군으로서 실권을 잡기 직전부터 '천하장안(천희연(千喜然), 하청일(河淸一), 장순규(張淳奎), 안필주(安必周)의 성을 딴 것)'이라는 중인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흥선군이 대원군이 된 이후에도 흥선대원군의 심복으로 활약했다.
- 의정부 경전철 흥선역은 흥선대원군의 봉호인 '흥선'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역 주변에 흥선광장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역 주변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직곡산장 터가 있기 때문.
- 개화를 막으려 했다는 행보로 유명하기 때문인지, 현대에는 주로 주변과 달리 유행에 적응 못하는 이들을 까거나 셀프 디스하는데 사용되는 별명이다. 즉 대놓고 나쁜 의미라는 것. 다만 성적이 좋을 때의 황선홍의 경우처럼 긍정적인 별명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12] 또한, 전투까지 치르면서 미국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한 행보로 인해 위정척사파와 함께 영포자들의 자학 개그 소재로 많이 활용되는 인물이다.
- 오늘날 고종과 명성황후가 혹평을 받기 시작하면서 흥선대원군을 재평가하는 시선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고종처럼 끝까지 우유부단하게 있다가 나중에 가서 어영부영 개항해서 이도저도 아니고 애매모호한 나라를 만든 것보다는 차라리 흥선대원군처럼 자기 주도로 확실하고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한 것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듯하다. 참고로 고종이 집권했을 당시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다르게 서구 열강들이 여유로웠을 때이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이전까지 조선이 개항하기에는 불리한 국제 정세였다.[13]
<colbgcolor=#29176e> 흥선대원군이 그린 묵란(墨蘭) |
- 당대 명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에게 직접 배운 난을 정말 잘 그렸다고 하며, 붓을 3번 틀어 잎을 그리며 그 끝이 쥐꼬리처럼 튀는 특징이 유명하다. 흥선대원군이 친 난초를 따로 일컫는 말로 그의 호인 '석파'를 따서 ’석파란(石坡蘭)‘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동명의 소설도 있다. TV쇼 진품명품에도 가끔씩 나온다. 물론 위작으로 밝혀진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이걸 반영해서 '난을 치는 흥선대원군'은 사극이나 소설, 기타 창작물에 등장하는 흥선대원군의 필수요소. 특히 심기가 불편하면 화로에다가 잘못된 난을 불태우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특히 실각 후 청군에 기습적으로 납치당하여 청나라 톈진에 잡혀가 있을 때 난을 치며 소일했기에 청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퍼져, 청나라 사람들도 석파란을 많이 받아갔다고 한다. 의외로 진품 석파란은 중국에 더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위조작이 많다고.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을 벌기 위해 일부러 그린 가짜도 있다고 한다.[14] 이때 석파란을 위조한 사람 중에는 오세창 같은 저명 인사도 있었다고 한다. 오세창은 자신의 그림을 추사 김정희의 것으로 위장해서 판 적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오세창의 석파란 위조설은 이것과 관련해서 제기된 설이다. 오세창은 추사의 그림이나 글을 위조하는 데 특히 뛰어났다고 알려졌는데, 흥선대원군은 추사의 제자였기 때문에, 추사 그림의 특징을 잘 이해한 사람이라면 쉽사리 위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당대에도 하도 난초 쳐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번거로워진 흥선대원군이 자신과 함께 추사의 그림을 배운 사람들을 시켜 난초를 대신 치게 하고, 낙관만 자기 것으로 찍어서 내준 적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석파란이라 알려진 작품이었는데 조사 결과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따른 화가들인 노천 방윤명(1827년 ~ 1880년)이나 소호 김응원(1855년 ~ 1921년) 등이 친 난초고, 낙관만 흥선대원군 것으로 밝혀진 그림도 적지 않다. 특히 방윤명에 대해서는 《홍약루속회인시록(紅藥樓續懷人詩錄)》에도 "방윤명은 난초 외에 매화도 잘 그렸으며, 묵란화가 흥선대원군의 화법과 유사하여 대신 그려주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오세창 역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석파 노인이 국정을 맡고 있을 때 난초를 그려달라고 하면 노천으로 하여금 대신 그리게 했다. 노천이 그 필체를 꼭 닮아 세상에서 구별할 수 없었으니, 오늘날 석파란이라 유행하는 것은 이 사람이 그린 것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응원의 경우는 출신 배경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흥선대원군의 종자였다는 설도 있다.
- 시조 작품 몇 수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문에 토만 단 수준이라 오늘날 혹평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붓은 부드러우므로 종이에 휘둘러도 쉽게 몽당붓이 되지 않지만 딱딱한 먹은 벼루에 갈면 금세 닳아 없어지는 이치에 빗대어, 원만한 사람은 자신을 보전할 수 있으나 모난 사람은 견제를 받아 스스로를 보전하기 어려워진다, 즉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것을 읊은 시조. 안동 김씨 세도하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던 처세술을 이른 것으로 보인다. 본인의 재능과 무관하게 시조, 판소리에 관심이 많았기에 19세기 말을 대표하는 가객(歌客) 안민영, 판소리꾼 신재효 등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그래서 현존하는 고전 시가 중 흥선대원군을 아부하는 작품도 꽤나 있다. 일례로 신재효는 병인양요 전승을 경축하는 의미로 〈괘씸한 서양 되놈〉이란 작품을 헌정해 바쳤다.
<colbgcolor=#29176e> 2015년 삼일절에 양상현 교수가 공개한 《그리피스 컬렉션》에 실린 흥선대원군 추정 사진 |
-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당시 찍은 사진이라고 하나, 그 신빙성은 의문시된다. 당시 시대상황 상 당연히 조선인이 찍었을 리는 없고 필히 서양인의 손을 빌려 찍었을 텐데,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분위기 속에서 서양인이 과연 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사진 속 인물의 흉배는 흥선대원군이 사용한 기린 흉배가 아닌 쌍호 흉배임을 알 수 있다.
<colbgcolor=#29176e> 흥선대원군으로 알려진 사진 |
- 이 사진의 주인공은 흥선대원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관복이나 목에 걸린 훈장 등으로 보아 사실은 프랑스에 간 베트남의 관료 반청간(潘清簡, Phan Thanh Giản)의 사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베트남사 전공 최병욱 교수는 "베트남 관복은 맞지만, 반청간은 확실히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비교적 근대의 인물이라 사진이나 초상화도 제법 남아 있는 편인데, 위 사진과 현존하는 흥선대원군의 사진이나 초상화들을 비교해 보면 사뭇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해당 관복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 시기의 관복이다. 응우옌 왕조가 들어서기 전의 후 레 왕조 관복의 경우 명나라 관복을 토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 관복과 매우 흡사했지만, 19세기 들어 베트남의 관복은 사진과 같이 관복에 금실을 넣는 등 기존 관복에서 크게 변화하였기에, 조선의 관복과 매우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관복을 포함하여 1,000년 동안의 베트남 복식의 변천 과정을 그린 그림을 보면 흥선대원군의 관복으로 잘못 알려진 문제의 그 관복이 있다. 아직 검증된 자료가 아닌데 최근까지 사극이나 개화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속 재연극 등에서 흥선대원군은 저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찬란한 여명〉이나 EBS 다큐멘터리 〈개항과 전쟁〉에서도 그랬다. 〈명성황후〉에서는 검은색 바탕에 황금 용이 수놓아진 옷을 입고 등장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저 위 사진에 나온 것처럼 익선관까지 쓰고 나온 적도 있다. 〈닥터 진〉에서도 〈명성황후〉에서와 비슷하게 검은 바탕에 황금 용을 수놓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잘못 알려진 사진에서 비롯된 오류이므로 전부 잘못된 것.
[1] 책의 완성 자체는 갑신정변 이전에 되었다.[2] 실제 역사에서 이장렴은 고종 즉위 직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강화유수, 진무사를 거쳐 형조판서와 금위대장(고종 6년)에 올랐고 종친직으로는 지종정령에 올랐으나 고종의 밤 행차 때 횃불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1872년(고종 9년) 파직되었다.[3] 그런데 이장렴도 전주 이씨, 그러니까 흥선대원군처럼 왕족이라는 점. 비록 흥선대원군보다'도' 왕위 계승권이 한참이나 멀고 먼 인물이지만.[4] 참고로 이 이야기는 원래 미국이나 유럽 쪽 유머이며, 이게 흥선대원군 일화로 와전되고 잘못 알려져서 여기 적혔다는 것은 일화의 일부가 근대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정식으로 수립된 이후에 더해졌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5] 그런데 동일한 내용의 에피소드가 선조와 이항복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6] 해당 지역은 당시만 그런 게 아니라 오늘날에도 '배천'이라고 읽는 게 맞다.[7] 땅바닥에 판을 그려놓고 돌, 풀잎, 나뭇가지 등을 말로 삼아 승패를 내는 놀이. 일반적으로는 작은 돌로 많이 하는 민속놀이다. 만약 노인이 고누놀이를 할 줄 알았다면 조선의 섭정 흥선대원군이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작은 돌멩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8] 이와 유사한 내용의 이야기가 또 있는데, 다만 흥선대원군은 집주인으로, 노인은 나그네로 바뀌어 있다. 고누놀이를 할 줄 아냐고 묻는 것까지는 동일하고, 이후 답답해진 집 주인이 "그럼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요?"라고 묻자 나그네가 "밥은 먹을 줄 압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9] 황문을 항문으로 잘못 들은 척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똥구멍'을 한자로 '황문'이라 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누런 것이 나오는 문'이라는 뜻.[10] 남사당패 대표쯤 된다[11] 망건에 달아서 당줄을 걸어넘기는 작은 고리. 사극 같은 데서 망건에서 관자놀이 부근을 보면 조그만 동그라미가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게 관자다. '관자놀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표현이다.[12] 2013년 황선홍이 지휘봉을 잡았던 포항 스틸러스는 모종의 사정으로 모기업 포스코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외국인 선수 없이 전원 국내 선수들만으로 시즌을 치러야 했고, 이 때문에 황선홍 감독에게 '황선대원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런데 그 시즌에서 포항은 K리그 30년 최초의 리그 + FA컵 더블을 달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다만 황선홍 본인은 외국인 선수를 안 쓰고 싶어서 안 쓰는 게 아닌데 이런 별명이 붙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상당히 불쾌해 했다.[13] 그렇다고 1차 세계대전은 낫냐면 당연히 아닌게 옆동네에 있는 일본 때문이다. 오히려 1차 세계대전에서는 보는 눈이라도 있으니 막나가지 못하지 보는 눈도 사라진 상황이면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활개칠건 뻔한 일이다.[14] 이 경우 가짜인 줄 알면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기 위해 모른 척하며 사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기당했는데 독립운동 자금 대주느라 그랬다고 정신승리를 하는 걸 수도 있고.[15] 중세 한국어의 2인칭 특수 의문어미(-ㄴ다, -ㄹ다)가 문어체에는 흥선대원군 시대까지 간혹 등장했다.[16] 끝이 닳거나 잘려서 없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