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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22 15:42:46

흥선대원군/여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a122d, #6d1b43 20%, #6d1b43 80%, #4a122d)"{{{#!wiki style="margin:-10px"<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6d1b43><tablebgcolor=#6d1b43> 파일:기린 흉배.png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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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섭정 배경 · 평가 · 여담 · 매체

1. 개요2. 일화
2.1. 석파란(石坡蘭)2.2. 시조2.3. 사진 오류

1. 개요

흥선대원군의 여담을 다룬 문서.

노련한 정객답게 뛰어난 화술(話術)을 가졌으며, 음담패설의 달인으로 좌중을 자주 웃음바다로 만든 것으로 유명했다. 닉값하셨네... 헤으응또한 흥선대원군은 개인적으로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을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를 풍미한 인물답게 그 재치나 언변과 관련한 많은 에피소드가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다.

다만 본문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흥선대원군 일화는 거짓 일화가 많다. 가장 큰 이유는 김동인의 소설 속 창작들이 실제 일화인 것처럼 퍼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 《국태공의 귀환》, 《젊은 그들》의 내용을 모아놓으면,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긍정적인 흥선대원군 상이 거의 정립될 정도로 흥선대원군 위인전 작가들이 복붙을 해댔다. 그리고 근대화도, 명성황후가 설치는 것도, 일본도 싫었던 당시 양반들이 그나마 긍정적으로 밀어준 것이 흥선대원군이기에, 풍문으로 도는 여러 미담들을 흥선대원군과 연관시킨 것도 많다. 결국 재미로만 보고, 실제로 이 일화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2. 일화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하는데, 공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剗泰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於諸公何如?)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거라면 비록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할 수 없다."

2.1. 석파란(石坡蘭)

파일:external/img.khan.co.kr/20090114.01100122000002.01M.jpg
<colbgcolor=#29176e> 흥선대원군이 그린 묵란(墨蘭)
당대 명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에게 직접 배운 을 정말 잘 그렸다고 하며, 붓을 3번 틀어 잎을 그리며 그 끝이 쥐꼬리처럼 튀는 특징이 유명하다. 흥선대원군이 친 난초를 따로 일컫는 말로 그의 호인 '석파'를 따서 '석파란'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동명의 소설도 있다. TV쇼 진품명품에도 가끔씩 나온다. 물론 위작으로 밝혀진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이걸 반영해서 '난을 치는 흥선대원군'은 사극이나 소설, 기타 창작물에 등장하는 흥선대원군의 필수요소. 특히 심기가 불편하면 화로에다가 잘못된 난을 불태우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특히 실각 후 청군에 기습적으로 납치당하여 청나라 톈진에 잡혀가 있을 때 을 치며 소일했기에 청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퍼져, 청나라 사람들도 석파란을 많이 받아갔다고 한다. 의외로 진품 석파란은 중국에 더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위조작이 많다고.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을 벌기 위해 일부러 그린 가짜도 있다고 한다.[15] 이때 석파란을 위조한 사람 중에는 오세창 같은 저명 인사도 있었다고 한다.

오세창은 자신의 그림을 추사 김정희의 것으로 위장해서 판 적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오세창의 석파란 위조설은 이것과 관련해서 제기된 설이다. 오세창은 추사의 그림이나 글을 위조하는 데 특히 뛰어났다고 알려졌는데, 흥선대원군은 추사의 제자였기 때문에, 추사 그림의 특징을 잘 이해한 사람이라면 쉽사리 위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당대에도 하도 난초 쳐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번거로워진 흥선대원군이 자신과 함께 추사의 그림을 배운 사람들을 시켜 난초를 대신 치게 하고, 낙관만 자기 것으로 찍어서 내준 적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석파란이라 알려진 작품이었는데 조사 결과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따른 화가들인 노천 방윤명(1827년 ~ 1880년)이나 소호 김응원(1855년 ~ 1921년) 등이 친 난초고, 낙관만 흥선대원군 것으로 밝혀진 그림도 적지 않다.

특히 방윤명에 대해서는 《홍약루속회인시록(紅藥樓續懷人詩錄)》에도 "방윤명은 난초 외에 매화도 잘 그렸으며, 묵란화가 흥선대원군의 화법과 유사하여 대신 그려주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오세창 역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석파 노인이 국정을 맡고 있을 때 난초를 그려달라고 하면 노천으로 하여금 대신 그리게 했다. 노천이 그 필체를 꼭 닮아 세상에서 구별할 수 없었으니, 오늘날 석파란이라 유행하는 것은 이 사람이 그린 것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응원의 경우는 출신 배경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흥선대원군의 종자였다는 설도 있다.

2.2. 시조

시조 작품 몇 수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문에 토만 단 수준이라 오늘날 혹평을 면치 못하고 있다.
휘호지면하시독(揮毫紙面何時禿)고 마묵연전필경무(磨墨硏田畢竟無)라
묻노라 저 사람아 이 글 뜻을 능히 알따[16]
기인(其人)이 완이이소(宛爾而笑)하고 유유이퇴(唯唯而退)하더라
종이에 붓을 휘두르니 언제야 모지라질까[17]? 먹을 벼루에 가니 마침내 없어지리라.
묻노라, 저 사람아, 이 글 뜻을 알겠느냐?
그자가 빙그레 웃고서 '예, 예' 하고 물러나더라.

은 부드러우므로 종이에 휘둘러도 쉽게 몽당붓이 되지 않지만 딱딱한 먹은 벼루에 갈면 금세 닳아 없어지는 이치에 빗대어, 원만한 사람은 자신을 보전할 수 있으나 모난 사람은 견제를 받아 스스로를 보전하기 어려워진다, 즉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것을 읊은 시조. 안동 김씨 세도하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던 처세술을 이른 것으로 보인다. #

본인의 재능과 무관하게 시조, 판소리에 관심이 많았기에 19세기 말을 대표하는 가객(歌客) 안민영, 판소리꾼 신재효 등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그래서 현존하는 고전 시가 중 흥선대원군을 아부하는 작품도 꽤나 있다. 일례로 신재효병인양요 전승을 경축하는 의미로 〈괘씸한 서양 되놈〉이란 작품을 헌정해 바쳤다.

2.3. 사진 오류

파일:/image/032/2015/03/01/l_2015030101000080100005655_99_20150301213103.jpg
<colbgcolor=#29176e> 2015년 삼일절에 양상현 교수가 공개한 《그리피스 컬렉션》에 실린 흥선대원군 추정 사진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당시 찍은 사진이라고 하나, 그 신빙성은 의문시된다. 당시 시대상황 상 당연히 조선인이 찍었을 리는 없고 필히 서양인의 손을 빌려 찍었을 텐데,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분위기 속에서 서양인이 과연 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사진 속 인물의 흉배는 흥선대원군이 사용한 기린 흉배가 아닌 쌍호 흉배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사진에 관한 블로그
파일:attachment/흥선 대원군/man.jpg
<colbgcolor=#29176e> 흥선대원군으로 알려진 사진
이 사진의 주인공은 흥선대원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관복이나 목에 걸린 훈장 등으로 보아 사실은 프랑스에 간 베트남의 관료 반청간(潘清簡, Phan Thanh Giản)의 사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베트남사 전공 최병욱 교수는 "베트남 관복은 맞지만, 반청간은 확실히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비교적 근대의 인물이라 사진이나 초상화도 제법 남아 있는 편인데, 위 사진과 현존하는 흥선대원군의 사진이나 초상화들을 비교해 보면 사뭇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해당 관복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阮朝, 1802년 ~ 1945년) 시기의 관복이다. 응우옌 왕조가 들어서기 전의 후 레 왕조(後 黎朝, 1428년 ~ 1788년) 관복의 경우 명나라 관복을 토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 관복과 매우 흡사했지만, 19세기 들어 베트남의 관복은 사진과 같이 관복에 금실을 넣는 등 기존 관복에서 크게 변화하였기에, 조선의 관복과 매우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관복을 포함하여 1,000년 동안의 베트남 복식의 변천 과정을 그린 그림을 보면 맨 오른쪽 위에서 두 번째에 흥선대원군의 관복으로 잘못 알려진 문제의 그 관복이 있다.

아직 검증된 자료가 아닌데 최근까지 사극이나 개화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속 재연극 등에서 흥선대원군은 저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찬란한 여명〉이나 EBS 다큐멘터리 〈개항과 전쟁〉에서도 그랬다. #명성황후〉에서는 검은색 바탕에 황금 용이 수놓아진 옷을 입고 등장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저 위 사진에 나온 것처럼 익선관까지 쓰고 나온 적도 있다. 〈닥터 진〉에서도 〈명성황후〉에서와 비슷하게 검은 바탕에 황금 용을 수놓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잘못 알려진 사진에서 비롯된 오류이므로 전부 잘못된 것.


[1] 책의 완성 자체는 갑신정변 이전에 되었다.[2] 실제 역사에서 이장렴은 고종 즉위 직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강화유수, 진무사를 거쳐 형조판서와 금위대장(고종 6년)에 올랐고 종친직으로는 지종정령에 올랐으나 고종의 밤 행차 때 횃불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1872년(고종 9년) 파직되었다.[3] 그런데 이장렴도 전주 이씨, 그러니까 흥선대원군처럼 왕족이라는 점. 비록 흥선대원군보다'도' 왕위 계승권이 한참이나 멀고 먼 인물이지만.[4] 참고로 이 이야기는 원래 미국이나 유럽 쪽 유머이며, 이게 흥선대원군 일화로 와전되고 잘못 알려져서 여기 적혔다는 것은 일화의 일부가 근대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1948년 8월 15일, 정식으로 수립된 이후에 더해졌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5] 소련의 경우 건물을 이동식으로 세우기도 했다. 정확히는 다른 곳에 있는 건물을 그대로 어떻게든 옮겨놓는 것.[6] 그런데 동일한 내용의 에피소드가 선조이항복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7] 해당 지역은 당시만 그런 게 아니라 오늘날에도 '배천'이라고 읽는 게 맞다.[8] 땅바닥에 판을 그려놓고 돌, 풀잎, 나뭇가지 등을 말로 삼아 승패를 내는 놀이. 일반적으로는 작은 돌로 많이 하는 민속놀이다. 만약 노인이 고누놀이를 할 줄 알았다면 조선의 섭정 흥선대원군이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작은 돌멩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9] 이와 유사한 내용의 이야기가 또 있는데, 다만 흥선대원군은 집주인으로, 노인은 나그네로 바뀌어 있다. 고누놀이를 할 줄 아냐고 묻는 것까지는 동일하고, 이후 답답해진 집 주인이 "그럼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요?"라고 묻자 나그네가 "은 먹을 줄 압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10] 황문을 항문으로 잘못 들은 척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똥구멍'을 한자로 '황문'이라 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누런 것이 나오는 문'이라는 뜻.[11] 남사당패 대표쯤 된다[12] 망건에 달아서 당줄을 걸어넘기는 작은 고리. 사극 같은 데서 망건에서 관자놀이 부근을 보면 조그만 동그라미가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게 관자다. '관자놀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표현이다.[13] 2013년 황선홍이 지휘봉을 잡았던 포항 스틸러스는 모종의 사정으로 모기업 포스코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외국인 선수 없이 전원 국내 선수들만으로 시즌을 치러야 했고, 이 때문에 황선홍 감독에게 '황선대원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런데 그 시즌에서 포항은 K리그 30년 최초의 리그 + FA컵 더블을 달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다만 황선홍 본인은 외국인 선수를 안 쓰고 싶어서 안 쓰는 게 아닌데 이런 별명이 붙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상당히 불쾌해 했다.[14] 그렇다고 1차 세계대전은 낫냐면 당연히 아닌게 옆동네에 있는 일본 때문이다. 오히려 1차 세계대전에서는 보는 눈이라도 있으니 막나가지 못하지 보는 눈도 사라진 상황이면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활개칠건 뻔한 일이다.[15] 이 경우 가짜인 줄 알면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기 위해 모른 척하며 사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기당했는데 독립운동 자금 대주느라 그랬다고 정신승리를 하는 걸 수도 있고.[16] 중세국어의 2인칭 특수 의문어미(-ㄴ다, -ㄹ다)가 문어체에는 흥선대원군 시대까지 간혹 등장했다.[17] 끝이 닳거나 잘려서 없어질까